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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1577-0606
공공행정
현충시설(국내)
REST
JSON/XML
2024-05-17
2024-05-17
전국
저작자표시-변경금지
무료제공
번호 | 관리번호 | 시설명 | 주제 | 지정일자 | 지역 | 시설관리자 | 종류 | 주제분류 | 사건연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 건립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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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2-2-27 | 베트남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24-04-30 | 서울특별시 동작구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서울특별시지부 | 조형물 | 월남참전 | 가로 12,000 세로 12,000 높이 15,000 단위 mm | 2009-07-18 | 베트남 참전의 역사의 의의를 되새기고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5천여 전우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민족의 성지 현충원이 바라보이는 이곳 동작동에 서울지역 4만5천여 전우들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화의 비상" 기념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의 위용과 애국충정을 노래한 "따이한의 전설" 을 헌시로 바친다. 이로써 우리 32만 베트남 참전 전우들은 조국의 안녕과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숭고한 희생정신이 역사 속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나아가 후세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의 귀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2 | 25-1-27 | 조동호 추모공간 | 독립운동 | 2024-04-09 | 충청북도 옥천군 | 옥천군 청산면 | 조형물 | 기타 | - | 조형물 흉상(2000*1000*2300mm) / 아트월(1200*600*20mm) | 2023-11-11 | 유정 조동호(1892∼1954)선생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위원, 독립신간 창간 등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중심 으로 활동하였고, 신한청년당, 조선중앙일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에 활동하며 독립에 큰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에서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옥천군에서는 그가 태어난 생가터를 보존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조동호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족과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군비 234백만원의 사업비로 이 곳에 남아있던 오래된 가옥을 철거하고 조동호선생의 흉상과 생애기록을 아트월에 담아 2023년 11월 11일 조동호생가 추모공간을 조성하였다. 이 공간을 통해 청산면 지역의 독립에 관련된 사료를 집중시켜 백운리 공원 내 청산 3.1만세 기념탑과 더불어 관광자원 및 교육공간으로 활용 할 계획이다. |
3 | 42-1-54 | 허당 명도석 애국지사 흉상 시비 | 독립운동 | 2024-04-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명인호(허당명도석지사기념사업회) | 동상 | 3·1운동 | 1922-45 | 기단: 4*5m, 높이 1.84m, 폭 3.27m, 흉상 0.51m*1.93m | 2022-04-25 | 허당 명도석지사의 투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표현한 시를 기재한 시비와 흉상을 건립하여 미래세대에게 허당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함 |
4 | 42-2-74 | 김오랑 중령 흉상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남도 김해시 | 활천동 주민자치회 | 동상 | 기타 | 1979년 | 높이 1.98m, 폭 0.5m | 2014-06-06 | 김오랑 중령은 1979년 12월 12일 사태 때 장관인 특전사령관을 시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수호르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히 대항하고, 정의를 수호하다 순직하였으며, 2014년 4월 1일 육군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보국훈장 삼일장 전수식이 거행되었다. 이 흉상은 김오랑 중령의 위대한 희생을 기리려는 김해시민의 뜻을 모아 활천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추모건립비 기금을 마련해 세워졌다. |
5 | 30-1-79 | 항일의사동산 | 독립운동 | 2023-12-12 | 경상북도 상주시 | 채재식 | 장소 | 3·1운동 | 1919 | 0 | 2004-11-01 | 항일의사동산에는 항일의사 소몽 채기중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후곡 채섬환 선생 추모비,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등 3개 기념비가 위치하고있다. 채기중선생의 자는 극오이며 1873년 7월7일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채기중선생은 광복회 지부를 설치하여 무장투쟁 및 만주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할 계혹도 수립하였다. 1918년 광복회 조직이 발각되고 채기중 선생 역시 그해 7월 전라도 목포에서 피체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서대문 감옥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채섬환선생은 1874년10월3일 상주시 이안면 여물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운강대장이 칙령을 받고 거병하자 격문을 해석 배포하였여 사기를 드높였으며, 군수품 등을 조달하였다. 이운강의 장자 이승재와 중장군 김상태를 대장으로 결사대도 조직하였으며 광복을 일년앞두고 1944년 9월3일 상주시 외서면에서 영면하였다. 1919년3월29일 밤 채세현, 채순만의 지휘아래 소암리 마을주문들이 기미독립만세운동을 펼쳤으며, 만세를 부른사람들은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
6 | 33-2-66 | 참전전공비(화북면)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 | 2001-11-30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영천시 화북면 출진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시겨주고자함 |
7 | 33-2-65 | 참전전공비(신녕면)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 | 2000-12-09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영천시 신녕면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겨주고자 건립 |
8 | 33-2-64 | 6.25참전국가유공자비(동부동, 중앙동, 서부동, 남부동)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비석 2개 | 2008-12-31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지 위하여 희생하신 영천시 동부동, 중앙동, 서부동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겨주고자 건립 | |
9 | 16-2-116 | 필리핀군 전적비 | 국가수호 | 2024-04-09 |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 캠프티아노기념사업회(대표 윤정화) | 비석 | 6·25전쟁 | 1952 | 비석 1기 | 1952-09-12 | 6·25 한국전쟁 당시 갈화골 및 에리에(erie) 고지에서 1952.6.21. 전사한 필리핀 아폴로 B. 티아노 소위를 추모하고 그 부대원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 |
10 | 16-2-115 | 춘농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 국가수호 | 2024-04-09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기 | 2010-04-29 |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하여 꽃다운 청춘을 버리고 자원입대하여 학도병 또는 참전용사로 전쟁을 치르고 전사한 선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생존 선배들의 영생을 위하여 건립함 |
11 | 16-2-114 | 국군의 날 제정 기념탑 | 국가수호 | 2024-04-09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 육군 제9871부대 | 탑 | 6·25전쟁 | 1950 | 탑 1기 | 1992-10-01 | 1950.10.1. 백골사단 23연대가 6·25전쟁 당시 38선을 전군 최선봉에서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1956년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선배 전우들이 이룩한 부대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다시한번 조국수호와 통일의 최선봉이 될 것을 다짐하며 1992.10.1. 기념탑을 건립하였음 |
12 | 15-2-126 | 윌리엄 E. 웨버 대령, 존 K. 싱글러브 장군 추모비 | 국가수호 | 2024-04-09 | 경기도 파주시 | 한미동맹재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3-10-06 |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쟁은 물론 한국전쟁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윌리엄 E. 웨버 대령과 존 K. 싱글러브 장군에 대한 추모비 건립 |
13 | 15-2-125 | 최영희 장군 흉상 | 국가수호 | 2024-04-09 | 경기도 포천시 | 2672 부대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22-06-23 | 제16대 국방부장관, 제5대 합참의장, 제1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시고 6.25전쟁의 영웅이신 덕장 故최영희 장군의 흉상을 건립하여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조국에 헌신하신 고인의 고귀한 희생과 공적을 대내외에 알리고 기려 우리의 6.25전쟁의 아픔과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널리 알리고 전하려는 교육홍보의 현장으로 활용하고자 함. |
14 | 18-2-33 | 성남시 6·25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3-12-12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남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1m*세로0.25m*높이1.9m | 2022-11-15 | 국가를 위해 희생·공헌하신 성남시 6·25 참전유공자의 호국보훈정신을 기리며 그분들의 애국과 헌신의 역사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합니다. 또한, 국가보훈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오늘날 보훈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합니다. |
15 | 50-1-57 | 강진읍교회 종탑 | 독립운동 | 2023-12-12 | 전라남도 강진군 | 한국기독교장로회 강진읍교회 | 탑 | 3·1운동 | 1919 | 기단 2.55*2.45*0.9, 탑 0.9*0.9*7.315 | 1914-01-01 | 강진읍교회 종탑은 1919년 4월 4일 강진독립만세운동을 있게 한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당시 시계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강진읍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비둘기바위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진행함 1914년 1월에 건립되어 1964년 교회의 이전에 따라 함께 옮겨와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음 현재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65호로 지정 및 관리되고 있고 담임목사를 포함한 6명의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음 매년 4.4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때마다 종탑을 지나가고 있으며 행진 중에 33번의 타종을 실시하여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음 |
16 | 50-2-53 | 갑종장교 호국공원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공원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갑종장교 호국탑, 임동춘 대위 상, 송서규 대령 상, 최범섭 중령 상, 회상의 벽, 추모의 집, 갑종장교 흉상, 갑종장교 기념관(동춘관) | 2004-10-29 | 갑종장교 호국공원은 군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갑종장교의 공훈을 재조명하고 그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려 명예를 선양한 갑종장교의 고적을 역사에 각인, 호국안보의식을 후세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갑종장교는 6.25전쟁 발발 이전에 창설, 20년간 45,424명이 임관하여 6.25전쟁에는 호국의 방패로, 베트남 전쟁에는 창군 이래 최초로 해외 파병되어 혁혁한 전공으로 국위를 선양하였고, 정전 후에는 군의 정예화 및 국가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나라가 위급할 때 가장 위험한 곳에 앞장섰다. |
17 | 42-2-73 | 함안 경찰승전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23-12-12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공원 | 6·25전쟁 | 1950 | 높이 5.7m, 폭 14.7m | 2023-05-30 | ○ 6.25전쟁 함안지역 전투 중 낙동강방어선에서 승리를 이룬 구혜리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과 경찰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 ○ 이곳은 미군 30명과 경찰 58명이 10배가 넘는 북한군 1,000명을 상대로 승리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2012년 승전탑을 건립하고, 서북산지구전투 및 대산지구전투 등 함안지구전투를 기념한 경찰승전기념관 등 기념공원을 2023년 건립하여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경찰의 숭고한 헌신과 전공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기억되게 남기고자 합니다. |
18 | 42-2-72 | 박진전쟁기념관 | 국가수호 | 2023-12-12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726.61㎡/ 지상1층 | 2004-06-25 |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박진전투의 전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박진전투는 1950년 8월부터 10월까지 낙동강 돌출부에서 있었던 전투로 미 2사단과 24사단이 북한군 4사단과의 전투 끝에 아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
19 | 53-2-40 | 호국참전기념탑(영광군)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탑 | 월남참전 | 1964 | 가로 3.6m, 높이 12m, 탑 1개소, 기념조각 2식 | 2016-05-01 | 영광군 지역의 월남전 참전용사와 무공수훈자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나라사랑 배움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음. |
20 | 53-2-39 | 참전유공자 기념탑(영광군)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1964 | 높이 7m, 기단 7m | 2008-04-13 |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참전한 용사들의 나라사랑에 대한 참뜻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음. |
21 | 42-1-53 | 3.1독립만세운동 함안읍 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23-12-12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5*0.9*1.05m, 폭 0.9m, 덯높이 1.87m | 2023-10-13 | 1919.3.19. 함안읍 의거에서 순국한 애국 지사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 |
22 | 41-1-20 |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23-12-12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광역시 | 탑 | 기타 | 높이 30m | 2021-02-26 | 울산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 및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기리고 계승 | |
23 | 41-1-21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 독립운동 | 2023-12-12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기념관 | 기타 | - | 2022-12-22 | ○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통해 양산의 독립운동가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양산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추모함 ○ 역사체험실에서의 체험활동을 통해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후손에게 전하는 계기를 마련 ○ 역사자료실에는 연령에 맞게 접할 수 있는 근현대 역사도서를 다수 비치하여, 독립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지식을 함양 | |
24 | 52-2-75 | 충혼탑(설천면)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북도 무주군 | 설천면 | 탑 | 6·25전쟁 | 1.1m x 0.75m x 4m | 2022-06-03 | 6.25전쟁 당시 조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목숨을 바치신 무주군 설천면 지역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애국정신과 그 뜻을 되새기기 위해 건립 | |
25 | 40-2-37 | 영도구 월남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3-12-12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4,500(W)x1,500(H)X460(L) | 2023-10-23 |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이역만리 월남전에서 고귀한 생명과 젊음을 바친 영도구 출신 월남 참전자들의 투혼과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한반도를 넘은 평화로운 미래, 번영의 대한민국 시대가 열리기를 염원하는 뜻을 모아 이 명비를 건립하게 되었음 |
26 | 26-2-22 | 세종 국가보훈광장 | 국가수호 | 2023-12-12 | 세종특별자치시 중앙공원로 | 국가보훈부 | 공원 | 기타 | 18590 | 2023-04-01 | 보훈관련 공간 조성을 통해 방문자들이 애국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 주요시설물: 이룸대로, 이음다리, 오름동산, 받침기둥, 비춤정원, 세움기둥 등 | |
27 | 23-1-51 | 김광제 동상 공원 | 독립운동 | 2016-11-23 | 충청남도 보령시 | 독립지사김광제기념사업회 | 동상 | 애국계몽운동 | 1907 | 0 | 2015-06-09 | 김광재 선생은 1866. 7. 1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의병활동과 일본화폐유통 반대, 친일파 배척활동, 사립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출판사인 대구광문사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국채보상운동 발기연설문을 작성 낭독하고 같은 해 부사장 서상돈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에 "국채일천삼백만원 보상 취지서" 격문을 발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실천한 선각자였다. 이후 1920년 일본에서 제 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28 | 23-1-50 |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13-11-22 | 충청남도 서천군 |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 | 동상 | 애국계몽운동 | 1896 | -0 | 2012-10-31 | 이상재 선생은 독립협회를 지지하여 자유사상 고취에 전력을 다하고 청소년의 애국사상을 지도하는 등 3.1운동 당시 민족적인 지도자로서 활약함.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함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정부에서 추서함 |
29 | 33-2-062 | 월남전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23-05-23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주탑 8.8m | 2020-12-29 |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위해 월남전에서 피와 땀,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 의미를 되새겨주고자 건립 | |
30 | 33-2-63 | 자황사 한미호국백호충혼탑 | 국가수호 | 2023-06-20 | 경상북도 울진군 | 자황사 | 탑 | 6·25전쟁 | 1950 | UN군 6m60cm / 8사단 4m97 / 3사단 5m25cm / 백호퉁용탑 5m85cm | 2021-06-23 | 한미호국배호충혼탑 |
31 | 10-1-041 | 남강기념관 | 독립운동 | 2023-05-11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재)남강문화재단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1907 | 지하1층, 지상5층(기념관 2층) | 1984-12-26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07년(광무 11)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 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을 건립하는 한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기독교 정신으로 바꾸어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거주의 제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 9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大邱)와 경성형무소에서 4년 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가출옥하여 세례를 받은 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상순 최 린(崔麟)·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이 중앙학교 안에 있는 송진우의 집에 모여, 한말(韓末)의 요직자와 기독교측의 동지를 포섭키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손병희(孫秉熙)를 민족대표로 삼아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와 의견서, 청원서를 작성키로 하고, 이를 최남선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최남선이 기독교측의 동지를 구하는 일을 맡았는데, 우선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그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최남선은 2월 11일 사람을 중계하여 이승훈을 오산학교 경영의 구실로 하여 상경케 하였는데, 이 때 최남선은 일본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송진우로 하여금 김성수(金性洙)의 집에서 그를 만나게 하여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규합의 일을 부탁하였다. 이에 그는 즉각 찬성하고 동지의 규합을 위하여 당일로 서울을 떠나 선천(宣川)으로 가서, 이튿날인 12일 장로교 목사인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이명룡(李明龍)·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유여대와 김병조의 인장을 위탁받고, 양전백과 이명룡에게는 상경하도록 하였다. 14일에는 평양의 기홀(紀笏) 병원에서 길선주(吉善宙)·신홍식(申洪植)에게 독립운동 계획의 취지를 설명하여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20일 밤에는 박희도(朴熙道)의 집에서 남감리파의 목사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신홍식 등과 만나 독립운동 계획에 대한 협의 끝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고, 정춘수로 하여금 원산(元山) 방면을 담당케 하였다. 이튿날인 21일 그는 최 린의 집에서, 최남선·최 린과 만나 전날 밤 박희도의 집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들이 모여, 기독교측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시 동지들과 협의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다시 세브란스 병원내의 이갑성(李甲成) 처소에서, 박희도·오기선·오화영·신홍식·함태영(咸台永)·김세환(金世煥)·안세환(安世桓)·현 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다가, 결국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 결정키로 하고 이 문제를 함태영과 함께 담당하기로 하였다. 22일에는 최 린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으로 5천원을 원조받고, 함태영과 함께 천도교측의 독립운동계획을 물어보자, 최린은 기독교측의 계획대로 독립선언을 하지않고 독립청원서만을 제출하려면 연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기독교측의 대표들과 모여 독립운동 계획의 방법을 숙의한 끝에, 천도교측의 주장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24일 함태영과 함께 최 린을 찾아가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동의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국장(國葬) 직전인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고, 스스로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27일에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서 박희도·이갑성·오화영·이필주·함태영·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과 모여,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이에 찬성하여 함태영을 제외하고 모두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天道敎)·기독교·불교(佛敎)측의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계획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출옥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한 후, 1924년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했다가 5개월여 만에 사임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32 | 52-1-48 | 박춘실 기념관 | 독립운동 | 2023-05-11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군수 | 기념관 | 의병운동 | 1909 | 1층 579.51㎡, 2층 364.8㎡ | 2022-11-24 | 관은 밀양(密陽)이고 전라북도 장수(長水)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불의를 모르는 곧은 성품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茂朱)·장수·진안(鎭安)·용담(龍潭) 등지에 국가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九峰山)에서 일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서(文泰瑞;泰秀)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무주 상창곡(商昌谷)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鎭安) 천반산(天盤山), 성수산(聖壽山), 장수 덕유산(德裕山), 구천동 적상산(赤裳山), 토옥동(土沃洞) 문성어전(文城於田), 농수리(農水里), 양악(陽岳), 진도리(眞道里)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金聖凡)·문태서를 부장(部將)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북과 전북을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함양 수비대장 조사(鳥飼)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長溪)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순사(自盡殉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수 5儀 중 한분이시자 을사조약 이후 대표적 의병대장이셨던 고 박춘실 의병대장은 위태로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하셨으나 유족이 제적되고 생가 확인이 어려워 복원이 어렵고, 의병장에 대한 유물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예우를 다 할 수 없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 주민의 염원을 담아 나라 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항일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보훈정신 산 교육장으로써 활용 계획임 |
33 | 30-1-077 |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사당 | 독립운동 | 2023-05-11 | 경상북도 상주시 | 광산노씨후제공종친회 | 사당 | 의병운동 | 1905 | 정면 3칸, 측면 1칸, 일반목구조 | 2002-12-12 |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거사 계획을 주청하여 밀칙을 제수받아 상주로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20일에는 김운노, 송창헌, 임용헌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이후 의병대장에 올라 보은, 상주, 성주, 거창 등지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1908년 7월 13일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1910년 공주감옥에서 복역 중에 경술국치의 특사로 출감되었다. 출감이후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1913년 3월 12일 다시 체포되어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대구감옥에 투옥된후 7월 10일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
34 | 30-1-078 | 애국지사 성곡 서병무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23-05-11 | 경상북도 성주군 | 서석형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2-03-01 |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서병무 애국지사의 공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건립 <애국지사 성곡 서병무선생> 1919년 4.2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대구형무소에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만주와 일본 등지로 망명하였다가 상해로 건너가 독립공채모금운동에 종사하다가 1923년 서석연선생이 투옥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사업에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침 |
35 | 25-2-072 | 공군박물관 | 국가수호 | 2023-05-2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공군박물관 | 기념관 | 기타 | - | 전시관 3,125 / 수장고 867 / 철근콘크리트구조 지상 2층, 지하 1층 | 1979-03-22 | ○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와 전통을 나타내는 역사적 기념물, 항공과학 관련 자료, 공군 선배들의 업적에 관한 자료 수집·보관·전시 ○ 항공기를 이용한 독립운동과 6.25전쟁, 해외파병, 전력증강, 인재양성 등 70여년 동안 국가수호를 위해 애썼던 공군의 활약상을 전시(6종 13점 국가등록문화재 보유) |
36 | 53-2-38 | 무안군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23-05-11 | 전라남도 무안군 |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전라남도지부 무안군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높이 16m, 폭 9m | 2022-08-30 | 나라를 위해 헌신 공헌한 6.25 및 월남전 참전유공자를 예우하며 그 희생정신을 기려 명예를 선양하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함 | |
37 | 50-1-56 | 홍범도 장군 흉상 | 독립운동 | 2023-05-11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역시 광산구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높이 2.2m, 가로 0.55m, 세로 0.55m | 2022-08-15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인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기둥과 같은 상징적인 인물로, 고려인 마을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건립하여 시민들과 후손인 고려인이 함께 홍범도 희생정신과 뜻을 기리는 공간을 마련 | |
38 | 25-1-26 | 이원면 독립유공자 공적자랑비 | 독립운동 | 2023-05-23 | 충청북도 옥천군 | 충북 옥천군 이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년 | 공적자랑비 1기, 공적비 5기 | 2022-10-15 | 옥천군 이원면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및 공적자랑비 설치 |
39 | 25-1-25 | 청산면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3-05-23 | 충청북도 옥천군 | 충북 옥천군 청산면 | 탑 | 3·1운동 | 1919 | 기념탑 높이 7m, 건축면적 13m | 2020-03-01 | 옥천군 청산면 출신 독립유공자 3.1독립만세운동 기념 |
40 | 12-2-026 | 중동고등학교 참전용사 명비 | 국가수호 | 2023-05-23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중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4.9M*높이 3M | 2022-10-31 | 국가를 위해 희생 및 공헌하신 중동고등학교 6·25 참전용사의 호국보훈정신을 기리며, 그들의 애국과 헌신의 역사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나라사랑정신을 계승발전한다는 의미를 담은 기념비임. |
41 | 12-2-025 | 경기인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3-05-23 | 서울특별시 강남구 | 경기고총동창회 | 비석 | 6·25전쟁 | 가로 6m*세로 3.3m | 2022-09-30 | 본 시설은 경기고등학교 졸업자 중 6·25 전쟁 대 참전 및 사망하신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동시에 예우 및 선양을 위한 기념비임. | |
42 | 15-2-124 | 지평리 전투 승전비 | 국가수호 | 2023-05-11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05m | 2015-08-15 | 지평리전투를 완승으로 이끈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대대, 제5기병연대 연합군의 진정한 용기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함 <비문 내용> 지평리 전투 승전비(1951. 2. 13.~16.) 지평리 전투를 완승으로 이끈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대대, 제5기병연대 연합군 전우들의 진정한 용기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 장병들과 양평군민의 온 마음을 정성껏 모아 이 승전비를 세웁니다. |
43 | 15-2-123 | 지평면 UN기념비 | 국가수호 | 2023-05-11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2), 국기게양대(4) | 2007-09-17 | 6.25 전쟁 지평리전투 당시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된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비문 내용> 이곳 지평리 전투에서 UN 프랑스군으로 참가한 그대들이 보여준 나폴레옹의 후예다운 용맹성과 숭고한 희생은 대한민국 국토수호의 초석이 되었으며 그대들의 고귀한 영혼은 아직도 이곳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대들의 뜻을 기려 한,불 양국간 혈맹관계를 더욱 공고히함은 물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44 | 15-2-122 | 트루먼 대통령 동상 | 국가수호 | 2023-05-11 | 경기도 파주시 | 제1570부대 | 동상 | 6·25전쟁 | 1950 | 2.45m | 1975-10-03 |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침략을 당했을 때,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국 참전의 용단을 내린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 <비문 내용> 국경에서의 침공을 방지하고 국내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된 한국 정부군이 북한의 침략군으로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군에게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의 전 회원국에게 이 결의를 집행함에 있어서의 모든 원조를 유엔에 제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본인은 미국 공군과 해군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군에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파괴공작의 범위를 뛰어넘어 무력침공과 전쟁수단을 사용하게 된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인은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최근 한국에서 유엔헌장을 무시하고 감행되고 있는 침략의 결과를 주의 깊게 고려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국제문제에 있어서의 무력지배로의 복귀는 막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미국은 법의 지배를 계속 지지할 것입니다. |
45 | 17-2-071 | 영월군 6·25전쟁 및 월남전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23-05-11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 영월군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탑 1 (높이 6m), 상징조형물 2(높이 2.5m), 기록벽 1 (높이 2.5m) | 2016-06-23 | 6·25전쟁과 월남전쟁에서 불굴의 투지로 젋젊음을 바친 영월지역 참전 무공용사를 추모 | |
46 | 42-1-52 | 의령 임천정 | 독립운동 | 2023-05-11 | 경상남도 의령군 | 임천정 열락계(이창순)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928 | 0 | 1928-03-27 | 독립유공자 이태식 선생의 별서이자 서당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 등과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장소로 이용한 독립운동 유적지로 독립운동가 이태식 선생의 삶을 재조명,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독립유공자의 고귀한 뜻과 흿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치하고자 건립 |
47 | 45-2-058 | 해병3·4기 호국관 | 국가수호 | 2023-05-11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해병대제9여단 | 기념관 | 6·25전쟁 | 1950.6.25 | 1층 | 1941-01-01 | 이 전시관은 6·25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해병 3·4기의 위상과 전공을 높이 기리고 해병대 역사의 초석을 다진 선배 해병들의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 전쟁 상황을 도민에게 알리며 청년들의 입대를 호소하였다. 소식을 접한 제주 전역의 청년·교사·학생 등 3000여 명은 자신의 손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겠다는 뜨거운 결의로 해병 3·4기(여군 126명 포함)에 자원입대했다. 1950년 9월 1일, 조국의 부름을 받은 이들은 제주 산지항에서 출항하여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을 비롯해 원산·함흥지구 전투, 도솔산지구 전투, 김일성·모택동고지 전투,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등 해병대 주요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상승불패의 정신으로 무적해병의 역사와 전통을 수립하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해병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해병 3·4기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애국정신과 자랑스러운 발자취를 계승하기 위해 해병 3·4기 호국관에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
48 | 43-1-71 | 3·1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23-05-18 | 경상남도 거창군 | 위천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비석(7.1 m x 7.1m) 1개소, 비(1.7m x 1.8m) 1개소, 안내판(0.7m x 1.7m) 1개소 | 2022-12-27 |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된 3.1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널리 호국애족정신을 고양하고자 건립 |
49 | 43-2-062 | 경남소방헬기 추락 순직 소방인 위령비 | 국가수호 | 2023-5-18 | 경상남도 산청군 | 경상남도 소방본부 | 비석 | 기타 | 1998.8.9 | 비석 1동 | 1998.5 | 1996.8.9. 지리산 소방헬기 추락으로 인한 사망한 고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함 1. 전면 : 여기 제 몸보다 남의 안전을 귀하게 여기다 숨져간 소방항공대원들과 구조활동 도중 목숨을 잃은 젊은이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잠들고도 사람들 가슴속에 영원히 지지않는 봉사와 희생의 꽃으로 피어나리니 님들이여 이승의 일 다 접고 편히 쉬소서. 2. 후면 : 1996년 8월 9일 19:00경 경상남도 소방항공대 소속 소방헬기에 항공구조대원 5명이 탑승 이곳 로타리 산장에서 등반환자와 보호자 등 2명을 태워 중산리 주차장쪽으로 비행하다가 급격한 기류 변화와 일기 불순으로 지리산 정상쪽으로 되돌려 운항 중 순두류 계곡 중턱에서 짙게 깔린 어둠과 난기류에 휩싸여 기체가 추락되면서 탑승자 전원이 영원한 안식처로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구조활동을 펼쳤던 119소방 항공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드높이고 젊음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대학생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 희생자 명단 - 기장 김유복 지방소방장 정영호 - 정비사 김윤석 지방소방장 김종배 - 현대정공정비사 허찬규 민간인 최진호, 민간인 유기영 |
50 | 40-2-36 | 범어사 | 국가수호 | 2023-05-11 | 부산광역시 금정구 | 대한불교조계종 범어사 | 장소 | 6·25전쟁 | 1950 | 5371.33 | 678-01-01 | 6·25전쟁당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한 39위의 유해를 범어사 보제루에 안치하고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했다.1952년 범어사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대규모 군 ·경 합동 위령재가 봉행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범어사는 1956년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가 설치될 때까지 수년간 전몰 군 ·경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 넋을 위로하며 임시 국립현충원의 역할을 담당했다. |
51 | 40-2-35 | 영도구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3-05-11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광역시 영도구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22-11-04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영도구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공헌을 가까이서 되새기고 후세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이 명비를 건립합니다. |
52 | 45-2-57 | 신효동 충혼비 | 국가수호 | 2022-12-06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효마을회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1979-06-25 | 6·25참전 당시 전사한 지역출신 국가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고 애국 및 희생정신을 후세에 남기고자 지역민 일동으로 건립함 |
53 | 45-2-56 | 호국영웅 한규택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17-10-30 | 1950년 8월 해병3기 입대, 3대대 11중대 화기소대 기관총사수로 적탄에 관통상의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두번째, 세번째 기관총 격파,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한규택 하사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한규택 하사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4 | 45-2-055 | 호국영웅 김문성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20-09-25 | 중동부 전선 도솔산 지구 전투 참가,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 도솔산 중동부 전선의 핵심 요충지, 도솔산 지구 탈환 작전에 투입되어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적의 진지 50m지점까지 들어갔으나 목표를 바로 눈아에 두고 전사,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김문성 중위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김문성 중위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5 | 45-2-054 | 호국영웅 고태문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17-10-30 | 제5사단 27연대 예하 제9중대장, 동부전선의 351고지 전투참가, 적2개 중대의 공격을 받고 백병전으로 고지 사수 중 진지 사수의 유언을 남기고 전사,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고태문 대위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고태문 대위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6 | 45-2-053 | 호국영웅 강승우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17-10-30 | 제9사단 30연대 백마고지 전투참가,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특공작전 결행, 적의 자동화기 지지 파괴, 전략요충인 백마고지 완전히 탈화하는데 결정적 기여로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강승우 중위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강승우 중위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7 | 20-2-51 | 고 민평기 상사 흉상 | 국가수호 | 2022-12-06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고등학교 | 동상 | 기타 | 2010 | 94cm x 68cm x 223cm | 2017-10-14 | 고 민평기 상사는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전사한 "천안함 46용사"이다. 고 민평기 상사는 1976년 10월 1일 충남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국군의 날에 태어나 부친에 의해 "평화통일의 초석이 되라"는 의미의 '평기'로 이름지어졌다. 매화초등학교(23회), 은산중학교(26회), 부여고등학교(44회)를 졸업한 후 1997년 8월 11일 해군에 입대하여 1997년 12월 2일 해군부사관(169기)로 임관하여 제2함대, 조함단, 인천방위사령부 등을 거쳐 2009년 2월 2일 제2함대 22전대 소속 천안함(PCC-772)에 부임했다. 북방한계선(NLL)을 지키기 위해 경계·경비 근무 중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경 백령도 연화리 서남방 2.5km 해상에서 북한 잠수정의 어뢰에 의해 전사했다. 부여고등학교 총동문회는 마지막 순간까지 NLL을 사수하고,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위국헌신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 얼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부여고등학교에 고 민평기 상사 흉상을 건립했다. |
58 | 20-1-37 | 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22-12-06 | 충청남도 부여군 | 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추진위원회 | 비석 | 3·1운동 | 0 | 2021-06-11 | 1919년 3월 6일 박용화의 주도로 부여군 임천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된 장소 | |
59 | 20-1-36 | 한훈기념관 | 독립운동 | 2022-12-06 | 충청남도 계룡시 | 계룡시 | 기념관 | 의열투쟁 | 지하 1층, 지상 1층 | 2021-08-15 | 계룡시 대표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독립운동 | |
60 | 50-2-52 | 광주경찰 추모비 | 국가수호 | 2022-12-06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역시경찰청 | 비석 | 기타 | 가로 7m, 높이 1m 70cm | 2022-06-20 | 전라남도 경찰부 창설 이후(1945년) 현재까지 광주권 5개 경찰서에서 전사 · 순직경찰관 253명의 위패를 봉안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숭고한 희생을 추모함 | |
61 | 10-2-06 | 호국충혼 위령비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강서구 | 강서구청 공원녹지과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4.7m | 1994-06-28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무력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육군 제1사단 11,12,15연대 소속 장병 1,100여 명은 김포지구로 후퇴하여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개화산에 최후의 방어진을 치고 아군으로 ㅟ장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고 탄약과 보급이 끊긴 채 북한군의 수와 화력에 밀려 부대원 전원이 개화산 골짜기에서 장렬이 산화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4년 개화산에 위령비를 건립하고 매년 6월 28일 이 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62 | 42-1-51 | 의열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22-12-06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설관리공단 | 기념관 | 의열투쟁 | 1919 | 의열기념관, 의열쳏체험관, 기념조형물 | 2022-04-28 | 조국의 독립을 위하 헌신한 의열독립투사들의 업적과 활동을 후세에 알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독립굥교육 인프라 구축 |
63 | 33-2-61 | 용화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22-12-05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용화사 | 탑 | 6·25전쟁 | 1950년 | 높이 4.4m | 1996-06-02 |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기계·안강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계·안강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면 포항·경주·영천·대구가 위험에 처하게 되어 우리 군은 최후 방어선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부대의 공격에 맞서 수도사단·제3사단과 독립기갑연대·2개 유격대대·해군육전대·민부대·학도병 등 동원가능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필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그 결과 고지의 주인이 열여섯 번이나 바뀌고, 국군 제17연대는 소대장·중대장, 3개 대대장이 전사와 부상으로 인해 지휘자가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었다. 17연대는 격전지인 곤제봉 전투에서 최후의 승자는 되었지만 수많은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치열했던 기계·안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고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
64 | 10-1-040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독립운동 | 2022-12-06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기념관 | 해외운동 | 1919 | 지상 4층, 지하 3층 | 2022-01-27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역사를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기억하고 후대에 전승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 건립 |
65 | 25-2-71 | 이원면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22-12-06 | 충청북도 옥천군 | 옥천군 이원면 | 공원 | 기타 | 2022 | 현충탑 : 가로 2.2m 세로 1.9m 높이 4.6m / 독립유공자탑 : 가로 1.5m, 세로 1.8m, 높이 4.6m | 2022-08-11 | 현충탑 : 6.25참전 및 월남참전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1998년 12월 31일 이원면 개심리에 건립하였던 기존 노후된 탑을 철거하고 이 곳 건진리에 재건립 하였으며, 하늘을 향해 세워진 세 개의 기둥이 가운데로 모여지는 형태는 한마음으로 숭고한 뜻을 받들고 따르겠다는 의미이며, 중앙에 있는 태극문양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독립유공자탑 : 3.1만세운동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탑으로 하늘을 향해 뻗은 태극문양은 횃불이 감싸는 듯한 형상으로 목숨을 바쳐 독립을 외치던 사람들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
66 | 26-1-021 | 독립기념관 | 독립운동 | 2022-12-06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독립기념관 | 기념관 | 3·1운동 | 1919년 | 46031.18 | 1987-08-15 | 대한민국의 박물관. 이를 운영하는 국가보훈처 산하 공공기관(준정부기관) 역시 '독립기념관'이다. 겨레의 탑과 불굴의 한국인 상이 박물관의 상징이며, 이 박물관이 바로 천안시의 랜드마크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 운동이 주요 주제이다. 2022년 현충시설로 등록되었다.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연구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올바른 국가관 정립에 이바지함 |
67 | 52-2-42 | 충혼비(고산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고산면장 | 비석 | 기타 | 1952 | 0 | 1952-06-01 | 고산면에서는 완주 읍내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고산면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고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2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고산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8 | 24-1-024 | 항일독립운동역사관 | 독립운동 | 2019-12-12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기념관 | 기타 | 지상 4층(1층 사무실 / 2~4층 전시관) | 2018-10-05 | 충북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읭의 역사적 자료와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 공훈자료 등을 전시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보존하고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함 | |
69 | 18-2-032 | 이천시 월남전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21-10-29 | 경기도 이천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경기도지부 이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가로 18m, 세로 13m, 높이 8.8m | 2021-06-30 | 이천시 거주 월남전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림. |
70 | 18-2-031 | 강릉지역 대침투작전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이천시 | 제5779부대 | 비석 | 기타 | 1996 | 높이 3.8m(하부 대리석 2m, 상부 청동 1,8m), 넓이 3m, 깊이 1,7m(석재 깊이 1.4m) | 2015-08-07 | 1. 전적비 : 1996년 9월 18일 01:17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대포동 앞바다 50m 해상에서 북괴 잠수함이 좌초된 채 발견되어 시작된 강릉 대침투 작전시 여단은 '96. 9. 18. ~ 11.5.까지 49일간 작전에 참가하여 무장공비 25명 중 8명을 사살함으로써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하였음.(작전 참가 지휘관 현황, 훈·표창 수상자 현황, 대통령 부대 표창장) 2. 전사자 동상(故 상사 이병희): 이 동상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다 목숨을 바친 한 특전인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고인은 1996년 9월 18일 강릉대침투 작전에 투입되어 9월 19일 3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계속적인 수색작전 중 9월 21일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칠성산에서 은거중인 적으로부터 선제 기습을 받아 두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면서도 적을 향하여 대응 사격을 가하는 불굴의 특전혼을 간직한 채 당일 14시 05분에 장렬히 전사함. |
71 | 51-1-51 | 김낙선의사 추모공원 | 독립운동 | 2011-06-08 | 전라북도 부안군 | 김성화 | 장소 | 의병운동 | 1909년 | 1256 | 2009-10-20 | 전남 부안(扶安) 사람이다. 1909년 3월 8일 이용서(李用西) 의병장의 휘하에서 총 15정과 도검 1자루로 무장한 의병 30여명과 함께 고부(古阜)·부안(扶安)·태인(泰仁)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 기병대의 습격으로 인하여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고 피신하여 집으로 돌아와 치료하였다. 1909년 8월 8일 부상당한 상처를 치료한 후에도 계속하여 이용서(李用西) 의병장의 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임명되어 총 8정과 칼 1자루를 무장한 부하 12명을 지휘하면서 고부(古阜)·태인(泰仁)·정읍(井邑)·부안(扶安) 등 각 군을 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전북 김제군(金堤郡) 홍산면(洪山面) 내리(內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1909년 11월 1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이 공원을 건립하였다. |
72 | 51-2-40 | 군산중.고등학교 6.25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년 | 가로 : 5m, 세로 : 3.5m, 높이 2.3m , 동상 : 2.3m | 2020-12-23 | 국가보훈처 주관 호국영웅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군산중.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을 추모하기 위하여 2020년 건립함 |
73 | 51-2-39 | 이리공업고등학교 6.25전쟁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북도 익산시 | 이리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년 | 가로 : 3.55m, 세로 : 2.8m, 높이 1.75m | 2019-11-28 | 국가보훈처 호국영웅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이리공업고등학교 출신 6.25참전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2019년 건립함. 건립된 6.25참전유공자 명비는 전면 중앙을 이리공업고 학생 상징인 교표와 무궁화로 참전유공자의 희생정신을 형상화했다. 또한 왼쪽에는 건립취지가, 오른쪽에는 이리공업고 출신 참전유공자 42명의 성명이 각인돼 있다. |
74 | 10-1-038 | 대한독립 만세운동 표지석 | 독립운동 | 2022-07-15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영등포구청 | 비석 | 3·1운동 | 1919 | 가로 100cm * 세로 65cm * 폭 50cm | 2022-03-01 | 1919년 3월 23일 당시 양평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75 | 52-1-47 | 장수군 3.1운동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21-06-18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군수 | 공원 | 3·1운동 | 1919 | 0 | 2021-03-01 | 이 공원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존 동화리 257-1에 소재하고 있던 3.1운동 기념비를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공원으로 조성하여 주민들의 접근성을 개선하였다. 현재는 주요 계기일의 행사 장소로 활용되는 등 지역의 애국심 함양의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
76 | 13-2-75 | 평택시 보훈공원 | 국가수호 | 2022-07-15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 공원 | 기타 | 0 | 0 | 2003-09-25 | ● 평택시 현충탑(현덕면)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에 평택군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1, 172위를 추모하기 위해 평택군에서 1987년 12월 26일 이 탑을 세웠다. 평택읍이 시로 승격되자 군에서 관리하던 현충탑을 시에 인계하고 평택군지역 관내 1, 172기의 영령을 모시기 위해 아산만 방조제의 관광단지 내에 새로운 현충탑을 건립함으로써 군민들로 하여금 국민적 우의 상징과 자유민주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도 저 햇빛 속에 그대들 꽃다운 모습이 보이고 지금도 바람결 속에 그대들 고운 음성 들리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쳤기에 가고도 가지 않은 그대들이라. 조국의 산천과 역사와 함께 길이 살리라. 정든 조국, 정든 고향, 여기서 그대들 길이 살리라. ● 평택3.1독립운동기념조형물 평택3.1독립운동 기념조형물 '그날의 함성'은 높이 6.9미터로 기단은 평택 최초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던 계두봉을 상징하며, 기단 위에는 만세 시위를 벌이는 군중을 표현했다. 중심 조형물에는 3.1독립선언서가 국내외에서 가장 큰 규모인 지금 5.5미터 오석에 새계 평택3.1운동의 광범위함을 표현했다. 벽면 조형물에는 100년 전 사용했던 태극기와 평택3.1만세운동 봉기도, 평택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창립 취지문, 평택3.1만세운동 약사, 평택의 독립운동가, 헌시, 100주년 기념조형물 작품해설 등이 담겨 있다. ● 무공수훈자 공적비 6.25의 국난을 당하여 국토를 보존하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부모처자를 불고하고 적군과 용감히 싸워서 빛나는 공훈을 기리고 후세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애국애족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이 공적비를 건립하노라 ● 6.25참전공적비 여기 햇살같이 찬란하고 눈부신 기백 정의의 부르짖음으로 불타오르는 횃불이 있다, 거룩한 청춘의 피 속에 최후까지 싸우다 꽃잎처럼 흩어진 호국의 신 자유조국의 수호신으로 영원히 이 땅을 지키니 님들의 끝없는 나라 정신으로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워 남기노라 |
77 | 13-1-045 | 평택3·1독립운동기념공간 | 독립운동 | 2022-07-15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복지정책과 | 비석 | 3·1운동 | 0 | 2019-03-09 | ●평택3.1독립운동기념비 평택에서는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평택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수원 이남지역 최초의 평택3.1만세운동은 안성, 화성, 천안 등 남한의 3대 만세운동 항쟁지보다 앞서 일어났다. 전국에서도 가장 뜨거운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평택의 3.1만세운동은 일제가 '광포하다'는 표현으로 기록될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평택3.1만세운동은 각계각층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나라를 되찾으려는 민중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이 기념비는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졌으며, 후세들의 애국심 항양과 우리 평택, 나아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평택3.1독립운동선열추모비 이 추모비는 1919년 평택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희생되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내 고장 평택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그로 인해 대통령장을 비롯해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등 정부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았다. 우리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길이 되새겨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평택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손들에게 같이 물려주기 위해 시민들의 정성스러운 모금운동으로 이 선열추모비를 건립하여 선조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자 한다 | |
78 | 14-2-48 | 해상 순직자 추모비 | 국가수호 | 2022-07-15 | 경기도 김포시 | 해병대 제2사단 제2상륙장갑차대대 | 비석 | 기타 | 2001 | 소 | 2003-06-10 | 2001년도 8월 6일 해상훈련 중 순직한 전우를 영원히 기억하고 상륙장갑차와 함께 고인이 된 3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병대 제2사단 제2상륙장갑차대대에서 2003년 6월 10일 부대 내에 추모비를 건립하였고 매년 현충일, 순직일 및 설과 한가위에 대대장 및 유족 주관 으로 순직장병 추모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비문내용 : 인차동체의 정신으로 이 몸 불살라 상륙장갑차와 함께한 전우들이여 그대들의 충혼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되리라, 故 최영욱 병장 / 김현중 상사 / 오상봉 상병 / 추모비 |
79 | 33-2-60 | 마린온 순직자 위령탑 | 국가수호 | 2022-04-25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국방부 | 탑 | 기타 | 2018 | 높이 7.8m, 넓이 2m | 2019-03-16 | 2018년 7월 17일 해병대 상륙기동헬기의 시험비행 중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5명 해병대원들의 명복을 빌고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80 | 30-1-67 | 대구교남YMCA회관 | 독립운동 | 2013-11-22 | 대구광역시 중구 | 대구기독교청년회재단 | 기타 | 문화운동 | 1919 | 0 | 1914-09-01 | 교남 YMCA회관은 일제 강점기 대구3.8독립만세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의 공간이었고, 초대 회장인 이만집(애국장,1999)선생, 초대 총무인 김태련(애족장,1990)선생 등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이 활동한 곳이다. 물산장려운동, 기독교 농촌운동 등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
81 | 30-2-64 | 성주중 6.25참전학도병충훈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북도 성주군 | 성주중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89 | 2019-06-22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성주중 출신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
82 | 30-2-63 | 대구공고 학도의용군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동구 | 대구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3.97 | 2018-10-04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대구공고 출신 참전유공자를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
83 | 30-2-62 | 계성고 6.25전쟁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서구 | 계성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3.8 | 2017-12-21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계성고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 자긍심 고취 |
84 | 30-2-61 | 경북고 학도의용군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수성구 | 경북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8.7 | 2016-05-16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경북고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 자긍심 고취 |
85 | 30-2-60 | 상원고 6.25참전호국영웅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상원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6-10-16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상원고 출신 참전유공자와 학도병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86 | 30-2-59 | 대구호국순직경찰추모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수성구 | 대구지방경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0-06-30 | 2020년 625전쟁 70주년을 계기로 추모비를 건립하여 경찰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배 경찰들과 지역민들에게 국가수호 및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87 | 50-1-51 | 해동사(안중근의사 사당) | 독립운동 | 2017-11-23 | 전라남도 장흥군 | 죽산안씨문중(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 사당 | 의열투쟁 | 1909 | 사당 1동 | 1955-08-01 | 순흥안씨인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어 1955년 장흥의 유림과 죽산안씨 문중의 발의로 만수사 부지내에 해동사를 건립. 이승만 대통령의 해동명월(海東明月) 친필 휘호로 현판을 검 |
88 | 50-1-025 | 전라남도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2-04-25 | 전라남도 무안군 | 광복회전라남도지부 | 탑 | 기타 | 19세기 | 22m*29,5m*17m | 2020-10-30 | 한말,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전라남도 출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89 | 42-2-71 | 해병대 발상탑 | 국가수호 | 2022-04-25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 탑 | 6·25전쟁 | 1949 | 높이 6m, 폭 2m | 1964-04-15 |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된 것을 기념하고, 해병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창군과 더불어 해병들은 민족사의 최대의 수난인 6.25전쟁을 맞아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하여 험준한 산악과 무명의 벌에서 또한 동. 서 양안으로 능히 일당백의 용맹성과 충용성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공으로 무적해병의 용맹이 온 세계에 떨쳤다. 이에 해병대 장병들의 해병 혼과 정신적 근원을 일깨우고, 자긍심과 사기, 소속감을 고취하고자 해병대 창설 15주년을 맞아 1964년에 한국 해병대 발상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
90 | 42-1-50 |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22-04-2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120cm, 폭 60cm, 두께 15cm | 1985-11-30 | 1919년 3월 1일 파고다에서 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의령에도 전해지자 기미년 3월 14일 의령 장날 2천여 군민이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벌였고 15일과, 16일에도 의령군민과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임. 이와 관련 3.1독립운동기념비는 의령군민의 독립운동유적지 보전사업의 하나로 확정되어, 나라사랑 겨레 사랑의 높은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 후손에게 전하고자 건립된 비로 국가유공자와 관련이 있음. |
91 | 42-1-049 | 애국지사 최정학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22-04-25 | 경상남도 의령군 | 최동준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8-04-21 | 의령읍 및 부림, 신반리 독립만세 시위 주동 인물로 활약하여 1990년 애족장으로 서훈되신 최정학 애국지사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금심을 고취하고자 의령군은 2018년 4월 21일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
92 | 10-1-37 | 이회영기념관 | 독립운동 | 2022-04-25 | 서울특별시 중구 | (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2층 | 2021-02-17 | 본 기념관은 항일독립투쟁의 초석을 마련한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6형제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매년 11월 17일 (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추모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 |
93 | 26-2-21 | 소방충혼탑 | 국가수호 | 2022-04-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중앙소방학교 | 탑 | 기타 | 2001 | 0 | 2002-05-23 | 충직스러운 소방인으로서 사영을 수행하다 몸 바치신 분들의 고귀한 뜻을 하나로 모아 위국충정, 위민봉사의 희생정신을 드높이는 방안을 모색하여 오던 중 6인의 소방관이 순직한 2001년 3월 4일 서울 홍제동 화재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민들의 애정 어린 성원과 소방인들의 열망적인 숙원에 따라 소방교육의 요람인 이곳에 이 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
94 | 10-2-998 | 테스트 | 국가수호 | 2022-04-08 | 경기도 과천시 | 0 | 공원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0 | 0 | 2022-03-07 | 0 |
95 | 17-2-62 | 이승복기념관 | 국가수호 | 2015-10-14 | 강원도 평창군 | 평창교육지원청 | 기념관 | 기타 | 1968년 | 지상 1층 | 1982-10-26 | 이승복 기념관은 1968년 12월 9일 울진삼척지구로 침투한 무장간첩들에게 9살의 어린 소년이“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분연히 외치다 산화했었던, 그 소년 이승복군의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대관령에 이승복반공관으로 개관하여 1982년 10월 26일 이승복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 부지로 이전하였다. 본 기념관은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승복군의 가족묘와 동상, 생가 모형, 본관 전시실, 군용장비 야외전시장을 비롯하여 자연학습장, 민속자료관, 야생화단지 등 총 10개의 전시관 및 학습장으로 운영 되고 있다. |
96 | 17-2-70 | 강릉중앙고등학교 6.25참전 국가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중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가로 4.3m, 세로 3.3m, 높이 3.09m | 2016-09-09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강릉중앙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삼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어 건립하였다. | |
97 | 17-2-069 | 강릉제일고등학교 6.25참전 국가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제일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가로 1.2m, 높이 3.2m | 2016-05-22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강릉제일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삼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어 건립하였다. | |
98 | 17-2-68 | 한국소방마이스터고등학교 6.25참전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강원도 영월군 | 한국소방마이스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4.3m*3.13m*2.56m | 2017-10-12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영월공업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삼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어 건립하였다. | |
99 | 17-1-14 | 대포만세운동기념관 | 독립운동 | 2021-11-01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주민생활지원과) | 기념관 | 3·1운동 | 1919 | 전시관 1층 | 2021-08-13 | 현 대포만세운동기념관은 1919년 4월 5일 양양군 도천면(현 속초시)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일제 순사주재소가 있던 자리이고, 속초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일 당시 순사주재소가 있던 대포에서 도천면과 강현면 군중이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면서 확산되었다. 속초시는 대포만세운동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기 위하여 당시 만세운동이 있었던 옛 순사주재소 자리인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100 | 11-2-18 |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 터 | 국가수호 | 2021-06-0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타워8 | 장소 | 6·25전쟁 | 1950 | - | 1950-09-26 | 이곳에는 6.25전쟁 당시 징병업무를 담당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있었다. 정부수립 후 병역법이 공포되면서 병력모집은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징병업무 수행을 위해 각 지구별로 병사구사령부를 설치했지만, 정부의 예산 부족으로 당장 징병제를 실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50년 3월 해체되었다. 전쟁 발발 후 정부는 병력 보충이 시급해지자 가두모집, 강제징집 등을 시행했다. 서울수복 무렵인 9월 26일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재설치 되어 현역 징병 및 제2국민병 소집 업무 등을 담당했다. 그런데 전황이 악화되면서 부산으로 이동했다가 1951년 3월 15일 서울로 복귀했다. 전쟁 이전 병무행정의 공백과 약화된 국방력에 대해 반면교사로 삼기위해 이곳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안내판을 세웠다. |
101 | 11-2-03 |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 국가수호 | 2010-02-12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대학교 병원 | 비석 | 6·25전쟁 | 1950~1953 | - | 1963-06-06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수도 서울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고개를 돌파하고 창경궁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는 거의 1천여명에 달하는 부상 장병들이 응급실, 입원실, 수술실은 물론, 병원 복도까지 가득 차 있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원은 남소위가 지휘하는 국군 1개 경비소대 병력과 육군본부 병참장교 조용일 소령의 지원하에 있었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어 북한군의 서울 함락이 목전에 있었으나 병원 내 의사와 간호사들은 환자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피난도 잊은 채 오직 환자 치료에만 전념하였다. 6.28일 새벽, 국군 경비소대가 병원 주위를 철통같이 방어하며 완강히 저항하자 북한 괴뢰군은 1개 대대병력을 투입하였고, 국군 경비소대는 이곳 뒷산에서 결사항전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조용일 소령과 소대장 남소위가 전사하고 소대원 전원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지키고 병원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하신 이름 모를 자유전사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3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02 | 18-1-20 | 광주시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0-11-19 | 경기도 광주시 | 경기도 광주시 | 탑 | 3·1운동 | - | 2020-08-31 | 의병전쟁과 3.1만세운동의 중심지인 남한산성에 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여 순국선열들의 호국정신을 계승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도립공원에 기존 신익희 동상과 하나의 광장으로 조성되어 보훈가족 및 시민, 관광객에게 역사교육의 장소 및 볼거리를 제공할수 있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정암 이종훈 선생과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춘경 구연영 의병장의 동상을 함께 건립 | |
103 | 30-2-53 | 백인권준장군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대구광역시 서구 | 권영빈 | 동상 | 기타 | 1917 | 0 | 2016-10-10 | 경북 상주 출신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자 초대 50사단장을 역임한 백인 권준장군을 기리기 위한 흉상이다. 1917년 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김원봉과 같이 의열단을 창설하여 군자금 조달 등을 지원하였다. |
104 | 51-1-60 | 문용기 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18-08-08 | 전라북도 익산시 | 문용기열사동상건립추진위원회 | 동상 | 3·1운동 | 1919 | 가로5m 세로5m | 2015-05-01 | 문용기 선생은 아버지 문재윤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1878년 5월19일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군산영명학교에서 한문, 영어교사로 재직하여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1911년부터 함경도 갑산 금광채굴 현장에서 8년간 비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앙 33인과 연계, 호남일대 동지들과 거사를 계획하여 4월4일 1천여 이리시민의 선봉에서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무도한 일본군 총검에 태극기를 든 왼팔과 오른팔이 차례로 잘려나감에도 선생께서는 몸으로 끝까지 항거하였고, 일본군의 창에 가슴이 찔려 절명하는 순간까지 선혈이 낭자한 몸으로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이에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여 순절하신 문용기 선생의 위대한 순국정신을 자손만대로 기리고 계승하고자 합니다. |
105 | 41-2-22 |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으로 쓰인 곳 - 통도사 | 국가수호 | 2021-11-01 | 경상남도 양산시 | 통도사 | 장소 | 6·25전쟁 | 1951 | 118.57 | 2021-11-01 | 통도사는 6.25전쟁을 겪으며 당시 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다. 통도사 스님들과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부상자들이 이곳에서 치료 받았으며 치료도중 사망한 병사의 수도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지난 2019년 통도사 용화전의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에서 "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해 1952년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통도사 육군병원의 존재가 기록으로 확인되었으며, 통도사 내 대광명전에서 당시 입원한 군인들이 남긴 필적이 발견되었다. 또한 군사편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51년 11월과 12월 국방부장관이 2차례에 걸쳐 대통령께 보고한 자료와 1951년 동아일보 신문 보도자료를 통해 6.25전쟁기간 양산 통도사가 제31육군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한반도의 숱한 전쟁 속에서도 통도사에 설치되었던 육군병원은 군의 입장에서는 의료기관이었고, 병사들에게는 안전한 귀의처였으며 백성의 아픔을 위로하고 국난을 극복해가는 힘이 되었다. 오늘날 통도사는 이름없이 생을 달리한 병사들을 위로하고, 6.25전쟁의 역사를 바로쓰고 희생자들의 존재를 밝혀 역사에 기록하고자 한다. |
106 | 41-2-21 | 양산고 6·25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명비 1.3m*1.05m , 조형물 좌대(1.6m*1.6m*0.12m), 기단석(1.2m*1.2m*1.4m), 인물상(1.95m) | 2016-12-13 | 양산고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07 | 42-1-047 |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21-11-01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 기념관 | 문화운동 | 1938 | 1층 문화 및 집회시설(619.36㎡, 2층 기념관 422.9㎡, 2층 기념관 별도공간 74.1㎡ | 2014-09-02 |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신 독립유공자 주기철 목사(1963 건국훈장 독립장)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후세에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
108 | 15-2-121 | 해병대 장단 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길이 11.56m, 폭 4.5m, 높이 2.8m, 132제곱미터 | 2014-11-13 | 6.25전쟁 당시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에서 1년 4개월 동안 중공군 남하공세를 차단하여 이 땅을 사수한 호국 해병들의 희생정신과 넋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함 | |
109 | 15-2-120 | 대한민국특수임무요원 한상남 동지 위령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기타 | 0 | 2003-11-30 | 조국통일을 위하여 젊음을 나라에 바친 북파특수요원 故한상남님의 명복을 빌고 가신 님의 거룩하신 나라사랑 정신을 후대에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 |
110 | 15-2-119 | 양주시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양주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양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66제곱미터 | 2017-11-28 | 흑요암으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높이 1.95m, 폭 6.75m이며, 전면에는 참전자 명단, 후면에는 6.25전쟁 및 월남전의 사진과 설명이 새겨져 있으며 중앙에 새겨진 브론즈로 만든 철모 조형물은 참전용사를 상징하며 그들의 희생정신과 명예로운 모습에 대한 예를 표하고자 하였다. | |
111 | 42-1-048 | 대암 이태준 기념관 | 독립운동 | 2021-11-01 | 경상남도 함안군 | (사)대암 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지상면적 1층 494㎥, 전시관면적 182.82 ㎡, 사무실 면적 40.12㎡, 교육실 59.71㎡, 회의실 31.39㎡ | 2021-06-07 | 몽골의 신의(神醫)라 불린 우리 함안이 낳은 위대한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 선생(1883-1921)의 항일운동과 몽골에서의 활동 등 일대기를 기리고자 2021년 11월 16일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개관하였다. 국가 현충 시설인 이 기념관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태준 선생님의 애국애족 정신과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은 박애 정신을 후세에 교육의 터전으로 삼고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곳이다. | |
112 | 42-2-70 | 창신중·고등학교 6·25전쟁 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창신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건평 2.56㎡, 기단 3.4㎡ 높이2.5m 폭 2m | 2016-12-12 | 이 명비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수호를 위해 젊음을 바치신 창신중·고등학교 출신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고자 건립하였습니다. | |
113 | 55-2-49 | 보성군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청 | 공원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6.25 및 월남 | 0 | 2020-12-01 | 현충탑, 순국비, 참전유공자 기념탑을 한데 모아 현충공원으로 조성하고 보성군 출신 호국영령 추모하기위해 건립되었다. |
114 | 55-1-58 | 의병장 임병국 기적비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보성군 | 임원모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가로 0.6m, 높이 3m | 2017-09-01 | 안규홍 의병부대 좌우익부장으로서 파청대첩, 진산대첩, 원봉대첩에서 활약 |
115 | 55-1-61 | 독립유공자 박항래 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순천시 | 박승재 | 비석 | 3·1운동 | 1919 | 가로 0.54m / 높이 1.95m / 기단 0.1m | 1974-10-01 | 순천출신 독립운동가로 박항래 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4년 문중 후손들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16 | 55-1-59 | 독립유공자 박항래 의사 흉상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순천시 | 순천시청 | 동상 | 3·1운동 | 1919 | 높이 2m | 2011-08-01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상)을 수여받은 순천 출신 독립운동가 박항래 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천시에서 건립하였다. |
117 | 55-1-060 | 윤동주 시(詩) 정원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장 | 장소 | 학생운동 | 1944 | 탑 31개 | 2019-10-18 | 망덕포구를 거점으로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과 연계한 테마공원을 윤동주 시집에 수록된 시 31편을 시비로 새겨 감성적 이색적인 공간으로 재창조하여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추모하고자 함 |
118 | 52-2-74 | 충혼비(화산면) | 국가수호 | 2021-11-01 | 전라북도 완주군 | 화산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 | 2022-10-27 | 완주군 화산면 출신으로 6.25전쟁에서 산화된 44명의 호국전몰용사영령을 추모하고 월남참전용사 39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으로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꽃다운 나이에 참전한 6.25전쟁용사들과 월남전쟁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이들을 기리는 비임 |
119 | 43-1-070 | 하익봉 공 독립운동 현창비 | 독립운동 | 2021-11-01 | 경상남도 진주시 | 진양하씨 창주공파종중(하종완) | 비석 | 학생운동 | 1944 | 비높이 2m | 2017-11-01 | 하익봉(1926~1945)지사는 1943년 일제강점기 땨때 비밀결사 광명회를 조직하여 역사를 공부하고 졸업후에는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는 등의 활동으로 2010년 독립운동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진양하씨창주공파종중에서 하익봉지사의 항일투쟁 공적과 자취가 잊혀짐을 우려하여 지역주민과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향상하고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2017년 건립하였다. |
120 | 31-2-041 | 경북호국경찰 추모공원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북도 안동시 | 경북지방경찰청 | 공원 | 기타 | 경북지방경찰청 내 219평의 잔디광장과 12평의 추모비 | 2018-10-17 | 1945년 창경 이후 국가수호 활동을 위해 전사 및 순직한 경찰관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원 내에 추모비를 설치하고, 그 뒤쪽에 그들을 위한 명각 추모벽 3면을 형성함 | |
121 | 14-2-47 |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6·25참전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2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10-19 |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자발적으로 참전한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출신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높이 기리고 후배 학생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인천보훈지청의 지원 아래 2018. 10. 19.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내 명비를 건립함 |
122 | 51-2-38 | 고창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 2.3m, 세로 : 1.1m, 높이 3.35m | 2018-12-15 | 국가보훈처 주관 호국영웅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을음 바친 고창고등학교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고자 건립 비문 내용 ○ 고창고등학교 6.25 참전유공자 명단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친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 고창고등보통학교 제16회 졸업 : 하사 송광의 ■ 고창고등학교 제27회 졸업 : 병장 김규만 병장 김규장 김경수 최진호 제28회 졸업 : 하사 은희태 상병 김기용 병장 김병완 제29회 졸업 : 중위 이상근 일병 이병문 이병 강성택 이병 박규태 명 예 졸 업 : 소령 황임춘 대위 전동선 중위 은창기 중위 이준행 중위 김성길 중위 변인석 소위 임경재 상사 정동춘 하사 김인종 하사 안현진 병장 김재원 병장 봉병채 일병 김형식 일병 배종석 일병 안도연 일병 조재연 이병 유근영 김원상 오문원 이성규 정재철 조한권 진해갑 ■ 선운사 학도의용대 제28회 : 서치윤 제29회 : 박구태 박금석 오연경 홍기선 제30회 : 강대한 김봉수 김재규 김창우 송병곤 우종익 탁영진 제31회 : 이연구 이운교 전종민 제32회 : 김용봉 권오섭 민병욱 서한수 이재옥 정택진 주원룡 차원길 최중곤 2018. 12. 15. 전북서부보훈지청 고창고등학교 |
123 | 14-2-046 | 인천고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소 | 2016-11-04 |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자발적으로 학도의용대를 조직하고 참전하여 생명과 학업의 기회를 바침으로써 조국과 가족을 지킨 인천고등학교 출신 학도병의 공훈을 높이 기리고, 후배들이 선배 학도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게승할 수 있도록 인천보훈지청의 지원 아래 2016.11.4. 인천고등학교 내 명비를 건립함 6·25전쟁 당시 인천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남녀 학생 수백여명이 "조국이 있어야 배움도 있다"라는 일념하에 자발적으로 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조국 수호활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인천고등학교에서는 180여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20여명이 전사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음 |
124 | 25-1-024 | 덕신학교 기념관 | 독립운동 | 2021-06-18 | 충청북도 청주시 | 사단법인검은정순만기념사업회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 | 2019-12-26 | 덕신학교는 독립유공자 정순만 선생이 하동정씨 문중과 함께 고향에 건립한 근대 교육시설로 1906년 개교하여 지역민의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쓴 곳이다. 정순만 선생은 1896년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설, 이동녕 등과 근대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또한 1907년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돟또한, 현재 기념관은 1920년 폐교 이후 터만 남아있던 곳에 2016년 하동정씨문중과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부대시설 정비 등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 |
125 | 12-2-24 | 강남구 6·25 참전유공자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서울특별시 강남구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7.4m 높이 3m | 2020-12-26 | 2020년 12월에 건립한 기념비는 앞면에 국가를 위해 헌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문구와 함께 건립취지와 6·25전쟁 연혁, 사진 등을 각인해 국민의 호국의식 교육장소로 활용토록 했고, 뒷면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구민 2,193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건립되었다. 개포동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해 있고, 2021년 6월 18일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
126 | 20-1-35 | 인동만세로광장 | 독립운동 | 2021-06-18 | 대전광역시 동구 | 대전광역시 동구 관광문화체육과 | 장소 | 3·1운동 | 1919 | 만세광장갤러리, 벽화, 만세조형물, 만세운동기념비, 소녀상, 노동자상 등 | 2014-08-20 | 대전 동구 인동시장 근처는 1919년 3.16 인동 장터 독립운동을 하여 대전지역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동 만세로 광장 근처를 이야기가 있는 테마 광장으로 조성 하여 기념 벽화, 기념탑,기념비 조성 및 매년 인동 장터 독립만세운동 재연 행사 등을 개최하여 호국 보훈의 정기가 숨쉬는 공간으로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
127 | 20-2-50 | 연산초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충청남도 논산시 | 연산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2.5m, 세로 2m, 높이 2.8m | 2018-11-30 | 이 명비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연산초등학교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우고자 2018년 건립되었습니다. |
128 | 20-2-049 | 계룡시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충청남도 계룡시 | 6·25참전유공자회 계룡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10m, 세로 6.8m, 높이 2.1m | 2020-06-25 | 충남 계룡시는 2020년 4월 29일 엄사근린 공원에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높이2.1m, 폭 12.8m 규모로 제작된 기념비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국가를 위해 희생과 헌신한 분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되었다. |
129 | 50-1-55 | 지강 양한묵 선생 추모탑(조형물) | 독립운동 | 2021-06-18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 | 조형물 | 3·1운동 | 1919 | 5m*2.3m*3.1m | 2019-12-30 | 양한묵 선생은 제주양씨 학포 양팽손의 12세손 이며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길중이요 호는 지강 으로 7살 때 천자문을 익히고, 8살에 양사재에서 유학을 배웠으며, 18살에 불교,선교, 천도교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1894년에 능주의 세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산적한 문서들을 신속히 정리하여 지역의 주민들에게 크게 봉사하였다. 1898년(3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운동을 추진하다 손병희 선생을 만나동학에 입교하였다. 헤이그열사 이준 등과 함께 공진회를 결성하여 친일 조직인 일진회에 맞섰다. 1909년 이완용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뤘으며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 모여 손병희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경에 채포되어 1919년 5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순국 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130 | 52-1-46 | 오산사 | 독립운동 | 2019-12-12 | 전라북도 장수군 | 권석희 | 사당 | 기타 | 0 | 2003-10-15 | 국권침탈에 분개하여 떨쳐 일어난 호남창의동맹단 이석용 의병장의 투쟁과 구한말 유학자 청련재 권진규(중원) 선생의 희생정신을 선양하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넋을 추모 | |
131 | 13-2-28 | 유엔군 초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오산시 | 오산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2-01-01 | 유엔군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당시 미군제24사단 21연대 1대대의 B.C.중대 및 사단 52포병대대 AVH대로 편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장병이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1950년 7월 5일 오산죽미령에서 북한국과 맞서 6시간 넘는 격전을 치렀으며 이 때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1955년 7월 5일 미군 제24단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1982년 4월 6일 경기도에 의해 재건립되었다. |
132 | 51-2-32 | (정읍시)무공수훈 국가유공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전라북도 정읍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정읍시지회 | 탑 | 6·25전쟁 | 2014-04-01 | 6.25 전쟁 및 월남전, 전후방 각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무공훈장과 보국훈장을 받은 정읍 출신 국가유공자. 무공수훈자와 보국수훈자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손의 가슴에 새겨 귀감으로 삼아 조국의 앞날을 더욱 밝게 비춰줄 기념물로 삼고자 전공비를 세움 | ||
133 | 24-2-27 | 충혼의 빛(6·25 참전 유공 기념 조형물) | 국가수호 | 2008-05-09 | 충청북도 제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제천시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07-08-21 | 제천시 모산동 솔밭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유공 기념 종형물’을 건립하였다. 제천시 6·25참전유공기념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강두구, 고덕규, 김용은, 송명식, 차승수(경찰), 장장식(철도원) 등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8월 21일 그들의 넋을 ‘별’로 표현한 이 조형물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제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34 | 33-1-06 | 애국지사 함양박공의연·의열·의훈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애국지사 함양 박공 문회 | 비석 | 3·1운동 | 1880 | 0 | 2000-01-01 | 상해 임정의 국내 조사원으로 경북 의성에서 조사 활동을 하였으며 재만독립촉성회를 결성하는데 북만 대표로 활동한 박의연 지사, 1912년 만주에서 부민단이 조직되자 중앙검찰장으로 활동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통의부 통화 검찰감, 정의부 부교, 동원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활동하다 순국한 박의열 지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의부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박의훈 지사 등 3명의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35 | 10-1-10 | 성재 이시영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해외운동 | 1869 | 1986-04-17 | 이시영은 1869년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그가 대한제국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던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부 교섭국장에서 사직하였다가 1906년 다시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 돼 관직 생활을 하던 이시영은 이후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 등 법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과 친형 이회영 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할 때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이시영은 형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 기지로서 경학사와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1919년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중요 업무를 담당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노병회, 한국독립당 참여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 |
136 | 33-2-56 | 육군 소령 윤길병 상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북도 경주시 | 건천초등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2006-6-25 | 1951년 1월 육군 소위로 임관,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 812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53년 1월 대위로 진급, 보병 제 12사단 37연대 10중대장으로 보직, 812고지 방어 전투에 참가하여 북한군 1개 대대와 5일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자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먼저 대피시킨 후 자신은 적으로부터 포로가 되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자결하였다. 이러한 중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52연대 2대대 장병들이 분격하여 역습을 감행 812고지 탈환에 성공 | |
137 | 15-2-43 |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1-06-06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노곡리에 애국청년 63명이 독수리유격대를 조직하고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에서 1991년 6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포천지역의 반공애국청년 63명이 1950년 11월 포천군 신읍에서 조직되어 국군 제 2사단 17연대와 합류하여 경북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지역과 충북의 제천, 단양지역에서 인민군 제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하고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일신호국의 정신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 중 16명이 전사하였다. 유격대는 민간인 신분으로 자생조직되었으나 투철한 애국정신과 구국신념으로 참전하였기 그 용맹함이 뛰어났고 전과 또한 컸지만 자신들의 신분이나 전공에 따르는 상훈은 초연하였기에 국가에서도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혀져 오다가 1989년 국방부의 전적을 확인받았다. 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국방부, 재향군인회, 포천군, 육군3070부대의 후원과 생존대원, 전몰대원 유족들의 정성과 포천문화원의 주선으로 관음산 기슭에 전적비를 세웠다. | |
138 | 16-2-69 | 854고지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인제군 | 보병제12사단(육군 제18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3 | 1967-08-15 |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가전리에 854고지 전투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사단이 1967년 8월 1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854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국군이 점령했다가 다시 중공군이 점령했으나 최후엔 국군이 재차 점령한 고지가 바로 854고지다. 당시 이곳을 점령한 부대는 윤춘근 장군이 지휘한 12사단 제51연대로 북한군 5개 대대를 격퇴시켰다. 그러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기상을 이어받으라는 의미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12사단의 이름을 ‘을지부대’라고 명명했다. 을지부대는 1952년 11월 8일 강원도 양양에서 창설됐다. 이곳 854고지에서 을지부대는 1953년 1월 12일부터 휴전 직전 7월 18일까지 무려 6개월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때 854고지 전투에서 12사단 최초로 승리를 거둬 우리나라에 유리한 휴전협정이 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854고지는 GP(Guard Post : DMZ에 있는 경계초소) 내에 있어 전적비를 854고지가 내려다 보이는 1052고지에 세웠다고 한다. 향로봉 건너편 1052고지는 GOP(General Out Post : 남방한계선 경계근무를 하는 곳)지역이다. 그래서 민간인이 방문하려면 쉽지 않다. 민통선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854고지 전투에서 적2개 대대를 전멸시킨 전공을 기념하고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 |
139 | 55-1-11 | 오강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신애옥(유족) | 사당 | 의병운동 | 1833 | 서당 등 4동 | 1908-01-01 | 오강사는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곡성 출신 제자 조우식,·조영선 등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1908년 건립한 사당으로 1916년 일제의 압력에 의해 폐쇄된 것을 1946년 조동진 등에 의해 복원됐다. 최익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에게 ‘청토오적소’라는 제하의 상소문을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06년 전국을 순회하며 각지의 유생 및 의병을 집결시켜 창의구국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됐다. 그해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어 12월30일 순국했다. 1921년에 일본경찰에 의해 면암의 영정이 압수되고 사우가 훼철당하게 되자 곡성 유림들이 총독과 곡성경찰서장에게 항의문을 보내어 1922년에 다시 사우의 복설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 다시 1937년에 또 훼철당함에 조우식이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의 곁의 노거수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46년에 이르러 중건되었으며 1954년에 조우식을 추배하였고 1956년에는 조영선을 추배하였으며, 1969년에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석연 정대현을 추배하였다. 사우내에는 면암과 성암의 영정 및 4위의 위패가 있다. |
140 | 14-1-05 | 3·1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30 | 경기도 광명시 | 온신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95-11-28 | 이곳은 일제의 강권적인 식민지 통치에 항거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시기에 광명지역의 첫봉화를 올려 민족혼을 빛낸 곳이다. 이고장의 3·1운동은 3월 27일 당시 시흥군 서면 소화리 거주 이정석이 독립운동을 선도하여 이튿날 일본 경찰에게 강제 연행되어 노온사리 경찰주재소에 구금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은 아들의 구금사실을 기독교인 최호천에게 알렸다. 이에 당시 배재고보생 윤의병 농민 류지호, 최정성, 김인한, 최주환, 김거봉 등은 모임을 가진 뒤 구금자를 구출하고 민족독립의 염원을 밝히기 위하여 2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들은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노온사리 경찰주재소를 에워싸고 이정석의 구출을 꾀했으나 이들은 증파된 일본 경찰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치안유지법 위반 또는 중한 구금자 탈취 미수죄를 적용 최고 4년에서 1년6개월의 징역형과 함께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광복된 조국에서는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및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141 | 41-1-04 | 병영 3·1운동 기념 조형물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초등학교 | 조형물 | 3·1운동 | 1919 | 0 | 1997-08-03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울산 병영리 일대에서 이현우·이문조·박영하·이종근·김장수 등의 사전 준비로 수백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5일에도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워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하자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발포하여 엄준(嚴俊, 1884~1919), 문성초(文星超, 1887~1919), 주사문(周士文, 1890~1919), 김응룡(金應龍, 1901~1919)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중경상자를 내고 40여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병영초등학교 총동창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7년 8월 3일 이 조형물을 세웠다. |
142 | 43-2-46 | 남해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5-11-08 | 경상남도 남해군 | 무공수훈자회 남해군지회 | 비석 | 기타 | 0 | 2005-03-28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경남지부남해군지회는 2005년 3월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1192-13번지에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여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하여 헌신한 애국애족정신과 베트남전에 참전,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공헌한 남해군 출신 무공수훈자 89명의 위훈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6·25전쟁의 참상과 국난극복을 위하여 모두가 하나 되었던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하였다. 전공비에는 무공수훈자의 이름과 훈격이 새겨져 있다. | |
143 | 18-2-14 | 안성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안성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안성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3-15 | 안성 마정리 안성마춤 가족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안성시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안성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44 | 25-1-15 | 의병장 청주한공봉수 항일 의거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진천군 | 문백면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높이 2m | 1977-06-01 |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 군인 등을 모아 충청도, 강원, 경상 일대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 의병장이다. 한봉수 의병장은 청주, 청원, 진천, 괴산 등지에서 30여 차레에 걸쳐 일제와 교전을 하여 많은 일본군을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특히 의병장은 게릴라전에 능숙하여 일제의 우편행랑 속에 담긴 현금을 빼앗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도 나누어주어 민중의병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정부에서는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당초 이곳에는 조선총독부가 세운 일본군 순직비가 있었으나, 1977년 문백면민들이 그 비를 끌어내고 성금을 모아 의병장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
145 | 16-1-25 |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강원도 원주시 | 한라대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1990-04-04 | 원주 흥업면의 3·1독립운동은 고종 인산 때 상경하였던 사람들이 서울의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전파시키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9일 낮과 밤 2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낮에는 사제리·대안리, 매지리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펼쳤고, 밤에는 흥업리 주민들이 마을 뒷산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일제 관헌이 검거에 나서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원래 이 기념비는 기미년 흥업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흥업면민 일동이 1990년 4월 4일에 흥업초등학교에 건립하였다. 2005년 10월 5일 한라대학교에서는 개교 10주년을 기점으로 더욱 흥업면민의 선구적 진취정신을 기념하고, 한라대학교의 정체성과 교육의 장에 독립정신의 혼을 계승해 나가고자 건립위원회와 흥업초등학교의 동의를 받아 기미독립만세기념비를 흥업면 산66번지에 위치한 한라대학교 잔디광장으로 이전하였다. | |
146 | 52-2-61 | 베트남 참전 유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진안군 | 대한해외참전전우회진안군지부(문종운)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2003-03-21 | 진안군 군하리에 이 고장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베트남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유공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병기, 박진근, 김병성, 임백호 등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3월 21일 기념비를 세웠다. 진안군 젊은이들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진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47 | 10-1-33 | 이충순 자결터 | 독립운동 | 2015-05-14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 장소 | 3·1운동 | 1907 | 0 | 2000-11-01 |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다. 1902년 7월에 육군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었다. 1905년에 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비밀각서에 의하여 한국군마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8월 1일 시위대(侍衛隊)가 전격적으로 해산 당하자 이를 거부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미리 파견된 일군과 경성에서 접전하던 중 크게 부상을 당하였다. 적에게 사로잡히게 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에서는 이충순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48 | 31-1-32 | 의사 내산 이하현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이병철(손) | 비석 | 의병운동 | 1874 | 1964-11-28 | 한말 불영사(울진)에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진보, 울진, 영해 등지에서 일경과 전투를 벌였으며 신돌석의병장과 연합하여 전공을 세우는 등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이하현은 이현규선생의 다른 이름임) | |
149 | 31-1-35 | 산남의사 남공 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박기석 | 비석 | 의병운동 | 1880 | 0 | 1977-04-12 | 남복수는 경상북도 청송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늑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 정환직에게 항일의병운동의 재개를 종용하였다. 정환직은 장남 정용기에게 고향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조직할 것을 명하고 중앙에서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이한구·손영각 등과 의논하여 영남과 관동 일대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이른바 산남의진의 창단을 보게 되었다. 이에 남복수는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여 조달하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입암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산남의진은 청송지역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부대로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청송을 비롯하여 영천, 영일 일대에서 활동했던 부대이다. |
150 | 42-2-48 | 마산 참전기념탑 및 전시관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창원시 | 탑 | 기타 | 2008 | 0 | 2008-06-15 | 베트남참전기념사업회는 2008년 6월 마산시 양덕동 412-28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의 참뜻을 알리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젊음을 바쳐 희생한 6·25 및 베트남 참전유공자의 위상을 드높이고 그들의 원대한 기상과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마산 참전 기념탑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마산참전기념탑 및 전시관은 8각형 구조로 높이는 16.85m이며, 건립취지문과 참전용사 비문, 군가노래비, 참전유공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탑 주변에는 당시 쓰였던 M-47 전차와 155㎜ 평사포가 전시돼 있다. 또한 전시관 안에는 월남참전기장증, 전공 표창장과 수통, 대검 등 개인장비, M16소총, M60기관총, 로켓발사기 등의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무기와 사진 앨범 등이 있다. |
151 | 15-2-103 | 故 해군준위 이창기 흉상 추모비 | 국가수호 | 2015-10-14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양평군지회 | 동상 | 기타 | 2010 | 0 | 2015-04-17 | 故이창기 준위는 1970년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서 태어나 1990년 10월 해군부사관126기 전탐하사로 임관하여 2009년 2월 천안함에 부임후,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으로 전사하였다. 천안함에서 장렬히 산화한 뒤 화랑무공훈장에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故이창기 준위의 숭고한 뜻과 국가수호의 공적을 기리고자 이 흉상을 건립하였다. |
152 | 33-1-50 | 이규필 애국지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17-11-23 | 경상북도 영천시 | 이상수(손)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0 | 1977-12-01 | 이규필 애국지사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용기 의병장은 포수와 농민 등의 민병을 규합하여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군사 소모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각 지역을 연락하며 의진편성에 힘썼고 창의 당시에는 연습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적의 모략에 속아 정용기 의병장이 피체됨으로써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출옥한 정용기 의병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07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사들을 모아 북동산(北東山)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였다. 이규필은 이때에도 의진에 참여하여 우영장(右營將)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해산군인을 포섭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군령을 정하여 장병들을 단속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였 다. 그해 8월부터는 청하읍을 습격하였으며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이규필은 산남의진의 우영장과 우포장(右砲將) 등을 역임하며 이와 같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이후 이규필은 새로이 산남의진의 의병장이 된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대일항전을 계속하다가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화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53 | 30-2-49 | (청도군)6.25참전학도병 충훈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청도군 | 모계중학교장 | 비석 | 6·25전쟁 | 0 | 2013-11-02 | 1950년 6월25일 한국정쟁이 발발하고, 국가의 존폐여부가 달린 낙동강-포항 방어선 사수 전투가 한창이던 8월 중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모계중학교 학도병 70여명이 참전하였다. | |
154 | 33-2-44 | 호국영웅 이상득 육군하사 공적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동해초등학교 | 비석 | 월남전쟁 | 1967 | 2007-12-10 | 이상득 육군하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수류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동료들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불굴의 백마용사이다. 이상득 하사는 1944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1965년 6월 육군에 입대했으며 1966년 5월 파병을 자원하여 제9사단(백마부대) 28연대 소속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66년 당시 한국군 9사단은 베트남의 중부 요충지인 캄란에서 루이호아에 이르는 1번 국도변에 부대별로 전개하여 지역내 적을 소탕하며 전술책임지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7년 3월부터 5월까지 북쪽의 수도사단(맹호부대)와 남쪽의 제9사단이 각각 기동해 적을 소탕하고 서로의 통로를 연결하여 전술책임지역을 확장하는 군단급 규모의 '오작교 1.2호 작전'이 펼쳐진다. 이상득 당시 병장은 제9사단 28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 부분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하여 다랑강변의 독립가옥을 수색하던 중 지하에 파놓은 적의 토굴을 발견하고 선두에서 조심스럽게 탐색하며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그 순간 토굴안에 있던 적의 수류탄이 날아왔고 되받아 던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이상득 병장은 "수류탄이다!" 라고 소리치고 재빨리 자신의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쳐 동료 세 명을 구하고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2006년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어 전쟁기념관에서 현양행사를 거행하였다. | |
155 | 51-2-29 | 6·25전쟁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12-03 | 전라북도 군산시 | 6.25참전유공자회군산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12-28 | 6·25참전유공자회 군산시지회는 2006년 12월 군산시 나운동 은파호수공원 수변광장에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조국에 몸 바친 6·25참전 유공자의 숭고한 뜻을 기려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 뒤쪽 작은 비석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나라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 |
156 | 25-2-37 | 무공수훈자 공적비(보은군)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보은군 | 무공수훈자 보은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07-01 | 무공수훈자 보은군지회는 2003년 7월 보은군 보은읍 교사리 16-2 소공원 내에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여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전공을 세운 보은군 출신 무공수훈자 권상호 중령 외 75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고자 하였다. |
157 | 25-2-31 | 6·25 참전 기념비(남일면)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남일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6-21 | 남일면 재향군인회는 2002년 6월 남일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26명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에게 6·25 참전용사들의 애국심을 본받게 하며, 국가안보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청원군(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효촌리 33(남일면사무소 내)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58 | 24-2-16 | 단양군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단양군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단양군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1-12-01 | 단양군 도전리 소금정 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단양군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단양군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2월 1일 공적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단양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159 | 55-1-33 | 애국지사 백당 신태윤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5-10-28 | 곡성군 곡성읍 | (사)국조단군 곡성 숭모회 | 동상 | 3·1운동 | 1884 | 청동 동상 5.2m | 2005-06-18 | 신태윤은 1884년 6월 15일 담양군 남면 외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904년 창흥의숙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광주농업학교와 관립한성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곡성보통학교의 훈도로 취임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는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단군숭모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914년 삼인동에 단군전을 건립하여 밤중에 춘추로 개천절과 승천일인 어천절에 제향을 모시면서 곡성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의 3·1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19년 곡성에서 장날인 3월24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다. 그 일로 신태윤은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었다.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1923년 서울로 이사하여 장훈학교에 취직하고 역사책 《정사》를 발간하였다. 1925년 경북 성주군 성산면 고산동으로 내려가 초산학교를 세워 육영에 힘썼다. 이후 전남 장성, 순창 등으로 옮겨다니며 단군숭모운동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펼쳤다. |
160 | 51-2-21 | 고창 6.25 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05-10-28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6m X 3.6m X 0.9m | 2005-09-07 | 6·25참전유공자회 고창군지회는 2005년 9월 고창군 고창읍 덕산리 산 39-1에 국가와 민족, 자유 수호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고창 출신 6·25참전유공자 300여 명의 공훈과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61 | 25-2-51 | 6·25전쟁 참전 유공비(문의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문의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11-17 | 청원군(현 청주시) 미천리 문의면 복지회관 앞에 문의면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전쟁 참전 유공비’를 건립하였다. 문의면 재향군인회는 이곳 출신 신철균, 김남석, 권병열, 서정만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11월 17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문의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등에서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문의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62 | 25-1-20 | 한봉수의병장 사적지 | 독립운동 | 2010-02-1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충청북도 청주시 | 장소 | 의병운동 | 0 | 0 | 2008-05-22 | 충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한봉수 의병장은 진천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진천·횡성·장호원 등에 출몰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한봉수 의병장 유허지에는 의병장을 추모하는 사당이 있다. |
163 | 50-2-40 | 완도군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남도 완도군 | 6.25참전유공자회,무공수훈자회,월남전참전자회 완도군지회 | 탑 | 기타 | 1950 | 2008-06-24 | 완도군은 2008년 6월 24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가용리 50(체육공원 내)에 6·25 및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전몰장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생존한 6·25 및 베트남 참전 용사의 호국충정 및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 좌·우측에 있는 명각비에 완도지역 6·25전쟁 참전유공자 2, 408명,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408명, 무공수훈자 109명 등 총 2, 92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
164 | 51-1-58 | 만경3.1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북도 김제시 | 만경3.1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재승) | 탑 | 3·1운동 | 0 | 2014-11-05 | 만경3.1독립운동기념탑에 대한 건립배경 및 조형물 의미를 지역민들에게 전달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공헌하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기억한다. | |
165 | 10-2-21 | 현봉학선생 동상 | 국가수호 | 2017-04-19 | 서울특별시 중구 | 연세대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2016-12-19 | 현봉학(玄鳳學, 1922~2007)박사는 6.25전쟁 시 장진호전투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킨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으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 민간인 구출 작전의 영웅이다. 현 박사는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후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 6.25전쟁 때 통역 장교로 참전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현 박사와 포니대령의 조언으로 군수물자 대신 피난민 10만여명을 태워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현 박사의 이 같은 인간 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연세대학교, 연세의료원, 현봉학 박사를 추모하는 모임)과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이 동상을 건립했다. | |
166 | 16-2-34 | 홍천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높이2.4 m 기단1.4m | 1957-03-15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 내에 홍천지구 전적 기념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1군단에서 1957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12월 13일부터 1951년 5월 20일까지 전개된 홍천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3, 5, 8사단과 121해병 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장병들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부 전선을 확보한 것을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에 굶주린 이리 떼와 같이 침공하여 오던 북쪽 오랑캐에 대하여 이 반격이 없었던들 이날과 이곳에 있을 것인가. 피땀에 젖은 장병들의 혈투사는 불후의 무공으로서 길이 남을 것이다. 단기 4283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5월 20일까지 전개되었던 홍천지구 전투에서 영용무쌍한 국군 제3, 5, 8사단과 영웅적인 미해병 제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부대의 장병들은 북한군 제6, 11, 12, 45사단과 중공군 제63군의 큰 적과 대적하여 시산혈하의 일대 혈전을 전개하게 됨에 우리 용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 장한 기백과 필승의 신념은 끝끝내 적을 섬멸하고 중부전선과 요지인 이 지구를 최후까지 확보함으로써 요원들의 불길 같은 우리의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우리의 영광과 감격이 아니랴. 이 전투로 말미암아 애석하게도 쓰러진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의 찬란한 무공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이에 이 비를 세우노라. 단기 4290년 3월 15일 제1군단 세움 |
167 | 16-2-36 | 충혼탑(횡성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탑 | 기타 | 1968 | 높이6 m 기단0.6m | 1968-06-06 | 이 충혼탑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조국의 평화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장렬하게 산화하신 횡성출신 군·경·민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68년 6월 6일 건립되었으나 규모가 작고 훼손부분이 많아 보훈시설로서 상징성이 떨어지므로 기존의 탑을 철거하고 새로 건립하였다. 이 탑의 형태는 사람 ‘인’자의 모습으로 호국의 념을 사람 ‘인’자와 횃불로 상징화하여 호국정신이 후대에 게승·발전됨을 표현하였고, 높이 6m, 폭 1,95m이며, 재료는 브론즈와 철재를 사용하였다. 위패실은 가로 12.35, 세로 7.30m, 높이 2.85m로 재료는 화강석과 고흥석, 유리를 사용하였다. 육·해·공군 및 경찰을 상징하는 4개의 동상이 있고 탑을 오르는 9개의 계단은 9개 읍면을 상징하며, 탑 앞쪽에는 한국전쟁 참전국의 국기를 게양하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시고 다시 한 번 이분들의 숭고한 애국 정신을 되새겨 진정한 나라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
168 | 14-2-06 | 해군 14용사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사무소 | 비석 | 기타 | 1950 | 소 | 1960-03-25 | 1950년 3월 25일 주둔 부대에서 해군함정 302호에 대원 14인이 승선하여 황해도 장연군 월래도(달래섬) 근방에 침투 및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에게 발각되어 무참하게 집단 사살당한 해군 첩보대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파괴되어 없어진 것을 재건하여 현재 주민과 군인들은 해마다 현충일과 명절에 이곳을 찾아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파괴 당시의 총탄자국이 선명히 나 있으며 비 하단부가 없어짐으로써 상단 7인의 명단만 남아있다. |
169 | 20-2-21 | 대전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대전광역시 중구 | 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9-03-31 | 대전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 야외음악당에 대전지구 전투 승전 기념 및 미 제24사단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대전시에서 1959년 8월 2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략으로 세계자유국가들이 총궐기하여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 제24단이 최선봉으로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대결하였으나 실패하자 북한군은 대전을 포위공격하게 되었고 미 제24사단은 대전에서 결사적인 방어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자유평화를 수호한 이들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전승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유는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생활의 고귀한 상징용, 평화는 자유를 살릴 수 있는 인류공동의 신성한 우상이다. 이 자유과 평화를 획득, 수호하기 위하여 여기 국제연합의 거룩한 역사 한 페이지가 이루어졌다. 단기 4283년 6월 25일 새벽 불법침략을 개시한 공산군은 일거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하였다. 세계 자유국가들은 총궐기하여 이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 제24사단을 국련군의 최선봉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적과 처음으로 대결하였으나 과부적중으로 인하여 7월 17일 적은 대전을 포위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20일 동안 결사적인 방어전을 감행하던 중 진두지휘에 나선 딘 소장이 불행히 실종되었다. 이 처절무비한 악전고투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미 제24사단의 영웅적인 결투사를 영원히 빛내고 기리고자 이 작은 비를 세우노라. |
170 | 52-1-03 | 의병대장 문태서 순국비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 설천면장 | 비석 | 의병운동 | 1880 | 0 | 1995-08-15 |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171 | 20-2-25 | 우리고장 국가유공자 기념비(남이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이면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9-28 | 남이면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2년 9월 28일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297-6(남이면사무소 내) 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172 | 50-2-32 | 의혼비(나주시) | 국가수호 | 2003-12-09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7-01 | 나주 남대동 시민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참전한 대한청년단 나주 단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의혼비’를 건립하였다. 애국청년단 나주청년단은 양채호, 김낙진, 김경두, 손성배 등 이 고장 출신 단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51년 7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대한청년단 나주단은 향토방위에 참여하여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앞장섰으며 국민방위군으로 재편된 뒤에도 공산세력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 | |
173 | 33-2-18 | 안강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한국자유총연맹 강동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10-20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인동리에 안강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1958년 10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안강~기계 전투는 1950년 북한의 8, 9월 기계-안강-경주-울산 축선을 따라 부산으로 진출하려고 공세해 올 때 국군 수도사단이 주축이 된 제1군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을 경주 북방에서 완전 섬멸시킴으로서 낙동강 방어전의 최대 위기를 극복한 공방전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그들의 최종 목표인 부산에 이르는 공격 축선 최단경로인 경주를 통과하기위해 1950년 8월10일. 북한군 제12사단 및 제766부대가 기계를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자, 육군본부에서는 8월 31일까지 기계 남쪽에 방어진을 구축토록 하여 8월14일에는 제1연대 및 26연대의 증원을 받아 적의 진출을 저지, 고착시키는 한편, 의성 동쪽에 있던 수도사단 예하 제18연대와 기갑연대를 도평~입암 통로를 따라 적의 후방으로 공격케 하는 국군 사상 최초의 군단 역포위공격을 실시하여 기계에 점령한 적군을 포위 섬멸, 8월 18일 13시. 기계를 탈환하였으며 적은 1, 245구의 시체를 남기고 비학산으로 패주하였으니 이는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당시 국군 수도 사단장은 경주 방어의 승패가 안강 무릉산과 곤제봉의 전투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기갑연대와 3연대, 17연대 등 3개 연대를 곤제봉과 무릉산 일대에 집중 배치하였고, 이 두 고지 중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곳은 곤제봉이었고, 이곳에 배치된 제17연대는 9월 6일, 북한군의 공격으로 최초의 방어진지를 탈취 당한 후 8일 동안 피아 15회에 걸쳐 역습을 감행하고 격전 끝에 9월 13일, 곤제봉을 확보하게 되어 1개월 4일만에 안강-기계 전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
174 | 55-2-07 | 거룩한 얼의 탑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동강면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높이 4m, 탑 높이 1m | 1979-05-15 | 동강면 현충탑 건립추진위원회는 1979년 5월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산 53-1번지 (노산공원 내)에 6·25전쟁 당시 조국을 수호하다 전사한, 고흥군 동강면 출신 채동현(육군 특무상사) 외 62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후세에 위훈을 전하기 위해 ‘거룩한 얼의 탑’을 건립하였다. |
175 | 30-1-34 | 장로 최영돈선생 현창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3·1운동 | 1897 | 1992-11-01 |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영돈(崔永敦)[1897~1985]은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1897년 1월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4일 김태연(金泰淵)·허철(許喆)·김종수(金琮洙) 등과 김천군 개령면 동부리의 은창서(殷昌瑞)의 집에서 만나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4시 기독교인들과 함께 마을 근처의 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4월 6일에는 머슴 김임천(金任天) 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역시 뒷산에 올라가 만세 시위를 전개. 1921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공채 모집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널리 알렸다. 또한 송명옥(宋明玉), 장이석(張利錫), 김종수 등의 애국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무렵 미국의 의원단 일행이 한국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온다는 것과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수(李賢壽), 김태연, 이학로(李學魯) 등과 더불어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부쳤다.그 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83년과 1990년에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 |
176 | 55-1-23 | 왕재일 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구례군 | 구례군수 | 동상 | 학생운동 | 1903 | 동상 | 2001-10-10 | 왕재일은 1904년 1월 19일 광의면 지천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1월 말경 조선청년연맹 전남지부와 신간회 전남지부에 가입했으며 신간회 및 조선청년총연맹 강진군지부의 조직책을 맡아 항일운동에 나섰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전남공립사범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에 독서회를 비밀조직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하자 검거자의 탈환과 조선인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등 격문을 살포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동자로 왜경에 체포됐다. 1932년 2월 장흥군을 근거지로 전남농민협의회를 비밀리에 조직, 각종 야학회와 소작인의 투쟁 등을 연결시켜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5년 12월 전남농민협의회 사건이 발각돼 대구복심법원에서 전남농민협의회 사건의 배후조정 인물로 지목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표창장을 추서 받았으며 지난 91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왕재일선생 동상은 군비 5천만원을 들여 지난달 착공, 높이 4.0m, 폭 1.5m 규모로 건립됐다. |
177 | 24-2-17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제천)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제천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제천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0 | 2000-01-01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충청북도지부 제천시지회는 2007년 12월 제천시 모산동 65-1 (솔밭공원 내)에 나라와 겨레를 지키고 나아가 온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무공수훈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국가유공자로서 긍지와 명예를 선양하여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대한민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공적비 후면에는 무공훈장 중 충무훈장 19명, 화랑훈장 165명, 인헌훈장 23명과 보국훈장 13명 등 총 220명의 제천지역 수훈자 이름을 새겼다. | |
178 | 16-2-110 | 춘천여고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여자고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4.0 m 폭 1.0m 높이 3.3m | 2016-7-7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하고 소중한 젊음을 바치신 춘천여자고등학교 출신 6.25참전국가유공자(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억하고 후배 밷학생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이어가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
179 | 10-1-35 | 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서울특별시 은평구 | 은평구 | 비석 | 해외운동 | 2019-8-14 | 독립운동가 윤기섭은 서간도 독립군 양성 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7대 의장을 역임하였다. 독립운동 정당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모으고자 했으며 임시정부 삼일기념준비위원회 주석, 군무부 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금은 은평구 지역구인 서대문구(을)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거주지였던 불광동 385번지에서 납북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180 | 52-2-073 | 호국영웅 박노규 준장 흉상 | 국가수호 | 2019-12-12 | 전라북도 임실군 | 전라북도 임실군 | 동상 | 6·25전쟁 | 1950 | - | 2016-6-10 | 1950년 7월 이화령 전투에서 대대를 지휘하여 적 800여명을 격멸하고, 불가피하게 후퇴할 때에도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업고 부대를 지휘하였으며, 죽은 적군 1,000여 구를 묻어주는 등 전쟁 중에도 특출한 인간애를 발휘하였다. 1951년 3월 일월산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최전선에 서서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총탄에 산화하였다. 정부는 박노규 준장의 살신보국과 임전무퇴의 정신을 기리고자 1951년 4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특히 국가보훈부에서는 2012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현재 고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하고 계신다. |
181 | 53-1-24 | 애국지사 정진감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전라남도 함평군 | 애국지사 정진감 현창사업추진위원회 | 비석 | 해외운동 | 0 | 2019-3-2 | 애국지사 정진감은 1940.9월 유학목적으로 일본을 건너가 1942.5월 중순경 한국독립청년당을 결성하고 중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43.3.2.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 |
182 | 40-1-33 | 기장항일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8-12-4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청 | 탑 | 기타 | 2011-4-30 | 항일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기장군민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희생정신을 기리며 선열들의 자랑스런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건립 | ||
183 | 16-2-105 | 춘천시월남전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8-12-4 | 강원도 춘천시 |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춘천시지회 | 탑 | 월남전쟁 | 2017-12-8 | 월남전 참전기념탑을 건립하며(전면)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부대 해외 파병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이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긍지를 세계 만방에 떨친 위업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춘천은 화천 오음리와 더불어 바로 이 위업의 중심이었음을 다시 밝혀둔다. 당시 우리 국군 주요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춘천으로 집결, 춘천북방 오음리에서 한달간의 실전과 같은 전투훈련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월남전 적응훈련을 마치고 강군으로 거듭난 맹호와 백마 청룡등 참전용사들은 험준한 배후령 고개를 다시 넘어 춘천으로 향했다. 구비치는 푸른 소양강, 그리고 봉의산이 손을 높이 흔들며 우리를 맞이했다. 이어 우리는 춘천시민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열차에 몸을 싣고 부산 제3부두를 향해 밤새워 달렸다. 이렇게 월남전 첫 참전군인이 된 우리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8개월간 열대의 월남땅에서 적과 용감히 싸웠고 평정사업도 펼쳤다. 여기에 투입된 한국군은 연인원 32만여명이며 5천99명의 전사자와 1만여명의 전상자도 발생했고, 많은 전우들이 고엽제 피해를 입어 지금도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1950년 6.25 한국전당시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한국을 지원한 미국등 우방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제 우리가 이 역사적 참전도시 춘천에 우리와 각계의 지원으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월남전에서 희생된 전우들의 명복과 그 후손들의 뜻을 새겨 결코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발전에도 기여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월남전 참전 의의와 성과(후면) 1) 도약의 계기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8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파병은 한 국 정부가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국방 및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제3공화국 정부는 국군의 파병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면서, 미국의 원조를 얻어 굳건한 안보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의 지원과 전쟁특수를 활용한 외화수입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한ㆍ미 안보동맹과 그 밖의 한ㆍ미관계가 상호협상의 관계로 변화되는 계기가 됐다. 다만 미국ㆍ한국등 우방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 정부가 그들의 철수 2년 후인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에 점령당함으로써 파병의 명분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사태는 한국 정부가 얻고자 했던 것을 대부분 얻은 후였기 때문에 파병의 의미와 자체가 변질되거나 퇴색된 것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경제ㆍ사회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2)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 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경제ㆍ사회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병과 관련된 외화 수입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전쟁특수, 그 밖의 간접효과 등은 포함하면 줄여 잡아도 50억 달러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965년, 장기간의 한ㆍ일 협상으로 얻어낸 대일청구권자금이 차관을 포함해 총 8억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1963년 우리나라의 수출총액이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당시 50억 달러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효과는 외화의 유입으로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정부 및 기업의 베트남 진출경험을 활용해 그 후 중동진출 기틀을 직ㆍ간접적으로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과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여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하겠다. | ||
184 | 12-1-04 | 삼일탑(서울고등학교) | 독립운동 | 2002-11-01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장 | 탑 | 3·1운동 | 1919 | 0 | 1960-03-01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서울고등학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학생들의 성금으로 1960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185 | 18-1-05 | 순국선열 유택수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비석 | 의열투쟁 | 1902 | 0 | 1985-02-27 | 유택수(柳澤秀, 1902~1929)는 1926년 6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參議府)에서 국내 특파원으로 파송된 이수흥(李壽興, 1905~1929)을 도와 서울 경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과 무장항일 활동을 하다가 1926년 11월 이수흥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28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9년 2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순국선열 유택수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는 1985년 2월 27일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를 세웠다. |
186 | 13-1-03 | 3·1독립운동 기념비(우정)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우정읍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9-08-15 | 1919년 3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장안면 수촌리 등지에서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9년 8월 15일에 세운 비로, 기념비가 건립된 장소는 당시 시위대에 의하여 파괴된 화수리 경찰관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 군민들은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경찰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잔혹하게 살상하였다. |
187 | 14-1-03 |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1-08-09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94-11-26 | 이 기념비는 강화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11월 26일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강화의 3·1운동은 3월 13일 강화읍 장날을 기하여 전개되었는데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주동자 5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8일 강화읍 장날에 길상면 온수리에 거주하는 유봉진(1990, 애족장)의 주도하에 2만 여명의 군중이 장터에 몰래 집결하였다가 12시를 알리는 강화 동종의 개시 신호로 일시에 뛰어나와 민족주권을 되찾고자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후 5월 1일까지 2달 동안 각 면 단위에서 횃불 시위 등으로 진행된 강화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60여 명, 체포 및 재판 회부가 50여 명에 이르며 3·1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이 18명에 이른다. |
188 | 14-2-01 | 무명 6용사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연평면 | 탑 | 6·25전쟁 | 1950 | . | 1983-09-08 | 옹진군 연평리에 6·25전쟁 기간에 연평도 방어를 위해 산화한 6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무명6용사 탑 건립추진위원회는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83년 9월 8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옹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연평도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9 | 15-2-57 | 미 제2사단 6·25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파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01-01 | 한국전쟁기간동안 미제2보병사단 장병들이 자유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90 | 16-1-04 | 광복투사 이광훈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홍천군 | 두촌초등학교 | 비석 | 학생운동 | 1924 | 1987-11-14 | 이광훈(1924~1943)은 1938년 가을에 춘천고등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 회원이 검거된 후에는 독서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1년 3월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원후정(元厚貞)·김영근(金榮根)·박영한(朴永漢)·권혁민(權赫民)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춘천고등학교 교정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한 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된 뒤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3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89년 11월 16일 두촌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토록 하기 위하여 그의 모교인 두촌초등학교 교정에 ‘광복투사 이광훈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
191 | 17-1-06 | 3·1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너비 3m, 높이 3m | 1990-04-15 | 삼척초등학교 3·1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이 운동에 참여한 영령들의 조국독립 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1990년 4월 삼척 지역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의 주도하에 건립되었다. 1919년 4월 14일 삼척보통학교 학생 김달하가 재경 유학생 김순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고, 교사 김기덕의 지도 아래 심부윤·오원모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5일 오후 1시경 전교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인 교장 야마다는 일왕의 칙어를 옷에 감추고 뒷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일본 헌병들이 학교에 들어와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일로 학생 94명이 훈계처분을 받았다. |
192 | 15-2-71 | 학도의용군 파주지대 6·25동란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2-10-24 |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한 한국전쟁은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총칼에 짓밟히고 우리군은 남으로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마지막 목숨 줄인 낙동강 교두보를 설치하면서 100만 학도들은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파주시 학생들은 1950년 12월 16일 보병 제1시단 15연대 1대대에 편입하여 적과 맞서 싸웠으며 그분들의 조국애와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참전비를 건립하였습니다. |
193 | 15-2-66 | 월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월남참전유공자회 파주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8-04-18 | 파주시 장곡리 체육공원 내에 1998년 파주시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파주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유공자회 파주시 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4월 18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파주시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
194 | 23-1-36 | 창의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군(대호지면) | 사당 | 3·1운동 | 1919 | 1991-05-01 | 창의사는 대호지 4·4만세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가 제창이 있는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 선창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 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투석전으로 대응하며 천의 왜경주재소가 파괴되고 많은 일경들이 생포 구타되었으나, 4월 5일 출동한 일본 군경과 충돌, 사상자 5명 발생, 구속 200여명을 넘었다. 이 운동으로 현장 학살된 분이 송봉운 등 3명, 옥중에서 고문치사 당한분이 이달준, 김도일 등 3명, 수형인이 5년에서 8월까지 37명, 태형 90도 이상이 90여명에 이르는 치열한 만세운동으로 인근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
195 | 23-1-19 | 충의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예산군 | 충의사관리사무소 | 기념관 | 의열투쟁 | 1908 | 1985-06-01 | 민족의 독립이라는 꿈 하나로 목숨까지 바쳤던 매헌 윤봉길의사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이해 건립되었으며, 윤봉길의사의 유품인 보물 제568-2호, 3호 등 윤의사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근에는 윤의사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 윤의사가 태어나 4세 때깢까지 살았던 생가(광현당), 중국으로 망명 전인 23세까지 살던 성장가(저한당), 농촌부흥운동과 문맹퇴지를 위해 힘썼던 부흥원 등이 자리 잡고 있음 | |
196 | 23-1-24 | 면암최익현선생동상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모덕사관리사무소 | 동상 | 의병운동 | 1833 | 1973-01-01 | 최익현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14세 때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고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당대의 권력가인 대원군의 주요 정책인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의 혁파, 당백전의 폐지, 사대문 문세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해 대원군 일파의 비난을 받았으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 궐리사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900명에 이르렀으나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 진위대의 포위 공격을 받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쓰시마 섬[대마도]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에 감금되었는데 그곳에서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동상은 지난 1973년 12월 선생의 충의를 기리고 애국사상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민의 십시일반 모금해 현 위치에 건립됐으나 이 동상은 지난달 선생의 위패를 모신 목면 송암리 ‘모덕사’로 옮기고, 기존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동상을 제작해 다시 세웠다. 새 동상은 높이 7.2m의 청동상으로 동상의 좌대는 칠갑산을 상징하는 7각형으로 만들어졌다. | |
197 | 23-1-39 | 홍동3·1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7-24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홍동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72-03-03 | 1919년 3월 5일 밤, 신기리 거주 이제경, 조우식 등이 중심이 되어 마을주민들이 꽃동산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 일본경찰의 총탄에 이희도, 한명교 등이 사망하고 이석만, 안중호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후 신기리 주민들은 일경의 탄압 대상이 되어 13명이 투옥되기도 했다. 홍동노인회는 1972년 3월 3일 홍성군 홍동면 운월리를 건립하여 1919년 3월 당시 홍동3·1운동에 참여한 애국선열의 충정을 기렸다. | |
198 | 25-1-06 | 대한의사 이건석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황간역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52 | 0 | 1963-11-10 | 이건석은 1852년 경상북도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결혼 후 서울로 올라온 이건석은 유생의 신분으로 을미사변과 황제폐위 음모 사건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러일전쟁 이후로는 자강의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아울러 일제의 보호국화 책동에 맞서 13도유약소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항의문을 전달하고 일진회의 선언서를 반박하는 변명서를 올렸다. 고종의 회유에도 상소 운동을 계속하던 이건석은 1904년 11월 17일 새벽 일본군에 의해 상소의 주모자로 다른 네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건석은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상소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1906년 5월 10일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영동군의 황간역 앞에 ‘대한의사 이건석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
199 | 25-1-05 | 쌀안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미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6-03-3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미원면 쌀안장터에서 신경구·이용실 등의 주도로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를 연행하자 이용실·윤인보·이성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청주에서 일본군 지원대까지 출동하여 발포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 때 이병선·장일환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최봉원은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순구(金舜九, 1867~1919), 김재형(金在衡, 1890~1966), 김진환(金振煥, 1879~1934), 서정렬(徐正烈, 1882~1944), 성규원(成奎垣, 1862~1927), 신경구(申敬求, 1887~1948), 신성휴(申聖休, 1891~1955), 신정식(申鼎植, 1869~미상), 신학구(申學求, 1877~1968), 오교선(吳敎善, 1883~1948), 윤인보(尹仁甫, 1878~1951), 이병선(李秉善, 1882~1919), 이성호(李聖浩, 1873~1943), 이수란(李水蘭, 1862~1926), 이용실(李容實, 1878~1964), 장일환(張一煥, 1882~1919), 정무섭(鄭武燮, 1886~1960), 최봉원(崔鳳源, 1879~미상) 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6년 3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
200 | 24-1-04 | 이소응선생 창의 숭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제천시 | 광복회충북북부연합지회 | 비석 | 의병운동 | 1861 | - | 1989-01-01 | 제천에서 창의한 이소응 의병장의 창의 숭모비. 이소응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서 1896년 1월 강원도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개화파의 선봉인 강원도 관찰사를 처단하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가평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소응 의병진은 제천의 유인석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이소응은 제천 백운면 애련리로 이거하고 제천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유인석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교포들에게 충효·의열의 정신을 함양시켜 의병을 일으키고, 1909년 청풍면 장선리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피검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국내에서 투쟁이 어려워지자 1911년 요동지역으로 들어가 순국할 순간까지 항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9년 1월 1일 대한노인회 제천시지회 백운면분회에서는 이소응 의병장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201 | 40-1-13 | 박영준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칠암마을이장 | 비석 | 3·1운동 | 1885 | 0 | 1985-12-05 | 부산 동래 사람으로 기장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 경남 동래군 기장면 장 날에 모인 군중과 동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11일 하오 7시경에는 다시 일광면 이천리에서 주민 5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은 후 동년 6월 28일 대구 복심법원 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감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58세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202 | 16-2-16 | 충혼탑(화천군)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사내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1951 | 1981-06-25 | 이 충혼탑은 6·25한국 전쟁 당시 국군제6사단, 미국군 987자주포 중대 제2로케트 중대, 영국군부대가 중공군 제20군 및 제40군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보병 제27사단과 사내면 주민들의 뜻을 모아 1981년 6월 25일 건립하였다. | |
203 | 40-1-17 | 박재혁의사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부산시설공단 어린이대공원사업소 | 동상 | 의열투쟁 | 1895 | 0 | 1998-05-12 | 박재혁은 1895년 5월 17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반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 오택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1915년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고서를 파는 중국인으로 가장한 박재혁은 부산 경찰서에서 부산경찰서서장 하시모토를 향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을 던졌다.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 고 결심한 뒤 단식을 하여 함구하다 9일이 지난 후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
204 | 41-1-02 | 외솔 최현배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시 남부도서관 | 동상 | 문화운동 | 1894 | 1990-06-01 |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 |
205 | 16-2-46 | 충현비(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2-05-12 | 동부전선에서 공산역도와 싸우다 쓰러진 장병의 명복을 빌며 그 뜻을 만세에 빛내고저 이곳에 비를 세우다. 서기 1962년 5월 12일 제3군단장 육군중장 최창언 |
206 | 40-2-07 | 국군용사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가덕도동행정복지센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2-06-05 | 부산 천성동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25명의 이 고장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국군용사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부산 강서구청은 충혼비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1992년 6월 5일 현충일에 충혼비를 준공하여 이곳 출신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강서 청년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수호신이 되었다. 강서구청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7 | 17-2-07 | 강릉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공군제315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3 | 기단 0.6m, 높이 11m | 1982-04-16 | 강릉시는 1982년 4월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산45-49(제10전투비행전대 기지터)에 6·25 당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제10전투비행단 창설 조종사 108명의 넋을 기리고 후세에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제10전투비행단은 19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대를 모체로 하여 창설되어 적 후방 차단작전 5, 000회와 공지협동작전 2, 851회를 통해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 전투비행단 소속 108명의 조종사는 7, 851회 출격하여 승호리 철교폭파 작전, 평양 대폭격 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3년 비행단으로 격상된 이후 지금의 수원기지로 이전하였다. |
208 | 30-1-17 |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달성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의병운동 | 1854 | 1962-10-03 | 허위는 1854년 경북 구미에서 출생하여 영희정 참봉, 평리원 재판장을 거쳐, 의정부 참판, 비서원승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통분하여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이인영, 신돌석, 이강년, 문태서,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전국연합 의병부대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고,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경기·황해도)으로 선발대 300여명을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공격하려는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후속부대와의 연결 미비와 무기의 열세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선생은 1908년 5월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는 1962년 10월 건립된 비로 대구 달성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다. | |
209 | 42-2-31 | 고 이인호 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교육사령부 | 동상 | 기타 | 1966 | 0 | 1967-01-01 | 경남 진해시 경화동 기초군사학교 영내에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이인호 소령을 기념하기 위해 해군교육사령부에서 1967년 3월 22일 이 동상을 세웠다. 이인호 소령은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로서 1966년 8월 13일 베트남전선 투이호아 지구 해풍작전시 베트콩으로부터 입수한 첩보를 확인코자 1개 소대를 직접 인솔하고 베트콩이 잠거하는 동굴을 탐색하던 중 적이 던진 수류탄 1발을 가슴으로 막아 장렬하게 산화하여 위기에 처한 부하들의 생명을 구했다. 국군의 영웅인 이인호 소령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동상건립위원회를 설치, 해군과 해병장교단 및 각계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만리이역 월남 동굴에서 가슴에 수류탄을 안고 산화하던 날 하늘도 무심치 ᅟᅡᆭ아 비를 내렸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님도 즐거이 바치고 아아 스스로 장렬한 폭사를 하였다. 대륜은 충효라 스스로 속이지 않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 가르쳤거늘 그대 아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했구나. 그대 뿌린 씨가 천배 만배 될지니 나라도 사랑 먹고 자라기 때문이라 흐르는 눈물이 오히려 그대에게 부끄럽구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아들의 통곡하는 사연을 참아 못들을레라. 천장을 향하여 나는 눈만 깜박이고 있다.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흩어져 이슬이 되었거니 타는 불이여 이 가슴마저 태웠다고 그대를 지아비라 아빠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전우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아 용사여 조국의 영웅이여 고이 잠들라. 그대를 제자라 형제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동포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아 용사여 대한의 샛별이여 길이 복되라. |
210 | 30-1-43 | 이봉희지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성주군 | 이덕생 | 비석 | 3·1운동 | 1868 | 1967-03-28 |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 |
211 | 17-2-25 | 충혼탑(양양군)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양양군 | 양양군 | 탑 | 6·25전쟁 | 1950 | 탑 8.85m | 1966-06-06 | 양양군 현산공원 내에 3·1운동과 6·25전쟁 전후 순국 및 전사한 315위(항일투사 22위, 반공투사 106위, 전몰군경 187위)의 양양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양양군은 이곳 출신 순국선열과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6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89년 6월 1일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양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북한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사람들이 3·1운동과 6·25전쟁 전후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양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2 | 20-2-20 | 대전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대전광역시 중구 | 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12-20 | 대전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 위에 대전에서 벌어진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교통부에서 1981년 12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7월 5일 오산전투 이후 경부선을 따라 지연작전을 전개하여 오던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방어선을 전개하면서 3.5인치 로켓포를 최초로 사용하여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당시 윌리엄 F.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 딘 소장은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고, 그후 인민군 총좌인 이학구와 포로교환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낙동강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자 미 제24사단은 지난날 쓰라린 패배를 설욕하려고 최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대전에 진을 치고 있던 북한군을 분쇄하고 9월 28일 대전을 탈환하게 되었다. 대전 지구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영령 등을 추모하고 혈맹의 우의를 길이 전하기 위해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213 | 50-1-06 |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동구 | 전남여자고등학교 | 비석 | 학생운동 | 1929 | 1959-01-01 | 1929년 10월 30일 나주-광주 통학열차에서 발생한 일본인 중학생의 광주여고보생 희롱사건으로 촉발된 한·일 학생간의 난투극 처리에서 일본경찰이 한국인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처벌함으로써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1월 3일 광주고보와 광주농고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광주 시내에서 “민족차별 철폐, 식민지교육 중지”라는 구호와 함께, 용감히 일제를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11월 12일에도 광주 일원 학교에 학생 궐기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배포되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광주여고보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학도기념비건립기성회가 구성되어 전국 학생들의 성금을 모금하여 당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였던 전남여자고등학교에 이 비를 1959년 11월 3일 건립하였다 | |
214 | 50-1-26 | 의사 이산 윤승현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나주시 | 남평초등학교 | 비석 | 학생운동 | 1912 | 1989-08-01 |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 전남노농협의회 결성 | |
215 | 53-1-10 | 영암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4-04-10 | 영암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을 기리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1919년 3월 11일에 영암에서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3월 20일에도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영암 읍내에 거주하는 조극환은 정학순·최민섭·박규상·조병식·최한오 등과 함께 4월 10일 장날을 기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나팔소리를 신호로 구림리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박규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구림보통학교를 경유하여 읍내로 진격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강제 진압을 받았다. 이 날의 만세시위로 학생, 유지 등 3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중 20여 명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박규상은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귀가하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84년 4월 10일 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는 영암 3·1독립운동에 참여한 35인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216 | 53-1-02 | 독립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정명여자중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3m | 1985-12-3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양병진(楊炳震) 등의 사전 준비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강석봉(姜錫奉, 1890~1956), 박복영(朴福永, 1890~1973), 박상열(朴相烈, 1897~1981), 서상봉(徐相鳳, 1870~1927), 서화일(徐化壹, 1881~1936)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목포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12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
217 | 53-1-05 | 기미 3.1의거 열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비석 | 학생운동 | 1919 | 1.4m | 1983-03-01 | 1920년 3월 26일 전남 함평에서 모순기, 조사현 등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사현은 전국 각지에서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한다는 것을 듣고, 함평에서도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3월 19일 함평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송대호, 정기연 등에게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고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송대호 등은 모순기에게 그 계획을 알렸고, 그는 흔쾌히 찬동하여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수 십장을 만들어 기숙사에 숨겨 두었다. 거사 당일 졸업식 거행 후 송대호 등은 등교한 학생 등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는 학생 30여 명을 이끌고 함평시장에 이르러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모여든 군중들은 함평읍 내교리에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함평군은 1983년 3월 1일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06번지(함평공원내)에 1920년 3월 26일 함평보통학교 졸업식 때 만세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과 함평군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218 | 51-1-16 | 서강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장욱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41 | 사당, 내상문, 외상문 | 1936-11-01 |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219 | 51-1-32 | 옥구 농민항일항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비석 | 사회운동 | 1927 | 2.3M | 1995-06-17 |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여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관리인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하지만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95년 6월 17일 군산시 서수면민들이 뜻을 모아 항일항쟁의 발원지인 임피중학교 앞뜰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항일투쟁 34명의 명단을 각인하였다. |
220 | 51-1-11 | 백산서원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익산시 | 정인원 | 기타 | 한말구국운동 | 1850 | 정당, 내삼문, 외삼문, 통문, 세한당, 출입문, 화장실(총 7채) | 1915-01-01 | 전라북도 익산(益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이웃을 돌보는 성품이 있었으며 무술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아 이름이 높았다. 1876년 무과(武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親軍別營哨官) 겸 선전관(宣傳官) 충무위좌부장(忠武衛左部將)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등을 역임하고 훈련원 첨정(僉正)에 이르러 일본과의 강화 및 관리의 부패를 통탄하여 사직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역문(討逆文) 등을 지어 전라관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보내면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능히 우리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은 가히 다 말할 수 없으니 죽어서 마땅히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으리라」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목매어 자결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221 | 45-1-03 | 의병항쟁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시 | 탑 | 의병운동 | 1909 | 1977-01-11 | 1909년 창의한 제주의병의 항쟁을 기리는 기념탑.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고사훈 등 10 명의 구국지사들은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려하자 1909년 2월 25일 의병을 창의하여 봉기할 것을 발의하고 창의격문과 사발통문을 띄워 3월 3일을 기해 관덕정 광장에 집결하였다. 일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결의했으나 의병모집 운동을 전개하는 단계에서 비밀이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고사훈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만석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77년 1월 11일에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가 주관하고 제주도민의 협력을 받아 사라봉 공원에 모충사를 건립하고 그 중앙에 제주의병의 항일정신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 | |
222 | 20-2-27 | 우리고장 유공자 기념비(부리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부리면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6-01 | 부리면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2년 6월 1일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131-4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223 | 45-1-01 |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시 | 비석 | 기타 | 1884 | 1977-01-11 | 조봉호(趙鳳鎬, 1884~1920)는 제주 성내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온 독립희생회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모의하여 독립희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하고 임정헌장과 해외 통신문 등을 유인하며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려다가 1919년 7월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1919년 11월 12일 징역 1년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에서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77년 1월 11일 이 비를 세웠다. | |
224 | 10-1-05 | 의열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용산구청(공원녹지과) | 사당 | 기타 | 1990 | 1990-11-01 | 효창원 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7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광복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일본에서 순국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와 중국에서 순국한 이동녕, 차리석의 유해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의사, 그리고 국내에서 서거한 조성환 · 김구 등 7명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모신 효창공원 묘역을 만들었다. 1990년 11월 1일에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는 7명의 순국선열의 영정을 모신 합동 사당인 의열사를 건립하였다. 1993년 이래 매년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3일에 7위 합동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
225 | 18-1-03 |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광주시 |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 | 동상 | 해외운동 | 1894 | 0 | 2000-07-13 |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이다. 1919년 김시학(金時學)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한 후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서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 당시 상해는 지리적으로 동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있고, 또 일제(日帝)의 횡포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 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시대, 신정세에 발 맞추어 활동하는 신한청년당원들의 활동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호(趙東祜)·신규식(申圭植)·선우 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0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議員)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을 초안 낭독하여 가결, 채택케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의정원 제6차 회의인 1919년 9월 6일 오후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통과가 있은 다음, 다시 정부 개조안 토의가 있었다. 정부 개조안의 내용은 한성정부의 기구와 각원을 그대로 통합 정부의 기구와 각원으로 하되 수반인 집정관 총재의 칭호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기구에 있어서나 대통령 칭호에 있어서는 이미 통과된 헌법 제3장과 제5장에 의하여 결정을 본 것이니 여기서는 다만 인원의 선임 절차가 남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국무원의 선임은 대통령의 직권에 속하는 것인 즉 임시의정원에서 할 일은 헌법 제21조 5항에 의하는 임시 대통령의 선거와 제15조 4항에 의하는 국무원 임명에 대한 동의뿐인 것이었다. 따라서 먼저 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이 아직 발포되지 않았으니 대통령의 선거 방법을 새 헌법 중 임시대통령 선거 규정에 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이었다. 만일 새 헌법에 의하여 임시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한다면 현정부는 이미 소멸된 것이며, 헌법의 발포권도 새로 선거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라고까지 논의가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무차장인 신익희는 현정부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초창기이니 만큼 통상적인 준례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장차 발포되리라 믿는 그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거함이 부득이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투표케 되었고 이승만(李承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1919년 8월 그는 다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20년 9월에는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 초에 개최된 태평양회의는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의 실패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동태가 파탄적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운동이 고조되었으며, 같은 해 2월 8일부터 개막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3월 11일에 그를 비롯한 5명의 의원은 국민대표회의는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시국 수습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부결되었고 국무원은 총사퇴하여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따라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의정원이나 국무원에서는 대통령에게 전보를 쳐서 속히 상해로 건너와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통령은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여 정국은 더욱 혼미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법정연구회(法政硏究會),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이 조직되어 사태수습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그는 시사책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각처에서는 다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의 난립은 파쟁과 의견 충돌만을 야기할 뿐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광복운동에는 기여함이 적었다. 이리하여 독립지사들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승적(大乘的) 견지에서 통일된 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임정」 기치 하에 단결하였다. 그 첫 시도가 유일독립당(唯一獨立黨)의 조직이었다.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또다시 통합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들 대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다가 마침내는 단일당의 창립에 합의하여 1935년 7월 5일에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다시 분열되어 1937년에 그는 김인철(金仁喆)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투쟁동맹은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과 합하여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며 우익진영에서는 1937년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그 후, 1940년 5월에 광복진선에서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군을 창건하였으며, 민족전선 측은 동시에 따로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는 양대 진영으로 완전히 분립되었으나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양분된 광복운동에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절박한 현실은 사상적 대립에 앞서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 의용대는 광복군의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고 민족전선의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에 들어와 독립이 될 때까지 항일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1942년 6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23일에 외교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이연호(李然浩)와 함께 연구 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朴贊翊)·최동오(崔東旿)·김성숙(金星淑)·유 림(柳林)을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그 진용을 보강하니 여기서 중대시국에 임시정부의 외교활동도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를 보게 되니 여기서 선전 업무는 좀더 강력히 집행할 수 있었다. 즉 이때 새로 설치된 선전부에는 총무·편집·발행의 3과와 함께 선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할하여 행하게 되었는데, 초대 선전부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유 림(柳林) 등과 함께 선전계획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즉 그는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226 | 50-1-29 | 충의영당 및 춘산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화순군 | 문태주 | 사당 | 의병운동 | 1906 | 200 | 1927 | 면암 최익현 의진에 입대하여 활약하신 애국지사 문달환 선생을 추모하기 위함 |
227 | 23-2-14 | 위령탑(보령시) | 국가수호 | 2003-11-27 | 충청남도 보령시 | 보령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1990-10-29 | 6.25전쟁 당시 보령경찰서 주산지서에서 북한군 1개 중대와 교전 중 전사한 16명의 경찰관을 추모하기 위해 1990년에 건립됐으며, 해마다 자유수호희생자 합동위령제를 거행하고 있음 | |
228 | 30-2-12 | 이근석장군 동상 | 국가수호 | 2003-02-14 | 대구광역시 동구 | 공군3262부대 | 동상 | 6·25전쟁 | 1950 | 1953-10-02 | 대구시 동구 검사동 제11공군전투비행단 내에 6·25전쟁시 시흥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근석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1953년 10월 2일 동상을 세웠다. 이근석 장군은 평남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끝없는 하늘에 대한 동경과 함께 비행사에 대한 꿈을 품어왔는데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있는 구마다니 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천재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조종사로서의 재능은 그를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조종술은 교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담당교관은 그를 비행술의 천재라 칭할 정도였다. 1934년 만주 사변에서 구마다니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요시오카 전투비행부대로 배속되었는데, 당시 요시오카 전투비행부대는 육군항공부대 중에서도 최정예의 조종사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첫 출격부터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린 그의 조종술은 부대의 정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후 공군 창설에 주력해 최용덕, 김정렬,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영환 등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이 과정에 참여하여 마침내 1946년 4월 1일 최초의 항공부대가 조선경비대 내에 창설되었다. 1948년 수색의 조선경비대 보병학교를 거쳐 5월 14일 태능의 경비사관학교를 간부후보생 1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명된 그는 육군항공 총감부와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서 비행단장으로 근무한 후 1949년 7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으로부터 공군이 독립됨과 동시에 이근석은 새로이 창설된 공군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공군의 간성을 육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1950년 5월 공군 비행단장에 임명되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F-51전투기 인수단장의 자격으로 도일(渡日)하여 미 극동공군이 양도한 10대의 최신 전투기를 성공적으로 인수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F-51기를 인수하여 귀국해 1950년 7월 3일 작전명령 제25호에 의거 대한민국 공군 사상 최초의 전투기 출격을 감행하였으며, 7월 4일에도 작전수행을 위해 출격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시흥지역에서 남하중인 적 탱크를 공격 중 적의 포탄이 장군의 비행기에 명중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사후 1951년 9월 19일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공군 대령에서 공군 준장으로 특진이 추서되었다. | |
229 | 30-2-09 | 다부동 전적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한국자유총연맹경북도지부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1981-11-30 |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대구 사수의 보루인 다부동 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81년 11월 30일 기념관을 건립했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한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에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 9월 공세를 저지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 교전하여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과 지천 도덕산 일대에서 북한군 2개사단(제3, 13사단)과 23일간의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북한군 9월 공세를 저지하고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 |
230 | 30-2-29 | 충혼탑(김천시)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김천시 | 김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1962-11-10 | 김천 자산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이종호 소령 등 1.787위의 김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김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2년 11월 10일 준공하였고, 2010년 10월 20일 충혼탑 정비사업으로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김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3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김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31 | 31-2-06 | 경찰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49 | 1954-12-25 | 문경경찰서장이 1954년 12월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산 124-2(59번도로변)에 공비 토벌에 참전한 이무부 문경경찰서장 외 14명의 공적을 기리고 그들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경찰전공비를 건립하였다. 1949년 9월 16일 새벽 동로지서가 공비의 습격으로 포위당하여 전멸상태에 있다는 연락을 접하고 당시 문경경찰서장 이무부 등 28명이 출동하여 노루목 고개에서 공비들과 기습을 받아 교전하다가 경찰서장과 경관 11명, 동로면장과 민간인 2명이 전사하고 경관 4명이 부상당하였다. | |
232 | 33-2-22 | 포항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9-12-30 |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에 포항지구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한 국군과 학도의용군을 추모하기 위해 국제관광공사에서 1979년 12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8, 9월은 피아간 낙동강전선의 공방전이 가장 치열했다. 북한군은 제2군단의 제5, 제12사단 및 366부대와 국군 및 미 3개 특수임무부대, 제7함대 일부, 제5공군 등이 상호 대치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포항지역을 포함한 낙동강전선에서 용전분투하여 방어함으로써 결국은 북진의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치열하던 1950년 8월 9일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과 12사단 및 366부대가 경주, 울산, 부산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포항을 점령했을 때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 독립 17연대 민부대와 경찰, 학도의용군 그리고 미군 특수임무부대와 합동으로 44일간의 혈전을 감행한 결과 동해안의 요충지인 이 지역을 탈환한 전투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동의 용향 여기 형산강변의 격전지 충용한 국군 제3사단 및 지원부대의 장병들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44일간의 혈전을 치르어 북한군 2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끝내 물리치고 말았으니 이 터전을 지킴에 있어서는 호국의 생명선이요, 쳐나감에 있어서는 북진의 시발점이었다. | |
233 | 43-1-41 | 남해 3.1독립운동 발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남해군 | 남해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12-23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2일 이예모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와 4월 3일 남양리·금음리·문창리의 노상에서 이예모·정순조·정학순·윤주승 등의 사전 준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남해읍으로 향했다. 이어서 남해읍 장날인 4일 1천여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군청, 우체국, 주재소 등에 몰려가 관리들에게도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시위에서 강한문(姜漢文, 1871~1926), 김희조(金熙祚, 1871~1930), 원복생(元福生, 1892~1937), 유봉승(柳琫承, 1901~1956), 유찬숙(柳贊淑, 1891~1926), 윤주순(尹柱舜, 1896~1964), 이예모(李禮模, 1883~1954), 장학순(張學順, 1887~1952), 정몽호(鄭夢虎, 1898~1984), 정순조(鄭順祚, 1885~1962), 정용교(鄭鎔交, 1885~1948), 정익주(鄭益周, 1896~1975), 정임춘(鄭任春, 1890~1956), 정재모(鄭栽模, 1897~1950), 정학순(鄭學淳, 1897~1920), 정흥조(鄭興祚, 1889~1964), 하상근(河祥根, 1889~1953), 하준호(河準互, 1887~1942)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해군수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12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
234 | 33-2-12 | 전몰군경 충혼비(온정면)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온정면 | 비석 | 기타 | 1957 | 1957-01-01 | 울진군 소태리에 1957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온정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재향군인회 온전면 분회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7년 1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온정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35 | 25-2-21 | 충혼비 3종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옥천군 | 군서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7-06-06 | 625전쟁 당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비, 반공투사 김영원 외 7인의 위훈을 기리는 반공투사위령비, 3.1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순구 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김공순구순절비 총3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
236 | 43-1-19 | 연호 이의사 사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거창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54 | 1995-10-22 | 일제 강제 병탄에 항거하여 자진 순국한 이주환의 사적비.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없는데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며 세금 납부를 거부해 헝병대로 연행되었다. 이곳에서 강제 날인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자귀로 자기 엄지를 절단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자 주상면 면사무소에 가서 자신의 호적을 찢어버리고 거창읍 침류정에서 절세시 1편을 남기고 자진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년 10월 22일 이주환의사 순절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이주환 의사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237 | 53-2-17 | 충혼비(시종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1식 | 1963-05-01 | 영암 내동리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36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시종면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3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시종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시종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38 | 33-1-22 | 대전 3.1의거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기념관 1, 생가 1 | 2001-1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2일 청하장날 윤영복·오용간 등의 사전 준비로 장터에 수백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김윤선(金允先, 1865~1932), 김종만(金鍾滿, 1887~1967), 김진봉(金鎭奉, 1898~1959), 안덕환(安德煥, 1866~1924), 안도용(安道用, 1893~1921), 안상종(安常鍾, 1893~1925), 윤영복(尹永福, 1896~1943), 안천종(安千鍾, 1870~1940), 안화종(安和鍾, 1888~1965), 오용간(吳用干, 1869~1941), 이명만(李命滿, 1900~1986), 이영섭(李泳燮, 1898~1960), 이준석(李俊石, 1896~1955), 정재선(鄭在先, 1898~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포항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11월 1일 이 기념관을 세웠다. |
239 | 55-2-09 | 충혼탑(남양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남양면 | 탑 | 6·25전쟁 | 1950 | 4.6m | 1965-06-06 | 남양 한마음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남양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양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남양면민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5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1998년 6월 6일 현충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과 빨치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작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양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40 | 23-1-37 | 주산3·1운동만세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보령시 | 보령시 | 비석 | 3·1운동 | 1919 | 2001-03-01 | 주산 3·1운동 만세 기념비는 2001년 3월 1일 보령시 주산면 면사무소 광장에 주산 3·1운동에 참여한 보령 출신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1919년 3월 16일 밤을 기하여 우리 고장 출신 18의사가 주렴산 국수봉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 봉화를 올리며 징을 치고, 독립 선언문에 혈서하여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했던 만세운동이 주렴산기미만세운동이다. 주렴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웅천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출동한 왜경에 의하여 저지되었고, 주모자급은 거의 체포되어 태형과 옥고를 치르고 온갖 수모를 당했다. | |
241 | 53-2-20 | 충용비(영광군)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남도 영광군 | 법성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1.2x1.2x2.1m | 1950-01-01 | 이 비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법성면 등 각 면의 수복을 위해 전라남도경찰국에 무장지원을 요청하려고 소대원들을 데리고 광주로 가던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지사의 충용을 기리기 위해 지역유지와 친지들이 1951년 5월 독바우 삼거리에 세웠다가 1981년 6월 이곳으로 이설함. |
242 | 42-1-26 | 항일운동 기념탑 (마산) | 독립운동 | 2004-10-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마산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44 | 0 | 1991-03-01 | 일본 제국주의가 이땅에서 마지막 발악을 할 때 재학생의 4할이 조선사람이었던 마산공립중학교에서도 드디어 항일이 불씨가 피어 올랐다. 민족의 해방을 대비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고 연합군에게 일제의 군사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1943년 5기 김희구, 조우식 동문이 경남학생건국회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악명높았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인천형무소에서 복역중 김희구 동문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고 조우식 동문은 조국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리고, 1944년에는 7기 김학득, 강순중과 8기 박기병, 박후식, 감영재, 조이섭, 강정중 동문은 해외 독립운동 상황과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가능한 시기에 외국에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마중독립단을 결사하여 활동하다 그해 7월에 발각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3개월 동안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해방으로 석방되었다. 민족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기개와 희생이야말로 민족의 장래를 지탱하는 주춧돌이요 기둥이다. 몸을 던져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동문들의 투철한 민족애가 이곳을 거쳐 가는 뒷사람들에게 영원히 이어지기 바라면서 그 이름을 새겨 모교의 뜰에 탑을 세우다 |
243 | 24-2-13 | 월남 참전 기념탑(제천)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제천시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제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 | 2000-01-01 | 제천시 하소동에 2000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 261명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제천월남참전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탑을 2000년 6월 24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제천시 출신 장병우·전원준(맹호부대), 고도순·도종희((백마부대), 강병원·홍순규(청룡부대), 강용구·이석재(십자성부대), 박장수·조정현(비둘기부대) 등 261명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244 | 52-2-08 | 순국 충혼비(부남) | 국가수호 | 2003-01-28 | 전라북도 무주군 | 부남면 총무계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8-12-29 | 무주군 대소리에 1998년 6·25전쟁 기간에 덕유산, 조항산 등지의 공비토벌과정에서 산화한 군경, 희생된 민간인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부남면은 사종율, 김병두, 양종태, 김상균, 강남식 등 이곳 출신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충혼비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12월 29일 준공하였다. 무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45 | 15-1-17 | 독립유공자 의사 김찬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 개성김씨북청파문중종원(김원탁) | 비석 | 해외운동 | 1894 | 0 | 1985-09-01 | 김찬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후 함경남도 혜산진의 대안인 장백현에서 이희삼·이동백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비단을 조직하여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1월에는 이동백의 집에서 장백현지단을 결성하고 총무장이 되었다. 이어 농장을 경영하면서 많은 항일투사를 양성하였고, 국경지대의 일본경찰주재소와 수비대를 습격하여, 감금되어 있던 독립군 13명을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장백현 부근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군비단을 비롯한 태극단·광복단·대진단 및 흥업단 지부의 대표 50여명이 장백현에 있는 대진단지부 사무소에 모여 압록강연안 각 독립단체의 연락과 과감한 행동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0월에는 연합회를 중심으로 각 단체를 병합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지휘·명령에 따르는 통일기관으로 대한국민단을 결성하였는데, 이 때 군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동삼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246 | 33-2-26 | 무공수훈자 전공비(강구)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영덕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98 | 1998-01-01 | 영덕군은 1998년 경북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삼사해상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영덕군 출신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분들의 거룩한 충성심과 전공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
247 | 16-2-104 | 전사경찰추모비 | 국가수호 | 2018-08-08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7-10-19 | 1950. 6. 25 북한 공산군이 불법 남침하여 전면 전쟁을 일으켰으나 한국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38선 이북으로 패주함에 따라 인제경찰서장 경감 최동규 외 56명이 수복된 인제지역의 치안업무를 수행하고자 10.19. 11:30 관대리(38대교에서 인제읍 방향 1.5㎞ 소양강내)를 지나던 중 북한 공산군의 기습을 받아 양춘길 경사(당시 계급 순경) 등 8명이 전사하였다.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 산화하신 순국선열들의 명복을 빌고 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며 영령들의 넋을 길이 기리고자 한다. | |
248 | 42-1-09 | 단정 배중세 지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 창원문화원 | 비석 | 의열투쟁 | 1893 | 0 | 1999-01-01 | 배중세는 1893년 지금의 창원시 토월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창원시 진전면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선봉장으로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일로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한 배중세는 김원봉, 양건호, 윤세주, 한봉건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듬해 배중세는 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경남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돕고, 양건호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의 정보를 캐다 1920년 8월에 체포, 1921년 5월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배중세는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세 번의 옥고를 겪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1월에 또 다시 검거되어 거듭 당하는 고문과 옥고에 1944년 1월 2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77년 배중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11월 창원시와 창원문화원, 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 건립위원회는 배 지사의 이런 행적을 기리고자 상남공원에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
249 | 55-1-09 | 의사 하동정공 성연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정길채 | 비석 | 3·1운동 | 1923 | 탑 | 1995-08-01 | 광양출신 독립운동가 정성련의 3·1독립운동 기념비.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전파되어가자 1919년 3월 26일, 정성련은 자택에서 손수 태극기 3개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3월 27일 광양군 광양면 읍내 장날을 기하여 시장으로 나아가 국기를 대나무에 매어달고 흔들며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정성련은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5년 8월 1일, 광양향교는 정성련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웠다. |
250 | 13-2-64 | 유엔군 초전기념관 | 국가수호 | 2013-05-13 | 경기도 오산시 | 대한민국상이군경회오산사지회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0 | 2013-03-11 |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견된 스미스특수임무부대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건립됨 |
251 | 25-2-70 | 하늘 빛 공원 추모비(청주시) | 국가수호 | 2015-10-14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17전투비행단 | 조형물 | 기타 | 2015-04-10 | 조국의 영공수호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고,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조국수호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건립됨 | ||
252 | 33-2-50 | 6.25참전 학도의용군 호국영웅 명비탑(포항해양고) | 국가수호 | 2016-11-23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해양과학고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5-12-22 | 6.25전쟁에 참전한 포항출신의 학도병들의 구국의 일념으로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한 그 숭고한 희생정신과 뜻을 기리고자 영일만이 내려다 보이는 모교에 이 탑을 건립함으로써 그 숭고한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하였다. | |
253 | 52-2-16 | 충혼비(정천면)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정천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06-01 | 진안군 봉학리에 6·25전쟁 기간에 조국과 향토를 지키다 희생된 ‘대한비밀결사대’ 64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정천면에서는 이 지역에서 육신을 포탄삼아 용감하게 산화한 결사대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1년 6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정천면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죽음으로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대한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용감히 싸우다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쳤다. 정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54 | 11-1-11 | 한지 김상옥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시 종로구청 녹지과(마로니에공원 관리사무소) | 동상 | 의열투쟁 | 1890 | - | 1998-05-28 | 1923년 1월 12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쪽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부,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한지 김상옥 의사를 추모 |
255 | 30-1-73 | 고령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18-08-08 | 경상북도 고령군 | 경북 고령군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907 | 2015-12-02 | 국채보상운동은 자주권 회복을 위해서 벌였던 범국민적 캠페인으로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차관한 1300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으로, 고령지역에도 홍와 이두훈 선생을 중심으로 다수의 군민들이 참여한 운동으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기 위함 | |
256 | 30-1-04 | 독립지사 남상순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남상호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26 | 1985-05-01 | 남상순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다. 일본 대판중학교 야간에 재학 중이던 1941년 충성회를 조직하고, 1942년 12월까지 30여 차례의 모임을 갖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민중계몽과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본받아 항일정신을 길러갔다. 그러던 충성회의 활동이 발각됨으로써 1942년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다 8·15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257 | 50-2-34 | 갑종장교 호국탑 | 국가수호 | 2005-06-01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탑 | 기타 | 2004 | 2004-10-29 | 갑종장교단중앙회는 2004년 10월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75-15 육군보병학교 교정에 갑종장교 출신으로 6·25전쟁 및 베트남전, 대간첩작전 중 전사한 5, 341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이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의식을 후배 장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호국탑을 건립하였다. 갑종간부후보생 과정은 1950년 1월 육군보병학교에 신설돼 그해 363명이 갑종 1기로 임관한 것을 시작으로 1969년 8월 30일까지 230기 45, 424명의 장교가 배출됐다. 갑종장교들은 6·25전쟁과 베트남전, 국내 대간첩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 3명을 비롯해 5천여 명이 각종 무공훈장을 받았다. | |
258 | 16-2-75 | 백호 충혼탑 | 국가수호 | 2005-10-27 | 강원도 원주시 | 제36보병사단 | 탑 | 기타 | 1968 | 0 | 2005-04-20 | 육군 제36보병사단은 2005년 4월 20일 사단 창설 50주년을 맞아 울진·삼척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전사한 박경호 상병 등 전몰장병 12위를 추모하기 위해 강원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보병 제36사단 영내) 백호충혼탑을 건립하였다.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자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고 12월 28일 완료되었다. 휴전 이후 북한측의 최대 규모의 도발로 침투한 무장공비 중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측도 제36보병사단 장병들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20여 명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는 백호의 얼이 서린 곳, 영원히 사단과 함께하는 백호의 충혼이여! 위국헌신 군인 본분의 표상이 되리라.” |
259 | 15-1-22 | 연천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9-05-25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의병운동 | 1910 | 0 | 2008-07-15 | 연천의 의병운동은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서 강고한 의병투쟁을 벌였고, 특히 1905년 ~ 1910년의 시기에는 연천 출신이거나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의병장 및 지도층과 많은 의병부대들이 연천·삭녕·마전(현재 연천지역)일대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항일투쟁을 전개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로 전락하기 직전인 1910년을 전후로 무자비한 탄압 및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 일제의 폭압에도 마지막까지 항일 의병운동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으며, 1919년 3월 21일 백학면 두일리 장날에 모인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는 항일 의병운동의 전통을 발하던 연천의 항일 독립의지를 선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
260 | 31-2-27 | 무공수훈자 전공비(풍기읍) | 국가수호 | 2004-12-22 | 경상북도 영주시 | 박성서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11-17 | 무공수훈자회 영주시지회는 2003년 11월 17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376-6(광복공원 내)에 영주 출신으로 6·25전쟁, 베트남전 등에서 국가수호를 위해 위국 헌신한 무공수훈자 150명의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전공비에는 장군 20명과 무공수훈자회원 130명(충무 14, 화랑 104, 인헌 10, 삼일장 1, 광복장 1) 등 총 150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다. |
261 | 23-2-18 | 무공수훈자전공비(종천면) | 국가수호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무공수훈자회 서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2 | 2002-11-15 | 무공수훈자회 서천군지회는 2002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 종천면 화산리 323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토수호를 위해 그리고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서천군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
262 | 16-1-36 | 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7-10-18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소초면 | 비석 | 3·1운동 | 1919 | 2006-04-05 | 소초면의 만세운동은 4월 3일 강사문과 하영현의 장례 때 계획되었다. 항일의병 출신으로서 소초면 둔둔리에서 서당 훈도로 지내던 박영하는 평장리 신현철과 협의하여 4월 5일에 소초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4월 4일 신현철은 동생 신현성·유재경·김흥열을 시켜 면내의 의관리·장양리·평장리·교항리 등의 주민들에게 시위계획을 알렸다. 다만 수암리헌병주재소가 위치한 수암리는 제외시켰다. 4월 5일 소초면 주민 약 300여 명이 면사무소로 가는 부채고개에 모였다.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향하였고 면사무소에서 면장 남상철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수암리헌병주재소는 원주헌병분견소의 지원을 받아 각 마을을 조사하여 주도자인 신현철과 박영하 등을 체포하였다. | |
263 | 12-2-15 | 6.25참전,월남참전,무공수훈자기념비 | 국가수호 | 2004-05-08 | 서울특별시 금천구 | 금천구청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12 | 2003-09-05 | 금천구 출신으로 6.25참전 및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무공수훈자의 공훈과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264 | 43-2-44 | 거창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거창군 | 무공수훈자회거창군지회 | 비석 | 기타 | 1964~1973 | 0 | 2004-02-27 | 거창군 상림리 신시가지 책읽는 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거창 무공수훈자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거창군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2월 27일 전공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거창 젊은이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265 | 23-2-06 | 충혼탑(서산)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서산시 | 서산경찰서장 | 탑 | 6·25전쟁 | 1950 | 1983-06-01 | 서산시 읍내에 198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하거나 순직한 77위의 서산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서산경찰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3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서산 경찰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서산경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66 | 12-2-23 |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9-12-12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3.8m, 세로 4.5m, 높이 2.2m | 2019-11-30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보훈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총동문회가 중심이 돼 '6.25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의 살신성인과 군인 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뜻에서 명비를 건립하였다. |
267 | 31-1-81 | 독립운동가 추산 정훈모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경상북도 예천군 | 정지영 | 비석 | 해외운동 | 0 | 2019-10-12 |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4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이상룡(李相龍)독판의 참모로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계속해서 무장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38년 노령 아르하라(ARKHARA)로부터 삼강성(三江省) 가목사시(佳木斯市)로 귀환하던 중 일만(日滿)혼성군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268 | 14-1-13 | 전등사 - 강화의병전투지 | 독립운동 | 2013-07-22 | 인천광역시 강화군 | 대한불교조계종전등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0 | 1907-07-01 | 전등사는 이동휘와 이능권의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했던 장소이다. 구한국 지방 주둔 군대의 하나인 강화진위대 대장 출신 이동휘는 1907년 7월 김동수·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던 곳이다. 또 8월 2일에는 진위대원인 정기우, 지홍윤, 유명규, 김동수 등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협의를 했다. 이능권은 국정리 출신으로 서울 시위대 장교였으며 군대 해산 후 강화도에 낙향한 후 주민들을 모아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친일파 밀정 처단,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1908년 10월 하순 용산 지역에서 출병한 일본군과 정족산 전등사에서 일주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1908년 의병의 항전이 이어지자 일본군은 같은 해 10월 용산 주둔 일본군 6사단 예하의 13연대 70여 명의 정규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다. 10월 30일부터 31일 양일 간 일본군의 공세가 거셌지만 전등사의 이능권(李能權)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하여 승리하였다. |
269 | 53-1-19 | 낭산 김준연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2-11-12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청 | 기념관 | 문화운동 | 1919 | 2012-07-17 | 김준연은 1895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나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대학예과 과정), 동경제국대학 대학원, 독일 베를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 영국 런던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해외특파원(조선일보 특파원)으로 1920년대의 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 특파원,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신간회 조직, 제3차 공산당 사건, 일장기 말살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에 참여, 8년 동안의 감옥 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 생활을 하였다. 8·15 해방이 되자 일제 당국은 정권 인수를 제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김준연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령하였다. 낭산 김준연선생 기념관은 2012년 전남 영암군과 ‘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사업회’을 주축으로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생가터에 설립하였다. | |
270 | 51-1-49 |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북도 김제시 | 곽규인 | 비석 | 3·1운동 | 1919 | 1980-1-1 | 곽경렬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915년 어린 나이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일본 헌병대 무기 탈취, 친일 부호 처단, 군자금 모집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1916년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1918년 친일파 이종국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다. 1920년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6년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 하였다. | |
271 | 55-1-40 | 광양시 독립유공자 추모탑 | 독립운동 | 2009-05-25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탑 | 기타 | 2009 | 탑 높이 6m, 탑신 3.13m, 탑1식 | 2009-03-01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광양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항의하여 박병하(朴炳夏, 1847~1910)는 단식으로, 황현(黃玹, 1855~1910)은 음독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272 | 25-2-42 | 6·25 참전 유공자비(용산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용산면6.25참전유공자회 길기석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11-14 | 용산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139-4에 용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99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유공자비에는 6·25전쟁 현황과 전략사 등을 기록했고, 비 후면에 용산면 참전 전사자 19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273 | 31-1-67 | 학암 박윤중선생 기적비 | 독립운동 | 2011-07-21 | 경상북도 문경시 | 박상욱(증손) | 비석 | 의병운동 | 0 | 0 | 2010-11-06 | 1907. 8. 1 大韓帝國軍隊가 해산됨에 따라 당시 육군참교로 있다가 서울시내로 진출하여 왜군과 항쟁 교전하다가 적탄에 맞아「大韓萬歲」를 삼창하고 전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
274 | 11-1-20 | 한용운 처소( 심우장) | 독립운동 | 2012-08-31 | 서울특별시 성북구 | 성북구 | 기타 | 기타 | 1933 | 1933-01-01 |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 |
275 | 13-2-19 | 현충탑(안양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 안양시 | 탑 | 기타 | 1971 | 1971-10-15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에 안양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안양시에서 1971년 10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희생하신 전몰군경 및 호국영령 637위(군인 560위, 경찰 48위, 군속 및 청년단원 29위) 위패를 모셨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여 땅이여- 머언 먼 아득한 그 옛날 잉벌노현, 금천이라 불리우던 곳. 이 안양땅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있었노라. 안양천 맑은 물에 동심을 닦고 관악언덕 수리기슭에서 몸을 기르며 내일의 큰 꿈을 키웠노라 아, 그러나 모진 광풍 불어와 나라의 부름이 있었나니 누구보다 그 부름에 앞장 섰노라. 동족상쟁의 아픔은 비록컸지만 내 한 목숨 초개같이 던졌노라 자유와 평화, 겨레와 조국이 그들에겐 생명보다 소중했노라. 하늘나는 새들은 구슬피 울고 땅을 기는 짐승들도 피눈물 흘렸노라 역사는 기억하리라. 그 빛나는 무명의 산화를 산하여 어찌 잊을 수가 가슴엔 더 뜨거운 그 이름들을 님들이 지킨 이 땅 어느 곳엔들 그 얼 아니 스며 있으리오 여기 우리 정성 모아 당신의 뜻을 세웠나니 하늘이여 땅이여 고이 잠든 넋들에 평안에 주소서. 하늘이여 땅이여 님들의 충혼으로 앞길을 밝히소서 | |
276 | 25-1-08 | 순국의사 심석재 송선생병순의 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39 | 0 | 1973-05-19 | 송병순은 본관은 은진. 호는 심석이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의 동생이다.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 뒤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 1888년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3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에 강당을 건립하여 제자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제자들이 말려 실패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
277 | 13-2-37 | 호국 유공자 전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 비석 | 기타 | 2002 | 2002-12-20 | 안양 부흥동 보훈회관 앞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유공자 전공 기념비(안양)’를 건립하였다. 안양시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2월 2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안양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78 | 24-2-22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충주) | 국가수호 | 2006-04-24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48 | 0 | 2004-12-10 | 이 기념비는 국가수호를 위해 6.25에 참전한 충주시에 거주하는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충청북도지부 충주시지회에서 2014년 12월 10일 건립하였다. |
279 | 51-1-57 | 애국지사 일표 조용관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북도 익산시 | 함라초등학교 | 동상 | 사회운동 | 폭2.5 길이4 높이2.2 | 2013-11-29 | 익산 함라마을은 1900년 초 개화기 때 만석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삼부자 고택으로 유명하다. 옛 담장을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함라면사무소 옆 함라초등학교가 나타나고 교정에 들어서면 바로 애국지사 일표 조용관 선생의 흉상을 만날 수 있다. 조용관 선생은 1885년 함라에서 태어나 1920년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자도자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1월 군산민중운동자동맹 사건으로 징역 8월을 받고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다시 노동운동계에 뛰어들어 1926년 10월 군산철도노동회 위원장, 1927년 3월 군산노동연맹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동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서 회의진행을 주관하다가 체포되었다. 동년 9월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3월 조선공산당 전북도당을 결성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조용관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동창회, 유족 등이 뜻을 모아 2008년 생전 설립에 힘을 쏟았던 함라초등학교 교정에 흉상을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5년 5월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 |
280 | 13-2-59 | 천안함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평택시 | 해군 제2함대사령부 | 조형물 | 기타 | 2010 | 0 | 2011-03-30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 해군본부에서 국민의 안보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2011년 3월 30일부터 백령도 근해에서 침몰한 천안함을 전시하고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침몰한 사건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천안함 피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 발표는 미국과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안보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 |
281 | 50-1-43 | 해남항일운동 추모비 | 독립운동 | 2014-05-20 | 전라남도 해남군 | 해남항일독립운동희생자추모사업회 | 비석 | 기타 | 1909 | 2013-07-09 | 해남의 항일운동 역사와 지역 호국의병들의 숭고한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함 | |
282 | 41-2-11 | 울산지구 두서전적 기념비 | 국가수호 | 2009-05-25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산광역시 호국선양기념사업단 | 비석 | 기타 | 1950 | 가로2m, 세로 1.5m, 높이 2m | 2008-11-19 | 울산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두서면사무소 내에 두서에서 벌어진 전투중 희생된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울산광역시호국선양기념사업단에서 2008년 11월 19일 이 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기간 중 울산지구 일대 북한군이 아미산, 천마산 등 두서면 일대에 아지트를 구축함으로써 전투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희생된 군경찰, 공무원, 지역주민 등 약 360여 명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수호 전선에 산화하신 우리의 님이시여 그날의 희생정신이 후세에 길이 빛나리 여기 두서면 양지바른 곳에 한 비를 세워 님들의 위대한 충성을 높이 기리노라 |
283 | 14-1-14 |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 | 독립운동 | 2014-05-20 | 경기도 김포시 | 재단법인김포시청소년재단 | 기념관 | 3·1운동 | 1919 | 대 | 2013-02-28 | 김포시는 1919년 3월 22일 월곶면과 검단면을 시작으로 3월 29일까지 8일간 양촌읍, 고촌읍 등지에서 총 15회에 걸쳐 3‧1독립만세운동 시위가 벌어진 고장이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선열들은 1만4천여 명으로 이 과정에서 부상자 120명, 체포자 200여 명이 발생하였다. 김포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지역의 정체성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한 독립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이 조성되는 이곳은 옛 양곡리의 오라니장터로 일제시대에 선조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역사 깊은 장소이다. 2013년 3월 1일 양촌읍에 개관한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건축 연면적 2058㎡(623평)에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재현한 영상과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전시관, 일제의 고문실태, 만세운동 체험관 등이 들어서 있다. |
284 | 16-2-103 | 수도탈환부대 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인제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6·25전쟁 | - | 0 | 1996-11-20 |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의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후배장병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다. |
285 | 50-1-46 | 사립 소안학교 터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남도 완도군 |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1927 | 1913 | 사립소안학교 폐교 반대 불령선인 800명 | |
286 | 24-1-22 | 중앙탑 독립유공자 공적비 | 독립운동 | 2014-12-12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 충청북도 북부연합지회 | 비석 | 기타 | - | 2012-12-23 | 공적비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유공자분들의 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설계되었고, 중앙의 공적비를 둘러싸고 있는 명각비는 대한민국 산천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유공자 분들의 공적을 담고 있다. | |
287 | 42-2-055 | 한주호 준위 동상 | 국가수호 | 2011-06-08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진해기지사령부 | 동상 | 기타 | 2010 | 0 | 2011-03-30 | 경남 진해시 경화동에 천안함 피격 당시 구조를 위해 애쓰다 희생된 한주호 준위를 추모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2011년 3월 30일 동상을 건립했다.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한 한주호 준위는 1975년 2월 서울 수도공업고등학교 졸업 직후 해군부사관으로 입대하여 내연보통과를 수료하고 호위함 부산함(FFK-959)에 승조하였다. 이듬 해 해군 특수전 초급반(UDT/SEAL) 제22차 과정을 수료하고 수중파괴대(UDT)에서 훈련교관, 작전요원 등을 역임하였다. 2000년 해군사관학교 준사관 제41기 과정을 수료하고 준위로 임관하였다. 해군 특수전 여단 작전지원대 근무중이던 2010년 3월 2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일대를 경비하던 제2함대 소속의 초계함 천안함(PC-772)이 침몰하자 소속부대원들과 함께 구조요원으로 참여, 높은 파고와 낮은 수온 등 극한의 환경에서도 실종자 수색에 만전을 기하던 30일 잠수 수색활동 중 실신하여 같은 해역내 미 해군 구조함 살바(SALVOR)함으로 후송돼 응급조치하였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순직 직후 보국훈장 광복장이 수여되었고,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
288 | 24-2-35 | 충의선양탑 | 국가수호 | 2015-05-14 | 충청북도 충주시 | 중앙경찰학교 | 탑 | 기타 | 1989 | 1991-05-13 | 동의대 사태로 인해 순직한 경찰관 및 공무수행중 순직한 경찰관 | |
289 | 30-1-41 | 애국지사 백아 이정기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성주군 | 이무남 | 비석 | 3·1운동 | 1898 | 0 | 1995-10-15 | 이정기는 1898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복한 등 전국의 유림 대표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고자 상하이로 보냈으나 파리로 가지 못하고 탄원서만 우송된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장서의 서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송회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정기 역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베이징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출판사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는 한편, 김창숙·남형우 등에게 무기 제조법을 익힌 뒤 1925년 9월 대구로 가서 이원록 등과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주력하였다. 1928년 1월 대구은행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 2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290 | 11-2-06 | 최규식경무관 동상 | 국가수호 | 2013-11-22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종로경찰서 | 동상 | 기타 | 1968 | 1969-10-21 |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한 최규식 경무관을 추모하기 위해 내무부에서 1969년 10월 21일 이 동상을 건립했다. 최규식 경무관은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 공비들에 의한 1·21 사태 때 사망했다.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경찰에 투신해 1967년 10월부터 서울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및 31명의 무장 공비들이 당시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고 남파되자 청와대 바로 옆에서 이를 검문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고 정종수 경사와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 | |
291 | 42-2-63 | 김해시 6. 25 및 베트남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4-05-20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탑 | 6·25전쟁 | 1951 | 0 | 2009-11-13 | 이 전공비는 6ㆍ25전쟁을 맞아 온몸을 바쳐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구한 공훈을 기리고 아울러 조국의 부름을 받아 머나먼 이역만리 월남 땅에서 대한용사의 용맹을 빛내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한 김해시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것이다. 이 전공탑비는 2009년 11월 13일에 준공하였으며, 현재 김해시 6ㆍ25참전자 2229명 및 월남전 참전자 1608명들의 이름이 훈격별로 새겨져 있다. |
292 | 14-2-26 | 강화특공대 의적 불망비 | 국가수호 | 2005-10-27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2-06-25 | 1.4후퇴 당시 강화군에 민간인 신분인 수백명이 강화특공대(1950.12.8. 결성)를 조직하여 공산군과 많은 전투를 통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 19명의 특공대원이 산화되어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건립함 |
293 | 53-2-30 | 장기창 순직기념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전라남도 무안군 | 무안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1947 | 높이 2m | 19471001 | 故 장기창 순경은 1947.04.30. 일로면에 무장공비들이 침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매복해 있다가 기습공격을 가하여 도주하는 적을 전원 사살케 하여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현장에서 순직하였으나, 미등록 국가유공자임. |
294 | 23-2-31 | 충남경찰 '혼' 추모공원 | 국가수호 | 2015-05-14 | 충청남도 예산군 | 충남지방경찰청 | 장소 | 6·25전쟁 | 2013-10-18 | 추모공원 비문에 1947년 이후 전사 및 순직한 경찰관 893위 명각 | ||
295 | 33-1-19 | 3·1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비석 | 3·1운동 | 1919 | 1986-05-01 | 포항 송라면 대전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5월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370 건립한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22일 오후 1시 포항시 송라면 대전리에서 윤영복, 이준석 등 23명이 주동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날의 독립항쟁은 일제 관헌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제지당했고 주동인물 23인 모두가 붙잡혀 갔다. 온갖 고문을 당한 뒤 윤영복, 윤영만, 이준석, 이영섭, 이준업, 안천종, 안상종, 안덕환,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태하, 김진봉, 안도용 등 14인은 대구형무소에서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 |
296 | 31-1-82 | 의병대장 남천 박주상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20-10-12 | 경상북도 예천군 | 함양박씨 남천공파 문중 대표 박희식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5 | 0 | 2012-5-10 | 박주상은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초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박주상은 예천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거의하여 의병을 모군하였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의병활동에서 김하락(金河洛)·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秊) 등과 연계하여 적군을 격멸시키는 등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297 | 14-2-43 | 故 정옥성 경감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강화경찰서 경우회 | 동상 | 기타 | 2013-06-20 | 13.3.1. 23:10경 강화서 내가파출소 당직근무 중 자살기도자 관련 112신고를 접하고 119휴대폰 위치추적 결과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 인근에 있는 것으로 확인 주변 수색, 자살기도자를 발견하고 설득하던중 자살기도자가 순간적으로 바닷물로 뛰어드는 것을 뒤쫒아 구조하는 과정에서 바닷물에 휩쓸려 순직 | ||
298 | 26-1-19 | 영명학교(공주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 독립운동 | 2019-4-26 | 충청남도 공주시 | 학교법인 감리교 영명학원 | 장소 | 문화운동 | 0 | 2022-02-10 | 1919년 4월 1일 공주 3.1운동 만세 시위 전날,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1천여 매를 등사하고 대형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 |
299 | 43-1-04 | 애국지사 국간 김철호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통영시 | 김용민 | 비석 | 사회운동 | 1901 | 1995-11-01 | 김철호(金哲鎬, 1901~1950)는 1926년 8월 중국 광동(廣東)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원봉(金元鳳)·오성륜(吳成崙)의 권유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국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아 활동하다가 1929년 10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사단법인 가학중앙종친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5년 11월 이 비를 세웠다. | |
300 | 20-1-28 |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01 | 0 | 1975-05-01 | 이호철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휘문학교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활동하였다. 1923년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에 재학당시 재일동포를 규합하여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정신의 앙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6월 부여군 홍산면을 위시하여 각지의 부락에 농민들을 위한 야학과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농민계몽에 주력하다가 1933년 8월 10일 피체되었다.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01 | 18-2-01 | 현충탑(경기 성남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성남시지회 | 탑 | 기타 | 1974 | 높이 17m, 폭 17m | 1974-06-06 | 이 현충탑은 조국을 위해 장렬히 희생하신 성남 출신의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성남시가 이일영 화백에게 제작을 위촉 1974년 6월 6일 현충일을 기념하여 현재의 장소에 건립을 완성하였다. 정면이 남향으로 전 시가지를 바라보는 형태의 이 탑은 중앙의 탑신을 중심으로 좌우에 직방형 비좌가 마련되어 좌측으로는 연혁이 우측으로는 헌시가 적혀있으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이곳은 매년 신년참배를 비롯 현충일 추모행사 등이 개최되는 현충시설로 후세들이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배우는 소중한 교육의 장이다. |
302 | 30-1-23 | 도병철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22 | 경상북도 칠곡군 | 도인수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03 | 1983-06-01 | 도병철은 경북 칠곡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되었으며,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손병선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결성되자 동년 4월 동지들과 함께 신간회 칠곡군지부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펴나갔다. 주로 민족교육운동에 관심을 갖고 무산아동의 수업료 면제와 한국인을 위한 교육실시를 주장하였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됨에 따라 옛 동지 손병선과 함께 다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던 중 1938년 일경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고초를 치르다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1945년 8월 패망직전의 일제 경찰이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강제 검거할 당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강제 연행되던 중 낙동강 철교에서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303 | 51-2-17 | 충혼 불멸탑(줄포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부안군 | 줄포면 | 탑 | 6·25전쟁 | 1950 | 1.8m x 2.1m | 1971-05-20 | 부안군 장동리에 6·25전쟁 기간에 향토방위를 위해 산화한 19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불멸탑’을 건립하였다. 부안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71년 5월 20일 이 탑을 세웠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박영원, 노방운, 이종권, 양봉식 등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육탄으로 대항하다 쓰러졌다. 줄포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04 | 40-2-06 | 백재덕 호국영웅 상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강서구 재향군인회 | 동상 | 6·25전쟁 | 1953 | 0 | 2001-01-01 | 부산 강서구 천가동 천성분교 내에 호국영웅인 백재덕 이등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백재덕 호국영웅흉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2001년 1월 1일 이 동상을 세웠다. 1953년 5월 14일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10중대 3소대 3분대장 백재덕 육군이등상사는 강원도 금성 샛별고지에서 야간 매복작전을 전개하던 중 적 3개 중대의 공격 징후를 미리 탐지하고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워진다. 전 분대원은 나와 같이 이곳에 뼈를 묻자"며 분대원들을 독려하여 3차에 걸친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백병전과 진내사격까지 요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중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중동부전선의 요충지인 샛별고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하였다. 1953년 5월 15일 밤 제11중대 3소대 백재덕 이등상사가 지휘하는 3분대는 매복조로 차출되어 중대진지 앞에서 진목동 일대를 살피고 있던 중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조명탄을 발사한 결과, 적 3개 중대가 진지를 향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분대장은 매복진지가 돌파될 경우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울 것으로 판단하고 전 분대원에게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철수를 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분대장은 능선의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로 4명씩 분리하여 배치한 후 접근해오는 적을 향해 사격을 집중하자 적은 괴성을 지르며 돌격을 감행해왔다. 분대는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인해전술로 접근해오는 적을 완전 섬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적의 제1파 15~16명이 분대의 진지안까지 돌입함으로써 백병전이 전개되었으며, 백재덕 이등상사 이하 모든 분대원은 수적으로 2:1의 열세 속에서도 적을 모조리 격퇴하였다. 약 20분이 경과된 후 적의 제2파가 다시 공세를 취해옴에 따라 피아간에는 수류탄전과 아울러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분대원들은 처절한 사투 끝에 침입한 적을 모두 사살하였으나, 1차 1명에 이어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잠시 후 또 다시 제3파의 공격을 재개한 적 10여 명이 다시 분대진지까지 돌입하자 분대원들은 총검과 맨주먹으로 혈전을 개시하였고, 아울러 중대에서는 진내사격을 실시하여 계속하여 돌진해오는 적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분대원들은 9명 중 4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명도 부상을 입는 손실이 있었으나, 날이 새고 적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분대장 백재덕 이등상사는 단신으로 10여 명의 적을 사살, 진지를 고수하고 중대의 위기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아울러 샛별고지전투의 승리는 아군이 중부전선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무사히 확보함으로써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305 | 16-2-17 | 춘천지구 전적 기념관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한국자유총연맹강원도지회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지상2층 | 1978-10-30 | 강원도 춘천시 삼천동에 춘천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다 산화한 용사들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관광공사에서 1978년 10월 30일 전적기념관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중부전선의 요충인 춘천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국군 용사들은 육탄으로 적을 막아냈고 전선의 격동기에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치열한 격전 끝에 춘천을 수호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춘천에서 3·8선까지 30리, 휴전선까지는 125리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부전선의 요충인 이곳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국군용사들은 육탄으로 적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전선의 격동기에는 유엔군과 함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격전 끝에 춘천을 수복하여 오늘이 있게 하였다. 이곳에서 산화한 거룩한 영령들의 민족수호와 호국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는 오늘 번영하는 호반도시 춘천을 건설하고 그때 그들의 전공을 기리며 여기에 이 비를 세워 자주국방의 증표로 삼는 바이다. |
306 | 14-2-16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5-30 | 인천광역시 연수구 | 인천광역시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대 | 1984-09-15 |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에서 1984년 9월 15일 기념관을 건립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지휘하에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하여 성공함으로써 전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해 본 기념관을 건립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하셨던 참전용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킬 수 있는 전쟁사기념관이며, 본 기념관에는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각종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307 | 14-2-12 | 육군소령 강재구 흉상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동구 | 인천창영초등학교 | 동상 | 기타 | 1965 | 소 | 1966-05-06 | 인천시 동구 창영동 창영초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으로 많은 부하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1966년 5월 6일 흉상을 건립했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직전, 부하들의 수류탄 투척훈련 중의 일이었다. 한 사병이 앞으로 던져야 할 수류탄을 뒤로 추켜드는 순간에 놓침으로써 그 수류탄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앉아 있던 사병들 가운데 떨어졌다. 그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수많은 사병들이 희생하게 된다. 미쳐 주워 던질 겨를도 없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침으로써 많은 부하들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출하고 산화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창영초등학교 어린이회의 발의로 학부모, 졸업생, 교직원, 인천시 유지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
308 | 16-1-24 | 충의현비 | 독립운동 | 2004-12-09 | 춘천시 남면 | 춘천시 | 비석 | 의병운동 | 1842 | 1989-03-01 | 광복회강원도지부는 1989년 3월 1일 춘천시 남면 후동리에 항일의병의 대표적 인물인 유인석 선생과 의병장 유홍석 선생, 유홍석 선생의 며느리인 윤희순 여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충의현비(忠義峴碑)를 건립하였다. 유인석 선생(1842~1915)은 화서학파의 태두로서 직접 거의하여 일제와 맞서 싸웠고 유홍석 선생(1841~1913)은 1907년 춘천의병을 창의하여 춘천, 가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윤희순 여사(1860~1935)는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등을 작사, 작곡하여 의병운동 지원 및 여자의병 300명을 조직하는 등 부녀자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 |
