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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1577-0606
공공행정
현충시설(국내)
REST
JSON/XML
2024-05-17
2024-05-17
전국
저작자표시-변경금지
무료제공
번호 | 시설명 | 주제 | 지정일자 | 지역 | 시설관리자 | 종류 | 주제분류 | 사건연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 건립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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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베트남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24-04-30 | 서울특별시 동작구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서울특별시지부 | 조형물 | 월남참전 | 가로 12,000 세로 12,000 높이 15,000 단위 mm | 2009-07-18 | 베트남 참전의 역사의 의의를 되새기고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5천여 전우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민족의 성지 현충원이 바라보이는 이곳 동작동에 서울지역 4만5천여 전우들의 이름으로 "자유와 평화의 비상" 기념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의 위용과 애국충정을 노래한 "따이한의 전설" 을 헌시로 바친다. 이로써 우리 32만 베트남 참전 전우들은 조국의 안녕과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숭고한 희생정신이 역사 속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나아가 후세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의 귀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2 | 조동호 추모공간 | 독립운동 | 2024-04-09 | 충청북도 옥천군 | 옥천군 청산면 | 조형물 | 기타 | - | 조형물 흉상(2000*1000*2300mm) / 아트월(1200*600*20mm) | 2023-11-11 | 유정 조동호(1892∼1954)선생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위원, 독립신간 창간 등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중심 으로 활동하였고, 신한청년당, 조선중앙일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에 활동하며 독립에 큰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에서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옥천군에서는 그가 태어난 생가터를 보존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조동호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족과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군비 234백만원의 사업비로 이 곳에 남아있던 오래된 가옥을 철거하고 조동호선생의 흉상과 생애기록을 아트월에 담아 2023년 11월 11일 조동호생가 추모공간을 조성하였다. 이 공간을 통해 청산면 지역의 독립에 관련된 사료를 집중시켜 백운리 공원 내 청산 3.1만세 기념탑과 더불어 관광자원 및 교육공간으로 활용 할 계획이다. |
3 | 허당 명도석 애국지사 흉상 시비 | 독립운동 | 2024-04-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명인호(허당명도석지사기념사업회) | 동상 | 3·1운동 | 1922-45 | 기단: 4*5m, 높이 1.84m, 폭 3.27m, 흉상 0.51m*1.93m | 2022-04-25 | 허당 명도석지사의 투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표현한 시를 기재한 시비와 흉상을 건립하여 미래세대에게 허당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함 |
4 | 김오랑 중령 흉상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남도 김해시 | 활천동 주민자치회 | 동상 | 기타 | 1979년 | 높이 1.98m, 폭 0.5m | 2014-06-06 | 김오랑 중령은 1979년 12월 12일 사태 때 장관인 특전사령관을 시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수호르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히 대항하고, 정의를 수호하다 순직하였으며, 2014년 4월 1일 육군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보국훈장 삼일장 전수식이 거행되었다. 이 흉상은 김오랑 중령의 위대한 희생을 기리려는 김해시민의 뜻을 모아 활천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추모건립비 기금을 마련해 세워졌다. |
5 | 항일의사동산 | 독립운동 | 2023-12-12 | 경상북도 상주시 | 채재식 | 장소 | 3·1운동 | 1919 | 0 | 2004-11-01 | 항일의사동산에는 항일의사 소몽 채기중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후곡 채섬환 선생 추모비,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등 3개 기념비가 위치하고있다. 채기중선생의 자는 극오이며 1873년 7월7일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채기중선생은 광복회 지부를 설치하여 무장투쟁 및 만주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할 계혹도 수립하였다. 1918년 광복회 조직이 발각되고 채기중 선생 역시 그해 7월 전라도 목포에서 피체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서대문 감옥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채섬환선생은 1874년10월3일 상주시 이안면 여물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운강대장이 칙령을 받고 거병하자 격문을 해석 배포하였여 사기를 드높였으며, 군수품 등을 조달하였다. 이운강의 장자 이승재와 중장군 김상태를 대장으로 결사대도 조직하였으며 광복을 일년앞두고 1944년 9월3일 상주시 외서면에서 영면하였다. 1919년3월29일 밤 채세현, 채순만의 지휘아래 소암리 마을주문들이 기미독립만세운동을 펼쳤으며, 만세를 부른사람들은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
6 | 참전전공비(화북면)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 | 2001-11-30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영천시 화북면 출진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시겨주고자함 |
7 | 참전전공비(신녕면)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 | 2000-12-09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영천시 신녕면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겨주고자 건립 |
8 | 6.25참전국가유공자비(동부동, 중앙동, 서부동, 남부동) | 국가수호 | 2024-04-09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비석 2개 | 2008-12-31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지 위하여 희생하신 영천시 동부동, 중앙동, 서부동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겨주고자 건립 | |
9 | 필리핀군 전적비 | 국가수호 | 2024-04-09 |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 캠프티아노기념사업회(대표 윤정화) | 비석 | 6·25전쟁 | 1952 | 비석 1기 | 1952-09-12 | 6·25 한국전쟁 당시 갈화골 및 에리에(erie) 고지에서 1952.6.21. 전사한 필리핀 아폴로 B. 티아노 소위를 추모하고 그 부대원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 |
10 | 춘농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 국가수호 | 2024-04-09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1기 | 2010-04-29 |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하여 꽃다운 청춘을 버리고 자원입대하여 학도병 또는 참전용사로 전쟁을 치르고 전사한 선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생존 선배들의 영생을 위하여 건립함 |
11 | 국군의 날 제정 기념탑 | 국가수호 | 2024-04-09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 육군 제9871부대 | 탑 | 6·25전쟁 | 1950 | 탑 1기 | 1992-10-01 | 1950.10.1. 백골사단 23연대가 6·25전쟁 당시 38선을 전군 최선봉에서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1956년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선배 전우들이 이룩한 부대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다시한번 조국수호와 통일의 최선봉이 될 것을 다짐하며 1992.10.1. 기념탑을 건립하였음 |
12 | 윌리엄 E. 웨버 대령, 존 K. 싱글러브 장군 추모비 | 국가수호 | 2024-04-09 | 경기도 파주시 | 한미동맹재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3-10-06 |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쟁은 물론 한국전쟁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윌리엄 E. 웨버 대령과 존 K. 싱글러브 장군에 대한 추모비 건립 |
13 | 최영희 장군 흉상 | 국가수호 | 2024-04-09 | 경기도 포천시 | 2672 부대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22-06-23 | 제16대 국방부장관, 제5대 합참의장, 제1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시고 6.25전쟁의 영웅이신 덕장 故최영희 장군의 흉상을 건립하여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조국에 헌신하신 고인의 고귀한 희생과 공적을 대내외에 알리고 기려 우리의 6.25전쟁의 아픔과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널리 알리고 전하려는 교육홍보의 현장으로 활용하고자 함. |
14 | 성남시 6·25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3-12-12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남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1m*세로0.25m*높이1.9m | 2022-11-15 | 국가를 위해 희생·공헌하신 성남시 6·25 참전유공자의 호국보훈정신을 기리며 그분들의 애국과 헌신의 역사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합니다. 또한, 국가보훈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오늘날 보훈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합니다. |
15 | 강진읍교회 종탑 | 독립운동 | 2023-12-12 | 전라남도 강진군 | 한국기독교장로회 강진읍교회 | 탑 | 3·1운동 | 1919 | 기단 2.55*2.45*0.9, 탑 0.9*0.9*7.315 | 1914-01-01 | 강진읍교회 종탑은 1919년 4월 4일 강진독립만세운동을 있게 한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당시 시계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강진읍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비둘기바위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진행함 1914년 1월에 건립되어 1964년 교회의 이전에 따라 함께 옮겨와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음 현재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65호로 지정 및 관리되고 있고 담임목사를 포함한 6명의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음 매년 4.4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때마다 종탑을 지나가고 있으며 행진 중에 33번의 타종을 실시하여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음 |
16 | 갑종장교 호국공원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공원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갑종장교 호국탑, 임동춘 대위 상, 송서규 대령 상, 최범섭 중령 상, 회상의 벽, 추모의 집, 갑종장교 흉상, 갑종장교 기념관(동춘관) | 2004-10-29 | 갑종장교 호국공원은 군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갑종장교의 공훈을 재조명하고 그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려 명예를 선양한 갑종장교의 고적을 역사에 각인, 호국안보의식을 후세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갑종장교는 6.25전쟁 발발 이전에 창설, 20년간 45,424명이 임관하여 6.25전쟁에는 호국의 방패로, 베트남 전쟁에는 창군 이래 최초로 해외 파병되어 혁혁한 전공으로 국위를 선양하였고, 정전 후에는 군의 정예화 및 국가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나라가 위급할 때 가장 위험한 곳에 앞장섰다. |
17 | 함안 경찰승전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23-12-12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공원 | 6·25전쟁 | 1950 | 높이 5.7m, 폭 14.7m | 2023-05-30 | ○ 6.25전쟁 함안지역 전투 중 낙동강방어선에서 승리를 이룬 구혜리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과 경찰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 ○ 이곳은 미군 30명과 경찰 58명이 10배가 넘는 북한군 1,000명을 상대로 승리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2012년 승전탑을 건립하고, 서북산지구전투 및 대산지구전투 등 함안지구전투를 기념한 경찰승전기념관 등 기념공원을 2023년 건립하여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경찰의 숭고한 헌신과 전공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기억되게 남기고자 합니다. |
18 | 박진전쟁기념관 | 국가수호 | 2023-12-12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726.61㎡/ 지상1층 | 2004-06-25 |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박진전투의 전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박진전투는 1950년 8월부터 10월까지 낙동강 돌출부에서 있었던 전투로 미 2사단과 24사단이 북한군 4사단과의 전투 끝에 아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
19 | 호국참전기념탑(영광군)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탑 | 월남참전 | 1964 | 가로 3.6m, 높이 12m, 탑 1개소, 기념조각 2식 | 2016-05-01 | 영광군 지역의 월남전 참전용사와 무공수훈자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나라사랑 배움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음. |
20 | 참전유공자 기념탑(영광군)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1964 | 높이 7m, 기단 7m | 2008-04-13 |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참전한 용사들의 나라사랑에 대한 참뜻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음. |
21 | 3.1독립만세운동 함안읍 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23-12-12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3·1운동 | 1919 | 1.5*0.9*1.05m, 폭 0.9m, 덯높이 1.87m | 2023-10-13 | 1919.3.19. 함안읍 의거에서 순국한 애국 지사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건립 |
22 |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23-12-12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광역시 | 탑 | 기타 | 높이 30m | 2021-02-26 | 울산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 및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기리고 계승 | |
23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 독립운동 | 2023-12-12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기념관 | 기타 | - | 2022-12-22 | ○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통해 양산의 독립운동가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양산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추모함 ○ 역사체험실에서의 체험활동을 통해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후손에게 전하는 계기를 마련 ○ 역사자료실에는 연령에 맞게 접할 수 있는 근현대 역사도서를 다수 비치하여, 독립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지식을 함양 | |
24 | 충혼탑(설천면) | 국가수호 | 2023-12-12 | 전라북도 무주군 | 설천면 | 탑 | 6·25전쟁 | 1.1m x 0.75m x 4m | 2022-06-03 | 6.25전쟁 당시 조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목숨을 바치신 무주군 설천면 지역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애국정신과 그 뜻을 되새기기 위해 건립 | |
25 | 영도구 월남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3-12-12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4,500(W)x1,500(H)X460(L) | 2023-10-23 |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이역만리 월남전에서 고귀한 생명과 젊음을 바친 영도구 출신 월남 참전자들의 투혼과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한반도를 넘은 평화로운 미래, 번영의 대한민국 시대가 열리기를 염원하는 뜻을 모아 이 명비를 건립하게 되었음 |
26 | 세종 국가보훈광장 | 국가수호 | 2023-12-12 | 세종특별자치시 중앙공원로 | 국가보훈부 | 공원 | 기타 | 18590 | 2023-04-01 | 보훈관련 공간 조성을 통해 방문자들이 애국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 주요시설물: 이룸대로, 이음다리, 오름동산, 받침기둥, 비춤정원, 세움기둥 등 | |
27 | 김광제 동상 공원 | 독립운동 | 2016-11-23 | 충청남도 보령시 | 독립지사김광제기념사업회 | 동상 | 애국계몽운동 | 1907 | 0 | 2015-06-09 | 김광재 선생은 1866. 7. 1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의병활동과 일본화폐유통 반대, 친일파 배척활동, 사립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출판사인 대구광문사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국채보상운동 발기연설문을 작성 낭독하고 같은 해 부사장 서상돈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에 "국채일천삼백만원 보상 취지서" 격문을 발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실천한 선각자였다. 이후 1920년 일본에서 제 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28 |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13-11-22 | 충청남도 서천군 |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 | 동상 | 애국계몽운동 | 1896 | -0 | 2012-10-31 | 이상재 선생은 독립협회를 지지하여 자유사상 고취에 전력을 다하고 청소년의 애국사상을 지도하는 등 3.1운동 당시 민족적인 지도자로서 활약함.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함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정부에서 추서함 |
29 | 월남전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23-05-23 | 경상북도 영천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경상북도지부 영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주탑 8.8m | 2020-12-29 |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위해 월남전에서 피와 땀,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고 후손에게 나라사랑의 참 의미를 되새겨주고자 건립 | |
30 | 자황사 한미호국백호충혼탑 | 국가수호 | 2023-06-20 | 경상북도 울진군 | 자황사 | 탑 | 6·25전쟁 | 1950 | UN군 6m60cm / 8사단 4m97 / 3사단 5m25cm / 백호퉁용탑 5m85cm | 2021-06-23 | 한미호국배호충혼탑 |
31 | 남강기념관 | 독립운동 | 2023-05-11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재)남강문화재단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1907 | 지하1층, 지상5층(기념관 2층) | 1984-12-26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07년(광무 11)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 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을 건립하는 한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기독교 정신으로 바꾸어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거주의 제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 9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大邱)와 경성형무소에서 4년 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가출옥하여 세례를 받은 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상순 최 린(崔麟)·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이 중앙학교 안에 있는 송진우의 집에 모여, 한말(韓末)의 요직자와 기독교측의 동지를 포섭키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손병희(孫秉熙)를 민족대표로 삼아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와 의견서, 청원서를 작성키로 하고, 이를 최남선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최남선이 기독교측의 동지를 구하는 일을 맡았는데, 우선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그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최남선은 2월 11일 사람을 중계하여 이승훈을 오산학교 경영의 구실로 하여 상경케 하였는데, 이 때 최남선은 일본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송진우로 하여금 김성수(金性洙)의 집에서 그를 만나게 하여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규합의 일을 부탁하였다. 이에 그는 즉각 찬성하고 동지의 규합을 위하여 당일로 서울을 떠나 선천(宣川)으로 가서, 이튿날인 12일 장로교 목사인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이명룡(李明龍)·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유여대와 김병조의 인장을 위탁받고, 양전백과 이명룡에게는 상경하도록 하였다. 14일에는 평양의 기홀(紀笏) 병원에서 길선주(吉善宙)·신홍식(申洪植)에게 독립운동 계획의 취지를 설명하여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20일 밤에는 박희도(朴熙道)의 집에서 남감리파의 목사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신홍식 등과 만나 독립운동 계획에 대한 협의 끝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고, 정춘수로 하여금 원산(元山) 방면을 담당케 하였다. 이튿날인 21일 그는 최 린의 집에서, 최남선·최 린과 만나 전날 밤 박희도의 집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들이 모여, 기독교측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시 동지들과 협의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다시 세브란스 병원내의 이갑성(李甲成) 처소에서, 박희도·오기선·오화영·신홍식·함태영(咸台永)·김세환(金世煥)·안세환(安世桓)·현 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다가, 결국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 결정키로 하고 이 문제를 함태영과 함께 담당하기로 하였다. 22일에는 최 린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으로 5천원을 원조받고, 함태영과 함께 천도교측의 독립운동계획을 물어보자, 최린은 기독교측의 계획대로 독립선언을 하지않고 독립청원서만을 제출하려면 연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기독교측의 대표들과 모여 독립운동 계획의 방법을 숙의한 끝에, 천도교측의 주장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24일 함태영과 함께 최 린을 찾아가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동의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국장(國葬) 직전인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고, 스스로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27일에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서 박희도·이갑성·오화영·이필주·함태영·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과 모여,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이에 찬성하여 함태영을 제외하고 모두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天道敎)·기독교·불교(佛敎)측의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계획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출옥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한 후, 1924년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했다가 5개월여 만에 사임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32 | 박춘실 기념관 | 독립운동 | 2023-05-11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군수 | 기념관 | 의병운동 | 1909 | 1층 579.51㎡, 2층 364.8㎡ | 2022-11-24 | 관은 밀양(密陽)이고 전라북도 장수(長水)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불의를 모르는 곧은 성품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茂朱)·장수·진안(鎭安)·용담(龍潭) 등지에 국가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九峰山)에서 일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서(文泰瑞;泰秀)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무주 상창곡(商昌谷)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鎭安) 천반산(天盤山), 성수산(聖壽山), 장수 덕유산(德裕山), 구천동 적상산(赤裳山), 토옥동(土沃洞) 문성어전(文城於田), 농수리(農水里), 양악(陽岳), 진도리(眞道里)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金聖凡)·문태서를 부장(部將)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북과 전북을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함양 수비대장 조사(鳥飼)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長溪)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순사(自盡殉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수 5儀 중 한분이시자 을사조약 이후 대표적 의병대장이셨던 고 박춘실 의병대장은 위태로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하셨으나 유족이 제적되고 생가 확인이 어려워 복원이 어렵고, 의병장에 대한 유물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예우를 다 할 수 없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 주민의 염원을 담아 나라 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항일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보훈정신 산 교육장으로써 활용 계획임 |
33 |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사당 | 독립운동 | 2023-05-11 | 경상북도 상주시 | 광산노씨후제공종친회 | 사당 | 의병운동 | 1905 | 정면 3칸, 측면 1칸, 일반목구조 | 2002-12-12 |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거사 계획을 주청하여 밀칙을 제수받아 상주로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20일에는 김운노, 송창헌, 임용헌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이후 의병대장에 올라 보은, 상주, 성주, 거창 등지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1908년 7월 13일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1910년 공주감옥에서 복역 중에 경술국치의 특사로 출감되었다. 출감이후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1913년 3월 12일 다시 체포되어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대구감옥에 투옥된후 7월 10일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
34 | 애국지사 성곡 서병무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23-05-11 | 경상북도 성주군 | 서석형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2-03-01 |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서병무 애국지사의 공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건립 <애국지사 성곡 서병무선생> 1919년 4.2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대구형무소에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만주와 일본 등지로 망명하였다가 상해로 건너가 독립공채모금운동에 종사하다가 1923년 서석연선생이 투옥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사업에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침 |
35 | 공군박물관 | 국가수호 | 2023-05-2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공군박물관 | 기념관 | 기타 | - | 전시관 3,125 / 수장고 867 / 철근콘크리트구조 지상 2층, 지하 1층 | 1979-03-22 | ○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와 전통을 나타내는 역사적 기념물, 항공과학 관련 자료, 공군 선배들의 업적에 관한 자료 수집·보관·전시 ○ 항공기를 이용한 독립운동과 6.25전쟁, 해외파병, 전력증강, 인재양성 등 70여년 동안 국가수호를 위해 애썼던 공군의 활약상을 전시(6종 13점 국가등록문화재 보유) |
36 | 무안군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23-05-11 | 전라남도 무안군 |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전라남도지부 무안군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높이 16m, 폭 9m | 2022-08-30 | 나라를 위해 헌신 공헌한 6.25 및 월남전 참전유공자를 예우하며 그 희생정신을 기려 명예를 선양하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함 | |
37 | 홍범도 장군 흉상 | 독립운동 | 2023-05-11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역시 광산구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높이 2.2m, 가로 0.55m, 세로 0.55m | 2022-08-15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인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기둥과 같은 상징적인 인물로, 고려인 마을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건립하여 시민들과 후손인 고려인이 함께 홍범도 희생정신과 뜻을 기리는 공간을 마련 | |
38 | 이원면 독립유공자 공적자랑비 | 독립운동 | 2023-05-23 | 충청북도 옥천군 | 충북 옥천군 이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년 | 공적자랑비 1기, 공적비 5기 | 2022-10-15 | 옥천군 이원면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및 공적자랑비 설치 |
39 | 청산면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3-05-23 | 충청북도 옥천군 | 충북 옥천군 청산면 | 탑 | 3·1운동 | 1919 | 기념탑 높이 7m, 건축면적 13m | 2020-03-01 | 옥천군 청산면 출신 독립유공자 3.1독립만세운동 기념 |
40 | 중동고등학교 참전용사 명비 | 국가수호 | 2023-05-23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중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4.9M*높이 3M | 2022-10-31 | 국가를 위해 희생 및 공헌하신 중동고등학교 6·25 참전용사의 호국보훈정신을 기리며, 그들의 애국과 헌신의 역사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나라사랑정신을 계승발전한다는 의미를 담은 기념비임. |
41 | 경기인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3-05-23 | 서울특별시 강남구 | 경기고총동창회 | 비석 | 6·25전쟁 | 가로 6m*세로 3.3m | 2022-09-30 | 본 시설은 경기고등학교 졸업자 중 6·25 전쟁 대 참전 및 사망하신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동시에 예우 및 선양을 위한 기념비임. | |
42 | 지평리 전투 승전비 | 국가수호 | 2023-05-11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05m | 2015-08-15 | 지평리전투를 완승으로 이끈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대대, 제5기병연대 연합군의 진정한 용기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함 <비문 내용> 지평리 전투 승전비(1951. 2. 13.~16.) 지평리 전투를 완승으로 이끈 미 제2사단 23연대와 프랑스대대, 제5기병연대 연합군 전우들의 진정한 용기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 장병들과 양평군민의 온 마음을 정성껏 모아 이 승전비를 세웁니다. |
43 | 지평면 UN기념비 | 국가수호 | 2023-05-11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2), 국기게양대(4) | 2007-09-17 | 6.25 전쟁 지평리전투 당시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된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비문 내용> 이곳 지평리 전투에서 UN 프랑스군으로 참가한 그대들이 보여준 나폴레옹의 후예다운 용맹성과 숭고한 희생은 대한민국 국토수호의 초석이 되었으며 그대들의 고귀한 영혼은 아직도 이곳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대들의 뜻을 기려 한,불 양국간 혈맹관계를 더욱 공고히함은 물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44 | 트루먼 대통령 동상 | 국가수호 | 2023-05-11 | 경기도 파주시 | 제1570부대 | 동상 | 6·25전쟁 | 1950 | 2.45m | 1975-10-03 |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침략을 당했을 때,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국 참전의 용단을 내린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 <비문 내용> 국경에서의 침공을 방지하고 국내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된 한국 정부군이 북한의 침략군으로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군에게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의 전 회원국에게 이 결의를 집행함에 있어서의 모든 원조를 유엔에 제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본인은 미국 공군과 해군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군에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파괴공작의 범위를 뛰어넘어 무력침공과 전쟁수단을 사용하게 된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인은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최근 한국에서 유엔헌장을 무시하고 감행되고 있는 침략의 결과를 주의 깊게 고려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국제문제에 있어서의 무력지배로의 복귀는 막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미국은 법의 지배를 계속 지지할 것입니다. |
45 | 영월군 6·25전쟁 및 월남전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23-05-11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 영월군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탑 1 (높이 6m), 상징조형물 2(높이 2.5m), 기록벽 1 (높이 2.5m) | 2016-06-23 | 6·25전쟁과 월남전쟁에서 불굴의 투지로 젋젊음을 바친 영월지역 참전 무공용사를 추모 | |
46 | 의령 임천정 | 독립운동 | 2023-05-11 | 경상남도 의령군 | 임천정 열락계(이창순)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928 | 0 | 1928-03-27 | 독립유공자 이태식 선생의 별서이자 서당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 등과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장소로 이용한 독립운동 유적지로 독립운동가 이태식 선생의 삶을 재조명,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독립유공자의 고귀한 뜻과 흿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치하고자 건립 |
47 | 해병3·4기 호국관 | 국가수호 | 2023-05-11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해병대제9여단 | 기념관 | 6·25전쟁 | 1950.6.25 | 1층 | 1941-01-01 | 이 전시관은 6·25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해병 3·4기의 위상과 전공을 높이 기리고 해병대 역사의 초석을 다진 선배 해병들의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 전쟁 상황을 도민에게 알리며 청년들의 입대를 호소하였다. 소식을 접한 제주 전역의 청년·교사·학생 등 3000여 명은 자신의 손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겠다는 뜨거운 결의로 해병 3·4기(여군 126명 포함)에 자원입대했다. 1950년 9월 1일, 조국의 부름을 받은 이들은 제주 산지항에서 출항하여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을 비롯해 원산·함흥지구 전투, 도솔산지구 전투, 김일성·모택동고지 전투,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등 해병대 주요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상승불패의 정신으로 무적해병의 역사와 전통을 수립하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해병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해병 3·4기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애국정신과 자랑스러운 발자취를 계승하기 위해 해병 3·4기 호국관에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
48 | 3·1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23-05-18 | 경상남도 거창군 | 위천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비석(7.1 m x 7.1m) 1개소, 비(1.7m x 1.8m) 1개소, 안내판(0.7m x 1.7m) 1개소 | 2022-12-27 |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된 3.1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널리 호국애족정신을 고양하고자 건립 |
49 | 경남소방헬기 추락 순직 소방인 위령비 | 국가수호 | 2023-5-18 | 경상남도 산청군 | 경상남도 소방본부 | 비석 | 기타 | 1998.8.9 | 비석 1동 | 1998.5 | 1996.8.9. 지리산 소방헬기 추락으로 인한 사망한 고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함 1. 전면 : 여기 제 몸보다 남의 안전을 귀하게 여기다 숨져간 소방항공대원들과 구조활동 도중 목숨을 잃은 젊은이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잠들고도 사람들 가슴속에 영원히 지지않는 봉사와 희생의 꽃으로 피어나리니 님들이여 이승의 일 다 접고 편히 쉬소서. 2. 후면 : 1996년 8월 9일 19:00경 경상남도 소방항공대 소속 소방헬기에 항공구조대원 5명이 탑승 이곳 로타리 산장에서 등반환자와 보호자 등 2명을 태워 중산리 주차장쪽으로 비행하다가 급격한 기류 변화와 일기 불순으로 지리산 정상쪽으로 되돌려 운항 중 순두류 계곡 중턱에서 짙게 깔린 어둠과 난기류에 휩싸여 기체가 추락되면서 탑승자 전원이 영원한 안식처로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구조활동을 펼쳤던 119소방 항공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드높이고 젊음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대학생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 희생자 명단 - 기장 김유복 지방소방장 정영호 - 정비사 김윤석 지방소방장 김종배 - 현대정공정비사 허찬규 민간인 최진호, 민간인 유기영 |
50 | 범어사 | 국가수호 | 2023-05-11 | 부산광역시 금정구 | 대한불교조계종 범어사 | 장소 | 6·25전쟁 | 1950 | 5371.33 | 678-01-01 | 6·25전쟁당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한 39위의 유해를 범어사 보제루에 안치하고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했다.1952년 범어사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대규모 군 ·경 합동 위령재가 봉행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범어사는 1956년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가 설치될 때까지 수년간 전몰 군 ·경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 넋을 위로하며 임시 국립현충원의 역할을 담당했다. |
51 | 영도구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3-05-11 | 부산광역시 영도구 | 부산광역시 영도구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22-11-04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영도구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공헌을 가까이서 되새기고 후세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이 명비를 건립합니다. |
52 | 신효동 충혼비 | 국가수호 | 2022-12-06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효마을회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1979-06-25 | 6·25참전 당시 전사한 지역출신 국가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고 애국 및 희생정신을 후세에 남기고자 지역민 일동으로 건립함 |
53 | 호국영웅 한규택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17-10-30 | 1950년 8월 해병3기 입대, 3대대 11중대 화기소대 기관총사수로 적탄에 관통상의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두번째, 세번째 기관총 격파,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한규택 하사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한규택 하사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4 | 호국영웅 김문성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20-09-25 | 중동부 전선 도솔산 지구 전투 참가,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 도솔산 중동부 전선의 핵심 요충지, 도솔산 지구 탈환 작전에 투입되어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적의 진지 50m지점까지 들어갔으나 목표를 바로 눈아에 두고 전사,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김문성 중위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김문성 중위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5 | 호국영웅 고태문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17-10-30 | 제5사단 27연대 예하 제9중대장, 동부전선의 351고지 전투참가, 적2개 중대의 공격을 받고 백병전으로 고지 사수 중 진지 사수의 유언을 남기고 전사,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고태문 대위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고태문 대위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6 | 호국영웅 강승우로 표지석 | 국가수호 | 2021-06-18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 비석 | 6·25전쟁 | 1950-53 | 0 | 2017-10-30 | 제9사단 30연대 백마고지 전투참가,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특공작전 결행, 적의 자동화기 지지 파괴, 전략요충인 백마고지 완전히 탈화하는데 결정적 기여로 제주출신 6.25전쟁 호국영웅 중 한명인 강승우 중위의 명예도로 지정을 기념하여 강승우 중위 출생지역에 명예도로 표지석을 설치함 |
57 | 고 민평기 상사 흉상 | 국가수호 | 2022-12-06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고등학교 | 동상 | 기타 | 2010 | 94cm x 68cm x 223cm | 2017-10-14 | 고 민평기 상사는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전사한 "천안함 46용사"이다. 고 민평기 상사는 1976년 10월 1일 충남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국군의 날에 태어나 부친에 의해 "평화통일의 초석이 되라"는 의미의 '평기'로 이름지어졌다. 매화초등학교(23회), 은산중학교(26회), 부여고등학교(44회)를 졸업한 후 1997년 8월 11일 해군에 입대하여 1997년 12월 2일 해군부사관(169기)로 임관하여 제2함대, 조함단, 인천방위사령부 등을 거쳐 2009년 2월 2일 제2함대 22전대 소속 천안함(PCC-772)에 부임했다. 북방한계선(NLL)을 지키기 위해 경계·경비 근무 중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경 백령도 연화리 서남방 2.5km 해상에서 북한 잠수정의 어뢰에 의해 전사했다. 부여고등학교 총동문회는 마지막 순간까지 NLL을 사수하고,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위국헌신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 얼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부여고등학교에 고 민평기 상사 흉상을 건립했다. |
58 | 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22-12-06 | 충청남도 부여군 | 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추진위원회 | 비석 | 3·1운동 | 0 | 2021-06-11 | 1919년 3월 6일 박용화의 주도로 부여군 임천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된 장소 | |
59 | 한훈기념관 | 독립운동 | 2022-12-06 | 충청남도 계룡시 | 계룡시 | 기념관 | 의열투쟁 | 지하 1층, 지상 1층 | 2021-08-15 | 계룡시 대표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독립운동 | |
60 | 광주경찰 추모비 | 국가수호 | 2022-12-06 | 광주광역시 광산구 | 광주광역시경찰청 | 비석 | 기타 | 가로 7m, 높이 1m 70cm | 2022-06-20 | 전라남도 경찰부 창설 이후(1945년) 현재까지 광주권 5개 경찰서에서 전사 · 순직경찰관 253명의 위패를 봉안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숭고한 희생을 추모함 | |
61 | 호국충혼 위령비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강서구 | 강서구청 공원녹지과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4.7m | 1994-06-28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무력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육군 제1사단 11,12,15연대 소속 장병 1,100여 명은 김포지구로 후퇴하여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개화산에 최후의 방어진을 치고 아군으로 ㅟ장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고 탄약과 보급이 끊긴 채 북한군의 수와 화력에 밀려 부대원 전원이 개화산 골짜기에서 장렬이 산화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4년 개화산에 위령비를 건립하고 매년 6월 28일 이 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62 | 의열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22-12-06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설관리공단 | 기념관 | 의열투쟁 | 1919 | 의열기념관, 의열쳏체험관, 기념조형물 | 2022-04-28 | 조국의 독립을 위하 헌신한 의열독립투사들의 업적과 활동을 후세에 알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독립굥교육 인프라 구축 |
63 | 용화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22-12-05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용화사 | 탑 | 6·25전쟁 | 1950년 | 높이 4.4m | 1996-06-02 |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기계·안강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계·안강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면 포항·경주·영천·대구가 위험에 처하게 되어 우리 군은 최후 방어선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부대의 공격에 맞서 수도사단·제3사단과 독립기갑연대·2개 유격대대·해군육전대·민부대·학도병 등 동원가능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필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그 결과 고지의 주인이 열여섯 번이나 바뀌고, 국군 제17연대는 소대장·중대장, 3개 대대장이 전사와 부상으로 인해 지휘자가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었다. 17연대는 격전지인 곤제봉 전투에서 최후의 승자는 되었지만 수많은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치열했던 기계·안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고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
64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독립운동 | 2022-12-06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기념관 | 해외운동 | 1919 | 지상 4층, 지하 3층 | 2022-01-27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역사를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기억하고 후대에 전승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 건립 |
65 | 이원면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22-12-06 | 충청북도 옥천군 | 옥천군 이원면 | 공원 | 기타 | 2022 | 현충탑 : 가로 2.2m 세로 1.9m 높이 4.6m / 독립유공자탑 : 가로 1.5m, 세로 1.8m, 높이 4.6m | 2022-08-11 | 현충탑 : 6.25참전 및 월남참전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1998년 12월 31일 이원면 개심리에 건립하였던 기존 노후된 탑을 철거하고 이 곳 건진리에 재건립 하였으며, 하늘을 향해 세워진 세 개의 기둥이 가운데로 모여지는 형태는 한마음으로 숭고한 뜻을 받들고 따르겠다는 의미이며, 중앙에 있는 태극문양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독립유공자탑 : 3.1만세운동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탑으로 하늘을 향해 뻗은 태극문양은 횃불이 감싸는 듯한 형상으로 목숨을 바쳐 독립을 외치던 사람들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
66 | 독립기념관 | 독립운동 | 2022-12-06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독립기념관 | 기념관 | 3·1운동 | 1919년 | 46031.18 | 1987-08-15 | 대한민국의 박물관. 이를 운영하는 국가보훈처 산하 공공기관(준정부기관) 역시 '독립기념관'이다. 겨레의 탑과 불굴의 한국인 상이 박물관의 상징이며, 이 박물관이 바로 천안시의 랜드마크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 운동이 주요 주제이다. 2022년 현충시설로 등록되었다.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연구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올바른 국가관 정립에 이바지함 |
67 | 충혼비(고산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고산면장 | 비석 | 기타 | 1952 | 0 | 1952-06-01 | 고산면에서는 완주 읍내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고산면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고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2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고산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고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8 | 항일독립운동역사관 | 독립운동 | 2019-12-12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기념관 | 기타 | 지상 4층(1층 사무실 / 2~4층 전시관) | 2018-10-05 | 충북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읭의 역사적 자료와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 공훈자료 등을 전시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보존하고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함 | |
69 | 이천시 월남전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21-10-29 | 경기도 이천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경기도지부 이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가로 18m, 세로 13m, 높이 8.8m | 2021-06-30 | 이천시 거주 월남전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림. |
70 | 강릉지역 대침투작전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이천시 | 제5779부대 | 비석 | 기타 | 1996 | 높이 3.8m(하부 대리석 2m, 상부 청동 1,8m), 넓이 3m, 깊이 1,7m(석재 깊이 1.4m) | 2015-08-07 | 1. 전적비 : 1996년 9월 18일 01:17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대포동 앞바다 50m 해상에서 북괴 잠수함이 좌초된 채 발견되어 시작된 강릉 대침투 작전시 여단은 '96. 9. 18. ~ 11.5.까지 49일간 작전에 참가하여 무장공비 25명 중 8명을 사살함으로써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하였음.(작전 참가 지휘관 현황, 훈·표창 수상자 현황, 대통령 부대 표창장) 2. 전사자 동상(故 상사 이병희): 이 동상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다 목숨을 바친 한 특전인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고인은 1996년 9월 18일 강릉대침투 작전에 투입되어 9월 19일 3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계속적인 수색작전 중 9월 21일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칠성산에서 은거중인 적으로부터 선제 기습을 받아 두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면서도 적을 향하여 대응 사격을 가하는 불굴의 특전혼을 간직한 채 당일 14시 05분에 장렬히 전사함. |
71 | 김낙선의사 추모공원 | 독립운동 | 2011-06-08 | 전라북도 부안군 | 김성화 | 장소 | 의병운동 | 1909년 | 1256 | 2009-10-20 | 전남 부안(扶安) 사람이다. 1909년 3월 8일 이용서(李用西) 의병장의 휘하에서 총 15정과 도검 1자루로 무장한 의병 30여명과 함께 고부(古阜)·부안(扶安)·태인(泰仁)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 기병대의 습격으로 인하여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고 피신하여 집으로 돌아와 치료하였다. 1909년 8월 8일 부상당한 상처를 치료한 후에도 계속하여 이용서(李用西) 의병장의 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임명되어 총 8정과 칼 1자루를 무장한 부하 12명을 지휘하면서 고부(古阜)·태인(泰仁)·정읍(井邑)·부안(扶安) 등 각 군을 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전북 김제군(金堤郡) 홍산면(洪山面) 내리(內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1909년 11월 1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이 공원을 건립하였다. |
72 | 군산중.고등학교 6.25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년 | 가로 : 5m, 세로 : 3.5m, 높이 2.3m , 동상 : 2.3m | 2020-12-23 | 국가보훈처 주관 호국영웅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군산중.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을 추모하기 위하여 2020년 건립함 |
73 | 이리공업고등학교 6.25전쟁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북도 익산시 | 이리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년 | 가로 : 3.55m, 세로 : 2.8m, 높이 1.75m | 2019-11-28 | 국가보훈처 호국영웅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이리공업고등학교 출신 6.25참전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2019년 건립함. 건립된 6.25참전유공자 명비는 전면 중앙을 이리공업고 학생 상징인 교표와 무궁화로 참전유공자의 희생정신을 형상화했다. 또한 왼쪽에는 건립취지가, 오른쪽에는 이리공업고 출신 참전유공자 42명의 성명이 각인돼 있다. |
74 | 대한독립 만세운동 표지석 | 독립운동 | 2022-07-15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영등포구청 | 비석 | 3·1운동 | 1919 | 가로 100cm * 세로 65cm * 폭 50cm | 2022-03-01 | 1919년 3월 23일 당시 양평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75 | 장수군 3.1운동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21-06-18 | 전라북도 장수군 | 장수군수 | 공원 | 3·1운동 | 1919 | 0 | 2021-03-01 | 이 공원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존 동화리 257-1에 소재하고 있던 3.1운동 기념비를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공원으로 조성하여 주민들의 접근성을 개선하였다. 현재는 주요 계기일의 행사 장소로 활용되는 등 지역의 애국심 함양의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
76 | 평택시 보훈공원 | 국가수호 | 2022-07-15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 공원 | 기타 | 0 | 0 | 2003-09-25 | ● 평택시 현충탑(현덕면)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에 평택군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1, 172위를 추모하기 위해 평택군에서 1987년 12월 26일 이 탑을 세웠다. 평택읍이 시로 승격되자 군에서 관리하던 현충탑을 시에 인계하고 평택군지역 관내 1, 172기의 영령을 모시기 위해 아산만 방조제의 관광단지 내에 새로운 현충탑을 건립함으로써 군민들로 하여금 국민적 우의 상징과 자유민주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도 저 햇빛 속에 그대들 꽃다운 모습이 보이고 지금도 바람결 속에 그대들 고운 음성 들리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쳤기에 가고도 가지 않은 그대들이라. 조국의 산천과 역사와 함께 길이 살리라. 정든 조국, 정든 고향, 여기서 그대들 길이 살리라. ● 평택3.1독립운동기념조형물 평택3.1독립운동 기념조형물 '그날의 함성'은 높이 6.9미터로 기단은 평택 최초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던 계두봉을 상징하며, 기단 위에는 만세 시위를 벌이는 군중을 표현했다. 중심 조형물에는 3.1독립선언서가 국내외에서 가장 큰 규모인 지금 5.5미터 오석에 새계 평택3.1운동의 광범위함을 표현했다. 벽면 조형물에는 100년 전 사용했던 태극기와 평택3.1만세운동 봉기도, 평택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창립 취지문, 평택3.1만세운동 약사, 평택의 독립운동가, 헌시, 100주년 기념조형물 작품해설 등이 담겨 있다. ● 무공수훈자 공적비 6.25의 국난을 당하여 국토를 보존하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부모처자를 불고하고 적군과 용감히 싸워서 빛나는 공훈을 기리고 후세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애국애족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이 공적비를 건립하노라 ● 6.25참전공적비 여기 햇살같이 찬란하고 눈부신 기백 정의의 부르짖음으로 불타오르는 횃불이 있다, 거룩한 청춘의 피 속에 최후까지 싸우다 꽃잎처럼 흩어진 호국의 신 자유조국의 수호신으로 영원히 이 땅을 지키니 님들의 끝없는 나라 정신으로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워 남기노라 |
77 | 평택3·1독립운동기념공간 | 독립운동 | 2022-07-15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복지정책과 | 비석 | 3·1운동 | 0 | 2019-03-09 | ●평택3.1독립운동기념비 평택에서는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평택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수원 이남지역 최초의 평택3.1만세운동은 안성, 화성, 천안 등 남한의 3대 만세운동 항쟁지보다 앞서 일어났다. 전국에서도 가장 뜨거운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평택의 3.1만세운동은 일제가 '광포하다'는 표현으로 기록될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평택3.1만세운동은 각계각층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나라를 되찾으려는 민중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이 기념비는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졌으며, 후세들의 애국심 항양과 우리 평택, 나아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평택3.1독립운동선열추모비 이 추모비는 1919년 평택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희생되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내 고장 평택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그로 인해 대통령장을 비롯해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등 정부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았다. 우리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길이 되새겨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평택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손들에게 같이 물려주기 위해 시민들의 정성스러운 모금운동으로 이 선열추모비를 건립하여 선조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자 한다 | |
78 | 해상 순직자 추모비 | 국가수호 | 2022-07-15 | 경기도 김포시 | 해병대 제2사단 제2상륙장갑차대대 | 비석 | 기타 | 2001 | 소 | 2003-06-10 | 2001년도 8월 6일 해상훈련 중 순직한 전우를 영원히 기억하고 상륙장갑차와 함께 고인이 된 3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병대 제2사단 제2상륙장갑차대대에서 2003년 6월 10일 부대 내에 추모비를 건립하였고 매년 현충일, 순직일 및 설과 한가위에 대대장 및 유족 주관 으로 순직장병 추모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비문내용 : 인차동체의 정신으로 이 몸 불살라 상륙장갑차와 함께한 전우들이여 그대들의 충혼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되리라, 故 최영욱 병장 / 김현중 상사 / 오상봉 상병 / 추모비 |
79 | 마린온 순직자 위령탑 | 국가수호 | 2022-04-25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국방부 | 탑 | 기타 | 2018 | 높이 7.8m, 넓이 2m | 2019-03-16 | 2018년 7월 17일 해병대 상륙기동헬기의 시험비행 중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5명 해병대원들의 명복을 빌고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80 | 대구교남YMCA회관 | 독립운동 | 2013-11-22 | 대구광역시 중구 | 대구기독교청년회재단 | 기타 | 문화운동 | 1919 | 0 | 1914-09-01 | 교남 YMCA회관은 일제 강점기 대구3.8독립만세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의 공간이었고, 초대 회장인 이만집(애국장,1999)선생, 초대 총무인 김태련(애족장,1990)선생 등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이 활동한 곳이다. 물산장려운동, 기독교 농촌운동 등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
81 | 성주중 6.25참전학도병충훈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북도 성주군 | 성주중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89 | 2019-06-22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성주중 출신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
82 | 대구공고 학도의용군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동구 | 대구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3.97 | 2018-10-04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대구공고 출신 참전유공자를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
83 | 계성고 6.25전쟁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서구 | 계성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3.8 | 2017-12-21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계성고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 자긍심 고취 |
84 | 경북고 학도의용군 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수성구 | 경북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8.7 | 2016-05-16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경북고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 및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 자긍심 고취 |
85 | 상원고 6.25참전호국영웅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상원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6-10-16 |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신 상원고 출신 참전유공자와 학도병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86 | 대구호국순직경찰추모비 | 국가수호 | 2021-06-18 | 대구광역시 수성구 | 대구지방경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0-06-30 | 2020년 625전쟁 70주년을 계기로 추모비를 건립하여 경찰 출신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배 경찰들과 지역민들에게 국가수호 및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87 | 해동사(안중근의사 사당) | 독립운동 | 2017-11-23 | 전라남도 장흥군 | 죽산안씨문중(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 사당 | 의열투쟁 | 1909 | 사당 1동 | 1955-08-01 | 순흥안씨인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어 1955년 장흥의 유림과 죽산안씨 문중의 발의로 만수사 부지내에 해동사를 건립. 이승만 대통령의 해동명월(海東明月) 친필 휘호로 현판을 검 |
88 | 전라남도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2-04-25 | 전라남도 무안군 | 광복회전라남도지부 | 탑 | 기타 | 19세기 | 22m*29,5m*17m | 2020-10-30 | 한말,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전라남도 출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89 | 해병대 발상탑 | 국가수호 | 2022-04-25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 탑 | 6·25전쟁 | 1949 | 높이 6m, 폭 2m | 1964-04-15 |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된 것을 기념하고, 해병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창군과 더불어 해병들은 민족사의 최대의 수난인 6.25전쟁을 맞아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하여 험준한 산악과 무명의 벌에서 또한 동. 서 양안으로 능히 일당백의 용맹성과 충용성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공으로 무적해병의 용맹이 온 세계에 떨쳤다. 이에 해병대 장병들의 해병 혼과 정신적 근원을 일깨우고, 자긍심과 사기, 소속감을 고취하고자 해병대 창설 15주년을 맞아 1964년에 한국 해병대 발상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
90 |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22-04-25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군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120cm, 폭 60cm, 두께 15cm | 1985-11-30 | 1919년 3월 1일 파고다에서 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의령에도 전해지자 기미년 3월 14일 의령 장날 2천여 군민이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벌였고 15일과, 16일에도 의령군민과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임. 이와 관련 3.1독립운동기념비는 의령군민의 독립운동유적지 보전사업의 하나로 확정되어, 나라사랑 겨레 사랑의 높은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 후손에게 전하고자 건립된 비로 국가유공자와 관련이 있음. |
91 | 애국지사 최정학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22-04-25 | 경상남도 의령군 | 최동준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8-04-21 | 의령읍 및 부림, 신반리 독립만세 시위 주동 인물로 활약하여 1990년 애족장으로 서훈되신 최정학 애국지사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금심을 고취하고자 의령군은 2018년 4월 21일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
92 | 이회영기념관 | 독립운동 | 2022-04-25 | 서울특별시 중구 | (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2층 | 2021-02-17 | 본 기념관은 항일독립투쟁의 초석을 마련한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6형제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매년 11월 17일 (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추모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 |
93 | 소방충혼탑 | 국가수호 | 2022-04-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중앙소방학교 | 탑 | 기타 | 2001 | 0 | 2002-05-23 | 충직스러운 소방인으로서 사영을 수행하다 몸 바치신 분들의 고귀한 뜻을 하나로 모아 위국충정, 위민봉사의 희생정신을 드높이는 방안을 모색하여 오던 중 6인의 소방관이 순직한 2001년 3월 4일 서울 홍제동 화재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민들의 애정 어린 성원과 소방인들의 열망적인 숙원에 따라 소방교육의 요람인 이곳에 이 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
94 | 테스트 | 국가수호 | 2022-04-08 | 경기도 과천시 | 0 | 공원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0 | 0 | 2022-03-07 | 0 |
95 | 이승복기념관 | 국가수호 | 2015-10-14 | 강원도 평창군 | 평창교육지원청 | 기념관 | 기타 | 1968년 | 지상 1층 | 1982-10-26 | 이승복 기념관은 1968년 12월 9일 울진삼척지구로 침투한 무장간첩들에게 9살의 어린 소년이“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분연히 외치다 산화했었던, 그 소년 이승복군의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대관령에 이승복반공관으로 개관하여 1982년 10월 26일 이승복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 부지로 이전하였다. 본 기념관은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승복군의 가족묘와 동상, 생가 모형, 본관 전시실, 군용장비 야외전시장을 비롯하여 자연학습장, 민속자료관, 야생화단지 등 총 10개의 전시관 및 학습장으로 운영 되고 있다. |
96 | 강릉중앙고등학교 6.25참전 국가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중앙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가로 4.3m, 세로 3.3m, 높이 3.09m | 2016-09-09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강릉중앙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삼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어 건립하였다. | |
97 | 강릉제일고등학교 6.25참전 국가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제일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가로 1.2m, 높이 3.2m | 2016-05-22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강릉제일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삼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어 건립하였다. | |
98 | 한국소방마이스터고등학교 6.25참전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강원도 영월군 | 한국소방마이스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4.3m*3.13m*2.56m | 2017-10-12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하고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영월공업고등학교 출신 6.25참전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삼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어 건립하였다. | |
99 | 대포만세운동기념관 | 독립운동 | 2021-11-01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주민생활지원과) | 기념관 | 3·1운동 | 1919 | 전시관 1층 | 2021-08-13 | 현 대포만세운동기념관은 1919년 4월 5일 양양군 도천면(현 속초시)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일제 순사주재소가 있던 자리이고, 속초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일 당시 순사주재소가 있던 대포에서 도천면과 강현면 군중이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면서 확산되었다. 속초시는 대포만세운동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기 위하여 당시 만세운동이 있었던 옛 순사주재소 자리인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100 |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 터 | 국가수호 | 2021-06-0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타워8 | 장소 | 6·25전쟁 | 1950 | - | 1950-09-26 | 이곳에는 6.25전쟁 당시 징병업무를 담당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있었다. 정부수립 후 병역법이 공포되면서 병력모집은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징병업무 수행을 위해 각 지구별로 병사구사령부를 설치했지만, 정부의 예산 부족으로 당장 징병제를 실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50년 3월 해체되었다. 전쟁 발발 후 정부는 병력 보충이 시급해지자 가두모집, 강제징집 등을 시행했다. 서울수복 무렵인 9월 26일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재설치 되어 현역 징병 및 제2국민병 소집 업무 등을 담당했다. 그런데 전황이 악화되면서 부산으로 이동했다가 1951년 3월 15일 서울로 복귀했다. 전쟁 이전 병무행정의 공백과 약화된 국방력에 대해 반면교사로 삼기위해 이곳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안내판을 세웠다. |
101 |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 국가수호 | 2010-02-12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대학교 병원 | 비석 | 6·25전쟁 | 1950~1953 | - | 1963-06-06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수도 서울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고개를 돌파하고 창경궁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는 거의 1천여명에 달하는 부상 장병들이 응급실, 입원실, 수술실은 물론, 병원 복도까지 가득 차 있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원은 남소위가 지휘하는 국군 1개 경비소대 병력과 육군본부 병참장교 조용일 소령의 지원하에 있었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어 북한군의 서울 함락이 목전에 있었으나 병원 내 의사와 간호사들은 환자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피난도 잊은 채 오직 환자 치료에만 전념하였다. 6.28일 새벽, 국군 경비소대가 병원 주위를 철통같이 방어하며 완강히 저항하자 북한 괴뢰군은 1개 대대병력을 투입하였고, 국군 경비소대는 이곳 뒷산에서 결사항전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조용일 소령과 소대장 남소위가 전사하고 소대원 전원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지키고 병원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하신 이름 모를 자유전사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3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
102 | 광주시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20-11-19 | 경기도 광주시 | 경기도 광주시 | 탑 | 3·1운동 | - | 2020-08-31 | 의병전쟁과 3.1만세운동의 중심지인 남한산성에 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여 순국선열들의 호국정신을 계승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도립공원에 기존 신익희 동상과 하나의 광장으로 조성되어 보훈가족 및 시민, 관광객에게 역사교육의 장소 및 볼거리를 제공할수 있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정암 이종훈 선생과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춘경 구연영 의병장의 동상을 함께 건립 | |
103 | 백인권준장군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대구광역시 서구 | 권영빈 | 동상 | 기타 | 1917 | 0 | 2016-10-10 | 경북 상주 출신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자 초대 50사단장을 역임한 백인 권준장군을 기리기 위한 흉상이다. 1917년 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김원봉과 같이 의열단을 창설하여 군자금 조달 등을 지원하였다. |
104 | 문용기 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18-08-08 | 전라북도 익산시 | 문용기열사동상건립추진위원회 | 동상 | 3·1운동 | 1919 | 가로5m 세로5m | 2015-05-01 | 문용기 선생은 아버지 문재윤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1878년 5월19일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군산영명학교에서 한문, 영어교사로 재직하여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1911년부터 함경도 갑산 금광채굴 현장에서 8년간 비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앙 33인과 연계, 호남일대 동지들과 거사를 계획하여 4월4일 1천여 이리시민의 선봉에서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무도한 일본군 총검에 태극기를 든 왼팔과 오른팔이 차례로 잘려나감에도 선생께서는 몸으로 끝까지 항거하였고, 일본군의 창에 가슴이 찔려 절명하는 순간까지 선혈이 낭자한 몸으로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이에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여 순절하신 문용기 선생의 위대한 순국정신을 자손만대로 기리고 계승하고자 합니다. |
105 |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으로 쓰인 곳 - 통도사 | 국가수호 | 2021-11-01 | 경상남도 양산시 | 통도사 | 장소 | 6·25전쟁 | 1951 | 118.57 | 2021-11-01 | 통도사는 6.25전쟁을 겪으며 당시 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다. 통도사 스님들과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부상자들이 이곳에서 치료 받았으며 치료도중 사망한 병사의 수도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지난 2019년 통도사 용화전의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에서 "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해 1952년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통도사 육군병원의 존재가 기록으로 확인되었으며, 통도사 내 대광명전에서 당시 입원한 군인들이 남긴 필적이 발견되었다. 또한 군사편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51년 11월과 12월 국방부장관이 2차례에 걸쳐 대통령께 보고한 자료와 1951년 동아일보 신문 보도자료를 통해 6.25전쟁기간 양산 통도사가 제31육군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한반도의 숱한 전쟁 속에서도 통도사에 설치되었던 육군병원은 군의 입장에서는 의료기관이었고, 병사들에게는 안전한 귀의처였으며 백성의 아픔을 위로하고 국난을 극복해가는 힘이 되었다. 오늘날 통도사는 이름없이 생을 달리한 병사들을 위로하고, 6.25전쟁의 역사를 바로쓰고 희생자들의 존재를 밝혀 역사에 기록하고자 한다. |
106 | 양산고 6·25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명비 1.3m*1.05m , 조형물 좌대(1.6m*1.6m*0.12m), 기단석(1.2m*1.2m*1.4m), 인물상(1.95m) | 2016-12-13 | 양산고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107 |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21-11-01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 기념관 | 문화운동 | 1938 | 1층 문화 및 집회시설(619.36㎡, 2층 기념관 422.9㎡, 2층 기념관 별도공간 74.1㎡ | 2014-09-02 |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신 독립유공자 주기철 목사(1963 건국훈장 독립장)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후세에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
108 | 해병대 장단 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길이 11.56m, 폭 4.5m, 높이 2.8m, 132제곱미터 | 2014-11-13 | 6.25전쟁 당시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에서 1년 4개월 동안 중공군 남하공세를 차단하여 이 땅을 사수한 호국 해병들의 희생정신과 넋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함 | |
109 | 대한민국특수임무요원 한상남 동지 위령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기타 | 0 | 2003-11-30 | 조국통일을 위하여 젊음을 나라에 바친 북파특수요원 故한상남님의 명복을 빌고 가신 님의 거룩하신 나라사랑 정신을 후대에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 |
110 | 양주시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기도 양주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양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66제곱미터 | 2017-11-28 | 흑요암으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높이 1.95m, 폭 6.75m이며, 전면에는 참전자 명단, 후면에는 6.25전쟁 및 월남전의 사진과 설명이 새겨져 있으며 중앙에 새겨진 브론즈로 만든 철모 조형물은 참전용사를 상징하며 그들의 희생정신과 명예로운 모습에 대한 예를 표하고자 하였다. | |