309 | 15-2-61 | 한·미해병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4-04-15 | 6·25전쟁 발발 뒤 한·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중동부 전선에서 도솔산 지구 전투, 924고지 전투 등 수많은 작전을 함께 수행했으며, 1952년 3월 중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옮겨, 현재 참전비가 있는 지역은 미 해병 제1사단이, 장단 지역에서는 우리 해병이 정전 시까지 1년 4개월 동안 북한과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 서울을 방어했다. | |
310 | 10-1-39 | 충정공 민영환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서대문구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61 | 높이 5m, 지름 1.3m, 받침석 3.5m | 1957-06-01 |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을 추모 |
311 | 18-2-12 | 베트남(월남) 참전 기념탑(성남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 성남시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8-05-14 |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 산 10번지 황송공원 내 건립된 월남참전기념탑은 지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에 참전한 성남 지역 젊은 용사들의 혁혁한 전공과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산화한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성남시민이 그 뜻을 모아 1998년 5월 14일 건립했다. 이 기념탑의 원래 명칭이 해외참전기념탑이었으나 2004년 12월 베트남(월남) 참전기념탑으로 변경되었다가 2013년 월남 참전기념탑으로 다시 바뀌었다. 기념탑 왼쪽에는 기념탑 건립 취지문이 새겨져 있고, 우측에는 해외참전 부대별로 총 426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2013년 6월에는 성남시 거주 베트남 참전 국가유공자 3, 373명의 이름을 새긴 명각비를 새로 세웠다. |
312 | 41-1-11 | 박상진의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울산광역시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4 | 높이 4.5m, 둘레 3.2m | 1960-08-15 |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1905) 이후에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위가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모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하여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악질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1월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 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 1921년 8월 11일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박상진의사 추모비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 내에 위치해 있는데 1960년에 당시 울산시 교육위원으로 구성된 추모사업추진위원회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
313 | 55-2-19 | 현충탑(광양시)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탑 | 기타 | 1991 | 탑 높이 27m | 1991-09-04 | 광양시 중동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72위의 광양시 출신 호국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광양시)’을 건립하였다. 광양시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1년 9월 4일 이탑을 준공하였고, 1995년 4월 28일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광양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기 위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과역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14 | 16-2-87 | 원주시 무공탑 | 국가수호 | 2014-05-20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탑 | 기타 | 0 | 0 | 2013-06-17 | 원주시 단구근린공원에 2013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원주시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원주시 무공탑’을 건립하였다. 원주시와 무공수훈자회 원주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13년 6월 17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원주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15 | 45-2-07 | 충혼비(대정읍 )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대정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6-06 | 서귀포 하모리 충혼묘지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군경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대정읍에서는 김원기, 허익찬, 이방수, 이무웅, 서덕주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7년 6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대정읍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나라의 부름을 받아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정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316 | 15-2-19 | 기지리 6.25 전투진지(벙커)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기타 | 6·25전쟁 | 1950 | 1949-01-01 |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45번지에 위치한 기지리 6·25 전투진지(벙커)는 1949년 10월 한국군에서 북한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4개 진지를 구축한 것 중 유일하게 보존된 진지다. 6·25 전쟁 당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져 전쟁 후 4개의 진지 중 3개소는 소실되었다. 포천시는 기지리 6·25 전투진지를 전적지로서 잘 보존하여 6·25 때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후세에게 일깨우고 조국수호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안보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317 | 53-2-21 | 영암군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7-05-03 | 전라남도 영암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영암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신 4m, 5단 | 2006-10-17 | 영암군 장산리 도로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참전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얌군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영암군 지회는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10월 17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암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318 | 14-2-27 | 김포시 6·25 참전 유공자탑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김포시 | 6.25참전유공자회 김포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소 | 2007-12-04 | 김포시 6‧25 참전유공자탑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시까지 국가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각 전투에서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냈던 김포시 6·25참전 국가유공자 393명의 이름을 탑 후면에 새겨 후손들에게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김포시에서 2007년 12월 건립하였다. |
319 | 18-2-17 | 여주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8-11-25 | 경기도 여주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여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8-02-21 | 여주군 상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여주군 지회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8년 2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여주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20 | 53-1-21 | 남일 심수택 의병장 사당 | 독립운동 | 2015-10-14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사당 | 의병운동 | 1908 | 원형비 높이 1.5m / 기단 1.0m | 2012-05-16 | 남일 심수택(1971~1910) 의병장은 구한말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서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특히, 영암 사촌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을 사살하는 등 호남의병의 기세를 만천하에 떨쳤다.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삼남일 의진은 안규홍, 전해산 의진과 접촉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고 연합투쟁을 전개하는 등 일제군경과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321 | 33-2-41 | 무공수훈 국가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영천시 | 무공수훈자회 영천시지회 | 비석 | 기타 | 0 | 2004-12-10 | 참담한 비극의 역사를 열었던 6.25한국전쟁과 세계평화유지를 위하여 월남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 169명과 보국수훈자 26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
322 | 17-2-31 | 경찰 전적비(영월군) | 국가수호 | 2003-04-25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경찰서 | 비석 | 기타 | 1948 | - | 1992-06-02 | 영월경찰서는 1992년 6월 영월군 북면 공기리 888에 공비소탕작전에서 순직한 영월경찰서 소속 경찰관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공적과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경찰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영월지역은 8.15 해방후 줄곧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루트로 이용되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경찰에 의한 공비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11월 23일 영월경찰서 윤만섭 경위 지휘하에 1개 소대가 출동하여 13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고, 1949년 7월 20일 무장공비 3명이 민가를 습격하여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는 것을 경찰서장 엄정주의 지휘 아래 경찰관 40명, 마을청년 50명이 출동하여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월 지역 경찰관과 민간인 중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
323 | 15-2-33 | 충혼탑(옥계리)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3-01-01 | 1950년 10월 2일, 연천군이 공산치하에서 벗어나 수복될 당시 싸우다 전사한 일등중사 오을용 외 5명의 명복을 빌기 위해 1953년 10월 16일 건립하였다. 이 탑은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272-2에 위치하고 있던 것을 2010년 9월 현 위치로 이전하여 새롭게 정비한 것이다. |
324 | 25-2-33 | 6·25전쟁 참전 기념비(진천군) | 국가수호 | 2004-05-10 | 충청북도 진천군 | 6.25참전기념사업회 진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11-21 |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한 진천군 출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정신과 충정을 기리고 이를 후세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하여 2001년 건립하였다. |
325 | 55-1-10 | 의사 황병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향교 | 비석 | 의병운동 | 1876 | 높이 2m 폭 0.5m | 1986-08-15 | - 황병학은 1906년 7월 26일 산포수 2백여명을 규합하여 백운산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망덕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10척을 공격하여 침몰시키고 일본군을 사살하고 총기 등을 압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황병학은 광양을 비롯해 여수, 순천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옥곡원에 주둔중인 일본 헌병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일제 강제 병탄당하자 황병학 의병부대는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은신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병학은 기산도와 만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하다가 발각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가 의주에서 헌병대에 피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봄 출옥하여 귀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4월23일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이 비는 황병학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86년 8월 15일 건립하였다. |
326 | 52-1-23 | 기미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3-01-01 | 3·1독립운동이 막 시작된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천도교구장 한영태(韓榮泰, 1878~1919)는 전주교구실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강계대(姜啓大, 1884~1971), 박판덕(朴判德, 1900~1936), 우성오(禹成五, 1880~1943), 황성진(黃成瑱, 1868~미상), 김영원(金榮遠, 1853~1919), 박성근(朴成根, 1855~1925) 등 교도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각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3월 12일 임실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비롯한 임실 각 지역의 독립만세 시위가 잇달았다. 한영태를 비롯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던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한영태와 김영원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운암면 천도교 후손들이 주축이 된 운암 3대운동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동학농민운동 무인멸왜운동과 함께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6월 17일 이 비를 세웠다. |
327 | 18-1-01 | 안성 3·1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안성시 | 안성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1-11-17 |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만세고개에 위치한 3.1운동기념관은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안성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고,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건립되었다. 전시장에서는 3.1운동에 관한 각종 자료들과 모형, 체험관, 영상물 등을 소개한다. 또한 외부에는 순국선열 25인과 애국지사 195인의 위패를 봉인한 광복사, 안성시 양성면과 원곡면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친 장소를 알리는 만세고개 기념비, 기념탑, 무궁화동산 등을 설치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
328 | 43-1-45 |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진주시 | 진주성관리사무소장 | 비석 | 3·1운동 | 1919 | 1971-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 이강우·김재화·권채근·강달룡·박진환·박용근 등의 사전 준비로 3만여명이 모여 경남 도청 앞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9일에도 읍내 상점은 모두 철시하고 태극기와 악대까지 앞세워 만세시위를 하여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위에서 강달룡(姜達龍, 1888~1940), 강상호(姜相鎬, 1887~1957), 권채근(權采根, 1889~1920), 김성권(金聲權, 1875~1960), 김재화(金在華, 1892~1920), 박용근(朴龍根, 1883~1940), 박재룡(朴在龍, 1887~1955), 박진환(朴進煥, 1888~1940), 심두섭(沈斗燮, 1894~1975), 심호섭(沈護燮, 1891~1935), 이강우(李康雨, 1890~납북), 장덕익(張德翼, 1889~1947), 정용길(鄭鎔吉, 1887~1938), 한규상(韓圭相, 1896~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진주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329 | 55-2-43 | 경찰 충혼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남도 광양시 | 전남광양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탑1 | 2015-12-23 | 1950년 6.25전쟁 당시 백운산 전투에서 전사한 무연고 경찰관들의 유해 9위를 안치하고 묘역으로 조성하여 그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
330 | 30-1-32 | 해파 곽태진지사 현창비 | 독립운동 | 2011-11-10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7 | 1989-10-01 | 1917년 5월 18일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하였다. 1940년대 초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결사단체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5년 2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
331 | 33-2-11 | 호국학도 충의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고등학교 동창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0-01-01 |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한 포항고등학교 출신 전몰학도병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항구적으로 기리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호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 | |
332 | 55-1-22 | 돈헌 임병찬 의사 순지비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여수시 | 삼산면장 | 비석 | 의병운동 | 1851 | 기단 3.5m, 높이 3m | 1997-10-31 | 임병찬은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피체되고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음력)에 유배지에서 사망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333 | 25-2-30 | 무공수훈자 공적비(영동군)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영동군 | 무공수훈자회 영동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8-31 | 영동군 오탑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영동군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8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영동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34 | 52-2-55 | 6·25 참전용사 명비(계남면)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계남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장수군 화음리 보건지소 앞에 계남면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용사 명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 지회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1월 1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계남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계남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35 | 30-1-76 | 독립운동가 이상화 고택 | 독립운동 | 2020-5-8 | 대구광역시 중구 | (사)근대골목해설사회 | 생가 | 3·1운동 | 1919 | 0 | 2008-08-12(복원) | 대구출신 저항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상화(李相和, 1901 ~ 1943, 1990년 애족장)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한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2005년 대구시에 기부체납했다. 대구시는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을 설치하는 등 2008년 8월 복원을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2020년 5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으며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선생의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336 | 15-1-33 | 장준하 공원 | 독립운동 | 2018-12-4 | 경기도 파주시 | 경기도 파주시 | 장소 | 문화운동 | 0 | 2012-8-17 | 일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친 장준하 선생의 참 정신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함 | |
337 | 40-2-33 | 부경고등학교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0-5-8 | 부산광역시 서구 | 부경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9-11-27 | 6.25전쟁에 참전한 부경고(경남상고) 출신 283명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338 | 51-1-50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북도 정읍시 | 김용환 | 비석 | 해외운동 | 1919 | 높이 4.5m | 2009-02-24 | 1905년 최익현(崔益鉉)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이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김양수는 고예진(高禮鎭)과 고석진(高石鎭),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의 청년들과 정산(定山)에서 최익현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또한 김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작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 등의 영남유림과 김복한·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 등의 호서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때 김양수도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339 | 43-1-58 | 백초월대선사순국비 | 독립운동 | 2013-05-13 | 경상남도 고성군 | 백남덕 | 비석 | 기타 | 1944 | 1991-06-01 | 백초월은 1878년 2월 17일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위는 인영이고 법명이 초월이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였고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 법계를 받았다. 일제의 병탄 당시 대선사이신 이남파, 한용운, 김포광 등 저명한 큰 스님과 국권상실을 통탄하여 오다가 1914년 "한국민단본부"라는 구국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일심교"를 창안하여 2천만이 한마음이 되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일심교리를 선양하여 활동하다 일본 동경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당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원도와 지리산 등으로 전전하다 서울로 돌아와 서대문의 극락암에서 승려 70여명에게 수학을 하고 있던 중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주행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격문사건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고 또다시 청주형무소에 이감되어 3년 형고를 치르다 1944년 6월에 향년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1991년 6월 1일 향리인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 있는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백초월대선사 순국비를 세웠다. | |
340 | 12-1-11 |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4-05-20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1919 | 0 | 2010-01-20 |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김호림(金頀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창숙이지만 우(愚)라고 개명한 일도 있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지만 일제에 피수(被囚)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이란 별호(別號)도 붙었다. 성품이 곧아서 평생을 불의·부정·불법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리설(主理說)도 전수 받았다. 이러한 성장 과정으로 인하여 심산은 일찍부터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서구근대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개화(開化)와 외국의 것으로부터 내 것을 고수하자는 척사(斥邪)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게 되고 동시에 외세(外勢)와 저항이라는 사회변혁 속에서 전통적 유학자의 길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지킬 수 있는 구국부민(救國扶民)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심산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라는 을사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즉시 그는 이승희와 함께 시베리아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효심(孝心) 때문에 중단하고 계속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의 빚을 갚고 자립경제를 함으로써 일본을 물리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그는 이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성주지부(星州支部)를 결성하여 총무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리에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민족주의교육을 하였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韓日合倂論)을 제기하자 심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유림들을 모아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연서(連署)로 작성하여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日警)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마침내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오로지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적 실력은 이때 닦아졌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에 총총히 상경하여 민족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에 유림계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기회에 참여키 위하여 그는 영남·호남·호서의 유림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케 하였다. 이 장서는 그 이외에도 이중업(李中業)·곽대연(郭大淵)·유준근(柳濬根)·김 황(金榥) 등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連署)에 날인하였다. 인쇄되어 국내의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심산이 동년 3월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우송케 하였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심산은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 구(金九)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차회의의 결의에서 도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개최, 4월 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심산은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5차회의에서 그는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한편 심산은 그의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손 문(孫文)을 비롯하여 오 산(吳山)·서 겸(徐謙)·장병린(章炳麟) 등과 교통하여 한·중공동 항일 운동을 추진토록 하였다.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광동의 중국공교회원(中國孔敎會員)인 임복성(林福成)과 교유하면서 그곳 중의원(衆議院)에 나가 연설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그곳 광동에는 한국독립운동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복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천진(天津)에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간행하였다. 1923년 1월 민족의 단합을 위하고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양분되었고 이때 심산은 창조파의 국민의회대의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구국항쟁의 일념에 있던 그는 이때 민족운동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가치 않았던 것이다. 1925년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주장이 문제되자 그는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이를 성토·탄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한편 국내외적 변화에 따른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이 침체하자 심산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교포들을 모아 집단거주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산업의 추진,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입하는 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으로 만몽(滿蒙) 접경지에 황무지 3만 정보(町步)를 무상 조차하였고 이의 개간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그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경기·충청·경상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했으나 계획대로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국내에서의 잔학한 일제 식민지통치 아래 점차 상실되는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결사대(決死隊)를 파견, 각종 식민지기관을 파괴하기로 하였다. 1926년 이동녕·김 구·김원봉(金元鳳) 등과 상의,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하였다. 국내의 유림들도 그를 도와 모금운동을 하였고 이에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다. 1927년 5월 심산은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 중 일본 밀정에 발각 붙잡혀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그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강인한 정신은 반민족 반민주적인 독소를 제거키 위해 전환되었다. 즉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樂部事件)을 주동하여 재차 투옥되는 등 그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저서에 자서종요(字書綜要)와 벽옹70년회상기 등이 있다. |
341 | 51-2-31 | 베트남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02-12 | 전라북도 고창군 | 베트남참전고창군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기념비1, 명비1 | 2009-02-14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고창군지회는 2009년 2월 14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덕산리 산39-1에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의 위상을 드높인 고창 출신의 참전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342 | 52-1-44 |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 독립운동 | 2015-10-14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 고성이씨 화수회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0 | 19830801 |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하여서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愛國啓蒙團體)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2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처단하기 위해서 폭발장치를 한 선물상자로 위장하여 박제순(朴齊純)과 이지용(李址鎔)에게 우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오적신(五賊臣) 모두를 한꺼번에 처단하기로 하고 나인영·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이 자신회는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 40여명의 청년들이 가입하였고 많은 애국지사들의 협조가 있었다. 1907년 3월 25일 아침, 그는 동지들과 각기 지정한 장소에서 박제순·권중현 등을 처단하기 위해 대기하였으나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차질로 단지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동지들은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1907년 당시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의 판결에서 7년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얼마후 풀려났다. 그는 그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 처단을 위한 활동을 하는 등 이기선생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함. | |
343 | 50-2-46 | 김풍익 중령 상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포병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1980-06-25 | 고 김풍익 중령 약력 및 공적 1921. 8. 6.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출생 1941. 3. 31. 선린상업학교 졸업(제34회) 1948. 10. 11. 육군 소위 임관(육사 7특) 1950. 5.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장 1950. 6. 26. 의정부 금오리전투에서 전사 1950. 8 .24. 육군중령으로 추서 1950. 12. 30 을지 및 충무 무공훈장 수여 | |
344 | 40-2-34 | 동구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0-10-12 | 부산광역시 동구 | 부산광역시 동구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0-6-29 | 동구지역 출신 6.25참전유공자 920명의 이름을 명각한 비로 동구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지역 주민의 호국의식 함양을 위해 건립되었다. |
345 | 16-1-06 | 상록탑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춘천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36 | 1967-04-25 | 1936년 춘천고등학교 학생들은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상록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1938년 12월 상록회 조직이 일제 경찰에 노출되면서 학생들이 137명이나 체포되었고 10명이 2년 6월의 실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그 중 백흥기(10회)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그 후 1941년 2월 또다시 24명의 학생이 검거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이광훈(15회, 1924~1943)이 인천형무소에서, 고웅주(15회, 1923~1943)군이 김천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상록탑은 춘천고등학교동문회가 1967년 4월 25일 강원 춘천시 소양로3가 149-1 춘천고등학교 교정에 애국충정으로 산화한 춘천고등보통학교 출신 상록회원들의 얼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 |
346 | 25-2-32 | 무공수훈자 전공비(진천군) | 국가수호 | 2004-05-10 | 충청북도 진천군 | 무공수훈자 진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0 | 높이 5m, 기단(2mx1m) | 1995-05-13 |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진천군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기 위하여 1995년 5월 13일 건립하였다. 사선을 넘나들며 조국과 민족을 지킨 무공수훈자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347 | 25-2-35 | 6·25 참전용사 기념비(오송읍)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강외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6-23 | 강외면 재향군인회는 2003년 6월 청원군 강외면 오송리 274-1(강외면사무소 내)에 강외면 츨신 6·25참전유공자 박재기 외 162명의 나라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348 | 24-2-21 | 월남 참전 기념탑(충주)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충북지부충주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3-03-26 | 충주댐 좌안공원에 2003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충주시 지회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탑 건립을 추진하여 2003년 3월 26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충주 출신으로 이장흠, 곽상근, 김봉원, 강성인, 김용군 등 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49 | 50-1-33 |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7-11-11 | 전라남도 완도군 |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 기념관 | 기타 | 1909 | 0 | 2003-08-31 | 2003년 10월 20일에 문을 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의 애국선열들과 그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소안도는 1909년 당사도 의거사건, 13년에 걸친 토지 소유권 소송 승리, 사립 소안학교 설립, 수의위친계, 소안 배달청년회 창립 등을 통해 줄기차게 조국 광복을 외쳤으며, 소안도 주민 8000명 중 800여명이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았던 곳이다. 송내호 등 2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으며, 면민 전체가 독립 운동을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일의 함성이 거셌던 곳이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에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감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이준화는 1898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인본인 간수들을 처단했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르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학원과 사립 소안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토지소유권 반화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전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
350 | 45-2-52 | 딘 헤스 대령 공적 기념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방공관제사령부 | 조형물 | 6·25전쟁 | 2017-03-09 | 1917년 미국 오하이오 주 출생.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반년 만에 군에 입대,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51년 동안 250회 전투 출격해 눈부신 전과를 올렸으며,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애기(愛機)인 F-51D 무스탕 전투기 18호기에 써넣은 좌우명 "신념의 조인(By Faith I Fly)"은 대한민국 전투 조종사의 용맹과 헌신을 뜻하는 상징적 구호가 되었다. 또한, 미5공군 소속 군목 러셀블레이즈델 대령과 함께 전장의 참화속에 버려진 전쟁고아 1,000여명을 군 수송기로 구하는데 기여하고, 보육원 설립 및 전쟁고아 기금 마련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수호와 헌신의 공로로 대한민국 무공훈장, 소파상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
351 | 31-1-25 | 항일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후손(김하운,김정배) | 비석 | 3·1운동 | 1996 | 0 | 1996-04-18 | 안평면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는 중인 1919년 3월 15일 낮, 대사리 교회에서 장로 이종출, 김옥돈과 집사 이양준, 이북술 등 4명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날 밤 9시쯤 마을 사람 약 60명이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3월 16일 저녁 7시쯤, 100여명늬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마을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하다가 해산하였다. 3월 17일 시위에는 안평면의 괴산, 마전, 창길, 기도 등의 마을 사람들 100여명이 여러 마을을 돌아 안평 경찰관 주재소 앞에 가서 만세시위를 한 후 하녕리에서 해산했는데, 얼마 뒤 출동한 의성경찰서 군경에 의해 12명이 구속되었다. 3월 18일 시위에는 약 300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이어 19일에는 400여명의 시위대원들이 안평 경찰관 주재소까지 몰려가 시위하였다.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일어난 안평면 대사리(우리골) 만세시위는 대사리 기독교 교회 교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지도되었으며 농민들이 전면에 나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96년 4월 18일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안평군 독립운동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352 | 42-2-16 | 하청면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01 | 경상남도 거제시 | 하청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5-01-01 | 거제 하청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하청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하청면 충혼비’ 를 건립하였다. 신성현 외 1인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5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하청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청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53 | 55-1-37 | 서재필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07-11-11 | 전라남도 보성군 |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 기념관 | 민족주의운동 | 1864 | 기념관 건물 18동 | 2003-12-31 |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났다.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 천하를 이루었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1896년 귀국하여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문을 건립했으며, 자주독립 의식을 고양하고 근대 문명을 보급하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조야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그의 위업을 기리고자 1992년 사업을 시작하여 서재필 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다. 기념공원 인근에 부속시설로 서재필 선생의 생가(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 차량 10분 거리)가 함께 지정되어 있다. |
354 | 15-2-78 |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 | 국가수호 | 2005-05-02 | 경기도 파주시 | 특수임무유공자회 파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4-10-31 | 1951-1953년 6.25전쟁기간중 적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주요한 정보를 수집보고하여 미제8군과 전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큰 공적을 세운 많은 요원이 희생되어 그들의 추모와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355 | 52-1-37 | 백용성조사 유적지 | 독립운동 | 2008-11-25 | 전라북도 장수군 | (사)독립운동가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 장소 | 3·1운동 | 1863 | 0 | 2007-10-9 | 백용성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수도 정진 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선농불교의 대각사상을 바탕으로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 날인하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하여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혐의로 1년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었으며, 출옥 후에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1921년 3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위한 각종 포교서의 저술에 착수하고, 불교 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전승하였다. 1927년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하고 선농일치운동을 통한 민족구제 및 사원 경제의 자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기지로 활용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8년부터 7년간에 걸쳐 생가복원과 유적지를 건립하였으며 기념관과 용성교육관, 대웅보전, 생가, 오사채, 승방으로 구성되어있다. |
356 | 31-2-28 | 6·25 참전 유공자 선양비(신평면) | 국가수호 | 2004-12-22 | 경상북도 의성군 |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 의성군지회신평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3-11-27 | 의성군 신평면사무소 옆 면민회관 광장에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유공자 선양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의성군지회 신평면 분회는 이곳 출신 이봉성, 최재수 등 전사자를 포함한 참전유공자 115명의 숭고한 충절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11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평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려 분투하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357 | 51-1-34 | 백정기의사고택지 | 독립운동 | 2016-11-03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초가집1채 | 2008-01-01 | 이곳은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07년 8월 25일 정읍으로 이주하여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2년 동안 살던 곳이다. 백정기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으며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1운동을 목격하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동지를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해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0년 서울의 중부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1922년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곳에서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해,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둥팅 호[洞庭湖] 근처의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여름 도쿄에 잠입해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9월에는 상하이의 철공장에 들어갔다. 1925년 신채호 등이 조직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으며 5·30총파업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8년 5월에는 일본상품배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자유혁명자연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군의 시설파괴, 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상하이로 돌아와 이회영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해 상하이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한 후, 3월에 상하이 홍커우[虹口]에 있는 육삼정에서 열린 일본요인과 친일파들의 연회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으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
358 | 40-1-27 | 3·1운동 유공비 | 독립운동 | 2009-09-22 | 부산광역시 금정구 | 금정중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1970-03-01 | 범어사 학생의거 관련 3·1운동 유공자 42분의 공적을 기리고 이 고장 출신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1995년 3월 1일에 금정구 금정중학교 안에 건립된 비이다. 범어사 지방학림(고등보통과정)을 졸업한 김법린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3월 17일 저녁에 개최된 명정학교, 지방학림 두 학교 졸업생을 위한 송별연 모임에서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하여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한번 죽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1천장이 준비되었고, 태극기도 이미 제작해 두었다. 송별연 모임은 김영규의 축사를 끝으로 모두 ‘대한독립만세’ 3창을 외쳤고, 청련암으로 자리를 옮겨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동래읍에 잠입하기로 하였다. 주동인물들이 불교포교당에 18일 새벽 1시쯤에 도착하였으나, 한 학생의 밀고로 일본 헌병과 경찰이 들이닥쳐, 김영규, 김상기, 김학기 등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인원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다음날 19일 아침,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동래시장을 비롯한 동래읍 일원에 뿌리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십 명의 명정학교, 지방학림 학생들과 민중들이 합세하여 동래시장 남문부근에 다시 집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돌진하다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인물은 대부분 검거되었다. 이 의거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34명에 달하며 대부분 부산 또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
359 | 55-1-42 |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순천시 | 순천시 | 비석 | 해외운동 | 1940 | 비석1식 | 2009-02-28 | 조경한은 1900년 주암면 한동 마을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단의 국내연락원으로 활약했다. 1924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덕신의숙, 계명학원 법정과에 다니면서 신채호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26년 만주에서 배달청년회의 배신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정의부 교민교과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참여,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의 책임을 맡았고 1931년 지청천·김창환·황학수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만주 각지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33년 뤄양군관학교의 교관에 임명되어 청년군사간부의 양성에 힘썼다. 1935년 민족혁명당에 참여했고 1937년 지청천 등과 조선혁명당을 창설하고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8월 한국광복전선이 조직되자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임시정부에서 군사학 편찬위원으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였다. 1941년 12월 광복군장교훈련소가 설치되자, 송호성·나월환과 같이 훈련책임을 맡았으며, 1942년 10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으로 선전업무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징계심사분과위원장,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 국무위원회 부비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4년에는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중앙상무 집행위원이 되었다. 추모비는 2009년 순천 금당 공원에 조형물과 함께 건립되었다. 조형물과 추모비는 전국 공모를 거쳐 양진옥 작가의 ‘빛의 소리’를 선정해 설치했다. 설치된 조형물은 조경한이 참여한 100여 회의 크고 작은 항일 전투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던 대전자 전투를 형상화한 것으로 그의 애국심을 절벽에 피어나는 태극기로 형상화 하고 있다. |
360 | 16-1-42 | 3.1만세운동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18-05-10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 장소 | 3·1운동 | 1919 | 2017-09-05 | 1919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고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김화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3월 23일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500여명이 거사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내부 고발로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읍내로 향하던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맞서 30분간 맹렬한 격투를 하였으나 읍내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또한 김창희의 지휘 하에 화천장터에 모인 논미리, 구운리, 노동리, 풍산리 등의 주민들도 후일을 도모하고 해산하였다. 3월 28일에는 유학자, 청년, 농민, 의병출신, 산림기수, 일부 구장 등이 주도하여 상서면민들과 더욱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천장날이었던 이날 상서면 봉오리에 모인 천도교인들과 다목리, 파포리 주민 1,000여명은 만세를 부르며 상서면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면장과 면서기를 사로잡아 만세를 부르게 하고 화천읍으로 진격하였다.거사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주민 2,000여명은 지금의 화천읍 신읍리에서 화천읍내로 향하던 중 신풍리에 도착한 일본헌병들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격렬히 대치하다 4명이 즉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시위대는 그들을 저지하는 헌병에게 무력을 가하기도 하고 관공서를 공격·파괴하기도 하는 등 강렬히 저항하였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군민 3,500여명 이상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인원만 175명이 넘었다. 이들 피검된 숫자는 강원도에서 화천군이 가장 많았으며, 22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즉결재판으로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우리는 3․1만세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3. 23, 3. 28 화천만세항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화천의 얼과 민족의 자긍심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3․1만세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한다. | |
361 | 45-2-43 | 한규택상병 호국영웅 흉상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상귀리 | 동상 | 6·25전쟁 | 1950 | 2001-06-01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하귀초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으로 6·25전쟁영웅 100인에 선정된 한규택 상병을 추모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제주도청 등에서 2001년 6월 1일 흉상을 건립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해병 제3기로 자원입대한 한규택 상병은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리 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1950년 11월 20일 해병대 제3대대 11중대는 동양리 지구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이 지역에 준동하는 적 패잔병들의 소탕임무를 부여받았다. 원산~평양 간 도로의 요충지인 동양리 일대의 보급로 차단을 위한 대대 규모의 북한군 공격을 받은 11중대는 불리한 지형에서의 방어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적 기관총의 맹렬한 사격에도 한규택 상병을 비롯한 화기소대 대원들은 위기에 처한 중대의 철수를 위한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때 선두에 있던 한 상병은 이미 적탄에 부상을 당해 왼쪽 어깨에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도 적 기관총 3정을 공격목표로 정하고 차례로 2정을 명중시켰다. 다시 세 번째 기관총 격파를 시도하려는 순간 적 탄환이 한 상병의 가슴을 관통, 2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한 상병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2001년 그의 모교인 제주도 하귀초등학교 교정에 흉상으로 건립돼 나라 사랑의 소중한 교훈을 심어 주고 있다. 또 2010년에는 해병대를 빛낸 호국 인물에도 선정돼 참군인의 표상으로 전군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
362 | 13-2-08 | 현충탑(평택시 비전동)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 탑 | 기타 | 1950 | 0 | 1957-08-15 | 평택 덕동산 정상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628위의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평택시 비전동)’을 건립하였다. 평택군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7년 8월 15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평택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363 | 55-1-14 | 광양 5의사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향교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2m 폭 0.5m | 1966-01-1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광양읍 시장에서 서경식·박용래·김상후· 정길화·정용현 등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1천여명의 군민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서경식(徐璟植), 박용래(朴龍來), 김상후(金尙厚)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양향교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6년 1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
364 | 13-1-06 |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수원시 |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학사지원팀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79 | 0 | 1990-02-01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도왔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
365 | 33-1-21 | 의사 일천 정수기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건천읍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6 | 0 | 1968-01-01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의 원로 김창숙 선생과 연락을 취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웠다. 이에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366 | 52-2-30 | 충혼비(전주생명과학고)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9-05-01 | 전주생명과학교 교정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학교 출신 학생 28명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당시 전주농고에서는 모교 출신 양은섭, 장재원, 박종기, 홍준기 등 28명의 숭고한 애국열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우러러 받들고자 1985년 5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당시 전주농림고등학교 학생들은 조국의 통일과 자유를 위하여 책과 붓 대신에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출전하여 포항, 38선 전투 등에서 무공을 세웠지만 불행히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 전주생명과학고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67 | 40-1-15 | 박차정의사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금정구 | 동래여자고등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1910 | 0 | 2001-01-01 |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한 아버지와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와 둘째오빠 박문호 등 항일 운동가 집안이다. 그는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체포, 구금당했다. 1930년 근우회 활동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 중 중국으로 망명, 중국 남경에서 약산 김원봉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의열단 조선혁명 간부학교 제 1기 여자교관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 어깨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에 사망하였다.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368 | 43-1-14 |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비석 | 3·1운동 | 1895 | 1971-04-01 | 하승현은 경상남도 함양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함양 장날 김한익이 주도한 함양읍 만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김한익이 붙잡혀 가게 되자 하승현이 군중들을 데리고 노도와 같이 뒤를 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 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역시 순국하였다. 병곡면민은 하승현 선생의 순절을 기리는 뜻에서 1953년 면장의 발의와 군수의 동의로 기념비를 상림 위쪽 뇌계천 도로변에 세웠고 군내의 뜻있는 분들이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솔숲에 사적지를 만들었으며 1967년에는 상림에 의거 기념비를 군에서 건립하였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 |
369 | 18-2-21 | 호국 유공자 공적비(용인시) | 국가수호 | 2010-02-12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비석 | 기타 | 0 | 가로 23m 세로 6m 높이 8.05m | 2009-07-01 | 용인중앙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유공자 공적비(용인시)’를 건립하였다. 용인시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7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용인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370 | 30-2-44 | 6.25 및 월남참전 기념비(김천시 구성면) | 국가수호 | 2012-05-16 | 경상북도 김천시 | 6.25및월남참전유공전우회 김천시 구성분회장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2009-12-20 |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호국정신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구성면은 이곳 출신으로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10년 7월 9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구성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구성면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371 | 23-1-42 | 김인전선생추모비 | 독립운동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김인전선생 추모사업추진 위원회 | 비석 | 해외운동 | 1876 | 2004-03-16 | 김인전은 1876년 10월 7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촌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하여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고, 또한 27세 때인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1906년 11월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교육 계몽운동에 뛰어 들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현실화되자 선생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선생은 전주 서문외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 예수교 장로회 성경학교 교수·전북노회장 등의 교직을 이용한 전도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무장 독립투쟁의 필요성을 새삼 인식하기 시작하여 1922년 10월 1일 상해에서 한국노병회의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심신의 피로가 겹쳐 상해 동인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가 순국하였다. 1980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 |
372 | 25-2-56 | 6·25 참전 유공자비(용화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 용화면 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10-20 | 6·25참전유공자회 용화면분회는 2006년 10월 용화면 용화리 848-1에 용화면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넋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하여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373 | 16-2-91 | 6·25참전국적근산지구전투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16-11-23 | 강원도 화천군 | 육군제6685부대 | 공원 | 6·25전쟁 | 1950 | 2014-06-15 | 6·25한국전쟁 당시 세계 평화 수호를 위해 유엔군 16개국이 참전하였었다. 특히 화천의 적근산지구와 산양리지구에서 전공을 올린 에티오피아군 및 콜롬비아군의 영웅적인 참전용사의 공헌을 기리고자 이 곳 적근동에 2개 참전국의 전투기념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적근산지구 전적비는 1983년 10월 27일 상서면 마현리 산89번지에 건립되었으나,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위치하여 2014년 6월 15일 본 기념공원으로 이전 설치하게 되엇으며, 콜롬비아 산양리지구 전적비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군 병사 다니엘 우르따도 등 3명이 전쟁 중에 전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신규 설치하였다.(이하 하단 참조) | |
374 | 50-2-47 | 박양규공 충혼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1-04-20 | 고 박양규는 6.25당시 나주경찰서 순경으로 재직 중 1950. 7. 29. 나주시 교동소재 나주중학교에서 적정 탐지차 매복 근무 중 단신으로 적과 교전하며 적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사한 사실을 기리며 건립하였다. |
375 | 17-2-40 | 충혼탑(삼척시 원덕읍)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삼척시 | 원덕읍 | 탑 | 6·25전쟁 | 1950 | 2000-06-06 | 한국전쟁 중 삼척시를 수호하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순절한 삼척시 원덕읍 출신 전몰군경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 |
376 | 18-2-24 | 안성시 6.25 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0-11-03 | 경기도 안성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안성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9-28 | 6·25참전유공자회 안성시지회는 2005년 9월 28일 경기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 112-52 대림동산 내에 안성시 6·25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여 6·25전쟁 기간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안성시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기윟위해 건맂립하였다. |
377 | 50-2-45 | 최범섭중령 상 | 국가수호 | 2014-05-20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1968 | 2010-10-21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상무대 내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최범섭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에서 2010년 10월 21일 동상을 건립했다. 최범섭 소령은 1966년 6월, 베트남에 파병된 태권도 교관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1964년 9월, 의료지원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면서부터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병해 남베트남의 군사교육기관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태권도가 한국군을 알리고 위용을 과시하는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 시기에 파병됐던 최범섭 소령은 메콩강 남쪽 '껀토'에 위치한 남베트남군 제4군단의 태권도 교육을 담당하는 제4지구대장이었다. 당시 껀토 일대에 주둔한 한국군은 태권도 교관단뿐이었다. 따라서 최소령은 그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40여명의 한국 민간인 기술자에 대한 후견인 역할까지 담당해야 했다. 껀토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의 아비규환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특히 1968년 1월 31일에 시작된 베트콩의 음력 1월 1일 '뗏(Tet)공세'는 치열했다. 남베트남군의 많은 병력이 고향을 향해 휴가를 떠났으며, 우방국 병력들도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1월 31일 새벽,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최범섭 소령이 근무하고 있던 껀토에서도 베트콩의 기습공격은 예외가 없었다. 그때 제4군단사령부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최범섭 소령은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한국인 기술자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인 2월 1일 아침10시경, 보좌하사관 윤청길 중사를 대동하고, 껀토 시내로 나가 민간인 기술자들을 소집했다. 12시까지 20여 명의 기술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최범섭 소령은 그들을 남베트남군 제4군단 내 자신의 숙소로 긴급 대피시켰다. 이어 남베트남 군 관계자에게 장갑차 1대와 칼빈 소총 20정을 대여받아 민간인 기술자들을 무장시켜 자체 경비에 임하면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내에 침투한 베트콩들의 도발은 점점 더 격화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만 했다. 최범섭 소령은 나머지 20여 명의 동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나머지 20여 명의 기술자를 구출하기 위해 2월 6일 윤청길 중사를 대동하고, 시내로 달려갔다. 최범섭 소령이 보좌관 윤중사와 함께 시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민간인 기술자들을 소집하고 있을 때인 10시 20경이었다. 최 소령 일행은 갑자기 조우한 베트콩 5명과 총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과 교전에서 윤청길 중사가 초전에 전사했다. 최 소령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5발이 장전된 권총으로 응사하며, 교전을 계속한 결과 베트콩 2명을 사살했지만 결국 그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최범섭 소령의 불타는 사명의식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 ||
378 | 33-1-49 | 산남의진 죽장 입암리 사적비 | 독립운동 | 2016-11-23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입암서원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0 | 19850101 | 1907년 8월 하순 산남의진(山南義陣) 대장 정용기(鄭鏞基)는 관동(關東)으로 북상하기 위해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일군 죽장면(竹場面)에 주둔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청송 방면에서 입암(立巖)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우재룡(禹在龍)·김일언(金一彦)·이세기(李世基) 세 부장을 각기 길목에 매복시키고, 자신의 본대는 9월 1일 새벽에 입암을 기습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세기 부장이 입암에서 일본군 수명을 발견하고 성급하게 공격하다가 적의 복병에게 집중공격을 받아 패하였다. 이때 정용기는 갑작스런 포성을 듣고 밤중에 입암으로 진군하다가 일본군과 새벽까지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 수십명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산남의진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달려와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인솔하였다. |
379 | 31-2-18 | 6·25 참전용사 선양비(풍기읍)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영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영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0-12-28 | 풍기읍 6·25참전용사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0년 12월 28일 영주시 풍기읍 동부리 463-1(풍기문화의 집 경내)에 풍기읍에 거주하는 6·25전쟁 참전유공자 192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선양비를 세우고 그 비에 이름을 각인하였다. | |
380 | 53-2-10 | 순직경찰관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3.5m/ 기단 1m | 1999-03-31 | 영암경찰서 근무 중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6·25 때 전사 혹은 공무중 순직한 경찰관 영령 108위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영암경찰서가 1999년 3월 31일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137-2(영암경찰서내 후정녹지)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에는 북한군 500명과 군내에서 교전 중 산화한 김준병 경감 등 108명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
381 | 41-2-13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울주군) | 국가수호 | 2010-02-12 | 울산광역시 울주군 | 무공수훈자회 울산광역시지부 울주군지회 | 비석 | 기타 | 0 | 탑높이 3m, 둘레 7.2m | 2009-06-12 | 1950년 민족상잔의 6·25전쟁으로 한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을 구해 낸 역전의 용사들 그리고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울주군 무공수훈자들의 위훈과 충정을 기리고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건립하였다. |
382 | 10-1-20 | 순국선열 추념탑 | 독립운동 | 2003-02-04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독립공원관리사무소 | 탑 | 기타 | 1992 | 높이 22.3m, 좌우 길이 40m | 1992-08-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안중근(安重根, 1878~1910)·강우규(姜宇奎, 1859~1920)·이봉창(李奉昌, 1900~1932)·윤봉길(尹奉吉, 1908~1932) 같은 의열투쟁, 1919년 3·1독립운동,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같은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거나 혹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8월 15일 이탑을 세웠다. |
383 | 11-1-03 | 6·10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중앙고등학교 | 비석 | 문화운동 | 1926 | 0 | 1983-10-10 | 1926년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가 붕어하자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 전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격문 3만매를 인쇄하여 각급 학교에 배부하였고 융희황제 인산일인 6월 10일 장례행렬이 단성사 앞 연도를 통과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십 명의 학생이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격문 1천매를 군중에게 살포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 시위로 100여명이 부상하고 2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체포되었다. 1983년 6월 10일 동아일보사와 중앙고등학교 교우회가 6·10만세운동 때 활약한 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
384 | 45-2-31 | 6·25 참전 기념비(신천리) (45-2-17동일장소)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천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8-06-25 | 신천리 주민 일동은 1998년 6월 25일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 518-2에 6·25전쟁에 참전한 신천리 출신 청소년 62명(전사자 11위, 생환자 51명)의 공적을 기리고 위태로웠던 국토와 민족을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에 심신을 바친 갸륵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하여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385 | 16-2-62 | 충혼비(인제군) | 국가수호 | 2004-05-08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06-26 | 인제군 하남고개 정상에 6·25전쟁 중 향토를 지키려다 순국한 결사대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인제기린향우회는 이곳 출신 결사대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81년 6월 26일 기념비를 세웠다.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향토가 유린될 때, 한명대·양일용·박설철·임종덕 등 이 지역 청년들은 고향과 국가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가 산화했다. 기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86 | 26-1-06 |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목천읍행정복지센터 | 비석 | 3·1운동 | 1919 | 1989-03-14 |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무렵 천안군 목천읍에 있는 목천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 약 120명[목천 기미 독립 만세 운동 기념사업회에서는 171명으로 계산]이 교정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목천읍 읍내로 진출하여 일본 헌병대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를 앞장서서 이끈 인물로 네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하여 오는 기록이 없다. 당시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의 나이는 13~23세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각지로 파급 확산되어 4월 1일은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투쟁 의거인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니 이곳 목천 학생의거는 바로 천안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으로서 주동학생 4명이 체포·구금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191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1989년 3월 14일에 목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에 높이 3.5m의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387 | 15-2-109 |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 국가수호 | 2016-11-23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기념관 | 6·25전쟁 | 1951 | 0 | 2015-01-05 | - 지평의병 :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화서학파 문인 및 포수 400명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형성된 지평의병은 을미의병의 시초로써 원주·단양 등지에서 큰 공을 세우고 강원·충북 의병봉기의 도화선 역할을 함 - 지평리 전투 : 1951년 2월 13일~15일 미국과 프랑스 연대가 중공군 5개 사단을 물리친 전투로, 중공군에게 첫 패배를 안기고 1·4후퇴 이후 연이은 패배로 불리해진 아군의 전세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 |
388 | 15-2-49 |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5-09-26 | 국방부는 1975년 9월 26일 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동 13(소요산관광지앞)에 6·25전쟁때 참전한 벨기에군(지상군 1개대대)과 룩셈부르크군(지상군 1개소대)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벨기에는 900명으로 편성된 보병대대를 편성했고 룩셈부르크는 44명으로 편성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벨기에 A중대에 배속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1951년 1월 30일 부산에 도착해 3월 말 동두천에 진출했다. 이어 지금의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소요산 입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후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돼 적성의 신산리에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했다. 전선이 북상됨에 따라 대대는 연천-철원을 거쳐 김화로 이동하면서 학당리 전투와 잣골 전투를 잇달아 치른 후 정전을 맞았다. 벨기에 대대는 참전기간 중 104명의 전사자와 336명의 부상자, 1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룩셈부르크 소대는 2명의 전사자와 1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
389 | 42-2-41 | 무공수훈자 전공비 (마산)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경상남도지부 마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9-10-15 | 마산시 무공수훈자회는 1999년 10월 15일 마산시 합포구 석전동 석전삼거리 소공원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토수호를 위해 그리고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마산시 출신 무공수훈자 214명의 공훈을 선양하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고, 전공비 뒷면에 214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
390 | 25-2-64 | 6·25 참전 유공자 기념탑(보은군) | 국가수호 | 2010-03-10 | 충청북도 보은군 | 6.25참전유공자회 보은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4-03-31 | 6·25참전유공자회 보은군지회는 2004년 3월 보은군 보은읍 죽전리 산11-3(남산공원 내)에 보은군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나라사랑정신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유공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391 | 16-2-97 | 한국전 UN프랑스군 원주지구 전투전적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흥업면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9-11-29 | 1951년 1월 9일부터 15일까지 한국군 장병 2명을 포함하여 프랑스 대대 최초로 15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의 명을 받들어 프랑스 대대는 마장-외남송-구억천 지역에서 최초의 총검 전투를 펼쳤다.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강릉원주대학교 및 한국전 UN프랑스군 참전기념사업회가 2009년 11월 건립하였다. |
392 | 25-2-62 | 부자 조종사 흉상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청주시 |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동상 | 기타 | 1984 | 2009-07-20 | 충북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앞에 부자 조종사인 박명렬 소령과 박인철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한국국방안보포럼에서 2009년 7월 20일 이 흉상을 세웠다. 아버지 박명렬 소령(공군사관학교 26기)은 공군 제17전투비행단 소속이었으며 팀스피릿 훈련중 F-4E를 조종하다 사고로 1984년 순직하였다. 박인철 대위는 전투기 조종사로 2007년 7월 20일 KF-16 야간비행 훈련 중 기체가 황해로 추락하는 사고로 순직하였다. 어머니 이준신과 공군 조종사인 아버지 박명렬의 장남이다. 사고 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공군사관학교 52기로 졸업하였으며 2004년 임관하였다. 순직으로 1계급 특진, 대위가 되었다. 2007년 7월 23일 충청남도 서산시의 20전투비행단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아버지 묘소 옆에 나란히 묻혔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비행 전 남겨 둔 머리카락이 대신 묻혔다. 아버지 순직후 어머니와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아버지에 이어 2006년 조종사의 꿈을 이루었다. | |
393 | 16-2-82 | 철원군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11-03 | 강원도 철원군 | 철원군수 | 비석 | 기타 | 1950 | 2008-04-15 | 철원지역 6.25 및 월남전참전유공자의 공훈 | |
394 | 17-2-60 | 지리산함 전사자 충혼탑 | 국가수호 | 2013-11-22 | 강원도 강릉시 | 해군 제8385부대(해군 제1함대사령부) | 탑 | 6·25전쟁 | 1951 | 너비 11mX9m, 높이 8.95m | 2013-05-27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통일공원 내에 6·25전쟁 당시 원산만 봉쇄작전 임무수행중 전사한 지리산함 승조원 57인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 제1함대사령부에서 2013년 5월 27일 이 탑을 건립했다. 맥아더 장군의 '오퍼레이션 원산' 명령에 따라 1950년 10월 2일 원산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포항 전선을 출발하여 하루 평균 15마일의 속도로 원산을 향해 돌격했다. 해군의 전폭적인 함포 사격과 측방 보급은 원산으로의 진격을 한결 더 수월하게 해 주었다. 10월 9일, 국군과 미 해병대는 원산만 입구에서 접전을 벌였고, 10월 10일에 원산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다. '오퍼레이션 탈리보드'는 미국 육군의 작전명으로, 오퍼레이션 원산에 이어서, 뒤따라 상륙한 작전이다. 육군 제3사단은 10월 2일, 38선을 돌파하고 양양에 동해 사령부를 설치하고 원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이후 국군은 고성, 통천 등에서 거센 저항을 받았으나 진격 8일 만에 원산 남부에 도착했다. 중공군은 고립된 지형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험준한 산지를 이용해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10일, 원산 시가지에는 아침부터 접전이 시작되었다. 10월 13일, 원산 비행장을 점령하고 다음날 10월 14일에 원산 점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작전을 마무리하였다. 지리산함은 1950년 5월 27일 해군장병 및 국민의 성금으로 미국에서 도입했다. 1950년 7월 25일 부터 1951년 12월 26일 침몰시까지 유엔 해군과 연합 작전 최선두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1년 12월 24일 부산을 출항하여 상기의 12월 25일 원산만 봉쇄작전(원산해역 경비작전) 수행 중 12월 26일 적의 기뢰에 접촉, 침몰했다. 이때 함장 이태영 중령 등 승조원 57명이 전사했다. |
395 | 42-2-64 | (진해중·고 출신) 한국전쟁 학도병 참전비 | 국가수호 | 2015-10-14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진해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1998-12-31 | 6ㆍ25전쟁당시 진해 중ㆍ고등학교 재학생들의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신 13명과 참전하신 194명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호국정신을 기리고 재학생들에게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고 국가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됨 |
396 | 11-1-05 |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공원녹지과(탑골공원 관리사무소) | 동상 | 문화운동 | 1861 | - | 1966-05-19 | 천도교 3대 교주로서 1919년 2월 조선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조선독립을 선언 하고 적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으신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 선생을 추모 |
397 | 13-2-22 | 6·25 학도병 참전 기념상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00-06-26 |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이상에 따라 결정된다. 민족상잔의 아픔인 6.25사변 50주년에 즈음하여 학도병의 몸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신 아름다운 영혼의 거룩한 희생정신과 생존하시는 서른여덟 분의 호국정신을 여기에 새긴다. "광교의 푸른 봉에 동이 터오니 할 일 많은 조국의 날이 밝았다. 일어서라 장부야, 큰 뜻을 품고 눈부신 새역사의 쟁기를 몰자," 목청 높여 부르던 교가를 실천하듯 참전 선배 동문들은 큰 뜻을 품고 그 가치를 높이섰다. 젊은 청춘을 바쳐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고 꿋꿋한 역정을 뒤로한 자랑스런 참전 동문 선배들의 고결한 숨결은 오늘 이 지상 곳곳에 공기처럼 퍼져나간다. 모든 사람은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용기있는 사람은 생명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한다. 광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 우리 삶의 귀감을 삼자. 6.25참전 선배들의 조국사랑을 뜨거운 정열과 냉철한 지성으로 참전 동문 선배들이 머물던 이 교정에 그 뜻을 새겨 볓별빛처럼 후대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
398 | 15-2-51 | 캐나다 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5-11-07 | 1951년 4월 24일과 25일에 치른 가평지구 전투에서 희생한 캐나다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참전기념비이다. 캐나다군은 6·25전쟁에 참전하여 309명이 사망하고 1203명이 부상하였으며, 32명이 실종되는 등 제1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 1975년 11월 7일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주관하여 세웠고, 1983년 12월 30일 가평군이 재건립하였다. 부지면적은 1653㎡이고, 기단의 높이는 0.7m, 총 높이는 6.5m이다. 기단의 중앙에 비문이 새겨져 있고, 비 오른쪽에는 참전 약사가, 왼쪽에는 캐나다 상징탑이 세워져 있다. 2003년 7월 29일 6·25전쟁 휴전 50주년을 맞아 캐나다 측에서 입구 오른쪽에 기념비석을 세웠다. 매년 4월 마지막 주에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 |
399 | 55-1-44 | 곡성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11-10 | 전라남도 곡성군 | (사)국조단군곡성숭모회 | 탑 | 3·1운동 | 1919 | 탑 높이 11.4m | 2011-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9일 곡성읍 장날 신태윤·정래성·김경석·김중호·양성만·박수창·김기섭·김태수 등의 사전 준비로 장터에서 신태윤과 곡성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신태윤(申泰允, 1884~1962), 정래성(丁來聖)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단법인 국조단군곡성숭모회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서 2011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400 | 52-2-41 | 충혼탑(완주군)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완주군수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3-10-07 | 완주군 삼례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 등 완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완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3년 10월 7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0년 6월 6일 현재의 장소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완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완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01 | 25-2-41 | 6·25 참전 유공자비(매곡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매곡면6.25참전유공자회 변학근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11-17 | 매곡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49-14에 매곡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32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402 | 51-2-22 | 충혼비 | 국가수호 | 2005-10-18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영원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2.2M X 0.6M X 1.4M | 1954-08-15 |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험에 처해있을때 영원지역의 향토방위를 위해 싸우다 순국한 군인고 경찰등 59명의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함 |
403 | 40-2-23 | 건국청년운동기념비 | 국가수호 | 2015-10-14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사)대한민국건국회부산광역시본부 | 비석 | 6·25전쟁 | 0 | 1995-04-20 | 1945년 광복이후 전국에서 청년과 학생들이 궐기하여 공산당과 항쟁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터전을 닦고, 6.25남침때는 총을 메고 싸워 자유수호 호국의 초석을 다진 것을 기념하고자 이 비를 세움 | |
404 | 15-2-108 | (의정부)월남전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의정부시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의정부시지회 | 비석 | 월남전쟁 | 1965 | 2002-05-31 |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자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써 1965년부터 베트남에 참전했다. 이들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은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경험과 미군의 지원으로 국방력을 제고할 수 있었으며, 공산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는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 | |
405 | 50-2-50 | 광주광역시 6.25전쟁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전몰군경유족회 광주광역시지부 | 조형물 | 6·25전쟁 | 가로 4.8m, 세로 2.248m | 2017-05-30 | 광주광역시 출신 6.25전쟁 전사자 1,891명을 명비에 각자하여 그들의 넋과 얼을 기리고 있음 | |
406 | 26-2-07 | 6·25전쟁 참전 유공자비(부강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세종특별자치시 | 세종특별자치시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7-01 | 청원군 부강리에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부용면 재향군인회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헌신한 이곳 출신 임사수, 오창균, 박복만, 박윤기 등 호국용사의 숭고하고 거룩한 애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7월 1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부용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용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07 | 41-1-17 |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동상 | 기타 | - | 가로 3.1m, 세로 1.5m, 높이 2.3m | 2017-12-18 | 우산(右山) 윤현진 선생은 양산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고 재무차장을 지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항일 독립운동가인 윤현진 선생을 기리고 그의 애국과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의 흉상을 제작 설치하였다. |
408 | 25-2-48 | 6·25 참전용사 기념비(북이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북이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6-23 | 북이면 재향군인회는 2004년 6월 청원군 북이면 신대리 4-8(북이면사무소 광장)에 북이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409 | 15-2-88 | 백운의 혼 | 국가수호 | 2008-09-05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한넝쿨산악회(이영구, 박순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9-06-20 |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한산 백운암을 거쳐 후퇴하던 중 장교 1명, 사병 1명이 남아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하다가 서울이 함락되자 북한산에서 자결하였다. 1959년 6월 20일 두 용사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운의숙(애국청년단체)에서 이 곳에 ‘백운의 혼’이라는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
410 | 30-1-66 |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 | 독립운동 | 2013-11-13 | 대구광역시 남구 | 대한불교조계종안일사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0 | 1927-01-01 | - 1915년 음력 1월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달성친목회 회원 13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을 서약 -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 - 1919년 3.1운동 뒤에는 상해임시정부를 돕기 위하여 군자금 조달운동이 벌어지는 등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됨 | |
411 | 12-2-18 |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터 표지석 | 국가수호 | 2017-11-23 | 서울특별시 금천구 | 6.25참전유공자회 금천구지회 | 비석 | 6·25전쟁 | 2016-12-08 | 시흥기주사령부 표지석 터는 6.25전쟁 초기 한강방어선전투를 지휘했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흥일 소장)가 있었던 곳이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 전차가 창경원, 동대문, 돈암동 등지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본부가 시흥보병학교(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창동, 미아리 전투를 치르며 분산되어 한강을 건너온 병력을 수용해 혼성 수도사단, 혼성 제2사단, 혼성 제3사단, 혼성 제7사단,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등 예하사단을 편성했다. 각각의 사단은 연대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지형물인 한강을 이용하여 오늘날 양화교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24㎞ 구역 및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특히 여의도 비행장, 영등포, 노량진, 신사동 등에 이르는 한강이남지구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 제3,4사단, 제1사단(예비), 제105전차여단 등의 남진을 저지했다. 그 결과, 국군은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 ||
412 | 40-1-12 | 3·1운동 의거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정관읍주민자치위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9-04-05 | 3·1운동 당시 정관면의 좌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1979년 4월 5일 건립한 의거비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관면에서는 기장군 교리 김수용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여러 부를 오해영이 입수하여 오진환·김종복에게 전달하였고, 오진환·신두성 등 면내의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좌천 장날을 기해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3월 9일(음), 좌천시장에서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 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두성·김윤희·정지모 등은 검거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
413 | 30-1-03 | 선산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구미시 | 비석 | 기타 | 1993 | 1993-10-22 | 일제강점기 활동한 선산출신의 독립유공자로 권오환(權五煥, 1892~1957), 김관묵(金寬默, 1894~1967), 김의경(金義景, 1898~1949), 이원길(李元吉, 1893~1920),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3·1독립운동으로, 황진박(黃鎭璞, 1888~1942)은 의열투쟁으로, 김영득(金榮得, 1908~1940), 이종식(李鍾植, 1891~미상), 장재성(張在星, 1914~1939)은 국내항일로, 남상순(南相淳, 1926~1978), 육홍균(陸洪均, 1900~1983)은 일본방면 항일투쟁으로, 김종철(金鍾哲, 1924~), 전재덕(全在德, 1924~)은 광복군에 참여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구미시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3년 10월 22일 이들 각각의 비를 세웠다. | |
414 | 15-2-86 | 연천군 자유수호 무공 수훈탑 | 국가수호 | 2007-10-18 | 경기도 연천군 | 무공수훈자회 연천군지회 | 탑 | 6·25전쟁 | 2007 | 0 | 2007-06-18 | 연천군 은대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자유수호 무공수훈탑’을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연천군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6월 18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에서 연천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415 | 25-2-36 | 6·25 참전 유공자비(남이면)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남이면사무소 총괄담당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6-26 | 남이면 재향군인회는 2003년 6월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608-4(남이면복지회관 앞)에 남이면 출신 6·25 참전유공자 홍관표 외 208명의 나라사랑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416 | 11-1-26 |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사적지 | 한말구국운동 | 1896 | 독립협회창립총회 터는 영국 왕립아세아협회에서 소장한 '서울지도'(1902)에 광화문 앞 육조거리 동편으로 내부와 학부사이에 독립협회 창립 총회였던 외부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의 발의로 예전 중추원 자리인 외부 건물을 빌어 창립총회를 가질 당시 독립협회는 독립문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급관료클럽이었다. 그러나 1897년 8월 29일 모화관을 개수해 문을 연 독립관에서 첫 토론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시민과 학생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명실상부한 민중계몽단체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리고 1898년 2월 21일 구국선언 상소를 올린 것을 시발로, 만민공동회 등을 통한 정치개혁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룬 독립신문 계열과 개신 유학자들과 중인층이 중심을 이룬 황성신문 계열의 주도하에 1898년 12월 해산당할 때까지 민중과 함께 하는 점진적인 개화 개혁을 추구하며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열강의 이권침탈과 내정간섭에 대한 반대운동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주체성을 일깨웠고, 토론회와 의회개설운동을 통해 민중의 언로를 터주면서‘우리’라는 민족적 동질의식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서 독립문의 건립, 개국기원절 경축행사의 개최, 태극기의 게양과 애국가의 보급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 상징의 보급을 통해 대중적 차원에서 애국심과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였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3ㆍ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조야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 ||
417 | 24-2-29 | 참전용사 유공비(대소원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대소원분회 | 비석 | 기타 | 2007 | 0 | 2007-12-20 | 충주시 이류면 출신 6.25 및 월남전 전사자 25위, 참전유공자 303명을 포함 총 328명의 명단을 각인하여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나라 사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가안보 교육장으로 활용 |
418 | 18-2-19 | 이천시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9-05-25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04-25 | 이천시 관고동에 6·25전쟁에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이천시 6·25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천시는 한인수, 권오동, 이병우, 이영순, 이기남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4월 2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이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419 | 33-2-39 |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 연제근상사 특공대상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6.25참전유공자회 포항시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0-09-17 | 1950년 9월 17일, 형산강 도하작전 당시 3사단 22연대 분대장이었던 연제근 이등중사가 분대원들과 함께 도하 돌격대를 자원 편성,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다. 따라서 포항시는 연제근 이등중사의 호국정신과 함께 도하작전 당시 목숨을 바쳐 적을 섬멸한 분대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특공대상을 건립. | |
420 | 11-2-09 | (동대문구)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서울특별시지부 동대문구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2014-12-29 | 동대문구 출신 6.25전쟁,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추모 사망자 : 1,620명 생존자 : 2,880명 합 계 : 4,500명 | |
421 | 31-2-35 | 6·25 참전 국가 유공자비(풍천면) | 국가수호 | 2011-07-21 | 경상북도 안동시 |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0-12-07 | 6·25참전유공자 풍천면분회는 2010년 12월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1053-11번지에 6·25전쟁에 참전해서 순국한 안동시 풍천면 출신 국가유공자의 넋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6·25참전국가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
422 | 15-1-27 | 양평의병전투지-상원사 | 독립운동 | 2014-07-18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불교조계종상원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8 | 0 | 1216-01-01 | 상원사는 정미의병 당시 양평지역 의병진의 거점으로서 1908년 8월 24일 일본군의 보복으로 와해된 용문사에 이어 제2 거점으로서의 의병항쟁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4년 7월 18일 독립운동 관련 현충시설로 지정됭되었다. |
423 | 30-2-43 | 6.25참전용사명예선양비(대구 북구) | 국가수호 | 2012-05-16 | 대구광역시 북구 | 대구시 북구청장 | 비석 | 6·25전쟁 | 0 | 2001-06-25 | 대구 관음공원에 2001년 6·25전쟁에서 산화한 대구시 북구 출신 강상민, 박시동, 이상열 등 전사자의 영령을 추모하고 국주환, 안님, 전찬지 등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 북구 6·25 참전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6월 2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구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북구청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424 | 41-2-15 | 6.25참전기념비(울산시 남구) | 국가수호 | 2012-11-12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광역시남구청 | 조형물 | 6·25전쟁 | 1950년 | 길이 7.8m , 높이 3.3m, 두께 1.8m | 2012-06-25 | 울산광역시 남구청은 2012년 6월 25일 울산 남구 출신 6·25참전용사들을 기리며 시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선암호수공원 무궁화동산에 6·25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길이 7.8m, 높이 3.5m, 두께 1.8m 크기의 황동 부조로 제작되었고, 배면부에는 울산 남구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하거나 사망한 733명과 생존자 52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425 | 55-1-18 | 김구선생 은거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 | 비석 | 해외운동 | 1876 | 비석 | 1990-03-01 | 이 비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일본장교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백범 김구선생의 공적 및 애국정신을 받들고자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 |
426 | 31-2-36 | 영주시참전국가유공자 충훈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상북도 영주시 | 영주시참전유공자선양비운영추진위원회(박태승) | 탑 | 기타 | 0 | 0 | 2009-09-15 | 풍기읍 산법리에 2009년 이 고장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해 ‘영주시 충훈탑’을 건립하였다. 영주시 참전유공자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강갑신, 곽순명, 이봉구, 권병선 등 6·25전쟁 참전유공자와 권영기, 안재철, 최웅집, 박한성 등 베트남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불멸의 등불로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9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에서 영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가슴에 안고 포연 속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427 | 50-2-44 | 송서규대령 상 | 국가수호 | 2014-05-20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월남참전 | 1967 | 0 | 2010-10-21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상무대 내에 베트남 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한 송서규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에서 2010년 10월 21일 이 동상을 세웠다. 1967년 11월6일 주월 한국군의 닌호아2호 작전시 고 송서규 대령의 전사는 대대장이 최전방 전투원으로 직접 참가했다가 전사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해 10월 24일 2개 대대 규모의 베트콩이 9사단 사령부 남쪽 2km 닌호아 시가지를 점령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베트콩은 산악 정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시가지에 2개 대대를 투입한 공세는 대담한 도발이었다. 반면 9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콩을 찾아 산악 정글을 헤맬 필요 없이 제발로 찾아온 그들을 안방에서 섬멸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사단은 즉각 29연대 2·3대대를 투입, ‘닌호아1호’ 작전을 전개했다. 문제는 베트콩이 시가지를 점령하고 있어 아군의 포격으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 오히려 그들의 심리전에 말려들 가능성이었다. 그 점을 감안해 채명신 주월사령관은 "공격 준비 사격 없이 적을 격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자체 화력만으로 공격을 감행한 29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적 주력은 도주해 버렸다. 아군의 약점을 간파한 베트콩은 11월6일 새벽, 또다시 1개 대대 규모로 닌호아를 점령했다. 29연대는 이번에도 2·3대대를 투입, 닌호아2호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2대대장 송서규 중령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후임 대대장과 함께 출동했다. 송 중령은 지난 작전의 교훈에 따라 제한된 포병 화력을 지원받아 4개 중대로 베트콩을 포위한 후 그들을 압축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작전은 진척되지 않았다. 헬기에 탑승해서 지휘하던 송 중령은 작전이 지연될 경우 닌호아1호 작전과 같이 적의 주력이 야음을 이용, 도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진격이 부진한 6중대 지역에 착륙한 송중령은 자신이 직접 중대를 지휘하면서 작전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송 중령은 화기소대를 동쪽으로 우회시킨 후 전 중대가 일제히 공격하도록 했으나 이미 지쳐 있던 장병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오후 5시가 되면서 상황이 급박해지자 송 중령은 더욱 강력히 밀어붙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 부상당한 3소대장이 전사하자 송중령은 3소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병사들과 함께 50여m를 전진했다. 이어서 병사의 유탄 발사기를 들고 사격을 계속하면서 진격하던 송중령은 30m 전방 농가에서 날아온 적의 집중 사격에 가슴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송 중령이 전사한 후 다음날까지 계속된 작전에서 29연대는 베트콩 1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전사 38명, 부상 51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끝난 후 정부는 송서규 중령에게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했으며 전쟁기념관은 호국인물로 선정, 그를 추모하고 있다. |
428 | 55-2-15 | 6·25 참전 학도병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1 | 1993-06-25 | 6·25참전학도병건립추진위원회는 1993년 6월 25일, 자원 입대한 전남 동부지역 학도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여수시 오림동 123번지 진남체육공원 내 학도병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의 건립에는 학도병동지회의 모금과 전라남도와 여수시의 지원이 있었다. 1950년 7월 전남 여수 76명, 순천 54명, 광양 13명, 강진 8명, 고흥·기타 16명 등 180명의 학도병이 전국 최초로 국군 1사단 15연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이들은 6개 소대의 학도중대(중대장 육사8기 정태경)로 편성돼 9일간의 기초훈련을 받은 뒤 전선에 배치되었다. 진주 촉석루전투, 함안전투, 진동사수전투 등 낙동강 최후 방어 전투에 미군 25사단과 함께 투입돼 격전을 치러 입대병력 180명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다. |
429 | 15-2-116 | 월남전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9-4-26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 조형물 | 월남참전 | 0 | 2018-6-19 | '18년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월남전참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공헌한 월남전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
430 | 55-1-02 | 매천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구례군 | 황승연(유족)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1855 | 창의문, 유물관 | 1962-04-01 | 황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황현은 조선 말기 절의를 지킨 우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나 34세에 생원 회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구례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쳤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껴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그의 나이 56세,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431 | 30-1-61 | 백세각 | 독립운동 | 2012-10-17 | 경상북도 성주군 | 송만수 | 생가 | 3·1운동 | 1919 | 0 | 1551-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말 4월 초 성주 지역 야성송씨 문중이 여기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서명과 성주지역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논의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준비하여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송준필(宋浚弼, 1869~1943), 송홍래(宋鴻來, 1876~1953), 송회근(宋晦根, 1877~1949), 송규선(宋圭善, 1880~1948), 송훈익(宋勳翼, 1884~1961), 송천흠(宋千欽, 1888~1968), 송우선(宋祐善, 1894~1942), 송문근(宋文根, 1895~1963), 송인집(宋寅輯, 1896~1961), 송수근(宋壽根, 1896~1969)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432 | 10-2-20 | 서울학도포병참전자명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용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0 | 2015-04-24 | 6.25전쟁 당시 용산고에서 출정식(1950.10.20.)을 하고 학생 신분으로 참전한 학도포병 341명의 애국정신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
433 | 41-2-18 | 6.25 참전유공자 선양비(북구) | 국가수호 | 2016-04-27 | 울산광역시 북구 | 6.25참전유공자회 북구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2015 | 2015-12-22 | 현재 울산 북구지역 6.25참전유공자의 생존자 233명과 사망자 790명에 대한 명각대상자1,023명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전후세대에게 안보 의식과 청소년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가 위한 현충시설로 지정 | |
434 | 15-2-107 | 미국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가평군 |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16-02-04 | 가평은 1·4후퇴 이후 6·25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던 용문산-가평지구 전투의 현장이다. 해당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영연방 4개국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족적을 가평에 남긴 미군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 사실 美 2사단 72전차대대는 1951년 4월 가평지구 전투에서 목동~대원사 능선을 따라 남하하는 중공군을 격퇴함으로써 가평지구 전투 승전의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美 213야전포병대대는 1951년 5월 26일 북면 홍적리 일대에서 240명의 병력으로 4000여 중공군을 섬멸했다. 특히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중공군 1180명을 사상(死傷)함으로써 ‘가평의 기적’이라 명명되며, 당시 대대를 이끈 J. Frank Dally 준장(전투 당시 중령)은 2015년 5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가평에 주둔했던 美 40사단은 주로 타 지역에서 활약했지만 전투 이외의 방식으로 가평에 ‘2달러의 기적’을 일궈냈다. 전화의 폐허에서도 학구열을 놓지 않은 한국 학생들의 모습에 감동받은 美 40사단은 Joseph Cleland 사단장의 주도 하에 15000명 장병들이 2달러 씩 갹출해서 가이사중고등학교(現 가평고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학교의 명칭도 美 40사단의 첫 전사자인 Kenneth Kaiser Jr 하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美 40사단 참전용사들은 1987년부터 매년 방한시마다 가평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자신들의 젊음(혹은 생명)을 바쳐 지켜낸 대한민국의 발전된 오늘이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것이다. 보훈, 즉 은혜갚음의 첫 걸음은 부채의식을 가짐으로써 수혜(受惠)를 잊지 않는 것이다. 이에 미군이 가평에 남긴 족적을 기억하고, 65년간 이어온 특별한 인연을 키워나가기 위한 노력이 최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평고등학교 졸업식과 연계한 미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기에 지난 2월 4일 건립한 ‘미국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美 213대대·2사단·40사단이 가평 땅에 남긴 공헌은 물론 이들이 가평에 베푼 정(情)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한 것이다. 한편 본 기념비는 참전 미군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참전 과정에서의 희생을 기리며, 미국과의 미래지향적 우호관계를 이어나가는 국제보훈의 정책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
435 | 18-2-28 | 월남참전 국가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6-11-23 | 경기도 이천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이천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0 | 2016-07-30 | 월남전에 참여하여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우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
436 | 12-2-19 |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상이군경회 동작구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0 | 2016-10-28 | 6.25전쟁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한 한강방어선전투의 가장 치열했던 노량진 전투에서 전사한 참전유공자, 전몰군경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음 | |
437 | 15-2-112 | 고양시 6.25전쟁 참전 전사자 명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 전몰군경유족회 고양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8m | 2016-12-06 | 고양시 출신 6.25전쟁 전사자 742명의 성함을 새긴 명비 건립을 통해 호국영웅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함 |
438 | 16-2-94 | 육군 중위 조유환 전공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6-03 | 조유환은 1925년 4월 23일 문막에서 출생 / 1946년 4월 국방경비대에 지원입대하여 통신장교 / 1950년 6․25사변 당시 일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9․28 수복 당시에는 애향심에 불타 문막지구를 조기탈환함으로서 적치하에서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한 반공애국면민들의 고귀한 생명을 구출한 업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 전한다 / 1951년 4월 23일 가평지구전투에서 향년 27세를 일기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고 명복을 기원하여 이 전공비를 건립하노라 미망인 최성훈 / 서기 1976년 3월 일 문막면민 일동 건립 | |
439 | 10-2-25 | 양천구 참전유공자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양천구 | 양천구 | 비석 | 6·25전쟁 | - | 0 | 2016-12-23 | 양천구 장수공원 내에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며 명비를 건립하였다. |
440 | 12-2-04 | 학도의용군 현충비 | 국가수호 | 2002-11-01 | 서울특별시 동작구 | 대한민국학도의용군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5-06-25 | 6.25참전 학도의용군 포항 전투 전사자 48명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도 전국 초,중,고등학생들의 성금모급과 당시 3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도움으로 건립 |
441 | 15-1-05 | 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사회복지과 | 비석 | 기타 | 0 | 0 | 1996-08-15 | 한말·일제강점기 동두천 출신으로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항쟁에 몸 바친 독립유공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동두천시민 대표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추모비건립위원회는 1996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442 | 52-2-06 | 위령탑(안성면)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2-06-01 | 한국 전쟁 당시 이 지방 학도 의용군으로 분연히 참전하였다가 의롭게 전사한 33인의 넋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 |
443 | 52-2-20 | 호국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백운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2-05-02 | 6.25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 등 추모 |
444 | 52-2-51 | 향토수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기념사업회장수군지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7-09-01 | 산서면 동화리에 6·25전쟁 향토수복작전에서 산화한 경찰 4위와 향토수복 대원 11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향토수복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산서면 향토수복 동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7년 9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장수 군민은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을 받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인천상륙작전 직후 향토수복작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 과정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산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45 | 30-1-14 | 동암 서상일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원화여자고등학교장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87 | 1988-10-15 | 서상일은 대구 사람으로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비밀항일단체인 신민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동청년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 '9인결사대'를 조직했으며, 1913년 대구에서 박상진 등과 함께 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20년 3월 만주로부터 무기를 반입하여 일제 관공서를 습격할 계획을 준비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1921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이 청원서에 대표로 서명했다. 1924년 〈농림〉·〈민중운동〉이라는 잡지를 발행했으며, 연정회 조직 결성에 대구지역 대표로 참가했다. 신간회 해소 이후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관한 사견〉 등 정치평론을 발표하면서 합법적 정치운동에 주력하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 |
446 | 30-1-24 | 목산 조현욱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22 | 대구광역시 북구 | 조근채 | 비석 | 3·1운동 | 1854 | 1968-06-01 | 조현욱은 호는 목산이고 본관은 함안,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6일에 청송군 현서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던 와중에 조현욱은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신태휴‧조병국 등에게 격문을 보내서 동참하기를 권유하였다. 이후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면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주민을 선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고등법원으로 이송되어 5월 31일에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조국의 현실에 통탄해 하며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청송군 주동자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현욱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447 | 23-1-40 | 홍주의병출진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1-27 | 충청남도 예산군 | 예산군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87-05-01 | ||
448 | 53-2-37 | 김원주무관 흉상 | 국가수호 | 2018-12-4 | 전라남도 목포시 | 서해어업관리단 | 동상 | 기타 | 2017 | 높이 2m/ 기단 1.3m | 2018-7-25 | 故김원 주무관은 해양수산부 남해어업관리단 어업감독공무원으로서 특별사법경찰관(리) 지명을 받아, 국민의 재산 보호 및 해양주권 수호를 위해 힘써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험성이 현저한 직무를 수행 중 사망하여,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흉상을 건립함. |
449 | 10-1-21 | 송재 서재필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2-04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서울특별시서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문화운동 | 1866 | 동상높이 3.5m, 좌대높이 2.8m | 1990-04-07 |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1884년 12월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1895년 12월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국내 동지들과 함께 7월 2일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이 수구파 정부의 미움을 사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19년 8월 구미위원부 고문으로 추대되고, 1921년 4월 위원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하여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서거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축이 된 송재서재필선생동상건립위원회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0년 4월 7일 이 동상을 세웠다. |
450 | 41-1-18 | 독립유공자 정용득 열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18-12-4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정타관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2.4m, 높이 0.5m | 2011-07 | 정용득열사는 1885년 7월 28일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256번지에서 태어났다. 25세 되던 1910년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였고 이에 비분강개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죽음을 무릅쓰고 자주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언양만세운동의 주도자들과 거사를 도모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언양 장날인 1919년 4월 2일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던 중 일본군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시위군중은 해산되었으나 주동자로 정용득 등 6명은 일본군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그 후 부산지방법원울산지청에서 형의 언도를 받고 태형 90대를 집행당하였다. 수감 당시 왜경의 혹독한 고문 및 그 후유증으로 7여 년 간 병고를 치르다 조국광복의 영광도 보지 못하고 1927년 11월 29일 42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인정하여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451 | 52-1-04 | 의병장 강무경 상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설천면장 | 동상 | 의병운동 | 1878 | 0 | 2001-05-01 | 전북 무장군 풍면 설천(茂長郡 豊面 雪川)에서 출생하였다. 필묵상(筆墨商)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고 있던 중 유지인 심남일(沈南一)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고서 결의 형제를 맺고 함께 김율(金聿)이 사망하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 이후 그의 의병생활은 심남일과 일체가 되어 시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전투일] [전투장소] 1908년 3월 7일 강진 오치동(康津 吾治洞) 4월 15일 장흥 곽암(長興 藿巖) 6월 19일 남평 장담원(南平 長淡院) 6월 25일 능주 노구두(綾州 老狗頭) 7월 30일 영암 사촌(靈巖 沙村) 8월 1일 나주 반치(羅州 盤峙) 9월 20일 장흥 신풍(長興 新豊) 10월 9일 해남 성내(海南 城內) 10월 27일 능주 돌정(綾州 石亭)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능주 돌정의 전투에서는 심남일과 강무경이 모두 병석에 눕게 되는 불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왜병 삼백여 명과 접전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다시 이듬해인 1908년 봄부터 전투를 재개하여 3월 8일 남평 거성(巨聲), 4월 2일 능주 풍치(風峙), 5월 12일 보성 천동(泉洞) 등지에서 크게 접전을 하여 적 수십 급을 사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후 해산 조칙(詔勅)을 받고 1909년 7월 21일 의진을 부득이 해체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해산 후에도 강무경은 심남일과 거취를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적병에게 발각되어 10월 9일 심남일과 함께 체포되어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공소 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동년 10월 4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452 | 51-1-47 |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6-05-02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동상 | 3·1운동 | 1901 | 2005-10-01 | 군산 출신 독립운동가 이인식의 동상. 이인식은 1919년 2월 28일 정동교회구내 이필주 목사 집에서 3·1독립운동을 계획할 때 보성중학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3월 5일에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8월에 전재산을 방매하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8,000원을 헌납하였다. 1923년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 단체인 금우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간행하며 항일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여 정보수집과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인식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2005년 10월 1일 이인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웠다. | |
453 | 15-2-03 | 양평군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청운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1-09-19 | 1950년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하신 박종만 육군소령 외 61위 영령의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유족의 뜻을 모아 충혼각을 건립하였으나, 노후됨에 따라 1984년 6월 6일 청운면민 모두의 마음을 담아 현 소재지에 건립하고 현충탑으로 재명명하였다. |
454 | 11-1-06 |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성균관대학교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79 | - | 1990-03-28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도왔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
455 | 11-1-08 |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공원녹지과(종묘공원 관리사무소) | 동상 | 문화운동 | 1850 | - | 1986-04-10 |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였으며 기독교청년회(YMCA)가입과 3.1독립운동의 배후 도움과 물산장려운동 등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456 | 55-2-29 | 보성중 순국학생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중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7-18 | 보성중학교 총동문회는 6·25전쟁 중 보성전경대에 자원입대하여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 순국한 보성중학생 5명(김택 선전부장, 문용주 위원장, 이중재 정보부장, 이용의 감찰부장, 임두학 조직부장)을 추모하기 위해 1951년 7월 18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평리 798번지 보성중학교 내에 이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위령비가 노후화하여 2002년 9월 28일 새로 건립하였다. | |
457 | 15-1-01 | 가평의병 3.1항일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청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4-03-15 |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 사건과 그 해말 단발령에 항거하여 가평에서는 북면을 근거지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가평 지역의 의병들은 강원도 의병들과 연합하여 격렬히 전투하다가 이충응(李忠應, 1856~1896), 신재가(申在嘉, 1850~1895), 정문위(鄭文緯, 1851~1896) 등이 의병장으로 참여하여 순국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일어난 중기의병과 1907년 고종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기의병에도 강귀손(姜貴孫, 미상 ~1909), 강윤희(姜允熙, 1868~1909), 김석하(金錫夏, 미상~1908), 김춘쇠(金春釗, 미상~1908), 나봉산(羅奉山, 1860~1910), 박내병(朴來秉, 미상~1908), 박내봉(朴來鳳, 미상~1908), 하상태(河相泰, 1868~1909), 홍난우(洪鸞祐, 미상~1908) 등이 참가하여 순국하였다.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5, 16일 이윤석(李胤錫, 1894~ 1953)·정흥교(鄭興敎, 1900~1965) 등의 주도로 군북면사무소 앞에서 수백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되어 가평읍 군청앞으로 행진하여 이를 진압하려는 군경과 대치하였다. 이 시위로 체포된 사람이 70여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28명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에 처해졌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4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458 | 42-2-69 | 김해 공병탑 | 국가수호 | 2017-11-23 | 경상남도 김해시 | 공병전우회 | 탑 | 6·25전쟁 | 0 | 2008-05-29 | ○ 육군 공병은 북한 괴뢰의 적색침략에서 국토를 방위하는 성전을 통하여 항상 전선의 최선봉에서 그야말로 육탄으로 전투공병의 희생적 정신을 배양, 발휘하고 포연탄우 아래 공병특유 화목단결의 전통을 공고히 하여 영원불멸의 공병 전통을 확립하며 성전수행에 앞장섬. ○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는 날까지 전 공병의 더욱더 큰 노력과 충성을 맹세하고, 모든 공병장병의 눈물겨운 노력을 찬양하고 존경하며 특히 빛나는 공병의 역사와 전통을 창조하고 진작하는 기반이 되고 희생하신 38명의 전사자 포함 1천 5백여주 공병전우의 충혼과 명복을 빌고 영세 기억하기 위해 건립된 공병 상징탑임. | |
459 | 20-1-26 | 열사 무이재 오강표 순절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주민복지지원실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48 | 0 | 1965-03-01 | 오강표는 1848년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월리 도덕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의를 중시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간재 전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스승을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하였고,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예절을 행하는 등 충의의 마음시가 남달리 강하고 뛰어 났다고 전한다. 오강표는 1905년 11월 일제의 강요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을사오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지어 관찰사에게 조정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생은 청국 상인에게 아편을 구입하여 공주향교의 명륜당에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은 이등박문을 성토하는 장문의 글을 쓰고자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좌절되었다. 1910년 8월 명강산에서 은거하던 중 일제의 국권강탈 소식을 접한 선생은 절명사를 지으면서 자결을 결심하였다. 자결 의지를 동지인 최종화에게 알린 선생은 공주향교의 명륜당에 들어가 벽에 글을 붙이고 대성통곡을 하고, 마침내 10월 16일 밤, 강학루에서 목을 매 자결함으로써 강력한 항일의지를 표출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460 | 33-2-35 | 6·25 참전 충용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영덕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영덕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9-18 | 영덕군 화개리 영덕군민운동장 앞에 2004년 6·25전쟁에 참전한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충용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영덕군 지회는 이곳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9월 18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영덕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덕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461 | 17-2-55 | 충혼탑(삼척시 근덕면)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 근덕면사무소 | 탑 | 기타 | 1950 | 2005-05-28 | 근덕면 교가리에 200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243위의 근덕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근덕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5년 5월 2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근덕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근덕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462 | 18-1-11 | 구연영ㆍ구정서 의사 순국 추모비 | 독립운동 | 2010-11-03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중앙교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6 | 0 | 1979-09-06 | 구연영(具然英)은 서울 출신의 전통 유림 인사로서 1895년 10월 일본 무뢰배들에 의해 왕후 민씨가 참살당한 데 이어 12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해인 1896년 1월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구연영은 경기도 양근(楊根)·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300명을 모병하고, 안성의 의병장 민승천(閔承天)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1896년 1월 18일 경기도 이천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1896년 2월 12일 새벽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온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에 맞서 이현(梨峴)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이 열세한 데다 눈보라까지 몰아쳐 의병 부대는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이현 전투에서 패전한 잔여 병사들과 여주 의병부대는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였다. 2월 25일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의 주둔 병으로 산성을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용전하였으나 박준영이 관군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어 함락 당하였다. 구연영은 다시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안동·의성·청송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이듬해 5월 26일 비봉산(飛鳳山) 일대에서 관군과 접전한 뒤 부하 30여 명과 경기도로 돌아왔다. 그 뒤 구연영은 동족상잔을 피할 수 없는 의병전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상동 교회의 전덕기(全德基)·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구국 교육에도 종사하였으며, 1900년에는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하며 구국 종교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각처에서 성토회를 열고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정서(禎書)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구성서는 서울에서 태어나 동대문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보안회ㆍ자강회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00년에는 아버지가 조직한 구국회 청년부를 맡아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국채 보상 운동을 벌였다.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여주(驪州)와 원주(原州)에서 아버지 구연영과 함께 의병항쟁을 하다 1907년 일진회원의 밀고로 아버지와 함께 붙잡혀 사형당했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463 | 31-1-68 | 병신 창의 기적비 | 독립운동 | 2011-11-10 | 경상북도 의성군 | 김태옥 | 비석 | 기타 | 0 | 0 | 2009-04-24 | 병신창의기적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 침탈기도에 항거하기 위해 1896년 2월부터 4월까지 의성 점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록한 기념비다. 의성 지역의 의병 항쟁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를 보면, 의병장에 김상종, 초모장에 김수욱, 중군에 권대직, 선봉장에 김수빙, 관향장에 김수협 등이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 1895년에 을미사변을 계기로 궐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려 황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여기에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담, 김수협 등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출신의 이필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와 옥산의 황산에서 적과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 이긴 조선 왕실은 파병의 조칙을 내리게 되자 비통함을 품은 채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
464 | 20-1-14 | 윤봉길 의사 상 | 독립운동 | 2002-11-25 | 대전광역시 중구 | 시설관리공단 체육시설운영본부 | 동상 | 의열투쟁 | 1908 | 0 | 1972-05-23 | 1908년 충남 예산 출신으로 문맹퇴치와 농촌개혁운동을 전개하다 1931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방안을 모색하였고 1932. 4. 29.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에 대한 숭앙시모가 추모의 뜻을 높이고 민족의 얼을 되새기고자 동상을 건립 |
465 | 14-2-10 | 현충탑(광명시) | 국가수호 | 2002-11-02 | 경기도 광명시 | 경기도 광명시 | 탑 | 기타 | 1988 | 대 | 1988-08-25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광명근린공원 내에 광명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광명시에서 1988년 8월 25일 이 탑을 세웠다. 광명출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 등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며 동시에 광명시민에 대한 애향심을 함양할 목적으로 1988년 이 탑을 건립하였다. 이 현충탑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자유수호를 위한 선열들의 애국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1988년 8월에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여기에는 이 고장 출신 차상준 준장 외 483위의 영령을 봉안하고 광명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 추모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
466 | 52-1-42 | 독립유공자 박준승선생 추모공원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수 | 공원 | 3·1운동 | 1919 | 0 | 2013-09-11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91년(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에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 공원은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셨던 박준승 애국지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 위해 건립되었다. |
467 | 16-2-92 | 춘천내평전투 호국경찰 추모상 | 국가수호 | 2016-11-23 | 강원도 춘천시 | 강원도재향경우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5-10-20 | 1950.6.26. 춘천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감 등 11인은 북한 2사단 병력에 맞서 목숨을 마다하고 1시간 이상 결사 항전하여 국군의 주 저항선을 확보하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춘천 지구 전투 승리의 초석을 다지게 함, 이와 같은 11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함 | |
468 | 31-1-76 | 기려자 송상도 지사 생가 터 및 표지석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북도 영주시 | (사)기려자송상도지사기념사업회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 | 0 | 2017-12-20 | 농촌의 한학자로서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말기부터 1945년 광복때까지 일제치하 30여년간 도보로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순국선열의 유가족 또는 친지들을 방문하면서 자료를 수집하여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 행적을 기록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저술하였다. |
469 | 42-1-01 | 영산 3·1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56-03-11 | 창녕군은 1956년 3월 창녕군 영산면 동리 산4 (호국공원내)에 영산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영산결사대 24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천도교인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을 중심으로 영산에서의 독립의거가 일찍부터 준비되었다. 이들은 의거일을 13일로 결정한 후 야간을 이용하여 태극기와 요약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 24명은 결사대를 조직한 후 이날 오후 2시 영산면 남산에 모여 「결사단원 맹세서」를 작성하여 각자 서명 날인하였다. 결사대원들은 풍물을 울리며 큰 태극기를 앞세워 영산읍내를 향해 행진하자 주민들과 장꾼들이 합류하여 600~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창녕경찰서에서 경관 1개대를 영산읍으로 급파하여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을 체포 구금하였다. 남은 결사대원들은 오후 8시 남산봉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영산읍에서 시위한 후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창녕읍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일본경찰들이 3일 만에 시위 주모자들을 모두 검거하였다. 이날의 시위를 주도한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은 징역 10월에서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470 | 31-1-39 | 영양 3의사 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 | 비석 | 기타 | 1977 | 1977-10-03 | 영양군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인 김도현, 남자현, 엄순봉 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1977년 10월 영양3의사비를 건립하였다. 김도현은 한말의 항일 의병장으로 영양·안동 지방의 의병을 모아 항전했고,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일본 만주국대사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엄순봉은 1933년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청년부장이 되었으며,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뒤 백정기·정화암 등과 상해로 갔다. 1935년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친일파 이영로를 처단하여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 |
471 | 55-1-15 | 광양 7의사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옥룡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2.6m 폭 0.6m | 1966-04-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일 광양읍 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 여러 사람이 검속되자, 4월 2일에 옥룡면 운평리에 있던 서당 견룡재의 학생인 이기수·김영석·최준수·서성식·서찬식·박병원·나종길 등이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향하여 가다가 도중에 검속당하여 심한 폭행을 당하였다. 옥룡면민들은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1966년 4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472 | 20-2-01 | 충령탑(금산)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사회복지과) | 탑 | 기타 | 1963 | - | 1963-06-06 | 금산군 하옥리 남산 중턱에 1963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이 고장 출신 580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금산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6월 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금산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
473 | 10-1-23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독립운동 | 2007-10-18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 기념관 | 기타 | 1998 | 건축면적 4,726.39㎡ | 1998-11-05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갖은 옥고를 치르고 마침내 목숨까지 빼앗겼던 우리민족 독립의 현장이며 살아있는 역사의 터이다. 서대문구에서는 이곳의 옥사와 사형장, 망루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악명 높았던 구 보안과 건물을 보수하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87년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하기까지 사용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기도 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중앙사, 제 9~12옥사와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시구문, 유관순지하감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474 | 31-1-21 | 애국지사 천세헌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천재종 | 비석 | 해외운동 | 1881 | 0 | 2001-05-02 | 천세헌은 1902년 서울에서 외국어학교에 다녔으며,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0년 다시 뉴욕으로 옮겨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하였다. 1914년에는 흥사단에서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가 열리자 여기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외교사무소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그 뒤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에서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특연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된 그는 안창호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940년 7월 강영승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였다. 1942년부터는 각종 독립금과 기성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전쟁을 후원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6월 서거하였다. |
475 | 43-1-13 | 권석도의병장 동상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동상 | 의병운동 | 1880 | 1991-08-13 | 권석도 선생은 한말의 의병장으로서 함양읍 백전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크게 분노하여 1907년 김동신 의병진에 참여하였다가 고광순 의병진에 합류하였고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계면에서 박인환 의병진과 합류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선생은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과 대일 항쟁을 하던 중, 1908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어 하동주재소에 구금되었으나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던 중 일경의 추격을 받아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의병장과 합류하여 진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며 활동하던 중 1909년 10월 10일 일경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으로 확정, 수감 중 일본왕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그후 1918년 2월 일본 경찰로부터 다시 강도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선생은 허위자백을 강요당하는 등 혹독한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함양군에서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상림 숲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 |
476 | 30-1-54 |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0-06-09 | 대구광역시 동구 | 대구광역시 | 탑 | 한말구국운동 | 1945 | 2006-06-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대구·경북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의열투쟁,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사)대구경북항일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6년 6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
477 | 15-2-60 | 케니상사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8-07-04 | 1951년 1.4후퇴 당시 이 곳 베내(동문리)에서 1개 소대 규모의 군병력이 후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적군의 전차에 소대는 열사직전에 이르렀다. 이 때에 분대장직을 맡았던 케니는 부하 2명과 함께 육탄으로 전차를 잡고 장렬히 전사하여 소대를 구출하는 지대한 전공을 세웠다. |
478 | 31-1-43 | 의병대장 도암 신선생 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문경시 | 신대식(고손) | 비석 | 의병운동 | 1864 | 0 | 2000-08-02 | 1907년 의병대장으로 영양, 영월, 제천, 울진, 평해, 원주, 철원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투옥되어 10 여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2년 의용군 경북단장으로 독립군을 후원하다 1년간 투옥되기도 한 신태식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생가마을 입구에 유허비 건립 |
479 | 43-1-43 | 건국훈장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명철 유적비 | 독립운동 | 2004-05-20 | 경상남도 거창군 | 어윤종 | 비석 | 3·1운동 | 1865 | 1991-05-05 | 1991년 5월 5일 함종어씨 문초공파 종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어명철 선생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어명철 선생(1865~1923)은 거창군 가조면 출신이다. 1919년 3월 21일 가조면 석강리에서 동지들과 비밀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여 다음날인 22일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오문현 신병희 어명우 등과 함께 마을 대표로 뽑혀 연락책을 맡았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일제 헌병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던 중 거사 당일인 3월 22일 거창읍 가조·가북면의 3천명의 시위대에게 구출되어 군중과 합세, 거창읍으로 행진하여 그 선봉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었다. 이해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
480 | 42-2-28 | 무공수훈자 공적비 (진해)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진해구 무공수훈자회 | 비석 | 6·25전쟁 | 2002 | 0 | 2002-10-30 | 진해시 무공수훈자회는 2002년 10월 30일 경남 진해시 장천동 대발령 제1쉼터에 6·25전쟁 및 자유수호 전쟁에서 나라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용전분투한 진해지역 무공·보국수훈자 840명의 명예와 애국심을 선양하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481 | 43-2-42 | 진주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진주시 | 무공수훈자회진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04-22 | 진주시 초전동 농산물도매시장 앞 남강 변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진주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4월 22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진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서구청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82 | 17-2-37 | 제8보병사단 전몰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육군 제1607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2.7mX27.m, 높이 5.4m | 2001-09-14 | 6·25전쟁중에 산화한 제8사단 전몰장병들의 넔을 달래고 참전유공자들의 위상과 명예선양을 위해 건립하였다. |
483 | 23-2-22 | 베트남참전유공탑 | 국가수호 | 2005-10-24 | 충청남도 청양군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청양군지회 | 탑 | 1964 | 2005-05-28 | 월남참전기념탑추진위원회는 2005년 5월 28일 충남 청양군 대치면 6-2(칠갑산 주차장)에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유공탑을 건립하였다. 유공탑 정면 하단에는 기념탑기가, 뒷면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주둔지가, 옆면에서는 읍면별 참전용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 ||
484 | 50-1-54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독립운동 | 2020-5-8 | 광주광역시 남구 | (재)광주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 | 기념관 | 3·1운동 | 1919 | 415.61 | 2018-12-3 | 광주의 첫 장로이자 목사로 한평생을 한센병(나병)퇴치와 빈민구제, 독립운동, 선교활동, 교육운동 등에 헌신하는 삶을 기록하고 전시 |
485 | 33-1-07 | 한말의병 항왜혈전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영일민속박물관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67-01-01 | 이 기념비는 산남의병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고 그분들의 명예선양과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1967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영일민속박물관내)에 건립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초대 대장과 제2대 정환직 대장이 의병을 이끌다 순국하자 제3대 최세윤 대장이 의진을 수습하여 일본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최세윤 대장 역시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 |
486 | 30-1-21 | 신명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신명고등학교 | 탑 | 3·1운동 | 1919 | 0 | 1972-10-23 | 1972년 10월 23일 대구 중구 동산동 신명고등학교 교정에 대구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드높인 신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명 3·1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매년 3월 선배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신명고등학교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1919년 3월 8일 신명학교에 재학중이던 최정술을 비롯한 일부 학생은 만세운동의 시발지인 큰 장터에서 이영현을 비롯한 통학생 및 저학년 10여 명은 동신교를 조금 지나서, 그리고 30여 명의 기숙사생들은 대부분 남성파출소 앞에서 각각 계성학교·성격학교·남선정교회·남산교회·달남교회 등이 주축이 된 수천 명의 만세행렬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일본기마대와 기관총을 앞세운 대구 주둔 80연대의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동성로까지 진출하였으나, 달성군청 앞에서 일본 경찰, 헌병, 군인들로부터 구타당한 후 전원이 구속되고 말았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학교 학생들은 석방되었으나, 졸업생과 교사들은 전원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받았다. 이만집 3년, 김태련 2년 6개월, 김영서·김무생·정재순 각 2년, 박재원·권희윤·최경학 각 1년 6개월, 이재인·임봉선 각 1년, 신태근·이선애 각 6개월 등이다. |
487 | 33-2-49 | 6.25참전유공자 기념비(울진군) | 국가수호 | 2016-11-23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 2015-12-23 | 울진 출신 6.25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전하고 조국통일과 번영한 대한민국이 영원토록 발전할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울진군민의 뜻을 모아 2015년 12월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기념비 뒤편에는 건립취지문과 함께 울진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단이 각 읍․면별로 명각되어 있습니다. |
488 | 15-1-25 | 애국지사 국사 오화영 추모비 | 독립운동 | 2013-05-13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고창오씨대종회(오완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8-05-01 | 오화영(吳華英, 1880~1950 납북)은 1917년 서울 종교교회에 부임하여 담임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9년 3월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일인으로 참여하여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5일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간사로 활약하였고, 1930년 5월에는 물산장려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고창오씨종친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1988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489 | 55-2-37 | 광양시 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15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비석 | 6·25전쟁 | 2005 | 탑1 | 2005-04-29 | 광양시 참전유공자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5년 3월 광양시 광양읍 목성리 유당공원 내에 6·25 및 베트남전에 참전한 광양지역 출신 참전유공자 1, 500여 명의 공훈과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자 참전유공자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490 | 15-2-80 | 태극단 교사 추모비 | 국가수호 | 2006-04-24 | 경기도 파주시 | 태극단선양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12-01 | 6.25전쟁중 적의 치하에 든 고양, 파주지역에서 비밀결사단체인 태극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처참히 죽음을 당한 청석초등학교 교사들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파주 청석초등학교에 2004년 건립된 태극단 교사 추모 조형물입니다. 네비게이션에 청석초등학교를 찾으면 새로운 학교로 가기 때문에, 교하성당을 검색하여서 구 청석초등학교로 가야지 참배가 가능합니다. | |
491 | 18-1-18 | 성남3.1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6-11-23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남문화원장 | 탑 | 3·1운동 | 0 | 2006-03-01 | 성남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
492 | 43-1-35 | 통영3.1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0-05-30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시 | 비석 | 3·1운동 | 기념비 | 1972-09-01 | 경남 통영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비이다. 통영에서는 1919년 3월 18일 밤 당시 신정에서 박상건 등 한문학당 관란생도 2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28에는 박성백 등 읍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2일의 읍내장날에는 기생 33명이 합세한 5천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 |
493 | 33-2-37 | 충혼비(진혼비, 충혼비, 차성도중위충혼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북도 영천시 | 육군3사관학교 | 비석 | 기타 | 0 | 1970-01-17 | 육군3사관학교 호국정 내에 생도훈련, 전·후방 야전부대 교육훈련 등에서 전사, 순직한 육군3사관학교 임관장교들의 희생정신을 길이 받들고,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진혼비, 충혼비, 차성도 중위 충혼비를 건립했다. 동기생회에서는 1969년 이후 교육 중 조국을 위해 꽃피우려다 순직한 교육생의 얼을 추모하기 위해 진혼비와 충혼비를 1970년 1월 17일, 2004년 5월 25일 건립했다. 또한 충성동기회는 임관 후 1970년 5월 13일 제27보병사단 78연대 소대 야간 방어 전투사격 훈련 중 병사의 실수로 놓친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덮쳐 소대원의 목숨을 구하고 순직한 차성도 소위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1970년 11월 13일 세웠다. 육군3사관학교 생도들과 졸업생들은 매년 선배들의 열정과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 |
494 | 14-2-38 |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15-10-14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소 | 2014-12-06 |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과 민족의 자유수호를 위해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인천광역시 무공수훈자들의 위대한 공적과 나라를 위한 충절을 후대에 기리고자 인천광역시에서 2014년 12월 6일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건립취지문에는 '이 곳은 조국과 민족의 자유수호를 위해 멸공전선에서 함께 한 전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터전이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때,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수훈자들의 애국애족의 불꽃정신은 자자손손 남으리리. 국가발전의 영원한 초석이 되며 조국의 무궁한 번영과 영광을 위해 지난날의 용감무쌍한 기상과 정신을 이곳에 되새기며 무공수훈자들의 위대한 공적과 나라 위한 충절을 자손만대에 기리고자 이 비를 건립하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495 | 24-2-15 | 6·25 참전 기념탑(앙성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앙성분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92-01-01 |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일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호국 용사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후면에 앙성면 출신 참전유공자 403명의 이름을 명각하였다. 앙성면 6.25참전기념탑 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이들의 공훈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1992년 6월 2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자신의 생명을 헌신한 이들의 정신은 개인의 이익보다 민족을, 당대보다 후손을 향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자유와 독립의 참된 정신을 일꺠워 주고 있다. |
496 | 53-2-04 | 충혼탑(진도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진도군 | 진도읍장 | 탑 | 6·25전쟁 | 1950 | 4.8x2.7x13m | 1987-06-07 | 진도 군강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진도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진도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7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진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진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97 | 53-1-06 |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비석 | 해외운동 | 1886 | 높이 2.5m, 기단 0.74m | 1975-08-15 | 일강 김철선생은 평생을 조국광복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일강 김철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의 참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498 | 31-1-07 | 안동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성균관유도회안동지부(이동술 총무부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8-15 | 이 기념비는 안동유도회에서 발의하고 동아일보사와 안동시민들의 정성을 모아 1985년 8월 15일 안동댐 보조댐광장에 건립되었다. 도쿄 유학생 강대극은 1919년 2월 8일에 있었던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에 참가한 후 비밀리에 안동에 돌아와 김원진(군청 서기), 김영옥(안동교회 목사) 이중희(안동 교회 장로) 등과 접촉하여 의거를 계획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김재명(세브란스의전 학생)도 내려와 김병우(안동교회 장로) 등을 만나 거사를 모의하였다. 한편, 예안의 조수인은 3월 8일 손병희로부터 서신을 받고 안동지방의 의거를 계획하였다. 3월 17일, 예안의 1차 시위를 출발로 3월 18일 안동시와 도계의 시위에 이어 3월 21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21일 하루 동안 길안, 임하, 임동, 일직에서 일어났다. 3월 27일 하회의 소년들 시위를 끝으로 안동지방의 의거는 막을 내렸다. |
499 | 31-1-09 | 추강 김지섭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김두현(손) | 비석 | 의열투쟁 | 1884 | 0 | 1971-01-01 | 1922년 상해로 가서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해 및 북경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23년 왜적의 고관암살중요시설의 파괴계획을 하다가 비밀이 폭로되어 상해로 망명한 후 동년 12월에 도일하였다. 1924년 1월 5일 동경으로 와서 신년부터 제국의회가 동경에서 열리는데 조선총독부등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폭탄으로 폭사시키려다가 의회미개로 실패하고 1월 5일 저격목적을 변경하여 왜황궁성이중교에 나타나 투탄하였으나 불발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구속되었다. 동년 10월 6일 일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불복상고중 1928년 2월 10일 천엽형무소에서 병사하였다. |
500 | 11-1-38 | 안중근장군 동상 | 독립운동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 | 2015-05-01 | 광복 70주년 기념 및 육군사관학교 개교 69년을 기념하여 안중근 장군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의 후원 아래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안중근 장군의 정신은 학교 교훈인 '지.인.용'의 실천적 표상으로 학교 목표인 '국가방위를 위한 정예 육군장교 양성'구현과 일맥상통하다. | |
501 | 43-1-07 |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고전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85-12-30 | 1919년 4월 6일 고전면 3·1독립운동이 전개된 곳에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하동군 고전면에 사는 박영목, 정상정 등은 청장년들은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고 배다리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준비하였다. 4월 6일 배다리장터에는 고전면 주민들과 인근에 사는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1,000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들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4월 7일 일본 경찰은 고전면 지소마을을 수색하여 박영묵과 이종인 등 시위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985년 12월 30일 만세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3·1독립운동을 전개한 고전면 주민들의 3·1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502 | 11-2-11 | 강재구 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동상 | 월남참전 | - | 1966-02-23 | 1965년 10월 4일 강재구소령의 중대원 중 한 명이 홍천 맹호부대 훈련장에서 베트남 파병을 위한 수류탄 투척훈련 중 실수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강재구 소령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려 장렬히 산화하고 중대원들을 구했다. 이 동상은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육군 전 장병의 성금으로 1966년 2월 23일에 세워졌다. 강재구 소령을 진정한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길이 기념하기 위해 화랑기초훈련 기간 중 재구의식을 거행하며, 화랑의식을 마친 후 생도들은 이 동상을 우러러보면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되새긴다. | |
503 | 11-2-13 | 불멸탑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탑 | 기타 | - | 1959-10-02 | 생도 1기생들이(후에 육군의 기별 조정에 따라 10기생으로 개칭) 6.25당시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했던 동기생들의 불멸의 기상의 기리고, 전사한 동기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
504 | 23-1-02 | 백야김좌진장군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역사문화시설관리사업소) | 비석 | 해외운동 | 1889 | 1949-07-13 |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 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 조직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또한 1925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 운동의 전개와 동포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추모비는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의 치적을 적은 비이다. 1949년 대한 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으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 |
505 | 51-2-27 | 월남 참전 기념탑(군산) | 국가수호 | 2008-05-15 | 전라북도 군산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군산시지회 | 탑 | 월남전쟁 | 2007-12-01 | 월남참전기념탑은 1964년부터1973년까지 월남 전선에서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친 전우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월남파병의 참뜻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 ||
506 | 13-2-20 | 현충탑(화성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 탑 | 기타 | 1997 | 0 | 1997-06-06 | 화성시 송산동에 국가위기 시 산화한 애국지사와 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화성시)’을 건립하였다. 화성시는 애국지사와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7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기 화성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화성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07 | 51-2-33 | 구시포 경찰전적 충혼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경찰서 | 탑 | 6·25전쟁 | 1977-11-17 | 1977. 11. 17 산화한지 2주기를 맞이하여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17기, 18기 전우 뜻을 모아 유명을 달리한 세 전우의 명복을 빌고자 유찬종 등 27명이 추모비를 건립 | ||
508 | 52-2-70 | 소병민 중령 상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라북도재향군인회 | 동상 | 기타 | 1968 | 0 | 1970-11-03 | 1968년 11월 3일 충남 서산에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출동하여 부대를 지휘하다 장렬히 산화한 소병민 중령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509 | 52-2-69 | 故 김범수 대위 추모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북도 임실군 | 제35보병사단장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04-30 | 故 김범수 대위의 숭고한 살신성인 정신을 추모 2002년 학군장교 40기로 임관한 김범수대위는 35사단 신병교육대대 소대장으로 임무수행 중 2004년 2월 18일 사단 신병교육대대 수류탄 투척훈련 과정에서 훈련병이 당황해 수류탄을 던지지 못하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감싸 안아 훈련 중이던 269명의 동료들을 구하고 순직했다 |
510 | 41-2-16 | 6.25참전 국가유공자 선양비(중구) | 국가수호 | 2015-05-14 | 울산광역시 중구 | 6.25참전유공자회 중구지회 | 탑 | 6·25전쟁 | 2013-06-17 | 2013년 6월, 전쟁영웅이신 6.25참전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찬양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세워졌다. 참전유공자의 예우 및 명예를 선양하고 희생자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국난 극복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 ||
511 | 42-2-66 | 헌병순직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진해기지사령부 | 비석 | 기타 | 1979 | 0 | 1980-04-07 | 1979년 8월 25일 태풍 쥬디호가 남부 지방을 강습했을 때, 마진터널앞 군경 합동검문소에서 근무하던 해군 헌병대 소속 고 하사 전판수 등 8명이 폭우가 쏟아지는 오후 2시부터 마진간 도로가 침식되어 차량 통행이 불가한 상태에서 도보로 마산ㆍ창원 등지에서 귀진하는 약 3천여명과 200여대의 차량을 통제하다가 갑작스런 산 사태로 8명 전원 순직하여 고인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다음해 건립하였음. |
512 | 14-2-37 | (인천시)충혼비 | 국가수호 | 2015-10-14 | 인천광역시 계양구 | 국제평화지원단(제9100부대) | 비석 | 기타 | 소 | 2005-02-28 | 강하훈련, 해상훈련, 천리행군 등 조국 수호의 성업을 수행하던 중 순직한 흑룡부대 특전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기상과 뜻을 후배 장병들이 본받도록 하고자 흑룡부대 전 장병들의 성금을 모아 2005년 2월 28일 건립하였다. 또한 2004년 2월 26일 고공훈련 중 순직한 故김용기 원사와 2007년 2월 27일 다산부대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여 작전 중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故윤장호 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충혼비 좌측에 故김용기 원사 충혼비, 우측에 故윤장호 하사 추모비를 추가로 건립하였다. | |
513 | 55-2-08 | 충혼탑(금산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금산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 1958-06-06 | 나라위해 목숨바친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후세에 호국정신 함양과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건립 |
514 | 17-2-61 | 6·25 및 월남참전기념탑(평창) | 국가수호 | 2015-05-14 | 강원도 평창군 | 평창군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기단 높이 0.5m, 기단둘레 3.9m | 2014-06-25 | 6·25참전유공자 및 월남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평화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국가안보의식과 나라발전의 표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움 |
515 | 31-2-11 | 청송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청송군 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0-12-26 | 청송군 금곡동 무궁화동산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청송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청송군과 무공수훈자회 청송지회는 김종학, 이원세, 박갑생 등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0년 12월 26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청송 무공수훈자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서 싸우다가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516 | 30-1-47 |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5-10-27 | 경상북도 청도군 | 청도군교육지원청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2-07-25 | 운문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고종 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김상구, 김종대가 당시 사립 문명 학교장 김우곤의 집에서 동지 여러 명을 모아 독립회를 조직하여 결의문을 만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3월 18일 정보를 접수한 일경들이 독립회 청장년들을 모두 잡아가려 하자 동네 주민들과 독립 회원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운문면 3·18 독립운동이다. 3·18독립운동 기념관은 방지초등학교 문명분교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학교 내 유일한 독립기념관이다. 1919년 기미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가족과 경상북도 교육청의 지원으로 2002년 건축 한 것이다. |
517 | 45-2-03 | 호국영웅 강승우 상 | 국가수호 | 2002-11-21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동남초등학교 | 동상 | 기타 | 1952 | 2001-06-23 | NULL | |
518 | 10-2-17 | 미공병부대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용산구 | 한민친선군민협의회 | 비석 | 6·25전쟁 | 가로 1.9m, 높이 1.1m, 기단 0.65m | 2009-09-27 | 1950년 6월 25일 수도 서울이 북괴군의 전면적인 기습공격으로 점령당하자 우리군은 적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6월 28일 부득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또 다시 수도를 점령당하였다. 이 진퇴를 거듭하던 긴박했던 시기에 미공병부대들은 한강에 부교와 도보교를 설치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특히 1.4후퇴 시에는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이 다리를 건너 생명과 재산을 구할 수 있었다. 공산군이 한반도 이남에서 완전히 쫓겨난 1951년 6월, 미 공병부대들은 한강인도교의 철교를 복구하여 우리나라 경제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한국전쟁 중 보여준 미 공병부대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면서 이를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운다 | |
519 | 10-2-24 | 은평구 6.25참전유공자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은평구 | 은평구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7-05-15 | 나라를 위해 희생·공헌한 6.25참전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고자 지역출신 호국영웅 선양을 위한 명비 건립 | |
520 | 31-1-77 | 순국열사 구성집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북도 의성군 | 능성구씨 좌성승공파 덕천문중(구장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05 | 0 | 2017-12-15 | 1906년 9월 12일경 김동산(金東山)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북 봉화군(奉化郡)·강원도 삼척군(三陟郡)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동월 25일경에는 삼척군 개산동(皆山洞)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7월경에는 성익현(成益賢)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蔚珍郡) 내에서 활동하였고 또 삼척군 죽변동(竹邊洞) 해안에 있는 일본 어선을 공격하여 일인 조야국송(早野菊松)외 2인을 총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년 8월 5일부터 10월 10일경 사이에는 울진군 석호리(石湖里) 박명칠(朴明七)과 삼척군의 김자율(金子律)·이도장(李都長)·김자현(金子賢)의 집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그후 1908년 10월 7일 대구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
521 | 25-2-67 | 영원한 빛 | 국가수호 | 2010-11-1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비석 | 기타 | 2010 | 2010-06-15 | 공군과 공군사관학교 총동창회가 2010년 6월 15일 북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335-1(공군사관학교 내)에 대한민국 상공을 수호하다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해 ‘영원한 빛’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비 옆에 위치한 추모벽에는 조종사 333명 등 총 378명의 공중 전사 및 순직자의 이름이 헌액되어 있으며 이들 가운데 6·25전쟁 당시 전사자는 38명이다. | |
522 | 42-2-56 | 임병래 중위 동상 | 국가수호 | 2011-11-1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사관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 | 2010-11-26 | 경남 진해시 안곡동 해군사관학교 내에 인천상륙작전시 왕성한 첩보활동을 벌이다 전사한 임병래 중위를 추모하기 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2010년 11월 26일 동상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지구까지 밀린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 놓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대표적인 상륙작전으로 손꼽히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헌신적인 활약이 있었다. 그 주역인 임병래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 출생으로 1941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한후 1950년 4월 20일 해군 중위로 임관하여 해군정보국 창설 당시부터 창설요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고 영흥도 첩보전 조장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영흥도 첩보전' 일명 X-RAY작전에서 해군정보국 첩보대는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배치 상황, 주둔 병력의 규모와 해안방어태세 등을 파악하는 작업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 D-day가 임박하여 영흥도 첩보기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미군이 상륙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기습해왔고,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해군 첩보대원 9명과 해군 의용대원 30여 명은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적으로부터 포위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보트로 탈출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두 대원은 끝내 탈출에 실패하여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둔 시점에서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이 탄로날 것으로 판단한 두 대원은 적을 쓰러뜨린 다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3년 7월 6일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우리 정부는 1954년 1월 4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여 전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
523 | 24-1-03 |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일 용원 장날 이희갑·단경옥·이강렴·손승억 등의 장터에서 2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에서 김은배(金殷倍, 1891~1971), 단경옥(段慶玉, 1894~1943), 손승억(孫承億, 1893~1934), 윤무영(尹務榮, 1890~1962), 윤주영(尹周榮, 1897~1938), 이강렴(李康濂, 1902~1927), 이강호(李康吉, 1895~1973), 이희갑(李喜甲, 1897~1953) 등이 주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니면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이 비를 세웠다. |
524 | 25-1-19 | 내수초등학교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8-11-25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내수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4-02-01 | 1919년 4월 2일 내수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 85명은 의병장 출신인 한봉수(1883~1972) 선생의 지휘에 따라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구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생들은 엄익래, 이건간 선생의 인솔로 나무를 심기 위해 학교를 나와 이곳을 지나가던 중 한봉수 선생을 만나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내수초등학교 총동문회는 2004년 2월 1일 청원군 내수읍 마산리 177에 위치한 내수초등학교 교정에 내수초등학교 만세운동 85주년을 기념하고 3·1운동에 참여했던 내수초등학교 동문 선배들의 고귀한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25 | 18-2-13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성남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10-31 | 어찌 잊으랴 그 날을! 민족분단의 비극인 6·25전쟁에서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고 세계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도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호국 용사들의 거룩한 충정을 어찌 잊으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신명을 다 바쳐 국권과 체제를 수호하고 국위 선양의 위업을 이룩한 호국 용사들의 값진 희생을 그대들은 아는가? 이에 우리들은 성남시 호국 무공수훈자들의 충성심을 높이 받들고 역사에 길이 빛날 이들의 공훈을 영원토록 보전하고 후세들에게 국가의 안보의식과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위국헌신의 충정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거룩한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이곳에 세우노라 |
526 | 25-2-40 | 6·25 참전용사 기념비(학산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학산면6.25참전유공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8-30 | 학산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8월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 927-1 (학산게이트볼 구장 옆)에 학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65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27 | 25-2-43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추풍령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추풍령면6.25참전유공자회 박래영 | 비석 | 6·25전쟁 | 1950 | 4.1m | 2005-11-03 | 추풍령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 461-2에 추풍령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58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후에 2017년 11월 접근성이 좋은 도계공원 내(추풍령리 203-5)로 이전하여 지역민들의 나라사랑정신 함양과 국가유공자의 자긍심에 크게 기여하였다. |
528 | 23-1-43 | 김인전선생흉상 | 독립운동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김인전선생추모사업추진위원회 | 동상 | 해외운동 | 1876 | 0 | 2004-03-16 | 김인전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다.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유지 강화 등 독립운동의 활성에 온 힘을 쏟으며 한국 노병회를 발기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시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중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 임시정부 묘역에 안정하였으며, 2004년 3월 김인전선생 추모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나라사랑정신을 후세에 계승시키기 위해 흉상을 건립하였다. |
529 | 17-2-063 | 강릉학도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15-06-09 | 6·25정쟁 당시 강릉지역 5개교(강릉농업고등학교, 강릉상업고등학교, 강릉여자고등학교, 강릉사범학교, 주문진수산고등학교) 학도병 424명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
530 | 15-1-18 | 독립지사 김용기·안응건선생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3-05-24 | 김용기(金龍基, 1901~1983)는 1920년 만주에서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의 부하로서 일본영사관 습격 등의 활약을 하였고, 1921년에는 김좌진(金佐鎭) 휘하로 전속되어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전했다. 1923년 8월 의군부(義軍府) 특파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관공소 방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응건(安應乾, 1886~1920)은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경기도 포천 자택에서 태극기 25개와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이지 않으면 방화하겠다는 격문을 작성하여 다음 날 밤 태극기를 각 집에 세우고, 격문을 마을 게시판에 붙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6·25참전전우회 포천군 영북면 분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2003년 5월 24일 이 비를 세웠다. |
531 | 13-2-21 |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8-06-25 | 수원고등학교 교정 내에 6·25전쟁 기간에 순직한 학우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학도병 6·25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수원고등학교 총동창회는 순직한 학우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6월 2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수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수원고등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32 | 31-2-21 | 6·25 참전용사 선양비(예천읍)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예천군 | 예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8-28 | 예천군은 2001년 8월 예천군 예천읍 서본 240(예천문화회관 내)에 예천군 출신 6·25참전유공자 1, 462명(상이군경 115, 전사자 497, 무공수훈자 53, 참전용사 797)의 공적을 선양하기 위해 선양비를 세우고 그 비에 이름을 각인하였다. |
533 | 42-1-44 | 함안군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목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16-11-23 | 경상남도 함안군 | (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 기념관 | 문화운동 | 0 | 2015-09-30 | 애국지사 손양원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원수를 사랑한 실천정신을 널리 전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긍심을 갖고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고자 선생의 출생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여 지역문화 콘텐츠로 개발하여 순례관광자원 및 지역주민 휴식, 교육, 전시체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함 | |
534 | 12-2-17 |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 | 국가수호 | 2015-10-14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사)대한민국건국운동자유족회 | 탑 | 6·25전쟁 | 102 | 19890815 | 반탁반공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건국의 이념이며 이 운동은 오늘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꽃피운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8.15해방과 더불어 불어닥친 신탁통치의 음모와 공산주의의 야욕으로 비롯된 6.25 남침을 맞아 싸우다가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이름없이 쓰러져 갔다. 그 반탁반공의 순국 청년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길이 받들고 역사에 거룩한 업적을 기록해 두고자 사단법인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를 1965년 12월 28일 구성하고 한국학생건국운동사를 펴낸뒤 살아남은 동지들의 뜻을 모아 여기에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을 세운다. | |
535 | 41-2-19 | 울산경찰 추모의 공간 | 국가수호 | 2016-04-27 | 울산광역시 중구 | 울산지방경찰청(울산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2015 | 0 | 2015-06-05 | 6.25당시 공비토벌에 교전 하거나 민생 치안을 위하여 경찰업무 수행 중 순직한 110명분의 경찰관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536 | 31-2-31 | 6·25 참전 유공자 기념탑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영양군 | 6.25참전유공자회 영양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4-06-29 | 영양군6·25참전유공자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2004년 6월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147-1(영양군민회관 입구)에 영양군 출신 6·25참전유공자 1, 508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에는 6·25참전유공자 1, 508명의 이름과 추모의 글을 새겨넣었다. |
537 | 30-2-30 | 6·25 참전 유공자비(고령군)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8-26 | 6·25참전유공자회 고령군지회는 2004년 8월 고령군 고령읍 지산1리 192(고령국악당마당 앞)에 고령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2004년 건립 때 6·25 무공수훈자, 참전유공자, 참전경찰, 참전민간의용대를 포괄하여 700명의 이름을 명각했는데, 2007년 62명의 참전유공자를 추가 발굴하여 유공비 옆에 와비를 세워 그 이름을 새겨넣었다. | |
538 | 16-2-79 | 월남 참전용사 만남의 장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수 | 장소 | 월남참전 | 1964 | 0 | 2002-12-02 | 1964년~1973년 월남전참전유공자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월남파병 당시의 훈령장을 만남의 장으로 조성하여 월남파병 용사들의 자긍심을 함양하고자 2002년 12월 건립하였다. |
539 | 24-2-25 | 호국 참전 유공자 기념탑(단양)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단양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단양군지회 | 탑 | 기타 | 2005 | 0 | 2005-12-19 |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 참여하여 산화한 순국선열의 명복을 빌며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 |
540 | 55-1-34 | 설봉 김도규의병장 기적비 | 독립운동 | 2007-05-03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청 | 비석 | 의병운동 | 1885 | 기단높이 3m | 2005-04-29 | 김도규은 보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강건하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특히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고 했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근심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고향 보성에서 담산 안규홍이 거의했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호곡싸움에서 적의 목을 베고 안규홍의 부장이 되었다. 이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 보성파청전투를 비롯한 보성군 문덕면 진산, 병치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과 싸우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비록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글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역량이 크고, 정직하고, 경우가 분명하며 충성과 의리를 중히 여겼다. |
541 | 11-1-33 | 오화영 사택 터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교교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9-03-01 | 오화영은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가 동학에 입교한 적이 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남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개성과 원산 방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로 인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한편, 신간회에도 참여해 민중대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흥업구락부사건에도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다음 달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542 | 24-2-30 | 6·25 참전 유공자비(중앙탑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가금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9-16 | 6·25참전유공자회 충주시지회 중앙탑면분회에서는 ‘6·25참전유공자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탑면 출신 참전유공자 64명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전 유공자 등 지역의 뜻있는 분들의 성금과 충주시의 지원을 받아 2005년 9월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543 | 31-1-69 |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12-05-16 | 경상북도 청송군 | 청송군 | 기념관 | 의병운동 | 0 | 2011-06-02 | 청송의진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공원.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을미개혁이 단행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거의를 촉구하는 안동의진 소모장인 유시연의 격문이 청송에 전해지자, 이에 자극받아 1896년 3월 16일(음력)에 심성지를 창의장으로 한 청송의진이 거의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청송의진인 허훈·허환 형제가 주도한 진보의진이 거의하였다. 청송의병은 김하락의 이천의진을 비롯해 각지의 의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청송의진은 영덕전투에 참가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화전등 전투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아 패전하였다. 청송의진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전전하다가 고종의 해산조칙을 내리자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박연백,유시연, 박처사, 강진선, 김문호, 이세기, 이사옥, 강진수, 서종락 등 의병부대가 청송을 활동무대로 활약하였다. 2011년 6월 2일 청송군에서는 청송의병의 항일정신과 의병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 |
544 | 31-2-33 | 의성군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8-09-05 | 경상북도 의성군 | 무공수훈자회의성군지회 | 비석 | 기타 | 2007 | 2007-04-17 | 의성군 중리 호국동산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의성군 무공수훈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7년 4월 17일 전공비를 세웠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의성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금산군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45 | 42-2-50 | 의령군 호국참전유공자 비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의령군 | 6.25참전유공자회 의령군지회 | 비석 | 기타 | 2008 | 0 | 2008-02-22 | 의령군 무전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국참전유공자 비’를 건립하였다. 의령군은 이곳 출신으로 조국을 위해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8년 2월 22일 유공자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 의령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에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의령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46 | 13-2-45 | 수원시 참전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9-05-25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시 사회복지과 | 비석 | 기타 | 0 | 0 | 2009-01-01 | 수원시 인계동 예술공원 내 분수광장 옆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수원시 참전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했다. 수원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9월 28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수원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수원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47 | 20-2-33 | 자유평화 수호탑 | 국가수호 | 2009-05-25 | 충청남도 금산군 | 월남참전자회금산군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0 | 2005-11-30 |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세계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선 금산 출신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2009.5.25. 월남참전자회 금산군지회에서 건립했습니다. |
548 | 42-1-41 | 우봉 안지호의사 유허비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3·1운동 | 1919 | 2010-12-21 | 안지호는 1857년 9월 21일 고성군 고성읍 풍화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여름 경상남도지사에게 도정이 부패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다며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발송했고 1915년 9월에는 우리의 원수 일본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고 약속을 어겼다는 탄원서를 마산경찰서장과 일본정부에 발송하여 구류 15일을 살았다. 1917년 12월 일본은 도적의 마음으로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린다는 규탄의 글을 써서 함안경찰주재소의 유리창을 파괴하고 투입하여 감옥에 갇혔으며 풀려난 후 다시 조선총독부에 필리핀, 폴란드가 독립했으므로 조선도 독립되어야 한다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함안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함안읍 의거를 주도했다. 군중과 함께 군청과 주재소를 파괴하고 우편국, 소학교 및 보통학교, 등기소를 돌며 기물을 파손했으며 군수의 관복을 찢고 경찰서장과 일본관리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2∼3인이 체포되자 그들은 죄가 없으니 나를 체포하라며 자진해서 체포됐다. 부산지청 마산지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대구복심병원에서 징역 7년의 가중형을 받았다. 1921년 12월 23일 마산형무소에서 향년 65세로 순절했다. 우봉 안지호의사 유허비는 2010년 가야읍 신음리 861-2번지 일원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藕峯安智鎬義士遺墟碑」로 새겨졌으며 유허비 옆에 따로 높이와 폭이 1.5m인 취지문비를 세워 유허비를 세운 뜻을 알 수 있도록 했다. | |
549 | 30-1-63 | 채기중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12-10-17 | 경상북도 상주시 | 채욱식 | 생가 | 의병운동 | 1915 | 2005-12-01 |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 해외에서는 독립전쟁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기지들이 건설되었고 국내에서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국내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국내 비밀 단체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풍기 광목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중심이 되어 1915년에 결성한 비밀 단체였으며 채기중 선생은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분이다. | |
550 | 13-1-33 |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13-05-13 | 경기도 과천시 |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 동상 | 3·1운동 | 1880 | 0 | 1988-03-11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이 동상은 1988년 단재의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를 연재한 조선일보가 지령 2만호 발행 기념으로 발기하고 유지들의 출연으로 세운 것이다. |
551 | 20-2-40 | 6.25참전유공자기념비(대전시 가양동) | 국가수호 | 2013-11-22 | 대전광역시 동구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1동 새마을협의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6-27 | 대전광역시 가양1동 주민자치위원회는 2003년 6월 정전 50주년을 맞이하여 조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에 참여한 가양동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하고 고귀한 뜻을 기리고 주민들의 애국심 함양을 위한 시설물로 활용하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대전 동구 가양1동 347-2번지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높이 3.5m 규격의 화강석 재질로 3단의 좌대와 상징물, 그리고 기념비문이 있으며 대전 가양동 거주 참전유공자 1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552 | 16-2-86 | 춘천옥산포전투지 | 국가수호 | 2013-02-18 | 강원도 춘천시 | 육군제2218부대 | 장소 | 6·25전쟁 | 0 | 0 | 2010-06-25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제16포병대대가 즉시 출동하여 옥산포 방향으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소탕하였다. |
553 | 30-2-47 | (왜관)6.25참전용사 충훈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칠곡군 | 한국자유총연맹 경북칠곡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1-06-25 | 칠곡지역 6.25전쟁 참전유공자 920명의 충혼을 기리고자 건립 | ||
554 | 15-2-111 | (동두천)베트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7-04-19 | 경기도 동두천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유공자회 동두천시지회 | 탑 | 월남전쟁 | 1964 | 2005-11-05 | 월남 파병 부대별 참전자(맹호 76, 십자성 28, 청룡 7, 비둘기 8, 백구 1, 주월사 1 맥마 67명 등 총 178명) | |
555 | 51-2-02 | 월남 참전 기념비(김제) | 국가수호 | 2003-01-01 | 전라북도 김제시 | 월남참전전우회 김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9M X 3M | 2000-10-05 | 김제시 삼정리에 2000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 700여 명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전우회 김제지회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 5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김제 출신으로 700 여 명이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556 | 30-2-41 | 고 해병소령 이인호 현충비 | 국가수호 | 2011-06-08 | 경상북도 청도군 | 청도초등학교 | 비석 | 월남전쟁 | 1966 | 1967-05-01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청도초등학교 내에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이인호 소령을 기념하기 위해 청도초등학교에서 1967년 5월 1일 현충비를 건립하였다. 이인호 소령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출생으로 현재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청도초등학교,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해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 1953년 4월 5일 해군사관학교 제 11기로 졸업하였으며 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미 해병대 상륙전 부대 훈련과정(LFTU), 육군 공수특전 교육 및 수중폭파훈련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베트남전에 한국 해병 청룡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해병 제1사단 수색중대장,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작전보좌관 및 정보참모로 근무하였다. 대대 정보참모로 투이호아 지역에서 해풍작전시 베트콩 색출을 위해 최선두에서 동굴을 수색하던 중 베트콩이 중대원을 향해 수류탄을 한 발 던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집어 베트콩 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또 다른 수류탄 한 발이 부다 대원들 옆으로 떨어져 폭발하려는 순간 수류탄에 홀로 몸으로 덮쳐 대원들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 이후 해병 소령으로 특진되며, 태극무공훈장이,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 |
557 | 12-2-16 | 6.25전쟁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2-11-12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0-10-16 | 서울고등학교 총동창회는 2010년 10월에 6·25전쟁 때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학도병으로 참전한 서울고 동문들의 명예를 선양함으로써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서울고등학교 교정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전 기념비는 5개의 오석으로 된 비석이 배치되어 있고, 서울고 마크를 새긴 원형의 화강암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후면의 주 비석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새겼고, 주 비석 좌우에 한 쌍씩 서 있는 4개의 비석에는 서울고 동문 참전자 453명의 이름을 기수별로 새겨 넣었다 |
558 | 41-2-05 |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신불산공비토벌참전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2 | 기념비 2m, 너비 0.5m, 두께 0.6m | 2001-06-27 | 제53보병사단은 2001년 6월 27일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 232-16 석남사 입구에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중 희생된 전몰군경, 의용대원 및 지역 주민 등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참전용사 및 유가족의 명예를 선양하며 고귀한 희생정신을 길이 빛내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해마다 신불산참전유공자회의 주관으로 추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군경과 민간 의용대의 신불산 공비토벌작전은 1949년 말부터 1954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군과 경찰, 의용대가 남부군 제5지대장 김원팔 등 450여 명을 소탕했으며, 1952년 2월과 3월에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울산경찰서, 의용대가 미 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공비활동과 토벌작전 과정에서 희생당한 울산지역의 우익인사와 경찰관, 의용대, 군인은 140여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
559 | 10-2-23 | 6.25전쟁 참전 학도병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중구 | 성동공업고등학교 총동문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7-05-21 | 성동공업고등학교 출신의 학도병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학들에게 일깨우고자 이 명비를 건립하였다 | |
560 | 52-1-32 | 김인전목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8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주서문교회(이승규) | 비석 | 해외운동 | 1876 | 0 | 1986-04-29 |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을미사변 등 국내정세가 혼란하던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에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주력하다가 1910년을 전후로 일제의 침략이 완전히 표면화되면서부터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보다도 많은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議政院) 재무예산위원(財務豫算委員)으로 피선되자 임시의정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즉 의정원에서는 인구세(人口稅)의 징수, 국내외에서의 독립공채 발행, 구국(救國) 활동을 위한 재정단(財政團)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으나 예산과 결산만큼은 행정부에 전담하였다.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政務調査特別委員)이 되어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의 대외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해 지구력과 규율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의 개최와 군인학과의 개설, 사업부의 설치, 국민의용병 등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의 실시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한 지역 선정, 외국의 사관학교에 무관학생(武官學生)을 파견하고 군사선전대를 마련하는 등 직접적 전쟁에 대비키 위한 전열을 가다듬는 등 안건을 내세워 실천토록 하였다. 이렇듯 의정원의 안건설정, 임시정부의 시정방침 등 활발한 활동으로 1920년 4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 의정원을 이끌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 연구회가 협의하여 국내외 각 방면에서의 활동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한(南韓) 지역의 기독교와의 연락책임자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본구 의원에 당선되어 한진교(韓鎭敎) 서병호(徐丙浩)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교민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臨時公債管理局長)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한 중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학무총장(學務總長) 대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하였으며,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連署)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제4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들의 단합을 위하여 안창호 김덕진(金德鎭) 최 일(崔日)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원이 되었으며, 9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교육과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김 구 조상섭(趙尙燮) 이유필(李裕弼) 여운형(呂運亨) 등과 한국노병회(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그는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10월 해산할 때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던 그는 1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다. (1993년 유해봉환, 서울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561 | 15-2-72 | 가평학도 의용대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가평군 | 가평6ㆍ25참전유공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1-11-01 | 가평6·25참전동지회는 2001년 11월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 321-1 (가평공설운동장내)에 6·25 당시 북한군의 무력 침공을 막고자 애국학생들이 자진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전한 전몰자와 참전학도병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전사자와 작고한 동지들의 명단이, 기념비 오른쪽에는 '학우여! 전우여! 고이 잠드소서'라고 새겨진 추모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
562 | 31-1-54 | 애국지사 성계 김경성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2 | 경상북도 의성군 | 김태권(손) | 비석 | 문화운동 | 1879 | 0 | 1991-07-25 | 김경성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도덕리 출신으로, 김중탁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경성은 1919년 10월경 개인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였으며,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신흥 무관 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인도하였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1921년 4월 14일 대구 지방 법원 경주 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죄 명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563 | 14-2-07 |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광역시 중구청 | 탑 | 6·25전쟁 | 1950 | 중 | 2000-08-31 |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은 2000년 8월 31일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가 주체가 되어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는 2,000여명의 규모로 6·25전쟁 중 군에 입대하여 어린 학생의 신분으로 자유 수호를 위해 참전하였고, 200여명이 전사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인천 시내 각 중학교(현 제물포고, 인천고, 인천기계공고, 동산고, 대건고, 인천여고, 인천여상, 박문여고, 남인천중 등)에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자 학도의용대를 보강조직하여 치안유지에 힘썼다.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재학생이 주축이었고, 당시 고려대학교 2학년 이계송이 인천학생의용대장에 선출되었다. 승전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또 다시 위기에 처하자, 징집대상이 아닌 어린 학생 2,000여명이 1950년 12월 18일 축현초등학교에 집결하여 출정식을 갖고 부산까지 남하하였다. 1951년 1월 700여명은 마산에서 해병대로, 1,300여명은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전사자 200여명, 행방불명자 1천여명, 생존자 450여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인천학도의용대는 1998년 확인되는 대원 1,300여명을 모아 ‘인천학도의용대 6·25참전회’로 재결성되었다. |
564 | 50-2-22 | 순국경찰관 충혼 불망비(화순) | 국가수호 | 2003-02-10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경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m x 1.5m x 3m | 1985-11-28 | 6·25전쟁 당시 화순경찰서 소속으로 백아산과 화학산, 모후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경찰관 23위의 넋을 기리기 위해 화순경찰서가 1985년 11월 28일 전남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 산5-1(너릿재공원)에 충혼불망비를 건립하였다. 너릿재 공원에는 1950년 10월 북한군의 습격으로 숨진 화순경찰서 소속 경찰관 23위를 모신 순국경찰묘지와 더불어 1951년 4월 너릿재에서 싸우다 순국한 무명용사들의 묘지가 있다. |
565 | 30-2-35 | 무공수훈자 전공비(청도군)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청도군 | 무공수훈자 청도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5-30 | 무공수훈자 청도군지회는 2000년 5월 30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청화로 70 (군민회관 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운 청도군 출신 무공수훈자 76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에게 숭고한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고, 전공비에 무공수훈자 76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2023년 10월20일 군민회관 철거로 인해 충혼탑 부지로 이전하였다 |
566 | 17-2-02 | 심일소령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1.5m, 높이 2.5m | 1998-10-15 |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마차초등학교 내에 6·25전쟁 당시 육탄공격을 감행한 심일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영월군청년회의소에서 1998년 10워 15일 이 비를 세웠다. 심일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4기로 입학,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당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포탄을 쏘아대며 계속 전진해오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한 끝에 북한군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전공 사실은 순식간에 전군에 전파되어 북한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공로로 중위에서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이후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군 등지의 전투에서도 참전했다가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하여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
567 | 30-1-48 | 성주 공적 충혼비 | 독립운동 | 2007-01-18 | 경상북도 성주군 | 성주군 | 비석 | 기타 | 2004 | 2004-01-01 | 성주 출신으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 국토수호를 위해 희생한 6·25참전 유공자, 자유와 평화·정의를 위해 참전한 파월장병들이 많다. 성주군에서는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6·25전쟁 제54주년(2004년 6월 25일)을 맞아 이 비를 세웠다. | |
568 | 50-2-33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20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광역시 푸른도시사업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2-11-05 | 광주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 내에 광주광역시 출신 무공수훈자를 추모하기 위해 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에서 2002년 11월 5일 이 비를 세웠다. 이 비는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신 광주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훈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현충시설이다. 전공비의 전면 상단에는 무공수훈자의 마크를, 탑신 전면에는 전공비 명칭과 비문을, 후면에는 광주지역 무공수훈자의 성명을 가나다순으로 오석에 명각하였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에서는 조국수호에 일생을 바치신 무공수훈자의 공훈을 드높이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 |
569 | 52-2-14 | 충혼탑(진안)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부귀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2-09-30 | 진안 부귀면 사인암 숲에 6·25전쟁 기간 부귀면에서 전사한 전몰용사 등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부귀면은 이곳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9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부귀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귀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70 | 52-2-36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남원)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남원시 | 무공수훈자회 남원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2 | 0 | 2002-05-31 | 남원 국민관광단지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66명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남원)’를 건립하였다.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5월 3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남원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571 | 43-1-52 | 진주 항일투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10-23 | 경상남도 진주시 | 광복회울산경남지부 서부연합회 | 비석 | 3·1운동 | 1919 | 2002-04-20 |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진주시 매년 신년, 3.1절, 광복절에 후손들이 정기적인 참배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우리고장 출신의 애국선열에 대한 공훈을 돌이켜보고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는 의미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 동부지역(문산, 반성, 금산, 미천, 정촌, 금곡: 옛진양군)의 항일투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됨, 매년 신년, 3.1절, 광복절에 후손들이 정기적인 참배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우리고장 출신의 애국선열에 대한 공훈을 돌이켜보고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는 의미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 | |
572 | 52-1-34 | 이석용의병장 생가 | 독립운동 | 2006-04-24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주민복지과 | 생가 | 의병운동 | 1878 | 1870-01-01 | 이석용 의병장 | |
573 | 13-2-61 | 군포시 월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기도 군포시 | 월남참전자회 군포시지회 이석규 | 탑 | 월남전쟁 | 0 | 2012-10-10 | 군포시는 2012년 10월 군포시 금정동 산 356-8 한얼공원 내에 월남기념참전탑을 건립하여 젊은 나이에 자유수호를 위해 베트남에 파병되어 용감히 싸운 군포 출신 베트남 참전 용사 1, 057명의 공적을 기리고 그들의 위대한 기상과 숭고한 뜻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한얼공원에는 이 현충탑과 아울러 육탄 10용사 가운데 군포 출신인 이희복 용사 동상이 설치돼 있어 시민들을 위한 안보의식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
574 | 12-2-02 | 강재구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02-11-02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장 | 동상 | 기타 | 1965 | 0 | 1986-04-12 |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학교 내에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6년 04월 12일 동상을 건립하였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 졸업후,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부하 사병이 실수하여 수류탄이 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속했던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는 '재구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울고 8회 졸업생인 강재구소령의 고귀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6년 4월 12일에 8회 졸업생들이 졸업 30주년을 기념하여 동상을 만들었다. 강재구 소령이 졸업한 서울고 교정에 강재구 소령의 동상을 건립하여 후학들이 선배의 살신성인하는 정신을 본받아 더욱더 애국애족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좌표가 되고 있다. |
575 | 15-2-76 | 무공수훈자 호국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포천시 | 무공수훈자회 포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06-06 | 무공수훈자회 포천시지회는 2003년 6월 6일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하성북리 635-4에 포천시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수상한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게 호국정신을 배양케 하고자 이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576 | 33-1-39 | 김수곡·김준운·권규섭·권태용·한상택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05-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문화운동 | 1906 | 2002-07-01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는 2002년 7월 1일 영천 출신 애국지사 김수곡, 김준운, 권규섭, 권태용, 한상택의 공훈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732-1(성환산공원내)에 애국지사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권규섭(?~1907) 선생은 1906년 산남의진에 참가, 산남의진의 좌영장에 임명, 동년 10월 영일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권태용(1920~?) 선생은 1944년 불교전문학교 재학중에 일본군에 강제 징병되어 대구 24부대에 입영하였다. 8월 8일 동지 김이현 등과 함께 탈출에 성공, 대구 팔공산에 은신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수곡(?~1910) 선생은 정환직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김준운(1855~1925) 선생은 신녕공립보통학교 생도들에게 영천 3·1독립운동 참가를 권유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상택(1909~?) 선생은 1928년에 비밀결사 적우동맹(赤友同盟)에 가입, 사회과학 연구를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다가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 |
577 | 25-2-34 | 6·25 참전용사 기념비(내수읍)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내수읍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11-01 | 내수읍 재향군인회는 2001년 11월 청원군 내수읍 마산리 149-2(내수읍복지회관 광장, 내수읍사무소 옆)에 내수읍 출신 6·25 참전유공자 김흥권 외 108명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78 | 33-1-52 | 조재복·조병화·홍종현·조병진·이진영·황보선·황보근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22-04-25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기타 | 1906 | - | 2001-01-16 | 1906년 3월에 조직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황보근 애국지사, 영천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병진·홍종현 애국지사, 구학회 및 적우동맹에서 학생 항일운동을 주도한 황보선 애국지사,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간부로서 강력한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이진영 애국지사, 일본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한 조병화 애국지사, 1919년 만세운동을 전개한 조재복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영천항일 독립운동 선양사업회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
579 | 31-2-32 | 한국전쟁 의성장병 전몰 위령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의성군 | 의성군 전몰군경유자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2-29 | 의성군 중리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1, 126위의 의성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전쟁 의성장병 전몰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포항의성향우회는 의성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12월 29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의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성군 전몰군경유자녀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80 | 15-1-21 | 가래비 3.1운동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기도 양주시 | 가래비3.1운동순국기념사업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7-10-16 | 이 기념비는 가래비 3·1독립운동 순국선열 백남식, 이용화, 김진성과 양주 출신 참여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7년 10월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4에 건립한 비이다. 1919년 3월 초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백남식(2010, 애국장)은 김진성, 이용화와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3월 28일 백남식 등은 효촌리 주민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고창하면서 가납리로 향하였다. 이들이 가납리에 도착했을 때, 미리 모여서 만세를 부르던 광적면과 백석면 주민들은 시위를 마치고 해산하려다가 다시 모였다. 시위대는 오후 4시경 논 가운데 모여 시위를 재개하였다. 이때 의정부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 5명과 헌병보조원, 광적면장이 도착하였다. 헌병이 군중의 해산을 명령하자, 이용화가 이들을 크게 꾸짖었고 군중들이 이들을 향해 돌팔매를 시작하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때 시위대 선두에 있던 백남식, 김진성, 이용화 3인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시위대원 가운데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
581 | 15-2-79 | 포천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5-10-27 | 경기도 포천시 | (사)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7-27 | 포천 양문리 38휴게소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포천시 출신 전몰군경과 참전유공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포천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7월 27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포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582 | 42-2-45 | 6·25 참전 기념비 (진해) | 국가수호 | 2005-11-09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창원시진해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3-22 |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시회는 2005년 3월 진해시 장천동 1-263 소방공원내에 진해시 출신 6·25참전유공자 1368명의 공적을 기리며 그들의 숭고한 구국정신과 불굴의 군인정신을 새겨 나라사랑 정신의 표상으로 삼고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83 | 51-2-24 | 6·25 참전 유공자 공적탑 | 국가수호 | 2005-10-28 | 전라북도 익산시 | 6.25참전유공자익산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4M X 9M X 3M | 2004-12-15 | 6·25참전유공자회 익산시지회는 2004년 12월 익산시 팔봉동 338-1(군경묘지내 도로변)에 국난에 처하자 자유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하여 희생하신 익산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유공자 공적탑을 건립하였다. 공적탑은 조국과 지구의 항구적 평화를 기원하며 주탑의 상단에 지구본을 설치하고 그 안에 익산 출신 참전유공자 630명의 명단을 새겨놓았다. |
584 | 16-2-67 | 함북3일전우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철원군 | 육군 제9871부대(23보병연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4-28 | 철원 자등리 제23보병연대 동산에 6·25전쟁 기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함경북도 애국청년 156명을 기리기 위해 ‘함북3일전우전공비’를 건립하였다. 3일약속전우회는 함경북도 애국청년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에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4년 4월 2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함경북도 애국청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585 | 17-2-20 | 강릉 무장공비 침투 희생자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탑 | 6·25전쟁 | 1996 | 너비 2mX2m, 높이 2m | 2000-08-29 |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통일공원 내)에 북한 잠수정이 침투한 것을 소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강릉시에서 2000년 8월 29일 건립하였다. 1996년 9월 18일 북한 무장공비 26명이 승선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상어급(360톤) 잠수정이 동해안 일대에 침투해 정찰공작 활동을 벌이다 복귀하던 중 좌초된 것을 새벽 1시 30분경 택시운전사의 신고로 발견하게 되었다. 육군은 국지도발경계태세의 최고 단계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소탕작전을 실시한다. 9월 19일 오전 10시 30분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에 은신한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전과로는 1명 생포(이광수), 13명 사살, 11명 집단 피살, 1명 도주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역 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대간첩작전 중 희생된 17명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잠수함의 침투장소가 보이는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통일공원 내에 ‘강릉 무장공비 침투 희생자 위령탑을 2000년 8월 29일 건립하였다. |
586 | 17-2-51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삼척)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1m X 1m, 뫂높이 2.5m | 1997-12-01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삼척시지회는 1997년 12월 6·25전쟁 중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삼척지역 출신의 국가유공자(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해 대한민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587 | 26-2-14 | 충혼탑(아산)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우회아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2-06-25 | 아산 신창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온양경찰 이현종 경감 등 38위의 경찰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아산경찰서와 재향경우회 아산지회는 전국 각 지구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전몰 경찰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2년 6월 25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1년 11월 30일 새롭게 신축한 후 2006년 5월 30일 성역화 하였다. 6·25전쟁 기간 아산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아산경찰서 전투부대는 1950년 7월 10일 북한 정규군 부대의 침략에 맞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많은 경찰이 전사 또는 부상당하였다. 재향경우회 아산지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88 | 42-2-15 | 장승포 군경합동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01 | 경상남도 거제시 | 장승포 주민센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4-01-01 | 거제시 장승포동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거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거제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거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89 | 50-1-37 | 항일 애국지사 김용상·김영하 선생 충혼탑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화순군 | 김원배 | 탑 | 민족주의운동 | 1919 | 2008-11-05 | 화순군 도암면 출신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하신 김용상 지사와 김영하 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함 | |
590 | 11-2-01 | 대광동문 순국 기념비 및 한국전쟁 참전 대광학생의 탑 | 국가수호 | 2007-05-03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대광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7-10-25 | 대광학교 동문은 1997년 10월 대광동문순국기념비 및 한국전쟁참전 대광학생의 탑을 건립하여 대광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서 자유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 및 순국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배 동문들로 하여금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발전의 인재로서 커나갈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 |
591 | 33-1-43 | 죽헌 이주호선생 항일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0-06-09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연일초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학생운동 | 1941 | 2007-11-03 | 일제강점기인 1930년 후반,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다혁당을 결성하여 우리 말글과 민족문화를 연구하는 한편 민중제도, 농촌계몽등 독립운동을 벌이다 1941년 9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3월 6일 만기출옥하였고 이 공로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은 항일독립투사인 죽헌 이주호선생의 공훈과 고귀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 | |
592 | 10-2-13 | 경찰혼 | 국가수호 | 2006-11-09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영등포지회 | 조형물 | 기타 | 2006 | 2006-06-23 | 영등포구 당산동에 2006년 광복 후 혼란기, 6·25전쟁, 전후 시기에 전사하거나 순직한 이 지역 경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영등포경찰서는 이 곳에서 순국, 순직한 조용태·김동욱(전쟁 이전), 이재운·박용주(전쟁 시기), 양일용·김영식(전후) 등의 숭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6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전후 영등포 경찰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공비 토벌작전에서 산화했다. 전후에도 자신의 삶보다는 구민의 치안 확보를 위해 사시사철 노력하다가 희생자가 발생했다. 영등포경찰서에서는 매년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93 | 16-2-06 | 충혼탑(춘천시)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건국회 강원도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1993-07-10 | 춘천시 퇴계공원 내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춘천 출신 전몰경찰과 애국청년 등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건국회 강원도지부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3년 7월 1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에서 춘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춘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94 | 53-2-19 | 마을을 빛낸 호국 용사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신안군 | 안좌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6-11-06 | 신안군 안좌면 마을주민 및 전몰유족은 1996년 11월 6일 신안군 안좌면 시서리 마을회관 옆에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바친 김남섭 외 4명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마을을 및낸 호국용사비'를 건립하였다. |
595 | 43-1-55 | 문태서 의병장 생가 및 사당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수 | 생가 | 의병운동 | 1880 | 2012-05-01 | 문태서 의병장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출생하여 26세 되던 1905년 일제에 의해 불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과 함께 덕유산을 근거지로 함양, 거창, 남원, 무주, 장수, 산청, 합천 등의 영호남지역과 상주, 영동, 옥천, 청주 등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무장투쟁활동을 벌이다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13년 사형 순국하였다. 이에 함양군에서는 문태서의병장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1999년 8월 15일 서상중·고등학교 앞 군유지에 문태서의병장 사적공원을 조성해 사당, 사적비, 동상을 건립했다. 2009년 1월 2일 문태서의병장 생가 복원 사업을 착수해 2011년 12월 4일 공사를 완료했다. | |
596 | 43-2-49 | 함양군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8-05-09 | 경상남도 함양군 | 6.25참전유공자회함양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7-11-15 | 함양 신관리 지원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함양군 출신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함양군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함양군은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고자 ‘함양군 6·25 베트남전 참전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7년 11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함양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각종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597 | 18-2-15 | 충혼비(특전부대) | 국가수호 | 2007-10-10 | 경기도 광주시 | 특수전교육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06-01 | 경기도 광주시 매산리 특수전교육단 정문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공군 제15혼성비행단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특수전교육단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6월 1일 건립하였다. 서초구 원지동 청계산 정상에 세운 충혼비와 같은 대상이다(No. 713). 공수기본 250기 대원들은 특전부대 용사로 거듭나기 위해 3주간의 지상훈련을 마치고 공수낙하훈련을 위해 청계산 상공을 비행하던 중 짙은 안개로 수송기가 추락하여 조국을 수호하는 창공의 꽃이 되었다. | |
598 | 26-1-12 | 이동녕선생 생가·기념관 | 독립운동 | 2013-05-13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기념관 | 해외운동 | 1919 | 0 | 2010-02-23 | 이동녕 선생은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 교육 활동 및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 귀국후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신 인물이다. 이러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생가를 조성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599 | 17-1-011 | 강릉항일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13-05-13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660㎡ | 2010-05-11 | 2010년 5월 11일 강릉시는 강릉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항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강릉항일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높이 10m의 지방의병항쟁기념탑과 강릉 지역에서 의병 활동한 민용호(을미의병 관동구군도창의대장, 독립장), 민긍호(정미의병 관동창의대장, 대통령장), 권인규(정미의병, 독립장), 권종해(정미의병, 애국장), 권기수(3·1운동, 애족장) 등 5명의 흉상이 건립됐다. 그 후, 의병활동을 펼친 공훈을 인정받아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권익현 지사 흉상을 2014년 7월에 추가(14년도 국가보훈부 12백만원지원)로 건립하여 현재는 총 6명의 항일 애국지사의 흉상이 안치되어있다. 또한 의병장들의 어록, 항일의병 참여자 120명의 명단, 의병 항쟁사 등이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됐다. |
600 | 13-2-38 | 호국 국가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 상이군경회,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2005 | 0 | 2005-06-13 | 안산 화랑유원지 내에 6·25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안산 출신의 상이군경 및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국가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안산시는 이곳 출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6월 13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수지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01 | 13-2-39 | 6·25 및 월남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 안산시장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2008 | 2008-06-15 | 안산시는 2008년 6월 경기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성호공원 내에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선 안산 출신 6·25참전유공자 및 베트남 참전유공자의 조국애를 기리기 위해 참전유공자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02 | 25-2-55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양산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 양산면 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7-06-25 | 6·25참전유공자회 양산면분회는 2007년 6월 25일 영동군 호탄리 호탄공원 내에 양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달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603 | 15-2-84 | 호국6·25참전유공자상 및 탑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남양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남양주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6-12-15 | 남양주시 일패동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남양주시 출신 전몰군경과 참전유공자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6·25 참전 유공자 상 및 탑’을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남양주시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군경과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12월 15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남양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04 | 11-2-02 | 6·25 순진 16지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9-09-22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동대문구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8-09-01 | 답십리제당보존회는 1988년 9월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쌈지공원에 6·25전쟁 당시 순국한 대한결사단 답십리분대 소속 16지사의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호국정신을 후세에 전파하기 위하여 16지사위령비를 건립하였다. 당시 동대문구 답십리에 거주하였던 곽명선, 박영인 등 16인은 대한결사단 답십리분대의 결사대원으로 지원하여 조국을 지키는데 온몸을 바쳤다. 1987년 답십리 주민 및 유족을 중심으로 16지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건립기금을 마련하였다. | |
605 | 13-2-49 | 6·25 참전 공적비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주민생활지원과 | 비석 | 6·25전쟁 | 0 | 2007-03-23 | 안양시는 2007년 3월 6·25전쟁에 참전한 안양시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상기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코자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 평촌공원 내에 6·25참전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공적비에는 안양시 출신 참전유공자 4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충혼을 상징하는 횃불조형 및 비문탑과 화강석으로 된 태극조형, 국군상, 헌화 및 참배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
606 | 24-2-32 | 6·25 참전 유공자비(충주시 노은면)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충주시 | 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노은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04-30 | 충주시는 2006년 4월 노은면 신효리 768-8에 6·25전쟁에 참여한 노은면 출신 6·25 참전유공자 68명의 명예와 공적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을 기리며 자랑스러운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607 | 25-2-58 |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5-25 | 충청북도 보은군 | 6.25참전유공자회보은군지회 | 탑 | 기타 | 1950 | 0 | 2007-10-30 | 보은군 학림리 대바위 새마을공원 내에 6·25전쟁 시기 보은군 일대에 출몰한 공비를 토벌하다가 산화한 이 지역 출신 국민방위군, 의용경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보은군 지회는 안경상, 류재한, 강근식, 라영환, 김선우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10월 30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낙동강 전선에 있던 북한군은 패퇴하면서 소백산으로 북상하는 길목인 속리산 일대에 모여 국군을 공격하거나 산간마을에 출현하여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산외면과 속리산면 청년들을 시작으로 각 면 청장년들은 북한군 패잔병을 토벌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되어 1951년 5월 해체될 때까지 수십 차례 단독 또는 의용경찰, 국군과 합동으로 수 많은 전공을 세웠다.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후에도 공비들의 출몰이 계속되자, 방위군 출신이 공비토벌에 적극 가담하여 500여 명이 산화했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
608 | 52-2-66 | 호국 6·25 참전 전공비 | 국가수호 | 2010-06-09 | 전라북도 남원시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남원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0 | 0 | 2004-02-25 | 수지면 호곡리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수지면 출신의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6·25 참전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남원시주지면 번영회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4년 2월 2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수지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09 | 42-2-49 | 일운면 6·25 참전용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거제시 | 6.25참전유공자회 거제시지회 일운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10-18 | 거제시 지세포리에 6·25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운면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는 이곳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10월 18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일운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10 | 43-2-50 | 고성 호국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08-09-05 | 경상남도 고성군 | 고성군 | 비석 | 기타 | 2005 | 2005-10-31 | 고성군 호국참전유공자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5년 10월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합을 염원하며 6·25 및 베트남전의 참상을 상기하고 고성 출신 호국참전용사들의 애국심을 선양하여 후손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을 정립시키고자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산 273번지 남산공원에 호국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
611 | 51-2-28 | 6·25전쟁 참전 기념비(김제) | 국가수호 | 2008-12-03 | 전라북도 김제시 | 6.25참전유공자회김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12-28 | 6·25참전유공자회 김제시지회는 2006년 12월 김제시 신덕동 200-7에 6·25전쟁 당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참전한 김제시 출신 참전 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상기시키는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12 | 13-1-42 | 수원삼일학교 학생운동지 | 독립운동 | 2015-10-14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삼일중학교 | 장소 | 학생운동 | 1920 | 0 | 19200701 | 관련사건: 1920 구국민단사건/1917 삼일학교 동맹휴학 관련인물: 이득수, 최문순, 이선경, 차인재, 박선태, 임순남 혈복단(血復團)에서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학생 이득수(일명 이종상)은 임순남·최문순·이선경 등과 함께 혈복단을(血復團)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였다. 1920년 7월경부터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독립신문을 비롯해 창가집 등을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입수하여 수차례 민가에 배포하였으며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였다. 한편 수원 삼일학교 5·6학년 학생80여명은 1927년 11월 4일 학교에서 사직시킨 4명의 교사 복직과 교무주임 김용각(金龍珏)의 사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
613 | 43-1-64 | 항일투사 추모탑(하동 옥종) | 독립운동 | 2016-04-27 | 경상남도 하동군 | 항일투사충혼탑보전회 | 탑 | 의병운동 | 1907 | 2015-08-15 | 하동군 옥종면 일대에서 항일투쟁한 유명인사 40명과 무명전사자 117인의 영혼을 위로 및 추모하고 후세에 영원히 기리고자 건립함 | |
614 | 52-2-67 | 월남 참전 기념탑(전라북도) | 국가수호 | 2012-05-16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 (사)전라북도월남참전전우사회복지지원회 | 탑 | 월남참전 | 1970 | 0 | 2007-05-10 | 전주시 덕진동에 2007년 전라북도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통영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전라북도월남참전전우사회복지지원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7년 5월 10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8년간 전라북도 출신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615 | 18-1-17 | 성남 항일의병 기념탑 | 독립운동 | 2015-10-14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남시 | 탑 | 의병운동 | 0 | 2015-04-28 | 취지/유래 : 성남시 항일의병 정신 함양 관련전투/전사 : 동천 남상목의병장 및 윤치장 선생외 부하 의병 7명 항일의병 국가유공자와의 관련성 : 성남시 항일의병장 남상목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성남시 항일 의병들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
616 | 15-2-94 |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 국가수호 | 2012-05-16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0 | 0 | 2009-11-25 | 양평군 창대리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양평군 지역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양평)’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양평군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10월 2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양군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17 | 50-1-50 | 고하 송진우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7-04-19 | 전라남도 담양군 | 송진한 | 기념관 | 한말구국운동 | 2017 | 2012-12-30 |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로 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민주건국의 등불이었던 고하 송진우선생(1890~1945)의 삶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음 | |
618 | 14-2-30 | 백호부대 전적비 | 국가수호 | 2010-02-1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중 | 1961-08-15 | 백호부대전우회는 1961년 8월 15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248-1에 백호부대 전적비를 건립하여 1951년 2월부터 1954년 2월까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장렬히 산화한 백호부대 전우들의 넋을 추모하였다. 백호부대, 곧 동키(DONKEY)부대는 북한 출신 청년으로 구성된 장연군 무장대 26명으로 출발하여 월남한 북한 청년들의 가담으로 2천여 명까지 늘어났다. 동키부대는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83차례의 작전을 벌여 적 사살 2100여 명, 생포 105명, 반공인사 구출 4500여 명이라는 전과를 올렸으며 대원들이 적진에서 얻은 정보는 연합군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수행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동키부대는 휴전협정과 동시에 해산되어 전우의 시체를 북한지역 산골짜기나 해변가 모래밭에 묻어두고 각각 주둔지에서 철수했으며 4년간의 활동기간에 전사 338명, 부상 406명, 행방불명 34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
619 | 20-2-35 | 국군 제9사단 대둔산지구 6.25 전사자 충혼비 | 국가수호 | 2011-06-08 | 충청남도 논산시 | 육탄용사선양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0-11-26 | 충남 논산시 벌곡면에 국군 제9사단과 육탄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제9사단대둔산전우회와 육탄용사선양회에서 2010년 11월 26일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육군 제9사단은 1950년 10월 25일 28연대(대전), 29연대(공주) 및 30연대(청주)를 기간으로 서울특별시 청계 국민학교에서 창설되었다. 창설 직후 28연대와 29연대는 대둔산 지구에 대둔산전투사령부를 설치, 10월부터 12월까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해 사살 2, 000여 명, 포로 250여 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전투경찰에 작전을 인계하고 1951년 북진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예하 30연대(독수리부대)가 6·25 전사상 대표적인 산악전투인 매봉산 전투, 한석산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에 맞서 고지전을 펼친 끝에 승리하였다. 1952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에 걸쳐서는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395고지에서 중공군 3개 사단과 격돌하였는데 적사살 13, 000여명의 전과를 올리며 승리하였는데 전투가 끝난 뒤 포격에 의해 고지의 형태가 말의 형상으로 변한 것을 본 미군들은 그곳 395고지를 White Horse Hill(백마고지)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육군 제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전후 60년이 지난 2010년 11월 26일 육탄용사회에서 육탄5용사를 비롯해 숨져간 7, 641인의 용사들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620 | 42-2-60 | 밀양 6.25및 베트남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비석 | 기타 | 0 | 0 | 2011-07-14 | 밀양시 교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밀양시는 호국용사의 드높은 나라사랑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1년 7월 14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밀양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621 | 26-2-18 | 故최규식경무관동상(경찰학교) | 국가수호 | 2014-12-12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찰대학 | 동상 | 기타 | 1968 | 1983-01-21 | 북한 무장 공비 김신조 등 31명의 청와대 습격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기습공격 저지중 총탄 막고 순직 | |
622 | 26-2-08 | 고 오규봉하사 동상 | 국가수호 | 2013-11-22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 천안시재향군인회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13-06-07 | 천안시 삼룡동에 천안시 출신 오규봉 하사를 추모하기 위해 육군 9사단과 천안시에서 2013년 6월 7일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오규봉 하사는 육탄 3용사 중 한 명이다. 육탄 3용사는 한국전쟁 당시 중부전선의 최대격전지였던 백마고지를 육탄으로 탈환한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를 일컫는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던 곳 중 백마고지는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를 감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이자 최대의 전략요충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이날 아침부터 9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전 지역에 집중적인 사격을 퍼부으며, 북쪽 5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했다. 이로 인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이 범람했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하고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 제9사단은 인력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10월 12일 국군의 역습이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좌절되자 제9사단 제3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와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 등 3용사는 특공대를 자원하여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적진에 돌진하였다. 이들 3용사는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백마고지를 탈환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로써 12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 끝에 백마고지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2013년 9사단은 모금활동을 벌여 추모비 건립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 천안시가 부지를 제공해, 전사 61년만에 오규봉 하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 삼룡동 마틴공원 맞은편에 동상을 세웠다. |
623 | 11-2-08 | 천안함 용사 故장철희 졸업생 추모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서울특별시 노원구 | 대진고등학교 | 조형물 | 기타 | 2010 | 2014-08-14 | 이곳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전사한 46인의 용사 중 막내인 故장철희 일병의 모교이다. 장철희(1991~2010)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나 중평중학교를 거쳐 대진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22회)하고 철도인의 꿈을 안고 2009년 우송대학교 철도전기신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후 2010년 1월 해군에 입대(해군병563기), 3월 11일 천안함 보수병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그 달 26일 북한 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되면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뒤 정부에서는 졸업생의 살신 보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서해수호의 날에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에서 졸업생을 추모하고 있다. | |
624 | 50-1-49 | 모암 장희수 애국지사 항일 기적비 | 독립운동 | 2017-04-19 | 전라남도 화순군 | 장동연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2004 | 0 | 2004-03-01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625 | 55-2-44 | 곡성경찰서 전적기념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경찰서 | 비석 | 기타 | 1950 | 비석 2m | 1993-04-20 | 1950. 8. 6 북한군이 태안사작전 지휘본부를 기습공격해 경찰관 48명이 전사한 태안사 전투와 1951. 9. 29 공비 1,500명이 곡성경찰서를 습격하여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던 전투로 적군 506명을 사살하고 아군 25명이 전사한 9월30일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희생당한 경찰관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위해 비석을 건립하였다 |
626 | 51-2-35 | 호국영웅 차일혁 경무관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북도 정읍시 | 전몰군경유족회 정읍시지회 | 동상 | 6·25전쟁 | 2017-09-29 | 차일혁 경무관(1920.7.7.~1958.8.9.)은 1951년 1월 6.25전쟁중 빨치산 2,000여명이 국내 유일의 정읍 칠보발전소를 포위하자 제18전투경찰대대장으로서 75명의 대원을 이끌고 빨치산을 격퇴하였으며, 1953년 9월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여 빨치산 토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으며, 6.25전쟁 당시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사철의 소각 명령에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 소각함으로써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는 기지를 발휘하여 문화재 보호에도 큰 공을 세웠다. | ||
627 | 33-2-54 | 경주시 625참전 월남전 참전자 명예 선양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경상북도 경주시 | 경주시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2017-09-30 | ㅇ경주시 출신 6.25전쟁, 월남전 참전 8,800여명의 명예 선양 | |
628 | 25-1-10 | 기미 3.1운동 기념비(이원면)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옥천군 | 이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58-08-15 |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23 이원역 광장에 세워진 이 3.1운동 기념비는 1958년 8월 15일에 제 2대 이원면 의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당시 주동자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허상기, 허상구, 허상준, 김용이, 육창주, 공재익, 조이남, 이금봉, 이호녕 등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 장날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형기를 다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애국지사들은 옥고에 시달려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하였다. |
629 | 25-1-12 | 의병장 한공봉수 송공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청주시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0 | 1967-08-15 | 충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한봉수 의병장은 진천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진천·횡성·장호원 등에 출몰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630 | 25-1-03 | 3·1운동 의거 기념비(영동)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매곡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6-03-01 | 안준, 안광덕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매곡면 3·1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6년 3월 1일 매곡면민의 정성을 모아 매곡초등학교 교정에 건립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2006년 3월 1일 학교 앞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안광덕이 서울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하고 나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가하여 같은 마을 안준과 시위계획을 짰다. 이에 신상희 장복철 안병문이 합세하고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이장노, 김용문, 장출봉 등도 합류하여 태극기 2천여 매를 미리 제작하였다. 4월 3일 이들은 면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옥전, 노천리의 3백 여명과 함께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이들은 매곡면사무소에 몰려가 면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군중의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러 황간으로 나아갈 계획이었으나 날이 저물어 중지하였다. 대신에 추풍령 헌병분견대를 습격코자 했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출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거를 주동한 사람 11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631 | 15-2-55 | 뉴질랜드 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88-01-01 | 가평군이 1988년 9월 가평군 북면 목동리 691-1에 6·25전쟁 당시 자유수호를 위해 참전한 뉴질랜드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뉴질랜드전투기념비를 재건립하였다. 원래 1963년 4월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이 자리에 뉴질랜드군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던 것인데, 탑의 노후화로 인해 가평군에서 재건립한 것이다. 뉴질랜드는 6·25전쟁에서 31명이 사망하고 7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1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희생이라고 한다. | |
632 | 25-1-13 |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청주시 문화예술체육회관 | 동상 | 문화운동 | 1880 | 0 | 1996-12-08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청주 예술의 전당 앞에 세워져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동상은 단재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2년 동안 전국에서 9천여 명의 헌금과 충청북도 등에서 지원한 지원금으로 1996년 12월 8일 단재선생 탄신일 116주년을 맞아 건립되었다. |
633 | 16-2-39 | 오우덴중령 현충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6-10-12 |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보훈공원 내에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산화한 오우덴 중령과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1군사령부에서 1966년 10월 12일 이 비를 세웠다. 네덜란드 군은 1951년 2월 21일에서 3월 13일까지 횡성지구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장병들의 희생 또한 컸었다. 오우덴((Marinus Petrus Antonius den Ouden) 중령은 네덜란드의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오우덴 니우 가스텔에서 태어났다.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브레다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1932년에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에 복무하였다. 그는 전란 당시 국제 연합군 소속 네덜란드 대대의 대대장을 역임하였으며, 1951년 2월 12일 횡성 전투에서 중공군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며, 같은해 4월 14일 빌럼 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 |
634 | 40-1-08 | 남강 조정환선생 구국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75 | 0 | 1994-03-13 | 조정환은 녹산 출신으로 파주에 인성학교를 세워 후진을 기르다가 경술 합방 이후에 아세아 시국변론, 일본 대한정책론, 한국 유신론 등의 책을 지어 개혁과 자강을 역설하였다. 3·1운동 후 만주에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군자금 모금 차 입국했다가 다시 만주로 가서, 1923년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하고 다물단을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북경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1927년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우국의 한시 한 수를 보낸 뒤 소식이 두절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635 | 16-2-23 | 643고지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높이2.3 m 기단1.52m | 1957-03-15 | 육군 제2군단은 1957년 3월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 산8에 6·25전쟁사에서 주요 승전의 하나로 꼽히는 643고지전투의 위훈을 전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643고지 전투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643고지는 1951년 6월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7연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에 맞서 치열한 백병전 끝에 최후까지 사수한 격전지다. 이 고지는 화천의 크고 작은 능선에서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는 전략상 요충지여서 국군·미군과 중공군 간에 총력전을 펼쳤다. 국군 제6사단 예하 7연대가 6월 6일 643고지에 깃발을 꽂아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643고지 전투에서 아군은 적군 21, 550명 사살, 2617명 생포, 야포 86문·기관총·소총 2695점 노획 등의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
636 | 40-1-010 | 소해 장건상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동상 | 의열투쟁 | 1882 | 0 | 1991-10-13 | 장건상 선생은 부산 사람으로 중국에서 동제사,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족혁명당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의열단에서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의열단 고문이 되어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하였다. 이를 기리기위해 건립하였다. |
637 | 40-1-20 |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동래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19 | 0 | 1995-11-03 | 동래고 학생들의 주요 항일운동인 노다이 사건(1940.11.23. 부산항일학생의거), 동래고보 학생의거(1919.3.13.), 동래중학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순국당 사건, 1940년 당시 동래중학교 학생들이 독서회를 조직, 항일투쟁 전개) 등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다. |
638 | 40-1-02 | 검정다리 추억비 | 독립운동 | 2002-11-30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광역시 중구청 | 비석 | 기타 | 1996 | 0 | 1996-07-01 |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대신동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면회를 오기도 했다. 이 때 건넜던 검정다리는 다리를 놓은 통나무를 썩지않게 하기 위해 검게 그을린 데서 이름 붙여졌지만, 애국지사들이 검은 수의를 입고 옥살이를 한 데서 왔다고 한다. 1987년 이후 이 다리는 복개공사로 없어졌지만, 부산 중구청은 이 다리에 얽힌 애환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서 1996년 7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639 | 16-2-45 | 매봉 한석산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90-11-09 | 육군 제2307부대 참전동지회는 1990년 11월 강원 인제군 인제읍 고사리(피아시)에 매봉 한석산 전적비를 세워 매봉·한석산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자 하였다. 매봉·한석산 전투는 1951년 5월 1일부터 10일까지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제3대대가 전략적 요충지인 한석산 남쪽에 위치한 매봉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북한군 12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고지를 탈환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북한군 사살 895명, 포로 42명, 각종 화기 347점을 노획함으로써 장교 100여 명 모두 무공훈장을 받았고, 부사관과 사병은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매봉·한석산의 탈환으로 인해 국군과 연합군은 인제·원통에서 현리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확보하여 향후의 전황 전개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
640 | 40-2-09 | 부산광역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동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탑 | 기타 | 1983 | 0 | 1983-09-07 | 부산 영주동에 건국 이후 산화한 이곳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부산광역시는 이 고장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3년 9월 7일 충혼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부산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41 | 41-1-10 | 박상진의사 생가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북구 | 울산광역시북구청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84 |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도장채, 아래재 등 6동 건물 | 2007-08-15 |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1905) 이후에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위가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모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하여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악질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1월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 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 1921년 8월 11일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2007년 8월 15일 생가 복원사업이 완료되었으며, 추가로 전시관이 마련되었다. |
642 | 16-2-52 | 칠성탑(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탑 | 6·25전쟁 | 1950 | 1959-06-25 | 보병 제7사단장 하갑청 장군이 민족의 간성인 충용무쌍한 칠성사단장병과 더불어 조국통일 전선에서 외롭게 순직한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남북통일을 이룩할 결의를 굳게 다짐하는 뜻에서 당시 제3군단장이었던 오덕준 장군이 이 탑을 건립하였다. | |
643 | 16-2-50 | 무명용사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12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9-29 | 인제군 한계리에 6·25전쟁 기간에 인제군 노전평전투에서 산화한 726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무명용사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인제군과 제12보병사단은 이 고장에서 전사한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7년 9월 29일 충혼비를 세웠다 1951년 8월 중순 국군 제8사단이 투입된 노전평 지구에서 적의 주저항선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두고 적의 저항도 격렬하여 수시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를 반복하면서 쌍방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2014년 10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이곳에서 전사한 강영만 하사의 유해를 발굴해 유가족에게 유품을 전달했다. 세월의 흐르면서 충혼비가 크게 퇴락하자, 인제군에서 1999년 9월 정비하였다. 인제군과 군 부대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44 | 16-2-47 | 위령비(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2-05-12 | 6.25전쟁 당시 미 제10군단 지원작전에 있어 생명을 바쳐 참전한 육군 제103부대 및 소속 장병들의 명복을 빌고 공훈을 기리고자 1962년 건립하였다. |
645 | 16-2-44 | 현리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85-06-25 | 하늘도 맺혀 울고 딸고 목메였던 혈육의 비극 6.25, 피어린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1951년 5월 북괴군 제5군단과 중공군 제12군은 우리 육군 제3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대공세를 취하여 후방의 요지인 오미재고개를 차단하였다. 군단은 완강한 방어를 시도하였으나 지형과 기상의 악조건으로 인접부대간의 협조가 단절되어 끝내 크나큰 희생만을 치루고 후퇴함으로써 종심 50km의 돌파구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 쓰라린 전투를 거울삼아 나라지킴을 새롭게 다지고 이 전투에서 이름 없이 몸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삼가 빌면서 이 전적비를 세워 그 높은 뜻을 기린다. 1985년 6월 25일 육군제2307부대 |
646 | 17-2-22 | 강릉지구 포병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사천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7.7m X 7.7m, 높이 10.8m | 1991-12-11 |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에 6·25전쟁 당시 강릉지구에서 치러진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91년 12월 11일 명주군수 등 각계의 후원으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사천초등학교 일대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월 26일 38선 인근에 강릉 8사단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6월 27일에는 현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강릉 8사단 제18대대는 105밀리 포 5문을 사천면 노동하리 지역에 배치하였다. 석교2리 뒷산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당시 장경석 대대장을 중심으로 사력을 다하여 주문진 북방을 향해 지원 사격을 가하였으나 아군은 주문진 이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18대대 장병들은 다시 105밀리 포를 사천초등학교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가래골 뒷산의 관측소와 연곡천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되어 사력을 다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8대대는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덕실리 앞에서 맹렬한 지원 사격을 계속 가하였다. 그러는 동안 북한군은 육지를 포기하고 경포, 강문 쪽으로 돌아 상륙하여 삽시간에 사천 쪽으로 밀어닥쳤다. 국군은 계속 패하는 상황에서 바다 쪽을 헤아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사천면 이남으로 넘어왔으니 18대대 장병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18대대 장병들은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올라가 육박전을 하였으나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전멸되다시피 패배를 당하였으니 여기저기 나뒹굴어 피아간의 시체가 말할 수 없이 많아 동리 주민들은 며칠 동안 시체를 점검하고 팻말을 부착하고 매장하였으나 당시 수백 구의 시체 중에서 몇 구의 시체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18대대에는 월남한 장병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팻말도 없이 무명용사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천의 유지들이 회의를 열고 사천초등학교 뒷동산 임간 교실 위쪽에 이름 모를 국군의 시신 3구가 묻혔던 자리에 '용사의 묘'를 기념하도록 하고 당시 전쟁사에 기록해 줄 것을 전사편찬위원회에 특별히 청하였다. '자라는 어린 새싹들에게 멸공 교육의 귀감(표본)이 되게 하자.'는 의미에서 당시 뜻있는 인사들의 주선으로 무명용사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추모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격전지의 무명용사 묘이다. 때마침 사천초등학교가 전국 새마을 시범학교로 알려져서 전국의 교장시찰단에게 공개되자 무명용사의 묘는 이곳을 찾는 교육 관계자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다. 그 뒤 18대대 전우회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이곳을 찾아서 다시 복원하여 비문을 건립하고 과거를 되살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장렬하게 싸우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무명용사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들이 바로 중사 최서종과 하사 한명화, 일병 심우택이다. 중사 최서종은 지휘통신 선임하사로 적진으로 유선 철수 중 전사하였다. 하사 한명화는 관측하사로 미노리 능선에서 관측 임무 수행 중 전사하였다. 일병 심우택은 운전병으로 백병전 상황에서 포차로 진지 이탈 중 전사하였다. 무명이었던 3용사의 이름이 밝혀지고 '사천삼용사비'로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민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가 새로이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1991년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로 건립되었다.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주민들이 처음 ‘사천삼용사비’(건립일자 미상)이 세워졌다가. 1980년 6월 6일 다시 비석을 세우고, 1981년에는 포병 18대대가 복원하였다. 그후 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가 1990년 설치되고 부지 및 기금을 바탕으로 1991년 12월 11일 준공되었다. |
647 | 17-2-35 | 설악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04-28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비 (기단 0.7m, 둘레 8.9m), 동상(기단 0.75m, 동상 3.25m) | 1978-11-10 |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설악산지구 전적을 기념함과 동시에 그 전투에서 전사한 혼령을 위로하고자 교통부에서 1978년에 이 비를 세웠다. 1976년 대통령의 교통부 연두순시 때 6·25전쟁 전적지 개발 추진지시에 따라 교통부, 국방부, 문공부, 국제관광공사 합동으로 전적지 개발계획을 작성하여 1976년 7월 21일 대통령 재가를 받아 1978년 1월~6월까지 개발대상지를 답사 사업계획을 승인받았다. 그후 교통부차관을 위원장으로 관계부처국장급 및 전문가로 추진위원회를 구성 1978년 7월 8일 설악산지구전적비설계를 완료하고 같은해 11월 10일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설계는 최기원 조작가가 담당하였다. 이 전적비는 11사단과 수도사단이 북한군과 싸운 전투를 기념하고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설악산전투는 중공군 1차 춘계동세시 국군 1군단의 11사단 및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5군단과 치른 공세적인 전투로서 1951년 2월 삼척 부근에서 태백의 준령을 따라 북진한 국군 제11 및 수도사단은 5월 7일 공격을 개시해 6월 9일까지 공격을 계속,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향로봉지역의 북한군 제5군단을 격퇴하고 설악산 일대를 확보하였다가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강릉과 대관령지역으로 철수하여 중공군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
648 | 17-2-34 | 제1군단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91-05-30 |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에 6·25 당시 설악산 전투 등으로 참전했던 제1군단 용사들의 무훈을 기리고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8군단에서 1991년 5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제1군단은 동해안 축선반격작전의 주력부대로서 1951년 5월 7일부터 휴전까지 치열한 작전으로 꼽히는 설악산전투, 351고지전투, 향로봉지구전투에 투입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설악산전투는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시 삼척 부근에서 태백산맥의 준령을 따라 북진한 제1군단 예하 11사단 및 수도사단이 양양과 간성을 통하여 향로봉지역의 북한군 제5군단을 격퇴한 후 설악산 일대를 확보하였다가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로 강릉과 대관령지역으로 철수하여 중공군의 침입을 저지하며 영동지역 사수를 위해 치른 전투다. 351고지 전투는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18일까지 벌어졌던 전투로 제1군단 예하 제5, 제11, 제15수도사단과 적 제6, 제7, 제9사단이 금강산과 고성군 일대의 곡창지대를 통제할 숭 ᅟᅵᆻ는 공격발판을 확보하기 위해 월비산 208고지, 351무명고지 일대에서 공방전을 감행하다가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적 1개 사단을 전멸시킨 격전지로 현재 동해안 일대를 수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전투다. | |
649 | 30-1-15 | 장윤덕의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북구 | 경북대학교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1965-05-01 | 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 1907년 이토히루부미 암살계획에도 참여, 의병을 모아 이강년 의진과 합류한 후 풍기, 봉화 일대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고 일보누 공무소를 습격, 상주에서 교전후 순국하였다. | |
650 | 30-1-20 | 대구학생 운동지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장 | 사적지 | 학생운동 | 1941 | 1923-05-01 | 일제의 전시체제가 한참 강화되어 가던 1941년 2월 15일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이던 김성권(金聖權)·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문홍의(文洪義) 등이 당시 대구부 대봉정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고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사까지 포섭하여 활동하였다. 다혁당 관련자들은 1941년 7월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두안(姜斗安, 1922~1944, 옥사), 고인옥(高麟玉, 1921~), 권쾌복(權快福, 1921~), 김근배(金根培, 1921~미상), 김성식(金聖植, 1922~), 김영복(金榮宓, 1919~), 김효식(金孝植, 1920~), 문덕길(文德吉, 1921~), 문홍의(文洪義, 1921~), 박우전(朴祐雋, 1920~), 박제민(朴濟民, 1919~), 박찬웅(朴贊雄, 1919~1943, 옥사), 박효준(朴孝濬, 1924~), 배학보(裵鶴甫, 1920~), 서진구(徐鎭九, 1921~1944, 옥사), 안진강(安津江, 1922~), 양명복(梁命福, 1921~), 오용수(吳龍洙, 1922~미상), 유흥수(柳興洙, 1922~), 윤덕배(尹德裵, 1921~), 윤영석(尹永碩, 1922~), 이도혁(李道赫, 1922~), 이동우(李東雨, 1922~), 이무영(李茂榮, 1921~), 이원호(李元鎬, 1923~), 이종악(李鍾岳, 1923~), 이주호(李柱鎬, 1921~), 이태길(李泰吉, 1920~ ), 이홍빈(李洪彬, 1923~), 임병찬(林炳讚, 1922~), 장세파(張世播, 1919~1945), 조강제(趙崗濟, 1923~1950), 최낙철(崔洛哲, 1921), 최대석(崔大碩, 1923~), 최영백(崔榮百, 1921~) | |
651 | 30-1-57 |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06-08 | 대구광역시 달서구 | 두류공원관리사무소 | 탑 | 학생운동 | 1941 | 1998-03-01 | 1938년 3월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조선의 민족성이 담겨있는 소설이나 시, 역사서 등을 읽는 것은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에 대구사범학교에서는 문예부를 시작으로 연구회,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문예부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구, 그리고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다. 연구회는 독립 쟁취라는 사명을 위해 자신들의 분야에서 심층적 연구를 통해 지식과 힘을 키웠다. 다혁당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군사 훈련도 실시하였다. 1941년 일제 경찰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한 사실을 알아낸 후 비밀 결사의 회원들, 조선인 교직원, 학부모를 모두 포함하여 총 300여명을 체포하는 ‘대구사범학교 사건’을 일으켰다. 이 중 35명이 구속되었으며, 그 중 5명은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옥에서 순국하였다. 이 탑은 대구사범학교재학생 박효준 등이 항일결사 모임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데 대한 공훈을 기리고 옥중 순국한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화 등 5인에 대한 추모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 |
652 | 30-1-07 |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교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최성구(자녀) | 비석 | 3·1운동 | 1892 | 1966-05-06 | 구미시(전 선산) 해평면 출신 독립운동가 최재화를 추모하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학산되어 가던 중인 1919년 4월 3일, 최재화는 산양리, 송곡리, 금호리 주민 60 ~ 70명을 이끌고 해평면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5월 8일에는 경북도내의 조선인 관리의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애국청년들을 모집하여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경상북도 경찰 제3부에 제령위반 혐의로 송치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1920년 7월에 상해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의열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미시에서는 1966년 5월 6일에 최재화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이 비를 세웠다. | |
653 | 42-2-54 | 밀양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10-06-09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6-01-01 | 밀양시 충혼탑은 원래 1966년 6월 6일 경남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내 밀양 출신 호국영령들을 봉안하기 위하여 밀양군민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건립된 것이다. 충혼탑이 노후화하고 주변 공간도 협소하여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2009년 10월 26일 밀양시 교동 517-1 밀양대공원에 충혼탑을 이전 건립하였고 아울러 밀양 출신 호국영령 2470위를 모신 봉안각과 사무실, 영상실 등을 설치하였다. 특히 봉안각에는 6·25전쟁의 발발단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황을 알 수 있는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어 청소년 및 시민의 산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654 | 31-1-52 | 사부령 순국지사 합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2-09 | 경상북도 영양군 | 정동진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5 | 1991-07-24 |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다음해인 1896년 6월 22일 김도현의진에서 활약하던 정성첨(1853~1896), 김상조는 의병 30명을 이끌고 입암면 연당리 사부령(思夫嶺)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진보 쪽에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하여 사부령 고개로 이동하다 접전하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섬첨이 이끄는 의병은 화기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전하였고, 정성첨을 포함한 의병 11명(김상조, 김상진, 김경재, 안경순, 김계현, 김순흠, 김장흠, 김용흠, 심의영, 박석래, 남조한)이 순국하였다. 건립위원회는 1991년 7월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479-6(임천교앞) 앞에 사부령전투에 참전하여 순국한 애국지사 12분의 넋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합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55 | 42-2-03 | 김해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9-01-01 | 김해시 삼방동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김해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9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김해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김해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56 | 45-2-32 | 해병혼 탑 | 국가수호 | 2003-12-01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사)해병대전우회 제주도연합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60-01-01 | 제주시 동문로타리에 6·25전쟁 등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제주 출신의 해병들을 기리기 위해 ‘해병혼 탑’을 건립하였다. 제주시는 이곳 출신 해병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에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해병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0년 4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제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57 | 33-1-04 | 울진 기미독립만세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군 | 탑 | 3·1운동 | 1919 | 1991-08-15 | 기미년 3.1운동이 확산될 무렵 울진 지역에서는 동년 4월 11일 매화장날 500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13일 북면 부구리 흥부장터에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 |
658 | 50-1-04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29 | 높이 8.73m | 1959-01-01 |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다.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왕재일과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학생인 박인생 등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성진회를 결성했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1차 광주학생운동이 끝난 후 일본경찰은 광주고보생 48명, 광주중학생 8명, 광주농교생 11명, 광주사범생 5명등 총 72명을 검거했다. 그 중 고보생 39명, 농교생 1명을 형무소에 가두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보안법위반 따위의 죄명으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2차 광주학생운동을 전개했으며 광주농교생 또한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를 구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하다가 광주고보 앞에서 강제 해산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하여 구속되고 고문당한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창회에서 성금을 모아 1959년 6월 10일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옛 교정에 세웠는데 1974년 9월 30일 현 교지로 학교가 이전함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건립하였다. |
659 | 50-1-01 |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시립미술관 | 탑 | 3·1운동 | 1919 | 높이 17.5m | 1986-01-01 | 1910년 3월 10일 광주시 일대에서 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기리기 위하여 광주광역시가 건립한 기념탑이다. 당일 오후 2시 양림동 쪽에서 기독교인과 수피아,숭일학교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양동시장을 향하여 내려오고 일반시민들은 서문통을 따라 광주천으로 가서 합세하였다. 또한 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은 북문통을 거쳐 광주시를 누비니 참가 인원이 천여명에 달했다. 이 날 주동자인 김철, 서정희를 비롯하여 100여 명을 검거되었다. 김철, 서정희, 김강 등 주동인물 30여 명이 옥고를 치렀고, 송광춘은 옥고 중 사망하였다. |
660 | 50-1-15 | 고하 송진우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9 | 1991-01-01 | 송진우는 190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16년 귀국하여 중앙학교의 교감이 되어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1917년 단군·세종대왕·이순신을 남산에 모시는 삼성사 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중앙학교 교장이 되어 3.1운동을 준비하는데 참여하였다가 교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0년 석방되어 고향에서 학교설립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1925년 특파원 자격으로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참여하였다. 1926년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송진우는 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석방 후에도 언론활동과 함께 실력양성을 위한 문맹퇴치운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하고, 다시 브나로드 운동을 지원을 지원하는 한편, 백야 김좌진 장군에게 비밀리에 네 차례나 군자금을 제공하여 독립을 준비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이후 창씨개명과 학도병 권유 유세를 거부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파악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은신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송진우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만성리 167번지 관어공원내에 '고하 송진우 추모비'가 세워졌다. | |
661 | 50-1-28 | 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완도군 | 박권부 | 비석 | 학생운동 | 1929 | 1980-03-01 | 정남균은 전남 완도 사람이다.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1926년 1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 소재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왕재일·장재성 등 광주고보와 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 동지포섭으로 조직 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동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동년 3월 졸업 후에도 계속 모교 독서회와 연락하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 후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662 | 42-2-32 |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 국가수호 | 2008-12-03 | 경상남도 거제시 | 거제해양관광개발공사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0 | 1999-10-15 | 경남 거제시 신현읍에 민족사의 비극인 6·25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거제시에서 1999년 10월 15일 이 유적공원을 건립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해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해 거제시 옛 신현읍, 연초면, 남부군 일대에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시작되었다.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후 휴전회담시 포로송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북한, 중공, 유엔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 670명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인해 더 이상의 효용가치가 없어져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
663 | 55-1-19 | 의사 박공문용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 문화관광과 | 비석 | 해외운동 | 1882 | 기단 0.27m, 탑 높이 1.7m | 1996-07-01 | 보성군 출신으로 임정활동(불변단 특파원, 조선독립사령부 총책으로 미의원단 암살기도)에 앞장서며 나라 위해 몸 바친 의사 박문용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위해 건립함. |
664 | 45-2-06 | 충혼탑(성산읍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성산읍 | 탑 | 기타 | 1997 | 1997-01-01 | 성산읍 충혼묘지 내에 1997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성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성산읍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제주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성산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65 | 45-2-15 | 충혼비(온평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온평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3-01-05 | 서귀포 온평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온평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3년 1월 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온평리 주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66 | 45-2-25 | 충혼비(표선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표선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6-06 | 서귀포 성읍리에 1953년 6·25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산화한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표선면에서는 이곳 출신 고태호, 강광희, 현상진, 김상호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7년 6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표선면 출신의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하나 뿐인 생명을 바쳤다. | |
667 | 45-2-04 | 충혼탑(남원읍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남원읍 | 탑 | 6·25전쟁 | 1950 | 1991-02-26 | 제주 남원읍 충혼묘지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남제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제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12월 이 탑을 준공하였으며, 1991년 2월 26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제주 군민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제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68 | 52-1-17 |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 전주시장 | 탑 | 기타 | 0 | 1994-07-21 | 일제에 찬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전북지역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르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4년 7월 21일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234-16(어린이회관동편)에 독립운동추념탑이 건립되었다. 현재 추념탑 부지에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현창비와 탑명비, 헌시비, 건립취지문비, 안중근의사 휘호비, 건립기비 등 부속시설과 함께 추념탑 주변을 공원화하여 청소년들에게는 정신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후손들에게는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역사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669 | 16-1-19 | 한상열의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의병운동 | 1876 | 1993-06-26 |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강제해산으로 국권이 일본에게 침탈되자 그 해 8월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동지 200여 명을 규합한 뒤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홍천·횡성·원주·지평·평창·영월 등지에서 반일투쟁을 전개, 일본군과 무려 500여 차에 걸친 전투를 통해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탄약 등을 노획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타고났다. 1908년 4월 초 횡성 주둔 일본수비대가 한상렬의 처자를 납치한 뒤 협박하며 귀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횡성읍을 습격하여 이들을 대경실색하게 하였다. 일제가 경술국치를 앞두고 의병에 대하여 일대탄압을 가하므로 국내에서의 의병운동 전개가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자,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그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한의용부·대한독립단 등 애국단체의 참모로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의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로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상렬 [韓相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670 | 20-2-05 | 충혼탑(남일면)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일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1-06-01 | 이 탑은 6·25전쟁 이후, 남아있던 북한군 잔당들이 약탈, 후방 교란을 비롯해 주민들의 생활에 위협을 주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위국충절(爲國忠節 :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과 애향애족(愛鄕愛鄕 : 자신의 고향과 나라를 아끼고 사랑함)의 거룩한 마음으로 자진하여 잔당 소탕을 이어나가던 중 적의 총탄에 전사하신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자 1981년 6월에 건립되었습니다. |
671 | 42-2-08 | 의령경찰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경찰추모시설 관리위원회 | 탑 | 기타 | 1953 | 0 | 1956-06-11 | 1953년 11월 23일 지리산 무장공비의 경찰서 기습으로 순직한 고 박영동 경찰서장 등 경찰관 5위를 포함하여, 6.25를 전후하여 전사•순직한 의령경찰서 소속 경찰관 15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이후 순직한 9위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고 있다. |
672 | 17-2-24 | 참전용사 탑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옥계면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99 | 너비 9.3mX9.3m, 높이 10m | 1999-09-20 | 강릉 옥계 출신 625 및 월남전 참전용사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99명의 전몰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함 |
673 | 51-1-14 | 애국지사 정화암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정재택(장조카) | 비석 | 3·1운동 | 1896 | 비문높이 1.9M, 거북대(1.8M X 2.1M , 2.4M X 2.7M) | 1992-09-09 |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674 | 43-2-40 | 6·25 반공 유적비(고성군)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고성군 | 고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61-09-05 | 고성군 남산공원에 6·25전쟁에서 향토를 방위하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고성군 출신 반공청년단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6·25 반공유적비’를 건립하였다. 6·25반공애국부활 고성군 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박남두, 정찬홍, 최상호 등 9명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61년 9월 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성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서 반공청년단을 조직하여 향토방위에 앞장섰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75 | 51-1-01 | 순국열사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북도 익산시 | 바르게살기운동 익산시협의회 직할 인화동위원회(회장 송계주)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3m | 1949-04-29 | 이리 장날이었던 1919년 4월 4일 정오에 문용기 장로를 비롯한 박영문, 장경춘, 서정만, 박도현 등 성도들과 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했으며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합류 대규모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문용기 장로는 1878년 전북 익산시 오산면 관음부락에서 태어났다.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그는 24세 때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한 후 전남 목포와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벌어지자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41세 나이로 순국했다. 순국열사비는 1949년 4월 순국한 문용기 장로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익산시민이 뜻을 모아 건립했으며,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한편 문용기 열사의 출신지인 익산군 오산면 소재지에는 순국열사기념비,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
676 | 51-1-19 | 필양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정읍시 | 김호문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36 | - | 1945-01-01 | 한말 유학자 김영상을 배향하는 사당 필양사(泌陽祠).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조선 양반과 귀족을 회유하기 위해 ‘천황 은사금’을 지급하였는데, 김영상이 은사금을 거절하고 서자(書字)를 찢어버렸다. 이에 일제는 ‘불경죄’로 체포하여 동곡 헌병대에 구속시켰으나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일제는 군산 감옥으로 이송하기 위해 만경강을 건널 때 김영사은 강에 몸을 던졌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군산감옥에 투옥되어 단식투쟁을 하다가 투옥된 지 9일만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45년 1월 1일 정읍의 지방유림들은 김영상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이 사당을 건립하였다. |
677 | 43-2-30 | 통영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시 해병대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념비 | 1980-02-22 | 해병대의 성공적인 상륙작전과 더불어 지역 방위대 경찰이 합세하여 큰 공을 세울수 있었던 그날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0년 2월 원문공원에 건립, 이 지역을 통영지구 전적비로 지정하고 통영 전우회에서는 매년 8월에 전우의 충혼을 기리는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
678 | 53-2-34 | 팔금면 충혼탑 | 국가수호 | 2015-10-14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팔금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가로3.66m, 높이 6.94m | 2014-08-12 | 조국수호를 위해 6.25전쟁 및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신명을 바치신 팔금도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 충혼탑 건립하였다. | |
679 | 45-1-07 | 제주해녀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 탑 | 사회운동 | 1931 | 높이 12m, 면적 700㎡ | 1998-08-15 | ○ 제주해녀의 항일운동은 생존권투쟁을 넘어 일제강점기 연인원 만7천명에 참가한 여성주도의 일제항거라는 점에서 천추만대에 길이 찬양할 만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재조명하고, 항일운동의 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북제주군(현재 제주시)이 1998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 덕판배(전통배) 좌대 높이 12m 탑신(塔身)을 세우고, 삼무정신을 상징하는 3개의 돛을 형상화하였다. |
680 | 52-1-19 | 전주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주 신흥고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0-01-01 | 1919 기미년 당시 전주지역 3·1독립운동을 주도한 기독교 교인 및 학생 일반인들의 공훈을 기리고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2000년 전주 기독교의 요람인 신흥고등학교 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전주 3·1독립운동은 장날인 당시 3월 13일에 기독교와 천도교 교인 및 인근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남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날 정오 부근 남문의 인경 소리를 신호로 평화동 쪽에서 신흥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이 장터로 몰려와 시장 안에 숨어있던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합세, 현재 매곡교 부근 전주천변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 일본 헌병과 경찰의 해산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학생 등 74명이 체포됐다. |
681 | 43-2-22 | 거창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거창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7-03-04 | 거창군재향군인회는 1967년 3월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31에 지리산 공비토벌 및 6·25전쟁에서 전사한 거창군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거창군의 지원을 지원받아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탑이 노후화되자 거창군은 2010년 기존의 충혼탑을 헐고 그 자리에 충혼탑을 재건립했다. 이 일대에 죽전근린공원을 조성, 충혼탑을 중심으로 거창군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참전기념비 등도 나란히 세워 호국공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 |
682 | 42-1-13 | 의사 배치문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비석 | 사회운동 | 1890 | 0 | 2000-08-01 | 김해 출신 배치문 의사의 기적비. 배치문은 1919년 4월 8일에 목포시 창평동에서 3·1독립운동을 주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배의사는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최하는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가 끝나자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4년에 비밀리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체 가입, 활동하다가 1927년 7월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6개월 형을 받고 1929년에 석방되었다. 신간회 목표지회장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언론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1930년대에 호남평론사의 기자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1년 3월에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출판법·보안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00년 8월 1일 고파 배치문의사 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배치문의사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683 | 10-1-18 |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강동구청 문화체육과 | 동상 | 해외운동 | 1894 | 2001-05-03 |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수립 후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함 | |
684 | 42-1-30 | 삼진 독립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진전면 청년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8일 고현시장에서 변상태·권영조·권영대·변상섭·변상헌 등의 사전 준비로 4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이어서 4월 3일 변상태·권태용·권영대의 주도로 진전·진북·진동면의 3개면이 연합하여 5천여명이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고앙주(高昻柱, 미상~1919), 김수동(金守東, 1877~1919), 김영환(金永煥, 미상~1919), 김호현(金浩鉉, 1893~1919), 변갑섭(卞甲燮, 미상~1919), 변상복(卞相福, 미상~1919), 이기봉(李基鳳, 미상~1919), 홍두익(洪斗益, 미상~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구수서(具守書, 1894~1948), 권영대(權寧大, 1885~1946), 권오규(權五奎, 1895~1961), 권태용(權泰容, 1885~1939), 김규현(金奎鉉, 1903~1933), 김영종(金永鍾, 1890~1950), 백승인(白承仁, 1899~1970), 변상섭(卞相攝, 1891~1950), 변상술(卞相述, 1898~1946), 변상태(卞相泰, 1889~1963), 변상헌(卞相憲, 1897~1965), 변우범(卞又範, 1898~1974), 변종열(卞鍾悅, 1896~1974), 서정규(徐正奎, 1889~1949), 이교영(李敎瑛, 1878~1950)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마산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이 비를 세웠다. |
685 | 43-2-13 | 영령탑(금남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금정사 | 탑 | 6·25전쟁 | 1950 | 0 | 2015-02-01 | 금정사 영령탑은 6·25 전쟁 때 산화한 하동군 출신의 육군 및 한국청년기동대원 334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1954년 7월 10일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35 (금정사 내)에 세운 석탑으로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강봉옥)이 건립을 주관하였으며, 2004년 6월 6월 하동군 금정사 현재 부지로 이전하여 2015년 2월에 재복원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매년 음력 사월 초파일에 합동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현충일에 금정사 주지의 주관하에 신도들이 제례를 봉행한다. |
686 | 43-2-12 | 순직 충령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양보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념비 | 1951-05-01 | 양보면 운산마을에 6·25자유수호전쟁 기간에 전사한 지 지역 출신 전몰용사 등 1,227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양보면은 이진기, 김순기, 김재열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1년 5월 1일 충령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하동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동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87 | 18-1-07 | 의병장 오녀 임경재(임옥녀)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동상 | 의병운동 | 1872 | 1993-06-18 |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한데 이어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자, 당시 재직하고 있던 농상공부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1907년 8월 이천에서 의병단을 만들어 일본 기병대를 급습하고 이천읍 우편취급소와 순사분파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광주 실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해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상주 상림과 백암 장터에서 일진회원을 총살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밖에도 용인 굴암산 주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한편 이천, 여주, 안성, 양근(양평)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 |
688 | 43-2-19 | 순직 경찰관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경찰서 | 비석 | 기타 | 1953 | 1959-10-01 | 지리산 공비토벌 소탕작전에서 산화한 강창섭 경감 등 12명의 경찰관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함양읍장이 건립위원회를 구성, 지방유지들의 성금으로 1959년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46-3 (함양경찰서 내)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특히 강창섭 경감은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서 이현상부대와 교전중 공비 3명을 사살하고 계속 교전하다가 1951년 9월 5일 장렬히 전사하였다. | |
689 | 50-2-19 | 칠충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나주시 | 영산포초등학교 | 탑 | 6·25전쟁 | 1951 | 1951-04-01 | 6.25전쟁 당시 나주지역 내 학도병 7명이 비밀리에 북벌단 특공대를 조직하고 북한군 기습을 준비하던 중 탄로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들 7명의 학생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이에 동료학생들은 희생된 7명의 학도병에 대한 애국충정을 기념하기 위해 해당 시설을 건립하였다. | |
690 | 50-2-24 | 위령비(화순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 동면 | 비석 | 기타 | 1949 | 1950-04-01 | 1949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빨치산 잔당들에 의해 전사한 경비군인 2명과 향토수호를 위해 마을 자체 경비 중 학살당한 동면 마산리 주민 4명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현충시설로써 화순군 동면에서 건립하였다. | |
691 | 30-2-16 | 학도의용군 6·25 참전 기념상(비)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남구 | 한국자유총연맹대구시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9-05-30 | 대구 낙동강승전기념관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학도의용군을 기리기 위해 ‘학도의용군 6·25 참전 기념동상(비)’를 건립하였다. 경상북도와 대구시, 경상북도교육위원회는 6·25전쟁에 참전한 이름 없는 학도의용군의 전공을 기념하고 청소년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공동으로 추진하였고, 1979년 5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학도의용군은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구시 남구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92 | 30-2-23 | 6·25 참전용사 기념비(달성군)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달성군 | 달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5-03-30 |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의 교두보였던 대구 팔공산 지역과 낙동강변에서의 격렬했던 전투 속에 산화한 달성군 출신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생존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어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국전쟁참전자회 달성군지회가 1995년 3월 달성군 논공읍 남리 137-16(달성공단 입구)에 참전용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93 | 17-1-02 | 충절사 | 독립운동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문화관광과) | 사당 | 의병운동 | 1864 | 사당 1동 | 2001-05-02 | 김상태는 충북 영춘 남청(永春 南川 혹은 東面) 출신으로 1차·2차 의병전쟁에 모두 참여하였다. 1차 의병전쟁 때, 김상태는 1896년 이강년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그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호좌수(湖左帥)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酒泉)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짐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다.이와 같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그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삼년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여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주장(主將)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1984년에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거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에 이장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694 | 31-1-28 | 의사 청운선생 장공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장석태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66 | 0 | 1971-05-21 |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21년 12월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단(慶尙北道團)의 집사(執事)로 임명되었다. 1922년 10월부터 동지들과 함께 경북 일원과 경남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들에게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명의의 군자금 제공 요청서와 이 요청에 불응할 경우에는 처단하겠다는 예경서(豫警書) 또는 사형선고서를 우송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던 중 동년 11월 하순 일경에 붙잡혀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
695 | 30-2-10 | 충혼탑(칠곡군)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 탑 | 6·25전쟁 | 1950 | 1973-08-01 | 칠곡군 삼청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등 540위의 칠곡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칠곡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 8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칠곡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칠곡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96 | 30-2-26 | 순국경찰관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칠곡군 | 재향경우회칠곡군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1988-08-20 | 재향군인회칠곡군지회가 1946년 10월 1일 벌어진 10.1 대구폭동사건과 6·25전쟁 때 순국한 칠곡경찰서 소속 경찰관 2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 8월 20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4리 산63-4(애국동산 내)에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1946월 10월 대구를 위시하여 좌익 폭도들의 관공서 파괴 및 탈취행위가 도내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을 즈음, 10월 3일 왜관읍에서도 폭도들이 경찰관서를 기습해와 이를 진압하던 중 왜관지역 경찰들이 하였고 6·25 사변 중 조국수호를 위해 싸우다 많은 경찰관들이 희생되었다. 1952년 11월 순직경찰관 영세불망비를 건립하였으나 영령들의 큰 공훈에 비해 비가 너무 초라해 기존 영세불망비를 헐고 그 자리에 순국경찰관위령비를 건립한 것이다. | |
697 | 25-2-69 | 민주지산 위령비(영동군) | 국가수호 | 2015-10-14 | 충청북도 영동군 | 9100부대 | 비석 | 기타 | 1998 | 0 | 1998-06-05 | 1998년 4월 1일 제5공수특전여단(현 국제평화지원단) 23특전대대 내륙전술훈련간 예상치 못한 기상악화로 인하여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전우 고 소령 김광석 등 6위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흑룡부대원으로서의 기상과 뜻을 기리고자 전 장병의 성금을 모아 건립하였다. 매년 4월 1일 이곳에서 특수전사령부 주관하 영동군청, 영동지부 특전동지회, 6·25참전 전우회, 희생자 유가족, 부대장병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698 | 31-2-15 | 지용호총경 순직비(동상)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봉화군 | 봉화경찰서(경우회) | 탑 | 기타 | 1949 | 1994-06-24 | 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에 공비들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총살당한 지용호 총경을 추모하기 위해 봉화경찰서에서 1994년 6월 24일 동상을 건립했다. 1949년 6월 17일 봉화경찰서 재산지서가 공비들에게 습격당하자 지용호 총경은 경찰과 군청공무원, 청년단원 등 50명을 인솔 재산방면으로 출동하다가 봉양리 미륵재에서 적 200명의 기습을 받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관 및 대한청년단 7명이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토벌대 전원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 지용호 서장은 ‘자신의 희생으로 전 대원의 목숨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봉화경찰서장이다”라고 외친 후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희생을 자청하여 부하 대원들의 목숨을 구출하고 적의 포로가 된 후, 그들의 흉탄에 장렬하게 산화했다. | |
699 | 31-2-09 | 호국경찰 유적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예천경찰서(보문치안센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9-09-08 | 6.25전쟁 당시 국군으로 가장한 인민군 50여명이 보문지서를 습격하자 지서를 사수하기 위해 교전하다 전사한 홍종보 지서장 등 전사자 9명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추모 | |
700 | 43-1-42 |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유지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남도 진주시 | 심영무 | 비석 | 3·1운동 | 1891 | 1992-08-15 | 이 비는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심호섭이 다수의 수곡면민을 창촌 무실장터에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8월 15일에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670에 건립되었다. 심호섭 선생(1891∼1935)은 3·1운동 당시 수곡면장을 지내면서 진양군 수곡면 토곡리에 거주 중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1919년 3월 22일 수곡면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이해 5월 20일 보안법 위반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6년경에는 일본의 도쿄·나고야 등지를 무대로 친일한국인 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근로조합을 상대로 투쟁하였다. | |
701 | 52-1-24 | 설산 이광수선생 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수 | 비석 | 3·1운동 | 1863 | 0 | 1988-01-01 | 현재 오수초등학교인 오수공립보통학교에서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교사인 당시 훈도 이광수는 남원군 사매면 출신으로 1919년 상경하여 3·1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33인 지도부를 비밀리 접촉하고 지방으로 보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전 수업 시간에 어린 학생들 앞에서 울분을 토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호소하였다. 그 뒤 학생들을 이끌고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뛰쳐나와 고사리 같은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돌다가 당시 일본인 교사들과 교장이 제지하여 일단락되었다. 이광수는 그 뒤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
702 | 33-2-02 | 5인의 해병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해병제1사단 | 탑 | 기타 | 1962 | 1966-10-15 | 해병 9118부대는 1966년 10월 수색정찰대로서 임무수행 중 순직한 강대헌 대위, 유중광 병장, 오경환 상병, 유문선 상병, 김규산 상병의 임전무퇴 해병정신과 순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해병1사단 영내)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 뒷면에는 “해병 제1상륙사단 제1연대 상륙단의 해룡작전 훈련기간 중이던 1965년 12월 13일 밤 상륙해안 정찰의 중임을 수행하던 수색대원은 격심한 돌풍과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임무를 완수하고 숭고한 해병정신을 발휘하여 이곳에 몸을 바쳤다.”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 |
703 | 24-1-10 | 부자 독립운동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괴산군 | 소수면 | 비석 | 기타 | 1891 | - | 1991-01-01 | 김용응(金鏞應)은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임병찬과 함께 전국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 김태규(金泰珪, 1896~미상)도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충북 괴산군 조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19년 1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노인회 괴산군 지회에서는 1991년 11월 이 부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베를 세웠다. |
704 | 33-2-05 |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덕군 | 탑 | 6·25전쟁 | 1950 | 1991-01-01 |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들의 호국정신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며 작전에 참여하여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참전용사 및 학도병들의 충혼을 기리며 구국충정을 가슴에 새기고 후세에 널리 기려지도록 건립 | |
705 | 43-1-08 | 항일 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하태현 | 비석 | 3·1운동 | 1995 | 0 | 1995-08-15 | 하동군 청암면 일원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함 |
706 | 25-2-26 | 월남 참전 기념비(진천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진천군 | 베트남참전전우회진천군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1996-09-06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참전한 진천군 출신들의 국위선양에 공헌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
707 | 33-2-28 | 전몰군경 충혼비(평해읍)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평해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5-01-01 |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장렬히 산화한 평해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함 | |
708 | 25-2-20 | 충혼비(안남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안남면사무소 | 비석 | 기타 | 1950 | 1955-09-15 | 옥천군 연주리 배바위 윗산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안남면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9월 15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안남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안남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09 | 23-1-03 |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문화관광과)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86-11-14 | ||
710 | 25-2-24 | 해외(월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영동군 | 베트남참전전우회 영동군지부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7-11-03 |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참전한 영동군 출신 참전전우들의 국위선양에 공헌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711 | 23-1-06 | 장곡3·1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장곡 3.1운동유족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94-08-13 | 홍성 장곡면 주민들의 3·1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어가는 가운데 4월 4일 홍성 매봉산에서 횃불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어 장곡면에서는 4월 7일과 8일 사이에 장곡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세차례에 걸쳐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7일에 김동하의 주도 아래 장곡면 주민들은 화계리 주민들과 함께 앞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계속 시위를 전개하였고 밤 8시에는 광성리와 가송리 주민 300여 명이 합세하여 면사무소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8일에도 지역 인사들과 학생 약 60여 명이 밤 11시 도산리에 모여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로 20여명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태형 90도에서 2년 6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10여명이 홍성경찰서로 연행되어 60도에서 90도의 태형을 당하였다. 1994년 8월 13일 장곡3·1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장곡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712 | 50-2-28 | 충혼비(장성읍 수산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장성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9-08-15 | 장성군 수산리 성산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169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장성군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와 주민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9년 8월 15일 총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장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장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13 | 43-1-26 | 신원순의사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신문섭 | 비석 | 3·1운동 | 1890 | 0 | 1991-08-15 | 신원순(申元淳, 1890~1961)은 경남 합천군 묘산면 사람으로 같은 면 윤병석(尹炳奭)·윤병은(尹炳殷) 등 동지들과 함께 1919년 3월 22일 묘산면 면사무소 앞에서 100여명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때 성경술(成敬戌)과 함께 일군경과의 연락을 끊기 위해 연도(沿道)의 전화줄을 절단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원순의사기념사업회는 이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1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714 | 41-1-03 | 외솔 최현배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초등학교 | 동상 | 문화운동 | 1894 | 0 | 1996-08-04 | 최현배 선생은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의 독립과 한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외솔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 병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건립하였다. |
715 | 40-1-22 | 애국지사 강근호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 유족(강귀철) | 비석 | 의열투쟁 | 1888 | 0 | 2000-04-13 | 강근호(姜槿虎, 1888~1960)는 1916년 함흥중학교 2학년 때 학생사건으로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월 13일 용정촌에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만주 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21년에는 자유시 전투에 참전하고,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1943년에는 만주 명월구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활동했다. 육군 제53사단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2000년 4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
716 | 25-2-07 | 충혼비(4종)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읍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1-09-04 | 이 비들은 공비소탕 중 사망한 4분의 숭고한 희생과 위훈을 기리고자 건립되었으며, 본래 영동읍내에 산재되어 있는 것을 모아 1974년 영동읍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충혼비(고 육군 이등상사 김종완, 1952년 전사) 충혼비(고 순경 정동철, 1951년 성주산에서 전사) 충혼비(고 경사 배석종, 천만산에서 전사) 반공투사충혼비(고 김재덕, 1952년 전사) |
717 | 43-1-01 | 3·1운동 기념비(합천군)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쌍백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95-03-01 | 이 기념비는 1919년 3월 합천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 등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업가인 정영섭 씨가 1995년 3월 1일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산 80-1 (쌍백초교 정문 앞)에 건립한 것이다. 3월 8일 삼가장날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등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무력행사로 해산했으나, 3월 23일 쌍백면에서 다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순국 또는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 |
718 | 40-1-18 | 부산광복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서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기념관 | 기타 | 1999 | 0 | 1999-06-19 | 부산광복기념관은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민족정신과 광복활동을 길이 빛내고 이를 전승하며,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위해 시민을 뜻을 모아 건립한 기념관으로 2000년 8월 15일에 개관했다. 지상 2층 전시실에는 부산의 3·1 독립운동, 동래장터 독립만세운동,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부산의 독립운동사 등에 대한 기록물이 테마별로 구성돼 있어,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하는 날 까지 일본의 침략과 그에 항거한 부산 지역의 항일 독립투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위패 봉안실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위패 가 봉안돼 있다. |
719 | 51-1-13 | 이상운학생 순의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이리농림동창회 김제시지부 | 비석 | 의열투쟁 | 1927 | 1984-08-10 | 애국지사 이상운의사의 순의비. 이상운은 이리농업학교 재학중인 1943년에 동교생들과 화랑회(花郞會)를 조직하였다. 화랑회는 총기 및 폭약 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또 만경교를 폭파함으로써 일제의 수탈통로를 차단하려는 것으로 행동방략을 삼았다. 첫 번째 계획 실행으로 폭약 및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에 있는 일본인의 광산을 습격하고, 그의 주도아래 동지 20여명이 광산에 잠입했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이들은 거사를 재차 계획하는 한편 회원간의 체력 및 무술단련에 힘을 쓰면서 무기확보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화랑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1945년 4월에 전회원이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1945년 7월 12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84년 8월 10일 이리농림동창회 김제군지부에서는 이상운의 고향인 김제시 소재 성산공원에 순의비를 건립하였다. | |
720 | 24-2-18 | 김재옥교사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충주시 | 동락초등학교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 | 1990-01-01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동락초등학교 내에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김재옥 교사의 호국충정심을 기리기 위해 충청북도충주교육청에서 1990년 1월 1일 기념관을 세웠다. 1931년 음성에서 태어나 1946년에 상평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린 시절 총명하고 예의가 바르며, 효행심이 지극하여 주위 어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후, 여자도 사회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1949년 음성여자중학교를 졸업, 1950년 5월에는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6월에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5일 만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 7월 7일, 김종수 소령에게 학교에 집결했던 북한군 정보를 상세히 알려 한국 전쟁 사상 최초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민간인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후 병기장교였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 군인가족으로 생활하며 강원도 인제군에 있을 때, 어론초등학교 설립, 군인 교회 등을 건립하여 군인 및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과 정신을 심어주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에 음성 주천초등학교로 전출되었고, 그해 9월에 퇴직하였다. 1963년, 고재봉 사건으로 인해 남편 이득주(당시 계급 중령)는 물론, 자신과 일가족이 참변당하였다. 사후 김재옥 교사의 공이 알려지면서 1990년대에 동락초등학교 내에 김재옥교사기념관을 설립하여 충주지역의 학생들에게 안보를 키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동락초등학교 교정 내에 김재옥 교사의 비석이 세워졌으며, 문락리 산에는 동락리 전투 승전비가 건립되었다. |
721 | 55-2-04 | 충혼탑(곡성군)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곡성군 | 오곡면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1.2m, 탑 높이 1.2m | 1991-09-30 | 오곡면 보건소 앞에 1953년 6·25전쟁 기간에 전몰한 한국청년단원 109위의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오곡면은 이들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3년 4월 2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1951년 9월 29일 오곡면민과 한국청년단원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이현상 부대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북한군과 지방좌익들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오곡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탑은 곡성군과 당시 한국청년단장 안학선, 그리고 면민들의 뜻을 모아 40년만인 1991년 9월 30일 재건립되었다. |
722 | 55-2-13 | 현충탑(대서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대서면 | 탑 | 6·25전쟁 | 1950 | 2001-05-30 | 대서면 금마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대서면 출신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대서면)’을 건립하였다. 대서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5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서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23 | 24-2-31 | 6·25 참전 기념비(동량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동량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4-06-25 | 동량면 6·25참전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1994년 6월 25일에 조국의 자유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보국의 초석으로 살신성인한 62명의 전사자의 충혼을 위령하고 119명의 6·25 참전용사의 용감무쌍한 충렬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306-1(조동근린공원 내)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에는 동량면 출신 6·25전쟁 전사자 62위 및 참전유공자 119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다. |
724 | 24-2-09 | 충혼탑(제천)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제천시 | 제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8-01-01 | 제천시 솔밭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김종훈 대령 외 1, 547위의 제천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제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8년 10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나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25 | 53-2-14 | 충혼탑(도초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도초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1.2x1.2x6.25m | 1994-01-01 | 신안 수항리에 1994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도초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도초면 노인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4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도촌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도촌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26 | 24-2-04 | 향토방위 전몰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괴산군 | 청천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2-01-01 | 괴산 선평리에 향토방위 작전에서 산화한 32위의 전몰용사 등 402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향토방위 전몰용사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괴산군은 이곳 출신 향토방위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2년 1월 준공하였다. 향토방위작전 중 괴산 향토방위군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과정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괴산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27 | 23-1-16 | 청대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순흥안씨 문중(대표 안선영) | 사당 | 의병운동 | 1994 | 1994-09-01 | 청대사는 순흥 안씨 문중 출신 네 분 애국지사(건국훈장 애족장 안창식, 애국장 안항식, 애국장 안병찬, 애족장 안병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4년 충청남도의 지원을 받아 순흥 안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음. 청양출신 안창식의 아들인 안병찬은 두 아들 병찬, 병림과 함께 1895년 을미의병에 투신했다. 선생은 1895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거의 할 뜻을 두고서 광호 등지로 가서 저자 사람을 앞세워 먼저 일어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 이봉학, 이세영 등과 긴밀히 연락을 취했습니다. 아들 병찬이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에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오자 채광묵과 함께 모집해 놓은 민병 180명을 내놓아 홍주의병을 거의 하도록 도와 의진이 패하자 피체되었습니다. 안병찬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하여 3년형을 선고받고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으며, 1906년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의 참모로 활약하여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파리만국강화회의에 장서 서명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안병림 선생은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 및 돌격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안항식 선생은 1906년 4월 25일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로 활약하여 일제에 체포 후 대마도로 호송 감금되었다가 4년만에 귀국했습니다. | |
728 | 23-1-26 | 대의사(인한수의사현충비) | 독립운동 | 2010-06-09 | 충청남도 예산군 | 한내장4.3만세운동기념사업회 | 사당 | 애국계몽운동 | 1881 | 1976-04-02 | 대성사는 인한수와 장문환의 영정이 있는 사당으로 2009년에 준공되었다. 인한수는 1881년 고덕면 상궁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 장날에 대천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을 이끌고 대천교 옆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 때 일본헌병과 일경들이 휘두른 창검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말을 타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장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내려 내동댕이치자 말에서 떨어진 수비대장이 군도로 목을 찔러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문환은 충남 예산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 장날에 대천장터에 모인 1, 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시위자 7명이 일경에게 검거되자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에서 시위를 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어 일본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자 한명이 순국하자 격분한 나머지 시위군중 15명과 함께 시체를 헌병주재소로 찾아가 항의하고 주재소장을 구타하다가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729 | 20-1-13 |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 독립운동 | 2002-11-25 | 대전광역시 중구 | 대전 중구청 문화담당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80 | 0 | 1992-01-01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신채호선생 생가지는 신채호가 태어나 8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1992년 선생이 태어나신 이곳의 효율적 보존을 위하여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생가를 복원하였다. |
730 | 52-2-28 | 호국 영렬탑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시장 | 탑 | 기타 | 1950 | 0 | 1957-10-01 | 전주 다가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영렬탑’을 건립하였다. 전라북도 호국영렬탑 건립위원회는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57년 10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전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31 | 52-2-29 | 호국지사 충령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시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1-09-01 | 6.25전쟁 당시 전사한 호남지역 호국충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1년 9월 건립함 |
732 | 52-2-033 | 6·25 한국전 참전 및 국군 제3연대 창설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김한준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8-10-22 | 창군 초창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창군의 웅지를 품은 애국청년들이 자원입대하여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제3연대(보병제3연대)가 전북지역에 창설(1946. 2. 26.)되고 1948년 정부수립 후 국군 제3연대로 개편되어 국군의 초석을 이루게 한 창군용사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며, 6.25전쟁 발발 후 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각 전선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733 | 52-2-34 | 충혼불멸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시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4-05-10 | 지리산은 산이 높고 계곡이 많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비들이 은거하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합동작전을 했다가 공비로부터 희생된 민간인과 청년단원 286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
734 | 52-2-11 | 충혼 불멸탑(진안군)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진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5-01-01 | 진안군 군상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진안읍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2005년 1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진안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진안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35 | 26-1-16 | 임대수의병장 공적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세종특별자치시 | 세종특별자치시 | 비석 | 의병운동 | 1882 | 0 | 1999-08-15 | 임대수 의병장은 1882년 충남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항거를 결의하였고,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고 전의 소정역을 습격하는 등 충남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리다 1911년 6월 16일 공주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대수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해 1999년 8월 1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
736 | 52-2-49 | 충혼비(설천면)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무주군 | 설천면장 | 비석 | 기타 | 1950 | 0 | 1963-09-01 | 무주 소천리에 1963년 6·25전쟁 시기 좌익 빨치산과 대적하다 산화한 이 고장 출신 31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향토전우회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3년 9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무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737 | 51-2-11 | 충혼탑(여산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탑 | 기타 | 1950 | 8M X 4M | 1993-10-05 | 익산 두여리에 199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689위의 익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익산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3년 10월 5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익산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익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38 | 26-1-08 |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시설관리공단 | 비석 | 의열투쟁 | 1917 | 0 | 1969-10-01 | 이 기념비는 대한광복회의 회원으로 천안 출신인 장두환(1963, 독립장), 유창순(1963 독립장), 성달영(1990, 애족장), 유중협(1990, 애족장), 강석주(1990, 애족장), 조종철(1991, 애족장), 김정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9년 10월에 천안시 삼용동 295 천안삼거리 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이 조직한 광복단과 대구에서 박상진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7월 조직했고 박상진이 총사령을 맡았다. 1916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경북·충남·황해·전남 일대와 만주에 기지를 두기도 했다.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는 100개소의 요지에 혁명기지로서 잡화상을 설치하여 무기를 비축하며 조직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행동강령 아래 군자금 모금을 위해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거나 친일 관리·지주를 처단하기도 했다. 1918년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면서 대한광복회의 전모가 일경에게 포착되어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대한광복회 간부와 회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
739 | 51-2-06 | 육탄 3용사 고 안영권하사 전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01 | 전라북도 김제시 | 안덕겸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1.2M | 1984-11-12 | 1952년 10월 12일 오전 8시 탈환 명령을 받은 국군이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고, 살아도 이 고지에서 살자 하는 비장한 각오로 진경을 개시한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며 서로 고지를 차지하기를 2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 국군과 중공군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으며 국군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육군 3용사의 한 사람인 고 안영권 하사는 우리고장 김제시 금산면 용화리 출신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입대 제9사단 30연대 1대대 3소대원이었다. 우리나라 육군전사가 증언하듯이 피맺힌 동족상잔의 전란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중부전선의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 1952년 10월 12일 그 고지의 최후의 탈환작전에서 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와 함께 결사대에 자원, TNT 수류탄 박격포탄을 몸에 묶고 적의 토치카에 뛰어들어 장렬히 자폭함으로써 막혔던 아군의 작전 혈로를 뚫어 위기일발의 백척간두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한 주인공이다 |
740 | 51-2-16 | 호국영렬탑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부안군 | 부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3m, 탑높이 4.3m | 1969-01-01 | 부안군 서림공원 정상에 6·25전쟁 시 부안군에서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영령탑’을 건립하였다. 부안군은 부안군을 수호하다가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호국영렬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69년 1월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광명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41 | 41-1-14 | 삼일독립운동 유공 기념비 | 독립운동 | 2009-05-25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주청년회의소 | 비석 | 3·1운동 | 1919 | 2001-12-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2일 언양 장날 이무종·강경찬(姜康贊)·이규인(李圭寅)·이성영·최해선·이규장·이규천·최해규(崔海圭)·황선훈 등의 사전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본군 수비병이 발포하여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길천, 손입분, 김종환, 정달조 등이 부상을 입었다. 이 시위에서 강문필(姜文必, 1872~1953), 김경수(金卿洙, 1892~1968), 김운봉(金雲峰, 1893~1950), 김정훈, 김종백, 서석용, 손수복(孫秀福, 1877~1961), 윤봉수(尹鳳水, 1889~1971), 정대원, 정용덕 등이 피체되어 90도의 태형을 받고, 강기형(姜祺馨, 1876~1940), 강재주, 김락수(金洛綬, 1880~1919), 김원용, 김정원(金正元, 1880~1961), 김한준(金漢俊, 1884~1956), 박채우, 서태식(徐泰植, 1889~1973), 신동목(辛東睦), 이규경(李圭庚), 이규인(李圭寅, 1890~1927), 이무종(李武鐘, 1893~1956), 이민영, 이성영(李成榮, 1879~1940), 최윤봉(崔允奉, 1898~1934), 최한홍(崔翰鴻, 1898~1949), 최해선(崔海璇), 허황(許황, 1874~미상)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가운데 김락수는 옥중 순국하였다. 3·1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742 | 31-1-50 | 소류정 및 심성지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청송군 | 심남규(문중관리자) | 비석 | 의병운동 | 1831 | 1896-01-01 | 소류정은 1885년에 건립된 정자로, 청송지역 의병활동의 상징적 인물인 심성지(沈誠之)의 주 은거지였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툇마루와 사분합문을 설치하는 등 청송지방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붕괴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심성지는 역학변화 지리와 성학심성지설을 연구하여 유학을 통달한 선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1888년에 의금부도사와 1894년에 돈영부 도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고 이후 1896년에는 향천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덕 감은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하고 말았다. 심성지 서거 100주년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 소류정에 사적비를 세웠다. | |
743 | 31-1-49 | 3선생 공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예천군 | 조필권 | 비석 | 기타 | 1907 | 2002-10-26 | 2002년 10월 26일 예천지역 출신인 조윤제 문학박사와 독립운동가 조용구, 조용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윤제(1904~1976)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대에 한국 고전 문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다. 특히 『한국 문학사』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저술로 평가되며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조용구(1861~1925)는 1907년 이강년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좌종사부 의관에 임명되어 1908년 6월까지 종군하고 이후 군자금 모집활동에 힘써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조용필(1867~1946)은 1915년 조직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군자금 조달, 일제 관리와 친일부호 처단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러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 |
744 | 20-2-26 | 우리고장 국가유공자 기념비(남일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일면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7-04 | 남일면 출신으로 애국지사,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 무공수훈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2년 7월 4일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308-2(남일면사무소 내)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745 | 45-1-09 | 조설대 | 독립운동 | 2010-02-12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조설대보존회 | 조형물 | 한말구국운동 | 1910 | 1905 | 제주 애국지사 12인의 구국을 맹약한 장소 조설대. 조설대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젊은 유림 12인이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한 곳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 |
746 | 25-2-27 | 무공수훈자 공적비(청주시)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무공수훈자 청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8-02 | 청주시 무공수훈자회는 2000년 8월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1459(발산공원 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공적비를 건립하였고 무공수훈자 509명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이후 474명의 무공수훈자회 회원 누락자 및 추가자 발생으로 인해 2010년 4월 474명의 명각비를 추가로 건립하였다. |
747 | 15-2-106 | (연천군)베트남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연천군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연천군지회 | 탑 | 월남전쟁 | 2006-10-17 |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자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써 1965년부터 베트남에 참전했다. 이들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은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경험과 미군의 지원으로 국방력을 제고할 수 있었으며, 공산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는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 | ||
748 | 52-2-22 | 충혼탑(복흥면)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순창군 | 복흥면 수복동지회 윤용호 | 탑 | 기타 | 1950 | 0 | 1988-06-01 | 복흥면 정산리에 1988년 6·25전쟁 기간 공비토벌작전에 전사한 의용경찰, 방위군, 청년단원 등 복흥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복흥면과 수복동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8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복흥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 공비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복흥중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49 | 30-2-56 | 경산시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19-12-12 | 경상북도 경산시 | 경상북도 경산시 | 공원 | 기타 | 2019-6-6 | 경산시 참전유공자, 무공수훈자를 기리고 각 국가유공자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음 | ||
750 | 50-2-51 | 해남군 6·25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전라남도 해남군 | 6·25참전유공자회 해남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3m x 3m, 높이 5m | 2011-12-7 | 6.25전쟁 휴전 후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넋을 위로하고, 참전유공자의 호국정신을 널리 계승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음 |
751 | 16-1-43 | 충의성지발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강원도 춘천시 | 충의성지발원비건립위원회 | 비석 | 기타 | 높이3.6 m 가로2.3m 세로3.6m | 2011-10-27 | 국가와 민족이 위난에 처하였을때 국권회복과 민족의 생존권을 되찾기위해 일제에 맞서 소중한 목슴을 초개같이 여기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수십여 명의 의병장과 700여명의 의병을 양성하여 훈련시켰던 국내유일의 성지로 의병정신의 발원지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동시에 자라나는 청소년과 국민에게 민족정신 교육의 장으로 승화 시키고자 건립하였다. | |
752 | 15-1-37 | 순국선열 노은 김규식 선생 생가 터 | 독립운동 | 2019-12-12 | 경기도 구리시 | 경기도 구리시 | 장소 | 해외운동 | 0 | 1882-01-01 | 1920년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 무쟁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독립운동가 노은 김규식이 태어난 곳이다. | |
753 | 14-2-45 | 귀성충혼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인천광역시 남동구 | 제7851부대 | 탑 | 기타 | 소 | 2019-1-1 | 국가를 위해 순직한 귀성부대 전우 36인의 공적과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제7851부대에서 2019년 6월 6일 부대 내에 탑을 건립하였다. 1974년 10월 1일, 부대창설 이래 숭고한 조국 수호의 절대 임무를 위해, 드높은 하늘에서 낙하산에 자신을 맡기고 뛰어내리고, 칠흑 같은 어두운 바다에서 두려움과 거친 파도를 극복하는 등의 특수훈련에 전념하다 작전 중 순직한 36인의 전우들의 혼과 넋을 기리기 위해 부대 전 후배 장병들이 뜻과 기금을 모으고 예비역과 민간단체로부터 추가로 도움을 받아 충혼탑 건립을 계획하였으며, 후배 장병들이 충혼탑 건립 후 부대 주요행사(국기게양식, 부대창설일, 현충일 등), 부대생활 및 출·퇴근 시 순직한 전우들의 거룩한 뜻을 생각하고 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부대에서 가장 따뜻한 곳에 건립하게 되었다. | |
754 | 17-2-67 | 속초시 6·25 및 월남전 참전기녑탑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속초시 | 월남전참전유공자회 속초시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탑 4.4mX 0.52mX7.6m / 명각비 7mX 2.6mX0.4m 2동 | 2019-5-14 | 6.25전쟁과 월남참전의 역사적 의의와 참뜻을 널리 알려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속초시 출신 참전용사들의 투혼과 희생, 상흔의 족적이 각인된 애국애족 정신과 장렬히 산화한 용사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755 | 10-2-27 | 한영중·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9-12-1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한영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 | 2019-9-27 | 우리의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때, 위국충절과 애국단심의 영혼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시어, 소중한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시고 선진 강국 대한민국 건설의 초석을 이루게 하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한영의 가족들은 영원히 기억하고자 이 명비를 세웁니다. |
756 | 40-2-31 | 철마 순직 경찰·의용경찰 추모비 | 국가수호 | 2019-12-12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 비석 | 기타 | 1952 | 0 | 2018-12-21 | 1952년 9월 2일 철마면 나암동 전투(무장공비와 교전)에서 조국과 내 고장을 지켜내고 순직한 경찰 1명과 의용경찰 6명의 숭고한 희생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기 위함 |
757 | 40-2-30 | 기장군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9-12-12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12-17 | 기장군 지역 출신 6.25참전유공자 1,263명의 이름을 명각한 비로 기장군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지역 주민의 호구의식 함양을 위해 건립 |
758 | 15-2-118 | 6.25반공산악대원 전적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경기도 가평군 | 경기도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9-4-27 | 6.25전쟁 당시 가평지역에서 80여명의 청년들이 군번없이 반공투쟁산악공작대를 조직, 북한군을 상대로 싸운 전적과 자유수호정신을 후손에 전하고자 함 |
759 | 16-2-109 | 해병대가리산전투전적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홍천군 | 강원도 홍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5-7-1 | 6.25전쟁 당시 가리산 전투에 참여하여 주요 고지인 가리산을 확보하는데 기여한 해병대와 해병대 소속 참전 군인들의 공훈을 추모함 | |
760 | 16-2-108 | 부채뜰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홍천군 | 강원도 홍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1.5 m 폭 1m | 2008-12-10 | 6.25전쟁 당시 미2사단 23연대 소속으로 가리산 부채뜰 전투에 참전한 유엔군 프랑스대대 공병 소대 및 소속 참전 군인들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761 | 15-2-117 | 반공희생자 위령탑 | 국가수호 | 2019-12-12 | 경기도 동두천시 | 경기도 동두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4-6-20 | 공산군에 맞서 싸운 이름도 군번도 없는 반공투사들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충정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
762 | 52-2-72 | 6·25참전유공자기념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전라북도 순창군 | 전라북도 순창군 | 탑 | 6·25전쟁 | 1950 | 2012-11-30 | 6·25전쟁으로 인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6·25전쟁사를 재조명하여 군민에게 국가관, 민족관, 애국심을 고취하기 이하여 건립 | |
763 | 41-1-19 | 독립유공자 이재락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19-12-12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생가 | 3·1운동 | 1919 | 277.16 | 2019-12-12 |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 1월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764 | 26-2-20 | 월남참전유공비 | 국가수호 | 2019-12-12 | 세종특별자치시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세종특별자치시지부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2003-12-21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한 부용면 회원들을 추모하고 그들을 영원히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765 | 43-2-61 | 6·25, 베트남(월남)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경상남도 거창군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거창군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2006-10-12 | 6.25참전 750명, 월남전참전 146명, 국가유공(상이, 전사)자 193명, 참전경찰유공자 78명 등 총 1,167명의 6.25 및 월남전참전용사들의 불굴의 충성심을 받들고, 후손에게 국가관과 민족관을 정립시키고자 건립하여 기념하고자 함 | |
766 | 16-2-107 | 6·25전쟁 철의삼각지대전투 전몰장병추모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철원군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강원도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2-10-15 | 6.25한국전쟁 당시 조국수호와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한 대한민국의 참전용사와 유엔군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유훈을 되새겨 후세에 영원토록 기리고자 함. | |
767 | 51-1-62 | 가람문학관 | 독립운동 | 2019-4-26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1892~1968 | 영상실, 가람실, 상설전시실, 세미나실, 휴게실 등 | 2017-10-14 |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1927년 2월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신명균(申明均) 등과 같이 "한글사(社)"를 조직하고 월간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발기인이 되어 사전편찬의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국민)문학의 부흥을 주장하고, 고유한 민족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확대 개편)의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하여 1천 6백명의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 강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민족문화와 국사·국어국문 등 국학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익산시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문학관을 설립하였다. |
768 | 55-1-55 | 독립지사 진주정공 기적비 | 독립운동 | 2019-4-26 | 전라남도 광양시 | 정찬기 | 비석 | 3·1운동 | 0 | 2011-9-25 | 1919년 4월 1일 광양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군중 1,00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던 정귀인 선생을 기리는 시설이다. | |
769 | 50-1-52 | 안중근 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19-4-26 | 광주광역시 서구 | 광주광역시 서구 | 동상 | 의열투쟁 | 2016-08-00 | 광주광역시 서구의 상무시민공원 내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동상은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가 우리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와 한복을 입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
770 | 33-2-55 |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북도 울릉군 |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 | 기념관 | 기타 | 0 | 2017-10-27 | 대한민국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 용감히 싸우다 부상을 입고 명예제대하여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이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독도의용수비대원이 되어 울릉군민들의 생활터전인 우리땅 “독도”를 일본의 불법 침입으로부터 지켜내었다. | |
771 | 15-1-34 | 고양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8-12-4 | 경기도 고양시 | 경기도 고양시 복지정책과 | 탑 | 3·1운동 | 1919 | 31m | 2018-7-31 | 고양출신의 74인의 독립운동가와 아직 조명 받지 못한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함 |
772 | 23-1-52 |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8-12-4 | 충청남도 서천군 | 고석주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 동상 | 3·1운동 | 1919 | 0 | 2018-7-19 |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은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17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773 | 43-2-60 |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남도 통영시 | 경상남도 통영시 주민생활복지과 | 장소 | 6·25전쟁 | 1950 | 표지석, 안내판 | 2000-8-16 | 1950년 8월 17일 7척의 해군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시작한 곳으로 해병대 최초 상륙작전인 통영 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 세우고 18년에 이전하여 재건립하였음 |
774 | 40-1-34 | 좌천시장 3.1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8-12-4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장안읍주민자치위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7-4-9 | 1919.4.9. 좌천 장날을 기해 3.1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고자 좌천시장 자리에 건립 |
775 | 40-2-29 | 동래고등학교 6.25 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12-4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동래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7-10-30 | 동래고등학교 출신으로 6.25전쟁에 군인, 학도병으로 참전해 국가수호를 위해 헌신한 289명의 이름을 각인하여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776 | 40-2-28 | 용마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12-4 | 부산광역시 서구 | 경남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6-9-27 | 6.25전쟁에 참전한 경남중, 고교 출신 424명의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777 | 20-2-47 |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 | 국가수호 | 2018-12-12 | 대전광역시 서구 | 한국자유총연맹 대전광역시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6-7-15 | 대전지구전투는 1950년 7월 16일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미 제24사단 [사단장 소장 딘 (William F. Dean)]이 17일에 대전으로 물러나 방어진을 치고 수행한 전투이다. 이 전선에서 다시 한 번 북한군을 막아보려다가 적의 포위망 속에 빠지게 되는 고전 끝에 20일에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7월 20일까지 지연임무를 수행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에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호국영웅비는 1950. 7. 17. ~7. 20. 기간 중 대전지구전투에 참전하여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미군 참전용사(미 제24사단 등)의 넋을 기리고 그희생정신과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778 | 43-2-59 | 충혼탑(산청경찰서)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남도 산청군 | 산청경찰서 | 탑 | 기타 | 1950 | 1983-6-25 | 6.25전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및 6.25에 참전하였다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장렬하게 순국하신 산청경찰서 소속 호국영령의 넋을 달래고 그 공훈을 빛내기 위하여 당시 산청경찰서에 같이 근무하였던 경우들의 모임이 청맥회에서 건립하고 매년 2회(1월 2일, 6월 6일) 추모행사를 개최한다. | |
779 | 40-2-27 | 6.25 참전 호국영웅 기념비 | 국가수호 | 2018-12-4 | 부산광역시 수영구 | 부산광역시 수영구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7-25 |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조국을 위한 희생을 기리고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건립되었음. |
780 | 10-1-14 | 유관순열사 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3·1운동 | 1902 | - | 1973-10-20 | 대표적인 독립지사인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함 |
781 | 10-2-10 | 이원등상사 상 | 국가수호 | 2003-09-15 | 서울특별시 용산구 | 특전사령부 | 동상 | 기타 | 1966 | 1966-06-09 |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한강대교에 낙하훈련중 동료를 구하고 숨진 이원등 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이원등상사상기념사업회에서 1966년 6월 9일 이 동상을 세웠다. 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제1공수특전여단 고공침투훈련 강하조장으로 훈련도중 동료의 낙하산이 기능 고장을 일으키자 동료의 낙하산을 개방시켜주고 자신은 한강에 추락 순직하였다. 주낙하산과 예비낙하산을 착용하고 이원등 중사의 안전점검을 받았다. 4, 500피트의 고도를 잡고 한강 모래사장을 항하여 날았다. 강하조장인 이원등 중사는 비행기 좌측문에 앉아서 정확한 낙하지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강하명령을 내렸다. 모두 다 비행에서 이탈했다. 비행기 우측문 3번째에서 뛰어내린 한 전우의 자세가 균형을 잃고 회전했다. 그는 전우를 구출코자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뛰어 내렸다. 전우의 낙하산을 펴서 위기를 모면해주고 이탈하려는 순간 자기 자신은 강렬하게 전개되는 전우의 주낙하산 줄에 걸려 오른팔이 부려졌다. 그후 그는 한강에 떨어져 순직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취옥보다도 더 푸른, 아름다운 조국의 하늘. 이 하늘을 지키는 젊은 용사 이원등. 바람찬 창공을 끊어 죽음의 부하를 구하다. 오오. 대한민국의 군인, 이원등의 정신이여! 높은 의지여! 당신의 갸륵한 군인정신을 우리 모두 씩씩하게 받들어 이곳에 찬란한 구리상을 세운다. | |
782 | 10-1-02 | 안중근의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11-06-08 | 서울특별시 중구 | (사)안중근의사숭모회 | 기념관 | 의열투쟁 | 1879 | 1970-10-26 | 안중근은 개항 이후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참담하게 국권을 피탈당하고 있을 때 불타는 애국심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의 영웅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이었던 남산 조선신궁 터에 1970년 개관한 이래 2010년 새로이 건립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단지 동맹을 상징하는 12개의 유리 기둥을 묶은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전시실에는 그의 출생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안중근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평화사상을 널리 선양하여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고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데 그 소임이 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생중에 남긴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전체가 보물 569호로 지정된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은 그의 우국충절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그밖에 안중근 의사 초상화와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 휘호 등도 전시되었다. | |
783 | 10-1-01 | 백범 김구 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용산구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1876 | 1,743 | 2002-10-22 |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개명하여 창수(昌洙),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으로 아버지 순영(淳永),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광무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엡윗청년회(Epworth 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이동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시행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京橋莊:지금의 강북삼성병원)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임정로 26)에 건립된 박물관이다. 1996년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기념관 건립을 제안하였고, 1998년에 (사)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발족하여서, 1999년부터 백범기념관 건립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2000년 6월 26일에 기공식을 가졌고,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하였다. 2008년 12월에 백범기념관에서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 김구의 어린 시절부터 서거까지의 행적을 따라 관련 유물을 배치하였다. 전시관 1층의 중앙홀에는 김구의 좌상이 놓여있다. |
784 | 10-1-11 | 백범 김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해외운동 | 1876 | 1969-09-23 |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출신으로 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왕후 민씨를 참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하였으마,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동상은 1969년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 그의 의로움을 본받으려는 뜻에서 세웠다. | |
785 | 10-1-07 | 일성 이준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문화운동 | 1859 | 동상높이 3m, 좌대높이 4.8m | 1964-07-14 |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 중 순국한 이준 열사의 뜻을 전승하기 위하여 해당 동상을 건립하였다. |
786 | 10-2-04 | 백마고지 3용사의 상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6·25전쟁 | 1952 | - | 1973-10-01 |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의 진지를 공격해 승리로 이끌었던 강승우 소위 및 오규봉 일병, 안영권 일병을 추모하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1973년 10월 어린이대공원 내(동문 인근 위치)에 ‘백마고지 3용사의 상’을 건립하였다. 이들 3용사는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예하 제1중대 제1소대 소속으로 1952년 10월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고지에서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 등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돌진하여 적의 기관총 특화점을 격파한 후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고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
787 | 10-1-06 |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탑 | 3·1운동 | 1919 | 0 | 1999-03-01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광복회의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788 | 10-1-09 | 유관순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3·1운동 | 1902 | - | 1970-10-12 |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로 진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각 마을과 문중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공주 영명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을 만났다. 1심 공주재판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언에서 3년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 중 여러 차례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 등으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동상은 원래 1970년 남대문 앞 녹지대에 건립됐다. 하지만 지하철 공사 때문에 건립 1년 만인 1971년 이곳으로 이전됐다. |
789 | 10-1-08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9 | 높이 4.5m | 1973-10-03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글인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펼친 유림의 파리장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
790 | 10-2-03 | 반공순국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영등포구재향군인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78-06-25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좌우익 충돌에 의한 혈전과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영등포구 관내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반공연맹, 민보단 서북청년회 등 애국우익 단체 동지들과 경찰관, 소방관, 학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동지들이 반공전선에서 싸우다가 순국 산화하였다. 위령탑 건립위원회는 1978년 6월 2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1동 20-4에 이재호 등 134명의 반공순국용사들의 무훈을 앙양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후세에까지 길이 추모하고자 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6월 순국용사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791 | 12-2-05 |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01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유격백마부대기념사업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2-07-15 |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북 정주에서 조직된 '유격백마부대'는 군번,계급도 없이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 과정에서 전사자 552위를 추모하는 충혼탑을 건립 |
792 | 12-1-01 |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08-05-09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사)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 기념관 | 의열투쟁 | 1908 | 0 | 1988-12-01 |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한 뒤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 때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에는 월진회와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 민족운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 하였다. 그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인 1930년 3월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 29일 천장절 겸 상해 점령 전승경축 기념식을 홍구 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점령 일본군 수뇌들이 여기에 모이게 되자, 김구가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에 특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윤봉길은 단신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등 군·정 수뇌들 7명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데 성공하였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25일 현지의 군법재판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해 12월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업적과 살신성인 정신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키며, 선양하기 위하여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국민들의 성금으로 서울 양재 시민의숲 안에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1988년 12월 1일에 준공된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은 대지 1,996평에 건평 743평,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서 윤의사의 유품과 생애사진, 훈장 그리고 항일독립운동 관련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 |
793 | 10-2-05 |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해병대사령부 군사연구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2-09-28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서울 서쪽 관문인 104고지 탈환 작전 중 전사한 해병대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82년 9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해병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계속 진격하던 중 1950년 9월 21일 서울의 서쪽 관문인 104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4고지 점령은 서울시민 구출의 선도를 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해병은 결사적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3주간의 끝없는 혈전으로 1개 중대 중 26명만 생존하는 처절한 혈전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 적은 104고지 일대를 요새화하여 난공불락을 호언하며 서울 사수의 최후방어선으로 확보중에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한미해병대는 공격을 계속했다. 해병 제1대대가 104고지를 조기에 탈취 역사적인 수도탈환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상승해병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다. 서울 서측방을 점령 방어하던 적은 북한군 제25여단 및 독립 제7연대 소속 약 4, 000명 규모였으며 장교 및 준사관은 대부분 중공군에서 복무했던 정예화된 전투 경험자들이었다. 1950년 9월 21일 해병 제1대대를 중앙에, 미 해병 제5연대 제1대대를 좌측에, 미 제3대대를 우측으로 하여 서울 서측방을 병진공격했다.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제3중대를 주공으로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18:30분에 104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9월 22일 새벽 약 600명 규모의 적은 120밀리 박격포와 각종 공용화기의 지원하에 3시간 동안 2차에 걸쳐 단말마적인 역습을 감행해왔으나 우리 해병대는 필사적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 |
794 | 13-1-16 | 원심창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평택시 | 성동초등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1906 | 0 | 1991-12-20 | 원심창 의사는 1906년 평택군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 1918년 평택보통학교(평택성동국민학교 전신) 4년제를 졸업했다. 1923년부터 1932년까지 중국 상해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1933년에는 육삼정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6년부터 1971년까지 재일거류민단을 결성, 단장을 역임하며 교포사회의 단결과 평화적인 남북통일 성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통일의 일념으로 활약하다 1971년 7월 4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며 그 유해는 1976년 10월 2일 철원군 망향의 동산에 모셔졌다. |
795 | 13-2-09 | 현충탑(평택시 서정동)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평택시 | 송탄출장소 | 탑 | 기타 | 1950 | 0 | 1982-06-06 | 평택시 서정동에 국가를 위해 산화한 방기원 대위 등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평택시 서정동)’을 건립하였다. 송탄문화원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2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다. 국가위기 시 평택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796 | 18-1-06 | 기미독립선언 신둔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이천시 | 신둔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4-02 | 이천군 신둔면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수광리에 위치한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났다. 서기창·이상혁은 3월 31일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모임을 갖고, 김영익이 거사의 취지와 장소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집집마다 이를 회람시켰다. 4월 1일 신둔면사무소 앞에 5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자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은 이천읍내로 향하였는데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천 주둔병이 총칼로 강력히 제지하여 모두 해산되었으나 그날 밤 신둔면·모가면·백사면·대월면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서기창 이상혁 김영익 등 7명의 지사들이 체포되어 고문과 옥고로 순국하였다. 한천회는 이천 신둔면 지역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한 7명의 애국지사들의 공적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4월 2일 이천시 신둔면 경충대로 3150번길 82-3(신둔초교 내)에 신둔면의거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신둔면 경충대로 3234번길 37(신둔체육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
797 | 18-1-04 | 이수흥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동상 | 의열투쟁 | 1905 | 0 | 1985-02-27 |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주 대한통의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육군 주만참의부에 가담,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했다. 6·10만세사건 당시 동소문파출소, 이천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
798 | 13-2-01 | 현충탑(의왕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의왕시 | 의왕시 | 탑 | 기타 | 1993 | 1993-05-21 | 의왕 왕곡동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의왕시)’을 건립하였다. 의왕시는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3년 5월 21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위기 시에 의왕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왕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99 | 13-1-07 | 3·1독립운동 기념비(장안)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장안면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4-03-01 |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마을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 삼일절 때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 차희식(1968, 독립장) 등 수촌리 지사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경찰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불을 질러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왜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쳤다. 이 소식을 듣고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가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문하고 치료해주었다. |
800 | 13-2-16 | 현충탑(시흥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시흥시 | 시흥시 | 탑 | 기타 | 1987 | 1987-05-30 | 시흥군 현충탑은 1971년 10월 15일 안양읍 안양리 산 101번지에 건립하였으나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안양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1986년까지 안양시와 공동으로 영령을 봉안 하여오다 1987년 6월 6일 현충탑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탑은 내탑과 외탑으로 구분하였고 내탑의 조석 5각 충혼비는 5개 읍면 20만 군민이 호국영령을 기리는 염원이며 외탑은 비를 감싸는 두손의 형태이고 백색은 우리 백의민족을 뜻하며 천정에서 쏟아지는 다섯줄기의 빛은 우주근원인 음양오행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상징하였다. | |
801 | 13-1-12 | 탄운 이정근 창의탑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화성시 | 이호헌(이정근의 증손자) | 탑 | 3·1운동 | 1856 | 0 | 1970-04-05 | 경기도 화성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한 이정근(1856~1919)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하생들과 국내의 저명인사 36명이 1970년에 건립한 비이다. |
802 | 18-2-11 | 터어키군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 용인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 | 1974-09-06 | 유엔군의 기치를 들고 터어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사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 |
803 | 13-1-17 | 제암리 3 1운동 순국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시설관리공단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1-01-01 | 제암·고주리 사건은 일제가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에 대한 전복과 3·1운동 확산을 저지하고자 자행한 참극이며 보복사건이다. 이에 제암리 순국기념관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발생한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으로 돌아가신 29선열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고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1년에 개관하였다. |
804 | 14-1-09 | 월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기도 김포시 | 월곶3.1정신선양회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84-12-29 |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월곶면에서는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郡下里) 장날을 이용하여 이병린(李炳麟), 성태영(成泰永), 박용희(朴容羲), 이병철(李丙喆), 백일환(白日煥) 등이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동년 3월 29일 임용우(林容雨), 최복석(崔福錫), 윤영규(尹寧圭)등이 주동이 되어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805 | 18-2-04 | 현충탑(안성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안성시 | 안성시 | 탑 | 기타 | 1965 | 1965-12-08 |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 안성시청 뒤편에 안성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안성군에서 1965년 12월 8일 이 탑을 세웠다. 순국충렬 봉안회 안성군 지부장 김태영씨가 현충탑 건립기금을 마련해 냄으로써 안성군에서는 1965년 12월 8일 안성공원에 최초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그후 안성출신 전몰 육·해·공군 장병 및 경찰관과 민간인 열사의 충혼 1, 263위의 현충록을 봉안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명복을 축원하기 위해 1975년 10월 2일 현충탑을 재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님의 높으신 얼은 이 겨레 이끄시고 님의 거룩한 넋은 이 강토 지키시네 드넓은 안성벌 우뚝 솟은 이 언덕에 힘 모아 바칩니다. 님들의 안식처 더욱더 빛내리라. 님들의 높으신 뜻. | |
806 | 14-1-07 | 연기우의병장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인천광역시 강화군 | 곡산연씨대동종친회 | 비석 | 의병운동 | 1914 | 소 | 1988-11-18 | 연기우(미상∼1914)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성장하였다. 강화 진위대 부교로서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지홍윤, 유명규, 이동휘, 김동수 등과 함께 전등사에 모여 의병모집을 밀의하고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창의대장 이인영의 휘하에 합류하여 대대장으로 서울 진격을 감행했으나, 양주에서 패한 후 창의 한북대장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연천·이천·안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1월 21일에 강기동 의진과 합작으로 포천군 송우 등지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여 2명을 사살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철원군 동면에서 일본 헌병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이진용·강기동 의진과 연합작전을 벌이면서 활동했다. 1909년 8월 이후에는 철원·연천 등지에서 20~40명의 소수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감행하며 활약했다. 1910년에는 구월산, 지리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14년 마침내 일제에 체포되어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807 | 18-2-02 | 현충탑(이천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탑 | 기타 | 1958 | 1958-03-03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에 이천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천시에서 1958년 3월 3일 이 탑을 세웠다. 이천군에서는 1958년 3월 3일 이천군 이천읍 안흥리에 6·25전쟁 당시 이천군 출신 전몰군경 및 군속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세에 빛나는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도시계획지구로 인가에 접근하여 조경 및 관리상 문제점이 많아 1977년 6월 6일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건립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조국을 위해 몸바치신 이천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이천의 현충탑은 원래 안흥동 방죽 한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후 1978년도 설봉호수 입구로 이전하였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규모가 발전하는 이천시의 위상에 걸맞지 않아 새로운 현충탑 건립이 필요하던 차에 설봉공원 주변이 세계도자기 EXPO 주행사장으로 결정되면서 진입도로 확장과 아울러 현충탑도 그 규모를 크게 하고 좀더 아늑한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선현들의 넋을 새롭게 기리게 되었습니다. 호국이 영령들은 문화도시로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는 이천시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미소지으실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이섭대천(利涉大川)의 큰 뜻을 새기어 천하를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과 상생의 정신, 개척의 정신을 갖고 더욱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20만 이천 시민들은 호국영령들이 베푸신 살신성인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우리 고장의 유산으로 영원히 물려주기 위해 이곳을 '충효동산'으로 이름짓고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성스런 장소가 시민들의 화합의 장소가 되고, 충효의 교육장이 될 것으로 믿으며 여기에 이 현충탑을 세웁니다. | |
808 | 18-2-06 | 현충탑(경기 광주)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광주시 | 광주시 | 탑 | 기타 | 1950 | 가로 12m, 높이 21m | 1959-11-30 |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에 광주시 출신으로 호국영령이 되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주시에서 1959년 11월 30일 이 탑을 세웠다. 현충탑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된 지 6년이 지난 1959년도에 16개면 출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대에 선양하기 위해 경안리에 건립되었다. 기존시설은 50년 전 시설로 규모가 작고, 훼손부분이 많을 뿐더러 보훈시설로서 상징성이 부족함에 따라 재건립이 요구되어, 살기 좋으며 날로 발전하는 인구 24만의 광주시 위상에 걸맞고 국가를 위해 희생, 공헌한 분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 국가의 소중함과 감사를 느낄수 있고, 경건 엄숙한 곳이면서 후세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시설로 확장 조성하기 위해 기존 시설 철거와 주변부지 3배 확장 등 시민들의 휴식 및 여가공간인 경안근린공원과 연계하여 작품성을 갖추어 새로이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끓는 청춘을 겨레위해 바치리라. 목숨걸고 지켜온 아-소중한 조국산하 불굴의 큰 뜻 받들어 청사에 꽃 피우고 불멸의 혼불로 스러져간 영령앞에 추모의 정 깊고깊어 머리숙인 광주시민 호국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기립니다. |
809 | 18-2-09 | 무어장군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여주시 | 여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1-10-01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단현리에 전쟁 영웅이었던 미 육군 제9사단장 브라이언트 무어(Bryant E. Moore)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51년 10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1894년 6월 6일 미국 메인 주에서 태어난 무어 장군은 8군사령관 리지웨이와 미국 육사 동기였다. 리지웨이가 8군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추천한 네 명의 군단장 후보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에서 연대장, 사단장을 지냈고, 전후엔 미국 국방부 공보처장, 육사교장을 거쳤다. 6·25 전쟁 당시 1951년 1월 31일 부임하여 3주만인 1951년 2월 24일 남한강 도하작전을 지휘하다 고압 전기선에 헬리콥터가 충돌하여 강바닥에 추락 전사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 |
810 | 14-1-06 | 기미 3.1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소규모 | 1979-04-09 | 1919년 전국으로 퍼진 3.1독립만세운동은 옹진군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옹진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을 전개한 곳은 덕적도였다. 당시 김포군 덕적도에서 사립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林容雨)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月串)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수배되어 덕적도로 들어와 있었다. 임용우 선생은 명덕학교 제자인 한․일학교 선생 이재관(李載寬), 차경창(車敬昌)등과 함께 덕적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섬이라는 특성상 김포처럼 군중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장날’같은 계기가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임용우가 제시한 방법은 ‘학교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임용우선생과 이재관과 차경창은 덕적도 각 지역을 돌며 4월 9일 ‘운동회’ 개최를 알렸다. 운동회 장소는 진1리 해변 운동장이었으며, 당일 섬 유지들과 많은 학생 및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오전 중에 운동회와 관련된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이 진행되었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운동회는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임용우의 독립 연설과 이재관의 격문 낭독 그리고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참가자 수는 명덕학교, 합일학교의 재학생과 교사, 덕적도 주민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 및 주민들은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진리에서는 뒷산에서 봉화를 피우며 만세를 불렀고 서포리는 국사봉에서, 북리는 주요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진행된 덕적도의 독립만세운동은 밤 9시 이후에야 각 마을에서 끝났다. 임용우 선생은 이 날 3.1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임용우의 정확한 체포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덕적도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4월 9일에서 4~5일 지난 다음으로 보인다.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이미 임용우 선생은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철사줄에 묶여 있는 등 잔혹하게 보복을 당했다. 이어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더욱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임용우 선생이 체포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임용우 선생과 함께 덕적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수업 중에,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동응과 장기선, 남준기 등이 체포되어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각각 8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렇지만 임용우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5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덕적면민들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1979년 4월 9일, 3 ·1 독립만세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덕적면민 일동이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136번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덕적도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임용우와 이재관, 차경창 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
811 | 16-1-02 | 춘천농고 항일학생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19 | 1995-08-25 | 춘천농공고등학교는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식민지 교육을 받는 가운데서도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터지자 전교생이 만세 시위에 동참한 강원도 최초의 유일한 학교로, 이를 효시로 일본 교사 배척, 식민지 교육 반대, 광주학생사건연대투쟁,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 독서회 사건, 일본 천황과 총독에게 보낸 통치반대 청원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련의 항일운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른 많은 본교 애국학생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총동창회 동문들의 뜻을 모아 1995년 8월 25일 개교 85주년 및 광복 50년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기단 1.5m, 탑신 5.4m로 매년 3월1일 동문회 주관으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 |
812 | 16-1-21 | 애국선열 추모비(철원)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 철원군 | 비석 | 기타 | 1919 | 0 | 1967-03-01 | 철원군민들이 철원군에서 3·1운동 직후 결성된 철원애국단 단원들의 구국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3월 1일 철원군 철원읍 화지8리 54(철원고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대한독립애국단이 조직되었다. 1919년 철원 출신 김상덕은 애국단에 가입하고 강원도 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8월 11일 강대려·김완호·이용우·이봉하·박건병·오세덕 등은 도피안사에 모여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철원애국단)을 결성하였다. 철원애국단의 활동이 도내 각지로 확대되어 나갔으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철원의 부호가 이를 경찰에 밀고하여 1920년 초 관계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 애국선열추모비가 위치한 철원역사문화공원의 철원읍 사요리 일대는 강원도에서 3·1운동이 먼저 일어난 장소로 철원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2023.12.7. 철원중·고등학교에서 이전되었다. |
813 | 14-2-14 | 김포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13-05-30 | 경기도 김포시 | 경기도 김포시 | 탑 | 기타 | 1962 | 0 | 2012-04-17 | 김포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현충탑(김포시 북변동 소재)이 시민들이 접근하기 불편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해소하기 위해 김포한강신도시 내에 김포시에서 2012년 4월 17일 탑을 새로 세웠다. 김포시 현충탑은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국화인 무궁화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하였으며, 태극이 서로 휘감는 모습을 상징화하였다. 특히, 하늘, 땅, 물, 불을 상징하는 건,곤,감,리 4괘를 부조벽과 광장 포장 패턴에 도입하였으며, 헌화대는 태극문양을 활용하여 설치하였다. 현충탑 안 쪽에는 김포시 순국선열의 영현을 각인해 놓아 후세들이 순국선열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게 하였으며 2020년 6월 독립운동 만세 장면, 6·25전투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 설치 및 위패를 각인하였다. |
814 | 16-1-23 | 한용운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백담사 | 기념관 | 한말구국운동 | 1879 | 1층 | 1998-10-10 |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용운 [韓龍雲] (두산백과) |
815 | 16-1-27 | 의암류인석기념관 | 독립운동 | 2012-05-16 | 강원도 춘천시 | 춘천문화원 | 기념관 | 의병운동 | 1842 | 0 | 2004-06-01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연해주에서 병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인석 [柳麟錫] (두산백과) |
816 | 14-2-24 | 해병대 김포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기도 김포시 | 해병대 제2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1 | 대 | 1989-11-01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에 김포지구 전적 기념 및 해병대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89년 11월 1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김포지구 전투에서 수도 서울을 수호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독립 5대대 장병의 빛나는 무훈과 조국수호의 영령으로 산화한 해병용사들의 숭고한 넋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그날의 전승터가 보이는 곳에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예로부터 한강 하구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이자, 대몽고 항쟁, 신미, 병인양요 등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 한 땅이다. 한국동란중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만회한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탈환작전의 선봉군인 해병 제1연대는 그 예하 제3대대를 이곳에 배치하여 서울로의 반격을 시도하려던 잔적을 과감히 소탕하였고, 1·4후퇴의 와중인 1951년 3월부터 휴전시까지는 해병 독립 제5대대가 이곳에 배치되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면서 한강 넘어 개풍군 및 개성 등으로 침투, 월암리전투를 비롯한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사수하고 이 땅을 지켰다. 특히 이 지역은 휴전 이후 해병 제1임시여단, 제5여단, 제2여단, 제2사단으로 오늘에 이르며, 피와 땀과 혼이 깃든 분단조국의 최전방을 40년 이상 지켜 온 우리 해병들은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지킬 것이다. 여기 이 전투에서 목숨 바쳐 나라와 겨레를 지킨 님들의 고귀한 충정과 용감무쌍한 정신은 자손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
817 | 16-1-13 | 진병산 전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비석 | 의병운동 | 1895 | 1979-12-28 | 1895년의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시해와 단발령의 강제로 배일감정이 폭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0일(음력 을미년 12월 16일)에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의 지방유생과 1,000여 명의 농민들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소응은 척사위정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규정하고, 엄한 군율 밑에서 부대를 통솔하였다. 먼저 정부에서 개화관료인 조인승(曺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임명하자 단발하고 부임한 조인승를 참형에 처하여 그 기세를 올렸다. 2월 8일에는 이겸제(李謙濟)가 인솔한 친위대 3개 중대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고 흩어졌으나 다시 모여 부대가 정비되었다. 그 뒤 포천·영평·양광 등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또 일부 병력은 그 뒤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강릉에 이르렀고 경기도 여주·이천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신우균(申羽均)·김구현(金龜鉉)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전략 전술 및 무기의 열세로 점차 전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문제도 곤란해져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와 협상하였으나 실패하자 2월 17일 부득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부대로 이적하였고 부대는 종형 이진응(李晉應)이 지휘하였다. 이진응 다음에는 이진응의 아우 이경응(李景應)이 대장에 추대되어 지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소응 [李昭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818 | 15-2-68 | 버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한국자유총연맹 파주시지회 | 탑 | 기타 | 1983 | 0 | 1984-01-01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희생된 외교사절 및 공식 수행원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반공연맹에서 1984년 1월 1일 탑을 세웠다. 1983년 10월 8일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22명, 비공식 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의 공식 순방길을 출발했다. 미얀마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길의 첫 방문지였으며, 이 날은 미얀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10월 9일,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들은 행사 준비 및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인 오전 10시, 전두환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한다. 예행연습을 끝내고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한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오전 10시 26분에, 전두환 측근으로부터 무전 연락을 받아 "차량 정체로 인해 전두환 대통령이 약 30여 분뒤에 지연도착"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한번 더 애국가의 예행 연습을 한다. 그런데 미리 대기해 있던 폭탄테러 용의자중 1명인 신기철은 전두환 대통령이 오전 10시30분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첩보를 통해 파악한 상태였고 예행연습중에 나온 음악을 듣고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하여 오전 10시 28분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을 터트린다. 이 폭발로 예행 연습중이던 경제부총리 서석준과 수행공무원 기자를 포함하여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한다. 전두환은 차량정체로 인해 애당초 도착예정인 10시 30분에서 30분뒤인 11시에 도착했다. 따라서 30분에 정상적으로 도착을 했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이후 전두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한다. 버마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희생된 순국외교사절 및 공식 수행원 17위의 영령을 추모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위령탑을 건립했다. |
819 | 16-1-18 | 기미만세공원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장소 | 3·1운동 | 1919 | 1991-08-26 | 물걸(동창)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장두 김덕원과 부장두 전성열의 지휘로 거사 일정 및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많은 군중이 모이도록 사발통문식으로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3일 동창장터에서 5개 면민(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3천여 군중이 운집하여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도준이 징을 치면서 내촌면 주재소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현장에서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이여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등 8명이 순국했고 함춘선, 승만수 등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63년 동창 3·1독립운동 때 순국한 8열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관민이 합동하여 팔렬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팔렬각이 노후화되자 1990년 2월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91년 8월 기미만세공원이 준공되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기미만세공원은 군민의 성금과 군비를 투자하여 약 5, 700㎡의 부지에 기미만세상을 세우고 부대시설을 하는 등 독립운동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 |
820 | 15-2-58 | 미국군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5-10-03 | 국방부는 1975년 10월 3일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490-1 (임진각 내)에 6·25전쟁 기간(1950~1953) 참전한 미국 군인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이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미국은 6·25 전쟁을 맞아 유엔 참전국 중 가장 먼저 참전했으며 가장 큰 규모의 지상군, 해군, 공군을 파병했다. 유엔군 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을 임명함으로써 6·25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다.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최초로 북한군과 교전을 시작한 것을 비롯,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작전, 북진, 1·4 후퇴, 휴전 등 6·25 전쟁 전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전쟁 기간 참전 연인원 57만 2000명, 사상자 14만 2091(사망 3만3629명, 부상10만9284명, 실종 5178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
821 | 15-2-26 | 임진강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9-01-01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임진강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79년 12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임진강지구 전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청단, 연백, 개성, 고량포, 적성 일대에서 3·8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국군 제1사단이 개전 이후 배속된 국군 2개 연대와 더불어 개성-문선-파평산-봉일천 일대에서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4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다.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과 공릉천의 천연장애물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6월 28일 서울이 실함됨으로써 퇴로가 차단되어 부득이 행주-이산포 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사단은 철수 시기를 놓친 데다가 도하장비의 부족으로 인하여 벽력이 과도히 분산되고 모든 공용화기와 장비를 유기한채 철수를 단행해야 하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다. 더구나 임진교 폭파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천 장애물을 활용하지도 못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부의 요충지 임진강은 남북을 잇는 관문이요, 혈맥이다. 여기에 공산군의 화살을 꽂아 4년.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및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몸을 던져 사선을 지켰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은 영원히 혈맹의 교훈을 받은채 통일의 그날을 지켜볼 것이다. |
822 | 31-1-63 | 백하구려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안동시 | 김시중 | 생가 | 문화운동 | 1909 | 0 | 1885-04-19 | 백하구려는 1907년 안동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된 백하 김대락의 생가 사랑채이다.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김대락은 신교육을 수용하면서 백하구려를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12월경 김대락은 마을과 인근의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삼원포 이도구에 정착였다. 1911년 6월 경학사와 1913년 공리회 결성에 참여하여 「공리회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김대락은 망명 후 줄곧 이주 한인들을 지도하고,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심혈을 기울이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김대락의 뜻은 여동생인 김락, 집안 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 종손자 김성로의 항일투쟁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
823 | 16-1-01 |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광복회강원도지부 | 탑 | 기타 | 1995 | 0 | 1995-08-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강원도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824 | 15-2-45 | 이유중대령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기타 | 1980 | 1981-01-01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이유중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81년 12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1980년 겨울 전방경계 작전수행 중 중상을 입고 간경화증까지 악화되어 임무수행은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웠으나 조금의 내색도 없이 의연하게 마지막 순간까지 부대를 지휘하다가 보병 제1사단 12연대 3대대장 이유중 대령은 순직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호국의 선봉으로 젊음을 다 바친 이유중 대령의 전진혼을 기린다. | |
825 | 15-2-17 | 소위 김만술 상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상이군경회파주시지회 | 동상 | 6·25전쟁 | 1953 | 1996-12-04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베티고지 전투에서 맹활약한 김만술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96년 12월 4일 이 동상을 세웠다. 베티고지의 영웅인 김만술 소위는 192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6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제5연대에 배속되었다. 입대 후 그는 여순 10·19사건의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평양 탈환 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김만술 소위는 7월 15일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티고지 사수임무를 부여받았다. 7월 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부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그동안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대대에서는 사흘 동안 3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중공군의 공격에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이 새기도 전에 새로운 1개 소대를 다시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김만술 소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 제2소대가 4번째로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가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베티고지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봉과 동봉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앙봉에서 직선거리로 10m도 안되는 서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15일 오후 2시 김만술 소위는 아직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34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중앙봉과 동봉(東峯)을 점령했다. 김만술 소위는 ‘목의 가시’와도 같은 서봉(西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지금까지 국군이 당하고만 있던 수동적인 자세를 뒤집어 국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한편, 중공군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중대장에게 서봉에 대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 당시 베티고지에서는 많은 사상자로 인해 병사들은 고지에 오를 때 "오늘은 몇 명이 전사할 것인가"를 걱정하게 되었고, 상급부대도 다음에는 “어느 소대를 투입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사상자가 많아 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특무상사로서 실전 경험이 많았던 김만술 소위는 병사들에게 먼저 “아무리 치열한 포탄 속에서도 침착하고 민첩하게만 행동하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김만술 소위는 서봉을 기습 공격하여 적병 5명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공격하여 소대원들의 사기를 올린 다음 야간에 적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의 모래를 파내고, 무선과 유선을 세밀히 점검하고, 시계를 일일이 확인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중공군의 야간공격을 받았다. 김만술 소위는 중공군 1개 대대 규모의 공격에 맞서 수류탄과 소총, 백병전 그리고 4차례의 포병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사선에서의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13시간이나 진행된 격전 속에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치룬 결과 제2소대의 생존자는 소대장을 포함 단 12명뿐이었다. 이때 확인된 중공군의 시체만도 350여구에 달했고, 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김만술 소위와 제2소대원은 치열한 혈투속에서 왕성한 책임감과 감투정신으로 베티고지를 몸으로 지켜냈다. | |
826 | 16-1-09 | 횡성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2-08-15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
827 | 15-2-18 |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7-01-01 | 한국동란중 자유세계 곳곳에서 달려온 "부의전사"라 불리우는 많은 종군기자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쳐가며 정의의 평화 그리고 종군 기자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쳐가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민과 유엔군의 투쟁을 생생히 기록하려 전 세계에 알린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18명의 희생과 공훈을 길이 추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828 | 15-2-40 | 임광빈중령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보병제1사단 | 비석 | 기타 | 1989 | 1990-01-01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을지훈련 중 순직한 임광빈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90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임광빈 중령은 1957년 10월 7일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의정부공고를 졸업하고 3군사관학교 15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32사단 98연대 소대장과 62사단 108연대 작전장교, 39사단 117연대 중대장, 306보충대 군구과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후 1989년 4월 24일 보병 제11연대 1대대 작전장교로 보직되어 우수하게 근무하던 중 동년 8월 22일 89을지훈련기간 적 주력 섬멸 전투훈련중 임진강에서 부대원들을 안전하게 도하시킨 후 자신을 급류에 의해 순직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死必忠誠으로 꽃피운 軍人精神을 높이 기리고자 이 碑를 건립한다 천하제일 제1사단 장병일동 | |
829 | 15-2-21 | 해병대 수도방위기공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해병대사령부 | 비석 | 6·25전쟁 | 1952 | 1959-03-05 | 1951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요청으로 유엔군사령관 벤 플리트 장군은 1952년 3월 12일 한미해병대로 하여금 장단·사천강 지구를 방어하게 하여, 정전협정시까지 중공군 2개 사단의 네 차례 대공세를 저지함은 물론 정전협정 후에도 1959년까지 본 전선을 굳게 수호하여 수도권 방어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 |
830 | 15-2-41 | 파주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8-01-01 |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남한 땅이 한 때 붉은 무리들의 손에 들어 갔으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젊은 청년들은 고귀한 피를 흘려 싸웠다. 당시 감악산에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현역 잔류병과 파주군 연천군 양주군 장단군 등지에서 모여든 반공 청년들이 대한의열단 감악산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후방교란과 유격적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결사대원들의 희생도 많았다. 생존한 결사대원들은 항상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동지들의 숭고한 뜻과 영혼을 달래고자 1978년 적석면 객현리에 충혼사를 건립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수복일인 9월 28일과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내왔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어언 38년 감악산 결사대장과 생존동지들은 옛 순국동지들의 영혼을 달래는 길은 충혼탑의 건립이라고 뜻을 모으고 그 성사를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던 중 1988년 파주시당국과 한국자유총연매 파주시 지부의 도움을 받아 늦게나마 이탑을 세움 |
831 | 17-1-005 |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양양시 | 양양군 | 비석 | 3·1운동 | 1919 | 너비 3.5m, 높이 14.8m | 2000-04-09 | 양양 3·1독립운동이 참여한 양양군민의 유적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4월 4일부터 4월 9일까지 양양군 6개면 82개 동리 주민들은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양읍 도천면에 거주하던 이석범은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3·1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다. 양양으로 귀향한 그는 현북면의 7개리 주장들과 태극기 11,000개를 제작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태극기를 압수당하고 22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태극기를 각 면별로 전달하여 4월 4일부터 양양읍 장터에서 3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만세운동에 불길을 댕겼다. 양양 3·1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 신분종파를 초월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양양군에서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양양군민들의 나라사랑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2000년 4월 9일에 이 비를 세웠다. |
832 | 17-1-07 | 충렬사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양양군 | 양양군(환경복지과) | 사당 | 3·1운동 | 1919 | 사당 1동 | 1990-12-30 | 강원도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양양3.1만세운동 당시 순국하신 30위의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이때의 만세운동으로 현재 45분(애국장 9, 애족장 27, 건국포장 3, 대통령표창 6)이 포상을 받았다. ㅇ 위패 봉안 선열 권광식(權廣植) 고대선(高大先) 김성서(金聖瑞)김두영(金斗榮) 권병연(權炳淵) 김재한(金在漢)김사만(金思晩) 김석희(金錫熙) 김종성(金鐘聲)김창환(金昌煥) 김학구(金學九) 김주열(金周烈)이창갑(李昌甲) 문종희(文鍾熙) 김필선(金必善)최영덕(崔永悳) 이학봉(李學奉) 이원희(李源熙)최인식(崔寅植) 임병익(林秉翼) 이종엽(李鐘燁)이두형(李斗炯) 전원거(全元擧) 김철기(金哲起)황선주(黃璇周) 진원팔(陣元八) 노병례(盧炳禮) 함홍기(咸鴻基) 황응상(黃應相) 홍필삼(洪必三) |
833 | 17-1-04 | 양양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강원도 양양군 | 양양군 | 비석 | 3·1운동 | 1919 | 너비 1.7m, 높이 3.5m | 1974-10-03 |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은 대규모 시위 계획이 사전에 치밀하게 진행되던 중 1919년 4월 3일 일경에 탐지되어 임천리에서 22명의 인사가 체포되고 태극기 수백 매가 압수되었으나, 4월 4일 양양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4월 9일까지 6일 동안 강선면, 도천면, 논산리, 손양면, 상평리 등지에서 각각 별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에 함흥기, 권병연, ·김학구(1995, 애국장) 등 12명이 일본군에 피살되고 시위자 중에 80여 명이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외에 수많은 양민이 태형을 당하였다. 동아일보사와 양양군협찬회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되거나 투옥된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74년 10월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25-1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834 | 15-2-22 | 고 육군대위 서상윤 순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육군 제7296부대 | 비석 | 기타 | 1960 | 0 | 1960-01-01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에 지뢰를 밟아 순직한 서상윤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20사단 육사 동기들이 모여 1960년 4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당시였던 1960년 4월 6일 제20사단 탄약고 지역에서 산불이 나자 영연방사단(영국·뉴질랜드·캐나다)이 주둔하면서 매설해 놓은 지뢰가 폭발하였다. 이때 주위에 주둔하고 있던 소대장 서상윤 중위는 소대원을 지휘하여 화재진압작전을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순직하였다. 20사단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은 서상윤 중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순직비를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에 건립하였다. |
835 | 15-2-24 | 해병 제1상륙사단 전공 선양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해병대(군사과)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8-03-15 | 해병 제1상륙사단은 6·25전쟁 중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함흥지구작전, 도솔산지구전투, 김일성고지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귀신잡는 해병대의 위용을 만전하에 떨쳤다. 특히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려는 중공군을 격퇴해 수도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 |
836 | 16-1-05 | 순국 3·1열사 충혼비(홍천)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홍천군 | 성수리3.1열사유족회(민성홍)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1.5 m 폭0.5m | 1964-05-01 | 민병숙은 서울에 올라가 광무황제의 국장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3월 말경 민준기와 같이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4월 2일에서 3일까지 이틀 동안 계속된 이 만세시위에는 먼저 면사무소 앞에서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1919년 4월 1일 홍천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다음날인 4월 2일 동면 소재지인 속초리로 군중이 집결하면서 동면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동면사무소 주변에 모여든 800여 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민병숙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3일에 동면 주민들은 속초리에 다시 집결하여 홍천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일제 헌병과 수비대 10명이 나타났다. 면사무소에서 시위 주도자들과 헌병들이 대치하다가 격투가 벌어졌다. 군중들이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고 하자, 일본군이 총을 쏘아 민병숙이 즉사하였다. 동생의 죽음에 격분하여 달려들던 민병태도 역시 총에 맞고 쓰러졌다. 격분한 군중이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나 결국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군중은 모두 해산하고 말았다. 수십 명이 검거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들 면병태, 민병숙 두 형제 열사를 기려 1965년 홍천읍 유지들이 뜻을 모아 높이 1.5m, 폭 50cm의 추모비를 세웠다. |
837 | 20-1-20 | 문충사 | 독립운동 | 2003-09-15 | 대전광역시 동구 | (사)문충사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36 | 1동 | 1966-01-01 | 문충사는 한말에 일제에 항거한 유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송병순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두 형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손으로 형 송병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해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동생 송병순은 1888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학문연구에 몰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는 격문을 지어 8도에 돌렸다. 1910년 망국의 비보를 듣고 통분하여 형의 뒤를 따라 음독 자결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문충사는 원래 1908년 충청북도 영동에 건립되었는데, 송병선의 순국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66년 그의 순국지인 대전시 동구 용운동으로 옮겨졌다.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고, 그 옆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인 외삼문 안에 용동서원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있으며, 그 뒤의 내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
838 | 15-2-62 | 파주시 징집 제1차 6·25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2 | 1998-06-28 |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침공하여 우리 강토가 적색으로 물들어갔으나 다시 우리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통일의 그날을 생각할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파주시 800명의 청년들은 국가의 부름에 조국을 구하겠다는 신념하나로 참전하여 70여명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하고 파주군 징집 1기생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진 기념탑입니다. | |
839 | 15-2-42 | 대한민국 무공수훈 국가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무공수훈자회 파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1998 | 0 | 1998-01-01 | 파주시 장곡리 장곡체육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와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 국가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파주시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8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파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840 | 26-1-15 | 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땅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아산시 | 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1878 | 0 | 1986-12-15 | 수당 이남규선생은 고려말 목은 선생의 후예로 1855년 서울 미동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 벼슬은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일제의 침낮 마수가 이땅을 죄어들자 일찍이 척왜 항일의 굳은 신념을 불태워온 수당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영흥부사직을 박차고 왜적을 물리칠 것과 척신의 머리를 베라는 추상같은 상소와 실제의 행동은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1906년 의병들의 홍주성 봉기를 뒤에서 후원하고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준 일로 왜군에 의해 공주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두고는 그들의 침략이 뜻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안 백여 명의 왜군은 이곳에서 20여리 떨어진 대술면 상항리 선생의 사저 평원정을 에워싸고 묶으려 했다. 선생은 이에 ˝선비는 죽을 수 있으되,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외치며 가마를 타고 나섰다. 해가 지기를 바라며 뒤따르던 왜적들이 이속 평촌 냇가에 이르러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자 ˝죽을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선생의 호령이 떨어지자 저녁놀에 반짝이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뒤따르던 맏아들 충구가 몸으로 선생을 감싸자 내리친 칼에 쓰러지니 가마를 맨 하인 김응길, 가수복이 또 선생을 에워싸는 순간 칼날이 어지러이 비켜 아들도, 하인도, 선생도 모두 쓰러지니 향년 쉰 셋이었다. |
841 | 15-2-74 |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01-01 | 대한민국 해병대는 수도권 안전확보를 위해 현 전적비 일대에서 북한군 1개연대와 격전 끝에 20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포로로 잡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국군은 서울 외곽 방어선을 확보했고 북한의 재침공 기도를 분쇄하였으며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
842 | 26-1-07 |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47-11-26 |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홍일선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와 이순구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그리고 숙부 유중무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쳤다. 일경 5명이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였다. 사상자들의 친지는 시신을 헌병 주재소를 옮기고 항의를 하였고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경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
843 | 15-2-46 | 미 제25사단 한강도하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6-03-07 | 남양주시는 1986년 3월 7일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 347-2(미 제25사단의 도하지점)에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하여 감행한 한강도하작전에 참전한 미 제25사단 용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미 제8군이 1951년 3월 7일부터 서울 재탈환을 위한 리퍼작전을 실시하였다. 당시 제8군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대장은 중부의 미 제9군단 예하 25보병사단으로 하여금 양수리와 팔당 부근에서 도하작전을 전개하도록 해 서울 동측을 위협하는 한편, 한강 남안 진지를 확보하고 있던 미 제1군단( 한국군 제1보병사단·미 제3보병사단)을 투입시켜 큰 피해 없이 서울을 탈환하려 했다. 그러자 중·조연합사령관인 팽덕회는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미 제25 보병사단의 도하와 중동부 지역에서 감행된 미 제10 군단과 한국군 제1 군단의 공격에 대해 지연전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격전이나 희생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다. | |
844 | 15-2-02 | 구리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구리시 | 구리시 | 탑 | 6·25전쟁 | 1950 | 1991-01-01 | 구리시는 1991년 6월 구리시 인창동 313-44에 6·25전쟁시 전사한 구리시 출신 호국영령 87위(육해공군, 경찰, 애국단원, 노무자)를 추모하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 |
845 | 15-2-10 | 포천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4-05-02 | 이 탑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순국하신 포천 지역 출신 호국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시민의 정성을 모아 건립되었다. 1966년 건립된 기존에 있던 충혼탑은 탑신만 이 자리에 옮겨 같이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의 탑은 1994년 재건축된 것이다. |
846 | 15-2-67 | 월남 참전 기념탑(포천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월남참전전우회 포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8-06-10 | 청성문화체육공원 내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 중령 최인환, 대위 이광용, 준위 박종서, 원사 최병욱, 하사 조보원, 병장 안승주, 상병 이강열 등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포천시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유공자회 포천시 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6월 10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포천시 젊은이들은 맹호, 백마, 청룡, 십자성 부대 대원으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 |
847 | 23-1-31 | 애국지사추모탑(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태안군 | 반도청년회 | 탑 | 민족주의운동 | 1919 | 1983-08-05 |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음력 3월 남만주 유하현에서 조맹선·백삼규·조병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 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 이들은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지역, 만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집중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습격하고, 신의주 등지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는 1919년 9월 조직되었고 이종헌이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응징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노출되어 단원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지단장 이종헌(1977년 애족장)을 비롯해 가재창(1982년 애족장), 오몽근(1982년 애족장), 김정진(1983년 애족장), 염성환 등이 옥고를 치렀다. 태안 안면 반도청년회는 1983년 8월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추모탑을 건립하였다. | |
848 | 15-2-27 | 도평리 수복 기념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4-10-15 | 포천시는 1954년 10월 포천시 이동면 도평1리 197-2에 도평리 수복 기념탑을 건립하여 북한군의 마수에서 포천지역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고 북한군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다한 육군 5군단장 최영희 장군과 그 예하 장병의 전공을 널리 선양하고자 하였다. 포천지역은 개전 초부터 1951년 3월까지 2차례 북한군이 점령했다가 1951년 3월 24일 유엔군과 우리 육군의 반격작전으로 완전히 수복하게 됐다. 1954년 10월 15일에 열린 제막식 때 ‘收復紀念塔’이란 휘호를 쓴 이승만 대통령이 행사를 주관하였고 미 9군사령관(카터비 중장)과 초대 5군단장(최영희 중장) 등이 참석하기도 했다. |
849 | 15-2-12 | 육사생도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9-01-01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당시 육군 사관 학교에 다니던 생도 1기[현 육군 사관 학교 10기] 312명과 2기 330명은 육사 장교 및 교관들의 지휘 아래 6월 26일 새벽 포천으로 출전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공산군 제3사단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포병의 지원도 없이 소총만으로 싸우던 이들은 이곳에서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한 전몰 생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동기생들이 모은 기금과 국비 1억 원을 지원받아 1979년 12월 1일 건립되었다. |
850 | 23-1-032 | 옥파이종일선생생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태안군 | 태안군 | 생가 | 3·1운동 | 1858 | 1996-08-11 |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서 태어났다. 신교육의 일환으로 1898년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여성들도 읽을 수 있는 순 한글 신문인 <뎨국신문>을 간행하였고 신물을 통해서 애국에 관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또한, 1910년까지 10여 년간 <뎨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개화와 구국 계몽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에서는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3·1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된 그는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하자 제2의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성사되지 못하였다. 1925년 8월 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 거적위에서 68세를 일기로 영양실조로 서거하였다. | |
851 | 23-1-08 | 새장터3·1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서천군 | 서천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987-03-01 | 서천 마산 신장리 장터에서는 3월 29일 송기면의 주도 하에 유성렬·이근호·임학규 등이 시장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송기면은 3월 23일부터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준비 끝에 29일 마산 신장리 장터에서 노형래·하중호·유일동 등과 함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주동 인사 송기면·유성렬·송여직 등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그러나 이근호와 나상준 등은 계속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찰출장소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2, 000여 명에 이르렀고, 군중들은 고시상·양재흥·박재엽 등의 주도로 출장소를 파괴하고, 체포된 인사들을 구출하였다. 이 만세시위로 송기면 등 14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년 3월에서 5년의 옥고를 겪었다. 신장리의 만세운동은 서천지방에서는 가장 큰 3·1만세운동이었다. 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는 1987년 3월 1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360에 새장터 3·1운동에 참여했던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비문을 박경수가, 글씨를 김기승이, 조각설계는 김주현이 각각 맡았다. | |
852 | 23-1-15 | 월남이상재선생생가및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서천군 | 한산면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50 | 1991-01-01 | 월남 이상재 선생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서천군에서 1991년01월01일 건립한 시설이다. 이상재 선생의 주요 공적을 보면 1.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일본의 한국기독교연합회 공작을 저해하고 교도들에게 민족사상의 고취에 진력함 2. 1898년 서재필 박사가 도미함에 독립협회를 지지하여 자유사상 고취에 진력함 3. 황성기독교 총무로서 청소년의 애국 사상을 지도함 5. 3.1운동 당시 민족적인 지도자로서 활약했으며 말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함 6. 1927년 신간회 회장으로 있다가 서거함. 사회장으로 예장함 | |
853 | 23-1-41 | 월남이상재선생추모비 | 독립운동 | 2003-11-27 | 충청남도 서천군 | 서천군 | 비석 | 사회운동 | 1850 | 1975-08-15 | 1975년 08월 15일 서천군에서 월남이상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공적을 요약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일본의 한국기독교연합회 공작을 저해하고 교도들에게 민족사상의 고취에 진력하였다. 1898년 서재필 박사가 도미함에 독립협회를 지지하여 자유사상 고취에 진력한 바 있다. 또한 황성기독교 총무로서 청소년의 애국 사상을 지도다. 3.1운동 당시 민족적인 지도자로서 활약했으며 말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회장으로 있다가 서거하였음 | |
854 | 23-1-18 | 수당이남규선생고택및기념관 | 독립운동 | 2009-05-25 | 충청남도 예산군 | 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한말구국운동 | 1637 | 1637-01-01 | 조선시대 1637년 건립된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태어난 곳으로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위치해 있으며 1976년 충남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됐다. 건물은 냠향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 행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사랑채가 별도로 있다. 안채는 정면 중앙 7칸과 측면 6칸으로, 중앙 3칸은 대청으로, 대청의 우측의 안방과 1칸의 윗방, 그리고 반칸 씩의 고방을 각각 갖고 있다. 대청 좌측에는 마루방과 건넌방이 1칸씩 있고, 이어서 부엌 2칸이 연결되어 있으며, 대청 서쪽 끝에 1칸 반을 우무물마루로 하여 사당공간을 두었다. 안채 앞에 있는 一자형의 행랑채는 2칸의 중문을 중심으로 동측 3칸에는 헛간이, 서측 2칸은 청지기방이다. 안채와 서측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대청 좌측에는 작은 사랑방 1칸, 우측에는 큰사랑방 2칸이 있다. 이남규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4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과거 급제 후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해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 공조참의, 형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는 이를 규탄하는 "청절왜소(請絶倭疏)", 을사늑약 때는 "청토적소(請討賊疏)" 등의 상소문을 써서 일제의 만행을 온 나라에 알려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가 1906년 5월 전 참판(參判) 민종식(閔宗植)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하여 피신한 민종식 의병장을 이곳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었다가 부일 주구배가 그 사실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선생과 장남 충구(忠求)가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당한 끝에 한 달만에 풀려났다. 그후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의병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이 지역의 의병재발을 우려한 일본군은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붙잡아 압송하던 중 충남 아사군(牙山郡) 송악면(松岳面) 평촌리(坪村里) 냇가에 이르러 협박과 회유를 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조금도 뜻을 굽힐 기색을 보이지 않자 칼로 선생을 죽이고, 온 몸으로 이를 막으려던 맏아들 충구와 하인 김응길(金應吉)이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855 | 15-2-31 | 연천군 현충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6·25전쟁 | 1951 | 0 | 1971-01-01 |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15일까지 육군 제17연대 장병들이 연천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공훈을 선양하고,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연천군에서 1993년 10월 건립하였다. 연천 출신으로 전사한 육군 중령 박영렬 외 76위와 해군, 경찰 등 83위의 영령이 모셔져 있다. |
856 | 15-2-32 | 충현탑 [(구)와초리 충현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6·25전쟁 | 1951 | 0 | 1959-01-01 | 1953년 3월 23일 대광리 북방고지 탈환을 위하여 미 7사단장 "아더 지 투르도" 소장이 지휘한 부대장병들은 중공군 주력부대를 섬멸·격퇴시켜 적의 전의를 상실케하고 우군의 전력을 호전시켜 성공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함. 이들 장병들의 공적을 찬양하며 자유·평화를 위해 산화한 자유 우방용사와 우리 국군장병의 영령 893위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함. |
857 | 15-2-73 | 필리핀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6-04-22 |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필리핀군의 중공군과 가장 큰 전투를 벌였던 율동전투(1951.4.22~1951.4.23)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함. 필리핀군은 한국전쟁에 총 7,147명이 참전하였으며 전사 112명, 부상 299명, 실종 16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음 *율동 전투 : 제10보병대대 Dionisio S. Ojeda 중령의 지휘로 중공군 1개 대대 규모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림 |
858 | 23-1-25 | 모덕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모덕사관리사무소 | 사당 | 사회운동 | 1833 | 1914-01-01 |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1914년에 건립되었다. 현판의 글자는 고종황제가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 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한 것이다. 최익현은 이행노의 제자로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사헌부 장령까지 올랐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며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리고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죄상을 16개 항목에 적어 항쟁하며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 끝내 순국하였다. 후에 그를 추모하는 사림들이 태인, 포천, 곡성 등 여러 지역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모덕사는 최익현이 살았던 고택 옆에 마련된 사우와 많은 장서를 보존하고 있는 장서각과 그의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함께 들어서 있다. | |
859 | 15-2-34 | 충혼탑(왕림리)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기타 | 1950 | 1954-01-01 | 군남면 왕림리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김정곤 대령 이하 5, 238위의 보병 제1사단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보병 제1사단은 동 사단 출산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4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보병 제1사단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보병 제6387부대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860 | 23-1-35 | 김좌진장군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역사문화시설관리사업소) | 기념관 | 해외운동 | 1889 | 1992-01-01 |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 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 조직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또한 1925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 운동의 전개와 동포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고인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
861 | 15-2-35 | 정갑진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비석 | 기타 | 1969 | 0 | 1970-01-01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 육군 7895부대 내에 서울대 ROTC 출신으로 부하가 잘못던진 수류탄을 앉고 많은 이들을 구하고 산화한 정갑진 중위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20사단에서 1970년 6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정갑진 소위는 1946년 1월 28일 경북에서 출생하여 1964년 2월 25일 경북사대부고를 거쳐 1969년 2월 26일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1969년 2월 28일 학군 제7기로 소위에 임관되었다. 1969년 7월 14일 보병 제20사단 61연대 1대대 2중대 화기소대장으로 명받아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방초소에서 부하를 대신하여 산화하였다. 사단에서는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뜨거운 젊은 지성 분단된 조국의 멍에 메고지고의 성스러움 그 크신 덕 대한 위해 몸 드린 정갑진 중위여! |
862 | 23-1-01 | 김좌진장군동상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문화관광과) | 동상 | 해외운동 | 1889 | 1983-05-31 |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 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 조직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또한 1925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 운동의 전개와 동포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1979년 김좌진장군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1983년에 완공된 사업으로 장군이 31세때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가납연대를 섬멸시킬 때의 무장의 위용으로 독립군 대장의 늠름한 기상을 표현하였다. | |
863 | 15-2-36 | 김광율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제60여단 | 비석 | 기타 | 1966 | 0 | 1967-01-01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에 대간첩작전 임무 수행중 전사한 김광율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20사단이 1967년 4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김광율 소령은 중국 봉천 출신으로 1953년 11월 28일 장교로 임관하여 1964년 8월 27일 보병 제20사단 제60연대 수색중대장으로 휴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올빼미부대 대간첩작전에서 전사했다. 보병 20사단은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그의 충용무쌍한 감투정신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찬양하고 그 유혼을 길이 받들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1966년도 올빼미부대 대간첩작전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고 김광율 소령의 충용무쌍한 감투정신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높이 찬양하고 그 유훈을 깊이 받들고자 여기에 기념탑을 세우다. 그는 중국 봉천태생으로 1953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육군장료로 임관하여 1964년 8월 27일 제20사단 제60연대 수색중대장으로서 휴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1966년 8월 8일 새벽 불법남침한 무장간첩 섬멸작전을 진두지휘하여 적 2명을 사살한 다음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다가 적의 수류탄에 안면부 부상을 입고도 과감히 적을 생포하려던 순간 불의의 흉탄에 산화하다 뒤에 미망인과 슬하에 3남매의 지녀는 남긴채 꽃다운 청춘을 조국의 수호신으로 바쳤다. 여기에 그 무훈을 높이 찬양하고 일계급 특진과, 충무 무공훈장이 추서되다. |
864 | 23-1-28 | 만해한용운선생동상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문화관광과) | 동상 | 기타 | 1887 | 1985-12-02 |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히고, 14세에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16세 되던 1894년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나는 등 세상이 요동치자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그러던 중 한때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불교 경전 공부와 한문으로 된 불경을 번역사업에 주력하였으며,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만주지방 여러 곳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였으며,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시인으로서도 유명한 한용운은 1926년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직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발간하며 불교개혁에 노력하였다. 1938년 그가 이끌던 불교계 비밀단체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나 고초를 겪었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동상은 만해 한용운의 훈업을 민족정신의 지표로 삼고 이 고장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홍주혼의 구심점 강화에 그 건립의 목적으로 삼고자 1985년 12월 2일 남산마루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은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에 왼손에는 독립선언문을 들고 오른손을 높이 치켜 올린 40대 당시의 서있는 모양의 동상으로, 동상의 글은 동상건립추진위원장 최창규가 짓고 글씨는 한국미술협회 고문 정한섭이 썼으며 조각은 이대교수 강태성이다. | |
865 | 15-2-01 | 고양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 고양시 | 탑 | 6·25전쟁 | 1950 | 8.7m | 1971-01-01 | 고양시청이 6·25전쟁 당시 고양시 출신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1년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한편 2010년 12월에 고양시는 현충탑 인근의 공원화사업(고양현충공원)을 완료하고 기존의 현충탑을 헐고 재건립하였으며 위패실 설치와 태극단 묘역 정비도 마쳤다. 현충탑 재건립을 통해 현충시설로서의 목적뿐 아니라 고양시 출신으로 순국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패실을 새로 설치, 400여 위를 안치하여 애향심 고취와 애국애족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866 | 15-2-44 | 태극단 반공 유적지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 고양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7-01-01 | 6ㆍ25전쟁을 맞아 애국청년 240명은 태극단을 조직해 서울 수복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1ㆍ4후퇴 이후에는 국방부 정훈국 등에 편입되 실전에서 활약하였다. | |
867 | 11-1-36 | 윤동주 문학관 | 독립운동 | 2015-10-14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 기념관 | 문화운동 | 2012년 7월 25일에 개관하였으며 윤동주(尹東柱) 시인을 기념하는 문학관이다. 대지는 90㎡ 이며 3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사진자료와 친필원고, 시집, 당시에 발간된 문학잡지 등을 전시하며, 그리고 윤동주 문학관의 가장 독특한 특징인 시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실이 있는데 이 영상실은 물탱크를 재활용하여 만들었다. 문학관에서 주최하는 시낭송회와 음악회, 백일장 등이 열리며, 문학관 뒷편 인왕산 자락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시절 이곳에서 가까운 누상동 9번지(서울 종로구 옥인길 57)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1922~1982, 시인)과 함께 하숙생으로 살았으며 당시 그의 대표작인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작품을 남겼다. 윤동주문학관 건물의 특징은 청운동에 버려진 물탱크와 수도가압장 시설을 재건축하여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는데 뛰어난 공간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물탱크 내부를 영상실로 만들었는데 외부에서 한줄기의 빛이 스며들게 설계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탱크의 윗부분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뒤쪽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계단으로 연결된다. 2013년 1월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건축문화잡지인 월간 스페이스(Space)가 선정한 한국의 현대건축 'Best 20' 중에서 18위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大賞)에 선정되었다. | |||
868 | 23-1-17 | 금마기미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철마산관리위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84-11-01 | 금마면에서는 가산리 거주 이재만(1886~1943), 조재학, 김재홍, 부평리 민영갑(1888~1965), 조환원, 신곡리 김종석(1874~1936), 송강리 최중삼 등 7명이 주동이 되어 사전에 인근의 친지와 친인척들을 설득하여 은밀히 거사 준비를 완료하고, 인근 홍동면과도 사전 연락을 취하여 4월 1일부터 각 리별로 장소를 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가산리 이원교 집에서 심파극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 9시경에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연극공연이 끝나자 조환원이 선창하고 참석자 전원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금마면 전역에 파급되어 4월 5일부터 연 3일간 각 리의 뒷동산에 모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치열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84년 11월 1일 대한노인회 금마면분회(회장 이창익) 주관으로 면민과 유족회. 출향인사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홍성군 금마면 죽림리 산23-1에 기미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군민과 유족이 다수 참여하여 추모제와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 |
869 | 15-2-13 |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고양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09-28 | 인천상륙작전의 승세를 이어 한미연합해병대는 적을 재추격하여 1950년 9월 20일 행주나루에서 혈전 끝에 도강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서울 진격의 교두보를 확보하였음 | |
870 | 15-2-23 | 파주시 충현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보병제1사단 | 탑 | 6·25전쟁 | 1950 | 0 | 1972-01-01 | 6.25전쟁 당시 문산 전투(1950.6.25-28)에서 산화한 육군 제3270부대 장병 2,385명에 대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72년 12월 1일 육군 보병 제1사단에서 건립한 탑으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15-2-23)로 지정되었다. *문산 전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청단, 연백,개성,고랑포,적성 일대에서 38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한국군 제1사단이 개전 이휴 배속된 한국군 2개 연대외 더불어 개성, 문산, 피평산, 봉일천 일대에서 T 34형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제1,6사단)과 4일 동안에 걸쳐 맞서 싸운 방어전투이다. |
871 | 25-1-09 | 숭렬사(이상설 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진천군 | 진천군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70 | 0 | 1996-01-01 | 이상설은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 성균관 교수 탁지부재무관을 지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6년 러시아령 연추에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허위로 칭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상설은 1909년 4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성명회 사건으로 추방되었다 다시 돌아와 권업회를 창립하고 그 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당의 본부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나, 건강악화로 인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낯선 타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
872 | 15-2-53 | 참전비(양평군)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지평면 | 비석 | 6·25전쟁 | 1951 | 비석(1) | 1966-02-14 | 지평리 전투는 1951년 중공군의 2월 공세 당시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5일까지 이곳 지평면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군 제2보병사단 23전투단과 프랑스 군대가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 전투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 기념비는 자유수호를 위하여 지평리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미군 제2보병사단 23전투단의 공적과 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6년 2월 14일 양평군민의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
873 | 25-1-02 | 영동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2-03-04 | 영동에서 전개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던 중인 3월 4일 영동 장날에 계산리 등 읍내 여러 곳에 태극기가 배포되면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이날 만세시위는 확산되지 않았다. 4월 4일 오후 2시경, 다시 영동시장에 모인 2,0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출동한 일경들이 해산을 강요했으나 군중들은 불응하고 독립만세를 더욱 고창하자 일경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하였다. 만세 군중들은 몽둥이로 맞서며 저항했으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날의 영동 3·1독립운동은 인근의 매곡·양산·학산·양강·용산·심천면 등지로 번저나갔다. 시위현장에서 장태호는 순국하였고, 체포된 정돈영·이낙연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2년 3월 4일 동아일보사는 영동군의 협찬을 받아 영동 군민의 3·1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874 | 16-2-59 | 6·25 반공 투쟁 산악대원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춘천시 | (주)남이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5-08-15 | 춘천시와 (주)남이섬은 1975년 8월 15일 광복일을 맞이하여 춘천군 남산면 거주 6·25 반공투쟁 산악대원 83명의 공적을 기리고 반공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춘성군 남면(현재 춘천시 남산면) 가정리에서 1950년 8월 15일에 이미 활동하고 있던 유격대원들이 국군 낙오병 장호석․이정용, 가평경찰서에 근무하던 이승균 순경 등과 함께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반공투쟁 공작산악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국군이 이곳을 수복한 10월 10일까지 방하리 칼봉산를 거점으로 하여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북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치고 남면, 가평, 청평 등을 무대로 지방 좌익세력을 척결하고 내무서를 습격했다. | |
875 | 15-2-54 | 영연방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9-30 | 연방참전기념비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싸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국연방 4개국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1967년 9월 30일 경기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365-1에 건립되었다. 대리석을 4각으로 쌓아올린 비 중앙에는 4개국 국기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 영연방군의 희생자 수와 참전비문이 새겨져 있다. 매년 4월 마지막 주에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영연방국은 1951년 4월 22일부터 4일 동안 가평군 북면 일대에서 중국군의 대공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중국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 |
876 | 25-1-11 | 한봉수의병장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청주시 | 동상 | 의병운동 | 1872 | 0 | 1997-05-24 | 우리 지역 대표 독립운동가인 한봉수 의병장의 동상으로 선생의 숭고한 애국독립정신을 기림 |
877 | 15-2-56 | 호주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63-04-24 | 1950년 10월 호주군 제3대대는 대구에서 김포까지 돌진하였다가 1951년 4월 적의 춘계공세 시에 가평전투에서 적을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움/ 그 후 영국군 제27여단과 같이 복무하고 있다가 곧 제29영연방 여단에 편입되었으며, 임진강 북방의 주요 지역을 오랫동안 확보하고 있었던 이 부대는 공세적이 경찰전에서 특히 용맹을 떨쳤음 | |
878 | 25-1-16 | 의암 손병희선생 유허지(의암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21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청주시 | 기념관 | 문화운동 | 1862 | 0 | 1992-01-01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손병희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애국독립정신을 선양·고취함. 천도교 3세 교주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의암 손병희(1861.4.8~1922.5.19)선생을 기리며 2000년에 건립하였다. 천도교총본부가 기증한 선생의 유물 100여 점을 비롯해 청원지역의 항일운동과 한국의 3·1운동 역사를 알 수 있는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879 | 25-1-04 | 이정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김해김씨 문중(김백호) | 사당 | 문화운동 | 1956 | 0 | 1956-01-01 | 이정사(梨亭社)는 김제환 선생의 제자들이 남당 한원진(1682~1751) 소당 김제환(1876~1916) 성암 박유형(1858~1929)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954년 지은 사당이다. 1969년 정당 김성환(1875~1958) 각재 신태구(1886~1929)를 추향하고 매년 3월 8일 향사하고 있다. 소당 김제환 선생은 1910년 일제의 강제합병으로 국권이 유린되자 민적등록·토지측량·세금납부를 거부했다. 또 국권회복을 위한 무력의거 시도가 체포와 구금 등으로 좌절되자 출옥 후 산골짜기에 초막을 짓고 단식 투쟁을 하다가 순국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880 | 15-2-14 | 용문산전투 가평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97-06-23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에 양평 북방 용문산을 방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전적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96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지키고있었다. 5월 18일에는 중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당시 장도영 휘하 6사단 중 2연대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에 막강한 물량공세에 후퇴, 전초부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와 합류하였다. 그 후 2연대는 후퇴하지 않고 그대로 진지를 지키며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해 했다. 이때 중공군은 착각을 했는데,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를 주력부대로 알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제63군은 187, 188 2개 사단에다 군 예비인 189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하기까지 이른다. 즉, 중공군 3개 사단이 2연대에게 총 공격을 감행한것이다. 하지만 2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서 계속 몰려오는 중국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중공군이 2연대를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6사단의 7, 19연대가 후방을 기습한 것이다.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UN군과 국군의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국군은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새벽 중공군은 서둘러 퇴각을 하였다. 6사단은(2, 7, 19연대)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중국군은 화천호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그 결과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되거나 6사단에 의해 격멸당했다. | |
881 | 25-1-14 | 기산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풍양조씨 문중(조백구) | 기타 | 한말구국운동 | 1848 | 0 | 1949-01-01 | 조장하는 한말의 순국지사. 본관은 풍양이고 자는 경헌, 호는 이재이다. 충청북도 청원출신. 임헌회의 문인이다. 1910년 8월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통분하여 죽음으로써 항의하기로 하고,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끝내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장하선생의 항일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유림에서 194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기산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극문양의 대문과 오색단청이 아름답고 선명한 작고 아담한 사당이다. |
882 | 15-2-08 | 용문산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7-07-15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용문산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아낸 제6사단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육군 제5사단에서 1957년 7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1년 5워 19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개된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제6사단 장병은 중공군 제60군 예하 186, 187, 188사단과 격전 끝에 적을 섬멸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로서 호국의 신으로 사라진 제6사단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그 공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건립했다. 전투기간 중 제6사단은 적의 집결지를 포위 공격하여 2, 500명의 중공군을 포획하고, 이어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용문산 지구 전투는 일개 방어전의 승리일 뿐 아니라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6·25전쟁 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린 기록적인 작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
883 | 16-2-30 | 현충탑(원주시)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13.45m | 1966-06-06 | 원주 태장동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558위의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원주시)’을 건립하였다. 원주시는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현충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66년 6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5년 6월 6일 현충일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베트남전쟁 시 원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원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884 | 25-1-07 | 단재영당(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청주시 | 기념관 | 문화운동 | 1880 | 0 | 2002-01-01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단재영당은 일제 강점기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 그의 묘소 앞에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며2003년 서거 67주기를 맞이하여 단재기념관이 사당의 부속 건물로서 개관되었다. |
885 | 16-2-32 | 고 이순학대위 순직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비석 | 기타 | 1964 | 1964-11-10 | 원주시 일산동 원주군청 내에 임무수행중 사망한 이순학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강원도에서 1964년 11월 10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이순학 대위는 제27사단 포병사령부 소속 장교로 1964년 5월 22일 원주군 흥업면 산 상공에서 임무수행중 항공기가 기계고장을 일으켜 추락하여 순직하였다. 다음은 비문의 내용이다. 고 이순학 대위 영전에 산새같이 날아왔다. 산꽃처럼 저버렸네, 명동산 아침저녁 산새들 노래하고 넋인들 차마 어이 이땅을 떠나리요. 포복산 봄 가을에 산꽃이 피어나면 푸른 숲 바라볼 적마다 그대 이름 외우리. 대대로 이 고장 겨레들 그대 이름 외우리. 강원도에서는 도지사의 주관하에 1964년 11월 10일 이순학 대위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를 군청내에 건립하였다. | |
886 | 24-1-06 | 애국지사 연병호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증평군 | 증평군 | 생가 | 해외운동 | 1894 | - | 1986-01-01 |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중명학원을 수료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연길시 창동학원, 그리고 북경시 중국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일제에 의하여 주권을 강탈당하자 그는 25세가 되던 해인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난징, 상하이 등지로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에 있던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와 함께 입국하여 1919년 5월 이병철, 조용주 등과 비밀항일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청년외교단을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임시정부에 정보제공 등을 목표로 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여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말에는 한국국민당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35년 한국민족혁명당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활동을 하던 중 일제 앞잡이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의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1937년 1월 7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징역8년형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광복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이 되었으며, 1945년 제헌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887 | 16-2-33 | 충혼탑(홍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1972-08-15 | 홍천군 무궁화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 홍천군 출신으로 전사한 468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홍천군은 이곳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2년 8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홍천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홍천군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888 | 24-1-08 | 괴산 모래재의병 격전 유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괴산군 | 사리면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1984-01-01 |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에 위치한 괴산모래재의병격전유적비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를 주축으로 1909년 6월에 증평에서 괴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서 한봉수부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여 수 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노획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한봉수 선생은 1883년 4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를 조직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오근장 부근에서 일본 헌병대위 도기선치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일본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즈음하여 홍명희 ·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괴산군에서는 국권회복과 민족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선열의 우국충정을 길이 전하고자 1984년에 높이 3m, 너비 2.5m 규모의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 |
889 | 24-1-11 | 괴산 3.1운동 7인 열사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괴산군 | 괴산장연신촌노인회장 | 비석 | 3·1운동 | 1919 | - | 1991-01-01 | 이 열사비는 3·1운동 때 일제에 항거한 괴산 출신의 김의현 등 7분의 거룩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립되었다. 김의현(1990, 애족장)은 당시 장연면의 서당 교사로,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자인 박영래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를 목격하였다. 귀향 후 김의대(1990, 애족장) 김일곤 정해문 지민수 양신집과 함께 거사를 협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장을 몰래 준비하였다. 거사일자를 4월 1일로 결정하고 각 동리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박영래로 하여금 준비된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전달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가리 소재 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
890 | 24-1-16 | 청안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충청북도 괴산군 | 청안면 | 비석 | 3·1운동 | 1919 | - | 1990-01-01 | 청안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유적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던 중인 3월 중순부터 청안에서도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청안의 이태갑, 김수백, 신강면 등은 3월 30일 오후 3시 반경, 청안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2,000여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우편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경찰은 주도자를 체포하여 청안경찰서 주재소로 연행하자 격부한 시위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일제 경찰은 충주에서 급파된 수비대와 함께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0년 1월 1일 괴산군에서는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청안 면민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891 | 16-2-02 | 호국용사추모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홍천군 | 내촌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5-04-01 | 이 비에 각인된 구국지사들은 신생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며 국가 발전에 앞장섰던 대한청년단원 및 지역 유지들이었는 바, 6.25사변으로 남침한 북한 공산도당이 민주인사학살, 재산수탈, 부역동원 등 온갖 만행으로 주민들을 탄압하며 적화야욕완수를 위해 광분하자 20명이 지하결사대를 조직하여 내무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도당들을 처단한 다음 이 지역을 대공투쟁의 거점화하기로 결의하고 거사기회를 탐색 중 첩자의 밀고로 전원 체포되어 1950년 9월 13일 가족들의 면전에서 참혹한 수모를 당하다가 춘천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아군의 공습으로 수감시설이 파괴되자 5명은 탈출하고 15명은 재수감, 납북된 후 생사불명이 되었다. 이에 우리 내촌면민 일동은 구국일념으로 기꺼이 희생하신 님들의 숭고한 애국 정시을 기리고 북한 공산도당의 만행을 후세에 알려 애국심을 심어주고자 1975년 4월 도관리 북동고개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가 2013년 5월 이곳으로 옮겨 다시 이비를 제막하였다. 2013년 5월 내촌면민일동 | |
892 | 24-1-05 | 기미독립만세 추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음성군 | 소이면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5m | 1981-01-01 | 한내장터 만세 시위는 김을경과 이중곤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1일 장날을 맞이해 한내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4월 1일 다수의 군중을 이끌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시위하는 군중을 선도하고 소이면사무소에 진출하여 면장인 민병식으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케 함으로써 군중의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5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김을경, 이중곤은 다른 주동인물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1년 2월 추념비건립위원회는 소이면 한내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의 장한 의거를 후세에 기리기 위해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992-1에 기미독립만세추념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추념비 일대를 ‘한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고, 2001년 12월에는 기존 추념비 상단에 높이 5m의 탑신을 추가 설치하고 '한천 3·1만세사적비'라 비명을 개칭했다. 또 한내장터 공원 내에 헌화 및 분향소를 마련해놓아 독립기념공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
893 | 24-1-13 | 청은 김상한선생 창의 숭모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충청북도 제천시 | 청풍면 | 비석 | 의병운동 | 1883 | - | 1989-01-01 | 제천 청풍 출신 의병장 김상한의 창의 숭모비. 김상한은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정언을 지냈으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분격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동지를 규합하여 이강년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휘하에서 좌익장으로 활약하며 문경전투에 참가하였다. 1907년 3월 경상도지방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4월에 일본군과 교전하여 수명의 적병을 사살했으며 11월에는 문경군 능노면에서 일본군 800여명과 격전하여 5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 패전하여 남은 병력 100여명을 이끌고 단양으로 퇴각하였다. 1908년 9월 경상도, 충청도에서 재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시골에 은신했다가 1917년 10월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89년 1월 1일 대한노인회 제천시지회 청풍면분회에서 김상한 의병장의 애국 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894 | 16-2-38 | 네덜란드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12 m 기단0.95m | 1975-09-29 | 국방부에서는 6·25전쟁 참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네덜란드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오우덴 중령 등 많은 전사자를 낸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 20(영동고속도로 새말인터체인지 변)에 1975년 9월 네덜란드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횡성군은 이들의 참전을 기념하는 뜻에서 1976년 5월 네덜란드 카스델시와 자매결연도 맺었다. 6·25전쟁 당시 미2사단에 배속된 네덜란드군은 1월 11일 프랑스군과 함께 고전하던 미군을 도와 원주를 탈환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나아가 홍천 방면으로 진격하다 2월 12일 횡성 북천리 부근에서 적군과 이틀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때 대대장 오우덴 중령을 비롯한 수십 명의 전상자가 발생했으나 아군의 퇴로를 여는데 성공했다. 6·25전쟁 기간 네덜란드는 총 5, 322 명의 육군과 해군 병사를 파병했고 그 중 120명이 전사하고 64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명이 실종됐다. |
895 | 16-2-25 |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1-15 | 강원도 철원군 | 육군 제2136부대(보병 제5사단 27연대) | 기념관 | 6·25전쟁 | 1952 | 지상1층, 건물2동 | 1990-05-03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에 6·25전쟁 중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를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90년 5월 3일 기념관을 지었다.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전쟁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제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과 12차례의 공방전을 반복하면서 중공군이 7번 고지를 점령하고, 국군이 7번 역습하여 고지를 탈환하는 등 고지의 주인이 14번 바뀌는 혈전이 거듭되면서 피아간에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하였으나,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의 좌변 일각인 철원 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으며, 중공군 제38군은 그들 제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작전기간중 이 작은 고지에 중공군이 5만 5, 000발, 아군측이 21만 4, 954발이라는 막대한 양이 포탄이 집중되어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투중에 발사된 극심한 포격과 폭격에 의해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고, 제9사단 역시 백마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896 | 24-1-17 | 충주 독립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비석 | 3·1운동 | 1930 | 높이 3.1m, 너비 2.1m | 1985-01-01 | 1930년 2월 7일 충주 대소원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에 세워진 유적비. 1929년11월에 전남 나주와 광주 간 기차 통학 열차에서 한국 학생과 일본 중학생 사이의 싸움이 도화선이 되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충주 지역에서는 1930년 2월 7일 대소리 장날에 대소원보통학교 학생 30여 명이 장터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뿌리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날 시위에 가담한 학생은 100여명이 넘었다.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 서장이 직접 지휘하여 현장으로 달려와 주동 학생을 수색하여 구속하였다. 1985년 1월 1일 충주시에서는 학생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소원 초등학교 교정에 유적비를 세웠는데, 2008년 12월 13일에 충주시와 충북북부보훈지청의 지원을 받아 유적비를 중건하였다. |
897 | 16-2-10 |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철원군 | 철원군 | 비석 | 6·25전쟁 | 1952 | 1958-03-15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에 저격능선전투를 기념하고 전사한 미군과 한국군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5군단에서 1958년 7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저격능선전투는 1952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북한군과 중공군이 대대적인 진지전을 전개하자 국군과 유엔군측에서도 전투력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국군 제2사단으로 하여금 김화 북방의 저격능선을 탈취하도록 한 공격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은 저격능선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 제5군을 공격하여 초전에 목표를 점령한 후 중공군의 역습을 저지하기 위하여 42일 동안이나 그 고지에서 버텼다. 이 기간중에 중공군 제15군은 2개 연대 병력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손실을 입게 되었고, 국군 제2사단은 1개 연대 병력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겨울이 다가올 때까지 끈질기게 대결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끝까지 저격능선을 확보하였으며 중공군은 저격능선 전방에서 대치한 채 공격을 중지하고 수세전으로 전환하였다. | |
898 | 16-2-08 | 현충탑(철원군)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철원군 | 철원군 | 탑 | 6·25전쟁 | 1950 | 1979-06-06 | 이 탑은 호국영령이 남긴 충, 의, 신, 용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철원삼각 전적지로서 격전의 현장인 우리 고장을 승리와 전진기지로 발전시키자는 군민적 염원을 한데 모아 1979년 6월 6일 신철원 뒷산 부지에 건립한 현충탑은 탐신 높이 13m, 폭 2.7m 날개 부조의 넖이는 16m의 웅장한 탑으로 대리석의 재료를 써서 거립됐다. 이 탑의 형태는 승천 비상하는 학의 자채를 하고 있다. 현충탑은 1979년 당시 현충탑 추진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군민들의 성금 1,500만원과 소요부지의 개인 회사와 유관 군부대의 기반 조성 공사의 지원사업과 민, 관, 군의 총화로 건립되었다. | |