111 | 대암 이태준 기념관 | 독립운동 | 2021-11-01 | 경상남도 함안군 | (사)대암 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지상면적 1층 494㎥, 전시관면적 182.82 ㎡, 사무실 면적 40.12㎡, 교육실 59.71㎡, 회의실 31.39㎡ | 2021-06-07 | 몽골의 신의(神醫)라 불린 우리 함안이 낳은 위대한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 선생(1883-1921)의 항일운동과 몽골에서의 활동 등 일대기를 기리고자 2021년 11월 16일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개관하였다. 국가 현충 시설인 이 기념관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태준 선생님의 애국애족 정신과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은 박애 정신을 후세에 교육의 터전으로 삼고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곳이다. | |
112 | 창신중·고등학교 6·25전쟁 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창신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건평 2.56㎡, 기단 3.4㎡ 높이2.5m 폭 2m | 2016-12-12 | 이 명비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수호를 위해 젊음을 바치신 창신중·고등학교 출신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배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고자 건립하였습니다. | |
113 | 보성군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청 | 공원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6.25 및 월남 | 0 | 2020-12-01 | 현충탑, 순국비, 참전유공자 기념탑을 한데 모아 현충공원으로 조성하고 보성군 출신 호국영령 추모하기위해 건립되었다. |
114 | 의병장 임병국 기적비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보성군 | 임원모 | 비석 | 의병운동 | 1908 | 가로 0.6m, 높이 3m | 2017-09-01 | 안규홍 의병부대 좌우익부장으로서 파청대첩, 진산대첩, 원봉대첩에서 활약 |
115 | 독립유공자 박항래 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순천시 | 박승재 | 비석 | 3·1운동 | 1919 | 가로 0.54m / 높이 1.95m / 기단 0.1m | 1974-10-01 | 순천출신 독립운동가로 박항래 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4년 문중 후손들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16 | 독립유공자 박항래 의사 흉상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순천시 | 순천시청 | 동상 | 3·1운동 | 1919 | 높이 2m | 2011-08-01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상)을 수여받은 순천 출신 독립운동가 박항래 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천시에서 건립하였다. |
117 | 윤동주 시(詩) 정원 | 독립운동 | 2021-11-01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장 | 장소 | 학생운동 | 1944 | 탑 31개 | 2019-10-18 | 망덕포구를 거점으로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과 연계한 테마공원을 윤동주 시집에 수록된 시 31편을 시비로 새겨 감성적 이색적인 공간으로 재창조하여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추모하고자 함 |
118 | 충혼비(화산면) | 국가수호 | 2021-11-01 | 전라북도 완주군 | 화산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 | 2022-10-27 | 완주군 화산면 출신으로 6.25전쟁에서 산화된 44명의 호국전몰용사영령을 추모하고 월남참전용사 39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으로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꽃다운 나이에 참전한 6.25전쟁용사들과 월남전쟁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이들을 기리는 비임 |
119 | 하익봉 공 독립운동 현창비 | 독립운동 | 2021-11-01 | 경상남도 진주시 | 진양하씨 창주공파종중(하종완) | 비석 | 학생운동 | 1944 | 비높이 2m | 2017-11-01 | 하익봉(1926~1945)지사는 1943년 일제강점기 땨때 비밀결사 광명회를 조직하여 역사를 공부하고 졸업후에는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는 등의 활동으로 2010년 독립운동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진양하씨창주공파종중에서 하익봉지사의 항일투쟁 공적과 자취가 잊혀짐을 우려하여 지역주민과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향상하고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2017년 건립하였다. |
120 | 경북호국경찰 추모공원 | 국가수호 | 2021-06-18 | 경상북도 안동시 | 경북지방경찰청 | 공원 | 기타 | 경북지방경찰청 내 219평의 잔디광장과 12평의 추모비 | 2018-10-17 | 1945년 창경 이후 국가수호 활동을 위해 전사 및 순직한 경찰관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원 내에 추모비를 설치하고, 그 뒤쪽에 그들을 위한 명각 추모벽 3면을 형성함 | |
121 |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6·25참전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2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10-19 |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자발적으로 참전한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출신 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높이 기리고 후배 학생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인천보훈지청의 지원 아래 2018. 10. 19.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내 명비를 건립함 |
122 | 고창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 2.3m, 세로 : 1.1m, 높이 3.35m | 2018-12-15 | 국가보훈처 주관 호국영웅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을음 바친 고창고등학교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고자 건립 비문 내용 ○ 고창고등학교 6.25 참전유공자 명단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친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 고창고등보통학교 제16회 졸업 : 하사 송광의 ■ 고창고등학교 제27회 졸업 : 병장 김규만 병장 김규장 김경수 최진호 제28회 졸업 : 하사 은희태 상병 김기용 병장 김병완 제29회 졸업 : 중위 이상근 일병 이병문 이병 강성택 이병 박규태 명 예 졸 업 : 소령 황임춘 대위 전동선 중위 은창기 중위 이준행 중위 김성길 중위 변인석 소위 임경재 상사 정동춘 하사 김인종 하사 안현진 병장 김재원 병장 봉병채 일병 김형식 일병 배종석 일병 안도연 일병 조재연 이병 유근영 김원상 오문원 이성규 정재철 조한권 진해갑 ■ 선운사 학도의용대 제28회 : 서치윤 제29회 : 박구태 박금석 오연경 홍기선 제30회 : 강대한 김봉수 김재규 김창우 송병곤 우종익 탁영진 제31회 : 이연구 이운교 전종민 제32회 : 김용봉 권오섭 민병욱 서한수 이재옥 정택진 주원룡 차원길 최중곤 2018. 12. 15. 전북서부보훈지청 고창고등학교 |
123 | 인천고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소 | 2016-11-04 |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자발적으로 학도의용대를 조직하고 참전하여 생명과 학업의 기회를 바침으로써 조국과 가족을 지킨 인천고등학교 출신 학도병의 공훈을 높이 기리고, 후배들이 선배 학도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게승할 수 있도록 인천보훈지청의 지원 아래 2016.11.4. 인천고등학교 내 명비를 건립함 6·25전쟁 당시 인천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남녀 학생 수백여명이 "조국이 있어야 배움도 있다"라는 일념하에 자발적으로 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조국 수호활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인천고등학교에서는 180여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20여명이 전사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음 |
124 | 덕신학교 기념관 | 독립운동 | 2021-06-18 | 충청북도 청주시 | 사단법인검은정순만기념사업회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 | 2019-12-26 | 덕신학교는 독립유공자 정순만 선생이 하동정씨 문중과 함께 고향에 건립한 근대 교육시설로 1906년 개교하여 지역민의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쓴 곳이다. 정순만 선생은 1896년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설, 이동녕 등과 근대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또한 1907년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돟또한, 현재 기념관은 1920년 폐교 이후 터만 남아있던 곳에 2016년 하동정씨문중과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부대시설 정비 등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 |
125 | 강남구 6·25 참전유공자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서울특별시 강남구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7.4m 높이 3m | 2020-12-26 | 2020년 12월에 건립한 기념비는 앞면에 국가를 위해 헌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문구와 함께 건립취지와 6·25전쟁 연혁, 사진 등을 각인해 국민의 호국의식 교육장소로 활용토록 했고, 뒷면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구민 2,193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건립되었다. 개포동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해 있고, 2021년 6월 18일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
126 | 인동만세로광장 | 독립운동 | 2021-06-18 | 대전광역시 동구 | 대전광역시 동구 관광문화체육과 | 장소 | 3·1운동 | 1919 | 만세광장갤러리, 벽화, 만세조형물, 만세운동기념비, 소녀상, 노동자상 등 | 2014-08-20 | 대전 동구 인동시장 근처는 1919년 3.16 인동 장터 독립운동을 하여 대전지역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동 만세로 광장 근처를 이야기가 있는 테마 광장으로 조성 하여 기념 벽화, 기념탑,기념비 조성 및 매년 인동 장터 독립만세운동 재연 행사 등을 개최하여 호국 보훈의 정기가 숨쉬는 공간으로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
127 | 연산초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충청남도 논산시 | 연산초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2.5m, 세로 2m, 높이 2.8m | 2018-11-30 | 이 명비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연산초등학교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우고자 2018년 건립되었습니다. |
128 | 계룡시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21-06-18 | 충청남도 계룡시 | 6·25참전유공자회 계룡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10m, 세로 6.8m, 높이 2.1m | 2020-06-25 | 충남 계룡시는 2020년 4월 29일 엄사근린 공원에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높이2.1m, 폭 12.8m 규모로 제작된 기념비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국가를 위해 희생과 헌신한 분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되었다. |
129 | 지강 양한묵 선생 추모탑(조형물) | 독립운동 | 2021-06-18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 | 조형물 | 3·1운동 | 1919 | 5m*2.3m*3.1m | 2019-12-30 | 양한묵 선생은 제주양씨 학포 양팽손의 12세손 이며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길중이요 호는 지강 으로 7살 때 천자문을 익히고, 8살에 양사재에서 유학을 배웠으며, 18살에 불교,선교, 천도교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1894년에 능주의 세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산적한 문서들을 신속히 정리하여 지역의 주민들에게 크게 봉사하였다. 1898년(3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운동을 추진하다 손병희 선생을 만나동학에 입교하였다. 헤이그열사 이준 등과 함께 공진회를 결성하여 친일 조직인 일진회에 맞섰다. 1909년 이완용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뤘으며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 모여 손병희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경에 채포되어 1919년 5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순국 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130 | 오산사 | 독립운동 | 2019-12-12 | 전라북도 장수군 | 권석희 | 사당 | 기타 | 0 | 2003-10-15 | 국권침탈에 분개하여 떨쳐 일어난 호남창의동맹단 이석용 의병장의 투쟁과 구한말 유학자 청련재 권진규(중원) 선생의 희생정신을 선양하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넋을 추모 | |
131 | 유엔군 초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오산시 | 오산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2-01-01 | 유엔군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당시 미군제24사단 21연대 1대대의 B.C.중대 및 사단 52포병대대 AVH대로 편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장병이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1950년 7월 5일 오산죽미령에서 북한국과 맞서 6시간 넘는 격전을 치렀으며 이 때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1955년 7월 5일 미군 제24단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1982년 4월 6일 경기도에 의해 재건립되었다. |
132 | (정읍시)무공수훈 국가유공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전라북도 정읍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정읍시지회 | 탑 | 6·25전쟁 | 2014-04-01 | 6.25 전쟁 및 월남전, 전후방 각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무공훈장과 보국훈장을 받은 정읍 출신 국가유공자. 무공수훈자와 보국수훈자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고, 후손의 가슴에 새겨 귀감으로 삼아 조국의 앞날을 더욱 밝게 비춰줄 기념물로 삼고자 전공비를 세움 | ||
133 | 충혼의 빛(6·25 참전 유공 기념 조형물) | 국가수호 | 2008-05-09 | 충청북도 제천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제천시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07-08-21 | 제천시 모산동 솔밭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유공 기념 종형물’을 건립하였다. 제천시 6·25참전유공기념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강두구, 고덕규, 김용은, 송명식, 차승수(경찰), 장장식(철도원) 등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8월 21일 그들의 넋을 ‘별’로 표현한 이 조형물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제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134 | 애국지사 함양박공의연·의열·의훈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애국지사 함양 박공 문회 | 비석 | 3·1운동 | 1880 | 0 | 2000-01-01 | 상해 임정의 국내 조사원으로 경북 의성에서 조사 활동을 하였으며 재만독립촉성회를 결성하는데 북만 대표로 활동한 박의연 지사, 1912년 만주에서 부민단이 조직되자 중앙검찰장으로 활동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통의부 통화 검찰감, 정의부 부교, 동원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활동하다 순국한 박의열 지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의부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박의훈 지사 등 3명의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35 | 성재 이시영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해외운동 | 1869 | 1986-04-17 | 이시영은 1869년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그가 대한제국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던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부 교섭국장에서 사직하였다가 1906년 다시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 돼 관직 생활을 하던 이시영은 이후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 등 법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과 친형 이회영 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할 때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이시영은 형 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 기지로서 경학사와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1919년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중요 업무를 담당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노병회, 한국독립당 참여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 |
136 | 육군 소령 윤길병 상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북도 경주시 | 건천초등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2006-6-25 | 1951년 1월 육군 소위로 임관,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 812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53년 1월 대위로 진급, 보병 제 12사단 37연대 10중대장으로 보직, 812고지 방어 전투에 참가하여 북한군 1개 대대와 5일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자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먼저 대피시킨 후 자신은 적으로부터 포로가 되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자결하였다. 이러한 중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52연대 2대대 장병들이 분격하여 역습을 감행 812고지 탈환에 성공 | |
137 |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1-06-06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노곡리에 애국청년 63명이 독수리유격대를 조직하고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독수리유격대기념사업회에서 1991년 6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포천지역의 반공애국청년 63명이 1950년 11월 포천군 신읍에서 조직되어 국군 제 2사단 17연대와 합류하여 경북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지역과 충북의 제천, 단양지역에서 인민군 제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하고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일신호국의 정신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 중 16명이 전사하였다. 유격대는 민간인 신분으로 자생조직되었으나 투철한 애국정신과 구국신념으로 참전하였기 그 용맹함이 뛰어났고 전과 또한 컸지만 자신들의 신분이나 전공에 따르는 상훈은 초연하였기에 국가에서도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혀져 오다가 1989년 국방부의 전적을 확인받았다. 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국방부, 재향군인회, 포천군, 육군3070부대의 후원과 생존대원, 전몰대원 유족들의 정성과 포천문화원의 주선으로 관음산 기슭에 전적비를 세웠다. | |
138 | 854고지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인제군 | 보병제12사단(육군 제1862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3 | 1967-08-15 |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가전리에 854고지 전투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사단이 1967년 8월 1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854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국군이 점령했다가 다시 중공군이 점령했으나 최후엔 국군이 재차 점령한 고지가 바로 854고지다. 당시 이곳을 점령한 부대는 윤춘근 장군이 지휘한 12사단 제51연대로 북한군 5개 대대를 격퇴시켰다. 그러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기상을 이어받으라는 의미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12사단의 이름을 ‘을지부대’라고 명명했다. 을지부대는 1952년 11월 8일 강원도 양양에서 창설됐다. 이곳 854고지에서 을지부대는 1953년 1월 12일부터 휴전 직전 7월 18일까지 무려 6개월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때 854고지 전투에서 12사단 최초로 승리를 거둬 우리나라에 유리한 휴전협정이 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854고지는 GP(Guard Post : DMZ에 있는 경계초소) 내에 있어 전적비를 854고지가 내려다 보이는 1052고지에 세웠다고 한다. 향로봉 건너편 1052고지는 GOP(General Out Post : 남방한계선 경계근무를 하는 곳)지역이다. 그래서 민간인이 방문하려면 쉽지 않다. 민통선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854고지 전투에서 적2개 대대를 전멸시킨 전공을 기념하고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 |
139 | 오강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곡성군 | 신애옥(유족) | 사당 | 의병운동 | 1833 | 서당 등 4동 | 1908-01-01 | 오강사는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곡성 출신 제자 조우식,·조영선 등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1908년 건립한 사당으로 1916년 일제의 압력에 의해 폐쇄된 것을 1946년 조동진 등에 의해 복원됐다. 최익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에게 ‘청토오적소’라는 제하의 상소문을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06년 전국을 순회하며 각지의 유생 및 의병을 집결시켜 창의구국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됐다. 그해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어 12월30일 순국했다. 1921년에 일본경찰에 의해 면암의 영정이 압수되고 사우가 훼철당하게 되자 곡성 유림들이 총독과 곡성경찰서장에게 항의문을 보내어 1922년에 다시 사우의 복설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 다시 1937년에 또 훼철당함에 조우식이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의 곁의 노거수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46년에 이르러 중건되었으며 1954년에 조우식을 추배하였고 1956년에는 조영선을 추배하였으며, 1969년에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석연 정대현을 추배하였다. 사우내에는 면암과 성암의 영정 및 4위의 위패가 있다. |
140 | 3·1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30 | 경기도 광명시 | 온신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95-11-28 | 이곳은 일제의 강권적인 식민지 통치에 항거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시기에 광명지역의 첫봉화를 올려 민족혼을 빛낸 곳이다. 이고장의 3·1운동은 3월 27일 당시 시흥군 서면 소화리 거주 이정석이 독립운동을 선도하여 이튿날 일본 경찰에게 강제 연행되어 노온사리 경찰주재소에 구금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은 아들의 구금사실을 기독교인 최호천에게 알렸다. 이에 당시 배재고보생 윤의병 농민 류지호, 최정성, 김인한, 최주환, 김거봉 등은 모임을 가진 뒤 구금자를 구출하고 민족독립의 염원을 밝히기 위하여 2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들은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노온사리 경찰주재소를 에워싸고 이정석의 구출을 꾀했으나 이들은 증파된 일본 경찰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치안유지법 위반 또는 중한 구금자 탈취 미수죄를 적용 최고 4년에서 1년6개월의 징역형과 함께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광복된 조국에서는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및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141 | 병영 3·1운동 기념 조형물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초등학교 | 조형물 | 3·1운동 | 1919 | 0 | 1997-08-03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울산 병영리 일대에서 이현우·이문조·박영하·이종근·김장수 등의 사전 준비로 수백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5일에도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워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하자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발포하여 엄준(嚴俊, 1884~1919), 문성초(文星超, 1887~1919), 주사문(周士文, 1890~1919), 김응룡(金應龍, 1901~1919)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중경상자를 내고 40여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병영초등학교 총동창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7년 8월 3일 이 조형물을 세웠다. |
142 | 남해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5-11-08 | 경상남도 남해군 | 무공수훈자회 남해군지회 | 비석 | 기타 | 0 | 2005-03-28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경남지부남해군지회는 2005년 3월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1192-13번지에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여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하여 헌신한 애국애족정신과 베트남전에 참전,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공헌한 남해군 출신 무공수훈자 89명의 위훈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6·25전쟁의 참상과 국난극복을 위하여 모두가 하나 되었던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하였다. 전공비에는 무공수훈자의 이름과 훈격이 새겨져 있다. | |
143 | 안성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안성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안성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3-15 | 안성 마정리 안성마춤 가족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안성시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안성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144 | 의병장 청주한공봉수 항일 의거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진천군 | 문백면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높이 2m | 1977-06-01 |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 군인 등을 모아 충청도, 강원, 경상 일대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 의병장이다. 한봉수 의병장은 청주, 청원, 진천, 괴산 등지에서 30여 차레에 걸쳐 일제와 교전을 하여 많은 일본군을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특히 의병장은 게릴라전에 능숙하여 일제의 우편행랑 속에 담긴 현금을 빼앗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도 나누어주어 민중의병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정부에서는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당초 이곳에는 조선총독부가 세운 일본군 순직비가 있었으나, 1977년 문백면민들이 그 비를 끌어내고 성금을 모아 의병장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
145 |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강원도 원주시 | 한라대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1990-04-04 | 원주 흥업면의 3·1독립운동은 고종 인산 때 상경하였던 사람들이 서울의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전파시키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9일 낮과 밤 2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낮에는 사제리·대안리, 매지리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펼쳤고, 밤에는 흥업리 주민들이 마을 뒷산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일제 관헌이 검거에 나서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원래 이 기념비는 기미년 흥업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흥업면민 일동이 1990년 4월 4일에 흥업초등학교에 건립하였다. 2005년 10월 5일 한라대학교에서는 개교 10주년을 기점으로 더욱 흥업면민의 선구적 진취정신을 기념하고, 한라대학교의 정체성과 교육의 장에 독립정신의 혼을 계승해 나가고자 건립위원회와 흥업초등학교의 동의를 받아 기미독립만세기념비를 흥업면 산66번지에 위치한 한라대학교 잔디광장으로 이전하였다. | |
146 | 베트남 참전 유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진안군 | 대한해외참전전우회진안군지부(문종운)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2003-03-21 | 진안군 군하리에 이 고장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베트남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유공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병기, 박진근, 김병성, 임백호 등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3월 21일 기념비를 세웠다. 진안군 젊은이들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진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47 | 이충순 자결터 | 독립운동 | 2015-05-14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 장소 | 3·1운동 | 1907 | 0 | 2000-11-01 |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다. 1902년 7월에 육군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었다. 1905년에 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비밀각서에 의하여 한국군마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8월 1일 시위대(侍衛隊)가 전격적으로 해산 당하자 이를 거부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미리 파견된 일군과 경성에서 접전하던 중 크게 부상을 당하였다. 적에게 사로잡히게 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에서는 이충순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48 | 의사 내산 이하현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이병철(손) | 비석 | 의병운동 | 1874 | 1964-11-28 | 한말 불영사(울진)에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진보, 울진, 영해 등지에서 일경과 전투를 벌였으며 신돌석의병장과 연합하여 전공을 세우는 등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이하현은 이현규선생의 다른 이름임) | |
149 | 산남의사 남공 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박기석 | 비석 | 의병운동 | 1880 | 0 | 1977-04-12 | 남복수는 경상북도 청송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늑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 정환직에게 항일의병운동의 재개를 종용하였다. 정환직은 장남 정용기에게 고향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조직할 것을 명하고 중앙에서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이한구·손영각 등과 의논하여 영남과 관동 일대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이른바 산남의진의 창단을 보게 되었다. 이에 남복수는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여 조달하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입암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산남의진은 청송지역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부대로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청송을 비롯하여 영천, 영일 일대에서 활동했던 부대이다. |
150 | 마산 참전기념탑 및 전시관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창원시 | 탑 | 기타 | 2008 | 0 | 2008-06-15 | 베트남참전기념사업회는 2008년 6월 마산시 양덕동 412-28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의 참뜻을 알리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젊음을 바쳐 희생한 6·25 및 베트남 참전유공자의 위상을 드높이고 그들의 원대한 기상과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마산 참전 기념탑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마산참전기념탑 및 전시관은 8각형 구조로 높이는 16.85m이며, 건립취지문과 참전용사 비문, 군가노래비, 참전유공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탑 주변에는 당시 쓰였던 M-47 전차와 155㎜ 평사포가 전시돼 있다. 또한 전시관 안에는 월남참전기장증, 전공 표창장과 수통, 대검 등 개인장비, M16소총, M60기관총, 로켓발사기 등의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무기와 사진 앨범 등이 있다. |
151 | 故 해군준위 이창기 흉상 추모비 | 국가수호 | 2015-10-14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양평군지회 | 동상 | 기타 | 2010 | 0 | 2015-04-17 | 故이창기 준위는 1970년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서 태어나 1990년 10월 해군부사관126기 전탐하사로 임관하여 2009년 2월 천안함에 부임후,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으로 전사하였다. 천안함에서 장렬히 산화한 뒤 화랑무공훈장에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故이창기 준위의 숭고한 뜻과 국가수호의 공적을 기리고자 이 흉상을 건립하였다. |
152 | 이규필 애국지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17-11-23 | 경상북도 영천시 | 이상수(손)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0 | 1977-12-01 | 이규필 애국지사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용기 의병장은 포수와 농민 등의 민병을 규합하여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군사 소모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각 지역을 연락하며 의진편성에 힘썼고 창의 당시에는 연습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적의 모략에 속아 정용기 의병장이 피체됨으로써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출옥한 정용기 의병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07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사들을 모아 북동산(北東山)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였다. 이규필은 이때에도 의진에 참여하여 우영장(右營將)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해산군인을 포섭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군령을 정하여 장병들을 단속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였 다. 그해 8월부터는 청하읍을 습격하였으며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이규필은 산남의진의 우영장과 우포장(右砲將) 등을 역임하며 이와 같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이후 이규필은 새로이 산남의진의 의병장이 된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대일항전을 계속하다가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화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153 | (청도군)6.25참전학도병 충훈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청도군 | 모계중학교장 | 비석 | 6·25전쟁 | 0 | 2013-11-02 | 1950년 6월25일 한국정쟁이 발발하고, 국가의 존폐여부가 달린 낙동강-포항 방어선 사수 전투가 한창이던 8월 중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모계중학교 학도병 70여명이 참전하였다. | |
154 | 호국영웅 이상득 육군하사 공적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동해초등학교 | 비석 | 월남전쟁 | 1967 | 2007-12-10 | 이상득 육군하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수류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동료들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불굴의 백마용사이다. 이상득 하사는 1944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1965년 6월 육군에 입대했으며 1966년 5월 파병을 자원하여 제9사단(백마부대) 28연대 소속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66년 당시 한국군 9사단은 베트남의 중부 요충지인 캄란에서 루이호아에 이르는 1번 국도변에 부대별로 전개하여 지역내 적을 소탕하며 전술책임지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7년 3월부터 5월까지 북쪽의 수도사단(맹호부대)와 남쪽의 제9사단이 각각 기동해 적을 소탕하고 서로의 통로를 연결하여 전술책임지역을 확장하는 군단급 규모의 '오작교 1.2호 작전'이 펼쳐진다. 이상득 당시 병장은 제9사단 28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 부분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하여 다랑강변의 독립가옥을 수색하던 중 지하에 파놓은 적의 토굴을 발견하고 선두에서 조심스럽게 탐색하며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그 순간 토굴안에 있던 적의 수류탄이 날아왔고 되받아 던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이상득 병장은 "수류탄이다!" 라고 소리치고 재빨리 자신의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쳐 동료 세 명을 구하고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2006년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어 전쟁기념관에서 현양행사를 거행하였다. | |
155 | 6·25전쟁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12-03 | 전라북도 군산시 | 6.25참전유공자회군산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12-28 | 6·25참전유공자회 군산시지회는 2006년 12월 군산시 나운동 은파호수공원 수변광장에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조국에 몸 바친 6·25참전 유공자의 숭고한 뜻을 기려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 뒤쪽 작은 비석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나라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 |
156 | 무공수훈자 공적비(보은군)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보은군 | 무공수훈자 보은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07-01 | 무공수훈자 보은군지회는 2003년 7월 보은군 보은읍 교사리 16-2 소공원 내에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여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전공을 세운 보은군 출신 무공수훈자 권상호 중령 외 75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고자 하였다. |
157 | 6·25 참전 기념비(남일면)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남일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6-21 | 남일면 재향군인회는 2002년 6월 남일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26명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에게 6·25 참전용사들의 애국심을 본받게 하며, 국가안보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청원군(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효촌리 33(남일면사무소 내)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158 | 단양군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단양군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단양군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1-12-01 | 단양군 도전리 소금정 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단양군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단양군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2월 1일 공적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단양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159 | 애국지사 백당 신태윤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5-10-28 | 곡성군 곡성읍 | (사)국조단군 곡성 숭모회 | 동상 | 3·1운동 | 1884 | 청동 동상 5.2m | 2005-06-18 | 신태윤은 1884년 6월 15일 담양군 남면 외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904년 창흥의숙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광주농업학교와 관립한성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곡성보통학교의 훈도로 취임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는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단군숭모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914년 삼인동에 단군전을 건립하여 밤중에 춘추로 개천절과 승천일인 어천절에 제향을 모시면서 곡성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의 3·1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19년 곡성에서 장날인 3월24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다. 그 일로 신태윤은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었다.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1923년 서울로 이사하여 장훈학교에 취직하고 역사책 《정사》를 발간하였다. 1925년 경북 성주군 성산면 고산동으로 내려가 초산학교를 세워 육영에 힘썼다. 이후 전남 장성, 순창 등으로 옮겨다니며 단군숭모운동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펼쳤다. |
160 | 고창 6.25 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05-10-28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6m X 3.6m X 0.9m | 2005-09-07 | 6·25참전유공자회 고창군지회는 2005년 9월 고창군 고창읍 덕산리 산 39-1에 국가와 민족, 자유 수호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고창 출신 6·25참전유공자 300여 명의 공훈과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61 | 6·25전쟁 참전 유공비(문의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문의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11-17 | 청원군(현 청주시) 미천리 문의면 복지회관 앞에 문의면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전쟁 참전 유공비’를 건립하였다. 문의면 재향군인회는 이곳 출신 신철균, 김남석, 권병열, 서정만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11월 17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문의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등에서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문의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62 | 한봉수의병장 사적지 | 독립운동 | 2010-02-1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충청북도 청주시 | 장소 | 의병운동 | 0 | 0 | 2008-05-22 | 충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한봉수 의병장은 진천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진천·횡성·장호원 등에 출몰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한봉수 의병장 유허지에는 의병장을 추모하는 사당이 있다. |
163 | 완도군 참전용사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9-22 | 전라남도 완도군 | 6.25참전유공자회,무공수훈자회,월남전참전자회 완도군지회 | 탑 | 기타 | 1950 | 2008-06-24 | 완도군은 2008년 6월 24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가용리 50(체육공원 내)에 6·25 및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전몰장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생존한 6·25 및 베트남 참전 용사의 호국충정 및 명예를 선양하기 위해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 좌·우측에 있는 명각비에 완도지역 6·25전쟁 참전유공자 2, 408명,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408명, 무공수훈자 109명 등 총 2, 92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
164 | 만경3.1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북도 김제시 | 만경3.1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재승) | 탑 | 3·1운동 | 0 | 2014-11-05 | 만경3.1독립운동기념탑에 대한 건립배경 및 조형물 의미를 지역민들에게 전달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공헌하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기억한다. | |
165 | 현봉학선생 동상 | 국가수호 | 2017-04-19 | 서울특별시 중구 | 연세대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2016-12-19 | 현봉학(玄鳳學, 1922~2007)박사는 6.25전쟁 시 장진호전투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킨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으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 민간인 구출 작전의 영웅이다. 현 박사는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후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 6.25전쟁 때 통역 장교로 참전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현 박사와 포니대령의 조언으로 군수물자 대신 피난민 10만여명을 태워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현 박사의 이 같은 인간 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연세대학교, 연세의료원, 현봉학 박사를 추모하는 모임)과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이 동상을 건립했다. | |
166 | 홍천지구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높이2.4 m 기단1.4m | 1957-03-15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 내에 홍천지구 전적 기념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1군단에서 1957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12월 13일부터 1951년 5월 20일까지 전개된 홍천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3, 5, 8사단과 121해병 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장병들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부 전선을 확보한 것을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에 굶주린 이리 떼와 같이 침공하여 오던 북쪽 오랑캐에 대하여 이 반격이 없었던들 이날과 이곳에 있을 것인가. 피땀에 젖은 장병들의 혈투사는 불후의 무공으로서 길이 남을 것이다. 단기 4283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5월 20일까지 전개되었던 홍천지구 전투에서 영용무쌍한 국군 제3, 5, 8사단과 영웅적인 미해병 제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부대의 장병들은 북한군 제6, 11, 12, 45사단과 중공군 제63군의 큰 적과 대적하여 시산혈하의 일대 혈전을 전개하게 됨에 우리 용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 장한 기백과 필승의 신념은 끝끝내 적을 섬멸하고 중부전선과 요지인 이 지구를 최후까지 확보함으로써 요원들의 불길 같은 우리의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우리의 영광과 감격이 아니랴. 이 전투로 말미암아 애석하게도 쓰러진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의 찬란한 무공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이에 이 비를 세우노라. 단기 4290년 3월 15일 제1군단 세움 |
167 | 충혼탑(횡성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탑 | 기타 | 1968 | 높이6 m 기단0.6m | 1968-06-06 | 이 충혼탑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조국의 평화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장렬하게 산화하신 횡성출신 군·경·민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68년 6월 6일 건립되었으나 규모가 작고 훼손부분이 많아 보훈시설로서 상징성이 떨어지므로 기존의 탑을 철거하고 새로 건립하였다. 이 탑의 형태는 사람 ‘인’자의 모습으로 호국의 념을 사람 ‘인’자와 횃불로 상징화하여 호국정신이 후대에 게승·발전됨을 표현하였고, 높이 6m, 폭 1,95m이며, 재료는 브론즈와 철재를 사용하였다. 위패실은 가로 12.35, 세로 7.30m, 높이 2.85m로 재료는 화강석과 고흥석, 유리를 사용하였다. 육·해·공군 및 경찰을 상징하는 4개의 동상이 있고 탑을 오르는 9개의 계단은 9개 읍면을 상징하며, 탑 앞쪽에는 한국전쟁 참전국의 국기를 게양하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시고 다시 한 번 이분들의 숭고한 애국 정신을 되새겨 진정한 나라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
168 | 해군 14용사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사무소 | 비석 | 기타 | 1950 | 소 | 1960-03-25 | 1950년 3월 25일 주둔 부대에서 해군함정 302호에 대원 14인이 승선하여 황해도 장연군 월래도(달래섬) 근방에 침투 및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에게 발각되어 무참하게 집단 사살당한 해군 첩보대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파괴되어 없어진 것을 재건하여 현재 주민과 군인들은 해마다 현충일과 명절에 이곳을 찾아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파괴 당시의 총탄자국이 선명히 나 있으며 비 하단부가 없어짐으로써 상단 7인의 명단만 남아있다. |
169 | 대전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대전광역시 중구 | 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9-03-31 | 대전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 야외음악당에 대전지구 전투 승전 기념 및 미 제24사단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대전시에서 1959년 8월 2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략으로 세계자유국가들이 총궐기하여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 제24단이 최선봉으로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대결하였으나 실패하자 북한군은 대전을 포위공격하게 되었고 미 제24사단은 대전에서 결사적인 방어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자유평화를 수호한 이들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전승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유는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생활의 고귀한 상징용, 평화는 자유를 살릴 수 있는 인류공동의 신성한 우상이다. 이 자유과 평화를 획득, 수호하기 위하여 여기 국제연합의 거룩한 역사 한 페이지가 이루어졌다. 단기 4283년 6월 25일 새벽 불법침략을 개시한 공산군은 일거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하였다. 세계 자유국가들은 총궐기하여 이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 제24사단을 국련군의 최선봉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적과 처음으로 대결하였으나 과부적중으로 인하여 7월 17일 적은 대전을 포위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20일 동안 결사적인 방어전을 감행하던 중 진두지휘에 나선 딘 소장이 불행히 실종되었다. 이 처절무비한 악전고투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미 제24사단의 영웅적인 결투사를 영원히 빛내고 기리고자 이 작은 비를 세우노라. |
170 | 의병대장 문태서 순국비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 설천면장 | 비석 | 의병운동 | 1880 | 0 | 1995-08-15 |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171 | 우리고장 국가유공자 기념비(남이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이면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9-28 | 남이면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2년 9월 28일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297-6(남이면사무소 내) 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172 | 의혼비(나주시) | 국가수호 | 2003-12-09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7-01 | 나주 남대동 시민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참전한 대한청년단 나주 단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의혼비’를 건립하였다. 애국청년단 나주청년단은 양채호, 김낙진, 김경두, 손성배 등 이 고장 출신 단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51년 7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대한청년단 나주단은 향토방위에 참여하여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앞장섰으며 국민방위군으로 재편된 뒤에도 공산세력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 | |
173 | 안강지구 전승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한국자유총연맹 강동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10-20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인동리에 안강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1958년 10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안강~기계 전투는 1950년 북한의 8, 9월 기계-안강-경주-울산 축선을 따라 부산으로 진출하려고 공세해 올 때 국군 수도사단이 주축이 된 제1군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을 경주 북방에서 완전 섬멸시킴으로서 낙동강 방어전의 최대 위기를 극복한 공방전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그들의 최종 목표인 부산에 이르는 공격 축선 최단경로인 경주를 통과하기위해 1950년 8월10일. 북한군 제12사단 및 제766부대가 기계를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자, 육군본부에서는 8월 31일까지 기계 남쪽에 방어진을 구축토록 하여 8월14일에는 제1연대 및 26연대의 증원을 받아 적의 진출을 저지, 고착시키는 한편, 의성 동쪽에 있던 수도사단 예하 제18연대와 기갑연대를 도평~입암 통로를 따라 적의 후방으로 공격케 하는 국군 사상 최초의 군단 역포위공격을 실시하여 기계에 점령한 적군을 포위 섬멸, 8월 18일 13시. 기계를 탈환하였으며 적은 1, 245구의 시체를 남기고 비학산으로 패주하였으니 이는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당시 국군 수도 사단장은 경주 방어의 승패가 안강 무릉산과 곤제봉의 전투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기갑연대와 3연대, 17연대 등 3개 연대를 곤제봉과 무릉산 일대에 집중 배치하였고, 이 두 고지 중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곳은 곤제봉이었고, 이곳에 배치된 제17연대는 9월 6일, 북한군의 공격으로 최초의 방어진지를 탈취 당한 후 8일 동안 피아 15회에 걸쳐 역습을 감행하고 격전 끝에 9월 13일, 곤제봉을 확보하게 되어 1개월 4일만에 안강-기계 전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
174 | 거룩한 얼의 탑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동강면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 높이 4m, 탑 높이 1m | 1979-05-15 | 동강면 현충탑 건립추진위원회는 1979년 5월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산 53-1번지 (노산공원 내)에 6·25전쟁 당시 조국을 수호하다 전사한, 고흥군 동강면 출신 채동현(육군 특무상사) 외 62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후세에 위훈을 전하기 위해 ‘거룩한 얼의 탑’을 건립하였다. |
175 | 장로 최영돈선생 현창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3·1운동 | 1897 | 1992-11-01 |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영돈(崔永敦)[1897~1985]은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1897년 1월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4일 김태연(金泰淵)·허철(許喆)·김종수(金琮洙) 등과 김천군 개령면 동부리의 은창서(殷昌瑞)의 집에서 만나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4시 기독교인들과 함께 마을 근처의 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4월 6일에는 머슴 김임천(金任天) 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역시 뒷산에 올라가 만세 시위를 전개. 1921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공채 모집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널리 알렸다. 또한 송명옥(宋明玉), 장이석(張利錫), 김종수 등의 애국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무렵 미국의 의원단 일행이 한국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온다는 것과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수(李賢壽), 김태연, 이학로(李學魯) 등과 더불어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부쳤다.그 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83년과 1990년에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 |
176 | 왕재일 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구례군 | 구례군수 | 동상 | 학생운동 | 1903 | 동상 | 2001-10-10 | 왕재일은 1904년 1월 19일 광의면 지천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1월 말경 조선청년연맹 전남지부와 신간회 전남지부에 가입했으며 신간회 및 조선청년총연맹 강진군지부의 조직책을 맡아 항일운동에 나섰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전남공립사범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에 독서회를 비밀조직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하자 검거자의 탈환과 조선인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등 격문을 살포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동자로 왜경에 체포됐다. 1932년 2월 장흥군을 근거지로 전남농민협의회를 비밀리에 조직, 각종 야학회와 소작인의 투쟁 등을 연결시켜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5년 12월 전남농민협의회 사건이 발각돼 대구복심법원에서 전남농민협의회 사건의 배후조정 인물로 지목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표창장을 추서 받았으며 지난 91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왕재일선생 동상은 군비 5천만원을 들여 지난달 착공, 높이 4.0m, 폭 1.5m 규모로 건립됐다. |
177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제천)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제천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제천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0 | 2000-01-01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충청북도지부 제천시지회는 2007년 12월 제천시 모산동 65-1 (솔밭공원 내)에 나라와 겨레를 지키고 나아가 온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무공수훈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국가유공자로서 긍지와 명예를 선양하여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대한민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공적비 후면에는 무공훈장 중 충무훈장 19명, 화랑훈장 165명, 인헌훈장 23명과 보국훈장 13명 등 총 220명의 제천지역 수훈자 이름을 새겼다. | |
178 | 춘천여고 학도병 명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여자고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4.0 m 폭 1.0m 높이 3.3m | 2016-7-7 | 이 명비는 1950년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국가수호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뒤로하고 소중한 젊음을 바치신 춘천여자고등학교 출신 6.25참전국가유공자(학도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억하고 후배 밷학생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이어가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
179 | 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서울특별시 은평구 | 은평구 | 비석 | 해외운동 | 2019-8-14 | 독립운동가 윤기섭은 서간도 독립군 양성 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7대 의장을 역임하였다. 독립운동 정당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모으고자 했으며 임시정부 삼일기념준비위원회 주석, 군무부 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금은 은평구 지역구인 서대문구(을)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거주지였던 불광동 385번지에서 납북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180 | 호국영웅 박노규 준장 흉상 | 국가수호 | 2019-12-12 | 전라북도 임실군 | 전라북도 임실군 | 동상 | 6·25전쟁 | 1950 | - | 2016-6-10 | 1950년 7월 이화령 전투에서 대대를 지휘하여 적 800여명을 격멸하고, 불가피하게 후퇴할 때에도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업고 부대를 지휘하였으며, 죽은 적군 1,000여 구를 묻어주는 등 전쟁 중에도 특출한 인간애를 발휘하였다. 1951년 3월 일월산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최전선에 서서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총탄에 산화하였다. 정부는 박노규 준장의 살신보국과 임전무퇴의 정신을 기리고자 1951년 4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특히 국가보훈부에서는 2012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현재 고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하고 계신다. |
181 | 애국지사 정진감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전라남도 함평군 | 애국지사 정진감 현창사업추진위원회 | 비석 | 해외운동 | 0 | 2019-3-2 | 애국지사 정진감은 1940.9월 유학목적으로 일본을 건너가 1942.5월 중순경 한국독립청년당을 결성하고 중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43.3.2.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 |
182 | 기장항일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8-12-4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청 | 탑 | 기타 | 2011-4-30 | 항일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기장군민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희생정신을 기리며 선열들의 자랑스런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건립 | ||
183 | 춘천시월남전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8-12-4 | 강원도 춘천시 |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춘천시지회 | 탑 | 월남전쟁 | 2017-12-8 | 월남전 참전기념탑을 건립하며(전면)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부대 해외 파병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이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긍지를 세계 만방에 떨친 위업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춘천은 화천 오음리와 더불어 바로 이 위업의 중심이었음을 다시 밝혀둔다. 당시 우리 국군 주요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춘천으로 집결, 춘천북방 오음리에서 한달간의 실전과 같은 전투훈련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월남전 적응훈련을 마치고 강군으로 거듭난 맹호와 백마 청룡등 참전용사들은 험준한 배후령 고개를 다시 넘어 춘천으로 향했다. 구비치는 푸른 소양강, 그리고 봉의산이 손을 높이 흔들며 우리를 맞이했다. 이어 우리는 춘천시민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열차에 몸을 싣고 부산 제3부두를 향해 밤새워 달렸다. 이렇게 월남전 첫 참전군인이 된 우리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8개월간 열대의 월남땅에서 적과 용감히 싸웠고 평정사업도 펼쳤다. 여기에 투입된 한국군은 연인원 32만여명이며 5천99명의 전사자와 1만여명의 전상자도 발생했고, 많은 전우들이 고엽제 피해를 입어 지금도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1950년 6.25 한국전당시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한국을 지원한 미국등 우방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제 우리가 이 역사적 참전도시 춘천에 우리와 각계의 지원으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월남전에서 희생된 전우들의 명복과 그 후손들의 뜻을 새겨 결코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발전에도 기여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월남전 참전 의의와 성과(후면) 1) 도약의 계기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8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파병은 한 국 정부가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국방 및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제3공화국 정부는 국군의 파병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면서, 미국의 원조를 얻어 굳건한 안보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의 지원과 전쟁특수를 활용한 외화수입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한ㆍ미 안보동맹과 그 밖의 한ㆍ미관계가 상호협상의 관계로 변화되는 계기가 됐다. 다만 미국ㆍ한국등 우방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 정부가 그들의 철수 2년 후인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에 점령당함으로써 파병의 명분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사태는 한국 정부가 얻고자 했던 것을 대부분 얻은 후였기 때문에 파병의 의미와 자체가 변질되거나 퇴색된 것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경제ㆍ사회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2)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 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경제ㆍ사회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병과 관련된 외화 수입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전쟁특수, 그 밖의 간접효과 등은 포함하면 줄여 잡아도 50억 달러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965년, 장기간의 한ㆍ일 협상으로 얻어낸 대일청구권자금이 차관을 포함해 총 8억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1963년 우리나라의 수출총액이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당시 50억 달러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효과는 외화의 유입으로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정부 및 기업의 베트남 진출경험을 활용해 그 후 중동진출 기틀을 직ㆍ간접적으로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과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여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하겠다. | ||
184 | 삼일탑(서울고등학교) | 독립운동 | 2002-11-01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장 | 탑 | 3·1운동 | 1919 | 0 | 1960-03-01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서울고등학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학생들의 성금으로 1960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185 | 순국선열 유택수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비석 | 의열투쟁 | 1902 | 0 | 1985-02-27 | 유택수(柳澤秀, 1902~1929)는 1926년 6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參議府)에서 국내 특파원으로 파송된 이수흥(李壽興, 1905~1929)을 도와 서울 경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과 무장항일 활동을 하다가 1926년 11월 이수흥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28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9년 2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순국선열 유택수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는 1985년 2월 27일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를 세웠다. |
186 | 3·1독립운동 기념비(우정)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우정읍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9-08-15 | 1919년 3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장안면 수촌리 등지에서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9년 8월 15일에 세운 비로, 기념비가 건립된 장소는 당시 시위대에 의하여 파괴된 화수리 경찰관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 군민들은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경찰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잔혹하게 살상하였다. |
187 |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1-08-09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94-11-26 | 이 기념비는 강화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11월 26일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강화의 3·1운동은 3월 13일 강화읍 장날을 기하여 전개되었는데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주동자 5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8일 강화읍 장날에 길상면 온수리에 거주하는 유봉진(1990, 애족장)의 주도하에 2만 여명의 군중이 장터에 몰래 집결하였다가 12시를 알리는 강화 동종의 개시 신호로 일시에 뛰어나와 민족주권을 되찾고자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후 5월 1일까지 2달 동안 각 면 단위에서 횃불 시위 등으로 진행된 강화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60여 명, 체포 및 재판 회부가 50여 명에 이르며 3·1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이 18명에 이른다. |
188 | 무명 6용사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연평면 | 탑 | 6·25전쟁 | 1950 | . | 1983-09-08 | 옹진군 연평리에 6·25전쟁 기간에 연평도 방어를 위해 산화한 6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무명6용사 탑 건립추진위원회는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83년 9월 8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옹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연평도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189 | 미 제2사단 6·25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파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01-01 | 한국전쟁기간동안 미제2보병사단 장병들이 자유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90 | 광복투사 이광훈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홍천군 | 두촌초등학교 | 비석 | 학생운동 | 1924 | 1987-11-14 | 이광훈(1924~1943)은 1938년 가을에 춘천고등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 회원이 검거된 후에는 독서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1년 3월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원후정(元厚貞)·김영근(金榮根)·박영한(朴永漢)·권혁민(權赫民)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춘천고등학교 교정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한 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된 뒤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3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89년 11월 16일 두촌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토록 하기 위하여 그의 모교인 두촌초등학교 교정에 ‘광복투사 이광훈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
191 | 3·1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너비 3m, 높이 3m | 1990-04-15 | 삼척초등학교 3·1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이 운동에 참여한 영령들의 조국독립 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1990년 4월 삼척 지역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의 주도하에 건립되었다. 1919년 4월 14일 삼척보통학교 학생 김달하가 재경 유학생 김순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고, 교사 김기덕의 지도 아래 심부윤·오원모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5일 오후 1시경 전교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인 교장 야마다는 일왕의 칙어를 옷에 감추고 뒷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일본 헌병들이 학교에 들어와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일로 학생 94명이 훈계처분을 받았다. |
192 | 학도의용군 파주지대 6·25동란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2-10-24 |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한 한국전쟁은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총칼에 짓밟히고 우리군은 남으로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마지막 목숨 줄인 낙동강 교두보를 설치하면서 100만 학도들은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파주시 학생들은 1950년 12월 16일 보병 제1시단 15연대 1대대에 편입하여 적과 맞서 싸웠으며 그분들의 조국애와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참전비를 건립하였습니다. |
193 | 월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월남참전유공자회 파주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8-04-18 | 파주시 장곡리 체육공원 내에 1998년 파주시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파주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유공자회 파주시 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4월 18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파주시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
194 | 창의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당진시 | 당진군(대호지면) | 사당 | 3·1운동 | 1919 | 1991-05-01 | 창의사는 대호지 4·4만세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가 제창이 있는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 선창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 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투석전으로 대응하며 천의 왜경주재소가 파괴되고 많은 일경들이 생포 구타되었으나, 4월 5일 출동한 일본 군경과 충돌, 사상자 5명 발생, 구속 200여명을 넘었다. 이 운동으로 현장 학살된 분이 송봉운 등 3명, 옥중에서 고문치사 당한분이 이달준, 김도일 등 3명, 수형인이 5년에서 8월까지 37명, 태형 90도 이상이 90여명에 이르는 치열한 만세운동으로 인근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
195 | 충의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예산군 | 충의사관리사무소 | 기념관 | 의열투쟁 | 1908 | 1985-06-01 | 민족의 독립이라는 꿈 하나로 목숨까지 바쳤던 매헌 윤봉길의사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이해 건립되었으며, 윤봉길의사의 유품인 보물 제568-2호, 3호 등 윤의사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근에는 윤의사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 윤의사가 태어나 4세 때깢까지 살았던 생가(광현당), 중국으로 망명 전인 23세까지 살던 성장가(저한당), 농촌부흥운동과 문맹퇴지를 위해 힘썼던 부흥원 등이 자리 잡고 있음 | |
196 | 면암최익현선생동상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모덕사관리사무소 | 동상 | 의병운동 | 1833 | 1973-01-01 | 최익현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14세 때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고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당대의 권력가인 대원군의 주요 정책인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의 혁파, 당백전의 폐지, 사대문 문세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해 대원군 일파의 비난을 받았으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 궐리사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900명에 이르렀으나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 진위대의 포위 공격을 받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쓰시마 섬[대마도]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에 감금되었는데 그곳에서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동상은 지난 1973년 12월 선생의 충의를 기리고 애국사상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민의 십시일반 모금해 현 위치에 건립됐으나 이 동상은 지난달 선생의 위패를 모신 목면 송암리 ‘모덕사’로 옮기고, 기존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동상을 제작해 다시 세웠다. 새 동상은 높이 7.2m의 청동상으로 동상의 좌대는 칠갑산을 상징하는 7각형으로 만들어졌다. | |
197 | 홍동3·1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7-24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홍동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72-03-03 | 1919년 3월 5일 밤, 신기리 거주 이제경, 조우식 등이 중심이 되어 마을주민들이 꽃동산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 일본경찰의 총탄에 이희도, 한명교 등이 사망하고 이석만, 안중호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후 신기리 주민들은 일경의 탄압 대상이 되어 13명이 투옥되기도 했다. 홍동노인회는 1972년 3월 3일 홍성군 홍동면 운월리를 건립하여 1919년 3월 당시 홍동3·1운동에 참여한 애국선열의 충정을 기렸다. | |