899 | 24-1-15 | 음성 기미 3·1독립만세 추념비(대소면) | 독립운동 | 2003-09-15 | 충청북도 음성군 | 대소면 | 비석 | 3·1운동 | 1919 | - | 1993-03-01 | 음성 대소면민들이 3·1독립운동을 일으킨 대소면 면사무소 자리에 세운 추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살고 있는 임경순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다. 1919년 4월 2일 밤, 이들의 주도아래 대소면민 수백명이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 소재 면사무소에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소면민들은 두번에 걸쳐 면사무소 유리창과 의자 등 기물을 파괴하고 장부를 불태우는 등 음성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중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대소면의 3·1독립운동 시위대는 진천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해산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임백규, 김동식, 김달년 등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고 임경순은 도주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1993년 3월 1일 추념비건립위원회에서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음성 출신 애국지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900 | 40-1-24 | 항일무명용사 위령비 | 독립운동 | 2003-09-15 | 부산광역시 강서구 | 녹산향토문화관 | 비석 | 기타 | 1995 | 폭1.6m 높이 4.5m | 1995-08-15 | 항일운동을 전개한 무명용사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기 불과 2시간 전에, 가덕도 일본군 포병대대 소속의 한 한국 병사가 가덕도를 탈출하였다. 청년은 일본군에 쫒기며 십리 바다를 헤엄쳐 녹산 처녀골 절벽에 이르렀다. 무장한 일본군이 뒤를 쫓는 상황에서 청년은 ‘대한독립만세’를 세번 외치고 장열하게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1995년 8월 15일에 부산 강서구 녹산동 주민들은 광복 50주년 기념비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름 모를 무명의 용사가 뛰어내린 언덕 인근에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녹산향토문화관에서는 매년 광복절을 맞아 항일무명용사의 위령제를 실시하고 있다. |
901 | 16-2-18 | 전공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제668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80 | 1980-08-15 | 1980년 3월 27일 보병제39,50연대 합동수색조는 비무장지대내 442고지를 수색 중 은거중이던 무장공비의 사격을 받고 즉각 응사,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 사살1명 AK소정 2정을 포함한 281점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고 김윤길 하사의 명복을 빌며 승리부대 용사에게 길이 그 훈공을 전하고자 여기에 전공비를 세워 이를 기념한다. 1980년 8월 15일 | |
902 | 40-1-16 | 부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금정구 | 동래여자고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4-11-01 | 부산진일신여학교는 교사와 16세 전후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 제일 먼저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3월 2일과 3일경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서울에서 부산의 학생대표단에게 전해졌고 일신여학생들은 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때 일신여학교 측에서는 학생 이명시가 연락을 담당하였으며, 주경애·박시연 선생은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일신여학교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는 3월 10일, 동료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위해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옥양목으로 태극기 50개를 만들었고, 다음 날 9시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시위 군중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때 고등과 김응수·송명진·김반수 등 11명과 주경애·박시연 교사가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던 때가 3월 11일 오후 9시경이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학생과 교사들은 일본군과 경찰에 붙잡혀 각각 6개월과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의거는 부산지역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0년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되기도 했다. 일신여학교 어린 소녀들의 항쟁은 부산․경남 3·1운동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그 의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1919 년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당시의 항일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4년 11월 당시 일신여학교 자리인 부산시 동구 좌천1동 768번지에 만세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1992년 5월 19일 일신여학교의 후신인 동래여고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903 | 16-2-40 | 충열탑(화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7 m 기단3m | 1970-05-30 | 화천군 중리 충렬탑공원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군경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열탑’을 건립하였다. 화천군은 이종균, 오철준, 김창순, 정재수 등 이곳 출신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0년 5월 30일 준공하였다. 이 탑은 처음 1966년 6월 하리에 건립되었다가 위치가 적합하지 않아서 현 위치로 이전했고, 이후 시설노후로 2008년 7월 새롭게 정비했다. 6·25전쟁 기간 화천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화천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04 | 16-2-15 | 파로 전투 전적비(자유수호탑)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 기타 | 6·25전쟁 | 1951 | 1975-10-26 | 이 수호탑은 6·25전쟁당시 국군 제6사단, 학도의용군, 그리고 국군 제6사단과 해병 제1연대가 합세하여 중공군 제10·25·27군을 화천저수지에 수장시킨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의 학도병이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웠노라"라는 전우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추모하고자 1975년 1월 26일 화천군이 건립하였다. | |
905 | 40-1-11 | 이명순의사 공적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재부함경북도도민회 | 비석 | 3·1운동 | 1872 | 0 | 1989-03-01 | 만주 훈춘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운동가 이명순(1872-1920)의 공훈을 기림 |
906 | 40-1-03 |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30 | 부산광역시 남구 | 동천고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897 | 0 | 1992-10-05 | 평안남도 안주읍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안찬복의 추모비. 안찬복은 1919년 3월 3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하여 평남 안주읍 율산공원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모인 5,000여명의 군중을 이끌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으며 대형 태극기와 악대를 선두로 하여 시가행진을 하였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헌병경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아 시위현장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안찬복은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에는 요시찰인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2년 10월 5일에 학교법인 원곡학원은 그의 애국행적과 독립정신을 추모하고자 동천고등학교 교정에 이 비를 세웠다. |
907 | 16-2-07 | 사창리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사내면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7-07-15 |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사창리지구 전적 기념과 제6사단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제9사단과 제27사단 그리고 화천군이 1957년 7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 제58군 예하 59, 118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사창리를 탈환하기 위하여 치른 전투다. 이 전투에서 희생당한 제6사단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파하기 위해 육군 제9사단이 주관하여 사창초등학교에 건립했던 것을 1978년 화천군과 육군 제27사단이 함께 힘을 모아 현 위치로 이전 건립하였다. 사창리전투는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 당시 국군 제6사단이 가평북방의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중공 제20군 예하 3개 사단과 제40군 예하 1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3일동안에 걸쳐 전개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는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되기 하루던 1951년 4월 21일 국군 제6사단이 중부전선 미 제9군단의 촤일선에서 와이오밍선 진출을 위해 김화를 목표로 진격을 계속하던 중 중공군의 반격을 받게 되자 사창리 부근의 명월리와 광덕리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하였다. 그곳에서 국군 제6사단은 급편된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방어에 실패하고 사창리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병력과 야포와 각종 차량 등이 협소한 사창리 계곡으로 밀려들게 됨에 따라 큰 혼란이 야기되고 지휘체제가 와해되었다. 그후 제6사단은 일부 수습된 병력을 화악산과 석용산에 배치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하에 가평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으며 중공군 제20군도 가평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
908 | 16-2-22 |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육군 제15사단(668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2 | 높이2.23m 기단3.75m | 1957-07-15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 말고개 정상에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치러졌던 최대의 격전지인 금성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3사단이 1957년 7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반공포로 석방후 휴전회담이 중단되고 이러한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일어나자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에 돌출된 금성지구 국군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중공군은 4개군과 산하 12개 사단병력 23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총공세를 펼쳤다. 당시 이에 맞서 5개 사단이 방어하던 국군도 선전했으나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지 얼마 안돼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인데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형편이라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을 내주고 저지선에서 후방 4km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러한 전투의 결과로 국군은 1만 4천여의 병력을 잃었으나 중공군 2만 7천여 명 사살 3만 8천여 명 부상, 186명 생포 등 6·25전사상 초유의 전과를 얻었다. 이처럼 금성지구를 탈환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금성지구 일부를 탈환할 수 있었다.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는 이런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
909 | 40-1-21 |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북구 | 부산광역시 북구청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5-08-15 |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이 운동에 참가한 선열들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하여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구포 3·1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양봉근이 귀향하여 지역청년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김옥겸(1892~1957) 등 지역청년 42명이 주동이 되어 3월 29일 정오 장날에 구포장터에 모인 장꾼, 농민, 노동자 등 1, 000여 명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로 확대되었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김옥겸 등 구포장터 3·1운동에 앞장 선 43인의 이름을 새겨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 매년 3월중 구포장터 3·1만세운동 재현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
910 | 15-2-70 | 수복기념탑(포천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탑 | 6·25전쟁 | 1954 | 0 | 1955-01-01 | 포천시는 1955년 1월 포천군 영북면 자일리 509-1에 수복기념탑을 건립하여 북한군의 마수에서 포천지역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고 북한군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다한 육군 5군단장 최영희 장군과 그 예하 장병의 전공을 널리 선양하고자 하였다. 포천지역은 개전 초부터 1951년 3월까지 2차례 북한군이 점령했다가 1951년 3월 24일 유엔군과 우리 육군의 반격작전으로 완전히 수복하게 됐다. 이후 도로가 확,포장됨에 따라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보존중이다. |
911 | 16-2-49 | 인제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8-03-15 |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남북리에 인제지구 전투 중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1958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물리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시 아군 제5사단이 봉화봉-월화동-장평을 잇는 캔자스선으로 북진을 계속하던 중 소양강선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하려는 북한군 제12, 15, 45사단과 치른 전투다. 지형적인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소양강선을 돌파하고 캔자스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북한군 제12사단은 궤멸상태에 빠지고 아군은 캔자스선으로 전선을 정리하였으며 알라바마선으로의 공격 발판을 마련하였다. 중동부전선의 군사적인 요충지인 인제지역의 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 비는 경제발전으로 합강교 부근의 국도확장 포장공사로 1986년 8월 20일 인제읍 남북리로 이설하였다. | |
912 | 16-2-53 | 충혼탑(양구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양구군 | 탑 | 6·25전쟁 | 1967 | 0 | 1967-05-23 | 본 충혼탑은 6·25 전쟁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1967년 5월 23일 콘크리트 구조물로 건립되었으나, 긴 세월동안 낡고 훼손되어 2014년 6월 5일 새로 건립하게 되었다. 탑의 바닥면적은 130㎡이고, 탑신은 12m로 당초 건립되었던 탑의 모형을 기초로 새롭게 디자인하여 현재의 모형으로 건립하였다. 탑 아랫부분의 검은 삼각형 기단은 우리 국토의 중심인 양국군의 기운과 양구군민의 애국 애향 정신을, 위로 솟아있는 2개의 기둥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시는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방사형 태극모향의 원구는 빛이 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순국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상징한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거룩하게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충혼은 대한민국 국토의 정중앙 양구 비봉산 기슭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 |
913 | 40-1-19 |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부산광역시 동래구청 | 탑 | 3·1운동 | 1919 | 0 | 1996-03-01 | 부산지역에서 학생·노동자·상인·승려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1일 부산일신여학교 학생들에 의한 시위운동을 시작으로 3월 13일 동래고보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 민중의 봉기, 18일과 19일에는 범어사 명정학교 학생·군중이 합류한 동래시장 시위, 3월 29일 구포장날에는 대형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대규모의 대중집회와 주재소습격투쟁, 4월 5일 기장읍 장날에는 청년들이 중심이 된 수천여 명의 궐기 등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위로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부산시는 1996년 3월 1일 동래구 명장동 산93-10(마안산 정상)에 기념탑을 건립하여 부산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며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
914 | 16-2-55 | 도솔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양구군해병대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1981-08-26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에 도솔산 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1981년 8월 26일 이 비를 세웠다. 도솔산은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산악지역인 천연적 요새지로 북한군 지상부대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예하 제12, 제32사단의 정예 2개 사단병력이 어떠한 공격에도 절대 함락당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며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해오던 고지였다. 그러나 1951년 6월 14일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와 임무교대한 해병 제1연대가 17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 끝에 1951년 6월 20일 00시를 기하여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 새벽 5시 30분 죽한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빛나는 전승의 개가를 올렸다. 이 전투를 산악전사상 유례없은 청사에 길이 빛나는 해병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산화한 전몰 호국 해병용사의 넋을 추모하고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해군본부 해병참모부에 의해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 |
915 | 16-2-063 |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양구군 | 21사단(71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8-03-15 |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펀치볼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과 미군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1958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펀치볼이라는 지명은 이 당시 해안분지의 지형을 본 미 종군기자가 펀치(칵테일 종류)를 담는 그릇(Punch bowl)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해 유래되었다. 펀치볼 전투는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신속히 재정비한 인민군 제2군단이 펀치볼지역의 돌출된 지형을 이용하여 국군 제1해병연대와 미 해병 제1사단을 분리시키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국군은 전략적 요충인 펀치볼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 해병 제1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는 펀치볼과 그 북쪽 감재고지를 목표로 선제공격을 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도로상에 지뢰를 매설하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한·미 해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포병 및 근접 항공지원사격을 지원받아 3주동안 치열한 혈전을 벌인 끝에 인민군 제1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펀치볼과 주변 고지들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의 성과는 북한군 사살 3, 739명 포로 767명을, 아군 피해는 전사 506명, 부상 1, 602명, 실종 11명이었다. |
916 | 16-2-68 | 피의능선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양구군 | 제21사단(육군제71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80-11-11 |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피의능선 전투에서 적군을 격퇴하고 산화한 139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21사단에서 1980년 11월 11일 이 비를 세웠다. 피의능선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선으로 진출한 후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제안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36연대가 양구 북방 피의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한 공격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은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북한군은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를 봄으로써 피의능선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격전을 전개하여 목표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피의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피의능선을 장악한 아군은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피의 능선! 6·25가 빚은 최대의 혈전장 때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 보병 제5사단, 미 제2사단과 북한군 12, 27사단이 대치한 전투에서 적 1, 250명을 격멸하고 탈환한 고지! 19일 동안의 빼앗기고 빼안은 공방전에 20만 발의 포탄이 작렬, 계곡과 산등성이마다 탄흔과 혈흔으로 물들어졌나니 님들의 빛나는 위국충성과 용맹무쌍한 투혼 기리고자 뜻 모아 돌기둥 세우나니 넋이여! 편히 쉬소서. 전우여! 피로써 되찾은 이 땅 다시는 더럽히지 말자. 그리고 소중히 간직하자. 바로 저기 금강산이 보이지 않는가? 이곳 딛고 백두산까지 |
917 | 40-1-09 | 백산 안희제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동상 | 3·1운동 | 1885 | 0 | 1994-03-01 |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세워 부산지역에서 무역업을 벌였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순국했다. |
918 | 40-1-01 | 백산 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30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광역시 중구청 | 기념관 | 3·1운동 | 1885 | 0 | 1995-08-07 |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세워 부산지역에서 무역업을 벌였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순국했다. 백산기념관은 백산 안희제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는 이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백산상회를 설립 운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현재 기념관은 1995년 8월 15일 개관하여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전시장에는 그의 유품과 당시 구국운동 자료 등 8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
919 | 40-2-01 | 대한해협 전승비 | 국가수호 | 2002-11-30 | 부산광역시 중구 | 해군작전사령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8-12-23 | 부산시 중구 영주동 중앙공원 내에 최초의 해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해군 제3함대 사령부에서 1988년 12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남해안에 유격대를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려 하였다. 동해 경비를 증강하기 위해 구월산함, 고성함과 함께 출동중이던 해군 백두산함은 25일 오후 8시 12분 부산 동래방면 30마일 해상에서 남하하는 북한군 무장선박(무장 유격대 600여 명 탑승)을 조우하여 5시간여의 야간검색, 추격 및 교전 끝에 26일 새벽 1시 38분 부산 동남방 11마일 해상에서 격침함으로써 창군 초기 해상경비와 훈련만을 거듭하던 해군 최초의 전과로 6·25 개전초기 북한군 유격대의 후방교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유엔군의 젖줄이었던 부산항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유엔 해군과 더불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경위가 되었다. 해군 창설후 최초로 성공한 단독 해상작전이었던 해전을 영원히 기리고 안보의식을 높이기 위해 당시의 해전 해역과 인접한 부산중앙공원(옛명칭 : 대청공원)에 전승비를 건립하였다. | |
920 | 40-2-11 | 유엔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남구 |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 공원 | 6·25전쟁 | 1950 | 1951-01-18 | 전투지원국 16개국(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콜롬비아, 그리스, 태국,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및 의료지원국 6개국(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스웨덴, 독일) 6.25전쟁 참전 군인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림 | |
921 | 41-1-05 | 삼일사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삼일사봉제회 | 사당 | 3·1운동 | 1919 | 1971-04-06 | 삼일사는 병영에서 일어났던 1919년 독립만세 시위운동에서 순국한 독립투사와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가 돌아가신 기미계원들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지방에도 파급되어 울산의 병영에서도 서울에 유학하고 있던 한명조, 이영호로부터 이를 전해 듣자 때를 놓치지 않고 청년회 간부였던 양석룡, 이현우, 이문조, 박영하, 김장수, 이종근 등은 거사를 위한 모의를 거듭한 끝에 4월 5일과 6일의 양일에 걸쳐 성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일신학교 학생과 성내의 온 주민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때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수비대와 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의 네 사람이 순사하고 송근찬, 김규식, 김두갑 등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해산하고 말았다. 실형을 받았던 동지들이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은 기미계를 만들어 순국한 동지의 외로운 넋을 달래기 위해 매년 4월 6일에 비밀리에 빠짐없이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1955년 영모각을 개수하여 3·1사를 세우고 이들을 안치하는 한편 3·1사 봉제회를 만들어 길이 그들의 뜻을 받들어 오고 있다. | |
922 | 16-2-48 | 장병 추도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3군단 제3공병여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7-07-01 | 6·25전쟁이 교착전 단계로 접어든 직후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향로봉 북쪽의 주요 고지군 확보를 위해 924·884고지의 북한군을 격퇴하고 남강 선으로 진출한 공격전투. 향로봉전투는 1951년 8월 14일부터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함께 진행한 ‘포복작전(Operation Creeper)’ 중의 한 전투였다. 포복작전은 방어선 개선을 목적으로 한 작전으로, 해안분지 동측의 1031∼924∼884고지로 이어지는 ‘낚시바늘 형상의 능선(J Ridge)’을 탈취하여 해안분지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1951년 8월 14일 국군 제1군단은 미 제8군사령관으로부터 미 제10군단과 함께 포복작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군 제1군단의 임무는 ‘낚시바늘 능선’의 줄기와 머리에 해당하는 924고지(향로봉 서북쪽 7㎞)와 884고지(924고지 북쪽 3㎞)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때 좌측에서는 미 제10군단 예하의 국군 제8사단이 이 능선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1031고지를 함께 공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국군 제1군단은 8월 18일 924고지를 목표로 수도사단을, 884고지를 목표로 제11사단을 각각 공격에 투입하였다.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은 155밀리 야포사격에도 견딜 만큼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해 놓고 저항하는 북한군을 공격하는 동안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사단은 유엔 해군의 함포지원까지 받아가며 지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북한군을 격멸하였다. 수도사단은 23일 08시경에 공격목표인 924고지를 점령하였으며, 제11사단은 4번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격전 끝에 8월 27일 884고지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큰 타격을 입고 남강 북쪽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며, 국군은 향로봉 일대의 주요 고지를 모두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군 제1군단은 미 제8군의 계획에 따라 해안분지 공격을 위해 실시한 해안분지 동측 능선에 대한 점령 임무를 완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향로봉전투 [香爐峰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923 | 41-1-07 | 삼일 충혼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삼일사봉제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67-04-05 | 삼일충혼비는 1967년 4월 5일 울산 병영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순국하였거나 형을 받았던 애국지사(순국 4분, 징역 17분, 태형 5분)를 추모하기 위하여 울산 중구 서동 193(삼일사당내)에 건립한 것이다. 병영만세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병영삼일사봉제회는 매년 4월 6일 삼일사에서 봉제를 개최하고 병영초등학교 및 병영사거리 일원에서 기념식 및 재현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병영에서는 4월 4일 오전 9시경, 문성초(1887~1919) 등 청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동리·남외리·산전리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해산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주동인물들이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군중이 1천여 명에 이르자 일본관헌은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받아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결국 이문조 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군중들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해 선두에 있던 엄준, 문성초, 주사문(1886~1919), 김응룡 열사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 |
924 | 41-1-06 | 남창 3.1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울주군 | 남창3.1운동기념선양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94-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8일 울주군 온양면 남창 장날 이용락·이수락·이희계·이쾌덕 등의 사전 준비로 수백명이 모여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고기룡(高基龍, 1878~1947), 이수락(李壽洛, 1899~1981), 이용락(李龍洛, 1897~1972), 이재락(李在洛, 1886~1960), 이쾌경(李快慶, 1900~1960), 이쾌덕(李快德, 1900~1975), 이희계(李希季, 1900~1931) 안병철(安秉哲) 김우상(金禹祥, 태형), 이수필(李樹苾, 집유)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창3·1의거 기념비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4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925 | 40-2-15 | 6·25 참전 영도 유격대 유적지비 | 국가수호 | 2003-12-09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시설공단 태종대유원지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4-09-12 | 영도유격부대 전우회는 1984년 9월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 29-1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유격작전 중 산화한 영도유격부대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유적지비를 건립하였다. 영도유격부대는 1950년 11월 1, 200여 명의 자원자를 중심으로 창설된 민간유격대로 태종대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북한 지역 곳곳에 침투해 적의 전선이나 후방 해안기습과 매복으로 적을 교란하는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정전 직전 부대가 해산될 때까지 2년 1개월에 걸쳐 적군 4, 810명 사살, 각종 군사시설 파괴 378건, 각종 무기류 노획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53년 북파된 900여 명 중 겨우 40여 명이 살아 돌아오는 등 부대원들의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
926 | 23-1-14 | 추양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문화관광과) | 사당 | 의병운동 | 1860 | 1975-08-01 | 추양사는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친 지산 김복한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로 1975년 홍성군에서 건립하였다. 지산 김복한선생은 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와 형조참의, 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로 귀향하여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자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된 후 1906년 민종식이 홍주의병을 일으키자 이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역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개월간 투옥된 후 석방되었고, 후에 홍주의병과 연루된 혐의로 두차례 체포되어 온갖 수욕을 받은 후 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어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
927 | 40-2-18 | 스웨덴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02-12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롯데쇼핑(주) 부산본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1-10-01 | 유엔군 산하의 스웨덴 의료지원단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의료진 92명과 행정요원 76명 등을 부산에 파견했으며 1953년 철수할 때까지 옛 부산상고 건물에서 국군과 피란민 등 연간 5, 3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스웨덴 야전병원협회 및 스웨덴 한국협회는 1971년 10월 1일 스웨덴 의료지원단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스웨덴 왕국과 대한민국 양국의 영원한 친선을 위해 부산진구 부전동 503 롯데백화점 정문 왼편(옛 부산상고 건물 자리)에 스웨덴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928 | 40-2-10 | 의료지원단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시설공단 태종대유원지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6-09-20 | 의료지원국 6개국(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스웨덴, 독일) 6.25전쟁 참전 군인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림 |
929 | 41-1-09 | 박상진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광역시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84 | - | 1982-08-15 |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1905) 이후에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위가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모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하여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악질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1월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 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 1921년 8월 11일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박상진의사 동상은 높이 4.6m(좌대 포함)로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당초 82년 울산 중구 옥교동 JC동산에 건립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1998년 북정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북정공원이 울산시립미술관 부지로 편입되면서 2024년 울산 남구 달동 문화공원 내로 이전하였다. |
930 | 16-2-24 | 백골병단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인제군 | 제5689부대 2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90-11-09 | 1950년 12월 21일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대구 소재 육군보충대에 집결한 청년과 학생 6천여 명 중에서 817명이 선발되어 육군제7훈련소에서 입소하였다. 이들은 훈련을 마친 후 육군 11연대 363명, 12연대 330명, 13연대 124명의 3개 연대로 편성되었으며 적진 후방으로 침투하였다. 백골병단(白骨兵團)은 이들 3개 연대의 장병을 통합하여 설립된 유격부대로 1951년 2월 20일 당시 육군중령 채명신이 백골병단의 창설을 선포하면서 총 지휘를 맡았다. 백골병단은 북한군으로 위장하여 후방까지 침투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그러다 1951년 3월 설악산지구전투에서 북한군 1개 사단의 협공을 받아 보급로가 차단되어 백골병단 장병 중 364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육군 제2307부대와 대한유격참전동지회는 1990년 11월 9일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250-1에 백골병단 장병의 전공을 기리고 순국 산화한 장병의 명복을 빌고자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931 | 16-2-51 | 순직장병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기타 | 1954 | 1956-05-30 | 육군 제5사단(당시 사단장은 박정희 육군준장)은 1956년 5월 30일 강원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 1198(당봉산공원) 전방고지에서 경계근무중 폭설로 순직한 제5사단 장병 59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해발 1, 200m의 전방고지에서 경계근무를 수행하던 중 이규홍 대위 등 제5사단 장병 59인이 1954년 1월 기록적으로 내린 2m의 폭설로 참사를 당하였다. 충혼비 앞면에는 “嶺洞地區 柄申雪鍋 殉職將兵 忠魂碑”라는 박정희 장군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 |
932 | 42-1-28 | 애국지사 백당 권영조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권씨문중 | 비석 | 3·1운동 | 1883 | 0 | 1994-01-01 | 권영조는 경남 창원 사람으로 1910년부터 창원에서 애국유지로서 사립경행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기여하여 왔다. 1919년 3월에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권영대·변상섭 등과 이 지방의 거사를 의논하고, 거사일을 다가오는 고현 장날로 약정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격문을 쓰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거사준비를 갖추어 가는 한편 각 면·동으로 다니면서 동지와 대중규합에 노력하였다. 약정한 3월 28일의 장날 오후 1시경이 되자 예측대로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고 권영대의 선창과 지휘 아래 장터 곳곳에 대기중인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주민과 함께 시위를 주동하다가 이해 3월 28일 오후 5시경 진동헌병주재소 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5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다. |
933 | 42-1-18 | 독립지사 최병규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1881 | 1984-01-01 |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서기인 그는 면장 강제형(姜齊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부탁 받고 동료서기 전용선(田溶璿)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군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9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934 | 42-1-20 | 기미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0-08-15 | -기미년삼일독립운동기념비문- 기미년 3월 1일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 자주 독립을 위하여 온 겨레가 한마음 되어 떨쳐 일어났으니 서울에서 외친 만세소리와 독립선언은 이 강산 온 누리에 울려 퍼졌고, 동포의 가슴마다 뜨겁게 타오른 3.1의 횃불은 우리 향토 신반에서도 더높게 치솟았던 것이다. 그 날은 3월 15일 장날 정오 여러 향사들을 비롯하여 수백의 민중들은 대한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일제에 대한 항쟁이 거면적으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인근 면으로 까지 확산파급되었으니 이 어찌 자랑스런 장거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포악무도한 일제관헌의 탄압만행으로 시위 군중은 해산되었고 여러 지사가 체포 구금된 채 온갖 악형을 당했던것이다. 비록 국권회복의 민족 열망이 성취되진 못했어도 선열들의 그 숭고한 희생위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했으며 바야흐로 민주번영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니 그 위대한 애국혼은 천추만대로 살아 빛날 것이다. 그날로부터 일흔 한해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비 하나 세우는 것이니 그 위업 받들고 기리면서 깊이 추모할 지어다. |
935 | 42-1-21 | 독립지사 여세병·여찬엽 추모비 | 독립운동 | 2008-12-03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3·1운동 | 1897 | 0 | 1984-01-01 |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강제형(姜齊馨)에게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그의 협조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한 그는, 3월 14일 오후 1시경, 의령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도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936 | 42-1-23 | 오당 조재학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의병운동 | 1888 | . | 1977-01-01 | 조재학은 경남 의령 화정면 출신으로 의병운동과 파리장서 운동에 관여한 독립운동가이다. 면암 최익현을 따라 1906년 태인·진안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고, 최익현 의진의 소모오위장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에는 임병찬과 함께 대한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고, 1941년 4월에는 광무 황제의 밀조를 받은 사건으로 울릉도로 1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회당 장석영 선생 등과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하고 1921년 고사연구회를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937 | 40-2-03 | 국군용사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가락동행정복지센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3-06-05 | 부산시 강서구청은 1993년 6월 부산 강서구 죽림동 762에 충혼탑을 건립하여 6·25전쟁시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한 가락동 출신 김작지 소위 등 호국용사 39위(유명 34, 무명 5/ 연고 13, 무연고 26)의 넋을 기리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가락동 출신 젊은이로서 6·25 전쟁 중 군에 입대하여,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한 호국영령 39위의 유골과 위패가 당초 동래 범어사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1952년 3월부터 3차례에 걸쳐 오봉산으로 옮겨오면서 1957년에 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938 | 16-2-14 | 전공비(화천군 화천발전소)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수력발전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4-11-01 | 이 전공비는 1951년 4월부터 2개월간 펼쳐진 북한군 120만명의 춘계대공세기간 중 화천발전소를 사수하기 위해 육군제6사단 장병들이 1951.5.30. 발전소 입구의 적 퇴로를 끊고 용전분투하여 적6만5천명을 격멸하고 연대장 1명을 포함한 많은 포로를 생포하므로써 발전소를 탈환한 대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4년 11월 1일 화천발전소 직원들이 건립하였다. | |
939 | 43-1-06 | 서비정(서비 최선생 순의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고성군 | 최호석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11 | 0 | 1924-01-01 | 최우순 선생은 1883년 6월 22일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일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말 가뭄으로 흉년이 지속되고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자 자신의 사비로 곡식을 나누어주었고, 이로 인해 재산이 크게 줄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을미사변 이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선생은 서부경남 일대에서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자희산 아래에서 창검술을 익히고 훈련한 뒤 다른 지역 의병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고성읍을 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고 통분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제는 국민들에게 명망이 높고 추앙받는 인사들을 선발하여 돈으로 회유하기 위해 일본천황의 은사금을 주었는데 선생도 그 대상자가 되었다. 1911년 3월 18일 일본헌병대 고선분견대장이 일본군 선무대와 함께 선생의 집을 찾아 은사금을 내어놓으며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말라고 강요하자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에 헌병대는 선생을 강제로 연행하려 총칼로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날 밤 자정, 선생은 음독하여 순절하였다. 선생이 순절하기 전 동쪽에는 왜인들이 살고 있으니 그 후손들은 사립문을 서방쪽으로 내고 살라는 유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에 후손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그 유서를 받들었으며, 선생을 서비선생으로 칭하였다. |
940 | 16-2-61 | 육탄용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05-08 | 강원도 홍천군 | 육군제6790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10 m 기단2m | 1975-10-20 | 6.25전쟁 초기인 1950년 6월 28일 전차를 선두로 밀려오는 적 7사단을 맞아 아군 6사단 19연대 조달진 일등병을 비롯한 11명의 특공대가 주력전차 9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것을 기리고 그 얼을 받들고자 1975년 10월 건립하였다. |
941 | 16-2-37 | 충혼비(횡성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횡성군 | 갑천면 | 비석 | 6·25전쟁 | 1959 | 1983-12-01 | 6·25동란 중 북한 괴뢰군이 이고장을 침범하였을때에 이 고장 출신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치대를 조직 괴뢰군과 용감히 싸우다 장열히 순국한 젊은 넉을 추모하고자 서기 1965년 12월 1일 충혼비를 건립하였으나 도로확장 및 포장공사로 이곳에 옮겨 건립하다. 서기 1983년 12월 1일 갑천면민 일동 | |
942 | 16-2-21 | 대성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보병 제15사단(668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1980-08-15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대성산 지구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화천군과 육군 제8305부대에서 1980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대성산 지구 전투는 1951년 6월 9일 국군 제2사단 네2, 제3대대가 1041고지에서 활동중인 중공군 제20군 58사단 177연대의 적군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벌였던 전투다. 국군은 선제공격을 개시하여 1041고지와 신월동 및 865고지를 탈취한 후 6월 14일까지 6일간 연이어 계속된 전투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승양고개, 삼천봉, 비로봉 일대를 확보하면서 김화지역을 적으로부터 사수한 전투다. 사살 453명, 생포 19명, 55점의 무기를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아군 피해로는 전사 38명, 전상 123명에 그쳤다. 육군 제15사단에서는 대성산 지구 전투장병들의 전공을 찬양하고 조국수호를 위해 불굴의 신념으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며 그 위훈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 |
943 | 16-2-060 | 전사경찰 위령비 | 국가수호 | 2004-05-08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2-06-18 | 6.25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 기습 공격을 받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인제경찰서 8명의 경찰관의 명복을 빌고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자 1992년 6월 18일 인제군 및 인제경찰서에서 건립하였다. |
944 | 42-1-02 | 3·1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안군 | 칠북3.1운동기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6-01-01 |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연개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유광도가 격려 연설을 하였으며, 김정오(金正悟)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이를 계기로 경명학교 선생들을 선두로 많은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산인면 각 부락을 순회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 만세 시위는 함안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시위로 3월 12일 대산 평림시위, 18일 칠서 이룡리시위, 19일 함안읍시위, 20일 군북시장시위, 4월 3일 칠원시위 등으로 이어졌다. 3·1독립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6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945 | 16-2-43 | 현리전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94-06-06 | 현리지구 전투는 중공군 제2차 춘계공세 기간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실시된 전투이다. 당시 춘천, 인제 , 설악산, 속초를 잇는 선에서 대치한 가운데, 적1개 사단 규모가 전술적 요충지인 오미재 고개를 점령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고, 결국 아군은 전후방으로부터 적의 위협을 받아 현리~광원리~하진부리를 거쳐 영월로 철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곳 현리지구 전투에서만 19,000여명의 선배 전우들이 전사, 포로, 실종되었거나 부상을 입는 등 처절한 패배를 당하였고 이로 인해 5월 26일에는 불명예스럽게도 군단히 해체되는 비운을 겪에 되었습니다. 우리 후배 장병들은 당시의 처절한 전투에서 패배의 아픔을 뼈아픈 교훈으로 상기하고 초개와 같이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자 현리지구 전투에서 희생이 가장 많았고 선배전우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바로 이 자리에 군단 전장병과 지역주민들의 뜻을 모아 1991년 11월 20일 위령비를 건립한 후 매년 주요 행사시 참배하면서 당시의 쓰라린 전훈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아픔을 교훈으로 삼아 다가오는 미래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지난 날의 비극은 언제든지 되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시련의 겨사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하여 숨기려 하기 보다는 이를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어떠한 적의 도발도 반드시 격퇴할 수 있는 군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합니다. | |
946 | 43-1-21 | 파리장서 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거창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9 | 1977-09-23 | 거창출신 유림대표 곽종석 외 137명이 연서하여 파리강화회의에 2674자의 장서로 호소한 파리장서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 | |
947 | 17-2-23 | 88동기회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강릉시 | 사천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68-10-01 | 88동기회는 1968년 10월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512-3에 88동기회 참전기념비를 세워 6·25 때 전사한 동기생의 명복을 기원하며 후손들에게 위국충정 정신을 이어가게 하고자 하였다. 6·25전쟁 때 명주 출신 장정 500여 명이 88기로 응소하였는데 88동기생 중 박제균 외 30여 명이 옛 전우를 규합하여 88동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이 사기막 주민의 지원을 받아 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
948 | 41-2-06 | 양산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23.5m | 1968-07-01 |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양산시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68년 7월 1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1994년 8월 당시 양산군에서 봉안각을 신축하여 춘추원사에 모셔져 있던 위패를 이전 봉안하여 현재 봉안각에는 호국영현 76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져 있다. 6·25전쟁 기간 양산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949 | 41-2-08 | 농소 순국전몰군경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북구 | 울산광역시 북구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1.4m, 세로 1.5m, 높이 2.9m | 1991-04-06 | 농소6·25전몰군경유족회는 1991년 4월 울산 북구 농소1동 산38-1 호봉사 내에 농소면 출신 6·25참전 전몰군경 163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순국전몰군경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원래 이 충혼비는 농소 전몰군경유가족회에서 1980년 6월 건립한 것인데 점차 노후화되어 울산군의 지원을 받아 재건립한 것이다. 충혼비에는 전물군경 163위의 위패가 봉재되어 있다. 2003년 2월에는 울산시 북구청의 주관으로 충혼비 주변에 청동군인상을 건립하고 경내 정비사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
950 | 17-2-08 | 공군 강릉기지 전공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강릉시 | 공군제3155부대 | 탑 | 6·25전쟁 | 1951 | 0 | 1968-07-25 | 공군본부는 1968년 7월 강릉시 학동 공군 제18전투비행단 부대 내에 6·25전쟁 당시 우리 공군이 강릉기지에서 이룩한 전공을 기념하고 작전중 산화한 11명의 젊은 전투조종사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공군 강릉기지 전공탑을 건립하였다. 1951년 9월 강릉기지에 제10전투비행전대가 설치되자 1951년 10월 11일부터 우리 공군의 첫 단독 출격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휴전시까지 108명의 조종사가 F-51 무스탕 전폭기로 7, 851회의 폭격작전을 수행하였고, F-51전폭기가 11회 출격하여 평양 동쪽 승호리 철교 세 곳을 폭파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제10전투비행전대는 1953년 2월 제10전투비행단으로 재편되어 적 후방 차단작전 5천 회와 공지협동작전 2, 800여 회를 통해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
951 | 17-2-18 | 충혼탑(강릉시)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1.5m, 높이 15m | 1969-09-30 | 저동에 196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 등 2, 013위의 명주군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명주군은 명주군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9월 30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명주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8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강릉시에서 충혼탑을 관리하고 있다. 강릉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52 | 41-2-02 | 충혼탑(순직경찰관및공무원)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울산시경우회 | 탑 | 6·25전쟁 | 1950 | 가로 2.8m, 세로 2.8m, 높이 3.8m | 1955-03-29 | 울산 북정동에 6·25전쟁 기간에 순직한 경무관 김종신 등 148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울산경찰서는 이곳 출신 전몰 경찰과 공무원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3월 29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10년 8월 15일 새로이 개축하였다. 6·25전쟁 기간 울산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울산시경우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53 | 41-2-07 | 호국 위령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전몰군경유족회 울주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2.4m, 넓이 0.6m, 두께 0.3m | 1992-05-01 | 상북면민운동장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상북면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상북면전몰군경유족회는 이곳 출신의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0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광명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상북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54 | 41-2-03 | 일가 4형제 국가유공자 위령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일가4형제국가유공자추모회 | 비석 | 기타 | 1997-06-06 | 울주군 구미리에 이 고장 출신 이재양과 류분기의 장남 이민건, 차남 태건, 삼남 영건이 6·25전쟁에서 산화했고, 육남 승건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일가 4형제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울주군은 4명의 호국 간성을 길러난 부모를 포함해 국가유공자 묘역을 조성하여 자유의 수호신이 된 일가 4형제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7년 6월 6일 현충일에 위령비를 세웠다. 또한 추모비 앞에 충효정을 건립했다. 울주군에서는 매년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955 | 17-2-36 |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속초시)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5-10-30 | 한국전쟁 중 설악산 산악전에서 북한군 3개 사단과 중공군을 맞아 용감히 싸운 수도사단, 11사단, 5사단 전몰장병과 군번 없이 참전했다가 산화한 학도결사대 호림부대의 젊은 용사들의 넔을 위로하고 그 공훈을 추모 |
956 | 17-2-42 | 순국용사 위령비(삼척시)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삼척시 | 미로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 0.7m, 비높이 1.8m | 1966-01-01 | 삼척시 미로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미로면은 최선호, 박종석, 최진희. 김흥규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 58위를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6년 1월 1일 위령비를 세웠다.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문이 희미해지자, 1988년 6월 재건립했다. 6·25전쟁 기간 삼척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삼척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57 | 42-2-02 | 창원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 창원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5-06-06 | 창원시 삼동동 8호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창원시는 경남지역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5년 6월 6일 준공하였다. 이 충혼탑은 창원으로 도청이 이전됨에 경남 도청이 부산에 있을 당시 용두산 공원에 모셔졌던 위패를 모셔 오기 위해 건립되었다. 6·25전쟁 기간 경남 도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창원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58 | 30-1-45 | 신암 선열공원 | 독립운동 | 2005-10-27 | 대구광역시 동구 | 국가보훈처 국립신암선열공원관리사무소 | 공원 | 3·1운동 | 1955 | 0 | 1955-05-01 | 신암선열공원은 1955년 3·1동지회가 대명동 공동묘지에 방치되었던 선열묘지 5기를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으며 1957년 경상북도지사로부터 사용허가를 받아 신암동 선열묘지로 명명하였다. 또한 1986년 묘역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87년 산재되어 있던 27기의 선열묘지 이장 및 묘비, 상석 등 석물조성 공사 완료하고 3월 1일 준공식 거행하였다.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단충사가 있으며 이곳에는 우리고장의 3·1만세운동, 항일 학생운동과 신간회 활동, 선열의 빛나는 자주독립정신, 암흑기의 독립쟁취, 청원운동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
959 | 30-1-44 | 조양회관 | 독립운동 | 2005-05-09 | 대구광역시 동구 | 대구시 | 기타 | 민족주의운동 | 1922 | 1922-05-01 | 1922년 10월 30일 서상일 등 민족지도자들이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혼을 불어 넣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염원으로 달성공원에 세운 건물이다. 이 회관에는 당시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민중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으며 건립 7년만에 영남지역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지목되면서 우국지사들이 체포되고, 조선총독부에 징발되어 대구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일본군 부대가 주둔하기도 하는 등 민족의 수난사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고아복후 한때 정당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1953년 부터 원화여중고의 교무실 겸 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1980년 원화여고 이전에 따라 대구시에서 매입 1987년 망우공원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 |
960 | 17-2-45 | 전몰군경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삼척시 | 도계읍사무소 | 탑 | 6·25전쟁 | 1950 | 1980-06-06 | 6·25전쟁 중 조국을 위하여 산화한 삼척시 도계읍 출신 젊은 군경 187명의 영령에 대한 명복을 빌고 조국의 번영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도계청년회가 주관이 되어 건립 | |
961 | 42-2-38 | 마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창원시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10m, 둘레 6.15m | 1965-05-25 | 창원시는(구, 마산시)는 마산합포구 산호동 531-2 산호공원내에 6·25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용전 분투하다 장렬히 산화한 마산 출신의 호국영령 1652위를 추모하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 뒤편에는 호국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봉안각이 있다. |
962 | 30-1-16 |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달성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해외운동 | 1858 | 1963-05-01 |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에게 배움을 받았다.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여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다. 이후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근지역의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유림적 인사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자 이에 합류하였다. 1908년경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1월 해외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동지들과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하였다. 또 서로군정서에서는 군정서 독판을 맡아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중국 동북삼성 지역의 군사통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해의 임시정부에서는 초대 국무령을 맡았다. 이 후 간도로 돌아가 전민족유일단 결성을 위해 힘쓰다 순국하였다. 이상룡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구국기념비는 이상용의 제자 이은상이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이 비문의 앞글을 쓰고 제자‘종주’가 비문의 뒷부분을 썼다고 한다. | |
963 | 17-2-14 | 충혼탑(태백중학교)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태백시 | 태백중학교 | 탑 | 6·25전쟁 | 1951 | 1963-10-08 |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태백중학교 내에 태백중학교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18인을 추모하기 위해 태백중고등학교동문회에서 1963년 10월 8일 이 탑을 건립했다. 조국산하가 포화로 벌집처럼 파헤쳐지고 우리의 집과 재산이 불타고 있을 때 보다 못해 127명의 학우들은 분연히 일어서 교정에 모였다. 이들은 육군 제23사단 23연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열흘 동안 간단한 기초훈련만 받은 채 1월 26일 영월군 녹전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은 휴전이 될 때까지 중동부 전선을 누비며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린다. 3군단 철수작전과 치열했던 피의 능선전투, 가칠봉 949고지, 건봉산 662고지, 대지리 쑥고개 224고지 등 많은 전투에 참전 전과를 올렸다. 7월 27일 휴전이 되어 확인한 결과 18명의 전우가 호국의 영령으로 산화하였다. 1954년 11월 1일 건립된 충령비는 1963년 10월 8일 태백중학교가 하장면 평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현 태백기계공고 교정에 충혼비로 이전 건립되었으며, 1971년 5월 10일 태백중학교가 태백기계공고에서 분리되면서 현 위치에 충혼탑으로 이전 건립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의의 남침으로 인하여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을 때 학생의 몸으로 용약 구국전선에 뛰어나가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18주의 영령들이 이곳에 고이 잠드노라. | |
964 | 17-2-41 | 충혼탑(삼척시)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0.5m, 탑높이 12.5m | 1967-06-06 | 6.25전쟁중 이 고장을 수호하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순절한 이 고장 출신 군경, 경찰관, 민간인, 청년 등은 무려 552명에 이른다. 이들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삼척시에서는 충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1967. 6월 이 탑을 건립하였다. 설계는 당시 삼척공전 건축과 김형창 교수가 담당하였고 탑 양쪽에 비둘기를 상징하는 조각이 있고 우뚝 솟은 탑신 역시 비둘기의 날개를 상징하였다. 탑 전면에 충혼탑이란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며 아래쪽 동판에는 노상 이은상 씨가 작시하고 김기승 씨가 글씨를 썼다 |
965 | 30-1-19 | 대구사범 항일학생 의거 순절동지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장 | 비석 | 학생운동 | 1941 | 1973-11-03 | 이 비는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 재학생 박효준 등 35명이 항일결사 모임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데 대한 공훈을 기리고 옥중 순국한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파 등 5인에 대한 추모하기 위해 1973년 11월 3일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교정에 건립되었다. 대구사범학교 내에는 1940년 11월 8, 9, 10기생들로 구성된 문예부, 1941년 1월 8기생이 중심이 된 연구회, 1941년 2월 조직된 9기생의 다혁당이라는 비밀결사단체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 패망을 예견하고 이를 대비하여 민족의식 앙양과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회보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관련자 35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이들 다수가 옥고를 치렀으며 그 중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파 5인이 옥중 순국하였다. | |
966 | 17-2-03 | 해군 옥계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동해시 | 해군838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3m, 높이 17m | 1990-04-03 |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에 최초의 해상전투 승리 기념 및 전사한 해군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1990년 4월 3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남침에 발맞춰 동해안의 해상에도 북한군이 침범해 왔다. 우리 해군은 옥계 앞바다에서 침투해온 북한군에 대항하여 해군사상 최초의 전투를 치렀고 또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50년 6월 24일 동해안 경비임무를 교대한 YNS 509정은 부식품을 적재하려고 묵호항에 정박하고 있던 동해안을 따라 남침한 북한의 제766게릴라부대는 공격목표를 옥계 등지의 해안으로 정하고 25일 04:00에 이미 해안 상륙을 개시하였다. 묵호경비부의 옥계 해안초소로부터 적군의 상륙을 보고받은 사령관은 즉시 YNS 509정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509정은 즉각 묵호를 출항하여 북상을 개시, 2시간의 항진 끝에 안개속에서 배 한 척을 발견하고 피아식별을 위한 발광신호를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전투배치를 완료하고 접근하기 시작하자 적선에서 사격을 가해 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상호간 약 50분간 교전 끝에 적선은 도주하였다. 다시 묵호항으로 돌아와 정비를 마치고 해역으로 출동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
967 | 30-1-01 | 애국지사 박희광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구미시(금오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 동상 | 의열투쟁 | 1905 | 1984-03-01 | 박희광은 항일 의병운동가인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항일 의병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8세 되던 해인 1922년 그는 만주에서 결성한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하여, 특공대원으로써 활약하였다. 1924년 박희광은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받고, 김광추, 김병현 등과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하여 이들의 숙청작업을 하였다. 1924년 6월 1일에는 무순방면의 고등계 첩자이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하였다. 1924년 6월 7일 대낮에는 보민회를 습격하여 친일파 거두 최정규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최정규가 미리 피신하여 그의 부하 허 윤과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년 7월 2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지급받은 폭탄을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다. 같은날 저녁에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잠복한 중국,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김병현과 체포되었다. 박희광은 1924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심에 사형을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어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되어, 20년을 복역한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하였다. 그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주목과 감시를 피해다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채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았다. | |
968 | 30-1-27 | 황진박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북도 구미시 | 우자훈 | 비석 | 의열투쟁 | 1888 | 0 | 1967-05-01 | 경북 선산출신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신 독립운동가 황진박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황진박선생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1927년 장진홍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장진홍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장진호의사가 옥중에서 순국하자 감방문을 부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재소자들과 농성하며 옥중 투쟁을 벌였으며 장진홍의사의 사인을 규명하다 8개월 가형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옥고를 치루고 나욌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2년 5월 27일에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황진박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67년 5월 1일 황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황진박의 의열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969 | 42-2-01 | 진해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창원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5-01-01 | 진해 풍호동 풍호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진해시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5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진해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진해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70 | 17-2-04 |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고성군 | 해군1함대사령부 | 탑 | 기타 | 1967 | 기단 2.2m X 0.2m X 2.75m, 탑 1.1m X 1.13m X 6m | 1970-05-10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거진리에 우리 어선을 납치하려는 북한 경비함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북한 해안포대의 포탄에 침몰하여 전사한 당포함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본부와 고성군해병전우회에서 1970년 5월 10일 충혼탑을 세웠다. 1967년 1월 19일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어로작업중인 어선 250여 척의 보호임무를 수행하던 당포함은 적의 육상 포대로부터 집중포격을 받아 침몰되어 승무원 79명중 39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70년 5월 해병전우회 주관으로 군민과 해군의 협조를 받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충혼탑은 1967년 1월 19일 오후 1시 30분경 동해안 어로보호작전중 북괴의 만행으로 격침된 56함(당포함) 장병중 고 해군 대위 박태만 등 39명의 영혼과 명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재 고성군 예비역 장병과 해군 당국 역대 총장님 그리고 지방 각 기관장 유지들의 협조로써 1970년 1월 19일 제3주년을 맞아 위령제와 기공식을 올리고 동년 5월 10일 완공하였다. |
971 | 17-2-15 | 추모상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태백시 | 태백중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1 | 1992-08-10 |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태백중학교 내에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한 태백중학교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동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92년 8월 10일 추모상을 건립했다. 조국산하가 포화로 벌집처럼 파헤쳐지고 우리의 집과 재산이 불타고 있을 때 보다 못해 127명의 학우들은 분연히 일어서 교정에 모였다. 이들은 육군 제23사단 23연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열흘 동안 간단한 기초훈련만 받은 채 1월 26일 영월군 녹전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은 휴전이 될 때까지 중동부 전선을 누비며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린다. 3군단 철수작전과 치열했던 피의 능선전투, 가칠봉 949고지, 건봉산 662고지, 대지리 쑥고개 224고지 등 많은 전투에 참전 전과를 올렸다. 7월 27일 휴전이 되어 확인한 결과 18명의 전우가 호국의 영령으로 산화하였다. | |
972 | 23-1-12 | 권흥규선생순열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청양군(정산면) | 비석 | 3·1운동 | 1852 | 1966-10-01 | 권흥규는 충남 청양사람이다. 1919년 그는 청양군 목면 안심리에 거주하면서 정산향교 직원으로 있었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홍범섭 · 임의재선생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해 4월 5일 장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5일 정산의 장날 하오 3시경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로 발포해 최윤안의사 등 아홉 분이 현장에서 순국했으며 일제 헌병이 이중 30여명을 강제 연행하자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인하여 권흥규의사가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그의 장례식 때 더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고 이날부터 연 사흘간의 의거로 붙잡혀 태형을 받은 사람만도 166명에 이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973 | 17-2-16 | 학도병 기념관(태백중학교)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태백시 | 태백중학교 | 기념관 | 6·25전쟁 | 1951 | 1991-02-10 |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태백중고등학교 내에 태백중학교 내에 태백중학교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18인을 추모하기 위해 강원도 교육청에서 1991년 2월 10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조국산하가 포화로 벌집처럼 파헤쳐지고 우리의 집과 재산이 불타고 있을 때 보다 못해 127명의 학우들은 분연히 일어서 교정에 모였다. 이들은 육군 제23사단 23연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열흘 동안 간단한 기초훈련만 받은 채 1월 26일 영월군 녹전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은 휴전이 될 때까지 중동부 전선을 누비며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린다. 3군단 철수작전과 치열했던 피의 능선전투, 가칠봉 949고지, 건봉산 662고지, 대지리 쑥고개 224고지 등 많은 전투에 참전 전과를 올렸다. 7월 27일 휴전이 되어 확인한 결과 18명의 전우가 호국의 영령으로 산화하였다. 이에 태백중학교에서는 참전학도병의 명예를 높이고 공훈을 선양하고자 주수복 태백중학교 교장이 학도병기념관을 건립하여 학교특색 교육현장 및 추모사업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974 | 42-2-53 | 지덕칠 중사 동상 | 국가수호 | 2009-09-22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진해기지사령부 근무지원전대 | 동상 | 월남참전 | 1967 | 0 | 1967-08-03 | 경남 진해시 현동에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지덕칠 중사를 추모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1967년 8월 3일 이 동상을 건립했다. 1940년 11월 3일 서울 출생, 1967년 2월 1일 베트남전에서 순국했다. 지덕칠 중사는 해군군의학교과정을 이수하고 청룡부대 제2대대 2중대 3소대 위생하사관으로 1966년 9월에 베트남 전선으로 파병되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매양 자기 임무에 충실했었고 최후의 날에는 베트콩부대와 3차의 싸움에서 가슴 등 여덟 군데의 관통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혼자 엎드려 20여 명의 적을 쏘아 쓰러뜨리고 제몸은 돌보지 않고 부상병들을 먼저 치료해 주어 거룩한 사명을 다하다 숨을 거두니 당시 나이 28세였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중사와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
975 | 17-2-26 | 화랑사단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고성군 | 육군제5861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기단 높이 1.65m, 비 높이 1.5m | 1959-11-30 | 1951년 5월 공산군과 국군 사이에 밀고 밀리던 향로봉지구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피로 고지를 사수하다 많은 장병들이 장렬히 산화, 이들 호국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고 전승을 기념하기 화랑사단 장병들이 1959년 11월 전적비를 건립 |
976 | 30-1-08 |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시 교육지원청 | 비석 | 의병운동 | 1856 | 1969-05-01 | 한말의 독립운동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속리산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보은, 성주, 거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단식으로 옥사하였다 | |
977 | 42-2-39 | 고 이인호 소령 동상 (남빈동)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사관학교 기지전대 | 동상 | 기타 | 1966 | 0 | 1967-01-01 | 이인호 소령은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로서 1966년 8월 11일 월남전선 투이호아 지구 해풍작전시 베트콩으로부터 입수한 첩보를 확인코자 1개 소대를 직접 인솔하고 베트콩이 잠거하는 동굴을 탐색하던 중 적이 던진 수류탄 1발을 가슴으로 막아 장렬하게 산화하여 위기에 처한 부하들의 생명을 구했다 |
978 | 17-2-50 | 충혼비(고성군)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고성군 | 고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6-09-30 | 1951년 4월 2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직전까지 2년간 국군 제5,8,9사단과 미 제10군단 장병들은 괴뢰군 예하 12,15,45사단과 건봉산에서 접선 16차례의 공방전을 벌여 치열한 전투끝에 거진 지구를 수복시키는데 불멸의 공울 세웠다. 처음 미10군단이 당하지 못하고 밀려나자 아군 제5,8,9사단과 미7함대 20여척이 거진 앞바다에 집결 합동작전으로 최후의 반격을 가해 중공군 1개 사단과 괴뢰군 2개사단을 건봉산 계곡에 몰아 넣고 섬멸시켰다. | |
979 | 17-2-47 | 호림유격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10-30 | 강원도 고성군 | 고성군(현내면) | 비석 | 기타 | 1949 | 0 | 1986-10-15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통일전망대 내에 호림유격대 전적 기념 및 사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고성군에서 1986년 9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직전 북한 무장게릴라의 남침을 저지 분쇄하기 위하여 강원지역 청년단을 주축으로 호림이란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과 맞서 유격활동을 전개하다가 숭고한 희생을 치렀던 애국청년들의 위혼을 아로새겨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 영전 사실을 널리 선양하고자 비를 세웠다. 1949년 2월 강원지역 청년들과 서북청년단원이 주축이 된 민간인 316명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호림이라 이름하고 적과 맞서 유격활동을 전개하다 산화하였으며, , 그들은 오직 자유수호의 일념으로ㅗ 무력책동을 저지 분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949년 7월 그들은 머리카락을 은종이에 싸서 묻고 생무덤을 만들어 누구든지 한 명이라도 살아남으면 동지들의 유해를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기를 맹세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유인에게 전해다오! 여기 군번도 없는 호림용사들이 자유대한을 수호하기 위해 반공전선에서 싸우다 산화한 사랑하는 전우들의 영전에 생존한 동지들이 뜻을 모아 님들의 충혼을 추모하고 저 격전지인 갈림길 마루턱에 돌 하나를 다음어 기리나니 부디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이 나라 이 민족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
980 | 30-1-09 | 장기석선생 해동청풍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성주군 | 장영환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67 | 1936-05-01 | 경상북도 성주(星州)군 벽진(碧珍)면 봉계(鳳溪)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나라가 망하자 성주군수와 경찰서장 등으로부터 일본왕 명치(明治)의 천장절(天長節) 경축식에 참석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한 바 일제경찰이 구인(拘引)하려 하자 일제경찰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당하였다. 1911년 1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결행했으며, 손톱과 발톱을 다 뽑히는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내 목은 베어도 내 뜻을 꺾을 수 없다」고 호령하다가 1911년 1월 5일 단식 27일 만에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 의기에 일제 형리들도 내심 감복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
981 | 17-2-27 | 351고지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4-28 | 강원도 고성군 | 육군 제5861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높이 4.8m | 1957-07-15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육군 제3군단, 제8군단이 351고지 전투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7월 15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동해안 요충지인 월비산(459고지), 208고지, 351고지의 피아공방전은 1951년 7월 15일부터 1953년 7월 1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개전 이래 수십 차례에 걸쳐 국군 제5, 11, 15, 수도사단 용사들과 북한군 제6, 7, 19사단은 월비산 208고지, 351고지를 뺏고 빼기기를 반복했다. 1953년 7월 29일 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전투가 종식되었다. 목표탈환을 눈앞에 두고 전투를 중지해야했던 격전지로 현재의 동해안 일대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전투다. 이 비는 휴전되기까지 동해안의 요충지인 351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참전한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후대에 그 위혼을 전하고자 1957년 7월 15일 제3군단과 제8군단에서 공동으로 현내면 대진리에 건립·관리하여 오던중 1988년 12월 26일 동해안 안보관광지를 조성하면서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어, 그날의 격전지가 직접 바라다 보이는 통일전망대로 이전하였으며 2020년 통일전망대 리모델링 공사에 따라 국군의 합동작전을 통한 국토방위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공군 전투전적비가 있는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6·25전쟁 당시 351고지 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하게 산화한 전몰장병의 영혼을 달래고 당시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사단을 섬멸시킨 전승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
982 | 30-1-42 | 김희규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성주군 | 이호남 | 비석 | 1894 | 1991-11-10 | 김희규선생 유족회는 1991년 11월 10일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98-1에 성주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한 김희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김희규 선생(1894~1959)은 이기정, 송인집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기독교 측 인사들과도 연합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하였다. 4월 2일 시장에는 1, 5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독립만세를 부르자 일본경찰은 해산을 강요하면서 발포하였다. 그래서 선생과 군중들 산 위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선생은 주동인물 등 수많은 시민들과 일경에 체포되었고,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 ||
983 | 31-1-05 | 항일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봉화군 | 서벽초등학교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0 | 1984-12-01 | 1908년 5월 15일 일본군은 서벽리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500여 명이 5월 19일 봉화를 습격하고, 20일에는 영주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영천수비대는 풍기분견소와 주재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서벽전투는 1908년 5월 17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영천수비대는 봉화 오록에서 주실령을 넘어 두내리를 경유해 서벽리로 들어가려 하였고,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는 서벽리 동쪽의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수비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나머지는 주실령을 넘어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서벽전투가 있었던 격전지 자리인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350(서벽초등학교 교정 입구)에 1984년 12월 항일의거기념비를 세워 서벽전투의 승전과 항전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
984 | 17-2-05 | 경찰 전적비(양양군)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양양군 | 속초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46 | 0 | 1992-06-04 | 속초경찰서는 1992년 6월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4-4에 경찰전적비를 건립하여 북한군의 도발로부터 양양지역을 수호하다 전사한 경찰경비대원 32명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1946년 10월 17일부터 1952년 3월 19일에 이르기까지 서면 서림리, 현북면 대치리, 장리, 잔교리, 면옥치리, 현남면 남애3리 등 전투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가 산화하였다. |
985 | 31-1-10 | 이만도선생 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권은희(후손)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42 | 0 | 1948-09-01 | 경상북도 안동(安東)군 예안(禮安)면 하계(下溪)리에서 퇴계(退溪)의 후예로 태어났다. 186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에 지평(指平)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으며, 1876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 때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격렬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양산(梁山)군수로 복직되었을 때에 양산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가렴주구가 심한 관찰사를 면박하여 사과를 받았다. 1882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 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어 의병대장이 되고 부장(副將)에 이중린(李中麟)을 임명하여 안동의 의병대장 권세연(權世淵)과 연합해서 안동지방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조약에 찬동한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리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마침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자 이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으로써 항거하기로 하고 유서를 지어 놓고 단식을 시작해서 24일만에 절명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986 | 33-1-14 | 해강 이겸호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덕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5 | 1965-03-01 | 이겸호 의사는 대한통의부 대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1923년 대한통의부 제1소대 이덕숙, 신형섭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뤘다. 이를 기리고자 기념비를 조성하였다. | |
987 | 17-2-30 | 호국경찰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 8m X 2m X 2m, 탑 높이 10m, 동상 높이 2.5m | 1980-10-21 | 6·25전쟁 당시 영월화력발전소를 사수하기 위해 헌신한 김해수 등 48명의 경찰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988 | 33-1-15 | 도해단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벽산김도현선생숭모회 | 비석 | 의병운동 | 1914 | 0 | 1971-09-03 | 벽산김도현선생숭모회는 1971년 9월 3일 의병활동과 자진 순국한 김도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빠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바닷가)에 도해단(蹈海壇)을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전 박정희 대통령이 쓴 천추대의(千秋大義)가 새겨져 있다. 김도현 선생은 영양의병에 참가, 선성 진영의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순국의 뜻을 품었고 부친의 장례를 마친 뒤 산수암에서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蹈海(도해)'를 결행하였다. 그 날이 1914년 12월 23일 동짓날로, 그의 나이 64세였다. |
989 | 17-2-12 | 현충탑(평창군)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평창군 | 평창군 | 탑 | 6·25전쟁 | 1950 | 탑높이 8m | 1959-10-01 | 평창 하리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평창 출신의 호국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평창군)’을 건립하였다. 평창군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9년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91년 10월 6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에서 평창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평창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90 | 31-1-15 | 기려자 송상도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주시 | 야성송씨종회(송인홍, 사무실:경북영주시하망동548-5) | 비석 | 문화운동 | 1910 | 0 | 1987-11-03 | 송상도(宋相燾:1871~1946)는 당대 거유였던 권상익, 곽종석, 전우 등과 교류하며 퇴계 학맥을 이어가던 한말의 유학자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일찍이 중국의 명나라 말기 망국의 분노 속에 나귀 한필로 중국 전역을 다니며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찾아 기록했던 중국의 ‘기려도사’를 본떠 송상도는 스스로 호를 ‘기려자(騎驢子)’라 칭하고 대한제국말기부터 해방 때까지 전국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채록하여 『기려수필』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에서 순절한 이시원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말의 의병활동 및 안중근 김지섭 윤봉길 등의 사적 등은 물론 고려혁명당사건과 6.10만세사건,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에 관한 사적들까지 수록되어 있다. |
991 | 17-2-38 | 충혼탑(정선군)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정선군 | 정선군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0.8m, 탑 10m | 1970-05-31 | 정선 신월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정선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정선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의 뜻을 모아 1970년 5월 31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6년 6월 6일 현충일에 다시 현재의 위치인 신월리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정선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정선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992 | 31-1-29 | 중산 권원하선생 독립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권철영(자녀)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8 | 1979-08-15 |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년 8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소재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군정서(軍政署)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년 7월에 최재화(崔載華)·조강제(趙强濟)·배승환(裵昇煥)·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남병태(南炳台)·박창호(朴昌鎬)·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하였다. 그는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천청소년운동(全禮泉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993 | 31-1-14 | 항일투사 농고 오하근공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주시 | 오병택(자녀) | 비석 | 3·1운동 | 1897 | 1979-12-17 | 吳夏根은 榮州邑內의 3.1독립만세시위의 주모자로서 거사의 사전준비와 시위에 선봉역할을 하다 大邱地法에서 1년6월형을 받고 옥고하였며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출감후에도 요시찰인물로서 定居住치못하고 동지들과 독립운동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 |
994 | 20-2-16 | 윤옥춘 전공비 | 국가수호 | 2002-11-25 | 대전광역시 중구 | 공원관리 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1-05-10 | 대전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 야외음악당 내에 대전시 출신의 육탄10용사 중 한 사람인 윤옥춘 일등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대전시에서 1971년 5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윤옥춘 일등상사는 충청남도 대전시(大田市) 문화동(文化洞)에서 태어나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여 제1사단 제11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제11연대는 1949년 1월 12일 문산으로 이동하여 38도선경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당시 연대는 제2대대를 38도선 전면인 청단, 연안, 배천, 송악산, 고랑포 일대에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진지구축과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제1대대는 연대후방에서 신병교육을 전담토록 하였으며, 제3대대는 인접 제15연대에 배속시켜 파견중에 있었다. 그리고 연대본부에서는 하사관교육대 1개 중대 병력이 교육훈련중에 있었다. 제2대대가 38도선 전면의 불리한 지형과 적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점차 경비임무를 강화하자, 북한군은 이를 저지하고 계속적인 38도선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1949년 4월 25일 남천점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사단 제3연대의 1개 대대 약 1천명을 송악산 후방의 냉정리에 집결시켜 공격준비를 완료한 후, 5월 3일 미명을 기해 기습남침하여 송악산 일대의 292고지, UN고지, 155고지 및 비둘기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급보를 접한 제11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이를 즉시 보고함과 동시에 제1대대 예하 제3, 제4중대를 급히 제2대대에 예속시키는 한편, 연안 방면으로 행군훈련을 나간 연대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로 긴급 복귀시켜 5월 4일 미명을 기해 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공격지역이 노출된 급경사지역으로 너무나도 불리한 지형이며, 10개 소의 토치카에서 중화기가 불을 뿜고 있어, 공격부대는 7부 능선에서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대장은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아군진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선발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자원한 하사관 교육대의 특공대장 서부덕 소위(당시 계급 이등상사)와 이희복 일등상사(당시 계급 하사) 등 9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이리하여 특공용사 9명의 육탄공격조는 81mm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치하여 만든 육탄공격용 포탄을 휴대하고 12:00를 기해 각자 목표지점을 향해 출발하였으며, 동시에 후방에서는 57mm 대전차포로 특공대의 전진을 엄호하였다. 특공대는 적의 집중되는 기관총사격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맡은 적의 기관총진지에 신속히 돌입하여 자폭함으로써 적의 토치카를 폭파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아군 공격부대는 14:00경 LN고지를 무난히 탈환하였다. 또한 특공대를 지원했던 박창근 하사가 292고지의 적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단독 공격하여 분쇄함에 따라, 사기충천한 제11연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적을 공격하여 292고지 등을 탈환함으로써 송악산지구의 38도선 아군진지를 모두 회복시켰다. 윤옥춘 일등상사는 육탄10용사의 한 사람으로 제1차 송악산지구전투에서 1949년 5월 4일 장렬하게 산화하였으며, 그의 고귀한 희생으로 송악산지구의 주요고지를 모두 탈환하여 국군의 위용을 과시함은 물론 개성지역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52년 10월 15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
995 | 50-1-05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제일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29 | 1954-01-01 | 광주지역에는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과 광주농업학교생들이 1926년 11월 3일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목표로 성진회(醒進會)라는 비밀학생 독서회를 중심으로 독립을 이루기 위한 실천 방법을 상의하고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출발한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했다. 이에 여학생의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가 항의하면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한 데 이어 광주농교, 광주사범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항쟁에 놀란 일제는 휴교령을 내려 일시 잠잠해졌으나, 등교가 시작되면서 학생들이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여 일제의 탄압과 불공평한 처사를 비난하고 구속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운동은 많은 학생과 사회단체 간부들이 구속됨에 따라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광주고보 학생들은 1930년 1월 9일 백지동맹을 일으켜 다시 저항의 불길을 올렸다. 이로 인해 17명이 퇴학당했다. 1월 16일 광주고보에서는 제3차 시위를 계획하다 탄로나 48명이 퇴학당했다. 이와같이 하여 2, 3, 4학년 재적 460명 중 졸업 학생 수는 160명에 불과했다. 광주에서의 학생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이듬해 초까지 전국 194개교에서 5천400여 명의 학생이 참가, 3ㆍ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했다. 광주고보는 광주제일고등학교가 되었는데 교내에 당시의 학생운동을 추념하기 위하여 1954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다.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은 1953년 ‘학생의 날’로 제정되었다가 유신정권 때인 1974년 일시 폐지됐다가 1984년 부활한 후 2006년 11월 국가기념일인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제정되었다. | |
996 | 33-1-03 | 영해 3·1의거 탑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해 3.1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 탑 | 3·1운동 | 1919 | 1983-11-29 |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탑.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읍 장날인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시위대에 참가한 3,000명의 영해면 주민들은 일본 경찰 주재소로 달려가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공립보통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들을 파괴하였다. 이 날의 만세시위가 이튿날까지 계속되자, 오전 11시경 포항 헌병대와 대구의 보병 80연대 병력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하였다. 이 날 시위로 8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96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18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11월 29일, 3·1운동의거탑건립추진위원회는 영해 장날에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 |
997 | 45-2-42 | 백마고지의 영웅 강승우소위 상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한국자유총연맹제주도지회 | 동상 | 6·25전쟁 | 1952 | 1991-07-15 | 제주도 제주시 일도2동에 제주 출신으로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인 강승우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 고강승우소위추모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1991년 7월 15일 동상을 세웠다. 강승우 소위는 1930년 남제주군 성산읍 출생으로 일본 오사카 흥국 산업학교를 졸업한 후 1951년 8월 갑종7기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안영권 일병은 1925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출생으로 1952년 2월 27일에 입대하였으며, 오규봉 일병은 1928년 충남 천안군 성환읍 출생으로 성환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4월 11일 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소총병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도 군사작전 중에서 제9사단이 중공군 1개 군을 섬멸하고 대승리를 거둔 전투다. 철원평야 일대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였던 백마고지는 '한 치의 땅도 거저 얻은 땅이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정전협정을 앞둔 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등 아군과 중공군간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제 9사단은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자 적의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진지를 보강하던 중 적의 집중적인 기습공격을 받아 395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제9사단 제30연대는 즉각 역습을 실시했지만 중공군의 수류탄과 기관총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역습부대인 제30연대 제1중대의 공격마저 실패한 상황에서 오규봉 일등병은 아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목표 60m 측방의 기관총을 멈추기 위해 자동화기 진지로 돌진했고 제1중대 제1소대장인 강승우 소위는 안영권 일등병과 화력으로 오규봉 일등병을 엄호했다. 강승우 소위는 소대장 자신이 직접 TNT와 박격포탄으로 적의 화점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후 기관총진지 7m 전방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폭발물을 투척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강승우 소위는 우측 팔에 총상을 입고 폭발물을 떨어뜨렸고 안영권 일등병이 이를 신속히 주워 적군에게 투척하였다. 그리고 적 진지에 근접한 오규봉 일등병도 적진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산화함으로써 중대가 공격을 재개해 목표를 탈환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6·25전쟁 사상 최대의 격전지로 불린 철의 삼각지내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돌격을 결행한 3명의 용사는 이후 백마 3군신으로 불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1953년 7월 1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고 강승우 소위는 중위로, 오규봉·안영권 일병은 하사로 추서하였다. | |
998 | 33-1-13 | 백운 주진수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초등학교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875 | - | 1959-03-01 | 주진수는 일명 진수라고도 하는데, 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울진에 만흥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9년 신민회 강원도 대표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 모집을 위하여 1911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및 경학사 설립에 노력했다. 1914년 대한국민의회 회원이 되고,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926년 이규풍·최소수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열린 민족혁신파 대표자대회에 대표로 참석하고, 이 해 고려혁명당 조직에 가담했다. 주진수는 1936년 9월 16일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9세를 일기로 만주 영안현 해림에서 사망하였다. 주진수의 구국 독립 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백운선생기념사업회에서 1959년 3월 1일 울진초등학교 정문 왼쪽에 기념비를 세웠다. |
999 | 26-2-02 | 위령탑(천안인의 상)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시설관리공단 | 탑 | 기타 | 1991 | 0 | 1991-12-27 | 천안시 유량에 1991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1,069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천안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애국심을 기리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1년 12월 27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천안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천안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00 | 33-1-05 | 4.13흥부만세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군 광복회 | 탑 | 3·1운동 | 1919 | 1995-08-15 | 건립추진위원회는 울진 흥부장터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울진군 북면 부구리 150-12에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오후 1시 울진군 북면 흥부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병항(1891~1966)·남병표(1894~1955)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참여자가 500여 명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병항과 남병표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날 밤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경선 노인이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을 꾸짖자 김일수(1878~1927) 등이 칠보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징역 7월에서 4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
1001 | 33-1-12 |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평해황씨문중 | 비석 | 문화운동 | 1875 | 1976-12-12 | 황만영은 경북 울진 태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 하고 있던 성익현 의진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에 대흥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 등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설립된 신흥학교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 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 주진수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 독판 이상룡이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 |
1002 | 20-2-29 | 충혼비(연산면) | 국가수호 | 2004-12-27 | 충청남도 논산시 | 연산면 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5 | - | 1955-08-15 | 6.25당시 대둔산 공비토벌 작전중 애국청년들이 작전에 참가하 여 장렬히 산화하니 주민들은 경찰관과 애국청년들의 영령을 추 모하고 추앙하고저 연산공원에 순국동지 충혼비와 충혼비를 세우 게 되었다. |
1003 | 50-1-02 |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 동상 | 3·1운동 | 1919 | 1995-01-01 | 광주 3·1만세운동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다 일본경찰에 끌려가 옥고를 치른 광주수피아여학교 출신 23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수피아여중고총동창회가 광주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1995년 1월 1일 건립했다. 동상 좌대에는 박순애, 이태옥, 김양순, 윤혈녀, 김덕순, 조옥희, 이금봉, 하영자, 강화선, 이라혈, 최수향, 김만순, 홍순해 등 2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으며, 옆면은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있다. | |
1004 | 17-2-06 | 해양경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속초시 | 속초해양경찰서 | 탑 | 기타 | 1986 | 높이 12.33m, 폭 4.62m | 1986-12-30 | 해양경찰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해안 치안 및 질서 유지, 어로 보호 활동 전개, 대간첩 작전 임무를 수행하며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양경찰청은 1986년 12월 30일 강원 속초시 장사동 482-3에 각종 임무수행 중 꽃다운 나이에 젊음을 바친 해양경찰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해양경찰탑을 건립하였다. 처음에 118위의 위패를 봉안했는데, 해가 지나면서 사망자수가 늘어 현재는 143위(경찰관 114위, 전투경찰순경 29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1005 | 15-2-07 | 용문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용문면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79-02-10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용문산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아낸 제6사단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교통부에서 1979년 1월 1일 건립했다. 용문산지구 전투는 1950년 10월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 용문산에서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것을 한국군 제6사단 장병과 학도병들이 육탄으로 사수하여 적을 섬멸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장렬한 전투로 나라를 지킨 장병들과 학도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뜻을 받들고자 비를 세웠다. 1951년 용문산 북쪽 산속에서 국군은 적과 대치하여 육탄전으로 전투사상 유래없는 격전을 거듭하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분쇄하여 적의 남침을 저지하였고 중부전선을 끝까지 사수하여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
1006 | 50-1-07 | 안중근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시립미술관 | 동상 | 의열투쟁 | 1879 | 1995-01-01 | 안중근의사 동상은 안중근의 애국정신을 지역민과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심어주고자 1995년 4월 14일 안씨 문중과 시민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높이 7m의 규모이다. 안중근의사 동상이 있는 중외공원에서는 매년 애국심 함양을 위한 백일장 행사 등이 개최되고 있으며 중외공원에서는 안중근의사 동상 외에도 광주 전남순국학생위령탑, 광주3·1독립운동기념탑 등이 있다. | |
1007 | 20-2-19 | 충령탑(논산시) | 국가수호 | 2003-01-30 | 충청남도 논산시 | 논산시청 주민생활지원과 | 탑 | 기타 | 1994 | 0 | 1994-12-30 | 논산시 출신 순국선열과 전몰군경 위패를 모신 곳임. 1994년 12월 추모의 탑(면적 130.5㎡, 높이 10m)을 세워 자라나는 후세에게 호국정신을 일깨워 굳건한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조성. 그 동안 위패봉안 대상이 증가되어 2003년 10월 현재 931위의 위패가 봉안됨. 이 탑은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정신을 바탕으로 비상하는 날개의 형태를 취하고, 단계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논산시의 발전적인 이미지를 표현하였으며, 전면 중앙에 호국투쟁 장면을 부조로 표현하고 양면 날개에는 영원한 미래지향적인 상징으로 십장생 등을 조각하고 순국선열의 정신을 이어받아 약진하는 후손들의 모습을 군상(환조)으로 표현하여 순국의 영혼을 기림 |
1008 | 50-1-25 | 3·1운동 기념비(강진 남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강진군 |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 비석 | 3·1운동 | 1919 | 1992-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강주형·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의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제문(金濟文, 1888~1935),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진 지역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8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 |
1009 | 50-1-10 | 강진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강진군 | 강진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976-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황호경(黃鎬京) 등의 사전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진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6년 5월 9일 이 비를 세웠다. | |
1010 | 50-1-09 | 죽봉 김태원의병장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서구 | 죽봉김태원장군의적사업보존위원회 | 동상 | 의병운동 | 1870 | 1998-12-03 | 이곳은 1906년 함평과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경과 40여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호남의병의 대표적 의병장 죽봉 김태원장군의 숭고한 애국 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건립하였다 | |
1011 | 20-2-30 | 자유수호 순국지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4-12-27 | 충청남도 논산시 | 한국자유총연맹논산시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90-05-01 | 논산시 관촉동에 1990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 논산지부에서는 이재문, 최종만, 박용규, 유병인, 조동선 등 이곳 출신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위국 헌신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90년 5월 1일 위령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논산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수호신이 되었다. 논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12 | 50-1-14 | 죽봉김태원장군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녹지과 | 비석 | 의병운동 | 1870 | 1975-01-01 |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입 선봉장 활약하며 활발한 의병활동 전개 | |
1013 | 50-1-27 | 애국지사 광산김공제중 독립운동 공훈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담양군 | 김선웅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893 | 1991-07-01 | 김제중(金濟中, 1893~1950)은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 선무대를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1920년 김성현(金聖炫)·문동길(文東吉) 등과 함께 신덕채(申德采)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밀지를 받아 같은 해 4월부터 6월 사이에 담양·곡성 지역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1921년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광산김씨 문정공파 종중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서 1991년 2월 7일 이 비를 세웠다. | |
1014 | 45-2-35 | 충혼탑(애월읍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애월읍 | 탑 | 기타 | 1948 | 탑높이 9.3m (부조단 길이 6.2m, 높이 2m) | 1992-12-01 | 4·3사건 및 6·25당시 조국과 향토를 방위하다가 숨져간 애월읍 출신 순직경찰 및 전몰장병 영령들의 얼을 추모하고 넋을 새기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1015 | 50-1-22 | 추월산 격전지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군 가마골관리사무소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1908-11-25 | 1907년 12월 27일 한말 기삼연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전투한 추월산 격전지. 기삼연은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2년 봄에 다시 기병코저 하다가 평리원에 구금되었으나 옥리의 동정으로 탈옥할 수 있었다. 1907년 9월 영광의 수록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기삼연 의병장은 전해산·이석용·김준·이남규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상소문을 작성하여 예식원(禮式院)에 보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기사를 보내 창의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어 고창의 일본군을 밤을 타고 습격하여 섬멸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후 기삼연 의진은 천연암벽으로 이루어진 천연 요새지 추월산성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1907년 10월에는 고창과 정읍, 11월에는 부안에서 연승을 거둔 기삼연부대는 이어 광주와 담양을 습격하였다. 이에 일본군 대부대는 12월 27일 밤, 눈비가 뒤섞여 내리는 틈을 타 추월산 주둔지를 습격하였다. 일본군과 기삼연의병부대 사이에 혈전이 벌어졌으며 피차간에 40~50명씩의 전사자를 발생하였다. 기삼연 의병장도 일본군의 포탄에 부상당하여 순창으로 후퇴하였다. 1972년 1월 29일, 추월산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 |
1016 | 50-1-21 | 신지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21 | 전라남도 완도군 | 신지면 | 탑 | 3·1운동 | 1891 | 1994-01-01 | 이 탑은 1994년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669에 신지면 출신 애국지사 임재갑, 장석천, 김정상 3인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을 후세에 알려 자라나는 2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하고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임재갑(1891~1960)은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1927년에 신간회 완도군지회장을 지냈다. 장석천(1903~1935)은 1928년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였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정상(1894~1965)는 신지중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다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신간회 활동에 앞장섰다. | |
1017 | 45-2-40 | 충혼탑(한림읍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한림읍 | 탑 | 기타 | 1990 | 1990-01-01 | 한림읍 한림공원 내에 제주 4·3사건과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북제주군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의 성금을 모아 1990년 5월 24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제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제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18 | 20-2-13 | 대둔산 승전탑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논산시 | 논산 경우회 | 탑 | 기타 | 1950 | 0 | 1986-06-23 | 충남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에 6·25전쟁 직후 6년간 벌어진 공비토벌 작전으로 희생된 호국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충남지방경찰청에서 1986년 6월 23일 탑을 건립하였다. 1950년 9월부터 1955년 1월까지 약 6년간 빨치산과 수백 회의 혈전을 거듭하며 대둔산 지역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전투경찰대원들은 조국수호와 향토방위의 일념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용전분투하여 사살 2, 287명, 생포 1, 025명 이외에 다량의 무기탄약과 장비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작전 중에 경찰관, 의용경찰, 애국청년 등 1, 376명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였다. 충청남도 경찰청에서는 당시 격전지였던 대둔산 기슭에 승전탑을 건립하여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의 전공을 길이 선양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충절의 교육장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했다. |
1019 | 50-1-24 | 3·1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신호섭(유족대표) | 사당 | 3·1운동 | 1919 | 1989-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모현리 유지 유상설·고용석·정병모·신태식 등의 주도로 마을 주민 200여명이 ‘대한독립기’라고 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헌병대가 출동하여 유상설·고용석·신진식 등 주동자를 체포해 가자 다음날도 100여명의 마을 주민이 만세시위를 하며 사가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시위로 고용석(高龍錫, 1895~1950), 박광우(朴光又, 1866~1940), 신국호(申國浩, 國洪, 1990~1924), 신상우(申商雨, 1892~1981), 신태식(申台植, 1890~1944), 오상구(吳相九, 1891~1942), 유상설(柳相卨, 1890~1943), 유상순(柳相淳, 1876~1932), 유상학(柳相學, 1882~1948), 정병모(鄭秉謨, 1872~1945)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장성 지역 3·1사우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9년 1월 1일 이 사우를 세우고 13인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 |
1020 | 50-1-16 | 3·1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972-09-3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7일 송주일·조병렬 등이 주도하여 소룡리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3월 21일에도 교사 정선유와 학생 100여명과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3, 4일에도 모현리 유지 유상설·고용석·정병모·신태식 등의 주도로 마을 주민 200여명이 ‘대한독립기’라고 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하고, 사가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시위로 고용석(高龍錫, 1895~1950), 박광우(朴光又, 1866~1940), 신국호(申國浩, 國洪, 1990~1924), 신상우(申商雨, 1892~1981), 신태식(申台植, 1890~1944), 오상구(吳相九, 1891~1942), 유상설(柳相卨, 1890~1943), 유상순(柳相淳, 1876~1932), 유상학(柳相學, 1882~1948), 정병모(鄭秉謨, 1872~1945)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열사장성기념사업회가 장성출신 3·1운동열사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1972년 9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 |
1021 | 50-1-19 | 기미독립선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해남군 | 해남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946-03-01 | 해남보통학교 학생 김규수는 1919년 4월 1일 해남보통학교의 기숙사로 김한식·임영식·신건희·윤옥하 등을 찾아가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만세시위를 제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거사일은 4월 6일의 해남 장날로 정했고 천과 종이로 만든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고 신건희가 기초한 독립선언 광고문을 등사하였다. 4월 6일 오후 1시경,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 광고문 등을 감추어 가지고 시장으로 간 해남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광고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상인들과 주민들이 이에 환호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해남보통학교 생도들이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으로 나섰고, 장터에 모였던 사람들도 이를 따라 나섰다. 일경은 이를 폭력 진압하고 학생들을 대량 검속하였다. 해남군은 1946년 3월 1일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346(서림공원내)에 해남군민의 기미독립운동을 기리고 민족정기를 후손에 전하기 위해 기미독립선언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1022 | 50-1-18 | 지강 양한묵선생 순국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해남군 | 해남군 | 비석 | 3·1운동 | 1862 | 1991-11-30 | 전남 해남 출신으로써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한 지강 양한묵 선생을 추모 | |
1023 | 55-1-08 | 오봉정사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구례군 | 임병곤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33 | 5,107㎡ | 1915-03-01 | 경당 임현주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오봉정사.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임현주는 면암 최익현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항쟁을 하였다. 남원·운봉·정읍·태인·순창·곡성·영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와 탄환·군량미 등을 모으며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창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서울 용산 조선주차사령부로 끌려가 군법재판에 회부된 임현주는 태형 100도에 처해져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다. 석방된 후 임현주는 전 재산을 처분하여 1915년 3월 오봉산 기슭에 봉산사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면암 최익현을 배향하였다. 이 때 오봉정사도 함께 건립하였다. 임현주는 이 곳에서 후학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심어주면서 여생을 바치었다. 그가 서거한 후에 제자 270명은 봉산계를 조직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그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하였다. |
1024 | 55-1-06 | 의재 기산도의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고흥군 | 기노식(유족, 자) | 비석 | 의병운동 | 1869 | 비석 | 1994-12-02 |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11.18.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기도, 3.1만세운동 주도 등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일제의 가혹안 고문과 장기옥고로 불구가 되어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의재 기산도의사의 애국충정과 기백을 추모 |
1025 | 20-2-23 | 국가유공자비(추부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추부면 | 비석 | 기타 | 1993 | - | 1993-04-03 | 금산군 마전리 추부면사무소 내에 이 고장 출신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추부면은 김금영, 박명하, 강달성, 김상우, 박찬표 등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3년 4월 3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추부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1026 | 45-2-39 | 충혼탑(한경면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한경면 | 탑 | 기타 | 1950 | 1994-01-01 | 한경면 용수리에 제주 4·3사건과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북제주군은 이곳 출신으로 산화한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8년 6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94년 1월 현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한경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한경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27 | 42-2-05 | 거제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제시 | 거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3-06-06 | 거제시는 1983년 6월 거제시 고현동 산 59-7번지에 6·25전쟁 당시 산화한 거제시 출신 1, 000위의 호국영령을 봉안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위훈을 후세에 전승하기 위하여 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
1028 | 55-1-16 | 황매천 선생 휘현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향교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55 | 비석 | 1966-01-10 | 이 비는 매천 황현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6년 1월 10일 건립되었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 운경(雲卿), 호 매천(梅泉)이다. 1855년 12월 11일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이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이다. 왕석보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이후 서울로 거주하여 이건창 등과 교우했고 1885년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대탄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 구럐례로 낙향하여 구안실이라는 작은 초가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여 황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과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 4편을 남겼으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사를 담은 <매천야록>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되어 한말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1962년 황현 선생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029 | 33-1-17 | 산남의진 정대장 양세출신 충효동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유족 정대영 | 비석 | 의병운동 | 1843 | 1988-01-01 | 구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정환직(1843~1907)과 정용기(1862~1907) 부자의 출생지인 영천시 자양면 검단리를 충효동이라 고쳐 부르고, 정씨 부자의 숭고한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본보기로 삼고자 1988년 5월 10일 자양면 충효리 626번지에 충효동사적비를 건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은 정환직 선생은 큰아들 정용기와 함께 1906년 3월 영천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산남의진을 일으켰다. 정용기 대장은 9월 1일 영일군 죽장면 입암에 포진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정용기 대장을 비롯하여 의진의 핵심부장과 의병 대다수가 전사하였다. 아들의 순국소식을 들은 선생은 직접 의병장으로 나서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서울진공작전의 일환으로 산남의진을 관동지방으로 북상시키던 중 1907년 11월 청하면에서 일본군에게 피체되어 총살당하였다. | |
1030 | 20-2-06 | 의혼탑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진산면 | 탑 | 6·25전쟁 | 1950 | - | 1978-12-01 | 금산 읍내3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진산면 출신 무명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의혼탑’을 건립하였다. 진산면은 김형복, 임창덕, 유영기, 이진우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용기와 뜨거운 향토애를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8년 12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진산 청장년들은 공산 무리의 침략을 막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군번도 계급도 없이 대둔산, 600고지, 건천리 등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산화했다. 진산면에서는 매년 9월 15일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31 | 45-2-38 | 충혼탑(조천읍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조천읍 | 탑 | 기타 | 1962 | 1962-01-01 | 제주 조천읍 신흥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북제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북제주군은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2년 9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93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조천읍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조천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32 | 53-1-11 | 항일독립 유공인사 숭모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무안군 | 무안군 | 비석 | 기타 | 1993 | 기단 6.25m, 탑높이 2m | 1993-08-15 | 일제 침략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 무안군 출신들의 의병활동,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광복군 참여 등을 하신 독립지사 김종성 외 17명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 |
1033 | 55-1-05 | 애국지사 송계명 선생 구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고흥군 | 송재현(손자) | 비석 | 의병운동 | 1854 | 비석 | 1995-04-01 | 송계명은 전남 고흥군 동강면 윤리 축내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전남 보성에서 담산 안규홍·김성택·의제 송기휴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보성의 파청전투와 동복의 운월치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1909년 8월 16일 일본군에 피체되어 잔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동강 주재소 안에서 북향사배하고 스스로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송계명선생구국기념비는 애국지사 송계명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에 전승하기 위해 1995년에 건립되었다. |
1034 | 20-2-22 | 우리고장 국가유공자 기념비(금성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성면 | 비석 | 기타 | 1993 | - | 1993-06-05 | 금성면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3년 6월 5일 충남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157-5(금성면사무소)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1035 | 55-1-03 | 의사 안공 파청승첩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보성군 | 안병진(증손) | 비석 | 의병운동 | 1907 | 기단 10m 높이 1.75m | 1947-04-15 | 안규홍은 비록 배우지 못하여 문자를 몰랐으나 천성이 뛰어나고 결백하며 과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농민군이 그를 따랐다. 이들 안 담살이 의진이 보성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병들이 보성군 조성(鳥城)·벌교(伐橋)·순천(順天)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포위 섬멸전을 전개하려 하였다. 안규홍은 평소 초로 지리(樵路地理)에 밝은지라 일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적이 정시(定時)에 출동하여 수색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미리 보성 동쪽 8키로미터 떨어진 파청(巴靑)의 험한 지점에 복병을 마련해 두었다. 마침 일대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미도(永戶)·히라이(平井)의 두 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 복병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적병 부대장들이 쓰러지고, 전군이 궤멸하여 의병 부대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후 다시 대원산(大院山)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파청대첩(巴靑大捷)이다. |
1036 | 45-2-36 | 충혼탑(추자면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추자면 | 탑 | 기타 | 1995 | 1995-01-01 | 추자면 영흥리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추자면 출신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북제주군은 추자면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2년 6월 1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95년 1월 현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위기 시 추자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추자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37 | 45-2-37 | 충혼탑(우도면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우도면 | 탑 | 기타 | 1996 | 1996-05-27 | 제주 우도면 충혼묘지 내에 1996년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북제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북제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6년 5월 27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북제주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우도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38 | 55-1-13 | 독립유공자 성암 박창규장로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박병주 | 비석 | 문화운동 | 1880 | 비석 | 1983-04-12 | 1940년 4월 기독교교회 전도사로 신사참배거부 활동을 박창규장로를 추모하기위해 건립하였다. 일황불경죄 및 일본국체변혁선동죄로 피체되어 1942. 9. 30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기도 하였다. |
1039 | 45-2-14 | 충혼비(성산읍 수산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수산1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6-12-01 | NULL | |
1040 | 55-1-01 | 낙안3·1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2-01 | 전라남도 순천시 | 김귀지 | 탑 | 3·1운동 | 1919 | 8.5m | 1956-02-01 | 이 비는 1919년 4월 낙안 및 벌교장터에서 도란사(桃蘭社), 이팔사(二八社) 등 구국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경찰에 피체된 애국지사 27인 등을 위시한 지역 주민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추진위원회가 1956년 2월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60-1번지(낙안민속마을 앞)에 건립하였다. 안호형(1873~1948)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결사투쟁을 계획하고 이병채·안규휴·안주환·오병원·김규석·김종주 등과 함께 도란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또한 이병채 등은 김규석을 비롯한 청장년 33인으로 이팔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하였다. 김규석 등은 4월 9일 벌교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9일 오후 1시 30분경 김규석 등 이팔사 대원들은 장좌리 아랫 시장에 모여 앞장서서 대한독립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4월 13일 도란사 결사대원들도 낙안읍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워 행진시위를 하다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시위가 중단되었다. 이 시위로 도란사, 이팔사 결사대원 27인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
1041 | 45-2-30 | 6·25 참전 기념비(신양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양리노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0-01-01 | 신양리원로회는 1990년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186-2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으로 위태했던 국토와 민족을 구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에 심신을 바친 신양리 출신 6·25참전용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1042 | 52-1-02 |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청년회의소 회장 박준길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65-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방극용·형갑수 등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과 헌병이 무차별 발포하여 방진형(房鎭馨, 미상~1919), 방양규(房亮圭, 1879~1919), 방명숙(房明淑, 미상~1919), 김홍록(金洪祿, 1895~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황찬서(黃贊西, 1873~1919), 정한익(丁漢翼, 1890~1977) 등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해근(金海根, 1860~1946), 박정석(朴正錫, 1897~1933), 유창근(柳昌根, 1874~1938),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형기(李炯器, 1884~1936) 등 20여명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와 남원지역 청년회의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4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1043 | 45-2-01 | 충혼비(표선면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표선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3-04-05 | 서귀포 표선리에 1953년 6·25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산화한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상군회 표선면 지회는 이곳 출신 강석하, 홍태욱, 강정민, 김용배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3년 4월 5일 충혼비를 세웠다. 2007년 3월 6일 성읍리 현 위치로 이전했다. 6·25전쟁 기간 표선면 출신의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하나 뿐인 생명을 바쳤다. | |
1044 | 20-2-07 | 의혼비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성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1-01-01 | 충남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에 있는 의혼비. 금산 출신의 이동규선생을 비롯한 20여명의 순국희생을 기리고자 1971년 건립하였다. |
1045 | 53-1-07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비석 | 해외운동 | 1886 | 탑 2.4m, 기단 0.88m | 1984-06-01 | 김철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교통부차장, 교통부총장대리, 군무장, 재무장, 무임소장, 국무원 비서장등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봉창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폭살 의거를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1934년 중국 항주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1046 | 45-2-28 | 충혼비(표선면 세화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세화1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3-04-01 | 서귀포시 세화리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국가수호를 위해 산화한 현우서, 김시준, 현대순 등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을 건립하였다. 세화1리 4H연합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충혼비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4월 세웠다. 6·25전쟁 기간 세화리 젊은이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마을주민들이 충혼비 자리에 도로 개설을 위해 2001년 6월 6일 비를 마을 입구로 이전했다. | |
1047 | 45-2-29 | 순직비/충혼비(표선면 세화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세화2리 | 비석 | 기타 | 1948 | 0 | 1957-06-01 | 서귀포 세화2리에 1957년 4·3사건 토벌 과정에서 순직하거나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세화 2리 출신 김동곤, 공영춘, 김창수, 최군창 등 15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순직비와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세화2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을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7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세화 2리 젊은이들은 6·25전쟁 이전 혼란기를 거쳐서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하나 뿐인 생명을 바쳤다. |
1048 | 53-1-08 | 순국선열 황덕환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비석 | 해외운동 | 1895 | 높이 1.8m, 폭 0.6m | 1985-11-01 | 황덕환(黃德煥, 1895~1929)은 1916년 10월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건너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2년 3월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1925년 3월 신민부에 참여했으며, 별동대장으로 활약하다가 1927년 12월 일제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8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여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한인을 괴롭히는 일인 공장장을 살해하여 사형언도를 받아 1929년 9월 20일 순국했다. 후손이 주축이 된 순국선열 황덕환선생 추모비건립위원회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1985년 11월 이 비를 세웠다. |
1049 | 53-1-09 | 의병장 이화삼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영광군 | 박종일(외증손) | 비석 | 의병운동 | 1866 | 높이 1.8m, 폭 0.6m | 1987-08-29 | 전남 장성(長城) 사람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장성군(長城郡) 삼계면(森溪面) 자초리(紫草里)에 있는 일간 50여 가구의 장정과 의병을 일으켜 맹주가 되어 삼북주재소(三北駐在所)를 습격하고 1906년 3월 군율작전, 비린내 작전 등 수십차례에 걸친 전투를 하였다. 1906년 봄 의병장인 이대극(李大克, 淳植이라고도 함)이 영광(靈光)에서 기병하여 일군을 쳐부수고자 기삼연(奇參衍) 의병진영과 합세하여 기삼연을 맹주로서 추대하고 이대극이 부의병장이 되어 법성포(法聖浦)·무장(茂長)·장성(長城) 등지에서 전투할 때 함께 참전하였다. 1907년 10월 장성으로 회군(回軍)한 좌익군은 기삼연이, 그리고 그는 우익군의 이대극과 함께 어등산(魚登山) 전투를 거쳐 석대산(石臺山)에서 의병진영을 정비하고 휴식하던 중, 기삼연이 패전하여 일본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1908년 3월 19일 김 준(金準)과 의진을 재편성하여 이대극을 맹주로 추대하였으며, 어화삼(魚化三)을 참모로 하고 이백겸(李伯謙)은 선봉장(先鋒將), 그리고 그는 후군장(後軍將)으로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8년 4월 18일 무장(茂長)·고산(高山)등지에서 일본기병을 쳐부수고 동년 5월 8일에는 불갑산(佛甲山) 연실봉(蓮實蜂) 전투에 참전하였다. 또한 9월 12일 고창(高敞) 석곡(石谷)에서 대혼전을 치르다가 이백겸 의병장이 패전하자 강필주(姜弼周)로 하여금 대항케 하는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0월 20일 무장(茂長) 장자산(莊子山)에서 전투 중 강필주가 전사하고, 이대극이 퇴군한 후 1909년 4월 3일 순국하게 되자 스스로 의병진을 수합하여 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1월 영광(靈光), 백양산(白羊山) 등지에서 많은 전투 성과를 거두었으며 본진영과 합류하여 대혈전을 벌이던 중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1910년 1월 2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050 | 53-1-12 | 함평 3·1만세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탑 | 3·1운동 | 1919 | 1989-04-08 |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함평읍에서도 거사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인행, 이윤상, 김기택 등 24명의 열사 주도하에 4월 8일 문장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에 수백명의 군중들이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소리로 진동하였고 문장리에 있던 헌병분소를 기습하고 함평, 영광, 송정리 방향으로 각각 행진하였다 | |
1051 | 45-2-08 | 충혼탑(대정읍)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대정읍 | 탑 | 6·25전쟁 | 1950 | 1953-04-01 | 대정 하모리에 195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대정면 출신 육군 중위 양상호 외 68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대정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면민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3년 4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정 군민은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정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52 | 52-1-15 | 영광정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순창군 | 쌍치면장 | 기타 | 민족주의운동 | 1910 | 0 | 1921-01-01 | 영광정(迎狂亭)은 이 지방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원중이 7인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 1921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산6 건립한 것이다. 한일합병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김원중은 애국동지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의병투쟁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 마치 미친 사람행세를 하여 왜인들의 감시를 피했다고 하여 영광정(迎狂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처마 끝에는 태극팔괘를 새겨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굳센 의지를 담았다. 6·25전쟁 때 현판이 분실되었을 뿐 그대로 보존되어 오다, 일부 기둥과 현판을 보수하였다. |
1053 | 45-2-18 | 충혼비(화순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화순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7-05-01 | 서귀포 화순리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성부훈, 강주흥, 지창익, 양해룡 등 13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화순리 재향군인회원들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57년 5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화산리 젊은이 또한 조국과 향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꽃다운 목숨을 바치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 |
1054 | 52-1-21 | 일문 9의사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유민상(고흥유씨 후손) | 비석 | 의병운동 | 1982 | 0 | 1982-05-09 |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활약한 완주 비봉 내월리 출신 고흥유씨 가문 9의사 유중화, 유연청, 유영석, 유연풍, 유태석, 유연봉,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 |
1055 | 45-2-19 | 충혼비(대평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대평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57㎝, 세로 20㎝, 높이 150㎝ | 1956-01-01 | 6·25동란 중 전사한 대평리 출신 육군 이등중사 양태윤외 9명의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대평리 재향군인회에서 건립하였다. |
1056 | 45-2-21 | 충혼비(덕수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덕수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좌: 가로48㎝,세로17㎝,높이145㎝, 우: 가로48㎝,세로17㎝,높이117㎝ | 1955-03-20 | 6·25전쟁의 전승을 염원하다 숨진 덕수리 출신 호국영령과 4·3사건 당시 부락을 사수하기 위해 공비들과 교전 중 순직한 경찰 및 민간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50년(우)과 1955년(좌) 덕수리민 일동이 건립하였다. |
1057 | 45-2-23 | 충혼비(서광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서광서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49㎝, 세로 20㎝, 높이 120㎝ | 1955-01-06 | 조국통일을 위하여 멸공전선에 몸 바치신 서광리 출신 육군 소위 이영평등 24명의 호국영령들과 제주 4·3사건 당시 지역방어를 하다 애석하게도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경찰관들을 기리기 위하여 1955년 서광리민 일동이 광해악 서쪽 중산간도로변에 건립하였다. |
1058 | 45-2-24 | 충혼비·순직기념비(감산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감산리 청년회 | 비석 | 기타 | 1950 | 충혼비(W60㎝×B28㎝×H193㎝), 순직기념비(W60㎝×B28㎝×H193㎝) | 1956-05-05 | ○ 충혼비: 감산리 출신 6·25전사자 육군 이등상사 강성화외 1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감산리 재향군인회에서 건립하였다. ○ 순직기념비: 제주 4·3사건 당시 부락을 사수하다 순직한 보향대장 강문봉외 15명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1059 | 52-1-026 | 소충사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 사당 | 의병운동 | 1878 | - | 1957-01-01 | 소충사는 이석용 의병장외 28의사의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절하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 계승, 임실출신의 독립유공자 묘역과 유물을 한곳에 모신 곳이다. 지의동과 동룡동에 있는 28의사의 묘소를 1988년 5월 18일 성수면 오봉리 산1번지로 임시 합장하였다가 1995년 11월 소충사를 조성하고 여기에 안장하였으며 정재 이석용장군의 묘도 전남 영암군 월출산에서 같은 해 유족들의 천묘로 28의사와 함께 소충사에 안장 되었다.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소충사에 안장된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김동관·김사범·김여집·김춘화·김치삼·김학도·승려 덕홍·승려 봉수·박달천·박만화·박운서·박인완·박철규·허천석·서상열·서성일·성경삼·양경삼·여주목·윤정오·오병선·이광삼·정군삼·최덕일·최일권·한득주·한사국·허윤조 이석용은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한 출중한 인물이다. 을사조약으로 일제가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자 성수산 골짜기의 상이암에 동지를 규합하여 1907년 8월 28일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장의 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는데 당시 의병의 수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2년에 걸쳐 진안에 주둔한 왜군을 격파하고 영광, 고창, 용담 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당하지 못하고 1908년 4월 임실에서 크게 패하자 의병들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정동석의 배반으로 1913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37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
1060 | 17-2-33 | 통천군 순국동지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 높이 1.1m , 비 높이 6.25m | 1969-10-15 | 속초 동명동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140위의 통천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통천군 순국동지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통천군민회는 통천군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군민의 뜻을 모아 1969년 10월 15일 준공하였고, 1990년 5월 30일 개축하였다. 6·25전쟁 기간 통천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속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61 | 52-1-22 | 오수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수 | 탑 | 3·1운동 | 1919 | 0 | 1991-01-01 | 임실군 오수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참가자들을 기리는 기념탑.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오수보통학교 교사인 이광수는 서울에서 천도교 대표 오세창을 만나서 만세운동에 관한 지시를 받고 내려왔다. 3월 10일 10시경 교사 이광수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으나 일본인 교장과 다른 교사들의 만류로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바로 진정되었다.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3월 12일 임실읍 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수 지역의 유지인 이기송 등은 3월 23일 오수 장날을 기하여 오후 2시에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일시에 8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을 이끌던 이기송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몰려갔다. 그의 석방을 요구하자 기세에 눌린 일본인 순사는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불어났으며 시위군중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를 점령하였다. 이날 저녁 남원 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병력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1991년 1월 1일 오수 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임실 전역에서 전개된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
1062 | 52-1-27 | 3·1운동 기념비(장수 산서) | 독립운동 | 2003-12-08 | 전라북도 장수군 |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장(김진식)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5-12-01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 장날 박정주·안성섭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23일 사계리에서도 주민 20여명이 사계산에서 산상 시위를 벌이고, 양일표·빈영섭·유동렬 등의 준비로 3월 26일 산서면 오성리에서 주민 수백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들 시위로 김형택(金炯澤, 1891~1950), 박기영(朴琪永, 1893~1938), 박정주(朴政柱, 1871~1921), 빈영섭(賓永燮, 1887~1936), 신동개(申東開, 1893~1939), 안성섭(安成燮, 1880~1944), 양일표(梁日杓, 1880~1959), 유동렬(柳東烈, 1895~1974), 이길선(李吉善, 1894~1957), 이상욱(李相煜, 1894~1926), 이화백(李化伯, 1885~1941), 장재만(張在萬, 1894~1956), 정호현(丁豪鉉, 1890~1940)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산서면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5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1063 | 52-1-18 | 황극단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 이정하 | 비석 | 의병운동 | 1878 | 0 | 1955-01-01 | 이석용 의병장을 비롯한 순국선열의 추모비를 세운 제단이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진안 마이산 주필대에서 거병하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했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진안 시동, 마근현, 수류산, 관촌역,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2년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그 해 4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순국하기 전 아들인 독립운동가 이원영에게 순국선열을 위한 추모 제단을 세워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1955년 1월 1일 이원용은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이석용 의병장 순국비, 고종황제비, 대한의장비,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 백범안동김공구지비, 대한장의순국5열사(안중근·이봉창·윤봉길·이준·백정기)기적비, 광복정령33인추억비 등 모두 5기의 비를 세우고 황극단을 세웠다. |
1064 | 52-1-13 | 전영상선생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마령면장,전병철 | 비석 | 3·1운동 | 1885 | 0 | 1995-01-01 |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065 | 52-1-16 | 대한이산 묘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진안군 | 이병기 이사장 | 사당 | 의병운동 | 1946 | 0 | 1946-01-01 | 이산묘는 단군, 태조, 세종, 고종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 조선 개국이후 충신과 유림 40위의 위패를 모신 영모사,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항거한 애국선열 34위의 위패를 모신 영광사로 이루어져 있다. 유림회는 이들을 추모하고 제사하기 위해서 1946년 이 사우를 세웠다. |
1066 | 45-2-12 | 충혼비(성산읍 )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성산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4-11-05 | 서귀포 고성리 충효묘지 내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성산읍 출신으로 산화한 호국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성산읍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4년 11월 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성산읍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성산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67 | 52-1-12 | 둔암 오기열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마령면장 | 비석 | 기타 | 1888 | 0 | 1995-01-01 | 전라북도 진안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전영상·김구영·황해수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068 | 10-2-09 | 이탈리아 의무부대 6·25전쟁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서울우신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1 | 0.97m * 0.3m * 0.87m | 1999-08-10 | 6.25전쟁 당시 이탈리아는 UN의 비회원국이었지만 국제적십자사연맹의 구조 도움 호소로 1951년 10월 16일 의무장교 6명, 행정관 2명, 약제사 1명, 군목 1명, 간호사 6명, 하사관 6명, 사병 45명 등 67명을 우리나라에 파견(참전 연인원 189명), 서울우신초등학교에 의무부대를 주둔시켰다. 이탈리아 의무부대는 1955년 1월 30일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23만명을 치료하였으며, 1952년 9월 17일 영등포 열차 사고 때에는 신속한 치료 활동으로 대통령 부대 표창까지 받았다. 1989년 6월 2일 주한 이탈리아 대사 Graziella Simbolotti가 이탈리아 의무부대의 6.25전쟁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주둔지였던 서울우신초등학교 교사(서관) 벽면에 기념표석을 설치하였으나, 1999년 7월말 동 건물이 철거되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1999년 8월 구령대 옆 화단으로 이전, 2013년 5월 현 위치로 재이전 설치하였다. |
1069 | 42-2-11 | 호국 전몰동문 추모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마산고등학교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1-01 | 6.25 및 월남전에서 전사한 마산고등학교 출신 전몰동문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를 애국심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 |
1070 | 51-1-28 | 한말의사 박도경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고창읍 | 비석 | 의병운동 | 1874 | 높이 1.5m | 1963-02-01 |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기삼연 의병장을 이어받아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일군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자결한 박도경선생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 고창군수가 추모비를 세움 |
1071 | 42-2-37 | 6·25 참전 기념비(의령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8-05-20 | 의령군 지정면 6·25참전전우회는 1998년 5월 지정면 봉곡리 산144-3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여, 6·25전쟁시 지정면 출신 3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달려가 조국을 구해내고 민주주의를 수호한 거룩한 뜻을 후세에 길이 전승하고자 하였다. |
1072 | 42-2-12 | 자유수호 전승의 터 기념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탑 | 기타 | 1953 | 0 | 1989-09-03 | 함안군 도항리 소공원 내에 1989년 6·25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전몰군경과 유엔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함안군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함안군 청년회의소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89년 9월 3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함안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073 | 42-2-33 | 반공전승의 터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1-09-15 | 한국전쟁 당시 최후 방어선이었던 함안에서는 여항전투와 삼봉전투 등 북한군에 대항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함안 출신 청년들과 전남 경찰대 소속 경찰대원들이 이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끝에 승전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막을 수 있었다. 조국수호의 최후 방어선으로서 유엔군과 애향청년대원, 경찰대원들의 혈투로 멸공 전승한 터임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 9월 15일 함안군민이 가야읍 도항리 소재 마산-지주간 지방도 1004호 도로변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074 | 42-2-30 | 6·25 격전 함안 민안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88-06-13 | 함안군은 1988년 6월 여항면 외암리 저수지 옆에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한 부산, 마산을 지키는 교두보로서 치열했던 함안지구(여항산, 서북산)전투에 참전한 미25사단과 함안군민의 공적을 기리고 자유수호의 얼을 되새기기 위하여 6·25격전 함안민안비를 건립하였다. 1950년 8월, 북한군 6사단이 함안으로 몰려오자 이곳 수비군인 미25사단과 민기식 혼성부대, 전투경찰대, 일부 학도병 등 임시부대들이 치열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8월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여항산과 서북산을 사이에 두고 전개된 격전에서 이 고지들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고 엄청난 물량의 포격과 폭격으로 산꼭대기에 풀 한 포기 남지 않았으며 주변 가옥들은 불타고 많은 주민들이 사망했다. 이 처절했던 함안지구 전투에서 아군이 승리하여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고 이후 북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
1075 | 42-2-04 | 창녕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9-12-01 | 창녕 직교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군경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창녕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12월 1일 준공하였다. 2000년 이 탑을 퇴천리 현 위치로 옮겨 새로 건립했다. 6·25전쟁 기간 창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호국의 충혼이 되었다. 창녕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76 | 42-2-26 | 창녕지구 전승비 (UN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9-02-01 | 한국전쟁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남쪽 부곡,오항,박진나루를 정점으로 방어중이던 미 제24사단과 미 제2사단 제19연대가 북한군 제4사단과 돌출부인 낙동강 교부도를 화보하기 위해 역습에 역습을 거듭하여 13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북한군 제4사단을 재차 낙동강 전선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던 이 불후의 공훈을 길이 빛내는 동시에 그 영령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건립 |
1077 | 42-2-09 | 영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9-04-30 |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호국공원 내에 영산지구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교통부와 국제관광공사에서 1979년 4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은 부산지역 공격을 위하여 영산지방에서 막바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미군과 아군의 결사방어로 남침이 저지된 격전지였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산화한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고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교통부 주관하에 국제관광공사가 집행을 맡고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이 전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연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미 제24사단과 그 증원부대가 영산지역에서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북한군 제4사단이 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기습적으로 도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영산지역으로 침입하자 이들의 밀양지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증원가능한 부대들을 통합, 공방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강서쪽으로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회복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4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서게 되었으며 그후 낙동강전선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
1078 | 51-1-38 |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김제시 | 김제시 | 비석 | 3·1운동 | 1919 | 2.1m X 1.47m X 3.99m | 1989-10-28 |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이 조선에서 무단 통치를 실시하여, 조선인은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국외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자고 주창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1919년 1월 21일 사망한 고종이 일제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동요하였다. 이에 국내 명망가들이 연합한 독립대표 33인은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애초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 선언 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나 충돌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파고다공원에서는 운집한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전주 등 인근 지역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흐름을 접한 원평 사람들도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특히 김제의 청년 배세동이 4월 13일 전주읍장에 갔다가 만세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뒤 16일 같은 마을의 주민과 함께 의논하여 20일 원평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펼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군중이 모이는 곳을 감시하던 경찰에게 원평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배세동 등 주동자 10여 명이 체포·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에서 1년간의 실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그리하여 1989년 10월에 청년 배세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제 주민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079 | 42-2-10 | 박진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7-11-27 | 경남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에 낙동강변에 위치한 박진지구 전투에서 이 지구를 사수함으로써 UN군의 총반격의 기회를 제공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39사단에서 1987년 11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변에 위치한 박진지구에서 피아간 치열한 전투가 한달이상 계속되었다. 이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이 지구를 사수함으로써 유엔군의 총반부의 디딤돌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래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 당시 이곳 박진지역에서 유엔군과 국군용사들은 피을 뿌리는 건곤일척의 사투를 전개함으로써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구하였다. 1950년 8워 5일 북한군 제4사단이 낙동강을 도하한 후 영산-밀양을 점령하고 부산으로 진출하고자 필사적인 공세를 되풀이 하고 있을 때 우리 국군과 미 제24사단 용사들이 함께 피 어린 역습으로 이를 좌절시켰다. 다시 8월 31일 북한군 제9사단이 발악적인 공세를 가해 옴으로써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내 이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유엔군 총반격의 디딤돌 구실을 한 이곳 박진지구 전투는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한 줄기 낙동강 물이 굽이치는 바로 이 언덕은 과거 수많은 선열들이 조국을 위해 산화한 곳일진대 그분들의 애국충혼을 기리고 후손들로 하여금 반공사상으로 뭉친 호국의지의 실천적인 정신을 기르고자 이 전적비를 세운다. |
1080 | 42-2-36 | 의령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탑 | 6·25전쟁 | 1957 | 1958-01-01 | 의령군 중동리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의령군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8년 1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의령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령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81 | 42-2-34 | 충혼비(의령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5-02-06 | 의령군 신반리 신반체육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의령군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5년 2월 6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의령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령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82 | 51-1-37 | 의사 우당 홍순갑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6 | 비석2개, 높이 2.5M | 1968-11-08 |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早稻田)대학에 재학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8월 만주에서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특파원으로 파견된 이채우(李採雨)·김영순(金永淳)과 협의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년 10월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 1921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1925년에 신민부(新民府) 중앙간부로서 동지 규합과 군자금 조달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상해로 갔다가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으며, 길림성 조주현 양자하(吉林省鳥珠縣亮子河)에서 고려국민당(高麗國民黨) 중앙검사부 집행위원으로서 동지규합 및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29년 1월 하얼빈(哈爾濱)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동년 4월 2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었으며,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중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10월 6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083 | 43-2-32 | 고성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고성군 | 고성군 | 탑 | 6·25전쟁 | 1950 | 1957-11-01 | 경남 고성 동외리 남산공원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고성군 충혼탑건립위원회는 이곳 출신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7년 1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성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84 | 43-2-33 | 충혼탑(남해군)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남해군 | 남해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0-06-05 | 남해군 남산 등성이에 1980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남해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해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과 봉안각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0년 6월 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해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해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085 | 43-2-23 | 합천호국공원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합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1958-01-01 | 합천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합천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합천군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합천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8년 1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91년 7월 20일 다시 군민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합천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합천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86 | 51-1-10 | 이병기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생가 | 문화운동 | 1891 | 1850-01-01 |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고패형식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고방채·모정(짚이나 새로 지붕을 인 정자)으로 구성되었으며, 입구에 세워졌던 3칸의 행랑채는 철거되었다. 모정 앞쪽에는 두 개의 작은 못을 파놓았으며, 뒤쪽에는 일꾼을 위한 각각 1칸씩의 방과 부엌으로 된 외딴채가 있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후에 기와를 얹었다. 안채나 사랑채 건물이 소박하고, 집 안에 모정과 못을 마련하는 등 조선 후기 선비가옥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는 시조의 현대적 혁신과 부활을 위한 신운동을 전개하고 고전의 발굴·연구에 힘쓰는 한편 청소년 교육을 통해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전북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교수하였으며, 저서에《역대시조선》《가람문선》《국문학전사》 등이 있다. | |
1087 | 43-2-05 | 사천 호국공원 | 국가수호 | 2011-06-08 | 경상남도 사천시 | 사천시장 | 장소 | 기타 | 1954 | 2010-12-12 | 사천 호국공원 내에 2010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사천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사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2010년 12월 12일 호국공원을 준공하였다. 충혼각에는 1,493위의 호국영령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6·25전쟁 기간 사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사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88 | 43-2-06 | 충령비(용현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사천시 | 공군 제3218부대 | 비석 | 기타 | 1958 | 1958-10-30 | 한국전쟁부터 1958년 9월까지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한 故 이근석 장군 외 109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8년 비를 건립. 공군 제3218부대의 공군사재 제12호(1982.11.9)로 지정된 서설임 | |
1089 | 45-1-04 | 제주항일 기념관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항일기념관 | 기념관 | 기타 | 1997 | 지하 1층, 지상 2층 | 1997-08-02 | ○ 애국선열추모탑 및 위패봉안실(창열사), 3·1독립운동기념탑, 기념관등을 갖추었으며, 제주지역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올바른 역사의식과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 미밋동산(만세동산)은 1919년3월21일부터 4일간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3·1독립운동이 제주까지 전개되는 시발점이 됬던 곳이다. ○ 제주지역 3대 항일운동(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에 대한 항일운동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
1090 | 43-2-28 | 김문길 추념비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통영시 | 경상대학교해양과학대학 | 비석 | 기타 | 1956 | 1957-04-12 | 경남 통영시 인평동에 최창용 중위의 월북기도를 막고 순직한 김문길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 4월 12일 통영수산전문대 동창회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김문길 소령은 1931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3년 8월 갑종간부후보생 제 52기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 제25사단 70연대 1대대 탄약소대장을 역임한 후 1954년 육군항공학교 제11기로 입교하여, 1955년 10월 제25사단 항공대 조종사로 임명되었다. 1956년 11월 19일 강원 양구 북방에서 항공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김문길 중위는 관제탑을 통해 2사단 보급소장 최창용 중위를 탑승시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고 2사단 비행장에서 최 중위를 탑승시켰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지만 최 중위는 치밀하게 업무수행을 위장한 월북기도자였다. 비행 중 뒷자리에 있던 최 중위가 갑자기 비행기를 돌려 월북을 강요하는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자 김 중위는 당황했으나 곧바로 최 중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설득하는 등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미 월북을 결심한 최 중위는 김문길 중위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협박하기 시작했고 비행기는 비무장지대를 불과 몇 분 거리의 코앞에 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끝내 김문길 중위가 항로를 이탈하지 않자 최중위는 김 중위의 왼쪽 팔에 권총 한 발을 쏘며 위협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도 김중위는 마침 제2사단 공병대 연병장이 시야에 들어오자 기수를 돌려 연병장을 향했다. 비행기는 추락하듯 연병장에 불시착했고 그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도주하던 최 중위는 부대원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김문길 중위는 조종석에서 순직한 채 발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려 2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육군 항공인들은 그의 위훈을 기려 항공학교에 공적비를 건립했다. | |
1091 | 43-2-02 | 충혼탑(통영시)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통영시 | 신봉마을 이장, 김봉렬 | 탑 | 6·25전쟁 | 1950 | 1961-04-08 | 통영시 신전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신봉마을 출신 7위의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신봉마을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1년 4월 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신봉마을 주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봉마을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092 | 20-2-24 | 우리학교 출신 국가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이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92 | 0 | 1992-09-28 | 1991년 보훈가족 사기양양 추진 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하나로 남이초등학교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분들을 기리고자 1992년 9월 28일 건립한 기념비이다. |
1093 | 45-1-05 |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항일기념관 | 탑 | 3·1운동 | 1919 | 1991-03-01 | 조천만세운동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삼일절에 조천리 만세동산에 건립된 기념탑이다. 조천만세운동의 발단은 조천리 출신의 휘문고보 학생인 김장환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김시은 등과 의논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이 시위는 이후 3월 24일까지 함덕리·신촌리 등 조천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광복 후 조천만세운동의 시발지인 미밋동산에 삼일정이란 정자가 지어졌고 그 옆에 3·1운동독립기념비가 있었다. 1991년 이후 조천만세동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옛 기념물은 모두 헐고 그 자리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새로 세우고, 이어서 제주항일기념관을 건립했다. | |
1094 | 45-1-08 | 강문호목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한림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91-07-12 | 강문호는 제주도 남제주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1919년 3월 31일 군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3월 5일의 군산 만세시위 때 체포된 30여명의 영명학교 교사·학생들이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재판을 받는 날로¸ 영명학교 4학년인 그는 이날 그들의 재판과정을 보기 위하여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30여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찰나¸ 그는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과 학우들이 묶여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방청객들이 이에 호응하여 재판정은 별안간 만세 현장으로 변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고등법원에서 소위 법정 소란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교회 목사로서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항상 일본 경찰 헌병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는 등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제주의 한림교회에서는 강문호목사의 독립운동을 기리고자 1991년 강문호목사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1095 | 51-1-23 | 도동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고창군 | 고광헌 | 사당 | 의병운동 | 1928 | 강당, 정문, 중문, 강학비, 의적비 | 1928-06-01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 있는 최익현, 고석진, 고예진, 고용진을 기리는 일제 강점기 사당으로 도동사는 원래 고석진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가 있던 곳인데, 1928년 6월에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사우를 지어 최익현과 독립의군부 참모장을 지낸 고석진, 의병장 고예진, 고용진 등 4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하고 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14세 때에 이항로의 문인이 되어,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 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 갑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 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통상 확대와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최익현은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단식을 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가 4개월 만에 사망했다. 고석진은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스승인 최익현의 단식결사 소식을 듣고 장귀동에 달려가 지사를 규합하여 창의 토적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다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종의 밀칙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참모총장으로 활약하였고, 1919년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인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하여 제2인으로 서명하였다. 광복 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6년에 최익현이 창의할 때 족형인 고석진과 함께 의거에 참여해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고, 많은 무기와 군량을 모아서 옥천으로 운송하였다. 1914년 독립의군부 서기관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항일운동에 진력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용진은 그의 형 고석진과 아우 고예진과 함께 최익현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1913년 9월 독립의군부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그 후 1919년 4월에는 파리장서운동에도 참여하여 호남지방 유림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1096 | 20-2-08 | 순국 의적비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부리면 | 비석 | 기타 | 1960 | 0 | 1963-06-07 | 6·25전쟁 당시 부리면 청년 30여 명은 금산군 일원의 공산잔당 소탕 및 면내치안 활동을 위해 ‘청년방위대’를 조직했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2일 아침 무장공비들이 부리지서를 습격하자 청년방위대원 5명이 이들에 맞서다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비는 청년방위대 동우회(회원 33명)가 당시 전사한 청년방위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후세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해 1963년 6월 7일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459 (양곡교 옆)에 이 비를 건립했고, 2002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
1097 | 43-2-20 | 충혼탑(산청읍)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산청군 | 산청군 | 탑 | 기타 | 1948 | 1959-06-06 |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산청군 출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함 | |
1098 | 53-1-04 | 평산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무안군 | 박석노 | 사당 | 의병운동 | 1945 | 신실 49, 강의당 66 | 1946-01-01 | 최익현·기우만·박임상 등 3인 유학자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사당.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박임상은 기우만 의진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제자 수십 명을 규합하여 최익현의 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이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하자 심상3년(心喪三年 : 마음속으로 복을 입는 것)을 마치고 중암 김평묵의 유배지였던 지도(智島)에 두류단(頭流壇)을 설치하고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4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최익현·기우만의 사우를 건립코자 부지를 다듬다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뜻을 못 이루었다. 1944년 박임상은 아들 현풍에게 사우를 꼭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1946년 1월 1일 박임상의 제자들과 자손은 합심하여 평산사를 건립하고 최익현․기우만 두 의병장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2년 후에는 박임상도 배향하여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평산사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평산사는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
1099 | 26-2-01 | 충령탑(세종특별자치시) | 국가수호 | 2002-11-25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 세종특별자치시 | 탑 | 6·25전쟁 | 1969 | 0 | 1969-10-01 | 조치원읍 침산리에 1969년 6·25전쟁 기간에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령탑’을 건립하였다. 연기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김제원과 김창원 형제의 후원으로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10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연기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00 | 23-2-13 | 충령사 | 국가수호 | 2003-07-24 | 충청남도 태안군 | 태안군 | 사당 | 기타 | 1997 | 1997-06-05 | ||
1101 | 13-1-14 | 원태우지사 의거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 시립만안도서관장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82 | 0 | 1992-11-22 | 1905년 11월 22일에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지역을 유람 후 경부선 열차로 귀경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석수2동 안약육교 부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향해 투석 수 주일간의 진료를 요하는 큰 상처를 입혀 안양인의 기개를 떨쳤을 뿐 아니라 국내외에 자주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지사는 거사 후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헌병사령부에서 2개월간의 모진고문을 당하는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었으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으로 불우한 삶을 살다가 슬하에 자녀도 두지 못한채 1950년 6월 25일 59세를 일기로 의로운 생을 마감했다. 고인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다. |
1102 | 23-2-04 | 충령탑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예산군 | 예산군 | 탑 | 기타 | 1967 | 1967-06-06 | ||
1103 | 13-1-015 | 원태우지사 및 한흥리지사 조형물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82 | 0 | 1995-08-15 | 원태우 자사는 1905년 11월 22일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에 사냥을 왔다가 서울로 열차를 타고 서리재고개(현재의 안양육교)를 지날 때 혼자의 몸으로 돌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히고 곧 일경에게 체포 구금되었다. 이 의거는 민간항일운동의 효시가 된 거사로서 당시 대한매일신문 등의 언론에 수록되었다. 원의사는 1906년 1월 24일자로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1950년 6월 25일 6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한항길 지사는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생의 몸으로 3.1운동에 참가하여 만세를 외쳤고 이어 시흥·안양·군포 지역의 통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시는 한편 3월 5일 서울역에서 거행되었던 두번쨰 독립시위운동에 가담하셨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여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이후 경성보인고등학교 교사, 경성매일신문, 부산국제신보사의 기자생활을 거쳐 광복과 함께 조국의 앞낧날은 기술진흥과 후진 양성에 있다는 신념으로 안양직물주식회사, 소사공업고등기술학교, 부천전문대학교 등을 설립하시고 공업 입국을 위한 기술인력 배양에 심혈을 기울이시다가 1979년 5월 8일 82세 일기로 타계하였다. |
1104 | 52-1-20 | 전주 3·1운동 발상지 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주시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0-01-01 | 전주 남밖장터 3·1독립운동 발생지 표지석.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과 천도교 조직원, 그리고 기독교 학생들은 만세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13일 남밖 장날을 기하여 채소가마니로 가장한 태극기 포장을 남문 장터까지 무사히 운반하였다.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천주교 성당 건너편에서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부하고 12시 30분 경 남밖장터 부근에서 시위를 하였다. 이어 제2보통학교 교정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2000년 1월 1일 전북인권선교협의회에서는 전주지역 학생과 주민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3·1독립운동이 시작된 매곡교 부근에 표지석을 세웠다. |
1105 | 43-2-03 | 충혼탑(욕지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통영시 | 욕지면 | 탑 | 6·25전쟁 | 1950 | 1984-06-06 | 욕지면 동항리에 198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욕지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욕지라이온스클럽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4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욕지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욕지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06 | 42-1-06 | 김해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장유면장 | 탑 | 3·1운동 | 1919 | 0 | 1967-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 시장에서 김종훤·조순규(趙順奎)·이강석·김승태 등의 사전 준비로 3천여명이 모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본군 헌병의 발포로 김선오(金善五, 1865~1919), 김용이(金龍伊, 1891~1919), 손명조(孫明祚, 1884~1919)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승태(金升泰, 1878~1940), 김종훤(金鍾煊, 1892~1948), 이강석(李康奭, 1879~1923), 조항래(趙恒來, 1884~1949), 최현호(崔鉉浩, 1890~1974)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기성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7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1107 | 43-2-21 | 반공유격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산청군 | 시천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1-09-01 | 산청군 사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사천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반공유격전적비’를 건립하였다. 경우회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1년 9월 1일 전적비를 세웠다. 세월이 흐름에 퇴락하자, 사천면에서 개보수를 했다. 6·25전쟁 기간 사천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108 | 43-2-24 | 향토수호 전몰용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산청군 | 이인근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9-06-25 | 단성 성내리에 6·25전쟁 기간 향토수호작전에서 산화한 단성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향토수호 전몰용사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단성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9년 6월 25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단성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단성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09 | 42-1-24 | 8의사 창의탑 | 독립운동 | 2004-12-31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진북면 | 탑 | 3·1운동 | 1919 | 0 | 1963-01-01 |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3개 면민들의 시위운동인 4.3삼진의거는 1919년 4월 3일 진동.진전.진북 3개면 약 5,000여 명(일부사료 8000명)의 군중이 일본 헌병의 총칼에 맨주먹으로 맞서 벌인 크고 격렬한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총격으로 8명이 숨지고 22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변상태와 권영대, 권태용, 변상헌 등은 진전, 진북, 진동 3개 면의 합동의거를 4월 3일에 대대적으로 거사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4월 3일이 되자 진전면의 군중들을 이끌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진동 장터로 진입을 하고자 하였으나, 시위대의 규모에 놀란 일본 헌병들은 마산의 주둔부대에 긴급지원을 요청하고, 헌병보조원과 재향군인까지 동원하여 진동입구의 사동교에 진을 치고 시위대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이때 진전면의 시위대에 진북과 진동면의 군중들이 합류하여 시위군중이 7000여 명으로 불어나 사동교에서 대치하였다. 일본 헌병과 군인들이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당시 23세인 김수동과 변갑섭이 목숨을 잃었다. 오후 3시 마산의 중포병 대대 병력이 증파되어 사망자는 모두 8명에 22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목숨을 잃은 8명은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앙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이었다. 있었다. 또한 변상섭, 변상술, 구수서, 변상헌, 김영종, 변우범 등은 징역 형을 수형하였다. 삼진면민들은 부상자에 대한 일제의 치료를 거부하고 성금을 모아 민간병원에 치료를 의뢰하여 강렬한 민족의식을 다시 보여 주었다. 1963년 10월 삼진면민들은 순국한 8의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 고현 마을 입구에 8의사 창의탑을 세웠다. |
1110 | 12-1-05 |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08-05-09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사)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1878 | 0 | 1998-10-30 |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救世學堂:一名 元社宇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동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서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하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자각(自覺)을 호소하였다.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하였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 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상부상조 조국광복(相扶相助 祖國光復)을 목적으로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는 등 활동하였다. 1907년 고국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귀국하였으며, 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각 주요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리는 등 정치·교육·문화의 여러 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용산헌병대에 수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 통감부(統監府)의 도산내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일축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다음 해 북만(北滿)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흥사단(興士團)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務實力行 健全人格 團結訓練 國民皆業) 등 정신개조(精神改造)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표제를 바꾸어 발행하였다. 191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를 내무총장에 선임하자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지도하였다. 동년 7월 2일에는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전4권을 편찬,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해외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출연 받아 임정을 꾸려 나가도록 하였다. 같은 해 임정의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부 총판(總辦)에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주비위원장이 되어 북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辦)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 등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하였다. 1921년에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되었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가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나, 이 회의도 임시정부의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대립되어 실패하자, 북만에 독립운동기지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방략은 군사·외교·재정·문화·식산·통일의 6대운동으로써 후에 민족의 통일단합을 위한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여 이를 실행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실력배양운동(實力培養運動)의 기초를 다졌다. 이 해에 그는 군자금 확보를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왔다. 중국에 돌아온 그는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독립군의 주요 간부인 김동삼(金東三)·박창식(朴昌植) 등이 일경에게 체포된 뒤에, 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 등이 암살되는 수난이 계속되고, 이어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상촌 건설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상해로 되돌아 온 그는 1930년에 협동상조(協同相助), 소비합작(消費合作),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활역량(生活力量)을 넓히기 위한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하여 재상해한인(在上海韓人)의 합심 협력을 계획하였다.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국민의 자질혁신(資質革新)과 청년 인재 양성 등 흥사단의 이념 구현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하여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한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한중인(韓中人) 충돌 사건이 일어나고 중국민의 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회, 청년동맹 등의 각 단체를 연합하여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하게 되자 그는 흥사단 대표로 이에 참가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강화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이시영(李始榮)·김사집(金思潗)·김 철(金徹)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員)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는 이유필(李裕弼)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동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 고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였다. 그후,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同友會) 관계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重病)이 들어 동년 12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1111 | 43-2-38 | 위령탑(생비량면) | 국가수호 | 2003-12-08 | 경상남도 산청군 | 생비량면 | 비석 | 기타 | 1951 | 0 | 1981-09-13 | 1951.9.13. 지리산 공비 1,000여명이 생비량파출소 및 면창고를 소각하고 민가를 약탈하자 경찰관 9명과 의경 52명이 12시간의 전투끝에 방어하였으나, 경찰관 5명과 12명이 전사하여 조국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면민들과 향우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
1112 | 42-1-29 | 지사 석당 변상태 선생 기적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진전면청년회(박종묵)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9 | 0 | 1982-01-01 |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1916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2월 하순 서울에 있는 동지들로부터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고 동지인 김관제(金觀濟)·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상경하여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그후 이들은 만세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계획하고 각자 책임지역을 선정하였는데 그는 경남 서부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귀향한 그는 이희석(李喜錫)·조태식(趙台植)·이경형(李景 ), 창원의 이수룡·권태용(權泰容)·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고성의 황태익(黃泰益) 등과 함께 힘을 모아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이들은 거사일을 3월 28일의 장날로 정하고 당일 곳곳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가 일경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그는 몸을 피해 권영대·권태용 등과 재기를 도모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그는 4월 3일 회집 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천변(川邊)에 큰 태극기를 세우고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에서 모여든 수천 명이 넘는 군중앞에서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국(自由國)의 국민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도 받아서는 안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로 항일의식을 고취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변상태는 피체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西大門)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출옥후 그는 1944년 8월 의열단(義烈團)의 구여순(具汝淳)·이주순(李周順)등과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113 | 43-2-39 | 한청기동대 전공 충혼탑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하동군 | 하동군 | 탑 | 기타 | 1948 | 1961-08-30 | 하동 하동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하거나 공훈을 세원 한청기동대 124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한청기동대 전공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국제신보 하동지국은 6·25전쟁에 크게 활약한 한청기동대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1년 8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한청기동대는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114 | 43-2-14 | 충혼탑(청암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청암면 | 탑 | 6·25전쟁 | 1950 | 기념탑(0.5m x 0.26m x 1.5m), 기단(1.5m x 1.2m x 1m) | 1954-04-15 | 청암면 상이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청암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조상래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4년 4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청암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암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15 | 10-1-04 | 이봉창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용산구청(문화체육과) | 동상 | 의열투쟁 | 1901 | 좌대높이 3m, 동상높이 3.5m | 1995-10-10 | 이봉창 의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일본천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의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와 이봉창의사동상건립위원회가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동상을 건립하였다. |
1116 | 10-1-12 | 나석주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재령군민회 | 동상 | 의열투쟁 | 1892 | 1999-11-17 |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이 있었던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겸이포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활동과 친일파 처단 활동에 앞장서다 1920년 9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나석주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과 한단군관학교를 거쳐 1924년까지 중국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천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해 한층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강구하던 중 1926년 6월 유림대표 김창숙을 만나 경제적 착취의 대표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은행, 식산은행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12월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는 28일 오후 먼저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대부계 철책 너머로 폭탄 한 개를 던지고, 큰길 건너편 동양척식 주식회사 경성지점으로 달려가 총격과 함께 또 폭탄 한 개를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 나석주는 동양척식 주식회사 바로 옆의 조선철도회사로 들어가 한 차례 더 총격을 가하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나석주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 위치한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 |
1117 | 42-1-27 | 애국지사 서암 조선생 창의비 | 독립운동 | 2004-12-10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기념사업회 | 비석 | 3·1운동 | 1880 | 0 | 1987-01-01 | 조계승은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 장날의 만세 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의 한문 교사 안지호와 연락하여 3월 19일 함안 장날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계승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3월 19일 봉성동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 북촌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시위 군중은 폐쇄한 군청 문을 부수고 들어가 청사 안으로 들어가 군수 민인호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다. 오후 5시, 시위대는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 포병대대와 대치하다 그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이때 체포되어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1118 | 43-2-11 | 충혼탑(악양면) | 국가수호 | 2010-02-12 | 경상남도 하동군 | 악양면 | 탑 | 기타 | 1948 | 1968-06-06 | 1948년 여ㆍ순반란사건 당시 민보당(지방청년단) 소속의 김영수 씨 등 수명이 공비토벌에 나섰으나 전사하였고, 6ㆍ25전쟁 당시 부상인 민군을 위한 야전병원이 악양면 정서리에 위치하고 있을 때 대한청년 단원인 이승관, 제일봉, 이차수 씨 등 수명이 인민군 초병의 총기탈 취에 나섰으나 이승관, 제일봉 씨 등이 현장에서 생포되어 총살당함 에 따라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탑이다. | |
1119 | 42-1-17 | 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85 | 1915-01-01 |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세워 부산지역에서 무역업을 벌였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순국했다. 안희제 생가는 그가 태어나서 자란 집으로 안채와 집사실의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기와 및 슬래트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고 집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다. 이들 가옥은 조선 후기 민가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 |
1120 | 42-1-19 | 백산 안희제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5 | 0 | 1976-01-01 |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세워 부산지역에서 무역업을 벌였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순국했다. 추모비는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이며 민족자본의 육성자, 영남지방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선생의 업적이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121 | 13-1-04 | 민세 안재홍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평택시 |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 생가 | 사회운동 | 1892 | 일곽 | 1914-01-01 | 안재홍은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이다. 그는 1922년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주필 겸 이사로 역임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신간회 활동의 주역이었으며, 조선어학회, 흥업구락부 등에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사회단체와 독립운동 외에도 사학자로서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였고 고적지 답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삶의 대부분을 생가에서 보냈다. 이 생가는 원래 대문간 채까지 있던 큰 집이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가옥의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는 1914년에 사랑채는 1932년에 건립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배치를 이루었으며, 안채는‘ㄱ’자형 사랑채는 ‘ㅡ’자형의 평면 가옥으로 전형적인 경기도지방의 살림집 건축형태이다. 안재홍 생가는 구한말 중부지방의 개량 한옥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우리 전통한옥의 구조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
1122 | 23-2-09 | 충령사(청양)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청양군 | 사당 | 기타 | 1954 | 1954-10-10 | ||
1123 | 55-1-12 | 정재건 선생 유적지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정증원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1843 | 기와1동, 공적비(2m), 생가1동 | 2001-06-02 | 정재건 선생이 평생 거주하던 곳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가에서 자결 순국하신 정재건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현충시설로 지정됨 |
1124 | 18-1-08 | 해공 신익희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3-09-15 | 경기도 광주시 | 신동호(종손) | 생가 | 해외운동 | 1894 | 0 | 1865-01-01 |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이며 광복 후 제헌국회 부의장 국회의장을 역임한 신익희(1894-1956)선생이 어릴 때 살던 집이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거리에 있었는데 1865년 대홍수 때 파손되어 이 곳으로 옮겼다. 해공선생의 생가는 원래 2백여년전의 한옥 건축양식으로 유품으로는 목관, 고서, 휘호(친필), 놀이용 화살등이 보존되어 있다. |
1125 | 43-2-18 | 반공애국 유적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2-10-01 | 6.25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각 전선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호국충정을 널리 전하고자 반공애국유적부활운동 함양군 추진위원회에서 함양군민들 성금을 모금하여 건립하였다. |
1126 | 43-2-09 | 충혼탑(하동군)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하동군 | 탑 | 6·25전쟁 | 1950 | 기념탑 6.3m, 기단 1.8m x 2.4m, 0.9m | 1971-08-10 | 하동 하동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711위(국군 584위, 경찰 43위, 청년단 82위, 애국지사 2위)의 하동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하동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1년 8월 1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하동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동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27 | 42-1-16 | 창원읍민 만인운동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 창원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1-01 | 창원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운동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는 가운데, 창원지역 주민인 김태순과 박화열 등은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창원 장날을 기해 당일 2시 20분 경, 시장 한 가운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시장에 모인 6,000 ~ 7,000여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가 고조되어가자 일본 헌병 경찰은 진압에 나서 3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후 4월 2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나자 주재소 헌병과 마산헌병분견소 헌병들은 무력으로 진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1985년 1월 1일 창원시에서는 창원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창원 장터 인근에 이 비를 세웠다. |
1128 | 43-2-37 | 애국동지 위령단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함양군 | 지곡면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1951-05-01 |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지곡면 출신 경감 이용구 경감 등 46인의 군경과 반공투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대한청년단 지곡면 단원과 지역유지들의 찬조로 1951년 5월 1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창평리 산64-1에 애국동지 위령단을 건립하였다. |
1129 | 43-2-17 | 충혼탑(안의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안의면 | 탑 | 기타 | 1968 | 소규모 | 1968-06-06 | 여순 반란사건,한국전쟁 지리산 공비 토벌등으로 인하여 희생된 안의면 출신 육군 대위 노병출 외 130주의 반공투사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68년 5월 안의면유족회장이 충혼탑 건립위원회를 구성 유족들의 자체 자금으로 건립함 |
1130 | 43-2-16 | 충혼탑(서상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박지은 | 탑 | 6·25전쟁 | 1950 | 0 | 1973-06-06 | 서상면 금당리에 197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서상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서상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면민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서상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서상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31 | 14-1-02 | 양촌 대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경기도 김포시 | 오라니장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 | 비석 | 3·1운동 | 1919 | 중 | 1985-12-11 | 서울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충서는 정인섭·임철모·이병린·박승옥·박승만·안성환·전태순 등과 함께 1919년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양촌면 오라니 장날인 3월 23일에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오인환·정억만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3월 23일 양곡 장터에 모인 수백명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을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5년 12월 11일 양촌면민 주관으로 김포시 양곡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양촌 대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를 양곡리 산 266-14번지에 건립하였다. 이후 위치가 부적정하여 2000년 11월 20일 양촌면, 이장협의회 및 번영회의 주관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
1132 | 51-1-05 | 동의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01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산외면 | 비석 | 의병운동 | 1905 | 2m X 0.9m | 1928-01-01 | 본관은 평택(平澤)으로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신이다.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義兵將)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招募), 군량(軍糧)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洪州)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官 )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陣容)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監禁)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 일제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不服)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됨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巨文島)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음력)에 유배지에서 사망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133 | 23-2-05 | 충혼탑(대치면)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청양군 | 탑 | 6·25전쟁 | 1993 | 1993-01-01 | 칠갑산 자락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청양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청양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72년에 이 탑을 건립하였고, 1993년 10월 30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새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청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빨치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양군에서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 행사와 6월 6일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34 | 23-2-16 | 국가유공자무훈탑 | 국가수호 | 2003-11-27 | 충청남도 서산시 | 서산시 보훈단체 | 탑 | 기타 | 1990 | 기단높이 1.13m, 탑 높이 3.5m, 가로세로 5m | 1990-06-25 | 태안군 국가유공자 무훈탑건립추진위원회는 1990년 6월 25일 충남 서산시 읍내 478-1에 태안군 출신 6·25 참전 및 베트남 참전 국가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국가유공자무훈탑을 건립하였다. 특히 건립추진위원회에는 참전자 당사자들과 국가유공자의 자녀들이 많이 참여하여 이들의 성금으로 재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
1135 | 23-2-10 | 충령각(동문동)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서산시 | 서산시 | 사당 | 6·25전쟁 | 1950 | 1964-04-26 | ||
1136 | 31-1-01 | 일송 김동삼선생 어록비(충효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청년유도회 | 비석 | 해외운동 | 1878 | 0 | 1999-11-04 | 인륜의 기본이 되는 충효정신이 담긴 김동삼선생 및 정부인 장씨의 어록비를 건립하여 선열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함 |
1137 | 55-1-04 | 우재 이병찬 지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보성군 | 유족(이덕규)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86 | 2.4m | 2001-10-12 | 보성 출신 독립운동가 이병찬(본명 이병호) 동상. 이병찬은 1915년 7월 15일 경북 대구 소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일제고관 및 친일배의 처단과 일제기관을 파괴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대한광복회에서 박상진이 총사령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전라도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병찬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공갈·총포류단속취체령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1년 10월 12일, 이병찬지사추모사업회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추모하고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동상을 세웠다. |
1138 | 50-2-01 | 현충탑(광주광역시) | 국가수호 | 2002-11-02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광역시 푸른도시사업소 | 탑 | 6·25전쟁 | 1950 | 1963-05-29 | 광주공원 내에 위치한 현충탑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전남지역 전몰호국용사 15,867명(군인 10,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963년 5월 29일 “우리 위한 영의 탑”으로 명명하여 건립되었다. 우리는 호국용사들이 목숨과 바꾸어 지킨 이 땅에 살면서 지난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충의와 애국심을 영원히 추앙하며, 자라나는 후세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2015년 12월 2일 이곳에 현충탑을 다시 세운다. | |
1139 | 50-2-04 | 현충탑(광주 광산구) | 국가수호 | 2002-11-02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역시 광산구 | 탑 | 기타 | 1977 | 0 | 1977-06-06 | 0 |
1140 | 42-1-05 | 거제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제시 | 거제시 | 탑 | 3·1운동 | 1919 | 0 | 2001-06-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이운면 아주리에 살던 윤택근(尹澤根)·이인수(李麟洙)·이주근(李柱勤) 등이 주도하여 아양리 장터에서 50여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날 옥포리 시장에서도 주종찬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로 이주근(李柱勤, 1898~1966), 이인수(李麟洙, 1900~1962), 주종찬(朱宗贊, 1893~1933) 등이 주동자로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거제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6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1141 | 50-2-03 | 충혼(忠魂) | 국가수호 | 2002-11-02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지방경찰청 | 탑 | 6·25전쟁 | 1981 | 1981-10-23 | 여수 반란사건과 6.25전쟁 등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 출신 순국경찰관 3,196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1956년 전남도청 앞 상무관 정원에 건립된 충혼탑이 붕괴 직전으로 1979.10.12 충혼탑 이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81.10.23. 건립함 | |
1142 | 15-2-06 | 동두천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78-06-06 | 동두천시는 1978년 6월 6일 동두천시 생연동 산47-1에 조국의 안녕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현충탑의 휘호는 진만헌(당시 군수)의 친필이며 탑의 모형과 설계는 이일녕 화백이 맡았다. 동판에 있는 비문 내용은 나라에 몸 바친 호국들에게 국민의 정성으로 위훈을 비니 겨레의 빛이 되어 그 뜻이 영원하라는 내용이다. |
1143 | 23-2-12 | 현충탑(당진시)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군 | 탑 | 6·25전쟁 | 1950 | 2005-12-23 | 당진 광명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당진군 출신 907위의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당진군)’을 건립하였다. 당진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5년 12월 23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당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당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44 | 23-2-08 | 충령사(홍성읍)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 | 사당 | 기타 | 1962 | 1962-01-01 | 충남 홍성군 홍성읍 남산에 있는 충령사는 6.25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운명한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1978년 건립되었다. 홍성 출신의 군인, 경찰, 노무자 등 보훈 유공자 77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
1145 | 50-2-02 | 충의비(忠義碑) | 국가수호 | 2002-11-02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산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 높이 1.2m, 기단 높이 1.5m | 1976-10-21 | 광주 광산경찰서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75위의 이 고장 출신 경찰관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을 건립하였다. 광산경찰서는 채동수, 김연석, 김우곤, 정헌춘 등 이곳 출신 호국경찰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76년 10월 21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동곡, 삼도, 비아, 대촌, 평동지역에서 전개된 전투와 공비소탕 작전에서 광산경찰서 소속 경찰관 75명이 산화했다. 광산경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46 | 50-2-06 | 거룩한 얼의 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1969-06-06 | 나주 남산공원 내에 196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860명의 나주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거룩한 얼의 탑’을 건립하였다. 나주군은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여 나주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나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47 | 25-2-17 | 충혼탑(흥덕구)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 청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5-10-04 | 흥덕구 사직동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청주, 청원 출신 등 3, 203위의 호국전몰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청주시는 이곳 출신으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몰용사(청주출신 883위, 청원 출신 1, 773위, 기타 22위)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10월 4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2년 4월 6일 현 위지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청주 시민과 청원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주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48 | 15-1-06 | 홍덕문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 비석 | 3·1운동 | 1864 | 0 | 1975-01-01 | 홍병준(1864~1923) 선생은 구한말의 애국지사로 자는 덕문(德文), 본관은 남양이며 동두천 출신이다. 선생은 1919년 음력 2월 25일 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만세를 연창하며 백절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결국 고문과 형독(刑毒)으로 1923년 5월 17일 걸산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동두천노인회는 1975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31번지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홍병준 선생의 고귀한 순국이념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렸다. 추모비는 동두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
1149 | 50-2-11 | 현충탑(담양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군 | 탑 | 6·25전쟁 | 1950 | 1992-06-06 | 담양 관어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담양군 출신 애국지사와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담양군)’을 건립하였다. 담양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2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담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담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50 | 23-2-15 | 월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11-27 | 충청남도 보령시 | 해외참전전우회 보령시지부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7-11-10 |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입구 공원 내에 2002년 제주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1,900여 명의 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제주도월남참전기념탑건립연합추진위원회에서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8개년 동안 이국만리 월남전선에서 제주시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151 | 43-2-04 | 위령탑(통영시)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통영시 | 추형윤 | 탑 | 기타 | 1981 | 0 | 1981-06-06 | 통영시 비진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했다. 내항마을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애국심을 기리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81년 6월 6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내항리 주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152 | 15-1-02 | 면암 최익현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동상 | 의병운동 | 1833 | 0 | 2000-04-26 | 최익현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14세 때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고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당대의 권력가인 대원군의 주요 정책인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의 혁파, 당백전의 폐지, 사대문 문세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해 대원군 일파의 비난을 받았으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 궐리사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900명에 이르렀으나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 진위대의 포위 공격을 받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쓰시마 섬[대마도]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에 감금되었는데 그곳에서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
1153 | 50-2-08 | 충혼비(담양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담양군 | 전몰군경유족회 담양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2-07-30 | 담양 만성리 관어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담양군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2년 7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담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담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54 | 50-2-09 | 충혼비(담양군 수북면)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군 수북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8-06-25 | 담양군 대방리에 1968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수북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수북면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8년 6월 25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수북면인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수북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55 | 15-1-15 | 3·1운동 기념비(남양주)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남양주시 | 화도읍사무소 총무계 | 비석 | 3·1운동 | 1919 | 1999-02-06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밤 월산리·답내리 주민 200여명이 마석우리 헌병대 병참 앞에 몰려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발포하여 손복산(孫福山, 1889~1919), 신영희(申榮熙, 1891~ 1919), 유상규(兪相奎, 1880~1919), 이교직(李敎稙, 1887~1919), 이달용(李達鎔, 1889~1919)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강선원(姜善遠, 1874~미상), 권은(權慇, 1872~미상), 김필규(金弼圭, 1874~1919, 옥사) 등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 2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 |
1156 | 30-2-22 | 충혼탑(달성군)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달성군 | 달성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2-10-01 | 달성군 부리에 1962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등 1, 315위의 달성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달성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2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달성 군민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달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57 | 30-2-28 | 충혼탑(대구시) | 국가수호 | 2005-05-09 | 대구광역시 남구 | 대구시 | 탑 | 6·25전쟁 | 1950 | 1971-04-20 | 대구시 대명동에 6·25전쟁 직후 전사한 대구 출신 5, 400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대구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영현봉안탑을 수성구 두산동에 건립하였으나, 1971년 4월 20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구 시민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구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58 | 31-1-11 | 추산 권기일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권대용(손) | 비석 | 해외운동 | 1886 | 0 | 2001-06-25 | 일제치하시 중국에서 이시영, 김좌진등과 독립군양성 및 군자금모금등의 활동으로 1920년 일경에 사살, 순국한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 |
1159 | 31-1-12 | 육사 이원록선생 시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사)이육사추모사업회 | 비석 | 문화운동 | 1904 | 0 | 1992-07-00 |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 출생.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
1160 | 30-2-11 | 낙동강승전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2-14 | 대구광역시 남구 | 한국자유총연맹대구시지부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1979-06-25 |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낙동강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을 대구시와 경상북도에서 1979년 6월 26일 건립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조국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의 승전을 기념하고 대구를 죽음으로 지켰던 참전용사들의 거룩한 얼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 기념관은 6·25전쟁의 뼈저린 교훈과 그때 유물 및 자료가 전시되었으며, 대구시와 경북도민의 교육현장으로 전쟁을 겪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동족상잔의 참상을 가르쳐 주고 이를 통해서 국가관을 확립시키기 위해 1978년 착공 1979년 6월 25일 완공하였다. | |
1161 | 31-1-02 | 육사 이원록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시, 이동박(양자), 채경자(육사 팔촌제수) | 생가 | 문화운동 | 1904 | 1800-01-01 | 광야, 청포도 등 저항시인으로 유명하며, 대구조선은행투탄등 항일 투쟁으로 무려 17회나 옥고를 치른 육사선생의 생가지임 | |
1162 | 31-1-13 | 황영남지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황화수(손) | 비석 | 3·1운동 | 1885 | 0 | 1979-09-12 | 1919년 3월 18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거사 당일에 유동봉·송기식(宋基植)·송장식(宋章植)·권중호(權重浩)·이종록(李鍾祿) 등과 함께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1백 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군경에 대항하다가 일경이 휘두르는 칼에 중상을 입어 순국하였다. |
1163 | 30-2-24 | 고 나야대령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수성구청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0-12-07 |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에 지뢰폭발로 사망한 국제연합 인도 대표 우니 나야(M. K. Unni Nayar)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에서 1950년 12월 7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국제연합 한국위원단 인도 대표로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월 12일 왜관 근처에서 지뢰폭발로 사망했다. 1950년 8월 13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속칭 주일골에서 화장하고, 1950년 12월 7일 같은 장소인 대구 수성구 범어동 산156번지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1996년 주변을 단장하고 보수공사를 해 나야 대령의 넋을 위로하고, 매년 현충일에 나야 대령 기념비를 참배하고 자유 수호를 위해 이국땅에서 숨진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 |
1164 | 16-1-07 | 춘천의병대장 습재 이소응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광복회 춘천연합지회 | 비석 | 의병운동 | 1852 | 0 | 2002-01-10 | 1895년의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시해와 단발령의 강제로 배일감정이 폭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0일(음력 을미년 12월 16일)에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의 지방유생과 1,000여 명의 농민들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소응은 척사위정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규정하고, 엄한 군율 밑에서 부대를 통솔하였다. 먼저 정부에서 개화관료인 조인승(曺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임명하자 단발하고 부임한 조인승를 참형에 처하여 그 기세를 올렸다. 2월 8일에는 이겸제(李謙濟)가 인솔한 친위대 3개 중대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고 흩어졌으나 다시 모여 부대가 정비되었다. 그 뒤 포천·영평·양광 등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또 일부 병력은 그 뒤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강릉에 이르렀고 경기도 여주·이천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신우균(申羽均)·김구현(金龜鉉)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전략 전술 및 무기의 열세로 점차 전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문제도 곤란해져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와 협상하였으나 실패하자 2월 17일 부득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부대로 이적하였고 부대는 종형 이진응(李晉應)이 지휘하였다. 이진응 다음에는 이진응의 아우 이경응(李景應)이 대장에 추대되어 지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소응 [李昭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165 | 23-2-01 | 충령사(서천)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서천군 | 서천군 | 사당 | 기타 | 1968 | 1968-01-01 | ||
1166 | 30-2-13 | 다부동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수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1-12-15 | 경북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 다부동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북도와 제2군사령부에서 1971년 12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8월 J. H. 마이캘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보병 제27연대 장병들이 국군 제1사단 장병들과 더불어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격파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전승비는 미 보병 제27연대(존 에취 마이캘리스 대령 지휘) 용사들이 수행한 찬연한 무훈과 공훈을 길이 남기기 위한 기념비이다. 1950년 8월 이곳에서 미 27연대는 한국군 제1사단 장병과 더불어 공산침략자들을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무찔렀으며 대한민국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들이 남긴 탁월한 지휘력과 결단성과 돌격정신을 이 겨레와 함께 영구히 간직될 것이다. | |
1167 | 30-2-02 | 충혼탑(고령군)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8-06-06 | 고령 연조리 공원 내에 1968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호국전몰용사 등 고령 출신의 741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고령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8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령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령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68 | 17-1-03 | 금마리 독립만세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 | 동상 | 3·1운동 | 1919 | 너비 3.2m, 높이 4.5m | 1992-01-01 | 금마리 독립만세상은 1992년 7월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산 225 금마고개에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여 시위를 감행했던 선현들의 숭고한 애국독립정신을 함양하고자 높이 4.55m의 청동 조형물로 세워졌다. 1919년 4월 21일 주천 장날을 기하여 박광훈(1882~1938) 외 만세 주동자들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당시 영월군수 석명전이 부하들과 함께 주민에게 만세반대자명부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자 박수창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군수일행을 주민 앞으로 끌고가 만세연명부에 서명하게 한 후, 태극기를 들려 힘차게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이로 인해 69명이 검거되었고 17명이 옥고를 치렀으며 이 중 탁원근(1880~1921)은 옥중에서 숨졌다.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영월군에서 유일하게 전개된 시위운동으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할 수 있다. |
1169 | 30-2-19 | 충혼탑(경산시)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경산시 | 경산시 | 탑 | 6·25전쟁 | 1950 | 1963-05-31 | 경산 성암산 공원 내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경산시 출신 전몰용사 등 1, 227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경산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5월 3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경산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경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70 | 30-2-01 | 유재흥장군 제승 기념지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경산시 | 하양초등학교 | 기타 | 6·25전쟁 | 1950 | 1956-03-29 | 경북 경산시 하양읍 하양초등학교 내에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재흥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유재흥장군제승기념지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56년 3월 29일 제승기념지를 조성했다. 유재흥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대위로 임관, 조선경비대총사령부 보급관(군수국장)으로 보직돼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여단 참모장을 거쳐 여단장과 사단장(6·2·7사단장)·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을 거치며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진급했다. 6·25 때 그는 7사단장·1군단 부군단장·2군단장(2번)·참모차장(3번)·3군단장으로 개전 초기부터 낙동강선 방어작전, 북진·청천강 전투, 1·4후퇴, 유엔군의 재북진, 고지쟁탈전을 거쳐 휴전 때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전투지휘관'이었다. 국군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적의 주공이 지향된 동작동~대방동의 방어책임을 맡은 혼성 7사단장으로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 미군이 증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1950년 7월 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필두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증원돼 한미 간에 지연전략이 채택되고, 이에 책임구역이 경부가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미군, 동쪽은 한국군이 전담하면서 산악지역에서의 작전지휘의 효율성을 위해 1군단을 창설했다. 이때 유재흥 준장은 부군단장에 보직돼 김홍일 군단장을 보좌했다. 그는 7월 중순 새로 창설된 2군단장에 보직돼 낙동강 방어선에서 1·6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북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그는 미국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북진 작전 시 그는 2군단장으로 3개 사단(6·7·8사단)을 지휘, 미군보다 먼저 압록강에 진출했다. 그렇지만 운명의 신은 그에게 행운만을 주지 않았다. 중공군이 1·2차 공세에서 화력이 빈약한 2군단을 집중 타격해 그 여파로 군단이 해체되자 참모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4후퇴 직후 다시 중동부 전선을 맡은 3군단장에 보직돼 유엔군의 재진격 시 크게 활약하던 중 중공군이 4월 공세의 실패(서울 점령)를 만회하고 한국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목적으로 3군단(3사단·9사단)에 주력을 지향하고 기습공격했다. 이때 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해체됐다. 이후 그는 중장(31세)에 진급했고, 1952년 7월 백선엽 장군(2군단장)이 총장으로 영전되자, 다시 군단장에 보직돼 금성돌출부 형성에 기여했다. 1953년 초 군단장을 정일권 중장에게 물려준 그는 참모차장에 복귀해 휴전을 맞이했다. | |
1171 | 17-1-01 | 순국 김상태의병장 충절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 | 비석 | 의병운동 | 1864 | 너비 1m, 높이 3m | 1998-01-01 | 김상태는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강년과 의형제를 맺고 이강년 의병부대와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유인석·이강년과 함께 만주로 들어가 백두산 주변의 무송 임강 등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정미의병 봉기 때 더욱 신출귀몰한 작전을 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08년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체포된 후 군사지휘권을 인계받아 3년간 수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소백산맥을 근거로 해 의병활동을 했으며 일본 군경과 교전한 것이 무려 41회에 달했다.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 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인석 대장의 휘하로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도에 걸쳐 일군 수 백명을 무찔러 의병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간 수천 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일군과 싸웠습니다. 이에 경찰이 현상금을 걸자 1911년 6월14일 우중수의 밀고로 경북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중턱에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는데 3년형을 선고받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13일 만에 옥중에서 향년 50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는 삼척김씨 종친회가 주축이 되어 1998년 3월 15일에 세워졌다. |