198 | 대한의사 이건석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황간역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52 | 0 | 1963-11-10 | 이건석은 1852년 경상북도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결혼 후 서울로 올라온 이건석은 유생의 신분으로 을미사변과 황제폐위 음모 사건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러일전쟁 이후로는 자강의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아울러 일제의 보호국화 책동에 맞서 13도유약소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항의문을 전달하고 일진회의 선언서를 반박하는 변명서를 올렸다. 고종의 회유에도 상소 운동을 계속하던 이건석은 1904년 11월 17일 새벽 일본군에 의해 상소의 주모자로 다른 네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건석은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상소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1906년 5월 10일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영동군의 황간역 앞에 ‘대한의사 이건석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
199 | 쌀안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미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6-03-3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미원면 쌀안장터에서 신경구·이용실 등의 주도로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를 연행하자 이용실·윤인보·이성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청주에서 일본군 지원대까지 출동하여 발포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 때 이병선·장일환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최봉원은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순구(金舜九, 1867~1919), 김재형(金在衡, 1890~1966), 김진환(金振煥, 1879~1934), 서정렬(徐正烈, 1882~1944), 성규원(成奎垣, 1862~1927), 신경구(申敬求, 1887~1948), 신성휴(申聖休, 1891~1955), 신정식(申鼎植, 1869~미상), 신학구(申學求, 1877~1968), 오교선(吳敎善, 1883~1948), 윤인보(尹仁甫, 1878~1951), 이병선(李秉善, 1882~1919), 이성호(李聖浩, 1873~1943), 이수란(李水蘭, 1862~1926), 이용실(李容實, 1878~1964), 장일환(張一煥, 1882~1919), 정무섭(鄭武燮, 1886~1960), 최봉원(崔鳳源, 1879~미상) 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6년 3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
200 | 이소응선생 창의 숭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제천시 | 광복회충북북부연합지회 | 비석 | 의병운동 | 1861 | - | 1989-01-01 | 제천에서 창의한 이소응 의병장의 창의 숭모비. 이소응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서 1896년 1월 강원도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개화파의 선봉인 강원도 관찰사를 처단하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가평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소응 의병진은 제천의 유인석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이소응은 제천 백운면 애련리로 이거하고 제천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유인석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교포들에게 충효·의열의 정신을 함양시켜 의병을 일으키고, 1909년 청풍면 장선리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피검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국내에서 투쟁이 어려워지자 1911년 요동지역으로 들어가 순국할 순간까지 항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9년 1월 1일 대한노인회 제천시지회 백운면분회에서는 이소응 의병장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201 | 박영준의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칠암마을이장 | 비석 | 3·1운동 | 1885 | 0 | 1985-12-05 | 부산 동래 사람으로 기장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 경남 동래군 기장면 장 날에 모인 군중과 동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11일 하오 7시경에는 다시 일광면 이천리에서 주민 5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은 후 동년 6월 28일 대구 복심법원 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감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58세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202 | 충혼탑(화천군)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사내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1951 | 1981-06-25 | 이 충혼탑은 6·25한국 전쟁 당시 국군제6사단, 미국군 987자주포 중대 제2로케트 중대, 영국군부대가 중공군 제20군 및 제40군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보병 제27사단과 사내면 주민들의 뜻을 모아 1981년 6월 25일 건립하였다. | |
203 | 박재혁의사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부산시설공단 어린이대공원사업소 | 동상 | 의열투쟁 | 1895 | 0 | 1998-05-12 | 박재혁은 1895년 5월 17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반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 오택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1915년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고서를 파는 중국인으로 가장한 박재혁은 부산 경찰서에서 부산경찰서서장 하시모토를 향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을 던졌다.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 고 결심한 뒤 단식을 하여 함구하다 9일이 지난 후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
204 | 외솔 최현배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시 남부도서관 | 동상 | 문화운동 | 1894 | 1990-06-01 |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 |
205 | 충현비(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2-05-12 | 동부전선에서 공산역도와 싸우다 쓰러진 장병의 명복을 빌며 그 뜻을 만세에 빛내고저 이곳에 비를 세우다. 서기 1962년 5월 12일 제3군단장 육군중장 최창언 |
206 | 국군용사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가덕도동행정복지센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2-06-05 | 부산 천성동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25명의 이 고장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국군용사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부산 강서구청은 충혼비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1992년 6월 5일 현충일에 충혼비를 준공하여 이곳 출신 호국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강서 청년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수호신이 되었다. 강서구청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07 | 강릉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공군제3155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3 | 기단 0.6m, 높이 11m | 1982-04-16 | 강릉시는 1982년 4월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산45-49(제10전투비행전대 기지터)에 6·25 당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제10전투비행단 창설 조종사 108명의 넋을 기리고 후세에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제10전투비행단은 19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대를 모체로 하여 창설되어 적 후방 차단작전 5, 000회와 공지협동작전 2, 851회를 통해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 전투비행단 소속 108명의 조종사는 7, 851회 출격하여 승호리 철교폭파 작전, 평양 대폭격 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3년 비행단으로 격상된 이후 지금의 수원기지로 이전하였다. |
208 |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달성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의병운동 | 1854 | 1962-10-03 | 허위는 1854년 경북 구미에서 출생하여 영희정 참봉, 평리원 재판장을 거쳐, 의정부 참판, 비서원승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통분하여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이인영, 신돌석, 이강년, 문태서,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전국연합 의병부대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고,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경기·황해도)으로 선발대 300여명을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공격하려는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후속부대와의 연결 미비와 무기의 열세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선생은 1908년 5월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는 1962년 10월 건립된 비로 대구 달성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다. | |
209 | 고 이인호 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03-09-15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교육사령부 | 동상 | 기타 | 1966 | 0 | 1967-01-01 | 경남 진해시 경화동 기초군사학교 영내에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이인호 소령을 기념하기 위해 해군교육사령부에서 1967년 3월 22일 이 동상을 세웠다. 이인호 소령은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로서 1966년 8월 13일 베트남전선 투이호아 지구 해풍작전시 베트콩으로부터 입수한 첩보를 확인코자 1개 소대를 직접 인솔하고 베트콩이 잠거하는 동굴을 탐색하던 중 적이 던진 수류탄 1발을 가슴으로 막아 장렬하게 산화하여 위기에 처한 부하들의 생명을 구했다. 국군의 영웅인 이인호 소령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동상건립위원회를 설치, 해군과 해병장교단 및 각계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만리이역 월남 동굴에서 가슴에 수류탄을 안고 산화하던 날 하늘도 무심치 ᅟᅡᆭ아 비를 내렸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님도 즐거이 바치고 아아 스스로 장렬한 폭사를 하였다. 대륜은 충효라 스스로 속이지 않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 가르쳤거늘 그대 아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했구나. 그대 뿌린 씨가 천배 만배 될지니 나라도 사랑 먹고 자라기 때문이라 흐르는 눈물이 오히려 그대에게 부끄럽구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아들의 통곡하는 사연을 참아 못들을레라. 천장을 향하여 나는 눈만 깜박이고 있다.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흩어져 이슬이 되었거니 타는 불이여 이 가슴마저 태웠다고 그대를 지아비라 아빠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전우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아 용사여 조국의 영웅이여 고이 잠들라. 그대를 제자라 형제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동포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아 용사여 대한의 샛별이여 길이 복되라. |
210 | 이봉희지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성주군 | 이덕생 | 비석 | 3·1운동 | 1868 | 1967-03-28 |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 |
211 | 충혼탑(양양군)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양양군 | 양양군 | 탑 | 6·25전쟁 | 1950 | 탑 8.85m | 1966-06-06 | 양양군 현산공원 내에 3·1운동과 6·25전쟁 전후 순국 및 전사한 315위(항일투사 22위, 반공투사 106위, 전몰군경 187위)의 양양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양양군은 이곳 출신 순국선열과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6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고, 1989년 6월 1일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양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북한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사람들이 3·1운동과 6·25전쟁 전후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양양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12 | 대전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0 | 대전광역시 중구 | 공원관리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12-20 | 대전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 위에 대전에서 벌어진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교통부에서 1981년 12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7월 5일 오산전투 이후 경부선을 따라 지연작전을 전개하여 오던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방어선을 전개하면서 3.5인치 로켓포를 최초로 사용하여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당시 윌리엄 F.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 딘 소장은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고, 그후 인민군 총좌인 이학구와 포로교환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낙동강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자 미 제24사단은 지난날 쓰라린 패배를 설욕하려고 최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대전에 진을 치고 있던 북한군을 분쇄하고 9월 28일 대전을 탈환하게 되었다. 대전 지구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영령 등을 추모하고 혈맹의 우의를 길이 전하기 위해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213 |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동구 | 전남여자고등학교 | 비석 | 학생운동 | 1929 | 1959-01-01 | 1929년 10월 30일 나주-광주 통학열차에서 발생한 일본인 중학생의 광주여고보생 희롱사건으로 촉발된 한·일 학생간의 난투극 처리에서 일본경찰이 한국인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처벌함으로써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1월 3일 광주고보와 광주농고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광주 시내에서 “민족차별 철폐, 식민지교육 중지”라는 구호와 함께, 용감히 일제를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11월 12일에도 광주 일원 학교에 학생 궐기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배포되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광주여고보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학도기념비건립기성회가 구성되어 전국 학생들의 성금을 모금하여 당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였던 전남여자고등학교에 이 비를 1959년 11월 3일 건립하였다 | |
214 | 의사 이산 윤승현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나주시 | 남평초등학교 | 비석 | 학생운동 | 1912 | 1989-08-01 |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 전남노농협의회 결성 | |
215 | 영암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4-04-10 | 영암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을 기리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1919년 3월 11일에 영암에서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3월 20일에도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영암 읍내에 거주하는 조극환은 정학순·최민섭·박규상·조병식·최한오 등과 함께 4월 10일 장날을 기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나팔소리를 신호로 구림리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박규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구림보통학교를 경유하여 읍내로 진격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강제 진압을 받았다. 이 날의 만세시위로 학생, 유지 등 3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중 20여 명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박규상은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귀가하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84년 4월 10일 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는 영암 3·1독립운동에 참여한 35인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216 | 독립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정명여자중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3m | 1985-12-3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양병진(楊炳震) 등의 사전 준비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강석봉(姜錫奉, 1890~1956), 박복영(朴福永, 1890~1973), 박상열(朴相烈, 1897~1981), 서상봉(徐相鳳, 1870~1927), 서화일(徐化壹, 1881~1936)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목포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12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
217 | 기미 3.1의거 열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비석 | 학생운동 | 1919 | 1.4m | 1983-03-01 | 1920년 3월 26일 전남 함평에서 모순기, 조사현 등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사현은 전국 각지에서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한다는 것을 듣고, 함평에서도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3월 19일 함평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송대호, 정기연 등에게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고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송대호 등은 모순기에게 그 계획을 알렸고, 그는 흔쾌히 찬동하여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수 십장을 만들어 기숙사에 숨겨 두었다. 거사 당일 졸업식 거행 후 송대호 등은 등교한 학생 등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는 학생 30여 명을 이끌고 함평시장에 이르러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모여든 군중들은 함평읍 내교리에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함평군은 1983년 3월 1일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06번지(함평공원내)에 1920년 3월 26일 함평보통학교 졸업식 때 만세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과 함평군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218 | 서강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장욱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41 | 사당, 내상문, 외상문 | 1936-11-01 |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219 | 옥구 농민항일항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비석 | 사회운동 | 1927 | 2.3M | 1995-06-17 |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여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관리인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하지만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95년 6월 17일 군산시 서수면민들이 뜻을 모아 항일항쟁의 발원지인 임피중학교 앞뜰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항일투쟁 34명의 명단을 각인하였다. |
220 | 백산서원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익산시 | 정인원 | 기타 | 한말구국운동 | 1850 | 정당, 내삼문, 외삼문, 통문, 세한당, 출입문, 화장실(총 7채) | 1915-01-01 | 전라북도 익산(益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이웃을 돌보는 성품이 있었으며 무술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아 이름이 높았다. 1876년 무과(武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親軍別營哨官) 겸 선전관(宣傳官) 충무위좌부장(忠武衛左部將)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등을 역임하고 훈련원 첨정(僉正)에 이르러 일본과의 강화 및 관리의 부패를 통탄하여 사직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역문(討逆文) 등을 지어 전라관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보내면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능히 우리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은 가히 다 말할 수 없으니 죽어서 마땅히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으리라」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목매어 자결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221 | 의병항쟁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시 | 탑 | 의병운동 | 1909 | 1977-01-11 | 1909년 창의한 제주의병의 항쟁을 기리는 기념탑.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고사훈 등 10 명의 구국지사들은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려하자 1909년 2월 25일 의병을 창의하여 봉기할 것을 발의하고 창의격문과 사발통문을 띄워 3월 3일을 기해 관덕정 광장에 집결하였다. 일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결의했으나 의병모집 운동을 전개하는 단계에서 비밀이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고사훈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만석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77년 1월 11일에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가 주관하고 제주도민의 협력을 받아 사라봉 공원에 모충사를 건립하고 그 중앙에 제주의병의 항일정신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 | |
222 | 우리고장 유공자 기념비(부리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부리면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6-01 | 부리면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2년 6월 1일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131-4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223 |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시 | 비석 | 기타 | 1884 | 1977-01-11 | 조봉호(趙鳳鎬, 1884~1920)는 제주 성내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온 독립희생회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모의하여 독립희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하고 임정헌장과 해외 통신문 등을 유인하며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려다가 1919년 7월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1919년 11월 12일 징역 1년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에서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77년 1월 11일 이 비를 세웠다. | |
224 | 의열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용산구청(공원녹지과) | 사당 | 기타 | 1990 | 1990-11-01 | 효창원 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7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광복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일본에서 순국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와 중국에서 순국한 이동녕, 차리석의 유해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의사, 그리고 국내에서 서거한 조성환 · 김구 등 7명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모신 효창공원 묘역을 만들었다. 1990년 11월 1일에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는 7명의 순국선열의 영정을 모신 합동 사당인 의열사를 건립하였다. 1993년 이래 매년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3일에 7위 합동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
225 |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광주시 |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 | 동상 | 해외운동 | 1894 | 0 | 2000-07-13 |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이다. 1919년 김시학(金時學)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한 후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서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 당시 상해는 지리적으로 동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있고, 또 일제(日帝)의 횡포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 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시대, 신정세에 발 맞추어 활동하는 신한청년당원들의 활동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호(趙東祜)·신규식(申圭植)·선우 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0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議員)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을 초안 낭독하여 가결, 채택케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의정원 제6차 회의인 1919년 9월 6일 오후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통과가 있은 다음, 다시 정부 개조안 토의가 있었다. 정부 개조안의 내용은 한성정부의 기구와 각원을 그대로 통합 정부의 기구와 각원으로 하되 수반인 집정관 총재의 칭호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기구에 있어서나 대통령 칭호에 있어서는 이미 통과된 헌법 제3장과 제5장에 의하여 결정을 본 것이니 여기서는 다만 인원의 선임 절차가 남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국무원의 선임은 대통령의 직권에 속하는 것인 즉 임시의정원에서 할 일은 헌법 제21조 5항에 의하는 임시 대통령의 선거와 제15조 4항에 의하는 국무원 임명에 대한 동의뿐인 것이었다. 따라서 먼저 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이 아직 발포되지 않았으니 대통령의 선거 방법을 새 헌법 중 임시대통령 선거 규정에 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이었다. 만일 새 헌법에 의하여 임시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한다면 현정부는 이미 소멸된 것이며, 헌법의 발포권도 새로 선거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라고까지 논의가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무차장인 신익희는 현정부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초창기이니 만큼 통상적인 준례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장차 발포되리라 믿는 그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거함이 부득이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투표케 되었고 이승만(李承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1919년 8월 그는 다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20년 9월에는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 초에 개최된 태평양회의는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의 실패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동태가 파탄적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운동이 고조되었으며, 같은 해 2월 8일부터 개막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3월 11일에 그를 비롯한 5명의 의원은 국민대표회의는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시국 수습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부결되었고 국무원은 총사퇴하여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따라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의정원이나 국무원에서는 대통령에게 전보를 쳐서 속히 상해로 건너와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통령은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여 정국은 더욱 혼미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법정연구회(法政硏究會),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이 조직되어 사태수습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그는 시사책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각처에서는 다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의 난립은 파쟁과 의견 충돌만을 야기할 뿐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광복운동에는 기여함이 적었다. 이리하여 독립지사들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승적(大乘的) 견지에서 통일된 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임정」 기치 하에 단결하였다. 그 첫 시도가 유일독립당(唯一獨立黨)의 조직이었다.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또다시 통합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들 대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다가 마침내는 단일당의 창립에 합의하여 1935년 7월 5일에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다시 분열되어 1937년에 그는 김인철(金仁喆)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투쟁동맹은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과 합하여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며 우익진영에서는 1937년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그 후, 1940년 5월에 광복진선에서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군을 창건하였으며, 민족전선 측은 동시에 따로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는 양대 진영으로 완전히 분립되었으나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양분된 광복운동에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절박한 현실은 사상적 대립에 앞서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 의용대는 광복군의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고 민족전선의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에 들어와 독립이 될 때까지 항일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1942년 6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23일에 외교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이연호(李然浩)와 함께 연구 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朴贊翊)·최동오(崔東旿)·김성숙(金星淑)·유 림(柳林)을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그 진용을 보강하니 여기서 중대시국에 임시정부의 외교활동도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를 보게 되니 여기서 선전 업무는 좀더 강력히 집행할 수 있었다. 즉 이때 새로 설치된 선전부에는 총무·편집·발행의 3과와 함께 선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할하여 행하게 되었는데, 초대 선전부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유 림(柳林) 등과 함께 선전계획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즉 그는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226 | 충의영당 및 춘산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화순군 | 문태주 | 사당 | 의병운동 | 1906 | 200 | 1927 | 면암 최익현 의진에 입대하여 활약하신 애국지사 문달환 선생을 추모하기 위함 |
227 | 위령탑(보령시) | 국가수호 | 2003-11-27 | 충청남도 보령시 | 보령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1990-10-29 | 6.25전쟁 당시 보령경찰서 주산지서에서 북한군 1개 중대와 교전 중 전사한 16명의 경찰관을 추모하기 위해 1990년에 건립됐으며, 해마다 자유수호희생자 합동위령제를 거행하고 있음 | |
228 | 이근석장군 동상 | 국가수호 | 2003-02-14 | 대구광역시 동구 | 공군3262부대 | 동상 | 6·25전쟁 | 1950 | 1953-10-02 | 대구시 동구 검사동 제11공군전투비행단 내에 6·25전쟁시 시흥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근석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1953년 10월 2일 동상을 세웠다. 이근석 장군은 평남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끝없는 하늘에 대한 동경과 함께 비행사에 대한 꿈을 품어왔는데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있는 구마다니 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천재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조종사로서의 재능은 그를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조종술은 교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담당교관은 그를 비행술의 천재라 칭할 정도였다. 1934년 만주 사변에서 구마다니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요시오카 전투비행부대로 배속되었는데, 당시 요시오카 전투비행부대는 육군항공부대 중에서도 최정예의 조종사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첫 출격부터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린 그의 조종술은 부대의 정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후 공군 창설에 주력해 최용덕, 김정렬,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영환 등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이 과정에 참여하여 마침내 1946년 4월 1일 최초의 항공부대가 조선경비대 내에 창설되었다. 1948년 수색의 조선경비대 보병학교를 거쳐 5월 14일 태능의 경비사관학교를 간부후보생 1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명된 그는 육군항공 총감부와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서 비행단장으로 근무한 후 1949년 7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으로부터 공군이 독립됨과 동시에 이근석은 새로이 창설된 공군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공군의 간성을 육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1950년 5월 공군 비행단장에 임명되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F-51전투기 인수단장의 자격으로 도일(渡日)하여 미 극동공군이 양도한 10대의 최신 전투기를 성공적으로 인수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F-51기를 인수하여 귀국해 1950년 7월 3일 작전명령 제25호에 의거 대한민국 공군 사상 최초의 전투기 출격을 감행하였으며, 7월 4일에도 작전수행을 위해 출격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시흥지역에서 남하중인 적 탱크를 공격 중 적의 포탄이 장군의 비행기에 명중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사후 1951년 9월 19일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공군 대령에서 공군 준장으로 특진이 추서되었다. | |
229 | 다부동 전적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한국자유총연맹경북도지부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1981-11-30 |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대구 사수의 보루인 다부동 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81년 11월 30일 기념관을 건립했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한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에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 9월 공세를 저지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 교전하여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과 지천 도덕산 일대에서 북한군 2개사단(제3, 13사단)과 23일간의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북한군 9월 공세를 저지하고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 |
230 | 충혼탑(김천시)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김천시 | 김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1962-11-10 | 김천 자산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이종호 소령 등 1.787위의 김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김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2년 11월 10일 준공하였고, 2010년 10월 20일 충혼탑 정비사업으로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김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3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김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31 | 경찰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문경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49 | 1954-12-25 | 문경경찰서장이 1954년 12월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산 124-2(59번도로변)에 공비 토벌에 참전한 이무부 문경경찰서장 외 14명의 공적을 기리고 그들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경찰전공비를 건립하였다. 1949년 9월 16일 새벽 동로지서가 공비의 습격으로 포위당하여 전멸상태에 있다는 연락을 접하고 당시 문경경찰서장 이무부 등 28명이 출동하여 노루목 고개에서 공비들과 기습을 받아 교전하다가 경찰서장과 경관 11명, 동로면장과 민간인 2명이 전사하고 경관 4명이 부상당하였다. | |
232 | 포항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9-12-30 |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에 포항지구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한 국군과 학도의용군을 추모하기 위해 국제관광공사에서 1979년 12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8, 9월은 피아간 낙동강전선의 공방전이 가장 치열했다. 북한군은 제2군단의 제5, 제12사단 및 366부대와 국군 및 미 3개 특수임무부대, 제7함대 일부, 제5공군 등이 상호 대치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포항지역을 포함한 낙동강전선에서 용전분투하여 방어함으로써 결국은 북진의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치열하던 1950년 8월 9일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과 12사단 및 366부대가 경주, 울산, 부산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포항을 점령했을 때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 독립 17연대 민부대와 경찰, 학도의용군 그리고 미군 특수임무부대와 합동으로 44일간의 혈전을 감행한 결과 동해안의 요충지인 이 지역을 탈환한 전투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동의 용향 여기 형산강변의 격전지 충용한 국군 제3사단 및 지원부대의 장병들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44일간의 혈전을 치르어 북한군 2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끝내 물리치고 말았으니 이 터전을 지킴에 있어서는 호국의 생명선이요, 쳐나감에 있어서는 북진의 시발점이었다. | |
233 | 남해 3.1독립운동 발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상남도 남해군 | 남해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12-23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2일 이예모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와 4월 3일 남양리·금음리·문창리의 노상에서 이예모·정순조·정학순·윤주승 등의 사전 준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남해읍으로 향했다. 이어서 남해읍 장날인 4일 1천여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군청, 우체국, 주재소 등에 몰려가 관리들에게도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시위에서 강한문(姜漢文, 1871~1926), 김희조(金熙祚, 1871~1930), 원복생(元福生, 1892~1937), 유봉승(柳琫承, 1901~1956), 유찬숙(柳贊淑, 1891~1926), 윤주순(尹柱舜, 1896~1964), 이예모(李禮模, 1883~1954), 장학순(張學順, 1887~1952), 정몽호(鄭夢虎, 1898~1984), 정순조(鄭順祚, 1885~1962), 정용교(鄭鎔交, 1885~1948), 정익주(鄭益周, 1896~1975), 정임춘(鄭任春, 1890~1956), 정재모(鄭栽模, 1897~1950), 정학순(鄭學淳, 1897~1920), 정흥조(鄭興祚, 1889~1964), 하상근(河祥根, 1889~1953), 하준호(河準互, 1887~1942)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해군수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12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
234 | 전몰군경 충혼비(온정면)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온정면 | 비석 | 기타 | 1957 | 1957-01-01 | 울진군 소태리에 1957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온정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재향군인회 온전면 분회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7년 1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온정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35 | 충혼비 3종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옥천군 | 군서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67-06-06 | 625전쟁 당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비, 반공투사 김영원 외 7인의 위훈을 기리는 반공투사위령비, 3.1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순구 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김공순구순절비 총3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
236 | 연호 이의사 사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거창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54 | 1995-10-22 | 일제 강제 병탄에 항거하여 자진 순국한 이주환의 사적비.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없는데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며 세금 납부를 거부해 헝병대로 연행되었다. 이곳에서 강제 날인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자귀로 자기 엄지를 절단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자 주상면 면사무소에 가서 자신의 호적을 찢어버리고 거창읍 침류정에서 절세시 1편을 남기고 자진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년 10월 22일 이주환의사 순절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이주환 의사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237 | 충혼비(시종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1식 | 1963-05-01 | 영암 내동리에 1963년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36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시종면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3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시종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시종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38 | 대전 3.1의거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기념관 1, 생가 1 | 2001-1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2일 청하장날 윤영복·오용간 등의 사전 준비로 장터에 수백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김윤선(金允先, 1865~1932), 김종만(金鍾滿, 1887~1967), 김진봉(金鎭奉, 1898~1959), 안덕환(安德煥, 1866~1924), 안도용(安道用, 1893~1921), 안상종(安常鍾, 1893~1925), 윤영복(尹永福, 1896~1943), 안천종(安千鍾, 1870~1940), 안화종(安和鍾, 1888~1965), 오용간(吳用干, 1869~1941), 이명만(李命滿, 1900~1986), 이영섭(李泳燮, 1898~1960), 이준석(李俊石, 1896~1955), 정재선(鄭在先, 1898~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포항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11월 1일 이 기념관을 세웠다. |
239 | 충혼탑(남양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남양면 | 탑 | 6·25전쟁 | 1950 | 4.6m | 1965-06-06 | 남양 한마음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남양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양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남양면민의 뜻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5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1998년 6월 6일 현충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양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과 빨치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작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양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40 | 주산3·1운동만세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보령시 | 보령시 | 비석 | 3·1운동 | 1919 | 2001-03-01 | 주산 3·1운동 만세 기념비는 2001년 3월 1일 보령시 주산면 면사무소 광장에 주산 3·1운동에 참여한 보령 출신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1919년 3월 16일 밤을 기하여 우리 고장 출신 18의사가 주렴산 국수봉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 봉화를 올리며 징을 치고, 독립 선언문에 혈서하여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했던 만세운동이 주렴산기미만세운동이다. 주렴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웅천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출동한 왜경에 의하여 저지되었고, 주모자급은 거의 체포되어 태형과 옥고를 치르고 온갖 수모를 당했다. | |
241 | 충용비(영광군)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남도 영광군 | 법성면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1.2x1.2x2.1m | 1950-01-01 | 이 비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법성면 등 각 면의 수복을 위해 전라남도경찰국에 무장지원을 요청하려고 소대원들을 데리고 광주로 가던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지사의 충용을 기리기 위해 지역유지와 친지들이 1951년 5월 독바우 삼거리에 세웠다가 1981년 6월 이곳으로 이설함. |
242 | 항일운동 기념탑 (마산) | 독립운동 | 2004-10-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마산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44 | 0 | 1991-03-01 | 일본 제국주의가 이땅에서 마지막 발악을 할 때 재학생의 4할이 조선사람이었던 마산공립중학교에서도 드디어 항일이 불씨가 피어 올랐다. 민족의 해방을 대비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고 연합군에게 일제의 군사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1943년 5기 김희구, 조우식 동문이 경남학생건국회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악명높았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인천형무소에서 복역중 김희구 동문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고 조우식 동문은 조국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리고, 1944년에는 7기 김학득, 강순중과 8기 박기병, 박후식, 감영재, 조이섭, 강정중 동문은 해외 독립운동 상황과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가능한 시기에 외국에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마중독립단을 결사하여 활동하다 그해 7월에 발각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3개월 동안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해방으로 석방되었다. 민족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기개와 희생이야말로 민족의 장래를 지탱하는 주춧돌이요 기둥이다. 몸을 던져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동문들의 투철한 민족애가 이곳을 거쳐 가는 뒷사람들에게 영원히 이어지기 바라면서 그 이름을 새겨 모교의 뜰에 탑을 세우다 |
243 | 월남 참전 기념탑(제천)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제천시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제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 | 2000-01-01 | 제천시 하소동에 2000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 261명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제천월남참전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탑을 2000년 6월 24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제천시 출신 장병우·전원준(맹호부대), 고도순·도종희((백마부대), 강병원·홍순규(청룡부대), 강용구·이석재(십자성부대), 박장수·조정현(비둘기부대) 등 261명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244 | 순국 충혼비(부남) | 국가수호 | 2003-01-28 | 전라북도 무주군 | 부남면 총무계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8-12-29 | 무주군 대소리에 1998년 6·25전쟁 기간에 덕유산, 조항산 등지의 공비토벌과정에서 산화한 군경, 희생된 민간인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부남면은 사종율, 김병두, 양종태, 김상균, 강남식 등 이곳 출신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충혼비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12월 29일 준공하였다. 무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45 | 독립유공자 의사 김찬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 개성김씨북청파문중종원(김원탁) | 비석 | 해외운동 | 1894 | 0 | 1985-09-01 | 김찬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후 함경남도 혜산진의 대안인 장백현에서 이희삼·이동백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비단을 조직하여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1월에는 이동백의 집에서 장백현지단을 결성하고 총무장이 되었다. 이어 농장을 경영하면서 많은 항일투사를 양성하였고, 국경지대의 일본경찰주재소와 수비대를 습격하여, 감금되어 있던 독립군 13명을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장백현 부근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군비단을 비롯한 태극단·광복단·대진단 및 흥업단 지부의 대표 50여명이 장백현에 있는 대진단지부 사무소에 모여 압록강연안 각 독립단체의 연락과 과감한 행동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0월에는 연합회를 중심으로 각 단체를 병합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지휘·명령에 따르는 통일기관으로 대한국민단을 결성하였는데, 이 때 군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동삼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246 | 무공수훈자 전공비(강구)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영덕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98 | 1998-01-01 | 영덕군은 1998년 경북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삼사해상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영덕군 출신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분들의 거룩한 충성심과 전공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
247 | 전사경찰추모비 | 국가수호 | 2018-08-08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7-10-19 | 1950. 6. 25 북한 공산군이 불법 남침하여 전면 전쟁을 일으켰으나 한국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38선 이북으로 패주함에 따라 인제경찰서장 경감 최동규 외 56명이 수복된 인제지역의 치안업무를 수행하고자 10.19. 11:30 관대리(38대교에서 인제읍 방향 1.5㎞ 소양강내)를 지나던 중 북한 공산군의 기습을 받아 양춘길 경사(당시 계급 순경) 등 8명이 전사하였다.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 산화하신 순국선열들의 명복을 빌고 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며 영령들의 넋을 길이 기리고자 한다. | |
248 | 단정 배중세 지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 창원문화원 | 비석 | 의열투쟁 | 1893 | 0 | 1999-01-01 | 배중세는 1893년 지금의 창원시 토월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창원시 진전면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선봉장으로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일로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한 배중세는 김원봉, 양건호, 윤세주, 한봉건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듬해 배중세는 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경남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돕고, 양건호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의 정보를 캐다 1920년 8월에 체포, 1921년 5월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배중세는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세 번의 옥고를 겪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1월에 또 다시 검거되어 거듭 당하는 고문과 옥고에 1944년 1월 2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77년 배중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11월 창원시와 창원문화원, 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 건립위원회는 배 지사의 이런 행적을 기리고자 상남공원에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
249 | 의사 하동정공 성연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정길채 | 비석 | 3·1운동 | 1923 | 탑 | 1995-08-01 | 광양출신 독립운동가 정성련의 3·1독립운동 기념비.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전파되어가자 1919년 3월 26일, 정성련은 자택에서 손수 태극기 3개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3월 27일 광양군 광양면 읍내 장날을 기하여 시장으로 나아가 국기를 대나무에 매어달고 흔들며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정성련은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5년 8월 1일, 광양향교는 정성련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웠다. |
250 | 유엔군 초전기념관 | 국가수호 | 2013-05-13 | 경기도 오산시 | 대한민국상이군경회오산사지회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0 | 2013-03-11 |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견된 스미스특수임무부대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건립됨 |
251 | 하늘 빛 공원 추모비(청주시) | 국가수호 | 2015-10-14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17전투비행단 | 조형물 | 기타 | 2015-04-10 | 조국의 영공수호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고,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조국수호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건립됨 | ||
252 | 6.25참전 학도의용군 호국영웅 명비탑(포항해양고) | 국가수호 | 2016-11-23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해양과학고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5-12-22 | 6.25전쟁에 참전한 포항출신의 학도병들의 구국의 일념으로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한 그 숭고한 희생정신과 뜻을 기리고자 영일만이 내려다 보이는 모교에 이 탑을 건립함으로써 그 숭고한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하였다. | |
253 | 충혼비(정천면)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정천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06-01 | 진안군 봉학리에 6·25전쟁 기간에 조국과 향토를 지키다 희생된 ‘대한비밀결사대’ 64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정천면에서는 이 지역에서 육신을 포탄삼아 용감하게 산화한 결사대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1년 6월 1일 충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정천면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죽음으로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대한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용감히 싸우다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쳤다. 정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254 | 한지 김상옥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시 종로구청 녹지과(마로니에공원 관리사무소) | 동상 | 의열투쟁 | 1890 | - | 1998-05-28 | 1923년 1월 12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쪽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부,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한지 김상옥 의사를 추모 |
255 | 고령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18-08-08 | 경상북도 고령군 | 경북 고령군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1907 | 2015-12-02 | 국채보상운동은 자주권 회복을 위해서 벌였던 범국민적 캠페인으로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차관한 1300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으로, 고령지역에도 홍와 이두훈 선생을 중심으로 다수의 군민들이 참여한 운동으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기 위함 | |
256 | 독립지사 남상순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남상호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26 | 1985-05-01 | 남상순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다. 일본 대판중학교 야간에 재학 중이던 1941년 충성회를 조직하고, 1942년 12월까지 30여 차례의 모임을 갖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민중계몽과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본받아 항일정신을 길러갔다. 그러던 충성회의 활동이 발각됨으로써 1942년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다 8·15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257 | 갑종장교 호국탑 | 국가수호 | 2005-06-01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탑 | 기타 | 2004 | 2004-10-29 | 갑종장교단중앙회는 2004년 10월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75-15 육군보병학교 교정에 갑종장교 출신으로 6·25전쟁 및 베트남전, 대간첩작전 중 전사한 5, 341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이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의식을 후배 장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호국탑을 건립하였다. 갑종간부후보생 과정은 1950년 1월 육군보병학교에 신설돼 그해 363명이 갑종 1기로 임관한 것을 시작으로 1969년 8월 30일까지 230기 45, 424명의 장교가 배출됐다. 갑종장교들은 6·25전쟁과 베트남전, 국내 대간첩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 3명을 비롯해 5천여 명이 각종 무공훈장을 받았다. | |
258 | 백호 충혼탑 | 국가수호 | 2005-10-27 | 강원도 원주시 | 제36보병사단 | 탑 | 기타 | 1968 | 0 | 2005-04-20 | 육군 제36보병사단은 2005년 4월 20일 사단 창설 50주년을 맞아 울진·삼척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전사한 박경호 상병 등 전몰장병 12위를 추모하기 위해 강원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보병 제36사단 영내) 백호충혼탑을 건립하였다.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자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고 12월 28일 완료되었다. 휴전 이후 북한측의 최대 규모의 도발로 침투한 무장공비 중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측도 제36보병사단 장병들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20여 명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는 백호의 얼이 서린 곳, 영원히 사단과 함께하는 백호의 충혼이여! 위국헌신 군인 본분의 표상이 되리라.” |
259 | 연천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9-05-25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의병운동 | 1910 | 0 | 2008-07-15 | 연천의 의병운동은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서 강고한 의병투쟁을 벌였고, 특히 1905년 ~ 1910년의 시기에는 연천 출신이거나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의병장 및 지도층과 많은 의병부대들이 연천·삭녕·마전(현재 연천지역)일대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항일투쟁을 전개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로 전락하기 직전인 1910년을 전후로 무자비한 탄압 및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 일제의 폭압에도 마지막까지 항일 의병운동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으며, 1919년 3월 21일 백학면 두일리 장날에 모인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는 항일 의병운동의 전통을 발하던 연천의 항일 독립의지를 선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
260 | 무공수훈자 전공비(풍기읍) | 국가수호 | 2004-12-22 | 경상북도 영주시 | 박성서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11-17 | 무공수훈자회 영주시지회는 2003년 11월 17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376-6(광복공원 내)에 영주 출신으로 6·25전쟁, 베트남전 등에서 국가수호를 위해 위국 헌신한 무공수훈자 150명의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전공비에는 장군 20명과 무공수훈자회원 130명(충무 14, 화랑 104, 인헌 10, 삼일장 1, 광복장 1) 등 총 150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다. |
261 | 무공수훈자전공비(종천면) | 국가수호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무공수훈자회 서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2 | 2002-11-15 | 무공수훈자회 서천군지회는 2002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 종천면 화산리 323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토수호를 위해 그리고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서천군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
262 | 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7-10-18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소초면 | 비석 | 3·1운동 | 1919 | 2006-04-05 | 소초면의 만세운동은 4월 3일 강사문과 하영현의 장례 때 계획되었다. 항일의병 출신으로서 소초면 둔둔리에서 서당 훈도로 지내던 박영하는 평장리 신현철과 협의하여 4월 5일에 소초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4월 4일 신현철은 동생 신현성·유재경·김흥열을 시켜 면내의 의관리·장양리·평장리·교항리 등의 주민들에게 시위계획을 알렸다. 다만 수암리헌병주재소가 위치한 수암리는 제외시켰다. 4월 5일 소초면 주민 약 300여 명이 면사무소로 가는 부채고개에 모였다.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향하였고 면사무소에서 면장 남상철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수암리헌병주재소는 원주헌병분견소의 지원을 받아 각 마을을 조사하여 주도자인 신현철과 박영하 등을 체포하였다. | |
263 | 6.25참전,월남참전,무공수훈자기념비 | 국가수호 | 2004-05-08 | 서울특별시 금천구 | 금천구청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12 | 2003-09-05 | 금천구 출신으로 6.25참전 및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무공수훈자의 공훈과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264 | 거창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거창군 | 무공수훈자회거창군지회 | 비석 | 기타 | 1964~1973 | 0 | 2004-02-27 | 거창군 상림리 신시가지 책읽는 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거창 무공수훈자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거창군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2월 27일 전공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거창 젊은이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265 | 충혼탑(서산)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서산시 | 서산경찰서장 | 탑 | 6·25전쟁 | 1950 | 1983-06-01 | 서산시 읍내에 198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하거나 순직한 77위의 서산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서산경찰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3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서산 경찰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서산경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266 |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9-12-12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가로 3.8m, 세로 4.5m, 높이 2.2m | 2019-11-30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보훈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총동문회가 중심이 돼 '6.25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의 살신성인과 군인 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뜻에서 명비를 건립하였다. |
267 | 독립운동가 추산 정훈모 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경상북도 예천군 | 정지영 | 비석 | 해외운동 | 0 | 2019-10-12 |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4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이상룡(李相龍)독판의 참모로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계속해서 무장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38년 노령 아르하라(ARKHARA)로부터 삼강성(三江省) 가목사시(佳木斯市)로 귀환하던 중 일만(日滿)혼성군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268 | 전등사 - 강화의병전투지 | 독립운동 | 2013-07-22 | 인천광역시 강화군 | 대한불교조계종전등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0 | 1907-07-01 | 전등사는 이동휘와 이능권의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했던 장소이다. 구한국 지방 주둔 군대의 하나인 강화진위대 대장 출신 이동휘는 1907년 7월 김동수·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던 곳이다. 또 8월 2일에는 진위대원인 정기우, 지홍윤, 유명규, 김동수 등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협의를 했다. 이능권은 국정리 출신으로 서울 시위대 장교였으며 군대 해산 후 강화도에 낙향한 후 주민들을 모아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친일파 밀정 처단,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1908년 10월 하순 용산 지역에서 출병한 일본군과 정족산 전등사에서 일주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1908년 의병의 항전이 이어지자 일본군은 같은 해 10월 용산 주둔 일본군 6사단 예하의 13연대 70여 명의 정규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다. 10월 30일부터 31일 양일 간 일본군의 공세가 거셌지만 전등사의 이능권(李能權)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하여 승리하였다. |
269 | 낭산 김준연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2-11-12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군청 | 기념관 | 문화운동 | 1919 | 2012-07-17 | 김준연은 1895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나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대학예과 과정), 동경제국대학 대학원, 독일 베를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 영국 런던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해외특파원(조선일보 특파원)으로 1920년대의 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 특파원,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신간회 조직, 제3차 공산당 사건, 일장기 말살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에 참여, 8년 동안의 감옥 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 생활을 하였다. 8·15 해방이 되자 일제 당국은 정권 인수를 제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김준연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령하였다. 낭산 김준연선생 기념관은 2012년 전남 영암군과 ‘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사업회’을 주축으로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생가터에 설립하였다. | |
270 |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북도 김제시 | 곽규인 | 비석 | 3·1운동 | 1919 | 1980-1-1 | 곽경렬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915년 어린 나이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일본 헌병대 무기 탈취, 친일 부호 처단, 군자금 모집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1916년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1918년 친일파 이종국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다. 1920년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6년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 하였다. | |
271 | 광양시 독립유공자 추모탑 | 독립운동 | 2009-05-25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탑 | 기타 | 2009 | 탑 높이 6m, 탑신 3.13m, 탑1식 | 2009-03-01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광양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항의하여 박병하(朴炳夏, 1847~1910)는 단식으로, 황현(黃玹, 1855~1910)은 음독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272 | 6·25 참전 유공자비(용산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용산면6.25참전유공자회 길기석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11-14 | 용산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139-4에 용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99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유공자비에는 6·25전쟁 현황과 전략사 등을 기록했고, 비 후면에 용산면 참전 전사자 19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273 | 학암 박윤중선생 기적비 | 독립운동 | 2011-07-21 | 경상북도 문경시 | 박상욱(증손) | 비석 | 의병운동 | 0 | 0 | 2010-11-06 | 1907. 8. 1 大韓帝國軍隊가 해산됨에 따라 당시 육군참교로 있다가 서울시내로 진출하여 왜군과 항쟁 교전하다가 적탄에 맞아「大韓萬歲」를 삼창하고 전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
274 | 한용운 처소( 심우장) | 독립운동 | 2012-08-31 | 서울특별시 성북구 | 성북구 | 기타 | 기타 | 1933 | 1933-01-01 |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 |
275 | 현충탑(안양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 안양시 | 탑 | 기타 | 1971 | 1971-10-15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에 안양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안양시에서 1971년 10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희생하신 전몰군경 및 호국영령 637위(군인 560위, 경찰 48위, 군속 및 청년단원 29위) 위패를 모셨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여 땅이여- 머언 먼 아득한 그 옛날 잉벌노현, 금천이라 불리우던 곳. 이 안양땅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있었노라. 안양천 맑은 물에 동심을 닦고 관악언덕 수리기슭에서 몸을 기르며 내일의 큰 꿈을 키웠노라 아, 그러나 모진 광풍 불어와 나라의 부름이 있었나니 누구보다 그 부름에 앞장 섰노라. 동족상쟁의 아픔은 비록컸지만 내 한 목숨 초개같이 던졌노라 자유와 평화, 겨레와 조국이 그들에겐 생명보다 소중했노라. 하늘나는 새들은 구슬피 울고 땅을 기는 짐승들도 피눈물 흘렸노라 역사는 기억하리라. 그 빛나는 무명의 산화를 산하여 어찌 잊을 수가 가슴엔 더 뜨거운 그 이름들을 님들이 지킨 이 땅 어느 곳엔들 그 얼 아니 스며 있으리오 여기 우리 정성 모아 당신의 뜻을 세웠나니 하늘이여 땅이여 고이 잠든 넋들에 평안에 주소서. 하늘이여 땅이여 님들의 충혼으로 앞길을 밝히소서 | |
276 | 순국의사 심석재 송선생병순의 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39 | 0 | 1973-05-19 | 송병순은 본관은 은진. 호는 심석이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의 동생이다.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 뒤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 1888년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3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에 강당을 건립하여 제자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제자들이 말려 실패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
277 | 호국 유공자 전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 비석 | 기타 | 2002 | 2002-12-20 | 안양 부흥동 보훈회관 앞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유공자 전공 기념비(안양)’를 건립하였다. 안양시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2월 2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안양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278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충주) | 국가수호 | 2006-04-24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48 | 0 | 2004-12-10 | 이 기념비는 국가수호를 위해 6.25에 참전한 충주시에 거주하는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충청북도지부 충주시지회에서 2014년 12월 10일 건립하였다. |
279 | 애국지사 일표 조용관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북도 익산시 | 함라초등학교 | 동상 | 사회운동 | 폭2.5 길이4 높이2.2 | 2013-11-29 | 익산 함라마을은 1900년 초 개화기 때 만석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삼부자 고택으로 유명하다. 옛 담장을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함라면사무소 옆 함라초등학교가 나타나고 교정에 들어서면 바로 애국지사 일표 조용관 선생의 흉상을 만날 수 있다. 조용관 선생은 1885년 함라에서 태어나 1920년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자도자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1월 군산민중운동자동맹 사건으로 징역 8월을 받고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다시 노동운동계에 뛰어들어 1926년 10월 군산철도노동회 위원장, 1927년 3월 군산노동연맹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동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서 회의진행을 주관하다가 체포되었다. 동년 9월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3월 조선공산당 전북도당을 결성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조용관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동창회, 유족 등이 뜻을 모아 2008년 생전 설립에 힘을 쏟았던 함라초등학교 교정에 흉상을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5년 5월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 |
280 | 천안함 | 국가수호 | 2012-11-12 | 경기도 평택시 | 해군 제2함대사령부 | 조형물 | 기타 | 2010 | 0 | 2011-03-30 |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 해군본부에서 국민의 안보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2011년 3월 30일부터 백령도 근해에서 침몰한 천안함을 전시하고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침몰한 사건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천안함 피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 발표는 미국과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안보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 |
281 | 해남항일운동 추모비 | 독립운동 | 2014-05-20 | 전라남도 해남군 | 해남항일독립운동희생자추모사업회 | 비석 | 기타 | 1909 | 2013-07-09 | 해남의 항일운동 역사와 지역 호국의병들의 숭고한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함 | |
282 | 울산지구 두서전적 기념비 | 국가수호 | 2009-05-25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산광역시 호국선양기념사업단 | 비석 | 기타 | 1950 | 가로2m, 세로 1.5m, 높이 2m | 2008-11-19 | 울산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두서면사무소 내에 두서에서 벌어진 전투중 희생된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울산광역시호국선양기념사업단에서 2008년 11월 19일 이 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기간 중 울산지구 일대 북한군이 아미산, 천마산 등 두서면 일대에 아지트를 구축함으로써 전투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희생된 군경찰, 공무원, 지역주민 등 약 360여 명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수호 전선에 산화하신 우리의 님이시여 그날의 희생정신이 후세에 길이 빛나리 여기 두서면 양지바른 곳에 한 비를 세워 님들의 위대한 충성을 높이 기리노라 |
283 |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 | 독립운동 | 2014-05-20 | 경기도 김포시 | 재단법인김포시청소년재단 | 기념관 | 3·1운동 | 1919 | 대 | 2013-02-28 | 김포시는 1919년 3월 22일 월곶면과 검단면을 시작으로 3월 29일까지 8일간 양촌읍, 고촌읍 등지에서 총 15회에 걸쳐 3‧1독립만세운동 시위가 벌어진 고장이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선열들은 1만4천여 명으로 이 과정에서 부상자 120명, 체포자 200여 명이 발생하였다. 김포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지역의 정체성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한 독립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이 조성되는 이곳은 옛 양곡리의 오라니장터로 일제시대에 선조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역사 깊은 장소이다. 2013년 3월 1일 양촌읍에 개관한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건축 연면적 2058㎡(623평)에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재현한 영상과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전시관, 일제의 고문실태, 만세운동 체험관 등이 들어서 있다. |
284 | 수도탈환부대 기념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인제군 | 육군제21보병사단 | 비석 | 6·25전쟁 | - | 0 | 1996-11-20 |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의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후배장병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다. |
285 | 사립 소안학교 터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남도 완도군 |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1927 | 1913 | 사립소안학교 폐교 반대 불령선인 800명 | |
286 | 중앙탑 독립유공자 공적비 | 독립운동 | 2014-12-12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 충청북도 북부연합지회 | 비석 | 기타 | - | 2012-12-23 | 공적비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유공자분들의 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설계되었고, 중앙의 공적비를 둘러싸고 있는 명각비는 대한민국 산천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유공자 분들의 공적을 담고 있다. | |
287 | 한주호 준위 동상 | 국가수호 | 2011-06-08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진해기지사령부 | 동상 | 기타 | 2010 | 0 | 2011-03-30 | 경남 진해시 경화동에 천안함 피격 당시 구조를 위해 애쓰다 희생된 한주호 준위를 추모하기 위해 해군본부에서 2011년 3월 30일 동상을 건립했다.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한 한주호 준위는 1975년 2월 서울 수도공업고등학교 졸업 직후 해군부사관으로 입대하여 내연보통과를 수료하고 호위함 부산함(FFK-959)에 승조하였다. 이듬 해 해군 특수전 초급반(UDT/SEAL) 제22차 과정을 수료하고 수중파괴대(UDT)에서 훈련교관, 작전요원 등을 역임하였다. 2000년 해군사관학교 준사관 제41기 과정을 수료하고 준위로 임관하였다. 해군 특수전 여단 작전지원대 근무중이던 2010년 3월 2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일대를 경비하던 제2함대 소속의 초계함 천안함(PC-772)이 침몰하자 소속부대원들과 함께 구조요원으로 참여, 높은 파고와 낮은 수온 등 극한의 환경에서도 실종자 수색에 만전을 기하던 30일 잠수 수색활동 중 실신하여 같은 해역내 미 해군 구조함 살바(SALVOR)함으로 후송돼 응급조치하였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순직 직후 보국훈장 광복장이 수여되었고,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
288 | 충의선양탑 | 국가수호 | 2015-05-14 | 충청북도 충주시 | 중앙경찰학교 | 탑 | 기타 | 1989 | 1991-05-13 | 동의대 사태로 인해 순직한 경찰관 및 공무수행중 순직한 경찰관 | |
289 | 애국지사 백아 이정기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상북도 성주군 | 이무남 | 비석 | 3·1운동 | 1898 | 0 | 1995-10-15 | 이정기는 1898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복한 등 전국의 유림 대표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고자 상하이로 보냈으나 파리로 가지 못하고 탄원서만 우송된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장서의 서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송회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정기 역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베이징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출판사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는 한편, 김창숙·남형우 등에게 무기 제조법을 익힌 뒤 1925년 9월 대구로 가서 이원록 등과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주력하였다. 1928년 1월 대구은행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 2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290 | 최규식경무관 동상 | 국가수호 | 2013-11-22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서울종로경찰서 | 동상 | 기타 | 1968 | 1969-10-21 |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한 최규식 경무관을 추모하기 위해 내무부에서 1969년 10월 21일 이 동상을 건립했다. 최규식 경무관은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 공비들에 의한 1·21 사태 때 사망했다.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경찰에 투신해 1967년 10월부터 서울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및 31명의 무장 공비들이 당시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고 남파되자 청와대 바로 옆에서 이를 검문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고 정종수 경사와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 | |
291 | 김해시 6. 25 및 베트남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4-05-20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탑 | 6·25전쟁 | 1951 | 0 | 2009-11-13 | 이 전공비는 6ㆍ25전쟁을 맞아 온몸을 바쳐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구한 공훈을 기리고 아울러 조국의 부름을 받아 머나먼 이역만리 월남 땅에서 대한용사의 용맹을 빛내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한 김해시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것이다. 이 전공탑비는 2009년 11월 13일에 준공하였으며, 현재 김해시 6ㆍ25참전자 2229명 및 월남전 참전자 1608명들의 이름이 훈격별로 새겨져 있다. |
292 | 강화특공대 의적 불망비 | 국가수호 | 2005-10-27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2-06-25 | 1.4후퇴 당시 강화군에 민간인 신분인 수백명이 강화특공대(1950.12.8. 결성)를 조직하여 공산군과 많은 전투를 통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 19명의 특공대원이 산화되어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건립함 |
293 | 장기창 순직기념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전라남도 무안군 | 무안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1947 | 높이 2m | 19471001 | 故 장기창 순경은 1947.04.30. 일로면에 무장공비들이 침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매복해 있다가 기습공격을 가하여 도주하는 적을 전원 사살케 하여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현장에서 순직하였으나, 미등록 국가유공자임. |
294 | 충남경찰 '혼' 추모공원 | 국가수호 | 2015-05-14 | 충청남도 예산군 | 충남지방경찰청 | 장소 | 6·25전쟁 | 2013-10-18 | 추모공원 비문에 1947년 이후 전사 및 순직한 경찰관 893위 명각 | ||
295 | 3·1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시 | 비석 | 3·1운동 | 1919 | 1986-05-01 | 포항 송라면 대전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5월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370 건립한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22일 오후 1시 포항시 송라면 대전리에서 윤영복, 이준석 등 23명이 주동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날의 독립항쟁은 일제 관헌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제지당했고 주동인물 23인 모두가 붙잡혀 갔다. 온갖 고문을 당한 뒤 윤영복, 윤영만, 이준석, 이영섭, 이준업, 안천종, 안상종, 안덕환,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태하, 김진봉, 안도용 등 14인은 대구형무소에서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 |
296 | 의병대장 남천 박주상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20-10-12 | 경상북도 예천군 | 함양박씨 남천공파 문중 대표 박희식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5 | 0 | 2012-5-10 | 박주상은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초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박주상은 예천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거의하여 의병을 모군하였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의병활동에서 김하락(金河洛)·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秊) 등과 연계하여 적군을 격멸시키는 등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297 | 故 정옥성 경감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인천강화경찰서 경우회 | 동상 | 기타 | 2013-06-20 | 13.3.1. 23:10경 강화서 내가파출소 당직근무 중 자살기도자 관련 112신고를 접하고 119휴대폰 위치추적 결과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 인근에 있는 것으로 확인 주변 수색, 자살기도자를 발견하고 설득하던중 자살기도자가 순간적으로 바닷물로 뛰어드는 것을 뒤쫒아 구조하는 과정에서 바닷물에 휩쓸려 순직 | ||
298 | 영명학교(공주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 독립운동 | 2019-4-26 | 충청남도 공주시 | 학교법인 감리교 영명학원 | 장소 | 문화운동 | 0 | 2022-02-10 | 1919년 4월 1일 공주 3.1운동 만세 시위 전날,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1천여 매를 등사하고 대형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 |
299 | 애국지사 국간 김철호선생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통영시 | 김용민 | 비석 | 사회운동 | 1901 | 1995-11-01 | 김철호(金哲鎬, 1901~1950)는 1926년 8월 중국 광동(廣東)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원봉(金元鳳)·오성륜(吳成崙)의 권유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국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아 활동하다가 1929년 10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사단법인 가학중앙종친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5년 11월 이 비를 세웠다. | |
300 |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충청남도 부여군 | 부여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01 | 0 | 1975-05-01 | 이호철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휘문학교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활동하였다. 1923년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에 재학당시 재일동포를 규합하여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정신의 앙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6월 부여군 홍산면을 위시하여 각지의 부락에 농민들을 위한 야학과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농민계몽에 주력하다가 1933년 8월 10일 피체되었다.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01 | 현충탑(경기 성남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성남시지회 | 탑 | 기타 | 1974 | 높이 17m, 폭 17m | 1974-06-06 | 이 현충탑은 조국을 위해 장렬히 희생하신 성남 출신의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성남시가 이일영 화백에게 제작을 위촉 1974년 6월 6일 현충일을 기념하여 현재의 장소에 건립을 완성하였다. 정면이 남향으로 전 시가지를 바라보는 형태의 이 탑은 중앙의 탑신을 중심으로 좌우에 직방형 비좌가 마련되어 좌측으로는 연혁이 우측으로는 헌시가 적혀있으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이곳은 매년 신년참배를 비롯 현충일 추모행사 등이 개최되는 현충시설로 후세들이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배우는 소중한 교육의 장이다. |
302 | 도병철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22 | 경상북도 칠곡군 | 도인수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03 | 1983-06-01 | 도병철은 경북 칠곡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되었으며,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손병선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결성되자 동년 4월 동지들과 함께 신간회 칠곡군지부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펴나갔다. 주로 민족교육운동에 관심을 갖고 무산아동의 수업료 면제와 한국인을 위한 교육실시를 주장하였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됨에 따라 옛 동지 손병선과 함께 다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던 중 1938년 일경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고초를 치르다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1945년 8월 패망직전의 일제 경찰이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강제 검거할 당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강제 연행되던 중 낙동강 철교에서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303 | 충혼 불멸탑(줄포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부안군 | 줄포면 | 탑 | 6·25전쟁 | 1950 | 1.8m x 2.1m | 1971-05-20 | 부안군 장동리에 6·25전쟁 기간에 향토방위를 위해 산화한 19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불멸탑’을 건립하였다. 부안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71년 5월 20일 이 탑을 세웠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박영원, 노방운, 이종권, 양봉식 등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육탄으로 대항하다 쓰러졌다. 줄포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04 | 백재덕 호국영웅 상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강서구 재향군인회 | 동상 | 6·25전쟁 | 1953 | 0 | 2001-01-01 | 부산 강서구 천가동 천성분교 내에 호국영웅인 백재덕 이등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백재덕 호국영웅흉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2001년 1월 1일 이 동상을 세웠다. 1953년 5월 14일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10중대 3소대 3분대장 백재덕 육군이등상사는 강원도 금성 샛별고지에서 야간 매복작전을 전개하던 중 적 3개 중대의 공격 징후를 미리 탐지하고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워진다. 전 분대원은 나와 같이 이곳에 뼈를 묻자"며 분대원들을 독려하여 3차에 걸친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백병전과 진내사격까지 요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중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중동부전선의 요충지인 샛별고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하였다. 1953년 5월 15일 밤 제11중대 3소대 백재덕 이등상사가 지휘하는 3분대는 매복조로 차출되어 중대진지 앞에서 진목동 일대를 살피고 있던 중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조명탄을 발사한 결과, 적 3개 중대가 진지를 향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분대장은 매복진지가 돌파될 경우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울 것으로 판단하고 전 분대원에게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철수를 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분대장은 능선의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로 4명씩 분리하여 배치한 후 접근해오는 적을 향해 사격을 집중하자 적은 괴성을 지르며 돌격을 감행해왔다. 분대는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인해전술로 접근해오는 적을 완전 섬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적의 제1파 15~16명이 분대의 진지안까지 돌입함으로써 백병전이 전개되었으며, 백재덕 이등상사 이하 모든 분대원은 수적으로 2:1의 열세 속에서도 적을 모조리 격퇴하였다. 약 20분이 경과된 후 적의 제2파가 다시 공세를 취해옴에 따라 피아간에는 수류탄전과 아울러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분대원들은 처절한 사투 끝에 침입한 적을 모두 사살하였으나, 1차 1명에 이어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잠시 후 또 다시 제3파의 공격을 재개한 적 10여 명이 다시 분대진지까지 돌입하자 분대원들은 총검과 맨주먹으로 혈전을 개시하였고, 아울러 중대에서는 진내사격을 실시하여 계속하여 돌진해오는 적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분대원들은 9명 중 4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명도 부상을 입는 손실이 있었으나, 날이 새고 적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분대장 백재덕 이등상사는 단신으로 10여 명의 적을 사살, 진지를 고수하고 중대의 위기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아울러 샛별고지전투의 승리는 아군이 중부전선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무사히 확보함으로써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305 | 춘천지구 전적 기념관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한국자유총연맹강원도지회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지상2층 | 1978-10-30 | 강원도 춘천시 삼천동에 춘천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다 산화한 용사들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관광공사에서 1978년 10월 30일 전적기념관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중부전선의 요충인 춘천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국군 용사들은 육탄으로 적을 막아냈고 전선의 격동기에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치열한 격전 끝에 춘천을 수호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춘천에서 3·8선까지 30리, 휴전선까지는 125리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부전선의 요충인 이곳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국군용사들은 육탄으로 적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전선의 격동기에는 유엔군과 함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격전 끝에 춘천을 수복하여 오늘이 있게 하였다. 이곳에서 산화한 거룩한 영령들의 민족수호와 호국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는 오늘 번영하는 호반도시 춘천을 건설하고 그때 그들의 전공을 기리며 여기에 이 비를 세워 자주국방의 증표로 삼는 바이다. |
306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5-30 | 인천광역시 연수구 | 인천광역시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대 | 1984-09-15 |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에서 1984년 9월 15일 기념관을 건립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지휘하에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하여 성공함으로써 전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해 본 기념관을 건립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하셨던 참전용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킬 수 있는 전쟁사기념관이며, 본 기념관에는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각종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307 | 육군소령 강재구 흉상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동구 | 인천창영초등학교 | 동상 | 기타 | 1965 | 소 | 1966-05-06 | 인천시 동구 창영동 창영초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으로 많은 부하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1966년 5월 6일 흉상을 건립했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직전, 부하들의 수류탄 투척훈련 중의 일이었다. 한 사병이 앞으로 던져야 할 수류탄을 뒤로 추켜드는 순간에 놓침으로써 그 수류탄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앉아 있던 사병들 가운데 떨어졌다. 그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수많은 사병들이 희생하게 된다. 미쳐 주워 던질 겨를도 없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침으로써 많은 부하들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출하고 산화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창영초등학교 어린이회의 발의로 학부모, 졸업생, 교직원, 인천시 유지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
308 | 충의현비 | 독립운동 | 2004-12-09 | 춘천시 남면 | 춘천시 | 비석 | 의병운동 | 1842 | 1989-03-01 | 광복회강원도지부는 1989년 3월 1일 춘천시 남면 후동리에 항일의병의 대표적 인물인 유인석 선생과 의병장 유홍석 선생, 유홍석 선생의 며느리인 윤희순 여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충의현비(忠義峴碑)를 건립하였다. 유인석 선생(1842~1915)은 화서학파의 태두로서 직접 거의하여 일제와 맞서 싸웠고 유홍석 선생(1841~1913)은 1907년 춘천의병을 창의하여 춘천, 가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윤희순 여사(1860~1935)는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등을 작사, 작곡하여 의병운동 지원 및 여자의병 300명을 조직하는 등 부녀자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 |
309 | 한·미해병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4-04-15 | 6·25전쟁 발발 뒤 한·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중동부 전선에서 도솔산 지구 전투, 924고지 전투 등 수많은 작전을 함께 수행했으며, 1952년 3월 중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옮겨, 현재 참전비가 있는 지역은 미 해병 제1사단이, 장단 지역에서는 우리 해병이 정전 시까지 1년 4개월 동안 북한과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 서울을 방어했다. | |
310 | 충정공 민영환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서대문구청 | 동상 | 한말구국운동 | 1861 | 높이 5m, 지름 1.3m, 받침석 3.5m | 1957-06-01 |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을 추모 |
311 | 베트남(월남) 참전 기념탑(성남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 성남시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8-05-14 |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 산 10번지 황송공원 내 건립된 월남참전기념탑은 지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에 참전한 성남 지역 젊은 용사들의 혁혁한 전공과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산화한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성남시민이 그 뜻을 모아 1998년 5월 14일 건립했다. 이 기념탑의 원래 명칭이 해외참전기념탑이었으나 2004년 12월 베트남(월남) 참전기념탑으로 변경되었다가 2013년 월남 참전기념탑으로 다시 바뀌었다. 기념탑 왼쪽에는 기념탑 건립 취지문이 새겨져 있고, 우측에는 해외참전 부대별로 총 426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2013년 6월에는 성남시 거주 베트남 참전 국가유공자 3, 373명의 이름을 새긴 명각비를 새로 세웠다. |
312 | 박상진의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울산광역시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4 | 높이 4.5m, 둘레 3.2m | 1960-08-15 |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1905) 이후에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위가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모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하여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악질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1월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 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 1921년 8월 11일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박상진의사 추모비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 내에 위치해 있는데 1960년에 당시 울산시 교육위원으로 구성된 추모사업추진위원회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
313 | 현충탑(광양시)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탑 | 기타 | 1991 | 탑 높이 27m | 1991-09-04 | 광양시 중동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72위의 광양시 출신 호국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광양시)’을 건립하였다. 광양시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1년 9월 4일 이탑을 준공하였고, 1995년 4월 28일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광양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기 위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과역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14 | 원주시 무공탑 | 국가수호 | 2014-05-20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탑 | 기타 | 0 | 0 | 2013-06-17 | 원주시 단구근린공원에 2013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원주시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원주시 무공탑’을 건립하였다. 원주시와 무공수훈자회 원주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13년 6월 17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원주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15 | 충혼비(대정읍 )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대정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6-06 | 서귀포 하모리 충혼묘지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군경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대정읍에서는 김원기, 허익찬, 이방수, 이무웅, 서덕주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7년 6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대정읍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나라의 부름을 받아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정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316 | 기지리 6.25 전투진지(벙커)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기타 | 6·25전쟁 | 1950 | 1949-01-01 |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45번지에 위치한 기지리 6·25 전투진지(벙커)는 1949년 10월 한국군에서 북한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4개 진지를 구축한 것 중 유일하게 보존된 진지다. 6·25 전쟁 당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져 전쟁 후 4개의 진지 중 3개소는 소실되었다. 포천시는 기지리 6·25 전투진지를 전적지로서 잘 보존하여 6·25 때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후세에게 일깨우고 조국수호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안보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317 | 영암군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7-05-03 | 전라남도 영암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영암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신 4m, 5단 | 2006-10-17 | 영암군 장산리 도로공원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참전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얌군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영암군 지회는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10월 17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영암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318 | 김포시 6·25 참전 유공자탑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김포시 | 6.25참전유공자회 김포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소 | 2007-12-04 | 김포시 6‧25 참전유공자탑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시까지 국가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각 전투에서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냈던 김포시 6·25참전 국가유공자 393명의 이름을 탑 후면에 새겨 후손들에게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김포시에서 2007년 12월 건립하였다. |
319 | 여주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8-11-25 | 경기도 여주시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여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8-02-21 | 여주군 상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여주군 지회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8년 2월 2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여주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20 | 남일 심수택 의병장 사당 | 독립운동 | 2015-10-14 | 전라남도 함평군 | 함평군 | 사당 | 의병운동 | 1908 | 원형비 높이 1.5m / 기단 1.0m | 2012-05-16 | 남일 심수택(1971~1910) 의병장은 구한말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서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특히, 영암 사촌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을 사살하는 등 호남의병의 기세를 만천하에 떨쳤다.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삼남일 의진은 안규홍, 전해산 의진과 접촉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고 연합투쟁을 전개하는 등 일제군경과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321 | 무공수훈 국가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5-05-14 | 경상북도 영천시 | 무공수훈자회 영천시지회 | 비석 | 기타 | 0 | 2004-12-10 | 참담한 비극의 역사를 열었던 6.25한국전쟁과 세계평화유지를 위하여 월남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 169명과 보국수훈자 26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
322 | 경찰 전적비(영월군) | 국가수호 | 2003-04-25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경찰서 | 비석 | 기타 | 1948 | - | 1992-06-02 | 영월경찰서는 1992년 6월 영월군 북면 공기리 888에 공비소탕작전에서 순직한 영월경찰서 소속 경찰관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공적과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경찰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영월지역은 8.15 해방후 줄곧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루트로 이용되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경찰에 의한 공비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11월 23일 영월경찰서 윤만섭 경위 지휘하에 1개 소대가 출동하여 13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고, 1949년 7월 20일 무장공비 3명이 민가를 습격하여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는 것을 경찰서장 엄정주의 지휘 아래 경찰관 40명, 마을청년 50명이 출동하여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월 지역 경찰관과 민간인 중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
323 | 충혼탑(옥계리)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연천군 | 연천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3-01-01 | 1950년 10월 2일, 연천군이 공산치하에서 벗어나 수복될 당시 싸우다 전사한 일등중사 오을용 외 5명의 명복을 빌기 위해 1953년 10월 16일 건립하였다. 이 탑은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272-2에 위치하고 있던 것을 2010년 9월 현 위치로 이전하여 새롭게 정비한 것이다. |
324 | 6·25전쟁 참전 기념비(진천군) | 국가수호 | 2004-05-10 | 충청북도 진천군 | 6.25참전기념사업회 진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11-21 |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한 진천군 출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정신과 충정을 기리고 이를 후세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하여 2001년 건립하였다. |
325 | 의사 황병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향교 | 비석 | 의병운동 | 1876 | 높이 2m 폭 0.5m | 1986-08-15 | - 황병학은 1906년 7월 26일 산포수 2백여명을 규합하여 백운산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망덕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10척을 공격하여 침몰시키고 일본군을 사살하고 총기 등을 압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황병학은 광양을 비롯해 여수, 순천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옥곡원에 주둔중인 일본 헌병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일제 강제 병탄당하자 황병학 의병부대는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은신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병학은 기산도와 만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하다가 발각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가 의주에서 헌병대에 피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봄 출옥하여 귀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4월23일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이 비는 황병학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86년 8월 15일 건립하였다. |
326 | 기미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3-01-01 | 3·1독립운동이 막 시작된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천도교구장 한영태(韓榮泰, 1878~1919)는 전주교구실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강계대(姜啓大, 1884~1971), 박판덕(朴判德, 1900~1936), 우성오(禹成五, 1880~1943), 황성진(黃成瑱, 1868~미상), 김영원(金榮遠, 1853~1919), 박성근(朴成根, 1855~1925) 등 교도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각면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3월 12일 임실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비롯한 임실 각 지역의 독립만세 시위가 잇달았다. 한영태를 비롯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던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한영태와 김영원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운암면 천도교 후손들이 주축이 된 운암 3대운동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동학농민운동 무인멸왜운동과 함께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6월 17일 이 비를 세웠다. |
327 | 안성 3·1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안성시 | 안성시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1-11-17 |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만세고개에 위치한 3.1운동기념관은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안성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고,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건립되었다. 전시장에서는 3.1운동에 관한 각종 자료들과 모형, 체험관, 영상물 등을 소개한다. 또한 외부에는 순국선열 25인과 애국지사 195인의 위패를 봉인한 광복사, 안성시 양성면과 원곡면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친 장소를 알리는 만세고개 기념비, 기념탑, 무궁화동산 등을 설치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
328 | 3·1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진주시 | 진주성관리사무소장 | 비석 | 3·1운동 | 1919 | 1971-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 이강우·김재화·권채근·강달룡·박진환·박용근 등의 사전 준비로 3만여명이 모여 경남 도청 앞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9일에도 읍내 상점은 모두 철시하고 태극기와 악대까지 앞세워 만세시위를 하여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위에서 강달룡(姜達龍, 1888~1940), 강상호(姜相鎬, 1887~1957), 권채근(權采根, 1889~1920), 김성권(金聲權, 1875~1960), 김재화(金在華, 1892~1920), 박용근(朴龍根, 1883~1940), 박재룡(朴在龍, 1887~1955), 박진환(朴進煥, 1888~1940), 심두섭(沈斗燮, 1894~1975), 심호섭(沈護燮, 1891~1935), 이강우(李康雨, 1890~납북), 장덕익(張德翼, 1889~1947), 정용길(鄭鎔吉, 1887~1938), 한규상(韓圭相, 1896~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진주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329 | 경찰 충혼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남도 광양시 | 전남광양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탑1 | 2015-12-23 | 1950년 6.25전쟁 당시 백운산 전투에서 전사한 무연고 경찰관들의 유해 9위를 안치하고 묘역으로 조성하여 그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
330 | 해파 곽태진지사 현창비 | 독립운동 | 2011-11-10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7 | 1989-10-01 | 1917년 5월 18일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하였다. 1940년대 초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결사단체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5년 2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
331 | 호국학도 충의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포항고등학교 동창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0-01-01 |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한 포항고등학교 출신 전몰학도병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항구적으로 기리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호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 | |
332 | 돈헌 임병찬 의사 순지비 | 독립운동 | 2003-12-09 | 전라남도 여수시 | 삼산면장 | 비석 | 의병운동 | 1851 | 기단 3.5m, 높이 3m | 1997-10-31 | 임병찬은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피체되고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음력)에 유배지에서 사망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333 | 무공수훈자 공적비(영동군) | 국가수호 | 2003-12-09 | 충청북도 영동군 | 무공수훈자회 영동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08-31 | 영동군 오탑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영동군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8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영동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34 | 6·25 참전용사 명비(계남면) | 국가수호 | 2004-12-2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유공자회장수지회계남면분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1-01 | 장수군 화음리 보건지소 앞에 계남면 출신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용사 명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기념사업회 장수군 지회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11월 1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계남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계남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35 | 독립운동가 이상화 고택 | 독립운동 | 2020-5-8 | 대구광역시 중구 | (사)근대골목해설사회 | 생가 | 3·1운동 | 1919 | 0 | 2008-08-12(복원) | 대구출신 저항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상화(李相和, 1901 ~ 1943, 1990년 애족장)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한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2005년 대구시에 기부체납했다. 대구시는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을 설치하는 등 2008년 8월 복원을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2020년 5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으며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선생의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336 | 장준하 공원 | 독립운동 | 2018-12-4 | 경기도 파주시 | 경기도 파주시 | 장소 | 문화운동 | 0 | 2012-8-17 | 일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친 장준하 선생의 참 정신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함 | |
337 | 부경고등학교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20-5-8 | 부산광역시 서구 | 부경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9-11-27 | 6.25전쟁에 참전한 부경고(경남상고) 출신 283명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338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북도 정읍시 | 김용환 | 비석 | 해외운동 | 1919 | 높이 4.5m | 2009-02-24 | 1905년 최익현(崔益鉉)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이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김양수는 고예진(高禮鎭)과 고석진(高石鎭),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의 청년들과 정산(定山)에서 최익현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또한 김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작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 등의 영남유림과 김복한·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 등의 호서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때 김양수도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339 | 백초월대선사순국비 | 독립운동 | 2013-05-13 | 경상남도 고성군 | 백남덕 | 비석 | 기타 | 1944 | 1991-06-01 | 백초월은 1878년 2월 17일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위는 인영이고 법명이 초월이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였고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 법계를 받았다. 일제의 병탄 당시 대선사이신 이남파, 한용운, 김포광 등 저명한 큰 스님과 국권상실을 통탄하여 오다가 1914년 "한국민단본부"라는 구국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일심교"를 창안하여 2천만이 한마음이 되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일심교리를 선양하여 활동하다 일본 동경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당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원도와 지리산 등으로 전전하다 서울로 돌아와 서대문의 극락암에서 승려 70여명에게 수학을 하고 있던 중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주행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격문사건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고 또다시 청주형무소에 이감되어 3년 형고를 치르다 1944년 6월에 향년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1991년 6월 1일 향리인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 있는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백초월대선사 순국비를 세웠다. | |
340 |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4-05-20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1919 | 0 | 2010-01-20 |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김호림(金頀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창숙이지만 우(愚)라고 개명한 일도 있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지만 일제에 피수(被囚)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이란 별호(別號)도 붙었다. 성품이 곧아서 평생을 불의·부정·불법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리설(主理說)도 전수 받았다. 이러한 성장 과정으로 인하여 심산은 일찍부터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서구근대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개화(開化)와 외국의 것으로부터 내 것을 고수하자는 척사(斥邪)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게 되고 동시에 외세(外勢)와 저항이라는 사회변혁 속에서 전통적 유학자의 길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지킬 수 있는 구국부민(救國扶民)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심산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라는 을사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즉시 그는 이승희와 함께 시베리아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효심(孝心) 때문에 중단하고 계속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의 빚을 갚고 자립경제를 함으로써 일본을 물리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그는 이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성주지부(星州支部)를 결성하여 총무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리에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민족주의교육을 하였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韓日合倂論)을 제기하자 심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유림들을 모아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연서(連署)로 작성하여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日警)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마침내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오로지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적 실력은 이때 닦아졌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에 총총히 상경하여 민족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에 유림계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기회에 참여키 위하여 그는 영남·호남·호서의 유림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케 하였다. 이 장서는 그 이외에도 이중업(李中業)·곽대연(郭大淵)·유준근(柳濬根)·김 황(金榥) 등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連署)에 날인하였다. 인쇄되어 국내의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심산이 동년 3월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우송케 하였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심산은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 구(金九)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차회의의 결의에서 도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개최, 4월 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심산은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5차회의에서 그는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한편 심산은 그의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손 문(孫文)을 비롯하여 오 산(吳山)·서 겸(徐謙)·장병린(章炳麟) 등과 교통하여 한·중공동 항일 운동을 추진토록 하였다.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광동의 중국공교회원(中國孔敎會員)인 임복성(林福成)과 교유하면서 그곳 중의원(衆議院)에 나가 연설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그곳 광동에는 한국독립운동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복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천진(天津)에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간행하였다. 1923년 1월 민족의 단합을 위하고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양분되었고 이때 심산은 창조파의 국민의회대의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구국항쟁의 일념에 있던 그는 이때 민족운동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가치 않았던 것이다. 1925년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주장이 문제되자 그는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이를 성토·탄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한편 국내외적 변화에 따른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이 침체하자 심산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교포들을 모아 집단거주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산업의 추진,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입하는 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으로 만몽(滿蒙) 접경지에 황무지 3만 정보(町步)를 무상 조차하였고 이의 개간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그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경기·충청·경상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했으나 계획대로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국내에서의 잔학한 일제 식민지통치 아래 점차 상실되는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결사대(決死隊)를 파견, 각종 식민지기관을 파괴하기로 하였다. 1926년 이동녕·김 구·김원봉(金元鳳) 등과 상의,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하였다. 국내의 유림들도 그를 도와 모금운동을 하였고 이에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다. 1927년 5월 심산은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 중 일본 밀정에 발각 붙잡혀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그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강인한 정신은 반민족 반민주적인 독소를 제거키 위해 전환되었다. 즉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樂部事件)을 주동하여 재차 투옥되는 등 그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저서에 자서종요(字書綜要)와 벽옹70년회상기 등이 있다. |
341 | 베트남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02-12 | 전라북도 고창군 | 베트남참전고창군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기념비1, 명비1 | 2009-02-14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고창군지회는 2009년 2월 14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덕산리 산39-1에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의 위상을 드높인 고창 출신의 참전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342 |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 독립운동 | 2015-10-14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 고성이씨 화수회 | 비석 | 애국계몽운동 | 0 | 19830801 |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하여서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愛國啓蒙團體)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2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처단하기 위해서 폭발장치를 한 선물상자로 위장하여 박제순(朴齊純)과 이지용(李址鎔)에게 우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오적신(五賊臣) 모두를 한꺼번에 처단하기로 하고 나인영·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이 자신회는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 40여명의 청년들이 가입하였고 많은 애국지사들의 협조가 있었다. 1907년 3월 25일 아침, 그는 동지들과 각기 지정한 장소에서 박제순·권중현 등을 처단하기 위해 대기하였으나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차질로 단지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동지들은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1907년 당시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의 판결에서 7년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얼마후 풀려났다. 그는 그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 처단을 위한 활동을 하는 등 이기선생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함. | |
343 | 김풍익 중령 상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포병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1980-06-25 | 고 김풍익 중령 약력 및 공적 1921. 8. 6.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출생 1941. 3. 31. 선린상업학교 졸업(제34회) 1948. 10. 11. 육군 소위 임관(육사 7특) 1950. 5.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장 1950. 6. 26. 의정부 금오리전투에서 전사 1950. 8 .24. 육군중령으로 추서 1950. 12. 30 을지 및 충무 무공훈장 수여 | |
344 | 동구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20-10-12 | 부산광역시 동구 | 부산광역시 동구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20-6-29 | 동구지역 출신 6.25참전유공자 920명의 이름을 명각한 비로 동구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지역 주민의 호국의식 함양을 위해 건립되었다. |
345 | 상록탑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춘천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36 | 1967-04-25 | 1936년 춘천고등학교 학생들은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상록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1938년 12월 상록회 조직이 일제 경찰에 노출되면서 학생들이 137명이나 체포되었고 10명이 2년 6월의 실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그 중 백흥기(10회)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그 후 1941년 2월 또다시 24명의 학생이 검거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이광훈(15회, 1924~1943)이 인천형무소에서, 고웅주(15회, 1923~1943)군이 김천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상록탑은 춘천고등학교동문회가 1967년 4월 25일 강원 춘천시 소양로3가 149-1 춘천고등학교 교정에 애국충정으로 산화한 춘천고등보통학교 출신 상록회원들의 얼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 |
346 | 무공수훈자 전공비(진천군) | 국가수호 | 2004-05-10 | 충청북도 진천군 | 무공수훈자 진천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0 | 높이 5m, 기단(2mx1m) | 1995-05-13 |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진천군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들의 안보사상을 함양하기 위하여 1995년 5월 13일 건립하였다. 사선을 넘나들며 조국과 민족을 지킨 무공수훈자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347 | 6·25 참전용사 기념비(오송읍)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강외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6-23 | 강외면 재향군인회는 2003년 6월 청원군 강외면 오송리 274-1(강외면사무소 내)에 강외면 츨신 6·25참전유공자 박재기 외 162명의 나라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348 | 월남 참전 기념탑(충주)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충북지부충주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2003-03-26 | 충주댐 좌안공원에 2003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충주시 지회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탑 건립을 추진하여 2003년 3월 26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충주 출신으로 이장흠, 곽상근, 김봉원, 강성인, 김용군 등 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349 |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7-11-11 | 전라남도 완도군 |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 기념관 | 기타 | 1909 | 0 | 2003-08-31 | 2003년 10월 20일에 문을 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의 애국선열들과 그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소안도는 1909년 당사도 의거사건, 13년에 걸친 토지 소유권 소송 승리, 사립 소안학교 설립, 수의위친계, 소안 배달청년회 창립 등을 통해 줄기차게 조국 광복을 외쳤으며, 소안도 주민 8000명 중 800여명이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았던 곳이다. 송내호 등 2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으며, 면민 전체가 독립 운동을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일의 함성이 거셌던 곳이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에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감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이준화는 1898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인본인 간수들을 처단했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르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학원과 사립 소안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토지소유권 반화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전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
350 | 딘 헤스 대령 공적 기념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방공관제사령부 | 조형물 | 6·25전쟁 | 2017-03-09 | 1917년 미국 오하이오 주 출생.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반년 만에 군에 입대,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51년 동안 250회 전투 출격해 눈부신 전과를 올렸으며,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애기(愛機)인 F-51D 무스탕 전투기 18호기에 써넣은 좌우명 "신념의 조인(By Faith I Fly)"은 대한민국 전투 조종사의 용맹과 헌신을 뜻하는 상징적 구호가 되었다. 또한, 미5공군 소속 군목 러셀블레이즈델 대령과 함께 전장의 참화속에 버려진 전쟁고아 1,000여명을 군 수송기로 구하는데 기여하고, 보육원 설립 및 전쟁고아 기금 마련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수호와 헌신의 공로로 대한민국 무공훈장, 소파상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
351 | 항일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의성군 | 후손(김하운,김정배) | 비석 | 3·1운동 | 1996 | 0 | 1996-04-18 | 안평면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는 중인 1919년 3월 15일 낮, 대사리 교회에서 장로 이종출, 김옥돈과 집사 이양준, 이북술 등 4명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날 밤 9시쯤 마을 사람 약 60명이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3월 16일 저녁 7시쯤, 100여명늬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마을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하다가 해산하였다. 3월 17일 시위에는 안평면의 괴산, 마전, 창길, 기도 등의 마을 사람들 100여명이 여러 마을을 돌아 안평 경찰관 주재소 앞에 가서 만세시위를 한 후 하녕리에서 해산했는데, 얼마 뒤 출동한 의성경찰서 군경에 의해 12명이 구속되었다. 3월 18일 시위에는 약 300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이어 19일에는 400여명의 시위대원들이 안평 경찰관 주재소까지 몰려가 시위하였다.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일어난 안평면 대사리(우리골) 만세시위는 대사리 기독교 교회 교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지도되었으며 농민들이 전면에 나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96년 4월 18일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안평군 독립운동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352 | 하청면 충혼비 | 국가수호 | 2002-11-01 | 경상남도 거제시 | 하청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5-01-01 | 거제 하청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하청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하청면 충혼비’ 를 건립하였다. 신성현 외 1인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5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하청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청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53 | 서재필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07-11-11 | 전라남도 보성군 |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 기념관 | 민족주의운동 | 1864 | 기념관 건물 18동 | 2003-12-31 |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났다.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 천하를 이루었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1896년 귀국하여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문을 건립했으며, 자주독립 의식을 고양하고 근대 문명을 보급하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조야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그의 위업을 기리고자 1992년 사업을 시작하여 서재필 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다. 기념공원 인근에 부속시설로 서재필 선생의 생가(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 차량 10분 거리)가 함께 지정되어 있다. |
354 |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 | 국가수호 | 2005-05-02 | 경기도 파주시 | 특수임무유공자회 파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4-10-31 | 1951-1953년 6.25전쟁기간중 적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주요한 정보를 수집보고하여 미제8군과 전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큰 공적을 세운 많은 요원이 희생되어 그들의 추모와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
355 | 백용성조사 유적지 | 독립운동 | 2008-11-25 | 전라북도 장수군 | (사)독립운동가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 장소 | 3·1운동 | 1863 | 0 | 2007-10-9 | 백용성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수도 정진 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선농불교의 대각사상을 바탕으로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 날인하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하여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혐의로 1년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었으며, 출옥 후에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1921년 3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위한 각종 포교서의 저술에 착수하고, 불교 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전승하였다. 1927년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하고 선농일치운동을 통한 민족구제 및 사원 경제의 자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기지로 활용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8년부터 7년간에 걸쳐 생가복원과 유적지를 건립하였으며 기념관과 용성교육관, 대웅보전, 생가, 오사채, 승방으로 구성되어있다. |
356 | 6·25 참전 유공자 선양비(신평면) | 국가수호 | 2004-12-22 | 경상북도 의성군 |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 의성군지회신평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3-11-27 | 의성군 신평면사무소 옆 면민회관 광장에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유공자 선양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의성군지회 신평면 분회는 이곳 출신 이봉성, 최재수 등 전사자를 포함한 참전유공자 115명의 숭고한 충절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11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평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려 분투하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357 | 백정기의사고택지 | 독립운동 | 2016-11-03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초가집1채 | 2008-01-01 | 이곳은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07년 8월 25일 정읍으로 이주하여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2년 동안 살던 곳이다. 백정기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으며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1운동을 목격하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동지를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해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0년 서울의 중부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1922년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곳에서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해,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둥팅 호[洞庭湖] 근처의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여름 도쿄에 잠입해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9월에는 상하이의 철공장에 들어갔다. 1925년 신채호 등이 조직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으며 5·30총파업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8년 5월에는 일본상품배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자유혁명자연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군의 시설파괴, 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상하이로 돌아와 이회영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해 상하이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한 후, 3월에 상하이 홍커우[虹口]에 있는 육삼정에서 열린 일본요인과 친일파들의 연회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으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
358 | 3·1운동 유공비 | 독립운동 | 2009-09-22 | 부산광역시 금정구 | 금정중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1970-03-01 | 범어사 학생의거 관련 3·1운동 유공자 42분의 공적을 기리고 이 고장 출신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1995년 3월 1일에 금정구 금정중학교 안에 건립된 비이다. 범어사 지방학림(고등보통과정)을 졸업한 김법린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3월 17일 저녁에 개최된 명정학교, 지방학림 두 학교 졸업생을 위한 송별연 모임에서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하여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한번 죽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1천장이 준비되었고, 태극기도 이미 제작해 두었다. 송별연 모임은 김영규의 축사를 끝으로 모두 ‘대한독립만세’ 3창을 외쳤고, 청련암으로 자리를 옮겨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동래읍에 잠입하기로 하였다. 주동인물들이 불교포교당에 18일 새벽 1시쯤에 도착하였으나, 한 학생의 밀고로 일본 헌병과 경찰이 들이닥쳐, 김영규, 김상기, 김학기 등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인원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다음날 19일 아침,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동래시장을 비롯한 동래읍 일원에 뿌리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십 명의 명정학교, 지방학림 학생들과 민중들이 합세하여 동래시장 남문부근에 다시 집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돌진하다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인물은 대부분 검거되었다. 이 의거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34명에 달하며 대부분 부산 또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
359 |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순천시 | 순천시 | 비석 | 해외운동 | 1940 | 비석1식 | 2009-02-28 | 조경한은 1900년 주암면 한동 마을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단의 국내연락원으로 활약했다. 1924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덕신의숙, 계명학원 법정과에 다니면서 신채호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26년 만주에서 배달청년회의 배신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정의부 교민교과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참여,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의 책임을 맡았고 1931년 지청천·김창환·황학수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만주 각지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33년 뤄양군관학교의 교관에 임명되어 청년군사간부의 양성에 힘썼다. 1935년 민족혁명당에 참여했고 1937년 지청천 등과 조선혁명당을 창설하고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8월 한국광복전선이 조직되자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임시정부에서 군사학 편찬위원으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였다. 1941년 12월 광복군장교훈련소가 설치되자, 송호성·나월환과 같이 훈련책임을 맡았으며, 1942년 10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으로 선전업무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징계심사분과위원장,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 국무위원회 부비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4년에는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중앙상무 집행위원이 되었다. 추모비는 2009년 순천 금당 공원에 조형물과 함께 건립되었다. 조형물과 추모비는 전국 공모를 거쳐 양진옥 작가의 ‘빛의 소리’를 선정해 설치했다. 설치된 조형물은 조경한이 참여한 100여 회의 크고 작은 항일 전투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던 대전자 전투를 형상화한 것으로 그의 애국심을 절벽에 피어나는 태극기로 형상화 하고 있다. |
360 | 3.1만세운동 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18-05-10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 장소 | 3·1운동 | 1919 | 2017-09-05 | 1919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고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김화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3월 23일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500여명이 거사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내부 고발로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읍내로 향하던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맞서 30분간 맹렬한 격투를 하였으나 읍내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또한 김창희의 지휘 하에 화천장터에 모인 논미리, 구운리, 노동리, 풍산리 등의 주민들도 후일을 도모하고 해산하였다. 3월 28일에는 유학자, 청년, 농민, 의병출신, 산림기수, 일부 구장 등이 주도하여 상서면민들과 더욱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천장날이었던 이날 상서면 봉오리에 모인 천도교인들과 다목리, 파포리 주민 1,000여명은 만세를 부르며 상서면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면장과 면서기를 사로잡아 만세를 부르게 하고 화천읍으로 진격하였다.거사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주민 2,000여명은 지금의 화천읍 신읍리에서 화천읍내로 향하던 중 신풍리에 도착한 일본헌병들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격렬히 대치하다 4명이 즉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시위대는 그들을 저지하는 헌병에게 무력을 가하기도 하고 관공서를 공격·파괴하기도 하는 등 강렬히 저항하였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군민 3,500여명 이상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인원만 175명이 넘었다. 이들 피검된 숫자는 강원도에서 화천군이 가장 많았으며, 22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즉결재판으로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우리는 3․1만세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3. 23, 3. 28 화천만세항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화천의 얼과 민족의 자긍심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3․1만세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한다. | |
361 | 한규택상병 호국영웅 흉상 | 국가수호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상귀리 | 동상 | 6·25전쟁 | 1950 | 2001-06-01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하귀초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으로 6·25전쟁영웅 100인에 선정된 한규택 상병을 추모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제주도청 등에서 2001년 6월 1일 흉상을 건립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해병 제3기로 자원입대한 한규택 상병은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리 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1950년 11월 20일 해병대 제3대대 11중대는 동양리 지구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이 지역에 준동하는 적 패잔병들의 소탕임무를 부여받았다. 원산~평양 간 도로의 요충지인 동양리 일대의 보급로 차단을 위한 대대 규모의 북한군 공격을 받은 11중대는 불리한 지형에서의 방어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적 기관총의 맹렬한 사격에도 한규택 상병을 비롯한 화기소대 대원들은 위기에 처한 중대의 철수를 위한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때 선두에 있던 한 상병은 이미 적탄에 부상을 당해 왼쪽 어깨에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도 적 기관총 3정을 공격목표로 정하고 차례로 2정을 명중시켰다. 다시 세 번째 기관총 격파를 시도하려는 순간 적 탄환이 한 상병의 가슴을 관통, 2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한 상병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2001년 그의 모교인 제주도 하귀초등학교 교정에 흉상으로 건립돼 나라 사랑의 소중한 교훈을 심어 주고 있다. 또 2010년에는 해병대를 빛낸 호국 인물에도 선정돼 참군인의 표상으로 전군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