1172 | 31-1-17 | 신태식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시(문경시민운동장관리소장) | 비석 | 의병운동 | 1864 | 0 | 1968-10-01 | 신태식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95년에 의병을 일으켜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와 상주에 사는 강용이 등을 농암장터에서 총살하였다. 그 뒤 광무황제의 퇴위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또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소모후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양주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나가사부로를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이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한 그는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그 기밀이 드러나 단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신태식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뒤에도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
1173 | 30-2-18 | 충혼탑(청도군)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청도군 | 청도군 | 탑 | 6·25전쟁 | 1950 | 1959-09-20 | 청도군 송읍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등 1, 519위의 청도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청도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9년 9월 20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82년 3월 충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군민의 뜻을 모아 1985년 6월 6일 현충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청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74 | 31-1-18 | 운강 이강년선생 경모각 및 기념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시 | 비석 | 의병운동 | 1858 | 0 | 1967-09-10 | 이강년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이기태와 의령 남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2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격하여 188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1896년 2월 문경 가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국내로 돌아온 이강년은 광무 황제(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운강은 문경 갈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죽령, 단양 고리평, 백자동, 용소동 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이 쏜 총에 발목을 맞아 붙잡혔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정부에 불만을 품고 정사를 기도하여 1907년 음7월 이후 호좌창의 대장이라 자칭하고 도당을 소집하여 내란을 일으켜 충청, 강원, 경기 각 도내를 횡행’했다는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기념비는 이강년 선생의 구국을 위한 위정척사 사상의 충정을 기리고, 갈평리대첩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10일에 건립하였다. |
1175 | 42-1-08 | 애국지사 간취 김희봉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김태인(손자) | 비석 | 3·1운동 | 1874 | 0 | 2000-10-01 | 김희봉은 경남 창녕 사람으로 유학자이다. 3·1운동 때 경상도 유림들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 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1919년 3월 18일(음력)경 일본 헌병에 발각되면서, 그는 고암면 원촌 출신의 유학자인 조긍섭과 함께 대구 헌병사령부에 연행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장서사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후 그는 3·1운동 1주기를 즈음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1920년 2월 창녕 장날에 「통곡아팔역 동포 오주열강」이란 선언문을 작성, 낭독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다시 고초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1176 | 30-2-04 | 충혼탑(군위군) | 국가수호 | 2003-02-14 | 대구광역시 군위군 | 군위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2-12-20 | 군위 동부리에 1962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서성호 중위 외 683위의 군위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군위군 재향군인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각 기관과 군민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2년 12월 2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군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8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군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77 | 31-1-20 |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시(석탄박물관) | 기념관 | 의병운동 | 1858 | 2002-11-11 | 이강년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이기태와 의령 남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2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격하여 188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1896년 2월 문경 가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국내로 돌아온 이강년은 광무 황제(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운강은 문경 갈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죽령, 단양 고리평, 백자동, 용소동 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이 쏜 총에 발목을 맞아 붙잡혔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정부에 불만을 품고 정사를 기도하여 1907년 음7월 이후 호좌창의 대장이라 자칭하고 도당을 소집하여 내란을 일으켜 충청, 강원, 경기 각 도내를 횡행’했다는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운강기념관은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도창의대장 이강년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2002년 4월 개관하였는데 유물전시관, 사당, 관리사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 |
1178 | 52-1-01 |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남원시 | 덕과면지역발전협의회 회장 신병용 | 탑 | 3·1운동 | 1919 | - | 1998-03-09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등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기미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성역화 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1179 | 31-1-30 |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권순태(유족)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8-06-30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경북 예천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권오정, 권혁무(權赫武, 1924~1985), 기성용, 김국경, 김철상, 김칠종(金七鍾), 이구성(李九成), 이만섭, 이병태(李炳泰, 1878~1968), 이봉래, 이순성, 이준형(李俊衡, 1883~1940), 임우경, 장진성(張進聖, 1895~1943), 장진우(張進瑀, 1866~1945), 정규원, 정진완(鄭鎭琬) 등은 이 비에 그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만파루복원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 6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
1180 | 30-2-08 | 왜관지구 전적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한국자유총연맹경북도지부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1978-07-01 |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전투지역인 왜관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산화한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교통부에서 1978년 7월 1일 전적기념관을 지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전투인 왜관전투를 기념하고 이때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며 동시에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적기념관 및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령들이여! 우리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기억하노라! 이곳 유학산 봉우리에 그리고 낙동강 기슭에서 남긴 그날의 거룩한 희생을 피의 발자국을 우리 겨레는 영원히 기억하노라. | |
1181 | 30-2-46 | 왜관지구전승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9-03-31 | 단기 4283년 적 제2군단은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할 목적으로 수차례 왜관에 도하작전을 펼쳤으나, 국군은 이를 분쇄하였다. 그 후 증원된 적을 격퇴하고 8월 20일부터는 국군이 역습하였다. 조국수호와 국군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지은 이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1182 | 31-1-22 | 애국지사 현호 박석홍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박후근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1 | 1968-12-19 | 박석홍은 비안면 서부리에서 출생하여 학문을 통달하고 1914년 19세의 몸으로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김약수와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찾아 가다가 일본경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만주에서 동지를 규합하더니 1920년 북만주 조선인청년총동맹을 조직하는 한편 잡지 『농군』 『혈청단』등을 발간하여 청년동지의 무장봉기를 제창하였고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에서도 구국의 필봉을 들었다. 그 후 이백파와 고려혁명군을 재조직하고 다시 단두단을 조직하여 서울에 있는 일본인 집안 살해 계획을 세운 뒤 1928년 소련영토인 연해주일대에서 망명동지를 구합하다가 청진 함흥동 감옥에서 4년의 옥고를 겪었다. 그로부터 국내동지들과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8.15해방 이튿날 의성경찰서에서 석방되기까지 20여회의 검거 투옥을 당한 애국지사이다. | |
1183 | 31-1-23 | 의병대장 죽포 이필곤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이병석 | 비석 | 의병운동 | 1864 | 0 | 1978-10-01 | 의성(義城) 출신 의병대장 이필권의 공적 기념비. 이필곤은 의성지방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896년 2월 의성 지방의 의병장 김상종(金象鍾) 의진에 입대하여 부장(副長)으로 활약하다가 김상종의 뒤를 이어 의병장이 되었다. 의성의 춘산면 왕산면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적하며 접전했으나 고종의 칙명을 받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것이 이력으로 인해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안동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07년 8월에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1978년 10월 1일 의병장 이필곤순국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이필권의 항일의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184 | 30-2-25 | 백선엽장군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칠곡군 | 동명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3-09-13 |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금암동 동명초등학교 내에 다부동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전적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73년 9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전투에서 지략과 용전으로 유학산 일대를 공격해온 적을 섬멸하고 부산교두보를 확보한 국준 보병 제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비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기습으로 아군은 전략적인 철수와 지연작전으로 전선을 이끌어오다가 동년 8월에는 낙동강전선에서 피아가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은 국군 제1사단장으로서 예하 제11, 12 및 15연대를 이끌고 이곳 다부동전투를 지휘하였다. 동년 8월 14일부터 한달동안 계속된 이 전투에서 장군은 지략과 용전으로 가산, 유학산 수암산 일대를 공격해 온 적을 섬멸하였으니 이야말로 아군의 최종적인 부산 교두보를 결정적으로 확보한 것이라, 아! 이 찬연한 전적영세 불멸의 빛나는 성전이로다. 한편 장군은 병력과 장비가 적의 열세였은즉 비상한 웅변으로 보충하였고 부대장병의 훈련이 믿음과 단결로써 극복하였나니 오로지 절박한 국난을 혈투의 연속으로써 타개하였으며 그의 수용은 내외에 높이 선양하였노라. 이에 지방유지들은 뜻을 모아 당시 제1사단의 본부였던 이 자리에 불멸의 그의 전적을 세계 온누리에 드날려 기리노라. | |
1185 | 53-1-03 | 3·1독립운동 무안 의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무안군 | 무안군 | 비석 | 3·1운동 | 1919 | 탑3m | 1975-08-15 | 이 비는 무안 출신의 서울 유학생 김한근과 지역 유지 10여 명이 장날에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여 1975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무안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한근이 독립만세 소식을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김한근과 지역 유지 수십여 명은 무안읍 장날인 3월 19일 새벽 읍내 각처에 독립 선언서와 경고문을 붙여 친일파의 반성 자숙과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이 날 읍내에 모인 수백의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밤 10시경까지 만세운동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중심인물 24명을 포함한 57명이 체포되었다. |
1186 | 30-2-21 | 충혼탑(상주시)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1963-04-25 | 상주시 남산공원 내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호국영령 등 1, 534위의 상주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상주시 지부 재향군인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4월 2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상주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상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87 | 53-1-13 | 구림 삼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구림청년계 | 탑 | 3·1운동 | 1919 | 0 | 2001-04-13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0일 영암읍 장날 조극환·박규상·최민섭·김봉규·김학용·김봉규 등의 사전 준비로 1천여명이 구림 대동계 광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영암읍 장터까지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박규상(朴奎相, 1893~1921), 박흔홍(朴炘弘, 1886~1966), 정상조(鄭相祚, 1882~1927), 정학순(鄭鶴順, 1892~1950), 조극환(曺克煥, 1887~1966), 조희도(曺喜道, 1892~1923), 최기준(崔琪焌, 1896~1957), 최성심(崔聖心, 1868~1939)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구림청년계 3·1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4월 13일 이 탑을 세웠다. |
1188 | 30-2-20 | 화령장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시 화서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8 | 1980-11-08 | 6.25전쟁 당시 육군 1사단 및 제17연대가 화령장지구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파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189 | 31-1-33 | 해창 조병국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조원경(손) | 비석 | 3·1운동 | 1883 | 1967-01-01 | 1919.3.26~3.27 청송 현서 화목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고 신진학교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민족운동교육에 앞장선 선생의 정신을 기리 위함 | |
1190 | 30-2-03 | 충혼탑(선산읍)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구미시 | 탑 | 6·25전쟁 | 1950 | 1955-10-16 | 선산 비봉산 중턱에 195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호국영령 등 1, 015위의 선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선산읍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5년 10월 1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이 탑의 휘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6·25전쟁 기간 선산 읍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구미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91 | 52-1-08 | 이재명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진안이씨 화수회 이수원 감사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90 | - | 2001-01-01 |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美國勞動移民會社)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숙청을 결의하자 그는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등박문이 동행한다는 사실에 접하고 평양역(平壤驛)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정거장 부근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등박문이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이등박문을 처단코자 동지 김병록(金丙綠)과 함께 서울과 원산(元山)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 괴수들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慶興學校)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의 처단은 그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이 담당하고, 김정익(金貞益)과 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7일에는 최종적으로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는데,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여, 조창호와 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을, 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후 12월 12일 상경하여 거사 준비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경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그의 정의로운 행동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은 인력거 아래로 떨어졌고, 그는 재빨리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그의 거사로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이 달려들자 이들과 격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일경들의 칼에 하체가 상하게 되어 붙잡혔다. 그런데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히도 잔명을 보존하여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의 의연함은 왜적의 재판장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그것은 1910년 봄 공판장에서 내외의 많은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그를 처단하였음을 역설하고, 일본인 재판장의 공모 여부에 대한 심문에 이천만 조선 동포가 모두 매국노를 죽이는데 가담한 것이라고 답한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변호사인 안병찬(安秉瓚)의 성의있는 변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그는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1192 | 30-2-05 | 충혼탑(성주군)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성주군 | 성주군 | 탑 | 기타 | 1950 | 1963-06-06 | 성주군 예산리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 등 700위의 나주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성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성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성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93 | 31-1-34 | 중호 임용상의사 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임한칠(손) | 비석 | 의병운동 | 1877 | 0 | 1978-01-01 | 1905년 을사늑결시 창의 동해창의대장으로 활약하고 산남의진과 합세하여 청송, 영덕, 의성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군자금모금활동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의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
1194 | 31-2-01 | 충혼탑(안동시)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5-05-30 | 안동 정하동에 196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안동 출신 군경 및 민간인 등을 포함하여 1, 257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안동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5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충혼탑의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진필이며 비문은 한솔 이효상의 글이다. 6·25전쟁 기간 안동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안동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95 | 31-1-04 | 달성서씨 마평 4의사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서점(서효원의 장손) | 비석 | 의병운동 | 1905 | 0 | 2000-09-03 |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당시 친일정권에 의해 단행된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1월에 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경북 청송향교의 유생이자 달성 서씨 집안인 서효원(徐孝源, 미상~1897), 서효격(徐孝格, 1855~1936), 서효달(徐孝達, 1839~1904), 서효신(徐孝信, 1848~1915) 등이 참여하였다. 이 의진에서 서효신은 소모장을, 서효원은 백의종사에 이어 의영도지휘사를, 서효격은 서기를 각각 맡아 활동하였다. 청송 지역 달성서씨 후손들은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2000년 9월 3일 이 비를 세웠다. |
1196 | 31-2-12 | 충혼탑(영양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 | 탑 | 기타 | 1968 | 1968-05-31 | 영양군 서부리 남산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전몰용사 등 영양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양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8년 5월 31일 준공하였으며, 2009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산주의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197 | 31-2-04 | 문경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시 | 탑 | 기타 | 1950 | 0 | 1967-05-31 | 문경시 점촌동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문경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거룩한 희생과 위국헌신 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7년 6월 6일 충혼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문경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문경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98 | 31-2-10 | 충혼탑(청송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청송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9-05-01 | 청송 금곡리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346위의 청송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청송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한군경원호회의 후원을 받아 1959년 5월 1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2년 1월 8일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등에서 청송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송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199 | 33-2-24 |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지구6.25참전학도의용군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비석 | 1977-12-15 | 경북 포항시 북구 학산동에 포항지구를 사수하다 전사한 학도의용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학도의용군 6·25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77년 12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포항을 사수하다 전사한 학도의용군의 전공을 기념하여 학도의용군 6·25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포항에 있는 각급 기관장과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1977년 11월 3일 전적비를 착공하여 1977년 12월 23일 완공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군의 남침이 있던 1950년 8월 1일 새벽 3시 30분경 중무장으로 탱크를 앞세운 적군 12사단, 5사단 유격 766부대가 진공상태에 빠진 아군 3사단 사령부를 기습하여 올때 조국을 사랑하는 젊은 학도 71명이 교복을 입은 채 MI소총 한자루에 실탄 250발로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11시간 반 동안 버티고 싸우며 반격하다가 실탄이 다하면 개머리판으로 치고 또한 이빨로 물어뜯는 혈전을 거듭하다가 적병의 박격포, 수류탄의 폭음 속에 대한 민국만세를 부르다 숨져 갔으니, 이들은 전사에 길이 빛날 호국 학도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11시간 반의 전투는 무방비 상태에서 방황하던 20여만(피난민)의 시민들을 무사히 피난케 하고 괴뢰군의 주 침공 선을 2시간 동안이나 지연시켰으며 영덕 방면에서 고립상태에 빠진 3사단 주력 부대를 철수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고, 8월 15일전 부산 함락이라는 적군 김일성의 지상명력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괴뢰군 300여 시체를 남기고 퇴각케하는 혁혁한 전투였으나 이 전투에서 슬기롭고 용감한 젊은 학도 58명은 영원히 돌아올수 없는 조국의 수호신이 된 것이다. 학도병아 잘 싸웠다. 승리의 길로 역적의 공산당을 때려 부셔라. 밀려오는 괴뢰군을 때려 죽여라.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 이는 그날의 학도 의용군들의 노래였다. |
1200 | 31-2-25 | 적성리전투 전승비·순국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12-09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1-04-01 |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 적성리 전투 전승 기념 및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문경시에서 1971년 4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중인 1951년 1월 13일에서 16일까지 4일간 동로면 적성지역에서 미군 제10군단에 배속되었던 한국군 대대(대대장 배동 소령)는 북한군 제10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배동 소령 대대는 2, 0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크게 전승을 거두었다. 문경군에서는 이 전투 참전용사들의 전승기념과 6·25를 전후하여 북한군과 교전중 전사한 향토출신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순국 및 전승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동로면 노은리에 2개의 비를 각각 건립하였다. 그후 1980년 10월 당시의 격전지였던 동로면 적성리 산4번지 향토예비군 교육장 옆으로 이전 건립하게 되었다. 순국위령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조국수호와 자유를 위하여 이 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니 용전의 부대는 특별공격대로서(미 제10군단 비속 대대장 비동 소령, 중대장 손장말 대위, 동 허태운 대위, 소대장 정영화 소위, 이상헌 소위 등) 1951년 정월 13일까지 북한군 제10사단을 격파하여 확인 사살 1, 057명, 적 부상 900명, 무기노획 다수의 전과를 올렸도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용감히 싸운 이들 부대전원의 공훈과 적성리 주민의 일치단결된 애국충정은 이 고장 강산과 더불어 청사에 길이 빛나리. 전승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해방이후 우리 겨레와 이 고장을 수호하다가 많은 청년이 북한군들과 싸워 장렬하게 전사 또는 순국하였으니 특히 6·25를 전후한 어지러운 시기에 이 고장에서 벌어진 전투중 1951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의 통로로 남하를 기도하던 적 사단 규모의 대병력과 대적하여 우리 젊은이들은 군과 경찰을 도와 일기당천의 용맹으로 크게 용전분투하여 대성과를 거두었으니 이 어찌 장하지 않으리. 황정산을 전투장으로 이 고장을 간성으로 지켜주시다가 순국한 거룩한 넋이여 고이 잠드시라. | |
1201 | 31-2-26 | 반공애국투사 합동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12-09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1-10-03 | 영양군 서부리 영양호국공원 내에 1961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으로 일월산 일대에서 공비들에 의해 희생된 영양 군민을 추모하기 위해 ‘반공애국투사 합동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영양군은 이곳 출신 조만영, 오창해, 김기수, 유병두 등 호국의 사도들의 숭고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사랑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1년 10월 3일 추모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영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나, 공산무리에 의해 일월산 등성이나 후미진 골짝, 혹은 개울가에서 여러 군민이 반공의 이슬로 사라졌다. 영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02 | 52-1-09 | 호남창의동맹단 의병 위령비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사)대한이산묘봉찬회 | 비석 | 의병운동 | 1909 | 0 | 1998-04-08 | 정재 이석용을 의병대장으로 삼은 진안, 장수, 임실, 순창, 남원 등지의 의병 |
1203 | 33-2-19 | 충혼탑(경주시)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경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1986-01-01 | 경주 황성공원 내에 1986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경주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경주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충혼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6년 5월 1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경주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12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경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04 | 31-1-36 | 김도현의병장 생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이분조 | 생가 | 의병운동 | 1852 | 0 | 1580-02-01 | 김도현은 경북 영양출신이며, 호는 벽산이다. 그는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영양지역 곳곳을 돌며 창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호응이 없자 1896년 2월 17일 청량산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경북 북부지역을 돌며 활동하던 김도현은 3월 18일 예안의 선성의진과 합세하였다. 선성의진의 중군장을 맡은 그는 태봉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태봉전투에서 패하자 영양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부대를 만들어 1896년 10월 15일까지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펼쳤다. 이는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최장기간에 걸친 항전이었다. 김도현은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이 있자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는 한편 각국 공관에 포고문을 보내 역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그는 상소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6년 1월 21일 5읍도집강 때 활동하던 포수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06년 가을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은 김도현은 각 지역에 격문을 발송하고 다시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909년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곧 순사하려 하였으나, 노친이 계셨기에 뜻을 펴지 못하다가 부친이 돌아가신 뒤 동해로 가서 투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1205 | 33-2-09 | 6·25 참전 전몰학우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경주공고 | 탑 | 6·25전쟁 | 1950 | 1984-01-01 |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한 학우들을 추모하기 위해 경주공업고등학교 동창회가 건립위원회를 구성해 성금을 모금하여 1984년 경주시 사정동에 위치한 경주공업고등학교 교정에 전몰학우위령탑을 건립했다. | |
1206 | 51-1-17 | 무성서원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장소 | 의병운동 | 1906 | 1484-01-01 | 무성서원은 원료 고려시대에 최치원을 제향하기 위한 태산사(泰山祠)였다. 조선조에 들어서서 성종 14년(1483) 정극인의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숙종 22년(1696)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906년(병오년) 3월 고석진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자 최익현은 태인의 임병찬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같이할 것을 권하였다. 몇 차례의 서신 왕래를 통해 임병찬의 뜻을 확인한 최익현은 당시 거주하고 있던 충청남도 청양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였다. 임병찬을 제자로 받아들인 최익현은 회문산 북록의 상종성에 약 2개월간 머물며 거의를 준비하였다. 창의소를 지어 고종에게 올린 최익현은 임실·순창·담양 등지로 사람을 보내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친 뒤 그 자리에서 창의를 발의하니 따르는 자가 80여 명에 달하였다. | |
1207 | 52-1-10 | 독립유공자 추모탑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마령면장 | 탑 | 기타 | 0 | 0 | 1997-08-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진안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강신홍(姜信洪, 1923~1980), 김경선(金京先, 1885~미상), 김규현(金奎鉉, 1879~1950), 김사범(金士範), 김암우(金岩宇, 1887~미상), 김영필(金永弼, 1896~1976), 김옥현(金玉現, 1878~1907), 명경안(明敬安, 1852~미상), 박동근(朴東根, 1887~미상), 박재열(朴在烈, 1907~1988), 박재춘(朴在春, 1886~1967), 서성일(徐聖一, 미상~1908), 신치수(辛致守, 1874~미상), 심우상(沈尤相, 1888~미상), 안성(安盛, 1926~), 안왈오(安曰五, 1867~미상), 안일(安鎰, 1924~), 양인문(梁仁文, 1887~1944), 오기열(吳基烈, 1888~1950), 이옥동(李玉童, 1922~), 임종문(林鍾文, 1886~1908), 전영상(全永祥, 1885~1958), 정진희(鄭鎭喜, 1885~1940), 조경화(趙京化, 1862~미상), 채도석(蔡道錫, 1915~1984), 최병무(崔秉茂, 1922~), 하준태(河俊太, 1873~미상), 한청여(韓淸汝, 1863~미상), 황준성(黃俊聖, 1897~1910) 진안군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1208 | 31-1-37 | 벽산 김선생 유허비(김도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김기칠 | 비석 | 의병운동 | 1852 | 0 | 1946-01-01 | 김도현은 1852년에 영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강개하고 기백이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그 효성은 다시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승화되었다. 1895년 말에 단행된 단발령 이후 김도현은 영양, 안동, 예안 등에서 의병 운동을 주도하느라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이리저리 사방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는 것에 몹시 마음 아파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자결하려했으나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1914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그는 그해 11월 7일 동짓날에 영해의 관어대로 가서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걸어 들어가 자결 순국하였다. |
1209 | 52-1-05 | 순국의병장사지상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풍면장 | 조형물 | 의병운동 | 1876 | 0 | 1999-08-31 | 건립추진위원회는 1999년 8월 1일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1495-1에 무주 출신의 황대연, 이병열, 이종성 세 의병장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국의병장 사지상을 건립하였다. 황대연(1876~1908)은 1908년 2월 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유종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포대장이 되어 장수·무주·함양·안의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같은 해 3월 23일 무풍면 지성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종성(1871~1910)은 1908년 의병장 문태서 의진에 들어가 영남·호남·호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흑석산 계곡에서 소수의 의병과 함께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습격하였으나 전사 순국하였다. |
1210 | 33-2-03 | 한·미해병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해병1사단 | 탑 | 기타 | 1984 | 1989-06-28 | 한미연합 상륙훈련중 장렬하게 산화한 한, 미 해병용사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혈맹의 우의를 다져온 한, 미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 | |
1211 | 52-1-06 | 전일봉선생 상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동상 | 3·1운동 | 1896 | 0 | 2001-03-01 | 전북 무주(茂朱)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무주군 무주읍(茂朱邑)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 무주에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인근의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3월 7일경이었다. 이에 이곳 인사들은 다른 지방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군민들간의 연락을 통해 만세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이때 전일봉은 인근의 기독교도들과 접촉하면서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해 갔으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 무주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일로 정하는 한편, 읍내보통학교 학생들과 뜻을 같이하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일인 4월 1일 오후 2시경, 40∼50여 명이 먼저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세우고 집합한 다음, 전일봉이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주위의 장꾼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헌병 분견소의 무장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들 시위군중을 해산시켜 버렸다. 이때 전일봉과 보통학교 학생 3명이 붙잡혔으나, 그날 밤 읍내 주위 산상에서 청년 및 보통학교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전일봉은 이 일로 이해 4월 11일 광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212 | 33-2-20 | 충혼탑(포항시)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탑 | 6·25전쟁 | 1950 | 1964-01-01 | 6.25전쟁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포항시 출신 참전용사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964년 시민들의 뜻을 모아 탑을 건립 | |
1213 | 33-2-21 | 전몰학도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탑 | 6·25전쟁 | 1950 | 1957-08-15 | 학도의용군은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역 전투에 출전, 공산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950년 8월 11일 새벽 김춘식 외 학도의용군들이 장렬히 전사하는 등 희생도 많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역 전투에 참전한 전사자들의 위훈을 길이 남기고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이 탑을 건립하였습니다. | |
1214 | 43-1-37 | 3·1의거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사천시 | 사천읍 | 비석 | 3·1운동 | 1919 | 1969-08-15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중순 경남 사천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3일 김진곤이 주도한 곤양장터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3월 21일 사천보통학교 졸업식장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져 이날 오후에는 3백여 군중이 사천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진주읍으로 시위행진을 하던 도중 일제에 의해 차단되었다. 3월 25일 삼천포 장날에도 1천여명이 3개 대열로 나누어 다음날까지 만세시위를 하였다. 4월 5일에는 곤명면에서, 4월 10일과 16일에는 서포면에서 4월 6일과 19일에는 곤양면 장터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 14일에는 중선포의 도로공사부역을 마치고 귀가하던 유영갑 등 1백여명이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러한 시위로 김진곤(金鎭坤, 1890~1963), 송지환(宋芝煥, 1903~1929), 신영안(申英安, 1899~1944), 유승갑(柳承甲, 1892~1960), 이규현(李圭玄, 1887~1972), 이영근(李永根, 1894~1922), 최범술(崔凡述, 1904~1979)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사천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9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
1215 | 33-2-31 | 미해병대 제1비행단 전몰용사 충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포항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2-12-22 | 6·25 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대 제1비행단 전몰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당시 미군통역관으로 근무한 이종만씨가 1952년 12월 22일, 포항역 광장에 이 충령비를 건립하였다. 1969년 4월 22일 송도동의 현 위치로 이전했으며, 한국자유총연맹 포항시지회 송도동분회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50년 8월 3일 제214해병전투기대대의 콜세어 전투기 8대가 발진하여 첫 공격을 개시한 미 제1해병항공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아군을 근접지원 했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유엔군을 근접지원 했다.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을 수복할 때 하늘에서 근접지원을 했다. 1950년 9월 23일에 김포비행장으로 기지를 옮겼다. 1950년 10월 26일 미 제1해병사단이 원산에 상륙하자 원산 인근의 연포비행장으로 기지를 옮겼다. 제1해병사단을 비롯하여 미 제10군단이 장진호에서 철수할 때 출격하여 근접지원 공격을 했고 12월 17일 연포비행장이 폐쇄된 후로는 3척의 항공모함 갑판으로 기지를 옮겨 흥남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 |
1216 | 43-1-36 | 3·1운동 창의탑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고성군 | 고성군 | 탑 | 3·1운동 | 1919 | 1986-06-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배둔리 장날을 이용하여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洛僖)·최정원(崔正元)·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허재기 등의 주도로 장터에서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김갑록(金甲錄, 1899~1977), 문기식(文琪植, 1898~1970), 서응엽(徐應燁, 1894~1948), 우태선(禹泰先, 1889~1939), 이정수(李正洙, 1899~1964), 허재기(許在其, 1887~1969)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성군 삼일운동창의탑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6년 6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
1217 | 33-2-25 | 포항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포항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9-05-31 | 경북 포항시 남구 송도동 포항기상대 옆에 포항지구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던 국군의 전투상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에서 1959년 3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8, 9월은 피아간 낙동강전선의 공방전이 가장 치열했다. 북한군은 제2군단의 제5, 제12사단 및 366부대와 국군 및 미 3개 특수임무부대, 제7함대 일부, 제5공군 등이 상호 대치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포항지역을 포함한 낙동강전선에서 용전분투하여 방어함으로써 결국은 북진의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치열하던 1950년 8월 9일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과 12사단 및 366부대가 경주, 울산, 부산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포항을 점령했을 때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 독립 17연대 민부대와 경찰, 학도의용군 그리고 미군 특수임무부대와 합동으로 44일간의 혈전을 감행한 결과 동해안의 요충지인 이 지역을 탈환한 전투이다. 이 전적비는 포항시 육거리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그후 1969년 4월 20일 송도동의 현 위치로 이전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해에 솟은 햇빛은 이 강산을 빛내거니와 포항에 벌어진 이 전투는 우리 역사를 새롭게 했도다. 단기 4283년 8월 15일, 17일에 걸친 공산군 제5사단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포항을 점령하였으나 우리 수도사단, 민부대, 브래들리부대 및 1연대, 26연대의 반격으로 8월 18일 포항을 탈환하였으나 우리 제3사단은 9월 1일부터 5일에 이르기까지 계속 침공하여 오는 적을 송학동 221고지, 145고지에 뻗치는 방어선에서 치열한 격퇴와 저지를 계속하던 중 적 제25사단이 경주로, 제12사단이 영천으로, 제15사단은 우리 제3사단 정면으로 일제 총공격을 감행하여 왔다. 이에 우리 제3사단은 우군 총반격이 개시되기까지 적의 치명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끝끝내 방어에 성공하였다. 우리 용사들의 과감무쌍한 이 혈투사는 자손만대에 영원히 빛나리. | |
1218 | 33-2-01 | 11인의 해병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해병제1사단 | 탑 | 6·25전쟁 | 1984 | 1984-01-28 |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해병 1사단 영내에 1984년 9월 28일 제1해병사단이 팀스피리트 훈련중 사망한 11인의 해병대원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충혼탑이다. 1984년 3월 24일 새벽 4시, 팀스피릿(Team Spirit) 한미연합상륙 훈련중 영덕 시루봉 일대에서 악천후 속에서 야간 저공 헬리콥터 침투를 감행하다가 미국 해병대원들과 함께 장렬히 순직한 해병대 1사단 72대대 해병대원 11인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꽃다운 청춘을 불살라 평화의 수호신이 된 한·미 해병 용사들이어! 그대 떠났어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대지엔 그날의 의기와 투혼의 함성이 포효하고 있도다. 여기 혈맹의 우의와 가신 형제의 넋을 기리기 위해 표상을 세우나니 영령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의 얼 속에 그 이름 영원하리 이 충혼탑은 순직한 해병대원들의 투철한 호국정신을 길이 받들고 그 넋을 추모코자 1984년 9월 28일 해병대 1사단 해안대대 장병들의 작업으로 건립하였다. | |
1219 | 43-1-40 | 남해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남해군 | 남해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68-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2일 이예모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와 4월 3일 남양리·금음리·문창리의 노상에서 이예모·정순조·정학순·윤주승 등의 사전 준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남해읍으로 향했다. 이어서 남해읍 장날인 4일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군청, 우체국, 주재소 등에 몰려가 관리들에게도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시위에서 강한문(姜漢文, 1871~1926), 김희조(金熙祚, 1871~1930), 원복생(元福生, 1892~1937), 유봉승(柳琫承, 1901~1956), 유찬숙(柳贊淑, 1891~1926), 윤주순(尹柱舜, 1896~1964), 이예모(李禮模, 1883~1954), 장학순(張學順, 1887~1952), 정몽호(鄭夢虎, 1898~1984), 정순조(鄭順祚, 1885~1962), 정용교(鄭鎔交, 1885~1948), 정익주(鄭益周, 1896~1975), 정임춘(鄭任春, 1890~1956), 정재모(鄭栽模, 1897~1950), 정학순(鄭學淳, 1897~1920), 정흥조(鄭興祚, 1889~1964), 하상근(河祥根, 1889~1953), 하준호(河準互, 1887~1942)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해3·1동지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8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1220 | 33-2-27 | 신녕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신녕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10-30 | 경북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성환산공원 내에 신녕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1958년 10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8월초 안강, 포항지구로 침투하려던 적이 의성 지구에서 입은 병력 손실 때문에 의흥, 신녕지역으로 진출했고 이에 아군 제 6사단이 적의 최후 공격을 저지했다.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분전난투를 거듭했던 제6사단의 신녕 지구 전투는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야욕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던 전투였다. 특히 9월 4일에는 제 19연대의 1대대가 화산동 깊숙이 숨겨놓은 적의 전차 8대를 발견하고 특공대를 파견하여 모두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9월 4일 북한군이 영천을 점령하자 북한군 제 8사단이 신녕으로 진출했고 아군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포병으로 방어했다. 9월 7일 조림산과 운산동에서 침입한 적 1개 대대 병력이 합세하여 공격했으나 아군도 포병의 집중화력으로 크게 이겼는데 유재흥 준장이 각 연대에게 되도록 많은 예비대를 보유하도록 지시했던 것이 승전으로 이끌게 된 이유였다. 이날 제7연대의 방어진에서도 2개 대대병력의 공격으로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는데 아군은 진지를 약간 뒤로 이동하고 전 화력을 집중 발포했으며 미 공군 전폭기의 지원 사격과 포병의 지원 화력 그리고 각 대대의 박격포 사격으로 적의 인해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8일부터 15일까지 전투에서 아군은 수차례 승전했으며 적은 시체를 버린채 황망히 퇴각했다.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장병의 사기는 충천했다. 신녕-화산 지구 전투는 신녕-조림산 지구 전투와 더불어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적 8사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북진반격의 기반을 마련한 전투이다. | |
1221 | 33-2-29 | 영천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0-10-07 | 경북 영천시 교촌동에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건설교통부에서 1980년 10월 7일 이 비를 세웠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 제2군단은 일거에 부산을 석권할 기도 아래 1950년 9월 4일 전략의 요충인 이곳 영천을 점령하고자 최후의 공세를 폈다. 만약 영천이 함락되면 유엔군은 울산-밀양을 잇는 이른바 데이비드손 방어선으로 철수할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군 제2군단 장병들은 국가의 운명이 싸움의 승패에 달려 있음을 알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어찌할 바 없이 한때는 영천을 내놓기도 하였다. 분노한 군민들은 너도나도 총을 잡고 전장에 나섰다. 이윽고 전열이 정비되자 유재흥 군단장은 1950년 9월 9일 총반격전을 감행하여 금호강변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고 백척간두에 섰던 조국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고 북진의 기틀을 만들게 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국의 운명을 건 갈림길에 적구의 무리들이 영천벌을 넘나드니 인과 철이 용용하는 전쟁터로 너, 나 뛰쳐나가 둑을 막아 내 고장을 지켰다. 저~ 기룡산은 이~ 금호강은 너의 용자를 길이 간직하리. |
1222 | 24-1-09 | 소수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괴산군 | 광복회충북북부연합지회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1.5m, 너비2.87m | 1985-01-01 |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괴산군이 세운 기념비이다. 기념비는 높이 1.5m, 너비 2.87m이며, 부지 면적은 63㎡이다. 1985년 9월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수면의 독립만세운동은 몽촌리의 유해륜(柳海崙)과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등이 주도하였다.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유해륜과 경권중은 같은 군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고무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 송능식이 앞장선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하여 몰려갔으나, 사전에 탐지한 일제 경찰의 무력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 밤 8시경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유해륜·경권중·송능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해륜·경권중은 징역 10월형을, 송능식은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경권중은 모진 고문을 받고 병보석되어 귀가하였으나, 얼마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후에 경권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유해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송능식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1223 | 33-2-04 | 충혼탑(영덕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덕군 | 탑 | 기타 | 1950 | 0 | 1979-01-01 | 영덕 화개리 영덕군민공원 내에 197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481위의 영덕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덕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9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덕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덕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24 | 43-1-39 | 독립지사 윤병호선생의 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남해군 | 윤희건 | 비석 | 문화운동 | 1909 | 1998-03-01 | 윤병호는 1909년 백산 안희제·남형우·서상일·김동삼·박중화 등 80여 명의 동지들이 참가한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부산에서 백산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에 지배인 겸 중역으로서 참여하였다. 이 당시 백산상회는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주요 공급처였다. 1919년 11월 안희제와 함께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다수의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할 때 여기에 참가하여 국어사전 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같은 윤병호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225 | 33-2-13 | 군경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유족회울진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6-01-01 | 울진군 척산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기성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유족들은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기 위해 1966년 1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기성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226 | 25-2-66 | 임택순대위 동상 | 국가수호 | 2010-06-09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동상 | 6·25전쟁 | 1951 | 1960-03-19 | 충북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앞에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최초의 전사자가 된 임택순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공사동문회에서 1960년 3월 19일 이 동상을 세웠다. 1951년 8월 5일 공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하여 1953년 1월 23일 첫 출격을 개시하였으며, 동년 3월 6일 고성 남방 구성면 148고지 상공에서 국군 지상군의 작전을 엄호하던 중 적의 포화에 피격되어 조종이 불가능해지자 적진을 향하여 자폭함으로써 출격 11회를 마지막으로, 공사 출신으로는 최초의 전사자가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몸은 비록 가셨어도 그 얼은 더 큰 별이 되어 성무대 언덕을 길이 비추리라. 1930년 12월 31일생. 본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전쟁 출격중 1953년 3월 6일 고성 상공에서 전사하시다. 본교 출신중 최초로 호국의 별이 되신 큰뜻을 기리기 위하여 1기 사관부터 33기 사관까지 졸업생의 정성을 모아 이 상을 세운다. | |
1227 | 25-2-25 | 해외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베트남참전전우회 청원군지회 내수읍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높이 4.3m | 1997-06-16 | 청원 마산리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내수읍 출신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해외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전우회 내수읍지회는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에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6월 16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내수 읍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내수읍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전쟁의 각종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228 | 31-1-38 | 창의순절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김기칠 | 비석 | 의병운동 | 1852 | 0 | 1988-08-15 | 영양 출신의 항일의병장 김도현 및 애국지사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세운 기념비. 영양 출신 애국지사들은 의병뿐만 아니라 국권회복운동, 의열투쟁, 3·1독립운동, 청년운동 등 국내 독립운동과 만주 독립군과 한국광복군 등 해외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항쟁하였다. 198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지역 유림들로 구성된 기념비 설립 추진위원회는 영양 출신 김도현을 비롯한 86명의 독립지사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검산성 기슭에 비를 세웠다. |
1229 | 25-2-10 | 6·25 격전지 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진천군 | 진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78-01-01 | 진천군은 1978년 1월 진천읍 행정리 잣고개 마루에 진천방어전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6·25격전비를 건립하였다. 봉화산과 문안산 사이의 잣고개를 둘러싼 공방전은 진천 방면으로 남하하던 북한군 2사단과 김석원 장군 휘하의 수도사단 사이에서 7월 10일부터 5일간이나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 전투에는 수도사단 장병들은 물론 진천중학교 출신 학생 100여 명도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한군의 남진계획을 봉쇄하고 적의 남하를 일정 기간 저지하여 이제 막 도착한 미군의 병력 전개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아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던 것이다. |
1230 | 25-2-11 | 충혼탑(진천읍)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진천군 | 진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4-06-16 | 진천군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 땅에 평화의 뿔리를 내리는데 신명을 바치신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6.25전몰군경의 불굴의 호국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빛나는 위훈을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된 조형물로 최초 진천읍 읍내리에 건립되었으며, 1994년 현재의 위치고 이전하였다. |
1231 | 24-1-12 | 입암 주용규선생 의병 순절 숭모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충청북도 제천시 | 광복회충북북부연합지회 | 비석 | 의병운동 | 1896 | - | 1989-01-01 | 제천 출신 주용규 의병장의 순절을 기리는 숭모비. 일찍이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유인석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참모로 활약하면서 팔도와 백관, 각국공사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었다. 1896년 충주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인 현오와 현삼도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항쟁을 하다가 모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89년 1월 1일, 대한노인회 제천시지회 봉양읍분회에서는 그의 애국 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232 | 25-2-03 | 충혼탑(보은읍)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보은군 | 보은군 | 탑 | 6·25전쟁 | 1950 | 5.6m x 6.8mx 11.9m | 1969-06-06 | 보은군 남산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국군 1, 055위(육군 1, 026, 해군 19, 해병 10), 경찰 35위, 대한청년단 52위 등 1, 142위의 보은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보은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을 1969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고, 1995년 11월 30일 새로 보수하였다. 6·25전쟁 기간 보은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보은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33 | 31-1-40 | 독립운동 기념비(영양)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이병철(유족) | 비석 | 의병운동 | 1985 | 1985-11-01 | 영양군은 1985년 11월 1일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산67-9에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의병을 모집하여 500여명을 이끌고 영양, 울진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이현규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고 계승 발전하기 위해 독립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현규 선생(1874~1917)은 1905년 12월 중순 울진의 불영사에서 안동·청송·진보·영양 등지에서 모여든 500여 명의 병력으로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영양 울진 왜관 영해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왜관전투 때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본인은 총상을 입었고 많은 의병을 잃었다. 영일군 청하면에 피신하여 상처를 치료하던 중 순국하였다. | |
1234 | 25-2-01 | 반공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보은군 | 속리산 자유총연맹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6-06-01 | 속리산상우회는 6·25전쟁 당시 조국의 평화수호를 위해 산화한 보은군 출신 육군중사 이정무 외 34명의 6·25참전유공자와 향토방위에 헌신한 이름없는 청년 반공투사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1996년 6월 1일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산 12(속리산국립공원 내속보건소 뒤)에 반공충혼비를 이전 건립하였다. 원래 반공충혼비는 1951년 법주사 오리숲에 충청일보사와 보은농업학교, 보은중학교의 주관하에 건립되었던 것이다. |
1235 | 43-1-33 |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산청군 | 이인근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46 | 1995-03-01 | 1919년 3월 21일 산청군 단성면 일대 수천명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순국한 선열과 옥고를 치룬 수많은 우국지사와 무명의 애국선열을 기리기 위하여 산청군 항일독립유공자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 | |
1236 | 43-1-10 | 의병장 석상용선생 전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이방강 | 비석 | 의병운동 | 1870 | 0 | 1995-10-29 | 지리산을 중심으로 실상사, 쑥발제, 벽소형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함얌, 남흥지역등에서 의병활동을 한 석상용 의병장의 전적을 기려 건립 |
1237 | 33-2-06 | 전몰군경 충혼비(매화면)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원남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1-01-01 | 울진군 매화리에 1961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군경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재향군인회 원남면 분회는 남도선, 임관식, 최탁, 김길홍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1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원남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원남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38 | 33-2-07 | 충혼탑(울릉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릉군 | 울릉군 | 탑 | 6·25전쟁 | 1950 | 1975-12-31 | 울릉군 도동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울릉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울릉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5년 12월 3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을릉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울릉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39 | 43-1-16 |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비석 | 의병운동 | 1880 | 0 | 1970-03-21 | 함양군 안의면 출신으로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호남일대에서 활약한 문태서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
1240 | 43-1-12 | 함양읍 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985-12-01 | 1919.3.28 함양읍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선인의 뜻을 기림 | |
1241 | 33-2-10 | 전몰학도병 추념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경주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8-01-01 | 경북 경주시 황오동 경주중·고등학교 교정에 형주중·고등학교출신 학도병으로 산화한 학도병을 추모하기 위해 수봉교육재단에서 1954년 11월 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뜻하지 않은 공산 침략을 받게 되자 젊은 학도들은 용약 전선으로 뛰어나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다. 그들 가운데는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그들이 나라를 위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정신은 비할 바 없는 고귀한 일이었다. 이땅에 전운이 걷히지 않고 그들의 의를 숭상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전장에서 돌아온 학도병들은 그들 순국한 동지들을 그리며 그들 영령을 추모하는 유적을 남기기 위해 재단과 종친회 그리고 동창회 및 학도호국단 등의 힘을 모아 모교의 뜰에 작은 비를 다듬어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족을 반역한 붉은 이리떼의 남침으로 바람 앞에 등불이 된 조국을 구하러 펜 대신 총을 들고 초연탄우속을 치닫던 경중학우들. 자유와 평화와 통일 위해 순결한 피를 뿌리며 화랑의 기개로 목숨 불태운 그 젊음 그 열정 오! 고귀한 충혼이여. 나라와 겨레를 건져 놓고 그대들은 어느 기슭에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혹은 무덤 하나 없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무명영령들 하늘은 푸르러 저렇듯 무한한데 역사의 가시밭길 굽이굽이를 헤쳐온 지 어느덧 서른네 해. 아! 살아남은 자가 오히려 할말이 없구나. 여기 불사조로 온 그대들의 무기보다 강한 양심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잇게 하는 가교를 우리 서로 얼싸앉게 하라. 그리고 거룩한 그대들의 뜻과 이름같이 여기 빛나리. 자유 평화 정의와 함께 길이 여기 살으리. | |
1242 | 25-2-02 | 충혼비(장안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보은군 | 어광수(봉비리 이장) | 비석 | 6·25전쟁 | 1981 | 0 | 1981-08-01 | 보은군 봉비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봉비리 주민들은 이 마을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민의 성금을 모아 1981년 8월 1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보은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보은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43 | 25-1-01 | 충민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옥천군 | 충민사봉헌추진위원회 | 사당 | 기타 | 2002 | 0 | 2002-04-01 |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신 후 옥중 순국하신 김순구 선생과 항일애국지사 25인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충절을 기림 |
1244 | 43-1-34 | 권석도의병장 흉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함양군 | 박홍규 | 동상 | 의병운동 | 1880 | 1990-06-01 | 권석도는 한말의 의병장으로서 함양읍 백전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크게 분노하여 1907년 김동신 의병진에 참여하였다가 고광순 의병진에 합류하였고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계면에서 박인환 의병진과 합류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선생은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과 대일 항쟁을 하던 중, 1908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어 하동주재소에 구금되었으나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던 중 일경의 추격을 받아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의병장과 합류하여 진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며 활동하던 중 1909년 10월 10일 일경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으로 확정, 수감 중 일본왕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그후 1918년 2월 일본 경찰로부터 다시 강도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선생은 허위자백을 강요당하는 등 혹독한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0년에 재일본 거류민단(단장 박병헌)에서 백전면사무소 뒤편 동산공원에 장군을 기리는 흉상을 건립하였다. | |
1245 | 33-1-02 | 의병대장 신돌석장군 유적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덕군 | 장소 | 의병운동 | 1878 | 1999-11-18 | 한말 평민 의병장으로서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 일원에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신돌석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모아 전시한 곳으로 기념관, 충의사, 동, 서재등으로 구성 | |
1246 | 25-2-14 | 충혼탑(청성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청성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9-06-06 | 청성면 산계리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96위의 청성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옥천군은 청성면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9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청성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성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47 | 33-2-30 | 순국동문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문화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5-07-06 | 경북 경주시 충효동 문화고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한 24인을 추모하여 동창회에서 1985년 7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비문은 아래와 같다. 청산을 지키려다 청산에 진 님, 흘리신 거룩한 피 엉켜 배달의 맥 이루심이여! 국조 개국하신후 홍익성모로 한민족 이룩하시매, 우리 함께 평화의 강산을 누림은 외유내강에 순국으로 나라를 부둥켜 안고 흘리신 선열님들의 향그런 피의 값이라. 감습의 눈물이 소매를 적시오나 어찌 우리 님들의 애틋한 충절에 비기랴! 못다 핀 꽃망울, 학생의 몸으로 초연탄우속을 용악 진격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하시여 무덤은 차치하고 명자조차 없음에도 지하에서 면면히 조국을 음우하심이여! 님들의 그 거룩한 정 못잊어 동창회는 총지로 추모비 건립을 결정하니, 도하 각지에 산재한 동문들의 호응과 정성이 뜨겁게 모아지고 6·25 참전에서 살아남은 이상철, 김치선, 동문들의 심혈과 이병준, 이종원 동문 등의 노고와 모교 최영내 교장님의 아낌없는 성원에 힘입어, 여기 정든 교정에 제단을 쌓고 글자를 아로새겨 세세에 순절의 증표로 삼나니, 이 문을 드나드는 이 머리숙여 추모할지며, 향을 지피는 이 거룩한 충혼에 옷깃을 여미고 명복을 빌지어다. 만대 후학이여! 국난극복에 목숨 바친 이 지순의 교훈을 효칙하시와 하늘같은 웅지, 바다같은 덕을 배우시라. 재천하신 님이시여! 못다한 통일성업 후진에 맡기시고 이제 정든 모교의 품안에서 길이 안식하소서. | |
1248 | 33-1-10 | 이원대열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이원대열사추모사업회 | 비석 | 의열투쟁 | 1911 | 1999-01-01 | 193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거쳐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 조선의용대의 창군 주역으로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1941년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진출, 새로이 개편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분대장으로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이원대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9년 비를 건립 | |
1249 | 25-2-23 | 월남 참전 기념비(청산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옥천군 | 청산면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1992-05-05 | 청산면 삼거리 근처에 1992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 82명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 청산면 전우회는 청산 면민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여 1992년 5월 5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청산면 출신으로는 박준병을 비롯해 82명이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 가운데 4명이 전사했으며 2명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
1250 | 50-2-10 | 충혼탑(월산면)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경찰서 | 탑 | 기타 | 1948 | 1987-12-30 | 전남 담양군 월산면 중월리에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사망한 바심재전투의 전몰영령 38인을 추모하기 위해 담양경찰서에서 1987년 12월 30일 이 탑을 세웠다. 여순반란사건의 잔당과 지방좌익분자들이 합세한 무장공비들이 야음을 틈타 자주 부락을 습격 양민학살과 식량가축을 약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러 왔는데, 1949년 2월 28일 새벽에 월산면 용흥리 죽림부락에 출현하자 이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월산지서 및 담양경찰서기동대원등 38명이 공비 출현지역으로 향하던 중 바심재 정상에 이르렀을 때 잠복중이던 공비들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차량은 벼랑으로 추락하고, 토벌대원의 필사적인 응사로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으며 현장은 유혈이 낭자한채 38명이 일시에 전사하였다. | |
1251 | 25-2-13 | 충혼탑(청산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면민협의회 | 탑 | 6·25전쟁 | 1997 | 0 | 1997-10-15 | 청산면 인정리에 3·1운동, 6·25전쟁 등 전사한 장영진 중령 등 131위의 청산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창산면민협의회는 이곳 출신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10월 15일 준공하였다. 3·1운동, 6·25전쟁 등의 기간 청산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청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52 | 33-1-09 | 애국지사 조재만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의열투쟁 | 1906 | 2001-12-18 | 조재만은 삼창리 현고마을에서 태어나 백학학원과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고보에 진학한 뒤 친일교장 배척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제적됐다. 그는 1926년 9월 대구에서 이육사, 이정기, 장진홍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만들고 휘문고 출신들과 함께 6.10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으로 망명한 조재만은 중국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 상황을 인식하고 한국인 군관학교 설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국내에 잠입, 1927년 10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2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고향에 돌아와서 청년들을 상대로 계몽운동과 항일의식 고취에 힘써 후학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지주가 됐다. | |
1253 | 50-2-14 | 충혼탑(장흥읍)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장흥군 | 장흥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4-06-06 | 장흥 남동리에 196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장흥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장흥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4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장흥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장흥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54 | 50-2-29 | 충혼비(장성군 진원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진원면 | 비석 | 6·25전쟁 | 1953 | 1953-06-25 | 장성군 선적리 면사무소 내에 6·25전쟁 기간에 공산 무리에게 학살당한 진원 면민 91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진원면은 당시 면장 박호연을 중심으로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된 박천구, 신길룡, 기동희, 이남주 등의 넋을 위로하고 공산주의자의 잔악상을 알리기 위해 진원면 소재지 선적리 덕천에 1953년 6월 25일 충혼비를 세웠다. 그후 면 청사의 이전에 따라 1955년 8월 선적리 현 위치로 이전했다. 진원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55 | 50-2-13 | 청소년 호국정신 교육장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장흥군 | 장흥경찰서 | 기타 | 6·25전쟁 | 1951 | 1986-03-15 | 한국전쟁 시 광주사범학교 2학년생 문영만군, 장흥 관산중학교 3학년생 오연차군 광주 숭일중학교 3학년생 김원주군 등 3인은 향토수호를 위해 학도대로 참전하여 용전분추하다 1951년 전사하였으나 그 동안 일정한 안장지가 없어 유치면 일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6년 3월 당시 장흥 경찰서장 이재길과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고영국 등이 중심이 되어 흩어져 있던 3구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 |
1256 | 50-2-05 | 충혼탑(강진)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강진군 | 강진군 | 탑 | 기타 | 1969 | 1969-06-06 | 강진읍 보은산 자락에 1969년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41위와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호국전몰용사 557위,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16위 등 강진군 출신 614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강진군은 강진군 출신 순국선열과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일제강점 및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시기 강진군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고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다 산화하거나 부상당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57 | 43-1-18 | 기미독립만세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거창군 | 탑 | 3·1운동 | 1919 | 기념탑 | 1983-03-22 | 3월 22일 아침, 가조면 장기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주동인물인 오문현, 김호, 어명철 등이 일본헌병에게 끌려가 취조당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가조·가북면의 주민 3천 명이 오후 2시 30분경 독립만세라고 대서한 깃발을 장기리 만학정 앞에 세운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서 이들은 취조 중에 있던 주동인물을 구출한 후 행렬을 이루어 거창읍 쪽으로 진출하였다. 시위 행렬이 살피재에 이르렀을 때 이미 거창 일본군 헌병대와 용산 일헌병 분견대는 합세하여 군중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총포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명하였으나 군중은 응하지 않자 이때 포진하였던 일본헌병들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1983년 3월 22일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90에 기미독립만세 기념탑을 건립하여 거창군 가조, 가북면민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
1258 | 43-1-22 | 면우 곽종석선생 유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김점봉 | 비석 | 3·1운동 | 1846 | 기념비 | 1989-12-01 | 1989년 12월 문화체육부가 면우 곽종석 선생(1846~1919)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산124 (면우 선생 다전 기적비 뒷편 길 50m)에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무렵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곽종석은 파리장서라고 하는 2, 674자의 장문을 지어 김복한 등과 같이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보내어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이해 4월 12일 경북 성주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유림 송회근에 의하여 파리장서 사실이 탄로나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았고 그해 7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
1259 | 50-2-12 | 충혼탑(장성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 탑 | 6·25전쟁 | 1950 | 1980-11-01 | 장성군 장성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장성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장성 향토문화개발협의회는 장성군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0년 11월 1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이후 다시 ‘순국의열 충혼탑’을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장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장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60 | 43-1-23 | 면우선생 다전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김점봉 | 비석 | 3·1운동 | 1846 | 0 | 1990-11-11 | 다전마을 주민이 1890년 11월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2231(다전마을회관 앞)에 면우 곽종석 선생(1846~1919)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다전기적비를 건립하였다. 다전마을은 선생이 51세때부터 이곳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옥고를 치른 후 돌아와 영면한 곳이다. 파리장서는 면우 곽종석 선생이 기초하여 선생과 전국의 유림 136명이 1919년 11월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 세계만방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연명으로 작성한 독립청원서이다. 파리장서는 “오(吾) 한국도 천하만방의 하나로서 지역이 3천리, 인민이 2천만이요 또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국임은 온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고 강조,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있다. 면우 선생은 일경들의 삼엄한 경비를 피하기 위해 파리로 가는 김창숙에게 장서를 외우게 하고 가는 붓으로 다시 써 미투리(짚신)를 삼아 당시 우리나라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전달했다. 김규식은 이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고 독어 불어 영어로 번역, 세계 각국의 언론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 발송해 국제여론을 크게 환기시켰다. |
1261 | 43-1-27 | 애국지사 초산 성만영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성진경 | 비석 | 3·1운동 | 1875 | 1993-11-09 | 성만영은 경남 합천 사람이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합천군 초계면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이원화·전하선·김덕명 등과 함께 3월 21일 초계리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였다. 3월 21일 장날을 기하여 장터에 모인 4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시위를 주도하고 초계우편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기물을 파괴하고 일경 2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에 시위가 중단되고 동료들과 함께 그도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262 | 50-2-30 | 충혼비(장성군 서삼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서삼면 | 비석 | 6·25전쟁 | 1961 | 1961-08-31 | 이 지역출신 변주연 외 5명은 한국전쟁 당시 속칭 빨치산에게 생포되어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꼴채계곡에서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넋을 추모할 목적으로 당시 장성리에 거주하고 있던 변주연씨를 비롯한 면 유지들이 희생자들의 시체를 발굴하여 이장하고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
1263 | 41-1-08 | 박상진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북구 | 송정초등학교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84 | 2000-08-20 |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1905) 이후에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위가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모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하여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악질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1월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 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
1264 | 50-2-23 | 충의비(장성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진남파출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2-08-01 | 전남 장성군 남면 분향리에 무장공비에게 사살당한 정순조를 추모하기 위해 남면소방대와 남면파출소에서 1952년 8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전황이 교착상태에 접어들고 있을 때 후방 곳곳에서는 무장공비들이 자주 출몰하여, 방화 및 약탈과 양민학살을 일삼고 있었다. 장성군 남면에서도 공비들이 야간에 지서를 습격할 목적으로 위장침투하여 이들이 남면소방대 방호부장 정순조 씨에게 지서 대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정순조 씨는 대문을 열겠다고 말하고는 남면지서에 근무하던 70~80명의 안전을 위해 오히려 열려 있던 대문을 잠그고 엎드렸으나 그는 애석하게도 공비의 사격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전쟁 당시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장하게 했었던 정순조 씨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비를 만들어 세웠다. | |
1265 | 50-2-20 | 충혼탑(완도군)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완도군 | 완도군 | 탑 | 6·25전쟁 | 1965 | 1965-10-20 | 완도군 완도공원 내에 1965년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626위의 완도군 출신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완도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5년 11월 14일 준공하였다. 완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북한 공산주의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다양한 작전과 전투에 참전하여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다가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완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266 | 41-1-01 | 3·1독립운동 사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주청년회의소 | 비석 | 3·1운동 | 1919 | 1992-10-03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2일 언양 장날 이무종·이규인·이성영·강경찬·최해선·이규경 등이 주동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의 군중 1, 0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여, 출동한 일본군 수비병에게 1명이 총에 맞아 순국하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 시위와 관련하여, 강기형(姜祺馨, 1876~1940), 강기형(姜祺馨, 1876~1940), 강문필(姜文必, 1872~1953), 김경수(金卿洙, 1892~1968), 김운봉(金雲峰, 1893~1950), 김정욱(金正勖, 1883~1947), 김정원(金正元, 1880~1961), 김한준(金漢俊, 1884~1956), 서태식(徐泰植, 1889~1973), 손수복(孫秀福, 1877~1961), 윤봉수(尹鳳秀, 1889~1971), 이규인(李圭寅, 1890~1927), 이무종(李武鐘, 1893~1956), 이성영(李成榮, 1879~1940), 정태원(鄭泰源, 1869~1953), 최윤봉(崔允奉, 1898~1934), 최한홍(崔翰鴻, 1898~1949), 최한홍(崔翰鴻, 1898~1949), 허황(許황, 1874~미상) 등이 피체되어 태형, 옥고 등 고초를 당하고, 김낙수(金洛綬, 1880~1919)는 옥중 순국하였다. 언양 지역 3·1독립운동의거기념비 추진위원회는 1992년 10월 3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1267 | 50-2-21 | 육군소령 김영남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완도군 | 완도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1-06-01 |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에 6·25전쟁 중 경북 예천에서 전사한 김영남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1·20학병동지회에서 1961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김영남 소령은(출생지 및 생년월일 미상) 1949년 3월 29일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직할부대(헌병사령부)에서 복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용전분투하였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그리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마저 제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독립기갑연대 제1대대(장갑차)도 제1, 6, 7, 8사단에 배속되었다. 또한 서울 특별연대를 제1사단에, 전투경찰 1개 대대가 배속된 육사생도대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는 한편,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는 제1, 6, 7사단에, 제2교도대대는 제7사단에 배속하였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지역에 배치하였다. 국군은 철수와 방어 그리고 다시 철수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만 수행하다가 일시 공격으로 전환하여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역습을 받아 의정부 방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렀다.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선에서 강력한 방어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꺾었다. 김영남 소령은 1950년 7월 29일, 경북 예천에서 공격해 내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부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용전분투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 |
1268 | 41-1-13 | 대한국사 윤현진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비석 | 해외운동 | 1892 | 높이 2.1m, 둘레1.5m | 1959-01-01 | 윤현진은 1892년 양산군 상북면에서 출생하였으며 1906년 일본 동경 명치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 유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였으며, 1909년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3·1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 중국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그는 건강이 나빠져 상해에서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윤현진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대한국사 윤현진선생 기념비는 구국투쟁에 헌신한 윤현진을 추모하기 위해 양산군민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
1269 | 50-2-17 | 경찰 충혼탑(약산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완도군 | 약산파출소 | 탑 | 6·25전쟁 | 1950 | 1961-09-17 | 완도경찰서는 1961년 9월 17일 약산중학교 정문 옆에 1950년 9월 14일 벌어진 약산면전투에서 전사한 호국영령 29위(경찰 26위, 지역방위군 3위)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이 노후화되고 그 면모도 부실하여 1986년 11월 23일 완도 군민의 성금과 군비로 기금을 조성하여 당시 격전지였던 약산면 장용리 919-1로 이전 재건립하였다. 약산면전투는 경찰대가 북한군과 맞서 싸운 경찰의 최대 격전의 하나로 꼽힌다. 장흥경찰서부대 70여 명과 지역방위군 30여 명이 완도 약산면에서 해안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14일 약산면 장용리 앞 해상으로 야음을 틈타 침공해 온 북한군 대대병력과 격전 끝에 적 15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경찰관 26명과 지역방위군 3명이 전사하였다. | |
1270 | 55-2-31 | 6·25 참전 기념비(순천시) | 국가수호 | 2003-12-09 | 전라남도 순천시 | 매산고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1.7m | 1985-10-01 | 매산고등학교는 1985년 10월 순천시 매곡동에 위치한 매산고등학교 교정에 6·25 때 혈서로 지원하여 조국 수호에 생명을 바친 30여명의 매산고 재학생의 애국정신과 충성심을 길이 기억하고 후배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새긴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271 | 55-2-17 | 순국장병 공동묘지 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 | 비석 | 기타 | 1950 | 탑 1개 | 1976-08-20 | 여수시 화장동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순국 장병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여수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76년 8월 2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여수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여수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72 | 40-1-04 | 3·1운동 유공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금정구 |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7-03-01 | 이 유공비는 범어사 학생의거 3·1운동 유공자 42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3월 1일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앞 문화의 거리에 건립한 비이다. 범어사 지방학림(고등보통과정)을 졸업한 김법린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3월 17일 저녁에 개최된 명정학교, 지방학림 두 학교 졸업생을 위한 송별연 모임에서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하여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한번 죽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1천 장이 준비되었고, 태극기도 주동인물 등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3월 17일 저녁 졸업생 송별연 모임은 김영규의 축사를 끝으로 모두 ‘대한독립만세’ 3창을 외쳤고, 청련암으로 자리를 옮겨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동래읍에 잠입하기로 하였다. 불교포교당에 18일 새벽 1시쯤에 도착하였으나, 한 학생의 밀고로 일본 헌병과 경찰이 들이닥쳐, 김영규, 김상기, 김학기 등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인원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다음날 19일 아침에는 준비해놓은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동래시장을 비롯한 동래읍 일원에 뿌리며 다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십 명의 명정학교, 지방학림 학생들과 민중들이 합세하여 동래시장 남문부근에 다시 집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돌진하다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인물은 대부분 검거되었다. 이 의거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34명에 달하며 대부분 부산 또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1273 | 43-1-28 | 삼란 권공영두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권석근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1-03-01 | 이 기적비는 1971년 3월 1일 합천군 대병면 성리 860번지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 옆에 대병 3·1독립운동을 주도한 권영두 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권영두 선생(1874~1961)은 1919년 3월 20일 대병면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권중박·정시권·유인수 등과 밀의한 끝에, 3월 20일의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인근 부락에도 이 계획을 알렸다. 3월 20일 오후 1시, 그는 장터에 모인 4천 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준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장터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창리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드디어 정문을 박차고 소내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수십 명의 일본군이 도착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면서 시위군중을 검거하기 시작하게 되자 그도 이때 체포되었다. 이해 10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1274 | 40-1-14 | 애국지사 월성 박공임갑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월성 박씨 동래 문중 | 비석 | 3·1운동 | 1902 | 0 | 1994-03-12 | 박임갑은 경남 양산 출신이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동래군 동래읍 장날을 기하여 엄진영,고영건,김귀룡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 같은 학교 학생 수백 명과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275 | 25-2-06 | 충혼탑(황간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영동군 | 황간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73-05-10 | 황간면 남성리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황간면 출신 148위의 호국전몰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박만봉, 이귀임, 이명복은 황간 출신으로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 5월 10일 준공하였고 1976년 개축하였다. 6·25전쟁 기간 황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황간면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76 | 55-2-16 | 현충탑(여수시)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 | 탑 | 기타 | 1996 | 탑1 | 1996-04-02 | 여수 자산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여수 출신(구여천시, 여천군, 여수시)의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여수시)’을 건립하였다. 여수시는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6년 4월 2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여수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여수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77 | 43-1-02 |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합천군 | 탑 | 3·1운동 | 1919 | 2001-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날 300여명의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합천군에서는 각 장날을 따라 독립만세 시위가 잇따랐고, 3월 23일 삼가장터 시위에는 백산, 상백, 삼가, 가회, 대병, 용주, 대양면 및 의령군 대의면, 산청군 생비량면에서까지 모인 13, 000여명의 시위로 절정을 이루었다. 4월에 들어서도 3일 가야면 매안리 시위, 7일 봉산면 술곡리 시위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합천군의 3·1독립운동은 그 시위 규모가 컸을뿐만 아니라 시위 양상도 격렬하였고, 삼가시위의 경우와 같이 여러 면이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합천3·1독립운동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이 탑을 세웠다. | |
1278 | 51-1-03 | 화랑회 이상운의사 추모탑 | 독립운동 | 2002-11-21 | 전라북도 익산시 |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익산대학교) | 탑 | 의열투쟁 | 1927 | 높이 2.8m, 전면 0.5m, 측면 0.5m | 1991-11-23 |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이던 이상운의사는 동기생 장지환, 김구, 김영준, 호중기 등과 항일결사대인 화랑회를 조직하고 선배 강이규 등이 조직한 독립단과 제휴, 김제경찰서 습격, 목천호 철교 폭파 등 무장항일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1945. 7. 17. 순국하였습니다. |
1279 | 53-2-18 | 충혼탑(영암군)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12m | 1959-06-06 | 영암 영암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364위의 영암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암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9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83년 12월 30일 현재의 위치인 영암공원 내에 다시 건립하였다. 이 탑의 휘호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6·25전쟁 기간 영암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암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80 | 51-1-18 | 병오 창의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정읍시 | 유회소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92-12-10 |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된 것이 알려지자 이에 분개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의병전쟁을 개시하였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한 상소를 올리고, 그의 문인인 전북 유생 고석진(高石鎭, 1856~1924)과 최재학(崔濟學)의 권유를 받아들여 1906년 2월 하순경 정읍으로 내려와 임병찬(林炳瓚, 1851~1916)과 함께 창의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6월 4일 수백명의 유생들을 무성서원에 모아 강회를 하면서 창의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여 의진을 결성하고 의병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 일제가 조선인 진위대를 앞세워 반격해 오자 최익현은 동족상잔은 불가하다 하여 의병을 해산시키고 그를 비롯한 핵심인물 13명은 체포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읍 지방유림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12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 |
1281 | 55-2-23 | 곡성 충의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군 | 탑 | 6·25전쟁 | 1950 | 탑 2.5m | 1960-04-15 | 곡성군 승법리 충의공원 내에 1960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1,304명의 이 고장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의탑’을 건립하였다. 곡성군은 충의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0년 3월 1일 준공하여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1988년 12월에는 위패각을 건립해서, 나중에 충혼당이라고 명명했다. 6·25전쟁 기간 곡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멸공성전에서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곡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82 | 51-1-29 | 김승옥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고창군 | 학산학원 | 비석 | 3·1운동 | 1889 | 1992-02-01 | 김승옥은 전라북도 고창 출신이다. 1919년 3월 19일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오동균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국민휘보’, ‘조선독립가’ 등 문서를 등사하며 추진하다가, 왜경에게 발각되어 일시 좌절되었다. 그러나 3월 21일 청년, 학생 등 100여 명을 규합하여 오동균‧김창규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다시 주동하였으며,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에도 행진을 강행하였으며, 군청직원들에게도 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결국 10여 명이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며, 그는 상고하였지만 1919년 7월 고등법원에 의하여 기각당하여 징역 1년 6월이 선고되어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고창청년회’, ‘고창노동친목회’의 위원장 또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14년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이 공로를 기리어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
1283 | 55-2-26 | 충혼탑(죽곡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죽곡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높이 5m | 1959-04-02 | 곡성 죽곡면 청년회 복지회관 앞에 6·25전쟁 기간에 순국한 93명의 애국청년단원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죽곡면은 이곳 출신으로 순국한 애국청년단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9년 4월 2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죽곡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죽곡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84 | 55-2-25 | 충혼비(삼기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삼기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8m | 1961-11-11 | 6·25전쟁 당시 나라와 고장을 수호하다 산화한 삼기면 출신 105인과 월남전에서 전사한 3인의 숭고한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됨 |
1285 | 51-1-26 | 정시해 충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성송면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비석 1개 | 1963-01-01 | 정시해는 면암의 문인으로서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신이다. 1906년 4월 호남에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는 의보(義報)를 받고 면암의 친서(親書)를 영남지사들에게 전달하여 영남에서 면암의 의거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면암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병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6월 5일 임병찬, 김기술, 유종구, 김재귀, 강종회 등과 부서를 나누어 관장하고, 정읍(井邑)으로 출발하였다. 정읍에서 각종의 무기를 접수하고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한 후 6일 순창에서 무력을 증강하여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회군하여 오산촌(鰲山村)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임병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 접전에서 중군장의 임무를 맡은 정시해는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시해는 임종할 때 면암에게 '시해는 왜놈 하나도 죽인 일이 없이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라도 선생을 도와 적을 죽이겠습니다.' 하고 운명하였다. 면암은 나기덕에게 명하여 정시해의 명정(銘旌)을 '대한국의사정시해지구(大韓國義士鄭時海之柩)'라 쓰게 하고 후히 장사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286 | 40-1-28 | 독립투사 최천택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1-06-08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비석 | 의열투쟁 | 1920 | 0 | 2009-03-05 | 최천택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였는데 구금과 구속 기록만 무려 54회에 이를 정도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가 처음 구속된 때는 부산공립상업학교(옛 부산상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2년 금서인 동국역사를 등사해 배포하다 구속되었다. 1920년 박재혁·김영주 등과 함께 부산경찰서 사무실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일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최천택은 의열단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고 부산지방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7월에 열린 신간회 부산지회 설립총회에서 준비위원을 하였고 서무부 담당, 부회장, 부산지회 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2003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
1287 | 24-2-10 | 반공 위령탑(제천)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제천시 | 제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8-01-01 | 제천시는 1988년 충북 제천시 모산동 72 (솔밭공원내)에 반공위령탑을 건립하여 6·25전쟁 때 공산주의에 대항하다 순국한 제천 출신의 반공의사들의 영령을 봉안하고 해마다 현충일에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
1288 | 55-2-28 | 호국영령의 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고흥군 | 두원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높이 .3.6m | 1993-01-21 | 고흥 두원면사무소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두원면 출신의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영령의 탑’를 건립하였다. 두원면은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상우종합건설의 후원을 받아 1993년 1월 2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두원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두원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89 | 31-1-41 | 남자현지사 생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주민생활지원과) | 생가 | 의병운동 | 1919 | 1999-11-30 | 남자현지사 생가는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이 3년여의 조성 기간을 거쳐 1999년 11월 30일에 복원한 생가이다. 본채·추모각 등의 건물과 주차장, 남자현지사 항일순국비를 갖추었다.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지나면 본채와 부속채가 있고, 본채 뒤편에는 추모각이 있다. 남자현의 본관은 영양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 정한(廷漢)이다. 1896년 남편이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죽자,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 이후에는 의병으로 활동한 아버지 정한을 도와 장정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은 투사들을 간호하는 한편 독립군의 간부를 추천했다. 1921년 지린성에서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주력했다.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의 리튼 경이 하얼빈에 왔을 때, 무명지를 끊어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동봉하여 리튼에게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33년 이규동(李奎東) 등과 함께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의 살해를 기도하다가 2월 28일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강인한 의지로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8월 22일 하얼빈의 여관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 |
1290 | 31-1-31 | 애국지사 박봉필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후손(손- 박진형) | 비석 | 기타 | 1908 | 1996-11-26 | 박봉필은 1908년 3월 29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일가가 모두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북경소재 중국의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전수하고 1934년 7월 항일결사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39년 중경으로 가서 1940년 6월 광복군 편성의 병력충원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1년 9월 일본군 점령지역인 봉천으로 잠입하여 간도성과 길림성 등지에서 독립군 병력증강을 위하여 지하에서 활약을 하던 중 일경에 피체 되었다. 일 년여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재만 항일결사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신경(장춘)고등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1945년 8월 13일 패망을 앞둔 일본 관동군 헌병대가 장춘교외로 연행하여 불법적인 총살형을 감행하여 순국하니 향년38세이다. 1977년에 정부에서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1291 | 31-1-27 | 석초 한양리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유천초등학교 | 비석 | 의병운동 | 1883 | 1971-04-25 | 한양리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강년이 의병활동의 재개하였다. 이에 한양리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 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고 한다. 이강년 의진이 의병활동을 본격화시키자 그 종사관이 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의진이 크게 패하고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자, 이등박문을 암살하고자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일이 적에게 탐지되어 은신하였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 후에는 문경군 가은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해외의 길림군정서 및 흥업단과 연락 제휴하고,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북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동지 이응수·이대기 등과 함께 대구 계림여관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후에는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하여 정양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 예천군 유산면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이강연 의병장의 문집인 『운강문집』을 정리하였다. | |
1292 | 53-2-09 | 현충탑(장산면)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신안군 | 장산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1.6m*1.6m*5.3m | 1988-04-01 | 장산면 도창리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장산면)’을 건립하였다. 장산면은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재일교포 고일주의 성금과 장사면민의 뜻을 모아 1988년 4월 1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장산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장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93 | 16-2-111 | 6·25참전 충훈비 | 국가수호 | 2020-10-12 | 강원도 양구군 | 강원도 양구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폭 1.2m 높이 6.8m | 2006-10-00 |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를 기하여 북한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우리 국군은 후퇴와 반격을 거듭하면서 오직 나라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곘겠다는 신념 하나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사수하게 되었다.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고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후손들에게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는 대한민국 6.25참전 전우들의 뜻을 모아 충훈비를 건립하노라. |
1294 | 23-1-38 | 대호지·천의장터4·4독립만세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시 | 탑 | 3·1운동 | 1919 | 1995-04-04 | 4월 4일 대호지면 광장에서 이인정, 송재만, 남주원 등이 중심이 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서울 파고다공원의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남주원, 이두하, 남상직, 남상락 등이 독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천의장날에 결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4월 4일 대호지 광장에서 아침 9시를 기해 6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애국가를 제창 곧 바로 만세시위에 들어가 정미면 천의시장까지 진출하였다. 오후 4시 진압하기 위해 온 당진경찰서 순사의 권총 발사로 시위대 4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투석전으로 대응하여 천의일경주재소까지 파괴했다. 시위로 인해 구속 입건된 열사만도 400여 명이 넘었고 현장 학살 1명, 옥중 고문치사 3명, 확인된 수형인이 39명, 태형 90대 이상이 88명으로 총 200명이 옥고 혹은 태형을 치렀다. 대호지4.4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1995년 4월 4일 당진군 정미면 천의리 243-2(당시 일경 주재소 자리)에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여 대호지 독립만세운동에서 순국, 부상당한 독립운동 유공자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있다. | |
1295 | 24-2-05 | 충혼탑(단양)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단양군 | 단양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8-01-01 | 단양 하방리에 1968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를 포함하여 615위의 단양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단양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8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단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8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단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96 | 53-2-11 | 충혼의 횃불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신안군 | 증도면장 | 탑 | 기타 | 1996 | 1996-01-01 | 중도면 중동리에 1996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사하거나 순직한 12명의 중도면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유공자 충혼탑(충혼의 횃불)’을 건립하였다. 중도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5년 지역사회개발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6년 1월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신안군 중도면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12명의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조국을 지키다 산화하였고, 아울러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다가 전사하거나 순직하였다. 중도면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유족들이 모여 진혼제를 올리고 있다. | |
1297 | 23-1-07 | 기미3.1독립운동및항일투쟁공훈종합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파평윤씨화계종친회 회장 | 비석 | 3·1운동 | 1919 | 2001-09-26 | 장곡면에서 3·1운동은 윤형중(1895~1935)·윤익중(1896~1963)·윤낙중 3형제와 윤의석(1901~1977)의 주도로 4월 4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윤낙중(경신학교 2년)은 2월 말경 윤익중(중앙고보 4년)에게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는 3·1운동을 듣고, 3월 1일 탑골공원에 나가 독립선언서 선언식에 참가하였다. 윤익중은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가지고 윤낙중과 함께 3월 20일 귀향했다. 그는 윤형중·윤의석 등과 독립만세운동의 행동강령을 결의하고, 지역 인사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들은 4월 4일에 윤만수·이문재·최기석 등 화계리·광성리·신풍리 주민들 100여 명과 매봉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파평윤씨 화계종친회에서는 2001년 9월 26일 홍성군 장곡면 화계리 산39번지에 공훈종합비를 세워 파평윤씨 네 분 애국지사의 숭고한 공훈과 유방에 대하여 삼가 기리고 민족정기와 애국정신 함양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 |
1298 | 53-2-13 | 호국영령 추모의 탑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신안군 | 임자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2.7x2.7x6.6m | 1987-01-01 | 신안 대기리에 6.25전쟁 시 산화한 992위의 전몰용사와 반공주민 희생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영령 추모의 탑'을 건립하였다. 임자면은 호국전몰용사와 반공주민 희생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샹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7년 1월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시 임자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산주의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임자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299 | 52-2-27 | 충혼 불멸탑(완산구)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 조상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5-03-01 | 전주시 낙수정 군경묘역 내에 195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군경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 불멸비’를 건립하였다. 전주시는 이곳 출신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5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전주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00 | 20-1-10 | 독립운동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군 | 비석 | 기타 | 1983 | - | 1983-11-03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충남 부여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부여군 충효회원들이 독립운동 애국지사 추모비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11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
1301 | 23-1-11 | 의병대장민종식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천장새마을회 | 비석 | 의병운동 | 1861 | 1990-12-01 | 의병대장 민종식 추모하기 세운 유허비로 민종식 의병대장은 을사의병중에서 가장 큰 규모와 조직을 가지고 일본에 항쟁하였다. 민종식(1861-1917)은 조선 고종대의 사람으로 자는 윤조, 본관은 여흥으로 경기도 여주군 금내면에서 판서 민영상의 맏아들로 1861년에 출생하였다. 1882년(고종19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나 35세때 관직을 버리고 정산면 천장리로 돌아와 살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제일 먼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이듬해 5월 의병을 일으켜 남포, 보령군 등을 점령하고 동월 19일에 일본 헌병이 주둔하고 있는 홍주를 습격, 점령하였다. 왜군에 패하고 헌병에 체포되어 이듬해 7월 평원리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그 후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 |
1302 | 23-1-30 | 필경사(심훈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시 | 기념관 | 문화운동 | 1934 | 1934-01-01 | ||
1303 | 23-1-23 | 한훈선생사적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청양군 | 장소 | 의열투쟁 | 1890 | 1990-12-01 | ||
1304 | 53-2-03 | 현충탑(영광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수 | 탑 | 기타 | 1997 | 9.2x2.4x13.4m | 1997-06-29 | 영광 관람산 내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영광 출신의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영광군)’을 건립하였다. 영광군은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7년 6월 29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위기 시 영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05 | 53-2-06 | 나라와 겨레위한 얼의 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탑 | 기타 | 1977 | 4.5x5.9x12m | 1977-12-22 | 함평 기각리 함평공원 내에 이 고장 출신 순국선열과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나라와 겨레위한 얼의 탑’을 건립하였다. 함평군은 순국선열, 호국용사의 거룩한 얼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77년 12월 22일 이 탑을 세웠다. 탑 뒤에 전몰호국영렬위패봉안소가 설치되어 600여 명의 전몰용사와 반공애국투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함평 청년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서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306 | 23-1-45 | 김한종선생유적지 | 독립운동 | 2006-11-09 | 충청남도 예산군 | 일우김한종기념사업회 | 장소 | 의열투쟁 | 1883 | 2000-07-30 | 김한종은 충남 예산 사람이다. 유가출신인 그는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진에 종군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 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으며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 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 친일 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대한광복회의 충청도 책임자였던 김한종은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친일부호 처단을 주관하였다. 그는 동지 포섭에 힘을 쏟으면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을 위해 장두환·엄정섭 등과 함께 충청도 지방 부호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또 1917년 11월 칠곡의 부호 장승헌의 처단할 때 참여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그의 지휘 아래 당시 악질면장으로 지목되어 처단 대상이었던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김경태·임봉주 등이 처단하게 되었다. 그 후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8년초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1307 | 31-1-48 | 의사 함안조공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청송군 | 조규영(손) | 비석 | 의병운동 | 1852 | 0 | 2002-06-02 |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이 유시언이 청송에서 군기를 모집하고 토적복수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자, 심성지의 진에서 종사에 선임되어 4월2일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계속하여 마평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영덕의진을 지원케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하였다. |
1308 | 18-2-07 | 현충탑(경기 용인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탑 | 기타 | 1975 | - | 1975-06-03 | 용인시 김량장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488위의 용인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용인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군인 454위, 경찰 9위, 군무원 25위 등)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용인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용인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09 | 31-1-47 | 영양 3·1의거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 | 탑 | 3·1운동 | 1919 | 0 | 2002-08-15 | 영양 3·1독립운동 참가자들을 기리는 기념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영양 출신의 오윤승·오석준 등은 고종이 시해당했다고 판단하고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에 망곡례를 올렸다.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가던 중인 3월 17일에는 예안에서, 18일에는 안동 · 영해 · 영덕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번져갔다. 3월 21일에는 영양 인근의 임동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석준과 오윤승, 유동수, 이원오 등은 영양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4일 저녁 7시쯤 오석준과 오윤승이 주민을 동원하니 삽시간에 4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원되자 청기면 면사무소 뜰안에서 만세 함성을 터져나왔다. 시위대는 가가호호를 돌면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5일 영양장날에 시위할 것을 기리면서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167명이 일경에 검거되었다. 2002년 8월 15일 영양3·1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영양군 청기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310 | 30-1-40 | 의사 유적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상주시 | 화북명륜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84-10-01 | 상주 화북면에서 1919년 4월 8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정양수 등 5명의 선열을 추모하고 애국 정신을 기리며 건립하였다. | |
1311 | 30-1-38 | 우강 송종익선생 상 | 독립운동 | 2005-05-09 | 대구광역시 수성구 | 대구 흥사단 | 동상 | 해외운동 | 1887 | 1999-10-04 | 송종익은 1887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906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일제 통감부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이들 두 의사의 재판후원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한 이래, 1945년 광복 때까지 미주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안녕과 권익 보호를 위해 활약하였고,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주로 재정을 담당하면서 살림을 도맡았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맡아 임시정부 청사구입과 임시정부 경비자금을 조달하였으며, 미주 지역 동포들의 애국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역할을 하였다. 동상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송종익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교훈으로 삼고자 1999년에 건립되었다. | |
1312 | 20-1-11 | 3·1독립운동 기념비(부여)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군 세도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6-03-01 | 부여 세도면의 창영학교 교사로 강경3·1독립운동에 참여한 엄창섭(1990, 애족장) 외 9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 3월 부여군 세도면 간대리 419-7번지 세도복지회관 앞 건립한 비이다. 엄창섭은 1919년 3월 7일 자신이 재직하던 창영학교 내에서 강경읍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고상준, 추병갑과 상의하였다. 이튿날 강경읍에 나아가 태극기 제작에 필요한 종이와 물감을 사가지고 김종갑과 추성배를 불러 취지를 불러 설명하고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아침에는 이 태극기를 서삼종으로 하여금 가마니에 넣어 옥녀봉으로 운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날 오후 3시경 옥녀봉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강경읍 장터까지 진출했다. 이해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1313 | 25-2-22 | 월남 참전 기념탑(청주시)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청주시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1-11-17 | 청주시 송정동 솔밭공원 내에 2001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 485명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 전우회는 베트남전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여 2001년 11월 17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청주시 출신으로 신삼식, 이상기, 이진흥, 심재달, 김영웅 등 485명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314 | 51-1-12 | 군산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군산시 | 구암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2.5M X 1.5M X 2M | 2000-03-05 | 군산은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처음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가 주도하였는데, 여기에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등의 영명학교 교사들과 양기준, 유한종 등의 예수병원 직원들이 합세하여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에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경찰 10여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이 잡혀가자 계획한 다음날을 기다리지 않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병원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과 주민들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출발하여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며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느새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길에 휩싸이게 된다. 그 후 점차 수가 늘어나자 일본 경찰은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은 약 90여명으로 모두 군산경찰서에 투옥되었고,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는 헌병대와 일본경찰들이 수색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압수하고 학교의 기물을 파손하였다. 심지어 두 학교의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연행되어 며칠씩 심문을 받는 고충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산에서 3월 5일에 일어난 3·5만세운동은 호남지방 최초로 일어난 봉기로 이후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군산의 자긍심을 세우고, 선열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및 후세까지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군산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군산 3.5만세운동의 발원지인 구암동산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315 | 55-1-24 | 박경현 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구례군 | 구례군청 | 동상 | 3·1운동 | 1859 | 동상 | 2002-08-16 | 박경현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구례군 광의면 지촌리에서 박해운의 방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이튿날 3월 24일 구례읍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 앞에서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연설을 한 후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4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현의사 동상은 기미독립만세 의거 터(당시 구례 시장터. 현 로터리 농산물 검사출장소정문 앞)에 2001년 4월에 세워졌다. 동상의 높이는 112㎝, 너비는 84㎝이다. |
1316 | 25-2-12 | 충혼탑(이원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이원면사무소 | 탑 | 기타 | 1998 | 탑 | 1998-12-31 | 이원면 개심리에 1998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등 75위의 호국 이원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옥천군은 이원면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12월 3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이원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이원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17 | 55-1-25 | 매천 황현 선생 시비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구례군 | 구례군수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55 | 비석 | 2002-04-19 | 한말의 문장가,시인,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역사비평서인 『매천야록』을 저술하였고,1901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침탈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한학자 매천 황현선생추모 한 말의 문장가요 시인이며 예리한 시각으로 시대와 역사를 비판한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1855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지만 가계가 가난하고 몰락하여 농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매천은 어릴 때부터 체격은 작고 약했지만 총명하였고 특히 시문에 뛰어나 당시 호남의 대유학자 기정진도 그의 재능을 높이 칭찬하였다. 29세 때인 1883년(고종20년)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서 장원에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몰락한 가문 출신임을 알고 차석으로 떨어뜨렸다. 이후 그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집필에 열중하여 그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깊이 배어있는 역사비평서인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시문집인 '매천집','매천속집'과 '동비기략'을 저술하였다. 시비는 1901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침탈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황현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현충시설물이다. 그의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새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이 이미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도 하구나. |
1318 | 25-2-19 | 순직철도인 위령원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한국철도공사 | 사당 | 6·25전쟁 | 1959 | 1982-10-22 | 옥천군 윤정리 철도성역 내에 6·25전쟁 기간에 철도인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순직 철도인 위령원’을 건립하였다. 철도청은 6·25전쟁 참전 철도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2년 10월 22일 위령원을 준공하였다. 철도인들은 본분을 지켜 땀을 흘렸고 또 몸을 바쳐 순직함으로써 교통문화의 수호신이 되었다. 유족과 철도직원이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319 | 24-2-23 | 6·25 참전 기념비(신니면) | 국가수호 | 2006-11-09 | 충청북도 충주시 | 동락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6-20 | 6·25참전유공자 충주시지회는 2000년 6월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126(동락초등학교 내)에 신니면 출신 6·25참전 용사의 넋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320 | 52-2-02 | 충혼탑(조국의 품안에 젊은 혼을 불사르다)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남원시 | 대한민국참전동우회남원시특별지부 강신규 | 탑 | 6·25전쟁 | 1950 | 1997-10-01 | 남원시 서무리에 지리산공비토벌작전과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118위의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원시는 이곳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10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원시와 대한민국참전동우회 남원시 특별지부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321 | 33-1-51 | 정치우·정치석·정치화·정규식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4-1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 선양사업회 | 비석 | 3·1운동 | 1920 | - | 2002-11-01 | 1941년 일본 오사카에 소재한 오사카공학교에 재학하면서 오사카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한 정규식 애국지사. 1906년 3월 산남의진 결성에 크게 기여하고 영천, 영일, 청송 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치석(형)·정치우(동생) 애국지사와 산남의진 결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사재로 의병자금을 후원한 정치석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2002년(정규식)과 2017년(정치석, 정치우, 정치화)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322 | 52-2-43 | 위령탑(소양)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소양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4-04-01 | 완주군 황운리에 1994년 6·25전쟁 기간에 향토 수호를 위한 산화한 34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소양면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을 기리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4년 4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완주군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소양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23 | 24-2-08 |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충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1 | 0 | 2001-01-01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충청북도지부 충주시지회는 2001년 1월 충주시 안림동 산 54-3 마즈막재 정상에 6·25전쟁과 공비 토벌, 베트남전쟁 등 국가와 민족,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분투하여 전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충주시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길이 선양하고 시민들의 호국안보의식 고취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공적비에는 251명의 무공수훈자 명단을 각인해 놓았다. |
1324 | 52-2-39 | 위령탑(구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구이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2-05-22 | 6.25전쟁 당시 산화한 호국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325 | 43-1-38 | 애국지사 류인수 행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합천군 | 류성복 | 비석 | 3·1운동 | 1886 | 0 | 1995-11-19 | 1919.3.20 대병면 창리 장날을 기해 동지들과 함께 40,000여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인 뒤 주재소를 습격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공적이 있다. |
1326 | 51-1-44 |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장군 추모비 | 독립운동 | 2004-12-09 | 전라북도 김제시 | 영락회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9 | 0 | 1987-11-23 | 김제 금산면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종희의 추모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만주로 망명한 후 길림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였다.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제4기로 졸업하고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1938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과 조선의용대 조장을 맡아 활약하였고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자 제1지대 총무조장과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전라북도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였다. 해방을 맞이하여 1946년 3월 귀국길에 배안에서 벙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7년 11월 23일 모악 향토문화연구회는 이종희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 |
1327 | 51-1-42 | 애국지사 정한조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4-12-09 | 전라북도 김제시 | 김제시 | 비석 | 사회운동 | 1890 | 1994-10-10 | 김제 출신 애국지사 정한조의 사적비. 정한조는 1926년 이리청년회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리지역의 여러 단체를 이리청년회로 결집시키는데 공헌하였다. 1925년 전북기자단의 일원으로 경찰비리를 도당국에 항의하였고 1927년 12월에는 이리의 언론기관을 비롯해 13개 단체 대표 30여명과 함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조직하고 재만동포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8년에 폭력방위 등에 대한 법률위반혐의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징역 6개월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와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에 정한조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1994년 10월 10일, 김제시에서는 정한조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1328 | 45-1-06 | 창열사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항일기념관 | 사당 | 기타 | 2003 | 건축물 1동, 면적 99㎡ | 2003-07-28 | ○ 도내 항일독립운동가의 위패를 봉안해 두어 민족적 자주의 독립정신을 드높여 후세에 우국정신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창열사는 위엄을 밝혀 제사 지내는 사당이란 뜻으로 제주출신 독립유공자(160인)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1329 | 33-1-30 | 영해 3·18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 탑 | 3·1운동 | 1919 | - | 2003-12-30 |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기념탑.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이 영덕면 금호동 기독교 장로교회 조사인 강우근과 권태원은 영덕면 장날에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협의하고 영덕면 화개동,금호동,남정면 남정동의 기독교인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반, 영덕시장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며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2003년 12월 30일, 영덕 애향동지회에서는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
1330 | 43-1-24 | 다천서원(면우 곽선생 신도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다천서원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919 | 1921-01-01 | 곽종석은 1846년(현종 12년) 6월 24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영특해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다. 23세 때 이진상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58세 때 고종이 궁으로 불러 의정부 참찬, 홍문관 경연관, 시강원 서연관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사직하면서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듣고 상경하여 매국오적의 참수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입대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돌아와 두문 칩거하면서 영재의 교육에 힘썼다. 74세 되던해 기미년에는 전국유림대표 137명을 대표하여 파리의 세계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를 송치한 일로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병환의 위중으로 풀려나 1919년 8월 24일 다전의 여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1960년에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이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20년 그 탄생지인 단성에 니동서당을 세웠고 다음 해인 1921년에는 거주지인 거창에 다천서당을 건립하고 1979년 전국 유림들의 성금으로 ‘신도비’를 세워 선생의 학덕과 애국충정을 기리고 있다. | |
1331 | 52-2-26 | 호국 무공수훈 전공비(진안)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무공수훈자회 진안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2-01 | 진안 군하리에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진안군 출신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 전공비(진안)’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진안군지회는 이곳 출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2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진안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332 | 52-2-18 | 충혼탑(진안군 성수면)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성수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1996-09-28 | 6.25동족 상잔의 비극으로 인하여 고귀한 국방용사와 한토치안에서 산화한 선열들의 영혼을 추모위령하기 위하여 성수면민의 정성으로 탑을 세움 | |
1333 | 52-2-48 | 자유수호 상이군경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장수군 | 상이군경 장수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1-05-01 | 장수군 장수리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희생을 입은 상이군경을 비롯한 호국용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자유수호 상이군경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장수군은 이곳 출신 상이군경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5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장수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부상을 당하였다. |
1334 | 52-2-07 | 구천동 수호비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문정렬(구천동청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6-11-01 | 구천동 수복동지회는 1996년 11월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879-4에 구천동 수호비를 건립하여 구천동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희생된 호국영령 111위(육군 21위, 주민 방위대 17위, 학살주민 11위, 참전자 5위 등)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구천동 수호비를 건립하였다. 구천동 공비소탕작전은 1951년 7월부터 11월까지 구천동 지역에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을 상대로 벌인 것으로 국군과 민간인 방위대가 함께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
1335 | 45-1-02 | 애국선열 추모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항일기념관 | 탑 | 기타 | 2003 | 2003-11-17 |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항일독립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의 주도자들은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었다. 북제주군에서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
1336 | 52-2-21 | 충혼탑(순창군 쌍치)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순창군 | 수복동지회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0-01-01 | 쌍치면 전암리에 1990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하거나 산화한 씽치면 출신 호국전몰 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순창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0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쌍치 면민은 고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빨치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쌍치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37 | 41-2-04 | 호국 무공 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양산시 | 무공수훈자양산지회 | 비석 | 기타 | 2000 | 높이 7m | 2000-10-05 | 양산시 서남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양산시 출신 110명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 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양산무공수훈자회는 이곳 출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0년 10월 2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양산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338 | 52-1-30 | 석정 황석선생 충의 기적비 | 독립운동 | 2004-12-28 | 전라북도 남원시 | 문중대표(황형연)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05 | 0 | 2003-04-01 |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전북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乙未事變)]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황석은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전북도내 유림들에게 통문(通文)을 돌려 거의(擧義)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장성(長城)에서 기우만(奇宇萬)이 거의할 때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점차 가속화되고, 러일전쟁 직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황석은 의(義)로써 적신(賊臣)들을 단죄하고자 고광순(高光洵)·이석용(李錫庸) 등과 수 차례 거의를 도모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소식에 자결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1339 | 51-1-45 | 애국지사 이종희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4-12-09 | 전라북도 김제시 | 김제시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89 | 2001-01-01 | 이종희는 1890년 4월 19일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을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가다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들어가 항일투쟁에 헌신하였고, 1922년 3월에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을 저격하려다 실패, 그 후 1925년 광동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 소위로 임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돼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 교관으로 한인 청년사관 양성에 힘썼다. 1936년 2월부터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일제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고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으로 약산 김원봉 선생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었고 이듬해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포함한 100여명의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조직에 참여했다. 1942년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해 제1지대 총무조장으로 활약하다 1943년 김원봉 선생에 이어 제1지대장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이어 임시의정원 전라북도 의원으로 피선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1946년 3월 귀국길 배안에서 병이나 56세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1340 | 50-1-13 | 의병장 단암 조정인 순절비 | 독립운동 | 2001-11-02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녹지과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1996-01-01 | 나주출신 의병장 조정인의 순절비. 조정인은 1907년 호남의병장 김태원(金泰元)·기삼연(奇參衍) 등과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총기 400여 정으로 무장시켜, 나주·함평·장성 등지에서 일본헌병대·경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나주 가산(佳山)에서 심수근(沈守根)과 함께 탄약을 제조하던 중 일본헌병대에게 잡혔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대구복심원에 항소했였으나 기각되었다. 그 뒤 대심원에 상고했으나 형이 확정되어 1909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6년 1월 1일 조정인 선양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조정인의 애국충절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1341 | 33-2-33 | 6·25 기계·안강지구 학도의용군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경주시 안강읍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0-11-13 | 대한민국학도의용군회는 2000년 11월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1881-35번지에 6·25전쟁시 기계, 안강지구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학도의용군의 빛나는 공훈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학도의용군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전적비 건립에 있어서 이한동 국무총리가 제자(題字)를 쓰고 이종달 참전학도병이 글을 짓고 부지를 기증하였으며 전통문화선양회가 협찬하였다. 기계·안강지구전투는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기계와 안강, 포항과 경주 북부 일원에서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군 유격부대인 766부대로 증강된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다. 어래산을 경계로 40여 일간의 처절한 공방전 끝에 우리 국군이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전투에서 수많은 학도의용군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하였다. | |
1342 | 33-2-14 | 무공수훈자 전공비(경주)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경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1 | 2001-01-01 | 경주시 무공수훈자회는 2001년 경주시 황성동 황성공원 내에 경주 출신으로 6·25전쟁 및 월남전에 참전해 공적을 세워 무공훈장을 수상한 구국용사들의 위훈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호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비 뒷면에는 경주시 무공수훈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 |
1343 | 50-1-08 |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광역시 푸른도시사업소 | 비석 | 의병운동 | 1871 | 1972-01-01 |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 심남일(심수택)을 추모하는 순절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심남일은 의병을 일으켜 장성, 영광, 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적하였다. 1907년 11월 강무경(姜武景)을 선봉장으로 하여 진용을 정비한 후, 1909년까지 강진, 퇴계원, 남평, 영산포, 장흥, 영암,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5월에는 안규홍(安圭洪) 의병진과 합세하여 일거에 일본군을 섬멸코저 하였으나, 고종의 의병해산의 조칙이 내려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능주(綾州)의 풍치(風峙) 바위굴속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 정보를 탐지한 일경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1910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72년 1월 1일 순절비건립위원회는 심남일의 애국충정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1344 | 50-1-17 | 호남창의 영수 기삼연선생 순국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 비석 | 의병운동 | 1851 | 1966-01-01 | 기삼연(1851-1908) 선생은 장성 출신으로 노사 기정진 밑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기우만·고광순과 의병을 일으켰으나 선유사의 회유로 실패하였다. 1907년 9월 장성 수연산 석수암에서 여러 의사들과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 수백명을 이끌고 고창 문수암 전투를 비롯하여 영광, 법성포, 부안, 정읍, 나주 등 전남 서부와 북부 지역을 휩쓸며 일본군을 공격, 큰 전과를 올렸다. 담양 추월산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 복흥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광주로 압송되어온 이틀 후인 1908년 1월 2일 광주시장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장성공원에 '호남창의영수 기삼연 선생 순국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충정을 기리었다. | |
1345 | 33-2-15 | 무공수훈자 전공비(포항)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포항무공수훈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0-01-01 | 2001년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민족수난의 전쟁교훈을 되살리고 포항 출신의 참전무공수훈 노병들의 고귀한 호국정신을 선양하며 전후세대들에게 자유평화의 소중함과 국가안보의 호국정신 고취를 위해 경북 포항시 남구 해도동 해도근린공원 내에 무공수훈자회 포항시지회에서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
1346 | 15-2-30 | 양주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양주시 | 양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1-12-22 | 양주 마전동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양주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12월 22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양주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양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47 | 51-1-27 | 순국의사 유금동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01 | 전라북도 고창군 | 류연수(조카) | 비석 | 학생운동 | 1909 | 2m x 0.5m x 0.2m | 1986-05-01 |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고창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중 1930년 1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가 전해지자 이에 동조하여 동급생 유일석(柳日錫)·윤정하(尹鼎夏) 등과 함께 무기맹휴(無期盟休)를 단행하면서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구류 20일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구류중 감방안에서 동교생인 밀정 이재천(李載千)이 동지인줄 잘못 알고 고창고보의 만세시위 계획을 말하였던 바, 만세시위 계획의 전말이 드러나게 되어 일경은 이에 재검속을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와 동지들은 전주형무소로 수감되었다. 그런데 그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동년 6월 2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348 | 20-1-18 | 애국지사 임병직박사 생가 | 독립운동 | 2003-05-30 | 충청남도 부여군 | 임병직박사생가보존위원회 | 생가 | 해외운동 | 1893 | 0 | 2003-11-25 | 임병직 선생은 1895년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 1921년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유럽제국에 일본이 침략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를 펼쳤으며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외교 교섭에 기여하였다. 부여군에서는 임병직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2003년 11월 그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
1349 | 24-2-12 | 호국영웅 연제근선생 흉상 | 국가수호 | 2003-01-17 | 충청북도 증평군 | 도안초등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01-08-15 | 충북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도안초등학교 정문에 이 학교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포항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연제근 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연제근선생흉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2001년 8월 15일 이 흉상을 건립했다. 연제근 상사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노암리에서 태어나 도안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하여 청주의 제7보병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9년 제3보병사단 제22연대 1대대 1중대 소속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참전하여 9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1950년 3 사단 22연대 1대대의 분대장으로 경상북도 형산강 방어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그해 9월, 포항 반격 전투중 형산강 도하 작전에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시킨 후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대한민국은 2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추서했다. |
1350 | 25-1-18 | 7지사 독립만세 운동비 | 독립운동 | 2004-12-09 | 충청북도 영동군 | 주곡리 이장(김규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1-06-07 |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510-53에 있는 7지사 독립만세운동비는 영독 3ㆍ1운동의 주역인 7분의 독립운동가들의 충절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1919년에 3월1일에 3ㆍ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영동에서도 전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4일 영동면에서 영동장날을 이용하여 박성하·한의교·정성백·장인득·정우문·한광교· 김태규 7인은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4월 4일 이들은 장터에 모여있던 2,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였다. 이에 일경이 병력을 통원하여 시위를 해산시키려 하자 몽둥이 등으로 탄압에 맞서며 대항하자 일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인하여 박성하·한의교·정성백·장인덕·정우문·한광교 등 6명은 순국하였으면 김태규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김태규는 같은 해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징역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에 7인의 애국지사의 충절을 기리고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7지사독립만세운동비를 건립하였다. |
1351 | 15-2-29 | 호국 무공 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양주시 | 무공수훈자회 양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1 | 0 | 2001-09-28 | 양주시에 거주하는 무공수훈자 및 보국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2001년 9월 28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에 수훈자들의 이름을 훈격별로 명각하여 후손이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고취 발전시키고 국민의 안보의식과 애국 애족 정신을 함양하고자 한다. |
1352 | 43-1-44 | 애국지사 청송 심공재현 기적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합천군 | 심종석 | 비석 | 3·1운동 | 1894 | 0 | 1998-04-01 | 심재현은 1919년 3월 20일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체포된 독립지사 신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결사대를 이끌고 경찰서로 돌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정신을 기려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심재현선생의 얼을 되살려 후세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제작된 기적비는 2000년 사업비 4천여만원을 들여 부지 25평에 높이 212cm 너비 1m로 제작됐다. |
1353 | 51-1-25 | 의병장 김공삼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01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 비석 | 의병운동 | 1864 | 1.28m x 0.9m x 0.3m | 1994-12-10 |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07년 음력 8월말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있으면서 전북 고창(高敞)·무장(茂長)·부안(扶安)과 전남의 담양(潭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동년 음력 9월경 고창주재소 순사를 습격하여 고창읍내에서 교전하였으며 또 동년 11월에는 추월산(秋月山)에서 일군 수비대와 접전하며 활동하였다. 그후 1908년 음력 1월 기삼연이 붙잡힌 후에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부하 20~200여명을 지휘하며 동년 음력 2월 25일경 전남 장성군(長城郡) 송치산(松峙山)에서 일군 4명을 저격하고 사살하고 동년 3월 6일에는 장성군 월반(月半) 장터에서 접전을 벌여 일인순사 3명과 한인순사 3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5월 18일 전북 무장군에서 일군 기병(騎兵) 7명을 사살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 2월 25일에는 고창군과 부안군의 접경인 변산(邊山)에서 일군기병과 교전하였고 동년 6월 20일에는 고창군에서 부하 의병을 해산시키고 재기하려 계획하던 중 동년 9월 20일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후 동년 12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1910년 1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교수·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1354 | 16-2-54 | 도솔산지구 전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양구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2-06-22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에 도솔산 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몰 해병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양구군과 해병대사령부에서 2002년 6월 22일 이 비를 세웠다. 도솔산일대는 해안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해발 1, 148m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고지가 중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연중 이상기후가 계속되는 지대이며, 특히 여름에는 안개가 짙어 수 미터를 분간키 어려운 지역이다. 그러나 평지처럼 넓은 천연적인 해안분지는 작전수행을 위한 병력과 물자의 집결은 물론 휴전회담에서 대두될 군사분계선의 위치선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피차간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전술의 요충지였다. 미해병대 제1사단 제5연대는 항공 및 포병의 지원하에 도솔산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북한군이 고지마다 거점진지를 구축하고 중화기를 배치하는 등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공격이 부진하게 되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미해병대를 대체하여 국군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연대장 김대식 대령의 지휘 아래 도솔산지구 공격을 감행했으나 도솔산의 험난한 지형과 장애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한 북한군의 반격으로 일진일퇴 공방전을 전개했다. 해병대 정면에 배치한 북한군은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예하 제12사단과 32사단으로 철벽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아군은 장비와 지원포는 우세했지만 적은 2개 사단의 병력인데 비하여 1개 연대인 아군은 절대절명의 기로에 있었다. 따라서 아군은 주간공격을 야간공격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6월 19일 밤 야음을 틈타 결사적인 돌격작전에 감행하여 악전고투의 혈전으로 육박전을 감행한 결과 6. 20일 적이 난공불락으로 호언장담하던 도솔산고지를 탈환하는 등 24개 고지를 완전 점령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은 3, 263명이 사살된 반면, 아군도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
1355 | 31-2-19 | 6.25참전용사명예선양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안동시 | 6.25참전유공자회안동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6-13 | 안동 6·25참전전우회가 2001년 6월 6·25전쟁 50주년을 즈음하여 조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에 참여한 안동 출신 참전용사와 그 유족의 숭고하고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안동시 상아동 486번지 일원(월영공원 내)에 선양비를 건립하였다. 이 선양비 건립은 안동시민의 적극적인 성원과 육군 3260부대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
1356 | 30-1-59 | 순국선열 정학이 동상비 | 독립운동 | 2011-06-08 | 대구광역시 달성군 | 화원초등학교 | 동상 | 해외운동 | 1913 | 2003-05-01 | 정학이(鄭鶴伊, 1913~1934)는 경북 달성 사람으로 1928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그 지역 교포의 인권보호와 친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여 지하실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항일독립을 위한 벽보를 작성하고 인쇄물을 배포하다가 1933년 9월 2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중 1934년 11월 3일 순국하였다. 순국선열 정학이 동상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3년 5월 1일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동사비를 세웠다. | |
1357 | 18-2-08 | 현충탑(하남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하남시 | 하남시 | 탑 | 기타 | 2001 | 2001-07-11 | 하남 창우에 국가위기 시 산화한 순국선열과 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하남시)’을 건립하였다. 하남시는 순국선열과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1년 7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9년 9월 21일 다시 건립하였다. 국가위시 기 하남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남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358 | 51-1-06 | 항일애국지사 진치만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1-01 | 전라북도 정읍시 | 진기장 | 비석 | 의병운동 | 1876 | 1998-07-01 | 여양진씨 영안문중에서는 1998년 7월 1일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255-1 영안부락에 독립의군부 대원으로 일제에 맞선 진치만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진치만 선생((1876~1925)은 국권회복운동을 위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의 부하로서 활동하였다. 1916년 고종황제의 유명서(諭命書)를 제작하고 흠치교의 포교를 가장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등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이같은 정황이 일경에 탐지되어 1917년 5월 홍성경찰서에 피체되어 같은 해 7월 평북 신미도로 1년간 유배되었다. | |
1359 | 15-2-64 | 6·25 참전 호국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6.25참전동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5-11 | 포천 6·25참전동지회는 2002년 5월 포천시 영북면 운천1리 486-5에 포천시 출신 6·25참전용사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호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360 | 51-1-08 | 애국지사 김양수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전라북도 정읍시 | 김용환(증손) | 비석 | 3·1운동 | 1896 | 2.75m X 0.31m X 0.3m | 2002-04-26 | 1905년 최익현(崔益鉉)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이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김양수는 고예진(高禮鎭)과 고석진(高石鎭),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의 청년들과 정산(定山)에서 최익현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또한 김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작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 등의 영남유림과 김복한·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 등의 호서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때 김양수도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361 | 31-2-02 | 호국인물 이일영 공군중위 상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사)호국인물 이일영 기념사업회 | 동상 | 6·25전쟁 | 1952 | 0 | 2001-10-18 | 안동시 예안면 출생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대구, 영천 지구 일원에 은신하고 있던 적 병력 수백명을 찾아 내어 지구 방어에 결정적 공을 세우고, 1952년 강원도 창도리 상공에서 전투 중 장렬히 산화하였다. 전사후 충무무공훈장, 공비토벌기장, 대통령 수장, 유엔종군기장이 수여되었다. |
1362 | 31-2-16 | 6·25 참전용사 선양비(평은면)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영주시 | 6ㆍ25참전전우회 평은분회(장성덕)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6-25 | 6·25참전전우회 평은분회는 2001년 6월 25일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229-13(면사무소 앞)에 평은면 거주 6·25전쟁 참전유공자 192명의 공적을 선양하기 위해 선양비를 세우고 그 비에 이름을 각인하였다. |
1363 | 31-2-17 | 6ㆍ25 참전용사 선양비(봉현면)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영주시 | 6ㆍ25참전유공자회봉현분회(진만식-영주시 풍기읍 서부리 인삼시장 205호)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1-06-29 | 봉현면 6·25참전전우회는 2001년 6월 영주시 봉현면 오현리 17-2(봉현농공단지 사거리)에 국난에 처해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봉현면 거주 6·25참전유공자들을 높이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선양비를 건립하고 참전유공자 117명의 이름을 명비에 새겨 놓았다. | |
1364 | 31-2-24 | 월남 참전 기념비(문경)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문경시 | 월남참전전우회(문경새재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1999-04-01 | 문경읍 하리에 이 고장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문경 월남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우회 문경읍 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우국충정과 위국헌신 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비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9년 4월 1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문경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365 | 31-2-05 | 김용배장군 상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시 재향군인회 | 동상 | 6·25전쟁 | 1951 | 0 | 2001-07-02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용배공원 내에 토평리 전투에서 전사한 문경 출신 김용배 장군을 기리기 위해 김용배장군추모사업추진위원회에서 2001년 7월 2일 동상을 건립했다. 김용배 준장은 1921년 4월 17일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남면 흥덕리 665번지에서 태어나, 1948년 4월 6일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초급장교 시절에는 오대산 일대에서 북한에서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뛰어난 전공을 세웠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써 춘천지구에서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쟁초기 제7연대는 춘천에서 사단예비인 제19연대의 증원 하에 북한군의 춘천공격을 3일 동안 저지하였으나 의정부 축선의 조기 붕괴로 전선의 재조정을 위한 지연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음성지구전투와 문경지구전투에서 대대장으로써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제7사단은 1951년 5월 16일 개시된 중공군의 제5차 2단계 공세(5월 공세)에 맞서 춘천 및 소양강지구전투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철수하였다. 철수 후 다시 반격을 실시한 사단은 미 해병사단으로부터 화천저수지 남안 진지를 인수하고 6월 8일부터 757고지 탈환을 위한 양구지구전투를 수행하고, 901고지 탈환을 위해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지구 전투를 실시하여 고지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제5연대장 김용배 대령은 양구 북방의 633고지와 731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함으로써 사단작전에 기여하였으나 이어 실시된 양구군 북면 토평리지구 전투에서 중공군 1개 연대와 교전 중 적 포격에 의해 1951년 7월 2일 부여된 작전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기 위해 일계급 특진(준장진급)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이름을 새겨 그 영령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경북 문경시 재향군인회와 문경시청에서는 매년 7월 2일 문경읍 용배공원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
1366 | 31-2-23 | 6·25 참전 호국용사 전공비(문경)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문경시 | 6.25참전유공자 문경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12-13 | 6·25참전호국용사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1년 12월 문경시 모전 411(시민운동장 도로변 쪽 소공원)에 문경지역의 6·25전쟁 참전유공자 1, 315명(상군221, 전사101, 무공80, 참전868, 경찰45)의 우국충정과 위국헌신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1367 | 30-1-12 |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달서구 | 대상총동창회 | 탑 | 학생운동 | 1942 | 2003-10-19 | 1942년 5월 대구상업고등학교 4학년 이상호가 서상교, 김상길 등과 조선이 처한 현실을 토로하고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한 태극단은 치밀한 조직체계와 투쟁방안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1943년 일경에 발각되어 단원 26명 전원이 체포되어 16명이 석방되고 10명이 취조를 받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이준윤이 병보석 석방 3일만에 숨지고, 3명이 추가로 불기소로 풀려났으며, 6명이 재판을 받아 미성년자의 최고형인 단기 5년이상 장기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 |
1368 | 16-1-31 | 횡성군민 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10-27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문화예술계 | 비석 | 3·1운동 | 1919 | 1984-11-22 | 1919년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 군민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옛 횡성군청 자리에 세운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1984년 11월 22일 횡성군수는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 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횡성군민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1369 | 31-2-22 | 6·25전쟁 참전용사 선양비(안평면)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의성군 | 6.25참전유공자회 의성군 안평면분회(최대연)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1-06-25 | 6·25전쟁참전용사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1년 6월 25일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749(의성중부농협 안평지점주유소 앞)에 안평면 거주 6·25전쟁참전자 411명의 공적을 기려 선양비를 건립하였고 411명의 이름을 명비에 새겨 추모하고 있다. | |
1370 | 16-1-26 | 3·1만세운동 기념비(원주) | 독립운동 | 2004-12-09 | 강원도 원주시 | 호저면 매호리 이장(이명섭) | 비석 | 3·1운동 | 1919 | 1989-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2일 밤 송병기·성태현·이정헌·박민희 등의 주도로 이민 50여명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만세소리를 듣고 합세한 이민들과 함께 동리를 돌며 시위하였다. 이 시위로 김옥봉(金玉鳳, 18805~미상), 박민희(朴民喜, 1879~1945), 성태현(成泰鉉), 송병기(宋秉箕, 18910~1930), 유정근(柳定根, 1882~1946), 이두연(李斗淵, 1881~1946), 이정헌(李正憲), 이종우(李鍾禹, 1880~1951)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원주 지역 3·1만세운동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9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1371 | 15-1-19 |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기도 남양주시 | 소래김중건선생기념사업회 | 비석 | 해외운동 | 1889 | 0 | 1983-10-16 | 김중건(金中建, 1889~1933)은 함남 영흥 사람으로 1908년 고향에서 연명(鍊明)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1913년 만주로 건너가 건원학교·도전학교·덕수학원·쟈피구학원·이도구학원·팔포강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안도현에서 대진단(大震團)이라는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만주지역 동포사회에서 조선민사(朝鮮民社)·농우동맹(農友同盟)·진우회(震友會) 등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그를 시기하던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소래김중건기념사업회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6일 이 비를 세웠다. |
1372 | 45-2-05 | 충혼탑(서귀포시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서귀포시 | 탑 | 기타 | 1950 | 2001-02-01 | 서귀포 상효동에 2001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사귀포시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서귀포시 충혼묘지)’을 건립하였다. 서귀포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2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서귀포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서귀포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373 | 55-1-29 | 매천 황현 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4-12-1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장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55 | 청동동상 1점, 화강석좌대 | 2004-06-17 | 한 말의 문장가요 시인이며 예리한 시각으로 시대와 역사를 비판한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1855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지만 가계가 가난하고 몰락하여 농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매천은 어릴 때부터 체격은 작고 약했지만 총명하였고 특히 시문에 뛰어나 당시 호남의 대유학자 기정진도 그의 재능을 높이 칭찬하였다. 29세 때인 1883년(고종20년)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서 장원에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몰락한 가문 출신임을 알고 차석으로 떨어뜨렸다. 이후 그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집필에 열중하여 그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깊이 배어있는 역사비평서인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시문집인 '매천집', '매천속집'과 '동비기략'을 저술하였다. 매천 황현의 동상은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유림회관 앞에 서 있다. 이 동상은 광양의 대표적인 인물인 매천 황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4년에 건립한 것으로 동상과 함께 그의 연보, 절명시, 건립취지문이 쓰여 있다. 동상의 조각은 이경우가 맡았고, 글씨는 이시규가 썼다. 그 옆에는 황매천선생휘현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이 비는 1966년에 매천 황현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인데, 비문은 조민식이 짓고 글씨는 주정수가 썼다. 이 비에는 매천 황현의 행적과 의로운 순국과정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
1374 | 14-2-21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김포)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김포시 | 무공수훈자회 김포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2 | 소 | 2002-11-25 | 국가위시 시 김포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김포 조각공원 내에 6·25전쟁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134명의 김포시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회 김포시지회에서 2002년 11월 25일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김포)’를 건립하였다. |
1375 | 55-1-30 | 보성군 독립유공자 추모탑 | 독립운동 | 2004-12-10 | 전라남도 보성군 |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 탑 | 기타 | 2002 | 폭3m, 높이 15m | 2002-12-20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보성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사단법인 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3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1376 | 31-2-20 | 6·25 참전용사 명예 선양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봉화군 | 봉화군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6-25 | 6·25참전용사명예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1년 6월 25일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356-1(봉화군 보건소 뒤 충혼탑 경내)에 봉화군 출신 6·25참전유공자 및 유족 935명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선양비를 세우고 그 비에 이름을 각인하였다. |
1377 | 14-2-19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광명)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광명시 | 무공수훈자회 광명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1 | 소 | 2001-10-01 | 6·25전쟁, 베트남전쟁 대침투작전 등에서 등에서 전공을 세운 광명시 무공수훈자의 위상을 기리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0월 1일 기준으로 광명시에 거주하고 있는 무공수훈자의 이름을 훈격별 가나다순으로 명각하여 무공수훈자회 광명시지회에서 2001년 10월 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
1378 | 31-2-13 | 영양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2-28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 무공수훈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5-07 | 영양군 서부리 군민회관 입구에 2001년 이 고장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빛나는 무공을 세운 수훈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양군 무공수훈자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영양군 무공수훈자회는 이곳 출신 김옥명, 류기한, 박우중, 권찬석, 박태화, 백태봉 등 무공수훈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전공비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5월 7일 세웠다. 6·25전쟁에서 영양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379 | 40-2-14 |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기념석 | 국가수호 | 2003-09-15 | 부산광역시 서구 | 부산광역시 서구청 | 조형물 | 6·25전쟁 | 1951 | 0 | 2001-05-01 | 부산시 서구청은 2001년 5월 서구 암남동 622 암남공원 내에 1950년 12월 31일 부산에 도착했던 SS올몬드 군함이 캠프를 설치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기념석을 건립하였다. 특히 기념석에 쓰인 바위는 뉴질랜드 오클랜드로부터 직접 공수된 바위로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SS올몬드 군함으로 타고온 뉴질랜드군 제16포병연대는 12월 31일 한·미 장병들과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는 1951년 중공군의 신정공세 후 실시된 영연방 제27여단의 진격작전, 가평전투, 코맨도작전, 고왕산전투, 휴전을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전투였던 후크고지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
1380 | 42-1-14 | 기미독립의거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0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0-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밤 김해읍 중앙거리에서 몇몇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고, 3월 31일 진영 장날과 4월 2일 김해읍 장날에도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4월 5일 진영 장날에도 3천여명이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일본군 헌병주재소에 몰려갔다. 이러한 독립만세 시위는 4월 10일 명호시장 날날 시위, 11일 진목리 시위, 12일 무계리 시장 시위로 이어져 3천여명이 참여한 무계리 시위 때는 일제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손명조·김선오·김용이 등이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시위로 김석암(金石岩, 1891~1959), 김선오(金善五, 1865~1919), 김승태(金升泰, 1878~1940), 김용이(金龍伊, 1891~1919), 김용호(金用浩, 1893~1927), 김정태(金廷泰, 1900~1958), 김종훤(金鍾煊, 1892~1948), 손명조(孫明祚, 1884~1919), 송상진(宋相振, 1887~1967), 송세탁(宋世卓, 1884~1939), 이강석(李康奭, 1879~1923), 이진석(李鎭奭, 1896~1970), 임학찬(任學讚, 1890~1952), 장위식(張渭式, 1890~1942), 조영우(趙鏞宇, 1887~1923), 조항래(趙恒來, 1884~1949), 최현호(崔鉉浩, 1890~1974) 등이 현장에서 순국하거나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해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0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1381 | 42-1-15 | 애국지사 만초 남병우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1 | 경상남도 의령군 | 남택종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4 | ㅇ | 2002-04-28 | 남병우는 경남 의령출신으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경남 의령군의 정곡면 중교동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지역을 국유지로 편입하여 멋대로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전중진, 남병우, 남상순, 이진우 등의 지역 유지들은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모아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남병우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5년 2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1382 | 43-1-47 | 의사 박공삼형제 항일 사적비 | 독립운동 | 2005-05-23 | 경상남도 거창군 | 박동기 | 비석 | 의병운동 | 1871 | 기념비 | 2004-11-06 | 경남 안의면 출신 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삼형제의 항일애국정신 기리고자 건립하였고,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거의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2005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
1383 | 43-1-46 | 독립투사 12대장 권석도 공적비 | 독립운동 | 2005-05-23 | 경상남도 합천군 | 권동술 | 비석 | 의병운동 | 1880 | 기념비 1동 | 2004-07-31 | 권석도는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명은 명구이다.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8월 김동신 의병진에 들어가 고광순 휘하에서 지리산 연곡사와 쌍계사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고광순이 전사하자 의병진을 정비하고 이학로·김경각·우수보·박매지 등과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 의병진과 합류하고 박인환과 의병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 6월 하동군 일대에서 무기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구금 20여 일 만인 7월 9일 하동주재소를 탈출하다가 가슴에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동양곡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으며, 5월에는 박매지·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본군 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 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다 1909년 10월 진주에서 다시 체포되어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6년 6월 24일 가석방되었으나, 1918년 2월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1986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384 | 16-2-58 | 도솔산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양구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99-06-20 |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후리에 펀치볼이라는 지명은 이 당시 해안분지의 지형을 본 미 종군기자가 펀치(칵테일 종류)를 담는 그릇(Punch bowl)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해 유래되었다. 펀치볼 전투는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신속히 재정비한 인민군 제2군단이 펀치볼지역의 돌출된 지형을 이용하여 국군 제1해병연대와 미 해병 제1사단을 분리시키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국군은 전략적 요충인 펀치볼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 해병 제1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는 펀치볼과 그 북쪽 감재고지를 목표로 선제공격을 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도로상에 지뢰를 매설하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한·미 해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포병 및 근접 항공지원사격을 지원받아 3주동안 치열한 혈전을 벌인 끝에 인민군 제1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펀치볼과 주변 고지들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의 성과는 북한군 사살 3, 739명 포로 767명을, 아군 피해는 전사 506명, 부상 1, 602명, 실종 11명이었다. |
1385 | 30-2-27 | 무공수훈자 공적비(상주시) | 국가수호 | 2003-12-08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시 화서면 | 비석 | 6·25전쟁 | 2001 | 0 | 2001-10-30 | 상주시는 2001년 10월 30일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167-8에 무공·보훈훈장 수여자 174명의 전공을 기리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한편 상주시는 2년마다 수훈자를 추가 발굴하여 공적비에 새겨넣는데 2008년 현재 총 243명의 무공·보훈훈장 수여자가 명각되어 있다. |
1386 | 40-1-26 | 부산 항일학생의거 기념탑 | 독립운동 | 2005-10-24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부산시설공단 어린이대공원사업소 | 탑 | 학생운동 | 1940 | 2004-11-23 | 이 기념탑은 1940년 11월 제2회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 참가한 부산지역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항쟁하여 일으킨 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고 선현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4년 11월 부산진구 초읍동 43(부산어린이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1940년 11월 21 , 22일. 일제는 경남학도연합 모의 전투훈련을 육군대좌 노다이(乃台兼治)의 총지휘 아래 실시하고,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이에 동래중학과 부산2상(현 부산상고) 학생들이 항의하였으나 번번이 묵살당하였다. 하오 6시경, 두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 1천여 명이 시가행진과 노다이 관사 습격을 결의하였다. 학생들은 공설운동장을 출발하여 우리 민요를 부르면서 보수동 네거리에 이르러 대열을 나누어 대청동과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시가행진을 계속하였다. 7시경, 4, 5학년생 400여 명이 재집결하여 영주동 노다이 관사에 도착하여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부수었다. 이 사건으로 일경과 헌병들에 의해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이 투옥되고,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 징계를 당했다. | |
1387 | 50-2-31 |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시립미술관 | 탑 | 6·25전쟁 | 1950 | 1989-01-01 | 광주·전남 순국학도병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는 1989년 1월 광주 북구 운암동 산42-3(중외공원 내) 광주·전남 출신 6·25참전 학도병 122명의 우국충정과 애국정신을 후세에 남기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순국학생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이 위령탑에서 매년 6월 광주·전남 호국학도병 출신 동지회 주최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
1388 | 50-2-15 | 현충탑(해남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해남군 | 해남군 | 탑 | 기타 | 2002 | 2002-05-01 | 해남 신안리에 국가위기 시 산화한 애국지사와 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해남군)’을 건립하였다. 해남군은 이곳 출신 애국지사와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2년 5월 이 탑을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기 해남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해남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389 | 51-1-40 | 백정기의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04-12-09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기념관 | 의열투쟁 | 1896 | 2004-06-05 | 백정기의사기념관은 사단법인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가 2004년 의사의 고귀한 뜻과 정신을 기리고자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세웠다. 백정기의사는 일제시대 중국으로 망명하여 농민 자치운동을 전개하고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97년 의열사를 짓기 시작하여 2004년 6월 5일 준공된 의열사 안에 백정기 의사의 영정을 봉안함으로써 개관하였다. 총 면적 20,849㎡의 기념관 부지에는 의열사를 비롯해 구파기념관,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백정기의사 동상, 어록비, 순국비, 추모비 등이 있다. 2007년에는 정읍9경 선정위원회에서 내장산,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봉준선생고택 등과 함께 본 기념관을 정읍9경에 선정하였다. | |
1390 | 30-2-34 | 무공수훈자 전공비(김천시)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김천시 | 무공수훈자회 김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2 | 2002-05-04 | 김천시 무공수훈자회는 2002년 5월 4일 경북 김천시 성내동 146-4(자산공원 내)에 김천 출신으로 조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헌신하여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공훈장과 보국훈장 수훈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전공비에는 충무무공훈장 7명, 화랑무공훈장 141명. 인헌훈장 8명, 보국훈장 6명 등 162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다. | |
1391 | 55-2-10 | 충혼탑(포두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포두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 1991-01-01 | 포두면 장수제소공원 내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95위의 포두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포두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1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위기 시 포두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포두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92 | 31-1-55 | 이육사 문학관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안동시 | (사)이육사추모사업회 | 기념관 | 문화운동 | 1904 | 2004-07-31 |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 출생.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 |
1393 | 30-2-15 | 참전용사 명예 선양비(서구) | 국가수호 | 2003-05-30 | 대구광역시 서구 | 대구시 서구청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5-01 | 대구시 서구 이현공원 내에 2001년 6·25전쟁에서 산화한 대구시 서구 출신 김건수, 최원길, 황인수 등 전사자의 영령을 추모하고 박병기, 이진유, 최점돌 등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 서구 6·25전쟁 참전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했다. 또한 이어서 베트남전에 참전해 전사한 금원학, 이종태를 비롯한 곽종덕, 현차환 등 ‘베트남전 참전유공자 기념비’를 2011년 6월 25일 건립하였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보훈식과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대구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지키고, 인근의 고지쟁탈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서구청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394 | 16-1-28 | 한서 남궁억 기념관 | 독립운동 | 2005-05-09 | 강원도 홍천군 | 한서남궁억기념관 | 기념관 | 문화운동 | 1863 | 지상1층 | 2002-12-12 |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 궁내부 별군직(別軍職),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襄陽郡守),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을 지내고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궁억 [南宮檍] (두산백과) |
1395 | 17-2-10 | 영혈사 충령각(양양)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양양군 | 국군 제 5192부대 | 사당 | 6·25전쟁 | 1952 | 사당 1동 | 1992-11-17 | 6․25전쟁 발발로 육군 정보군 소속 첩보대대(4863대대)가 창설되었으며, 동해지역을 관할하는 36지구대에서 휴전 직후 가지 정보 및 무정 첩보대원으로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고급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군의 고위 인사를 납치하는 등 목숨을 건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사, 순직한 대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이 사당을 건립하였다. |
1396 | 17-2-09 | 현충탑(고성군) | 국가수호 | 2012-05-16 | 강원도 고성군 | 국군 제 519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1m, 높이 5m | 2010-04-14 | 6·25전쟁 발발로 육군 정보국 소속 첩보대대(4863부대)가 창설되었으며, 동해지역을 관할하는 36지구대에서 휴전 직후까지 정보 및 무장 첩보대원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고급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북한군의 고위인사를 납치하는 등 목숨을 건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전사, 순직한 대원들의 전공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
1397 | 20-2-18 | 경찰 충혼탑(부여)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경찰서 | 탑 | 기타 | 1995 | 0 | 1997-12-10 | 부여경찰서는 1997년 12월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산2(부여 대간첩작전 전적지 현장)에 무장공비와 교전중 전사한 장진희, 나성주 경사의 넋을 기리고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부여경찰서 장진희, 나성주 경사는 1995년 10월 24일 오후 2시 40분경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뒷산에 무장공비 출현 신고를 받고 긴급 출동하여 오후 4시 10분경 석성면 정각리 소재 4번 국도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하고 용감하게 추격하여 교전을 벌이다 산화하였다. |
1398 | 20-2-28 | 참전 공적비(논산) | 국가수호 | 2003-12-08 | 충청남도 논산시 | 논산시 자치행정과 | 비석 | 기타 | 2002 | - | 2002-01-01 |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나라 사랑에 대한 참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오늘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함 |
1399 | 14-1-08 |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5-05-09 | 인천광역시 계양구 | 계양구청 | 기념관 | 3·1운동 | 1919 | 대 | 2004-08-15 |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불길은 이곳 장기동 황어장터에서도 타올라 3월 24일 오후 2시경 장이 파하는 시각에 600여명의 계양주민들은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 운동에서 일본순사가 휘두른 칼에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더욱 격분한 계양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40여명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당했으며, 그 가운데 중심인물로 지목된 인사들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
1400 | 40-1-25 | 박차정의사 생가 | 독립운동 | 2005-10-24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부산시 동래구청 | 생가 | 3·1운동 | 1910 | 0 | 2005-07-08 |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살한 아버지와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와 둘째오빠 박문호 등 항일 운동가 집안이다. 그는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체포, 구금당했다. 1930년 근우회 활동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 중 중국으로 망명, 중국 남경에서 약산 김원봉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의열단 조선혁명 간부학교 제 1기 여자교관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 어깨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에 사망하였다.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가는 2005년 7월에 복원, 개방되었다. 위치는 동래고등학교 옆 좁은 골목길 안에 있다. 생가 내부에는 독립훈장, 태극기, 밀성 박씨 가계도, 기념패 등이 전시 되어 있다. |
1401 | 33-1-34 | 이범교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3·1운동 | 1888 | - | 2004-12-03 | 3.1독립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교통부 위원으로 피선되어 국내를 오가며 군자그므 조달 및 임시정부와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노령으로 건너가 배영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한 이범교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널리 전하기 위해 2004년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402 | 42-2-17 | 연초면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제시 | 연초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3-01-01 | 6‧25 전쟁 때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국군에 입대하여 희생한 연초면 출신 참전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설치됭되었다. |
1403 | 42-2-24 | 호국영웅 진두태 중위 흉상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남지초등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1 | 0 | 2001-10-05 | 6.25전쟁에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참전하여 장렬히 산화한 위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습니다. |
1404 | 42-2-22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 (창녕)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경남지부 창녕군지회 | 비석 | 기타 | 2002 | 0 | 2002-01-28 | 창녕군 공설운동장 뒤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창녕 지역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창녕)’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창녕군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월 28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창녕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405 | 42-2-35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의령)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기타 | 2002 | 0 | 2002-09-26 | 의령군 통일동산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의령 출신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광명)’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의령군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9월 26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의령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406 | 42-2-19 | 일운면 현충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제시 | 일운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1-01-01 | 거제시 지세포리에 1961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비’를 건립하였다. 거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1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거제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거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407 | 51-2-08 | 자유 평화 진리의 탑(고창)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중,고 동창회 | 탑 | 6·25전쟁 | 1951 | 2000-04-16 | 6.25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던 그 해 11월 자유와 향토수호를 위해 펜 대신 총을 들고 학도의용군에 지원한 120명, 1951년 8월 25일 선운사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6열사가 산화하였다. 이에 6열사의 호국충정의 얼을 되새기기 위하여 1962년 10월 7일 군민의 뜻을 모아 모교정문 앞에 충혼불멸의 비를 세웠다. 이를 1975년 8월 15일 선운사 경내 "자유의 집"으로 옮겨 "멸공탑"으로 건립하였다. 즉 1951. 8. 25 선운산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여 전사한 고창중학교 출신 학도의용군 6명(정택진, 민병욱, 이운교, 김봉수, 유익종, 박금석)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창중,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이 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자유 평화 진리" 라는 제호는 이곳 고창고보를 졸업한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이 쓰셨다고 한다. | |
1408 | 42-2-23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 (창원)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 창원시 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1999 | 0 | 1999-12-10 | 창원시 용지공원 뒷산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창원지역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창원)’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창원시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9년 12월 1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창원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409 | 42-2-27 |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진해)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창원시 진해구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9-30 | 웅동면 웅동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웅동 출신 학도의용군과 군경을 기리기 위해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진해)’를 건립하였다. 진해시는 웅동 출신 학도의용군과 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참전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0년 9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웅동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웅동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410 | 16-1-32 |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 | 독립운동 | 2005-10-27 | 강원도 횡성군 | 강림면번영회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2004-11-20 | 본관 여흥(驪興). 서울 출생이다. 1907년 원주 진위대(原州鎭衛隊)의 정교(正校)로 있을 때, 고종이 타의로 양위(讓位)하고 군대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분격하여 의병을 일으켜 제천 의병대장 이강년(李康imagefont)과 합세,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 살상하였고, 양주(楊州)에서 이인영(李麟榮)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 관동군 창의대장(倡義大將)이 되어 100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치악산(雉岳山) 강림촌(講林村)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긍호 [閔肯鎬] (두산백과) | |
1411 | 25-2-29 | 6·25 참전 기념비(가덕면)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가덕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2-11-27 | 청주시 재향군인회 가덕면회는 2002년 11월 가덕면출신 6·25참전유공자 강태봉 등 104명(후에 5명 추가 기록하여 현재 109명이 명각됨)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 후세 지역민들에게 6·25 참전용사들의 애국심을 본받게 하며, 국가안보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319(가덕면행정복지센터 내)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1412 | 52-2-44 | 무주학도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6-06 | 건립추진위원회는 2002년 6월 6일 전북 무주군 무주읍 지남공원(한풍루공원 내)에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무주의 평화와 안보를 수호하기 위해 무주중학교 학생 59명으로 조직된 학도 의용대(일명‘비호대’)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413 | 52-2-50 | 향토수호 기념비(남원)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남원시 | 6.25참전전우회 인월면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12-15 | 남원 중군리에 6·25전쟁 기간 향토수호를 위해 참전한 104명의 향토수호대원, 자치의용대 등을 기리기 위해 ‘향토수호 기념비(남원)’를 건립하였다. 남원시는 향토수호대원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6·25참전용사전적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12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남원 군민은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을 받았으며, 많은 향토수호대 젊은이들이 공산군으로부터 고향과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자치의용대와 특공대 등을 조직하여 방어하다가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414 | 42-1-35 |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6-04-24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명인호 | 비석 | 3·1운동 | 1885 | 0 | 2005-08-15 | 명도석은 1885년 4월 3일 마산에서 태어났다. 1907년 7월 설립된 마산노동야학교의 교사생활을 하였는데 이 학교는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한 민족학교로 무산층의 여자교육도 함께 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거사 당일에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1927년 7월 20일에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서기흥과 함께 정치문화부장을 담당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12월 28일에 열린 2회 정기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1929년 8월에 열린 ‘복대표대회 규약개정에 따른 임시대회’에서는 대회의 최고 의결권자인 집행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 양조장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수송차량을 만주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은밀히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무역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의 창간주주로서도 참여하여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였다. 1940년대 일제가 소위 내선일체를 내걸고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도 그는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다. |
1415 | 42-1-33 | 한뫼 이윤재 선생 기념 조형물 | 독립운동 | 2006-04-24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문화원 | 조형물 | 문화운동 | 1888 | 0 | 2005-06-24 |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
1416 | 52-2-35 | 충혼 불멸비(남원)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경찰서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5-06-06 | 6·25전쟁 당시 후퇴하면서 인민군과 싸우다 전사하신 순직경찰관 합동묘지임 |
1417 | 33-2-34 |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0 | 2002-09-01 |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 용흥근린공원 내에 6·25전몰 학도의용군 71인을 추모하기 위해 포항시와 국방부에서 2002년 9월 1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내·외 학생들은 펜을 던지고 총검을 잡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자진 참전하여 꽃다운 나이로 7, 000여 명이 산화하였으며 국내학생 5만여 명과 재일유학생 641명이 전투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약 20여만 명이 후방선무 및 공작, 위문활동, 잔당 소탕작전 등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이곳 포항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김춘식 외 47명이 산화한 곳이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로 이곳 출신 생존 학도의용군은 1979년 8월부터 이곳 탑산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 전적물 보존, 추념행사 및 현지 안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1996년 6월 청와대 등 각계에 건의 및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건립을 추진, 국방부의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비 중 일부 국비지원으로 포항시에서 2001년 3월~2002년 7월에 이르러 본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1418 | 31-1-57 | 독립운동 합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6-04-24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주민생활지원과) | 비석 | 기타 | 1987 | 1987-00-00 | 독립지사기념사업 영양군 추진위원회는 1987년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123에 남자현(1962년 대통령장) 한말 의병장 김도현(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등 영양 출신 독립유공자 107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합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에는 107명의 이름을 새겨 넣어 후세의 귀감으로 삼았다. | |
1419 | 31-1-58 | 항일구국열사 권오설선생 기적비 | 독립운동 | 2006-04-24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권씨가일파문중(권대용) | 비석 | 기타 | 1897 | 0 | 2001-11-11 | 1919년 전남도청에서 고원으로 근무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의 형을 치렀으며, 1923년 11월 경북 안동군 풍산에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4월 조선勞농총동맹 창립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동년 6월 당국의 언론집회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서울시내 조선교육협회에서 개최된 언론집회압박탄핵회라는 모임에서 동회의 방침을 결정하는 위원으로 선임되어 결의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5년을 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1420 | 52-1-35 | 남원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6-04-24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교육문화회관 | 탑 | 기타 | 2005 | 0 | 2005-10-18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항일운동, 일본지역항일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남원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 10월 18일 이 탑을 세웠다. |
1421 | 16-2-05 |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장소 | 6·25전쟁 | 1950 | 2000-06-26 |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에 춘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3일간 저지시킴으로써 남침계획을 저지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춘천시에서 2000년 6월 26일 평화공원을 조성하였다. 중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6사단은 춘천에 제7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제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원주에 집결 보유하여 적목리로부터 진흑동까지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방어지역 서측의 북한강과 전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양강을 이용하여 제7연대는 소양강 북안에, 제2연대는 소양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하지만 좌일선의 제2연대는 6월 20일 사단에 예속되어 가까스로 이곳에서 제8연대와 진지교대를 마쳤으며, 예비인 제19연대도 5월 1일 예속된바 이들의 방어 및 전투태세는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6사단은 1948년 6월 14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제4여단으로 창설된 후 11월 20일 제6여단으로 개칭되었다가, 강원도 원주에서 1949년 5월 12일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사단은 예하 제2연대와 제7연대를 춘천 북방에 배치하여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하였다. 제6사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춘천-홍천 지구에서 6월 30일까지 적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다가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횡성-충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 제2군단은 서울 점령에 집착한 나머지 제7사단을 홍천 동북쪽에서 역전시켜 홍천으로의 침공이 지연되고 군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한 데다 사단의 기습적인 공세에 몰려 그들 전차의 충격력은 사라지고 뒤를 쫓는 데에 불과하였으며, 또한 측방타격이나 우회추격에 실패함으로써 사단전투능력의 회복이 예상외로 빨랐던 것이다. 어떻든 사단은 질서 있는 지연전으로 기간 중에 충주를 점령하여 아군을 동서로 양단하려던 그들의 기도를 무산시키는 데 주효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한군은 이와 같은 작전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 군단장 김광협 소장이 해임당하고 그 후임으로 김무정 중장을 임명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7월 초에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은 최현 소장으로, 제7사단장 전우 소장은 최충국 소장으로 각각 교체되었고, 7월 3일에는 제7사단을 제12사단으로 개칭하여 패전의 오욕을 씻으려 안간힘을 기울였다. 또한 북한군들이 제6사단 특히 제7연대의 선전 앞에 무릎을 꿇고 춘천바위라고까지 별명을 붙이게 된 것도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이 때문에 북한군이 3일간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 |
1422 | 52-1-33 |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 | 독립운동 | 2006-04-24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성수면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0 | 2005-10-19 | 이석용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1897년 8월 그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으로 이거한 후 경향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다. 특히, 그는 면암과 연재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제가 한일합병 후 통감부를 설치하자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이른바 12의사가 체포된 이후에는 그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7년 8월 하순 그는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의병에 나설 것임을 부모에 알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창의동맹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는데 당시 마이산 용암에는 1천여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석용은 의병 조직을 결성하고 진안읍 공격하여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하였으며, 일본어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으며, 군율을 엄히 하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한 후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석용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의령단 설치운동을 통해 점차 무력감에서 벗어난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그는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사형이 언도되자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3일 그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는 이석용 의병장 과 휘하의 28의사를 추모. 1908년 3월 22일 최대의 격전지인 임실운현전투에서 17명의 의병들이 순국하였고 그들을 기려 그 장소에 건립하였다. |
1423 | 17-1-09 | 애국지사 정석대공 추모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 | 2004-03-01 | 정석대는 1919년 4월 강원도 삼척보통학교에서 김달하·심부윤등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 활동하였다고 하며 1933년 6월 삼척군 삼척면에서 심부윤·오원모 등과 함께 삼척농민조합을 비밀 결사하여 면 담당 조직책임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34년 5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35년 10월 3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정석대공 추모비는 유족의 발원으로 삼척교육청 및 삼척보통학교 4.15만세운동기념사업회 등의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
1424 | 16-2-01 | 강원경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춘천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2000-01-01 | 강원지방경찰청은 2000년 1월 1일 춘천시 서면 신매리 68-4(소양강 호수변)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6·25때 전사하거나 치안유지를 위해 순직한 강원 경찰 673위(전사 525위, 순직 142위)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길이 보전하며 강원경찰의 자긍심과 화합단결을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원래 1958년 10월 27일 춘천시 봉의동 산 15번지 강원도청 뒤에 충혼탑을 건립하고 전사경찰관 550위를 봉안하였으나 1967년 5월 철거됨에 따라 춘천시 서면에 새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 |
1425 | 51-1-46 | 애국지사 고순진·고예진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5-10-28 | 전라북도 고창군 | 고광본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75 | 높이 2m | 1986-05-05 |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일찍이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생 고예진(高禮鎭)에게 격문 2백여 매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게 하였으며, 면암의진(勉菴義陣)에 조총(鳥銃)을 제공하고 군자금을 내기도 하였다. 1919년 3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유림들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2,674자의 장문으로 된 청원서에 한국 유림대표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金昌淑)이 상해에 전달하였고, 당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하였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426 | 16-2-13 | 김교수대위 추모비 및 공완택병장 동상 | 국가수호 | 2011-06-08 | 강원도 철원군 | 보병제6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3 | 2001-09-07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강리 평화광장에 자신을 희생하여 동료를 구한 공완택 병장 등을 추모하기 위해 용문산전투전우회에서 2001년 9월 7일 추모비 및 동상을 건립했다.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교암산 전투라 불리는 공세를 시작했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피아간의 혈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중공군의 공세에 대항해 김교수 대위가 이끄는 제6사단 제6중대는 교암산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돌입했다. 교암산은 금성천 동쪽의 아군 주저항선에서 가장 표고가 높기 때문에 방어편성상 핵심고지였으며,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화천까지 철수해야하는 제2군단 방어진지의 최대 거점이었다. 진지방어에 나선 6중대는 비 내리는 가운데 모든 진지가 파괴되고 통신마저 두절된 상황에서 6차에 걸친 적의 공세를 육박전으로 물리쳤다. 김교수 대위는 진두에 서서 작전을 지휘했으나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적을 100여 명의 중대원이 막기에는 역부적이었다. 결국 김교수 대위와 중대원들은 이 전투에서 6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김교수 대위와 6중대원의 전투결과로 재정비를 마친 아군은 교암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6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공완택 병장은 1987년 제6사단 2연대 3대대 10중대에서 군복무를 시작하였다. 1989년 4월 6일 경기도 포천 제5군단 승진훈련장에서 대대급 공지합동훈련에 지상군으로 참가했다. 개인화기와 유탄발사기 사격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수류탄을 동료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헬멧으로 덮으며 몸으로 감싸 주위에 있던 동료 4명의 목숨을 구하고 공완택 병장은 장렬히 산화했다.1989년 5월 4일 1계급 특진과 함께 보국훈장 광복장을 추서했고, 소속부대인 육군청성부대는 순직현장인 승진훈련장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또한 2008년 발안중학교 동문회와 화성시 등에서 고인의 모교인 발안중학교 교정에 공완택 병장의 동상을 건립해 살신성인한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
1427 | 16-2-29 | 심일공원 | 국가수호 | 2009-08-28 | 강원도 춘천시 | 춘천대첩선양회 | 공원 | 6·25전쟁 | 1950 | 0 | 2000-06-25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 102보충대 입구에 제6사단 7연대 소대장으로 춘천대첩의 신화를 창조한 심일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춘천대첩선양회에서 2000년 6월 25일 공원을 조성했다. 심일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4기로 입학,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당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포탄을 쏘아대며 계속 전진해오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한 끝에 북한군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전공 사실은 순식간에 전군에 전파되어 북한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공로로 중위에서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이후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군 등지의 전투에서도 참전했다가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하여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
1428 | 25-2-28 | 무공수훈자 공적비(오창읍)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청원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0-30 | 무공수훈자 청원군지회는 2002년 10월 30일 충북 청원군 오창면 구룡리 375(중앙공원 진입전)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운 청원군 출신 무공수훈자 193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1429 | 31-1-59 | 근전 김재봉선생 어록비 | 독립운동 | 2006-11-09 | 경상북도 안동시 | 김탁 | 비석 | 문화운동 | 1896 | 0 | 2006-04-29 | 김재봉 선생(1891~1944)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경북교통부장이 되었고, 대구지역에 독립신문 등을 보급하다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1921년 출옥 후 만주로 망명,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925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책임비서로 활동하다가 12월에 체포되어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 어록비는 2006년 4월 29일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248에 김재봉 선생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특히 비문에 새겨진 ‘조선독립(朝鮮獨立)을 목적(目的)하고’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선생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할 때 제출한 조사표의 항목 중 참석 목적과 희망 난이 있었다. 선생은 여기에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고 기재하였던 것이다. |
1430 | 45-2-10 | 충혼비(상모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대정읍장 | 비석 | 기타 | 1954 | 1954-11-01 | 서귀포 상모리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상모리 제대병장 친목회에서 이곳 출신 송상준, 강성준, 고원욱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4년 1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사모리 청년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수호신이 되었다. | |
1431 | 23-1-44 | 김한종선생순국기념비 | 독립운동 | 2006-11-09 | 충청남도 예산군 | 사단법인예산모현사업회 | 비석 | 의열투쟁 | 1883 | 1974-10-03 | 김한종은 1883년 광시면 신흥리에서 출생하였다. 김한종 의사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충효의 가학과 유학을 전수 받아 성품이 강직 과감하고 정의감이 강했으며,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 외세의 침탈을 목격하면서 척사적 민족주의를 견지하여 갔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각 지로 동지를 찾아다니며 모으고, 조선총독의 부여 시찰 소식을 듣고는 동지들과 함께 암살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6월 혁명적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에 가입 충청도지부장이 되었다. 이후 총사령 박상진, 경상도지부장 채기중과 함께 대한 광복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였다. 우선 충청도지부를 홍성·예산·아산·청양·천안 등지에 설치하고, 자신의 친척들과 과거 의병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독립 군자금 모집 활동과 악덕 지주 및 친일 관리 처단에 앞장섰다. 1917년 11월에는 경북 칠곡의 악덕 지주를 처단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포악한 친일 관리 도고면장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도고면장 처단 직후 1918년 단원 중 이종국이 천안 경찰서에 밀고하여 광복단 조직이 발각되어 그해 1월 28일 자택에서 잡혔으며, 결국 1921년 음력 7월 8일 민족 해방과 조국 독립의 꿈을 가슴에 묻은 채, 38세의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1432 | 45-2-13 | 충혼비(성산읍 고성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고성리 | 비석 | 기타 | 1950 | 가로 115㎝, 세로 150㎝, 높이 250㎝ | 1960-06-01 | 조국과 향토를 방위하다 전사·순직한 고성리 출신 영령 육군대위 한공수외 23명을 추모하기 위해 1960년 6월 건립한 것으로, 1999년 6월 현재 위치로 재건립하였다. |
1433 | 45-2-16 | 충혼비(신산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산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6-04-01 | 서귀포 신산리에 1966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15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신산리에서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6년 4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산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산리 주민들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434 | 53-1-15 | 기미 4·8만세운동 발상지 | 독립운동 | 2007-05-03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장소 | 3·1운동 | 1919 | 목조건물 1동 | 2005-04-07 | 낙영재(樂英齋)는 김기택, 정용섭, 정재남 등 애국지사 24인이 주도하고 수백 명의 인근 주민들이 호응하여 거행되었던 문장 4·8독립만세운동을 사전 결의하였던 곳이며,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 격문 등을 제작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1919년 4월 8일 오후 2시경 함평군 문장장터에서 김기택·정용섭·정재남 등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니 수백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이들은 문장리에 있던 헌병분견소를 기습하고 일진은 함평쪽으로, 일진은 영광쪽으로, 일진은 송정리 쪽으로 행진하였다. 한편 장터에는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김기택 등을 구타 체포하였는데 장효섭·이윤상 등이 석방을 요구하자 발포를 자행하였다. 낙영재는 1943년 큰 태풍으로 파손되고 말았다. 지역주민들이 낙영재를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반일 거점지라 하여 일본경찰의 방해로 복원하지 못하였다. 1999년부터 낙영재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다가 결국 함평군청의 주도로 2005년 4월 7일 부지 5, 558㎡에 전시장과 부대시설 등을 갖춘 문장 4·8독립만세운동 발상지인 낙영재 복원사업을 완료하였다. |
1435 | 45-2-41 | 고태문대위 호국영웅 흉상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한동초등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2 | 2001-06-02 |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한동초등학교 내에 고태문 대위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활약상을 기념하기 위해 고태문 대위 호국영웅 흉상 건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어 2001년 6월 2일 흉상을 세웠다. 고태문 대위는 1929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서 태어났다. 한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오사카 테이츠카공고를 졸업, 1950년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1사단 9연대 7중대 소대장이던 그는 1951년 8월 강원 양구 펀치볼전투에 참전, 북한군 2개 연대가 철조망과 지뢰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884고지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52년 11월 10일 동해안 고성 351고지 전투는 피아가 뒤섞인 가운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고태문 대위는 중대원들을 먼저 철수시킨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진지에 홀로 남았다가 쏟아지는 탄환을 온 몸으로 맞았다. 중대장의 전사소식을 접한 중대원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과감한 역습을 감행하여, 10시간 만에 빼앗긴 고지를 재탈환했다. 고태문 대위는 화랑, 충무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100인의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었다. 2008년 건군 60주년을 맞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명장(名將) 18명 중 한 명으로 추대됐다. | |
1436 | 30-1-49 |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7-05-03 | 대구광역시 중구 | 대구광역시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907 | 1997-10-16 | 1904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7년 2월까지 1300만원의 국채가 쌓였고, 이 돈은 한국정부가 재정적으로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문제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했다. 김광제, 서상돈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참여하여 의연금을 냈다. 이후 국채보상금 처리회의 회장 유길준은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의연금으로 장차 교육 사업을 하기로 결의하고 한강변의 농토를 사들이던 중 1910년 8월 29일 한, 일 합방의 국치를 맞았고, 모집한 의연금은 그 후 한국 국민들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다. 기념비는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세상에 공포하기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장소인 옛“북후정”정자 터에 이날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여 1997년에 건립되었다. | |
1437 | 31-1-60 | 의사 세심헌성주 이공규홍 사적비 | 독립운동 | 2007-05-03 | 경상북도 예천군 | 이선규 | 비석 | 의병운동 | 1851 | 0 | 2005-12-14 | 한말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자 이에 분개하여 이강년 의병진에서 활동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군자부로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국내외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한 선생의 공을 기림. |
1438 | 55-1-35 | 성산 강진원 장군 순의비 | 독립운동 | 2007-05-03 | 전라남도 순천시 | 진주강씨 순천시 청장년회 | 비석 | 의병운동 | 1881 | 2단 높이 3m | 1968-01-01 | 강진원(姜震遠, 1881~1921)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각지에 의병들이 일어나자, 1908년 6월 전남 순천에서 김명거(金明巨), 김화삼(金化三), 권덕윤(權德允), 김병학(金炳學) 및 곡성의 김양화(金良化)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승주군 조계산에 의진을 두고 주변의 의진과 연합작전도 수행하면서 전남 동부지역, 주로 순천·곡성·여수·고흥·광양·구례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전투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 시작될 무렵 의진이 해산되어 오성산 동굴에 10여년간 피신해 있다가 1921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성산양로회원들이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8년 이 비를 세웠다. |
1439 | 33-1-42 | 김상률·손병헌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05-03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기타 | 1870 | 2005-06-23 | 김상률은 경북 영천 사람이다. 1920년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였는데 김상률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에서는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군자금의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고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의 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였다. 김상률은 일제의 친일기관인 보민회를 습격하는 등 친일파 제거에 진력하였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경과 교전하였다. 의군부에 가담한 후에 평북 의주군 청성진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과 교전 중 피체되어 단식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손병헌은 경북 영천 사람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10월경 봉천성 환인현 지방에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된 한교공회를 재건하여 총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 남구 마권자에서 무장독립군인 통군부 등 8개 단체대표가 모여 통의부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윤세용·이장녕 등과 함께 참모부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1926년부터는 간도 용정에서 대성중학교의 교사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440 | 52-2-52 | 국민방위군 6.25 무주수복 공적비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6-06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에 동족상잔으로 산하를 피로 붉게 물들였던 두매산골 무주는 참옥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당시 청년연맹 대동청년단장에 온몸을 던져 앞장선 초대 단장 전 제헌국회의원 신현돈 선생, 2대단장 전 제헌국회의원 김교중선생 그리고 3대단장에 대한청년단을 역임한 오문환선생은 납치되어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고 4대 대한청년단장 김동헌 선생은 남하하여 부대집결에 공이 많았으며 지역 치안과 향토방위와 공비토벌은 물론 용사들의 보급품을 지원하면서 선무활동에 힘써왔다. 6.25동란으로 무주군 모든 행정은 공백기에 들어가고 단원은 분산되었다. 잔류된 단원 10여 명은 공산군 치하에서 지하조직활동으로 고통스럽게 지내오다가 반공투쟁단을 조직하여 결사적인 활동을 하던 중 패주하는 공산군의 무기와 실탄을 빼앗고 1950년 9월 28일 무주경찰서를 탈환하여 태극기를 꽂고 지역치안활동을 시작하였다. 남하하던 국민방위군 30여 명은 제2신병교육대에서 모병업무와 신병교육에 힘써오다가 원대복귀하면서 기존의 반공투사들과 합류하여 계급군번없는 용사들을 이끌고 무주치안수복 공비토벌 작전에 공적을 남기고 무주경찰이 진격할 때까지 군청과 경찰서를 결사적으로 사수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지역 치안 수복방위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
1441 | 52-2-53 | 해외(월남)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2002-11-11 |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역만리 월남(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의 경제 발전과 국위 선양에 크게 이바지한 무주군 참전 용사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건립 |
1442 | 52-2-56 | 6·25 참전용사 명비(장계리)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장계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지회는 2002년 11월 장수군 장계면 장계리 684(면사무소 앞)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각지의 전투에 참전한 장계면 출신 참전유공자 111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용사명비를 건립하였다. |
1443 | 33-1-36 | 애국지사 고당 전배근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07-05-03 | 경상북도 울진군 | 의병장 전배근선생기념사업회 | 비석 | 의병운동 | 1876 | 2006-09-27 | 전배근은 죽변면 봉평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해 그해 12월 청송 이하현과 흥부장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907년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발표에 반대해 의병 200명을 인솔, 평해를 점령하고 평해군수 이명근을 설득, 관군 40명과 군자금 1천냥을 받아 관군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식량을 마련했다. 그해 10월 성익현·정경태·변학기 등 의병진과 합세해 삼척읍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면서 삼척 오십천 능촌에서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1908년 7월 울진 서면전투에서 수적 열세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애국동지들과 연대, 광복정신을 함양한 선생은 군자금을 모금, 상해임시정부에 밀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국권회복의 좌절로 인한 심적 부담과 전투 중 입은 상처의 악화로 38년 6월23일 향년 61세로 순국했다. 그의 애국충절을 높이 기려 정부에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애국지사 고당 전배근 선생의 공적비는 2006년 10월 죽변면 봉평해안에 세웠다. | |
1444 | 45-2-27 | 충혼비(토산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토산2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4-02-01 | 서귀포 토산리에 1964년 6·25전쟁 기간에 향토와 조국를 방어하기 위해 하나 뿐인 생명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토산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김재담, 박용수, 신학순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충혼비를 1964년 2월 1일 세웠다. 6·25전쟁 기간 토산리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 |
1445 | 52-2-57 | 6·25 참전용사 명비(계북면)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계북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지회는 2002년 11월 장수군 계북면 어전리 체육공원 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각지의 전투에 참전한 계북면 출신 참전유공자 83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용사명비를 건립하였다. |
1446 | 52-2-60 | 6·25 참전용사 명비(천천면)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천천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지회는 2002년 11월 장수군 천천면 봉덕리 15-2(면사무소 앞)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각지의 전투에 참전한 천천면 출신 참전유공자 81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용사명비를 건립하였다. |
1447 | 52-2-58 | 6·25 참전용사 명비(산서면)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산서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지회는 2002년 11월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122-2(면사무소 앞)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각지의 전투에 참전한 번암면 출신 참전유공자 100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용사명비를 건립하였다. |
1448 | 52-2-59 | 6·25 참전용사 명비(번암면)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번암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지회는 2002년 11월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94(동화댐 관리사무소 앞)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각지의 전투에 참전한 번암면 출신 참전유공자 369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용사명비를 건립하였다. |
1449 | 33-1-37 | 정재호·정원흥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05-03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기타 | 1877 | - | 2001-10-31 |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게 하기 위해 파리장서를 제출할 때 서명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연통제 및 정의부에서 대일 항쟁을 전개한 정재호 애국지사와 일본 대판 기옥현 등지에서 학생 항일운동을 주도한 정원흥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널리 전하기 위해 2003년 비를 건립하였다. |
1450 | 33-1-38 | 김기용·김영길·이영환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05-03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의열투쟁 | 1928 | 2002-11-01 | 김기용은 경북 영천 사람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과 회합하여 1928년 결사대원이 된 후 영천경찰서와 고향의 친일부호인 이인석의 집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언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예비죄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영길은 1942년 박기수 등 6명과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1943년 4월 영천신사에 방화하여 불태웠고, 이후 다시 대구신사에도 방화를 기도했으나 이는 실패하였다. 같은 해 5월, 대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80연대의 막사 안에 세균을 투입하고 일본군 24부대 병기고를 폭파하는 등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한편으로는 야간에 대구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에 일본군의 패전을 알리는 전단을 살포하는 등 민족의식을 북돋웠다. 1944년 군자금 모금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이영환은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1943년 일본 국왕 및 정부요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거사계획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잡히기 직전 만주로 탈출하였다. 그 뒤 1944년에 다시 국내로 잠입, 같은 해 5월 항일선언문을 작성, 경상도 일대에 비밀리에 배부한 뒤 7월에는 한인 징용자들이 탑승한 열차를 급습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일본군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식수에 독약을 살포하고 일본군병영을 방화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이어 11월에는 대구헌병대에 방화하려 하였으나, 거사 직전 밀고로 영천 자택에서 잡혀 이듬해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 |
1451 | 30-1-56 | 이명균의사 유적지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북도 김천시 | 이진특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919 | 1999-08-01 | 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 |
1452 | 52-2-54 | 6·25 참전용사 명비(장수읍)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읍지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지회는 2002년 11월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노하숲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각지의 전투에 참전한 장수읍 출신 참전유공자 163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용사명비를 건립하였다. |
1453 | 42-2-43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김해) | 국가수호 | 2004-12-02 | 경상남도 김해시 | 무공수훈자김해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3 | 0 | 2003-09-30 | 김해 삼계동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137명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김해)’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9월 3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김해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454 | 30-2-33 | 무공수훈자 전공비(군위군) | 국가수호 | 2005-05-09 | 대구광역시 군위군 | 무공수훈자군위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11-04 | 무공수훈자회 군위군지회는 2003년 11월 4일 경북 군위군 군위읍 오곡리 872-1(군위휴게소 옆)에 조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헌신하여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군위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고, 비 뒷면에 무공수훈자 56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
1455 | 30-1-50 |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 | 독립운동 | 2007-05-03 | 대구광역시 중구 | 대구광역시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907 | 0 | 2006-02-28 |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성 참여의 기폭제가 됐던 대구 남일동 7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애국계몽단체인 대구 광문회(회장 김광제)에서 서상돈 선생이 건의함으로써 첫 횃불이 올랐다. 2월 21일 북후정에서 열린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다투어 참가했는데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눈부셨다. 여학생은 물론 가정의 부인에서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성 못지않게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남일동 7부인회는 비녀와 반지를 뽑고 깊이 숨겨두었던 보석을 국채보상금으로 헌납함으로써 그 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뒤를 따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이름 없는 걸인으로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이 비폭력 항일정신은 뒷날 3. 1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었다. |
1456 | 43-1-50 |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 | 독립운동 | 2007-06-12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청 | 공원 | 의병운동 | 1861 | 비석 | 2005-10-28 | 노응규 선생과 의병활동을 전개한 독립지사의 위국정신과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계승하고자 건립(사당 및 추모비 9기)하였다. |
1457 | 24-1-19 | 애국지사 이용태·이용준선생 형제 동상 및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10-18 | 충청북도 제천시 | 박달재수련원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90 | - | 2006-09-18 | 대종교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용태·이용준 형제의 동상과 추모비. 이용태는 1938년 제천군 백운면장으로 근무하다가 동생 이용준이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것을 목격하고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해서 대종교총본사에 입교하였다. 대종교 참교와 지교를 역임한 후에 경의원장(經議院長)에 임명되었다. 1942년 12월 26일 임오교변 당시 대종교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며 목단강 액하감옥에 투옥되어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이해 출옥하였다. 이용준은 1927년 신간회에서 활동했으며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1932년 중국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고등밀정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8년 재중국일본공사 아카라 아라요시〔有吉明〕처단 기도가 탄로나 북경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당하였다. 194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용태·이용준 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2006년 9월 18일 박달재 수련원에서는 이용태·이용준 형제의 독립행적을 추모하고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동상과 추모비를 세웠다. |
1458 | 30-2-32 | 6·25 참전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청도군 | 이서중학교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6-06-25 | 이서중학교 1기동기생은 1986년 6월 25일 청도군 이서면 학산1길 22번지 이서중고교 교정에 6·25전쟁에 참전한 이서중학교 1기생 31명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이서고등공민학교(현 이서중고등학교) 제1기생 31명은 조국 수호의 의지를 불태우며 홍영기 교사의 인솔로 1950년 8월 23일 대구의 육군부대에 입대하여 2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영천, 영일, 포항 등지의 전선에 배치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 중 4명은 전사하였다. | |
1459 | 23-2-20 | 6·25참전기념비(응봉면) | 국가수호 | 2004-12-22 | 충청남도 예산군 | 예산군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1-09-28 | 예산군 6·25참전용사명예선양사업추진위원회는 2001년 9월 예산군 응봉면 후사리 국민관광단지 내에 예산군 출신 6·25참전용사 751명 및 무공수훈자 65명의 공적을 기리며 그들의 숭고한 구국정신과 불굴의 군인정신을 새겨 나라사랑 정신의 표상으로 삼고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1460 | 42-2-40 | 해사졸업생 전사자 추모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사관학교 | 비석 | 기타 | 2001 | 0 | 2001-06-06 | 해사 졸업생으로 국가수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6•25, 월남전 참전 및 평시작전 수행 중 장렬히 전사하다. 또한 해사졸업생출신으로 전쟁과 국가수호 중 산화한 34명을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
1461 | 42-2-42 | 6·25 참전용사 기념비(거제)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거제시 | 6.25참전유공자회거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12-24 | 6·25참전유공자회 거제시지회는 2003년 12월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산 1036-5에 조국수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참전하여 국가수호에 이바지한 거제 지역 6·25참전유공자 1, 950명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는 가로 1m에 높이 6.5m 규격의 화강석으로 1명의 참전용사가 총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
1462 | 15-1-04 | 삼충단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05 | 0 | 1989-01-01 | 삼충단비는 을사조약 때 자결 순국한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충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조병세는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889년 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사직하고 가평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 5적신의 처형을 왕에게 간청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였다. 심상훈·민영환 등과 함께 여러 날 궁궐에 머물며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 왜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해산되었다. 그러자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글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민영환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 등을 지냈다. 조선 최초의 신식해군인 해방영을 설치하였고 1886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형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자결하였다. 최익현은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하여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오불가의 상소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단식의 후유증으로 3개월 뒤의 발병으로 7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
1463 | 55-2-03 | 현충탑(구례군)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구례군 | 구례군 | 탑 | 6·25전쟁 | 1950 | 탑 | 1951-06-06 | 구례 현충공원에 6·25전쟁 시 구례지역에서 산화한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구례군시)’을 건립하였다. 구례군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1년 6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87년 6월 재 건립 이후 2013년 5월 9일 현충공원으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구례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기 위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구례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464 | 55-2-32 | 박옥규 제독 송덕비 | 국가수호 | 2003-12-09 | 전라남도 여수시 | 덕촌리 청년회 | 비석 | 6·25전쟁 | 1953 | 0 | 1983-11-21 | 전남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에 덕촌리 출신으로 6·25 전쟁 당시 맹활약한 박옥규 제독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과 거문도 유지 등 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83년 11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1919년 일본 관서대 전문부 예과를 졸업한 장군은 고국으로 돌아와 인천상선학교 석상학과(席上學科)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실습과에서 3년에 걸쳐 선박 및 항해에 관한 실무를 익혔다. 이후 갑종 2등 운전사자격을 취득하고 일본의 고베-가와사키 기선주식회사에 입사하여 해운인으로의 길에 들어선 그는 조선 우선(郵船)주식회사에서 갑종 일등운전사 면장과 갑종 선장 면장을 취득하고 조선선박운항통제주식회사 부산지점 주재 선박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선박운항통제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남조선과도정부의 요청에 의해 사장직을 사임하고 부산항 수선인(水先人)으로 종사하면서 부산하역주식회사 사장을 겸임하였다. 1947년 11월 남조선과도정부 운수부 추천으로 해상운수국 부국장 겸 부산항만청장에 취임하였고, 다음해 12월에는 교통부 부산 조선창장(造船廠長)에 임명되었다. 1949년 3월 1일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중령으로 임관된 박옥규 제독은 해군본부 작전국장에 보임되어 작전참모로 활동하면서 10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함정을 인수해 오는 함정인수단장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5월에 다시 도미 함정인수단의 지휘관으로 선정되었다. 1952년 해군본부 인사국장에 이어 해군 작전참모부장으로 발령된 그는 1953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는 한편 6월에는 해군의 수장인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1954년 10월말까지 휴전에 따른 전쟁의 마무리와 해군발전에 정열을 쏟았다. 총참모장 재임 중 해군 중장으로 진급한 박옥규 제독은 1957년 7월 30일 참모총장직을 마지막으로 10년 가까운 군 생활을 종결하였다. 해상봉쇄를 위시한 상륙작전과 군수물자 수송, 적진 포격 등 한 치의 차질 없는 전시임무 수행으로 제독은 은성태극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이어 미 동성훈장마저 수여받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
1465 | 51-2-03 | 칠보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탑 | 6·25전쟁 | 1950 | 1.9M X 13.3M | 1954-06-25 | 한국전생시 국가산업 부흥의 원동요소인 전력을 생산하는 섬진강 발전소와 송전시설을 공비들의 파괴대상이라 1950년 11월 향토방위대를 조직하여 군경, 발전소직원, 애국청년단들이 발전소를 사수하다 경찰 25명 향토방위대 26명 학도호국단 1US 발전소 직원 10명, 민간인 7명 총 69명이 산화하였고 이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1466 | 51-2-10 | 순직경찰관 충혼탑(익산)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5M X 2.9M | 1976-12-01 | 익산 팔봉동 군경묘지 내에 1976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지역 경찰 59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대한경우회 익산지회는 김택룡, 원종식, 김재경, 양재용 등 익산 지역 순직 경찰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6년 12월 1일 준공하였다. 충혼탑은 1951년 7월 16일 처음 건립 당시에 갈산동 이리경찰서 뒤뜰에 위치했다. 6·25전쟁 기간 익산 경찰은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금강저지작전, 이리시 사수작전 등에서 인민군과 교전 중 많은 희생자를 냈다. |
1467 | 16-1-37 | 을미의병 봉기 기념탑 | 독립운동 | 2007-10-18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문화관광과 | 탑 | 의병운동 | 1905 | 2002-01-12 |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을미의병봉기의 거사지임을 기념하고 애국충정으로 참여한 원주지역과 경기 지평 포군·충북 제천 지역 순국선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2년 1월 12일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8(을미의병 기의지)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강제점령,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 11월 단발령에 분노한 이춘영·안승우 등의 젊은 척사파 유림들이 1896년 1월 경기도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김백선이 거느린 포군 100여 명을 동원하여 무력을 갖춘 다음에 원주로 진출하였다. 원주에 진출한 이춘영, 안승우 등은 현지의 김사정 등과 모의하여 봉기하였다. 이춘영이 포군을 통솔하고, 안승우는 화서학파 인사들을 동원하고, 원주 출신 김사정은 의병의 전략과 원주지역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1896년 1월 12일 원주 안창에서 거의하였다. 이들 의병들은 원주와 제천 관아를 점령하고, 단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초기 의병활동에 있어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 |
1468 | 16-1-38 | 항일의병 무기제조훈련장 유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7-10-18 | 강원도 춘천시 | (사)의암유인석선생기념사업회 | 비석 | 의병운동 | 1907 | 2005-12-20 | 1907년 대한제국의 광무(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킨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자로 삼으려하자 이에 통분한 춘천의병장 외당 유홍석과 여성의병장 윤희순을 비롯 한 남녀노소 700여 의병이 같은해 8월 춘천시 남면 여의내골을 중심으로 크게 봉기하였다. 이때 춘천의진은 의병투쟁에 긴요한 화약과 탄환 등을 조달할 수 있는 무기 제조소를 설치하고 의병훈련을 실시하는 동시에 의병의 가시를 진작시킴으로써 보다 피맺힌 대일항쟁을 펼쳤다. 이에 구국항쟁의 역사적 현장이요 민족정기가 서린 성스러운 유적지의 소중한 흔적과 뜻깊은 의의를 새기고 기리고자 정성을 모아 이곳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2005년 12월 9일 (사)의암류인석선생기념사업회 강원도 춘천시 | |
1469 | 13-2-32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4-05-08 | 경기도 시흥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지회 경기도지부시흥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2 | 0 | 2002-12-24 | 시흥시 옥구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시흥시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2년 12월 24일 공적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시흥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470 | 51-1-33 |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김장환(사업추진위원)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2.5M | 2003-05-01 | 익산 여산면 주민들에 의해 전개된 3·1독립운동 기념비. 일산 읍내에서는 1919년 3월 3월에 고총건(高寵權)이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르 부르다 현장에서 체포된 적이 있다. 3월 9일 밤 9시에, 전북 익산 · 완주 등지의 여러 곳 산상에서 봉화가 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3월 10일 익산군 여산면에서는 이정·박사국·이병석 등이 준비한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200여명의 면민들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여산면 헌병 분견소 남쪽 400m까지 진출하였으나 일본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이들은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형을 언고받고 복역하였다. 2003년 5월 1일 여산면의 주민들은 여산지역 3·1독립운동에 참여한 3의사와 여산면 면민들의 나라사랑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여산 헌병분견소 자리에 이 비를 세웠다. |
1471 | 17-2-49 | 삼척지역 경찰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삼척시 | 삼척 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2-06-06 | 6·25전쟁 기간 중 조국과 삼척지역의 수호를 위해 하장면 용연리 전투, 가곡면 풍곡리, 오저리 전투, 근덕면 궁촌리 전투, 원덕읍 호산리, 이천리 전투, 미로면 내미리 전투, 노곡면 중마읍리 전투, 정라동 정상리 전투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13명의 삼척경찰서 소속 순직경찰관들의 조국수호의지를 후세에 널리 전하고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1992년 6월 6일 강원 삼척시 근덕면 근덕면 궁촌리 1023-29에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전적비가 위치한 궁촌리는 삼척지역 전적지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 |
1472 | 13-2-31 | 제2연평해전 전승비 | 국가수호 | 2004-05-08 | 경기도 평택시 | 해군제2함대 사령부 | 비석 | 기타 | 2002 | 0 | 2003-01-01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해군 제2함대 내에 제2연평해전으로 전사한 윤영하 등 5일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 제2함대 사령부에서 2003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차단기동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한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사격으로 대응하다가 고속정이 침몰됐고, 그 후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이라고 부르던 것을 2008년 4월에 제2연평해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
1473 | 31-1-62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 독립운동 | 2007-12-11 | 경상북도 안동시 | (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 기념관 | 기타 | 2007 | 0 | 2007-08-10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2007년 개관)을 확대개편하여 2017.6.30. 개관하였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있으며, 이곳은 동산 유인식(柳寅植)이 한말 교육구국운동을 일으켰던 협동학교 자리이다. 지하1층, 지상1층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시설로 전시실, 신흥무관학교, 연수원, 대강당, 연수강의실, 자료실,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은 독립관과 의열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독립관은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조국 광복 때까지 51년간 펼쳐진 경북 사람들의 국내외 독립운동이 담겨 있다.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 자정순국, 만주지역 항일투쟁, 6·10 만세운동, 의열투쟁, 한국광복군 등 경북 사람들의 쉼 없는 항일투쟁과 관련 유물이 소개되어 있다. 의열관은 안동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전통마을의 항일투쟁을 전시하고 있는 안동실과 되살아나는 불씨,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경북사람들의 51년 독립운동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추강영상실, 유아를 위한 교육과 체험공간인 새싹교육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는 과거 신흥무관학교의 정신과 교육과정?독립전쟁을 최첨단 장비와 시설로 재현하였으며, 독립군의 훈련과정과 전투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외 편의시설인 쉼터, 식당, 부대시설 등이 있다. |
1474 | 12-2-03 | 충혼비(청계산) | 국가수호 | 2002-11-02 | 서울특별시 서초구 | 특전교육단 | 탑 | 기타 | 1982 | 0 | 1982-06-01 | 서초구 원지동 청계산 정상에 1982년 6월 1일 군 작전 중 항공기 추락으로 순직한 이동천, 최구덕, 이상권, 김윤일 등 53인의 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세웠다. 6·1유족회는 훈련 중 희생된 특전교육단 교관 5명, 교육생 44명, 공군부대원 4명 등 53명의 충혼의 얼을 기억하고 이를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공수기본 250기 대원들은 특전부대 용사로 거듭나기 위해 3주간의 지상훈련을 마치고 공수낙하훈련을 위해 청계산 상공을 비행하던 중 짙은 안개로 수송기가 추락하여 조국을 수호하는 창공의 꽃이 되었다. |
1475 | 17-2-48 | 고원 청년유격대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10-30 | 강원도 고성군 | 고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6-06-01 | 강원도 고성 용촌리에 6·25전쟁 때 피난을 포기하고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고원청년유격대원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비를 건립했다. 고원군민회는 반공유격대원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고원땅을 조성하였고 유격전을 전개했던 동해 여도(麗島)가 보이는 곳에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에는 송경구, 박수현, 김인기, 한권일, 조병팔, 박기연, 홍경우 등 대원 명단을 함께 적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의 개입이후 아군이 후퇴를 거듭하던 1950년 12월 함경남도 고원 지역에서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활동을 했던 반공청년들은 국군을 따라 피난을 내려오다가 문천에서 “우리의 힘으로 다시 내 고장을 수복하자”는 결의를 다지고 고원반공유격대를 결성했다. 대원들은 영흥만 일대와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여도로부터 영흥을 먼저 탈환한 뒤 고원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던 작전이 실패했으나 소수의 병력과 열악한 장비로 적 후방에서 소규모 전투라도 적을 괴롭히는 것이 애국임을 믿었다. |
1476 | 15-2-77 | 의정부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기도 의정부시 | 무공수훈자회 의정부시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4-06-15 | 의정부시 의정부 2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의정부시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의정부시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6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의정부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세계평화 수호란 이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서구청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477 | 17-1-10 | 애국지사 구국충정 숭모비 | 독립운동 | 2007-10-18 | 강원도 고성군 | 애국지사구국충정숭모비건립추진위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가로 1.8m, 세로1.5m, 높이 3.6m | 2007-06-30 | 이근옥은 강원 양양 출신으로 3·1독립운동 때 양양군 토성면 윤봉리에서 만세시위를 고무하는 격문 '충고동포'를 지어 각 마을의 게시판에 붙이는 등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같은 해 10월초 김형석의 권유에 의해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가입 직후 김연수·문명섭·이석규 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활동은 주로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10월 하순에 그는 앞서의 동지 김연수·이석규·문명섭 등과 함께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활동할 목적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강원도 고성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그런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연수는 강원 양양 출신으로 1919년 10월에 이근옥의 권유에 의해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하순에 그는 이근옥·이석규·문명섭 등과 함께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활동할 목적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그는 양양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0년 1월에 동단의 강원도단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피체되어 1년여 동안 고초를 치르고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문명섭은 강원 양양 출신으로 1919년 10월에 이근옥의 권유에 의해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하순에 그는 이근옥·이석규·문명섭 등과 함께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활동할 목적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다가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애국지사 구국충정 숭모비는 길이 2.27m, 폭 0.8m로 2007년에 완공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신 마을출신 세분 이근옥, 김연수, 문명섭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478 | 43-2-43 | 사천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사천시 | 무공수훈자회사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3-18 | 무공수훈자회 사천시지회는 2004년 3월 18일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선진리성 입구)에 사천시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충성심을 높이 받들고 이들의 공훈이 영원토록 보전되어 후세에게 나라사랑 호국정신을 일깨우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전공비 정면에 새긴 비문에는 사천시 출신 최송량 시인이 지은 “무공 수훈자 영원한 맹세”가 새겨지고 하단 탑대 동쪽에 96명의 무공수훈자회 사천시지회 회원들의 성명, 계급, 훈격 등이 새겨져 있다. | |
1479 | 43-2-45 | 함양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함양군 | 무공수훈자회함양군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4-06-17 | 6.25전쟁과 공비토벌,월남전 등에서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수호하고자 싸움터에서 젊음을 불사르며 국가를 방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데 이바지 한 함양군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높은 공훈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손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된 비임 |
1480 | 51-1-64 | 애국지사 박준승 기념관 | 독립운동 | 2020-5-8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기념관 1동, 야외화장실 1동, 동상 1식 | 2019-7-2 |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박준승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2019년7월2일 정읍시에서 건립하였다. |
1481 | 31-1-061 | 애국지사 함당 정진화선생 지비 | 독립운동 | 2007-12-11 | 경상북도 예천군 | 정원정(증손)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73 | 0 | 1994-04-00 | 정진화는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채 잠자고 있는 민족을 깨우치는 포고문을 작성, 배포하고, 부호에게는 군자금을 헌납하게 하여 수합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수합에 주력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가 장승원·박용하 등 친일부호 처단으로 그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1482 | 51-1-65 | 이종주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20-5-8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 비석 | 기타 | 1919 | 추모비1개 | 1987-04-00 | 이종주 선생은 1901년 3월 20일 성내면 월산리 35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종주 선생은 1920년 3월 10일 밤 1919년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종철, 이대성, 유판술 등과 함께 성내면사무소에 숨어 들어가 등사기를 훔쳐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다. 이어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12본을 그려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다가 흥덕 주재소 일본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1921년 1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 이송되었다. 이후 옥에 갇힌 사람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같은 해 7월 13일 고문을 받다가 혹형을 이기지 못하고 21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고창군 및 지역유지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내면 월산리 현 위치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1483 | 51-1-63 |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 독립운동 | 2020-5-8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3층 | 2018-6-19 |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과 2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구암동산에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을 건립하여 군산의 역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염원을 실현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및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선조들의 고ㅛ귀한 나라사랑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함 |
1484 | 25-1-23 |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 | 독립운동 | 2020-5-8 | 충청북도 영동군 | 충청북도 영동군 | 탑 | 기타 | 높이 6.7m | 2012-4-25 |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영동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9명 이름과 취지문을 새긴 탑이다. 영동군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얼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자연스러운 원형 좌대에 양쪽 수직방향의 화강석 기둥이 음과 양이 서로 상승 변화, 화합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 |
1485 | 43-1-51 | 독립지사 공재규·공민호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11-11 | 경상남도 합천군 | 공양표 | 비석 | 3·1운동 | 1919 | - | 2007-10-10 | 공재규는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상백면과 삼가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8일의 삼가 장날을 이용하여 정연표 등과 함께 4백여 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3일, 그는 칠순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4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상백면사무소 일대를 시위행진하고 면사무소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삼가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삼가 장터에는 가회·삼가·상백면으로부터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그 수가 1만 3천명이나 되었다. 일본 헌병이 총격을 가하자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공민호는 경남 합천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군 삼가읍 장터에서 정방직·정각규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다시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486 | 50-1-53 | 안중근 의사 숭모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시립미술관 | 비석 | 의열투쟁 | 1909 | 높이 2.7m, 가로 0.9m, 세로 0.9m | 1961-12-3 | 광주시민, 전남도민, 유림, 안중근 기념사업회가 성금을 모아 건립한 숭모비는 심산 김창숙이 비문을 쓰고, 소전 손재형이 전면에 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라 새겨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렸다. 대한의사 안중근 숭모비 비문(1,027자) 나는 『이 천하의 의사로서는 안중근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남방의 명승지로서는 무등산보다 더 으뜸가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온 나라의 인사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무등산 밑 광주공원 위에 비석을 세우고 의사의 열렬과 공적을 표하는데, 그 전면에 크게 쓰기를,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라 하고 길이 만세에 알려 두었으니 아! 거룩하기도 하다. 의사의 성은 안씨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중근은 그 이름이고, 자는 응칠(應七)이니 태어날 때 그 가슴에 일곱 사마귀가 있었기 때문이다.……(중략) 이토가 차에서 내려 러시아 대신과 악수하고 인사가 끝날 무렵에, 차츰 차츰 각국 영사소(領事所)를 향해 걸어가다가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앞에 두고 의사가 곧 군대를 헤치고 돌입하여 권총 세 발을 쏘아 이토의 가슴을 명중시켜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고……(중략) 재판장 마나베가 심문하기를, 『어째서 우리 이토 공을 살해했느냐.』 의사가 큰 소리로 꾸짖어 말씀하기를, 『이토의 죄는 위로 하늘에까지 치솟았으니 만 번 죽이더라도 남은 죄가 있으리라. 음모로 우리 명성황후를 죽이고, 함부로 우리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우리의 대한독립을 방해한 것이 특히 큰 죄다. 이러한 것은 우리로서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거니와, 하물며 너희 나라 선황제까지 죽였으니 너희 나라에도 큰 역적이 아닌가. 이놈은 천하의 공공연한 죄인이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이 도적놈을 제거했으니 천하 만세에 떳떳이 말할 수 있다.……(중략) 아! 옛날 문천상(文天祥)이 일찍 말하기를, 『공자는 인(仁)을 이룩할 것을 강조하고 맹자는 의(義)를 취할 것을 강조한지라. 그 의를 다하는 그것만이 곧 인에 이르는 바이다』라고 했으니, 지금의 안의사가 바로 그러하셨다. 우리들이 왜놈에서 벗어난 것이 사실 의사의 덕택이니 대한 천만세에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전남 유림으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이 호응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비석에 기록을 실은 자는 늙은 앉은뱅이 김창숙이다. - 김창숙 짓고 임형택·이동환 국역하다 |
1487 | 17-2-21 | 월남전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탑 | 월남참전 | 1964 | 너비 8mX8m, 높이 6.5m | 2001-11-06 | 월남에 파병되어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영동지역 출신 월남참전용사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한국군은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약 32만 여명의 병력이 파견되어 대대급 이상의 작전 1,100회를 비롯하여 소부대작전 57만여 회를 통해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또한 3,500여 채의 건물과 1,700km의 도록 건설 등 대민지원 봉사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
1488 | 52-2-38 | 충혼비(화산)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화산면장 | 비석 | 기타 | 1950 | 0 | 1953-08-01 | |
1489 | 33-2-58 | 영천전투호국기념관 | 국가수호 | 2019-12-12 | 경상북도 영천시 | 경상북도 영천시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2064 | 2019-10-8 | 영천전투호국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수세에 몰리던 국군의 반격 신호탄이 된 영천전투를 기념하고 후대에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인근의 국립영천호국원과 함께 참전세대와 전후세대 간 공감의 장, 호국영령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을 위해 2019년 건립되었다. |
1490 | 51-2-04 | 충혼탑(거룩한 얼) | 국가수호 | 2002-12-01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탑 | 6·25전쟁 | 1969 | 1969-10-14 | 정읍 장명동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정읍군 출신 전몰용사 전준기 중령 등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거룩한 얼)’을 건립하였다. 정읍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고자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여 1969년 10월 14일 준공하였고, 1989년 6월 경내에 위패봉안소를 세워 육군 중령 전준기 외 3, 200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6·25전쟁 기간 정읍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정읍시에서는 이곳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키는 호국안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1491 | 42-2-13 |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제시 | 6.25참전회 동부면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8-10-11 | 거제시 동부면 6·25참전동지회가 1988년 10월 거제시 동부면 산양리 945번지에 한국전쟁시 조국을 위해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동부면 출신 6·25참전자 67명이 동부면 6·25참전 동지회를 결성하고 회비와 기관단체의 찬조금으로 건립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
1492 | 43-2-25 | 진주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진주시 | 진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1958-05-30 | 진주 판문동에 ·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진주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8년 5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진주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진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493 | 26-1-20 | 경암 장선생 의열비 | 독립운동 | 2019-12-12 | 세종특별자치시 | 장운표 | 비석 | 문화운동 | 0 | 1988-10-6 | 일제의 민적조사와 납세정책에 저항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경암 장재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함 | |
1494 | 40-2-32 | 개성고등학교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0-5-8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개성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6-22 | 6.25전쟁에 참전한 개성고 출신 267명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음. |
1495 | 55-2-46 | 호국영웅 조달진 소위 흉상 | 국가수호 | 2020-5-8 | 전라남도 순천시 | 사단법인 조달진소위추모사업회 | 동상 | 6·25전쟁 | 1950 | 240cm | 2018-10-17 | 1950년 을지무공훈장, 1951년 화랑무공훈장, 2011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순천출신 6.25 전쟁영웅 조달진 소위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조달진소위 흉상 건립추진위원회가 건립하였음. 조달진소위는 1950.6.28 홍천 말고개 전투에 참가하여 육탄으로 적 전차를 파괴한 공을 인정받아 2012. 7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 됨. |
1496 | 10-2-28 | 배재중·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0-5-8 | 서울특별시 강동구 | 배재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3m, 세로 1m, 높이 2m | 2019-11-22 | 6·25전쟁에 참전한 배재고등학교 선배들 395명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재고 후배들에게 일깨우고,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기억하고자 명비를 건립하였다. |
1497 | 55-1-36 | 모충사 | 독립운동 | 2007-11-11 | 전라남도 보성군 | 모충사독립유공자추모보존위원회 | 사당 | 의병운동 | 1991 | 목조와가 3동 | 1991-12-30 | 모충사에는 항일 의병의 거목인 최익현을 비롯한 호남지역 출신 애국지사 백홍인(‘90년 애족장)과 박태환(’91년 애국장), 창의사인 위계룡과 백형칠 등 독립운동가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최익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상소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백홍인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운을 걱정하여 의병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면암 의진에 들어가 적군과 약간의 교전을 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2천만 동포가 왜놈들의 밥이 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고 하며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위계룡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최익현선생의 소명에 응하여 호남창의에 좌중군장으로 참여하였다. 박태환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9년 3월 8일 전남지방의 의병장 박민홍의 우익장으로 총기로 무장한 40∼5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전남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왜적과 교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백형칠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백홍인 등과 함께 결사구국 할 것을 혈맹하고, 경고서사(敬告書社)를 호남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1908년 백홍인 등 여러 장수들과 보성, 장흥 등지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군자금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 순절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19년 3.1운동시 귀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려 하였으나 귀향 즉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투옥되어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망극의 한을 품은 채 1937년 타계하였다. |
1498 | 13-2-74 | 천안함 46용사 추모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경기도 평택시 | 제2함대사령부 | 탑 | 기타 | 2010 | 2018-10-14 | 대한민국 해군의 제2함대 소속 초계함인 천안함(PCC-772)은 2010년 3월 26일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경계작전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 공격으로 침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정부는 전사자들의 숭고한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기리기 위하여 이들을 ‘천안함46용사’라 칭하고, 화랑무공훈장과 1계급 진급을 추서하는 동시에 국립대전현충원 제308묘역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습니다. 해군에서는 북한의 이러한 불법적 군사도발 행위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인양된 천안함의 선체를 전시하고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어서 국가보훈처, 해군 제2함대사령부, 천안함재단은 천안함46용사의 원혼을 위로하고 이들의 호국정신이 우리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하는 뜻을 한데 모아서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였습니다. | |
1499 | 42-2-18 | 둔덕면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01 | 경상남도 거제시 | 둔덕면장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0 | 1957-01-01 | 둔덕면 번영회는 1957년 거제시 둔덕면 술역리 산 119-11에 거제 둔덕면 충혼비를 세워 6·25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둔덕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위훈을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하였다. |
1500 | 30-2-06 | 백선엽 호국 구민비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4-01 |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 내에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선엽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칠곡군에서 1951년 4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에서 탁월한 지략과 용전으로 유학산 일대를 공격해 온 적군을 격퇴하고 반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국군 보병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비는 당초 가산면 다부리 414-5번지에 있던 것을 2003년 7월 다부동전적기념관내로 이전하였다. | |
1501 | 43-2-36 | 통영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2000 | 2000-04-20 | 통영 죽림리 복지회관 앞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통영출신 무공수훈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통영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통영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차전한 무공수훈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0년 4월 20일 이 탑을 건립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통영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502 | 23-1-09 | 주렴산기미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보령시 | 보령시 | 비석 | 3·1운동 | 1919 | 1997-04-01 | 주렴산기미독립만세운동선양사업추진위원회는 1997년 4월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산65-1에 주렴산 3·1독립운동을 주도한 18의사와 이에 참여한 애국선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철원은 학생 전위대원으로 시위 하다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와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3.15일 간재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누설로 왜경의 감시가 삼엄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 저녁에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주렴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웅천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출동한 왜경에 저지되었고, 주모자급은 거의 체포되어 태형과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을 주동한 18의사는 이철원, 박윤화, 임문호, 박태현, 김양제, 이철규, 이장규, 이성규, 이성수, 이관규, 윤기호, 이홍규, 이항규, 윤용원, 최봉규, 박성하, 윤천영, 신도휴이다. | |
1503 | 42-1-25 | 경남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0-09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 경상남도 | 탑 | 3·1운동 | 1919 | 0 | 2004-03-01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경상남도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농어민운동, 노동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다른 지역 출신이지만, 이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다. 경상남도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4년 3월 1일 이들 725명의 이름을 새겨 이 탑을 세웠다. |
1504 | 42-2-29 |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교육사령부 | 비석 | 기타 | 1947 | 0 | 1982-10-29 | 1974.2.22 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귀대 중 충무항에서 전복 사고로 순직한 신병 159명의 영령을 위호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1505 | 25-1-17 | 3·1공원 | 독립운동 | 2002-12-21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청주시 공원녹지과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80-08-01 |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하여, 3·1독립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은 손병희(1861-1922), 신홍식(1872-1939), 권동진(1861-1947), 권병덕(1867-1944), 신석구(1875-1950) 5인이다( 당초 정춘수(1873-1953,)까지 6인의 동상이 있었으나 친일논란으로 1996년 2월 철거되었다). 충청북도에서는 1980년 8월 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이들의 동상을 건립하고, 주변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충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는 2013년 8월 충북지역 항일 독립 운동가 513인의 이름을 새긴 기념탑을 공원 안에 건립하였다. |
1506 | 43-2-34 | 6·25 참전용사비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합천군 | 합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1-11-01 |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일깨워 호국안보의식을 고취하고 참전용사의 명예선양과 선열들의 호국혼을 기리기 위해 재향군인회에서 주관하고 합천군에서 건립한 비로써 참전용사 1,718명이 명각되어 있다. | |
1507 | 51-2-23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군산시) | 국가수호 | 2005-10-18 | 전라북도 군산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전라북도군산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5 | 2005-03-08 | 군산 은파시민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 군경을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군산시)’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군산시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0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광명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508 | 13-1-23 | 최용신 기념관 | 독립운동 | 2008-05-09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 안산시장 | 기념관 | 문화운동 | 1909 | 0 | 2007-11-20 | 최용신 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교육 활동을 통해 애국심을 심어준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의 삶과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7년에 개관하였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도에는 최용신의 활동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면서 역사적인 인물로 재조명 받았다. |
1509 | 14-1-11 | 고촌면민 독립만세 유적탑 | 독립운동 | 2008-05-09 | 경기도 김포시 | 경기도 김포시 | 탑 | 3·1운동 | 1919 | 중 | 2007-05-15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4일 고촌면 신곡리에서 김정국·윤재영·윤주섭 등의 주도로 50여명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김남산(金南山, 1889~1966), 김정국(金正國, 1893~1920), 김정의(金正義, 1900~1963), 윤재영(尹在英, 1888~1922), 윤주섭(尹周燮, 1887~1957) 등이 주동자로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포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7년 5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1510 | 50-1-34 | 전명운의사 기념 조형물 | 독립운동 | 2008-11-25 | 전라남도 담양군 |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담양종친회장 전계문 | 조형물 | 의열투쟁 | 1908년 | 0 | 2008-03-23 | 죽암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 100주년 기념 |
1511 | 31-2-29 | 호국 충훈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의성군 | 의성군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06-06 | 의성공설운동장 왼쪽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대침투작전 등의 의성 출신 전사자와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충훈비’를 건립하였다. 의성군은 6·25전쟁 전사자 1, 383명, 베트남전쟁 전사자 41명, 서해교전 전사자 1명, 6·25전쟁 참전유공자 2, 700명,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458명, 서해교전 참전자 1명 등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6월 6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의성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512 | 31-2-30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봉화군 | 무공수훈자봉화군지회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11-02 | 무공수훈자 봉화군지회는 2004년 11월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호국동산에 6·25 전쟁 당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던 무공수훈자와 세계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전에서 참전한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1513 | 30-2-31 | 호국용사 기림터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구미시 | 구미시 | 조형물 | 기타 | 2004 | 2004-08-17 | 경북 구미시 진평동 동락공원 내에 6·25전쟁 및 베트남참전 유공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구미시에서 2004년 8월 17일 호국용사 기림터를 조성하였다. 6·25전쟁 및 월남전에 참전하여 자유수호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 및 참전용사들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는 잊혀져 가는 전쟁의 참상과 호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2004년에 각계의 노력과 구미시의 지원으로 6·25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이자 조국수호의 최후의 보루였던 이곳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동락공원에 호국용사 기림터를 조성했다. 부지면적이 총 710㎡인 호국용사 기림터는 낙동강을 상징하는 원형바닥에 그 위를 건너는 낙동강 도하군인 청동상 5기와 6·25 및 베트남전쟁 등 호국평화상징 브론즈 3면, 그리고 총 4, 006명의 호국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좌우 석재 기둥이 조화롭게 설치되어 있어 이곳에서 호국정신의 함양과 동시에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야외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
1514 | 30-1-52 | 독립지사 우초 백성흠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성주군 | 백태열 | 비석 | 1888 | 2006-09-21 | 백성흠은 1888년 10월 17일 경북 성주 대가면 탕실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성주장터에서 만세시위를 계획, 독립만세를 주도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동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심 징역 1년6월, 항소심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옥중 고문 후유증 등으로 향년 34세로 1922년 7월 29일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1515 | 41-2-17 | 6.25참전기념비(울주군) | 국가수호 | 2015-10-14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주군(생활지원과) | 비석 | 6·25전쟁 | 가로 3.2m, 세로 1.8m, 높이 7m | 2015-06-15 | 이 기념비는 울주군 지역 2,203명의 6.25참전 유공자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조국수호를 위한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나 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고 돌아온 숭고한 정신을 오늘날 전후 세대들에게 일깨워 나라사랑 마음과 안보정신을 심어주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명예로운 참전유공자들의 애틋한 마음을 담아 2015.06.15일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1516 | 16-2-74 | 위령탑(철원군) | 국가수호 | 2005-10-27 | 강원도 철원군 | 제 5보병사단 27연대 | 탑 | 기타 | 1996 | 1997-07-26 | 철원군 대마리에 1996년 7월 26일 집중 호우로 순직한 김철우 등 21명의 장병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제5보병사단은 순직 장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7월 26일 준공하였다. 1996년 수해에 희생된 21명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지키려다 불의의 수해로 호국영령이 되었다. 부대에서는 매년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517 | 20-2-12 | 충령사(부여군) | 국가수호 | 2008-11-25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군 | 사당 | 기타 | 1956 | - | 1956-01-01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 내에 나라와 겨레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부여군에서 1956년 1월 1일 사당을 세웠다. 충령각은 부소산성(扶蘇山城)내에 있는 사우로 1956년 세워졌다. 부여지방의 호국 전몰 군경과 베트남에 참전한 용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6월 6일에 추념행사를 하고 있다. 안내판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이곳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전몰군경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국영령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6·25참전, 베트남참전, 대간첩작전시 헌신호국하신 927위(2004년 현재)의 위패가 봉안 되어 있습니다. 본 사당은 당초 부여군전몰군경충령각건립기성회 민간단체에서 성금을 모아 1960년에 건립하여 위패를 모셔오다가 건물이 노후되어 2004년 부여군에서 증·개축하였습니다. 전통한옥 양식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53㎡ 규모로 전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두었고 후면 2칸에 위패를 모시는 공간을 두었습니다. 호국영령들의 영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삼가 추모와 명복을 빌며 위국헌신 나라사랑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자 합니다. |
1518 | 17-2-56 |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공적비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고성군 | 고성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5-06-03 | 6·25참전유공자회 고성군지회는 2005년 6월 고성군 거진읍 대대리 510-8에 6·25전쟁시 조국의 자유와 국토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고성지역 참전유공자 92명의 공적과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길이 계승하고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
1519 | 15-2-81 | 6·25 참전 소년전차병 기념비 | 국가수호 | 2006-04-24 | 경기도 연천군 | 전차병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9-01 | 연천군 횡산리에 2004년 6·25전쟁에 중학생 신분으로 소년전차부사관 후보생으로 자원 입대한 120여 명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년전차병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 소년전차병전우회는 강종현, 민창식, 양지현 등 소년전차병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9월 1일 기념비를 준공하였다. 1952년 5월 전차부사관으로 자원 입대한 소년전차병은 포수, 조종수, 통신, 탄약, 정비교육 등 전 과정을 이수한 후 같은 해 11월 15일 제57전차중대 창설과 함께 제1보병사단 전투를 지원했고, 최전방 고지였던 태풍전망대 지역에 투입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다. |
1520 | 18-1-10 | 독립항쟁 기념탑 | 독립운동 | 2008-09-05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탑 | 기타 | 1995 | 0 | 1995-05-23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용인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항일의병 40명, 3·1독립운동 주동인사 77명, 애국독립지사 36명 등 153명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있고, 1919년 3·1독립운동에는 이 지역에서 1만 3, 200여명이 참여했으며, 그 가운데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폭압으로 사망 35명, 실종 139명, 상해 502명, 옥고 65명 등 741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용인시청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5월 23일 이 탑을 세웠다. |
1521 | 14-2-25 | 연평해전 전승비 | 국가수호 | 2004-12-09 | 인천광역시 옹진군 | 해군 제2함대 사령부 | 비석 | 기타 | 1999 | 소 | 1999-11-11 |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에 제1차 연평해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해군 제2함대 사령부에서 1999년 11월 11일 이 비를 세웠다. 1999년 북한은 자신들의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6월 7일 경비정 1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이래 해상교전이 발발한 6월 15일까지 9일간 총 11여 회에 걸쳐 우리 관할해역을 침범하였다. 6월 7일 오전 9시 10분경 북한 경비정 1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이래, 8일까지 양일간 북한어선 15척이 NLL을 4~7km까지 침범하고 북한 경비정이 3~4회 침범과 철수를 반복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은 국제법에 의거 고속정 2개 편대의 신호로 철수를 요구하다가, 북한 함정의 행위가 의도적이라고 분석 판단하여 고속정들로 하여금 진입차단 기동작전을 펼쳤다. 9일부터는 북한이 경비정을 10척으로 증강하는 한편, 경비정, 어뢰정, 편대를 구성하여 NLL을 1~13.7km까지 침범하여 도발의 수위를 높이자, 우리 해군은 초계함 2척, 고속정 5개 편대를 현장에 투입하여 북한 전력대비 우위전력을 유지하고, 적의 도발에 대비하여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었다. 6월 9일 06:00시부터 10일 04:00시까지 북한 경비정 8척 중 7척이 NLL을 13.7km까지 침범하였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우리 고속정에 대해 북한 경비정이 충돌기동을 시도하여 양측 함정 간에 경미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어 6월 11일 03:36시부터 13:40시까지는 북한 경비정 4척이 NLL을 13.9km를 침범하고 우리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하자 우리 고속정은 이에 맞대응 충돌하여 북한 중형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2척은 손상을 입혔으며 우리 고속정은 4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교전이 일어난 15일에는 08:45시 북한경비정 4척이 NLL을 침범하여 우리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 09:04분 어뢰정 3척을 포함하여 7척의 북한함정이 우리 관할해역을 침범하여 우리 초계함에 고속 접근하자 09:07시 우리 고속정 6척이 맞대응하여 역충돌을 시도하였다. 우리 고속정이 북한 어뢰정을 대상으로 충돌을 시도하자 북한 함정에서는 수류탄 4~5발을 던지고 인근에 있던 북한의 경비정과 합세하여 소총사격과 25mm 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하였고 추가로 증원된 3척의 경비정을 포함하여 총 10척의 북한 함정들이 우리 측 함정을 향해 공격해왔다. 북한 함정의 선제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해군은 북한 함정들을 향해 돌진하며 40mm와 76mm 기관포로 응사하여 교전이 일어난 지 14분 여 만에 북한 함정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교전이 발발한 지 14분만에 10척의 북한함정들 중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대형 경비정 대파, 중형 경비정 2척 반파, 소형 경비정 2척 파손 등 최소 30여 명 이상 사망 및 70여 명 부상이라는 큰 전과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우리 해군의 피해는 4척의 고속정과 1척의 초계함만이 기관실 및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9명의 장병들이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는데 그쳤다. |
1522 | 15-2-104 | 장승천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15-10-14 | 경기도 연천군 | 2136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12-10-22 |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시, 1951년 4월 22 ~ 4월 23일동안 연천군 일대에서 터키군 여단은 장승천 전투라 명명되는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66명의 전사자와 105명의 실종자 및 3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중공군은 1000여 명의 사망과 2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공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523 | 52-2-19 | 호국영웅 라희봉경감 상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 부귀초등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2 | 0 | 2001-02-01 | 6.25전쟁에 희생하신 애국선열들을 추모하고 부귀초등학교 출신 라희봉경감의 호국정신을 빛나게 함으로써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가발전에 이바지 하게 하고자 라희봉경감의 출신 학교 교정에 상을 건립함. |
1524 | 17-2-54 | 월남전참전 기념탑(고성군) | 국가수호 | 2005-05-09 | 강원도 고성군 | 고성군청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4-11-05 | 고성군 대대리에 2004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고성군 지회는 참전유공자를 기리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여 2004년 11월 5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남종현, 한건철, 탁규원, 엄대호, 정현우 등 고성군 용사들은 맹호, 백마, 청룡, 십자성 부대 대원으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525 | 16-2-26 | 강재구 공원 | 국가수호 | 2003-01-20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장소 | 기타 | 1965 | 1986-11-30 |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고자 1만여 평의 대지를 기증받아 육사 16기 동기회 등 여러 기관이 1986년 11월 30일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에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부하 사병이 실수하여 수류탄이 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속했던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는 '재구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그를 높이 기리어 동상이 세워지고, 그가 산화한 자리에는 추모탑을 세웠고, 1978년 강원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산181에 '강재구공원'이라는 공원을 만들었다. 이 공원은 서울 대경목재 김경황씨가 대지 1만여 평을 희사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강재구 소령이 산화한 이 성지에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추모탑 및 기념관을 세우고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살신성인의 정신을 본받는 국민정신의 도장으로 길이 보존하고 있다. | |
1526 | 16-2-78 | 태백중학교 학도병 전적비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철원군 | 제3보병사단(1968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5-04-07 | 6.25는 동족상단이고 동서진영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우리의 조국산하가 포화로 초토화가 되면서 교정에 모여든 127명의 태백중학교 학우들은 육군제3사단 23연대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제3군단 철수작전과 중동부 전선에서 치열했던 피의능선 가칠봉979고지 대진리 쑥고개 214고지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7.27 휴전 때까지 18명의 학우가 구국의 영령으로 산화하였다. 장열하게 산화한 영령을 달래고 태박 학도병의 애국심과 충정이 자라나는 2세와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기를 바라면서 참전학도병과 동문들의 정성으로 전적비를 세운다. | |
1527 | 20-2-04 | 충령사(금산)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사회복지과) | 사당 | 기타 | 1956 | 0 | 1956-01-01 | 금산지역의 순국지사 및 6.25전사자, 월남전쟁 전사자, 순직자 등의 호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군인의 호국보훈 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금산군 주관으로 금산군민의 뜻을 모아 1963년 건립, 위국헌산한 호국영령 위패 580위를 봉안 |
1528 | 11-1-25 | 조병세 순국지(표훈원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학교법인 덕성학원 | 사적지 | 한말구국운동 | 1905 | 1899-09-23 |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원임 의정대신으로 민영환과 더불어 5조약을 폐기하고 5적을 처형할 것을 여러번 상소하였으나, 일이 실패에 돌아가자 유소와 동포에 고하는 유서 및 각 공사에게 보내는 글을 남기고 약을 마시고 순국한 곳 | |
1529 | 33-1-26 | 이형표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4-1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의병운동 | 1858 | - | 2003-05-23 |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1906년 3월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영천 남부지역 책임자로서 구룡산 일대를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전을 전개한 이형표 애국지사의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3년 건립 |
1530 | 41-1-15 | 양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9-05-25 | 경상남도 양산시 | 광복회경남동부지회 | 탑 | 기타 | 0 | 가로 4.5m, 세로 4.5m, 높이 16.3m | 2009-04-01 | 양산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기념탑. 일제강점기 양산지역에서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의해 일어난 항일의병활동과 3·1독립운동, 농민운동·청년운동·학생운동 등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양산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비롯해 각종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여 항일독립운동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2009년 4월 1일에 양산시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양산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
1531 | 16-2-77 | 6·25 참전 학도병 순국 충혼탑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횡성군 | 횡성중.고동문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5-05-08 | 횡성중·고등학교 교정에 200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학교 출신 학도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횡성중고동문회는 모교 출신 학도병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5년 5월 8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횡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횡성중·고등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532 | 43-1-54 | 애국지사 하우 김홍권선생 공훈비 | 독립운동 | 2009-05-25 | 경상남도 하동군 | 하우김홍권선생공훈기념사업회 | 비석 | 해외운동 | 0 | 0 | 2005-06-10 | 김홍권은 1892년 지금의 양보면 운암리에서 태어나 하동보통학교에 입학해 1909년 안희제, 이원식 등과 대동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단체를 만들어 국내외 지하공작활동을 했다. 특히 그는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하동군 대표로 참여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재무위원을 역임했으며, 의정원 의결에 따라 경상도 지방 구급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선임돼 경남지역 책임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또한 1920년부터 1936년까지 만주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천석지기 전 재산을 다 바쳤으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한 채 1937년 향년 46세로 눈을 감았다. 김홍권의 공훈비는 지역민의 노력으로 2005년 8월15일 선생의 고향에 세워졌다. |
1533 | 31-1-64 | 오미 광복운동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09-09-22 | 경상북도 안동시 | 풍산 김씨 오미동 문중 | 장소 | 의열투쟁 | 1905 | 0 | 2008-10-11 | 오미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광복운동 기념 공원. 오미동은 예로부터 풍산김씨의 집성촌이다. 풍산김씨들은 일본제국주의 침탈에 저항하여 간단없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단식으로 순절한 김순흠을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이었던 김응섭과 일본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의사, 그리고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김만수 등 오미마을 출신 24명의 애국지사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민족의 제단 앞에 바치었다. 2008년 10월 11일 오미 광복공원조성사업 추진위원회는 국가보훈처와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받아 오미리 출신의 풍산김씨 독립운동가 24인의 항일 독립운동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이 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다. |
1534 | 42-1-37 | 애국지사 사당 | 독립운동 | 2009-05-25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창원시 | 사당 | 3·1운동 | 0 | 0 | 2008-12-0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경남 마산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고앙주(高昻柱, 미상~1919), 김수동(金守東, 1877~1919), 김영환(金永煥, 미상~1919), 김호현(金浩鉉, 1893~1919), 변갑섭(卞甲燮, 미상~1919), 변상복(卞相福, 미상~1919), 이기봉(李基鳳, 미상~1919), 홍두익(洪斗益, 미상~1919) 등은 1919년 4월 3일 진전면·진북면·진동면의 연합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의 발포로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다. 마산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고 제사하기 위하여 2008년 12월 5일 이 제당을 세웠다. |
1535 | 15-2-83 | 남양주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남양주시 | 무공수훈자회 남양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08-11 | 무공수훈자회 남양주시지회는 2004년 8월 남양주시 지금동 73-1에 남양주시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무공을 세운 무공수훈자와 국가안전보장에 크게 이바지하여 보국훈장을 수여받은 자의 공로를 기리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함양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1536 | 15-2-82 | 내촌면 6.25 참전 전사자 추모비 | 국가수호 | 2006-11-09 | 경기도 포천시 | 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1-01-28 | 6·25참전유공자회 내촌분회는 1991년 1월 포천시 내촌면 내리 325-2에 내촌면 출신 6·25참전 전사자의 넋을 추모하고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그 숭고한 뜻을 전하고자 6·25 참전 전사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1537 | 15-2-37 | 의정부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의정부시 | 의정부시 | 탑 | 6·25전쟁 | 1950 | 1996-01-01 | 6.25전쟁 당시 자유와 국토방위를 위하여 장렬히 전사한 육군대령 홍병태 외 181위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들을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함. 1975년 녹양동(綠楊洞)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199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표석의 뒷면에는 초은 이병식 선생이 쓴 건립 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탑신의 높이는 15m 정도이며, 탑 주위에 전몰장병상과 순국선열상 등 8상의 청동군상이 조성되어 있다. | |
1538 | 53-1-16 | 석정 안후덕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함평군 | 석정안후덕 추모사업위원회 | 생가 | 기타 | 1924 | 본채(83), 대문채(40) | 2009-04-22 | 안후덕은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1924년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내고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에 나섰다. 1926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하여 전 재산을 임시정부 운영 자금으로 헌납하고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다시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하였다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에 은거 생활을 해 오다 광복 이듬해 고문후유증으로 요양하던 중 1946년 향년 42세로 서거할 때까지 23년간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생가는 2009년 복원 공사를 완료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생가에는 그의 독립운동 활동사진과 초상화, 김구의 글과 윤봉길의 초상화 등이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
1539 | 55-1-43 | 독립유공자 위령탑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곡성군 | 윤재일 | 탑 | 기타 | 0 | 가로 8m, 세로 7.5m, 높이 9m | 2005-11-17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곡성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성언(金成言,1880~미상), 김영학(金永鶴,1887~1939), 김용표(金容杓,1899~1967), 김재룡(金在龍,1907~1937), 노인선(盧仁先,1877~1909), 노임수(盧琳壽,1876~1911), 신문선(辛文善,1906~1937), 신유선(申有善,1894~1982), 신정백(申正栢,1877~1909), 양원모(梁遠謨,1858~1942), 유건영(柳健永,1883~1940), 유인수(柳寅秀,1860~1927), 유해용(柳海瑢,1884~1938), 윤정구(尹正九,1882~1953), 이종협(李鍾俠,미상~1907), 이초립(李草笠,미상~1908), 장기문(張基文,1924~미상), 정재건(鄭在健,1843~1910), 조영선(趙泳善,1879~1932), 조옥희(曺玉姬,1901~1971), 조우식(趙愚植,1870~1937), 한방섭(韓芳燮,1890~1958) 독립유공자유족회 곡성군지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 11월 17일 이 탑을 세웠다. |
1540 | 51-2-026 | 군산사범학교 학도의용군 현충탑 | 국가수호 | 2006-11-09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사범학교학도의용군추모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6-08-22 |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군산사범학교 학생 90여명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그 중 29명이 전사하였다. 이 젊은 학생들의 나라를 위해 목숨 받친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고, 장렬하게 산화한 학고의용군의 영령들을 길이 추모하기위하여 2006년 8월 22일 이 현충탑을 건립하고 제막하였다. | |
1541 | 50-2-35 | 김백일장군 상 | 국가수호 | 2006-11-09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1 | 0 | 1966-06-10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육군보병학교 내에 6·25전쟁 중 최전선에서 작전지휘도중 전사한 김백일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966년 6월 10일 육군참모총장이 동상을 건립했다. 김백일 장군은 그 일가의 고향이 함경북도 명천이나, 조부(김영학, 독립투사)가 한·일합방 후 북간도 연길현으로 이주함에 따라, 1917년 1월 30일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에서 태어났다. 국자가 소학교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 1년을 마친 후 서울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군관학교를 졸업, 만주군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함께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1946년 2월 26일 전라북도 이리에서 제3연대를 창설하여 초대연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대령 계급으로 특별부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1948년 10월 여·순 10·19사건이 일어나자 제5여단장으로 임명되어, 순천에 이어 여수를 탈환함으로서 진압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제6여단장, 경기도 옹진지구전투사령관, 육군보병학교 초대교장,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제3사단장을 역임하고, 1950년 4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부재중인 작전참모부장을 겸임하여 초기전투의 산파역할을 하였다. 또한 7월 12일부로 준장 진급을 한 김백일 장군은 동년 8월 제1군단장에 부임한 후, 경상북도 기계, 안강, 포항일대의 낙동강 최후 방어전투에서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의 공격을 저지, 포위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므로서 반격작전의 발판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총 반격작전시에는 예하 3사단을 동해안지구로 진격시켜, 1950년 10월 1일 국군 최초로 38선 돌파작전을 감행하였다.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다가 동년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하고, 김백일 장군은 10월 11일부로 소장으로 진급 하였으며, 제1군단은 계속적으로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함흥 탈환에 이어서 계속 진격하여 청진까지 점령, 동부전선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작전상 후퇴를 하던 중,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서는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에게, 국군은 육로로 철수하겠으니 피란민을 승선시켜 철수토록 설득한 끝에 모든 군용물을 하역하고,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던 피란민 10만 여명을 군 선박을 이용하여 안전하게 자유의 땅 남한으로 후송하는 탁월한 공적을 남겼다. 해상 철수 후 김백일 장군은 1950년 12월 하순부터 강원도 동부지구 38선 지역 방어작전을 강화 하였으나, 1951년 정월 중공군의 신정 공세로 인하여 삼척까지 지연작전을 전개하였다가, 3월 재 반격작전으로 38선을 다시 회복하는 공훈을 세웠다. 그 후 김백일 장군은 중공군의 대공세에 대비, 작전 임무를 수행하다 1951년 3월 28일 미 제8군 작전회의에 참석한 후 군단 본부로 급거 복귀 하던 중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타고 있던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장렬히 전사 하였다. |
1542 | 20-1-29 |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 | 독립운동 | 2009-09-22 | 충청남도 계룡시 | 광복회대전충남지부 | 탑 | 한말구국운동 | 1920 | 0 | 2008-05-22 |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은 1920년 한훈에 의해 결성된 광복단 결사대 발원지인 계룡산 신도안에 충청도의 애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충남 청양 출신의 한훈은 1889년 2월 27일 태어나 1906년 홍주의병이 일어났을 때 17세의 나이로 참여하였다. 선생은 홍주의병 가운데 이용규(李容珪) 휘하에서 군사를 모집하는 소모장으로서 부여․노성․연산․공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5월 30일 홍주성이 일본군에 점령되어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선생은 신도안에서 은거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나철, 윤이병, 기산도, 이상학 등과 함께 오적 처단 계획을 세웠으나 나철 등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홍주 의진 참여자들과 전국의 유림을 연결하여 독립운동을 꽤했으며, 1913년 박상진, 채기중 등 경북지역 지사들과 광복단 및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과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활동했다. 1916년 보성의 양재성(梁在誠)과 벌교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하였고, 서도현 당질인 서인선을 납치하여 1만원의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조성(鳥城) 헌병분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 단원의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과 충남 온양의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사건을 계기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자 체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한훈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광복단 결사대 조직을 협의하고 국내로 잠입했다. 귀국한 한훈은 독립군 모집과 일제 요인 처단을 목적으로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암살단을 조직하여 조선 총독을 비롯한 일제 요인과 친일파 처단을 위해 활동을 시작한 대한광복회 동지 김상옥(金相玉)을 만났다. 한훈과 김상옥은 연합하여 첫 거사로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환영 나온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미국의원단이 남대문역에 도착했을 때 암살단취지서 및 통고문․경고문을 환영군중들에게 살포하고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가서 총독 이하 일본관리들을 처단하는 한편,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관공서와 일본경찰서 등을 폭파한다는 세부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미국위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 일제경찰의 예비검속이 이루어지면서 김상옥의 집에 무기와 탄환을 전달하러 갔다가 김상옥은 탈출했으나, 한훈과 광복단 결사대원, 암살단원들이 체포됨에 따라 거사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훈은 8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이후 대한광복회 요원으로 서도현 등을 처단한 것이 추가로 확인되어 5년 형이 추가되었다. 한훈은 192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충남 계룡산 신도안에 은거하면서 학병 거부자와 탈출병 등을 은신(隱身)시키면서 이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광복단을 재건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단결과 민족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다 6ㆍ25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543 | 31-1-66 | 임청각 | 독립운동 | 2009-05-25 | 경상북도 안동시 | 이항증 | 생가 | 해외운동 | 1905 | 0 | 1519-00-00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이 거주했던 곳이다. 선생은 경술국치 후 만주에 이주하여 조국 광복 사업에 노력하였고 남만 교포의 자치기관으로 부민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3.1운동 당시 한족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의 군사기관으로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1925년에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었으나 1932년 남만에서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
1544 | 23-1-47 | 소난지도항쟁추모탑 | 독립운동 | 2009-09-22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시 | 탑 | 의병운동 | 1909 | 2009-3-13 | 1906년 4월 최구현(1866~1906)은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군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때 소난지도에는 이미 당진의병과 화성창의장 홍일초 휘하의 군사 등 40여 명이 있었고 이어서 서산의병의 참모 김태순이 거느린 의병 28명과 차상길이 거느린 홍주의병 15명이 합류하여 총 120여 명의 의병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로 가기 위해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100여 의병들이 전사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당진군청은 2009년 3월 13일 당진군 석문면 난지도리 373-7에 소난지도 항쟁 추모탑을 건립하여 소난지도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거나 옥고를 치른 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렸다. | |
1545 | 25-2-38 | 6·25 참전 유공자비(상촌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상촌면분회 김우열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11-15 | 6·25참전유공자회 상촌면분회는 2004년 11월 영동군 상촌면 유곡리 돈대리 366에 상촌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1546 | 45-2-20 | 충혼비(사계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사계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5-09-01 | 서귀포시 사계리에 195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호국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사계리 재향군인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충혼비를 1955년 9월 1일 세웠다. 사계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충혼비를 1999년 현재의 사계공동묘지 내로 옮겼다. | |
1547 | 25-2-39 | 6·25 참전 기념비(심천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심천면분회장 박동주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11-15 | 6·25참전전우회 심천면분회는 2004년 11월 영동군 심천면 약목리 375-1에 심천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548 | 11-1-42 | 광복군추모조형물 | 독립운동 | 2018-05-10 | 서울특별시 강북구 | (사)한국광복군동지회 | 조형물 | 해외운동 | - | - | 2017-12-13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순국한 애국선열 17위의 합동묘소로 1967년 광복군동지회에서 조성 후 1985년 국가보훈처에서 단장하였고 2017년 강북구청에서 이 추모조형물을 건립하였다. 현재 묘소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되어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원에 준하는 예우로 관리하고 있다. 김성률 : 1943년 9월 산서성 능천 전투에서 순국 김순근 : 1945년 초모공작 중 체포되어 자결 순국 김운백 : 1943년 9월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김유신 : 1943년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김찬원 : 1945년 8월 태원에서 순국 문학준 : 1943년 8월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백정현 : 1944년 4월 태원에서 순국 안일용 : 1943년 5월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이한기 : 1943년 7월 전방공작요원으로 활동 이해순 : 1945년 8월 하북성 석가장에서 순국 전일묵 : 1945년 8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 정상섭 : 1943년 9월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현이평 : 1941년 3월 서안에서 순국 한 휘 : 1943년 7월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동방석 : 1971년 사망, 태행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이도순 : 미상, 서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조대균 : 미상, 특수공작훈련단으로 활동 <이장자> 김천성 : 1945년 7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 1975.8.8.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 한성수 : 1945년 5월 광복군 모집 및 정보공작 중 순국, 1991.6.19.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 |
1549 | 53-2-22 | 목포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7-05-03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시 | 탑 | 기타 | 2007 | 0 | 2007-02-09 | 목포시 현충탑은 기존 현충탑이 유달산 중턱 고지대에 위치해 현충일 등 각종 행사 시 상이군경 및 고령 보훈가족들이 참배하기 불편하여 재건립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넓어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목포시 옥암동 근린공원 내에 2007년 2월 14일 부지 4,950m²에 새로 건립한 탑이다. 매년 전라남도 현충일 추념식과 함께 각종 국경일 참배 및 추모행사가 실시되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 및 시민들에게 호국정신 함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1550 | 18-1-12 | 민족운동가 구연영의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10-11-03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중앙교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6 | 0 | 2007-08-28 | 구연영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제가 단발령을 공포하자 이에 격분하여 김하락을 비롯하여 조성학․김태원․신용희 등의 우국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이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양근․지평 일대로 들어가 그 지역에서 300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다른 의병들과 함께 이천수창의소라는 연합의진을 세우고 중군장을 역임하였다. 이천 연합의진이 광주의병과 연합하여 수도 서울의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서울 진공을 계획하였지만 일본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구연영은 고향으로 돌아와 기독교에 투신하여 신앙활동과 구국투쟁을 병행하였다. 그러다가 일진회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자 구정서와 함께 체포되었다.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8월 24일 44세의 나이로 아들 정서와 함께 총탄에 맞아 순교했다. 구연영은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아들 정서에게는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구연영의 애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순국 장소인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에 있는 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
1551 | 30-2-38 | 유치곤장군 호국 기념관 | 국가수호 | 2007-05-03 | 대구광역시 달성군 | 달성군수 | 기념관 | 6·25전쟁 | 1951 | 2005-06-15 |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에 6·25전쟁 중에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유치곤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추진위원회에서 2005년 6월 15일 호국기념관을 세웠다. 유치곤장군은 1927년 달성군 유가면 쌍계리에서 태어나 6·25전쟁 당시 공군 전투조종사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운 전쟁영웅이다. 그는 1951년 10월 11일 F-51전투기 조정사로 강릉공군기지에서 첫 출격을 시작으로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공을 세움으로써 6·25 전쟁 중에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 각 3회를 비롯하여 모두 12회에 달하는 각종 최고 훈장을 수훈함으로써 전투조종사로서 최고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우리 공군사에 유일하게 203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2000년 1월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이와 같은 공로를 기리기 위해 호국인물로 전투 조종사인 유치곤 공군준장을 선정하였으며, 전쟁기념관에서는 그의 흉상이 역대 위인들과 함께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이렇듯 그는 전투비행 2천7백여 시간의 신화적인 기록을 남기면서 공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군이며, 그 전공을 그려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는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후대에 길이 알릴 수 있는 역사의 교육 현장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 달성군지역민과 공군 지원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 |
1552 | 33-1-44 | 의병 영솔장 최공주형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10-06-09 | 경상북도 영덕군 | 경주최씨 영덕읍 우곡문중 최석우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1986-11-03 | 한말 평민의병장인 신돌석 의병진의 영솔장으로서 영해 영덕읍 공격전투, 이전평 대산성전투등 각종 전투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1907년 7월 24일 영덕군 병곡면 아곡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시고 2001년 그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은 최주형장군의 전공과 고귀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 | |
1553 | 25-2-53 | 6·25 참전 유공자비(강내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강내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9m | 2004-12-10 | 청원군 탑연리 강내면사무소 입구에 이 고장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참전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강내면 재향군인회는 이곳 출신 박복록, 김태두, 이상민, 조남각 등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12월 10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강내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554 | 25-2-44 | 6·25 참전 유공자비(황간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황간면6.25참전유공자회 정영모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11-14 | 황간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황간면 소계리 소계리 307-16에 황간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262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1555 | 25-2-50 | 6·25전쟁 참전 유공자비(미원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미원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6-06 | 미원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 |
1556 | 15-2-25 | 가평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8-03-15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에 육군 제1군단이 가평지구의 전투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8년 3월 15일에 기념비를 세웠다. 1951년 4월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 때 사창리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의 전선이 돌파되어 이 지역으로 침공한 중공군 제20, 39, 40군이 가평 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자 6사단은 가평 북한강을 배수진으로 일대 반격작전을 준비중에 있을 때 중공군은 4월 25일 새벽 3시 가평과 청평간의 주보급로를 차단할 기도로 야간을 이용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2개 연대(제7, 제17)는 진지를 고수하고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가하자 오전 7시 30분부터 퇴각하기 시작했다. 좋은 기회를 포착한 2개 연대는 추격을 실시 가평 서북쪽 7킬로미터까지 진격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그 일대 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전투는 아군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기여한 전투로 전적비는 봉미산(일명 늪산)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북한강과 남이섬, 가평읍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 및 북한군을 맞아 국군 제5사단, 제6사단 및 미9군단과 함께 격렬하게 공방이 치뤄진 전투로 이 지구를 끝까지 사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
1557 | 23-1-04 | 홍주의사총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문화관광과,역사문화시설관리소) | 기타 | 의병운동 | 1906 | 1993-01-01 | ||
1558 | 15-2-04 | 양평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8-01-01 | 이기용소령 등 620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8년 6월 6일 경기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산40-2에 군민의 성금으로 충혼탑이 건립되었다. 충혼탑 오른쪽에 위치한 오석에는 6·25전쟁시 전몰한 영령들의 명단이 있는데 육군 599명, 해군 4명, 경찰7명, 군속 11명 등 621위다. 탑의 뒷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혼탑 휘호가 음각되어 있다. 이후 1990년 12월 10일 같은 자리에 충혼탑을 재건립하였고, 최초 건립했던 충혼탑은 뒷면에 새겨 보존하고 있다. |
1559 | 25-2-47 | 6·25 참전 유공비(오창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오창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12-09 | 오창읍 재향군인회는 2004년 12월 청원군 오창면(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장대리 324-5(오창면스포츠센터)에 오창읍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참전 유공비를 건립하였다. | |
1560 | 16-2-112 | 월남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0-10-12 | 강원도 양구군 | 강원도 양구군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높이 7.7 m 폭 2.2m | 2014-6-5 | 우리 대한민국 국군은 공산화 위기에 봉착한 자유 월남국을 돕기 위하여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 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요원 10명을 중심으로 1차 파병을 단행한 후 1965년 3월에 2천여 명으로 편성된 주월한국 건설지원단인 비둘기 부대를 추가 파병하였다. 이후 1965년 10월 9일 청룡부대를 파병하였고, 동년 10월 23일에 맹호부대, 1966년 9월 22일에는 백마부대를 파병함으로써 한국군의 총 파병인원은 4만 8천여 명으로 증강하였다. 주월 한국군은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의 파월 기간 동안 오작교, 짜빈동, 안케패스, 축코 작전 등 수많은 소부대 작전을 전개하여 적사살 41,462명, 포로 6,633명, 귀순 10,962명과 다수의 무기노획 등 전과를 올려 한국군의 위용과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으나, 우리도 전자사 5,099명과 부상자 10,962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용전분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악화되어 한국군은 1971년 12월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단계적으로 철수 하였으며, 월남은 패망하고 말았다. 자유를 위해 싸운 양구군 출신 월남전쟁 참전 용사 163명의 수훈을 기리고자 기념탑을 세웠다. |
1561 | 43-1-56 | 노응규의병장 생가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수 | 생가 | 의병운동 | 0 | 2010-11-05 | 노응규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죽전동에서 노이선의 2남으로 태어나,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거병하게 되었는데, 노응규도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의 의병은 진주를 단숨에 함락시키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하여 진주의병진(총대장 노응규)을 구성하였다. 진주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공하여 김해까지 손에 넣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개입에 밀려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의 피탈이 가시화되자 노응규는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의 의병에 합류하였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또 다시 거사를 준비하여 그해 충청북도에서 의병 조직을 구성했는데, 밀정에 의해 이 일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1562 | 25-2-46 | 6·25전쟁 참전 유공비(옥산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옥산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6-09 | 옥산면재향군인회는 2004년 6월 청원군 옥산면 오산리 540(옥산면사무소 광장)에 옥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비를 건립하였다. |
1563 | 30-1-55 | 이태희지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10-11-03 | 경상북도 성주군 | 이항용 | 비석 | 3·1운동 | 1919 | 1949-01-01 | 성주 출신 애국지사로 성주 3·1독립운동에서 순국한 이태희의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는 가운데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유림측과 기독교측에서 결정함에 따라 이날 장터에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여 밤 11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군중이 성주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에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강경진압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하였고 이태희는 투석으로 맞서며 항쟁하였다. 시위양상이 커져가자 일본경찰은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시위대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이태희는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49년 1월 1일에 후손들에 의해 이 비가 세워졌다. | |
1564 | 18-1-13 | 용인 3·1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11-10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탑 | 3·1운동 | 1919 | 0 | 2011-03-29 | 1919년 3월 21일 약 1천명이 참가하여 일어나 원삼면의 3·1만세운동의 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용인시가 2011년 4월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 산21-1에 건립한 철조 기념탑이다.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이봉현·김영달·김성남·이은표·이용환·최상근·안명옥·김은수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고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리는 등 준비를 갖춘 후 이날 새벽 횃불을 들고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원삼면사무소를 향해 시위 행진하였다. 이어 면장을 앞세우고 다시 장터로 향해 시위행진을 벌이던 중 출옥한 일군 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주동인물 다수가 체포되었다. 이같이 원삼면에서 시작된 용인 3·1만세 운동은 4월 2일 남사면 면장 기습시위 사건까지 13회에 걸쳐 13, 200명이 궐기해 사망자 35명, 부상자 139명, 피검 502명, 수형자 65명 등 사상자를 내며 외세에 대항한 운동으로 불굴의 의지와 독립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
1565 | 15-2-85 | 구리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구리시 | 무공수훈자회 구리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5 | 0 | 2005-05-02 | 무공수훈자회 구리시지회는 2005년 5월 구리시 인창동 313-6(인창중앙공원)에 구리시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 구리시의 지원을 받아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1566 | 31-1-75 | 우초 민순호 의사 사당 | 독립운동 | 2017-04-19 | 경상북도 문경시 | 우초 민순호의사 기념사업회 민창식 | 사당 | 의병운동 | 0 | 2009-10-14 |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 봉래(鳳來), 호는 우초(愚樵)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전국에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의병장 운강 이강년(雲崗 李康秊)을 도와 문경에서 거의하였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 의병을 피해 도망가던 친일 관리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치윤(李治允), 김인담(金仁覃)을 붙잡아 군중들 앞에서 그들의 친일행각을 밝히고 효수(梟首)하였다. 그 후 마성면 마고성(麻城面 麻姑城)에서 적과 격전을 치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한 후 이강년과 함께 제천(堤川) 의진과 연합하여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돌격장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고종(高宗)이 강제 퇴위 당하자 이강년과 함께 다시 거의하였다. 충주(忠州), 연풍(延豊), 영주(榮州), 봉화(奉花), 안동(安東), 강릉(江陵), 원주(原州)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7월 제천 전투에서 크게 이겨 이강년 의진의 명성이 높아졌다. 1908년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순국한 후에도 중군장(中軍將) 김상태(金尙台)를 중심으로 재기하여 태백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후에 《운강선생창의일록 雲岡先生倡義日錄》 편찬사업에도 관여하여 의병의 활동기록을 남기는데 동참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
1567 | 16-1-40 | 원주진위대터 | 독립운동 | 2014-07-18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장소 | 의병운동 | 1895 | 1395-01-01 | 긍호(閔肯鎬, 미상~1908)는 한말 여흥민씨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를 지냈다.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령이 공포되자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장교와 병사들을 소집하여 무기를 나누어주고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김덕제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원주읍을 장악한 다음, 일본군 정찰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격퇴시켰다. 8월 8일 이후에는 제천·충주·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약 7개월간 여주읍 습격 점령전투를 비롯하여 72회 이상의 전투를 치러내며 일본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의병장으로 떠올랐다. 민긍호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으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 29일 궐덕리 마을을 포위한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한국순사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환하려 하자 일제는 이를 두려워하여 29일 오후 11시경 민긍호를 사살하였다. | |
1568 | 52-1-38 |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10-02-12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읍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8-04-01 | 전라북도 장수(長水)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山西面桐花里) 장날을 이용하여, 안성섭(安成燮)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1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1569 | 13-2-35 | 의왕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의왕시 | 무공수훈자회 의왕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10-01 | 의왕시 내손동 계원예술대학 정문 앞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의왕시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의왕시는 김안일, 한지섭, 윤창곤, 강봉래, 박풍규 등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호국충정의 투혼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10월 1일 공적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의왕 청년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서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 수호의 방패자로서 싸우다가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세계평화 수호란 이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
1570 | 41-1-16 | 외솔기념관 | 독립운동 | 2011-06-08 | 울산광역시 중구 | 중구청 | 기념관 | 문화운동 | 1894 | 2009-10-23 |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학자 기념관로서는 전국 최초인 외솔 최현배 기념관이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터인 중구 동동 613번지 3,3l6㎡부지에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건립됐으며, 전시관과 체험실, 영상실 등을 갖추고 있다. | |
1571 | 10-1-24 | 안중근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11-06-08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의열투쟁 | 1879 | 2010-10-22 | 안중근의사 동상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순국하신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2010년 10월 22일 재건립되었으며,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태극기를 꺼내든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입구에 위치한다. 안중근의사는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현재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위치한 장소는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물이었던 남산 조선신궁이 건립되었던 곳으로 항일운동의 역사에서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
1572 | 53-1-17 | 박종식공 추모비 | 독립운동 | 2011-10-10 | 전라남도 진도군 | 태극기선양운동회(박종일) | 비석 | 학생운동 | 0 | 0 | 2011-06-07 | 이 추모비는 2011년 6월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 30-3에 이 마을 출신 항일독립지사 박종식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군내면 송산마을 출신인 박종식 선생은 1929년 목포상고 3학년 재학시절 목포지역 학생 항일투쟁 총집회를 개최, 유인물 1500장과 태극기 120매를 배포했다. 특히 광주학생항일운동 구속 학생 즉시 석방,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등을 요구하면서 항일 독립투쟁을 고취시켰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종식 선생은 1993년 항일독립투쟁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서훈받았다. |
1573 | 41-2-10 | 한국전쟁 대운산 전적 기념탑 | 국가수호 | 2007-10-23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산광역시 호국선양기념사업단 | 탑 | 6·25전쟁 | 1951 | 가로 2m, 세로 1.5m, 높이 5m | 2007-03-25 | 울산지역 향토수호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함 |
1574 | 13-1-29 | 애국지사 김용창 상 | 독립운동 | 2011-11-10 | 경기도 화성시 | 광복회 화성시지회 | 동상 | 학생운동 | 0 | 0 | 1996-06-01 | 김용창은 1926년 향남읍 상두리에서 광산김씨 김언수와 순천박씨 박종레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향남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덕수상업학교 재학하면서 그러던 중 1943년 6월경부터 근무지의 대우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이 있음에 의문을 품고 역사책을 탐독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는 경성시내 곳곳에 “조선반도 2600만 동포여 일어서라. 조선독립의 때는 왔다”는 벽보를 써 붙이고 조선독립을 선동하다 체포돼 보안법위반으로 징역형으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4월 3일 20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
1575 | 24-2-01 | 충혼탑(충주시)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충주시 | 충주시 | 탑 | 기타 | 1950 | 0 | 1955-01-01 | 충주시 칠금동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순국선열과 전몰군경 등 2, 920위의 충주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상이군경회와 재향군인회 충주시 지부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11월 이 탑을 준공하였고, 충주시에서 2002년 5월 다시 증축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 위기 시 충주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충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576 | 53-2-36 | 진도경찰부대상륙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전라남도 진도군 | 재향경우회진도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9m 기단 1.4m | 2013-10-05 | 1950년 제 12대 진도경찰서장 김용래 경감 등 138명으로 편성된 경찰부대가 10월 5일 11시 30분경 진도읍 해창리 동소포 해안으로 상륙하여 진도경찰서로 진격, 인민국 30여명을 격퇴하고 같은 날 오후 2시 경 경찰서를 탈환한 후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다시 게양하였으며, 당시 의신면 옥대리 돌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경찰가족 등 우익인사 50여명을 구출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양하였다. 이게 진도를 수복한 감격스런 그날 을 기념하고 선배 경우님들의 국가와 국민을 위한 숭고한 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움 |
1577 | 11-1-41 | 근현대사기념관 | 독립운동 | 2018-05-10 | 서울특별시 강북구 | 민족문제연구소 | 기념관 | 기타 | - | - | 2016-05-17 | 헌법정신의 요체인’자유’,’평등’,’민주’의 이념이 단순히 외래의 소산이 아니라 선열들이 피땀 흘려 체득하고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임을 감동이 있는 서사로 전달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사월혁명의 투사들이 소원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임을 널리 알리고자 함 |
1578 | 53-1-18 |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11-10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 탑 | 사회운동 | 1943 | 0 | 1998-05-01 | 암태도 농민소작쟁의는 일제의 가혹해진 소작료 수취가 발단이었다. 당시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은 평균적인 소작료는 50% 정도를 훨씬 넘는 60~80%에 이르는 소작료를 요구했다. 청년 서태석, 서창석 등은 1923년 말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조정하였다. 그러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소작료 납부 거부와 함께 협상을 시도하던 중 경찰 고소와 고발, 구속 등으로 이어졌다. 소작인회는 13명의 구속석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면서 쟁의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섬주민 500여 명이 목포법원 마당에서 단식농성을 하자 이에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지원하는 강연회와 지원금을 모금하였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로 변호를 자청하면서 파문이 계속 확산됐다. 이에, 마침내 일제는 더 이상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남도청과 무안군청 쪽도 문재철을 설득하여, 결국 타협안 6항(1항, 소작료 40%, 10%는 농업장려금 외 5항)이 마련되었다. 이 중재로 인하여 쌍방간의 고소를 취하하면서 구속자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풀려났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섬주민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다른 소작쟁의에 큰 힘을 불어넣어주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암태도 소작인 항쟁을 기리는 기념탑인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 비석에는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날의 투쟁을 증거하는 글이다. 1998년에 암태면사무소 옆 부지 4백여 평에 높이 7m, 폭 1.2m의 크기로 건립된 이 기념탑에는 소작인 항쟁사와 항쟁에 참여했던 농민 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1579 | 50-1-39 | 순국선열 규사 송주면 순절비 | 독립운동 | 2011-11-10 | 전라남도 화순군 | 정미령 | 비석 | 기타 | 1910 | 2008-05-01 | 규사 송주면 선생은 1905년 20월 일제의 침략이 더욱 거세지자 공은 이에 항의하여 중추원 의관 정삼품직을 사직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혈서를 일제통감부에 보내고 정명시 5수를 남긴다음 사평천에 나아가 투신 순결하였다. | |
1580 | 30-1-60 |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12-05-16 | 대구광역시 중구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기념관 | 민족주의운동 | 1907 | 2011-09-08 |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대구시가 1907년 거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서,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구국정신과 뜻을 기념하고 계승ㆍ발전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1년 10월 개관하였다. 지하 1층의 ‘제1전시실’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의 시작과 전개에 대하여, 지상 1층의 ‘제2전시실’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의 결과와 미래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다. 영상실에서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영상을 상영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국비와 시비 그리고 시민들의 모금으로 지어져 2011년 10월 5일 ‘한국기부문화일번지’로 명명되었다. 주요 시설물은 지하 1층에 제1전시실, 영상실이 있고 지상 1층에 제2전시실, 시민과 함께하는 국채보상운동, 지상 2층에는 기획전시실,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대한매일신보(449호),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 (국채보상)영수증,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규정 등이 있다. | |
1581 | 18-1-14 | 광주시 3.1독립기념탑 | 독립운동 | 2012-05-16 | 경기도 광주시 | 광주시 | 탑 | 3·1운동 | 0 | 0 | 2011-12-28 | 우리 선조들은 일제 침략에 조국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웠고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번영된 조국이 있게 되었다. 광주인들의 독립만세운동정신을 기리고 특히 의병들의 치열했던 항쟁사 속의 구국정신과 그분들의 혼을 여기에 새기고 후세에 선열들의 얼을 계승하고자 3.1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
1582 | 31-1-70 | 이인화의병장생가(온계종택) | 독립운동 | 2012-05-16 | 경상북도 안동시 | 이목(후손) | 생가 | 의병운동 | 0 | 0 | 2010-05-05 | 호는 원여(元汝). 경상북도 문경 출신.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선성(宣城)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에서 거의한 김도현(金道鉉)과 안동의병대장 김도화(金道和) 휘하에서 안동부 입성에 성공하였다. 3월에는 함창의 태봉(胎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군사 300여명을 거느리고 격전을 벌였다. 적과의 교전이 치열하고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하여 의병부대가 패퇴하자, 김도현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일단 헤어져 새로이 의병을 일으켜 예안대장(禮安大將)이 되었다. 10월에 고종이 해산을 선유(宣諭)함에 따라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예안에서 선명학교(宣明學校)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온힘을 기울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1583 | 41-2-09 | 양산시 6ㆍ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7-05-10 | 경상남도 양산시 | 6ㆍ25참전유공자회 양산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10m | 2007-03-13 | 양산시는 2007년 3월 13일 경남 양산시 중부동 406번지 일원 양주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양산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토록 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명각비에는 양산시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2, 33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실상을 알리고, 전쟁의 진행과정을 설명한 안내판이 서 있다. |
1584 | 20-1-30 | 송병선선생 순국지 | 독립운동 | 2012-10-17 | 대전광역시 동구 | 대전동부신협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1905 | 0 | 1993-01-01 | 송병선은 충청남도 회덕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과 경연관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에게 인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으며,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으로 건립된 문충사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
1585 | 55-1-31 | 성재 이백래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4-12-10 | 전라남도 보성군 | 이태호 | 비석 | 의병운동 | 2003 | 좌대 1.5m, 체석 2.4m, 갓석 1.5m | 2003-09-08 | 이백래(李白來, 李允先, 1862~1909)는 전남 보성 사람으로 한말 육군참위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능주에서 양회일(梁會一)·안찬재(安贊在)·임낙균(林洛均) 등과 함께 능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체포되어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풀려났다. 1908년 1월에도 의병을 모아 심남일(沈南一)·임창모(林昌模) 등과 함께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결성하고 도대장(都大將)에 추대되어 장흥·강진·흥양·보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했고, 광주로 진군하던 중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보성 지역 성재 이백래선생추모비건립위원회에서 2003년 9월 8일 그를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586 | 11-1-17 |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 독립운동 | 2012-05-16 | 서울특별시 성북구 | 대한불교 본원종 여래사 | 기타 | 기타 | 1958 | 1958-02-05 | 나라를 위해 순국한 373위 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순국선열봉안소 및 위령탑. 1958년 2월 5일 대한불교조계종 여래사는 조국 독립을 위하여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 순국선열 373인의 위패를 봉안하는 봉안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순국선열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위령탑을 세웠다. | |
1587 | 26-1-13 | 공주향교 강학루 | 독립운동 | 2012-10-17 | 충청남도 공주시 | 공주향교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1910 | 1623-01-01 | 공주 향교의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공주시 웅진동 숭산 기슭에 있던 것을 1623년 순찰사 신감(申鑑)과 목사 송흥주(宋興周)가 현재의 교동 211번지로 옮겨 세웠다. 대성전, 문묘·명륜당·동재·존경각 등이 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는데, 그 중에서 강학루는 1831년과 1846년에 중수를 하였다. 1978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공주향교의 강학루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1910년 한일병합 조약으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박탈당하자 오강표열사가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곳이다. 오강표(吳剛杓)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1588 | 55-1-41 | 권병안 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순천시 | 권준표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1909 | 생가 건물 1동 | 2009-05-01 | 의병으로 전남 순천(順天)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권대화는 무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전남 순천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중 1909년 6월 20일 전남 순천군(順天君) 쌍암면(雙岩面) 서변리(西邊里)에서 일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부대시설 지정 : 권병안 선생 동상 - 주 소 : 순천시 승주읍 평중리 595 - 건립일 : 2019. 5. 2. - 규 모 : 동상 1식 2.4mx3m |
1589 | 24-1-21 | 홍범식 고택 | 독립운동 | 2012-10-17 | 충청북도 괴산군 | 괴산군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0 | 0 | 1730-01-01 | 일완 홍범식은 1910년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에 의한 경술국치에 항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열사로 남으신 분이다. 홍범식 선생의 자제분이셨던 벽초 홍명희 선생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1919년 이곳에서 괴산지역 3.1항쟁을 주도하였다. |
1590 | 16-1-39 | 횡성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2-10-17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수 | 장소 | 3·1운동 | 1919 | 1919-04-01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 |
1591 | 24-1-20 | 제천의병 남산전투지 | 독립운동 | 2012-08-31 | 충청북도 제천시 | 충청북도제천교육지원청 | 장소 | 의병운동 | 1896 | 0 | 1896-01-01 | 제천 남산은 제천의병의 항일 정신이 깃든 격전지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의병은 유인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1896년(고종 33) 2월 17일에 충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세로 3월 5일 충주성을 빼앗기고 다시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의병은 남산에 주둔하면서 중앙공원 아후산에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의병의 방어선은 점차 밀렸고, 5월 25일에는 근거지인 남산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다. 이 남산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관 홍사구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
1592 | 26-1-11 | 숭의사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공주시 | 숭의사보존위원회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67 | 0 | 1968-03-17 | 이철영은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 에서 태어났다. 1904년 일본 사람들이 철도 부설을 위하여 공주에 있는 선영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1909년 융희 3년에 을사조약체결 등 어려운 상황을 느낀 선생은 의병거사를 계획하여 기의려문을 지었고, 호적개편 반대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4년 부여 순사주재소에 잡혀가 70여 일간 구금되었고, 1918년 호적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부여 일경주재소에 잡혀갔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왜인들의 정령을 모두 거부하여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19년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1593 | 43-1-57 | 다솔사 | 독립운동 | 2012-10-17 | 경상남도 사천시 | 다솔사 | 장소 | 문화운동 | 0 | 1915-01-01 |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한 만당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단체이다. 1930년 5월 만해 한용운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은 불교 청년들이 식민지 불교의 극복,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만당은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침략 세력과 줄기차게 투쟁하였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도쿄[東京]에까지 지부를 조직했다. 만당은 표면 단체로 불교 청년 동맹을 조직하고 각지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는 당세가 확장되어 80명의 당원을 확보하면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사찰로 1938년 말 만당은 진주경찰서에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서울과 사천을 비롯한 진주, 합천, 해남, 양산 등지에서의 6차례에 걸친 일본 경찰의 검거 선풍으로 김법린, 장도환, 최범술, 박근섭, 김범부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 |
1594 | 11-1-18 | 중앙 YMCA 회관 터 | 독립운동 | 2012-08-31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재단법인서울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 | 장소 | 3·1운동 | 1927 | 1927-02-01 | 3.1온둥의 3대 주축 세력인 학생단 운동의 중심지 중앙 YMCA회관은 3.1운동 당시 학생 YMCA가 중심이 된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신간회 창립대회를 비롯한 각종 민족운동 집회가 개최된 장소이며,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 | |
1595 | 43-2-48 | 산청군 참전 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08-05-09 | 경상남도 산청군 | 6.25참전유공자회산청군지회 | 공원 | 6·25전쟁 | 1951 | 0 | 2007-06-15 | 산청군 외송리 참전기념공원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공원’을 건립하였다. 산청군은 이곳 출신으로 무공수훈자를 비롯한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7년 6월 15일 기념공원을 준공하였다. 6·25전쟁에 산청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산청군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596 | 14-2-28 | 광명시 호국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광명시 | 경기도 광명시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중 | 2008-02-01 | 광명시 하안동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호국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광명시는 정한식·한명인·김용산·신동호(6·25전쟁), 임홍수·권종만·감석목)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충정의 얼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8년 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광명 청년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북한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1597 | 31-1-65 | 향산 고택 | 독립운동 | 2009-05-25 | 경상북도 안동시 | 이동열 | 생가 | 기타 | 1910 | 0 | 1976-4-00 | 경상북도 안동(安東)군 예안(禮安)면 하계(下溪)리에서 퇴계(退溪)의 후예로 태어났다. 186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에 지평(指平)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으며, 1876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 때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격렬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양산(梁山)군수로 복직되었을 때에 양산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가렴주구가 심한 관찰사를 면박하여 사과를 받았다. 1882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 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어 의병대장이 되고 부장(副將)에 이중린(李中麟)을 임명하여 안동의 의병대장 권세연(權世淵)과 연합해서 안동지방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조약에 찬동한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리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마침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자 이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으로써 항거하기로 하고 유서를 지어 놓고 단식을 시작해서 24일만에 절명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598 | 13-1-34 | 조명하 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13-05-13 | 경기도 과천시 | 조영환 | 동상 | 3·1운동 | 0 | 0 | 1988-05-14 | 조명하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일본제국의 국구인 육군대장 구니노이야 구나요시왕을 처단하였으며 그해 10월 10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제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한의 젊은이여! 조국을 굳게 지켜라, 조국을 잃으면 자유와 정의 평화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나라 없는 백성은 오직 노예의 곤욕과 방황만이 있을 뿐이다" |
1599 | 10-2-011 | 한강방어 백골부대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05-08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사단법인 백골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10-01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서울 삼각지에 주둔해 있던 제18보병연대(백골연대)는 6월 28일, 적이 서울까지 침공해오자 7일 동안 영등포를 방어하여 이후 미 지상군 투입 및 아군이 지연전을 펼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 분전한 백골연대 장병들의 투혼을 기리기 위하여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1600 | 10-1-26 | 대한제국군서울시가전투지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상공회의소 | 장소 | 기타 | 1907 | 0 | 2013-05-09 | 1907년 통감부가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통고하자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은 대한제국군의 해산 소식에 격분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을 택했다. 이를 본 장병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군 장병들이 분투했으나 현격한 전력의 차이로 인하여 시가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은 장교 11명 등 68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당했다.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했고 항일의병의 전력이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
1601 | 30-1-65 | 김산의진 창의지 | 독립운동 | 2013-02-18 | 경상북도 김천시 | 강희돈 | 장소 | 의병운동 | 1896 | 0 | 1634-01-01 | 여중룡(呂中龍)의 호는 남은(南隱). 경상북도 금릉군 구성면 김천 출신이다. 1895년 10월 일본인들의 민왕후 참살에 이은 단발령 공표에 반발하여 1896년 1월 22일 김산 유생 여영소·여중룡 등은 금릉향교에 모여 통문을 띄우고, 향회를 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 무렵 의병을 일으키다 실패한 상주지역 이기찬·조동석등과 선산의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통문을 보고, 김산으로 모여들었다. 허위(許蔿)는 경북 선산의 유가명문(儒家名門)에서 태어나 7세 때 시를 지을 줄 알고 16세 때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한 명망 높은 유학자였다. 이리하여 김산·지례·상주·선산 등지의 유생들은 1896년 음력 2월 11일(양 3. 24) 금릉향교에서 상주 유생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산의진을 일으켰다. 김산의진은 「김산창의대장」이라고 쓴 큰 대장기를 세우고 2월 12일(양 3. 25) 대구부로 진격하기 위해 출발하여 김천에서 유숙하고, 2월 13일 저녁 지례에 도착하였다. 2월 14일 김산의진은 군량과 군병을 모집하였는데, 지례현감은 관포군을 의병진에 붙여주었고, 의병지원자가 늘어 진영이 차츰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구에서 파송된 경상감영의 관군 수백 명이 김천에 도착하고, 고종 황제가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종용을 받아 3월 29일 김산의진은 해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후 1905년 7월 24일 여중룡은 이병구(李秉九)·지우룡(池禹龍)과 일본공사관을 폭파하려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행, 혹독한 고문으로 중상을 입었으며,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6년 5월 다시 허위ㆍ이강년(李康秊)·우용택(禹龍澤)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의병대장 최익현(崔益鉉)과 힘을 모아 서울에 입성한 뒤 통감부를 격파할 것을 맹세하고 8월 2일에 김산군 병기창고에서 포 80발을 걷어서 의병 180명을 무장시키고 군비 200원을 준비해 가던 중, 옥중에서 얻은 병과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허위는 1907년 다시 이인영(李麟永) 등과 원주(原州)에서 전국 의병 대연합 부대를 조직하여 서울을 향했고, 허위는 정병 3백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렀으나 후진(後陣)이 일군에게 진로를 차단당해 포위되어 싸우다가 포로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기찬은 1896년 3월 29일 패퇴했던 김산의병들 중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여 명을 다시 집결시켜 상주와 김찬의 동지들과 함께 직지사에서 4월 11일 다시 대장으로 추대되어 군문도총(軍門都總) 조동석, 참모장 허위, 서기 여영소와 이시좌, 중군장 양제안, 선봉장 윤홍채 등으로 의병 부대를 재정비하고는 진천·영동·황간·문경으로 진출했고, 김천·대구로 출동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
1602 | 15-2-87 | 양주시 6·25 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07-10-18 | 경기도 양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양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7-06-15 | 양주시 6·25 참전 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6·25 참전비를 세웠다. |
1603 | 13-1-31 | 대부면사무소3.1운동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3-02-18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 안산시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3-01-01 |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467에 위치한 대부면사무소는 3·1운동 당시 대부면민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던 시위지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면사무소 청사 건물로, 대부동주민센터 앞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면 좌측으로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와 선정비가 있다. 그 역사적의 가치가 커서 2002년 9월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7호로, 2013년 2월 18일에 현충시설(3.1 운동 만세시위지)로 지정되었다. 대부면의 김윤규·노병상·홍원표 등 3인은 1919년 3월 13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이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4일 오전 3시경 집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대부면사무소 앞에서도 시위하였다. 이로 인해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가 체포되어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1604 | 55-1-46 | 애양원 교회(신사참배거부 운동지) | 독립운동 | 2013-02-18 | 전라남도 여수시 | 성산교회 | 기타 | 한말구국운동 | 1941 | 건물 2동(교회 본관 1동, 역사관 1동) | 1909-04-25 | 애양원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1939년에는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원탁회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17년 10월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일본 동경유학 중에 기독교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경상남도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7월 여수 나병원의 애양원교회 전도사가 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맞서며 일제의 폭정과 우상숭배를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1940년 9월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1948년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으며, 아들을 죽게한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자신은 6·25전쟁 기간에 납북되는 도중에 북한군에게 희생되었다. 애양원교회는 1928년에 설립되었고, 1934년 화재로 인해 골조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전소되자 1935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
1605 | 33-1-45 | 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3-02-18 | 경상북도 영덕군 | 영해파출소장 | 장소 | 기타 | 1919 | 1919-03-18 | 1919년 3월 영해면 주민들이 영해주재소를 공격하며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영해면 주민들은 장날인 3월 18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영해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오후 1시경 영해 주재소로 옮겨 전개되었다. 3천여명의 주민들은 영해주재소에서 일제 경찰을 감금하고 집기와 기물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만세시위는 3월 19일까지 계속되었다. | |
1606 | 11-1-30 | 보성사 터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 | 사적지 | 3·1운동 | 1919 | 보성사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경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측근으로 활약하던 이용익이 1906년 러시아어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재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보성중학교와 보성사는 이용익 사후 재정난으로 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 3.1운동 당시 최린이 보성고보의 교장을, 이종일이 보성사 사장을 맡게 되었다. 1919년 2월 27일 보성사에서는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인쇄하였고 3월 1일 당일 천도교월보사 주필 이종린의 주관하에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촉구한 조선독립신문 제1호를 찍어냈다.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 인쇄소에서 조판한 후 천도교의 보성사 인쇄소로 넘겼다. 보성사 인쇄소는 2월 20일부터 사장 이종일, 총무 장효근, 감독 김홍규, 직공 신영구와 최남선 등 다섯 사람이 극비리에 밤에만 인쇄하여 25일까지 2만 5천매를 인쇄하고, 거리가 먼 천도교의 지방 교구에 우선적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의암상사와 협의하여 27일 밤에 1만매를 더 인쇄했다. 또 3월 1일에는 조선독립신문 제1호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 ||
1607 | 16-2-80 | 연화동 안보공원 | 국가수호 | 2006-11-09 | 강원도 인제군 | 제5689부대 | 장소 | 기타 | 1996 | 1998-11-05 | 1996년 9월 18일 북한무장공비 25명이 잠수함을 이용하여 강릉 안인진리 해안으로 침투하였다. 49여 일간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펼치던 중 육군 산악부대 예하 특공연대와 을지부대가 출동하여 11월 5일 연화동 계곡 인근에서 무장공비 2명을 사살하고, 300여 점에 이르는 장비를 노획함으로써 공비소탕작전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연화동 전투에서 오영안 기무부대장과 서형원 소령, 강민성 병장이 전사하고 1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998년 11월 5일 순직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민·관·군의 정성을 모아 연화동 일대에 평화와 안보를 상징하는 '전적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전적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2001년에는 장병들의 성금과 인제군 지원금으로 '안보전시관'을 건립하여 안보의식 고취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1608 | 11-1-22 | 천도교소년회사무소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천도교중앙총부 | 기타 | 문화운동 | 1923 | - | 2013-02-18 | 소년운동과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인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 천도교소연회는 1921년 4월 서울에서 방정환, 김기전, 이정호 등이 중심이 되어 어린사람의 인격 옹호를 표방하며 조직하였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1927년부터 5월 첫 일요일)로 정하고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함으로써 어린이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는 천도교 중앙종리원 안에 자리하였데, 현재는 수운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
1609 | 42-2-46 | 함안충의공원 | 국가수호 | 2007-10-31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공원 | 기타 | 2006 | 0 | 2006-10-17 |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함안군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위해 함안군에서 2006년 10월 17일 충의공원을 조성하였다. 함안충의공원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함안군이 역점시책으로 추진해온 건립사업으로 2002년 문화재발굴조사를 시작으로 5년간의 어려운 공사과정을 거쳐 호국영령들의 귀중한 안식처를 마련하였으며, 함주공원 맞은 편 나지막한 동산 위에 건립된 이곳은 함안의 관문인 고속도로 나들목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은데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
1610 | 18-1-15 | 원곡면사무소(3.1운동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3-05-13 | 경기도 안성시 | 안성시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9-03-01 | 1919년 3월 1일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해 만세 시위가 시작된 곳이다. |
1611 | 55-1-47 | 황병학 의병 전투지 - 망덕포 | 독립운동 | 2013-05-09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장 | 장소 | 의병운동 | 1905 | 부지 | 1905-11-18 |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은 을사늑약과 광무황제 강제 퇴위 및 군대해산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몰아내기 위해 1908년 여름에 황순모(黃順模)·한규순(韓圭順)·고견(高堅) 등과 산포수(山砲手) 200여 명을 모집하여 백운산에서 의병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광양군 망덕만(望德灣)에 이주하여 한국의 어장을 침탈한 일본 어민과 잡화상을 개설한 일본 상인들을 공격하여 처단하였다. 망덕포전투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저지하기 위한 황병학 의병부대의 대표적인 항일투쟁 사례이다. 그후 이들은 광양을 비롯한 여수·순천의 연해도서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을 병탄하자 황병학 의병부대는 하는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병학은 기산도와 만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하다가 발각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가 의주에서 헌병대에 피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봄 출옥하여 귀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4월23일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이 비는 황병학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86년 8월 15일 건립하였다. |
1612 | 23-2-21 | 반공5열사위령탑 | 국가수호 | 2005-05-25 | 충청남도 서천군 | 서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1991-09-09 | 충남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에 반공5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서천군에서 1991년 9월 9일 이 탑을 세웠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지 20여일 만인 7월 중순경 북한군은 서천지역을 점령하고 종천면 도만리·비인면 성산리·장항읍 송림리 등에 인민부대를 주둔시키며 무력도발을 지속적으로 자행했다. 이에 장항농업중학교 졸업반 학생이었던 김달식·양태순·임상덕·신윤식·최승상 열사는 구국결사동지회를 구성하고 장항제련소 뒷산과 비인면 월명산에 집결한 북한군의 적정을 우리 해군에 알려 해군 함정의 포격으로 적을 분산시켰다. 또 북한군에 끌려가는 주민들을 탈출하게 하는 등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2차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색분자의 밀고로 체포돼 모진 고문에 항거하다 대전형무소에서 9월 9일 순국했다. 반공 오열사 위령탑은 학생의 신분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다섯 학도의 숭고한 호국 혼을 기리기 위해 1991년 건립됐으며 매년 9월 9일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
1613 | 30-2-39 | 반공순국 충혼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상북도 경산시 | 경산재향경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2-11-10 | 경북 반공애국 유족위원회는 무장공비에 대항하다 순직한 경산경찰서 박상호 서장 등 순직경찰관 5명의 반공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2년 11월 10일 박상호 서장이 전사한 장소에 반공순국충혼비를 세웠다. 1978년 10월 도로확장에 따라 남산지서 정원 안으로 이전하였고, 1999년 12월 19일 충혼비를 중수하였다. 1962년부터 매년 12월 19일 추도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1949년 12월 19일 순시차 방문한 박상호 경산경찰서장이 남산초등학교에 은신중인 공비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지서 담장 구멍을 통해 살피던 중 공비들이 쏜 총탄에 이마를 맞고 사망하였다. 공비들이 남산면 사림리 소재 대왕산으로 달아난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경찰부대가 출동하였는데 공비들과 교전중 경찰관 4명(배인철 경감, 김상희·황인득·김병달 경사)이 전사하였다. | |
1614 | 43-2-047 | 통영시 월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8-05-09 | 경상남도 통영시 | 월남참전유공자회 통영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기념탑 | 2002-09-01 | 통영 출신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통영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유공자회 통영시 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킼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9월 1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통영시 젊은이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 용사들이 각종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공산군을 저지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2017년 통영시 무전동 원문공원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
1615 | 11-1-23 | 조선어학회 회관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재)원불교 | 장소 | 문화운동 | 0 | - | 2013-02-18 |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어학회의 회관이 있던 곳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혹 후 한글학회로 이어짐 |
1616 | 24-2-28 | 향토방위 용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괴산군 | 향토방위용사전적비보존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7-06-05 | 충북 괴산군 칠성면 도정리에 참전유공자 74인 및 향토방위군 68인을 추모하기 위해 괴산군에서 2007년 6월 5일 이 비를 세웠다. 내 고장을 지키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싸우다 전몰한 68위와 참전유공자 74명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고장을 지키고 자유와 조국을 수호하다 장렬히 전사하신 호국영령들의 얼을 기리고 위로하며 당시 향토방위를 위해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신 참전유공자들의 정신을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계승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이 비는 군번 없는 용사들이 뜨거운 조국애와 향토애가 횃불처럼 타올라 젊음을 바쳐 우리고장을 수호한 정신을 기리고 이곳은 후세를 위한 산 교육장으로 영원할 것이다. 조국분단의 비극! 원한의 휴전선! 1950년 6·25를 전후하여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노획한 전리품으로 괴산군 향토방위용사들의 대대병력이 자체무장하여 싸우다 가신 전몰용사들의 투혼은 내 가족 내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지역의 파수꾼이 되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우리의 젊은 사자 향토방위용사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도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실 호국영령들의 뜨거운 나라사랑과 향토사랑의 유업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되어 그날의 아픔을 달래줄 것이다. 여기 용사들이 싸우다 가신 호국영현들과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용사들의 이름을 이 빗돌에 새기고 타계하신 용사들의 위패를 비 탑신 속에 모시고 이 땅을 지키려 혈전분투한 많은 전적지 중에 대표지역인 이곳 칠성에 건립하니 그 분들의 거룩한 애국 애향정신이 길이길이 이어져 나가기를 바란다. 서기 2007년 6월 5일 괴산군 향토방위군 전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
1617 | 10-1-28 | 이재명의거지 | 독립운동 | 2013-12-18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시 중구 복지지원과 | 장소 | 의열투쟁 | 1909 | 0 | 2013-12-18 | 이 곳은 1909년 12월 22일 청년지사 이재명이 친일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의거한 곳으로,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 들어 이완용의 허리를 찌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의 칼에 하체가 상하게 되어 붙잡혀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이에 이재명 지사를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
1618 | 11-1-27 |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덕성여자중학교 | 3·1운동 | 1919 | 3·1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천도교 대표들이 모인 중앙총부 터.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주의 소식이 전해지자, 천도교 간부 손병희 등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측은 1919년 1월에 다른 종교 세력과의 제휴를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22일, 기독교측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운동하자는 의견을 천도교측에 전달하였다. 이에 2월 24일, 천도교 대표들은 이곳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에 모여 기독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결행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은 현재 멸실되었으며, 건물 터는 현재 덕성여자중학교 교정에 위치한다. | |||
1619 | 11-1-29 | 손병희 집 터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복지지원과 | 사적지 | 3·1운동 | 1919 | 이곳은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의견을 나눈 곳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서로 지면을 익히고 다음 날 독립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인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선언식 장소를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이 변경사실이 학생단 측에 전달되지 않아 인해 거사 당일 일정에 다소의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 ||
1620 | 17-2-57 | 순직경찰관 애국단체 위령비 | 국가수호 | 2008-12-01 | 강원도 정선군 | 정선경찰서 | 비석 | 기타 | 1997 | - | 1997-04-11 | 임계면 반천리에 6·25전쟁을 전후하여 전사한 정선경찰서 소속 경찰관 및 애국단체원 105명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강원지방경찰청은 임계 덕암리 전투, 북면 사당교 전투에서 순직한 경찰관 6명의 영령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자 1992년 7월 임계면 골지리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후 정선경찰서와 정선군, 경우회에서 누락된 순국자를 보완하여 동면 건천리 전투, 신동 운치리 전투를 비롯해 강릉·삼척·평창, 경북 청송·울진·봉화 등지로 출동하여 전투중 순국한 경감 최성하, 경위 최종달 등 경찰관 48명, 김록중, 조대효, 안중천 등 대한청년단, 국민회원, 향토방위대, 의용대, 대한애국부인회 등 소속의 57명 등 모두 105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반천리 현 위치에 1999년 6월 6일 다시 건립하였다.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621 | 25-2-57 | 6·25 참전 유공자 기념탑(청주) | 국가수호 | 2008-11-25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청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6-03-01 | 청주시 진재공원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고귀한 정신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청주시 6·25 참전유공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청주시지회는 이곳 출신 강희빈, 권태철, 도경원, 최원호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3월 1일 이 기념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청주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622 | 30-1-62 | 김창숙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12-10-17 | 경상북도 성주군 | 김위 | 생가 | 문화운동 | 1919 | 0 | 1901-01-01 | 한말 유림으로서 1919년 유림단 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창숙 선생의 집이다. 김창숙의 호는 심산(心山), 본관은 의성으로 선조 때 명신학자인 동강 김우옹선생의 주손으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스승 한계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목을 밸 것을 상소하는 ‘오적매국성토상소사건’과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장서’를 작성하여 발송한 ‘파리장서사건(제 1차 유림단사건)’으로 가진 옥고를 당하였다. 1906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국단연동맹 성주대표로 활동하며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으나 일제의 방해가 계속되자 이후 1909년 사립학교인 성명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습니다. 1910년에는 향리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 시대에 통하는 선비를 길러야 한다는 애국계몽의 일념으로 청천서당에 성명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 선생은 전국의 유림대표들이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상해에서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내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임시정부와 만주 등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활동을 지속한 김창숙선생은 급기야 병을 얻어 상해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일제의 밀정에 걸려 국내에 체포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구 감옥에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하반신이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결성된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활동하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평생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
1623 | 11-1-32 |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회관 터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안재용 | 사적지 | 학생운동 | 1929 | 일제시대에 애국계몽운동을 펼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회관이 있던 곳 | ||
1624 | 13-1-37 | 화수리 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3-11-13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오산교육지원청 | 기타 | 3·1운동 | 1919 | 0 | 1919-04-03 | 이 곳은 화성 지역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인 화수리 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만세꾼들은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우고 화수리에 도착하여 주재소를 에워싼 다음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가와바타 순사는 만세꾼들에게 총을 쏘면서 달아났고 시위대는 주재소를 모두 불태운 후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화수리 마을은 주재소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가옥이 불타는 등 보복을 당하였다. |
1625 | 31-1-71 | 박열의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12-11-12 | 경상북도 문경시 | (사)박열의사기념사업회 | 기념관 | 의열투쟁 | 0 | 2012-10-01 | 박열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받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나아가 귀향하여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살포하며 문경의 3·1운동을 촉발하여 민족독립의 의지와 열기를 분출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하며 과학적이며 선진적인 반제이론을 수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나 반제 항일투쟁의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식민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의열투쟁노선을 천명하면서 1922년 말 직접행동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중운동』·『후데이센징』·『현사회』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서울·도쿄의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펴면서 민중의 권익신장에도 힘썼다. 1923년에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계기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며 폭탄 반입 및 제조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대진재의 발생을 기화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때 박열과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어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일제는 박열과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가 무기로 감형했다.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박열의사 기념관은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투철한 애국정신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조명하고, 후손들이 이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2003년부터 추진하여 2012년 10월 9일 개관하였다. | |
1626 | 15-2-91 | 구리시 6.25 참전유공자 기념탑 | 국가수호 | 2008-11-25 | 경기도 구리시 | 참전유공자회 구리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8-06-25 | 참전유공자회 구리시지회는 2008년 6월 25일 경기 구리시 인창동 675-1 구리역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자유를 수호한 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
1627 | 42-1-43 | 최수봉 의거지 (옛 밀양경찰서 터) | 독립운동 | 2013-11-13 | 경상남도 밀양시 | (사)밀양시장번영회 | 장소 | 의열투쟁 | 0 | 0 | 2013-11-13 | 의열단원인 최수봉 의사가 폭탄을 던진 의거지 밀양경찰서 터. 최수봉의사는 윤치형, 윤세형과 함께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일어난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시위 주도자로 수배를 받게 되자 윤세주·윤치형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고 길림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폭탄제조법을 배워 밀양으로 다시 돌아온 최수봉의사는 박재혁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사건(1920. 9) 소식을 듣고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하고 1920년 12월 27일에 밀양보통학교에 자리한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당시 밀양경찰서장이 경찰서 직원 19명을 사무실에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날을 거사일로 잡은 것이다. 밀양경찰서에 폭탄 2개를 연달아 던졌으나 폭탄은 불발되고 말았다. 일본경찰이 추격해오자 경찰서 부근의 민가로 들어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1921년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 |
1628 | 43-2-31 | 하동군 호국공원 | 국가수호 | 2008-11-25 | 경상남도 하동군 | 하동군재향군인회 | 장소 | 6·25전쟁 | 1950 | 0 | 2005-03-01 | 1950년 7월 27일, 호남을 거쳐 하동을 우회하여 침공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채병덕 장군이 이끄는 영남지구편성관구사령부는 미 24사단의 일부병력과 협동하여 북한군과 맞서 전투를 벌임, 그 결과 채병덕 장군을 비롯한 국군 100여명과 미군 313명이 산화하였음 |
1629 | 15-2-92 | 자유수호 평화 박물관 | 국가수호 | 2010-11-03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4층 | 2002-05-20 | 동두천시 상봉암동에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과 유엔군 장병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자유수호 평화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동두천시는 참전 국군 및 유엔군 장병의 숭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5월 20일 이 박물관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서울 북방 관문인 동두천의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동두천시 무공수훈자공적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싸워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은 무공수훈자와 국가안보 발전에 기여한 보국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23년 12월 11일 동두천시 소요산 자유수호평화박물관 내에 동두천시 무공수훈자공적비를 건립하였다.무공 및 보국훈장을 받은 386명의 무공수훈자의 이름을 훈장별로 명각하여 무공 수훈자의 헌신과 희생정신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동두천시 6.25참전유공자기념비 6·25전쟁에 참전하여 민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젊은청춘을 바쳐 피로써 조국을 지킨 호국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전했던 전우들의 뜻을 모아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 동두천지회에서 2004년 10월 20일 동두천 초입에 건립하였다. 후손들에게 아픈 한국전쟁 역사를 교육하고 6.25참전유공자의 희생정신과 그 뜻 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2023년 12월 11일 동두천 소요산 자유수호박물관으로 6.25참전유공자기념비를 이전하였다. |
1630 | 42-2-52 | 창원시 6·25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08-12-03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8-06-27 | 창원시 삼동동에 6·25전쟁에 참전한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원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시 지회는 이곳 출신 감만식, 곽외식, 박태욱, 강경표, 김이근 등 참전유공자와 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8년 6월 27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창원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631 | 15-2-90 | 의정부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11-25 | 경기도 의정부시 | 참전유공자회 의정부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7-27 | 의정부 백석천근린 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이 고장 출신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의정부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의정부 지회는 김윤철, 박해룡, 문공근, 유덕희 등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2003년 7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의정부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632 | 50-1-41 | 호남창의회맹소전투지 | 독립운동 | 2012-10-17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군 | 장소 | 의병운동 | 1908 | 1100-01-01 | 호남창의맹소는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결성한 연합의병 지휘부로 기삼연이 대장이었다.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맹소는 1908년 1월 혹한을 피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금성산성에 머물렀다. 이때 의병부대의 동향을 탐지한 일제 군경의 습격으로 의병 30여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하였다. 기삼연은 인근에 몸을 숨겼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붙잡혔고, 의병들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총살, 순국하였다.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의병의 활동 거점이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 |
1633 | 42-1-42 | 이상관 선생 기적비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남도 밀양시 | 함평이씨 문중 | 비석 | 의열투쟁 | 1935 | 0 | 2010-10-29 | 이상관 선생은 1925년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재정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으며, 1937년 1월 일본군(日本軍) 동변도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에 의해 체포되어 피살(被殺) 순국(殉國)하였다. |
1634 | 52-2-63 | 지리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8-05-09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시장 | 탑 | 6·25전쟁 | 1950 | 1955-5-15 | 남원 부운리에 6·25전쟁 기간에 공비토벌 과정에서 산화한 전몰군경 7,283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리산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원시는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5년 5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원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원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635 | 10-1-32 | 우당 이회영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4-05-20 | 서울특별시 중구 | 우당기념사업회 | 동상 | 기타 | 흉상높이 1.2m, 폭 1m | 2014-02-24 | 이회영은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1905년에 울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경술국치)이 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을 떠났다. 그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와 더불어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그는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한다.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이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회영선생의 집터 표지석과 함께 흉상을 건립하였다. | |
1636 | 52-2-64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남원시) | 국가수호 | 2008-11-25 | 전라북도 남원시 | 6.25참전유공자회남원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7-11-28 | 남원시에서는 2007년 11월 남원시 신촌동 74-8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수호를 위하여 일신을 바친 남원시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선양하기 위하여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 양쪽에는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던 용사들이 전투 모습을 재현하고 오른쪽에는 남원 지역의 참전자 명단을 새긴 석판을 설치해두었다. |
1637 | 18-2-18 | 이천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9-05-25 | 경기도 이천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이천시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2003-06-01 |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베트남전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용전분투한 무공수훈자들의 업적과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공적비 | |
1638 | 15-2-89 | 위령비(안변동산) | 국가수호 | 2008-09-05 | 경기도 포천시 | 함경남도안변군민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0-09-24 | 1.4후퇴 당시 함경남도 안변군 출신 청년들로서 월남 도중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입대하거나 기타 경찰, 군속, 비정규군으로 전투 중 전사한 78명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령비와 통일염원 망향비를 건립하였다. |
1639 | 10-1-29 | 경성부민관 폭탄의거지 | 독립운동 | 2013-12-18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시의회 사무처(의정담당관) | 장소 | 의열투쟁 | 1945 | 1945년 7월 24일 경성부민관 폭탄의거 경성부민관은 1935년 12월 태평통 1정목 60번지에 세워진 경성부의 부립극장(府立劇場)으로, 오늘날로 하면 시립극장이다. 경성부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에 대강당·중강당·소강당·담화실 등을 갖춘 다목적 회관으로서, 당시로는 드물게 냉난방 시설과 조명·음향시설을 갖추어 각종 극단의 공연은 물론 전시총동원체제하 각종 관변 집회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경성부민관 폭탄의거를 주도한 조문기·유만수·우동학·강윤국 등 당시 20세 안팎의 열혈청년들은 1945년 5월 서울 관수동 13번지 유만수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항일투쟁의 기회를 엿보았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경성부민관에서 친일파 거두인 대의당의 박춘금(朴春琴) 일당이 주최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보도가 나오자, 조문기 등은 비밀회합을 갖고 대회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유만수가 수색변전소 공사장 발파 인부로 침투해 빼낸 다이너마이트로 사제폭탄 두 개를 만들어 대회 전날 밤 대회장 뒤편 화장실 쪽에 설치하였다. 폭탄은 대회 당일인 7월 24일 밤 9시경 박춘금이 시국강연을 위해 등단하고 얼마 뒤에 터졌고, 그것으로 대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경성부민관 폭탄의거는 해방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기에 꺾일 줄 모르는 민족의 독립의지를 안팎에 떨친 사건이었다. | ||
1640 | 50-1-42 | 어등산 호남의병 전투지 | 독립운동 | 2013-12-19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장소 | 의병운동 | 1908 | 0000-01-01 |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고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하여 관할구역이 애매해 일본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기에 좋은 곳이다. 또한 어등산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338.7m)이면서,‘ 비산비야(非山非野)’여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곳이다. 이처럼 지형적으로 유리한 점 때문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자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예를 들면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이곳은 여러 의병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 |
1641 | 14-2-33 | 해군첩보부대(UDU) 충혼탑 | 국가수호 | 2011-11-10 | 인천광역시 중구 |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인천시지부 | 탑 | 기타 | 1954 | 중 | 2009-07-27 | 해군첩보부대(UDU)는 대북공작대로서 대한민국 최초 첩보부대로 창설되어, 음지에서 국가수호를 위하여 첩보활동과 북파공작특수임무 수행하였다. 해군첩보부대 충혼탑은 해군첩보부대 UDU동지회 충혼탑 추진위원회에서 1950년 ~ 1970년대에 비밀리에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하거나 실종한 해군의 자랑스런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인천 월미공원에 세웠다. 2009년 7월 27일 공사를 완공하였고 2011년 6월 10일 제막식을 개최했다. 1948년 해군첩보부대 창설 이후 전사, 실종 및 순직 등 희생자는 약 350여명에 이르는데, 1961년 1월 1일 부대의 화재로 많은 분량의 특수임무수행 중 희생된 부대원들에 대한 공작문건이 소실되었다. 충혼탑에는 희생자 약 350여 명의 명단을 모두 새겨 놓으려고 했으나, 희생자 중 확인된 180여 명의 전사, 실종 및 순직자 명단만 해군첩보부대 특수성을 존중하여 충혼탑 지하에 봉토하였다. |
1642 | 18-2-16 | 동티모르 순직 장병 추모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광주시 | 특수전교육단 | 비석 | 6·25전쟁 | 2003 | - | 2003-10-22 | 2002년 10월 동티모르에 파병된 고(故) 민병조.박진규 중령과 백종훈.김정중.최 희 병장은 이듬해 3월 지역재건 장비를 보급하기 위해 에카트 강을 건너다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순직했다. 운전병이던 김 병장의 유해는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육군은 사고 당시 영결식에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각각 1계급씩 추서했으며 특수전교육단 영내에 추모비를 건립해 매년 3월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
1643 | 23-2-25 | 현충탑(보령시)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남도 보령시 | 보령시 | 탑 | 기타 | 2008 | 2008-06-06 | 보령시 궁촌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에 전사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보령시)’을 건립하였다. 보령시는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8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보령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보령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644 | 13-1-38 | 3.1운동만세시위지(옛장안면사무소) | 독립운동 | 2014-03-18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 장소 | 기타 | 1919 | 0 | 1919-04-03 | 수원군 장안면의 3·1운동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3일 일어났다. 차희식·차병혁 등은 장안면 석포리 구장 차병한을 비롯하여 장제덕·장소진·이영쇠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장날에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고창함으로써 군중의 호응을 유도하여 시위를 전개한 것과는 달리, 장날과 관계없이 조직적인 주민 동원을 통해 시위운동이 이루어졌으며, 일제 관공서를 파괴 방화하고 일인 순사를 처단한, 매우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시위였다. 이들은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할 것을 결의하고,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면장 김현묵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차희식과 장소진·김흥식·장제덕 등이 이끌던 200명의 시위대는 몽둥이, 돌 등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점차 시위대가 늘어나고 격렬해지자 차희식 등의 주도자들은 시위대를 쌍봉산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시위대는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여 불지르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주민 2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나와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일본당국을 놀라게 하였다. |
1645 | 26-2-13 | 아산 안보공원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남도 아산시 | 아산시 | 장소 | 기타 | 1982 | 0 | 1982-12-31 | 아산시 온천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빛나는 공훈으로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산 안보공원’을 건립하였다. 아산시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82년 12월 31일 안보공원을 준공했다. 6·25전쟁에서 아산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646 | 20-2-32 | 대전보훈공원 | 국가수호 | 2009-05-25 | 대전광역시 중구 | 대전광역시 복지정책과 | 장소 | 6·25전쟁 | 1950 | 0 | 2008-11-06 | 대전시 사정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와 전몰용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대전보훈공원’을 건립하였다. 대전광역시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8년 11월 6일 보훈공원을 준공했다. 대전 보훈공원은 호국영령들의 위훈을 기리기 위하여 중구 선화동에 있던 영렬탑을 선화용두지구재정비 촉진사업으로 인해 보문산공원 내 사정동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조성한 추모공원이다. 6·25전쟁에서 대전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1647 | 33-2-36 | 무공수훈자 전공비(울진) | 국가수호 | 2009-09-22 | 경상북도 울진군 | 무공수훈자회 울진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2 | 0 | 2002-06-27 | 울진군 수산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와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울진군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6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울진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648 | 25-2-60 | 6·25 참전 유공자비(양강면) | 국가수호 | 2009-09-22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 양강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0 | 0 | 2006-04-20 | 6·25참전유공자회 양강면분회는 2006년 4월 영동군 양강면 괴목리 757-5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을 위하여 희생한 양강면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1649 | 23-2-26 | 베트남참전기념탑(예산군) | 국가수호 | 2009-09-22 | 충청남도 예산군 | 예산군청 | 탑 | 1966 | 2006-06-06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예산군지회는 2006년 6월 6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 115-4에 예산군 출신으로 베트남에 참전한 분들의 공훈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에는 기단석 위에 2인의 군인상과 함께 해병대 청룡부대와 십자성, 비둘기, 맹호, 백마, 백구부대 등 베트남전 참전부대의 상징탑을 세웠다. | ||
1650 | 13-2-48 | 육탄 이희복용사 동상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군포시 | 군포시재향군인회 | 동상 | 6·25전쟁 | 1950 | 2009-06-19 |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한얼공원 내에 6·25전쟁 전쟁시 활약한 육탄10용사 중 군포시 출신 이희복 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군포시 재향군인회에서 2009년 6월 19일 동상을 건립했다. 이희복 일등상사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에서 태어나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여 제1사단 제11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제11연대는 1949년 1월 12일 문산으로 이동하여 38도선경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당시 연대는 제2대대를 38도선 전면인 청단, 연안, 배천, 송악산, 고랑포 일대에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진지구축과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제1대대는 연대후방에서 신병교육을 전담토록 하였으며, 제3대대는 인접 제15연대에 배속시켜 파견중에 있었다. 그리고 연대본부에서는 하사관교육대 1개 중대 병력이 교육훈련중에 있었다. 제2대대가 38도선 전면의 불리한 지형과 적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점차 경비임무를 강화하자, 북한군은 이를 저지하고 계속적인 38도선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1949년 4월 25일 남천점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사단 제3연대의 1개 대대 약 1천명을 송악산 후방의 냉정리에 집결시켜 공격준비를 완료한 후, 5월 3일 미명을 기해 기습남침하여 송악산 일대의 292고지, UN고지, 155고지 및 비둘기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급보를 접한 제11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이를 즉시 보고함과 동시에 제1대대 예하 제3, 제4중대를 급히 제2대대에 예속시키는 한편, 연안 방면으로 행군훈련을 나간 연대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로 긴급 복귀시켜 5월 4일 미명을 기해 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공격지역이 노출된 급경사지역으로 너무나도 불리한 지형이며, 10개 소의 토치카에서 중화기가 불을 뿜고 있어, 공격부대는 7부 능선에서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대장은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아군진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선발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자원한 하사관 교육대의 특공대장 서부덕 소위(당시 계급 이등상사)와 이희복 일등상사(당시 계급 하사) 등 9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이리하여 특공용사 9명의 육탄공격조는 81mm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치하여 만든 육탄공격용 포탄을 휴대하고 12:00를 기해 각자 목표지점을 향해 출발하였으며, 동시에 후방에서는 57mm 대전차포로 특공대의 전진을 엄호하였다. 특공대는 적의 집중되는 기관총사격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맡은 적의 기관총진지에 신속히 돌입하여 자폭함으로써 적의 토치카를 폭파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아군 공격부대는 14:00경 LN고지를 무난히 탈환하였다. 또한 특공대를 지원했던 박창근 하사가 292고지의 적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단독 공격하여 분쇄함에 따라, 사기충천한 제11연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적을 공격하여 292고지 등을 탈환함으로써 송악산지구의 38도선 아군진지를 모두 회복시켰다. 이희복 일등상사는 육탄10용사의 한 사람으로 제1차 송악산지구전투에서 1949년 5월 4일 장렬하게 산화하였으며, 그의 고귀한 희생으로 송악산지구의 주요고지를 모두 탈환하여 국군의 위용을 과시함은 물론 개성지역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하사에서 일등상사로 추서하고 1952년 10월 15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 |
1651 | 55-1-53 | 매산학교 신사참배 거부운동지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남도 순천시 | 순천매산중학교 | 기타 | 학생운동 | 1937 | 0 | 1910-01-01 |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 |
1652 | 13-2-50 | 베트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9-07-07 | 안양시는 2009년 7월 7일 경기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241 운곡공원 내에 안양시 출신 베트남전 참전유공자의 충정을 위로하고 후대에 올바른 역사의식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 뒤편에는 국기게양대 12개가 설치돼 있어 태극기, 안양시기, 참전부대기 등이 게양된다. 우리 국군은 1964년 7월 미국정부와 베트남정부의 요청으로 세계평화를 위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6·25전쟁당시 유엔군이 보내준 지원부대의 도움을 우리 정부는 받았다. 그 보답으로 1973년 3월까지 약 8년 8개월간 참전했다. 연인원 312, 853명을 파병하였다. |
1653 | 31-2-34 | 청송군 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9-05-25 | 경상북도 청송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청송군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8-06-13 | 청송군 금곡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 고장 출신의 국가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참전유공자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6·25참전유공자 1,893명, 참전경찰관 145명, 베트남참전유공자 140명 등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8년 6월 13일에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청송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청송군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654 | 13-2-47 | 제1연평해전 전승비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평택시 | 해군제2함대사령부 | 비석 | 기타 | 1999 | 0 | 2007-12-20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해군 제2함대 영내에 제1연평해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2007년 12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1999년 북한은 자신들의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6월 7일 경비정 1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이래 해상교전이 발발한 6월15일까지 9일간 총 11여 회에 걸쳐 우리 관할해역을 침범하였다. 6월 7일 오전 9시 10분경 북한 경비정 1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이래, 8일까지 양일간 북한어선 15척이 NLL을 4~7km까지 침범하고 북한 경비정이 3~4회 침범과 철수를 반복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은 국제법에 의거 고속정 2개 편대의 신호로 철수를 요구하다가, 북한 함정의 행위가 의도적이라고 분석 판단하여 고속정들로 하여금 진입차단 기동작전을 펼쳤다. 9일부터는 북한이 경비정을 10척으로 증강하는 한편, 경비정·어뢰정 편대를 구성하여 NLL을 7~13.7km까지 침범하며 도발의 수위를 높이자, 우리 해군은 초계함 2척, 고속정 5개 편대를 현장에 투입하여 북한 전력대비 우위전력을 유지하고, 적의 도발에 대비하여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었다. 6월 9일 0600시부터 10일 0400시까지 북한 경비정 8척 중 7척이 NLL을 13.7㎞까지 침범하였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우리 고속정에 대해 북한 경비정이 충돌기동을 시도하여 양측 함정 간에 경미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어 6월 11일 03:36시부터 13:40시까지는 북한 경비정 4척이 NLL을 13.9km를 침범하고 우리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하자 우리 고속정은 이에 맞대응 충돌하여 북한 중형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2척은 손상을 입혔으며 우리 고속정은 4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교전이 일어난 15일에는 08:45시 북한경비정 4척이 NLL을 침범하여 우리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 09:04분 어뢰정 3척을 포함하여 7척의 북한 함정이 우리 관할해역을 침범하여 우리 초계함에 고속 접근하자 09:07시 우리 고속정 6척이 맞대응하여 역충돌을 시도하였다. 우리 고속정이 북한 어뢰정을 대상으로 충돌을 시도하자 북한 함정에서는 수류탄 4~5발을 던지고 인근에 있던 북한의 경비정과 합세하여 소총사격과 25mm 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하였고 추가로 증원된 3척의 경비정을 포함하여 총 10척의 북한 함정들이 우리 측 함정을 향해 공격해왔다. 북한 함정의 선제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해군은 북한 함정들을 향해 돌진하며 40mm와 76mm 기관포로 응사하여 교전이 일어난 지 14분 여 만에 북한 함정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교전이 발발한지 14분만에 10척의 북한함정들 중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대형 경비정 대파, 중형 경비정 2척 반파(기동불능상태로 예인), 소형 경비정 2척 파손 등 최소 30여명 이상의 사망과 70여명을 부상시키는 큰 전과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우리 해군의 피해는 4척의 고속정과 1척의 초계함만이 기관실 및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9명의 장병들이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는데 그쳤다. |
1655 | 13-2-51 | 군포시 6.25 참전비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군포시 | 6.25참전유공자회군포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5-06-25 |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능안공원 내에 군포시 출신 참전 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군포시에서 2005년 6월 25일 이 비를 세웠다. 군포시 출신 6·25참전 유공자의 수는 1, 100명에 이른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조국이 8·15 해방직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립되었으며, 2년 후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차 및 중화기로 무장된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민족간의 대전쟁이 발생하였다. 우리 국군 및 전투경찰은 대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 이르렀으나 우리 국군과 16개국 UN군이 반격하여 그 해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평양, 압록강, 초산은 물론 길주, 혜산진, 청진까지 북진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라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이에 참전용사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백마고지 전투, 임진강변 노리고지 및 제티고지 전투 등 수다한 격전을 치루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6·25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수백만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1천만 이산가족이라는 엄청난 동족상잔의 상흔을 남겼다. 6·25참전 유공자들은 이 처참한 전투과정에서 살아남은 노병들로서 휴전 후 군복무를 명예롭게 마치고, 전쟁으로 초토화된 이 나라를 재건하기 위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총력을 다해 이바지한 결과 오늘날 세계에서 무역규모 11위를 자랑하는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휴전이후 어언 반세기! 영명을 달리한 전우들의 넋을 기리고 다시는 전쟁없는 평화통일을 기원하면서 오늘날까지 생존한 군포시 6·25참전 유공자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워 기념하노라. 서기 2005년 6월 24일 사단법인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경기도군포시지회 | |
1656 | 13-2-52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군포)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군포시 | 무공수훈자회군포시지회 | 비석 | 기타 | 0 | 2003-07-03 | 군포 한얼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군포시 출신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군포)’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군포시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7월 3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군포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657 | 25-2-63 | 베트남 참전 기념탑(청원군)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청원군 | 탑 | 월남참전 | 1966 | 0 | 2009-11-26 | 청원군은 2009년 11월 26일 충북 청원군 오창면 구룡리 375(중앙공원 내)에 청원군 출신 베트남전 참전유공자 456명의 자유수호정신을 군민들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탑신 하단에는 맹호부대를 비롯한 8개의 참전 부대 마크를 조각해 붙였으며 탑신 뒷부분 석판에는 456명의 참전용사 명단을 새겨놓았다. |
1658 | 15-2-39 | 무공수훈자의 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의정부시 | 무공수훈자회 의정부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8-01-01 | 의정부시 무공수훈자회는 1998년 경기 의정부시 자일동 101-1 민족 보위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의정부시 무공수훈자의 명예를 기리고 후손들에게 조국에 대한 올바른 국가관과 충성심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무공수훈자의 탑을 건립하였다. |
1659 | 18-2-22 | 여주시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11-03 | 경기도 여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여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3-06-25 | 6·25참전유공자회는 2003년 6월 25일 경기 여주군 여주읍 상리 132(영월공원 내)에 여주군 출신 6·25참전용사들의 전공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하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 뒷면에는 읍·면별 참전유공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 |
1660 | 18-2-23 | 월남전참전기념탑(하남시) | 국가수호 | 2010-11-03 | 경기도 하남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하남시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64 | 0 | 2003-05-30 |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트남참전전우회에서 2003년 5월 30일 이 탑을 세웠다.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국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와 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
1661 | 51-2-30 | 월남 참전 기념탑(익산)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북도 익산시 | 대한민국고엽제전북지부익산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9-01-19 | 익산시 현영동에 2009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익산시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탑 건립을 추진하여 2009년 1월 19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익산시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662 | 50-1-45 | 금릉학교 터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남도 강진군 | 박영숙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1906 | 한말 강진지역 교육 구국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금릉학교와 그 학생들 금릉학교는 1906년 9월 강진군수와 강진군민들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직후 학생이 100여명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커져 강진 지역 민족교육을 주도하였다. 금릉학교 학생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국채보상금릉협성회'를 조직하고 국채보상금을 모아 황성신문사에 기탁하였다. 또한 금릉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은 1919년 4월 4일 강진읍 만세시위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 ||
1663 | 43-1-59 | 최낙종 애국지사 유적비 | 독립운동 | 2013-11-22 | 경상남도 고성군 | 최연도 | 비석 | 3·1운동 | 0 | 1987-01-27 | 삼일독립선언 후 1919년 3월 20일 구만면 국천 모래사장과 배둔장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친일파가 만든 '상애회'에 대항하여 '동흥 노동동맹'을 창립하고 동포들의 권익 옹호 투쟁에 앞장섬.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
1664 | 43-1-62 | 최정원 애국지사 창의비 | 독립운동 | 2014-12-12 | 경상남도 고성군 | 최광림 | 비석 | 3·1운동 | 1968 | 1984-03-01 | - 1919년 3월 20일 고성군 구만면에서 만세운동 주동 - 1920년 10월, 군자금 모집 활동 전개 - 1921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순국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 추서 | |
1665 | 53-2-26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진도군) | 국가수호 | 2010-06-09 | 전라남도 진도군 | 진도군 | 비석 | 6·25전쟁 | 0 | 2005-11-25 | 진도 녹진리에 6·25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진도 출신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진도군)’를 건립하였다. 진도군은 이곳 출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0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진도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666 | 15-1-26 | 양평의병전투지-용문사 | 독립운동 | 2014-07-18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8 | 0 | 1913-01-01 | 용문사는 정미의병 당시 양평지역 의병진의 거점으로서 의병대장 조인환, 권득수 등이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근거지를 두고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괴롭힌 전적을 기념하고 1908년 8월 24일 일본군의 보복으로 소실된 용문사의 의병항쟁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4년 7월 18일 독립운동 관련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
1667 | 40-1-31 | 동래장터 3.1운동만세 시위지 | 독립운동 | 2014-12-12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부산지방경찰청 | 장소 | 3·1운동 | 1919 | 0 | 2022-01-28 | 1919년 3월 7일부터 19일까지 학생, 동래고보 학생들 주도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기념 건립하였다/ |
1668 | 40-1-30 | 구포장터 3.1운동만세 시위지 | 독립운동 | 2014-12-12 | 부산광역시 북구 | 부산지방경찰청 | 장소 | 3·1운동 | 1919 | 0 | 2022-01-28 | 1919년 3월 29일 구포지역 청년 유지들 주도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기념 |
1669 | 13-1-40 | 독립투사 조문기 상 | 독립운동 | 2014-12-12 | 경기도 화성시 | 조문기지사흉상건립추진위원회 | 동상 | 기타 | 1945 | 0 | 2014-07-24 | 화성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나 매송보통학교를 다닌 조문기 지사(1926~2008)는 1944년 18세 일본에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하였다. 귀국하여 유만수, 강윤국 등과 '대한 애국청년당'을 결성하였고, 박춘금 등 친일파 수괴와 총독부 고관들이 총집결하여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 행사장을 폭파하여 일제강점기 마지막까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해방 후, 민족통일과 민족사 정립의 길에 평생을 바친 선생은 2008년 82세로 별세하고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
1670 | 18-2-03 | 충혼탑(성남) | 국가수호 | 2002-11-17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국군제3810부대 | 탑 | 기타 | 2001 | - | 2001-10-10 | 성남 청계골에 2001년 6·25전쟁 이후 휴전선을 넘나들며 특수작전을 수행하던 중 산화한 전국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국군 제9965부대는 전국 각지의 작전도중 산화한 영령들과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요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계승하고자 동료, 가족, 후배들의 정성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10월 10일 준공하였다. 이 탑은 특수임무수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전국에서 유일한 충혼탑이다. 6·25전쟁 이후 많은 특수전 요원들이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하였고, 침투작전, 공비토벌작전 등의 임무수행 도중 상당수가 전사 또는 부상, 실종되었다. 국군 제5352부대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671 | 15-1-28 | 정주 3.1 추모원 | 독립운동 | 2014-12-12 | 경기도 연천군 | (재)정주동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54 |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3인(이승훈, 이명룡, 김병조) 정주 출신분들을 기리기 위함 |
1672 | 52-2-65 | 충혼비(남원) | 국가수호 | 2010-02-12 | 전라북도 남원시 | 애국단체순국동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3-10-13 | 남원시 대정리에 이 고장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애국단체순국동지회에서는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93년 10월 13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남원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673 | 14-2-31 | 강화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11-06-08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 | 탑 | 기타 | 2010 | 중 | 2010-05-18 | 인천광역시는 2010년 5월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218-4에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희생한 6·25참전유공자회 강화군지회와 월남참전유공전우회 강화군지회 회원, 그리고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군번 없는 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강화지역 3개 소년대원 회원(강화 향토방위특공대, 6·25참전국가유공자 강화청소년 유격동지회, 6·25참전유공자 강화청소년유격대 기념사업회)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전후세대들의 투철한 나라사랑정신 함양과 지역안보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강화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1674 | 55-1-50 | 호양학교 터 | 독립운동 | 2014-12-12 | 전라남도 구례군 | 호양학교선양회 이영렬 | 장소 | 기타 | 1908 | 0 | 1908-08-01 | 1908년 구례출신 학자 왕석보선생의 후학인 민족지도자 5명(박태봉, 권석호, 왕재소,권봉수, 왕수환)이 민족주의 교육을 설립한 학교임 |
1675 | 52-1-43 | 전해산기념관 | 독립운동 | 2015-05-26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군청 | 기념관 | 의병운동 | 0 | 2014-06-24 | 본명은 기홍(基洪)이고, 해산은 그의 호이다. 1878년 전라북도 임실 남면 국화촌 호전동(菊花村 狐田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해산은 1908년 이석용(李錫庸)과 같이 전북 남원(南原)에서 기병하였다. 이들보다 일찍이 호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고광순(高光洵)이 적에게 체포되고, 기삼연(奇參衍)이 일어나 활약하다가 그 역시 체포되자, 그 산하 의병들은 김준(金準)의 휘하에 통솔되고 있었다. 이에 해산은 이석용에게 김준과 연합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준을 뒤쫓아 장성에 이르니 김준 역시 순국하였다고 하므로 광주와 나주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김준의 부장으로서 활약하던 오성술(吳聖述)과 연합하여 나주 도림(道林)에 주둔하였다가, 사천(沙川) 등지에서 적병과 교전하였다. 한편 김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曺京煥)이 의병장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해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1908년 6월 광주에서 모군하고 있는 데 정원집(鄭元執)이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부하 되기를 청하였고, 계속 세력이 확장되었으므로 7월 29일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다시 구성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선 봉 장 : 정원집(鄭元執) 중 군 장 : 김원범(金元範) 후 군 장 : 윤동수(尹東秀) 호 군 장 : 박영근(朴永根) 도 포 장 : 이범진(李凡辰) 격문을 지어 원근에 돌리고 수하 장령들에게 특히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엄명하고 군령을 엄히 하였다. 적병과 전투하는 한편 친일적인 무리, 그 중에도 일진회원들을 경계하여서 김원범 등에게 명하여 일인에게 의병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던 변영서(邊永瑞)·박기춘(朴基春) 등을 총살시켰다. 첫 전투는 영광 불갑산(佛甲山) 전투였다. 7월 25일 삽시간에 적에게 포위 당하자, 선봉장이 천보총(千步銃)을 쏘아 두어 명을 사살하고 곧이어 선치(蟬峙)에 구멍을 파고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유인하여 기마병들을 죽이고 무기를 포획하였다. 한편 무기를 보충하고자 8월 23일 윤은경(尹殷卿)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조경환에게 무기를 보내었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일로 미루어 무기공급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알 수 있고 무기문제로 의병장간에 알력이 있었던 것은 관동의병장 민용호(閔龍鎬)와 김하락(金河洛)의 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9월 도림(道林)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는데 대봉산(大鳳山) 일대에 적병들이 운집하여 총성이 들렸다. 29일 나주 석문동(石門洞)에 이르러 조사해 보니 전일에 조경환이 순사대장 정득주(鄭得柱)를 죽였기 때문에 적병들이 거문돌(黑石) 윗마을에 불을 지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마침 전에 헤어졌던 군사들이 합세하여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일시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조경환의 의진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두 의진이 연합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사상자는 하나도 없었으나 수백 명의 군사가 흩어지고 수십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시 행군하여 유정(柳汀)에 유숙하였다. 10월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장성의 김기순(金基淳)과 합진할 것을 꾀하나 서로 군사와 무기를 빌릴 것을 주장하여 합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구룡촌(九龍村)·대곡(大谷) 등을 행군하여 영사재(永思齋)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광주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적과 접전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순창·담양 등을 거쳐 광주 대치(大峙)에서 다시 적과 대적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총과 탄환, 군복 등을 노획하였다. 주흥동(朱興洞)에 이르러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을 만나 크게 고무를 받고, 곧 순창 내동(內洞)으로 가서 적과 접전하다가 적이 불을 질러 후퇴하였다. 다시 함평 유덕산(有德山)으로 가서 참봉 김 돈(金燉)을 만나 전략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 돈은 김준의 전략을 크게 도와준 인물이었다. 고막(古幕)의 적병참을 포위 공격하여 적을 몇 명 사살하였으나 선봉장 정원집이 크게 부상당하였다. 민가에 머물며 10여 일 치료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해산은 거의한 이래 오른팔 역할을 담당하던 정원집을 잃고 크게 상심하였을 뿐 아니라 의진의 사기도 다소 떨어졌다. 1909년 1월 17일 몰래 고향에 돌아가 부친께 세배를 올리고 가사를 처리하고 돌아왔다. 1월 18일 그는 '본 고을 반당(反 )에게 보내는 격문'을 써서 고향에 널리 반포케 하고, 또 '대동 의병장(大東義兵將)은 격문 대신에 노래 한 장을 지어 모든 회도(會徒)와 각도 보조원에게 통유하노라'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3월 27일 해산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광으로부터 부안으로 가서 오동촌(梧洞村)에 이르렀을 때 적의 내침을 받아 접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다시 나주 땅으로 돌아와서 의병활동이 어려우므로 일시 휴식할 것을 훈시하고 곧 재기할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고향 진안(鎭安)으로 돌아갔다. 적은 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수탐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해산의 의진에 출입하던 조두환(曺斗煥)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현규(金顯圭)에게 밀고하여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친 지 수개월만에 일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체포된 후 일인들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귀화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남겼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가리니두견새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書生何事着戎衣 太息如今素志違 痛哭朝廷臣作蘗 忍論海外賊侵圍 白日呑聲江水逝 靑天咽泣雨絲飛從今別却榮山路 化作啼鵑帶血歸)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동년 7월 9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 동년 8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8월 23일(음력 7월 19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부하 중에 원인석(元仁石)·노한문(盧漢文)·박영근(朴永根)·이범진(李凡辰)도 그를 전후하여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로써 호남의진의 거봉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처는 그간에 시부모의 상을 홀로 치르고 있다가 그의 관이 돌아온 날 순절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1676 | 24-1-01 | (제천)의병탑 | 독립운동 | 2002-11-08 | 충청북도 제천시 | 제천시 | 탑 | 의병운동 | 1895 | - | 1987-01-01 | 제천의병은 구한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이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나 을미년(1895년) 의병 창의의 불을 지펴 국내외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애국충절의 제천의병을 알리고 국난을 극복한 제천의병정신을 계승하고자 1987년 1월 모산동에 제천 의병탑을 건립하였다. 제천의병의 대표적 인물은 의암 유인석(1842~1915)이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의암 유인석이 거의할 마음을 굳히고 11월 28일 문인인 이필희 서상렬 이춘영 안승우 등의 의병 부대에 격려의 글을 보냈다. 그래서 이른바 제천의진의 예하 부대들이 제천으로 집결하여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의암은 상중에도 불구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제천 연합의병 부대를 진두지휘하였다. 의암 휘하의 의병부대는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 단양 원주 영월 안동 문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
1677 | 20-2-36 | 국군 제2연대 창설 공적비 | 국가수호 | 2011-06-08 | 대전광역시 서구 | 육탄용사선양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 | 2010-06-04 | 대전시 서구 갈마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공원 내에 국방경비대(현 육군) 제2연대가 창설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군제2연대전우회에서 2010년 6월 4일 공적비를 세웠다. 1946년 2월 28일 국방경비대 제2연대가 창설되었다. 국방경비대는 해방된 조국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지자 청년들이 계속 지원 입대하여 연대가 창설되었다.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실질적인 교육훈련으로 창군의 위업을 달성하여 자주국방태세를 확립하고 후에 국군의 모체가 된 유서깊은 곳이다. 이러한 애국충정의 유서깊은 곳에 국군제2연대 창설지탑을 1993년 건립하였다. 2010년 6월 4일 국군제2연대창설공적비를 건립하여 6·25전쟁에서 산화한 국군제2연대 전사자 4, 024위의 위패를 봉안하여 후세 국민은 물론이요, 청년 학생들의 안보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창설공적비는 호국영령에 대한 헌시와 전투약사를 기록해 당시의 상황을 역사적으로 보존하도록 했다. |
1678 | 50-1-47 | 수피아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 독립운동 | 2015-05-14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1-01-01 | 광주 3.1운동을 주도했던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던 장소이다. |
1679 | 14-2-32 |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11-11-10 | 인천광역시 옹진군 | 해병대 제6여단 | 탑 | 기타 | 2010 | 대 | 2011-03-27 |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에 천안함 사건으로 숨진 46인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2011년 3월 27일 이 탑을 건립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침몰한 사건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천안함 피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 발표는 미국과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안보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 |
1680 | 40-2-08 | 6·25 전몰 장병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가락동행정복지센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2-03-01 | 6.25전쟁 중 참전하여 전시한 이 고장 출신 39명 용사의 묘역을 조성하고 충혼비 건립 | |
1681 | 31-1-73 | 봉화군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독립운동 | 2015-05-14 | 경상북도 봉화군 | 봉화군 | 비석 | 해외운동 | 1919 | 0 | 2014-08-01 |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서 제출된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137인의 한국유림 중 봉화출신 9분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건립하였다. |
1682 | 50-1-38 |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11-11-10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기념관 | 학생운동 | 1929 | 2008-07-25 | 나주역사는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된 건물로,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남학생의 편싸움을 발단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진원지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알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옛 나주역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학생독립운동의 과정과 나주지역의 식민지적 상황, 만세운동, 나주 출신 학생운동지도자 등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나주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당시 나주역에서 나주-광주 간 기차를 이용해 통학하던 일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찬 한국 학생들이 대항하여 생긴 충돌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학생독립운동은 흔히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옛 나주역’ 옆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전남지역의 식민지적 상황과 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 등을 주제로 2008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 | |
1683 | 50-1-44 | 광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5-05-14 | 광주광역시 서구 | 광주광역시 | 탑 | 한말구국운동 | - | 2014-10-30 | 19세기 말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의병들의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1910년 광주전남의 3.1운동, 191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1945년 조국광복이 있기까지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의 항일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함 | |
1684 | 14-2-34 | 윤영하 소령 흉상 | 국가수호 | 2011-11-10 | 인천광역시 연수구 | 송도고등학교 | 동상 | 기타 | 2002 | 좌대높이1.5m 흉상높이 0.85m | 2009-06-29 |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송도고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으로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다 전사한 윤영하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송도고등학교에서 이 비를 세웠다. 1973년 11월 24일 경기도 인천시에서 해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 윤두호와 어머니 황덕희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전역 후 해운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때 3년 동안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귀국한 뒤 송도고등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사 50기로 임관하였다. 1996년 해군 계봉함 갑판사관을 시작으로, 1998년 해군 원산함 정훈보좌관으로, 1999년에는 해군 초계함 제천함 작전관으로 근무를 하다가, 2001년 1월 참수리급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정장이 되었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를 기념함과 동시에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윤영하함이라는 함명이 그를 따서 지어졌다. 2002년 정부는 그의 희생에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故 윤영하 소령(1973~2002) 2002년 6워 29일 그 날의 아침과 우리 영웅들의 숨 가빴던 핏빛 역사를 짙푸른 바다위 포효하던 함포와 생과 사를 건너뛴 조국 향한 뜨거운 충정을 서해는 알고 있다, 그 날을 기억한다. 분단의 조국, 영핼ㄹ 침범한 적과의 전투와 검푸른 바다 위에 장렬히 산화한 그들 서해의 영웅이 되어버린 그 이름과 대한의 가슴속에 영원토록 새겨질 아들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날을 기억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다에 맹세한 대한의 사나이 뼈와 살을 내려놓고 피와 땀을 흩뿌린 윤영하 선배님을 기억한다. - 송도고등학교 2학년 안동헌 |
1685 | 42-2-57 | 6·25 및 월남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2-05-16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0 | 0 | 2011-11-08 | 창녕군은 2011년 11월에 6·25전쟁과 월남전쟁의 참상을 상기하고 조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의 명예선양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창녕읍 교리 명덕근린공원에 6·25·베트남참전기념비를 건립했다. 이 기념비는 6·25전쟁과 월남전쟁 참전용사의 숭고한 구국정신 함양과 호국충절의 고장인 창녕의 이미지를 상징화 했고, 기념비 뒤편에 명각비를 마련해 놓았다. |
1686 | 10-1-34 | 마포전차종점 3·1운동 만세 시위지 | 독립운동 | 2015-11-17 | 서울특별시 마포구 | (재)대한불교진흥원 | 장소 | 3·1운동 | 1919 |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약 1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장소 | ||
1687 | 55-1-51 | 구례장터3.1만세운동시위지 | 독립운동 | 2014-12-12 | 전라남도 구례군 | 구례군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9-03-23 | 1919년 3월 23일 구례읍 장날 박경현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곳 |
1688 | 55-1-52 | 백당기념관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남도 곡성군 | (사)국조단군곡성숭모회 | 기념관 | 3·1운동 | 1919 | 기념관1동 | 2014-10-03 | 곡성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백당 신태윤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시설이다. |
1689 | 55-1-49 |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4-12-12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 | 탑 | 기타 | 탑 1개, 상징조형물 1동, 기록벽 2동 | 2014-05-14 | 여수시 출신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
1690 | 16-2-84 | 홍천 경찰 충혼탑 | 국가수호 | 2011-11-10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경찰서 | 탑 | 기타 | 1950 | 0 | 2005-11-30 | 1945.8.15 조국광목과 함께 창설된 홍천경찰서는 한국전쟁 전에는 38선을 넘어 화촌,서석,내면지역과 가리산 공작산 등으로 남침하는 북한 인민군 유격대 토벌작전을 군과 함께 수행하여 325명을 사살하고 63명을 생포하였으며 1950.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경주에 일시 주둔하면서 포항․안강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낙동강 전선 방어에 기여하고 1951.5.27. 홍천수복과 동시 복귀하여 가리산․응봉산․대룡산 등지에서 패잔병 11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공을 세운 400여명의 홍천경찰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무궁화의 고장 홍천을 지키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안타깝게도 16명이 전사하였다. 이제 독립경찰 창설 60주년을 맞아 이곳 잿골 기슭에 충혼탑을 세워 조국수호를 위해 장렬하게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정신넔을 추모하고 참전 경찰관들의 전공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
1691 | 42-2-07 | U.D.T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 경남 UDT/SEAL 전우회 | 탑 | 기타 | 1969 | 0 | 1996-06-25 | 경남 진해시 속천동 대죽도 정상에 훈련중 순직한 김상익 하사와 김인권 일병에 대해 추모하기 위해 U.D.T.전우회에서 1996년 6월 25일 탑을 건립했다. 1969년 6월 UDT 훈련중 순직자(하사 김상익, 일병 김인권)에 대한 추모비를 진해시 속천항 앞 대죽도 8부능선에 추모비를 설치하고 참배하여 오던 중 속출되는 순직 및 전사자(전사자 8명, 순직자 32명)로 같은 곳에 비를 설치하였으나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그 애도의 비는 그대로 남아있고 매년 영·호남지역에 거주하는 예비역과 현역 및 유족들이 원거리 관계로 국군묘지는 참배하지 못하고 이곳 대죽도에 참배하여 오던 중 전국 UDT 전 회원의 마음과 뜻을 모아 종전의 애도의 비는 모두 철거하고 1996년 6월 23일 기존에 있던 비로부터 약 10m 정상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귀한 생명으로 조국을 지켜야 했던 임들의 거룩한 정신이 못다 한 애국충정으로 당신의 구슬픈 함성이 메아리되어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영원히 살아 숨쉬리.... |
1692 | 17-2-46 |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고성군 | 육군제18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7-07-15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에 향로봉지구 전적 기념 및 전몰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1957년 7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당시 설악산 및 향로봉전투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수도사단과 제11사단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7년에 최초 건립하였다. 그러나 비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노후됨에 따라 최초의 위치에 1973년 9월 29일 재건립하였다. 향로봉은 해발 1, 293미터로 인제와 고성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주위엔ㄴ 작봉, 고직봉, 건봉산 등이 있다. 향로봉전투는 6·25전쟁이 고착전 단계로 접어든 직후에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향로봉 북쪽의 주요 고지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924고지와 884고지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 제13사단과 제45사단을 격파하고 남강선으로 진출한 공격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2개 사단은 야포사격에도 견딜 만큼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놓고 저항하는 북한군을 공격하는 동안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유엔 해군의 함포지원까지 받아가며 1주일동안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여 진지내 적을 격멸한 후 고지를 점령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맹호 수도사단은 용사들은 서기 1951년 5월 17일부터 6월 19일까지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계속하여 설악산으로 진격하였으나 패주하던 적은 중동부 요충지인 인제를 방비하기 위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 제5군단 예하 11, 12, 13사단을 증원하여 우리 수도사단 및 제11사단에 89회라는 초유의 반격을 가하여 왔으나, 도처에서 연전연승을 자랑하는 용사들은 그 반격을 격퇴 분쇄하고 설악산 및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혁혁한 공훈이 되었으며 전 장병들의 영웅적인 전투는 높이 찬양되었다. 이 지구에서 장렬하게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전몰장병의 명복을 빌며 자손만대에 길이 그 위훈을 전하고자 전적비를 건립하고 이를 기념한다 |
1693 | 30-1-10 | 심산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성주군 | 성주군수 | 기념관 | 민족주의운동 | 1879 | 1974-08-15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주도하였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 |
1694 | 15-2-93 | 참전 유공자비(경기 양평) | 국가수호 | 2011-11-10 | 경기도 양평군 | 양동면 | 비석 | 기타 | 1950 | 2011-11-10 | 양평군 쌍학리에 6·25전쟁 및 베트남전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전유공자 비’를 건립했다. 양평군은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보훈식과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1년 11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에 양평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양평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695 | 51-1-56 | (고창군)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 | 독립운동 | 2014-12-12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 비석 | 3·1운동 | - | 2014-03-29 | 일제의 침략에 대한 부당성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국제평화회의 독립청원서(파리장서)에 서명한 한국유림대표 137인과 특히 고창지역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재만 선생의 공적을 선양하고자 건립함. | |
1696 | 51-1-54 | 흥동장학당 | 독립운동 | 2014-07-18 | 전라북도 고창군 | 이식종 | 기타 | 의병운동 | 1931 | 정면 6칸, 측면 3칸의 목조와가 | 1931-01-01 | 백관수 등 고창지역 유지들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 운영한 교육장소 |
1697 | 50-1-48 | 광주백범기념관 | 독립운동 | 2016-04-27 | 광주광역시 동구 | 사)백범문화재단 | 기념관 | 한말구국운동 | 1946 | 2015-05-08 | 1946년 여수, 순천, 보성을 거쳐 광주를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학동 전재민촌에 자신의 정치후원금품을 기증하여 전재민들의 안식처인 백화마을을 조성하였다. 이에 백범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을 오늘의 시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거점을 확보한다. | |
1698 | 45-2-11 | 전몰장병 추도비(신도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도1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4-04-01 | 서귀포 신도리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16명의 희생과 충혼을 기리기 위해 ‘전몰장병 추도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부창범, 변시종, 고태식, 이능수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4년 4월 1일 추도비를 세웠다. 신도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699 | 11-1-37 | 충의비 | 독립운동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비석 | 기타 | - | 1976-05-01 | 1976년 5월 1일 사관생도의 정신적 귀감인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장군의 뜻을 기리고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약4미터 높이의 자연석에 안중근 장군의 휘호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음각으로 새긴 것이다. 이 비는 육군 박물관과 화랑관 중간에 위치해, 사관생도의 정신적 구심력을 배양하며 활달한 기개 함양과 화랑의 위용을 선양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 |
1700 | 11-1-35 | 도산 안창호 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5-05-14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사단법인 흥사단 | 동상 | 문화운동 | - | 2013-08-27 | 한말 독립운동가,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등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을 추모하기위해 건립하였다. | |
1701 | 55-1-21 | 의사 백남이공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고흥군 | 과역면 | 비석 | 의병운동 | 1875 | 기단 0.5m 높이 2m | 1953-03-01 | 전남 고흥군 과역면 출신의 백남 이병채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과 순국열사로서의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함. |
1702 | 40-1-32 | 기장장터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명정의숙 | 독립운동 | 2015-05-14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청 | 기타 | 3·1운동 | 1919 | 0 | 1910 | 1910년 개설된 명정의숙과 보명학교가 사용했던 건물로 기장장터 3.1만세시위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든 곳을 기념하기 위해 2013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14.8.20 준공 |
1703 | 17-2-58 | 경찰 전적비 | 국가수호 | 2011-06-08 | 강원도 평창군 | 평창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 2.5m, 비 10.5m | 1992-01-01 | 평창군 병내리에 6·25전쟁 전후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를 토벌하다가 산화한 순국경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경찰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평창경찰서는 순국경찰 전우의 숭고한 애국충정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2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평창경찰은 6·25전쟁 이전인 1949년 7월부터 전쟁 중에도 계속된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도암면 용산리, 진부면 봉산리, 대화면 신리, 태기산, 오대산 등의 전투에서 무장공비 50여 명을 사살하고 12명을 생포했으며 무기 1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정운봉, 이병남, 김용연 등 9명이 호국의 신으로 산화했고 김수복 등 4명이 부상을 당했다. |
1704 | 13-2-58 | 충의탑 | 국가수호 | 2012-05-16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 제10전투비행단 | 탑 | 6·25전쟁 | 1950 | 1972-01-01 | 수원시 장지동 공군부대 내에 1972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의탑’을 건립하였다. 수원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 33명과 순직자 67명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2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수원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수원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705 | 55-1-54 | 고광순의병장 순국지(연곡사) | 독립운동 | 2016-11-03 | 전라남도 구례군 | 연곡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비석 | 2016-11-03 | 1907년 10월 고광순 의병부대가 장기항전을 펼치기 위해 주둔하다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곳 |
1706 | 20-2-34 | 충령탑(계룡) | 국가수호 | 2009-05-25 | 충청남도 계룡시 | 계룡시 | 탑 | 기타 | 1997 | 0 | 2007-06-06 | 충령탑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국을 위해 산화하신 거룩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호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2007년 6월 5일 이 탑을 건립하였다. |
1707 | 53-2-23 |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시 | 탑 | 6·25전쟁 | 1950 | 16m | 2009-08-07 | 참전용사기념탑은 조국을 위하여 투혼을 발휘, 몸과 마음을 바쳤던 참전용사들의 헌신적인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주탑 14미터를 중심으로 주변 8개의 기둥에 6·25 및 베트남 참전 부대마크를 부착하고 승리를 상징하는 V의 주탑 사이에 애국심의 표상인 태극문양을 넣어 탑의 위상과 자긍심을 높였으며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현대적 미의 감각을 겸비한 조형성과 에술성이 높은 탑으로 그 날의 승리, 그 날의 정신계승, 새로움을 품고 내일을 꿈꾸는 탑의 내용을 내포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1708 | 52-1-07 | 3·1운동 기념비(임실군)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7-01-01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중순 전북 임실군에서는 3월 10일 둔남면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임실읍내와 청웅면 등 군내 곳곳에서 4월 초순까지 한 달동안 계속해서 산발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시위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분들만도 80여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한영태(韓榮泰, 1878~1919)·김영원(金榮遠, 1853~1919)은 일제의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위원회와 협력하여 1977년 이 비를 세웠다. |
1709 | 55-2-39 | 곡성군 참전용사기념탑 | 국가수호 | 2012-05-16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군재향군인회 | 탑 | 기타 | 1950 | 탑 5m | 2011-07-22 | 곡성군참전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는 2011년 7월 곡성군 곡성읍 죽동리 체육공원 내(전남조리과학고등학교 근처)에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참전유공자들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참전용사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이 기념탑에는 6·25참전유공자 2, 278명, 베트남참전유공자 2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1710 | 13-2-57 | 과천시 6.25 전쟁기념비 | 국가수호 | 2012-05-16 | 경기도 과천시 | 과천시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1-05-12 | 2011년 5월 과천시 문원동 40(보훈종합회관)에 조국 수호를 위해 헌신한 과천 출신 6·25참전용사 296명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에는 6·25참전 연합국들의 국기와 참전용사 296명의 성명을 새겨 놓았다. | |
1711 | 15-1-29 | (의정부)3ㆍ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6-04-27 | 경기도 의정부시 | 광복회 의정부시지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6-03-15 |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굳건한 민족정신이 있어 민족정기를 이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작금 주변국의 역사왜곡과 동북공정 등 실로 우려할만한 국제적 시대 상황을 비춰 볼 때 날로 퇴색되어가는 우리의 역사의식 및 애국애족 정신에 대한 우려가 들곤 한다. 2015년 조국광복 70주년에 즈음하여 향후 조국과 민족을 이끌어 가야할 미래세대의 주인공들에게 조국과 겨레를 지키라고 하신 선열들의 유훈을 전하고자 이 비를 건립한다. |
1712 | 41-2-14 | 양산 월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10-11-03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탑 | 월남전쟁 | 1964 | 2009-10-31 | 양산시는 2009년 10월 31일 경남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1 ~503 제5호 근린공원 내에 베트남에 파병돼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양산 출신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위국헌신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단부에는 맹호, 백마, 백구, 은마, 비둘기, 십자성, 청룡 부대 등 참전부대 마크와 부대 설명이 있고, 탑 주변 부조벽에는 참전용사 이름과 전쟁 당시 기록 사진이 전시돼 있다. | |
1713 | 52-1-45 | 애국지사 김영호 구국운동 추념비 | 독립운동 | 2017-04-19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김만성 | 비석 | 기타 | 0 | 1989-03-01 | 전북 전주(全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천도교(天道敎) 전주지구(全州地區)에 보내온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전주 시내에 살포하여 만세시위를 촉발시켰다. 그후 상경(上京)한 그는 동년 8월 서울에 거점을 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동 국민회(國民會)의 전주지부(全州支部)를 설치하고 재정부장(財政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3월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략으로 대한국민회로부터 3·1독립운동 1주년기념 경고문(警告文) 50매를 받아 전주 시내에 살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해 8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탁송된 애국금통지서(愛國金通知書)를 받고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일로 인하여 1922년 2월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 8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1714 | 26-2-05 | 금강교 | 국가수호 | 2012-10-17 | 충청남도 공주시 | 공주시 | 기타 | 6·25전쟁 | 1950 | 1933-11-31 | 길이 513m인 금강교는 철교로 1932년 1월 착공하여 1933년 11월 개통되었다. 당시 철교는 대부분 전국적으로 철도교로 건설하였으나 금강철교는 도로교로 건설해 그 예가 드물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미 제24사단 34연대는 북한군과의 천안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공주지역으로 철수하였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군은 교량의 2/3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금강교 폭파에도 불구하고 도하를 통해 남쪽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7월 14일 미군은 금강교 서쪽 이인면 검상리에서 도하하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대평리 방향으로 후퇴하였다. 금강교는 1952년 복구 공사에 착수하여 1956년 9월 준공되었다. 이후 다시 보수하여 당시 모습이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금강을 연결하는 방어선은 금강 정비사업으로 주변이 정리되었을 뿐 당시 지형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 |
1715 | 42-2-58 | 학도병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2-11-12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8-10-01 | 이 곳에 설치되어 있는 학도병 참전 기념비는 옛교명인 김해농업고등학교 시절인 6‧25동란때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1950 8월경부터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출정한 85명(전사자30명)에 대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총동창에서 뜻있는 동문님들의 협조를 받아 건립하였다. |
1716 | 43-1-66 | 한치문 공적비 및 한필동 공훈비 | 독립운동 | 2017-04-19 | 경상남도 진주시 | 한정우 | 비석 | 3·1운동 | 비석2기, 장군 기마상, 공적비, 재실 | 2011-04-30 | 경남 합천‧산청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과 일제 관공서 습격 활동 등 의병활동을 전개한 한치문 선생과 경남 합천 삼가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한필동 선생의 주요 공적을 비석 후면, 측면에 기재되어 있으며, 청주한씨병사공파재실 앞에 조성되어 있어 매년 5월 경에 추모제가 시행하고 있습니다. | |
1717 | 14-1-01 |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인천광역시 동구 | 인천창영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95-03-04 | 1919는 3.1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당시 인천 유일한 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휴학을 일으켜 만세운동을 전개함 |
1718 | 55-2-40 | 고흥군 점암면 현충탑 | 국가수호 | 2012-11-12 | 전라남도 고흥군 | 고흥군 점암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 1998-06-06 | 고흥군 점암면사무소는 1998년 6월 6일 점암면 모룡리 817번지에 점암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한 독립유공자 2명, 6·25참전 국가유공자(군인 70명, 경찰 9명, 애국단원 15명) 94명 등 총 96명의 호국영령을 기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이 탑은 1997년 전남 고흥군 행정실적심사 최우수 면으로 점암면이 선정되어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
1719 | 15-2-96 | 6.25전쟁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0 | 0 | 2011-06-25 | 파주 임진각 내에 6·25전쟁 기간에 이 고장 출신과 제1보병 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장병, 해병대 제1전투사단 장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파주시 6·25전쟁 참전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2011년 6월 25일에 이 비를 세워, 파주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숭고한 나라사상 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6·25전쟁 기간 파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문산농고, 중동고 등을 다니던 학생들, 태극단원, 경찰,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720 | 11-1-40 | 창녕위궁재사(김석진선생 순절지) | 독립운동 | 2016-11-23 | 서울특별시 강북구 |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 | 1955-01-01 | 일제에 의한 작위수여를 거부하시고 순국자결하신 故김석진 선생을 추모 | |
1721 | 13-2-60 | 참-357호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평택시 | 해군 제2함대사령부 | 조형물 | 기타 | 2002 | 2002-11-30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 제2연평해전을 맞아 전사한 윤영하 등 6인을 추모하고 참수리 357호를 해군본부에서 2002년 11월 30일부터 전시하고 있다.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차단기동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한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사격으로 대응하다가 고속정이 침몰됐고, 그 후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이라고 부르던 것을 2008년 4월에 제2연평해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 |
1722 | 20-1-34 | 기미 3.1독립선언 애국선열의거 추모 기념비 | 독립운동 | 2016-04-27 | 충청남도 부여군 | 충남최초독립운동선양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2-03-06 | 1919년 3월 6일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임천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기념 |
1723 | 23-2-28 | 서산시나라사랑기념탑 | 국가수호 | 2012-11-12 | 충청남도 서산시 | 서산시청 | 탑 | 기타 | 0 | 2012-01-19 | 서산시 동문동에 2012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산화한 이곳 출신 호국전몰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서산시는 이 고장 출신으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12년 1월 19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서산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724 | 31-2-07 | 충혼탑(의성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의성군 | 탑 | 기타 | 1950 | 0 | 1965-05-30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八成里) 구봉산에 있는 충혼탑으로 한국전쟁 때 순국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경계면적 5백평, 기단 높이 3m, 탑높이 9.7m이다. 육군 1,351위, 해병 3위, 노무자 49위, 해군 1위, 전경 21위로 총 1,425위를 새겼다. |
1725 | 14-2-36 | 팔미도등대 | 국가수호 | 2013-07-22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지방해양수산청 | 기타 | 6·25전쟁 | 1950 | 중 | 1903-06-01 |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있는 팔미도 등대는 클라크 대위와 팔미도 등대원의 첩보수집 노력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전적지이다.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한 유엔군은 팔미도를 확보하여 인천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확보하려 하였다. 이에 미 해군 클라크(Eugene Clark) 대위는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수집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서해지구 책임자인 앤드류스(William G. Andrews) 소장의 주선으로 2명의 한국인 통역과 영국 해군 구축함 췌리티호(H.M.S. Charity)를 타고 와서 9월 1일 한국 해군함정 PC703함에 옮겨 탄 다음, 그날 저녁 영흥도에 도착하였다. 클라크 대위는 국군 정보장교인 계인주 대령과 연정 중령, 그리고 등대원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정보수집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해안감시반을 조직하고 일부의 청년들을 인천과 서울 등지로 파견 침투시켜 북한군 포대의 위치와 수, 해벽의 높이 그리고 서울-인천 간의 부대집결소와 이동로 등을 조사 보고하는 동시에 자신도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인천항으로 노를 저어 들어가 직접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팔미도 등대의 항해등을 점화하여 국군 및 유엔군 함선들이 비어수로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하였고 북한군이 국군과 유엔군의 상륙전을 예상하고 있는지 혹은 북한군이 방어대책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하여 중점을 두어 각 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자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항로표시의 효시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02년 공사를 시작해 1903년 6월 완공되었으며 2003년에는 한국 등대 설치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하 1층, 지상 4층, 높이 31m의 새로운 등대가 건설되며 1903년에 세워진 등대는 더 이상 등대 역할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00년 동안 불을 밝혀 온 팔미도 등대는 해양문화유산과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영구 보존되고 있다. |
1726 | 43-2-54 | 6.25 월남참전 국가유공자기념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상남도 남해군 | 남해군수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0 | 2012-04-30 | 남해군은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수호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수많은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운 남해 출신 참전유공자의 호국정신을 널리 계승하기 위하여 2012년 4월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군민동산에 참전 국가유공자 기념탑을 건립했다. 이 기념탑에는 2810명의 남해 출신 6·25 및 베트남 참전 국가유공자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전 읍면장과 진주보훈지청장, 보훈 관련 9개 단체장이 대상자 명단을 검토한 끝에 확정한 것이다. | |
1727 | 14-2-35 | 이청호 경사 흉상 | 국가수호 | 2013-05-13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해양경찰서 | 동상 | 기타 | 2011 | 소 | 2012-12-28 |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공원 내에 중국의 불법어로 단속을 하다 숨진 이청호 경사를 추모하기 위해 해양경찰청에서 2012년 12월 28일 흉상을 세웠다. 해경 정복을 입은 모습의 이 경사 흉상은 실물 크기 1.2배 크기로 황동 재질로 제작하여 고인의 강한 조국애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작품대는 해양경찰의 함정을 상징하는 디자인으로 함정을 타고 바다를 누비는 해양경찰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흉상 제작비 1,800만원은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가 시민에게서 모은 성금으로 마련됐다. 41살의 나이에 순직한 이 경사는 1996년 특전사 예비역 중사로 전역한 뒤 1998년 순경으로 임용되어 특수구조단, 특수기동대, 경비함정 등 우리 바다 최일선에서 해양주권수호를 위해 근무하였다. 2011년 겨울, 당시 우리 바다에는 외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이 계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12일 새벽 인천광역시 옹진군 소청도에서 남서쪽으로 87km 떨어진 해상에서 해경은 불법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 루원위(魯文漁) 15001호에 나포작전을 펼쳤다. 당시 인천해양경찰청 소속 경비함 3005함에서 근무하던 이청호 경사는 조타실로 투입되어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중국인 선장 '청다웨이'가 흉기를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중상을 입게 되었고 후송하던 도중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고귀한 희생과 공로를 인정하여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수여하였다. 해양경찰청은 이 경사의 흉상 3개를 제작하여 인천 월미공원, 인천해경부두, 충남 천안 해양경찰학교에 세웠으며 월미공원의 이청호 경사 흉상은 2013년 5월 13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
1728 | 42-2-59 | 서북산 전적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6·25전쟁 | 0 | 0 | 1995-11-23 | 경남 함안군 여항면 주동리에 서북산 전투에서 전사한 티몬스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9사단 공병대대에서 1995년 11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지난 95년부터 97년까지 미 8군 사령관으로 주한 미 지상군을 지휘한 리처드 F 티몬스(57) 예비역 중장의 아버지 로버트 L 티몬스씨는 미 육군 대위로 6·25에 참전했다가 마산 서북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들 리처드 F 티몬스 2세는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 96년부터 97년까지 1년간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함으로써, 3대에 걸쳐 한국 방위를 담당하는 인연을 맺게 됐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 티몬스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은 50년 8월.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이었던 그는 하와이 주둔 부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티몬스 대위는 서북산에서 북한군의 고지 점령을 시도하던 중 총격으로 부상해 후송되다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1년 뒤에 발견돼 미 워싱턴의 앨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소령 시절 미 2사단 작전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한 뒤 95년 미 8군 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 다시 부임한 그는 아버지가 전사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육군 39사단은 1995년 12월 서북산에 티몬스 대위를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
1729 | 15-1-30 | 기미독립선언서 비 | 독립운동 | 2017-04-1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청 | 비석 | 3·1운동 | 1919 | 2016-05-09 | 박동완 선생(민족대표 33인) 등 포천 독립유공자 선양 | |
1730 | 15-1-31 | 항일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17-04-19 | 경기도 파주시 | 경기도 파주시청 | 조형물 | 3·1운동 | 1919 | 2016-08-15 | 파주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뜻을 계승 발전 | |