362 | 현충탑(평택시 비전동)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평택시 | 평택시 | 탑 | 기타 | 1950 | 0 | 1957-08-15 | 평택 덕동산 정상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628위의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평택시 비전동)’을 건립하였다. 평택군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7년 8월 15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평택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363 | 광양 5의사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향교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2m 폭 0.5m | 1966-01-10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광양읍 시장에서 서경식·박용래·김상후· 정길화·정용현 등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1천여명의 군민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서경식(徐璟植), 박용래(朴龍來), 김상후(金尙厚)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양향교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6년 1월 10일 이 비를 세웠다. |
364 |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수원시 |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학사지원팀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79 | 0 | 1990-02-01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도왔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
365 | 의사 일천 정수기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경주시 | 건천읍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96 | 0 | 1968-01-01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의 원로 김창숙 선생과 연락을 취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웠다. 이에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366 | 충혼비(전주생명과학고)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9-05-01 | 전주생명과학교 교정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학교 출신 학생 28명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당시 전주농고에서는 모교 출신 양은섭, 장재원, 박종기, 홍준기 등 28명의 숭고한 애국열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우러러 받들고자 1985년 5월 27일 이 비를 세웠다.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당시 전주농림고등학교 학생들은 조국의 통일과 자유를 위하여 책과 붓 대신에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출전하여 포항, 38선 전투 등에서 무공을 세웠지만 불행히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 전주생명과학고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67 | 박차정의사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금정구 | 동래여자고등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1910 | 0 | 2001-01-01 |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한 아버지와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와 둘째오빠 박문호 등 항일 운동가 집안이다. 그는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체포, 구금당했다. 1930년 근우회 활동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 중 중국으로 망명, 중국 남경에서 약산 김원봉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의열단 조선혁명 간부학교 제 1기 여자교관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 어깨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에 사망하였다.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368 |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비석 | 3·1운동 | 1895 | 1971-04-01 | 하승현은 경상남도 함양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함양 장날 김한익이 주도한 함양읍 만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김한익이 붙잡혀 가게 되자 하승현이 군중들을 데리고 노도와 같이 뒤를 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 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역시 순국하였다. 병곡면민은 하승현 선생의 순절을 기리는 뜻에서 1953년 면장의 발의와 군수의 동의로 기념비를 상림 위쪽 뇌계천 도로변에 세웠고 군내의 뜻있는 분들이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솔숲에 사적지를 만들었으며 1967년에는 상림에 의거 기념비를 군에서 건립하였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 |
369 | 호국 유공자 공적비(용인시) | 국가수호 | 2010-02-12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비석 | 기타 | 0 | 가로 23m 세로 6m 높이 8.05m | 2009-07-01 | 용인중앙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유공자 공적비(용인시)’를 건립하였다. 용인시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7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용인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370 | 6.25 및 월남참전 기념비(김천시 구성면) | 국가수호 | 2012-05-16 | 경상북도 김천시 | 6.25및월남참전유공전우회 김천시 구성분회장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2009-12-20 |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호국정신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구성면은 이곳 출신으로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10년 7월 9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구성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구성면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371 | 김인전선생추모비 | 독립운동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김인전선생 추모사업추진 위원회 | 비석 | 해외운동 | 1876 | 2004-03-16 | 김인전은 1876년 10월 7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촌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하여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고, 또한 27세 때인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1906년 11월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교육 계몽운동에 뛰어 들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현실화되자 선생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선생은 전주 서문외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 예수교 장로회 성경학교 교수·전북노회장 등의 교직을 이용한 전도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무장 독립투쟁의 필요성을 새삼 인식하기 시작하여 1922년 10월 1일 상해에서 한국노병회의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심신의 피로가 겹쳐 상해 동인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가 순국하였다. 1980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 |
372 | 6·25 참전 유공자비(용화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 용화면 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10-20 | 6·25참전유공자회 용화면분회는 2006년 10월 용화면 용화리 848-1에 용화면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넋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하여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373 | 6·25참전국적근산지구전투기념공원 | 국가수호 | 2016-11-23 | 강원도 화천군 | 육군제6685부대 | 공원 | 6·25전쟁 | 1950 | 2014-06-15 | 6·25한국전쟁 당시 세계 평화 수호를 위해 유엔군 16개국이 참전하였었다. 특히 화천의 적근산지구와 산양리지구에서 전공을 올린 에티오피아군 및 콜롬비아군의 영웅적인 참전용사의 공헌을 기리고자 이 곳 적근동에 2개 참전국의 전투기념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적근산지구 전적비는 1983년 10월 27일 상서면 마현리 산89번지에 건립되었으나,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위치하여 2014년 6월 15일 본 기념공원으로 이전 설치하게 되엇으며, 콜롬비아 산양리지구 전적비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군 병사 다니엘 우르따도 등 3명이 전쟁 중에 전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신규 설치하였다.(이하 하단 참조) | |
374 | 박양규공 충혼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전라남도 나주시 | 나주경찰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1-04-20 | 고 박양규는 6.25당시 나주경찰서 순경으로 재직 중 1950. 7. 29. 나주시 교동소재 나주중학교에서 적정 탐지차 매복 근무 중 단신으로 적과 교전하며 적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사한 사실을 기리며 건립하였다. |
375 | 충혼탑(삼척시 원덕읍)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삼척시 | 원덕읍 | 탑 | 6·25전쟁 | 1950 | 2000-06-06 | 한국전쟁 중 삼척시를 수호하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순절한 삼척시 원덕읍 출신 전몰군경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 |
376 | 안성시 6.25 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10-11-03 | 경기도 안성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안성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9-28 | 6·25참전유공자회 안성시지회는 2005년 9월 28일 경기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 112-52 대림동산 내에 안성시 6·25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여 6·25전쟁 기간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안성시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기윟위해 건맂립하였다. |
377 | 최범섭중령 상 | 국가수호 | 2014-05-20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1968 | 2010-10-21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상무대 내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최범섭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에서 2010년 10월 21일 동상을 건립했다. 최범섭 소령은 1966년 6월, 베트남에 파병된 태권도 교관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1964년 9월, 의료지원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면서부터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병해 남베트남의 군사교육기관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태권도가 한국군을 알리고 위용을 과시하는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 시기에 파병됐던 최범섭 소령은 메콩강 남쪽 '껀토'에 위치한 남베트남군 제4군단의 태권도 교육을 담당하는 제4지구대장이었다. 당시 껀토 일대에 주둔한 한국군은 태권도 교관단뿐이었다. 따라서 최소령은 그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40여명의 한국 민간인 기술자에 대한 후견인 역할까지 담당해야 했다. 껀토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의 아비규환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특히 1968년 1월 31일에 시작된 베트콩의 음력 1월 1일 '뗏(Tet)공세'는 치열했다. 남베트남군의 많은 병력이 고향을 향해 휴가를 떠났으며, 우방국 병력들도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1월 31일 새벽,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최범섭 소령이 근무하고 있던 껀토에서도 베트콩의 기습공격은 예외가 없었다. 그때 제4군단사령부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최범섭 소령은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한국인 기술자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인 2월 1일 아침10시경, 보좌하사관 윤청길 중사를 대동하고, 껀토 시내로 나가 민간인 기술자들을 소집했다. 12시까지 20여 명의 기술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최범섭 소령은 그들을 남베트남군 제4군단 내 자신의 숙소로 긴급 대피시켰다. 이어 남베트남 군 관계자에게 장갑차 1대와 칼빈 소총 20정을 대여받아 민간인 기술자들을 무장시켜 자체 경비에 임하면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내에 침투한 베트콩들의 도발은 점점 더 격화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만 했다. 최범섭 소령은 나머지 20여 명의 동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나머지 20여 명의 기술자를 구출하기 위해 2월 6일 윤청길 중사를 대동하고, 시내로 달려갔다. 최범섭 소령이 보좌관 윤중사와 함께 시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민간인 기술자들을 소집하고 있을 때인 10시 20경이었다. 최 소령 일행은 갑자기 조우한 베트콩 5명과 총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과 교전에서 윤청길 중사가 초전에 전사했다. 최 소령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5발이 장전된 권총으로 응사하며, 교전을 계속한 결과 베트콩 2명을 사살했지만 결국 그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최범섭 소령의 불타는 사명의식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 ||
378 | 산남의진 죽장 입암리 사적비 | 독립운동 | 2016-11-23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입암서원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0 | 19850101 | 1907년 8월 하순 산남의진(山南義陣) 대장 정용기(鄭鏞基)는 관동(關東)으로 북상하기 위해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일군 죽장면(竹場面)에 주둔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청송 방면에서 입암(立巖)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우재룡(禹在龍)·김일언(金一彦)·이세기(李世基) 세 부장을 각기 길목에 매복시키고, 자신의 본대는 9월 1일 새벽에 입암을 기습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세기 부장이 입암에서 일본군 수명을 발견하고 성급하게 공격하다가 적의 복병에게 집중공격을 받아 패하였다. 이때 정용기는 갑작스런 포성을 듣고 밤중에 입암으로 진군하다가 일본군과 새벽까지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 수십명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산남의진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달려와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인솔하였다. |
379 | 6·25 참전용사 선양비(풍기읍)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영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영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0-12-28 | 풍기읍 6·25참전용사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0년 12월 28일 영주시 풍기읍 동부리 463-1(풍기문화의 집 경내)에 풍기읍에 거주하는 6·25전쟁 참전유공자 192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선양비를 세우고 그 비에 이름을 각인하였다. | |
380 | 순직경찰관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영암군 | 영암경찰서 | 탑 | 6·25전쟁 | 1950 | 높이 3.5m/ 기단 1m | 1999-03-31 | 영암경찰서 근무 중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6·25 때 전사 혹은 공무중 순직한 경찰관 영령 108위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영암경찰서가 1999년 3월 31일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137-2(영암경찰서내 후정녹지)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에는 북한군 500명과 군내에서 교전 중 산화한 김준병 경감 등 108명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
381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울주군) | 국가수호 | 2010-02-12 | 울산광역시 울주군 | 무공수훈자회 울산광역시지부 울주군지회 | 비석 | 기타 | 0 | 탑높이 3m, 둘레 7.2m | 2009-06-12 | 1950년 민족상잔의 6·25전쟁으로 한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을 구해 낸 역전의 용사들 그리고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울주군 무공수훈자들의 위훈과 충정을 기리고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건립하였다. |
382 | 순국선열 추념탑 | 독립운동 | 2003-02-04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독립공원관리사무소 | 탑 | 기타 | 1992 | 높이 22.3m, 좌우 길이 40m | 1992-08-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안중근(安重根, 1878~1910)·강우규(姜宇奎, 1859~1920)·이봉창(李奉昌, 1900~1932)·윤봉길(尹奉吉, 1908~1932) 같은 의열투쟁, 1919년 3·1독립운동,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같은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거나 혹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8월 15일 이탑을 세웠다. |
383 | 6·10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중앙고등학교 | 비석 | 문화운동 | 1926 | 0 | 1983-10-10 | 1926년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가 붕어하자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 전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격문 3만매를 인쇄하여 각급 학교에 배부하였고 융희황제 인산일인 6월 10일 장례행렬이 단성사 앞 연도를 통과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십 명의 학생이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격문 1천매를 군중에게 살포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 시위로 100여명이 부상하고 2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체포되었다. 1983년 6월 10일 동아일보사와 중앙고등학교 교우회가 6·10만세운동 때 활약한 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
384 | 6·25 참전 기념비(신천리) (45-2-17동일장소)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신천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8-06-25 | 신천리 주민 일동은 1998년 6월 25일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 518-2에 6·25전쟁에 참전한 신천리 출신 청소년 62명(전사자 11위, 생환자 51명)의 공적을 기리고 위태로웠던 국토와 민족을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에 심신을 바친 갸륵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하여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385 | 충혼비(인제군) | 국가수호 | 2004-05-08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1-06-26 | 인제군 하남고개 정상에 6·25전쟁 중 향토를 지키려다 순국한 결사대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인제기린향우회는 이곳 출신 결사대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81년 6월 26일 기념비를 세웠다.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향토가 유린될 때, 한명대·양일용·박설철·임종덕 등 이 지역 청년들은 고향과 국가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가 산화했다. 기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386 |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목천읍행정복지센터 | 비석 | 3·1운동 | 1919 | 1989-03-14 |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무렵 천안군 목천읍에 있는 목천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 약 120명[목천 기미 독립 만세 운동 기념사업회에서는 171명으로 계산]이 교정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목천읍 읍내로 진출하여 일본 헌병대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를 앞장서서 이끈 인물로 네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하여 오는 기록이 없다. 당시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의 나이는 13~23세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각지로 파급 확산되어 4월 1일은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투쟁 의거인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니 이곳 목천 학생의거는 바로 천안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으로서 주동학생 4명이 체포·구금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191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1989년 3월 14일에 목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에 높이 3.5m의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387 |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 국가수호 | 2016-11-23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 기념관 | 6·25전쟁 | 1951 | 0 | 2015-01-05 | - 지평의병 :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화서학파 문인 및 포수 400명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형성된 지평의병은 을미의병의 시초로써 원주·단양 등지에서 큰 공을 세우고 강원·충북 의병봉기의 도화선 역할을 함 - 지평리 전투 : 1951년 2월 13일~15일 미국과 프랑스 연대가 중공군 5개 사단을 물리친 전투로, 중공군에게 첫 패배를 안기고 1·4후퇴 이후 연이은 패배로 불리해진 아군의 전세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 |
388 |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5-09-26 | 국방부는 1975년 9월 26일 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동 13(소요산관광지앞)에 6·25전쟁때 참전한 벨기에군(지상군 1개대대)과 룩셈부르크군(지상군 1개소대)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당시 벨기에는 900명으로 편성된 보병대대를 편성했고 룩셈부르크는 44명으로 편성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벨기에 A중대에 배속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1951년 1월 30일 부산에 도착해 3월 말 동두천에 진출했다. 이어 지금의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소요산 입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후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돼 적성의 신산리에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했다. 전선이 북상됨에 따라 대대는 연천-철원을 거쳐 김화로 이동하면서 학당리 전투와 잣골 전투를 잇달아 치른 후 정전을 맞았다. 벨기에 대대는 참전기간 중 104명의 전사자와 336명의 부상자, 1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룩셈부르크 소대는 2명의 전사자와 1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
389 | 무공수훈자 전공비 (마산)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경상남도지부 마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9-10-15 | 마산시 무공수훈자회는 1999년 10월 15일 마산시 합포구 석전동 석전삼거리 소공원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토수호를 위해 그리고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마산시 출신 무공수훈자 214명의 공훈을 선양하고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자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고, 전공비 뒷면에 214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
390 | 6·25 참전 유공자 기념탑(보은군) | 국가수호 | 2010-03-10 | 충청북도 보은군 | 6.25참전유공자회 보은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4-03-31 | 6·25참전유공자회 보은군지회는 2004년 3월 보은군 보은읍 죽전리 산11-3(남산공원 내)에 보은군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나라사랑정신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유공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391 | 한국전 UN프랑스군 원주지구 전투전적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흥업면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9-11-29 | 1951년 1월 9일부터 15일까지 한국군 장병 2명을 포함하여 프랑스 대대 최초로 15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의 명을 받들어 프랑스 대대는 마장-외남송-구억천 지역에서 최초의 총검 전투를 펼쳤다.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강릉원주대학교 및 한국전 UN프랑스군 참전기념사업회가 2009년 11월 건립하였다. |
392 | 부자 조종사 흉상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청주시 |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동상 | 기타 | 1984 | 2009-07-20 | 충북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앞에 부자 조종사인 박명렬 소령과 박인철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한국국방안보포럼에서 2009년 7월 20일 이 흉상을 세웠다. 아버지 박명렬 소령(공군사관학교 26기)은 공군 제17전투비행단 소속이었으며 팀스피릿 훈련중 F-4E를 조종하다 사고로 1984년 순직하였다. 박인철 대위는 전투기 조종사로 2007년 7월 20일 KF-16 야간비행 훈련 중 기체가 황해로 추락하는 사고로 순직하였다. 어머니 이준신과 공군 조종사인 아버지 박명렬의 장남이다. 사고 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공군사관학교 52기로 졸업하였으며 2004년 임관하였다. 순직으로 1계급 특진, 대위가 되었다. 2007년 7월 23일 충청남도 서산시의 20전투비행단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아버지 묘소 옆에 나란히 묻혔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비행 전 남겨 둔 머리카락이 대신 묻혔다. 아버지 순직후 어머니와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아버지에 이어 2006년 조종사의 꿈을 이루었다. | |
393 | 철원군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10-11-03 | 강원도 철원군 | 철원군수 | 비석 | 기타 | 1950 | 2008-04-15 | 철원지역 6.25 및 월남전참전유공자의 공훈 | |
394 | 지리산함 전사자 충혼탑 | 국가수호 | 2013-11-22 | 강원도 강릉시 | 해군 제8385부대(해군 제1함대사령부) | 탑 | 6·25전쟁 | 1951 | 너비 11mX9m, 높이 8.95m | 2013-05-27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통일공원 내에 6·25전쟁 당시 원산만 봉쇄작전 임무수행중 전사한 지리산함 승조원 57인을 추모하기 위해 해군 제1함대사령부에서 2013년 5월 27일 이 탑을 건립했다. 맥아더 장군의 '오퍼레이션 원산' 명령에 따라 1950년 10월 2일 원산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포항 전선을 출발하여 하루 평균 15마일의 속도로 원산을 향해 돌격했다. 해군의 전폭적인 함포 사격과 측방 보급은 원산으로의 진격을 한결 더 수월하게 해 주었다. 10월 9일, 국군과 미 해병대는 원산만 입구에서 접전을 벌였고, 10월 10일에 원산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다. '오퍼레이션 탈리보드'는 미국 육군의 작전명으로, 오퍼레이션 원산에 이어서, 뒤따라 상륙한 작전이다. 육군 제3사단은 10월 2일, 38선을 돌파하고 양양에 동해 사령부를 설치하고 원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이후 국군은 고성, 통천 등에서 거센 저항을 받았으나 진격 8일 만에 원산 남부에 도착했다. 중공군은 고립된 지형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험준한 산지를 이용해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10일, 원산 시가지에는 아침부터 접전이 시작되었다. 10월 13일, 원산 비행장을 점령하고 다음날 10월 14일에 원산 점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작전을 마무리하였다. 지리산함은 1950년 5월 27일 해군장병 및 국민의 성금으로 미국에서 도입했다. 1950년 7월 25일 부터 1951년 12월 26일 침몰시까지 유엔 해군과 연합 작전 최선두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1년 12월 24일 부산을 출항하여 상기의 12월 25일 원산만 봉쇄작전(원산해역 경비작전) 수행 중 12월 26일 적의 기뢰에 접촉, 침몰했다. 이때 함장 이태영 중령 등 승조원 57명이 전사했다. |
395 | (진해중·고 출신) 한국전쟁 학도병 참전비 | 국가수호 | 2015-10-14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진해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1998-12-31 | 6ㆍ25전쟁당시 진해 중ㆍ고등학교 재학생들의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신 13명과 참전하신 194명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호국정신을 기리고 재학생들에게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고 국가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됨 |
396 |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공원녹지과(탑골공원 관리사무소) | 동상 | 문화운동 | 1861 | - | 1966-05-19 | 천도교 3대 교주로서 1919년 2월 조선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조선독립을 선언 하고 적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으신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 선생을 추모 |
397 | 6·25 학도병 참전 기념상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00-06-26 |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이상에 따라 결정된다. 민족상잔의 아픔인 6.25사변 50주년에 즈음하여 학도병의 몸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신 아름다운 영혼의 거룩한 희생정신과 생존하시는 서른여덟 분의 호국정신을 여기에 새긴다. "광교의 푸른 봉에 동이 터오니 할 일 많은 조국의 날이 밝았다. 일어서라 장부야, 큰 뜻을 품고 눈부신 새역사의 쟁기를 몰자," 목청 높여 부르던 교가를 실천하듯 참전 선배 동문들은 큰 뜻을 품고 그 가치를 높이섰다. 젊은 청춘을 바쳐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고 꿋꿋한 역정을 뒤로한 자랑스런 참전 동문 선배들의 고결한 숨결은 오늘 이 지상 곳곳에 공기처럼 퍼져나간다. 모든 사람은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용기있는 사람은 생명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한다. 광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 우리 삶의 귀감을 삼자. 6.25참전 선배들의 조국사랑을 뜨거운 정열과 냉철한 지성으로 참전 동문 선배들이 머물던 이 교정에 그 뜻을 새겨 볓별빛처럼 후대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
398 | 캐나다 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5-11-07 | 1951년 4월 24일과 25일에 치른 가평지구 전투에서 희생한 캐나다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참전기념비이다. 캐나다군은 6·25전쟁에 참전하여 309명이 사망하고 1203명이 부상하였으며, 32명이 실종되는 등 제1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 1975년 11월 7일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주관하여 세웠고, 1983년 12월 30일 가평군이 재건립하였다. 부지면적은 1653㎡이고, 기단의 높이는 0.7m, 총 높이는 6.5m이다. 기단의 중앙에 비문이 새겨져 있고, 비 오른쪽에는 참전 약사가, 왼쪽에는 캐나다 상징탑이 세워져 있다. 2003년 7월 29일 6·25전쟁 휴전 50주년을 맞아 캐나다 측에서 입구 오른쪽에 기념비석을 세웠다. 매년 4월 마지막 주에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 |
399 | 곡성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11-10 | 전라남도 곡성군 | (사)국조단군곡성숭모회 | 탑 | 3·1운동 | 1919 | 탑 높이 11.4m | 2011-03-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9일 곡성읍 장날 신태윤·정래성·김경석·김중호·양성만·박수창·김기섭·김태수 등의 사전 준비로 장터에서 신태윤과 곡성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신태윤(申泰允, 1884~1962), 정래성(丁來聖)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단법인 국조단군곡성숭모회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서 2011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400 | 충혼탑(완주군)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완주군 | 완주군수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3-10-07 | 완주군 삼례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용사 등 완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완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3년 10월 7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0년 6월 6일 현재의 장소에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완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완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01 | 6·25 참전 유공자비(매곡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매곡면6.25참전유공자회 변학근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11-17 | 매곡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49-14에 매곡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32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402 | 충혼비 | 국가수호 | 2005-10-18 | 전라북도 정읍시 | 정읍시 영원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2.2M X 0.6M X 1.4M | 1954-08-15 |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험에 처해있을때 영원지역의 향토방위를 위해 싸우다 순국한 군인고 경찰등 59명의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함 |
403 | 건국청년운동기념비 | 국가수호 | 2015-10-14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사)대한민국건국회부산광역시본부 | 비석 | 6·25전쟁 | 0 | 1995-04-20 | 1945년 광복이후 전국에서 청년과 학생들이 궐기하여 공산당과 항쟁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터전을 닦고, 6.25남침때는 총을 메고 싸워 자유수호 호국의 초석을 다진 것을 기념하고자 이 비를 세움 | |
404 | (의정부)월남전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의정부시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의정부시지회 | 비석 | 월남전쟁 | 1965 | 2002-05-31 |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자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써 1965년부터 베트남에 참전했다. 이들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은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경험과 미군의 지원으로 국방력을 제고할 수 있었으며, 공산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는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 | |
405 | 광주광역시 6.25전쟁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전몰군경유족회 광주광역시지부 | 조형물 | 6·25전쟁 | 가로 4.8m, 세로 2.248m | 2017-05-30 | 광주광역시 출신 6.25전쟁 전사자 1,891명을 명비에 각자하여 그들의 넋과 얼을 기리고 있음 | |
406 | 6·25전쟁 참전 유공자비(부강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세종특별자치시 | 세종특별자치시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7-01 | 청원군 부강리에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부용면 재향군인회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헌신한 이곳 출신 임사수, 오창균, 박복만, 박윤기 등 호국용사의 숭고하고 거룩한 애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7월 1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부용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용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07 |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남도 양산시 | 양산시 | 동상 | 기타 | - | 가로 3.1m, 세로 1.5m, 높이 2.3m | 2017-12-18 | 우산(右山) 윤현진 선생은 양산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고 재무차장을 지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항일 독립운동가인 윤현진 선생을 기리고 그의 애국과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의 흉상을 제작 설치하였다. |
408 | 6·25 참전용사 기념비(북이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북이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4-06-23 | 북이면 재향군인회는 2004년 6월 청원군 북이면 신대리 4-8(북이면사무소 광장)에 북이면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409 | 백운의 혼 | 국가수호 | 2008-09-05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한넝쿨산악회(이영구, 박순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9-06-20 |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한산 백운암을 거쳐 후퇴하던 중 장교 1명, 사병 1명이 남아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하다가 서울이 함락되자 북한산에서 자결하였다. 1959년 6월 20일 두 용사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운의숙(애국청년단체)에서 이 곳에 ‘백운의 혼’이라는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
410 |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 | 독립운동 | 2013-11-13 | 대구광역시 남구 | 대한불교조계종안일사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0 | 1927-01-01 | - 1915년 음력 1월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달성친목회 회원 13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을 서약 -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 - 1919년 3.1운동 뒤에는 상해임시정부를 돕기 위하여 군자금 조달운동이 벌어지는 등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됨 | |
411 |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터 표지석 | 국가수호 | 2017-11-23 | 서울특별시 금천구 | 6.25참전유공자회 금천구지회 | 비석 | 6·25전쟁 | 2016-12-08 | 시흥기주사령부 표지석 터는 6.25전쟁 초기 한강방어선전투를 지휘했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흥일 소장)가 있었던 곳이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 전차가 창경원, 동대문, 돈암동 등지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본부가 시흥보병학교(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창동, 미아리 전투를 치르며 분산되어 한강을 건너온 병력을 수용해 혼성 수도사단, 혼성 제2사단, 혼성 제3사단, 혼성 제7사단,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등 예하사단을 편성했다. 각각의 사단은 연대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지형물인 한강을 이용하여 오늘날 양화교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24㎞ 구역 및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특히 여의도 비행장, 영등포, 노량진, 신사동 등에 이르는 한강이남지구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 제3,4사단, 제1사단(예비), 제105전차여단 등의 남진을 저지했다. 그 결과, 국군은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 ||
412 | 3·1운동 의거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정관읍주민자치위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9-04-05 | 3·1운동 당시 정관면의 좌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1979년 4월 5일 건립한 의거비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관면에서는 기장군 교리 김수용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여러 부를 오해영이 입수하여 오진환·김종복에게 전달하였고, 오진환·신두성 등 면내의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좌천 장날을 기해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3월 9일(음), 좌천시장에서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 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두성·김윤희·정지모 등은 검거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
413 | 선산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구미시 | 비석 | 기타 | 1993 | 1993-10-22 | 일제강점기 활동한 선산출신의 독립유공자로 권오환(權五煥, 1892~1957), 김관묵(金寬默, 1894~1967), 김의경(金義景, 1898~1949), 이원길(李元吉, 1893~1920),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3·1독립운동으로, 황진박(黃鎭璞, 1888~1942)은 의열투쟁으로, 김영득(金榮得, 1908~1940), 이종식(李鍾植, 1891~미상), 장재성(張在星, 1914~1939)은 국내항일로, 남상순(南相淳, 1926~1978), 육홍균(陸洪均, 1900~1983)은 일본방면 항일투쟁으로, 김종철(金鍾哲, 1924~), 전재덕(全在德, 1924~)은 광복군에 참여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구미시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3년 10월 22일 이들 각각의 비를 세웠다. | |
414 | 연천군 자유수호 무공 수훈탑 | 국가수호 | 2007-10-18 | 경기도 연천군 | 무공수훈자회 연천군지회 | 탑 | 6·25전쟁 | 2007 | 0 | 2007-06-18 | 연천군 은대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자유수호 무공수훈탑’을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연천군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6월 18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에서 연천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415 | 6·25 참전 유공자비(남이면)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남이면사무소 총괄담당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6-26 | 남이면 재향군인회는 2003년 6월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608-4(남이면복지회관 앞)에 남이면 출신 6·25 참전유공자 홍관표 외 208명의 나라사랑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416 |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 독립운동 | 2013-02-18 | 서울특별시 종로구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사적지 | 한말구국운동 | 1896 | 독립협회창립총회 터는 영국 왕립아세아협회에서 소장한 '서울지도'(1902)에 광화문 앞 육조거리 동편으로 내부와 학부사이에 독립협회 창립 총회였던 외부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의 발의로 예전 중추원 자리인 외부 건물을 빌어 창립총회를 가질 당시 독립협회는 독립문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급관료클럽이었다. 그러나 1897년 8월 29일 모화관을 개수해 문을 연 독립관에서 첫 토론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시민과 학생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명실상부한 민중계몽단체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리고 1898년 2월 21일 구국선언 상소를 올린 것을 시발로, 만민공동회 등을 통한 정치개혁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룬 독립신문 계열과 개신 유학자들과 중인층이 중심을 이룬 황성신문 계열의 주도하에 1898년 12월 해산당할 때까지 민중과 함께 하는 점진적인 개화 개혁을 추구하며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열강의 이권침탈과 내정간섭에 대한 반대운동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주체성을 일깨웠고, 토론회와 의회개설운동을 통해 민중의 언로를 터주면서‘우리’라는 민족적 동질의식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서 독립문의 건립, 개국기원절 경축행사의 개최, 태극기의 게양과 애국가의 보급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 상징의 보급을 통해 대중적 차원에서 애국심과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였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3ㆍ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조야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 ||
417 | 참전용사 유공비(대소원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대소원분회 | 비석 | 기타 | 2007 | 0 | 2007-12-20 | 충주시 이류면 출신 6.25 및 월남전 전사자 25위, 참전유공자 303명을 포함 총 328명의 명단을 각인하여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나라 사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가안보 교육장으로 활용 |
418 | 이천시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9-05-25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04-25 | 이천시 관고동에 6·25전쟁에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이천시 6·25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천시는 한인수, 권오동, 이병우, 이영순, 이기남 등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4월 25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이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419 |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 연제근상사 특공대상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6.25참전유공자회 포항시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0-09-17 | 1950년 9월 17일, 형산강 도하작전 당시 3사단 22연대 분대장이었던 연제근 이등중사가 분대원들과 함께 도하 돌격대를 자원 편성,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다. 따라서 포항시는 연제근 이등중사의 호국정신과 함께 도하작전 당시 목숨을 바쳐 적을 섬멸한 분대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특공대상을 건립. | |
420 | (동대문구) 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서울특별시지부 동대문구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2014-12-29 | 동대문구 출신 6.25전쟁,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추모 사망자 : 1,620명 생존자 : 2,880명 합 계 : 4,500명 | |
421 | 6·25 참전 국가 유공자비(풍천면) | 국가수호 | 2011-07-21 | 경상북도 안동시 |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0-12-07 | 6·25참전유공자 풍천면분회는 2010년 12월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1053-11번지에 6·25전쟁에 참전해서 순국한 안동시 풍천면 출신 국가유공자의 넋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6·25참전국가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
422 | 양평의병전투지-상원사 | 독립운동 | 2014-07-18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불교조계종상원사 | 장소 | 의병운동 | 1908 | 0 | 1216-01-01 | 상원사는 정미의병 당시 양평지역 의병진의 거점으로서 1908년 8월 24일 일본군의 보복으로 와해된 용문사에 이어 제2 거점으로서의 의병항쟁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4년 7월 18일 독립운동 관련 현충시설로 지정됭되었다. |
423 | 6.25참전용사명예선양비(대구 북구) | 국가수호 | 2012-05-16 | 대구광역시 북구 | 대구시 북구청장 | 비석 | 6·25전쟁 | 0 | 2001-06-25 | 대구 관음공원에 2001년 6·25전쟁에서 산화한 대구시 북구 출신 강상민, 박시동, 이상열 등 전사자의 영령을 추모하고 국주환, 안님, 전찬지 등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 북구 6·25 참전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6월 2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구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북구청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424 | 6.25참전기념비(울산시 남구) | 국가수호 | 2012-11-12 | 울산광역시 남구 | 울산광역시남구청 | 조형물 | 6·25전쟁 | 1950년 | 길이 7.8m , 높이 3.3m, 두께 1.8m | 2012-06-25 | 울산광역시 남구청은 2012년 6월 25일 울산 남구 출신 6·25참전용사들을 기리며 시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선암호수공원 무궁화동산에 6·25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길이 7.8m, 높이 3.5m, 두께 1.8m 크기의 황동 부조로 제작되었고, 배면부에는 울산 남구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하거나 사망한 733명과 생존자 52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425 | 김구선생 은거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 | 비석 | 해외운동 | 1876 | 비석 | 1990-03-01 | 이 비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일본장교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백범 김구선생의 공적 및 애국정신을 받들고자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 |
426 | 영주시참전국가유공자 충훈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상북도 영주시 | 영주시참전유공자선양비운영추진위원회(박태승) | 탑 | 기타 | 0 | 0 | 2009-09-15 | 풍기읍 산법리에 2009년 이 고장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해 ‘영주시 충훈탑’을 건립하였다. 영주시 참전유공자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강갑신, 곽순명, 이봉구, 권병선 등 6·25전쟁 참전유공자와 권영기, 안재철, 최웅집, 박한성 등 베트남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불멸의 등불로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9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에서 영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가슴에 안고 포연 속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427 | 송서규대령 상 | 국가수호 | 2014-05-20 | 전라남도 장성군 | 육군보병학교 | 동상 | 월남참전 | 1967 | 0 | 2010-10-21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상무대 내에 베트남 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한 송서규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에서 2010년 10월 21일 이 동상을 세웠다. 1967년 11월6일 주월 한국군의 닌호아2호 작전시 고 송서규 대령의 전사는 대대장이 최전방 전투원으로 직접 참가했다가 전사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해 10월 24일 2개 대대 규모의 베트콩이 9사단 사령부 남쪽 2km 닌호아 시가지를 점령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베트콩은 산악 정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시가지에 2개 대대를 투입한 공세는 대담한 도발이었다. 반면 9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콩을 찾아 산악 정글을 헤맬 필요 없이 제발로 찾아온 그들을 안방에서 섬멸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사단은 즉각 29연대 2·3대대를 투입, ‘닌호아1호’ 작전을 전개했다. 문제는 베트콩이 시가지를 점령하고 있어 아군의 포격으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 오히려 그들의 심리전에 말려들 가능성이었다. 그 점을 감안해 채명신 주월사령관은 "공격 준비 사격 없이 적을 격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자체 화력만으로 공격을 감행한 29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적 주력은 도주해 버렸다. 아군의 약점을 간파한 베트콩은 11월6일 새벽, 또다시 1개 대대 규모로 닌호아를 점령했다. 29연대는 이번에도 2·3대대를 투입, 닌호아2호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2대대장 송서규 중령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후임 대대장과 함께 출동했다. 송 중령은 지난 작전의 교훈에 따라 제한된 포병 화력을 지원받아 4개 중대로 베트콩을 포위한 후 그들을 압축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작전은 진척되지 않았다. 헬기에 탑승해서 지휘하던 송 중령은 작전이 지연될 경우 닌호아1호 작전과 같이 적의 주력이 야음을 이용, 도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진격이 부진한 6중대 지역에 착륙한 송중령은 자신이 직접 중대를 지휘하면서 작전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송 중령은 화기소대를 동쪽으로 우회시킨 후 전 중대가 일제히 공격하도록 했으나 이미 지쳐 있던 장병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오후 5시가 되면서 상황이 급박해지자 송 중령은 더욱 강력히 밀어붙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 부상당한 3소대장이 전사하자 송중령은 3소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병사들과 함께 50여m를 전진했다. 이어서 병사의 유탄 발사기를 들고 사격을 계속하면서 진격하던 송중령은 30m 전방 농가에서 날아온 적의 집중 사격에 가슴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송 중령이 전사한 후 다음날까지 계속된 작전에서 29연대는 베트콩 1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전사 38명, 부상 51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끝난 후 정부는 송서규 중령에게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했으며 전쟁기념관은 호국인물로 선정, 그를 추모하고 있다. |
428 | 6·25 참전 학도병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여수시 | 여수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탑1 | 1993-06-25 | 6·25참전학도병건립추진위원회는 1993년 6월 25일, 자원 입대한 전남 동부지역 학도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여수시 오림동 123번지 진남체육공원 내 학도병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의 건립에는 학도병동지회의 모금과 전라남도와 여수시의 지원이 있었다. 1950년 7월 전남 여수 76명, 순천 54명, 광양 13명, 강진 8명, 고흥·기타 16명 등 180명의 학도병이 전국 최초로 국군 1사단 15연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이들은 6개 소대의 학도중대(중대장 육사8기 정태경)로 편성돼 9일간의 기초훈련을 받은 뒤 전선에 배치되었다. 진주 촉석루전투, 함안전투, 진동사수전투 등 낙동강 최후 방어 전투에 미군 25사단과 함께 투입돼 격전을 치러 입대병력 180명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다. |
429 | 월남전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9-4-26 | 경기도 양평군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 조형물 | 월남참전 | 0 | 2018-6-19 | '18년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월남전참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공헌한 월남전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
430 | 매천사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구례군 | 황승연(유족) | 생가 | 한말구국운동 | 1855 | 창의문, 유물관 | 1962-04-01 | 황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황현은 조선 말기 절의를 지킨 우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나 34세에 생원 회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구례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쳤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껴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그의 나이 56세,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431 | 백세각 | 독립운동 | 2012-10-17 | 경상북도 성주군 | 송만수 | 생가 | 3·1운동 | 1919 | 0 | 1551-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말 4월 초 성주 지역 야성송씨 문중이 여기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서명과 성주지역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논의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준비하여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송준필(宋浚弼, 1869~1943), 송홍래(宋鴻來, 1876~1953), 송회근(宋晦根, 1877~1949), 송규선(宋圭善, 1880~1948), 송훈익(宋勳翼, 1884~1961), 송천흠(宋千欽, 1888~1968), 송우선(宋祐善, 1894~1942), 송문근(宋文根, 1895~1963), 송인집(宋寅輯, 1896~1961), 송수근(宋壽根, 1896~1969)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432 | 서울학도포병참전자명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용산구 | 용산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0 | 2015-04-24 | 6.25전쟁 당시 용산고에서 출정식(1950.10.20.)을 하고 학생 신분으로 참전한 학도포병 341명의 애국정신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
433 | 6.25 참전유공자 선양비(북구) | 국가수호 | 2016-04-27 | 울산광역시 북구 | 6.25참전유공자회 북구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2015 | 2015-12-22 | 현재 울산 북구지역 6.25참전유공자의 생존자 233명과 사망자 790명에 대한 명각대상자1,023명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전후세대에게 안보 의식과 청소년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가 위한 현충시설로 지정 | |
434 | 미국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가평군 |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16-02-04 | 가평은 1·4후퇴 이후 6·25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던 용문산-가평지구 전투의 현장이다. 해당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영연방 4개국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족적을 가평에 남긴 미군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 사실 美 2사단 72전차대대는 1951년 4월 가평지구 전투에서 목동~대원사 능선을 따라 남하하는 중공군을 격퇴함으로써 가평지구 전투 승전의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美 213야전포병대대는 1951년 5월 26일 북면 홍적리 일대에서 240명의 병력으로 4000여 중공군을 섬멸했다. 특히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중공군 1180명을 사상(死傷)함으로써 ‘가평의 기적’이라 명명되며, 당시 대대를 이끈 J. Frank Dally 준장(전투 당시 중령)은 2015년 5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가평에 주둔했던 美 40사단은 주로 타 지역에서 활약했지만 전투 이외의 방식으로 가평에 ‘2달러의 기적’을 일궈냈다. 전화의 폐허에서도 학구열을 놓지 않은 한국 학생들의 모습에 감동받은 美 40사단은 Joseph Cleland 사단장의 주도 하에 15000명 장병들이 2달러 씩 갹출해서 가이사중고등학교(現 가평고등학교)를 세운 것이다. 학교의 명칭도 美 40사단의 첫 전사자인 Kenneth Kaiser Jr 하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美 40사단 참전용사들은 1987년부터 매년 방한시마다 가평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자신들의 젊음(혹은 생명)을 바쳐 지켜낸 대한민국의 발전된 오늘이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것이다. 보훈, 즉 은혜갚음의 첫 걸음은 부채의식을 가짐으로써 수혜(受惠)를 잊지 않는 것이다. 이에 미군이 가평에 남긴 족적을 기억하고, 65년간 이어온 특별한 인연을 키워나가기 위한 노력이 최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평고등학교 졸업식과 연계한 미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기에 지난 2월 4일 건립한 ‘미국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美 213대대·2사단·40사단이 가평 땅에 남긴 공헌은 물론 이들이 가평에 베푼 정(情)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한 것이다. 한편 본 기념비는 참전 미군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참전 과정에서의 희생을 기리며, 미국과의 미래지향적 우호관계를 이어나가는 국제보훈의 정책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
435 | 월남참전 국가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16-11-23 | 경기도 이천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이천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0 | 2016-07-30 | 월남전에 참여하여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우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
436 |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상이군경회 동작구지회 | 조형물 | 6·25전쟁 | 0 | 2016-10-28 | 6.25전쟁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한 한강방어선전투의 가장 치열했던 노량진 전투에서 전사한 참전유공자, 전몰군경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음 | |
437 | 고양시 6.25전쟁 참전 전사자 명비 | 국가수호 | 2017-11-23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 전몰군경유족회 고양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8m | 2016-12-06 | 고양시 출신 6.25전쟁 전사자 742명의 성함을 새긴 명비 건립을 통해 호국영웅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함 |
438 | 육군 중위 조유환 전공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강원도 원주시 | 원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76-03 | 조유환은 1925년 4월 23일 문막에서 출생 / 1946년 4월 국방경비대에 지원입대하여 통신장교 / 1950년 6․25사변 당시 일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9․28 수복 당시에는 애향심에 불타 문막지구를 조기탈환함으로서 적치하에서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한 반공애국면민들의 고귀한 생명을 구출한 업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 전한다 / 1951년 4월 23일 가평지구전투에서 향년 27세를 일기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고 명복을 기원하여 이 전공비를 건립하노라 미망인 최성훈 / 서기 1976년 3월 일 문막면민 일동 건립 | |
439 | 양천구 참전유공자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양천구 | 양천구 | 비석 | 6·25전쟁 | - | 0 | 2016-12-23 | 양천구 장수공원 내에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며 명비를 건립하였다. |
440 | 학도의용군 현충비 | 국가수호 | 2002-11-01 | 서울특별시 동작구 | 대한민국학도의용군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5-06-25 | 6.25참전 학도의용군 포항 전투 전사자 48명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도 전국 초,중,고등학생들의 성금모급과 당시 3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도움으로 건립 |
441 | 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동두천시 | 동두천시 사회복지과 | 비석 | 기타 | 0 | 0 | 1996-08-15 | 한말·일제강점기 동두천 출신으로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항쟁에 몸 바친 독립유공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동두천시민 대표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추모비건립위원회는 1996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442 | 위령탑(안성면) | 국가수호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무주군수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2-06-01 | 한국 전쟁 당시 이 지방 학도 의용군으로 분연히 참전하였다가 의롭게 전사한 33인의 넋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 |
443 | 호국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백운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2-05-02 | 6.25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 등 추모 |
444 | 향토수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장수군 | 6.25참전기념사업회장수군지회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87-09-01 | 산서면 동화리에 6·25전쟁 향토수복작전에서 산화한 경찰 4위와 향토수복 대원 11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향토수복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산서면 향토수복 동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7년 9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장수 군민은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을 받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인천상륙작전 직후 향토수복작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 과정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산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45 | 동암 서상일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원화여자고등학교장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87 | 1988-10-15 | 서상일은 대구 사람으로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비밀항일단체인 신민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동청년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 '9인결사대'를 조직했으며, 1913년 대구에서 박상진 등과 함께 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20년 3월 만주로부터 무기를 반입하여 일제 관공서를 습격할 계획을 준비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1921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이 청원서에 대표로 서명했다. 1924년 〈농림〉·〈민중운동〉이라는 잡지를 발행했으며, 연정회 조직 결성에 대구지역 대표로 참가했다. 신간회 해소 이후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관한 사견〉 등 정치평론을 발표하면서 합법적 정치운동에 주력하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 |
446 | 목산 조현욱선생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22 | 대구광역시 북구 | 조근채 | 비석 | 3·1운동 | 1854 | 1968-06-01 | 조현욱은 호는 목산이고 본관은 함안,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6일에 청송군 현서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던 와중에 조현욱은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신태휴‧조병국 등에게 격문을 보내서 동참하기를 권유하였다. 이후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면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주민을 선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고등법원으로 이송되어 5월 31일에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조국의 현실에 통탄해 하며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청송군 주동자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현욱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447 | 홍주의병출진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1-27 | 충청남도 예산군 | 예산군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87-05-01 | ||
448 | 김원주무관 흉상 | 국가수호 | 2018-12-4 | 전라남도 목포시 | 서해어업관리단 | 동상 | 기타 | 2017 | 높이 2m/ 기단 1.3m | 2018-7-25 | 故김원 주무관은 해양수산부 남해어업관리단 어업감독공무원으로서 특별사법경찰관(리) 지명을 받아, 국민의 재산 보호 및 해양주권 수호를 위해 힘써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험성이 현저한 직무를 수행 중 사망하여,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흉상을 건립함. |
449 | 송재 서재필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2-04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서울특별시서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문화운동 | 1866 | 동상높이 3.5m, 좌대높이 2.8m | 1990-04-07 |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1884년 12월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1895년 12월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국내 동지들과 함께 7월 2일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이 수구파 정부의 미움을 사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19년 8월 구미위원부 고문으로 추대되고, 1921년 4월 위원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하여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서거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축이 된 송재서재필선생동상건립위원회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0년 4월 7일 이 동상을 세웠다. |
450 | 독립유공자 정용득 열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18-12-4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정타관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2.4m, 높이 0.5m | 2011-07 | 정용득열사는 1885년 7월 28일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256번지에서 태어났다. 25세 되던 1910년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였고 이에 비분강개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죽음을 무릅쓰고 자주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언양만세운동의 주도자들과 거사를 도모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언양 장날인 1919년 4월 2일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던 중 일본군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시위군중은 해산되었으나 주동자로 정용득 등 6명은 일본군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그 후 부산지방법원울산지청에서 형의 언도를 받고 태형 90대를 집행당하였다. 수감 당시 왜경의 혹독한 고문 및 그 후유증으로 7여 년 간 병고를 치르다 조국광복의 영광도 보지 못하고 1927년 11월 29일 42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인정하여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451 | 의병장 강무경 상 | 독립운동 | 2002-11-01 | 전라북도 무주군 | 설천면장 | 동상 | 의병운동 | 1878 | 0 | 2001-05-01 | 전북 무장군 풍면 설천(茂長郡 豊面 雪川)에서 출생하였다. 필묵상(筆墨商)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고 있던 중 유지인 심남일(沈南一)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고서 결의 형제를 맺고 함께 김율(金聿)이 사망하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 이후 그의 의병생활은 심남일과 일체가 되어 시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전투일] [전투장소] 1908년 3월 7일 강진 오치동(康津 吾治洞) 4월 15일 장흥 곽암(長興 藿巖) 6월 19일 남평 장담원(南平 長淡院) 6월 25일 능주 노구두(綾州 老狗頭) 7월 30일 영암 사촌(靈巖 沙村) 8월 1일 나주 반치(羅州 盤峙) 9월 20일 장흥 신풍(長興 新豊) 10월 9일 해남 성내(海南 城內) 10월 27일 능주 돌정(綾州 石亭)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능주 돌정의 전투에서는 심남일과 강무경이 모두 병석에 눕게 되는 불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왜병 삼백여 명과 접전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다시 이듬해인 1908년 봄부터 전투를 재개하여 3월 8일 남평 거성(巨聲), 4월 2일 능주 풍치(風峙), 5월 12일 보성 천동(泉洞) 등지에서 크게 접전을 하여 적 수십 급을 사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후 해산 조칙(詔勅)을 받고 1909년 7월 21일 의진을 부득이 해체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해산 후에도 강무경은 심남일과 거취를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적병에게 발각되어 10월 9일 심남일과 함께 체포되어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공소 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동년 10월 4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452 |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6-05-02 | 전라북도 군산시 | 군산시 | 동상 | 3·1운동 | 1901 | 2005-10-01 | 군산 출신 독립운동가 이인식의 동상. 이인식은 1919년 2월 28일 정동교회구내 이필주 목사 집에서 3·1독립운동을 계획할 때 보성중학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3월 5일에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8월에 전재산을 방매하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8,000원을 헌납하였다. 1923년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 단체인 금우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간행하며 항일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여 정보수집과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인식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2005년 10월 1일 이인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웠다. | |
453 | 양평군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청운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1-09-19 | 1950년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하신 박종만 육군소령 외 61위 영령의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유족의 뜻을 모아 충혼각을 건립하였으나, 노후됨에 따라 1984년 6월 6일 청운면민 모두의 마음을 담아 현 소재지에 건립하고 현충탑으로 재명명하였다. |
454 |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성균관대학교 | 동상 | 민족주의운동 | 1879 | - | 1990-03-28 |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도왔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
455 |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3-01-17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로구청 공원녹지과(종묘공원 관리사무소) | 동상 | 문화운동 | 1850 | - | 1986-04-10 |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였으며 기독교청년회(YMCA)가입과 3.1독립운동의 배후 도움과 물산장려운동 등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456 | 보성중 순국학생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중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1-07-18 | 보성중학교 총동문회는 6·25전쟁 중 보성전경대에 자원입대하여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 순국한 보성중학생 5명(김택 선전부장, 문용주 위원장, 이중재 정보부장, 이용의 감찰부장, 임두학 조직부장)을 추모하기 위해 1951년 7월 18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평리 798번지 보성중학교 내에 이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위령비가 노후화하여 2002년 9월 28일 새로 건립하였다. | |
457 | 가평의병 3.1항일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0-09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청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94-03-15 |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 사건과 그 해말 단발령에 항거하여 가평에서는 북면을 근거지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가평 지역의 의병들은 강원도 의병들과 연합하여 격렬히 전투하다가 이충응(李忠應, 1856~1896), 신재가(申在嘉, 1850~1895), 정문위(鄭文緯, 1851~1896) 등이 의병장으로 참여하여 순국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일어난 중기의병과 1907년 고종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기의병에도 강귀손(姜貴孫, 미상 ~1909), 강윤희(姜允熙, 1868~1909), 김석하(金錫夏, 미상~1908), 김춘쇠(金春釗, 미상~1908), 나봉산(羅奉山, 1860~1910), 박내병(朴來秉, 미상~1908), 박내봉(朴來鳳, 미상~1908), 하상태(河相泰, 1868~1909), 홍난우(洪鸞祐, 미상~1908) 등이 참가하여 순국하였다.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5, 16일 이윤석(李胤錫, 1894~ 1953)·정흥교(鄭興敎, 1900~1965) 등의 주도로 군북면사무소 앞에서 수백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되어 가평읍 군청앞으로 행진하여 이를 진압하려는 군경과 대치하였다. 이 시위로 체포된 사람이 70여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28명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에 처해졌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4년 3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458 | 김해 공병탑 | 국가수호 | 2017-11-23 | 경상남도 김해시 | 공병전우회 | 탑 | 6·25전쟁 | 0 | 2008-05-29 | ○ 육군 공병은 북한 괴뢰의 적색침략에서 국토를 방위하는 성전을 통하여 항상 전선의 최선봉에서 그야말로 육탄으로 전투공병의 희생적 정신을 배양, 발휘하고 포연탄우 아래 공병특유 화목단결의 전통을 공고히 하여 영원불멸의 공병 전통을 확립하며 성전수행에 앞장섬. ○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는 날까지 전 공병의 더욱더 큰 노력과 충성을 맹세하고, 모든 공병장병의 눈물겨운 노력을 찬양하고 존경하며 특히 빛나는 공병의 역사와 전통을 창조하고 진작하는 기반이 되고 희생하신 38명의 전사자 포함 1천 5백여주 공병전우의 충혼과 명복을 빌고 영세 기억하기 위해 건립된 공병 상징탑임. | |
459 | 열사 무이재 오강표 순절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 주민복지지원실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48 | 0 | 1965-03-01 | 오강표는 1848년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월리 도덕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의를 중시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간재 전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스승을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하였고,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예절을 행하는 등 충의의 마음시가 남달리 강하고 뛰어 났다고 전한다. 오강표는 1905년 11월 일제의 강요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을사오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지어 관찰사에게 조정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생은 청국 상인에게 아편을 구입하여 공주향교의 명륜당에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은 이등박문을 성토하는 장문의 글을 쓰고자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좌절되었다. 1910년 8월 명강산에서 은거하던 중 일제의 국권강탈 소식을 접한 선생은 절명사를 지으면서 자결을 결심하였다. 자결 의지를 동지인 최종화에게 알린 선생은 공주향교의 명륜당에 들어가 벽에 글을 붙이고 대성통곡을 하고, 마침내 10월 16일 밤, 강학루에서 목을 매 자결함으로써 강력한 항일의지를 표출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460 | 6·25 참전 충용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영덕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영덕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9-18 | 영덕군 화개리 영덕군민운동장 앞에 2004년 6·25전쟁에 참전한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25 참전 충용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영덕군 지회는 이곳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9월 18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영덕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영덕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461 | 충혼탑(삼척시 근덕면)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 근덕면사무소 | 탑 | 기타 | 1950 | 2005-05-28 | 근덕면 교가리에 2005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243위의 근덕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근덕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5년 5월 2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근덕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근덕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462 | 구연영ㆍ구정서 의사 순국 추모비 | 독립운동 | 2010-11-03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중앙교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6 | 0 | 1979-09-06 | 구연영(具然英)은 서울 출신의 전통 유림 인사로서 1895년 10월 일본 무뢰배들에 의해 왕후 민씨가 참살당한 데 이어 12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해인 1896년 1월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구연영은 경기도 양근(楊根)·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300명을 모병하고, 안성의 의병장 민승천(閔承天)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1896년 1월 18일 경기도 이천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1896년 2월 12일 새벽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온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에 맞서 이현(梨峴)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이 열세한 데다 눈보라까지 몰아쳐 의병 부대는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이현 전투에서 패전한 잔여 병사들과 여주 의병부대는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였다. 2월 25일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의 주둔 병으로 산성을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용전하였으나 박준영이 관군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어 함락 당하였다. 구연영은 다시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안동·의성·청송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이듬해 5월 26일 비봉산(飛鳳山) 일대에서 관군과 접전한 뒤 부하 30여 명과 경기도로 돌아왔다. 그 뒤 구연영은 동족상잔을 피할 수 없는 의병전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상동 교회의 전덕기(全德基)·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구국 교육에도 종사하였으며, 1900년에는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하며 구국 종교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각처에서 성토회를 열고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정서(禎書)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구성서는 서울에서 태어나 동대문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보안회ㆍ자강회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00년에는 아버지가 조직한 구국회 청년부를 맡아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국채 보상 운동을 벌였다.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여주(驪州)와 원주(原州)에서 아버지 구연영과 함께 의병항쟁을 하다 1907년 일진회원의 밀고로 아버지와 함께 붙잡혀 사형당했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463 | 병신 창의 기적비 | 독립운동 | 2011-11-10 | 경상북도 의성군 | 김태옥 | 비석 | 기타 | 0 | 0 | 2009-04-24 | 병신창의기적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 침탈기도에 항거하기 위해 1896년 2월부터 4월까지 의성 점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록한 기념비다. 의성 지역의 의병 항쟁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를 보면, 의병장에 김상종, 초모장에 김수욱, 중군에 권대직, 선봉장에 김수빙, 관향장에 김수협 등이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 1895년에 을미사변을 계기로 궐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려 황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여기에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담, 김수협 등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출신의 이필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와 옥산의 황산에서 적과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 이긴 조선 왕실은 파병의 조칙을 내리게 되자 비통함을 품은 채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
464 | 윤봉길 의사 상 | 독립운동 | 2002-11-25 | 대전광역시 중구 | 시설관리공단 체육시설운영본부 | 동상 | 의열투쟁 | 1908 | 0 | 1972-05-23 | 1908년 충남 예산 출신으로 문맹퇴치와 농촌개혁운동을 전개하다 1931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방안을 모색하였고 1932. 4. 29.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에 대한 숭앙시모가 추모의 뜻을 높이고 민족의 얼을 되새기고자 동상을 건립 |
465 | 현충탑(광명시) | 국가수호 | 2002-11-02 | 경기도 광명시 | 경기도 광명시 | 탑 | 기타 | 1988 | 대 | 1988-08-25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광명근린공원 내에 광명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광명시에서 1988년 8월 25일 이 탑을 세웠다. 광명출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 등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며 동시에 광명시민에 대한 애향심을 함양할 목적으로 1988년 이 탑을 건립하였다. 이 현충탑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자유수호를 위한 선열들의 애국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1988년 8월에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여기에는 이 고장 출신 차상준 준장 외 483위의 영령을 봉안하고 광명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 추모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
466 | 독립유공자 박준승선생 추모공원 | 독립운동 | 2015-05-14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수 | 공원 | 3·1운동 | 1919 | 0 | 2013-09-11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91년(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에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 공원은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셨던 박준승 애국지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 위해 건립되었다. |
467 | 춘천내평전투 호국경찰 추모상 | 국가수호 | 2016-11-23 | 강원도 춘천시 | 강원도재향경우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5-10-20 | 1950.6.26. 춘천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감 등 11인은 북한 2사단 병력에 맞서 목숨을 마다하고 1시간 이상 결사 항전하여 국군의 주 저항선을 확보하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춘천 지구 전투 승리의 초석을 다지게 함, 이와 같은 11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함 | |
468 | 기려자 송상도 지사 생가 터 및 표지석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북도 영주시 | (사)기려자송상도지사기념사업회 | 장소 | 애국계몽운동 | - | 0 | 2017-12-20 | 농촌의 한학자로서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말기부터 1945년 광복때까지 일제치하 30여년간 도보로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순국선열의 유가족 또는 친지들을 방문하면서 자료를 수집하여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 행적을 기록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저술하였다. |
469 | 영산 3·1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창녕군 | 창녕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56-03-11 | 창녕군은 1956년 3월 창녕군 영산면 동리 산4 (호국공원내)에 영산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영산결사대 24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천도교인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을 중심으로 영산에서의 독립의거가 일찍부터 준비되었다. 이들은 의거일을 13일로 결정한 후 야간을 이용하여 태극기와 요약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 24명은 결사대를 조직한 후 이날 오후 2시 영산면 남산에 모여 「결사단원 맹세서」를 작성하여 각자 서명 날인하였다. 결사대원들은 풍물을 울리며 큰 태극기를 앞세워 영산읍내를 향해 행진하자 주민들과 장꾼들이 합류하여 600~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창녕경찰서에서 경관 1개대를 영산읍으로 급파하여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을 체포 구금하였다. 남은 결사대원들은 오후 8시 남산봉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영산읍에서 시위한 후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창녕읍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일본경찰들이 3일 만에 시위 주모자들을 모두 검거하였다. 이날의 시위를 주도한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은 징역 10월에서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470 | 영양 3의사 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영양군 | 영양군 | 비석 | 기타 | 1977 | 1977-10-03 | 영양군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인 김도현, 남자현, 엄순봉 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1977년 10월 영양3의사비를 건립하였다. 김도현은 한말의 항일 의병장으로 영양·안동 지방의 의병을 모아 항전했고,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일본 만주국대사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엄순봉은 1933년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청년부장이 되었으며,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뒤 백정기·정화암 등과 상해로 갔다. 1935년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친일파 이영로를 처단하여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 |
471 | 광양 7의사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광양시 | 옥룡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2.6m 폭 0.6m | 1966-04-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일 광양읍 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 여러 사람이 검속되자, 4월 2일에 옥룡면 운평리에 있던 서당 견룡재의 학생인 이기수·김영석·최준수·서성식·서찬식·박병원·나종길 등이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향하여 가다가 도중에 검속당하여 심한 폭행을 당하였다. 옥룡면민들은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1966년 4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472 | 충령탑(금산)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금산군(사회복지과) | 탑 | 기타 | 1963 | - | 1963-06-06 | 금산군 하옥리 남산 중턱에 1963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이 고장 출신 580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금산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6월 6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금산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
473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독립운동 | 2007-10-18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 기념관 | 기타 | 1998 | 건축면적 4,726.39㎡ | 1998-11-05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갖은 옥고를 치르고 마침내 목숨까지 빼앗겼던 우리민족 독립의 현장이며 살아있는 역사의 터이다. 서대문구에서는 이곳의 옥사와 사형장, 망루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악명 높았던 구 보안과 건물을 보수하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87년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하기까지 사용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기도 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중앙사, 제 9~12옥사와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시구문, 유관순지하감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474 | 애국지사 천세헌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문경시 | 천재종 | 비석 | 해외운동 | 1881 | 0 | 2001-05-02 | 천세헌은 1902년 서울에서 외국어학교에 다녔으며,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0년 다시 뉴욕으로 옮겨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하였다. 1914년에는 흥사단에서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가 열리자 여기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외교사무소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그 뒤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에서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특연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된 그는 안창호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940년 7월 강영승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였다. 1942년부터는 각종 독립금과 기성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전쟁을 후원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6월 서거하였다. |
475 | 권석도의병장 동상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 | 동상 | 의병운동 | 1880 | 1991-08-13 | 권석도 선생은 한말의 의병장으로서 함양읍 백전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크게 분노하여 1907년 김동신 의병진에 참여하였다가 고광순 의병진에 합류하였고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계면에서 박인환 의병진과 합류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선생은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과 대일 항쟁을 하던 중, 1908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어 하동주재소에 구금되었으나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던 중 일경의 추격을 받아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의병장과 합류하여 진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며 활동하던 중 1909년 10월 10일 일경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으로 확정, 수감 중 일본왕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그후 1918년 2월 일본 경찰로부터 다시 강도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선생은 허위자백을 강요당하는 등 혹독한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함양군에서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상림 숲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 |
476 |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0-06-09 | 대구광역시 동구 | 대구광역시 | 탑 | 한말구국운동 | 1945 | 2006-06-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대구·경북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의열투쟁,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사)대구경북항일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6년 6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
477 | 케니상사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58-07-04 | 1951년 1.4후퇴 당시 이 곳 베내(동문리)에서 1개 소대 규모의 군병력이 후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적군의 전차에 소대는 열사직전에 이르렀다. 이 때에 분대장직을 맡았던 케니는 부하 2명과 함께 육탄으로 전차를 잡고 장렬히 전사하여 소대를 구출하는 지대한 전공을 세웠다. |
478 | 의병대장 도암 신선생 유허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문경시 | 신대식(고손) | 비석 | 의병운동 | 1864 | 0 | 2000-08-02 | 1907년 의병대장으로 영양, 영월, 제천, 울진, 평해, 원주, 철원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투옥되어 10 여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2년 의용군 경북단장으로 독립군을 후원하다 1년간 투옥되기도 한 신태식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생가마을 입구에 유허비 건립 |
479 | 건국훈장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명철 유적비 | 독립운동 | 2004-05-20 | 경상남도 거창군 | 어윤종 | 비석 | 3·1운동 | 1865 | 1991-05-05 | 1991년 5월 5일 함종어씨 문초공파 종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어명철 선생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어명철 선생(1865~1923)은 거창군 가조면 출신이다. 1919년 3월 21일 가조면 석강리에서 동지들과 비밀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여 다음날인 22일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오문현 신병희 어명우 등과 함께 마을 대표로 뽑혀 연락책을 맡았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일제 헌병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던 중 거사 당일인 3월 22일 거창읍 가조·가북면의 3천명의 시위대에게 구출되어 군중과 합세, 거창읍으로 행진하여 그 선봉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었다. 이해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
480 | 무공수훈자 공적비 (진해)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진해구 무공수훈자회 | 비석 | 6·25전쟁 | 2002 | 0 | 2002-10-30 | 진해시 무공수훈자회는 2002년 10월 30일 경남 진해시 장천동 대발령 제1쉼터에 6·25전쟁 및 자유수호 전쟁에서 나라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용전분투한 진해지역 무공·보국수훈자 840명의 명예와 애국심을 선양하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481 | 진주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진주시 | 무공수훈자회진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04-22 | 진주시 초전동 농산물도매시장 앞 남강 변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진주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4월 22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진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서구청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82 | 제8보병사단 전몰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육군 제1607부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2.7mX27.m, 높이 5.4m | 2001-09-14 | 6·25전쟁중에 산화한 제8사단 전몰장병들의 넔을 달래고 참전유공자들의 위상과 명예선양을 위해 건립하였다. |
483 | 베트남참전유공탑 | 국가수호 | 2005-10-24 | 충청남도 청양군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청양군지회 | 탑 | 1964 | 2005-05-28 | 월남참전기념탑추진위원회는 2005년 5월 28일 충남 청양군 대치면 6-2(칠갑산 주차장)에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유공탑을 건립하였다. 유공탑 정면 하단에는 기념탑기가, 뒷면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주둔지가, 옆면에서는 읍면별 참전용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 ||
484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독립운동 | 2020-5-8 | 광주광역시 남구 | (재)광주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 | 기념관 | 3·1운동 | 1919 | 415.61 | 2018-12-3 | 광주의 첫 장로이자 목사로 한평생을 한센병(나병)퇴치와 빈민구제, 독립운동, 선교활동, 교육운동 등에 헌신하는 삶을 기록하고 전시 |
485 | 한말의병 항왜혈전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 영일민속박물관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67-01-01 | 이 기념비는 산남의병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고 그분들의 명예선양과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1967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영일민속박물관내)에 건립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초대 대장과 제2대 정환직 대장이 의병을 이끌다 순국하자 제3대 최세윤 대장이 의진을 수습하여 일본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최세윤 대장 역시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 |
486 | 신명 3·1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신명고등학교 | 탑 | 3·1운동 | 1919 | 0 | 1972-10-23 | 1972년 10월 23일 대구 중구 동산동 신명고등학교 교정에 대구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드높인 신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명 3·1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매년 3월 선배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신명고등학교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1919년 3월 8일 신명학교에 재학중이던 최정술을 비롯한 일부 학생은 만세운동의 시발지인 큰 장터에서 이영현을 비롯한 통학생 및 저학년 10여 명은 동신교를 조금 지나서, 그리고 30여 명의 기숙사생들은 대부분 남성파출소 앞에서 각각 계성학교·성격학교·남선정교회·남산교회·달남교회 등이 주축이 된 수천 명의 만세행렬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일본기마대와 기관총을 앞세운 대구 주둔 80연대의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동성로까지 진출하였으나, 달성군청 앞에서 일본 경찰, 헌병, 군인들로부터 구타당한 후 전원이 구속되고 말았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학교 학생들은 석방되었으나, 졸업생과 교사들은 전원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받았다. 이만집 3년, 김태련 2년 6개월, 김영서·김무생·정재순 각 2년, 박재원·권희윤·최경학 각 1년 6개월, 이재인·임봉선 각 1년, 신태근·이선애 각 6개월 등이다. |
487 | 6.25참전유공자 기념비(울진군) | 국가수호 | 2016-11-23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비석 | 2015-12-23 | 울진 출신 6.25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전하고 조국통일과 번영한 대한민국이 영원토록 발전할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울진군민의 뜻을 모아 2015년 12월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기념비 뒤편에는 건립취지문과 함께 울진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단이 각 읍․면별로 명각되어 있습니다. |
488 | 애국지사 국사 오화영 추모비 | 독립운동 | 2013-05-13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고창오씨대종회(오완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8-05-01 | 오화영(吳華英, 1880~1950 납북)은 1917년 서울 종교교회에 부임하여 담임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9년 3월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일인으로 참여하여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5일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간사로 활약하였고, 1930년 5월에는 물산장려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고창오씨종친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1988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489 | 광양시 참전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15 | 전라남도 광양시 | 광양시 | 비석 | 6·25전쟁 | 2005 | 탑1 | 2005-04-29 | 광양시 참전유공자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5년 3월 광양시 광양읍 목성리 유당공원 내에 6·25 및 베트남전에 참전한 광양지역 출신 참전유공자 1, 500여 명의 공훈과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자 참전유공자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490 | 태극단 교사 추모비 | 국가수호 | 2006-04-24 | 경기도 파주시 | 태극단선양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12-01 | 6.25전쟁중 적의 치하에 든 고양, 파주지역에서 비밀결사단체인 태극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처참히 죽음을 당한 청석초등학교 교사들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파주 청석초등학교에 2004년 건립된 태극단 교사 추모 조형물입니다. 네비게이션에 청석초등학교를 찾으면 새로운 학교로 가기 때문에, 교하성당을 검색하여서 구 청석초등학교로 가야지 참배가 가능합니다. | |
491 | 성남3.1만세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6-11-23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남문화원장 | 탑 | 3·1운동 | 0 | 2006-03-01 | 성남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
492 | 통영3.1독립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0-05-30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시 | 비석 | 3·1운동 | 기념비 | 1972-09-01 | 경남 통영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비이다. 통영에서는 1919년 3월 18일 밤 당시 신정에서 박상건 등 한문학당 관란생도 2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28에는 박성백 등 읍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2일의 읍내장날에는 기생 33명이 합세한 5천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 |
493 | 충혼비(진혼비, 충혼비, 차성도중위충혼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북도 영천시 | 육군3사관학교 | 비석 | 기타 | 0 | 1970-01-17 | 육군3사관학교 호국정 내에 생도훈련, 전·후방 야전부대 교육훈련 등에서 전사, 순직한 육군3사관학교 임관장교들의 희생정신을 길이 받들고,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진혼비, 충혼비, 차성도 중위 충혼비를 건립했다. 동기생회에서는 1969년 이후 교육 중 조국을 위해 꽃피우려다 순직한 교육생의 얼을 추모하기 위해 진혼비와 충혼비를 1970년 1월 17일, 2004년 5월 25일 건립했다. 또한 충성동기회는 임관 후 1970년 5월 13일 제27보병사단 78연대 소대 야간 방어 전투사격 훈련 중 병사의 실수로 놓친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덮쳐 소대원의 목숨을 구하고 순직한 차성도 소위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를 1970년 11월 13일 세웠다. 육군3사관학교 생도들과 졸업생들은 매년 선배들의 열정과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 |
494 |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15-10-14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소 | 2014-12-06 |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과 민족의 자유수호를 위해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인천광역시 무공수훈자들의 위대한 공적과 나라를 위한 충절을 후대에 기리고자 인천광역시에서 2014년 12월 6일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건립취지문에는 '이 곳은 조국과 민족의 자유수호를 위해 멸공전선에서 함께 한 전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터전이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때,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수훈자들의 애국애족의 불꽃정신은 자자손손 남으리리. 국가발전의 영원한 초석이 되며 조국의 무궁한 번영과 영광을 위해 지난날의 용감무쌍한 기상과 정신을 이곳에 되새기며 무공수훈자들의 위대한 공적과 나라 위한 충절을 자손만대에 기리고자 이 비를 건립하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495 | 6·25 참전 기념탑(앙성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앙성분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92-01-01 |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일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호국 용사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후면에 앙성면 출신 참전유공자 403명의 이름을 명각하였다. 앙성면 6.25참전기념탑 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이들의 공훈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1992년 6월 2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자신의 생명을 헌신한 이들의 정신은 개인의 이익보다 민족을, 당대보다 후손을 향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자유와 독립의 참된 정신을 일꺠워 주고 있다. |
496 | 충혼탑(진도군) | 국가수호 | 2002-11-02 | 전라남도 진도군 | 진도읍장 | 탑 | 6·25전쟁 | 1950 | 4.8x2.7x13m | 1987-06-07 | 진도 군강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진도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진도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7년 6월 6일 현충일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진도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진도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497 |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영광군 | 영광군 | 비석 | 해외운동 | 1886 | 높이 2.5m, 기단 0.74m | 1975-08-15 | 일강 김철선생은 평생을 조국광복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일강 김철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의 참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498 | 안동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성균관유도회안동지부(이동술 총무부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8-15 | 이 기념비는 안동유도회에서 발의하고 동아일보사와 안동시민들의 정성을 모아 1985년 8월 15일 안동댐 보조댐광장에 건립되었다. 도쿄 유학생 강대극은 1919년 2월 8일에 있었던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에 참가한 후 비밀리에 안동에 돌아와 김원진(군청 서기), 김영옥(안동교회 목사) 이중희(안동 교회 장로) 등과 접촉하여 의거를 계획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김재명(세브란스의전 학생)도 내려와 김병우(안동교회 장로) 등을 만나 거사를 모의하였다. 한편, 예안의 조수인은 3월 8일 손병희로부터 서신을 받고 안동지방의 의거를 계획하였다. 3월 17일, 예안의 1차 시위를 출발로 3월 18일 안동시와 도계의 시위에 이어 3월 21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21일 하루 동안 길안, 임하, 임동, 일직에서 일어났다. 3월 27일 하회의 소년들 시위를 끝으로 안동지방의 의거는 막을 내렸다. |
499 | 추강 김지섭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안동시 | 김두현(손) | 비석 | 의열투쟁 | 1884 | 0 | 1971-01-01 | 1922년 상해로 가서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해 및 북경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23년 왜적의 고관암살중요시설의 파괴계획을 하다가 비밀이 폭로되어 상해로 망명한 후 동년 12월에 도일하였다. 1924년 1월 5일 동경으로 와서 신년부터 제국의회가 동경에서 열리는데 조선총독부등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폭탄으로 폭사시키려다가 의회미개로 실패하고 1월 5일 저격목적을 변경하여 왜황궁성이중교에 나타나 투탄하였으나 불발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구속되었다. 동년 10월 6일 일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불복상고중 1928년 2월 10일 천엽형무소에서 병사하였다. |
500 | 안중근장군 동상 | 독립운동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 | 2015-05-01 | 광복 70주년 기념 및 육군사관학교 개교 69년을 기념하여 안중근 장군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의 후원 아래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안중근 장군의 정신은 학교 교훈인 '지.인.용'의 실천적 표상으로 학교 목표인 '국가방위를 위한 정예 육군장교 양성'구현과 일맥상통하다. | |
501 |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고전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85-12-30 | 1919년 4월 6일 고전면 3·1독립운동이 전개된 곳에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하동군 고전면에 사는 박영목, 정상정 등은 청장년들은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고 배다리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준비하였다. 4월 6일 배다리장터에는 고전면 주민들과 인근에 사는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1,000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들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4월 7일 일본 경찰은 고전면 지소마을을 수색하여 박영묵과 이종인 등 시위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985년 12월 30일 만세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3·1독립운동을 전개한 고전면 주민들의 3·1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
502 | 강재구 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동상 | 월남참전 | - | 1966-02-23 | 1965년 10월 4일 강재구소령의 중대원 중 한 명이 홍천 맹호부대 훈련장에서 베트남 파병을 위한 수류탄 투척훈련 중 실수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강재구 소령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려 장렬히 산화하고 중대원들을 구했다. 이 동상은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육군 전 장병의 성금으로 1966년 2월 23일에 세워졌다. 강재구 소령을 진정한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길이 기념하기 위해 화랑기초훈련 기간 중 재구의식을 거행하며, 화랑의식을 마친 후 생도들은 이 동상을 우러러보면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되새긴다. | |
503 | 불멸탑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노원구 | 육군사관학교 | 탑 | 기타 | - | 1959-10-02 | 생도 1기생들이(후에 육군의 기별 조정에 따라 10기생으로 개칭) 6.25당시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했던 동기생들의 불멸의 기상의 기리고, 전사한 동기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
504 | 백야김좌진장군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역사문화시설관리사업소) | 비석 | 해외운동 | 1889 | 1949-07-13 |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 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 조직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또한 1925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 운동의 전개와 동포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추모비는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의 치적을 적은 비이다. 1949년 대한 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으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 |
505 | 월남 참전 기념탑(군산) | 국가수호 | 2008-05-15 | 전라북도 군산시 |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군산시지회 | 탑 | 월남전쟁 | 2007-12-01 | 월남참전기념탑은 1964년부터1973년까지 월남 전선에서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친 전우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월남파병의 참뜻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 ||
506 | 현충탑(화성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 탑 | 기타 | 1997 | 0 | 1997-06-06 | 화성시 송산동에 국가위기 시 산화한 애국지사와 전몰군경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화성시)’을 건립하였다. 화성시는 애국지사와 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7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기 화성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화성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07 | 구시포 경찰전적 충혼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전라북도 고창군 | 고창경찰서 | 탑 | 6·25전쟁 | 1977-11-17 | 1977. 11. 17 산화한지 2주기를 맞이하여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17기, 18기 전우 뜻을 모아 유명을 달리한 세 전우의 명복을 빌고자 유찬종 등 27명이 추모비를 건립 | ||
508 | 소병민 중령 상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라북도재향군인회 | 동상 | 기타 | 1968 | 0 | 1970-11-03 | 1968년 11월 3일 충남 서산에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출동하여 부대를 지휘하다 장렬히 산화한 소병민 중령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509 | 故 김범수 대위 추모비 | 국가수호 | 2015-05-14 | 전라북도 임실군 | 제35보병사단장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04-30 | 故 김범수 대위의 숭고한 살신성인 정신을 추모 2002년 학군장교 40기로 임관한 김범수대위는 35사단 신병교육대대 소대장으로 임무수행 중 2004년 2월 18일 사단 신병교육대대 수류탄 투척훈련 과정에서 훈련병이 당황해 수류탄을 던지지 못하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감싸 안아 훈련 중이던 269명의 동료들을 구하고 순직했다 |
510 | 6.25참전 국가유공자 선양비(중구) | 국가수호 | 2015-05-14 | 울산광역시 중구 | 6.25참전유공자회 중구지회 | 탑 | 6·25전쟁 | 2013-06-17 | 2013년 6월, 전쟁영웅이신 6.25참전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찬양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세워졌다. 참전유공자의 예우 및 명예를 선양하고 희생자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국난 극복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 ||
511 | 헌병순직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진해기지사령부 | 비석 | 기타 | 1979 | 0 | 1980-04-07 | 1979년 8월 25일 태풍 쥬디호가 남부 지방을 강습했을 때, 마진터널앞 군경 합동검문소에서 근무하던 해군 헌병대 소속 고 하사 전판수 등 8명이 폭우가 쏟아지는 오후 2시부터 마진간 도로가 침식되어 차량 통행이 불가한 상태에서 도보로 마산ㆍ창원 등지에서 귀진하는 약 3천여명과 200여대의 차량을 통제하다가 갑작스런 산 사태로 8명 전원 순직하여 고인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다음해 건립하였음. |
512 | (인천시)충혼비 | 국가수호 | 2015-10-14 | 인천광역시 계양구 | 국제평화지원단(제9100부대) | 비석 | 기타 | 소 | 2005-02-28 | 강하훈련, 해상훈련, 천리행군 등 조국 수호의 성업을 수행하던 중 순직한 흑룡부대 특전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기상과 뜻을 후배 장병들이 본받도록 하고자 흑룡부대 전 장병들의 성금을 모아 2005년 2월 28일 건립하였다. 또한 2004년 2월 26일 고공훈련 중 순직한 故김용기 원사와 2007년 2월 27일 다산부대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여 작전 중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故윤장호 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충혼비 좌측에 故김용기 원사 충혼비, 우측에 故윤장호 하사 추모비를 추가로 건립하였다. | |
513 | 충혼탑(금산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금산면 | 탑 | 6·25전쟁 | 1950 | 탑 | 1958-06-06 | 나라위해 목숨바친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후세에 호국정신 함양과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건립 |
514 | 6·25 및 월남참전기념탑(평창) | 국가수호 | 2015-05-14 | 강원도 평창군 | 평창군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기단 높이 0.5m, 기단둘레 3.9m | 2014-06-25 | 6·25참전유공자 및 월남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평화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국가안보의식과 나라발전의 표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움 |
515 | 청송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청송군 | 청송군 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1950 | 0 | 2000-12-26 | 청송군 금곡동 무궁화동산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청송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청송군과 무공수훈자회 청송지회는 김종학, 이원세, 박갑생 등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0년 12월 26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청송 무공수훈자들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서서 싸우다가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516 |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 | 독립운동 | 2005-10-27 | 경상북도 청도군 | 청도군교육지원청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2-07-25 | 운문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고종 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김상구, 김종대가 당시 사립 문명 학교장 김우곤의 집에서 동지 여러 명을 모아 독립회를 조직하여 결의문을 만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3월 18일 정보를 접수한 일경들이 독립회 청장년들을 모두 잡아가려 하자 동네 주민들과 독립 회원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운문면 3·18 독립운동이다. 3·18독립운동 기념관은 방지초등학교 문명분교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학교 내 유일한 독립기념관이다. 1919년 기미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가족과 경상북도 교육청의 지원으로 2002년 건축 한 것이다. |
517 | 호국영웅 강승우 상 | 국가수호 | 2002-11-21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동남초등학교 | 동상 | 기타 | 1952 | 2001-06-23 | NULL | |
518 | 미공병부대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서울특별시 용산구 | 한민친선군민협의회 | 비석 | 6·25전쟁 | 가로 1.9m, 높이 1.1m, 기단 0.65m | 2009-09-27 | 1950년 6월 25일 수도 서울이 북괴군의 전면적인 기습공격으로 점령당하자 우리군은 적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6월 28일 부득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또 다시 수도를 점령당하였다. 이 진퇴를 거듭하던 긴박했던 시기에 미공병부대들은 한강에 부교와 도보교를 설치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특히 1.4후퇴 시에는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이 다리를 건너 생명과 재산을 구할 수 있었다. 공산군이 한반도 이남에서 완전히 쫓겨난 1951년 6월, 미 공병부대들은 한강인도교의 철교를 복구하여 우리나라 경제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한국전쟁 중 보여준 미 공병부대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면서 이를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운다 | |
519 | 은평구 6.25참전유공자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은평구 | 은평구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7-05-15 | 나라를 위해 희생·공헌한 6.25참전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고자 지역출신 호국영웅 선양을 위한 명비 건립 | |
520 | 순국열사 구성집 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18-05-10 | 경상북도 의성군 | 능성구씨 좌성승공파 덕천문중(구장회)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905 | 0 | 2017-12-15 | 1906년 9월 12일경 김동산(金東山)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북 봉화군(奉化郡)·강원도 삼척군(三陟郡)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동월 25일경에는 삼척군 개산동(皆山洞)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7월경에는 성익현(成益賢)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蔚珍郡) 내에서 활동하였고 또 삼척군 죽변동(竹邊洞) 해안에 있는 일본 어선을 공격하여 일인 조야국송(早野菊松)외 2인을 총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년 8월 5일부터 10월 10일경 사이에는 울진군 석호리(石湖里) 박명칠(朴明七)과 삼척군의 김자율(金子律)·이도장(李都長)·김자현(金子賢)의 집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그후 1908년 10월 7일 대구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
521 | 영원한 빛 | 국가수호 | 2010-11-13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비석 | 기타 | 2010 | 2010-06-15 | 공군과 공군사관학교 총동창회가 2010년 6월 15일 북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335-1(공군사관학교 내)에 대한민국 상공을 수호하다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해 ‘영원한 빛’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비 옆에 위치한 추모벽에는 조종사 333명 등 총 378명의 공중 전사 및 순직자의 이름이 헌액되어 있으며 이들 가운데 6·25전쟁 당시 전사자는 38명이다. | |
522 | 임병래 중위 동상 | 국가수호 | 2011-11-10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해군사관학교 | 동상 | 6·25전쟁 | 1950 | . | 2010-11-26 | 경남 진해시 안곡동 해군사관학교 내에 인천상륙작전시 왕성한 첩보활동을 벌이다 전사한 임병래 중위를 추모하기 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2010년 11월 26일 동상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지구까지 밀린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 놓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대표적인 상륙작전으로 손꼽히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헌신적인 활약이 있었다. 그 주역인 임병래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 출생으로 1941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한후 1950년 4월 20일 해군 중위로 임관하여 해군정보국 창설 당시부터 창설요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고 영흥도 첩보전 조장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영흥도 첩보전' 일명 X-RAY작전에서 해군정보국 첩보대는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배치 상황, 주둔 병력의 규모와 해안방어태세 등을 파악하는 작업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 D-day가 임박하여 영흥도 첩보기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미군이 상륙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기습해왔고,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해군 첩보대원 9명과 해군 의용대원 30여 명은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적으로부터 포위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보트로 탈출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두 대원은 끝내 탈출에 실패하여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둔 시점에서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이 탄로날 것으로 판단한 두 대원은 적을 쓰러뜨린 다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3년 7월 6일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우리 정부는 1954년 1월 4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여 전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
523 |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충주시 |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일 용원 장날 이희갑·단경옥·이강렴·손승억 등의 장터에서 2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에서 김은배(金殷倍, 1891~1971), 단경옥(段慶玉, 1894~1943), 손승억(孫承億, 1893~1934), 윤무영(尹務榮, 1890~1962), 윤주영(尹周榮, 1897~1938), 이강렴(李康濂, 1902~1927), 이강호(李康吉, 1895~1973), 이희갑(李喜甲, 1897~1953) 등이 주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니면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이 비를 세웠다. |
524 | 내수초등학교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8-11-25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 내수초등학교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4-02-01 | 1919년 4월 2일 내수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 85명은 의병장 출신인 한봉수(1883~1972) 선생의 지휘에 따라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구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생들은 엄익래, 이건간 선생의 인솔로 나무를 심기 위해 학교를 나와 이곳을 지나가던 중 한봉수 선생을 만나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내수초등학교 총동문회는 2004년 2월 1일 청원군 내수읍 마산리 177에 위치한 내수초등학교 교정에 내수초등학교 만세운동 85주년을 기념하고 3·1운동에 참여했던 내수초등학교 동문 선배들의 고귀한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25 |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성남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4 | 0 | 2004-10-31 | 어찌 잊으랴 그 날을! 민족분단의 비극인 6·25전쟁에서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고 세계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도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호국 용사들의 거룩한 충정을 어찌 잊으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신명을 다 바쳐 국권과 체제를 수호하고 국위 선양의 위업을 이룩한 호국 용사들의 값진 희생을 그대들은 아는가? 이에 우리들은 성남시 호국 무공수훈자들의 충성심을 높이 받들고 역사에 길이 빛날 이들의 공훈을 영원토록 보전하고 후세들에게 국가의 안보의식과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위국헌신의 충정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거룩한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이곳에 세우노라 |
526 | 6·25 참전용사 기념비(학산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학산면6.25참전유공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8-30 | 학산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8월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 927-1 (학산게이트볼 구장 옆)에 학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165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27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추풍령면)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영동군 | 추풍령면6.25참전유공자회 박래영 | 비석 | 6·25전쟁 | 1950 | 4.1m | 2005-11-03 | 추풍령면 6·25참전유공자회는 2005년 11월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 461-2에 추풍령면 출신 6·25참전유공자 58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후에 2017년 11월 접근성이 좋은 도계공원 내(추풍령리 203-5)로 이전하여 지역민들의 나라사랑정신 함양과 국가유공자의 자긍심에 크게 기여하였다. |
528 | 김인전선생흉상 | 독립운동 | 2004-12-22 | 충청남도 서천군 | 김인전선생추모사업추진위원회 | 동상 | 해외운동 | 1876 | 0 | 2004-03-16 | 김인전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다.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유지 강화 등 독립운동의 활성에 온 힘을 쏟으며 한국 노병회를 발기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시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중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 임시정부 묘역에 안정하였으며, 2004년 3월 김인전선생 추모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나라사랑정신을 후세에 계승시키기 위해 흉상을 건립하였다. |
529 | 강릉학도6·25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6-04-27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0 | 2015-06-09 | 6·25정쟁 당시 강릉지역 5개교(강릉농업고등학교, 강릉상업고등학교, 강릉여자고등학교, 강릉사범학교, 주문진수산고등학교) 학도병 424명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
530 | 독립지사 김용기·안응건선생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3-05-24 | 김용기(金龍基, 1901~1983)는 1920년 만주에서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의 부하로서 일본영사관 습격 등의 활약을 하였고, 1921년에는 김좌진(金佐鎭) 휘하로 전속되어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전했다. 1923년 8월 의군부(義軍府) 특파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관공소 방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응건(安應乾, 1886~1920)은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경기도 포천 자택에서 태극기 25개와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이지 않으면 방화하겠다는 격문을 작성하여 다음 날 밤 태극기를 각 집에 세우고, 격문을 마을 게시판에 붙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6·25참전전우회 포천군 영북면 분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2003년 5월 24일 이 비를 세웠다. |
531 |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8-06-25 | 수원고등학교 교정 내에 6·25전쟁 기간에 순직한 학우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학도병 6·25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수원고등학교 총동창회는 순직한 학우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6월 2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수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수원고등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32 | 6·25 참전용사 선양비(예천읍) | 국가수호 | 2003-05-30 | 경상북도 예천군 | 예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08-28 | 예천군은 2001년 8월 예천군 예천읍 서본 240(예천문화회관 내)에 예천군 출신 6·25참전유공자 1, 462명(상이군경 115, 전사자 497, 무공수훈자 53, 참전용사 797)의 공적을 선양하기 위해 선양비를 세우고 그 비에 이름을 각인하였다. |
533 | 함안군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목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16-11-23 | 경상남도 함안군 | (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 기념관 | 문화운동 | 0 | 2015-09-30 | 애국지사 손양원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원수를 사랑한 실천정신을 널리 전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긍심을 갖고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고자 선생의 출생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여 지역문화 콘텐츠로 개발하여 순례관광자원 및 지역주민 휴식, 교육, 전시체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함 | |
534 |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 | 국가수호 | 2015-10-14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사)대한민국건국운동자유족회 | 탑 | 6·25전쟁 | 102 | 19890815 | 반탁반공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건국의 이념이며 이 운동은 오늘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꽃피운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8.15해방과 더불어 불어닥친 신탁통치의 음모와 공산주의의 야욕으로 비롯된 6.25 남침을 맞아 싸우다가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이름없이 쓰러져 갔다. 그 반탁반공의 순국 청년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길이 받들고 역사에 거룩한 업적을 기록해 두고자 사단법인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를 1965년 12월 28일 구성하고 한국학생건국운동사를 펴낸뒤 살아남은 동지들의 뜻을 모아 여기에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을 세운다. | |
535 | 울산경찰 추모의 공간 | 국가수호 | 2016-04-27 | 울산광역시 중구 | 울산지방경찰청(울산재향경우회) | 비석 | 기타 | 2015 | 0 | 2015-06-05 | 6.25당시 공비토벌에 교전 하거나 민생 치안을 위하여 경찰업무 수행 중 순직한 110명분의 경찰관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
536 | 6·25 참전 유공자 기념탑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영양군 | 6.25참전유공자회 영양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4-06-29 | 영양군6·25참전유공자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2004년 6월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147-1(영양군민회관 입구)에 영양군 출신 6·25참전유공자 1, 508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에는 6·25참전유공자 1, 508명의 이름과 추모의 글을 새겨넣었다. |
537 | 6·25 참전 유공자비(고령군)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고령군 | 고령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8-26 | 6·25참전유공자회 고령군지회는 2004년 8월 고령군 고령읍 지산1리 192(고령국악당마당 앞)에 고령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2004년 건립 때 6·25 무공수훈자, 참전유공자, 참전경찰, 참전민간의용대를 포괄하여 700명의 이름을 명각했는데, 2007년 62명의 참전유공자를 추가 발굴하여 유공비 옆에 와비를 세워 그 이름을 새겨넣었다. | |
538 | 월남 참전용사 만남의 장 | 국가수호 | 2006-04-24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수 | 장소 | 월남참전 | 1964 | 0 | 2002-12-02 | 1964년~1973년 월남전참전유공자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월남파병 당시의 훈령장을 만남의 장으로 조성하여 월남파병 용사들의 자긍심을 함양하고자 2002년 12월 건립하였다. |
539 | 호국 참전 유공자 기념탑(단양) | 국가수호 | 2007-05-03 | 충청북도 단양군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단양군지회 | 탑 | 기타 | 2005 | 0 | 2005-12-19 |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 참여하여 산화한 순국선열의 명복을 빌며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 |
540 | 설봉 김도규의병장 기적비 | 독립운동 | 2007-05-03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청 | 비석 | 의병운동 | 1885 | 기단높이 3m | 2005-04-29 | 김도규은 보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강건하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특히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고 했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근심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고향 보성에서 담산 안규홍이 거의했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호곡싸움에서 적의 목을 베고 안규홍의 부장이 되었다. 이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 보성파청전투를 비롯한 보성군 문덕면 진산, 병치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과 싸우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비록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글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역량이 크고, 정직하고, 경우가 분명하며 충성과 의리를 중히 여겼다. |
541 | 오화영 사택 터 | 독립운동 | 2013-05-09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종교교회 | 장소 | 3·1운동 | 1919 | 0 | 1919-03-01 | 오화영은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가 동학에 입교한 적이 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남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개성과 원산 방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로 인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한편, 신간회에도 참여해 민중대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흥업구락부사건에도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다음 달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542 | 6·25 참전 유공자비(중앙탑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가금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9-16 | 6·25참전유공자회 충주시지회 중앙탑면분회에서는 ‘6·25참전유공자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탑면 출신 참전유공자 64명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전 유공자 등 지역의 뜻있는 분들의 성금과 충주시의 지원을 받아 2005년 9월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543 |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12-05-16 | 경상북도 청송군 | 청송군 | 기념관 | 의병운동 | 0 | 2011-06-02 | 청송의진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공원.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을미개혁이 단행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거의를 촉구하는 안동의진 소모장인 유시연의 격문이 청송에 전해지자, 이에 자극받아 1896년 3월 16일(음력)에 심성지를 창의장으로 한 청송의진이 거의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청송의진인 허훈·허환 형제가 주도한 진보의진이 거의하였다. 청송의병은 김하락의 이천의진을 비롯해 각지의 의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청송의진은 영덕전투에 참가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화전등 전투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아 패전하였다. 청송의진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전전하다가 고종의 해산조칙을 내리자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박연백,유시연, 박처사, 강진선, 김문호, 이세기, 이사옥, 강진수, 서종락 등 의병부대가 청송을 활동무대로 활약하였다. 2011년 6월 2일 청송군에서는 청송의병의 항일정신과 의병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 |
544 | 의성군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8-09-05 | 경상북도 의성군 | 무공수훈자회의성군지회 | 비석 | 기타 | 2007 | 2007-04-17 | 의성군 중리 호국동산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의성군 무공수훈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공수훈자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7년 4월 17일 전공비를 세웠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의성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워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경제발전을 초석을 다졌다. 금산군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45 | 의령군 호국참전유공자 비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의령군 | 6.25참전유공자회 의령군지회 | 비석 | 기타 | 2008 | 0 | 2008-02-22 | 의령군 무전리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국참전유공자 비’를 건립하였다. 의령군은 이곳 출신으로 조국을 위해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8년 2월 22일 유공자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 의령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에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의령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46 | 수원시 참전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9-05-25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수원시 사회복지과 | 비석 | 기타 | 0 | 0 | 2009-01-01 | 수원시 인계동 예술공원 내 분수광장 옆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수원시 참전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했다. 수원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9월 28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수원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낙동강 전투의 최후방어선을 비롯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수원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47 | 자유평화 수호탑 | 국가수호 | 2009-05-25 | 충청남도 금산군 | 월남참전자회금산군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0 | 2005-11-30 |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세계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선 금산 출신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2009.5.25. 월남참전자회 금산군지회에서 건립했습니다. |
548 | 우봉 안지호의사 유허비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남도 함안군 | 함안군 | 비석 | 3·1운동 | 1919 | 2010-12-21 | 안지호는 1857년 9월 21일 고성군 고성읍 풍화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여름 경상남도지사에게 도정이 부패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다며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발송했고 1915년 9월에는 우리의 원수 일본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고 약속을 어겼다는 탄원서를 마산경찰서장과 일본정부에 발송하여 구류 15일을 살았다. 1917년 12월 일본은 도적의 마음으로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린다는 규탄의 글을 써서 함안경찰주재소의 유리창을 파괴하고 투입하여 감옥에 갇혔으며 풀려난 후 다시 조선총독부에 필리핀, 폴란드가 독립했으므로 조선도 독립되어야 한다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함안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함안읍 의거를 주도했다. 군중과 함께 군청과 주재소를 파괴하고 우편국, 소학교 및 보통학교, 등기소를 돌며 기물을 파손했으며 군수의 관복을 찢고 경찰서장과 일본관리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2∼3인이 체포되자 그들은 죄가 없으니 나를 체포하라며 자진해서 체포됐다. 부산지청 마산지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대구복심병원에서 징역 7년의 가중형을 받았다. 1921년 12월 23일 마산형무소에서 향년 65세로 순절했다. 우봉 안지호의사 유허비는 2010년 가야읍 신음리 861-2번지 일원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藕峯安智鎬義士遺墟碑」로 새겨졌으며 유허비 옆에 따로 높이와 폭이 1.5m인 취지문비를 세워 유허비를 세운 뜻을 알 수 있도록 했다. | |
549 | 채기중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12-10-17 | 경상북도 상주시 | 채욱식 | 생가 | 의병운동 | 1915 | 2005-12-01 |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 해외에서는 독립전쟁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기지들이 건설되었고 국내에서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국내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국내 비밀 단체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풍기 광목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중심이 되어 1915년에 결성한 비밀 단체였으며 채기중 선생은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분이다. | |
550 |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13-05-13 | 경기도 과천시 |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 동상 | 3·1운동 | 1880 | 0 | 1988-03-11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이 동상은 1988년 단재의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를 연재한 조선일보가 지령 2만호 발행 기념으로 발기하고 유지들의 출연으로 세운 것이다. |
551 | 6.25참전유공자기념비(대전시 가양동) | 국가수호 | 2013-11-22 | 대전광역시 동구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1동 새마을협의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3-06-27 | 대전광역시 가양1동 주민자치위원회는 2003년 6월 정전 50주년을 맞이하여 조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에 참여한 가양동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하고 고귀한 뜻을 기리고 주민들의 애국심 함양을 위한 시설물로 활용하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대전 동구 가양1동 347-2번지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높이 3.5m 규격의 화강석 재질로 3단의 좌대와 상징물, 그리고 기념비문이 있으며 대전 가양동 거주 참전유공자 1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552 | 춘천옥산포전투지 | 국가수호 | 2013-02-18 | 강원도 춘천시 | 육군제2218부대 | 장소 | 6·25전쟁 | 0 | 0 | 2010-06-25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제16포병대대가 즉시 출동하여 옥산포 방향으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소탕하였다. |
553 | (왜관)6.25참전용사 충훈비 | 국가수호 | 2014-12-12 | 경상북도 칠곡군 | 한국자유총연맹 경북칠곡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1-06-25 | 칠곡지역 6.25전쟁 참전유공자 920명의 충혼을 기리고자 건립 | ||
554 | (동두천)베트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7-04-19 | 경기도 동두천시 | 대한민국월남참전유공자회 동두천시지회 | 탑 | 월남전쟁 | 1964 | 2005-11-05 | 월남 파병 부대별 참전자(맹호 76, 십자성 28, 청룡 7, 비둘기 8, 백구 1, 주월사 1 맥마 67명 등 총 178명) | |
555 | 월남 참전 기념비(김제) | 국가수호 | 2003-01-01 | 전라북도 김제시 | 월남참전전우회 김제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9M X 3M | 2000-10-05 | 김제시 삼정리에 2000년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공자 700여 명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전우회 김제지회는 참전유공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고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전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 5일 준공하였다.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베트남전쟁 기간에 김제 출신으로 700 여 명이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556 | 고 해병소령 이인호 현충비 | 국가수호 | 2011-06-08 | 경상북도 청도군 | 청도초등학교 | 비석 | 월남전쟁 | 1966 | 1967-05-01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청도초등학교 내에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이인호 소령을 기념하기 위해 청도초등학교에서 1967년 5월 1일 현충비를 건립하였다. 이인호 소령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출생으로 현재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청도초등학교,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해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 1953년 4월 5일 해군사관학교 제 11기로 졸업하였으며 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미 해병대 상륙전 부대 훈련과정(LFTU), 육군 공수특전 교육 및 수중폭파훈련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베트남전에 한국 해병 청룡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해병 제1사단 수색중대장,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작전보좌관 및 정보참모로 근무하였다. 대대 정보참모로 투이호아 지역에서 해풍작전시 베트콩 색출을 위해 최선두에서 동굴을 수색하던 중 베트콩이 중대원을 향해 수류탄을 한 발 던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집어 베트콩 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또 다른 수류탄 한 발이 부다 대원들 옆으로 떨어져 폭발하려는 순간 수류탄에 홀로 몸으로 덮쳐 대원들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 이후 해병 소령으로 특진되며, 태극무공훈장이,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 |