1731 | 53-2-28 | 자은면 충혼탑 | 국가수호 | 2012-11-12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청 | 탑 | 기타 | 0 | 가로1200x높이840x세로300cm | 2000-01-01 | 신안군 구영리에 2000년 6·25전쟁 및 베트남전쟁에서 산화한 자은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자은면에서는 이곳 출신 강동용, 박봉룡, 전인학, 배봉호 등 호국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0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자은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자은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732 | 43-2-53 | 사천6.25전쟁 월남전쟁 참전유공자 기념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상남도 사천시 | 사천시장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0 | 2012-09-20 | ‘사천 6·25전쟁·월남전쟁 참전유공자기념탑’은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해 조국을 수호하고 자유정신을 사수한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2012년 9월 20일 사천시가 경남 사천시 용현면 통양리 254(선진공원 내)에 건립했으며 6·25참전유공자 772명, 베트남참전유공자 485명이 명각되어 있다. | |
1733 | 45-2-50 | 제주도6.25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3-05-13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6.25참전유공자회도지부 | 탑 | 6·25전쟁 | 1950 | 2012-10-24 | 제주시 신산공원 내에 2012년 6·25전쟁에 참전한 제주시 출신 청년·학생 1만여 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도 6·25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6·25참전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2년 10월 24일 한규택, 강승우, 김문성, 고태문 등 호국영웅 흉상과 함께 이 탑을 준공하였다 제주시의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나라의 부름을 받아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낙동강 전선,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백마고지, 도솔산, 한석산 등 수 많은 격전지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734 | 31-2-37 | 안동교 전투지 | 국가수호 | 2013-11-13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경찰서 | 장소 | 6·25전쟁 | 0 | 안동교 전투지인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 645-4 일대는 국군 제8사단이 안동에서 철수한 후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1950년 8월 1일 군단참모장 최덕신 대령의 지휘하에 안동교와 안동철교를 폭파, 많은 병력이 희생된 곳이다.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8월 1일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으로 안동이 위기에 처하자 안동철수를 결심하였다.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접전이 경미한 제10연대, 제21연대 순으로 철수를 실시하고, 제16연대는 주력 부대가 철수하는 동안 계속해서 접전을 유지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의 엄호 하에 후위로서 철수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제21연대는 강안에 도착하기 전에 안동교와 안동철교가 폭파됨으로써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결국 무리한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제21연대와 제16연대는 안동철수과정에서 전사 137명, 부상 120명, 실종 594명 등 수많은 병력을 잃게 되었다. | ||
1735 | 50-2-43 | 상희공원 현석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공군 제1전투비행단 | 비석 | 기타 | 1991 | 1992-01-21 | 광주시 광산구 도산동에 비행훈련중 불의사고로 사망한 이상희 대위를 기념하기 위해 공군 제1전투비행단에서 1992년 1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이상희 대위는 한국항공대학교 항공운항과 졸업, 학군사관 17기였다. 이상희 중위(당시 계급)는 당시 제1전투비행단 소속으로, 정식으로 파일럿이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었다. 1991년 12월 13일 오후 3시경, 광주 상공에서 F-5A 4번기에 탑승하여 훈련비행중이었다. 비행 훈련 중, 3번기와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기체가 제어 불가 상태에 빠져 광주 덕흥마을의 밭에 기체가 추락, 이상희 중위는 순직했다. 파편과 화재로 마을 주민 3명도 중화상 등 부상을 입었다. 이후 기체의 잔해에서 회수된 블랙박스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에 탈출을 결심했으나 민가를 확인하고,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장렬히 순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향년 23세. 장례는 부대장으로 치뤄졌으며, 사후 공군 대위로 추서되었다. | |
1736 | 42-2-51 | 진해 해외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대한해외참전전우회 | 조형물 | 기타 | 2007 | 0 | 2007-2-20 | 자유민주주의수호와 세계평화를 위해, 베트남(월남), 동티모르 등 12개국의 해외 전쟁에 파병한, 해외 참전의 참뜻을 국민에게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난 얼을 영원히 기리며, 자라나는 후세와 국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자유민주주의 체재 수호 및 시국안정과 우국충정의 호국이념을 고취시키고, 참전용사들의 명예와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건립 |
1737 | 17-2-059 | 권태순장군 동상 | 국가수호 | 2013-11-22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동상 | 6·25전쟁 | 1951 | 높이 5.8m, 폭 1.6m, 기단 1.6m | 2012-10-14 |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통일공원 내에 강릉 출신으로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권태순 장군을 기리기 위해 강릉시장과 시민들이 힘을 합하여 2012년 10월 14일 동상을 건립하였다. 권태순 장군은 1922년 2월 5일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졸업하고 임관되었으며 오대산 및 태백산 지역 무장침투 북한군 유격대를 섬멸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6·25전쟁에 참전하여서는 보병 제8사단 10연대장으로서 조국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기 위한 영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후 3·8선을 돌파하여 희천을 점령하고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춘천 내평리에서 양동작전으로 연대병력을 섬멸하고 횡성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방해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보였으나, 1951년 2월 12일 횡성지구 전투에서 29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
1738 | 18-2-26 | 안성월남참전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기도 안성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안성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0 | 0 | 2008-10-24 | 안성시는 2008년 10월 24일 경기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 112-52 대림동산 내에 안성월남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여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한 안성시 출신 베트남참전용사들의 공적을 기렸다. |
1739 | 13-2-65 | 미공군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기도 평택시 | 공군작전사령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0-12-21 | 미공군 6.25전쟁 참전 기념 및 순직 공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740 | 42-2-61 | 밀양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비석 | 기타 | 0 | 0 | 2011-07-14 | 밀양시가 2011년 7월 14일 경남 밀양시 교동 517-1에 조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밀양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희생과 애국정신과 드높은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전공비는 무공수훈자의 용맹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6.5m의 화강석으로 제작되었고, 그 주위에 참전용사의 이름을 새긴 명각대가 설치돼 있다. |
1741 | 43-1-11 |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비석 | 3·1운동 | 1890 | 기념비 | 1967-10-01 | 김한익은 경상남도 함양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함양 장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만세를 외쳤다. 의거를 주도하였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 등은 1교 다리옆(구장터) 에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다가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김한익은 함양읍 만세사건을 보고 집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 가지고 4월 2일 장터로 갔다. 정오쯤 3천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니 주민들이 호응하였다.. 김한익이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붙잡혀 1년 6월의 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다음 출옥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다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
1742 | 42-2-62 | 함안군 6.25전쟁 참전 경찰승전탑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탑 | 6·25전쟁 | 0 | 0 | 2012-10-29 | 6.25전쟁 당시 최후 방어선 가운데 가장 치열하였던 곳 중 하나가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송도 나루터 전투로서 4,000여명의 경찰이 전투에 참가하여 승전으로 이끎. |
1743 | 15-2-100 | 조광성 중사 추모비 및 흉상 | 국가수호 | 2014-05-20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 3182부대 | 비석 | 기타 | 1994 | 1994-08-22 | 1994년 8월 22일 수류탄 훈련 중 한 훈련병이 실수로 떨어트린 수류탄을 처리하던 중 순직한 故 조광성 중위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군인정신을 기리어 백마 하사관의 지표로 삼기 위함 | |
1744 | 15-2-101 | 마포리 충혼비 | 국가수호 | 2014-05-20 | 경기도 연천군 | 1575부대 | 비석 | 기타 | 1981 | 0 | 1982-07-04 | 1981년 7월 4일 임진강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산화한 육군 제28사단 부사단장 이덕곤 장군 외 12인 장병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작전 1주년인 1982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
1745 | 43-2-55 | 위령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남도 사천시 | 공군제3훈련비행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2.4m, 세로 0.6m, 높이 2.7m | 1962-06-29 | 6ㆍ25전쟁부터 1962년 6월까지 사천기지에서 작전임무 및 훈련 중 호국의 넋으로 산화한 고 김영환 장군 등 45인의 영령을 추모하고자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746 | 26-2-15 | 충혼탑(경찰교육원) | 국가수호 | 2014-12-12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찰교육원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8-06-06 |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조국수호를 위해 순직한 순국경찰관 9848명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 1958.5.30. 故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휘호 '충혼'을 탑으로 제작 충혼탑(정 가운데): 故이승만 대통령이 휘호 하사 호국상(좌측 남자상): 조국 수호 상징 안민상(우측 여자상): 위로와 추모 상징 불꽃(하단 조형물): 조화를 이루며 상승하는 경찰정신 상징 |
1747 | 40-2-20 | 천안함 이상준중사 추모비 | 국가수호 | 2014-12-12 | 부산광역시 사하구 | 건국고등학교 | 동상 | 기타 | 2010 | 3.2m*3.2m | 2014-06-02 |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으로 전사한 건국고 52회 졸업생 고.이상준 중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
1748 | 30-2-48 | (김천시)6.25참전용사 선양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김천시 | 김천시 | 비석 | 6·25전쟁 | 2002-04-09 | 6.25전쟁에 참전한 김천 출신 참전 용사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 하였다 | ||
1749 | 42-1-45 | 애국지사 일성 이억근선생 공훈비 | 독립운동 | 2017-04-19 | 경상남도 의령군 | 함안이씨월암공파종중 | 비석 | 3·1운동 | 0 | 1995-10-03 | 경남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 의령군 의령읍(宜寧邑)에서 구여순(具汝純)·최정학(崔正學)·정호권(鄭浩權)·최병규(崔秉圭)·이태수(李泰秀) 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장터에 모인 300여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군중들 앞에서 구여순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연설하고 군중과 함께 태극길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일경의 무력탄압을 무릅쓰고, 읍내를 행진,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750 | 55-2-41 | 충혼탑(해양경찰) | 국가수호 | 2014-05-20 | 전라남도 여수시 | 해양경찰교육원 | 탑 | 기타 | 2008 | 7m | 2013-10-10 | 동,서,남해안의 해상치안질서 유지, 어로보호 및 대간첩 임무수행을 위해 희생당한 해양경찰영령을 위로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함 |
1751 | 30-2-45 | 김천 부항지서 망루 | 국가수호 | 2013-11-13 | 경상북도 김천시 | 김천경찰서 | 기타 | 6·25전쟁 | 1948 | 1951-10-01 | 부항지서 망루는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 684에 위치해 있는 사각형 망루로 6·25전쟁 때 경찰이 운용한 망루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적시설이다. 부항지서 망루를 중심으로 하여 1951년 10월경 부항지역 주민과 경찰이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산하 빨치산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과를 세우기도 하였다. 부항지역 전투는 경찰과 민간인의 협조로 적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로서 6·25전사상 손꼽히는 전투이기도 하다. | |
1752 | 13-2-067 | 시흥시 6.25 참전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4-05-20 | 경기도 시흥시 | 6.25참전유공자회 시흥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6-30 | 6·25참전유공자회 시흥시지회는 2005년 6월 30일 경기 시흥시 대야동 569-2 은계어린이공원 내에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시흥시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공훈을 선양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이 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1753 | 13-2-68 | 창훈대 | 국가수호 | 2014-05-20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 국가보훈부 경기남부보훈지청 | 탑 | 기타 | 1950 | 0 | 1963-09-25 | 국가를 위해 공헌하거나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이들의 뜻을 영원이 이어나가야 함 |
1754 | 16-2-88 | (홍천군)6·25및월남전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4-05-20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탑 | 월남전쟁 | 0 | 2013-05-21 | 홍천군은 홍천읍 갈마곡리 토리숲공원에 6·25전쟁 및 월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수호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수많은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운 홍천 출신 참전유공자의 호국정신을 널리 계승하기 위하여 2013년 5월 참전기념탑을 건립했다. 홍천군 참전기념탑은 총모양으로 한쪽에는 6·25전쟁을 표시하는 한반도지도, 한쪽은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베트남 지도가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평화를 지킨 불멸의 영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
1755 | 40-2-21 | 유엔평화기념관 | 국가수호 | 2015-05-14 | 부산광역시 남구 | (사)국제평화기념사업회 | 기념관 | 6·25전쟁 | 2014-11-11 | 세계 유일의 성소인 유엔기념공원의 위상에 걸맞는 기념관을 건립하여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세계적인 관광명소 육성 및 국제평화도시 이미지 제고 | ||
1756 | 10-1-25 | 상동교회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중구 | 상동교회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1897 | 0 | 1888-10-09 | 상동교회는 1901년 기독교 스크랜튼 선교사가 설립한 감리교 교회이다. 1904년 교회 안에 여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공옥학교와 병행하여 청년학원을 세워 민족지도자를 양성하였으며, 1907년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면서 독립운동의 비밀본부 역할을 하였다. 이 학교의 교감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등이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을 추진하였으며, 헤이그 밀사파견의 산실이 되었다. 이 교회는 민족운동에 참여한 많은 인재들을 길러 내었는데, 이동녕, 박용만 이승만 등이 이곳에 속하여 있었다. |
1757 | 33-2-42 | 경주 김공동헌 위적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재향경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5-11-01 | 1950년 3월 포항경찰서 죽장지서장 주임으로 부임한 경위 김동헌은 면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불철주야 공비토벌에 동분서주 하다가 6.25전쟁 중 애국청년 수백명을 구출한 공적으로 1960년 면민의 이름으로 건립하였고 1985년 재건립하여 현재 모습의 시설이 되었습니다. |
1758 | 42-2-65 | 故 홍시욱 하사 동상 | 국가수호 | 2015-10-14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 교육사령부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12-11-30 | 1948년 6월 1일 해군의 신병 10기로 입대하여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군본부의 정보국 특수공작대의 2조(하사)로서 특수공작대원들과 함께 경인지방의 북한군 병력 배치 상황과 규모, 병력 배치에 따른 보급 관계, 지뢰 매설상황, 상륙지점의 지형, 암벽의 높이 등을 수집하는 특수공작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50년 8월 22일 영흥도에 상륙 잠입하였다. 당시 영흥도에 있던 해군 의용대와 해군 정보국 소속의 부대원은 중대장 임병래 중위의 지휘 아래 북한군 1개 대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였으며, 최후에는 임 중위를 비롯한 군인 군속 10여 명이 남게 되었고, 이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이 때 홍시욱 이등병조는 임 중위와 함께 적에게 체포되어 특수공작임무의 기밀을 누설치 않으려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른 뒤 자결하였다. |
1759 | 10-2-16 | 맥아더 사령관 한강방어선 시찰지 | 국가수호 | 2015-05-29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영등포구 푸른도시과 | 장소 | 6·25전쟁 | 1950 | 0 | 1950-06-28 | 1950.6.29. 맥아더 사령관이 영등포공원 일대를 직접 시찰하여 국군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북한군의 공세에 대한 반격 작전을 구상했던 곳으로 이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
1760 | 31-2-38 | 봉화군 베트남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봉화군 | 봉화군 | 비석 | 월남참전 | 1950 | 0 | 2010-06-20 | 봉화군 참전유공자에게 명예를 선양하고 국난극복의 살아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함으로써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권영진 등 188명의 참전자 추모) |
1761 | 33-2-46 | 해군 육전대 전적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해군 작전사령부 제6전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3-08-25 | 6.25전쟁 중 해군육전대 소속 용사들이 구암산 전투 및 영덕방어선, 포항시가지 전투를 통해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지속적인 양륙작전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한 전적비 | |
1762 | 33-2-43 | 독도 순직경찰위령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울릉군 | 울릉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1954 | 1954-01-01 | 독도경비대 근무자 중 추락하여 사망한 6인의 위령비 | |
1763 | 10-2-07 | 존 비 코올터 장군상 | 국가수호 | 2003-05-30 | 서울특별시 광진구 | 국방부 | 동상 | 6·25전쟁 | 가로 2m 세로 2m 동상높이 3m 좌대높이 2.5m | 19770621 | 6.25전쟁에서 위기일발의 포항전투에서 미 제8군 부사령관으로 북한의 침입을 막아내고 전쟁이 끝난 후 초토화된 우리나라의 재건에 힘쓴 공로로 1959년 10월 이태원에 동상을 건립했다. 이후 1977년 어린이대공원(후문에서 아차산역 방면 위치)으로 이전하였다. | |
1764 | 53-2-31 | 순직경찰관 추도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경찰서 | 비석 | 기타 | 높이 3.15m, 기단 2m | 19841001 | 여수·순천반란 사건 발생 후 불갑산과 군유산을 근거지로 매일 출몰하는 공비소탕 작전 중 전사한 경찰관 18명, 5.18 당시 순직경찰관 4명, 업무로 순직한 경찰관 3명의 넋을 기르기 위해 건립했다. | |
1765 | 33-2-45 | 해군 해병대 항공순직자 추모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해군 작전사령부 제6전단 | 비석 | 기타 | 2013-10-31 | 해군 항공병과 창설 이후 해상초계 및 정찰, 산불진화 등 작전임무 수행 중 순직한 장병 48명의 명예선양과 희생정신을 추모하고자 건립 탑신 : 제6항공전단을 상징하는 6개의 탑신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날개를 형상화 불꽃 : 순직한 48인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 부조벽 : 비행기 동체 모양 메모리얼 벽 : 항공작전 활동상과 순직 장병 48명의 명단 기재 | ||
1766 | 20-2-45 |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호국영웅동산 | 국가수호 | 2015-05-14 | 대전광역시 중구 |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총동문회 | 동상 | 기타 | 1996 | 0 | 1999-06-05 | 6.25와 관련한 동상으로 대전시 중구 문화동에 충남기계공고 교정 호국영웅동산에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관리번호 : 20-2-45)인 오영안 장군 흉상과 임재엽 중사 흉상이 있습니다. 故.오영안 장군은 충남기계공고 4회 졸업생으로 1996년 11월 잠수함으로 강릉에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불의의 흉탄을 맞아 전사하였고, 故.임재엽 중사는 정밀기계과 38회 졸업생으로 2010년 3월 서해 NLL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의 어뢰 공격에 의한 천안함 폭침으로 전사하였습니다. 고인들의 동상은 그들의 투청한 사명감과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관리되고 있습니다. |
1767 | 20-1-17 | 강경 항일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28 | 충청남도 논산시 | 강경읍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10-01 | 이 기념비는 강경에서의 1, 2차 독립운동의 시발점인 옥녀봉 산정에 강경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5년 10월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강경읍의 장날 하오 3시경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 등이 주동하여 500여 명의 군중들이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 행진하였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 정통을 지나 시장을 일주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왜경은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주동인물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3월 20일 오후 5시경에도 옥녀봉에서 이근석, 이봉세 등이 1, 0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강경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1768 | 16-2-89 | Forney Bridge 기념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 육군제2236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2 m 폭1.4m | 1967-04-27 | 6.25전쟁 당시 춘천지역에서는 북한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소양강을 두고 밀고 밀리는 수많은 전투가 발생하였다. 1951.7.8.~8.1 기간 중 미군 62공병대대는 현 소양2교 위치에 병참선 유지 목적으로 목교를 건설하였고, 당시 62공병대대의 전 지휘관이었으며, 6.25전쟁 중 전사한 Frank H, Forney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Forney Bridge 로 명명하였다. 이후 Forney Bridge는 60년대 초까지 춘천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역할을 담당했으나, 교량의 노후로 인해 해체, 2차에 걸친 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차 신축공사시부터 소양2교로 불리며 춘천시민의 편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1769 | 53-2-32 | 흑산면 현충탑 | 국가수호 | 2015-10-14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흑산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높이5.7, 가로 2.5m | 2015-02-01 | 조국수호를 위해 6.25전쟁 및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신명을 바치신 흑산도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 현충탑 건립 | |
1770 | 30-2-50 | 전몰경찰관 충혼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김천시 | 김천재향경우회 | 비석 | 6·25전쟁 | 1995-05-27 | 6.25전후 무장 공비들의 습격으로 증산면 치안질서가 위태로울 때 공비소탕을 위해 전투 중 장열하게 산화한 경찰관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 ||
1771 | 53-2-33 | 신의면 현충탑 | 국가수호 | 2015-10-14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신의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0 | 2015-03-01 | 조국수호를 위해 6.25전쟁 및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신명을 바치신 신의도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 |
1772 | 30-2-51 | 상주 순직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5-05-22 | 6.25전쟁 당시 전사한 총경 황을흠, 경위 김용환 경찰관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773 | 40-2-22 | 아덴만여명작전 전적비 | 국가수호 | 2015-05-14 | 부산광역시 남구 | 해군작전사 부산기지전대 | 조형물 | 기타 | 2011 | 0 | 2012-01-13 |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쥬얼리호와 선원 21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한 아덴만 여명작전의 쾌거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1774 | 26-2-17 | 참경찰인탑 | 국가수호 | 2015-05-14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찰대학 | 조형물 | 기타 | 2001-11-30 | 고 최규식 경무관 (서울종로경찰서장 재직중 청와대 습격시 순직) 경사 김유연 (서울 마포서 재직중 도시가스 정압실 수리중 질식한 직원 구출중 순직) 경위 최동문, 경사 조덕래, 경사 정영환, 경사 박병환 (동의대 사건시 순직) 경사 장진희, 나성주 (충남부여경찰서 재직중 간첩의 총탄에 순직) 경감 남궁견, 경사 김상재 (서울 동대문서 재직중 강도용의자 검거중 순직) 경위 함용길 (경기 용인경찰서 재직중 폭우중 산사태 매몰된 가족 구출중 순직) 총경 장기택 (서울 강남경찰서장 재직중 위암말기중에도 ASEM 경호경비 완수) | ||
1775 | 45-2-51 | 삼양지지 및 기념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지방경찰청 | 비석 | 기타 | 1949 | 0 | 1945 | 제주4.3사건 당시 공비와 교전 중 순직한 경찰에 대한 애도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1776 | 20-2-46 | 권영주중위동상 | 국가수호 | 2015-05-14 | 대전광역시 유성구 | 충남대학교 학군단 | 동상 | 기타 | 1980 | 0 | 1990-02-09 | 권영주 중위는 충남대학교 출신으로 학군장료 임관 후, 복무 중 1980년 2월 9일 새벽 3시 40분경 야간 전차 기동훈련 후 부대 복귀 중 전차가 교량 아래로 추락 전복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고인은 당시 기절한 포수와 탄약수를 전차 바깥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유독가스에 질식된 채 화염에 쌓여 순직하였습니다. 1990년 2월 22일 권영주 중위 순직 10주기를 맞이하여 제 16기학군단 17기 동기생들이 동상을 건립 하였습니다. |
1777 | 31-2-39 | 6.25참전 호국학도 충의탑 | 국가수호 | 2016-05-04 | 경상북도 안동시 |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5-09-23 | 6.25전쟁 당시 안동농림학교 재학생 중 75명이 군번과 계급장도 없이 자진 참전하였고 그 중 6명은 낙동강 전선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안동농림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의용군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778 | 11-2-05 | 국군 및 육군사관학교 창설지(육군사관학교 및 밴플리트 장군 동상) | 국가수호 | 2013-05-09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기타 | 기타 | - | 1960-03-31 | 한국전 당시에는 미국 제 8 군 사령관으로 유엔군 사령관을 겸했다. 1951년 4 월 14일 밴 플리트는, 맥아더 원수가 미국으로 귀임하게 되면서 맥아더의 후임이 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8 군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리지웨이의 전략을 이어 받아 수적으로 우세였던 중국 공산군과 북한군에 맞서는 작전에서 미 8 군을 지휘했다. | |
1779 | 52-2-68 | 무주 경찰충령비 | 국가수호 | 2015-05-26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7-05-20 | 6.25 전쟁 시 공비를 소탕하기 위한 토벌작전에서 장렬히 산화한 무주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경, 학경, 특경 등 205위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
1780 | 52-2-45 | 충혼비(장수군)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군수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7-01-01 | 장수군 장수리에 6·25전쟁 기간에 목숨을 바쳐 나라를 수호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528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장수군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7년 1월 1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장수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781 | 52-2-47 | 반공투사 고 강백규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장수군 | 강종영 | 비석 | 6·25전쟁 | 1954 | 0 | 1996-08-01 | 전북 장수군 계남면 장안리에 반공투사로 활약한 강백규를 추모하기 위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1782 | 13-2-70 | 위국조인상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북도 부안군 | 공군작전사령부 | 동상 | 6·25전쟁 | 1950 | 2014-03-26 | ○ 취지/유래 공군작전사령부 및 예하부대 전 장병이 6‧25전쟁 출격 조종사들의 조국수호의지를 기리고, 안중근 의사의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방위의 핵심전력인 공군의 최선봉에서 영공방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힘차게 비상하는 모습 ○ 상징물 명칭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유사시 생명을 바치는 공군인(鳥人:조인)을 의미하는 爲國鳥人像(위국조인상) 으로 명명 ○ 부분별 의미 - 방패형 외형 : 국가방위의 핵심전력인 공군 - 상단부 빗살면 : 하늘로 비상하는 전투기 - 별(10개) : 대한민국의 하늘과 영공수호 임무의 완전성 - 조종사, 방공관제부대, 방공유도탄부대, 인공위성 : 항공우주군 - 23개 국기 : 6·25전쟁 유엔 참전국들의 평화와 자유 수호 의지를 기리고 올바른 역사인식과 안보관 확립 - 信念의 鳥人 : 6·25전쟁 시 美 헤스(Hess) 대령이 F-51D 18호기에 ‘I fly by faith’의 의미로 (신념의 조인) 기수 좌우측에 사용한 공군 조종사들의 정신 - 6‧25전쟁 출격 조종사: 조국수호 의지에 대한 경외심 -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 안중근 의사의 군인정신 계승 ○ 전체 의미 공군작전사령부는 조국의 하늘을 피와 땀으로 지켜낸 6‧25전쟁 출격 조종사들의 숭고한 투혼과 넋을 기리며,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높은 힘’의 중심에서 영공방위 임무 완수 | |
1783 | 42-2-67 | 손원일 제독 동상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진해기지사령부 | 동상 | 6·25전쟁 | 0 | 1997-11-11 |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해군 창설을 위해 힘쓴 故손원일 제독은 초대 사관학교장,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국군의 최선임 지휘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에 섰으며, 평생을 국가와 해군을 위해 봉직하였던 숭고한 정신과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
1784 | 24-2-14 | 한국전쟁 참전 용사비(단양)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단양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단양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1-01 | 매포읍 매포공공도서관 앞에 6·25전쟁에 참전한 매포읍 출신 참전유공자(80여명)를 기리기 위해 ‘한국전쟁 참전 용사비(단양)’를 건립하였다. 단양재향군인회와 매포읍방위협의회는 매포읍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매포 읍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785 | 14-2-40 | (강화군)6.25참전유공자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인천광역시 강화군 | 강화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소 | 2004-03-02 |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민족 및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대에 귀감으로 삼고자 강화도 출신 참전 전우들의 뜻을 모아 6·25참전유공자회 강화군지회에서 2004년 3월 2일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786 | 43-2-56 | 남해 대간첩작전 추모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남도 남해군 | 8962부대 2대대 | 비석 | 기타 | 1980 | 기념비 높이 2m | 2007-12-04 | 남해 대간첩작전간 순직하신 故이종춘 소령님과 김태식 중사님, 김진경 일병님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787 | 43-2-57 | 통영 해상순직장병 위령탑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남도 통영시 | 해군교육사령부 | 탑 | 기타 | 1974 | 비석높이 6.5m | 2007-02-20 | 1974년 2월 22일 해군병 159기와 해경 11기 훈련병 등 316명을 태운 예인정이 훈련 후 복귀 중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인해 통영 장좌도 앞바다에 침몰함,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한 장병들의 숭곡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탑임 |
1788 | 30-2-58 | 월남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0-10-12 | 대구광역시 군위군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대구광역시지부 군위군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높이 4.1 | 2020-6-24 | 1960년대 청년들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지킨 군위 출신 월남전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정신과 충성심을 기리며, 나라의 소중함과 올바른 국가관을 지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함 |
1789 | 33-2-47 | 6·25전쟁 호국영웅탑(동지중고)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동지중·고총동문회 | 탑 | 6·25전쟁 | 1950 | 2015-09-18 |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이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놓이자 모교의 청년학도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학도병으로 참전하였습니다. 1950년 7월 9일 포항중앙초등학교에서 열린 포항지역 학도 의용군 환송식에 이어 대구농림중학교에 마련되었던 임시훈련소에 정식 입소한 것을 시작으로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에 걸친 전쟁기간동안 수시로 자원입대하거나 동원 혹은 영장 입대로 참전하였던 모교의 호국영웅들은 300여명에 달하였고, 이 중에서 끝내 교정으로 돌아오지 못한 순국영웅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넋을 추모하고, 후학들에게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받게 하기 위해 이 탑을 세웠습니다. | |
1790 | 25-2-61 | 충혼공원(옥천군) | 국가수호 | 2009-09-22 | 충청북도 옥천군 | 옥천군 | 장소 | 기타 | 1966 | 0 | 2009-06-06 | 옥천군 마암리에 6·25전쟁 및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충혼공원’을 건립하였다. 옥천군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6월 6일 충혼공원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옥천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옥천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791 | 52-2-24 | 6·25 참전 기념비(무주)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6-20 | 한국전쟁 참전자회 무주군지회는 2000년 6월 무주읍 당산리 지남공원(한풍루공원)에 치열한 혈전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무주군 출신 6.25참전용사 250명의 이름을 새긴 참전 기념비를 세워 이들의 공적을 선양하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다. |
1792 | 24-2-07 | 동락전승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충주시 | 충주시 | 장소 | 6·25전쟁 | 1950 | 기단 높이는 4.1m, 비신 높이는 4.1m | 1973-07-07 |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첫 승리를 거둔 동락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73년 7월 7일 세운 전승비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가섭산(가엽산) 기슭에 있으며 기단 높이는 4.1m, 비신 높이는 4.1m이다. 1950년 7월 7일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2대대는 충주와 음성 중간 지점의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고 있었는데 당시 인근 동락국민학교(현 동락초등학교,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에 북한군 연대병력이 집결하고, 수십 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때 동락초등학교 여교사 김재옥이 기지를 발휘해 국군이 철수하고 있다고 북한군을 안심시킨 후 국군 제2대대장에게 적의 상황을 상세히 제보했다. 이에 국군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차량 60대·장갑차 3대·소총 1,000정·박격포 35문·기관총 47정·포 12문 등의 장비를 노획하였으며, 적 800명을 사살하고 90여 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
1793 | 16-2-90 | 미육군공병부대전적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강원도 철원군 | (주)귀뚜라미랜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3-10-31 | 한국전쟁 시 미 육군 공병은 최선봉에서 적과 싸우며 기동부대의 전진로와 보급로를 건설하고, 후퇴 시에는 아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장애물을 설치하며 가장 늦게 전장을 떠나는 방패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한탄강 일대의 험준한 산악와 단애로 형성된 하천은 공병의 이무수행을 매우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전통에 빛나는 미 육군 공병부대는 성공적으로 모든 임무를 수행하여 공격부대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이 미 육군 공병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교량과 도로를 통해 수많은 피난민이 남에서 자유를 얻었고, 특히 전후에까지 그들은 우리에게 장비와 기술을 제공하여 한국의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한탄강 일대의 험준한 지형에서 작전에 참가했던 미 육군 공병부대 용사들을 기리며 이 기념비를 세운다. | |
1794 | 15-2-110 | 故 중위 강현경 추모비 | 국가수호 | 2016-11-23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육군3사관학교 제3기 동기회(한상구) | 비석 | 기타 | 1971 | 0 | 1971-12-01 | 보병 제30사단 제91전투단 소대장으로 1971년 8월 27일 문산지역에 침투한 무장공비 4명 중 3명을 사살하고 임진강 하구에 위치한 거북고지 인근에서 잔비추격작전을 전개하다가 소대원 故병장 차성희와 함께 전투현장에서 전사하였다. 이렇듯 나라를 위하여 희생한 故육군중위 강현경을 추모하고자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795 | 31-2-40 | 6.25 전쟁영웅 박동진 중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17-04-19 | 경상북도 문경시 | 유곡동재산관리위원회 | 비석 | 6·25전쟁 | 0 | 2017-01-05 | 박동진(朴東鎭) 중사는 밀양박씨 강수공파 72세 손으로 1930년 1월 28일 문경시 유곡동 263번지에서 부 박재무(朴在茂)공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9년 1월 해군 신병 12기로 입대하여 해군 일등병조로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작전에 분대장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괴의 6.25 불법남침으로 낙동강 방어전선 까지 밀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50년 9월 15일 세기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로써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승승장구 북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수집과 도서확보를 목적으로 한국해동기동함대 (PC-701·702·704, YMS-513JMC- 301·307·309·313함) 승조장병으로 구성된 상륙부대(육전대)를 편성하여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작전(작전명:李작전)을 전개하였다. 박동진 중사는 JMC-301 함에서 차출된 육전대 1소대 1분대장으로 1950년 8월 18일 유엔군 함정과 PC-702·704 함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였다. 박동진 분대장은 산악고지로 도주하던 적 26명을 사살하고 7명을 포획하는등 격전 끝에 덕적도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8월 20일 인천상륙작전의 중요한 거점인 영흥도 탈환작전에 참가한 박동진 분대장은 북한군과 치열한 작전을 전개하여 적 2명을 나포하고 아 육군 4명을 구출 한 후 진격을 계속하였다. 진격도중 내리2구를 탈출한 적 15명이 내리 남방고지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박동진 중사가 소속된 1소대가 고지공격을 하자 적은 고지를 포기하고 해안선의 농가로 도주 잠입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1분대장 박동진 중사는 분대의 전진을 멈추게 한 후 양손에 수류탄을 가지고 단독으로 농가 3미터 까지 포복으로 접근하여 1발을 적진에 투척하였으나 적의 저항이 계속되자 적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 2번째 수류탄을 투척하고 엎드리는 순간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박동진 분대장의 용맹과 분투를 지켜보던 전 분대원들은 분기충천하여 돌격을 감행 적을 격멸하고 영흥도를 완전히 탈환함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고 상륙기동부대의 안전운항을 확보하여 9월 15일 전개된 UN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정부는 1951년 2월 5일 충무무공훈장을 수훈하고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하였다. 2005년 5월 호국인물 선정(전쟁기념관). 2014년 4월 1일 박동진함(해군 최첨단 유도탄 고속함.PKG) 취역식(진해 군항) 및 문경시와 자매결연. 2016년 8월 ‘6.25 전쟁영웅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 이달의 호국영웅 선정(국가보훈처) 되었다. 이에 박동진 중사의 친족 및 유곡동민들이 ‘6.25전쟁영웅박동진중사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토지를 제공하고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고향마을 문경시 유곡동 한절골에 장렬하게 전사하신 위국헌신(爲國獻身)의 높은 뜻을 선양하고 통일 안보 의식을 더욱 높이고자 삼가 기념비를 세우다. | |
1796 | 40-2-24 |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11-23 | 부산광역시 남구 | 부산광역시 남구청 | 비석 | 6·25전쟁 | 2005-09-13 | 6.25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UN군의 영령이 안치된 세계에서 하나뿐인 UN기념공원과 평화공원이 연결되어 있는 이곳에 6.25참전기념비를 건림함으로써 평화와 자유의 상징으로 부각시켜 관광명소로 가꾸고 6.25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함양을 위해 건립(남구지역 출신 6.25참전용사 1,049명이 명각되어 있음) | ||
1797 | 42-2-68 | 함안호국공원 | 국가수호 | 2016-11-23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공원 | 기타 | 0 | 2016-06-27 | 6ㆍ25전쟁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신보국정신으로 나라를 지킨 용사들과 월남전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새기기 위해 6ㆍ25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의 최후의 보루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서북산과 여항산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호국공원을 조성 | |
1798 | 40-2-25 | 6.25참전UN군활동기념조형물 | 국가수호 | 2016-11-23 | 부산광역시 남구 | 부산광역시 남구청 | 조형물 | 6·25전쟁 | 2014-12-08 | 6.25전쟁 시 세계평화를 위해 희생한 UN참전용사의 공훈을 기리고 UN참전국에 대한 보훈의 뜻을 기림 UN평화문화특구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조성하여 UN기념공원, 평화기념관과 연계한 평화,문화체험 기반 조성 | ||
1799 | 40-2-26 | LST 문산호 전사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7-04-19 | 부산광역시 영도구 | 해군작전사 부산기지전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135*60*145 | 2016-09-14 |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11명의 문산호 선장 및 선원들의 공헌과 희생정신을 기림 |
1800 | 11-1-44 | 함석헌 기념관 | 독립운동 | 2020-10-12 | 서울특별시 도봉구 | 도봉문화재단 | 기념관 | 문화운동 | 지하1층 / 지상1층 | 2015-9-3 | 함석헌 기념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권 운동가로 '씨알의소리'를 창간하고 독립운동가, 시인, 교육자, 언론인, 역사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함석헌 선생(1901-1989)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도봉구 쌍문동 집을 보존, 리모델링하여 작은 기념관 형식으로 건립한 것이다. 함석헌 기념관은 선생의 유품 전시, 발자취, 동영상 상영 등 전시실로 구성하였으며, 창고로 사용하였던 지하1층은 세미나실, 도서열람실, 게스트룸 등 주민 활용공간으로 구성하였다. 그 외에도 주민 공간으로 유리온실과 앞마당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
1801 | 18-2-27 | 월남참전 국가유공자 기념탑 | 국가수호 | 2016-11-23 | 경기도 여주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여주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0 | 2011-06-11 | 월남전쟁에 참전한 젊은 용사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
1802 | 51-2-36 | 故 문광욱 일병 추모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북도 군산시 | 전몰군경유족회 군산시지회 | 동상 | 기타 | 2016-11-16 | 고 문광욱 일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널리 기억하고 시민들의 호국정신 함양 고취 | ||
1803 | 33-2-53 | 故 이기태 경감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경상북도 경주시 | 경북경주 경우회 | 동상 | 기타 | 2016-05-19 | 2015년 10월 21일 11:30경 경찰 창설70주년을 맞은 경찰의 날에 울산시 북구 신천동 동해남부선 철로에 누워 있던 장애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열차가 달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채 마지막 순간까지 구조의 손을 놓지 않고 화물열차와 충돌하여 순직한 故 이기태 경감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음 | ||
1804 | 51-2-34 | 군산상업고등학교 6.25전쟁 참전 호국영웅 추모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상업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2016-12-21 | 6.25전쟁 당시 군산지역은 약 1,000여 명의 학도의용군이 참전하여 230여 명의 학도병이 전사한 지역으로 군산상업고등학교는 군산중, 고등학교(97명)과 더불어 많은 학도병 참전자가 전사하였다. 추모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가 위험에 처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군산상고 출신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고자 건립되었다. | ||
1805 | 24-2-37 | 증평군 월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7-11-23 | 충청북도 증평군 | 월남전참전자회 증평군지회 | 탑 | 월남참전 | 0 | 2003-10-01 | 이 기념탑은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1964~1973)에 참전한 증평군 내 157명 참전용사들의 공적과 고귀한 뜻을 기리고 추모해 지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국민들과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정신과 호국정신을 함양시키고자 2003년 10월에 건립되었다. | |
1806 | 24-2-36 | 매포지전투지 | 국가수호 | 2017-11-23 | 충청북도 단양군 | 매포초등학교 | 장소 | 6·25전쟁 | 제1대대장 박치옥 소령은 정찰대로부터 북한군 제12사단의 지휘소가 매포초등학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동·북서쪽에 있는 267고지·265고지·257고지에 적의 경계병력이 분산 배치되어 지휘소 경계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고, 5시를 기해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18포병대대의 교란사격을 지원받는 가운데, 제2중대의 특공대가 267고지의 북한군 매복조 1개분대를 섬멸하자 대대주력은 267고지로 진출하고, 제2중대가 개활지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또한 제1중대가 웃말의 329고지 동쪽 능선으로 신속하게 기동하여 급습하자, 북한군은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작전으로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는 적 100여 명 살상, 3대의 장갑차와 10문의 소구경포, 3대의 트럭 파괴 등의 전과를 올렸다. | |||
1807 | 18-2-30 | 안성시 전몰군경 합동 위령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경기도 안성시 | 경기동부보훈지청 | 비석 | 6·25전쟁 | - | 1980-06-06 | 조국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목숨을 바쳐 싸우시다 돌아가신 호국영령들이시여! 임들의 높고 높으신 충절의 큰 뜻 임들의 거룩하신 희생이 오늘의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기에 스물다섯 번째 현충일을 맞아 안성읍 도기동, 공도면 만정리, 미양면 양지리에 산재한 영령들을 군민의 뜻을 모아 한자리에 안식처를 마련하였으니 고이 잠드소서 길이 평안함을 누리소서 1980년 6월 6일 안성군수 | |
1808 | 15-2-113 | 순직 경찰관 추도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경기도 양주시 | 경기양주 경우회 | 비석 | 기타 | 1961 | 0 | 1983-11-15 | 1961년 10월 23일 대간첩 작전 중 폭발물을 제거하다가 순직하거나 중상을 입은 4명의 경찰관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21일에 이 비를 건립하였고, 그들의 이름과 당시 상황을 이 추모비에 새겨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자 한다. |
1809 | 53-2-35 | 박정모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남도 신안군 | 도초면 | 동상 | 6·25전쟁 | 60cmx50cmx180 | 2014-03-12 | 6.25전쟁 중 공로를 세운 박정모(1927~2010) 대령을 추모,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박정모 대령은 신안군 도초면 출신으로 1950년 해군 소위로 임관해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9월 27일 오전 6시경 6.25전쟁 발발 89일 만에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중앙청을 탈환한 공로를 세워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 |
1810 | 33-2-51 |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체험권) | 국가수호 | 2017-04-19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시 | 공원 | 6·25전쟁 | 1950 | 0 | 2017-03-21 | 영천전투에서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참전용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전시, 체험장 등을 조성한 공원이다. 영천전투는 국군 제 8사단이 1950년 9월 6일부터 9월 8일까지 북한군 제15사단과 빼았고 빼았기는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 전투이다. |
1811 | 41-2-20 | 충혼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울산광역시 동구 | 제7765부대 | 비석 | 기타 | 1971 | 1971-01-05 | 1971년 1월 5일 울산 특정지역 방어임무 중 순직한 3명의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그들의 뜻을 받들어 조국 수호 및 통일 생업 임무를 다하고자 7765부대 방어진 중대 내에 건립하였으며, 순직한 3명은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었음. | |
1812 | 53-1-23 | 장홍염 흉상 | 독립운동 | 2017-11-23 | 전라남도 신안군 | 장산면 | 동상 | 학생운동 | 60x50x180cm | 2014-02-26 | 독립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선 장홍염(1910~1990)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재조명하고 후세에 선생의 애국정신을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장홍염 선생은 신안군 장산면에서 태어나 서울휘문고등보통학교에 수학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경성의 각 학교 대표들과 회합하여 1930년 1월 15일 9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할 것을 결의하는 등 광주학생만세운동을 전국 규모로 확산하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같은 해 3월 엿장수로 가장하여 중국으로 망명, 신채호, 이회영 선생 등과 깊은 유대를 갖고 무력항일투쟁에 헌신하는 한편 국내에 여러 차례 잠입, 수많은 애국지사를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1933년 북격에서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후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에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동지들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아 광주학색운동관련 부분만 혐의를 씌워 3년 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뜻을 기려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813 | 16-2-96 | 흥업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흥업면 | 비석 | 6·25전쟁 | - | 2017-06-01 | 나라가 6․25 전란으로 어려울 때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길이 보전하고자, 흥업면민의 뜻으로 기념비를 세움 | |
1814 | 43-1-67 | 함양 백용성 선사 화과원 유허지 | 독립운동 | 2017-11-23 | 경상남도 함양군 | 정덕해(법명 혜원) | 장소 | 3·1운동 | 봉유대, 법당터, 선불장터, 가마터1기, 망루 1터, 지하저장고 2기 등 | 1927 | 화과원은 3·1독립만세운동 불교계 대표이자 독립유공가이신 백용성선사가 항일민족운동과 불교개혁운동을 실천한 주요 거점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중국 용정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임 | |
1815 | 14-2-44 |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해역방어사령부 | 조형물 | 6·25전쟁 | 1951 | 2017-11-15 | 6.25전쟁 전세역전에 크게 기여한 해군 및 해병대의 단독작전으로 감행된 제2차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들의 전공 선양 | |
1816 | 26-1-17 | 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7-11-23 | 충청남도 아산시 | 광복회 아산시지회 | 탑 | 3·1운동 | 0 | 2005-03-01 | 1919년 4월 4일 최병수, 정규희(수길), 임천근, 서몽조, 김천봉, 오상근 등 600여명의 주민들이 아산 선장장터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로 행진 해 파괴하는 등 시위운동을 전개한 아산 선장 4.4기미독립만세운동과 1938년 천도도교의 멸왜기도 운동에 천도교 지도자 6명이 참여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무인멸왜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 8월 15일 이 탑을 건립함 | |
1817 | 43-2-58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 국가수호 | 2018-05-10 | 경상남도 통영시 | 해병대통영시전우회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2층 | 2011-04-15 |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성공한 최초의 상륙작전으로 '귀신잡는 해병'이란 말을 탄생시킨 '통영상륙작전'을 기리는 기념관 |
1818 | 10-2-22 | 경찰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17-09-28 | 서울특별시 중구 | (재)경찰위로복지기금 | 장소 | 기타 | 2016-06-06 | 전사ㆍ순직경찰관들의 고귀한 희생을 널리 알리고 호국경찰에 대한 사회적 존중 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해 1945년 경찰 창설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사ㆍ순직한 全 경찰관을 기리는 경찰기념공원을 조성 | ||
1819 | 51-2-37 | 육군대령 강병식 추모 동상 | 국가수호 | 2018-05-10 | 전라북도 익산시 | 이리고등학교 | 동상 | 기타 | 1988 | 0 | 1989-05-04 | 강병식 대령은 1988년 5월 4일, 지뢰 매설 작업을 지휘하다 지뢰가 폭발하려 하자 부하들을 급히 엎드리게 하고 지뢰 위에 본인의 몸을 던져 휘하 장병 14명의 목숨을 구하고 순직하였다. |
1820 | 30-2-54 | 한.미 우정의 공원 | 국가수호 | 2018-05-10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 장소 | 6·25전쟁 | 1950 | 2017-09-22 | 칠곡군 왜관읍 자고산 일대는 6.25전쟁 당시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지구 전투의 최대 격전지이자, 경부선철도와 낙동강 교량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 요충지였다. 자고산의 여러 전적지 중 303고지는 전쟁초기인 1950년 8월 17일 제5연대 제2대대 소속 미군병사 45명이 북한군을 아군으로 오인하여 포로가 되어 42명이 군화줄에 손이 묶인 채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오직 3명만이 전우들의 시체에 깔려 구사일생으로 생존하는 비인도적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다. | |
1821 | 26-2-19 | 참전기념비(천안) | 국가수호 | 2018-05-10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시설관리공단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0 | 2004-09-23 | 나라 안팎에서 혁혁한 전투로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수호하고 대한의 명예를 세계에 널리 선양한 천안시 거주하는 6.25참전 및 월남참전용사 3,811명을 조사하여 삼남으로 가는 길목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분들의 이름을 새김 |
1822 | 15-1-32 | 묘골애오와 공원 | 독립운동 | 2017-11-23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0 | 2017-01-31 | 독립을 위해 세계적으로 활동한 여운형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조형물 조성, 몽양 여운형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공간을 마련했다. | |
1823 | 55-2-11 | 충혼탑(풍양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풍양면 | 탑 | 6·25전쟁 | 1950 | 탚탑높이 3m | 1995-06-20 | 풍양면 상림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풍양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풍양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5년 6월 2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풍양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풍양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24 | 23-1-54 | 천도교서산종리원(서산교구) | 독립운동 | 2019-4-26 | 충청남도 서산시 | 천도교 서산 종리원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1907-5-19 |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한 서산 천도교인 | ||
1825 | 17-1-013 | 애국지사 김동호 사당 | 독립운동 | 2019-4-26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노곡면) | 사당 | 애국계몽운동 | 0 | 2004 | 애국지사 김동호는 강원 삼척 사람이다. 그는 1910년대 국내의 대표적 혁명단체였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했다.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1915년에 7월 대구(大邱)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군자금을 조달하여 국내의 혁명기지를 확보하는 한편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함으로써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관한 포고문을 발송했는데, 이때 그는 강원도 지역의 자산가들을 조사하여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강원도지역의 활동을 주관했다. 1918년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붙잡힌 그는 고초를 치르다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동호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광복단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척결 등에 앞장선 애국지사의 숭고한 독립운동 사상을 고양하고자 사당을 건립하였다. | |
1826 | 23-1-53 | 녹도포구 항일의병 전적비 | 독립운동 | 2019-4-26 | 충청남도 보령시 | 녹도1리 마을회장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07 | 2017-11-16 | 녹도 포구 항일 의병 활동 | |
1827 | 16-2-106 | 춘천사범학교 6·25학도병 참전기념추도비 | 국가수호 | 2019-4-26 | 강원도 춘천시 | 춘천교육대학교 총동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9-6-25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당시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은 조국을 수호하고 자유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책과 연필 대신 총과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섰다. 개전 초기 춘천사범 학생들의 자발적인 협력에 힘입어 3일간 춘천 방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국군은 한강 이남 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적 심리적 여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3년 여의 전쟁기간 중 많은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마침내 조국 보위의 대의를 이루어 냈다. 또한 정전 후에는 교육계와 다른 분야에 종사하면서 조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에 한국전쟁 참전 학도병의 충성된 마음과 조국통일의 염원을 기리며, 이 조형물을 세운다. | |
1828 | 16-2-93 | 귀래 6.25참전용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비석 | 6·25전쟁 | - | 2001-12-02 | 6․25 전쟁당시 나라를 위해 몸바쳐 싸우신 귀래면 참전용사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안보의식을 고취하여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 | |
1829 | 11-2-7 | 故정종수경사 흉상 및 순직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종로경찰서 | 동상 | 기타 | 1968 | - | 1982-12-03 | 정종수 경사는 1935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60년 경찰에 투신하여 종로경찰서 재직 중이던 1968년 1.21 사태 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 중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경사로 추서하고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순직비는 서울종로 서울종로경찰서 직원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으며 2017년 6월 5일 흉상이 추가로 제작되어 순직비와 함께 현충시설로 재지정되었다. |
1830 | 12-2-20 | 서울공고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서울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8 | 2016-07-19 | 서울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학도병과 국군으로 입대해 1950년 6월 27일 새벽에 한강인도교가 폭파되고 북파의 남침을 막아냈어 대한민국을 지켰다. 학생신분이었음에도 전쟁에 참전하신 서울공업고등학교 출신의 핟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보훈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
1831 | 43-1-68 | 독립만세 100주년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경상남도 사천시 | 사천초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9-3-21 | 1919년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사천초등학교) 졸업식 날 재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친선 축구 경기를 하면서 첫 골이 터지자 이윤조학생 등이 주동하여 가슴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일제히 꺼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본 헌병대의 총칼앞에 저항하며 교문을 박차고 나가 읍민과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한 전국 최초의 재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민족정신을 드높인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
1832 | 16-2-95 | 육군 소령 심일 동상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동상 | 6·25전쟁 | 1951 | 2006-06-06 | 심일소령의 부친인 고(故) 청파 심기연 선생께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 1964년 사유임야 1만평과 건립기금기탁으로 현충탑을 건립하게 되었으며, 백척간두에 풍전등화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용전분투하다 전사한 심일 소령의 넋을 기리고자 추모 동상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 | |
1833 | 16-2-102 | 옹진지구 전투 위령탑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인제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09-12 | 1950.6.25.~6.27. 한국전쟁 개전 초기 적군은 옹진반도내 아군을 해상 철수전에 내력에서 포착 섬멸하기 위해 제14연대를 주공, 제3경비여단을 조공으로 공격하였으며 아군은 좌일선에 제1대대, 우일선에 제3대대, 제2대대를 예비로하여 해주방면에서 강령과 양원에 이르는 도로에 방어중점을 두고 방어하였다. 연대장(대령 백인엽)은 야간에 공차를 이용한 양동작전으로 성공적인 해상철수를 보장하였으며 차기작전에 참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옹진전투에 참전한 부대와 군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834 | 33-2-57 | 해병대 충혼탑 | 국가수호 | 2019-4-26 | 경상북도 포항시 | 해병대 교육훈련단 | 탑 | 6·25전쟁 | 2015-12-31 |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이래 6.25전쟁, 월남전, 대침투작전 및 연평도 포격전에서 국토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왔다. 이에 해병들의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정신과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그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함 | ||
1835 | 20-1-21 |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금산읍장 | 비석 | 기타 | 1997 | 0 | 1997-09-01 | 금산 출신의 애국지사 25인의 추모비. 금산 출신의 애국지사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국 항일의병에 참여한 이들과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자 이에 통분하여 자결한 이,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갈 때, 3일 23일 금산장터 3·1독립운동에도 많은 애국자사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한편 금산 출신자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여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등 각 계층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97년 9월 1일, 금산군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서훈 및 표창을 받은 금산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836 | 55-2-12 | 현충탑(과역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과역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 1997-06-05 | 고흥 과역리에 3·1운동과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68위의 과역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과역면)’을 건립하였다. 과역면은 이곳 출신 백남 이병채 등 순국선열과 송재만 상병 등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6월 5일 준공하였다. 3·1운동과 6·25전쟁 기간 과역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기 위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과역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37 | 24-2-20 | 순국 충혼비(제천)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제천시 | 운학2리이장 추연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9-06-25 |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참전 전사한 동료 김학기, 홍낙범, 장기천, 윤원, 진하중의 순직을 기리고자 1970년 3월 시멘트로 된, 규모가 작은 순국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이 충혼비의 노후화와 미관상 이유로 재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9년 6월 25일 제천군과, 운학2리에 남아 있던 훈련소 및 군복무 동기생들이 충북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 450에 다시 돌로 제작해 건립하였다. |
1838 | 43-1-20 | 이동서당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산청군 | 곽진구 | 사당 | 민족주의운동 | 1846 | 1920-11-01 | 면우 곽종석 선생은 1846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에서 출생,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을사오적의 참수를 상소했고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가 열렸을 때 한국유림 137인의 대표로서 파리장서라는 한국독립청원서를 기초하고 이를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전달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 파리장서의거로 일본경찰에 구금, 투옥됐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1919년 8월 24일 거창군 가북면 다전 여재에서 별세했다. 이동서당(尼東書堂)은 면우 곽종석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과 제자들이 1920년 설립한 서당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동서당 앞뜰에 1984년 면우 곽선생 유허비가 건립됐고, 1991년 서당 뒤쪽에 사우가 건립됐다. 또한 2003년에는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안내판 설치와 주변정리를 마무리함으로써 나라사랑 체험학습의 장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 |
1839 | 15-1-36 | 파주 교하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4-26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3·1운동 | 1919 | 2019-3-4 | 1919년 3월 10일 파주 최초의 만세시위 근원지였던 교하공립 보통학교(현 교하초)내 건립, 파주지역 대대적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친 임명애,염규호 지사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파주시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공헌을 후세에 널리 기리기 위함 | |
1840 | 24-2-03 | 괴산군보훈공원 | 국가수호 | 2013-05-13 | 충청북도 괴산군 | 괴산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2012-12-01 | 괴산군은 2012년 12월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188-5번지에 보훈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에 기존의 낡은 충혼탑과 충열탑을 새로 건립하고 여러 곳에 나누어진 6, 25참전공적비, 무공수훈자 공적비, 베트남 참전탑 등 충혼 관련 시설을 이곳에 모아 놓았다. 새 충혼탑에는 구국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1, 759위의 넋을 기려 그 이름을 새겨놓았고, 충열탑은 괴산지역 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65위의 넋을 기리며 민족정기를 되살려 후손에게 호국보훈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했다. 보훈공원은 후손에게 나라사랑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군민들에게 호국안보 성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841 | 31-1-26 | 순국열사 밀성박공회산 휘시목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박종혁(증손) | 비석 | 3·1운동 | 1894 | 0 | 2001-12-10 | 박시목은 1894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1920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북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2월 동회의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출되어 민족정신 고취 내용의 격문 등을 살포하며 활동하였다. 1930년 대구 근교 팔공산에서 광선 경영을 위장하여 박영덕·이상훈·심재윤·노석호·김인 등 애국지사를 규합하였으며, 청년동지들을 중국 옌안으로 밀파하여 독립군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는 종교계와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의 무력항쟁 및 중국의 한국광복군과 합세하여 대일 선전포고 등을 계획하던 중 아들 박희규를 포함한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북경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아들과 함께 옥중 순국하였다. |
1842 | 53-2-12 | 충혼비(하의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하의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1.4x2.4x2.7m | 1959-01-01 | 한국전쟁 및 월남전에 희생된 하의면 출신 호국용사 추모 |
1843 | 53-2-15 | 충혼탑(암태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신안군 | 암태면장 | 탑 | 기타 | 1996 | 0 | 1996-01-01 | 암태면 단고리에 1962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암태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암태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2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암태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암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44 | 42-1-12 | 독립지사 면산 김선오공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형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7-04-01 | 김선오는 경상남도 김해 사람으로, 1919년 4월 12일의 장유면 무계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4월 12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장터에 모여들어 시위 군중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날 그도 장터에서 시위대열의 일원으로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군경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하였으며, 그는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1845 | 31-1-03 | 기미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비안면사무소 | 탑 | 3·1운동 | 1919 | 2002-12-22 | 의성 비안 3·1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현 이두초등비안분교)에서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으며,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펼쳐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당시 급장이던 우희근, 박기근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11일 비안 장날을 계기로 봉기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 150명의 학생이 학교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시작되었다. 의성군 비안면이 도내 3·1만세운동의 효시로 확인되자,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가 2002년 12월 22일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산 5-3번지(비안분교 뒷산)에 기미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였고 이후 해마다 비안면민들이 3·1운동 재현행사를 실시해오고 있다. | |
1846 | 40-1-07 | 남강 조정환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75 | 1992-10-05 | 경남 김해 출신 독립운동가인 조정환 선생의 상이다. 조정환은 호가 남강으로 김해시 강서구 녹산동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일제에게 한국이 강점된 후에는 개혁자강과 실력양성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고, 그 후 조병준, 변창근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여 자의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9월 15일에는 서울에서 백남훈·홍성하·박승철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847 | 52-2-04 | 지리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시장 | 비석 | 기타 | 1948 | 1979-11-23 | 여기 삼남의 지붕에 공산비적이 반거하게 된 것은 1950년 낙동강 선까지 남침했던 북괴군이 우리의 총 반격에 다시 쫓기어 가게되자, 그 일부가 지방공비와 합류하여 이곳에 숨어들게 됨으로부터이다. 당시 이들 적도의 세는 2만에 달하였는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하여 도량하되, 그 지역이 동으로는 의령, 서로는 고창, 남으로는 보성, 북으로는 금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양민의 학살과 납치, 재물의 약탈과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적기가 나부끼는 양상이 되었다. 이에, 그해 말부터 이곳 남원을 중심으로, 국군 6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 그리고 6개 독립대대 및 전투경찰 4개 연대와 7개 독립대대, 그리고 11개 경찰서의 의용경찰과 대한청년단 특공대 등이 힘을 모아 이들을 함께 무찔러, 1952년을 고비로 그 세를 꺽고, 1954년에는 조직의 뿌리를 잘라 드디어 이를 초멸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그때 이 평정이 이루어지지 못횄더라면, 어찌 오늘 이곳 곡창에서 격양가가 메아리 칠 수 있었겠는가? 다시금 고개숙여 그날의 충혼을 기린다. | |
1848 | 30-1-36 | 백농 김재열선생 현창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0 | 1992-11-01 | 김재열은 본관이 김녕으로, 지금의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에서 태어났다. 김재열은 홍와 이두훈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상경하여 경신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5년 정월 15일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에 들어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정보 연락 및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에 충원하려는 청·장년의 모집에 힘썼다. 1915년 7월 15일 박상진·채기중·우재룡 등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조직하고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지원과 독립군 양성, 그리고 무력 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재열은 1916년 9월 3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 그리고 대구의 최병규·최준명·김진만·김진우 등과 서우순의 금고를 털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었다. 그 후 1917년 11월 10일 장승원 암살 사건과 1918년 1월 24일 박용하 암살 사건으로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남에 따라 천안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4개월 만에 풀려났다. | |
1849 | 52-2-01 | 충혼탑(운봉읍)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남원시 | 운봉읍장 | 탑 | 기타 | 1954 | 0 | 1954-08-15 | 운봉읍 서천리에 여순사건과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120위의 순국선열과 국군 및 경찰의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운봉지서 양기철 경위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4년 8월 15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57년 서천리로 이전하였다. 운봉읍은 충혼탑을 1993년 12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운봉 읍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운봉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50 | 20-1-27 | 순국지사 유기섭 기적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05 | 0 | 1975-03-01 | 유기섭은 1905년 부여출신으로 조선일보 부여지국 기자와 부여청년회 문예부장을 지냈으며 대왕의숙을 개설 남녀 아동에게 한글을 교육시키고 항일 민족의식을 고위하는데 힘썼다. 강성구 등의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화성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중앙일보 부여지국의 총무 겸 기자로 근무하였다. 1931년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야학을 개설하고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들은 또한 1933년 7월 부락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고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동년 8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피체된 지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5월 21일 공주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그를 추모하고 그의 뜻을 후손에게 전하고자 이 지방 뜻있는 유사들이 정성을 모아 비를 세웠다. |
1851 | 30-1-37 | 영주 김상덕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해외운동 | 1891 | 1992-11-01 | 김상덕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저전리에서 태어났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와 1915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면서 조선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19년 2월 조선독립청년단의 2·8독립선언의 대표로 「민족대표소집청원서」와 결의문을 발표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20년 2월 출옥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고 국민대표회의 경북대표, 상해청년동맹 집행위원, 한족노동당 조직, 정의부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김상덕은 이청천·김동삼·김원식 등과 정의부를 탈퇴하여 전민족유일당촉성회에 가담하였고 1930년 7월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참모로서 랴오닝성 통화와 지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신한독립당의 중앙청년부장, 1935년 4월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및 서기부원, 1940년 조선민족혁명당 소속군 조선의용대의 본부 편집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43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 1943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화부 부장 등으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 |
1852 | 40-1-06 | 이수강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 동상 | 의열투쟁 | 1912 | 0 | 1992-10-01 | 1930~40년대 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가덕인 청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식을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을 하신 이수강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 |
1853 | 52-2-31 | 충혼비(전주고)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고등학교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1-09-01 | 전주고등학교 교정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학교 출신 학생 38명과 교직원 10명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당시 전주북중학교에서는 모교 출신 강성수, 안상렬, 고정표, 기우동 등 학생과 최진기, 주영철 등의 교직원의 숭고한 애국열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우러러 받들고자 1951년 9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당시 전주북중학교 학생들은 조국의 통일과 자유를 위하여 400여 명이 책과 붓 대신에 총칼을 들고 출전하여 안강, 포항, 38선 전투에서 역전분투했지만 불행히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 교직원들은 북한군의 점령 아래 학살되었다. 전주고등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54 | 53-2-07 | 충혼의 얼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안좌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탑 등 | 1990-12-20 | 신안군 대척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했거나 무공을 세운 안좌면 출신 유공자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혼의 얼’ 탑을 건립하였다. 신안군은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전사한 김길산, 김남섭, 최내옥 등을 비롯하여 강호순, 최영철 등 수훈자, 문정호, 한용삼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2년 4월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안군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백마고지, 도솔산, 철의 삼각지, 저격능선 등의 피뿌린 전선에서 조국을 지키다 총알받이 되고 부상을 당하였다. |
1855 | 52-2-10 | 순국 반공청년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1-28 | 전라북도 무주군 | 부남면장 | 비석 | 기타 | 1950 | 0 | 1972-04-01 | 1949년 음력 10월 보름 무주와 진안의 남로당원 20여 명이 대티마을을 기습하여 주민들을 분교에 집결시키고 주민들 앞에서 11명의 반공청년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6·25 당시 부남면 일원에서 활동하던 반공청년단원 14명이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순국한 반공청년 25위의 영령을 추모하고 반공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유족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1972 4월 1일 전북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대티마을 입구에 반공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1856 | 52-2-13 | 충혼탑(진안군)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용담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6-01-01 | 진안군 용담면 망향의 동산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116위의 용담면 출신 군경 및 주민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수복동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6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용담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용담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57 | 30-1-33 | 해영 신철휴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의열투쟁 | 1898 | 1983-05-10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을 결성에 참여했으며 의열단 1차 목표인 밀양경찰서 폭파 계획에 앞장서다 체포되었다. 출옥 후, 신간회(新幹會) 고령지부장, 《조선중앙일보》 지국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 |
1858 | 30-1-25 | 장암리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북도 상주시 | 장암2리노인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85-05-01 | 상주 장암리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어 가는 가운데 1919년 4월에 들어와 화북면 장암리 이장 이성범은 김재갑, 홍종흠 등 면민들과 의논하여 만세운동 권고문과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4월 4일부터 인근 마을 여러 곳에 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4월 8일에 신일서숙에 모였다. 오후 2시쯤 속리산 문장대를 향하여 행진하며 태극기 2개를 세워놓고 각 마을에서 올라온 70여 명이 합세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성범, 김재갑, 이용희 등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5년 5월 1일 상수시에서는 장암리 3·1독립운동이 시작된 신일서숙 터에 기념비를 세워 장암리 주민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1859 | 52-2-03 | 충혼비(이백면)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남원시 | 유족회장 | 비석 | 기타 | 1953 | 0 | 1978-04-15 | 6·25전쟁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과 젊음을 바쳐 산화한 이 고장 출신의 군인 35위, 경찰 9위, 의용군 7위 등 51위의 명복을 빌고 이들의 넋과 얼을 받들고자 함 |
1860 | 20-1-23 | 군수 홍범식 순절비 | 독립운동 | 2003-12-08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71 | 0 | 1949-10-01 | 일본의 한국 병합에 항의의 표시로 자결순국한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의 순절을 기려 1949년 12월 10일 금산군에서 건립한 비이다. 홍범식은 1871년 7월 23일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 혜민서 참사를 역임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에 임명되어 군민을 위하여 활동하던 중 1910년 일제에 의하여 나라가 강점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 비는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한 홍범식 선생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이곳 조종산에 올라 북향사배하고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에 명주수건으로 목을 매어 순절한 홍범식 군수의 위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1949년 금산읍 중앙지에 세웠다가 1976년 남산으로 다시 옮겨 세웠으며 2008년 순절지인 조종산 부근 상옥리 산46-1번지에 홍범식공원을 조성한 후 순절비와 순절지비를 옮겨 세웠다. 한일합병 때 우리나라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으나 정충대절의 절개를 지킨 군수는 금산군수 홍범식 한 사람뿐이었다 |
1861 | 52-2-25 | 월남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남원시 | 베트남참전전우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1998-10-31 | 남원 교룡산성 공원 내에 1998년 남원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 153명을 기리기 위해 ‘통영시 월남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전우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8년 10월 31일 기념비를 세웠다. 베트남전쟁 기간 남원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862 | 10-1-27 | 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 | 독립운동 | 2013-07-22 | 서울특별시 중구 | 정동제일감리교회 | 장소 | 3·1운동 | 1919 | - | 2013-07-22 | 3·1운동에 앞서 제2, 3회 학생단 간부회와 기독교계 대표자 회의가 열린 곳 |
1863 | 30-1-05 | 무호 박무조선생 표충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군위군 | 신영자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59 | 0 | 1996-04-01 | 표충비는 1996년 4월 경북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942-1에 박무조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박무조 선생(1859~1917)은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이화동 출신으로 호는 무호이며 박춘립 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한을 품고 살다가 호적령이 강제되자 취적(就籍)을 거부하고 1914∼1917년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을 이끌고 예안·풍기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17년 7월 20일 흥해읍 우목리 앞바다에서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빠져 죽는 이만 못하다. 조선일민(朝鮮逸民) 박능일(朴能一)"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 순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우목리 해변에도 선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1946년 건립된 “도해비(蹈海碑)”가 서 있다. |
1864 | 53-2-08 | 충혼탑(압해읍)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1.5m * 0.8m * 10.1m | 1996-06-05 | 신안 압해면 분매리에 199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신안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신안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5년 6월 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신안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65 | 26-1-09 | 유관순열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기념관 | 3·1운동 | 1902 | 0 | 1986-11-21 | 1919년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3년형을 선고 받은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상황에서도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랫동안 심한 고문에 시달린 유관순 열사는18세의 나이로 옥중에 순국하였다. 이러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자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청소년들의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1866 | 30-1-11 | 회당 장석영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장세민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51 | 1998-05-01 | 성주읍 3·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한 독립운동가 장석영 사적비. 1905년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장석영은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곽종석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유림들과 접촉하여 성주 3·1독립운동을 계획하면서 기독교측과 만나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4월 2일 성주 장날을 기해 일어난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8년 5월 1일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는 장석영의 독립운동 공적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1867 | 30-1-13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월곡역사박물관장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9 | 0 | 1997-10-10 |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는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피해실정을 밝힌 142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로써 곽종석이 글을 짓고 김복한 등 전국의 유림 137명이 연서한 문서이다. 김창숙이 주동하여 서울과 영남각지와 호남 동서부까지 연락하고 경비를 마련하여 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건너가 중국어, 영어로 번역하여 삼종의 장서를 김규식에게 맡겨 파리강화회의에 보내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중국의 언론기관과 일본에도 발송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온 세계에 공표하였다. |
1868 | 52-2-46 | 충령탑(장수군)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 장계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4-06-01 | 전북 장수군 장계명 명덕리 육십령고개 정상에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국군 56인을 추모하기 위해 장수군에서 1954년 6월 16일 탑을 건립하였다. 1954년 육군 제5사단이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에서 밀려온 공비 이현상 부대와 덕유산 주둔 제7839부대가 결전후 공비를 완전 섬멸하고 이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장병 신창석 소령 등 56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8389부대장 육군 대령 김동혁 이하 전장병이 자력으로 충영탑을 세웠으나 1991년 남산에 백화여고가 세워지면서 덕유산과 인접한 육십령고개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후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충영탑이 노후화되어 유족 및 일반국민들의 참배시설로서의 위상이 저하되었기에 장수군에서 2003년 11월 4일 새롭게 단장을 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 육군 소령 신창석 이하 55명은 덕유산지구 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고이 잠들다. |
1869 | 52-2-37 | 충혼 불멸탑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6-01-01 | 임실군 이도리에 1956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995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임실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6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임실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임실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70 | 52-2-17 | 대한의백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주천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8-10-01 | 유가족과 주민들이 1968년 10월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산9-1에 6·25전쟁 당시 진안군 주천면 출신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공비들과 대항하다 전사하거나 향토대원으로 치안 유지 활동을 하다가 희생당한 33명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대한의백’이라는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1871 | 52-2-09 | 충혼탑(무주군) | 국가수호 | 2003-01-28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0-10-01 | 무주군 지남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606위의 무주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무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을 1960년 10월 1일 준공하였으나, 2009년 4월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건립되었다. 6·25전쟁 기간 무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무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872 | 51-2-09 | 충령탑(익산시)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탑 | 6·25전쟁 | 1950 | 5M X 2.9M | 1982-06-25 | 익산시 팔봉동에 1982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령탑’을 건립하였다. 익산시는 이곳 출신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2년 6월 2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익산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익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73 | 30-1-22 | 민족정기 탑 | 독립운동 | 2003-09-22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월곡역사박물관장 | 탑 | 기타 | 1995 | 1995-05-21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열투쟁,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대구 민족정기탑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5월 21일 이 탑을 세웠다. | |
1874 | 52-2-015 | 충의혼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부귀면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77-11-01 | 6.25전쟁을 일으킨 공산당(빨치산)을 저지하고자 활동했던 과거 궁항리 마을 주민 및 참전용사 |
1875 | 26-1-01 | 유관순열사 봉화지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탑 | 3·1운동 | 1902 | - | 1977-07-20 | 유관순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연기(燕岐), 청주(淸州)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
1876 | 30-1-18 | 이상화 시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달성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문화운동 | 1901 | 1948-03-14 | 대구 출신의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비. 1919년 대구 고등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상화는 3월 8일의 대구 서문밖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3·1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주로 계성중학교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였다. 3월 18일 오후 3시 경, 시장정에서 시작된 대구 3·1독립운동은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만집의 만세선창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만세시위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 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이상화는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백조(白潮)』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개벽(開闢)』지 6월호에「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피체되어 2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1877 | 33-1-18 | 대장 정공 양세 순국기념 산남 의진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유족 정대영 | 비석 | 의병운동 | 1905 | 1963-01-01 | 경상북도가 1963년 3월 구한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산남의진을 일으켰던 정환직(1843~1907), 정용기(1862~1907) 의병장의 공훈을 추모하고 구국충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이 산남의진비를 건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직후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은 정환직 선생은 큰아들 정용기와 함께 1906년 3월 영천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산남의진을 일으켰다. 정용기 대장은 9월 1일 영일군 죽장면 입암에 포진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정용기 대장을 비롯하여 의진의 핵심부장과 의병 대다수가 전사하였다 아들의 순국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직접 의병장으로 나서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서울진공작전의 일환으로 의진을 관동지방으로 북상시키던 중 1907년 11월 청하면에서 일본군에게 피체되어 총살당하였다. | |
1878 | 51-2-12 | 충혼탑(군산시)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탑 | 6·25전쟁 | 1950 | 1.5M | 1964-06-06 | 유구한 민족사의 전통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구국의 성스러운 전열에 서서 꽃다운 나이에 산화하신 선열과 순국용사의 애국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
1879 | 51-2-14 | 충혼 불멸비(김제시)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김제시 | 광활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7-12-10 | 순국지사 8위와 한국전쟁시 전몰장병 35위 영령들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고자 건립 | |
1880 | 51-2-05 | 해병대군산·장항·이리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01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M X 18M | 1990-12-01 | 전북 군산시 금동 월명공원 내에 고길훈부대 전적 기념 및 해병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90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을 맞아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병대가 그 예하 고길훈부대를 군산·이리·장항지구 전투에 해병 역사상 최초로 출전시켜 서해안의 젖줄인 금강지역을 사수하고 많은 적을 격파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시발로 해병대는 낙동강전선의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귀신잡는 해병이란 신화를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6·25동란을 맞아 한국해병대가 처녀출전하였던 곳.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호국충정의 일념으로 뭉쳐진 우리 해병들이 남단 제주기지로부터 용약 출전하여 백절불굴의 해병혼으로 적과 맞서 싸웠던 이곳 군산·이리·장항지구 전투는 그 이후 6·25의 격전장 속에서 상승불패의 해병 전통을 수힙하게 하였던 최초의 전투가 되었다. 1950년 7월 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13연대가 그 여세를 몰아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부대(1개 대대 규모)는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방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의 금강선 진출을 저지 격파하였고,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하여 적의 남침을 저지시킴으로써 3·8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이들에게 전율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최초의 전투에서 적을 격멸할 수 있었던 거슨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몸바쳤던 선배 해병들의 피땀 어린 훈련과 이를 통해 얻어진 해병정신의 결과였으며, 이 전투는 곧 이 나라 해병들이 귀신잡는 해병, 무적 해병의 신화를 창조 계승해 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여기 살신보국의 충정으로 산화하신 고귀한 선배 해병들의 영령을 기리며 그들의 호국 의지는 군산·장항·이리지구의 시민은 물론 우리 온 겨레와 함께 길이 살아 빛날 것이다. |
1881 | 51-2-15 | 향토방위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부안군 | 9.28수복동지회(회장김규태) | 비석 | 6·25전쟁 | 1950 | 5m x 5m | 1991-02-25 | 6.25전쟁 당시 18세에서 26세의 젊은이들이 자비로 무기를 구입하여 적과 대치하다 산화한 이들의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건립 |
1882 | 52-2-23 | 충혼 불멸비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순창군 | 순창군수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9-11-10 | 순창군 장덕리 순창제일고등학교 내에 195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참전 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순창군은 김영순, 조병호, 설성우, 유만영 등 이곳 출신 전몰군경과 민간인들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9년 11월 10일 충혼비를 세웠다. 이후 1971년 6월 6일 현충문을 건립했다. 6·25전쟁 기간 순창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순창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83 | 26-1-05 |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 천안시 입장면행정복지센터 | 탑 | 3·1운동 | 1919 | 1990-04-27 |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시장에서는 1919년 3월 20일 광명학교 민옥금·한이순·황금순 등과 직산금광 광부 안시봉의 주도로 군중 600∼700명이 1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8일에는 직산 금광의 광부 박창신이 동료 광부 안은·한근수 등과 함께 직산금광 갱부의 교대 시간을 이용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대열을 지어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저지하는 헌병주재소의 헌병 및 천안철도원호대 수비병과 충돌하였다. 이에 광부들과 군중들은 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격투를 벌이는 한편, 통신을 차단하고자 주재소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입장 지역에서는 3월 30일과 4월 8일에도 면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두 차례의 양대리장터 만세시위로 일본 헌병에 의해 현장에서 3명이 순국하고 민옥금 등 8명은 징역 6월에서 1년 2월, 박창신 등 4명은 징역 10월에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0. 4. 27 건립한 비이다. | |
1884 | 51-2-07 | 충혼탑(고창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2m, 탑높이 14m | 1957-01-01 | 고창 덕산리에 1957년 6·25전쟁에 참전하여 고창 일대에서 산화한 3, 081위(군인 951위, 경찰 253위, 민간인 1, 877위)의 순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고창군은 이곳에서 산화한 고창경찰서장 조원춘 경감, 전북, 경남 경찰 등 순국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들의 성군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1957년 6월 25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시기 고창 군민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에게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군경과 젊은이들이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창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탑은 고창읍성 복원으로 인하여 1988년 12월 1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
1885 | 16-1-08 | 홍천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청 | 비석 | 3·1운동 | 1919 | 1979-10-03 | 1919년 4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 연10여일에 걸쳐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홍천읍에서는 차봉철, 서상우, 오창섭이 주동이 되었고 도로공사 부역꾼으로 가장한 북방농민 300여명이 이에 합세하여 독립만세가 전 군을 뒤덮었다. 동면에서는 민병숙, 민병태 의사가 피살되었고 내촌면 동창리에서는 천여명의 군중이 무자비한 왜적의 총탄으로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이려선, 팔열사가 장렬하게 숨졌다. 그리고 5천여명의 시위자 중에서 백 여명이 투옥되어 실형을 받았고 그 외 수많은 양민이 고문을 당하였다. 이 숭고한 선열들의 뜻을 이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
1886 | 16-2-64 | 순직지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 양구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63-05-25 | 육군 제1729부대는 1963년 5월 25일 강원 양구군 양구읍 공수리에 6·25 당시 파로호 상류지역에서 전사한 국군용사 4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순직지비(殉職之碑)를 건립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순직지비가 많이 훼손되어 1963년 5월에 제2사단에서 재정비하였고, 2000년 11월 25일에 양구군에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2023.7.6. 비의 역사적 의미를 반영하기 위해 양구읍 공수리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1951년 8월 양구지역 파로호를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 제7사단은 파로호를 도강하여 북한군이 포진한 문등리까지 진격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적군에게 응사하며 도강을 감행하였다. 호수 중간쯤에 도달했을 때 적의 포탄에 오병철 대위와 대원들이 탄 보트가 명중되어 보트는 그 자리에서 전복되고 오병철 대위와 3명의 대원이 헤엄쳐 나와서 적에게 대항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 |
1887 | 13-1-19 | 항일 애국지사 이재천·이재현 형제 추모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 동상 | 해외운동 | 1917 | 0 | 2003-03-01 | 안양시 자유공원에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항일 애국지사 이재천·이재현 형제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형 이재천 선생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동생 이재현 지사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1888 | 50-1-30 | 모도 항일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0 | 전라남도 완도군 | 완도군 | 비석 | 사회운동 | 1923 | 2002-01-01 | 전남 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에서 1923년 9월 청년들이 배달청년회(1925년 모도청년회로 개칭)를 조직하여, 개량서당을 후원하며, 서당 학동들과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재만(徐在萬, 1904~1984), 장석칠(張石七, 1905~1952), 정두실(鄭斗實, 1900~1961), 천병섭(千柄燮, 1899~1949), 천홍태(千洪泰, 1903~1927), 최창규(崔昌奎, 1905~1966)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완도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2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1889 | 31-1-44 | 도암 신태식의병대장 생가지(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문경시 | 신대식(고손) | 생가 | 의병운동 | 1864 | 0 | 2002-10-26 | 신태식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단발령이 있자 신태식은 의병항쟁에 나섰다.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또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소모후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양주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나가사부로[長三郞]를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이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잡혀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에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그 기밀이 드러나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뒤에도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7년 생가를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어 복원을 거의 완료하였다. |
1890 | 31-1-45 | 의병 좌익장군 영양 천공보락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문경시 | 천형필(종고손) | 비석 | 의병운동 | 1896 | 0 | 1991-03-30 | 1896년 유인석(柳麟錫)의병진의 선봉장(先鋒將)으로 수안보(水安堡)·조령(鳥嶺)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1906년 이강년(李康秊)이 거의(擧義)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좌익장(左翼將)으로 단양(丹陽)·청풍(淸風)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8년 강릉(江陵)·양양(襄陽) 등지에서 분전하다 사망하였다. |
1891 | 31-1-46 | 3·1독립투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의성군 | 박대성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69-03-02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김원휘·박영화·박영신 등의 주도로 태극기 200여개를 준비하여 주민 2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 시위로 등이 김명출(金明出, 1893~1987), 박세길(朴世吉, 1876~1946), 박영달(朴永達, 1887~1962), 박영신(朴永新, 1891~1942), 박영화(朴永和, 1859~1923), 박인욱(朴寅郁, 1896~1934), 배달근(裵達根, 1865~1944), 배도근(裵道根, 1866~1923), 배용도(裵容度, 1895~1971), 배용석(裵容奭, 1890~1938), 배중엽(裵重曄, 1882~1934), 이일만(李一萬, 1903~1954), 최점문(崔占文, 1874~1938)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밀양박씨 유족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9년 3월 2일 이 비를 세웠다. |
1892 | 51-2-18 | 충혼 불멸탑(부안읍)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부안군 | 부안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1976-06-06 | 한국전쟁 당시 변산지구 공비토벌작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용전분투하시다가 장렬히 산화하신 반공의용경찰의 충혼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뜻을 길이길이 빛내고자 이 탑을 건립하였다. | |
1893 | 40-2-12 | 6·25 참전용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부산시설공단 어린이대공원사업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3-01 | 부산진구 참전용사회는 2001년 3월 1일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내 6·25 참전용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6·25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부산진구 참전용사를 위훈과 충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
1894 | 51-2-19 | 반공투사 충혼비(위도면)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부안군 | 부안군 위도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0.7m X 1.8m | 1969-09-08 | 6·25전쟁 당시 위도면 출신인 김길환과 김용만 향토방위대원은 방위대 본부에서 경계 근무를 하던 중 1950년 9월 23일 새벽 북한군이 방위대본부를 침입하자 장시간 교전 끝에 전사하였다. 위도 면민들은 김길환, 김용만 대원의 반공정신과 위국충정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1969년 9월 8일 치도리 고개마루에 충혼비를 세웠다. 1981년 도로공사로 인해 충혼비가 훼손되자 1987년 6월 6일 위도국민학교 제24회 동창회원들이 뜻을 모아 비를 새로 건립하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1895 | 40-2-04 | 호국영령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북구 | 부산광역시 북구청 | 비석 | 6·25전쟁 | 2002 | 2002-01-01 | 부산 제3근린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산화한 428위의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영령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조계종포교원 진여원은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월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부산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896 | 12-1-10 | 순국열사 김마리아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4-05-08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정신여자고등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1919 | 0.6 | 1989-03-30 |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소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세운 소래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광주 수피아 여학교와 모교에서 교사를 지냈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19년 2·8독립운동에 참가했다.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9월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에 힘쓰던 중 11월 오현주의 배신으로 비밀조직이 탄로나, 3년 형 선고를 받고 재수감 되었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사경에 처하자, 스코필드 박사의 주선으로 병보석을 받고 가료 중 동지들의 도움을 얻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 국민대표회 대표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3년 7월 미국으로 재 망명하였다. 1928년 1월 뉴욕에서 근화회를 조직, 항일여성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원산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 교수 및 장로교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 회장 등 종교활동을 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옥고 중에 얻은 고문 후유증 악화로 해방을 17개월 앞둔 1944년 3월 13일 평양에서 53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
1897 | 14-2-20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부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부천시 | 무공수훈자회 부천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2 | 소 | 2002-11-19 | 국가위시 시 부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부천 원미동에 6·25전쟁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부천시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고 부천시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회 부천시지회에서 2002년 11월 10일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부천)'를 건립하였다. |
1898 | 40-2-05 | 헌7학병 6·25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부산시설공단 어린이대공원사업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6-16 | 부산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헌병학교 제7기 학병들을 기리기 위해 ‘헌7학병 6·25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헌7학병동지회는 6·25전쟁에 참전한 헌병학교 제7기 학병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6월 1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헌병학교 제7기 학생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899 | 55-1-32 | 애국지사 영광 정건수 위적비 | 독립운동 | 2004-12-10 | 전라남도 보성군 | 정학범 | 비석 | 해외운동 | 1924 | 폭 0.7m, 높이 2.1m | 2003-11-15 | 정건수는 보성에서 태어났다. 1943년 10월 중순경 일본군에게 강제 징집되어 1944년 9월 13일 중국 산서성으로 끌려간 그는 한구에 집결하던 중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박태만·이동섭·이병렬·이병남·이병렬·이순석·장회수·최용선 등과 함께 12월 30일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였다. 일행은 추격해온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1945년 1월 25일 중경의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하여 정부요원의 신변보호와 총사령부 경비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에도 중국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6년 6월 8일 귀국하였다. 생가터에 ‘애국지사 영광 정건수 위적비’가 2003년 11월 15일 설립되었다. |
1900 | 55-1-28 |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 의적비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곡성군 | 유회수(증손) | 비석 | 의병운동 | 1886 | 높이 3.5m | 2002-08-16 | 유인수는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국권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자 1908년부터 의병진에 군자금을 조달하면서 항일투쟁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2년 이석용이 의병활동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거점조직인 임자동밀맹단의 곡성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인수선생 의적비는 그의 투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901 | 13-2-14 | 현충탑(군포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군포시 | 군포시 | 탑 | 기타 | 1995 | 1995-11-03 | 군포 한얼공원 내에 독립운동,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산화한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군포시)’을 건립하였다. 군포시는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5년 11월 3일 준공하였다. 독립운동,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 국가위기 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기 위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군포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1902 | 40-2-02 | 북괴 반잠수정 격침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30 | 부산광역시 남구 | 해군작전사령부 | 비석 | 기타 | 1998 | 1999-12-18 | 부산시 남구 용호동 해군작전사령부 내에 해군 제3함대의 북한 반잠수정 격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시에서 1999년 12월 18일 이 비를 세웠다. 1998년 12월 17일 밤 11시 15분쯤 전남 여수시 임포지역 돌산 해안초소 관측병 김태완 이병이 초소 전방 4km 해상에서 수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야간열상장비(Tod)를 통한 관측에서 안테나로 보이는 막대기가 달린 물체가 다가오는 게 잡힌 것이다. 육군 경비정 1척과 해경정 1척이 확인을 위해 현장에 출동했으나 괴물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로부터 1시간 25분 뒤인 18일 오전 1시40분쯤, 괴물체가 다시 야간열상장비에 포착됐다. 초소 앞 8km 해상이었다. 육해공 레이더가 총 동원돼 괴물체 추적에 나섰다. 오전 2시20분쯤 경남 통영시 욕지면 욕지도에 있는 해군 266레이더 기지에 미식별 선박의 궤적이 나타났다. 10노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육군 136레이더에도 2시 46분에서 3시 15분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쳐 출현했다. 해역을 담당하는 3함대사령부(사령관 변무근 소장)는 새벽 3시 20분 현장에서 초계중이던 광명함을 출동시켰다. 3시 27분 거문도의 362고속정 편대와 욕지도의 353고속정 편대에 출동명령이 내려졌다. 초계함인 동해함과 남원함은 괴선박의 도주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에 따라 외해로 나갔다. 오전 3시 35분쯤에는 공군조명기 cn-235기가 김해에서 현장에 출동했다. 광명함과 고속정편대가 오전 4시 35분쯤 괴선박을 따라잡아 정선명령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자 20mm포로 위협사격을 실시했다. 해군은 괴선박을 해안 침투를 노린 적의 반잠수정이라고 추정, 40mm 포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반잠수정은 40노트의 고속으로 공해쪽을 향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오전 5시 20분쯤 광명함장 손민 중령은 반잠수정을 적성으로 선포했다. 간첩선을 의미하는 해군의 암구호(망둥이)를 사용해 "망둥이를 격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76mm, 40mm 함포를 동원한 격파사격에 들어갔다. 포격을 받은 간첩선은 5시 48분쯤 돌연 광명함과 고속정을 향해 기관총으로 응사했다. 이때 외해에서 도주로를 막고 있던 남원함에서 40mm포가 작렬했고, 이 중 3발이 반잠수정에 명중했다. 6시 10분쯤 353고속정 편대가 접근하자 간첩선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직경 6mm 길이 2.5cm의 기관총탄이었다. 남원함은 이에 대응해 40mm 포사격 세례를 가했다. 반잠수정은 한동안 물위에 흔들흔들 떠있다가 폭발음과 함께 선미부터 침몰하기 시작했다. 간첩선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6시50분쯤. 거제도 남방 1백km 지점 해상이었다. 남원함은 7시15분쯤 침몰 지점을 향해 대잠 폭뢰 5발을 투하했다. 잠수 이후 도주를 막고, 부유물을 인양하기 위한 조치였다. 잠시 후 기름띠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분쯤 뒤인 오전 8시10분쯤에는 사체1구가 떠올랐다. 분홍색 계통의 사제 잠수복과 청색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발에는 오리발 특수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바지 호주머니에서는 수류탄 1발이 발견됐다. 격침된 북한 반잠수정을 수심 150m 깊이에서 건져 올려 기네스북에 올랐다. | |
1903 | 40-2-13 |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기장군 | 기장군 무공수훈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1-05-25 | 기장군 무공수훈자회는 2001년 5월 부산 기장군 장안읍 기룡리 509-3에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의 빛나는 위업을 선양하고 전후세대들에게 해이해져가는 반공정신과 안보태세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이 전공비를 건립했다. 이 비는 2단 자대 그리고 비신과 훈장고 총 높이 3미터이며, 기장군에 거주하는 무공수훈자 70여 명의 이름이 훈격별로 명각되어 있다. | |
1904 | 10-1-13 | 우남 이승만박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배재고등학교 | 동상 | 해외운동 | 1875 | 높이 2.97m , 폭 1.1m | 1984-02-28 |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진보적인 개화당 관계의 청년들과 많이 접하게 되었으며 외국의 문물을 섭취, 그 자신도 진보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896년에 서울에서 협성회보, 매일신문 등을 발간하였는데 황제를 비판하였다고 하여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04년에 미국으로 떠나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에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일본에게 약육강식 당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국제 여론은 마땅히 한국을 불합리한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호소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였으며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과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였다. 1940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그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을 실시하여 희망과 용기를 북돋았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
1905 | 30-1-30 | 광복의사단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북도 상주시 | 성균관화북유도회 | 사당 | 기타 | 1858 | 0 | 2000-12-25 | 구한말 국권회복과 일제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상주시 화북면 출신 이강년, 이용엽, 이원제, 이성범, 이용회, 이원녕, 김재갑, 홍종흠 등 8인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갈기동·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피체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성범은 상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4월 8일의 상주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운산 이용엽은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왜병을 말티재로 유인하고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고 가은 이원재는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에 헌신하였으며, 화은 이성범, 송사 이용회, 김재갑, 홍종흠은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6월씩 옥고를 겪었고, 간산 이원녕은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 |
1906 | 31-1-79 | 안동군청, 경찰서, 법원 3.1만세 운동지 | 독립운동 | 2018-12-4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시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9-03-01 | 안동군민 3,000여 명이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30여명이 순국하였다. |
1907 | 10-1-17 | 남강 이승훈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3·1운동 | 1864 | 0 | 1987-03-02 | 1864년에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다. 10여 년 동안 유기행상과 공장 경영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그는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면서 나라의 정세가 위태로운 시기에 이승훈은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40대의 나이에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신민회에서도 활동했으며 1910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에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 평의 땅을 기증해 공동경작제를 실시했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사업을 계속했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1908 | 10-1-16 |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사회운동 | 1883 | - | 1976-12-07 | 1976년 12월 7일 서울 광진구 능동 18(어린이대공원 내)에 조만식 선생의 숭고한 항일정신과 자유수호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동상이다. 조만식 선생(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구한말에서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의 한 분이다. 1913년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사에 취임하고 이후 교장에 올랐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오산학교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선물산장려회 주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평양지회장 등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과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당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1909 | 10-2-01 | 전쟁기념관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전쟁기념사업회 | 기념관 | 기타 | 1994 | 31,700평 | 1994-06-10 |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에 호국전쟁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국민정신교육장으로 역할을 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사업회에서 1994년 6월 10일 전쟁기념관을 세웠다. 전쟁기념관은 옥내전시와 옥외전시로 구분되어 있으며 3만 3천여 점의 소장유물 중 1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1만 900여 평의 옥내전시실은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대형장비실 등 6개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형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옥외전시실이 있다. 3층 규모의 옥내전시실은 삼국시대로부터 현대까지 5천년 대한민국 전쟁사와 위국 헌신한 분들의 공로와 훈장 등이 실물·디오라마·복제품·기록화·영상 등의 다양한 전시기법에 따라 역동적이고 입체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특히 6·25전쟁실은 전쟁이 일어난 원인과 전쟁 경과 및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쉽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험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외전시장에는 세계 각국의 대형무기와 6·25전쟁 상징 조형물, 광개토대왕릉비, 형제의 상, 평화의 시계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장비를 전시하고 있는데, K-1전차를 비롯하여 곡사포, 미사일, 헬리콥터, 수송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양측 회랑에는 국군 전사자와 유엔군 전사자 20여 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전사자 명비가 있으며, 전쟁기념관을 대국민 호국문화의 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이부터 일반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20여개의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함은 물론, 국군 군악·의장행사, 어린이날 문화축제, 현충일 그림그리기 대회, 6·25 호국문화행사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연간 개최하고 있어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의 캐릭터는 무돌이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을 가진 철모와 평화를 상징하는 월계수잎이 특징적이다. |
1910 | 10-1-15 | 고하 송진우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사회운동 | 1889 | - | 1983-09-23 | 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 - 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언론인, 교육자, 사상가,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민주당의 초대 당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해방 후 정치인으로서 한국민주당의 초대 당수였으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언론인, 교육자, 사상가로 활동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사의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23년에는『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적극 선전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하였으나, 1925년 4월 동아일보사 주필로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게재했다가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한 소위 '일장기 말소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평생 항일독립과 민주건국을 위하여 몸바친 선생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송진우선생동상건립위원회에서 1983년 9월23일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
1911 | 11-1-12 | 윤기안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정의여자고등학교 | 동상 | 3·1운동 | 1899 | - | 1991-10-07 | 이 동상은 만세시위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윤기안 선생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평안북도 박천에서 출생한 선생은 대동군에서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 동료교사, 학생 및 주민들과 함께 1919년 3월 4일에 만세시위를 주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에 항거하여 3.1 독립만세운동을 선도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1912 | 31-1-78 | 안동장터 3.1만세운동지 | 독립운동 | 2018-12-4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시 | 장소 | 3·1운동 | 1919 | 0 | 2021-02-20 | 현재 안동시 문화의 거리 일대인 안동장터에서 만진 이상동(석주 이상룡의 동생)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만세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단독시위를 벌였다. 이 단독시위가 확산되었고 2천5백여 명으로 늘어난 사람들이 군청, 경찰청, 법원으로 몰려가 애국지사 석방을 요구하는 등 투석전을 펼쳤다. |
1913 | 15-2-114 | 故 범재오 상사 추모비 | 국가수호 | 2018-12-4 | 경기도 양주시 | 제6955부대 | 비석 | 기타 | 2017 | 2018-4-15 | 2017년 한미연합전술 26전차대대 1중대 전차장으로 임무수행 중 전차가 교량 아래로 추락하여 전복되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상황을 무전으로 경고하는 등 피해확산을 방지하고 순직한 고인을 기리기 위함 | |
1914 | 10-1-19 | 독립관 | 독립운동 | 2003-02-04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996 | 정면 6칸, 측면 4칸 | 1996-12-28 |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옛 독립협회 사무실로 쓰던 독립관을 고증에 따라 복원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원래 중국 사신 방문시 접대를 하던 공간인 영빈관으로 사용하던 모화관 건물을 청·일 전쟁 이후 독립협회에서 사용하던 건물이다. 1894년 이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민권·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독립문과 함께 독립 사상을 표현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독립관은 지상1층 한식 목조건물로서 정면 6칸 측면 4칸 7량 팔작지붕 구조였으며, 원래 위치는 동남쪽으로 약 350m 지점이었다. 서대문독립공원 조성사업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지상층은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행사 및 유물 보관을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1996년 서울시에서 건립하였다. |
1915 | 15-1-12 | 파주 3·1운동 발상비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광탄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8-03-01 | 파주 3.1운동 발상지인 광탄면에서 순국하신 선열과 독립유공자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 |
1916 | 31-2-08 | 충혼탑(예천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예천군 | 탑 | 기타 | 1992 | 0 | 1992-05-30 | 예천군출신으로 6.25를 비롯한 국가위난시 전투, 훈련, 교육, 공무수행 등으로 사망한 국가유공자 위패 637위 봉안 추념 |
1917 | 15-1-07 | 화도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남양주시 | 월산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3-03-01 | 월산교회는 1993년 3월 1일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555(월산교회내)에 화도 3·1운동을 주도한 김필규 목사 외 7명의 독립운동가의 공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화도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달용 등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3월 16일 사전에 발각되어 다수의 주도인사들이 일경에 피체되었다. 월산교회 목사 김필규(1874~1919) 등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답내리·월산리 주민들이 총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 앞으로 몰려가 피체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은 그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5명이 즉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은 채,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3월 19일 이른 아침에 일헌병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을 연행해 갔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4월 25일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
1918 | 15-1-03 | 최면식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01-17 | 경기도 포천시 | 최면식선생문종종회 대표 최종규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1 | 0 | 1982-08-15 | 포천 출신 독립운동가 최면식 공적비. 최면식은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약한 애국지사이다. 면암 최익현의 둘째 아들인 최영학의 아들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월형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1917년에 대한광복회에 가입하고 이병호와 함께 전라남도 광복회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조달하여 광복회장 채기중에게 증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공주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한 후 대한광복회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에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8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최면식의 독립운동 공적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919 | 14-2-11 | 강화군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 탑 | 6·25전쟁 | 1950 | 대 | 1950-10-30 | 강화군에서는 1950년 10월 30일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산20에 6·25전쟁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강화 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들을 추모하고자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현충탑이 노후화되자 1994년 6월 현 위치에 현충탑을 재건립하고 강화군 출신 전몰군경 1,033위(국군 735위, 특공대18위, 경찰관36위, 유격군 224위)를 새겨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
1920 | 15-1-10 |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동상 | 애국계몽운동 | 1883 | 0 | 1992-10-20 | 1992년 10월 20일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59(오두산통일전망대)에 조만식 선생의 숭고한 항일정신과 자유수호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동상이다. 조만식 선생(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구한말에서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의 한 분이다. 1913년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사에 취임하고 이후 교장에 올랐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오산학교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선물산장려회 주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평양지회장 등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과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당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1921 | 15-1-11 | 파주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8-03-01 | 1919년 3월 27일 파주 공릉장날에 전개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던 3월 10일, 파주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읍)의 공립 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의 만세시위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하였고 파주의 다른 지역에까지 3·1독립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월 28일에 광탄면 발랑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약 2,000여명의 군중이 참여하였으며 시위대는 봉일천리의 공릉장으로 향하였으며 시위 군중의 규모는 3,000명을 넘어 섰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시위는 심상각의 주도하에 19명의 대표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 날 시위로 광탄면에 사는 박원선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날 시위는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무단통치기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으며 특별한 결사조직 없이 군민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8년 3월 1일 파주3·1운동건립추진위원회는 파주 애국선선열의 3·1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922 | 11-1-13 | 봉황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강북구 | 천도교 의창수도원 | 기타 | 3·1운동 | 1901 | 1912-06-19 | 봉황각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 손병희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이었던 이곳 27,900여 평을 매입하여,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1912년에 세운 건물이다. 손병희는 고종 19년(1882) 동학에 입교하였고,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다. 을사조약을 찬동한 친일분자인 이용구 등과 결별하고,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로 취임하였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물려주고 우이동 봉황각에 은퇴하여 수도에 힘쓰며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1912년 4월 15일부터 지방교역자 21명을 선발하고 지명하여 수련을 시켰으며, 1914년 4월까지 3년간 총 483명을 수련시켰다. 그리고 봉황각에서 교육과 수련을 받은 인사들이 3·1운동을 지도하는 각 지역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항일운동의 선도자가 되었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 |
1923 | 11-1-02 | 3·1운동 책원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중앙고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3-06-01 | 중앙고등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1919년 1월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학교(1919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를 찾아와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숙직실에 모여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하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계획을 세웠다. 이후 송진우 등은 기독교계, 불교계, 천도교계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3·1운동을 준비하였고 최남선이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바탕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1973년 6월 동아일보사가 삼일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했고, 당시의 숙직실은 ‘삼일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있다. |
1924 | 15-1-14 | 순국선열 추념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남양주시 | 화도읍주민자치센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11-15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당시 화도면 마석우리에서 이달용의 주도로 강선원(姜善遠)·김필규 등 2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일본 헌병이 시위자를 검거하자 시위대는 1천여명으로 불어나 마석우리 헌병대 병참으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헌병이 발포하여 이달용(李達鎔, 1889~1919), 손복산(孫福山, 1889~1919), 신영희(申榮熙, 1891~ 1919), 유상규(兪相奎, 1880~1919), 이교직(李敎稙, 1887~1919)이 순국하고, 김필규(金弼圭, 1874~1919)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고 복역 중 순국하였다. 화도읍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65년 11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1925 | 14-2-23 | 6·25참전 인천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0-09-15 |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당시 마산-왜관-포항을 연결하는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고,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1980년 9월 15일, 옛 격전지를 굽어보는 이곳 수봉공원에 전적비를 건립하였고, 2017년 10월 11일 인천시 6.25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명비를 건립하였다. |
1926 | 11-1-10 | 탑골공원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공원녹지과 | 장소 | 3·1운동 | 1919 | 1897-01-01 | 우리나라 최초로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 | |
1927 | 16-1-15 | 고 민족영웅 의병대장 민긍호 충혼탑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문화계 | 탑 | 의병운동 | 1908 | 1954-05-31 | 한말 의병장 민긍호는 1865년(고종 2년) 서울에서 민치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여흥이다. 인품이 곧고 강했으며 공과 사가 분명하여 부하들에게 존경을 많이 받았다. 1907년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현재의 특등상사)로 있을 때, 고종이 일제의 압력을 받아 물러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병사들을 이끌고 원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항일 무장 투쟁을 펼쳤다. 그는 일본 경찰 분견소 등을 공격해 원주 지역을 차지한 뒤, 충청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과 힘을 합쳐, 충주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경기도 양주에서 이인영이 일제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전국 의병 연합 부대로 13도 창의군이 새로 생기자 관동 창의군 대장으로 뽑혔다. 그는 강원·충청·경기도 일대의 의병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과의 100여 차례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원주 치악산 강림촌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용감히 싸우다가 붙잡혀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는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근대 민족 운동의 횃불이 되었다. 나라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봉산동 민긍호 의병장 묘역 충혼탑은 1954년 원주 제2경비사령부로 부임한 독립운동가 출신 권준(1895~1959) 장군이 민긍호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곳으로 묘를 이장하면서 건립했다. | |
1928 | 16-1-34 | 독립투사 호암 이준용·수암 한용섭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6-04-24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서면 노인회 | 비석 | 3·1운동 | 1893 | 1990-11-08 | 이준용은 강원도 춘천 사람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교도로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공주일대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집에 대장소를 설치하게 하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지용기 의병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윤도순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비밀리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춘천읍내 시장에서 박순교·허기준·허현 등과 함께 수십 명의 시위군중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 현장에서 헌병경찰에게 피체되어 고초를 겪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섭은 홍천읍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을 선도했으며 그 후 서면 방동리에 정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켰다. | |
1929 | 33-2-32 | 월성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해병대 제1사단 | 비석 | 기타 | 1983 | 0 | 1983-12-10 | 1983년 8월 5일 새벽, 해안으로 후방지역 군사정찰 및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침투하는 북한 공비를 9118부대 장병들이 민첩하게 대응하여 5명의 공비를 사살한 장소로 철통같은 경계로 국가안보에 기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983년 건립하였다. |
1930 | 12-2-01 | 포충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장 | 탑 | 기타 | 1956 | 0 | 1956-06-15 | 서초동 서울고등학교 내에 6·25전쟁과 4·19혁명 기간에 순직한 학우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포충탑’을 건립하였다. 서울고등학교는 순직한 학우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6년 6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서울고등학교 학생들은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서울고등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931 | 14-2-04 | 강화 유격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강화군 | 강화독립부대유격군동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중 | 1981-06-25 | 1950년 10월 30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1951년 1·4후퇴 당시 강화를 사수하기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연백군, 경기도 개풍군, 개성에서 강화도로 피난 온 애국청년 1,240명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북한군 과감히 싸웠다. 이후 육군 제5816부대 직속 유격대로 편성되어 적의 대병력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강화도 사수는 물론 해안침투상륙작전, 배후습격, 공수특전침투, 첩보활동, 유엔군 조종사 및 양민구출, 북한군과 중공군 3개 군단 견제, 개성까지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들 유격대 용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산화한 516명 유격용사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이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강화유격대 창설지에 1981년 6월 25일, 5816유격추진위원회에서 ‘반공유격용사위령탑’을 건립하였으며, 2008년 7월 31일 ‘강화유격용사위령탑’으로 재건립하였다. 탑머리는 평화와 자유수호, 좌측날개는 용사의 참혼, 우측날개는 조국의 안위, 탑 받침은 숭고한 용사의 넋을 대해로 펼침을 상징하였다. |
1932 | 14-2-09 | 해군 영흥도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해역방어사령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중 | 1992-12-02 | 한국전쟁 당시 수도 서울 탈환과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던 인천상륙작전 전초전인 영흥도 상륙작전(X-Ray작전)을 기리기 위하여 해군본부에서 당시의 격전지에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해군첩보부대는 영흥도 첩보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작전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미국동사령부 클라크 대위와 해군본부 정보국 임병래 중위가 이끄는 특수공작대는 1950년 8월 22일 인천 앞바다 영흥도에 상륙하여 잠입하였고 인천과 서울, 수원 등을 왕래하며 첩보를 수집하여 해군본부와 맥아더 사령부에 제공하였다. 이들의 첩보수집 활동은 인민군의 병력 배치와 규모, 보급관계, 지뢰매설 사항, 상륙지점의 지형, 암벽의 높이, 기뢰수송 사항, 인천해안포대의 위치, 인천시내 주둔 병력의 규모와 활동 내용을 수집하는 이른바 X-RAY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14일 영흥도로 상륙한 북한군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였고, 적에게 체포되어 특수공작임무의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한 임병래 중위는 자결하였다. 임병래 중위와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3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12월 2일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
1933 | 14-2-02 | 충혼탑(덕적도)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9-06-25 | 덕적면 진리에 1959년 6·25전쟁 기간에 조국의 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덕적도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덕적면은 1958년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9년 6년 25일에 진리 도우 언덕에 준공하여 덕적도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이후, 1986년 순환 도로 공사로 인하여 덕적면민의 뜻을 모아 1986년 6월 6일 현충일에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리 산 333-3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덕적면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2021년 1월, 덕적 기미 3·1독립만세 기념공원 준공과 함께 공원 내로 이전하였다. |
1934 | 15-1-08 | 을미의병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의병운동 | 1905 | 0 | 1996-11-27 | 1895년 양평 지제면 지평리에서 시작된 을미의병 기념비.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양평 지제면 지평리에서 을미의병이 거의하였다. 이들의 의병활동은 원주·제천·단양·영월·충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리고 강원지역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에 도화선이 되었다. 양평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양평 지역 유림 및 주민들의 후원으로 1996년 11월 27일에 양평의병의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1935 | 14-2-05 | 반공유격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1961-08-15 | 1950년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 당시 벽령도로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 왔다. 1951년 2월 28일 유엔군 관할 하에 월남민 중 8천여 명이 반공유격대(8240부대: 동키부대)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과 백령도 수호에 크나큰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을 수행하여 북한군 57명을 생포하고 4천 명가량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61년 8월 15일 한국일보사가 반공유격대의 전공을 기리고 장렬히 산화한 516명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을 받아 인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1184-1에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
1936 | 14-2-22 | 재일 학도의용군 참전비 | 국가수호 | 2004-12-09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중 | 1979-10-01 | 1950년 6월 25일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일본에 있던 재일교포의 자녀 및 유학생 1,000여명은 주일 대표부에 조국 수호를 위하여 참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였지만, 주일대표부와 미국 극동사령부는 이들은 병역의무가 없어 참전할 수 없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조국을 위해 꼭 참전하겠다는 탄원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교섭 끝에 642명이 미8군에 편입되어 참전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불과 1~2주간의 짧은 훈련을 마치고, 1950년 9월 중신 176명이 투입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어왔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미국과 국군부대에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인천상륙작전, 평양입성, 압록강 해산진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여했다. 이들 642명 중 52명은 전사했고 83명은 행방불명 처리되었으며, 265명은 일본에 귀국하였으나 242명은 일본이 무단출국자로 규정해 입국을 거부하여 조국에 남았다. 1959년 6월 28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52명의 유골을 안치할 충혼탑과 납골탑이 일본 동경에 건립되었고, 1956년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에서 조국의 땅인 월미도에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1976년에 와서 서울 현충원에 재일학도의용군 위령비가 건립되었는데, 재일교표들의 모금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1979년 10월 1일 바다를 건너 달려온 재일학도들의 장한 뜻을 영원히 기리고 후세 젊은이들에게 조국애의 표본으로 남기기 위해 수봉공원에 4백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여 높이 8m의 석재 조형물과 청동군상으로 된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제막식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등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참전비 문구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졌다. 1982년 11월 1일 참전비 앞에 다시 재일학도의용군 명비와 연혁비가 세워져 제막식이 열렸다. 현재 매년 9월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지회 회원들이 기념비 앞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
1937 | 43-1-48 | 독립지사 남계 강영순선생의 사적비 | 독립운동 | 2006-11-09 | 경상남도 고성군 | 강선이 | 비석 | 3·1운동 | 1882 | 기념비 | 1984-10-01 | 강영순은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의 진주군 정촌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3월 18일 그는 5천여 명의 대대적인 정촌면 시위군중과 함께 진주읍내로 시위 행진하였다. 도중에 사천의 일본군 헌병대와 진주의 일본군 수비대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칠암리에 도착했을 때,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과수원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경과 충돌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그는 한손에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한손으로 일본 헌병의 칼을 빼앗아 남강에 던지며 선두에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진주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를 성원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던진 포승줄에 목이 감긴 그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시위군중의 필사적인 구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주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포승을 절단하고 일본 경찰 2명을 발로 차 쓰러뜨린 뒤 피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1938 | 13-2-26 |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 수원시 사회복지과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74-10-03 |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안전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의의 십자군으로 파병되어 많은 전과를 거두고 산화한 프랑스군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74년 10월 3일 국방부가 건립하였던 것을 2000년 11월 6일부터 2001년 11월 3일까지 한국가 프랑스 문화를 접목한 추모공간으로 재조성하였다. |
1939 | 15-2-15 | 파주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7-01-01 | 파주시 아동동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파주군 출신 순국선열과 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파주시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파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현충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67년 6월 6월 준공하였고, 1988년 10월 2일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파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파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940 | 15-2-52 | 타일랜드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4-10-01 | 태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전쟁 중 피 흘린 1,296명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로, 기념비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타일랜드의 육·해·공군 용사들! 여기 그들의 마지막 주둔지에 피 흘린 1,296명의 뜻을 길이 새긴다.’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기념비 옆으로는 불상을 모신 태국식 사원(寺院) 건축물도 조성되어 있다. 태국은 한국전쟁 때 육군 1개 대대, 해군 함정 2척,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3대를 파견해 참전함으로써 육·해·공군 모두를 지원하였다. 태국군은 율동전투(1951), 철원 포크찹고지전투(1952), 고랑포 나부리전투(1953), 김화 사동전투(1953) 등의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자 129명, 부상자 1,139명, 실종자 5명이라는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 |
1941 | 15-2-28 | 남양주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1981-01-01 | 남양주시는 1981년 남양주시 일패동 산73-8에 6·25전쟁 당시 조국과 자유 수호를 위하여 장렬히 전사한 미금시 출신 장병 83위와 남양주시 장병 144위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호국보훈의 시민의식을 함양하기 위하여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 |
1942 | 23-1-05 | 애국열사윤병구선생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청남면 | 비석 | 의열투쟁 | 1877 | 1991-10-01 | 윤병구는 청남면 중산리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에 본거지를 둔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2년 총독 및 일제고관의 처단과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찰서등을 폭파하기 위한 계획과 자금조달을 유석현, 김지섭 등과 상의하였다. 그해 12월 23일 김지섭, 유석현 등과 함께 서울 무교동에 사는 총독부판사 백윤화 집에 가서 군자금 5만원을 요구하였다가 2천원의 자금을 약속받았다. 25일 밤 유석현과 같이 약속된 군자금 수령을 위해 백윤화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의 신고로 잠복중인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시국표방강도 죄목으로 중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195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청남면 중산리 태평이 마을에 기념비가 있다. | |
1943 | 24-1-18 | 독립운동가 추모비(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05-10-27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비석 | 기타 | 2005 | 0 | 2005-01-01 | 류자명(柳子明, 1894~미상)은 대소원면 영평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충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경에게 탐지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고, 1924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4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1942년 임시의정원 의원, 1943년 3월 임시정부 학무차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서정기(徐廷夔, 1898~1950)는 대소원면 대소리 출신으로 1925년 1월 서울에서 항일비밀결사인 흑기연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1929년 2월 문예운동사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고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일신(李一信, 1909~1988)은 대소원면 매현리 출신으로 1929년 12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교 만세시위를 주동하였고, 조선학생전위동맹을 조직하여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 유학 중 1938년 2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구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충주시 대소원면 지역발전협의회에서는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2005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1944 | 43-1-49 |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6-11-09 | 경상남도 합천군 |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 | 탑 | 3·1운동 | 1919 | 2006-05-2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날 장터에서 정연태·정현아·이기복 등의 사전 준비로 3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이어서 3월 23일 다시 삼가장터에서 백산·상백·삼가·가회·대병·용주·대양면 등에서 모인 13, 0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관공서에 몰려가자 일제군경이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 시위로 공재규(孔在奎, 1848~1919), 권영규(權永圭, 1865~1919), 김기범(金箕範, 1862~1919), 박선칠(朴仙七, 1876~1919), 윤성현(尹聖鉉, 1902~1919), 이상현(李相賢, 1886~1919) 등이 23일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고, 공민호(孔敏鎬, 1880~1948), 오영근(吳永根, 1889~1951), 윤규현(尹圭鉉, 18947~1965), 이계엽(李啓燁, 1887~1947), 정각규(鄭恪圭, 1889~1965), 정방직(鄭邦直, 1891~1961), 진택현(陳宅賢, 1881~1951), 최용락(崔龍洛, 1895~1967)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합천 삼가장터3·1만세운동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6년 5월 20일 이 탑을 세웠다. | |
1945 | 45-2-26 | 충혼탑(표선면 )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표선면 | 탑 | 기타 | 1950 | 2008-06-06 | 표선면 성읍리에 4·3사건과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표선청년회의소는 이곳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8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4·3사건과 6·25전쟁 기간 표선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946 | 11-1-39 | 이상재 집 터 | 독립운동 | 2016-11-23 | 서울특별시 종로구 | 헌법재판소 | 장소 | 문화운동 | - | 2016-11-23 |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였으며 기독교청년회(YMCA)가입과 3.1독립운동의 배후 도움 과 물산장려운동 등 독립운동가이신 월남 이상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집터를 보존하였다. | |
1947 | 30-1-68 | 순국의사 장진홍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4-12-12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 비석 | 의열투쟁 | 1895 | 0 | 1953 | 1895년 6월 6일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태어난 장진홍 의사는 일찍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국내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만주에서는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고, 3.1운동 이후에는 전국을 돌며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여 이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관공서, 은행 등 공공기관을 폭파하여 일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했으며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중의원과 경시청 폭파를 준비하다가 경찰에게 체포, 대구로 압송 되었다.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일제에 죽느니 내 손으로 죽겠다 향년 35세에 옥중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1948 | 11-1-01 |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중랑구 | 중랑구청 공원녹지과 | 탑 | 의병운동 | 1907 | 1991-08-05 | 1990년 동아일보사가 3·1운동 유적보존운동의 하나로 건립하였다. 1907년 11월 망우리 일대에서 13도창의군의 선발대 300여 명이 서울로 진격하려다,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혈전을 치른 것을 기념하고 항일의병의 구국혼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당시 경기도 양주에 거점을 둔 13도창의군은 총 48진·1만 명에 이르는 전국연합부대로서 총대장에 이인영·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 |
1949 | 11-1-07 | 우당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우당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1867 | 0 | 2001-06-15 | 이회영은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1905년에 울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을 떠났다. 그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와 더불어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그는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한다.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우당기념관은 일생을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신 우당 이회영의 역사적인 삶을 조명하기 위하여 종로구 신교동에 설립되었다. |
1950 | 13-2-11 | 고 김승철중위 전사지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과천시 | 과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6-09-19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에 김승철 중위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한림 장군이 1956년 9월 19일 이 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이한림 장군의 부관이었던 김승철 중위는 1950년 7월 2일 장군을 수행해 작전임무를 수행하던 중 과천시 갈현동 산 13번지를 통과하다가 잠복해 있던 북한군과 맞딱드리게 되고 북한군의 저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1959년 9월 19일 김승철 중위를 기리기 위해 과천시 갈현동에 이한림 장군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이 충혼비는 국방부에서 관리해오다 과천시가 관리하게 되었다.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고인의 순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과천시 갈현동 찬우물버스정류장 뒷편으로 이설 새로이 단장했다. | |
1951 | 11-1-16 | 보신각 3·1독립운동 기념터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문화진흥과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79-08-15 | 종로 보신각 앞은 1919년 3월 1일 시위 군중들의 타종을 시작으로 서울지역 3·1독립만세시위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었다. 학생단 주도로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대로 나뉘어졌던 시위대가 정오경 이곳에 모여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고, 3월 9일부터 상인들의 동맹 철시가 단행될 때도 그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4월 23일의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비록 당초 계획했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무산되어 학생으로 보이는 몇 명이「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선포문」을 뿌리고, ‘국민대회 공화만세’라는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데 그쳤지만, 이 날 국내 ‘13도 대표’ 25명 명의로 배포된 ‘한성정부’ 선포 문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
1952 | 13-2-15 | 현충탑(수원시) | 국가수호 | 2006-06-01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시 | 탑 | 기타 | 2005 | 0 | 2005-05-30 |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공헌하신 호국영령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빌고 그 용기와 숭고한 뜻이 우리 후손들에게 애국정신의 귀감이 되어 길이 보존·계승하기 위하여 건립된 국가 현충시설이다. 본 현충탑의 부제는 "미래를 향한 빛"이라는 명칭으로 재단에 올리는 향을 현대적 조형성과 미래지향적인 상승감을 갖도록 형상화 하였으며, 탑신 위부분 무색의 스테인레스 부분은 향이 타 들어가는 모양을 표현하여 나라를 위해 몸바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였다. 사선으로 변화있게 배치된 사각의 탑신은 사방으로 뻩뻗어나가는 민족정기의 기운과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 영원성을 표현하였다 |
1953 | 40-1-05 | 독립유공자 김근도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 동상 | 사회운동 | 1900 | 0 | 1996-10-15 | 김근도는 가덕도에서 태어나 1918년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법랑직공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제의 한국통치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36년 동향인 이수룡·이수강·김성규 등을 규합하여 재대판가덕인친목회를 조직한 그는 이후 약 두 달간에 걸쳐 회합을 갖고 일제의 민족차별정책과 한국 강점에 대해 비판하는 한편, 한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봉기하여 국토를 일본으로부터 탈환하고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회원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1939년 대판 주재 가덕인 청년을 결집하여 새로이 가덕인청년부회를 결성하고 1940년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정신 함양을 통해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격려하다가 피체되었다. 1942년 9월 30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고 그 해 12월 22일부터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1954 | 11-1-14 | 충정공 민영환선생 고택지(기념표석)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 문화진흥과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1861 | 1994-01-01 |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을 추모 | |
1955 | 13-1-11 | 3·1독립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문화재단 | 탑 | 3·1운동 | 1919 | 0 | 1969-10-15 | 이 기념탑은 원래 광복 후 중포산에 세워져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돌을 맞아 죽은 수원경찰서 사범계주임 노구치의 순국비를 허문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기념탑을 1969년 10월 15일 3·1동지회가 팔달산 중턱으로 이전하였다. 수원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의 시초는 장날인 3월 16일에 서장대와 창룡문 쪽 연무대에서 각각 당시 수원면민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향해 행진한 것이다. 23일에는 서호에서 약 700명이 시위를 벌였고, 25일에 25명의 청년학생과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날에 있었던 시위 주동자의 검거에 대한 항의 표시로 27일 인근 상인들이 상점을 닫는 철시투쟁을 전개하였다. |
1956 | 13-2-25 |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5-09-29 | 경기도 평택시 용이동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6·25전쟁에 참가한 장병들과 전사한 37인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75년 9월 29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의 안정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남아공에서는 공군을 파견하였다. 파견된 공군은 제2전투 비행대대 255명(장교 49명, 사병 206명)으로써 1950년 11월 16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 11월 19일부터 미 공군과 합동으로 청천강 이북지역에 대한 출격에 참가하였다. 그후 이 비행대대는 지상군 전선이동에 따라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등의 기지로 이동하면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적 후방지역 차단작전과 적 산업시설 파상작전에 참가하였으며 휴전이 되자 F-86 전투기를 미 폭격여단에 인계하고 1953년 10월에 철수하였다. 이 남아프리카공화국 군(軍)의 혁혁한 공적을 기리고 산화한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유와 국가간의 친선은 남아공화국의 높은 이상이요, 자랑스런 유산이다. 이들이 치른 큰 희생은 영원한 격려이어라. |
1957 | 51-1-04 | 구파 백정기의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01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영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0 mx0.5mx7.5m | 1956-07-20 | 백정기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으며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1운동을 목격하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동지를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해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0년 서울의 중부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1922년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곳에서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해,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둥팅 호[洞庭湖] 근처의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여름 도쿄에 잠입해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9월에는 상하이의 철공장에 들어갔다. 1925년 신채호 등이 조직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으며 5·30총파업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8년 5월에는 일본상품배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자유혁명자연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군의 시설파괴, 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상하이로 돌아와 이회영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해 상하이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한 후, 3월에 상하이 홍커우[虹口]에 있는 육삼정에서 열린 일본요인과 친일파들의 연회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으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83 |
1958 | 55-2-14 | 충혼탑(보성 벌교)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보성군 | 벌교읍 | 탑 | 기타 | 1950 | 기단높이 0.48m, 탑 높이 7.5m | 1979-06-09 | 보성 벌교리에 197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보성군 출신 군경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보성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9년 6년 9월 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보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보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959 | 51-1-02 | 익산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2m | 1971-08-15 | 1919년의 3.1만세운동은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의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함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당하고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잔인하고 악독한 살상이라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어졌고 같은 해 4월 4일 우리 익산에서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등 여러 의사가 장터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태극기의 물결을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일제의 총칼 앞에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그 거룩한 정신을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1971년8월 15일 익산 3.1운동기념비 건립협찬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이 기념비를 건립하여 현재까지 보존해오고 있습니다. |
1960 | 51-1-31 | 군옥 삼일운동 기념비/만세상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비석 | 3·1운동 | 1919 | 만세상 및 표석 | 1986-11-03 | 군옥 삼일운동 기념비는 1919년 4월 군산과 그 외곽 옥구지역 주민들이 일제의 조국침략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국권회복과 광복을 위하여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 옆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의 만세상도 건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군산에서는 3월부터 5월까지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이 21회이며, 동원 참가 인원이 총 25,800명이고, 피검자 145명, 사망자 21명, 부상자 37명이었다. 옥구 군내의 3.1운동 만세시위 역시 3월부터 5월까지 7회의 만세시위와 5,700명이 시위운동에 참가하고 50명의 피검에 32명 사망, 35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61 | 13-2-12 | 현충탑(과천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과천시 | 과천시 | 탑 | 기타 | 1990 | 1990-06-29 | 날파리는 하루 꽃은 열흘 권세는 십년 인생은 백년 예술은 천년 시간과 공간은 무한 사랑은 영원 생명을 조국에 바친 영령이시어 영원히 살으소서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며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며 전 시민에 대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함양하기 위해 건립) | |
1962 | 13-2-07 | 현충탑(안산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 안산시 | 탑 | 기타 | 1987 | 0 | 1987-05-28 | 안산시 원곡공원에 있는 현충탑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신명을 바치시다 산화하신 순국선열 및 전몰군경의 위패를 모신 곳이며, 현충탑 주변에는 한국전쟁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수호하다 전사하신 16개 UN참전국의 국기도 새겨져 있어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
1963 | 13-1-18 | 대한민국 독립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문화재단 | 비석 | 기타 | 1950 | 0 | 1948-08-15 | 한말·일제강점기에 우리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한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국권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전쟁, 순국항쟁, 3·1독립운동, 독립군전쟁, 의열투쟁, 대한민국임시정부,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있었다. 이들의 염원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고,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되었다. 수원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48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1964 | 55-2-21 | 전몰호국용사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옥룡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1 | 1993-01-19 | 광양 운평리 옥룡초등학교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옥룡면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옥룡면은 이곳 출신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3년 1월 9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옥룡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1965 | 55-2-05 | 경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탑 15m | 1985-08-06 | 전라남도경찰국은 1985년 8월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산 20번지에 6·25 당시 북한군과 교전중 전사한 남제평 경감 외 47인의 넋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당시 곡성경찰서장인 한정일은 북한군의 남하 저지 및 곡성 사수를 결심하고 태안사에 전투본부를 설치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8월 6일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남제평 경감 외 47명의 곡성경찰이 전사하였다. |
1966 | 14-1-04 | 3·1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광역시 중구 복지정책과 | 비석 | 3·1운동 | 1919 | 중 | 1983-03-28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하순 용유면 남북리에 살던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이 혈성단(血誠團)의 명의로 부근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등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의 주민이 모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날 시위에서 조명원(趙明元), 조종서(趙鍾瑞), 최봉학(崔奉學, 1897-1955), 문무현(文武鉉), 김윤배(金潤培), 윤치방(尹致芳), 윤보신(尹寶臣), 유웅렬(柳雄烈, 1897-1940), 오기섭(吳基燮), 구길서(具吉書, 1896-1971), 이난의(李蘭儀, 1885-1957) 등 11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 인천 덕교동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3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
1967 | 18-2-10 | 그리스군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여주시 | 경기도 여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1-12-17 | 국방부 제3군사령부는 1974년 10월 여주군 가남면 본두리 674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 국토수호를 위해서 희생한 그리스 참전용사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그리스군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그리스군은 1950년 12월에 1차로 851명으로 구성된 육군 1개 대대와 공군 수송편대를 한국전에 투입하고, 종전 때까지 5, 532명 군인과 8명의 여성간호장교 파견을 파병하였다. 1953년 휴전을 앞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워 휴전선 방어선을 지켜내며 186명의 전사자와 610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많은 희생을 치렀다. |
1968 | 14-2-18 | 맥아더 장군 동상 | 국가수호 | 2003-05-30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광역시 중구청 | 동상 | 6·25전쟁 | 1950 | 중 | 1957-09-15 | 인천시 중구 중앙동 자유공원 내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맥아더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시에서 1957년 9월 15일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경남북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국토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 실로 나라 존망이 위태로운 때 9월 15일 맥아더(Douglas McArthur) 사령관이 지휘한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조국을 구원한 맥아더 장군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우의를 기념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전장이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
1969 | 55-2-02 | 충혼탑(종화동)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경찰서 | 탑 | 기타 | 1991 | 탑 2개 | 1991-08-20 | 여수시 자산공원 내에 여·순사건과 6·25전쟁 등에서 순직 및 전사한 80위의 여수지역 경찰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여수경찰서는 이 지역 전몰경찰(여·순사건 72위, 6·25전쟁 4위, 공비토벌작전 4위 등)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1년 8월 20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여·순사건과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여수지역 경찰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여수경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970 | 25-2-54 | 6·25전쟁 참전 유공자비(영동읍)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 영동읍 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7-05-21 | 영동군 매천리에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동군 6·25 참전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영동읍 지회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5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영동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남진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동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971 | 24-2-02 | 반공투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충주시 | 한국자유총연맹충주시지부 | 탑 | 6·25전쟁 | 1950 | 0 | 1972-08-15 | 이 위령탑은 6·25전쟁을 전후해 민간인 신분으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다 산화한 충주지역 반공투사 호국영령 61명의 위패를 모신 탑이다. 당시 반공애국단체에서 활약한 인사 중 생존자 80여 명은 충주․중원 반공건국동지친목회를 조직하고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반공투사들의 거룩한 가르침과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고 기념하기 위해 1972년 8월 15일 이 위령탑을 건립했으며, 2009년 11월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국자유총연맹 충주시지부에서는 매년 10월 이곳에서 자유수호합동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
1972 | 51-1-30 | 군옥 출신 독립운동 공적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탑 | 기타 | 1986 | 7M X 1.65M X 3.5X | 1986-12-10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군산 옥구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전투,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군산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1973 | 55-2-18 |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비석 | 6·25전쟁 | 1953 | 비높이 1.5m, 기단 1m | 1953-09-01 |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는 1953년 백운산 지구 공비소탕작전 중 전사한 허정수 소령 이하 총 44명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위령비로서 1953년 9월에 백운산지구에 참전한 육군 870부대(제11경비대) 전우회 31명이 전남 광양시 옥룡면 산남리 산본마을에 건립하였다. 이후 2002년 11월 1일 위령비를 개축하고 주위 공간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 위령비는 여순사건의 아픔과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중요한 현장으로 안보교육과 통일교육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1974 | 55-2-048 | 호남 호국기념관 | 국가수호 | 2020-10-12 | 전라남도 순천시 | 독립기념관 | 기념관 | 기타 | 전시실 4실, 파노라마 영상실 1실, 체험전시관 1실 | 2020-6-16 | 호남지역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훈을 기리고 국민들의 호국안보 의식을 고취하여 나라사랑 정신음 함양하기 위하여 건립함. | |
1975 | 20-2-48 |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흉상 | 국가수호 | 2019-12-12 | 대전광역시 서구 | 목원대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18-9-20 | 이 곳은 미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 서위렴)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인 친구들과 자라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서위렴 2세)가 목숨을 바쳐 한국을 사랑한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하기 위해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자기 가족들의 안위와 젊은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뒤로하고 해군 대위로 자원 참전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시 정보장교로서 작전 성공에 기여했으며, 서울 탈환 부대를 이끌며 진격하던 중 1950년 9월 22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28세 일기로 전사하였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우리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추서받았으며, 2023년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전쟁 시 군목으로 참여한 그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목원대학교의 전신인 '감리교대전신학원'의 창립이사이자 신약학 교수)와 함께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여기 그의 고인의 흉상을 건립하여, 그의 숭고한 희생을 널리 전하고자 합니다. |
1976 | 11-2-17 | 함준호 대령 전사지 | 국가수호 | 2020-5-8 | 서울특별시 강북구 | 조영희 | 장소 | 6·25전쟁 | 1950 | - | 2020-05-08 | 6.25전쟁 발발 당시 육군 제7사단 1연대장이었던 함준호 대령은 국군 연대장으로서 첫번째 전사자였다. 그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북한군에 대항하다 창동 방어선으로 후퇴한 후, 오봉산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자 우이동으로 향하던 중,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1950년 6월 27일에 전사하였다. 정부는 1951년 7월 26일 함준호 대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육군준장으로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그의 고귀한 희상과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전사지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
1977 | 16-2-101 | 734고지 전승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양구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1 | 1982-06-06 | 734고지 전투! 1951년 9월 1일 중공군 1개 대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중대장 이하 전 중대원은 멸사보국의 사명을 거듭 6명의 생존자만 남긴 채 동고지를 사수 한국전사에 길이 빛나고 세계 만방에 퍼졌으니 여기 선배들의 넋을 추모하며 전적을 기리고자 전승비를 세우니 청사에 새기고 널리 후세에 전함이다. 1982년 6월 6일 | |
1978 | 16-2-100 | 故 중사 김대훈 추모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양구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기타 | 2008 | 2010-05-22 | 2008년 사단에서 실시한 통신망 구성 훈련간 원활한 무선통신 임무를 위해 3개소를 이동하며 통신이 양호한 지점을 찾으려 했으나 산악이 발달하고 골짜기가 많은 지형의 특성상 무선통신이 잘 잡히지 않자 원활한 소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고지로 올라가 임무를 완수함. 이후 복귀를 위해 산을 내려오던 중 급경사에서 제동장치의 이상을 인지하고 3차례에 걸쳐 벽면 충돌로 속도를 줄이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동승한 4명의 병사들의 안전과 대형사고의 방지를 위해 자신의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 본인은 순직하고 4명의 전우를 구함 | |
1979 | 11-2-12 | 미 육사 출신 장교 6.25참전 추모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비석 | 6·25전쟁 | - | 1996-10-02 | 1950년도 미 육사(웨스트포인트) 졸업 후 임관한 365명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쟁 중에 1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중 41명이 전사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96년 10월 2일 6.25찬전 동기생들이 추모비를 헌정하였다. | |
1980 | 13-1-44 | 군포항일독립만세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6-11-23 | 경기도 군포시 | 광복회 군포시지회 | 탑 | 3·1운동 | 2016-05-10 | 군포장 경찰주재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선열들의 숭고한 3.1독립정신 계승 및 후손들의 역사의식 제고 | ||
1981 | 33-2-17 | 충혼탑(영천시)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시 | 탑 | 기타 | 1963 | 29m | 1963-01-01 | 영천 교촌동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1,337위의 영천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시민들의 뜻을 모아 1963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고, 1974년 5월 다시 증축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2군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982 | 30-1-06 | 이명균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김천시 | 이진특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63 | 1969-03-01 |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운동 때는 경상도 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1920년 신태식(申泰植)·정순영(鄭純永) 등과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 5차에 걸쳐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냈다 | |
1983 | 51-1-43 | 위령각 | 독립운동 | 2004-12-09 | 전라북도 김제시 | 원평학수재영락회 | 사당 | 기타 | 1894 | 1987-10-01 | 김제 출신의 순국선열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위령각. 위령각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접주인 김덕명,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과 싸워 전몰한 무명의 용사들과 1919년 3월 20일 원평 장날을 기해 일어난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전도근, 전도명 등 9명의 애국지사, 그리고 의열단원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을 지낸 이종희 등 김제 출신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7년 10월 1일 원평 학수재 영락회에서 순국선열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위령각을 세웠다. | |
1984 | 43-2-26 | 학도병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화개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90-09-20 | 순천에서 재편성된 제5사단 15연대 1대대(부대장 소령 조남천,중대장 주위 정태경)전남 동부 6군지역에서 혈서로 지원 입대한 최초의 대규모 학도병 부대로서 전략요충지인 화개에서 7.25일 적6사단과 전투 40여명의 사상자를 매년 7.25일 생존자 및 유가족이 추모 |
1985 | 30-1-75 | 독립유공자 직산 김창열(원술)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경상북도 성주군 | 김규호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4-3-1 | 1919년 거국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약관 23세의 몸으로 향리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성주시장 만세 사건을 주도했다. 수많은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장짐처럼 가장하여 거사일인 4.2 성주시장에 운반, 군중들에게 나눠주어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
1986 | 55-2-06 | 경찰 승전탑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탑 높이 15.76m | 2000-11-30 | 곡성경찰서는 2000년 11월 30일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압록리전투의 전적지인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 138-1번지에 경찰승전탑을 세워 격전지를 성역화하고 당시 전공을 세운 참전경찰의 명예와 유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1950년 7월 29일 하동 방면으로 진격중인 북한군 제603기갑연대를 한정일 곡성경찰서장과 정순석 부대장 외 317명의 곡성경찰관들이 매복 공격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6·25전쟁사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한 경찰 승전이라 평가받고 있다. |
1987 | 20-1-09 | 충렬사(대전시) | 독립운동 | 2002-11-25 | 대전광역시 유성구 | 충렬사 보존및 제향추진위원회 | 사당 | 기타 | 1968 | 0 | 1968-08-22 | 조선 말 충신 민영환, 면암 최익현,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의 위패를 봉안하여 자라나는 후손들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본받게 하고자 함 |
1988 | 12-2-22 | 특공혼의 탑 | 국가수호 | 2019-4-26 | 서울특별시 서초구 | 경찰특공대 | 조형물 | 기타 | 2009-12-24 | 경찰특공대 근무 중 순직한 경찰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후배 경찰관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고 정택건 경장과 고 김남훈 경사의 성명이 특공혼의 탑에 각인되어 있다 | ||
1989 | 12-2-21 | 구로구 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9-4-26 | 서울특별시 구로구 | 구로구청 | 비석 | 6·25전쟁 | 0 | 2018-10-30 | 구로구 출신의 4,321명의 6.25, 월남참전 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지역주민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함 | |
1990 | 10-2-26 | 양정중·고등학교 6·25전쟁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9-4-26 | 서울특별시 양천구 | 양정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11-7 | 6·25전쟁 당시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참전한 양정중·고등학교 출신 참전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991 | 51-1-61 | 송와 박영관 선생 생가 및 공적비 | 독립운동 | 2018-12-4 | 전라북도 고창군 | (사)송와 박영관 선생 기념사업회 | 생가 | 기타 | 1926 | 생가, 창고, 공적비 | 1849 | 1928년 이리 동척 습격계획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금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고창 출신 애국지사이다. (1926년 음 5월 28일 오석완으로부터 권총 및 탄환을 보관의뢰받고 1928년 음 4월까지 보관하고 군자금 모집계획을 세우다가 일경에 피체 1930년 3월12일 전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외 2종목의 죄목으로 1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
1992 | 42-2-14 | 6·25 및 월남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01 | 경상남도 거제시 | 거제시 둔덕면 참전유공자회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97 | 0 | 1997-10-01 | 둔덕면 번영회는 1997년 10월 거제시 둔덕면 술역리 산119-11번지에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우일동이 격전지를 회상하며 전사자의 넋을 기리고 호국영령의 충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둔덕면 출신 6·25 및 베트남전 참전용사 312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1993 | 17-2-17 | 공군 351고지 전투지원작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고성군 | 공군제315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2 | 0 | 2001-07-18 | 공군본부는 2001년 7월 강원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188 통일전망대 내에 공군 351고지 전투지원작전 기념비를 건립하여 351고지전투 승전과 공지합동작전에 참여한 전투조종사의 전공을 기념하였다. 351고지전투는 동부전선에서 육군 제1군단이 1952년 7월 10일부터 휴전 직전인 7월 18일까지 격전을 치른 전투로, 공군에서는 F-51 전폭기가 300회 출격하여 긴밀한 공지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데 공헌하였다. 351고지의 사수로 제1군단은 동해안 일대를 수복할 수 있었다. 351고지 전투지원작전은 승호리철교 폭파작전, 평양 대폭격 작전과 함께 6·25전쟁사에서 우리 공군의 3대 전공으로 손꼽힌다. |
1994 | 43-2-27 | 충혼비(마천면)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함양군 | 마천면 | 비석 | 6·25전쟁 | 1953 | 1961-03-01 | 지리산 공비토벌에 솔선참여하여 희생된 마천출신 의용경찰 박준석 외 62명의 반공투사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함 | |
1995 | 15-1-09 | 을미의병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의병운동 | 1905 | 0 | 1997-12-27 | 을미의병에 참여한 양동면 출신 의병들의 추모비. 1895년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양평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양평 의병은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항쟁에 도화선이 되었다. 양평문화원과 의정부 보훈지청의 지원을 받아 양동면에서는 1895년에 거의한 양평지역 의병들의 애국정신과 숭고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97년 12월 27일 양동면 체육공원 내에 효열각을 건립하고 이 비를 세웠다. 그러다 2007년 8월 양평 의병 묘역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
1996 | 16-1-17 | 한서 남궁억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동상 | 문화운동 | 1863 | 높이2.2 m 기단1.2m | 1977-12-01 |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을 창립(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현산학교와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구국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비밀결사조직 십자당을 건립,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남궁억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위하여 건립 |
1997 | 55-2-33 | 6·25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04-12-10 | 전라남도 순천시 | 순천시장 | 탑 | 6·25전쟁 | 1950 | 탑 높이 8.5m | 2003-10-08 | 순천시는 2003년 10월 순천시 승주읍 평중리 262-1번지(순천기상대 뒤)에 순천시 출신 6·25참전유공자 1, 828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 기단 전면은 전투병 모습을 하고 있으며, 측면에는 무궁화 문양조각, 탑 상부에는 참전용사 1, 828명의 명단이 음각되어 있다. |
1998 | 14-1-10 | 백범광장 | 독립운동 | 2006-11-09 | 인천광역시 남동구 | 인천대공원사업소 | 장소 | 해외운동 | 1876 | 대 | 1997-10-27 | 김구 선생이 1896년 ‘치하포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일 새벽 해주감옥으로 붙잡혀간 후 7월초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8~9월에 걸쳐 모두 세 차례 신문을 마치고 수감 중이던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2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하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하였으며 당시 인천의 지리를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용동마루턱, 천주교당 뾰족집, 화개동 마루턱, 북성고지 모래밭, 부평 등의 지명을 통해 자신의 탈옥 경로를 남겼다. 김구 선생은 1911년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두 번째로 인천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 돼 노역에 시달리다 1915년 가출옥을 하였다. 김구 선생은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1946년 지방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으며 인천시에서는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의 겨레 사랑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97년 10월 27일 인천대공원 내에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동상을 세우고 백범광장을 조성하였다. |
1999 | 17-2-28 | 백일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육군 제1607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2-06-20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동덕리에 김백일 장군의 3·8선 최초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다리를 건설하여 그의 이름을 붙였고 육군 제1607부대에서 2002년 6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김백일 장군은 그 일가의 고향이 함경북도 명천이나, 조부(김영학, 독립투사)가 한·일합방 후 북간도 연길현으로 이주함에 따라, 1917년1월30일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에서 태어났다. 국자가 소학교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 1년을 마친 후 서울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군관학교를 졸업, 만주군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함께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1946년 2월 26일 전라북도 이리에서 제3연대를 창설하여 초대연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대령 계급으로 특별부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1948년 10월 여·순 10·19사건이 일어나자 제5여단장으로 임명되어, 순천에 이어 여수를 탈환함으로서 진압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제6여단장, 경기도 옹진지구전투사령관, 육군보병학교 초대교장,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제3사단장을 역임하고, 1950년 4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부재중인 작전참모부장을 겸임하여 초기전투의 산파역할을 하였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7월 12일부로 준장 진급을 한 김백일 장군은 동년 8월 제1군단장에 부임한 후, 경상북도 기계, 안강, 포항일대의 낙동강 최후 방어전투에서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의 공격을 저지, 포위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므로서 반격작전의 발판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총 반격작전시에는 예하 3사단을 동해안지구로 진격시켜, 1950년 10월 1일 국군 최초로 38선 돌파작전을 감행하였다.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다가 동년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하고, 김백일 장군은 10월 11일부로 소장으로 진급 하였으며, 제1군단은 계속적으로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함흥 탈환에 이어서 계속 진격하여 청진까지 점령, 동부전선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탁월한 지휘 능력과 전공 그리고 투철한 군인정신이 높게 평가되어 근무 중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은성훈장 및 공로훈장을 받았다. 그 후 김백일 장군은 중공군의 대공세에 대비, 작전 임무를 수행하다 1951년 3월 28일 미 제8군 작전회의에 참석한 후 군단 본부로 급거 복귀 하던 중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타고 있던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장렬히 전사 하였다. 연곡면 동덕리와 송림리를 잇는 백일교는 1950년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3·8선 최초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56년 육군야전공병단이 길이 200m, 폭 6m의 목재 교량으로 건설했다. 이후 72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재설치했으나 지지축 4개가 크게 파손돼 철거 위기에 놓여 있던 것을 김백일 장군의 아들 김동명 장군과 육군철벽부대가 강릉 시청에 교량의 역사적 가치와 영구 보존을 적극 요청했다. 이에 따라 강릉시는 교량이 통행에 이상이 없도록 한 달 동안 교판·교각·난간 등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고 철골구조물을 도색하는 등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거쳐 새롭게 단장했다. |
2000 | 30-1-74 | 상주시 국채보상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18-08-08 | 경상북도 상주시 | 경북 상주시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907 | 0 | 2016-12-16 |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에 의하여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기 위하여 벌인 1,300만원의 국채를 갚기 위한 국권수호운동으로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발의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상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해 3월 3일 김재익, 박정분을 발기인으로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를 발표하였다. 함창지역의 취지서는 황성신문 3월 24일자에 의하면 채규일, 김규환, 정동락, 박주환 등이 발기인이고 회장은 신관희, 부회장은 권용학, 총무는 김면수이며, 상주지역이 일찍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하게 된 것은 지역출신인 강신규가 대동광문회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 하였기 때문이다. 상주지역에서는 다양한 계층에서 의연금 모금에 참여 하였다. 사대부들은 향교를 통하여 200원을 출연하였고, 문중의 경우는 외서면 오씨문중, 최씨문중, 이씨문중이 참여를 하였었다. 개인으로는 장교익, 김문화는 각 40원을, 채규일 30원, 강석희, 강신규부자, 박정분, 서상요, 손국인, 김성득, 이장금 등이 20원, 김규환, 김도식, 강윤희 등이 10원을 의연하자 모금운동은 전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1원의 기부 참여자가 많았다. 국채보상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개한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권수호 운동이었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오늘날 나눔과 책임의 시대정신과도 연결된다. 그리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향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
2001 | 53-2-05 | 전몰호국용사 현충비(조도면)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진도군 | 조도면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 높이 2.15m, 비 높이 0.9m | 1996-10-01 | 진도군 창유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조도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비’를 건립하였다. 조도면 재향군인회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3년 5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조도면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조도면 재향군인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02 | 18-1-09 | 만해 기념관 | 독립운동 | 2005-06-01 | 경기도 광주시 | 전보삼 | 기념관 | 3·1운동 | 1887 | 0 | 1998-05-20 | 만해기념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요, 사상가인 만해 한용운을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1981년 10월에 설립되어 1990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남한산성내에 자리하였다. 만해 한용운은 일제 강점기를 살며 선봉에 서서 3.1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최고형을 선고 받고 옥중투쟁 3대 원칙을 스스로 지킨 강직한 인물이다. 출옥 후에도 신간회 운동, 만당 사건, 학병, 징병을 반대하며 끝까지 민족적 지조와 자존심을 지켰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반대하며 군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가하면 님, 침묵, 사랑의 증도가를 읊은 민족 시인이기도 하였다. |
2003 | 13-2-30 | 현충탑(오산시) | 국가수호 | 2003-12-08 | 경기도 오산시 | 오산시 | 탑 | 기타 | 1950 | 2003-06-05 |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에 오산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오산시에서 2003년 6월 5일 이 탑을 세웠다. 원래의 비는 1973년 6월 6일에 건립되었으나 주변환경이 변모되고 시설이 노후되어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등 시민의 바램으로 새로운 현충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현충탑은 ˝오산˝의 ㅇ ㅅ과 山자를 기본모형으로 하여 양날개와 훈불, 분수대, 위패실로 구성되어 있고 전통과 현대적 이미지가 조화되도록 하였으며 주탑의 높이는 16m로 기도하는 두손을 형상화하여 호국영령의 영원한 안식과 시민들의 평안을 기원하고 힘차게 발전하는 오산시의 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 |
2004 | 26-1-10 | 공주 3.1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공주시 | 공주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2-03-01 | 이 기념비는 공주지역 3·1만세운동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982년 3월 1일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33-2에 건립되었다. 공주 석송리의 3·1독립운동은 정암면 일대에서 유림으로 존경받던 이기한(1990, 애국장)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석송리에서 주민 수백 명을 모아놓고 만세운동이 취지를 설명하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오 무렵에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석송리에서 광정리까지 계속 시위하였으며, 시위군중이 농기구로 무장하여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는 등 만세시위가 치열해지자 주재소에서는 공주경찰서에서 연락하여 이날 오후 4시경에 헌병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30여명의 만세시위군중이 석송리 길목에서 일본경찰과 헌병이 타고 오던 자동차를 가로막고 진입을 저지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면서 그날 밤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병림 등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기한을 비롯한 주동인물 25명이 체포되었다. |
2005 | 50-1-35 | 순창 조공기보 추모비 | 독립운동 | 2008-11-25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2008-8-19 | 조기보는 나주 세지면 내정리에서 삼대독자로 출생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기보는 뜻있는 주민 몇 명과 함께 항일의병 항쟁을 전개했다. 그는 "차리리 싸워 죽을지언정 어찌 적국을 섬길 수 있느냐"며 8살의 어린 아들을 남기고 의열투쟁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에는 내정마을 야산에 몸을 숨긴 뒤 산발적인 게릴라 전략으로 일본 헌병을 교란했으며, 이후 함평출신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장흥, 영암, 나주, 강진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강진 오치동과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도 등에서 일본군와 맞서 싸웠다. 또 영산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하여 일본 장교와 기병 10여 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는 전과를 세웠다. 1908년 음력 8월 1일. 지금의 영암 반치산에서 일본군 40명과 싸워 20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지만 그도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순국하였다. 조기보 선생의 나라사랑의 마음과 그에 대한 기억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지면 내정리에 조기보 선생의 추모비를 세웠다. | |
2006 | 24-2-24 | 증평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증평군 | 증평군 | 탑 | 기타 | 2006 | 0 | 2006-03-31 | 증평군 내성리 보건소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증평군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6년 3월 3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증평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증평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07 | 16-2-72 | 강재구 기념관 | 국가수호 | 2005-10-27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기념관 | 기타 | 1965 | 1986-11-30 |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강재구 공원 내에 홍천군에서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6년 11월 30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직전, 부하들의 수류탄 투척훈련 중의 일이었다. 한 사병이 앞으로 던져야 할 수류탄을 뒤로 추켜드는 순간에 놓침으로써 그 수류탄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앉아 있던 사병들 가운데 떨어졌다. 그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수많은 사병들이 희생하게 된다. 미쳐 주워 던질 겨를도 없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침으로써 많은 부하들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출하고 산화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속했던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는 '재구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강재구 소령 기념비 옆에 면적 82.64m²에 기념관을 세워 그의 유품 125점을 전시하고 있다. 강재구 소령이 산화한 이 성지에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추모탑 및 기념관을 세우고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살신성인의 정신을 본받는 국민정신의 도장으로 길이 보존하고 있다. | |
2008 | 16-2-73 | 경찰 전적비(횡성군) | 국가수호 | 2005-10-27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1948 | 1992-06-05 | 횡성경찰서는 1992년 6월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 산1-19번지에 경찰전적비를 건립하여 1948년과 1949년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교전하다 순직한 곽윤춘 경감, 양면석 경위, 김한석 경위의 넋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선양하도록 하였다. 1948년 11월 15일 횡성경찰서 조동하 경위 지휘하에 1개 소대는 태기산 일대에서 출몰한 무장공비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10여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으나 경감 곽윤춘과 경위 양면석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1949년 7월 24일 무장공비가 강림지서를 기습하자 경위 김우기 지휘로 경찰 5명이 즉시 응사하여 2명을 사살하고 모두 격퇴하였으나 경위 김한석이 전사하였다. | |
2009 | 45-2-44 | 군경 충혼비(금성리) | 국가수호 | 2005-12-31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금성리 | 비석 | 기타 | 1950 | 1959-01-01 | 금성리 이장은 1959년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639에 6·25전쟁 당시 산화한 금성리 전사자와 제주도 4.3사건 당시 경찰로서 치안을 담당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군경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탑의 노후화로 인해 2005년 1월 31일 같은 자리에 충혼탑을 재건립하였다. | |
2010 | 26-2-10 | 공주보훈공원 | 국가수호 | 2014-12-12 | 충청남도 공주시 | 공주시 | 장소 | 기타 | 0 | 2014-06-13 |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신 전몰군경의 위패가 안치된 위패 봉안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건립한 공주시 독립유공자 기념비 등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 지키기 위한 고귀한 뜻을 기림으로써 호국정신 및 나라사랑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
2011 | 55-2-45 | 순천시 현충정원 | 국가수호 | 2018-08-08 | 전라남도 순천시 | 전남 순천시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18-06-05 |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해 산화한 호국 영령의 숭고한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9.5.월에 건립하였으며 탑 건립시 그동안 따로 봉안해왔던 죽도봉 반공순국 위령탑 144위와, 경찰관 충혼비의 321위, 향림사 충혼비의 128위를 합하여 593위를 봉안 하였다. 1995년 1월 1일 통합 순천시의 출범에 따라 같은해 5월 24일 승주 충혼탑의 1,237위를 옮겨와 총 1,830위를 합동으로 봉안하였다. |
2012 | 30-2-55 |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 | 국가수호 | 2018-08-08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시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지상2층 | 2018-03-16 | 6.25전쟁 중 아군이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지로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기도를 사전에 탐지하여 매복과 기습작전으로 적을 섬멸시킴으로서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한 상주화령장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호국 기념관이다. 광장내에는 상주 출신 6.25 및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상주시 6.25 및 월남전 참전 기념비(22.1.4. 건립, 22.12.6. 현충시설 지정)"가 세워져있다 |
2013 | 51-2-20 | 충혼탑(군산중학교) | 국가수호 | 2004-12-09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중학교 | 탑 | 6·25전쟁 | 1950 | 2004-06-30 | 군산중학교 교정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군산중고등학교 출신 97위의 학도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군산중고동창회는 모교 출신 학도병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0년 충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6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군산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군산중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014 | 50-2-36 | 임동춘대위 상 | 국가수호 | 2006-11-09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1972 | 1973-04-21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육군보병학교 내에 베트남전쟁에서 맹활약을 펴다 장렬하게 산화한 임동춘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갑종장교출신들이 1973년 4월 21일 동상을 건립했다. 임동춘 대위는 1949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김제 죽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군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230기로 입교했다. 1969년 8월, 육군 소위로 임관 이후 서부전선 소대장과 제2하사관 학교 교관을 거쳐 1971년 8월 31일 파월되어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2중대 1소대장을 역임했다. 1972년 3월, 월맹군은 춘계 대공세를 감행했는데, 안케고개 일대도 그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안케고개는 월맹군 제2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19번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핵심 요충지였다. 안케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월맹군은 3월 중순부터 남하하여 638고지를 비롯한 주요 지점을 확보하고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11일 새벽, 1개 연대 규모의 월맹군이 19번 도로를 점령하고 638고지 가까이에 있는 아군 기갑연대 1중대 기지를 습격함으로써 안케전투가 시작되었다. 안케고개가 차단되자 아군은 수색중대를 투입해 정찰을 시도했으나 적의 기습으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638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뒤이은 공격에서도 피해만 늘어날 뿐 진척이 없자 4월 22일, 임동춘 중위(당시 계급)가 속한 제2중대가 전면에 나섰다. 임 중위는 직접 특공대를 편성하고 선두에 나서 수류탄으로 적의 제1방어선 벙커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임 중위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공격을 계속 감행하여 5개의 벙커를 폭파시켜 공격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적의 집중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 ||
2015 | 42-1-39 |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10-06-09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8-05-30 | 영남지방 최초로 일어난 3·13밀양만세의거를 필두로, 의열투쟁의 역사를 새로 쓴 의열단의 창단과 무려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5당통합의 정치조직인 민족혁명당의 창당을 비롯해서 조선쳥청년혁명간부학교와 독자무력으로 일제를 타도하려한 조선의용대의 항일전쟁 및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는 애국충정이 빛나는 밀양 출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이외에도 신간회와 청년계몽운동을 비롯해서, 대종교를 통한 간도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신민부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집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이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2016 | 17-2-52 | 고성지역 전투 충혼탑 | 국가수호 | 2005-05-09 | 강원도 고성군 | 육군제5861부대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3-05-01 | 고성군 통일전망대 내에 2003년 6·25전쟁 시기 고성지역 전투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산화한 이익화, 이종직, 고태규, 황희성, 김기생, 노무자 등과 제22보병 사단 창설 이후 순직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탑을 건립하였다. 육군제5861부대와 고성군은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3년 5월 1일에 준공하여 이 지역에서 희생된 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성 출신의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17 | 50-2-37 | 박창근상사 추모 기념탑 | 국가수호 | 2007-11-11 | 전라남도 완도군 | 완도군 노화읍 | 탑 | 기타 | 1949 | 0 | 2007-11-11 | 전남 완도군 노화읍 이포리에 이 지역 출신으로 육탄10용사 중 한 사람인 박창근 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박창근 일등상사는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에서 태어나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제1사단 제11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제11연대는 1948년 5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창설되어 5월 5일부터 7월 23일까지 제주지구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으며, 1948년 11월 수원에서 문산으로 이동하여 미 제7사단 제32연대로부터 청단으로부터 고랑포에 이르는 38도선경비구역을 인수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였다. 제2대대가 38도선 전면의 불리한 지형과 적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점차 경비임무를 강화하자, 1949년 4월 25일 남천점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사단은 이를 저지하고 계속적인 우위를 유지할 목적으로 제3연대 병력 약 1천명을 송악산 후방 냉정리에 집결시켜 공격준비를 완료한 후 5월 3일 미명을 기해 송악산 능선을 따라 일제히 기습남침을 감행, 3·8선남방 100m지점의 292고지를 순식간에 유린하고 연이어 아군의 UN고지, 155고지, 비둘기고지를 점령하였다. 급보에 접한 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사단장 김석원 준장에게 이를 즉시 보고함과 동시에 훈련중인 제1대대 예하 이승준 대위의 제3중대, 채명신 대위의 제4중대를 제2대대에 증원시켜 5월 4일 미명을 기해 UN고지를 정면 공격하도록 하고, 마침 행군훈련중이던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교육대는 즉각 후방에서 비둘기고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공격지역은 노출된 급경사지역으로 10개소의 유개(有蓋) 토치카에서 중화기가 불을 뿜고 있어, 공격부대는 7부 능선에서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연대장은 서부덕 소위(당시계급 일등상사)를 특공대장으로 하는 박창근 일등상사(당시계급 하사) 외 8명의 육탄10용사를 선발하여 이들에게 81mm 박격포탄에 폭약을 장치하여 만든 폭탄을 휴대시킨 뒤 12:00를 기해 목표지점을 향해 출발시켰다. 동시에 후방에서는 57mm 대전차포를 노재현 대위가 지휘하여 특공대의 전진을 엄호하였다. 특공대는 적의 집중되는 기관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각자 맡은 적의 기관총진지에 신속히 돌입하여 육탄공격을 감행 자폭함으로써 적의 토치카를 폭파하였다. 박창근 일등상사는 육탄10용사의 한 사람으로서 1949년 5월 4일 송악산 비둘기고지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였고, 그의 장렬한 희생은 적의 견고한 진지를 일시에 폭파시켜 비둘기고지 및 UN고지를 탈환하여 개성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또한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경기도 파주군 통일공원내에 육탄10용사 충용탑과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
2018 | 52-2-62 | 완주군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7-05-03 | 전라북도 완주군 | 완주군수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0 | 2006-06-27 | 완주군은 2006년 6월 27일 전북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 309-6 독립기념관 옆에 6·25참전기념탑과 베트남참전기념탑을 나란히 건립하였다. 6·25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가한 완주군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두 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상기시키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
2019 | 42-1-40 |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 기념비 | 독립운동 | 2010-06-09 | 경상남도 밀양시 | 김기우 | 비석 | 의열투쟁 | 1920 | 0 | 2005-06-11 | 의열단 창단시 김원봉, 황상규 선생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920년 밀양폭탄투척사건과 부산경찰서장저격사건, 다나까대장 저격사건, 동경황궁습격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김상윤 선생을 추모 |
2020 | 25-2-45 | 6·25전쟁 참전 유공비(현도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 현도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6-30 | 현도면재향군인회는 2004년 6월 청원군 현도면 선동리 449-3(현도면사무소 광장)에 현도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비를 건립하였다. | |
2021 | 17-2-053 | 강릉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청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10-19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강릉시지회가 2004년 10월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45-49(통일안보공원내)에 6·25전쟁(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시까지)과 월남전(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에 참전하여 희생정신과 용맹성으로 값진 공훈을 세운 강릉시 무공수훈자 272명(6·25전쟁 260명, 베트남전 11명)의 공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작전수행 중 산화한 호국용사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2022 | 23-1-46 | 수당이남규선생3대항일투쟁사적비 | 독립운동 | 2009-05-25 | 충청남도 예산군 | 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 | 탑 | 한말구국운동 | 1855 | 1997-09-01 |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상소하고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 5월 민종식의진의 홍주성 전투에서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주성 전투 패퇴 후 그를 찾아 온 민종식 의병장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재기를 돕다가 거사일 직전인 1906년 10월 2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풀려났으나, 일진회의 밀고로 1907년 9월 다시 체포되어 같이 의병에 참여했던 그의 아들 이충구(李忠求, 1874~1907)와 함께 순국했다. 이승복(李昇馥, 1895~1978)은 그의 손자로 1913~1934년 사이에 국내와 만주 노령 지역을 드나들며 군자금 모금, 임시정부 연통제 활동 등 독립운동과 언론활동을 했고,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이 3대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9월 이 비를 세웠다. | |
2023 | 33-1-46 | 산남의병 제4차 결성지(거동사) | 독립운동 | 2013-02-18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불교조계종거동사 | 장소 | 기타 | 1908 | 0 | 1908-02-05 | 작은 보현산에 자리한 거동사(巨洞寺)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전통사찰로 조선시대까지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이곳이 산남의병의 제4차 결성지여서 2013년 2월 국가보훈처로부터 국립현충시설로 지정받았다. 산남의진은 1907년 제2대 대장 정환직(1843~1907)이 순국한 뒤, 최세윤(1867~1916)을 제3대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최세윤은 1908년 2월 산남의진의 본대가 머물고 있는 보현산 거동사에 도착하였고 한 달 뒤에 대장에 추대되었다. 최세윤 대장은 산남의진이 목표로 삼고 있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계획을 중단하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펼칠 계획으로 부장들을 각 지역으로 배치하였다.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고 본부를 남동대산으로 옮긴 최세윤은 경주·울산·흥해·포항 지역은 본부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다. 산남의진은 도처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
2024 | 23-2-24 | 보령시무공수훈자공적비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남도 보령시 | 무공수훈자회보령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9-12-09 | 무공수훈자회 보령시지회는 1999년 12월 9일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229-2에 보령 출신으로 6·25전쟁 때 신명을 다해 조국을 수호한 무공수훈자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무공수훈자의 빛나는 공훈을 기리고 후손에게 거룩한 뜻을 전하고자 이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2025 | 52-1-39 | 계명당고개 대한독립만세 탑 | 독립운동 | 2011-11-10 | 전라북도 남원시 | 사매면발전협의회 | 탑 | 3·1운동 | 1919 | 0 | 2009-11-17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식수기념일 행사 후 덕과면 일대에서 8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범수(李範壽, 1893~1945),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이준기(李俊器), 김선양(金善養), 이재화(李裁和)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사매면발전협의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9년 11월 17일 이 탑을 세웠다. |
2026 | 23-1-49 | 당진의병전투지(면천읍성) | 독립운동 | 2012-08-31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시 | 사적지 | 의병운동 | 0 | 알수없음 | 최구현(崔九鉉, 1866~1906)은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하고, 1906년 2월 통감부를 개설하자,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각처에 포고하여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로부터 370여명의 의병이 모았다. 그는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서 이 의진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결사항전을 다짐한 36명의 의병과 함께 당진 소난지도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 이주를 준비하던 중 7월 5일 새벽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어 면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2월 23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 |
2027 | 15-1-23 |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 독립운동 | 2012-11-12 | 경기도 양평군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0 | 2011-11-27 |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출생하여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일본과 국내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파견하고 자신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전민족적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1930년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1932년까지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해방 후 1947년 7월 19일 권총 피격으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생가는 여운형이 1886년 출생해서 부친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 간 1908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생가는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지만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 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서거 64주년인 2011년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2011년 11월 개관하였다. | |
2028 | 13-1-36 | 연무대3.1운동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3-11-13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시화성사업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9-03-01 | 1919년 3월 16일 수원 장날에 일어난 3·1운동이다. |
2029 | 11-1-21 | 천도교중앙대교당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천도교중앙총부 | 기타 | 문화운동 | 0 | 천도교의 총본산 중앙대교당.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 비롯되었으며, 1905년 3대 교주였던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또한 손병희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었으며, 300만 교도가 한 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당시 화폐 22만 원을 들여 지었다. 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맡았다. 나카무라는 1920년 숙명여고와 조선상공회의소 건물을 설계한 인물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은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해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지체되다가 1921년 2월에야 준공되었다. 이곳은 천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어린이운동을 비롯해 소년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 ||
2030 | 11-1-31 | 조선소년총연맹회관 터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중앙교회 | 사회운동 | 1928 | 1920년말 소년운동을 이끌어갈 조선소년총연맹 회관이 있던 곳이다. 소년운동 통합 조직인 조선소년연합회는 1928년 사회주의 계열로 운동의 주도권이 넘어가자 조선소년총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소년총연맹은 어린이의 지위를 향상하고 자립의식을 일깨워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창립 후 전국 각지로 조직을 확대하여 소년운동의 활성을 꾀했으나 좌우파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일제가 침략전쟁을 도발하면서 강제 해산 당하였다. | |||
2031 | 50-1-40 | 송진우 고택 | 독립운동 | 2012-10-17 | 전라남도 담양군 | 송진한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90 | 1894-01-01 | 송진우는 1890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의병장 기삼연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을미사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항일정신을 갖추어 갔다. 190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0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스승이었던 기삼연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한 송진우는 방황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남은 공부를 마치고,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1908년 일본으로 유학 중 송진우는 한인 유학생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그 후 중앙학교에서 교육운동을 펼치다가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1936년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손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이후 창씨개명과 학도병 권유 유세를 거부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파악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은신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직후 해방정국을 이끌면서 민주국가 건국 노력에 앞장섰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찬탁론자로 몰려 12월 30일 새벽 6시경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5인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송진우의 독립정신과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담양현지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한편 이곳은 한말 의병장 기삼연(1851~1908)이 을미사변 이후 1896년 2월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해산조치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후 평리원에 이감 중 탈출하여 은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의병장이며 성리학자였던 기삼연은 송진우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후일의 의병활동을 구상하여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 |
2032 | 25-1-22 | 한봉수 생가 터 | 독립운동 | 2012-10-17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김지영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0 | 1883-04-18 |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1919년 4월 세교리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한봉수가 태어난 곳이다. 한봉수는 1907년 의병전쟁에 투신하여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도, 강원도 등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1910년 5월 일제에 붙잡혀 사형을 받았으나 15년으로 감형되었고 8월 경술국치 후 이른바 '대사령'으로 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일 세교리 장터에서 내수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1년의 옥고를 치렀다. |
2033 | 26-2-04 | 자유평화의 빛 위령비 | 국가수호 | 2008-09-05 | 세종특별자치시 | 세종특별자치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12-18 | 충남 연기군 전동면 청남리에 개미고개 전투에서 전사한 미 제24사단 21연대 전사자 517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종특별자치시에서 2004년 12월 18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하자 미국은 전쟁개입을 선언한 후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를 선발대로 지정, 대대장 스미스 중령 지휘 하에 7월 1일 부산으로 공수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지체없이 전선을 향해 오산, 죽미령에 배치, 북한 인민군의 저지임무를 부여받았다. 7월 5일, 인민군 제4사단의 공격을 받은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는 전투에 임했으나, 대부대 공세를 감당못하고 격파당하여 분산 철수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에 미 제24사단은 제21연대장 스티븐슨 대령에게 잔여 부대를 지휘, 1번 국도에 걸친 지연작전을 수행케하였다. 7월 7일 이 제 21연대 사단장 딘 소장으로부터 "조치원 부근에 진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음 날 미곡리의 개미고개 좌우측 능선에 지연진지를 구축하였다. 7월 11일 새벽, 인민군 제4사단에 이에 제3사단이 교대하여 개미고개를 공격해 왔다. 제21연대는 전의-조치원간 전투에서 절대 우세한 적과 맞서 무려 5일간 적의 남진을 지연시킴으로써 인민군의 남침전략에 타격을 입혔다. 이에 장병들의 영웅적인 공적을 기리고 전사한 장병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격전지 개미고개에 위령비를 세운다. |
2034 | 50-2-38 | 해남군 베트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8-11-25 | 전라남도 해남군 | 월남전참전자회 해남지회 | 탑 | 월남전쟁 | 1964 | 2007-11-21 | 베트참 전쟁에 참가하여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경제발전 및 국가안보확립에 기여한 국가유공자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함 | |
2035 | 41-2-12 | 고 육군중위 차성도 흉상 | 국가수호 | 2009-09-22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초등학교 | 동상 | 기타 | 1970 | - | 2009-04-25 | 울산시 중구 서동 병영초등학교에 이 학교 출신으로 훈련중 잘못던진 수류탄을 온 몸으로 덮어 순직한 차성도 중위를 기리기 위해 병영학교 총동창회에서 2009년 이 흉상을 세웠다. 차성도 중위는 1969년 육군 3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교, 이듬해인 1970년 강원도 화천 육군 제27사단에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5월13일 소대 야간방어훈련에서 한 소대원이 수류탄을 투척하려 안전핀을 뽑다 실수로 손잡이를 놓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병사들을 구하고 자신은 복부가 파열돼 순직했다. 자신의 생명을 던져 부하의 목숨을 구한 희생정신을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고자 이 흉상을 모교 교정에 세웠다. |
2036 | 30-2-40 | 김천 베트남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06-09 | 경상북도 김천시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김천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50 | 0 | 2006-04-15 | 김천시는 2006년 4월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우리 국군의 용맹을 크게 떨친 김천 출신 베트남참전유공자의 공적과 호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김천시 대광동 881-1(환경공원 내)에 베트남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 건립에 김천 출신 참전전우 228명의 정성어린 모금도 큰 보탬이 되었다. |
2037 | 25-2-65 | 베트남 참전 유공자 탑(보은군)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보은군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보은군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5-03-02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유이 십자군으로 이역만리 월남전에 참전한 베트남참전용사들의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2038 | 33-1-48 | 형옥 구회수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13-05-13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구본덕 | 비석 | 의병운동 | 2007 | 2007-11-01 | 형옥 구회수 선생은 경북 영일(현 포항시) 출신으로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정환직, 정용기 선생이 조직한 항일의병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보현산과 동대산의 중간 영일군 죽장에 거주하면서 군사모집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영천, 영일, 청송 일대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 |
2039 | 52-1-41 | 독립유공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13-11-22 | 전라북도 남원시 | 광복회 남원정읍순창연합지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0 | 0 | 1970-03-01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임시정부, 노동운동, 국내항일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분들은 다음과 같다. 박권영(朴權永, 1898~1967), 박기영(朴琪永, 1893~1938), 박재홍(朴在洪, 1845~1910), 양문순(梁文淳, 1862~1927),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이두석(李斗碩, 1921~1947), 이태현(李太鉉, 1907~1942), 전규문(田圭文, 1881~미상), 정한익(丁漢翼, 1890~1977), 황찬서(黃贊西, 1873~1919) 남원 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0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2040 | 53-1-020 | 목포 양동교회 3.1운동 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양동교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10101 |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계획한 장소이자 3.1운동을 이끌었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지역 유지였던 양동교회 교인들은 영흥학교, 정명여학교의 교사.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전단을 준비하고 목포상업학교와 목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원하기로 임무를 분담한 뒤, 목포 곳곳에서 동싲시다발적 시위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1919년 4월 8일 양동교회 교인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으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많은 시련을 겪었다. |