557 | 6.25전쟁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2-11-12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0-10-16 | 서울고등학교 총동창회는 2010년 10월에 6·25전쟁 때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학도병으로 참전한 서울고 동문들의 명예를 선양함으로써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서울고등학교 교정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전 기념비는 5개의 오석으로 된 비석이 배치되어 있고, 서울고 마크를 새긴 원형의 화강암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후면의 주 비석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새겼고, 주 비석 좌우에 한 쌍씩 서 있는 4개의 비석에는 서울고 동문 참전자 453명의 이름을 기수별로 새겨 넣었다 |
558 |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21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신불산공비토벌참전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2 | 기념비 2m, 너비 0.5m, 두께 0.6m | 2001-06-27 | 제53보병사단은 2001년 6월 27일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 232-16 석남사 입구에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중 희생된 전몰군경, 의용대원 및 지역 주민 등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참전용사 및 유가족의 명예를 선양하며 고귀한 희생정신을 길이 빛내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해마다 신불산참전유공자회의 주관으로 추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군경과 민간 의용대의 신불산 공비토벌작전은 1949년 말부터 1954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군과 경찰, 의용대가 남부군 제5지대장 김원팔 등 450여 명을 소탕했으며, 1952년 2월과 3월에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울산경찰서, 의용대가 미 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공비활동과 토벌작전 과정에서 희생당한 울산지역의 우익인사와 경찰관, 의용대, 군인은 140여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
559 | 6.25전쟁 참전 학도병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05-10 | 서울특별시 중구 | 성동공업고등학교 총동문회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2017-05-21 | 성동공업고등학교 출신의 학도병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학들에게 일깨우고자 이 명비를 건립하였다 | |
560 | 김인전목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8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주서문교회(이승규) | 비석 | 해외운동 | 1876 | 0 | 1986-04-29 |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을미사변 등 국내정세가 혼란하던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에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주력하다가 1910년을 전후로 일제의 침략이 완전히 표면화되면서부터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보다도 많은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議政院) 재무예산위원(財務豫算委員)으로 피선되자 임시의정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즉 의정원에서는 인구세(人口稅)의 징수, 국내외에서의 독립공채 발행, 구국(救國) 활동을 위한 재정단(財政團)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으나 예산과 결산만큼은 행정부에 전담하였다.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政務調査特別委員)이 되어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의 대외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해 지구력과 규율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의 개최와 군인학과의 개설, 사업부의 설치, 국민의용병 등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의 실시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한 지역 선정, 외국의 사관학교에 무관학생(武官學生)을 파견하고 군사선전대를 마련하는 등 직접적 전쟁에 대비키 위한 전열을 가다듬는 등 안건을 내세워 실천토록 하였다. 이렇듯 의정원의 안건설정, 임시정부의 시정방침 등 활발한 활동으로 1920년 4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 의정원을 이끌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 연구회가 협의하여 국내외 각 방면에서의 활동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한(南韓) 지역의 기독교와의 연락책임자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본구 의원에 당선되어 한진교(韓鎭敎) 서병호(徐丙浩)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교민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臨時公債管理局長)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한 중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학무총장(學務總長) 대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하였으며,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連署)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제4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들의 단합을 위하여 안창호 김덕진(金德鎭) 최 일(崔日)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원이 되었으며, 9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교육과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김 구 조상섭(趙尙燮) 이유필(李裕弼) 여운형(呂運亨) 등과 한국노병회(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그는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10월 해산할 때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던 그는 1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다. (1993년 유해봉환, 서울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561 | 가평학도 의용대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가평군 | 가평6ㆍ25참전유공자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2001-11-01 | 가평6·25참전동지회는 2001년 11월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 321-1 (가평공설운동장내)에 6·25 당시 북한군의 무력 침공을 막고자 애국학생들이 자진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전한 전몰자와 참전학도병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전사자와 작고한 동지들의 명단이, 기념비 오른쪽에는 '학우여! 전우여! 고이 잠드소서'라고 새겨진 추모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
562 | 애국지사 성계 김경성선생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22 | 경상북도 의성군 | 김태권(손) | 비석 | 문화운동 | 1879 | 0 | 1991-07-25 | 김경성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도덕리 출신으로, 김중탁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경성은 1919년 10월경 개인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였으며,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신흥 무관 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인도하였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1921년 4월 14일 대구 지방 법원 경주 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죄 명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563 |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 국가수호 | 2002-11-02 | 인천광역시 중구 | 인천광역시 중구청 | 탑 | 6·25전쟁 | 1950 | 중 | 2000-08-31 |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은 2000년 8월 31일 인천 학도의용대 6·25참전회가 주체가 되어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는 2,000여명의 규모로 6·25전쟁 중 군에 입대하여 어린 학생의 신분으로 자유 수호를 위해 참전하였고, 200여명이 전사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인천 시내 각 중학교(현 제물포고, 인천고, 인천기계공고, 동산고, 대건고, 인천여고, 인천여상, 박문여고, 남인천중 등)에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자 학도의용대를 보강조직하여 치안유지에 힘썼다.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재학생이 주축이었고, 당시 고려대학교 2학년 이계송이 인천학생의용대장에 선출되었다. 승전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또 다시 위기에 처하자, 징집대상이 아닌 어린 학생 2,000여명이 1950년 12월 18일 축현초등학교에 집결하여 출정식을 갖고 부산까지 남하하였다. 1951년 1월 700여명은 마산에서 해병대로, 1,300여명은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전사자 200여명, 행방불명자 1천여명, 생존자 450여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인천학도의용대는 1998년 확인되는 대원 1,300여명을 모아 ‘인천학도의용대 6·25참전회’로 재결성되었다. |
564 | 순국경찰관 충혼 불망비(화순) | 국가수호 | 2003-02-10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경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m x 1.5m x 3m | 1985-11-28 | 6·25전쟁 당시 화순경찰서 소속으로 백아산과 화학산, 모후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경찰관 23위의 넋을 기리기 위해 화순경찰서가 1985년 11월 28일 전남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 산5-1(너릿재공원)에 충혼불망비를 건립하였다. 너릿재 공원에는 1950년 10월 북한군의 습격으로 숨진 화순경찰서 소속 경찰관 23위를 모신 순국경찰묘지와 더불어 1951년 4월 너릿재에서 싸우다 순국한 무명용사들의 묘지가 있다. |
565 | 무공수훈자 전공비(청도군)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청도군 | 무공수훈자 청도군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5-30 | 무공수훈자 청도군지회는 2000년 5월 30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청화로 70 (군민회관 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운 청도군 출신 무공수훈자 76명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 군민에게 숭고한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이 전공비를 건립하였고, 전공비에 무공수훈자 76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2023년 10월20일 군민회관 철거로 인해 충혼탑 부지로 이전하였다 |
566 | 심일소령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1.5m, 높이 2.5m | 1998-10-15 |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마차초등학교 내에 6·25전쟁 당시 육탄공격을 감행한 심일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영월군청년회의소에서 1998년 10워 15일 이 비를 세웠다. 심일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4기로 입학,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당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포탄을 쏘아대며 계속 전진해오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한 끝에 북한군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전공 사실은 순식간에 전군에 전파되어 북한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공로로 중위에서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이후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군 등지의 전투에서도 참전했다가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하여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
567 | 성주 공적 충혼비 | 독립운동 | 2007-01-18 | 경상북도 성주군 | 성주군 | 비석 | 기타 | 2004 | 2004-01-01 | 성주 출신으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 국토수호를 위해 희생한 6·25참전 유공자, 자유와 평화·정의를 위해 참전한 파월장병들이 많다. 성주군에서는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6·25전쟁 제54주년(2004년 6월 25일)을 맞아 이 비를 세웠다. | |
568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20 | 광주광역시 남구 | 광주광역시 푸른도시사업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2-11-05 | 광주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 내에 광주광역시 출신 무공수훈자를 추모하기 위해 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에서 2002년 11월 5일 이 비를 세웠다. 이 비는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신 광주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훈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현충시설이다. 전공비의 전면 상단에는 무공수훈자의 마크를, 탑신 전면에는 전공비 명칭과 비문을, 후면에는 광주지역 무공수훈자의 성명을 가나다순으로 오석에 명각하였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에서는 조국수호에 일생을 바치신 무공수훈자의 공훈을 드높이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 |
569 | 충혼탑(진안)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부귀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2-09-30 | 진안 부귀면 사인암 숲에 6·25전쟁 기간 부귀면에서 전사한 전몰용사 등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부귀면은 이곳에서 산화한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9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부귀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귀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70 |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남원)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남원시 | 무공수훈자회 남원시지회 | 비석 | 기타 | 2002 | 0 | 2002-05-31 | 남원 국민관광단지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66명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전공비(남원)’를 건립하였다.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 5월 3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남원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571 | 진주 항일투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10-23 | 경상남도 진주시 | 광복회울산경남지부 서부연합회 | 비석 | 3·1운동 | 1919 | 2002-04-20 |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진주시 매년 신년, 3.1절, 광복절에 후손들이 정기적인 참배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우리고장 출신의 애국선열에 대한 공훈을 돌이켜보고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는 의미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 동부지역(문산, 반성, 금산, 미천, 정촌, 금곡: 옛진양군)의 항일투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됨, 매년 신년, 3.1절, 광복절에 후손들이 정기적인 참배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우리고장 출신의 애국선열에 대한 공훈을 돌이켜보고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는 의미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 | |
572 | 이석용의병장 생가 | 독립운동 | 2006-04-24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 주민복지과 | 생가 | 의병운동 | 1878 | 1870-01-01 | 이석용 의병장 | |
573 | 군포시 월남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3-05-13 | 경기도 군포시 | 월남참전자회 군포시지회 이석규 | 탑 | 월남전쟁 | 0 | 2012-10-10 | 군포시는 2012년 10월 군포시 금정동 산 356-8 한얼공원 내에 월남기념참전탑을 건립하여 젊은 나이에 자유수호를 위해 베트남에 파병되어 용감히 싸운 군포 출신 베트남 참전 용사 1, 057명의 공적을 기리고 그들의 위대한 기상과 숭고한 뜻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한얼공원에는 이 현충탑과 아울러 육탄 10용사 가운데 군포 출신인 이희복 용사 동상이 설치돼 있어 시민들을 위한 안보의식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
574 | 강재구소령 동상 | 국가수호 | 2002-11-02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서울고등학교장 | 동상 | 기타 | 1965 | 0 | 1986-04-12 |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학교 내에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6년 04월 12일 동상을 건립하였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 졸업후,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부하 사병이 실수하여 수류탄이 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속했던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는 '재구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울고 8회 졸업생인 강재구소령의 고귀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6년 4월 12일에 8회 졸업생들이 졸업 30주년을 기념하여 동상을 만들었다. 강재구 소령이 졸업한 서울고 교정에 강재구 소령의 동상을 건립하여 후학들이 선배의 살신성인하는 정신을 본받아 더욱더 애국애족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좌표가 되고 있다. |
575 | 무공수훈자 호국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포천시 | 무공수훈자회 포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2003 | 0 | 2003-06-06 | 무공수훈자회 포천시지회는 2003년 6월 6일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하성북리 635-4에 포천시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수상한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게 호국정신을 배양케 하고자 이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576 | 김수곡·김준운·권규섭·권태용·한상택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7-05-10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문화운동 | 1906 | 2002-07-01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는 2002년 7월 1일 영천 출신 애국지사 김수곡, 김준운, 권규섭, 권태용, 한상택의 공훈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732-1(성환산공원내)에 애국지사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권규섭(?~1907) 선생은 1906년 산남의진에 참가, 산남의진의 좌영장에 임명, 동년 10월 영일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권태용(1920~?) 선생은 1944년 불교전문학교 재학중에 일본군에 강제 징병되어 대구 24부대에 입영하였다. 8월 8일 동지 김이현 등과 함께 탈출에 성공, 대구 팔공산에 은신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수곡(?~1910) 선생은 정환직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김준운(1855~1925) 선생은 신녕공립보통학교 생도들에게 영천 3·1독립운동 참가를 권유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상택(1909~?) 선생은 1928년에 비밀결사 적우동맹(赤友同盟)에 가입, 사회과학 연구를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다가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 |
577 | 6·25 참전용사 기념비(내수읍) | 국가수호 | 2004-12-09 | 충청북도 청주시 | 내수읍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1-11-01 | 내수읍 재향군인회는 2001년 11월 청원군 내수읍 마산리 149-2(내수읍복지회관 광장, 내수읍사무소 옆)에 내수읍 출신 6·25 참전유공자 김흥권 외 108명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군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78 | 조재복·조병화·홍종현·조병진·이진영·황보선·황보근 애국지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22-04-25 | 경상북도 영천시 |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 | 비석 | 기타 | 1906 | - | 2001-01-16 | 1906년 3월에 조직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황보근 애국지사, 영천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병진·홍종현 애국지사, 구학회 및 적우동맹에서 학생 항일운동을 주도한 황보선 애국지사,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간부로서 강력한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이진영 애국지사, 일본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한 조병화 애국지사, 1919년 만세운동을 전개한 조재복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영천항일 독립운동 선양사업회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
579 | 한국전쟁 의성장병 전몰 위령비 | 국가수호 | 2005-05-09 | 경상북도 의성군 | 의성군 전몰군경유자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2-12-29 | 의성군 중리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1, 126위의 의성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전쟁 의성장병 전몰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포항의성향우회는 의성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2년 12월 29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의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성군 전몰군경유자녀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80 | 가래비 3.1운동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기도 양주시 | 가래비3.1운동순국기념사업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7-10-16 | 이 기념비는 가래비 3·1독립운동 순국선열 백남식, 이용화, 김진성과 양주 출신 참여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7년 10월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4에 건립한 비이다. 1919년 3월 초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백남식(2010, 애국장)은 김진성, 이용화와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3월 28일 백남식 등은 효촌리 주민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고창하면서 가납리로 향하였다. 이들이 가납리에 도착했을 때, 미리 모여서 만세를 부르던 광적면과 백석면 주민들은 시위를 마치고 해산하려다가 다시 모였다. 시위대는 오후 4시경 논 가운데 모여 시위를 재개하였다. 이때 의정부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 5명과 헌병보조원, 광적면장이 도착하였다. 헌병이 군중의 해산을 명령하자, 이용화가 이들을 크게 꾸짖었고 군중들이 이들을 향해 돌팔매를 시작하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때 시위대 선두에 있던 백남식, 김진성, 이용화 3인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시위대원 가운데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
581 | 포천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5-10-27 | 경기도 포천시 | (사)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7-27 | 포천 양문리 38휴게소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포천시 출신 전몰군경과 참전유공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포천시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4년 7월 27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포천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582 | 6·25 참전 기념비 (진해) | 국가수호 | 2005-11-09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창원시진해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5-03-22 |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시회는 2005년 3월 진해시 장천동 1-263 소방공원내에 진해시 출신 6·25참전유공자 1368명의 공적을 기리며 그들의 숭고한 구국정신과 불굴의 군인정신을 새겨 나라사랑 정신의 표상으로 삼고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583 | 6·25 참전 유공자 공적탑 | 국가수호 | 2005-10-28 | 전라북도 익산시 | 6.25참전유공자익산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4M X 9M X 3M | 2004-12-15 | 6·25참전유공자회 익산시지회는 2004년 12월 익산시 팔봉동 338-1(군경묘지내 도로변)에 국난에 처하자 자유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하여 희생하신 익산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유공자 공적탑을 건립하였다. 공적탑은 조국과 지구의 항구적 평화를 기원하며 주탑의 상단에 지구본을 설치하고 그 안에 익산 출신 참전유공자 630명의 명단을 새겨놓았다. |
584 | 함북3일전우전공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강원도 철원군 | 육군 제9871부대(23보병연대)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4-04-28 | 철원 자등리 제23보병연대 동산에 6·25전쟁 기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함경북도 애국청년 156명을 기리기 위해 ‘함북3일전우전공비’를 건립하였다. 3일약속전우회는 함경북도 애국청년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에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4년 4월 28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함경북도 애국청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585 | 강릉 무장공비 침투 희생자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탑 | 6·25전쟁 | 1996 | 너비 2mX2m, 높이 2m | 2000-08-29 |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통일공원 내)에 북한 잠수정이 침투한 것을 소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강릉시에서 2000년 8월 29일 건립하였다. 1996년 9월 18일 북한 무장공비 26명이 승선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상어급(360톤) 잠수정이 동해안 일대에 침투해 정찰공작 활동을 벌이다 복귀하던 중 좌초된 것을 새벽 1시 30분경 택시운전사의 신고로 발견하게 되었다. 육군은 국지도발경계태세의 최고 단계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소탕작전을 실시한다. 9월 19일 오전 10시 30분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에 은신한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전과로는 1명 생포(이광수), 13명 사살, 11명 집단 피살, 1명 도주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역 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대간첩작전 중 희생된 17명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잠수함의 침투장소가 보이는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통일공원 내에 ‘강릉 무장공비 침투 희생자 위령탑을 2000년 8월 29일 건립하였다. |
586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삼척)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삼척시 | 삼척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1m X 1m, 뫂높이 2.5m | 1997-12-01 |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삼척시지회는 1997년 12월 6·25전쟁 중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삼척지역 출신의 국가유공자(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해 대한민국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
587 | 충혼탑(아산) | 국가수호 | 2003-02-18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우회아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2-06-25 | 아산 신창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온양경찰 이현종 경감 등 38위의 경찰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아산경찰서와 재향경우회 아산지회는 전국 각 지구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전몰 경찰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2년 6월 25일 이 탑을 준공하였고, 2001년 11월 30일 새롭게 신축한 후 2006년 5월 30일 성역화 하였다. 6·25전쟁 기간 아산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아산경찰서 전투부대는 1950년 7월 10일 북한 정규군 부대의 침략에 맞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많은 경찰이 전사 또는 부상당하였다. 재향경우회 아산지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88 | 장승포 군경합동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01 | 경상남도 거제시 | 장승포 주민센터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4-01-01 | 거제시 장승포동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거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3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거제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거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589 | 항일 애국지사 김용상·김영하 선생 충혼탑 | 독립운동 | 2009-09-22 | 전라남도 화순군 | 김원배 | 탑 | 민족주의운동 | 1919 | 2008-11-05 | 화순군 도암면 출신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하신 김용상 지사와 김영하 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함 | |
590 | 대광동문 순국 기념비 및 한국전쟁 참전 대광학생의 탑 | 국가수호 | 2007-05-03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대광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7-10-25 | 대광학교 동문은 1997년 10월 대광동문순국기념비 및 한국전쟁참전 대광학생의 탑을 건립하여 대광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서 자유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 및 순국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배 동문들로 하여금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발전의 인재로서 커나갈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 |
591 | 죽헌 이주호선생 항일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0-06-09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연일초등학교 총동창회 | 비석 | 학생운동 | 1941 | 2007-11-03 | 일제강점기인 1930년 후반,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다혁당을 결성하여 우리 말글과 민족문화를 연구하는 한편 민중제도, 농촌계몽등 독립운동을 벌이다 1941년 9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3월 6일 만기출옥하였고 이 공로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은 항일독립투사인 죽헌 이주호선생의 공훈과 고귀한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 | |
592 | 경찰혼 | 국가수호 | 2006-11-09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영등포지회 | 조형물 | 기타 | 2006 | 2006-06-23 | 영등포구 당산동에 2006년 광복 후 혼란기, 6·25전쟁, 전후 시기에 전사하거나 순직한 이 지역 경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영등포경찰서는 이 곳에서 순국, 순직한 조용태·김동욱(전쟁 이전), 이재운·박용주(전쟁 시기), 양일용·김영식(전후) 등의 숭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6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전후 영등포 경찰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공비 토벌작전에서 산화했다. 전후에도 자신의 삶보다는 구민의 치안 확보를 위해 사시사철 노력하다가 희생자가 발생했다. 영등포경찰서에서는 매년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93 | 충혼탑(춘천시)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건국회 강원도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1993-07-10 | 춘천시 퇴계공원 내에 6·25전쟁 등에서 산화한 춘천 출신 전몰경찰과 애국청년 등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건국회 강원도지부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3년 7월 1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에서 춘천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춘천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594 | 마을을 빛낸 호국 용사비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신안군 | 안좌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6-11-06 | 신안군 안좌면 마을주민 및 전몰유족은 1996년 11월 6일 신안군 안좌면 시서리 마을회관 옆에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바친 김남섭 외 4명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마을을 및낸 호국용사비'를 건립하였다. |
595 | 문태서 의병장 생가 및 사당 | 독립운동 | 2011-06-08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군수 | 생가 | 의병운동 | 1880 | 2012-05-01 | 문태서 의병장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출생하여 26세 되던 1905년 일제에 의해 불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과 함께 덕유산을 근거지로 함양, 거창, 남원, 무주, 장수, 산청, 합천 등의 영호남지역과 상주, 영동, 옥천, 청주 등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무장투쟁활동을 벌이다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13년 사형 순국하였다. 이에 함양군에서는 문태서의병장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1999년 8월 15일 서상중·고등학교 앞 군유지에 문태서의병장 사적공원을 조성해 사당, 사적비, 동상을 건립했다. 2009년 1월 2일 문태서의병장 생가 복원 사업을 착수해 2011년 12월 4일 공사를 완료했다. | |
596 | 함양군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8-05-09 | 경상남도 함양군 | 6.25참전유공자회함양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2007-11-15 | 함양 신관리 지원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함양군 출신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함양군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함양군은 이곳 출신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고자 ‘함양군 6·25 베트남전 참전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7년 11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함양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각종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
597 | 충혼비(특전부대) | 국가수호 | 2007-10-10 | 경기도 광주시 | 특수전교육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06-01 | 경기도 광주시 매산리 특수전교육단 정문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공군 제15혼성비행단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특수전교육단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6월 1일 건립하였다. 서초구 원지동 청계산 정상에 세운 충혼비와 같은 대상이다(No. 713). 공수기본 250기 대원들은 특전부대 용사로 거듭나기 위해 3주간의 지상훈련을 마치고 공수낙하훈련을 위해 청계산 상공을 비행하던 중 짙은 안개로 수송기가 추락하여 조국을 수호하는 창공의 꽃이 되었다. | |
598 | 이동녕선생 생가·기념관 | 독립운동 | 2013-05-13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기념관 | 해외운동 | 1919 | 0 | 2010-02-23 | 이동녕 선생은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 교육 활동 및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 귀국후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신 인물이다. 이러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생가를 조성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599 | 강릉항일기념공원 | 독립운동 | 2013-05-13 | 강원도 강릉시 | 강릉시 | 장소 | 의병운동 | 1907 | 660㎡ | 2010-05-11 | 2010년 5월 11일 강릉시는 강릉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항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강릉항일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높이 10m의 지방의병항쟁기념탑과 강릉 지역에서 의병 활동한 민용호(을미의병 관동구군도창의대장, 독립장), 민긍호(정미의병 관동창의대장, 대통령장), 권인규(정미의병, 독립장), 권종해(정미의병, 애국장), 권기수(3·1운동, 애족장) 등 5명의 흉상이 건립됐다. 그 후, 의병활동을 펼친 공훈을 인정받아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권익현 지사 흉상을 2014년 7월에 추가(14년도 국가보훈부 12백만원지원)로 건립하여 현재는 총 6명의 항일 애국지사의 흉상이 안치되어있다. 또한 의병장들의 어록, 항일의병 참여자 120명의 명단, 의병 항쟁사 등이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됐다. |
600 | 호국 국가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 상이군경회,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2005 | 0 | 2005-06-13 | 안산 화랑유원지 내에 6·25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운 안산 출신의 상이군경 및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국가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안산시는 이곳 출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6월 13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수지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01 | 6·25 및 월남 참전 유공자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5-09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 안산시장 | 비석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2008 | 2008-06-15 | 안산시는 2008년 6월 경기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성호공원 내에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조국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선 안산 출신 6·25참전유공자 및 베트남 참전유공자의 조국애를 기리기 위해 참전유공자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02 |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양산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영동군 | 6.25참전유공자회 양산면 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7-06-25 | 6·25참전유공자회 양산면분회는 2007년 6월 25일 영동군 호탄리 호탄공원 내에 양산면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달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603 | 호국6·25참전유공자상 및 탑 | 국가수호 | 2007-05-03 | 경기도 남양주시 | 6.25참전유공자회 남양주시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6-12-15 | 남양주시 일패동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남양주시 출신 전몰군경과 참전유공자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6·25 참전 유공자 상 및 탑’을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남양주시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군경과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12월 15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남양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04 | 6·25 순진 16지사 위령비 | 국가수호 | 2009-09-22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동대문구재향군인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8-09-01 | 답십리제당보존회는 1988년 9월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쌈지공원에 6·25전쟁 당시 순국한 대한결사단 답십리분대 소속 16지사의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호국정신을 후세에 전파하기 위하여 16지사위령비를 건립하였다. 당시 동대문구 답십리에 거주하였던 곽명선, 박영인 등 16인은 대한결사단 답십리분대의 결사대원으로 지원하여 조국을 지키는데 온몸을 바쳤다. 1987년 답십리 주민 및 유족을 중심으로 16지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건립기금을 마련하였다. | |
605 | 6·25 참전 공적비 | 국가수호 | 2009-09-22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 안양시 주민생활지원과 | 비석 | 6·25전쟁 | 0 | 2007-03-23 | 안양시는 2007년 3월 6·25전쟁에 참전한 안양시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상기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코자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 평촌공원 내에 6·25참전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공적비에는 안양시 출신 참전유공자 4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충혼을 상징하는 횃불조형 및 비문탑과 화강석으로 된 태극조형, 국군상, 헌화 및 참배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
606 | 6·25 참전 유공자비(충주시 노은면) | 국가수호 | 2010-02-12 | 충청북도 충주시 | 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노은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04-30 | 충주시는 2006년 4월 노은면 신효리 768-8에 6·25전쟁에 참여한 노은면 출신 6·25 참전유공자 68명의 명예와 공적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을 기리며 자랑스러운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607 |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 기념탑 | 국가수호 | 2009-05-25 | 충청북도 보은군 | 6.25참전유공자회보은군지회 | 탑 | 기타 | 1950 | 0 | 2007-10-30 | 보은군 학림리 대바위 새마을공원 내에 6·25전쟁 시기 보은군 일대에 출몰한 공비를 토벌하다가 산화한 이 지역 출신 국민방위군, 의용경찰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 보은군 지회는 안경상, 류재한, 강근식, 라영환, 김선우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7년 10월 30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낙동강 전선에 있던 북한군은 패퇴하면서 소백산으로 북상하는 길목인 속리산 일대에 모여 국군을 공격하거나 산간마을에 출현하여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산외면과 속리산면 청년들을 시작으로 각 면 청장년들은 북한군 패잔병을 토벌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되어 1951년 5월 해체될 때까지 수십 차례 단독 또는 의용경찰, 국군과 합동으로 수 많은 전공을 세웠다.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후에도 공비들의 출몰이 계속되자, 방위군 출신이 공비토벌에 적극 가담하여 500여 명이 산화했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
608 | 호국 6·25 참전 전공비 | 국가수호 | 2010-06-09 | 전라북도 남원시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남원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0 | 0 | 2004-02-25 | 수지면 호곡리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수지면 출신의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6·25 참전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남원시주지면 번영회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4년 2월 2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에서 수지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09 | 일운면 6·25 참전용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8-09-10 | 경상남도 거제시 | 6.25참전유공자회 거제시지회 일운면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6-10-18 | 거제시 지세포리에 6·25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운면 6·25 참전 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6·25참전유공자회는 이곳 출신 참전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6년 10월 18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일운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10 | 고성 호국참전 유공자비 | 국가수호 | 2008-09-05 | 경상남도 고성군 | 고성군 | 비석 | 기타 | 2005 | 2005-10-31 | 고성군 호국참전유공자비건립추진위원회는 2005년 10월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합을 염원하며 6·25 및 베트남전의 참상을 상기하고 고성 출신 호국참전용사들의 애국심을 선양하여 후손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을 정립시키고자 고성군 고성읍 수남리 산 273번지 남산공원에 호국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 |
611 | 6·25전쟁 참전 기념비(김제) | 국가수호 | 2008-12-03 | 전라북도 김제시 | 6.25참전유공자회김제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2006-12-28 | 6·25참전유공자회 김제시지회는 2006년 12월 김제시 신덕동 200-7에 6·25전쟁 당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참전한 김제시 출신 참전 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6·25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상기시키는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12 | 수원삼일학교 학생운동지 | 독립운동 | 2015-10-14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 삼일중학교 | 장소 | 학생운동 | 1920 | 0 | 19200701 | 관련사건: 1920 구국민단사건/1917 삼일학교 동맹휴학 관련인물: 이득수, 최문순, 이선경, 차인재, 박선태, 임순남 혈복단(血復團)에서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학생 이득수(일명 이종상)은 임순남·최문순·이선경 등과 함께 혈복단을(血復團)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였다. 1920년 7월경부터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독립신문을 비롯해 창가집 등을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입수하여 수차례 민가에 배포하였으며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였다. 한편 수원 삼일학교 5·6학년 학생80여명은 1927년 11월 4일 학교에서 사직시킨 4명의 교사 복직과 교무주임 김용각(金龍珏)의 사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
613 | 항일투사 추모탑(하동 옥종) | 독립운동 | 2016-04-27 | 경상남도 하동군 | 항일투사충혼탑보전회 | 탑 | 의병운동 | 1907 | 2015-08-15 | 하동군 옥종면 일대에서 항일투쟁한 유명인사 40명과 무명전사자 117인의 영혼을 위로 및 추모하고 후세에 영원히 기리고자 건립함 | |
614 | 월남 참전 기념탑(전라북도) | 국가수호 | 2012-05-16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 (사)전라북도월남참전전우사회복지지원회 | 탑 | 월남참전 | 1970 | 0 | 2007-05-10 | 전주시 덕진동에 2007년 전라북도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통영시 월남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전라북도월남참전전우사회복지지원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7년 5월 10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8년간 전라북도 출신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맞서서 이국만리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다. |
615 | 성남 항일의병 기념탑 | 독립운동 | 2015-10-14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성남시 | 탑 | 의병운동 | 0 | 2015-04-28 | 취지/유래 : 성남시 항일의병 정신 함양 관련전투/전사 : 동천 남상목의병장 및 윤치장 선생외 부하 의병 7명 항일의병 국가유공자와의 관련성 : 성남시 항일의병장 남상목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성남시 항일 의병들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
616 |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 국가수호 | 2012-05-16 | 경기도 양평군 | 양평군 무공수훈자회 | 비석 | 기타 | 0 | 0 | 2009-11-25 | 양평군 창대리에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양평군 지역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양평)’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양평군지회는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9년 10월 20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양군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17 | 고하 송진우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17-04-19 | 전라남도 담양군 | 송진한 | 기념관 | 한말구국운동 | 2017 | 2012-12-30 |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로 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민주건국의 등불이었던 고하 송진우선생(1890~1945)의 삶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음 | |
618 | 백호부대 전적비 | 국가수호 | 2010-02-1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중 | 1961-08-15 | 백호부대전우회는 1961년 8월 15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248-1에 백호부대 전적비를 건립하여 1951년 2월부터 1954년 2월까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장렬히 산화한 백호부대 전우들의 넋을 추모하였다. 백호부대, 곧 동키(DONKEY)부대는 북한 출신 청년으로 구성된 장연군 무장대 26명으로 출발하여 월남한 북한 청년들의 가담으로 2천여 명까지 늘어났다. 동키부대는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83차례의 작전을 벌여 적 사살 2100여 명, 생포 105명, 반공인사 구출 4500여 명이라는 전과를 올렸으며 대원들이 적진에서 얻은 정보는 연합군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수행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동키부대는 휴전협정과 동시에 해산되어 전우의 시체를 북한지역 산골짜기나 해변가 모래밭에 묻어두고 각각 주둔지에서 철수했으며 4년간의 활동기간에 전사 338명, 부상 406명, 행방불명 34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
619 | 국군 제9사단 대둔산지구 6.25 전사자 충혼비 | 국가수호 | 2011-06-08 | 충청남도 논산시 | 육탄용사선양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0-11-26 | 충남 논산시 벌곡면에 국군 제9사단과 육탄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제9사단대둔산전우회와 육탄용사선양회에서 2010년 11월 26일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육군 제9사단은 1950년 10월 25일 28연대(대전), 29연대(공주) 및 30연대(청주)를 기간으로 서울특별시 청계 국민학교에서 창설되었다. 창설 직후 28연대와 29연대는 대둔산 지구에 대둔산전투사령부를 설치, 10월부터 12월까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해 사살 2, 000여 명, 포로 250여 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전투경찰에 작전을 인계하고 1951년 북진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예하 30연대(독수리부대)가 6·25 전사상 대표적인 산악전투인 매봉산 전투, 한석산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에 맞서 고지전을 펼친 끝에 승리하였다. 1952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에 걸쳐서는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395고지에서 중공군 3개 사단과 격돌하였는데 적사살 13, 000여명의 전과를 올리며 승리하였는데 전투가 끝난 뒤 포격에 의해 고지의 형태가 말의 형상으로 변한 것을 본 미군들은 그곳 395고지를 White Horse Hill(백마고지)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육군 제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전후 60년이 지난 2010년 11월 26일 육탄용사회에서 육탄5용사를 비롯해 숨져간 7, 641인의 용사들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
620 | 밀양 6.25및 베트남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3-11-22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비석 | 기타 | 0 | 0 | 2011-07-14 | 밀양시 교동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밀양시는 호국용사의 드높은 나라사랑정신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1년 7월 14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밀양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621 | 故최규식경무관동상(경찰학교) | 국가수호 | 2014-12-12 | 충청남도 아산시 | 경찰대학 | 동상 | 기타 | 1968 | 1983-01-21 | 북한 무장 공비 김신조 등 31명의 청와대 습격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기습공격 저지중 총탄 막고 순직 | |
622 | 고 오규봉하사 동상 | 국가수호 | 2013-11-22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 천안시재향군인회 | 동상 | 6·25전쟁 | 1950 | 0 | 2013-06-07 | 천안시 삼룡동에 천안시 출신 오규봉 하사를 추모하기 위해 육군 9사단과 천안시에서 2013년 6월 7일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오규봉 하사는 육탄 3용사 중 한 명이다. 육탄 3용사는 한국전쟁 당시 중부전선의 최대격전지였던 백마고지를 육탄으로 탈환한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를 일컫는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던 곳 중 백마고지는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를 감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이자 최대의 전략요충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이날 아침부터 9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전 지역에 집중적인 사격을 퍼부으며, 북쪽 5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했다. 이로 인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이 범람했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하고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 제9사단은 인력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10월 12일 국군의 역습이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좌절되자 제9사단 제3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와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 등 3용사는 특공대를 자원하여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적진에 돌진하였다. 이들 3용사는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백마고지를 탈환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로써 12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 끝에 백마고지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2013년 9사단은 모금활동을 벌여 추모비 건립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 천안시가 부지를 제공해, 전사 61년만에 오규봉 하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 삼룡동 마틴공원 맞은편에 동상을 세웠다. |
623 | 천안함 용사 故장철희 졸업생 추모비 | 국가수호 | 2014-12-12 | 서울특별시 노원구 | 대진고등학교 | 조형물 | 기타 | 2010 | 2014-08-14 | 이곳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전사한 46인의 용사 중 막내인 故장철희 일병의 모교이다. 장철희(1991~2010)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나 중평중학교를 거쳐 대진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22회)하고 철도인의 꿈을 안고 2009년 우송대학교 철도전기신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후 2010년 1월 해군에 입대(해군병563기), 3월 11일 천안함 보수병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그 달 26일 북한 잠수정의 기습적인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되면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뒤 정부에서는 졸업생의 살신 보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서해수호의 날에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에서 졸업생을 추모하고 있다. | |
624 | 모암 장희수 애국지사 항일 기적비 | 독립운동 | 2017-04-19 | 전라남도 화순군 | 장동연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2004 | 0 | 2004-03-01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625 | 곡성경찰서 전적기념비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남도 곡성군 | 곡성경찰서 | 비석 | 기타 | 1950 | 비석 2m | 1993-04-20 | 1950. 8. 6 북한군이 태안사작전 지휘본부를 기습공격해 경찰관 48명이 전사한 태안사 전투와 1951. 9. 29 공비 1,500명이 곡성경찰서를 습격하여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던 전투로 적군 506명을 사살하고 아군 25명이 전사한 9월30일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희생당한 경찰관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위해 비석을 건립하였다 |
626 | 호국영웅 차일혁 경무관 흉상 | 국가수호 | 2017-11-23 | 전라북도 정읍시 | 전몰군경유족회 정읍시지회 | 동상 | 6·25전쟁 | 2017-09-29 | 차일혁 경무관(1920.7.7.~1958.8.9.)은 1951년 1월 6.25전쟁중 빨치산 2,000여명이 국내 유일의 정읍 칠보발전소를 포위하자 제18전투경찰대대장으로서 75명의 대원을 이끌고 빨치산을 격퇴하였으며, 1953년 9월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여 빨치산 토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으며, 6.25전쟁 당시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사철의 소각 명령에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 소각함으로써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는 기지를 발휘하여 문화재 보호에도 큰 공을 세웠다. | ||
627 | 경주시 625참전 월남전 참전자 명예 선양비 | 국가수호 | 2018-05-10 | 경상북도 경주시 | 경주시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2017-09-30 | ㅇ경주시 출신 6.25전쟁, 월남전 참전 8,800여명의 명예 선양 | |
628 | 기미 3.1운동 기념비(이원면)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옥천군 | 이원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58-08-15 |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23 이원역 광장에 세워진 이 3.1운동 기념비는 1958년 8월 15일에 제 2대 이원면 의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당시 주동자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허상기, 허상구, 허상준, 김용이, 육창주, 공재익, 조이남, 이금봉, 이호녕 등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 장날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형기를 다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애국지사들은 옥고에 시달려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하였다. |
629 | 의병장 한공봉수 송공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청주시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0 | 1967-08-15 | 충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한봉수 의병장은 진천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진천·횡성·장호원 등에 출몰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630 | 3·1운동 의거 기념비(영동)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영동군 | 매곡면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6-03-01 | 안준, 안광덕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매곡면 3·1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6년 3월 1일 매곡면민의 정성을 모아 매곡초등학교 교정에 건립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2006년 3월 1일 학교 앞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안광덕이 서울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하고 나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가하여 같은 마을 안준과 시위계획을 짰다. 이에 신상희 장복철 안병문이 합세하고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이장노, 김용문, 장출봉 등도 합류하여 태극기 2천여 매를 미리 제작하였다. 4월 3일 이들은 면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옥전, 노천리의 3백 여명과 함께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이들은 매곡면사무소에 몰려가 면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군중의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러 황간으로 나아갈 계획이었으나 날이 저물어 중지하였다. 대신에 추풍령 헌병분견대를 습격코자 했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출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거를 주동한 사람 11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631 | 뉴질랜드 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가평군 |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88-01-01 | 가평군이 1988년 9월 가평군 북면 목동리 691-1에 6·25전쟁 당시 자유수호를 위해 참전한 뉴질랜드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뉴질랜드전투기념비를 재건립하였다. 원래 1963년 4월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이 자리에 뉴질랜드군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던 것인데, 탑의 노후화로 인해 가평군에서 재건립한 것이다. 뉴질랜드는 6·25전쟁에서 31명이 사망하고 7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1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희생이라고 한다. | |
632 |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청주시 문화예술체육회관 | 동상 | 문화운동 | 1880 | 0 | 1996-12-08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청주 예술의 전당 앞에 세워져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동상은 단재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2년 동안 전국에서 9천여 명의 헌금과 충청북도 등에서 지원한 지원금으로 1996년 12월 8일 단재선생 탄신일 116주년을 맞아 건립되었다. |
633 | 오우덴중령 현충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6-10-12 |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보훈공원 내에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산화한 오우덴 중령과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1군사령부에서 1966년 10월 12일 이 비를 세웠다. 네덜란드 군은 1951년 2월 21일에서 3월 13일까지 횡성지구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장병들의 희생 또한 컸었다. 오우덴((Marinus Petrus Antonius den Ouden) 중령은 네덜란드의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오우덴 니우 가스텔에서 태어났다.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브레다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1932년에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에 복무하였다. 그는 전란 당시 국제 연합군 소속 네덜란드 대대의 대대장을 역임하였으며, 1951년 2월 12일 횡성 전투에서 중공군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며, 같은해 4월 14일 빌럼 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 |
634 | 남강 조정환선생 구국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75 | 0 | 1994-03-13 | 조정환은 녹산 출신으로 파주에 인성학교를 세워 후진을 기르다가 경술 합방 이후에 아세아 시국변론, 일본 대한정책론, 한국 유신론 등의 책을 지어 개혁과 자강을 역설하였다. 3·1운동 후 만주에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군자금 모금 차 입국했다가 다시 만주로 가서, 1923년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하고 다물단을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북경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1927년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우국의 한시 한 수를 보낸 뒤 소식이 두절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635 | 643고지 전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2-01 | 강원도 화천군 | 화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높이2.3 m 기단1.52m | 1957-03-15 | 육군 제2군단은 1957년 3월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 산8에 6·25전쟁사에서 주요 승전의 하나로 꼽히는 643고지전투의 위훈을 전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643고지 전투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643고지는 1951년 6월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7연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에 맞서 치열한 백병전 끝에 최후까지 사수한 격전지다. 이 고지는 화천의 크고 작은 능선에서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는 전략상 요충지여서 국군·미군과 중공군 간에 총력전을 펼쳤다. 국군 제6사단 예하 7연대가 6월 6일 643고지에 깃발을 꽂아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643고지 전투에서 아군은 적군 21, 550명 사살, 2617명 생포, 야포 86문·기관총·소총 2695점 노획 등의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
636 | 소해 장건상선생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동상 | 의열투쟁 | 1882 | 0 | 1991-10-13 | 장건상 선생은 부산 사람으로 중국에서 동제사,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족혁명당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의열단에서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의열단 고문이 되어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하였다. 이를 기리기위해 건립하였다. |
637 |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동래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19 | 0 | 1995-11-03 | 동래고 학생들의 주요 항일운동인 노다이 사건(1940.11.23. 부산항일학생의거), 동래고보 학생의거(1919.3.13.), 동래중학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순국당 사건, 1940년 당시 동래중학교 학생들이 독서회를 조직, 항일투쟁 전개) 등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다. |
638 | 검정다리 추억비 | 독립운동 | 2002-11-30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광역시 중구청 | 비석 | 기타 | 1996 | 0 | 1996-07-01 |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대신동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면회를 오기도 했다. 이 때 건넜던 검정다리는 다리를 놓은 통나무를 썩지않게 하기 위해 검게 그을린 데서 이름 붙여졌지만, 애국지사들이 검은 수의를 입고 옥살이를 한 데서 왔다고 한다. 1987년 이후 이 다리는 복개공사로 없어졌지만, 부산 중구청은 이 다리에 얽힌 애환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서 1996년 7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639 | 매봉 한석산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90-11-09 | 육군 제2307부대 참전동지회는 1990년 11월 강원 인제군 인제읍 고사리(피아시)에 매봉 한석산 전적비를 세워 매봉·한석산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자 하였다. 매봉·한석산 전투는 1951년 5월 1일부터 10일까지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제3대대가 전략적 요충지인 한석산 남쪽에 위치한 매봉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북한군 12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고지를 탈환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북한군 사살 895명, 포로 42명, 각종 화기 347점을 노획함으로써 장교 100여 명 모두 무공훈장을 받았고, 부사관과 사병은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매봉·한석산의 탈환으로 인해 국군과 연합군은 인제·원통에서 현리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확보하여 향후의 전황 전개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
640 | 부산광역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5-30 | 부산광역시 동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탑 | 기타 | 1983 | 0 | 1983-09-07 | 부산 영주동에 건국 이후 산화한 이곳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부산광역시는 이 고장 출신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3년 9월 7일 충혼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부산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41 | 박상진의사 생가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북구 | 울산광역시북구청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84 |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도장채, 아래재 등 6동 건물 | 2007-08-15 |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1905) 이후에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위가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모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하여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데라우치총독 암살을 시도하였으며, 악질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1월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 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도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 1921년 8월 11일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2007년 8월 15일 생가 복원사업이 완료되었으며, 추가로 전시관이 마련되었다. |
642 | 칠성탑(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탑 | 6·25전쟁 | 1950 | 1959-06-25 | 보병 제7사단장 하갑청 장군이 민족의 간성인 충용무쌍한 칠성사단장병과 더불어 조국통일 전선에서 외롭게 순직한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남북통일을 이룩할 결의를 굳게 다짐하는 뜻에서 당시 제3군단장이었던 오덕준 장군이 이 탑을 건립하였다. | |
643 | 무명용사 충혼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12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9-29 | 인제군 한계리에 6·25전쟁 기간에 인제군 노전평전투에서 산화한 726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무명용사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인제군과 제12보병사단은 이 고장에서 전사한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7년 9월 29일 충혼비를 세웠다 1951년 8월 중순 국군 제8사단이 투입된 노전평 지구에서 적의 주저항선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두고 적의 저항도 격렬하여 수시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를 반복하면서 쌍방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2014년 10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이곳에서 전사한 강영만 하사의 유해를 발굴해 유가족에게 유품을 전달했다. 세월의 흐르면서 충혼비가 크게 퇴락하자, 인제군에서 1999년 9월 정비하였다. 인제군과 군 부대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44 | 위령비(인제군)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2-05-12 | 6.25전쟁 당시 미 제10군단 지원작전에 있어 생명을 바쳐 참전한 육군 제103부대 및 소속 장병들의 명복을 빌고 공훈을 기리고자 1962년 건립하였다. |
645 | 현리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인제군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85-06-25 | 하늘도 맺혀 울고 딸고 목메였던 혈육의 비극 6.25, 피어린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1951년 5월 북괴군 제5군단과 중공군 제12군은 우리 육군 제3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대공세를 취하여 후방의 요지인 오미재고개를 차단하였다. 군단은 완강한 방어를 시도하였으나 지형과 기상의 악조건으로 인접부대간의 협조가 단절되어 끝내 크나큰 희생만을 치루고 후퇴함으로써 종심 50km의 돌파구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 쓰라린 전투를 거울삼아 나라지킴을 새롭게 다지고 이 전투에서 이름 없이 몸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삼가 빌면서 이 전적비를 세워 그 높은 뜻을 기린다. 1985년 6월 25일 육군제2307부대 |
646 | 강릉지구 포병전공비 | 국가수호 | 2003-09-20 | 강원도 강릉시 | 사천면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너비 7.7m X 7.7m, 높이 10.8m | 1991-12-11 |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에 6·25전쟁 당시 강릉지구에서 치러진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91년 12월 11일 명주군수 등 각계의 후원으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사천초등학교 일대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월 26일 38선 인근에 강릉 8사단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6월 27일에는 현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강릉 8사단 제18대대는 105밀리 포 5문을 사천면 노동하리 지역에 배치하였다. 석교2리 뒷산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당시 장경석 대대장을 중심으로 사력을 다하여 주문진 북방을 향해 지원 사격을 가하였으나 아군은 주문진 이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18대대 장병들은 다시 105밀리 포를 사천초등학교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가래골 뒷산의 관측소와 연곡천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되어 사력을 다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8대대는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덕실리 앞에서 맹렬한 지원 사격을 계속 가하였다. 그러는 동안 북한군은 육지를 포기하고 경포, 강문 쪽으로 돌아 상륙하여 삽시간에 사천 쪽으로 밀어닥쳤다. 국군은 계속 패하는 상황에서 바다 쪽을 헤아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사천면 이남으로 넘어왔으니 18대대 장병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18대대 장병들은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올라가 육박전을 하였으나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전멸되다시피 패배를 당하였으니 여기저기 나뒹굴어 피아간의 시체가 말할 수 없이 많아 동리 주민들은 며칠 동안 시체를 점검하고 팻말을 부착하고 매장하였으나 당시 수백 구의 시체 중에서 몇 구의 시체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18대대에는 월남한 장병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팻말도 없이 무명용사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천의 유지들이 회의를 열고 사천초등학교 뒷동산 임간 교실 위쪽에 이름 모를 국군의 시신 3구가 묻혔던 자리에 '용사의 묘'를 기념하도록 하고 당시 전쟁사에 기록해 줄 것을 전사편찬위원회에 특별히 청하였다. '자라는 어린 새싹들에게 멸공 교육의 귀감(표본)이 되게 하자.'는 의미에서 당시 뜻있는 인사들의 주선으로 무명용사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추모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격전지의 무명용사 묘이다. 때마침 사천초등학교가 전국 새마을 시범학교로 알려져서 전국의 교장시찰단에게 공개되자 무명용사의 묘는 이곳을 찾는 교육 관계자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다. 그 뒤 18대대 전우회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이곳을 찾아서 다시 복원하여 비문을 건립하고 과거를 되살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장렬하게 싸우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무명용사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들이 바로 중사 최서종과 하사 한명화, 일병 심우택이다. 중사 최서종은 지휘통신 선임하사로 적진으로 유선 철수 중 전사하였다. 하사 한명화는 관측하사로 미노리 능선에서 관측 임무 수행 중 전사하였다. 일병 심우택은 운전병으로 백병전 상황에서 포차로 진지 이탈 중 전사하였다. 무명이었던 3용사의 이름이 밝혀지고 '사천삼용사비'로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민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가 새로이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1991년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로 건립되었다.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주민들이 처음 ‘사천삼용사비’(건립일자 미상)이 세워졌다가. 1980년 6월 6일 다시 비석을 세우고, 1981년에는 포병 18대대가 복원하였다. 그후 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가 1990년 설치되고 부지 및 기금을 바탕으로 1991년 12월 11일 준공되었다. |