2041 | 51-1-53 | 정화암 생가 | 독립운동 | 2013-11-13 | 전라북도 김제시 | 정화암선생기념사업회 | 생가 | 3·1운동 | 0 | 방 2개와 툇마루, 부엌 | 1931-01-01 | 3·1운동과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태어난 곳입니다. 정화암은 김제시 장화동에서 태어나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연락기관인 독판부를 조직하여 국내연락망을 결성하는 한편 7월에 미국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이후 북경으로 가서 아나키즘 독립운동가와 만나 폭탄제조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의 혁명 세력들과 함께 동방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했으며 상해해방연맹,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여 친일파 및 전향자들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과 일본군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2042 | 42-2-047 | 거제시 월남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거제시 | 고엽제전우회 거제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5 | ㅇ | 2008-04-30 | 월남참전전우회 거제시지회는 2008년 4월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산59-9에 세계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베트남 전선에 참전하여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거제시 출신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자유수호 정신을 기리고 나라 사랑과 국가 안보 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2043 | 53-2-27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증도면) | 국가수호 | 2010-06-09 | 전라남도 신안군 | 증도면장 | 비석 | 6·25전쟁 | 0 | 높이 2m | 2006-04-02 | 증도면에서는 2006년 4월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220-6에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하신 증도면 출신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2044 | 51-1-55 | 태인의병 주둔지-태인향교 | 독립운동 | 2014-07-18 | 전라북도 정읍시 | 이원재 | 기타 | 의병운동 | 정면3칸, 측면3칸의 대성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명륜당, 정면4칸, 측면 2칸의 만화루, 장수재, 양사재, 사마재, 고직사 | 1592-01-01 | 최익현 의병장이 이끄는 태인의병이 이곳에 머무르며 전력을 강화 하였던 곳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전북 태인으로 내려가 임병찬과 함께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태인의병을 일으킴. 태인군수는 의병의 기세에 눌려 달아나고 태인의병은 태인향교에 머무르면서 관아의 무기를 확보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함. 1906년 6월 5일 이곳 태인을 떠나 정읍, 곡성을 거쳐 순창까지 진격한 태인의병은 6월11일 순창에서 관군과 마주치자 일본군이 아닌 같은 민족과의 싸움을 피하고자 의병을 해산함. | |
2045 | 13-1-39 | 3.1운동만세시위지(수원자혜병원) | 독립운동 | 2014-03-18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시 | 장소 | 3·1운동 | 1919 | 1919-03-01 | 1919년 3월1일 발발한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 한 달 내내 수원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으며 이 가운데 3월 29일 일어난 만세운동은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기생 30명의 주도로 일어났다. 15~23세인 이들은 수원기생조합 기생들로 이들의 만세운동은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일제의 '기생단속령'으로 과거 예술인으로 인정받던 이들이 관기로 내몰리면서 내재된 반발심을 사전 계획 하에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원기생조합 기생들은 자혜의원으로 검진을 받으러가던 중 일제의 보건 정책에 항거하여 수원경찰서 앞에서 김향화(金香花)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자혜의원 앞으로 이동하여 다시 한번 독립만세를 불렀다. 자혜의원에서 이들에 대한 검진을 거부하자 기생들은 의원을 나와 다시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김향화는 곧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자혜의원은 현재의 도립의료원과 비슷한 성격으로 1909년에 시행된 칙령에 의해 전국에 설립되었다. 칙령 발표 후 청주·전주·함흥에 의원이 설치되었으며, 수원 자혜의원은 공주·춘천·광주·대구·진주 등과 함께 1910년에 세워졌다. 자혜의원은 초기에 봉수당 건물을 이용하여 진료를 하였으며, 1923년 봉수당을 허물고 신축 벽돌 건물을 세웠다. 1990년대까지 수원의료원이 이 자리에 있었다가 화성복원 사업과 함께 해체 전 봉수당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 |
2046 | 26-1-14 | 순국선열전주이공학순추모비 | 독립운동 | 2014-12-12 | 충청남도 공주시 | 애국지사이학순추모회 | 비석 | 기타 | 이학순선생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은사금을 보내어 오자 이를 끝까지 거절하고 자결 순국 이내수선생은 이학순선생의 자녀로 군자금 모집 활동,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로 참여, 대동단의 유림 대표 및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 등 | |||
2047 | 16-1-41 | 항일의병장한갑복추모비 | 독립운동 | 2016-04-27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청 | 비석 | 의병운동 | 1907 | 2011-10-08 | 1907년 정미의병 봉기시 원주 감영 진위대 소속 장교로서 홍천군 동면에서 의병을 조직, 홍천․원주․횡성․평창․영월․강릉 등 강원도 전역에 걸쳐 의병활동을 전개한 한갑복 의병장 및 한갑복 의병장 전사 시(홍천군 동면 화방마을, 1907.11.28.) 함께 참전한 22명의 무명(無名) 대원의 공훈 추모 | |
2048 | 30-1-70 | 인동3.12독립만세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6-04-27 | 경상북도 구미시 | 구미시 | 탑 | 3·1운동 | 1919 | 2015-12-22 | 인동 3.12독립만세운동을 통하여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후손에게 계승하고 나라사랑정신을 고취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 및 지역주민 화합의 장으로 활용 | |
2049 | 45-2-49 | 월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11-06-08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월남참전자회제주도지부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2-06-01 |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입구 공원 내에 2002년 제주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1,900여 명의 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제주도월남참전기념탑건립연합추진위원회에서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애국심을 기리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8개년 동안 이국만리 월남전선에서 제주시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2050 | 31-1-72 | 혜인 이현구선생 충절비 | 독립운동 | 2014-12-12 | 경상북도 영주시 | 이재현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35 | 0 | 2013-11-26 |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고 단발령 떨어지자 안동일원에서 의병을 일으킴.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항일항쟁을 본격적으로 하려 했으나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의병해산령이 떨어지자 자진 해산했음. 그러나 경술국치와 창씨개명 등으로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조상님이 물려주신 이름 석자 마저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며 패랭이를 쓰고 방랑길에 올랐고 영주 안정 생현리에 머물 장소를 정했으나 끝내 죽기를 결심, 36일간의 단식 끝에 1940년 9월 7일 순국했다. |
2051 | 25-2-68 | 구국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1-11-10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군 구국참전 경찰유공자회 | 비석 | 6·25전쟁 | 0 | 0 | 2011-06-16 | 영동군 구국참전경찰 유공자회는 2011년 6월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498-3에 구국유공자비를 건립하여 6·25 전쟁 당시 젊은 나이에 상촌면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 등 영동의 격전지에서 조국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의용경찰대를 조직하여 공비소탕작전에 참여했던 참전유공자 48명의 넋을 기리고 참전유공자 이름을 새겨넣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는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되새기도록 하였다.-- |
2052 | 50-2-042 | 산동교 | 국가수호 | 2011-11-10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광역시 북구 | 장소 | 6·25전쟁 | 1950 | 0 | 1934-01-01 | 6·25전쟁 때 북한군의 정예부대였던 6사단은 2개 부대로 나눠 15연대를 익산~김제~목포 방향으로, 1연대를 익산~전주구례~순천방향으로 진격시켰다. 전주와 고창을 점령한 그들은 1950년 7월 22일 장성을 점령했다. 당시 광주지역에는 국군 5사단 예하 15연대와 26연대가 재편성하고 있었다. 국군의 무장 수준은 경찰로부터 입수한 99식 소총 10정과 광주병원(3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가 휴대했던 M1 소총 몇 정이 전부였으며, 각 부대는 10% 정도만이 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병력 규모는 500명 정도였으나 무장은 M1과 99식 소총뿐이었다. 그나마도 3명 중 1명만이 소총을 휴대한 실정이었다. 북한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950년 7월 23일 광주 북구 동림동에 위치한 옛 산동교에서 북한군과 최초의 교전이 발생했다. 교전 당일 장성에서 퇴각한 26연대는 7월 23일 새벽 4시에 북한군 전차 방어를 위해 산동교를 폭파했다. 26연대 병력과 김홍희 총경이 지휘하는 장성경찰서 대원들로 편성된 군경 혼성부대는 산동교 부근 산등성이에 진지를 편성한 후 적 공격에 대비했다. 7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6사단 15연대 병력 일부가 전차 2대를 앞세워 산동교에 이르렀다. 군경 혼성부대는 2.36인치 로켓포 등을 발사하며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전투로 인해 북한군의 마산지역 이동은 상당한 시간 동안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산동교는 광주지역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유일한 전적지로, 2011년 11월 10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이처럼 역사의 아픔과 함께 영산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옛 산동교는 친수(親水) 공원의 일부가 돼 새롭게 건설된 신 산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시민들의 건강과 문화의 공간, 6·25 체험행사, 현충시설 탐방 등 나라 사랑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2053 | 20-2-42 | 반공건국청년운동순국기념탑 | 국가수호 | 2013-11-22 | 대전광역시 중구 | 사단법인 대한민국건국회 대전충남본부 | 탑 | 6·25전쟁 | 1950 | - | 1986-10-23 | 대전 사정동에 1986년 6·25전쟁 기간에 희생된 대전과 충남 출신 애국청년단원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반공건국청년운동순국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건국회 대전충남본부는 이곳 출신 애국청년단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6년 10월 23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전과 충남 청년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2054 | 16-1-03 | 의병장 이은찬공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장 | 비석 | 의병운동 | 1878 | 1968-10-29 | 본관 전주(全州). 일명 언찬(諺瓚)·헌찬(憲瓚).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출생하였다. 유생(儒生)으로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홍천(洪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원수(元帥) 이인영(李麟榮)의 중군(中軍)이 되어 양주(楊州)에서 이구재(李九載) 등과 함께 해산군인 80명을 포함, 각지의 의병 500여 명을 규합, 24진을 편성하여 서울진격을 결행하였다. 12월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러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완강한 저항을 받고 패퇴, 양주에 머물렀다. 1909년 간도(間島)에 들어가 군대를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밀정(密偵) 박노천(朴魯天)·신좌균(申佐均) 등의 모략에 빠져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그는 우국시조(憂國時調) 한 수를 읊고 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2055 | 55-2-22 | 백인기 장군 전사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구례군 | 산동면 | 비석 | 기타 | 1948 | 비 높이 1.42m, 폭 0.37m | 1954-06-25 | 보병12연대(연대장:대령 백인기)가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으로 구례중앙초등학교에 지휘본부를 두고 토벌작전을 수행중 작전사령부(남원)로 부터 지휘관회의차 긴급호출을 받고 호위병 2명과 함께 남원으로 가던중 구례 산동 시상리 사랑부락앞에서 공비들의 기습공격을 받고 마을 뒷산으로 피신중 공비들에게 포위되었다고 판단, 마을입구에서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함 |
2056 | 10-2-19 | 윌리엄 해밀턴쇼 동상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은평구 | 은평구 | 동상 | 6·25전쟁 | 가로 2m, 세로 2m, 높이 2.8m, 기단 1.1m , 동상 1.7m | 1987-10-05 | 6.25전쟁에 참전하여 은평구 녹번리 전투 중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를 기리기 위한 조형물 | |
2057 | 14-2-39 | 몽금포작전전승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해역방어사령부 | 비석 | 6·25전쟁 | 1949 | 소 | 2015-08-23 | 충무공 탄신 470년과 조국광복, 해군창설 70주년을 맞아 몽금포작전에 참가한 특공대원들의 헌신적인 무공을 기리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해군본부에서 2015년 8월 23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건립비 3억원 전액이 국방부 예산으로 지원된 전승비는 가로 13m, 세로 10m, 높이 7.4m로 파도를 헤치며 몽금포 항 안으로 진격하는 JMS-302정(통영) 갑판에서 37밀리 포를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대원들의 모습과 적진을 가리키면서 전투 지휘를 하는 정장(소령 공정식)의 모습을 표현했다. 몽금포작전은 정부 수립 전후 북한군이 아군 함정과 미국 군사고문단장 전용 보트를 납북하는 등의 불법 도발을 지속적으로 자행하자 이러한 북한의 불법 도발에 우리 해군이 1949년 8월 17일 적의 항구인 몽금포를 기습하여 납북 선박을 구출하고 보복응징을 위해 감행한 우리 군 ‘최초의 대북 응징보복’ 군사작전이다. 해군은 PG-313(충무공), JMS-301(대전), JMS-302(통영), JMS-307(단천), JMS-309(대동강), YMS-503(광주) 등 함정 6척과 20명의 특공대원을 구성하여 8월 17일 새벽 6시 몽금포 해역에 도착하여 전투를 개시하였다. JMS-302는 빗발치는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항내로 돌진하여 부두에 계류 중인 경비정 4척을 격침 또는 대파시켰고, 끝까지 저항한 경비정 1척에 승선하여 육박전으로 북한군 장교 등 5명을 생포하고 경비정 1척을 나포하는 큰 전공을 거두었다. |
2058 | 43-1-65 | 백용성선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17-04-19 | 경상남도 합천군 | 용탑선원 | 비석 | 3·1운동 | 사리탑 | 1941-12-30 | 백용성 선사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 중 한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만세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농장을 조성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그 공훈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비석글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짓고(撰) 전(篆)은 역시 33인중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이 썼음을 비신의 우측면의 글귀로 알 수 있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삼일절날<다례제(茶禮際)>를 올리고자 계획하고 있다. | |
2059 | 43-2-52 | 통영시호국참전유공자탑 | 국가수호 | 2012-05-16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시 주민생활지원과 | 탑 | 기타 | 0 | 2009-12-10 | 통영 무전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산화한 전몰용사와 참전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통영시호국참전유공자탑’을 건립하였다. 통영시는 이곳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산화하거나 참전한 유공자(6·25전쟁 참전자 1, 194명, 전사자 1, 220명, 베트남전쟁 참전자 499명 등)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12월 10일 이 탑을 건립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통영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060 | 51-1-59 | 애국지사 송원 심재순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17-04-19 | 전라북도 군산시 | 심규증 | 비석 | 기타 | 1927 | 공적비1개(기초좌대 6*6m , 기단3m, 높이 6m | 2016-11-19 | 1927년 11월 말경 전북 옥구의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동년 12월 일본 동경에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여 국내의 신현국, 심상악, 심상호, 황봉규, 심호택에게 발송하고 1928년 1월 동경에서 김병우에게 신간회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하도록 교시하고 그 방법을 제시한 문서를 송부하였으며 1930년 9월 옥구로 귀향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31년 8월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
2061 | 15-2-99 |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 | 국가수호 | 2013-05-09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장소 | 6·25전쟁 | 1952 | 0 | 1952-01-01 | 1952년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에 세워진 유엔군 화장장시설은 화장장 시설 1동(1, 596㎡)으로 2008년 10월 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5월 9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도 지정되었다. 경기도 연천지역은 백마고지 전투, 철의 삼각지 등 고지쟁탈전이 치열하여 유엔군 희생자들이 많이 발생하자 이곳에 유엔군 전사자를 위한 화장장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휴전 직후까지 사용하였다. 전쟁 당시의 화장장 시설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주요한 유적으로 6·25 전쟁사에 있어 유엔군 참전 상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이며 생생한 현장으로 그 보존 가치가 있다. |
2062 | 11-2-04 | 미아리전투지 | 국가수호 | 2013-05-09 | 서울특별시 성북구 | 성북구 복지정책과 | 기타 | 6·25전쟁 | 1950 | 미아리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에 인접한 전선이 무너지게 되자, 3·8도 분계선으로부터 45km 거리에 있는 수도 서울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육군본부는 이응준(李應俊) 소장이 이끄는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劉載興)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이 미아리고개에서 치른 최후의 서울 방어 전투 명령을 내렸다. 국군 미아리지구 전투사령부는 미아리에서 국군 방어병력이 북한군에게 밀리자 서울 방어의 최종목표인 미아리 방어선의 유지를 위해 길음교를 폭파하기로 하였다. 국군 공병대는 북한군 전차부대가 1950년 6월 27일 저녁 수유리를 통과하여 길음교에 도착하자 명령에 따라 교량폭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선두부대가 이를 미리 알아채고 도화선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면서 교량 폭파에 실패하고 말았다. 교량 폭파에 실패하자 길음교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국군 제1연대와 제15연대는 모든 화기를 동원해 일제히 20여 분 동안 집중 공격했으나 단 한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했다. 이 때 제15연대 5중대 김정순 대위가 지휘하는 결사대가 전차에 올라 공격하다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6월 28일 새벽 1시경 북한군이 길음교-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진입하면서 미아리를 중심으로 한 서울방어선은 붕괴되었다. | ||
2063 | 53-2-29 | 박경조경위 흉상 | 국가수호 | 2013-11-22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해양경찰서 | 동상 | 기타 | 2008 | 흉상(50*40*80cm), whkeo(80*80*110cm) | 2012-12-21 | 전남 목포시 산정동 북항친수공원 내에 불법 조업 어선을 단속하다 사망한 박경조 경위를 추모하기 위해 신안군민과 해양경찰이 2012년 12월 21일 흉상을 제작 설치했다. 박경조 경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1990년 순경으로 특채돼 2001년부터 목포해양경찰서에서 근무했고 2008년 2월부터 목포해경 소속 경비정 3003함에서 병기장으로 근무해왔다. 특히 불법 조업 어선 나포의 공로가 인정돼 2006년 10월 해양경찰청장상을 받는 등 4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박경조는 목포해양경찰서 소속 경찰공무원으로서 2008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배타적경제수역 내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목포해양경찰서는 해당 중국 어선을 검문하는 과정을 촬영한 3003함의 채증 비디오 영상을 분석한 결과 고속 보트를 타고 중국 어선에 접근한 박경조 경위가 제일 먼저 배에 올라탄 순간 중국 선원이 휘두른 삽에 머리를 맞아 바다로 추락했다고 밝혔다. |
2064 | 15-2-47 | 38선 돌파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6-05-01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에 1951년 5월 28일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5월 31일 연천군에서 기념비를 설치했다. 6·25전쟁 당시 미국 제1기갑사단 제70탱크대대 제191분견대, 그리스 원정군 1대대, 태국군 제21보병대대원들이 1951년 5월 28일 3·8선을 돌파한 무공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다. 다음은 비문의 내용이다. 여기는 3·8선 겨레의 슬픔 어린 원한의 길목입니다. 우리 모두 하루속히 북녘을 읽은 땅과 그리운 부모 형제를 찾기 위하여 승공통일의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의 슬기를 모아 협동과 단결로 전진합시다. 연천군에서는 겨레의 슬픔이 어린 원한의 길목 3·8선을 통과하는 이 지점에 표석을 세우고 평화통일의 굳건한 신념을 키워 나갈 것을 기원했다. |
2065 | 53-2-24 | 충혼탑(지도읍)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7.2m | 2008-06-02 | 신안 지도읍 안산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신안군은 이곳 출신으로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8년 6월 2일 준공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신안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66 | 18-2-05 | 현충탑(여주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여주시 | 여주시 | 탑 | 기타 | 1956 | 1956-06-01 | 여주 상리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장남석 외 809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여주군)’을 건립하였다. 여주군는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6년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81년 6월 6일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여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여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067 | 43-2-35 | 참전 송덕비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고성군 | 하일면참전전우회 | 비석 | 기타 | 2000 | 기념비 1동 | 2000-11-09 | 6.25전쟁과 월남전에 이 지역의 젊은이로서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데 공헌한 분들(명예를 선양하고 후세에 자랑으로 삼고자 6.25전쟁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건립) |
2068 | 16-2-83 | 제2땅굴 위령비 | 국가수호 | 2011-06-08 | 강원도 철원군 | 제6보병사단 | 비석 | 기타 | 1975 | 1975-07-20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GOP 지역 내에 북한의 남치용 지하 땅굴 발견시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사망한 청성부대원 8위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6사단이 1975년 7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서울 북방 108km 지점에 위치한 이 땅굴은 육군 제0사단 소속 초병이 경계근무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청취하므로 서 이에 대한 정밀 조사를 착수한 후 북괴가 땅굴을 파고 있다는 확신을 얻어 1974년 12월 16일부터 땅굴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추 결과 1975년 3월 19일 3개소의 시추공에서 직경 2m 크기의 공간이 남쪽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 북괴의 엄청난 도발현장을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주한 UN군 사령부는 중부전선 철원 북방 약 13km지점인 한국군 제0사단 지역에서 북한의 남침 땅굴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3월 24일 국방부와 UN군사령부의 공식발표에 의해 제2땅굴의 전모가 밝혀졌다. 이 땅굴 발견 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내부에 처음으로 투입된 우리 장병이 북한군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산화한 6사단 청성부대원 고 김호영 중사, 중사 김재대, 하사 김홍섭, 하사 김명식, 병장 송영복, 병장 김영용, 병장 김볼래 이상 8분(화랑무공훈장 추서)의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 순국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마련한 추모 위령비다. | |
2069 | 50-2-48 | (나주시)국가유공자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7-04-19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재향군인회 | 탑 | 6·25전쟁 | 1950 | 2010-10-10 | 나주지역 출신의 6.25전쟁 및 월남전 참전 국가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유공자의 위상 정립과 전후세대의 국가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국가유공자 참전기념탑을 건립함 | |
2070 | 50-2-49 | 서정우하사 흉상 | 국가수호 | 2017-04-19 | 광주광역시 남구 | 문성중학교 | 조형물 | 기타 | 2010 | 높이 1.95m, 둘레 0.8m*0.6m | 2015-10-31 | 2010년 11월 23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서 대한민국 해병으로 복무 중 말년휴가를 나오다가 북한군 도발소식에 조국수호의 일념하나로 자진 귀대하던 중 북한의 폭격으로 인하여 장렬히 전사한 사실을 그의 모교인 문성중학교에 흉상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다. |
2071 | 15-2-115 | 단천군 반공투사 위령비 | 국가수호 | 2018-12-4 | 경기도 양주시 | 함경남도 단천군민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6-09 | 6.25전쟁 당시 1.4후퇴와 흥남철수작전에서 각 군과 영도유격부대, 경찰 등에 입대하여 전투 중 전사하거나 실종된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 청년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2072 | 15-1-35 | 조소앙 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8-12-4 | 경기도 양주시 | 경기도 양주시 | 기념관 | 민족주의운동 | 0 | 2016-5-25 | 유년시절을 양주에서 보낸 조소앙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 하고, 고귀한 독립운동정신을 기리며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 후손들에게 애국정신 함양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 | |
2073 | 26-1-18 | 선장 4.4 독립만세운동 기념상 | 독립운동 | 2018-12-4 | 충청남도 아산시 | 4.4 선장만세운동 유족회(대표 : 정해곤) | 동상 | 3·1운동 | 1919 | 0 | 2018-7-30 | 1919년 4월 4일 선장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운동 전개 하였다. 일본 경찰은 주재소까지 온 시위대에게 총을 쏘았고 최병수 순국, 정수길, 임천근, 서몽조, 오상근, 김천봉 체포되며 시위대 해산하였다. |
2074 | 31-1-80 | 독립유공자 권오돈, 권준희 생가(수곡고택) | 독립운동 | 2018-12-4 | 경상북도 안동시 | 권정숙 | 생가 | 기타 | 1926 | 0 | 1792-01-01 | 수곡고택은 일제강점기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 독립유공자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로서 학생 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옥고를 치른 권오돈 선생의 생가이다. 권준희는 1915년 7월 경북 대구에서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혐의로 1918년 체포되었다. 권오돈 1926년 연희전문학교에 재학중 6·10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여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정학처분을 받았으며 1928년 신흥청년동맹원으로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 중 옥사하였다. |
2075 | 23-2-32 | 호국무공수훈자기념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충청남도 태안군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6,600, 4,500, 5,000 | 2016-4-22 | ||
2076 | 16-2-57 | 양구전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21사단(제71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1994-12-03 | 6·25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양구지구 전투(도솔산지구전투, 펀치볼지구 전투, 가칠봉지구 전투, 피의 능선전투, 단장의 능선전투, 백석산지구 전투 등)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1994년 12월 3일 강원 양구군 방산면 건솔리 제21보병사단(백두산 부대장)이 양구전투위령비를 건립하였다. 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이 위령비 앞에서 호국영령 위령대제 추모식이 개최되고 있다. | |
2077 | 23-1-33 | 홍주성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 | 장소 | 의병운동 | 1896 | 1870-01-01 | 홍주성은 홍주의병이 1906년 5월 30일에서 31일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적지로 국가지정사적 제231호이며, 길이 약 1, 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성곽, 조양문, 아문이 1972년 사적 231호로 지정되었으며 안회당과 여하정이 1997년 추가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종식의진은 1906년 3월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 등지를 습격하여 병기를 확보하고 충청서부지역의 거점인 홍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이 이를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였다. 5월 29일 홍주성 천변리에 도착한 일본군은 홍주성 북문과 동문으로 공격하여 성 안의 의병을 포위,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성의 남문과 서문에 기관총 사격을 수차례 실시하여 의병의 주력을 성의 남서쪽으로 집중시킨 다음, 5월 31일 새벽 성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동문과 북문으로 일본군이 밀려들자 의병들은 대로를 차단하고 시가전을 전개하였으나 사상자가 급증하여 성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는 신돌석, 정용기 부대의 의병활동과 더불어 3대 의병전투의 하나로 손꼽힌다. | |
2078 | 15-2-48 | 필리핀군 참전비(고양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고양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m | 1974-10-02 | 필리핀은 1950년 9월 20일 한국에 대대급 전투단을 파견하여 개성-평양 주보급로 경계 작전(1950.11.01.~11.27.), 율동 전투(1951.04.22.~04.23.), 아스널·이리 고지 전초전(1952.05.18.~06.21.), 백석산-크리스마스 고지 전투(1953.07.15.~07.18.)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1955년 5월에 본국으로 개선했다. 참전기간 동안 연인원 7,420명이 참전해 *448명(사망 92, 부상 299, 실종 57)이 피해를 입었다 ※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필리핀군의 피해는 398명(전사 112, 부상 229, 실종 16, 포로 41)이다. |
2079 | 15-2-05 | 가평군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탑 | 6·25전쟁 | 1950 | 1972-06-06 | 가평군은 1972년 6월 6일 가평군청 옆에 가평군 출신 6·25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그 후 가평군이 확장됨에 따라 탑의 이전 필요성이 제기되어 1977년 12월 15일 가평읍 달전리 산39에 재건축 준공하였다. | |
2080 | 16-1-011 | 윤희순여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춘천시 | 예림회강원도지부 | 동상 | 의병운동 | 1860 | 높이2.4 m 기단0.8m | 1990-11-07 | 윤희순 여사는 1895년 의병장 류홍석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등을 작사 작곡하여 의병운동지원 및 부녀자들의 항일 독립운동정신을 고취하였고, 1907년 춘성군 가정리에서 여성의병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 의병지원 활동을 하였으며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류홍석선생의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지원하였음.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병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윤희순 여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며 널리 선양하고자 1990년 11월 7일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
2081 | 16-1-20 | 항일의병 전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양구군 | 비석 | 의병운동 | 1896 | 1978-11-15 | 양구읍 공리와 석현리 경계지점의 실학고개 정상에 있는 항일의병 전적비는 팔도창의대장 유인석(1842~1905)을 비롯하여 이강년(1858~1908), 최도환(1851~1911) 의병장들이 이곳 군민과 더불어 침략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강원도에서 1978년 11월에 건립한 것이다. 전적비 비문에서 "유인석선생은 1896년 7월 방산에 의진을 치고 그 달 24일에는 조백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양구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국에 항일의 세를 떨쳤고 이 고장 출신 최도환 선생은 1906년 이후 강원, 경기지방 곳곳에서 일제 침략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특히 방산과 양구, 양구와 춘천, 그리고 양구와 문등으로 연결된 교통로는 혈전의 길목이었다"고 적고 있다. 유인석 선생은 1896년 7월 방산에 의진을 치고 조백룡을 선봉장으로 양구면전투에서 대첩을 거둠으로서 전투에 항일의세를 떨쳤고 이 고장 출신 최도환 선생은 1906년 거의하여 양구를 주요 활동무대로 삼았다. | |
2082 | 15-2-16 | 육탄 10용사 충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육탄10용사기념사업회 | 탑 | 기타 | 1949 | 1980-01-01 | 육탄10용사는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5월 4일, 북한군의 기습으로 빼앗긴 개성 송악산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박격포탄을 가슴에 낮고 적 벙커에 뛰어들어 장렬히 산화한 장병들이다. 당시 북한군의 토치카를 파괴해야만 고지를 탈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획을 세웠으나 위험천만한 작전에 공격대원을 지정할 수 없어 지원자를 받았는데, 서부덕 이등상사, 박창근 하사, 박평서 상등병, 황금재 상등병, 오제룡 상등병, 윤옥춘 상등병, 김종해 상등병, 이희복 상등병, 양용순 상등병, 윤승원 상등병 10명의 용사들이 지원하였다. 토치카 파괴를 위해 박창근 하사가 수류탄을 안고 돌진하였으나 적진으로 가는 도중 집중사격을 받아 전사하자, 나머지 용사들은 각자 정해진 목표물을 향해 300m까지 포복,총탄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끝내 자신들의 몸을 던져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들의 희생으로 빼앗겼던 292고지, UN고지, 155고지, 비둘기고지 모두를 탈환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10용사 모두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서부덕 이등상사(현재는 중사)는 소위로, 박창근 이등중사와 나머지는 모두 육군상사로 특진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스스로 나서 목숨을 바친 육탄 10용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통일공원에서 호국정신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이들의 정신을 잊지 말고 이어나가자는 의미에서 육군에서는 조국 수호의가가 투철한 군인들을 선발해 '육탄10용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 |
2083 | 15-2-59 | 설마리 전투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7-06-29 | 보병 제25사단은 1957년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산1에 설마리전투에서 전사한 영국 글로스터연대의 제1대대와 제170 박격포대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영웅적 공적을 찬양하고 길이 전하기 위해 설마리전투비를 건립하였다. 설마리전투는 1951년 4월 서울공략을 위해 인해전술로 남하하던 중공군과 임진강 일대를 지키던 영국군이 사이에 벌어진 격전으로 꼽힌다. 중성산 일대에 주둔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원 652명은 10배도 넘는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아 중성산과 설마리 계곡에서 나흘간 버티며 혈전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탈출한 영국군은 67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59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가 됐다. 이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서울진입을 결정적으로 지연시킨 뛰어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
2084 | 17-1-08 |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탑 | 3·1운동 | 1919 | 너비 9m, 높이 6.4m | 1999-04-13 | 1919년 4월 2일 강릉에서 최선재 조대현 김진숙 최선근 최돈옥 최선호 정식화 등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동지들과 함께 100여 매의 태극기를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배포하면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후 강릉에서는 4월부터 5월까지 연인원 1만여 명이 참가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1998년 8월 14일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건립위원회가 구성되어 199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이 기념탑을 준공했다. |
2085 | 15-2-50 | 노르웨이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2-03-30 | 경기도 동두천시 하봉암동 소요산관광지 내에 수많은 부상장병을 치료하고 전쟁고아들을 지원하는 의료사업을 펼친 노르웨이 의료진을 위해 한·노협회에서 1972년 3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노르웨이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6월 22일 의무 및 행정요원 83명으로 구성된 60병상 규모의 이동 의무병원을 한국에 파견하였으나 그후 병력이 추가, 보충되어 이 병원의 근무인원은 106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병원은 미 제8군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미 제1군단 지역인 동두천지역에 위치하여 의무지원을 실시하였고 부대주변 한국 민간인들까지도 진료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휴전후 귀국시까지는 주로 민간인을 진료하였다. 이 병원 요원은 6개월 단위로 교대되었으나 100여 명이나 연장근무를 자원하였으며 연 근무인원은 623명이었다. 이 병원은 1954년 10월 18일 귀국하였고 이들이 한국에 주둔하는 동안 수많은 부상병들과 전쟁고아들을 구출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병원에서 일하던 근무자 70여 명이 정성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하였다. | |
2086 | 15-2-20 | 고근홍대령 전승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9-01-01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 다부동 전투 등에서 공을 세고 전사한 고근홍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전송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79년 1월 1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고근홍 대령은 1920년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망원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한 후 일선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6·25전쟁 발발 후 보병 제8사단 제10연대장으로 대구 부근 다부동 및 영천전투에서 연전연승, 불멸의 공을 세우고 적군을 추격, 한탄강을 지나 평양을 점령하였고, 1950년 11월 25일 평남 덕천 부근에서 중공군과 격전 끝에 장렬한 전사를 하여 31세를 일기로 조국수호에 몸을 바쳤다. |
2087 | 17-2-13 | 충혼탑(태백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태백시 | 태백시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3m, 탑높이 15m | 1984-11-30 | 태백시 백산동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230위의 태백 출신 전몰용사(국군 211위, 청년단원 3위, 노무자 6위)를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태백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4년 11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위기 시 태백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태백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88 | 17-2-43 | 충혼탑(삼척시 하장면)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삼척시 | 하장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1972-06-06 | 하장면 광동리에 1972년 6·25전쟁과 공비토벌작전 기간에 전사한 101위(국군 80위, 향토예비군 1위, 청년단체 4위, 애국단체 16위 등)의 하장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하장면 청옥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면면민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2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전후 하장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비들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남침 이후 3년 동안과 그 후 공비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장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089 | 16-2-56 |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양구군 | 21사단(제71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8-03-15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에 백석산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1958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1년 8월 18일부터 10월 28일까지 백석산에서 벌어진 전투다. 국군 제7사단 3연대, 5연대, 8연대, 제16포병대대, 제8사단, 미 제96야전포병대대와 북한 제12사단, 제32사단, 중공군 611연대가 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이 전투는 주저항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군이 양구 북방에서 제한된 공격 작전을 전개하여 백석산과 그 일대를 점령하였다. 8월 중순에 접어들고 장마가 그치자 유엔군의 하계공세라고 부르게 된 작전이 8월 18일부터 개시되었다.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2사단에게 피의 능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서쪽에 이는 554고지를 확보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7사단에 554고지 공격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사단은 554고지 공격에 앞서 인근의 883고지와 901고지를 공격하였다. 3연대는 883고지를 공격하여 8월 18일에 탈취하였지만 북한군의 역습에 다시 철수하였다. 8월 20일 3연대는 밀리고 밀리는 격전 끝에 901고지와 883고지를 점령하였고, 5연대는 양갈래고지를 점령하였다. 8월 21일 다시 철수하였고 8월 25일 8연대와 전차공격대대는 536고지를 탈취하였다. 8월 31일 8연대 901고지 탈취, 9월 2일 전차공격대대 554고지 탈환, 9월 18일 3연대는 883고지를 탈환하고 백석산을 목표로 공격준비를 하였고 9월 26일 백석산 남동쪽1060능선을 탈취하였다. 8연대는 이날 백석산 좌측봉우리를 점령하였다 9월 28일 북한군은 제12사단으로 교대하였고 9월 30일 아군도 8사단으로 교체되었다. 10연대는 이날 백석산 좌측 봉우리를 점령하였으나 북한군에게 피탈당하고 10월 1일 백석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결과 백석산을 점령하여 북쪽에 위치한 어은산 남쪽의 고지군 공격에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어은산 남쪽군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백석산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10연대는 1050고지를 6일동안 공격을 계속하여 10월 11일 마침내 고지를 점령하고 10월 15일에는 중공군을 격퇴하여 1130고지를 확보하고 다음 작전에 대비하였다. 한편, 16연대는 중공군과 접전을 벌인 끝에 백석산 서쪽 743고지, 650고지를 10월 12일에 점령하였다. 10월 13일에는 인근의 977고지를, 10월 16일에는 931고지를 점령하였다. 리리고10연대는 10월 28일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1090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중공군은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10월 25일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백석한 일대의 전투가 종료되었고 이 전선은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유지되다가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되었다. 적군 사살 1, 460명, 포로 101명이었으며 아군측도 전사 244명, 부상 1, 165명, 실종 14명에 이르렀다. | |
2090 | 16-2-42 | 충혼탑(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4-11-03 | 인제군 상동리에 196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104위의 인제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인제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4년 11월 3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인제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인제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091 | 16-2-28 |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1-15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68-05-07 | 에티오피아군은 1951년 5월 1일 한국에 도착하여 1955년 3월 1일 철수할 때까지 3개 대대 6, 037명을 파병하였고, 253회 전투를 치렀다. 에티오피아 각뉴 부대는 253회의 전투에서 전부 승리하여 단 한 명의 포로도 나오지 않았지만 참전용사 중 121명이 사망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 이러한 혁혁한 전공으로 인해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대 표창과 훈장을 받았다. 유엔한국참전국협회는 1968년 5월 7일 강원 춘천시 근화동 361-1(조각공원)에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운 에티오피아 참전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2092 | 16-2-03 | 충열탑(춘천시)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12.8m 기단1.2m | 1955-07-01 |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 우두산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장병과 순직 경찰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강원도와 제3군단, 제9사단에서 1955년 7월 1일 탑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강원도 출신으로 전몰한 장병들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 당시 제29사단의 주관으로 최헌길 강원도지사, 윤군 제3군단장 송요찬 중장, 최홍은 제9사단장 등이 주축이 되어 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7월 이탑을 준공 제막하였다. 그후 시군단위 충렬탑이 별도로 건립되어 영령을 분장하므로 현재는 도내 충령탑이 없는 시군의 호국영령과 1970년 봉의동 산15번지에 있었던 순국경찰관 영령을 안치한 충혼탑을 폐쇄하면서 충렬탑에 합장한 경찰관 호국영령을 동시에 안치 매년 현충일에 추모하고 있다. |
2093 | 24-1-02 | 충용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음성군 | 충용사총무 임희빈 | 사당 | 의병운동 | 1834 | 1964년에 정면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건립 | 1964-01-01 | 이 사당은 의당 박세화를 봉안한 사당으로, 1964년에 정면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건립, 충용사라 편액을 달았으며, 소승삼문은 광제문이라 하였다. 충용사에는 의당 박세화, 회당 윤응선, 직당 신현국, 명와 정규해를 배향하고 있다. 박세화는 자가 연길, 호는 의당, 본관은 밀양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윤응선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1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망국의 비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한 순국열사이다.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용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2094 | 16-2-35 | 줄·장루이소령 상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동상 | 6·25전쟁 | 1951 | 높이2 m 기단2m | 1986-10-25 |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쥴 장 루이 공원에 프랑스 군의무대를 이끌며 홍천전투에서 부상병을 구출하고 지뢰를 밟아 산화한 쥴 장 루이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공원 내에 홍천군에서 1986년 10월 25일 동상을 건립했다. 1917년 프랑스 앙시베 시에서 출생, 지난 1950년 11월 26일 한국전에 참전한 쥴 장 루이 소령은 원주전투 등 5개 지역 전투에 이동병원의 의무대장으로 참가, 부상병 치료는 물론 활발한 대민진료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1951년 두촌면 자은3리 속칭 외후동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의 질병치료에 적극 나서는 등 숭고한 인도주의 정신을 보였다. 그러나 쥴 장 루이 소령은 그해 5월 8일 두촌면 장남리에서 국군 장병 2명이 지뢰를 밟았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한 지뢰밭을 헤치고 들어가 구출한 후 돌아오다 자신은 중공군의 지뢰를 밟아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이국땅에서 전사하였다. |
2095 | 16-2-12 | 김화지구 합동 순의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철원군 | 철원군(사회복지과)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10 m 기단2m | 1984-06-06 | 철원군, 백골사단, 합동순의비건립추진위원회는 1984년 6월 6일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당고개에 김화지역에서 희생된 반공인사 및 가족 78위의 넋을 추모하고 북한군의 학살만행을 널리 고발하고자 합동순의비를 건립하였다. 김화지역은 38선 이북 지역으로써 공산치하에 있었는데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한 김화지역 주민은 반공활동의 거점을 구축하고 활동하여 오다가 북한군이 이 지역에서 축출될 때 반공인사 및 가족 등 78명을 연행하여 사곡리 당고개에서 무참히 학살하였다. 학살당한 반공인사와 가족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9월 30월 이 자리에서 처음 위령제를 거행하였다. |
2096 | 16-2-27 | 425고지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1-15 | 강원도 철원군 | 육군 제7사단(2621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3 | 높이7 m 기단3m | 1991-10-18 | 육군 제7사단은 1991년 10월 철원군 원남면 주파리에 6·25전쟁 마지막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여 425고지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425고지는 강원도 화천군 북방 철책선 약 1.2km 앞 비무장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화천댐 방위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국군 제7사단은 정전협정을 1주일 앞둔 1953년 7월 20일부터 8일간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이 고지를 사수하여 화천댐을 지키고 휴전선을 38선에서 35km 북상시킬 수 있었다. 특히 425고지 전투를 승리를 이끈 7사단 8연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작고)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
2097 | 17-2-11 | 현충탑(동해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동해시 | 동해시 | 탑 | 6·25전쟁 | 1950 | 폭 18.5m, 탑높이 12.5m | 1981-06-06 | 동해시 천곡동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김두현 대위 등 호국전몰용사(육군 296위, 해군 12위, 경찰 12위 등)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동해시)’을 건립하였다. 동해시는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1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동해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동해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98 | 43-1-32 | 3·1독립운동 기념비(거창)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정하성 | 조형물 | 3·1운동 | 1919 | 0 | 1985-10-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위천 장날 유희탁(劉熺倬, 1885~1965), 정대필(鄭大弼, 1880~1938), 이형준(李衡俊), 유한탁 등이 위천·마리·북상 3개면 유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거창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10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2099 | 17-2-32 | 충혼탑(속초시) | 국가수호 | 2003-09-01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1.65m, 탑 3.55m | 1964-05-01 | 속초 도문동에 1964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한호 외 53위의 속초 출신 호국 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속초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4년 5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속초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속초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00 | 53-1-01 | 3·1독립운동 탑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목포시 | 유달산공원 관리사무소 | 탑 | 3·1운동 | 1919 | 기단3m/탑신3.3m | 1983-08-15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서상봉·강석봉 등이 남궁혁(南宮赫)·오도근(吳道根) 등 청년 학생들과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여 목포 부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과 경찰은 기마부대와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이 시위로 강석봉(姜錫奉, 1890~1956), 박복영(朴福永, 1890~1973), 박상렬(朴相烈, 1897~1981), 배치문(裵致文, 1890~1942), 서상봉(徐相鳳, 1870~1927), 서화일(徐化壹, 1881~1936), 곽우영(郭宇英), 남궁혁, 박상술(朴相述), 박상오(朴相五) 등 80여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가운데 박상술은 일제의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되어 이듬해 5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끝내 순절하였다. 유당산공원화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3년 5월 15일 공원 내에 이 탑을 건립하였다. |
2101 | 30-1-58 | 항일독립의거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북도 상주시 | 상주시 | 탑 | 기타 | 1945 | 1987-10-18 |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기념탑.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장터에서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과 성필환, 서울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일명 한감석[韓邯錫]),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과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들과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10월 18일, 상주 항일독립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 | |
2102 | 17-2-39 | 충혼탑(고성군) | 국가수호 | 2003-12-08 | 강원도 고성군 | 고성군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0.5m, 탑 10m | 1973-09-29 | 고성 와우산 자락에 197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김수리, 김영기 외 63위를 포함하여 1, 274위의 고성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고성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 9월 29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저항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03 | 17-2-01 | 충혼탑(영월군)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 | 탑 | 6·25전쟁 | 1950 | - | 1964-06-24 | 영월 영흥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665위의 영월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월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9년 6월 24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월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산주의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월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04 | 42-1-07 | 영산 3.1 봉화대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조형물 | 3·1운동 | 1919 | 0 | 1956-03-11 | 일제의 조국 침략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영산지역 애국지사 24명의 결사대가 1919년 3월 13일 이곳 남산봉에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영산 향로단장 윤규은씨가 사재를 들여 건립하였으며 매년 열리는 영산 3.1민속문화재 행사기간 중 횃불을 올리며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있다. |
2105 | 41-2-01 | 울산광역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광역시(현충탑관리사무소) | 탑 | 기타 | 1996 | 높이 33m | 1996-11-19 | 6.25전쟁 때 조국수호를 위하여 전선에서 장렬히 산화한 울산지역 출신 영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2106 | 30-1-31 |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북도 경산시 | 항일대왕산죽창의거유족회 | 비석 | 의열투쟁 | 1944 | 1995-05-31 | 1944년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방보에서 안창률, 김명돌, 성상용, 송수답 등 29인이 모여 돌이 많고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신축 중에 있는 남산 주재소를 습격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7월25일 밤 축장으로 전원 무장하고 대왕산에 집결하여 26일 아침 안병률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7월 26일 무장한 일경 30명을 돌과 죽창으로 맞서 물리쳤고 8월 5일에도 일경 30명을 격퇴하였으나 보급이 끊기고 식량이 바닥나 8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전원 체포되어 옥고 를 치르고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안창률, 김경화 선생은 옥중 순국하였다. | |
2107 | 42-2-25 |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창원시 | (사)해병대전우회경남연합마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2-01-01 | 경남 마산시 합포구 진북면 지산리에 진동리지구 전투를 기념하고 국군 및 유엔군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92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마산 서남방의 관문 지대를 형성하는 이른바 3전지구 가운데 마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동지구에 위기가 고조된 시기는 낙동강 공방전이 바야흐로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8월 상순경이었고, 이 지역으로 침공했던 북한군은 마산을 공략하기 위해 호남지구를 석권한 다음 진주와 사천 및 고성지구로 기동한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6사단, 그리고 이 지역에 투입된 아군 부대는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25사단과 긴급 배속된 미 제24사단의 1개 연대와 미해병 제5연대, 그리고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해병대의 김성은부대와 육군의 민기석부대 및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 등이었다. 진동지구에 투입된 미 제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8월 7일부터 진주를 탈환하기 위한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데, 마산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감행했던 그 반격 작전 기간중 8월 1일 새벽 고사리지구에서 북한군 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를 요격하여 거둔 혁혁한 전공으로 8월 6일부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린 김성은부대 장병들은 야반과 수리봉, 서북산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고, 8월 12일 에는 중암리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일부 목표를 점령하는 등 부여된 공격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빛내었다. |
2108 | 33-1-16 | 충효재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유족 정대영 | 기타 | 의병운동 | 1843 | - | 1923-01-01 |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산남의진 대장 정환직과 그 장남인 용기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의사들이 1923년 건립 |
2109 | 50-1-11 |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 비석 | 학생운동 | 1929 | 1981-01-01 |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면서부터 발생한 일본인 중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81년 10월 30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일’을 맞아 항일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긍지와 귀감으로 삼고자 나주지역 광주서중·일고동창회 등 지역민의 정성을 모아 건립했다. | |
2110 | 24-1-23 | 제천의병전투지-충주성터 | 독립운동 | 2017-04-19 | 충청북도 충주시 | 충주시 | 장소 | 의병운동 | 1896년 | 0 | 1896-02-01 | 1896년 2월 15일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은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충주는 당시 관찰부가 있어 호서지방의 요지이므로 이곳을 점거하면 호서 일대를 장악하는 발판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충주성은 경병 400명, 왜병 200명, 지방대 500명 등 1,000여 명의 군대가 충주성에 있어 공격이 어려웠다. 2월 16일 유인석은 군사 4,000명을 거느리고 제천을 출발했다. 2월 17일 호좌의진은 지방대 두령들의 협조로 성문이 열려진 충주성의 남문과 북문을 통해 무혈 입성했다. 유인석은 입성 후 의병 토벌죄 및 단발 강요죄 등을 내세워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형하였다. 2월 17일부터는 충주성·가흥·수안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2월 22일 중군장 이춘영(李春永)은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으로 진군하여 좌우에서 병참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하였다. 이때 일본군 7명이 병참 밖으로 나와 응사하였다. 1시간 동안의 접전에서 이춘영은 일본군이 발사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2월 23일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넘어 의진에서 기습공격을 가하는 일본군 60여 명을 격퇴시켰다. 2월 24일 성을 포위한 100여 명의 일본군은 사격을 가하는 한편 성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충주향교에 불을 질러 모든 위패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2월 29일 일본군은 단월 방면에서 2일 동안 다시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호좌의진은 근처 요해처를 지키던 군사를 성안으로 불러들여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3월 2일 가흥에서 출동한 일본군 3개 중대가 다시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성안으로 포를 난사하고 사다리로 등성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의병과 일본군간에 충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틀간의 전투로 충주성은 모든 건물이 불타고 민가 100여 호만이 남을 정도의 폐허로 변했다. 3월 5일 호좌의진은 관군과 일본군의 양면 공격으로 양식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청풍으로 진을 옮겨야 했다. |
2111 | 50-1-20 | 삼일 민족대표 양한묵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 | 비석 | 3·1운동 | 1862 | 0 | 1965-01-01 | |
2112 | 45-2-09 | 순국전우 추도 기념비(신도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도2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6-01-01 | 서귀포 신도리에 1956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순국전우 추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리 주민들은 금화지구, 강원도 고성지구, 홍천지구 가리산 등의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이 곳 출신 이종식, 백대석, 정윤석 등 3인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1956년 2월 6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도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113 | 45-2-34 | 충혼탑(구좌읍 )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구좌읍 | 탑 | 6·25전쟁 | 1950 | 1991-06-06 | 사라봉 기슭에 제주 4·3사건 토벌작전과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북제주군은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에 준공하였다. 이후 공원지구 편입 등 도시화로 인해 1983년 4월 15일 제주시민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인 한라산 기슭에 새로운 충혼묘지를 조성하고 묘역 내에 충혼탑을 옮겨 건립하였다. 묘역에는 651기(군인 504기, 경찰 145기, 기타 2기)의 호국영령이 안장되어 있다. 제주 4·3사건 토벌작전과 6·25전쟁 기간 북제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북제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114 | 16-1-12 | 해주윤씨 의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비석 | 의병운동 | 1860 | - | 1982-11-09 |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에서 여성독립투사로 항일독립운동에 진력한 윤희순 여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윤희슨 여사의 시댁 옆 산기슭에 의적비를 건립하였다. 윤희순 여사는 1895년 의병장 유홍석 선생(시부)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사람의병가」「의병군가」「병정가」등을 작사, 작곡하여 의병운동 지원 및 부녀자들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고, 1907년 춘천군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여자의병 300명을 조직 군자금을 모아 의병지원 활동을 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유홍석 선생과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부녀자들에게 항일정신을 계몽하였다. |
2115 | 31-1-24 |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의성군(문화체육관리사업소) | 탑 | 3·1운동 | 1991 | 1991-08-15 | 의성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 기념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의성군 점곡면·사곡면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의성 출신 의병들은 1907년과 1908년에 주로 박연백, 이강연 의병부대에서 활약하며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의해 일어난 의성군 3·1독립운동은 안평면·봉양면·점곡면·신평면·가음면·춘산면 등지로 확산되어 4월 초까지 계속 전개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시위가 의성군내에서 약 20여 차례 전개되자 일제 경찰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의성 지역 유림 세력도 독립 청원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동시에 국외 무장 투쟁 세력과 연계한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대 이후 의성에서는 의성 청년회 등 청년운동, 안평 농민조합운동, 형평운동 등 대중운동이 일어나 교육 활동,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운동, 신분 해방 운동 등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사회 활동이 이루어졌다. 또 1930년대에는 의성 적색 독서회·의성 적색 농민 조합 등 비합법 투쟁, 신사 참배 거부 운동 등 일제 강점기 말 황국 신민화 정책에 저항하는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1991년 8월 15일 의성군 항일운동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의성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 283명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탑을 세웠다. | |
2116 | 50-1-03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6-05-18 | 광주광역시 서구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 기념관 | 학생운동 | 1929 | 2005-11-03 |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민족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 국내외의 복합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어 194개 학교가 시위, 동맹휴학 등으로 참가하였다. 참가 학생 수는 54,000여 명으로, 이는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참여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582명이 퇴학을, 무기정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으며, 1,462명이 검거되어 악형을 받았다. 이렇듯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여 1967년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4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신축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합 전시 연출하여 2005년 1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 |
2117 | 15-2-95 |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6.25참전유공자회 | 탑 | 기타 | 0 | 2008-06-10 | 양평군 6·25참전유공회는 2008년 6월, 6·25전쟁에 참전하여 국가와 민족의 보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공헌한 양평군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상활체육공원에 6·25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 참전기념비는 화강암 대리석 재질로 높이 8.6m이고 하단은 원통형으로 지름 11m로 제작되었다. 기념비 앞에는 참전용사 3명이 청동 동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 |
2118 | 43-2-41 | 진주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진주시 | 진주성지관리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념비 높이 3.6m, 기단높이 0.7m | 1958-11-10 | 경남 진주시 성지동 진주성지 내에 6·25전쟁 당시 미 제25사단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6건설공병단이 1968년 11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하고 있을 1950년 7월 29일 미 제25사단 킨 기동부대는 진주지구에 쳐들어온 북한군 제6사단과 제9사단 병력에 대항 전투를 벌인 끝에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이 전투는 6·25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적의 주공이 대구지역으로 향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마산전선의 방어선을 확장하여 부산교두보에 대한 측방위협을 제거하고 대구쪽으로 집중된 북한군의 주력과 예비대를 마산 쪽으로 유인하여 대구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치른 전투다. 미 제25사단이 병력 2, 400여 명과 전차 101대로 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북한군 제6, 제9사단과 장성점 서북쪽 무명고지를 놓고 수차례의 공방전을 벌여 피아의 공격이 뒤 엉키고 혼전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야간공격으로 목표를 탈취하게 되었다. 이 전투가 ‘피의 협곡’, ‘포병의 무덤’이라 불리워질 만큼 많은 전사상자를 내면서도 현전선을 고수하게 됨으로써 유엔군 총반격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
2119 | 43-2-29 | 충혼탑(무전동)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시 | 탑 | 6·25전쟁 | 1950 | 1992-06-06 | 통영 원문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통영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최초 충무시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을 1961년 5월 14일 남망산 공원에 준공하였으나, 통영시가 1992년 6월 6일 현충일에 10만 시민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인 원문공원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통영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통영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120 | 20-2-10 | 전몰호국용사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부여군 | 은산면 사무소 | 비석 | 기타 | 1950 | - | 1992-05-01 | 부여 홍산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은산면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은산면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92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은산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은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21 | 43-2-01 | 충혼탑(산양읍)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통영시 | 미남리 이장 | 탑 | 6·25전쟁 | 1950 | 1958-05-01 | 산양읍 미남리에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산화한 9위의 마동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재향군인회와 마동마을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하였고, 그 후 1992년 6월 20일 개축하였다. 6·25전쟁 기간 마동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마동 마을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122 | 42-1-11 | 야암 김종훤 지사 독립운동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비석 | 3·1운동 | 1892 | 0 | 1979-03-01 | 건립위원회는 1979년 3월 1일 장유면 무계리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김종훤 애국지사의 독립운동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독립운동기적비를 김해시 삼계동 비석공원 내에 건립하였다. 김종훤 지사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4월 11일 김승태·조순규·이강석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인원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책임, 분담하였다. 4월 12일 김승태가 이끄는 선발대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무계리 장터로 들어온 것을 시발로, 다른 동리에서도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그 숫자는 3천명이나 되었다. 이때 선생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를 독려하였다.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 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자, 그는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재차 투석과 몽둥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을 때려눕히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2123 | 20-2-09 | 600고지 전승탑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문화관광과 | 탑 | 6·25전쟁 | 1950 | - | 1991-09-28 | 금산군은 1991년 9월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산16-2(백암산 배티재)에 호국전몰 민·군·경에 대한 영령을 추모하고 군민 향토방위 정신 고취와 동시에 충의 반공정신의 산 교육장화하기 위하여 600고지 전승탑을 건립하였다. 아울러 전승탑 아래쪽에는 충혼비와 600고지 참전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남 금산군 백암산 600고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과 빨치산 등 공비들이 숨어들었던 아지트였다. 우리 군은 전략적 요충지였던 600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1951년 5월부터 1952년 6월까지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포함한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토벌작전을 벌였다. 2년여에 걸친 치열한 격전 끝에 우리 군이 승리하면서 금산 인근 지역의 치안을 확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리 군과 경찰, 민간인 270명의 희생도 뒤따랐다. |
2124 | 43-2-15 | 충혼탑(함양군)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19.2m, 기단높이 2m | 1959-06-01 | 함양군 이은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함양군 출신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함양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9년 6월 1일 준공하였고, 1989년 12월 29일 현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함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함양군에서는 매년 6월 25일에 배향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25 | 51-1-07 | 일광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1-01 | 전라북도 고창군 | 일광기념사업회 | 기념관 | 의병운동 | 1906 | 3층건물 | 1993-12-01 | 일광 정시해 선생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제자로 1906년 순창전투에서 순국, 광복 후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일광기념관은 그를 기리고 애국애족정신과 독립정신 계승을 위해 1993년 12월 건립되었으며, 정시해 선생 영정, 유품 15점, 문건 30점, 일대기(동판)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
2126 | 42-2-21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기타 | 1998 | 0 | 1998-01-01 | 무공수훈자회 창녕군지회는 1998년 창녕군 송현동 화왕산에 6·25 및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기념비의 노후화와 주변 조경물의 훼손으로 인해 이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14년 창녕읍 퇴천리 창녕공설운동장 뒤편 현충공원 내로 이전하여 새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2127 | 10-1-30 | 김익상 의거지 | 독립운동 | 2013-12-18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시 거점상장추진단 | 장소 | 의열투쟁 | 1921 | 김익상은 1895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광성연초공사의 기계감독으로 한동안 근무하였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간 김익상은 북경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의열단에서 조선총독부 폭파 지령을 받고 서울로 잠입한 김익상은 1921년 9월 12일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남산 중턱 왜성대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과 인사계실과 회계과에 폭탄 2개를 던졌다. 이 가운데 하나는 불발하고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터져 기물을 파손하였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거사 직후 피신하여 북경으로 돌아온 김익상은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과 함께 2월 28일 오후 3시 반경 상해 세관 부두에서 필리핀에서 도착한 일본 전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장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총탄을 발사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 ||
2128 | 10-1-31 | 신석구 사택 터 | 독립운동 | 2013-12-18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시 중구 | 장소 | 3·1운동 | 0 | - | 2013-11-28 | 신석구는 충북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15세때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할 때 친구 김진우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8년 정식으로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1918년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는 중에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27일 기독교 측 대표들이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신석구도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 모일 때도 참여하여 독립선언 후 체포되어 2년 반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1921년 11월 4일 출옥 후에는 목회에 임하였다. 천안교회의 목회 중에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일으켜 믿음을 지키도록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중형을 받아 중한 병을 얻고 석방되었다. 그 후 1939년 일제의 신사가 없는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 유사리교회, 문애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5년 5월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용강경찰서에 연행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
2129 | 31-1-08 | 항일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안동생명과학고등학교장 | 비석 | 학생운동 | 1944 | 1978-04-20 | 안동 농림학교 학생의 항일운동 기념비.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침략전쟁에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징병, 징용제를 실시하고 학생들에게 황민화교육을 강화하였다. 이에 안동 농림학교 학생들은 1944년 10월에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일본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조국을 위해 떳떳이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다짐하고「조선회복연구단」을 발족하였다. ‘조선의 독립 쟁취’, ‘신사참배 반대’,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등의 기본방침을 정하고 헌병대와 경찰서 기습 등의 적극적 대일투쟁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일을 앞두고 1945년 3월 1일 한국에서 추방당한 미선교사들이 두고간 영문서적을 강순원, 현필기가 남몰래 가져와 간수했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단원 명부까지 압수되면서 조선회복연구단 단원 51명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었다. 체포된 이들 중에 20여 명은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고 해방된 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1978년 4월 20일 안동농림학교 동창회는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학생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2130 | 50-2-18 | 충혼탑(화순군)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 | 탑 | 기타 | 1984 | 1984-10-26 | 화순군 광덕리 남산공원 내에 6·25전쟁 등에서 화순군 출신으로 산화한 호국전몰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화순군은 이곳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4년 10월 2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화순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화순군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131 | 16-1-14 | 민긍호의병장 기념상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동상 | 의병운동 | 1908 | 1999-10-17 | 민긍호(閔肯鎬, 미상~1908)는 한말 여흥민씨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를 지냈다.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령이 공포되자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장교와 병사들을 소집하여 무기를 나누어주고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김덕제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원주읍을 장악한 다음, 일본군 정찰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격퇴시켰다. 8월 8일 이후에는 제천·충주·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약 7개월간 여주읍 습격 점령전투를 비롯하여 72회 이상의 전투를 치러내며 일본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의병장으로 떠올랐다. 민긍호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으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 29일 궐덕리 마을을 포위한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한국순사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환하려 하자 일제는 이를 두려워하여 29일 오후 11시경 민긍호를 사살하였다. 2000년 10월 민긍호를 기리고자 원주 시민체육공원내 치악의 종 앞 동산에 기념상을 세웠다. | |
2132 | 30-2-17 | 필승 기원비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달성군 | 화원동산관리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4-01 | 대구 사문지로 화원동산 전망대 앞에 6·25전쟁 기간 화원읍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8352부대의 필승을 기원하기 위해 ‘필승 기원비’를 건립하였다. 대구시는 육군 제8352부대(부대장 이춘경 대령)의 필승을 기원하고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1년 4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육군 제8352부대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133 | 50-1-12 | 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 비석 | 사회운동 | 1910 | 1991-01-01 | 한말 궁삼면 일대 토지를 부패한 관리들이 경선궁장토로 편입하여 농민들과 분쟁이 된 것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매입하여 일본 이주민들에게 되팔거나 주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려 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성하고 토지소유권 확인소송과 토지소유권 청구소송을 제기하였지만, 조선총독부의 편파적인 판결로 모두 패소하였다. 농민들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농민회를 조직하고, 1925년 10월 9일 토지회수운동동맹을 결성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상대로 토지회수운동을 벌이는 등 항일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사업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1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2134 | 10-1-22 | 3·1독립선언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04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독립공원관리사무소 | 탑 | 3·1운동 | 1919 | 높이 4.2m | 1992-08-15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서울 중심지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로부터 시작된 전 민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 발발의 또하나의 중심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고귀한 순국의 현장이었던 서대문 감옥 가까운 곳인 서대문 독립공원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 |
2135 | 42-1-34 | 군북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6-04-24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탑 | 3·1운동 | 1919 | 1979-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학교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여 군북장터에 이르자 3, 000여명이 시위에 참여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군북경찰주재소 경찰과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출동하여 총칼로 탄압하여 20명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이 시위로 김삼도(金三道, 1896~1919), 김우곤(金宇坤, 1886~1919), 나수범(羅守凡, 1902~1919), 박상엽(朴尙燁, 1856~1919), 박주범(朴注範, 1885~1919), 송문호(宋文鎬, 1887~1919), 이경민(李卿敏, 1886~1919), 이경흠(李卿欽, 1874~1919), 이원필(李元弼, 1884~1919), 이재형(李甲伊, 1886~1919), 조경규(趙璟奎, 1876~1919), 조성근(趙聲根, 미상~1919), 조성기(趙性基, 1881~1919), 조용대(趙鏞大, 1880~1919), 조용섭(趙鏞燮, 1890~1919), 조용태(趙鏞台, 1871~1919), 조용호(趙鏞浩, 18745~1919), 조주규(趙周奎, 1883~1919), 조호진(趙虎振, 미상~1919) 등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노수정(盧秀貞, 1894~1948), 조경식(趙璟植, 1887~1950), 조동규(趙銅奎, 1885~1959), 조상규(趙相奎, 1866~1927), 조석규(趙碩奎, 1884~1924), 조성규(趙聖奎, 1876~1940), 조용구(趙鏞九, 1882~1936), 조창규(趙昌奎, 1896~1978), 조형규(趙炯奎, 1883~1940)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군북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
2136 | 33-2-23 | 충혼탑(구룡포)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구룡포읍 | 탑 | 6·25전쟁 | 1950 | 1960-01-01 |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내에 1960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240위의 포항(구 영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 유족들은 그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0년 7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포항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5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137 | 55-1-07 | 석전 유건영 선생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곡성군 | 유재환,유근창 | 비석 | 의병운동 | 1883 | 탑높이 1.8m | 1991-01-01 | 유건영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서 농촌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최익현과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최익현이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면암 의진에 입진하였다. 그러나 의진이 패배하자 시세가 의병운동 전개에 불리함을 깨닫고, 농촌에 들어가 청년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무하였다. 그 후 한일합방이 되고, 이른바 창씨개명을 추진하였다. 이에 유건영은 극력 반대하여 끝내 저지하겠다는 요지의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제의 모진 박해를 받고 끝내 자결하여 한민족의 기백을 적에게 알리고자 1940년 7월 24일 독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해방 후 곡성의 뜻있는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무산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순국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석전 유건영 선생 유적비는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비석이다. |
2138 | 15-1-16 | 애향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의정부시 | 의정부시 애향회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890 | 0 | 1996-01-01 | 의정부에서 활약한 애국지사 윤원세와 정동운의 공적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천도교 양주교구장의 직임을 맡은 윤원세는 의정부 금오리 3·1독립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3월 15일, 수백명의 군중을 이끌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농촌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동참하였으며 1936년 천도교청년회 임원으로서 12교구장의 ‘멸왜특별기도회’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1938년 2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신천경찰서원의 호송을 받고 귀가했으나 고문 휴유증으로 서거하였다. 한편 정동운은 강원도 원주 출신이나 1941년에 의정부로 이사왔다. 그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의정부 반공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윤원세를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하였다. 1996년 9월 20일 의정부시 애향회는 윤원세와 정동운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2139 | 43-1-05 | 의사 최원형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사천시 | 최태웅 | 비석 | 3·1운동 | 1901 | 1995-10-01 | 경기고보 재학중 기미독립만세 주동으로 피검되어 옥고 중 순국하신 지사님의 항일활동 공적을 기리고 계승 | |
2140 | 33-2-16 | 영천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10-20 | 경북 영천시 창구동 영천문화원 옆에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1205공병단에서 1958년 10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에 걸친 치열한 영천지구 공방전은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큰 전투로써 적과 아군은 서로 증강된 2개 사단의 대결이었다. 적은 5개 연대에 병력 12, 000명으로 추산되었고 아군은 7개 연대 병력 15, 000명이었다. 적은 76mm포 38문과 122mm포 18문, 전차 12대에 비하여 아군은 105mm포 26문과 57mm 대전차포 6문이었다. 병력에 있어서는 아군이 우세하였으나 포병 장비면에 있어서는 적이 오히려 우세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군은 열세한 화력을 항공력으로 보충하였으며 적은 다소 열세한 병력을 독전대의 위력으로써 보강할 수 있었다. 영천의 직접 쟁탈전은 9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에 걸쳐 3회의 진공전이 있었을 뿐이며 치열한 전투는 주로 영천 북방과 남방에서 벌어졌으며 영천 북방의 제21연대는 적 2개 연대를 견제하고 제19연대는 적의 후방부대와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또 남부의 제5연대와 제10연대는 적의 남침을 막아내면서 포위망을 형성한 결과 적 제15사단을 이 포위망 속에서 압축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데 많은 공을 세우게 되었다. | |
2141 | 43-1-03 | 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고전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82-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6일 주교리 장날 박영묵·추홍순 등의 주동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의 군중 1, 0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이를 제지하는 조선인 경찰과 일본 헌병을 구타하였다. 이에 일본 수비대가 출동하여 무력으로 이를 해산하고 다음날 박영묵(朴永默, 1881~1973), 이종인(李宗仁, 1869~1947), 정상정(鄭相正, 1878~1920), 정재기(鄭在基, 1890~1974), 추홍순(秋鴻順, 1894~1959) 등을 검거 처벌하였는데, 이 가운데 정상정은 이듬해 옥중 순국하였다. 성천리 지소부락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2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2142 | 33-2-08 | 충혼탑(울진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군 | 탑 | 기타 | 1978 | 1978-01-01 | 울진군 고성리에 1978년 6·25전쟁 등에 참전하여 전사한 118위의 울진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울진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8년 6월 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울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5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울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143 | 43-1-09 | 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추경화추경화(기념비 건립추진위원장) | 비석 | 3·1운동 | 1919 | 2001-02-01 | 1919년 4월 6일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각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운수리 쌍계사의 승려인 정금리에 사는 김주석은 학생인 정상근·양봉원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4월 6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준비하였다. 김주석 등은 4월 6일 오후 6시경, 장이 거의 파할 무렵에 태극기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으며 주도 인물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4월 7일, 하동보통학교 소풍날, 공평송림으로 소풍을 가던 길에 4학년 학생들인 박문화는 시장통에 이르렀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었고 하동보통학교 학생 16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이정수, 임만규 등 화개면민들은 4월 11일 장날에 제2차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준비하며 시위 전날인 4월 10일 밤에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만전을 기했으나 장날 당일 화개장터를 경계 중이던 일경에 의해 4명 모두 검거됨으로써 3·1독립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2001년 2월 1일, 화개장터3·1만세운동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화개장터에서의 3·1독립운동을 전개한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2144 | 11-1-34 | 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 독립운동 | 2013-12-1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농협은행 종로지점 | 장소 | 문화운동 | 1931 | - | 1926-07-05 | 조선중앙일보는 몽양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1937년 폐간됨 |
2145 | 17-2-64 | 강원도 순직소방인 추모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강원도 태백시 | 강원도소방학교 | 조형물 | 기타 | 2014 | 조형물 290㎡(높이 5m) | 2015-07-15 | 강원도 순직소방인 추모비는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국가적 대참사인 세월호 침몰사고 수습 지원임무 수행 후 같은 해 7월 17일 강원도 소방항공대로 복귀 중 불의의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강원소방본부 특수구조단 소속 소방항공대원 5명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생명 존중의 얼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2146 | 31-2-14 | 충혼탑(봉화군)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봉화군 | 봉화군 | 탑 | 기타 | 1950 | 0 | 1990-06-03 | 봉화읍 포저리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하거나 순직한 봉화군 출신 국가유공자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봉화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와 순직자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을 1963년 5월 30일 준공하였고, 그 후 군민의 뜻을 모아 1990년 5월 2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봉화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비들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봉화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47 | 31-2-03 | 충혼탑(영주시)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주시 | 영주시 | 탑 | 기타 | 1990 | 탑신(높이) 17m, 가로 1.9m, 부조 등 전체 폭 10m | 1990-11-27 | 영주 휴전동에 6·25전쟁 전후 전사한 898위의 영주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주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9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고, 1990년 11월 2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주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8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48 | 23-1-34 | 만해한용운선생생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역사문화시설관리사업소) | 생가 | 기타 | 1887 | 2000-01-01 |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이 태어난 곳이다.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히고, 14세에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16세 되던 1894년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나는 등 세상이 요동치자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그러던 중 한때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불교 경전 공부와 한문으로 된 불경을 번역사업에 주력하였으며,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만주지방 여러 곳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였으며,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시인으로서도 유명한 한용운은 1926년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직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발간하며 불교개혁에 노력하였다. 1938년 그가 이끌던 불교계 비밀단체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나 고초를 겪었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생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사적화하기 위해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생가인 초가 외에 사당삼문관리사화장실 등을 건립하였으며,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한용운의 애민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곳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 |
2149 | 50-2-25 | 군경 충혼비(완도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완도군 | 추동석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2-03-01 | 완도군 고금면 회룡리 유족회(8인)는 6·25전쟁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 8위의 넋을 추모하고 호국정신을 후세에 전파하기 위하여 1972년 3월 1일 회룡리 고금 남초등학교 윗 동산에 군경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
2150 | 25-2-09 | 충혼탑(영동읍)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9-08-15 | 영동군 매천리에 195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 등 925위의 영동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영동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군민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9년 8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동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3사단과 전차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동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51 | 51-1-35 | 충열사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사당 | 기타 | 1958 |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 1958-01-01 | 6명 충의사의 위패를 모신 익산 충렬사.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안중근·이봉창·윤봉길·이준·백정기 등 6명의 순국선열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 분연히 일어나 자기를 희생하며 나라를 지켰다. 1958년 1월 1일 익산 왕궁면 지역 유지들은 이들 순국선열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충렬사를 건립하였다. 이곳 충렬사에서 순국선열 6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2152 | 55-2-020 | 현충탑(선원동)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 | 탑 | 기타 | 1950 | 탐1 | 1987-06-06 | 여천출신 순국선열과 6.25전몰군경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 |
2153 | 51-1-36 | 임병찬선생 창의 기념표석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산내면 | 장소 | 의병운동 | 1851 | 높이 1.8m | 1992-07-08 | 옥구 출신 임병찬 의병장 창의지 기념 표석. 1906년 2월에 최익현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나 옥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08년 2월 1일 고종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 전남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독립의군부를 전국적 조직인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고 총사령에 임명되었다. 1913년 2월에 고종의 비밀 조서를 받고 1914년 2월 . 15일에 서울에 가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3차례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음력)에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2년 7월 8일 정읍군수는 그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 |
2154 | 43-1-31 | 의병장 정선전공성범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전한식 | 비석 | 의병운동 | 1870 | 1995-11-12 | 경남 함양 출신이다. 1906년 5월 면암 최익현이 덕유산에서 의병의의 기치를 드 높일때 중군장으로서 활약, 1090년 2월 안의에서 그리고 4월 거창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음 | |
2155 | 33-1-01 | 신돌석장군 생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덕군 | 생가 | 의병운동 | 1878 | 가옥 1채 | 1995-08-15 | 신돌석은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돌석, 태흥, 태을, 대호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이듬해 19세의 어린 나이에 10여명의 동지들을 모아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을 창군하니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 그러나 1908년 11월 18일 부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신돌석 생가는 본래 초가집으로 부친 신석주가 1850년경에 지었는데 일본 관헌들이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1940년에 불태워버렸다. 이후 1942년에 일부를 새로이 세워 기와집으로 꾸몄다가 1995년 초에 현재와 같은 초가집으로 복원되었다. |
2156 | 25-2-15 | 충혼탑(동이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동이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8-11-28 | 동이면 출신 호국영령 고 병장 이종금 외 80명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
2157 | 42-1-10 | 환산 이윤재 선생 어록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도서관 | 비석 | 문화운동 | 1888 | 0 | 1991-03-01 |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
2158 | 50-2-27 | 충혼비 (장성읍)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공민종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4-01 | 장성군 장안리에 6·25전쟁 중 북한군 점령 아래 억울한 죽임을 당한 38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장안리충혼탑 건립위원회는 이곳 출신 변진유, 전동렬, 조영화, 정응선 등 38명의 원통한 죽음을 애도하고 공산주의자의 잔악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51년 4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이 비는 세월이 흘러 마모되고 퇴색되어 2010년 3월 새로 비를 건립했다. 북한군 점령 시기 6·25전쟁 기간 장성군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태극결사대를 조직하였으나 발각되어 희생되었고, 1950년 10월 26일 국군이 반격하면서 후퇴하는 인민유격대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19명이 학살되었다. 장안리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159 | 43-1-25 | 의사 우전 노기용 숭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노원석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7 | 0 | 1980-10-01 | 합천지역에서 군자금 모금,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한 노기용 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자 건립 |
2160 | 31-1-42 | 애국지사 최봉환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영주시 | 최경호(손) | 비석 | 해외운동 | 1868 | 0 | 1995-10-09 | 최봉환은 경북 영주 출신이다. 1918년 중국 봉천성 장백현 14도구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며 광복단에 군자금과 피복 등의 물자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3년 8월 일군의 습격을 받아 전투 끝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4년 12월 9일 청진지방법원 북청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봉환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보존하기 위해 후손이 1995년10월9일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2161 | 18-2-29 | (하남시)6.25전쟁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7-04-19 | 경기도 하남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하남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5-10-08 | 6.25 전생은 북한군의 불법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 이었다. 서기 1950.6.25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20만 병력을 동원하여 남침을 강행 침략 3일 만인 6.28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전쟁 발발 40일 만에 대구와 영남지역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공산군의 치하로 넘어가게 되었다. 6.25전쟁 참전기념비에 새겨진 우리 하남시 참전유공자들은 이러한 처절한 전쟁 속에서 오로지 조국의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없는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 자라나는 후세들의 산 교육의 장으로 되기를 바란다. |
2162 | 20-1-22 | 3·1독립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금산읍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9-12-2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3일 금산 읍내 장날 김용술(金用述)·임승환(任勝煥)·김종구 등이 금산청년 대표자 명의로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여 수천명이 우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그 다음 장날인 3월 28일에도 상점들이 철시한 가운데 수백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구호열(具鎬烈, 1899~1940), 김일남(金一南, 1888~1950), 김종구(金鍾九), 김학술(金學述, 1897~1932), 변희조(卞熺朝, 1895~1943)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금산군 3·1독립의거기념비건립위원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9년 12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
2163 | 24-2-11 | 무극 전적 관광지 | 국가수호 | 2003-01-17 | 충청북도 음성군 | 음성군 | 기타 | 6·25전쟁 | 1950 | 감우재전승기념관(1층~4층), 충혼탑, 음성감우재전승비, 월남참전기념탑, 음성타임캡슐, 무공수훈자공적비 | 1985-06-08 |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곳으로써 남한이 최초로 승전하여 국군의 사기를 드높였으며, 그날의 용전분투한 장병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5년 6월 8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6·25 전쟁 최초승전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전승비, 전승탑과 관리사무소, 화장실, 주차장, 안내판, 식수대 등이 있으며, 조국광복과 수호를 위하여 순국하신 애국선열과 반공전몰 용사를 봉양하기 위한 충혼탑,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한 대한해외참전 기념탑, 새천년 밀레니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문명과 생활을 사랑하는 후손에게 전해 주는 가교가 되어 선조들의 삶과 전통을 후세의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음성군타임캡슐2000이 자리잡고 있다. -충혼탑 : 조국의 광복과 수호를 위하여 순국하신 애국선열과 호국용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음성감우재전승비 : 6.25전쟁 당시 국군이 최초의 승리를 거둔 감우재 전투를 기념하고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용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건립되었다. -월남참전기념탑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유의 십자군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국위를 선양한 참전 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음성타임캡슐 2000 : 21세기 새처년 밀레니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시대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문화·문물·산업·사회적 유산 등 377점을 선정하여 500년 후에 개봉할 수 있도록 매설하였다. -무공수훈자공적비 : 6.25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무공수훈자들의 전공을 기리고 나라사랑 호국정신을 전후 세대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건립하였다. |
2164 | 53-2-02 | 충혼탑(무안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무안군 | 무안군수 | 탑 | 기타 | 1973 | 2.9x5.4x14m | 1973-08-15 | 무안 남산공원 내에 1973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에 전사한 무안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무안군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준공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무안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무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65 | 51-1-39 | 의사 해학 이기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김제시 | 김제시 성덕면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848 | 2.5m x 1.2m x 0.7m | 1995-10-01 | 해학 이기선생은 황현, 이정직과 더불어 호남 3걸로 불리는 조선말 실학자이자 항일독립투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전문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4년 통감부 설치에 따른 국제적 외교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1905년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나아가 일본의 침략저의를 규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6년에는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교육자로써 민중계몽에 힘썼으며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하려는 뜻으로 1909년 단학회 창립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그 해 순직하였다. 『해학유서』라는 저서를 남겼으며 1968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
2166 | 55-2-24 | 반공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읍사무소 | 탑 | 6·25전쟁 | 1950 | 탑 1.5m | 1986-06-25 | 곡성군 학정리에 1985년 6·25전쟁 기간에 향토와 조국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반공투사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반공위령탑’을 건립하였다.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이곳 출신 정래상, 조태환, 박장업, 성재봉 등 반공투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5년 6월 25일 이 탑을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곡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이 가운데 학정리에서 북한 공산 무리들에 의해 마을 주민 40여 명은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곡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67 | 31-1-16 |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주시 |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 공원 | 의열투쟁 | 1919 | 0 | 1995-11-17 | 대한광복단은 경상북도 풍기 서부 한림촌의 채기중을 중심(정만교,김병연,양재안,유장열,유창순,한훈, 강병수 등)으로 유림, 의병, 대종교 출신, 애국청년 등 8개 지역 19명이 조직한 무장비밀결사대로서 일제하에서 최초로 결성된 전국규모의 무장 항일 투쟁 조직이다. 1915년 대구의 박상진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하여‘대한광복회(총사령관 박상진)’로 개칭하였다. 1916년 노백린, 김좌진 등 애국투사들이 합류하였고 1917년 기호, 호남, 관동, 관서지방의 애국지사들이 모여 거국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자리 매김하였다. 그들은 주로 대구, 광주, 아산, 인천, 해주, 옹천, 충북 등지에서 주로 군자금 조달과 친일파를 암살하였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17년말의 전(前) 경상도관찰사이며 친일부호인 장승원(張承遠)과 1918년 초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의 처단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이 1918년 1월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총사령(總司令)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다. 일경의 체포를 피한 한훈 등의 회원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뒤에는 김상옥·한훈·김동순(金東淳) 등 20여 명이 암살단을 국조직하여 총독을 암살하려다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힌훈, 김동순 등이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공원은 대한 광복단 결정 지역에 조성한 것으로 기념관, 추모탑, 광복탑, 기념비, 충훈탑(6.25), 무공수훈자탑, 평화통일 기원탑, 풍기체육관, 축구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2168 | 24-2-06 | 호국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앙성분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90-01-01 | 앙성면 앙성초등학교 앞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앙성면 출신 이우인, 최해원, 최상용 등 70위의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용사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앙성면6·25참전동지회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0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광명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앙성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69 | 40-1-23 | 의사 박재혁 비 | 독립운동 | 2003-09-15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부산진초등학교 | 비석 | 의열투쟁 | 1895 | 0 | 1948-10-01 | 박재혁 의사는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후 경찰서장에게 폭탄 투하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언도 받고 투옥하던 중 단식 투쟁으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음. |
2170 | 14-2-41 | 故오진석 경감 흉상 | 국가수호 | 2016-11-23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해양경찰서 | 동상 | 기타 | 2015 | 가로45 세로2 높이2 | 2016-08-19 | 국민을 위하여 헌신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故오진석 경감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흉상 건립 |
2171 | 43-1-15 | 애국지사 일암 하장환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남도 진주시 | 하현태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74 | 비높이 2.8m | 2002-11-03 | 경남 진주 사람으로 1926년 1월 김창숙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귀국했던 목적은 내몽고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 아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 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 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사 하장환은 곽종석의 문집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러 있던 중 김창숙을 만나 그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 중 하장환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어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2172 | 26-1-02 | 유관순 유적(아우내 3·1운동 사적지)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장소 | 3·1운동 | 1919 | 1914-04-01 |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유관순은 병천으로 내려와 만세운동 사실을 전하였다. 소식을 들은 유중권과 조인원 등은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때 병천주재소 헌병들이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돌을 던지며 격렬히 항거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하여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수십 명이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 |
2173 | 26-1-04 | 조병옥박사 생가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생가 | 문화운동 | 1894 | 0 | 1995-05-03 | 조병옥 박사 생가는 조병옥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1894년 3월 21일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나와 미국 콜롬비아대학 졸업 후 귀국 1927년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여 광범한 항일 민족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에 나섰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정혐의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정부 수립후 1951년 내무부 장관을 지내고 1960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 유세 중 신병으로 미국에서 사망,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이곳에 1995년 4월 20일 생가를 복원하였다. 조병옥 박사의 부친(조인원)은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2174 | 30-1-29 | 이두석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북도 칠곡군 | 이준식 | 비석 | 사회운동 | 1912 | 0 | 1983-05-01 | 본관은 광주(廣州). 1912년 5월 19일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서울중동중학교 재학 시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동참했다가 종로경찰서에 29일간 구금되었으며, 1932년 4월 정행돈(鄭行敦)·이창기(李暢基) 등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지도 및 한글강습 등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2월 활동 내용이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었고, 같은 해 3월 23일 모진 고문 끝에 대구경찰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2175 | 51-2-01 | 향토자유수호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북도 정읍시 | 국민방위군 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 4.5m, 둘레 2m | 1990-10-24 | 6.25 당시 500여명의 젊은이들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하여 경차로가 합동작전을 벌여 내장산 지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하여 논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즉, 애환으로 얼룩진 1950년 6.25! 자유와 평화 향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운 젊은이들의 넋과 슬기를 기리기 위하여 정읍 국민방위군 전우회에서 비를 건립하였다. 당시 500여 젊은이는 국민방위군에 입대하여 싸우다 방위군이 해체되자 독립전투대로 재편하여 경찰과 함께 내장산을 비롯 험산준령을 누비며 싸워서 2년 7개월 만에 고장을 수복하였다. 그래서 전사자도 많았으며 중상자도 많았다. |
2176 | 51-2-13 | 충혼비(김제시)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김제시 | 김제시 | 비석 | 기타 | 1960 | 기단높이 1m, 비높이 3.1m | 1960-03-01 | 김제시 관내에 거주하던 주민들중에서는 일제치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몸 바친 애국지사들과 한국전쟁시 반공전선에 앞장선 민간인 군인,경찰관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김제시는 매년 현충일에 이 충혼비에 새겨진 선인들의 넋을 기리고 동시에 그들의 높은 뜻을 후손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
2177 | 26-1-03 | 유관순열사 생가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생가 | 3·1운동 | 1902 | 0 | 1991-12-23 | 유관순 열사 생가는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 |
2178 | 16-1-10 | 의암 류인석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9-01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동상 | 의병운동 | 1842 | 1976-12-12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연해주에서 병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인석 [柳麟錫] (두산백과) | |
2179 | 52-2-32 | 순국학도 현충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박항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4-06-01 | 1950년 6.25전쟁 당시 학생신분으로 학도의용군에 입대한 3,500여명과 전사한 531명의 공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2180 | 30-1-35 | 유석 남형우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75 | 1984-06-01 |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지내고, 친일분자 및 밀정(密偵) 총살과 군자금 모집에 활약하였다. | |
2181 | 52-1-31 | 래산사 | 독립운동 | 2004-12-28 | 전라북도 진안군 | 정상염 | 사당 | 의병운동 | 1885 | 0 | 1957-01-01 | 정종엽은 1885년 계남마을에서 출생하여 간재 전우를 스승으로 모셨고 흠재 최병심, 의병장 기우만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이석용의병장과 항일 의병활동에 동참하였고, "임자동밀맹단"(임자년인 1912년 겨울에 만들어진 비밀단체)에 가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 후 창씨개명 반대 및 후진양성 교육에 전념하다가 1940년에 사망하였다. 진안군 마령면의 래산사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수당유고》가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하여 2003년 8월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
2182 | 52-1-28 | 삼요정 | 독립운동 | 2003-12-08 | 전라북도 임실군 | 김창식 | 기타 | 애국계몽운동 | 1883 | 0 | 2001-09-28 | 전라북도 임실(任實)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2일 서울로부터 전해받은 독립선언서를 운암면(雲岩面) 일대에 게시하였다. 그는 이날 정오경, 운암면 지천리(芝川里)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전도사인 한준석(韓俊錫)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여매를 전해받았다. 이에 그는 이날 독립선언서를 운암면내의 입석리(立石里)·선거리(仙居里)·학산리(鶴山里) 일대에 게시함으로써,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이 지역 주민들에게 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3월 12일의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정신적 배경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이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삼요정은 김영원이 올바른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후학양성에 매진하고자 1883년 임실군 운암면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민족교육의 출발점이자, 1904년 전주에 창동학교, 1906년 임실 청웅에 삼화학교의 건립으로 이어지는 근대식 개화교육의 선봉이 되었다. 국가보훈부에서는 2003년 12월 8일 삼요정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2183 | 42-1-31 | 최수봉 의사 추모 기적비 | 독립운동 | 2004-12-31 | 경상남도 밀양시 | 정주식 | 비석 | 의열투쟁 | 1894 | 0 | 2002-07-08 |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가 되는 해 사립동화학교(私立東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균(全鴻均) 밑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다시 1912년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불교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하였다. 또한 1913년 평양 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 중 학교가 폐교당하자 중퇴하고 말았다. 그후 독립쟁취의 신념을 갖고 남만주 지방으로 망명한 그는 봉천(奉天)·안동(安東)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기도 하였으며 한때 평안도 정주(定州)에서 광산노동 또는 우편 집배원 노릇도 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 의열단(義烈團)과 연락이 닿아 있던 고인덕(高仁德)이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갖고 모종의 거사를 준비중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동지 고인덕에게 즉각 자신의 독립투쟁의 결의를 전하고 고인덕으로부터 폭탄과 제조기를 전해받아 산속으로 들어가서 폭탄을 제조하여 송혜덕(宋惠德)에게 일단 보관을 요청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서장이 전 서원을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폭탄을 찾아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정한 그는 준비된 2개의 폭탄을 경찰서를 겨냥하여 던지고 밀양 서문(西門)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격을 받다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피체당하고 말았다.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동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2184 | 51-1-24 | 덕산사 | 독립운동 | 2003-05-01 | 전라북도 고창군 | 옥길호 | 사당 | 기타 | 1947 | 정면 3칸 | 1947-01-01 | 전북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 위치한 덕산사는 이 고장 출신 독립유공자 백정기, 백인수, 백관수를 추모하기 위하여 1947년 건립되어 1995년 재건되었다. 백정기는 1896년 전남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같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만주로 피신하였다. 28세 때인 1923년에는 일왕을 암살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관동조선인대학살 사건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조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쳤다. 193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했으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동지들과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1931년 11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요인 사살·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BTP’라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가 상하이 홍커우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원심창과 함께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인수는 1856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당시 의관벼슬에 있었는데 을사보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백성기와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이제 우리 민족에게는 죽음만의 항쟁이 있을 뿐이다. 나라가 없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애국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백관수는 문경공파조 백인걸 8대손으로 성내면 生芹里 마을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수학하고 신문학에 뜻을 두고 동경유학을 떠났다. 송진우, 김병로 같은 인물들과 친분을 두터이 하면서 항일운동을 모의하고 상해임시정부의 金九.金奎植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그 보다 앞서 기미년 芹村은 일본에서 朝鮮靑年 獨立團을 조직하고 그 團長에 추대되어 金度演 羅容均 李光洙 張德秀 등과 긴밀한 연락 끝에 3.1운동의 도화선인 2.8獨立宣言書를 발표하게 되였고 드디어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그 뒤에 근촌은 항일문화활동을 위해서 朝鮮事情硏究會와 弘文社를 만들어 月刊東方評論을 발간하고 太平洋會議에 民族大表로 참가했다 또 한편 중앙고보에서 육영에도 힘썼고 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했다 그 재임중에 强制發幹시키려는 총독부와 맞서서 옥중에서도 끝끝내 굴할줄 모른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仁村과 함께 韓民黨 창당 산파역을 하고 입법의원법사위원장 制憲國會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계의 거물이였으나 6·25당시 강제 납북되였다. 백관수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정치인이다. 일본 유학 중 1919년 신익희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잠시 교육활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 투신,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헌법기초를 담당하였다. |
2185 | 30-2-14 | 헤스대령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대구광역시 동구 | 공군32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3-01-13 | 대구시 동구 검사동 제11공군전투비행단 내에 고아수송작전을 수행한 주인공인 헤스 대령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51COB 제4파견대에서 1963년 1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헤스(Dean Elmer Hess) 대령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시에는 유럽에서 P-47 전투기를 몰고 63회 전투 출격하는 전적을 쌓기도 했다.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참전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고 한국 근무 중 중령으로 진급했다. 헤스 대령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공군을 크게 육성하는 BOUT 1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 추진이었다. 그는 미군 장교 4명과 100여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물자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었고 고정된 훈련 비행장도 없어서 이 비행장 저 비행장을 전전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군과 고락을 함께 하며 한국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은 3년도 안되어 75기의 무스탕 전투기에 자체 출격이 가능한 근대 공군으로 성장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쟁의 위기를 넘기자 헤스 대령의 교관들로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다시 이수했었다. 그는 한국 공군을 훈련시키면서도 수시로 미군 또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동반 출격해서 25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헤스 대령은 이런 군사적인 면보다도, 그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고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하던 1950년 12월 14일 미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1, 000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피난시킨 대 수송 작전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끝내고 미국에 돌아 간 뒤에도 계속 자금을 모아 고아원을 돌봤다. 그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민족에 가까웠던 미 공군 조종사로 남아 있다. | |
2186 | 50-1-31 | 의병장 추공기엽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0 | 전라남도 담양군 | 추규호(손) | 비석 | 의병운동 | 1879 | 2001-04-07 | 을사늑약 이후 거병하여 전북 익산지방 등 육지와 해상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1909년 순국한 추기엽의병장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함 | |
2187 | 55-1-26 | 매천 황현선생 유적지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장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1855 | 안채, 행랑채, 사당, 정자 | 2002-03-01 | 황현은 11세때 한말 대석학인 왕석보의 문하생이 되어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24세 때 상경하여 강위를 통하여 이건창, 김택영과 교유하게 되었으며 32세 때에 구례 간전면 만수동에 구안실을 짓고 부모님을 모신 가운데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하였으며 56세 되던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민족자존의 울분에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구례 광의면 월곡에서 순절하였다. 황현의 우국충정과 역사· 문화 업적을 기리고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려 애국· 애향정신을 북돋우며, 그 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광양시에서는 순천보훈지청과 협조하여 생가를 2001년에 복원하였다. |
2188 | 26-2-06 | 호국영웅 김종오대장 흉상 | 국가수호 | 2002-11-21 | 세종특별자치시 | 부강초등학교총동문회 | 동상 | 6·25전쟁 | 1952 | 0 | 2001-05-22 | 김종오 대장은 충주 동락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한국전 최초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 3만여 중공군을 섬멸하고 '한국 지상전 최대의 꽃'이라는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를 남겼다. 이러한 김종오 대장의 공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고취하고자 2001년 김종오 대장의 모교 부강초등학교에 흉상을 건립했다. |
2189 | 20-1-19 | 임병직박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충청남도 부여군 | 임병직박사추모위원회(임응규) | 비석 | 해외운동 | 1893 | 0 | 1978-09-21 |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가 임병직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8년 9월 21일 추모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병직 박사는 1913년 이승만의 알선으로 도미 오하이오대학에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그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 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 활동을 하였으며 1941. 4. 20.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그는 김호, 한시대 등과 집행부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 하였다. |
2190 | 51-1-20 | 춘우정 김선생 투수 순절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유회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36 | 본비 2.1m, 방면비 1.2m | 1978-06-30 | 김영상이 투신 자살하려 한 만경강 나루터 입구에 세운 순절비.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조선 양반과 귀족을 회유하기 위해 ‘천황 은사금’을 지급하였다. 김영상이 은사금을 거절하고 서자(書字)를 찢어버리자 일제는 그를 ‘불경죄’로 체포하여 동곡 헌병대에 구속시켰다. 이에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자 일제는 군산 감옥으로 이송하고자 만경강 신참나루터에서 김영상을 나룻배에 태우고 만경강을 건너자 김영상은 강에 몸을 던졌다. 일본 경찰에 의해 구조되어 군산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투옥된 지 8일만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78년 6월 30일 춘우정김영상선생 순국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는 김영상의 애국 충절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경강 나루터 입구 제방 위에 이 비를 세웠다. |
2191 | 51-1-09 | 3·1운동 기념탑(태인) | 독립운동 | 2002-12-01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탑 | 3·1운동 | 1919 | 높이 5m, 넓이 29.4 흉고3.5m | 1984-03-01 | 이 기념탑은 태인 3·1독립운동에서 희생된 애국지사 25인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4년 3월 1일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성황산 내)에 건립되었다. 1919년 3월 5일 송수연, 김현곤, 송한용이 태흥리 오리 부락에서 만나 거사방법을 토의하였고 7일부터는 송문상, 김달곤이 동참하여 읍원정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일시는 3월 16일 태인 장날 정오, 김현곤은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인보통학교의 교원과 학생 동원, 송수연은 행사진행 지휘, 송한용은 태극기 제작을 담당했다. 3월 16일 정오에 종소리가 울리자 장터에서 송수연의 선봉으로 의혈 청년들은 조국광복을 부르짖는 가두연설을 하고 대오를 지어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들은 총칼로 이를 탄압하여 박지선 등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성황산과 항가산에 모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날 100여 명이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그 중 송수연, 김현곤, 김달곤, 송문상 등 주동자 25명은 5월 15일 정읍재판소에서 태형과 구류 등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2192 | 15-2-65 | 고양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6.25참전유공자회 고양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6-25 | 고양6·25참전동지회는 2001년 6월 25일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97-6에 6·25전쟁에 참전한 고양시 거주 회원들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2193 | 14-2-03 | 유격군 충혼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중 | 2001-11-29 |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6·25전쟁시 반공결사대를 조직하여 유격전을 펼치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을지타이거여단유격군전우회에서 2001년 11월 29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탈환 후 1951년 1·4후퇴 때에 북한 지역과 3·8도선 접경지대에 거주하면서 치안대·청년대·학도호국대 등으로 반공결사대를 조직하여 공비소탕과 치안사업에 헌신한 청년방위군 등은 육군 '을지 제2병단'으로 편성된 후,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제8240)부대에 예속, 이후 '타이거여단'으로 개편된 반공유격대원으로 북한 연안일대와 적지내륙 등지에서 첩보전을 수행하며 도서지역 및 해상 방어 작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KLO부대는 1950년 9월 14일 인천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여 함정 261척이 안전하게 수로에 진입하게 하는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재 총 3, 875위의 8240한국유격군 전몰용사의 위패가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후, 유엔군의 보급지원 종료와 철수명령에 따라 1954년 2월 22일 국방부 8250부대에 통합·편입되어 군번을 부여 받고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대원들은 1992년 12월 '8240국제연합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로 통합되었다. 이에 '자유의 의병(義兵)'들의 넋을 위로하며 한국 유격군의 명예선양과 후세들에게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살고자 2001년 9월 1일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북녘의 미수복 산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이곳 교동도에 그들의 고귀한 생명과 희생을 나라에 바친 자유의 십자군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2194 | 42-2-20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 (거제)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제시 | 거제시 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1999 | ㅇ | 1999-11-10 | 거제 고현동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거제 지역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거제)’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거제시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9년 11월 1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거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2195 | 50-2-16 | 충혼비(해남)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해남군 | 해남경찰서 | 비석 | 기타 | 1948 | 1950-01-01 | 해남경찰서 뒷뜰에 1950년 정부 수립 후 혼란기 좌익 무장폭도와 싸우다 순직한 26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해남경찰서와 지역 사회단체장들이 이인갑, 박재규, 정찬수, 송병률 등 전몰경찰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0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1966년 신청사 신축과정에서 충혼비를 무관심 속에 방치하다가 1991년 복원한 후 1998년 8월 해남경찰서가 신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해남군 해리로 옮겼다. 해남경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호국정신과 봉사정신을 기리고 있다. | |
2196 | 42-1-32 | 열사 죽헌 이교재 순국 기적비 | 독립운동 | 2004-12-10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이상화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7 | 0 | 2002-05-04 | 이교재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교재는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돌리다가 진주에서 체포되었는데,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만기 출옥한 이교재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과 국내 연락책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통영의 김종원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3년 9월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3년간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국내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되돌아가려다 신의주 국경에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이교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에서 갈톱회를 조직해 고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주었다. 1931년 이교재는 국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되돌아갔다. 같은 해 11월 20일 상주대표 직위를 위임받아 경상남북도에 퍼져 있는 애국지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연락책 역할과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는 일, 독립자금을 모집하였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한 이교재는 진주·대구 등지를 돌아다니며 은밀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마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일제는 그를 강제 출소시켰다. 석방된 지 10여 일 만인 1933년 2월 14일 사망하였다. |
2197 | 55-1-27 | 완계정사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곡성군 | 안형식 | 조형물 | 의병운동 | 1881 | 사당, 산앙재 | 1901-01-01 | 안훈은 곽종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919년 파리만국회의에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137인 중 한 명으로 이명은 안자정이다. 그는 1901년 완계정사를 설립하고 해방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일제의 창씨개명 등에 반대하며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고, 1941년에는 의병장 이석용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완계정사는 이같은 안훈의 지도 아래 곡성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완계정사는 해방 이후 크게 훼손되어 200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
2198 | 51-1-41 | 오열사 충혼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부안면 | 탑 | 기타 | 1977 | 높이 10m | 1977-05-28 | 고창군 부안면 장군봉에 위치한 오열사 충혼탑은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다섯명의 열사 (이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와 호남칠의장(고관순, 기삼연, 김준, 김수용, 이석용, 심남일, 문태수), 청산리 · 대전자대첩의 전공을 세운 장병들의 위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설립했다. |
2199 | 31-1-56 |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안동시 | 이재영 | 비석 | 기타 | 1905 | 0 | 2004-11-07 | 하계마을 출신인 이만도, 이중언 등 25명의 독립운동가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지역 보훈문화창달에 기여하기 위해 2004년 11월 7일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에 독립운동기적비가 건립되었다. 하계마을은 퇴계 이황 선생의 고택과 묘소가 있는 곳으로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정착해온 마을이다. 조선조에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25명의 애국지사를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다. 이만도 선생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지도자로서 백동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육성하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늑약을 당하자 24일간 단식 후 자결하였다. 그의 며느리인 김락 여사도 파리장서를 주관한 남편 이중업과 광복회사건의 아들 이동흠을 뒷바라지했고 자신은 3․1 예안만세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실명했다. 이만도 선생과 을미의병을 함께 일으켰으며 단식에 동참하여 순절한 동은 이중언 선생, 3․1 예안만세 운동의 이비호 선생, 만주항쟁의 이원일 선생, 한말에 의병활동을 한 이만원 선생,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이종흠(李棕欽) 선생이 모두 하계마을 출신이다. |
2200 | 15-2-63 | 연천군 6·25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연천군 | 6.25참전유공자회 연천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1 | 2002-09-18 | 연천군은 2002년 9월 18일 경기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194-3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자유 수호를 위하여 장렬히 전사한 연천군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
2201 | 40-2-16 | 영도 유격부대 선열동지 추념비 | 국가수호 | 2004-05-08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시설공단 태종대유원지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1.6*0.25*1.2 | 2003-10-03 | 6·25전쟁 당시 월남한 반공청년 1, 200여명이 부산 영도(태종대)에 본부를 두고 주한연합고문사령부 지휘하에 북한땅에 공중 또는 해상 침투하여 적의 군사시설 파괴, 군사정보수집 등 반공유격전 전개하다가 491명의 대원이 전사하였다. 육군전사(陸軍戰史)에는 이 부대가 2년여에 걸쳐 적군 4, 810명 사살, 각종 군사시설 파괴 378건, 각종 무기류 노획 등의 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전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부대는 해체됐고 1953년 북파된 900여 명 중 40여 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영도유격부대전우회는 2003년 10월 3일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29-1(태종대 내)에 ‘영도유격부대 선열동지추모비’를 건립하고 전몰부대원 491위의 이름을 비문에 새겨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였다. |
2202 | 23-1-29 | 상록탑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시 | 탑 | 문화운동 | 1901 | 0 | 1976-01-01 | 심훈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연유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이후부터 본격적인 문학수업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의 소설들은 대체로 항일정신을 고취시킨 내용으로서 일경의 검열로 중단된 작품이 많다. 선생은 1934년 장편소설 직녀성을 써서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에는 농촌 계몽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여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 모집에서 당선되었다. 선생이 평소부터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던 농촌 계몽운동을 피력한 이 소설은 이후 한국 농촌 계몽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상록수 정신을 후세에 전달하고자 상록탑을 건립 하였다. |
2203 | 14-2-13 | 인천광역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광역시청 | 탑 | 6·25전쟁 | 1950 | 대 | 1972-08-15 |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천출신 국군장병 379위가 남구 도화동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이들을 1968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한편, 자유공원에 있던 충혼탑도 이 기회에 다시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1972년 이름을 현충탑으로 바꾸는 동시에 건립지는 수봉공원으로 결정하고 경찰 충혼탑도 새로운 현충탑에 합치기로 결정되었다. 또 현충탑 건립 부지임야 1천평은 이 사업의 뜻에 감동한 김태현씨가 기증하여 1972년 4월25일 착공하여 동년 광복절에 준공하였다. |
2204 | 45-2-17 | 충혼비(신천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천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2-10-01 | 서귀포 신천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신천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2년 10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천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천리 주민들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205 | 45-2-02 | 충혼탑(안덕면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안덕면 | 탑 | 6·25전쟁 | 1950 | 1999-03-17 | 안덕면 충혼묘지 내에 1999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영평 소위 등 84위(군인 83위, 기타 1위)의 안덕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제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9년 3월 17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안덕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안덕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206 | 53-1-14 | 일강 김철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07-05-03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기념관 | 해외운동 | 1886 | 지상 1층 | 2003-06-29 | 함평을 대표하며, 호남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일강 김철 선생(一江 金澈ㆍ1986~1934, 건국훈장 독립장)의 애국정신을 재조명하고 호국충절정신을 계승하는 등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신광면 함정리 1만 770㎡ 경내에 위치하며 사당, 수양관, 기념관, 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 김철 선생 생전의 사진, 유물 등과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 당시의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임시정부 회의 장면등이 재현되어 있다. 김철 선생이 생전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주도하고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재무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서 그 활동상황을 엿볼 수 있다. |
2207 | 15-1-20 | 석인 정태진 기념관 | 독립운동 | 2006-04-24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생가 | 문화운동 | 1903 | 0 | 2004-06-01 | 파주 중앙도서관 옆에 위치한 정태진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이며, 한글학자인 정태진의 생가이다. 정태진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미국에 건너가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거쳐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31년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2년 9월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도의 흥원 경찰서에 구금되어 징역2년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자 조선어학회를 복구하고 큰사전의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 중앙대학 홍익대학 동국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
2208 | 13-1-22 | 유석 조병옥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5-06-01 | 경기도 과천시 | 서울대공원관리사무소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94 | 0 | 2003-06-30 | 태산같은 기상, 바다같은 도량, 주옥같은 연설은 이 강산의 큰 빛이요, 높은 횃불로서 민족사에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높고 맑은 절개는 민족의 귀감이며,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힘이다. 온 겨레와 함께 추모하는 마음으로 선생이 서거한 지 43주년을 맞이하여 위업과 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성금을 모으로 국가보훈처와 서울특별시의 협조를 받아 이 동상을 세웠다 |
2209 | 52-1-36 | 건재 정인승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06-04-24 |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 장수군 주민생활지원과 | 기념관 | 문화운동 | 1897 | 0 | 2005-08-01 | 정인승(鄭寅承, 1897~1986)은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출생으로, 호는 건재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행을 희망하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5년 서울로 와서 최현배(崔鉉培)를 만나 조선어학회 이사가 되면서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일제가 한국어의 보급과 한글로 된 출판물의 출간을 금지하는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뜻을 이어받아 이를 널리 알리고 우리의 겨레와 사회에 우리 민족정신과 우리 언어의 뿌리를 배양하고자 국가보훈처, 장수군청, 장수군지역 주민들과 유족들이 힘을 합쳐 2005년 10월 24일 기념관을 선생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건립하였다. 정인승 기념관에는 선생의 유품과 저서, 약력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며, 외부에는 선생의 동상과 유허비, 사당을 건립하여 선생의 한글 사랑 얼을 기리고 있다. |
2210 | 40-2-17 | 6·25 참전용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4-05-08 | 부산광역시 금정구 | 금정구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 | 2003-06-18 | 금정구 노포동 810-6번지에 소재한 6·25 참전용사 기념비는 2001년 5월 금정구 내 인사와 단체를 주축으로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기념비 건립 사업을 추진하여 2003년 6월 18일에 건립되었다. 이 기념비는 6·25참전용사의 명예선양과 전후 세대들의 호국정신 함양 및 주민 안보의식 고취로 국가관 확립 및 지역안보태세 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6·25전쟁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들의 위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
2211 | 24-1-14 | 자양영당(제천의병 전시관) | 독립운동 | 2003-01-17 | 충청북도 제천시 | 제천시 | 기념관 | 의병운동 | 1895 | - | 2001-10-26 | 한말의 제천의병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서 유중교(柳重敎)와 유인석(柳麟錫)이 거주하며 제자를 양성한 제천의 장담(長潭)(제천시 봉양읍 공전리)마을이 의병봉기의 터전이 되었으며, 지평의병이 패하고 영월로 후퇴하자 유인석이 요동(遼東)행을 포기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진을 수습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제천이다. |
2212 | 33-1-41 | 산남의진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05-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 | 2006-11-24 |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영화 영일 청송 등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강봉학(1890~1914), 박한종(1855~1934), 전응팔(1878~1971), 조상환(1866~1908), 최치환(1875~1944) 애국지사의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 2006년 11월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산 78-4에 산남의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2213 | 23-2-17 | 월남참전기념탑(마서면) | 국가수호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월남참전유공자서천군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3-04-03 | 서천 출신 월남 참전 유공자(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비둘기부대, 십자성부대, 주월사부대, 백구부대원들)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2214 | 16-2-20 | 삼천봉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철원군 | 육군 제668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3-10-01 | 육군 제15사단은 1983년 10월 1일 강원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GOP입구에 삼천봉지구 전투에서 불멸의 전공을 세운 2사단 장병들의 영웅적인 투혼을 높이 찬양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삼천봉지구 전투는 1951년 8월 9일부터 9월 3일까지 중공군 제20군 예하 4개 사단의 대병력이 적근산 및 대성산을 탈취하고자 인해전술로 수차에 걸친 파상공격을 가해왔으나 우리 제2사단 예하 17연대, 32연대 및 사단 유격대대 용사들이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이 일대를 사수하여 대성산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전투에서 적 사살 1, 614명, 포획 328명, 3, 477정의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등 대전과를 거두었다. | |
2215 | 50-1-32 | 안중근의사 동상(장성) | 독립운동 | 2006-11-09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1879 | 1973-03-05 | 상무대에 세워져있는 안중근의사 동상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순국한 안중근의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3년 3월 5일 남산에 세워졌던 것으로 안중근의 동상이 남산에 재건되면서 기존에 있었던 것을 상무대로 이전한 것이다. 참군인의 표상이며 민족의 지도자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려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단죄하고 순국하였다. | |
2216 | 16-2-65 | 원주경찰 전적탑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재향경우회 | 탑 | 6·25전쟁 | 1992 | 1992-06-05 | 원주시 부론면에 1992년 6·25전쟁과 전후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를 격퇴한 전공을 기리고 순국한 김재덕 순경 등의 경찰관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 넋을 길이 보전하고자 ‘전적탑’을 건립하였다. 원주경찰서는 이곳에서 근무하다 순직한 호국경찰과 이에 협조한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2년 6월 5일 준공하였다. 2003년 10월 모산고개로 확장 건립했다. 6·25전쟁 기간에 원주경찰서는 취병리 범선골, 관설리 백운산 등지에 출몰한 공비를 격퇴했고, 전후에도 북한의 대남침투에 맞서 1953년 11월 15일 반곡리에 침투한 공비 1명을 생포했으며, 1965년 8월 5일 법천리에 출현한 무장공비 4명이 출현했을 때 부론지서 소속 3개 소대가 출동하여 3명을 사살했다. 1967년 9월 1일 관설리에서 생포한 무장공비를 연행하던 중 김재덕 순경은 불의의 기습으로 순직했다. 원주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217 | 55-1-38 | 의사 죽계 선공 기적비 | 독립운동 | 2007-11-11 | 전라남도 보성군 | 선동우(손) | 비석 | 의병운동 | 1908~1909 | 0 | 1984-3-2 | 1908~1909년 보성 문덕면 동소산에서 기의한 안규홍 의진에 입진하여 선후군장으로 보성, 순천, 고흥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 함 |
2218 | 23-1-13 | 백곡3.1운동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백곡리새마을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85-03-01 | 백곡리새마을회는 1985년 3월 1일 정산3·1독립운동에 참여한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마을회관 옆에 백곡 삼일운동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기적비에는 백곡리 출신의 홍범섭 등 5명과 태형 90대를 받은 조종원 등 12명, 일경의 총칼에 중상을 당한 김필현 등 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정산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6일간의 정사면 장날에 7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 일경의 무력탄압에 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운동이다. | |
2219 | 52-1-14 | 유관순 상 | 독립운동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백운면장 | 동상 | 3·1운동 | 1902 | 0 | 1983-01-01 |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新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민들이고, 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 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며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안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유관순은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유관순은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유관순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1만세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순국하신 유관순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백운면 부녀회에서 건립하였다. |
2220 | 15-1-13 | 3·1운동 애국선열 추념탑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시 | 탑 | 3·1운동 | 1919 | 1994-08-15 |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있는 용진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3·1운동 참가자 및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애곡선열추념탑이 1994년 8월 15일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715-1 송촌초교앞 근린공원내에 건립되었다. 용진교회 이정성 장로, 김현모, 김정하 등은 경진학원 교사, 교회 청년들과 함께 3월 14일 경진학교에서 사용 중인 일장기로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5일 이른 아침부터 이들은 교회 신도와 동리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조안리와 능내, 팔당을 지나 면소재지인 덕소리에 다다르니 시위군중이 5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면사무소 주위를 돌며 시위를 강행했다. 서울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게 주동자 이정성 김윤경 정일성 등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어 13명이 추가 연행되어 실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원산·함흥형무소에서 각각 복역하였다. | |
2221 | 42-1-36 | 수산선생 이공 추모비 | 독립운동 | 2008-12-03 | 경상남도 의령군 | 임천정 열락계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6-08-01 | 이태식의 호는 수산이고, 다른 이름은 이태곤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의령이다.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한국독립을 기원하는 내용의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때 곽종석‧장석영‧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유림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외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1926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김화식‧송영호‧이봉로 등과 함께 내몽고 일대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세력 양성 등을 위한 국내의 군자금 모금에 힘썼으나, 목표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자 제2차 군자금 모금을 실시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이 군자금 모금을 감지하고 대대적 검거에 들어가 600여 명의 유림인사들이 체포‧구금되었을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수년 간 도피생활을 하였다. 2004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2222 | 55-1-39 |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 독립운동 | 2008-09-05 | 전라남도 보성군 | 김태식 | 사당 | 의열투쟁 | 1876 | 사당 목조건물 1식 | 2006-09-05 | 이 비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1990년에 주민들의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하여 2006년에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백범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
2223 | 51-2-25 | 6·25 및 베트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6-04-24 | 전라북도 정읍시 | 사)6.25참전유공자회전북정읍시지회 | 탑 | 6·25전쟁 | 2005 | 높이 11.7, 넓이 10.3 | 2005-09-28 | 정읍시 부전동 내장저수지 부근에 2005년 6·25전쟁에 참전한 권영길, 송을용, 서기철 등을 비롯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김태언, 안흥남, 홍문성 등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읍시 6·25전쟁 및 베트남전쟁 참전기념탑’을 건립했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구국 용사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9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대구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정읍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224 | 14-2-15 | 충혼탑(용유도) | 국가수호 | 2003-05-30 | 인천광역시 중구 | 유격백마부대전우회 | 탑 | 6·25전쟁 | 1950 | 소 | 1953-10-13 | 1950년 11월 17일 평안북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략적인 후퇴를 하게 되자 평안도 일대 치안활동을 하던 애국청년들과 오산학교 학생 2,600명이 힘을 모아 1950년 11월 22일 유격백마부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백마부대는 김응수 부대장 지휘하에 6·25전쟁 당시 서해 도서지역을 오가며 500여 회의 유격전을 펼치고 철산반도 앞 대화도를 기지로 점거하여 북한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명을 생포하는 등 숱한 전과를 올리며 유엔군의 정규 작전에 크게 도움을 준 비정규군 전투부대이다. 유격백마부대는 전투 임무 수행 중 552명의 영웅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북한 서해지구에서 싸우다 전사한 552위의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자 생존 전우들이 1953년 10월 13일 부대가 창설된 지역에 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56년의 장구한 세월이 경과하면서 충혼탑이 마멸되어 2009년 6월 2일 보수공사를 통해 현 모습으로 재건립하였다. |
2225 | 53-2-16 | 무공수훈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2-24 | 함평군 기각리 함평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와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함평군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2월 24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함평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2226 | 17-2-29 | 호국유공자 명비(동해)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동해시 | 육군제1607부대 | 비석 | 기타 | 1950 | 너비 2mX2m, 높이 2.56m | 2000-12-21 | 동해시 거주 6·25 및 월남전 전사자 및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2227 | 51-1-15 | 남강정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장욱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1841 | 정면 4칸, 측면 4칸 초가 | 1877-01-01 | 이 곳은 장태수가 순국한 집이다. 이 집은 '남강정사'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장태수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21세 때인 1861년(철종 12) 신유 식년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69년(고종6) 양산군수로 부임하자 군기를 정비하고 별포군을 길러내는 등 국방에 힘썼다. 또 병조참의, 돈녕부도정, 대사간 등 요직을 지낸 다음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때는 고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고종황제의 선위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명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 냈으나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그 사이 1875년엔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인 금구에 내려와 효도에 전념하였다. 부친 사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간 그는 가선대부시정원부경에까지 올랐으나,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가 회유책으로 보낸 은사금을 거절하고 『자죄문』을 지어 망국을 자책하는 한편,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임금에게 불충하고 조상에게 불효한 것이라 하며 단식하여 목숨을 끊고자 하였다. 그는 동포에게 주권의 회복을 호소하는 고결문을 남기며 우국충정을 동포에게 호소하던 중 단식을 시작한지 20여 일이 지난 11월 17일 그는 그의 생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
2228 | 23-2-23 | 서천군 6·25참전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6-11-09 | 충청남도 서천군 | 6.25참전유공자회서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5-12-13 | 서천군 종천면에 2005년 6·25전쟁에 참전한 이 고장 출신 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천군 6·25 참전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서천읍 지회는 김중연, 남상윤, 구재승 홍성갑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위훈과 충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12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서천 군민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서천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229 | 14-1-12 | 백범 김구선생 상 | 독립운동 | 2008-05-09 | 인천광역시 부평구 | 부평여자중학교 | 동상 | 해외운동 | 1876 | 소 | 1980-01-01 | 김구 선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운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해방 후에는 국내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썼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김구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몸 바친 민족의 지도자 및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이 인천에서의 수감생활과 인천축항공사 노역 등으로 인천과 연이 깊었던 점을 기릴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당시 교장선생님의 주도 하에 1980년 부평여자중학교 내에 백범 김구선생 상이 건립되었다. |
2230 | 30-1-51 | 강원형 애국지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칠곡군 | 강신욱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62 | 1965-10-03 | 강원형은 구한말 국권회복운동과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전개한 독립지사이다. 강원형은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 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했다. 그러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 전판서 김학진, 비서승 허위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우두머리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2231 | 50-1-36 |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9-05-25 | 전라남도 완도군 | 문권섭 | 비석 | 학생운동 | 1926 | 2008-12-10 | 문승수는 1905년 1월 21일 전남 완도군 군외면 대아리에서 강성군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한 후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왕재일·장재성·최규창과 광주농고의 박인생·정남균·문승수 등 16명이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를 조직 주도하여 민족혼을 일깨웠으며 조국 독립 쟁취,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며 투쟁하였다. 1928년 3월 완도 약산사립보통학교에 재직하면서 야학과 독서회까지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중 1928년 11월 3일 광부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 조종과 주동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도 피체되었다. 1930년 10월 27일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았으며 대구복심법원에 공소,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기관으로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는 재정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야학과 독서회를 통하여 농민계몽과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3년 8월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을 계기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어 전남운동협의회가 탐지됨에 따라 그도 1934년 2월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고문과 옥중 투쟁 끝에 그는 결국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다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
2232 | 23-1-48 | 일연신현상추모탑 | 독립운동 | 2009-09-22 | 충청남도 예산군 | 일연각모연회 | 탑 | 해외운동 | 1905 | 1975-06-29 | 일연 신현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일연각모연회에서 2009. 9. 22. 건립하였다. 신현상 선생은 호서은행에서 거금의 독립운동자금 탈취사건으로 공주형무소에서 5년형(1929. 3 - 1932. 12 까지)을 받은 사실이 있고 임정 요원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공적이 확인됨. | |
2233 | 16-2-81 |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 국가수호 | 2007-05-03 | 강원도 춘천시 | 한국자유총연맹 춘천시지회 | 기념관 | 6·25전쟁 | 1951 | 2006-10-06 | 춘천시는 2006년 10월 6일 강원 춘천시 근화동 365-3에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희생한 수많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이 참전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기념관은 면적 530.71㎡ 규모로서 에티오피아 전통가옥 양식인 돔 형태로 지었다. 1층에는 에티오피아군의 참전과정, 전투상황, 참전 기간 사용했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았으며, 2층에는 에티오피아의 역사, 문화, 종교, 생활풍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풍물전시실과 교류전시실을 설치해놓았다. | |
2234 | 30-1-53 |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0-06-09 | 경상북도 구미시 | 왕산기념사업회 | 기념관 | 의병운동 | 1908 | 2009-09-28 | 허위는 1854년 경북 구미에서 출생하여 영희정 참봉, 평리원 재판장을 거쳐, 의정부 참판, 비서원승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통분하여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이인영, 신돌석, 이강년, 문태서,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전국연합 의병부대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고,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경기·황해도)으로 선발대 300여명을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공격하려는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후속부대와의 연결 미비와 무기의 열세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선생은 1908년 5월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선생의 출생지인 구미에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
2235 | 52-2-40 | 충혼비(동상)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동상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8-06-01 | 완주군 사봉리에 1998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완주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동상면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면민들의 성금을 모아 1998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동상면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동상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236 | 25-2-52 | 6·25 참전 유공자비(낭성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낭성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6-29 | 낭성면 재향군인회는 2004년 6월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 산 32-1에 낭성면 출신 6·25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도로공사로 인하여 2020.4. 현 위치인 호정리 산 34-9 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
2237 | 52-2-12 | 충혼 불멸탑(마령)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마령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0-09-28 | 진안군 동촌리에 2000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향토방위대의 영령을 추모하고 일반 참전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마령면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0년 9월 2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강만석, 고삼성, 곽봉주, 김덕헌 등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향토방위대를 조직하여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면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으며 수차례의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또한 강업동, 김공두, 박용부, 송병진 등 일반 참전자 유공자들은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2238 | 42-1-38 | 진해 3·1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9-05-25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창원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9-01-27 | 기미년(1919년) 4월 3일 마천동 냇가에서 우리고장 민족정신의 산실인 “계광학교”교사 주기용 선생을 비롯한 시민과 학생 3,00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킨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고자 1986년 두동에 비를 건립하였으나, 주변 여건의 변화와 노후로 인해 독립만세운동 발원지 인접 남양동에 이전 건립하여 2009년 1월 27일 준공되었다. |
2239 | 13-1-25 | 송산지역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9-05-25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장 | 탑 | 3·1운동 | 1919 | 0 | 2008-02-19 | 화성시는 2008년 2월 19일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58-4 송산3·1기념공원내에 송산지역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여 송산지역 3·1운동에 참여한 순국선열 및 면민들의 공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탑 주변에는 분향대를 비롯해 순국선열 42인의 이름을 새긴 기록벽과 송산 3.1운동 약사를 기록한 기록벽을 세웠으며 답 둘레에는 4개의 팔각형 조명등을 세웠다. 1919년 3월 26일 송산면사무소에서 200여 명으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27일 400여 명이 참가하는 서신면 지역의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며 28일 사강 장날을 맞아 군중 2천여 명의 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경 노구치의 강경한 진압에 성난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도망가는 노구치에게 달려들어 돌과 몽둥이로 때려 사망하게 한다. 원래 송산지역은 일제에 의해 해안일대의 농경지, 염전 간척에 무자비한 인력을 동원 당했고 식량과 소금의 가중한 수탈로 일제에 대한 원한이 특히 깊었던 곳이다. 이것이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과감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원인이 되었고 발안만세 운동, 화수리 주재소 습격 방화와 일경 가와바다 처단으로 이어졌다. |
2240 | 55-2-35 | 도덕면 현충탑 | 국가수호 | 2007-11-11 | 전라남도 고흥군 | 도덕면 | 탑 | 기타 | 2006 | 탑 | 2006-12-26 | 도덕면번영회는 2006년 12월 고흥군 도덕면 신양리 534-4번지에 고흥군 도덕면 출신으로 6·25참전유공자, 공비토벌 작전 수행중 순직한 경찰 등 호국영령 57위의 공적을 기리고 후손들이 호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
2241 | 14-1-15 | 강화 3·1운동 역사기념관 | 독립운동 | 2020-10-12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초대교회 | 기념관 | 3·1운동 | 1919 | 소 | 2020-4-18 | 독립지사 송암 유경근 선생은 3·1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종환 선생을 강화(남부)지역 만세운동 선봉자로 지정하였고, 조종환 선생은 유봉진 선생 등과 함께 현재 강화 3·1운동 역사기념관(당시 피뫼교회)에서 3월 8일, 3월 9일, 3월 11일 등 수차례 만세운동을 논의하여 3월 18일(강화읍 장날)을 거사일로 강화읍을 거사장소로 정하였으며, 염성오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아침 시위 가담자들은 강화읍으로 흩어져 잠입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곳곳에서 시위 가담자들이 합세하였고, 오후 2시경 길상에서 올라온 유희철, 황일남 등 결사대원들이 신문리 시장 쪽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날 강화3·1독립만세운동 참여자는 20,000명에 달한다. 이에 강화군에서는 강화군 3·1운동에 참여한 역사적 인물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애국심 및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강화군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이 논의된 예배당을 복원하여 강화3·1 독립만세운동과 그 정신적 가치를 기념하고, 당시 만세운동 가담으로 희생된 선열들을 추모하고자 하였다. |
2242 | 55-1-57 | 애국지사 임태일 생가 터 | 독립운동 | 2020-10-12 | 전라남도 광양시 | 유족 임병철 | 장소 | 3·1운동 | 1919 | 높이 2.5m 퐇폭 0.5m | 2003-00-00 | 1919. 4. 15.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려다가 피체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199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은 독립유공자 임태일 선생을 기리고자 유족이 건립하였다. |
2243 | 45-1-11 | 의열사 | 독립운동 | 2020-10-12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 사당 | 기타 | 1918 | 건축물 1동, 면적 135㎡ | 2004-00-00 | ○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 최대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내 기념탑은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으며,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한 700여명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2244 | 13-2-72 | 6.25 참전탑 및 월남전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7-04-19 | 경기도 오산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오산시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2014 | 0 | 2014-04-22 | 이 탑은 6.25와 월남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오산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값진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참전용사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세계만방에 떨쳤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산 시민의 마음이 담긴 이 탑을 세워 오산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받들고 그 뜻을 대대로 전하고자 한다. |
2245 | 33-2-52 | (6.25전쟁 격전지) 기계.안강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17-04-19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6-11-23 | 6.25전쟁 기계․안강전투 최후 격전지에서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꽃다운 젊은이들의 거룩하고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시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 당시 격전지인 기계·안강지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반격의 토대를 마련한 전투이다. 이에 치열했던 기계·안강지구전투에서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꽃다운 젊은이들의 거룩하고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그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
2246 | 25-1-21 | 이승칠지사 공적비 | 독립운동 | 2010-11-08 | 충청북도 보은군 | 내북애향동지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10 | 비석 1식 | 1991-09-30 | 충남 보은 출생으로, 1910년 사헌부 감찰직에 재직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려 하였으나 가족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일본왕이 사망하자 일제는 한국인들도 상복을 착용할 것을 강요함에 이를 거부하고 1912년 6월 26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몸이 원수의 복을 입는다면 만대의 수치이다. 이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될 수 없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 봉황대에서 투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2247 | 16-2-113 | 화천군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0-10-12 | 강원도 화천군 | 강원도 화천군 | 비석 | 6·25전쟁 | 높이2.6 m 가로6.7m 세로5.6m | 2019-12-16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화천군 6.25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그 공훈을 선양하고자 1919년 12월 16일 건립하였다. | |
2248 | 30-2-57 | 6·25참전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20-10-12 | 대구광역시 군위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대구광역시지부 군위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6.25 | 2004-12-20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 공헌하신 군위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건립 |
2249 | 11-1-43 | 창동 3사자 동상 | 독립운동 | 2020-10-12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서울특별시 도봉구 | 동상 | 애국계몽운동 | 0 | 2017-8-15 |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탄압을 피해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로 피난하였다. 가인 김병로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에 거주하였으며, 고하 송진우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 위당 정인보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733-4번지에 거주하였다. 사람들은 도봉구에 은둔한 세 위인을 일컬어 '창동 3사자'라 칭하였다. 도봉구는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창동 3사자의 재조명 및 구민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창동 3사자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2016년부터 추진하여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 |
2250 | 43-1-69 | 독립유공자 정세권 생가 | 독립운동 | 2020-10-12 | 경상남도 고성군 | 진주정씨 충장공파 덕명종중회 정병기 | 생가 | 애국계몽운동 | 1935 | 본채1동 | 1940-00-00 | 1926년 서울에서 한옥 건축업인 건양사를 건립하여 북촌한옥마을 조성에 기여하였으며,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 서울 화동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대지를 희사하여 조선어학회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정세권 애국지사의 생가는 1940년 사재를 들여 건립하여 낙향하여 생활하던 곳이었다. |
2251 | 23-1-55 | 독립유공자 이세영 유허비 | 독립운동 | 2020-10-12 | 충청남도 청양군 | 충청남도 청양군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0 | 2003-12-00 | ||
2252 | 15-1-24 | 양평의병전투지(사나사의병전투지) | 독립운동 | 2013-05-09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불교조계종사나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0 | 1907-10-01 |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한층 격해진 의병투쟁에 맞서 일제는 수비대, 헌병, 경찰을 총동원해서 적극적인 정찰과 토벌을 강행했다. 그러나 의병들의 신속한 유격전술을 따라 잡지 못하여 토벌작전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당황한 일제는 의병의 근거지, 보급품공급지, 심지어 의병들이 통과한 지역까지도 살육, 방화하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만행 때문에 민가는 물론 많은 고찰들이 방화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907년 10월 27일 신라 경명왕 7년(923)에 창건된 고찰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던 의병부대 약 150여 명은 연안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들을 토벌하려고 파견된 재경성 보병 제51연대와 교전하였다. 일본군은 이때 보복책으로 사나사를 방화하여 전소되었다. 전소된 사나사는 2년 뒤인 1909년에 일부 복구되었으나, 1950년 6·25전쟁 중에 다시 전소되었다. 1956년 일부 복구작업을 거친 뒤, 1993년에 대웅전과 지장전을 재건하였다. |
2253 | 52-1-40 | 완주독립운동추모공원 | 독립운동 | 2013-05-13 |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 완주군수 | 장소 | 의병운동 | 0 | 0 | 2012-09-01 |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 장병구를 비롯한 29명의 추모 공원. 완주 독립운동 추모공원은 완주독립기념관으로도 부른다. 완주독립운동 추모공원 안에는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선생 구국비와 독립운동 추념탑, 독립운동가 28인의 명판, 독립선언문, 추모각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2년 8월 15일 독립우동가 장병구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12년 9월 1일, 완주26위애국선열선양사업회는 전북 완주군 출신의 독립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국민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
2254 | 11-1-024 | 이종일 집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천도교중앙총부 | 3·1운동 | 0 | 3.1운동 거사를 위해 천도교 대표 등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 배부하던 곳 | |||
2255 | 13-2-71 | 해병대충혼탑 | 국가수호 | 2017-04-19 | 경기도 화성시 | 해병대사령부 | 탑 | 기타 | 2016-12-16 | 6.25전쟁 1,826명 베트남전쟁 1,155명 대침투작전 86명 연평도 포격전 2명 총 3,069명 | ||
2256 | 45-2-22 | 충혼비/순직기념비(창천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창천리 | 비석 | 6·25전쟁 | 1954 | 1954-05-16 | 6.25전쟁 당시 조국과 향토를 방위하기 위하여 전사,순직한 호국영령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 | |
2257 | 30-1-64 | 백세각 항일의적비 | 독립운동 | 2012-11-12 | 경상북도 성주군 | 송만수 | 비석 | 3·1운동 | 1919 | 2004-10-29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말 4월 초 성주 지역 야성송씨 문중이 백세각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서명과 성주지역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논의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준비하여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송준필(宋浚弼, 1869~1943), 송홍래(宋鴻來, 1876~1953), 송회근(宋晦根, 1877~1949), 송규선(宋圭善, 1880~1948), 송훈익(宋勳翼, 1884~1961), 송천흠(宋千欽, 1888~1968), 송우선(宋祐善, 1894~1942), 송문근(宋文根, 1895~1963), 송인집(宋寅輯, 1896~1961), 송수근(宋壽根, 1896~1969)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송명근(宋命根, 1912~1971)은 1931년 12월 대구에서 항일 반전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백세각항일의적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4년 10월 29일 이 비를 세웠다. | |
2258 | 55-1-45 | 독립유공자 주재년 열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12-11-12 | 전라남도 여수시 | 김명섭 | 기념관 | 기타 | 1943 | 지상 1층, 건물 1동 | 2012-05-07 | 주재년 열사 기념관은 2012년 돌산읍 금성리 작금마을 생가터에 설립되었다. 기념관은 본동 1동과 대문간 1동, 비각 1동 등으로 건축됐다. 주재년은 1943년, 15살의 나이로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목화밭 담장 밑 큰 돌 4개에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 일본은 패망한다, 조선 만세, 조선의 빛'이라고 새긴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44년 1월경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4개월 동안 복역했다. 그러나 그는 복역 도중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석방 후 한 달여 만에 순국했다. 정부는 2006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2259 | 40-1-29 |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 독립운동 | 2012-10-17 | 부산광역시 동구 | 대한예수교 장로회 부산노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05-04-15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1일 부산 좌천동 일대에서 당시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박시영과 학생 김응수·송명진·김순이·김난출·박정수·김반수 등의 사전 준비로 수백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김난출(金蘭出), 김반수(金班守, 1904~미상), 김복선(金福善), 김봉애(金奉愛), 김순이(金順伊), 김신복(金新福), 김응수(金應守, 1901~1979), 박시연(朴時淵), 박연(朴蓮), 박정수(朴貞守), 송명진(宋明進), 심순의(沈順義, 1903~미상), 이명시(李明施, 1902~1974), 주경애(朱敬愛)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2260 | 33-1-47 | 백학학원 | 독립운동 | 2013-02-18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전자고등학교장 | 기타 | 기타 | 1921 | 가옥 1채 | 1900-01-01 | 백학학원은 1921년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이다. 이 학원의 설립을 이끈 인물은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의 제자인 조병건이다. 창녕조씨 문중과 지역민들이 힘을 보탰다. 백학학원은 초등 과정이었는데 초등 졸업생들을 중등과정에 보내기 위한 예비교육 과정으로 보습과를 병설로 두기도 했다. 이육사·조재만·이원대·이진영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이다. 백학학원은 설립 이후 한때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정도로 면민이 일치단결하여 경영하였으나 1924년경부터 경영이 점전 어려워지게 되었다. 1924년 3월부터 영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시온촌의 동인들이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경영하면서 백학학원을 맡아 경영하였다. |
2261 | 55-2-36 | 전몰용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7-11-11 | 전라남도 여수시 | 삼산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0.6m, 탑 높이 6m | 2007-06-06 | 6.25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전사하신 여수시 삼산면 출신 92명의 전몰용사의 공헌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함 |
2262 | 14-2-29 | 부평전투 승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9-05 | 인천광역시 부평구 | 6.25참전유공자회 부평구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중 | 2008-05-31 |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백운공원 내에 부평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부평구청에서 2008년 5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부평전투는 인천상륙작전성공 후 서울 탈환 목적으로 진격하던 중 부평에서 있었던 전투를 말한다. 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맥아더사령관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의 최우선 과제는 서울 수복을 위한 김포비행장의 조기탈환이었다. 연합군은 미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를 앞세워 서울을 향해 진격을 하였고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된 한국해병 제3대대 9, 10, 11중대가 공격대열의 선봉에 섰으며 경인국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던 연합군은 부평지역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많은 아군이 전사하였다. 이 비는 당시 부평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 뿐만 아니라 UN의 깃발아래 조국의 수호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한국과 미국의 젊은 용사들의 넋을 기리고자 격전지였던 이 자리에 건립하여 2008년 6월 13일 준공식을 가졌다. |
2263 | 43-1-61 | 독립지사 좌해 허재기 공적비 | 독립운동 | 2014-12-12 | 경상남도 고성군 | 허성유 | 비석 | 3·1운동 | 0 | 1968-03-01 | 1919년 3월 20일 국천사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회화면으로 시위행진하여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대국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
2264 | 43-1-60 | 옥천사 - 고성 독립운동 근거지 | 독립운동 | 2014-03-18 | 경상남도 고성군 | 옥천사 | 기타 | 0 | 1976-01-01 |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성의 유서 깊은 사찰로, 일제시기에는 경남지역 애국지사들의 주요한 활동거점이기도 하였다. 특히 승려 신화수(申華秀)와 한봉진(韓奉眞)은 3·1운동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 변상태(卞相泰)·이주현(李周賢) 등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면서 이들이 거사를 논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본인들도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 전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도모하다가 체포된 옥천사 승려 신화수는 1919년 3ㆍ1운동 발발 후 4월부터 서울에서 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혁신공보』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원으로 폭탄과 권총 등의 무기를 휴대한 채 상하이[上海]로부터 귀국한 김상옥에게 군자금 1, 000원을 제공해 준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한봉진은 1919년 무렵 대한독립단에 가입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윤영백(尹永伯)과 함께 국내에서의 연락책임을 임무를 맡고 옥천사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절은 창건 이후에 수차례 중창하였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 소실되었다가 인조 17년(1639년)에 의오대사에 의해 재건되었다. 경내의 보장각에는 보물 제495호 '임자명 반자'와 지장모살탱, 시왕탱, 옥천사대종 등 지방 문화재 100여 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백연암, 청연암, 연대암의 부속암자가 있는 고찰로 경남 지방기념물 제140호이다. | ||
2265 | 13-2-40 | 참전용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의왕시 | 의왕시장 | 비석 | 기타 | 1950 | 2007-05-15 |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문화의거리 잔디광장에 의왕시 출신 6·25전쟁 및 베트남 참전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의왕시에서 2007년 5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차 및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민족간의 대 전쟁이 발생하였다. 우리 국군 및 전투경찰은 대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16개국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백마고지 작전, 임진강 전투 등의 격전으로 17만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1천만 이산가족을 냈다. 6·25참전유공자들은 휴전 후 군복무를 명예롭게 마치고, 전쟁으로 초토화된 우리나라를 재건하는데 공헌하였다. 휴전 이후 어언 반세기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의 넋을 기리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 없는 평화통일을 기원하면서 오늘날까지 생존한 의왕시 6·25참전 유공자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을 세워 기념하노라. 이 탑은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이역만리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우리 국군용사들의 눈부신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탑이다. 자랑스런 우리 국군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며 싸우던 베트남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싸웠다. 이로 인하여 우리 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치며 조국 대한의 위상을 한껏 더 높였다. 그분들이 흘린 고귀한 피와 땀은 진정 조국 근대화의 힘찬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의왕시민과 참전 단체에서는 이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정신을 후세들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이 탑을 세워 기념하노라. | |
2266 | 51-1-52 | 의병장 오하 이규홍 기념비 | 독립운동 | 2013-05-13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의병기념사업회 이용희 | 비석 | 의병운동 | 1907 | 3층계단 높이 가로1m, 세로4m | 1983-05-17 | 오하 이규홍 의병장은 1881년 익산시 팔봉동 석암 관동 마을에서 이기영 씨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이르자 뜻있는 동지 박의환, 문형모와 함께 의병을 창의 할 것을 다짐하고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 계신 호남 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을 만나 익산의병 창의를 다짐하고 맹약을 했다. 익산의병은 257명으로 7개 지대를 조직하여 발군하는데 부친 이기영 옹은 3,000석에 전 재산을 방매 하여 의병을 도우며 생명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부탁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충정을 다짐하고 하늘에 도움을 얻으려는 뜻으로 운장산에 가서 고천제(告天祭)를 드린다. 익산의병은 완주화산 가금제와 진안 용담 그리고 충남 금산 남이에서 세 차례에 걸쳐 호남의병 토벌에 참전한 일본 정규군과의 전쟁에서 왜병 129명을 사살하고 의병도 85명이 전사했다. 열악한 장비, 조급하게 마련된 무기에 훈련되지 않은 의병은 추운 겨울철에 고전 할 수밖에 없었다. 구국에 열정은 열악한 현실 앞에 인간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08년 4월 20일 밤 살아남은 의병과 이규홍의병장은 대전시 동구에 있는 식장산 장군 바위 아래서 비참한 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의병해산을 선언한다. 다요시의 심정을 이규홍의병장은 그의 오하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칼을 던지고 빈산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눈물이 전의(傳衣)를 적신다 저 두견새도 나의 마음을 알아서 불여귀의 슬픈 마음을 함께 울어주네“ 이규홍 의병장에게 일제는 4,000원(중소2,000마리값)의 현상금이 붙여 신변에 위협을 느끼며 은신하던 대전시 동구 사한동 송덕제씨 집에 1917년 10월 27일 일본 헌병이 급습하자 오도산으로 피신하여 교전중 안면을 스치는 총상을 입는다. 국내에서 투쟁의 한계를 느낀 이규홍은 은신처를 제공한 송덕제씨의 친척의 도움으로 1918년 5월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 이동휘, 신익회, 김규식, 안창호, 이광수씨와 같은 임정요인을 만나게 되고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씨에게 경비로 1,300원을 지원했다. 이 자금은 고국을 떠나올 때 동생 규현씨가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 준 것으로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20년 3월 간도에 가서 사관원 양성소 김좌진 장군을 만나 군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했는데 이 자금이 청산리 전쟁 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국내에 들어와 활동 중 1924년 2월에 서울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4개월간의 잔혹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러 고향에 돌아와 의지할 곳 없어 동생 기영씨 집에서 투병중 1929년 6월6일 고문 후유증으로 4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
2267 | 17-1-12 | 대공산성(관동의병 주둔지) | 독립운동 | 2013-07-22 | 강원도 강릉시 | 보현사 | 장소 | 의병운동 | 1896 | - | 0000-00-00 | 강릉의 대공산성은 1895년 민용호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한 동안 주둔했던 곳으로 알려진 산성이다. 발해의 대조영이 쌓았다 하여 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쌓았다는 의미에서 대공산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가까운 곳에 보현사가 있어 보현산성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을미의병 때 민용호는 1896년 1월 13일 원주에서 봉기한 이후 약 10개월간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민용호 부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동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현산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정부군이나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서기보다는 산악 지대인 관동지방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이다. 민용호 부대는 1896년 1월 17일 원주를 떠나 1월 29일 대관령을 넘어 강릉성 밖의 구산까지 행군하였으며, 2월 1일 강릉에 입성하였다. 그 후 원산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4월 초순에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5월 24일 강릉에서 물러나 동해안을 따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현산성이 을미의병 때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격전을 치러낼 정도로 의병의 근거가 되는 성으로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
2268 | 11-1-28 | 승동교회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승동교회 | 기타 | 3·1운동 | 0 |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이 1층 기도실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의한 이른바 제1회 학생지도자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학생대표들은 전문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아우르기로 합의하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설 것을 결의했지만, 사흘 뒤인 23일 다시 승동교회에 모여 학생대표들이 만들었던 독립선언문을 태워 없애버리고 범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세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이 교회에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 ||
2269 | 45-2-46 | 베트남참전위령탑 및 고 송서규대령 동상 | 국가수호 | 2008-05-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베트남참전현충회 | 동상 | 월남참전 | 1967 | 0 | 2006-05-06 | 건립추진위원회는 2006년 5월 6일 제주시 노형동 산19-2에 베트남 참전용사의 명예선양과 호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베트남 참전 위령탑과 송서규 대령 동상을 건립하였다. 특히 송서규 대령은 1966년 8월 백마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에 참전하여 오작교 작전, 비마작전, 부루도자 작전 등 많은 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67년 11월 6일 귀국을 이틀 남긴 상태에서 닌호아 지역에 침투한 월맹군과 베트콩과 교전중에 전사하였다. 국가에서는 송서규 대령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
2270 | 55-1-48 | 독립유공자 윤형숙 열사 공적비 | 독립운동 | 2013-11-22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장 | 비석 | 3·1운동 | 1919 | 비석 높이 1.7 m | 2013-09-28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0일 광주 장날을 이용하여 김복현(金福鉉)·김강(金剛)·서정희(徐廷禧) 등이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 및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과 협의하여 준비한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수피아여학교 학생이었던 윤형숙도 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저지하는 일본 헌병의 칼에 왼쪽 팔을 잃고 오른 쪽 눈을 다쳤으나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4월의 옥고를 치렀다. 여수시는 이를 기념하여 2013년 9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
2271 | 45-2-45 | 제주도 충혼비 | 국가수호 | 2008-05-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특수전사령부 | 비석 | 기타 | 1982 | 높이 3.4m, 폭 2.7m | 1982-05-28 | 1982년 2월 5일 육군특수 전 부대장병 47명과 공군장병 6명이 수송기를 타고 제주도 대통령 경호작전 중 심한 악천 후 기상으로 인하여 한라산 중턱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여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 한라산 관음사 입구에 충혼비를 세웠다. |
2272 | 18-1-16 | 이천수창의소 의병전투지(노루목 장터) | 독립운동 | 2013-07-22 | 경기도 광주시 | 류설환 | 장소 | 3·1운동 | 1896 | - | 1896-02-23 | 1896년 1월 이천 수창의소의 의병이 백현전투에서 패하고도망가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이천 수창의소(首倡義所)는 김하락을 중심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편성된 의병부대이다. 이천 수창의소 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이 이천으로 공격해오자 백현[魄峴, 광현(廣峴)으로도 불림]에서 매복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들 의병은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퇴각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1월 19일 새벽까지 추격하여 노루목 장터에서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
2273 | 14-2-17 |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인천광역시 서구 | 인천광역시 서구청 | 비석 | 6·25전쟁 | 1951 | 대 | 1975-09-24 | 6‧25전쟁에 지상군 1개 대대와 함정 1척 파견 및 5,000여명이 참전한 콜롬비아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5년 9월 24일 국방부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인천광역시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2018년 7월 25일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 경명공원으로 이전 건립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시 파병을 결정했고, 콜롬비아는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에 지원군을 보냈다. 콜롬비아군은 참전을 결정하자마자 미국식 장비로 재무장한 뒤 미국 교관단으로부터 12주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이와 함께 189명이 탑승한 해군 프리깃함도 한국 해역에 투입할 준비를 하기 위해 진주만에서 미 해군과 합동훈련에 나섰다. 1951년 4월 프리깃함 파딜라호가 한국을 향해 출항한데 이어 1천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콜롬비아 1보병 대대도 5월 21일 미국 수송선을 타고 콜롬비아를 떠났다. 이들은 1951년 6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 고위 장성,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항에 입항했다. 콜롬비아는 교대병력을 포함해 연인원 5천 100여명의 병력을 모두 4차례에 걸쳐 한국에 보냈다. 이들은 김화 400고지 전투, 연천 180 고지 전투, 골모고지 전투 등에서 격전을 치렀으며 휴전된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유엔군 방어작전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전국에 6·25전쟁 참전국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이 진행됐고 인천에는 콜롬비아군 참전비 건립이 결정되어 그해 9월 24일 서구 가정동에 비 높이 10m, 기단 2m의 콜롬비아군 참전비가 세워졌다. 매년 콜롬비아 독립기념일에 주한 콜롬비아 대사와 6·25참전유공자회 서구지회 회원들이 참석해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참전비에는 ‘카리브해 바다의 정기를 타고난 콜롬비아 용사들! 국제연합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611명의 고귀한 생명이 피를 흘렸다. 우리는 그들을 길이 기념하고자 여기에 비를 세운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
2274 | 15-2-38 | 김풍익중령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의정부시 | 의정부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8-01-01 |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에 적 전차 격파후 사망한 김풍익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전투병과학교에서 1988년 10월 25일 전적비를 건립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포천군 소을면 송우리를 탈취한 적 전차는 6월 26일 새벽 단독으로 포천군 소흘면 축석령을 향해 서서히 남하하고 있었다. 금오리에 위치한 105밀리 포대에서는 포신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쉴새없이 포사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소총도, 57밀리 대전차포도, 2.36인치로켓 포도 적 전차를 파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곳에서 전차를 저지하지 못하면 의정부는 물론이고 수도 서울의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김풍익 대대장은 적의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포병의 직접 사격 뿐이라고 적 전차와 맞서기로 결심하였다. 포병진지로 달려간 김풍익 소령은 포대장인 정세풍 대위, 그리고 분대원 6명으로 1개 결사대를 편성하여 직접 인솔하고 축석령이 잘 보이는 고개 밑으로 1.6Km까지 전진, 포 1문을 가지고 직접 사격 준비를 완료하였다. 때마침 커다란 굉음과 함께 축석령 고개를 돌아내려오는 전차를 발견한 결사대는 100여 미터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착하게 직접 대준사격을 실시하여 전차의 궤도에 명중시키자 육중한 쇳덩어리는 도로 중앙에 멈춰섰다. 그후 남은 포대에서는 전임 포대장 최진식 중위의 지휘하에 집중 포사격을 실시하여 결사대를 엄호하였다. 결사대는 곧이어 두 번째 포탄을 장전하고 사격을 실시하려던 순간 후속하는 적 전차의 집중사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전원 산화하고 말았으며 이 결과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시키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지연시켰다. 이 전투로 산화한 포병 김풍익 중령과 6·25 전몰 포병용사들의 숭고한 살신 호국정신을 높이 받들고 젊음을 조국에 바친 그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육군 포병장병과 고인의 친구 그리고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선배동료와 후배들은 정성을 모아 이 기념비를 세웠다. |
2275 | 13-1-43 | 수촌리 3.1운동피해지-옛 수촌교회 | 독립운동 | 2015-10-14 | 경기도 화성시 | 수촌교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05-03-05 |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는 수원지역 3·1운동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3·1운동으로 인하여 교회 및 마을 거의 전부가 전소되는 한편 다수의 주민들이 체포되어 형을 받은 곳이다. 수촌교회는 1965년 벽돌건물이 신축되어 지금까지 교회로 사용하고 있으며, 1974년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었으나 1987년 복원사업과 함께 다시 초가지붕으로 바꾸었다. |
2276 | 10-2-14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성동구) | 국가수호 | 2011-06-08 | 서울특별시 성동구 | 성동구 | 비석 | 기타 | 0 | 2010-12-01 | 성동구 용답동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성동구 거주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성동구)’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성동구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0년 12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성동 구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277 | 53-2-25 | 충혼탑(비금면)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9m | 2004-06-06 | 비금면 덕산리에 200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69명의 비금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신안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4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신안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공산주의자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278 | 18-2-20 | 광주시 호국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광주시 | 광주시 | 비석 | 기타 | 0 | 0 | 2009-04-27 |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호국용사들을 기리는 곳으로 광주시 호국유공자 공적비는 2009년에 건립하였다. " 임들의 공적을 기리며... 임 들이시여 참으로 고귀한 피와 땀을 흘리셨소. 조국의 평화와 겨레의 번영을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젊음을 오로지 바쳐 멍든 산하에 배달의 숭고한 얼을 심어주셨거늘 어찌 이름 석 자 새겨놓고 그 크신 공적을 기릴 수 있으리오. 온겨레 마음모아 임들의 애국 충정 거울 삼아 이 나라 굳건히 지키리이다" 라는 비석이 함께 있다 |
2279 | 50-2-39 | 장성군 6·25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5-25 | 전라남도 장성군 | 6·25참전유공자회 장성군지회 | 탑 | 기타 | 1950 | 2005-06-29 | 장성군 6·25 참전유공자 | |
2280 | 55-2-38 | 도양읍 현충탑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남도 고흥군 | 도양읍 | 탑 | 6·25전쟁 | 1950 | 탑 | 2004-07-01 | 고흥군 봉암리 쌍충사 공원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97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도양읍 현충탑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4년 7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흥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도양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281 | 43-2-51 | 무명용사 충혼탑 | 국가수호 | 2010-02-12 | 경상남도 하동군 | 양규한 | 탑 | 6·25전쟁 | 0 | 1979-01-01 | 1979년 경남 하동군 옥종면 병천리 산 35-2번지에 6·25전쟁 당시 하동군에서 전사한 무명용사와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전사한 지역 청년 51명들을 기리기 위해 무명용사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 |
2282 | 24-2-33 | 6·25 참전 기념비(증평군)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증평군 | 6.25참전유공자회증평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9-03-20 | 6·25참전유공자회 증평군지회는 2009년 3월 증평군 증평읍 내성리 68에 증평군 출신 6·25참전유공자 325명의 공적을 기리며 그들의 숭고한 구국정신과 불굴의 군인정신을 새겨 나라사랑 정신의 표상으로 삼고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증평지역 출신 6·25참전유공자 325명의 명단과 건립 취지문, 추진사항 등을 별도 비석에 새겼다. |
2283 | 24-2-34 | 무공수훈자 공적비(증평군)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증평군 | 증평군무공수훈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9-03-20 | 무공수훈자회 증평군지회는 2009년 3월 20일 충북 증평군 증평읍 내성리 68-1에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여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나아가 전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혁혁한 공을 세운 증평군 출신 무공수훈 국가유공자들의 명예와 애국충정을 기렸다. |
2284 | 53-1-22 | 독립유공자 김재홍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16-04-2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수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3-10-15 |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4월 10일의 영암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면서기로 재직하면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하였으며, 동료직원인 최민섭(崔旻燮)과 함께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6백여매, 태극기 50여매, 독립신문 5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비밀리에 등사하였다.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수많은 시위군중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든 태극기 등의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하다가 일제의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7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2285 | 31-1-74 | 애국지사 배연집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16-05-04 | 경상북도 청송군 | 배천섭 | 비석 | 의병운동 | 1905 | 0 | 1981-11-14 |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이어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갔다. 배연집은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이때 정용기(鄭鏞基)가 귀향하여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의진 구성을 진척시켜 가고 있었다. 정용기는 시종관으로 황제의 측근에서 종사하고 있던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의 아들로서 부친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아들을 시켜 의거를 일으키게 하고 부친은 서울에서 지원하기로 약속 받은 때문이다. 정용기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영남 일대의 크고 작은 모든 고을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대규모의 의진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영천·신녕·흥해·청하·기계·죽장·영덕·영해·영일·장기·진보·청송·영양·봉화·예안·안동·비안 등지를 포괄하는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배연집은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박태종(朴泰宗)과 함께 비안(比安)·의성(宜城) 일대에서 거의하여 의병을 소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곧 배연집은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소모하여 무장시키고 정용기의 의진에 달려갔다.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깃발을 높이 들고 영천을 떠나 영해로 진출하여 신돌석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그후 청하(淸河)로 진격하던 중 적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배연집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2286 | 16-2-85 | 6.25참전용사기념비 | 국가수호 | 2012-05-16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9-11-30 | 원주시 단계동 6·25참전용사기념탑 공원에 이 고장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 신영준, 조시형, 강두화 등 1,342명의 나라 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9년 ‘원주시 6·25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원주시 6·25참전용사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전투애와 업적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11월 30일 ‘영웅의 탑’을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원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원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287 | 15-2-102 | 자유의 다리 | 국가수호 | 2014-07-18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기타 | 6·25전쟁 | 1953 | 1953년 휴전협정 이후 포로교환 당시 건립된 교량으로 12,773명의 국군 포로가 북측의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자유를 찾아 본 교량을 건너 남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유의 다리’라 명명 | ||
2288 | 30-2-42 | 육군 공병5기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1-06-08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수성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4-10-27 | 6.25전쟁 당시 육군 제301공병교육대(육군공병학교 임시 개편)에 자진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한 174명의 젊은 장교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
2289 | 14-2-08 | 부천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1-02 | 경기도 부천시 | 부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대 | 1956-06-01 | 부천시는 1956년 6월 1일 6·25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심곡동 성주산 중턱에 처음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1967년 12월 30일 심곡동에서 소사시립도서관으로 이전하였으며, 1968년 6월 4일 소사구청 자리로 옮겼다가 1993년 9월 13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로 456(현 위치)에 부천시민의 뜻을 모아 재건립하였다. 이곳에는 부천시 출신 전몰군경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2290 | 40-2-19 | 부산 경찰 추모공간 | 국가수호 | 2011-06-08 | 부산광역시 연제구 | 부산지방경찰청 | 장소 | 기타 | 1989 | 5 | 2011-05-03 | 부산 연산5동 부산지방경찰청 앞 동백광장에 2011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하거나 순직한 77위의 부산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부산지방경찰청은 김경상, 오학호, 박승훈 등 교전 중 전사한 순국경찰과 박이도, 김영국 등 공무 수행 중 순직한 경찰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11년 5월 3일 추모공간을 준공하였다. 부산지방경찰청 청사 1층 로비에 있던 ‘명예의 전당’을 1989년 5월 ‘동의대 사태 순국경찰과 추모비’와 함께 이전하여 ‘부산경찰 추모공간’으로 조성되었다. 6·25전쟁 기간 경찰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공비 토벌작전에서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후에도 자신의 삶보다는 치안확보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다가 순직자가 발생했다. |
2291 | 43-1-63 | 하동 독립공원 | 독립운동 | 2015-10-14 | 경상남도 하동군 |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 장소 | 3·1운동 | 1919 | 5 | 2014-03-01 | 항일독립운동 유공선열들의 역사를 새기며 후손에 민족정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애국애족하신 뜻을 기리며 선양하기 위한 추모공원을 조성 |
2292 | 50-2-41 | 향토 수호탑 | 국가수호 | 2011-11-10 | 광주광역시 북구 | 육군31사단 | 탑 | 기타 | 1966이후 | 높이 20m | 1966-12-30 | 대침투작적 전사자와 훈련 중 순직한 장병의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1966년) (1967년 비문 추가 제작) |
2293 | 30-1-69 | 이승희 생가 | 독립운동 | 2015-05-29 | 경상북도 성주군 | 이태용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5 | -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자 유림의 뜻을 모아 을사5적의 참형과 조약 파기를 상소 - 1907년 성주의 국채보상운동 을 주도, 1909년 북간도 밀산부에서 독립운동기지 한흥동 건설을 이끔 - 1913년 서간도로 옮겨 덕흥보를 건설 함 | ||
2294 | 23-2-27 | 6·25참전충의탑 | 국가수호 | 2012-05-16 | 충청남도 보령시 | 6.25참전유공자회보령시지회장 | 탑 | 6·25전쟁 | 1950 | 5 | 2007-10-01 | 6·25참전유공자회 보령시지회는 2007년 10월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229-2에 보령시 북구 출신 6·25참전유공자 883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충의탑을 건립하였다. |
2295 | 11-2-10 | 6.25현충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서울특별시 강북구 | 강북구청 | 탑 | 6·25전쟁 | 5 | 2005-12-22 | 6.25참전유공자 추모 | |
2296 | 15-2-98 | 철산군 출신 호국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포천시 | 철산군민회 | 탑 | 기타 | 5 | 2012-11-12 | 포천시 명덕2리 철산군 동산에 자유통일을 외치며 반공전선에서 산화한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의 젊은이를 추모하기 위해, 호국용사 위령탑을 건립했다.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 호국용사위령탑건립위원회에서 공산학정을 못이겨 월남한 평안북도 철산 군민 2,000세대 가운데 전쟁 전 공산폭동과 6·25전쟁 시기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중령 이덕영, 준위 정익상, 이병 정태진, 방위군 오근홍, 경감 정관주, 순경 정준호, 서북청년단원 김기원, 정춘숙, 학도병 한학봉 등 95위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986년 11월 29일 철산군민 묘지에 위령탑을 세웠다, | |
2297 | 13-2-63 | 경기경찰 충혼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 경기지방경찰청청사관리계 | 탑 | 기타 | 0 | 5 | 2013-03-15 | 수원시 연무동 공원 내에 2013년 광복 후 혼란한 시기, 6·25전쟁 기간, 전후에 나라와 겨레를 위해 순국한 경기 경찰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수원시는 노백린·박인용·이성원(전쟁 이전), 고석주·손석창·박진종(전쟁 시기), 김응보·이한비(전후) 등 순국경찰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13년 3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경찰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공비 토벌작전에서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후에도 자신의 삶보다는 경기도민의 치안 확보를 위해 사시사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다가 순직자가 발생했다. 경기경찰청은 매년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298 | 26-2-09 | 마틴공원 | 국가수호 | 2014-05-20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한국자유총연맹천안시지회 | 장소 | 6·25전쟁 | 1950 | 5 | 2008-04-20 | 천안시 삼룡동에 천안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로버트 마틴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자유총연맹 천안시지회와 천안시가 2008년 4월 20일 공원을 조성했다. 1950년 7월 8일 미군 제24사단 34연대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별였던 곳으로 연대장 로버트 마틴(Robert. R. Martin) 대령은 천안을 고수하고자 구성리 삼거리에서 직접 로켓포로 전차를 공격하다가 북한군 전차로부터 사격을 받고 전사하는 등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미군 희생자 발생했다. 천안지구 전투에서 희생된 마틴 대령과 미군 희생자를 추모하고 나라사랑교육 함양의 장소로 활용코자 공원이 조성되었다. |
2299 | 45-1-10 |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0-10-12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 탑 | 기타 | 1918 | 5 | 2011-00-00 | ○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 최대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내 기념탑은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으며,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66인 및 700여명의 항일투쟁자들에 대해 상징하는 탑이다. |
2300 | 10-2-15 | 반공청년운동순국열사기념비 | 국가수호 | 2013-11-22 | 서울특별시 중구 | (사)대한민국통일건국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9.8m | 1969-06-25 |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건립위원회는 1968년 10월 9일 중구 예장동 산5-6에 반공청년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한 애국열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호국정신을 길이 계승하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2301 | 33-2-38 | 6.25참전유공자 명예선양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6.25참전유공자회 포항시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5 | 2010-06-25 | 6.25전쟁 제60주년 기념사업으로 6.25참전 국가유공자들의 명예선양비를 건립, 호국노병과 순국선열의 명예를 선양하고 전후세대 청소년들과 시민들의 역사, 문화, 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 |
2302 | 33-2-40 | 전몰경찰관 위령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재향경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5 | 1998-01-01 | 6.25전쟁 중 군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도망치던 북한군이 1951년 3월 봉화군을 거점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 방화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울진경찰서 경찰관들이 소탕에 나섰다가 경사 임호선 등 6명의 경찰관이 북한군과 교전하다 전샇사하였다. 정부는 전사한 6명을 경위로 추서하고 1987년 위령비를 건립하였고 1998년 현재 장소로 이전하였다. |
2303 | 15-2-97 | 베트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구리시 | 구리시 | 탑 | 기타 | 5 | 2009-04-30 | 구리시가 2009년 4월 30일 경기 구리시 토평동 990-1에 조국의 명예와 긍지를 가지고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헌신한 구리시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후세에 영원토록 기리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
2304 | 18-2-25 | 하남시 무공수훈자공적비 | 국가수호 | 2013-05-13 | 경기도 하남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하남시지회 | 탑 | 기타 | 0 | 5 | 2012-12-28 | 하남시 덕풍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146명의 하남시 거주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하남시 무공수훈자공적비’를 건립하였다. 하남시와 무공수훈자회 하남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12년 12월 2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하남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2305 | 10-2-29 | 제1공수특전여단 전사·순직자 추모공원 | 국가수호 | 2020-5-8 | 서울특별시 강서구 | 제5602부대 | 공원 | 기타 | 500 | 2019-6-1 | 1958년 4월 1일 부대 창설 이후 월남전과 대침투작전, 각종 임무수행 간 전사 및 순직한 영혼을 추모하고 훈련 중 전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특전영웅 故 이원등 상사의 고귀한 군인정신과 그 희생을 널리 알리고 살신성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동상을 제작하였다. | |
2306 | 10-1-36 | 영등포 3·1만세운동 시위 터 | 독립운동 | 2020-5-8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광복회 영등포구지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2020-3-23 | 1919년 3월 23일 당시 영등포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하기 위하여 영등포 역 앞에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
2307 | 18-1-19 | 수지 3·1만세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20-5-8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 용인시 | 탑 | 3·1운동 | 1919 | 5 | 2009-9-30 | 1919년 3월 29일 수지구 고기동에서 시작하여 수지 전 지역으로 들불처럼 퍼진 수지 3.1만세운동의 소중한 뜻을 기리고자 2007년 3월 1일에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추진되어 건립된 기념탑 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조국에 바치신 애국선열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모든 독립운동가 에게 감사한 마음과 경건한 애국심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현충시설입니다. |
2308 | 55-1-56 | 홍암나철기념관 | 독립운동 | 2020-5-8 | 전라남도 보성군 | 전라남도 보성군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5 | 2016-11-2 | 홍암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정부와 국회에 장서를 보내 무도함을 힐책하고 1907년 을사오적을 주살하려다 실패 후 10년 유형되었다가 일 년 후 특사되었다. 또한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 정신을 받들어 대종교를 창시하고 교육시설 등을 마련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 |
2309 | 55-2-47 | 고흥군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20-5-8 | 전라남도 고흥군 | 전라남도 고흥군 | 공원 | 기타 | 현충탑, 항일애국지사추모탑, 참전기념탑 | 2017-7-3 | 구 현충탑 등 시설물이 오래되어 낙후되고 장소가 협소하여 추모객들의 방문에 어려움이 있어, 호국시설 등을 새롭게 건립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나라사랑정신의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 | |
2310 | 55-2-42 | (여수시)충의탑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공업고등학교 | 탑 | 6·25전쟁 | 1950 | 탑1식 | 2000-06-25 | 1950년 6.25전쟁 당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도병으로 출전하여 살신성인한 여수공업고등학교 출신 학도병들의 애국애정을 기리고자 건립된 시설 |
2311 | 33-2-48 | 6.25 한국전쟁·월남참전 선양비(경주 개곡리)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북도 경주시 |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경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5 | 2015-03-01 | 국가와 민족을 지키다 산화하신 참전유공자를 추모하고 비를 세워 그 분들의 숭고한 공덕을 후세에 전하고 애국애족정신의 표상으로 전 개곡리 주민들의 뜻을 모아 선양비를 건립 |
2312 | 33-2-59 |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 | 국가수호 | 2020-10-12 | 경상북도 영덕군 | 경상북도 영덕군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5 | 2020-6-5 | 영덕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국내 유일의 바다 위 호국 전시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토대를 마련하며 한국 전쟁사에 영원히 남을 전투로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한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본 기념관 건립으로 장사상륙작전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찬양하고 호국충정을 기리며, 후세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자 한다. |
2313 | 12-1-13 | 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20-10-12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숭실대학교 | 비석 | 기타 | 1938 | 5 | 2020-5-22 | 숭실대학교는 1897년 개교 이래 근대 문명 교육을 선도하며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와 독립에 앞장섰으며 을사늑약 반대에 힘쓰고 신민회 및 조선국민회 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과 무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 광복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1920년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광주학생운동 등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항거한 숭실 출신 독립유공자들은 독립만세운동에서 가장 많이 배출됐다.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원은 현재까지 114명으로 파악되었으며 1929년 12월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3·1운동 이후 최대 민족 항쟁)에도 숭실인이 있었다. 1930년 1월 전개된 평양학생만세운동으로 검거된 학생 173명 중 숭실 출신 학생은 107명에 달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자진 폐교한 유일한 학교이며,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헌신한 숭실은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을 수여 받은 독립유공자 88인을 기념하기 위해 현충시설 ‘독립의 반석’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2314 | 24-2-38 | 하늘공원 | 국가수호 | 2020-10-12 | 충청북도 증평군 | 1987부대 | 공원 | 기타 | 5 | 2015-9-1 | 여단에서 임무수행간 혼신의 정열을 바치고 순직한 선배 전우 29인의 공적을 기리고, 2014년 9월 2일 강한 특전부대 육성을 위한 교육훈련 중 혼신의 정열을 바치고 안타깝게 순직한 故중사 이유성, 조용준 전우의 공적을 기리기 건립하였다. | |
2315 | 10-2-30 | 공군 창군 60주년 기념탑 | 국가수호 | 2020-5-8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공군역사기록관리단 | 탑 | 기타 | 1949 | 5 | 2009-9-22 | 여의도는 1949년 10월 1일 1,600여명의 병력과 경항공기 20여대로 창설된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비행단 부지로서, 1971년까지 20여년 동안 공군의 최전방기지로 운영된 곳으로, 공군 창군 60주년을 맞이하여 전 공군인의 이름으로 선배 전우들의 헌신과 희생 정신을 기리는 한편 국민과 함께하는 미래 항공우주군으로의 원대한 비전을 기리기 위해 본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2316 | 14-2-42 | 백령 현충탑 | 국가수호 | 2016-11-23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옹진군 | 탑 | 기타 | 1950 | 5 | 2016-06-06 | 6.25전쟁, 대청도 해상전투, 천안함 피격 등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2317 | 11-2-16 | 심일 소령 전공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5 | 1975-05-23 | 심일 소령 전공기념비는 육사 8기로 임관하여 6.25전쟁 당시 춘천지구 전투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산화한 故 심일 소령의 무공을 기리기 위해 제8기 동기회에서 건립했다. 이 기념비는 교훈탑 주변에 있으며, 그 옆에는 심일 소령 동상도 있다. 투철한 군인정신과 불꽃같은 투혼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심일 소령은 1923년 6월 5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이 공산화 되자, 가족과 함께 1945년 12월 자유 대한으로 월남하였다. | |
2318 | 10-2-18 | 워커장군 추모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광진구 | SK네트웍스(주)워커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가로 6.4m 높이 5m | 1987-10-05 |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여 1950년 9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우리나라를 지켜내는데 크게 기여한 워커장군은 1950년 12월23일 전방부대에 가던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를 기리기 위해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만들어진 미군 휴양시설을 워커힐로 명명하였고 한미친선군민협의회에서 워커힐에 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2319 | 15-2-105 | 평화의 발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파주시 | 제1570부대 | 조형물 | 기타 | 2015 | 5 | 2015-12-23 | 한교원 중사 등 8인은 北 지뢰도발에 의연히 대처해 국토수호의 의무를 완수했고, 이들의 국토수호 정신은 여타 장병은 물론 국민에게까지 이어져, 북한 도발에 단호히 대처할 수 있는 국민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로써 북한으로부터 '16.8.25성명을 이끌어냈고, 장기적으로도 국민 애국심 함양에 크게 공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2320 | 11-2-15 | 심일 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동상 | 6·25전쟁 | 5 | 2006-05-01 | 제 6사단 7연대 대전차포중대 소대장 심일 중위(육사 제8기)는 1950년 6월 26일 춘천지구(옥산포)전투에서 한국군 최초로 육탄공격을 감행하여 적 자주포(SU-76)을 격파함으로써, 전사후 위관장교로서는 최초로 같은해 10월 15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 되었다. 육군은 매년 모범 전투중대장 및 생도를 선발하여 심일상을 수여하고 육사 기념관에 수상자 명단을 게시하고 있다. 아울러 심일 소령이 보여준 숭고한 위국헌신의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6년 5월 1일 육사 교정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심일 소령 동상은 사관생도는 물론 학교 방문객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사생관을 심어주고 있다. | |
2321 | 11-2-14 | 참전 생도상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5 | 2000-06-19 | 육군사관학교 입교 25일만에 6.25전쟁을 맞았던 생도2기생 중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86명의 동기생을 추모 | |
2322 | 30-2-52 | 칠곡호국평화기념관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시설관리사업소 | 기념관 | 6·25전쟁 | 5 | 2015-10-15 | ○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그분들의 호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건립 ○ 6·25전쟁 초기에 벌어진 낙동강전투(1950. 8. 1. ~ 9. 24.)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 수복, 북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 |
2323 | 13-2-73 | 故 정평연 추모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 안산단원경찰서 | 비석 | 기타 | 5 | 2002-04-05 | 1998년 6월 8일 12시50분경 안산시 선부1동 앞 노상에서 협박 피의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고 정평연 경장이 피의자의 칼에 가슴부위를 찔려 순직하고 다른 경찰관 3명은 흉부를 찔리는 등 당시현장을 보존하여 다시는 순직자가 발생하지 않고 화랑유원지를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안타까운 순직을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 | |
2324 | 26-2-16 | 故최규식경무관동상(경찰교육원) | 국가수호 | 2014-12-12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찰교육원 | 동상 | 기타 | 1968 | 5 | 1969-01-21 | 1968.1.21 서울 종로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다 청와대로 침투하는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과 맞서 싸우다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사명감과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 |
2325 | 52-2-71 | (진안군)6·25참전 호국영웅 기념탑 | 국가수호 | 2017-04-19 | 전라북도 진안군 | 진안군수 | 탑 | 6·25전쟁 | 5 | 2015-05-07 | 6.25전쟁 휴전 후 희생자에 대한 넋을 위로하고 한을 치유하지 못하고 있어 위령탑을 건립하여 유족 위로, 전쟁사를 재조명하여 군민에게 국가관, 민족관, 애국심을 고취 | |
2326 | 30-1-72 | 우재 이시영 선생 순국기념탑 | 독립운동 | 2017-11-23 | 대구광역시 남구 | 이욱(증손) | 탑 | 3·1운동 | 5 | 1972-06-17 |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듬해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결연한 각오 아래 중국으로 망명,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괄괄한 성격의 그는 실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윤상태(尹相泰), 서상호(徐相鎬), 정운일(鄭雲馹) 등과 애국단이란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애국단을 조직한 그들은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모라는 당시 대구부호의 지원을 얻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자는 이름난 구두쇠인데다 민족의식이 없어 말로 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서부자의 아들을 애국단에 가입시켜 그가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희사하기를 원하였으나, 서부자는 끝내 외면했다. 군자금은 마련해야겠고 저쪽에서는 응할 기미가 없자 최후 수단으로 하루밤 그의 아들을 앞세우고 그 집에 침범했다가 정체만 드러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강도죄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다시 최준(崔俊),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을 조직했다. 광복단은 무기를 구하고 병사를 길러 일본 세력에 무력으로 겨루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였다. 1914년 다시 출국하여 북경으로 가 그곳에서 항일운동에 이바지했다. 그가 그때 쓴 일기를 보면 백남채(白南採)와 함께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1919년 2월, 지청천(池靑天),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영남유림대표 2백여 명을 경성으로 보냈다. 그때 유림측에서 그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 '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하였다. 1919년 3월 3·1운동 직후 그는 그를 따르는 한위건(韓偉健), 김영호(金永浩) 등 청년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한인무관학교(韓人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무관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길러내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1919년 7월 9일 피로와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 |
2327 | 30-1-71 | 김정호 선생 재사(해사정) 및 기념비 | 독립운동 | 2017-11-23 | 경상북도 성주군 | 김병환(증손) | 사당 | 3·1운동 | 5 | 1977-07-07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해 유안무 등과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답사하고 국내로 돌아와 동지를 규합하였고,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 심산 김창숙과 함께 파리장서운동을 기획하여 서울 및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해외파견대표에 선정되어 출국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2015년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 |
2328 | 16-2-99 | 미트루만대통령표창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양구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1 | 5 | 1995-10-05 | 표창장 한국군 제2사단 제31연대 제1중대 귀중대는 서기 1951년 5월 17일 174고지 방어전투에 있어서 2개 중대가 야음을 이용 은밀히 포위육박하여 왔을 때 중대 전원이 일심단결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에서도 용전분투하여 고지를 사수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대의 지원을 받아 중적을 포획 사살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용감한 행동은 널리 외국군에 알려졌으며 혁혁한 전공은 한국전쟁 전사상에 길이 빛날것이므로 이 전공에 대하여 최대한의 찬사와 경의를 표하며 표창장을 수여하나이다. 서기 1951년 5월 27일 미국대통령 트루먼 |
2329 | 12-1-012 | 유관순 열사 상(像) | 독립운동 | 2018-05-10 | 서울특별시 동작구 | 동작구청 | 동상 | 3·1운동 | 1919 | 5 | 2017-12-31 | 3.1운동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유관순 열사는 광복 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으로 2019.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일제에 항거한 유관순 열사의 공훈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기념상을 건립하였다. |
2330 | 16-2-98 | 강릉대침투작전참가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양구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기타 | 1996 | 5 | 1997 | 1996년 9월 18일 2시경 강릉 무장공비 침투 관련 ‘96. 9. 19. ~ 11. 5.(약42일) 기간 동안 토벌 작전에 참전하여 무장공비 사살(’96. 9. 21. 칠성산작전 1명, ‘96. 11. 4. 연하동 작전 2명) 및 노획품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린 육군제1729부대 참전 군인들의 공훈을 추모하고 기리고자 1997년 건립하였다. |
2331 | 42-1-46 | 의열기념관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기념관 | 의열투쟁 | - | 5 | 2017-12-27 | ○ 1층 - 의열투쟁의 주요사건을 소개한는 연대표 - 의열투쟁 관련 동영상(6분 23초) 및 바닥지도 - 의열단 아카이브(자료 검색대), 전자 방명록 ○ 2층 - 의열단 창립단원 소개 - 최수봉 의사 폭탄투척 석고상 -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영상(3분 2초) ○ 옥상 쉼터 공간 |
2332 | 17-2-65 | (삼척시)6·25 월남전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7-04-19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탑 7.6m(기단 4m, 조형물 3.6m | 2016-03-22 | 삼척지역 6·25참전유공자 및 월남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평화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국가안보의식과 나라발전의 표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움 |
2333 | 17-2-66 | (노곡면) 충혼탑 | 국가수호 | 2017-04-19 | 강원도 삼척시 | 노곡면 | 탑 | 6·25전쟁 | 1950 | 5 | 2011-09-30 | 이 곳은 6.25 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하여 몸을 바치신 노곡 출신 군인, 경찰 등 37위의 순국 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넋이 깃든 장소입니다. 그러나 1995년 12월 156일 당시 건립된 위령비는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여 충혼탑 건립이 필요하다는 면민들의 의견에 따라 삼척시로부터 건립비를 지원받아 이 곳에 다시 세웠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그 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산 교육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