647 | 설악산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04-28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비 (기단 0.7m, 둘레 8.9m), 동상(기단 0.75m, 동상 3.25m) | 1978-11-10 |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설악산지구 전적을 기념함과 동시에 그 전투에서 전사한 혼령을 위로하고자 교통부에서 1978년에 이 비를 세웠다. 1976년 대통령의 교통부 연두순시 때 6·25전쟁 전적지 개발 추진지시에 따라 교통부, 국방부, 문공부, 국제관광공사 합동으로 전적지 개발계획을 작성하여 1976년 7월 21일 대통령 재가를 받아 1978년 1월~6월까지 개발대상지를 답사 사업계획을 승인받았다. 그후 교통부차관을 위원장으로 관계부처국장급 및 전문가로 추진위원회를 구성 1978년 7월 8일 설악산지구전적비설계를 완료하고 같은해 11월 10일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설계는 최기원 조작가가 담당하였다. 이 전적비는 11사단과 수도사단이 북한군과 싸운 전투를 기념하고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설악산전투는 중공군 1차 춘계동세시 국군 1군단의 11사단 및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5군단과 치른 공세적인 전투로서 1951년 2월 삼척 부근에서 태백의 준령을 따라 북진한 국군 제11 및 수도사단은 5월 7일 공격을 개시해 6월 9일까지 공격을 계속,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향로봉지역의 북한군 제5군단을 격퇴하고 설악산 일대를 확보하였다가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강릉과 대관령지역으로 철수하여 중공군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
648 | 제1군단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도 속초시 | 속초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91-05-30 |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에 6·25 당시 설악산 전투 등으로 참전했던 제1군단 용사들의 무훈을 기리고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8군단에서 1991년 5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제1군단은 동해안 축선반격작전의 주력부대로서 1951년 5월 7일부터 휴전까지 치열한 작전으로 꼽히는 설악산전투, 351고지전투, 향로봉지구전투에 투입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설악산전투는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시 삼척 부근에서 태백산맥의 준령을 따라 북진한 제1군단 예하 11사단 및 수도사단이 양양과 간성을 통하여 향로봉지역의 북한군 제5군단을 격퇴한 후 설악산 일대를 확보하였다가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로 강릉과 대관령지역으로 철수하여 중공군의 침입을 저지하며 영동지역 사수를 위해 치른 전투다. 351고지 전투는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18일까지 벌어졌던 전투로 제1군단 예하 제5, 제11, 제15수도사단과 적 제6, 제7, 제9사단이 금강산과 고성군 일대의 곡창지대를 통제할 숭 ᅟᅵᆻ는 공격발판을 확보하기 위해 월비산 208고지, 351무명고지 일대에서 공방전을 감행하다가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적 1개 사단을 전멸시킨 격전지로 현재 동해안 일대를 수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전투다. | |
649 | 장윤덕의사 순국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북구 | 경북대학교 | 비석 | 의병운동 | 1872 | 1965-05-01 | 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 1907년 이토히루부미 암살계획에도 참여, 의병을 모아 이강년 의진과 합류한 후 풍기, 봉화 일대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고 일보누 공무소를 습격, 상주에서 교전후 순국하였다. | |
650 | 대구학생 운동지 | 독립운동 | 2003-02-14 | 대구광역시 중구 |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장 | 사적지 | 학생운동 | 1941 | 1923-05-01 | 일제의 전시체제가 한참 강화되어 가던 1941년 2월 15일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이던 김성권(金聖權)·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문홍의(文洪義) 등이 당시 대구부 대봉정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고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사까지 포섭하여 활동하였다. 다혁당 관련자들은 1941년 7월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두안(姜斗安, 1922~1944, 옥사), 고인옥(高麟玉, 1921~), 권쾌복(權快福, 1921~), 김근배(金根培, 1921~미상), 김성식(金聖植, 1922~), 김영복(金榮宓, 1919~), 김효식(金孝植, 1920~), 문덕길(文德吉, 1921~), 문홍의(文洪義, 1921~), 박우전(朴祐雋, 1920~), 박제민(朴濟民, 1919~), 박찬웅(朴贊雄, 1919~1943, 옥사), 박효준(朴孝濬, 1924~), 배학보(裵鶴甫, 1920~), 서진구(徐鎭九, 1921~1944, 옥사), 안진강(安津江, 1922~), 양명복(梁命福, 1921~), 오용수(吳龍洙, 1922~미상), 유흥수(柳興洙, 1922~), 윤덕배(尹德裵, 1921~), 윤영석(尹永碩, 1922~), 이도혁(李道赫, 1922~), 이동우(李東雨, 1922~), 이무영(李茂榮, 1921~), 이원호(李元鎬, 1923~), 이종악(李鍾岳, 1923~), 이주호(李柱鎬, 1921~), 이태길(李泰吉, 1920~ ), 이홍빈(李洪彬, 1923~), 임병찬(林炳讚, 1922~), 장세파(張世播, 1919~1945), 조강제(趙崗濟, 1923~1950), 최낙철(崔洛哲, 1921), 최대석(崔大碩, 1923~), 최영백(崔榮百, 1921~) | |
651 |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11-06-08 | 대구광역시 달서구 | 두류공원관리사무소 | 탑 | 학생운동 | 1941 | 1998-03-01 | 1938년 3월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조선의 민족성이 담겨있는 소설이나 시, 역사서 등을 읽는 것은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에 대구사범학교에서는 문예부를 시작으로 연구회,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문예부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구, 그리고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다. 연구회는 독립 쟁취라는 사명을 위해 자신들의 분야에서 심층적 연구를 통해 지식과 힘을 키웠다. 다혁당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군사 훈련도 실시하였다. 1941년 일제 경찰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한 사실을 알아낸 후 비밀 결사의 회원들, 조선인 교직원, 학부모를 모두 포함하여 총 300여명을 체포하는 ‘대구사범학교 사건’을 일으켰다. 이 중 35명이 구속되었으며, 그 중 5명은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옥에서 순국하였다. 이 탑은 대구사범학교재학생 박효준 등이 항일결사 모임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데 대한 공훈을 기리고 옥중 순국한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화 등 5인에 대한 추모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 |
652 |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교사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4 | 경상북도 구미시 | 최성구(자녀) | 비석 | 3·1운동 | 1892 | 1966-05-06 | 구미시(전 선산) 해평면 출신 독립운동가 최재화를 추모하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학산되어 가던 중인 1919년 4월 3일, 최재화는 산양리, 송곡리, 금호리 주민 60 ~ 70명을 이끌고 해평면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5월 8일에는 경북도내의 조선인 관리의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애국청년들을 모집하여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경상북도 경찰 제3부에 제령위반 혐의로 송치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1920년 7월에 상해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의열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미시에서는 1966년 5월 6일에 최재화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이 비를 세웠다. | |
653 | 밀양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10-06-09 | 경상남도 밀양시 | 밀양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66-01-01 | 밀양시 충혼탑은 원래 1966년 6월 6일 경남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내 밀양 출신 호국영령들을 봉안하기 위하여 밀양군민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건립된 것이다. 충혼탑이 노후화하고 주변 공간도 협소하여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2009년 10월 26일 밀양시 교동 517-1 밀양대공원에 충혼탑을 이전 건립하였고 아울러 밀양 출신 호국영령 2470위를 모신 봉안각과 사무실, 영상실 등을 설치하였다. 특히 봉안각에는 6·25전쟁의 발발단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황을 알 수 있는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어 청소년 및 시민의 산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654 | 사부령 순국지사 합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12-09 | 경상북도 영양군 | 정동진 | 비석 | 한말구국운동 | 1895 | 1991-07-24 |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다음해인 1896년 6월 22일 김도현의진에서 활약하던 정성첨(1853~1896), 김상조는 의병 30명을 이끌고 입암면 연당리 사부령(思夫嶺)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진보 쪽에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하여 사부령 고개로 이동하다 접전하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섬첨이 이끄는 의병은 화기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전하였고, 정성첨을 포함한 의병 11명(김상조, 김상진, 김경재, 안경순, 김계현, 김순흠, 김장흠, 김용흠, 심의영, 박석래, 남조한)이 순국하였다. 건립위원회는 1991년 7월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479-6(임천교앞) 앞에 사부령전투에 참전하여 순국한 애국지사 12분의 넋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합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55 | 김해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9-01-01 | 김해시 삼방동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김해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9년 1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김해 시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김해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56 | 해병혼 탑 | 국가수호 | 2003-12-01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사)해병대전우회 제주도연합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60-01-01 | 제주시 동문로타리에 6·25전쟁 등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제주 출신의 해병들을 기리기 위해 ‘해병혼 탑’을 건립하였다. 제주시는 이곳 출신 해병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에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해병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0년 4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제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57 | 울진 기미독립만세 기념탑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울진군 | 탑 | 3·1운동 | 1919 | 1991-08-15 | 기미년 3.1운동이 확산될 무렵 울진 지역에서는 동년 4월 11일 매화장날 500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13일 북면 부구리 흥부장터에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 |
658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29 | 높이 8.73m | 1959-01-01 |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다.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왕재일과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학생인 박인생 등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성진회를 결성했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1차 광주학생운동이 끝난 후 일본경찰은 광주고보생 48명, 광주중학생 8명, 광주농교생 11명, 광주사범생 5명등 총 72명을 검거했다. 그 중 고보생 39명, 농교생 1명을 형무소에 가두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보안법위반 따위의 죄명으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2차 광주학생운동을 전개했으며 광주농교생 또한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를 구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하다가 광주고보 앞에서 강제 해산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하여 구속되고 고문당한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창회에서 성금을 모아 1959년 6월 10일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옛 교정에 세웠는데 1974년 9월 30일 현 교지로 학교가 이전함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건립하였다. |
659 |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광주광역시 북구 | 광주시립미술관 | 탑 | 3·1운동 | 1919 | 높이 17.5m | 1986-01-01 | 1910년 3월 10일 광주시 일대에서 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기리기 위하여 광주광역시가 건립한 기념탑이다. 당일 오후 2시 양림동 쪽에서 기독교인과 수피아,숭일학교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양동시장을 향하여 내려오고 일반시민들은 서문통을 따라 광주천으로 가서 합세하였다. 또한 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은 북문통을 거쳐 광주시를 누비니 참가 인원이 천여명에 달했다. 이 날 주동자인 김철, 서정희를 비롯하여 100여 명을 검거되었다. 김철, 서정희, 김강 등 주동인물 30여 명이 옥고를 치렀고, 송광춘은 옥고 중 사망하였다. |
660 | 고하 송진우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남도 담양군 | 담양군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89 | 1991-01-01 | 송진우는 190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16년 귀국하여 중앙학교의 교감이 되어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1917년 단군·세종대왕·이순신을 남산에 모시는 삼성사 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중앙학교 교장이 되어 3.1운동을 준비하는데 참여하였다가 교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0년 석방되어 고향에서 학교설립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1925년 특파원 자격으로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참여하였다. 1926년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송진우는 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석방 후에도 언론활동과 함께 실력양성을 위한 문맹퇴치운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하고, 다시 브나로드 운동을 지원을 지원하는 한편, 백야 김좌진 장군에게 비밀리에 네 차례나 군자금을 제공하여 독립을 준비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이후 창씨개명과 학도병 권유 유세를 거부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파악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은신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송진우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만성리 167번지 관어공원내에 '고하 송진우 추모비'가 세워졌다. | |
661 | 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완도군 | 박권부 | 비석 | 학생운동 | 1929 | 1980-03-01 | 정남균은 전남 완도 사람이다.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1926년 1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 소재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왕재일·장재성 등 광주고보와 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 동지포섭으로 조직 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동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동년 3월 졸업 후에도 계속 모교 독서회와 연락하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 후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662 |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 국가수호 | 2008-12-03 | 경상남도 거제시 | 거제해양관광개발공사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0 | 1999-10-15 | 경남 거제시 신현읍에 민족사의 비극인 6·25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거제시에서 1999년 10월 15일 이 유적공원을 건립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해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해 거제시 옛 신현읍, 연초면, 남부군 일대에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시작되었다.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후 휴전회담시 포로송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북한, 중공, 유엔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 670명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인해 더 이상의 효용가치가 없어져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
663 | 의사 박공문용 기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남도 보성군 | 보성군 문화관광과 | 비석 | 해외운동 | 1882 | 기단 0.27m, 탑 높이 1.7m | 1996-07-01 | 보성군 출신으로 임정활동(불변단 특파원, 조선독립사령부 총책으로 미의원단 암살기도)에 앞장서며 나라 위해 몸 바친 의사 박문용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위해 건립함. |
664 | 충혼탑(성산읍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성산읍 | 탑 | 기타 | 1997 | 1997-01-01 | 성산읍 충혼묘지 내에 1997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성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성산읍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7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제주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성산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65 | 충혼비(온평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온평리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3-01-05 | 서귀포 온평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온평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63년 1월 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온평리 주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66 | 충혼비(표선면) | 국가수호 | 2003-05-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표선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1967-06-06 | 서귀포 성읍리에 1953년 6·25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산화한 전몰용사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표선면에서는 이곳 출신 고태호, 강광희, 현상진, 김상호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7년 6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표선면 출신의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하나 뿐인 생명을 바쳤다. | |
667 | 충혼탑(남원읍 ) | 국가수호 | 2002-11-30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남원읍 | 탑 | 6·25전쟁 | 1950 | 1991-02-26 | 제주 남원읍 충혼묘지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남제주군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제주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12월 이 탑을 준공하였으며, 1991년 2월 26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6·25전쟁 기간 남제주 군민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남제주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68 |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 전주시장 | 탑 | 기타 | 0 | 1994-07-21 | 일제에 찬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전북지역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르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4년 7월 21일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234-16(어린이회관동편)에 독립운동추념탑이 건립되었다. 현재 추념탑 부지에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현창비와 탑명비, 헌시비, 건립취지문비, 안중근의사 휘호비, 건립기비 등 부속시설과 함께 추념탑 주변을 공원화하여 청소년들에게는 정신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후손들에게는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역사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
669 | 한상열의사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의병운동 | 1876 | 1993-06-26 |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강제해산으로 국권이 일본에게 침탈되자 그 해 8월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동지 200여 명을 규합한 뒤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홍천·횡성·원주·지평·평창·영월 등지에서 반일투쟁을 전개, 일본군과 무려 500여 차에 걸친 전투를 통해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탄약 등을 노획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타고났다. 1908년 4월 초 횡성 주둔 일본수비대가 한상렬의 처자를 납치한 뒤 협박하며 귀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횡성읍을 습격하여 이들을 대경실색하게 하였다. 일제가 경술국치를 앞두고 의병에 대하여 일대탄압을 가하므로 국내에서의 의병운동 전개가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자,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그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한의용부·대한독립단 등 애국단체의 참모로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의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로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상렬 [韓相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670 | 충혼탑(남일면) | 국가수호 | 2002-11-2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일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1-06-01 | 이 탑은 6·25전쟁 이후, 남아있던 북한군 잔당들이 약탈, 후방 교란을 비롯해 주민들의 생활에 위협을 주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위국충절(爲國忠節 :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과 애향애족(愛鄕愛鄕 : 자신의 고향과 나라를 아끼고 사랑함)의 거룩한 마음으로 자진하여 잔당 소탕을 이어나가던 중 적의 총탄에 전사하신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자 1981년 6월에 건립되었습니다. |
671 | 의령경찰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의령군 | 의령경찰추모시설 관리위원회 | 탑 | 기타 | 1953 | 0 | 1956-06-11 | 1953년 11월 23일 지리산 무장공비의 경찰서 기습으로 순직한 고 박영동 경찰서장 등 경찰관 5위를 포함하여, 6.25를 전후하여 전사•순직한 의령경찰서 소속 경찰관 15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이후 순직한 9위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고 있다. |
672 | 참전용사 탑 | 국가수호 | 2003-09-15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옥계면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99 | 너비 9.3mX9.3m, 높이 10m | 1999-09-20 | 강릉 옥계 출신 625 및 월남전 참전용사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99명의 전몰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함 |
673 | 애국지사 정화암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정재택(장조카) | 비석 | 3·1운동 | 1896 | 비문높이 1.9M, 거북대(1.8M X 2.1M , 2.4M X 2.7M) | 1992-09-09 |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674 | 6·25 반공 유적비(고성군) | 국가수호 | 2004-12-09 | 경상남도 고성군 | 고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 | 1961-09-05 | 고성군 남산공원에 6·25전쟁에서 향토를 방위하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고성군 출신 반공청년단원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6·25 반공유적비’를 건립하였다. 6·25반공애국부활 고성군 추진위원회는 이곳 출신 박남두, 정찬홍, 최상호 등 9명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61년 9월 5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고성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서 반공청년단을 조직하여 향토방위에 앞장섰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675 | 순국열사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전라북도 익산시 | 바르게살기운동 익산시협의회 직할 인화동위원회(회장 송계주)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 3m | 1949-04-29 | 이리 장날이었던 1919년 4월 4일 정오에 문용기 장로를 비롯한 박영문, 장경춘, 서정만, 박도현 등 성도들과 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했으며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합류 대규모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문용기 장로는 1878년 전북 익산시 오산면 관음부락에서 태어났다.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그는 24세 때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한 후 전남 목포와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벌어지자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41세 나이로 순국했다. 순국열사비는 1949년 4월 순국한 문용기 장로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익산시민이 뜻을 모아 건립했으며,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한편 문용기 열사의 출신지인 익산군 오산면 소재지에는 순국열사기념비,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
676 | 필양사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정읍시 | 김호문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36 | - | 1945-01-01 | 한말 유학자 김영상을 배향하는 사당 필양사(泌陽祠).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조선 양반과 귀족을 회유하기 위해 ‘천황 은사금’을 지급하였는데, 김영상이 은사금을 거절하고 서자(書字)를 찢어버렸다. 이에 일제는 ‘불경죄’로 체포하여 동곡 헌병대에 구속시켰으나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일제는 군산 감옥으로 이송하기 위해 만경강을 건널 때 김영사은 강에 몸을 던졌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군산감옥에 투옥되어 단식투쟁을 하다가 투옥된 지 9일만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45년 1월 1일 정읍의 지방유림들은 김영상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이 사당을 건립하였다. |
677 | 통영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3-05-31 | 경상남도 통영시 | 통영시 해병대전우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념비 | 1980-02-22 | 해병대의 성공적인 상륙작전과 더불어 지역 방위대 경찰이 합세하여 큰 공을 세울수 있었던 그날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0년 2월 원문공원에 건립, 이 지역을 통영지구 전적비로 지정하고 통영 전우회에서는 매년 8월에 전우의 충혼을 기리는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
678 | 팔금면 충혼탑 | 국가수호 | 2015-10-14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팔금면사무소 | 탑 | 6·25전쟁 | 가로3.66m, 높이 6.94m | 2014-08-12 | 조국수호를 위해 6.25전쟁 및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신명을 바치신 팔금도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 충혼탑 건립하였다. | |
679 | 제주해녀 항일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4-12-09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위원회 | 탑 | 사회운동 | 1931 | 높이 12m, 면적 700㎡ | 1998-08-15 | ○ 제주해녀의 항일운동은 생존권투쟁을 넘어 일제강점기 연인원 만7천명에 참가한 여성주도의 일제항거라는 점에서 천추만대에 길이 찬양할 만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재조명하고, 항일운동의 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북제주군(현재 제주시)이 1998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 덕판배(전통배) 좌대 높이 12m 탑신(塔身)을 세우고, 삼무정신을 상징하는 3개의 돛을 형상화하였다. |
680 | 전주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 전주 신흥고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00-01-01 | 1919 기미년 당시 전주지역 3·1독립운동을 주도한 기독교 교인 및 학생 일반인들의 공훈을 기리고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2000년 전주 기독교의 요람인 신흥고등학교 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전주 3·1독립운동은 장날인 당시 3월 13일에 기독교와 천도교 교인 및 인근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남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날 정오 부근 남문의 인경 소리를 신호로 평화동 쪽에서 신흥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이 장터로 몰려와 시장 안에 숨어있던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합세, 현재 매곡교 부근 전주천변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 일본 헌병과 경찰의 해산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학생 등 74명이 체포됐다. |
681 | 거창군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거창군 | 거창군 | 탑 | 6·25전쟁 | 1950 | 1967-03-04 | 거창군재향군인회는 1967년 3월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31에 지리산 공비토벌 및 6·25전쟁에서 전사한 거창군 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거창군의 지원을 지원받아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탑이 노후화되자 거창군은 2010년 기존의 충혼탑을 헐고 그 자리에 충혼탑을 재건립했다. 이 일대에 죽전근린공원을 조성, 충혼탑을 중심으로 거창군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참전기념비 등도 나란히 세워 호국공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 |
682 | 의사 배치문 기적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김해시 | 김해시 | 비석 | 사회운동 | 1890 | 0 | 2000-08-01 | 김해 출신 배치문 의사의 기적비. 배치문은 1919년 4월 8일에 목포시 창평동에서 3·1독립운동을 주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배의사는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최하는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가 끝나자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4년에 비밀리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체 가입, 활동하다가 1927년 7월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6개월 형을 받고 1929년에 석방되었다. 신간회 목표지회장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언론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1930년대에 호남평론사의 기자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1년 3월에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출판법·보안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00년 8월 1일 고파 배치문의사 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배치문의사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
683 |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강동구청 문화체육과 | 동상 | 해외운동 | 1894 | 2001-05-03 |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수립 후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함 | |
684 | 삼진 독립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4-12-09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진전면 청년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1-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8일 고현시장에서 변상태·권영조·권영대·변상섭·변상헌 등의 사전 준비로 4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이어서 4월 3일 변상태·권태용·권영대의 주도로 진전·진북·진동면의 3개면이 연합하여 5천여명이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고앙주(高昻柱, 미상~1919), 김수동(金守東, 1877~1919), 김영환(金永煥, 미상~1919), 김호현(金浩鉉, 1893~1919), 변갑섭(卞甲燮, 미상~1919), 변상복(卞相福, 미상~1919), 이기봉(李基鳳, 미상~1919), 홍두익(洪斗益, 미상~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구수서(具守書, 1894~1948), 권영대(權寧大, 1885~1946), 권오규(權五奎, 1895~1961), 권태용(權泰容, 1885~1939), 김규현(金奎鉉, 1903~1933), 김영종(金永鍾, 1890~1950), 백승인(白承仁, 1899~1970), 변상섭(卞相攝, 1891~1950), 변상술(卞相述, 1898~1946), 변상태(卞相泰, 1889~1963), 변상헌(卞相憲, 1897~1965), 변우범(卞又範, 1898~1974), 변종열(卞鍾悅, 1896~1974), 서정규(徐正奎, 1889~1949), 이교영(李敎瑛, 1878~1950)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마산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이 비를 세웠다. |
685 | 영령탑(금남면)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금정사 | 탑 | 6·25전쟁 | 1950 | 0 | 2015-02-01 | 금정사 영령탑은 6·25 전쟁 때 산화한 하동군 출신의 육군 및 한국청년기동대원 334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1954년 7월 10일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35 (금정사 내)에 세운 석탑으로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강봉옥)이 건립을 주관하였으며, 2004년 6월 6월 하동군 금정사 현재 부지로 이전하여 2015년 2월에 재복원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매년 음력 사월 초파일에 합동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현충일에 금정사 주지의 주관하에 신도들이 제례를 봉행한다. |
686 | 순직 충령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양보면 | 비석 | 6·25전쟁 | 1950 | 기념비 | 1951-05-01 | 양보면 운산마을에 6·25자유수호전쟁 기간에 전사한 지 지역 출신 전몰용사 등 1,227위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양보면은 이진기, 김순기, 김재열 등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1년 5월 1일 충령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하동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하동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687 | 의병장 오녀 임경재(임옥녀) 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 용인시 | 동상 | 의병운동 | 1872 | 1993-06-18 |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한데 이어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자, 당시 재직하고 있던 농상공부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1907년 8월 이천에서 의병단을 만들어 일본 기병대를 급습하고 이천읍 우편취급소와 순사분파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광주 실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해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상주 상림과 백암 장터에서 일진회원을 총살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밖에도 용인 굴암산 주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한편 이천, 여주, 안성, 양근(양평)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 |
688 | 순직 경찰관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1-21 | 경상남도 함양군 | 함양경찰서 | 비석 | 기타 | 1953 | 1959-10-01 | 지리산 공비토벌 소탕작전에서 산화한 강창섭 경감 등 12명의 경찰관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함양읍장이 건립위원회를 구성, 지방유지들의 성금으로 1959년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46-3 (함양경찰서 내)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특히 강창섭 경감은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서 이현상부대와 교전중 공비 3명을 사살하고 계속 교전하다가 1951년 9월 5일 장렬히 전사하였다. | |
689 | 칠충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나주시 | 영산포초등학교 | 탑 | 6·25전쟁 | 1951 | 1951-04-01 | 6.25전쟁 당시 나주지역 내 학도병 7명이 비밀리에 북벌단 특공대를 조직하고 북한군 기습을 준비하던 중 탄로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들 7명의 학생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이에 동료학생들은 희생된 7명의 학도병에 대한 애국충정을 기념하기 위해 해당 시설을 건립하였다. | |
690 | 위령비(화순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화순군 | 화순군 동면 | 비석 | 기타 | 1949 | 1950-04-01 | 1949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빨치산 잔당들에 의해 전사한 경비군인 2명과 향토수호를 위해 마을 자체 경비 중 학살당한 동면 마산리 주민 4명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현충시설로써 화순군 동면에서 건립하였다. | |
691 | 학도의용군 6·25 참전 기념상(비)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남구 | 한국자유총연맹대구시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1979-05-30 | 대구 낙동강승전기념관 내에 6·25전쟁에 참전한 학도의용군을 기리기 위해 ‘학도의용군 6·25 참전 기념동상(비)’를 건립하였다. 경상북도와 대구시, 경상북도교육위원회는 6·25전쟁에 참전한 이름 없는 학도의용군의 전공을 기념하고 청소년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공동으로 추진하였고, 1979년 5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학도의용군은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학생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구시 남구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92 | 6·25 참전용사 기념비(달성군) | 국가수호 | 2003-09-22 | 대구광역시 달성군 | 달성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95-03-30 |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의 교두보였던 대구 팔공산 지역과 낙동강변에서의 격렬했던 전투 속에 산화한 달성군 출신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생존 참전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어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국전쟁참전자회 달성군지회가 1995년 3월 달성군 논공읍 남리 137-16(달성공단 입구)에 참전용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
693 | 충절사 | 독립운동 | 2003-05-30 | 강원도 영월군 | 영월군(문화관광과) | 사당 | 의병운동 | 1864 | 사당 1동 | 2001-05-02 | 김상태는 충북 영춘 남청(永春 南川 혹은 東面) 출신으로 1차·2차 의병전쟁에 모두 참여하였다. 1차 의병전쟁 때, 김상태는 1896년 이강년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그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호좌수(湖左帥)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酒泉)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짐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다.이와 같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그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삼년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여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주장(主將)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1984년에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거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에 이장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694 | 의사 청운선생 장공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장석태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866 | 0 | 1971-05-21 |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21년 12월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단(慶尙北道團)의 집사(執事)로 임명되었다. 1922년 10월부터 동지들과 함께 경북 일원과 경남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들에게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명의의 군자금 제공 요청서와 이 요청에 불응할 경우에는 처단하겠다는 예경서(豫警書) 또는 사형선고서를 우송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던 중 동년 11월 하순 일경에 붙잡혀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
695 | 충혼탑(칠곡군) | 국가수호 | 2003-02-14 | 경상북도 칠곡군 | 칠곡군 | 탑 | 6·25전쟁 | 1950 | 1973-08-01 | 칠곡군 삼청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전몰군경 등 540위의 칠곡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칠곡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73년 8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칠곡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칠곡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696 | 순국경찰관 위령비 | 국가수호 | 2003-09-22 | 경상북도 칠곡군 | 재향경우회칠곡군지회 | 비석 | 기타 | 1950 | 1988-08-20 | 재향군인회칠곡군지회가 1946년 10월 1일 벌어진 10.1 대구폭동사건과 6·25전쟁 때 순국한 칠곡경찰서 소속 경찰관 2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 8월 20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4리 산63-4(애국동산 내)에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1946월 10월 대구를 위시하여 좌익 폭도들의 관공서 파괴 및 탈취행위가 도내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을 즈음, 10월 3일 왜관읍에서도 폭도들이 경찰관서를 기습해와 이를 진압하던 중 왜관지역 경찰들이 하였고 6·25 사변 중 조국수호를 위해 싸우다 많은 경찰관들이 희생되었다. 1952년 11월 순직경찰관 영세불망비를 건립하였으나 영령들의 큰 공훈에 비해 비가 너무 초라해 기존 영세불망비를 헐고 그 자리에 순국경찰관위령비를 건립한 것이다. | |
697 | 민주지산 위령비(영동군) | 국가수호 | 2015-10-14 | 충청북도 영동군 | 9100부대 | 비석 | 기타 | 1998 | 0 | 1998-06-05 | 1998년 4월 1일 제5공수특전여단(현 국제평화지원단) 23특전대대 내륙전술훈련간 예상치 못한 기상악화로 인하여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전우 고 소령 김광석 등 6위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흑룡부대원으로서의 기상과 뜻을 기리고자 전 장병의 성금을 모아 건립하였다. 매년 4월 1일 이곳에서 특수전사령부 주관하 영동군청, 영동지부 특전동지회, 6·25참전 전우회, 희생자 유가족, 부대장병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698 | 지용호총경 순직비(동상)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봉화군 | 봉화경찰서(경우회) | 탑 | 기타 | 1949 | 1994-06-24 | 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에 공비들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총살당한 지용호 총경을 추모하기 위해 봉화경찰서에서 1994년 6월 24일 동상을 건립했다. 1949년 6월 17일 봉화경찰서 재산지서가 공비들에게 습격당하자 지용호 총경은 경찰과 군청공무원, 청년단원 등 50명을 인솔 재산방면으로 출동하다가 봉양리 미륵재에서 적 200명의 기습을 받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관 및 대한청년단 7명이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토벌대 전원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 지용호 서장은 ‘자신의 희생으로 전 대원의 목숨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봉화경찰서장이다”라고 외친 후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희생을 자청하여 부하 대원들의 목숨을 구출하고 적의 포로가 된 후, 그들의 흉탄에 장렬하게 산화했다. | |
699 | 호국경찰 유적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예천군 | 예천경찰서(보문치안센터)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9-09-08 | 6.25전쟁 당시 국군으로 가장한 인민군 50여명이 보문지서를 습격하자 지서를 사수하기 위해 교전하다 전사한 홍종보 지서장 등 전사자 9명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추모 | |
700 | 심호섭선생 독립만세 고창유지비 | 독립운동 | 2003-12-08 | 경상남도 진주시 | 심영무 | 비석 | 3·1운동 | 1891 | 1992-08-15 | 이 비는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심호섭이 다수의 수곡면민을 창촌 무실장터에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8월 15일에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670에 건립되었다. 심호섭 선생(1891∼1935)은 3·1운동 당시 수곡면장을 지내면서 진양군 수곡면 토곡리에 거주 중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1919년 3월 22일 수곡면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이해 5월 20일 보안법 위반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6년경에는 일본의 도쿄·나고야 등지를 무대로 친일한국인 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근로조합을 상대로 투쟁하였다. | |
701 | 설산 이광수선생 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전라북도 임실군 | 임실군수 | 비석 | 3·1운동 | 1863 | 0 | 1988-01-01 | 현재 오수초등학교인 오수공립보통학교에서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교사인 당시 훈도 이광수는 남원군 사매면 출신으로 1919년 상경하여 3·1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33인 지도부를 비밀리 접촉하고 지방으로 보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전 수업 시간에 어린 학생들 앞에서 울분을 토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호소하였다. 그 뒤 학생들을 이끌고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뛰쳐나와 고사리 같은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돌다가 당시 일본인 교사들과 교장이 제지하여 일단락되었다. 이광수는 그 뒤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
702 | 5인의 해병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 해병제1사단 | 탑 | 기타 | 1962 | 1966-10-15 | 해병 9118부대는 1966년 10월 수색정찰대로서 임무수행 중 순직한 강대헌 대위, 유중광 병장, 오경환 상병, 유문선 상병, 김규산 상병의 임전무퇴 해병정신과 순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해병1사단 영내)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 뒷면에는 “해병 제1상륙사단 제1연대 상륙단의 해룡작전 훈련기간 중이던 1965년 12월 13일 밤 상륙해안 정찰의 중임을 수행하던 수색대원은 격심한 돌풍과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임무를 완수하고 숭고한 해병정신을 발휘하여 이곳에 몸을 바쳤다.”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 |
703 | 부자 독립운동 공적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충청북도 괴산군 | 소수면 | 비석 | 기타 | 1891 | - | 1991-01-01 | 김용응(金鏞應)은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임병찬과 함께 전국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 김태규(金泰珪, 1896~미상)도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충북 괴산군 조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19년 1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노인회 괴산군 지회에서는 1991년 11월 이 부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베를 세웠다. |
704 |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영덕군 | 영덕군 | 탑 | 6·25전쟁 | 1950 | 1991-01-01 |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들의 호국정신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며 작전에 참여하여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참전용사 및 학도병들의 충혼을 기리며 구국충정을 가슴에 새기고 후세에 널리 기려지도록 건립 | |
705 | 항일 독립유공자 추모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하동군 | 하태현 | 비석 | 3·1운동 | 1995 | 0 | 1995-08-15 | 하동군 청암면 일원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함 |
706 | 월남 참전 기념비(진천군)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진천군 | 베트남참전전우회진천군지회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1996-09-06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참전한 진천군 출신들의 국위선양에 공헌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
707 | 전몰군경 충혼비(평해읍) | 국가수호 | 2003-02-10 | 경상북도 울진군 | 평해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5-01-01 |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장렬히 산화한 평해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함 | |
708 | 충혼비(안남면)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옥천군 | 안남면사무소 | 비석 | 기타 | 1950 | 1955-09-15 | 옥천군 연주리 배바위 윗산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안남면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9월 15일 기념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안남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안남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09 |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홍성군(문화관광과) | 비석 | 의병운동 | 1906 | 1986-11-14 | ||
710 | 해외(월남) 참전 기념탑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영동군 | 베트남참전전우회 영동군지부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7-11-03 |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참전한 영동군 출신 참전전우들의 국위선양에 공헌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711 | 장곡3·1운동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홍성군 | 장곡 3.1운동유족회 | 비석 | 3·1운동 | 1919 | 1994-08-13 | 홍성 장곡면 주민들의 3·1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어가는 가운데 4월 4일 홍성 매봉산에서 횃불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어 장곡면에서는 4월 7일과 8일 사이에 장곡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세차례에 걸쳐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7일에 김동하의 주도 아래 장곡면 주민들은 화계리 주민들과 함께 앞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계속 시위를 전개하였고 밤 8시에는 광성리와 가송리 주민 300여 명이 합세하여 면사무소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8일에도 지역 인사들과 학생 약 60여 명이 밤 11시 도산리에 모여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로 20여명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태형 90도에서 2년 6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10여명이 홍성경찰서로 연행되어 60도에서 90도의 태형을 당하였다. 1994년 8월 13일 장곡3·1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장곡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 |
712 | 충혼비(장성읍 수산리) | 국가수호 | 2003-05-30 | 전라남도 장성군 | 장성군 장성읍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9-08-15 | 장성군 수산리 성산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169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장성군은 이곳 출신 호국용사와 주민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9년 8월 15일 총혼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장성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장성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13 | 신원순의사 독립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신문섭 | 비석 | 3·1운동 | 1890 | 0 | 1991-08-15 | 신원순(申元淳, 1890~1961)은 경남 합천군 묘산면 사람으로 같은 면 윤병석(尹炳奭)·윤병은(尹炳殷) 등 동지들과 함께 1919년 3월 22일 묘산면 면사무소 앞에서 100여명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때 성경술(成敬戌)과 함께 일군경과의 연락을 끊기 위해 연도(沿道)의 전화줄을 절단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원순의사기념사업회는 이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1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
714 | 외솔 최현배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02-11-21 | 울산광역시 중구 | 병영초등학교 | 동상 | 문화운동 | 1894 | 0 | 1996-08-04 | 최현배 선생은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의 독립과 한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외솔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 병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건립하였다. |
715 | 애국지사 강근호선생 추모비 | 독립운동 | 2003-09-15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 유족(강귀철) | 비석 | 의열투쟁 | 1888 | 0 | 2000-04-13 | 강근호(姜槿虎, 1888~1960)는 1916년 함흥중학교 2학년 때 학생사건으로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월 13일 용정촌에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만주 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21년에는 자유시 전투에 참전하고,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1943년에는 만주 명월구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활동했다. 육군 제53사단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2000년 4월 13일 이 비를 세웠다. |
716 | 충혼비(4종)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영동군 | 영동읍사무소 | 비석 | 6·25전쟁 | 1951 | 0 | 1961-09-04 | 이 비들은 공비소탕 중 사망한 4분의 숭고한 희생과 위훈을 기리고자 건립되었으며, 본래 영동읍내에 산재되어 있는 것을 모아 1974년 영동읍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충혼비(고 육군 이등상사 김종완, 1952년 전사) 충혼비(고 순경 정동철, 1951년 성주산에서 전사) 충혼비(고 경사 배석종, 천만산에서 전사) 반공투사충혼비(고 김재덕, 1952년 전사) |
717 | 3·1운동 기념비(합천군) | 독립운동 | 2002-11-21 | 경상남도 합천군 | 쌍백면 | 비석 | 3·1운동 | 1919 | 1995-03-01 | 이 기념비는 1919년 3월 합천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 등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업가인 정영섭 씨가 1995년 3월 1일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산 80-1 (쌍백초교 정문 앞)에 건립한 것이다. 3월 8일 삼가장날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등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무력행사로 해산했으나, 3월 23일 쌍백면에서 다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순국 또는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 |
718 | 부산광복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5-30 | 부산광역시 서구 | 부산시설공단 중앙공원사업소 | 기념관 | 기타 | 1999 | 0 | 1999-06-19 | 부산광복기념관은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민족정신과 광복활동을 길이 빛내고 이를 전승하며,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위해 시민을 뜻을 모아 건립한 기념관으로 2000년 8월 15일에 개관했다. 지상 2층 전시실에는 부산의 3·1 독립운동, 동래장터 독립만세운동,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부산의 독립운동사 등에 대한 기록물이 테마별로 구성돼 있어,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하는 날 까지 일본의 침략과 그에 항거한 부산 지역의 항일 독립투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위패 봉안실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위패 가 봉안돼 있다. |
719 | 이상운학생 순의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전라북도 김제시 | 이리농림동창회 김제시지부 | 비석 | 의열투쟁 | 1927 | 1984-08-10 | 애국지사 이상운의사의 순의비. 이상운은 이리농업학교 재학중인 1943년에 동교생들과 화랑회(花郞會)를 조직하였다. 화랑회는 총기 및 폭약 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또 만경교를 폭파함으로써 일제의 수탈통로를 차단하려는 것으로 행동방략을 삼았다. 첫 번째 계획 실행으로 폭약 및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에 있는 일본인의 광산을 습격하고, 그의 주도아래 동지 20여명이 광산에 잠입했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이들은 거사를 재차 계획하는 한편 회원간의 체력 및 무술단련에 힘을 쓰면서 무기확보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화랑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1945년 4월에 전회원이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1945년 7월 12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84년 8월 10일 이리농림동창회 김제군지부에서는 이상운의 고향인 김제시 소재 성산공원에 순의비를 건립하였다. | |
720 | 김재옥교사 기념관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북도 충주시 | 동락초등학교 | 기념관 | 6·25전쟁 | 1950 | - | 1990-01-01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동락초등학교 내에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김재옥 교사의 호국충정심을 기리기 위해 충청북도충주교육청에서 1990년 1월 1일 기념관을 세웠다. 1931년 음성에서 태어나 1946년에 상평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린 시절 총명하고 예의가 바르며, 효행심이 지극하여 주위 어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후, 여자도 사회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1949년 음성여자중학교를 졸업, 1950년 5월에는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6월에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5일 만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 7월 7일, 김종수 소령에게 학교에 집결했던 북한군 정보를 상세히 알려 한국 전쟁 사상 최초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민간인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후 병기장교였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 군인가족으로 생활하며 강원도 인제군에 있을 때, 어론초등학교 설립, 군인 교회 등을 건립하여 군인 및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과 정신을 심어주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에 음성 주천초등학교로 전출되었고, 그해 9월에 퇴직하였다. 1963년, 고재봉 사건으로 인해 남편 이득주(당시 계급 중령)는 물론, 자신과 일가족이 참변당하였다. 사후 김재옥 교사의 공이 알려지면서 1990년대에 동락초등학교 내에 김재옥교사기념관을 설립하여 충주지역의 학생들에게 안보를 키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동락초등학교 교정 내에 김재옥 교사의 비석이 세워졌으며, 문락리 산에는 동락리 전투 승전비가 건립되었다. |
721 | 충혼탑(곡성군)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곡성군 | 오곡면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1.2m, 탑 높이 1.2m | 1991-09-30 | 오곡면 보건소 앞에 1953년 6·25전쟁 기간에 전몰한 한국청년단원 109위의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오곡면은 이들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53년 4월 2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1951년 9월 29일 오곡면민과 한국청년단원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이현상 부대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북한군과 지방좌익들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오곡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탑은 곡성군과 당시 한국청년단장 안학선, 그리고 면민들의 뜻을 모아 40년만인 1991년 9월 30일 재건립되었다. |
722 | 현충탑(대서면) | 국가수호 | 2002-10-21 | 전라남도 고흥군 | 대서면 | 탑 | 6·25전쟁 | 1950 | 2001-05-30 | 대서면 금마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대서면 출신 호국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대서면)’을 건립하였다. 대서면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2001년 5월 30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대서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서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23 | 6·25 참전 기념비(동량면) | 국가수호 | 2008-09-05 | 충청북도 충주시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충주시지회동량분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4-06-25 | 동량면 6·25참전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1994년 6월 25일에 조국의 자유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보국의 초석으로 살신성인한 62명의 전사자의 충혼을 위령하고 119명의 6·25 참전용사의 용감무쌍한 충렬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306-1(조동근린공원 내)에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에는 동량면 출신 6·25전쟁 전사자 62위 및 참전유공자 119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다. |
724 | 충혼탑(제천)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제천시 | 제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8-01-01 | 제천시 솔밭공원 내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김종훈 대령 외 1, 547위의 제천시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제천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8년 10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나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25 | 충혼탑(도초면) | 국가수호 | 2003-01-17 | 전라남도 신안군 | 신안군 도초면장 | 탑 | 6·25전쟁 | 1950 | 1.2x1.2x6.25m | 1994-01-01 | 신안 수항리에 1994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도초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도초면 노인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4년 1월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도촌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도촌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26 | 향토방위 전몰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21 | 충청북도 괴산군 | 청천면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2-01-01 | 괴산 선평리에 향토방위 작전에서 산화한 32위의 전몰용사 등 402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향토방위 전몰용사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괴산군은 이곳 출신 향토방위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2년 1월 준공하였다. 향토방위작전 중 괴산 향토방위군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각종의 전투와 작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과정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괴산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27 | 청대사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청양군 | 순흥안씨 문중(대표 안선영) | 사당 | 의병운동 | 1994 | 1994-09-01 | 청대사는 순흥 안씨 문중 출신 네 분 애국지사(건국훈장 애족장 안창식, 애국장 안항식, 애국장 안병찬, 애족장 안병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4년 충청남도의 지원을 받아 순흥 안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음. 청양출신 안창식의 아들인 안병찬은 두 아들 병찬, 병림과 함께 1895년 을미의병에 투신했다. 선생은 1895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거의 할 뜻을 두고서 광호 등지로 가서 저자 사람을 앞세워 먼저 일어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 이봉학, 이세영 등과 긴밀히 연락을 취했습니다. 아들 병찬이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에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오자 채광묵과 함께 모집해 놓은 민병 180명을 내놓아 홍주의병을 거의 하도록 도와 의진이 패하자 피체되었습니다. 안병찬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하여 3년형을 선고받고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으며, 1906년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의 참모로 활약하여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파리만국강화회의에 장서 서명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안병림 선생은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 및 돌격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안항식 선생은 1906년 4월 25일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로 활약하여 일제에 체포 후 대마도로 호송 감금되었다가 4년만에 귀국했습니다. | |
728 | 대의사(인한수의사현충비) | 독립운동 | 2010-06-09 | 충청남도 예산군 | 한내장4.3만세운동기념사업회 | 사당 | 애국계몽운동 | 1881 | 1976-04-02 | 대성사는 인한수와 장문환의 영정이 있는 사당으로 2009년에 준공되었다. 인한수는 1881년 고덕면 상궁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 장날에 대천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을 이끌고 대천교 옆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 때 일본헌병과 일경들이 휘두른 창검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말을 타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장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내려 내동댕이치자 말에서 떨어진 수비대장이 군도로 목을 찔러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문환은 충남 예산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 장날에 대천장터에 모인 1, 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시위자 7명이 일경에게 검거되자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에서 시위를 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어 일본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자 한명이 순국하자 격분한 나머지 시위군중 15명과 함께 시체를 헌병주재소로 찾아가 항의하고 주재소장을 구타하다가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729 |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 독립운동 | 2002-11-25 | 대전광역시 중구 | 대전 중구청 문화담당 | 생가 | 민족주의운동 | 1880 | 0 | 1992-01-01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신채호선생 생가지는 신채호가 태어나 8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1992년 선생이 태어나신 이곳의 효율적 보존을 위하여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생가를 복원하였다. |
730 | 호국 영렬탑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시장 | 탑 | 기타 | 1950 | 0 | 1957-10-01 | 전주 다가공원 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 영렬탑’을 건립하였다. 전라북도 호국영렬탑 건립위원회는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57년 10월 1일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전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31 | 호국지사 충령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전주시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1-09-01 | 6.25전쟁 당시 전사한 호남지역 호국충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1년 9월 건립함 |
732 | 6·25 한국전 참전 및 국군 제3연대 창설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전주시 | 김한준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8-10-22 | 창군 초창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창군의 웅지를 품은 애국청년들이 자원입대하여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제3연대(보병제3연대)가 전북지역에 창설(1946. 2. 26.)되고 1948년 정부수립 후 국군 제3연대로 개편되어 국군의 초석을 이루게 한 창군용사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며, 6.25전쟁 발발 후 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각 전선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733 | 충혼불멸비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남원시 | 남원시장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54-05-10 | 지리산은 산이 높고 계곡이 많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비들이 은거하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합동작전을 했다가 공비로부터 희생된 민간인과 청년단원 286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
734 | 충혼 불멸탑(진안군)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진안군 | 진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0 | 2005-01-01 | 진안군 군상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진안읍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2005년 1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6·25전쟁 기간 진안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진안읍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35 | 임대수의병장 공적비 | 독립운동 | 2004-12-27 | 세종특별자치시 | 세종특별자치시 | 비석 | 의병운동 | 1882 | 0 | 1999-08-15 | 임대수 의병장은 1882년 충남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항거를 결의하였고,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고 전의 소정역을 습격하는 등 충남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리다 1911년 6월 16일 공주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대수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해 1999년 8월 1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
736 | 충혼비(설천면) | 국가수호 | 2003-12-08 | 전라북도 무주군 | 설천면장 | 비석 | 기타 | 1950 | 0 | 1963-09-01 | 무주 소천리에 1963년 6·25전쟁 시기 좌익 빨치산과 대적하다 산화한 이 고장 출신 31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향토전우회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3년 9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무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737 | 충혼탑(여산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탑 | 기타 | 1950 | 8M X 4M | 1993-10-05 | 익산 두여리에 1993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689위의 익산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익산군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3년 10월 5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익산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익산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38 |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시설관리공단 | 비석 | 의열투쟁 | 1917 | 0 | 1969-10-01 | 이 기념비는 대한광복회의 회원으로 천안 출신인 장두환(1963, 독립장), 유창순(1963 독립장), 성달영(1990, 애족장), 유중협(1990, 애족장), 강석주(1990, 애족장), 조종철(1991, 애족장), 김정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9년 10월에 천안시 삼용동 295 천안삼거리 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이 조직한 광복단과 대구에서 박상진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7월 조직했고 박상진이 총사령을 맡았다. 1916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경북·충남·황해·전남 일대와 만주에 기지를 두기도 했다.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는 100개소의 요지에 혁명기지로서 잡화상을 설치하여 무기를 비축하며 조직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행동강령 아래 군자금 모금을 위해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거나 친일 관리·지주를 처단하기도 했다. 1918년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면서 대한광복회의 전모가 일경에게 포착되어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대한광복회 간부와 회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
739 | 육탄 3용사 고 안영권하사 전공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01 | 전라북도 김제시 | 안덕겸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1.2M | 1984-11-12 | 1952년 10월 12일 오전 8시 탈환 명령을 받은 국군이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고, 살아도 이 고지에서 살자 하는 비장한 각오로 진경을 개시한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며 서로 고지를 차지하기를 2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 국군과 중공군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으며 국군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육군 3용사의 한 사람인 고 안영권 하사는 우리고장 김제시 금산면 용화리 출신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입대 제9사단 30연대 1대대 3소대원이었다. 우리나라 육군전사가 증언하듯이 피맺힌 동족상잔의 전란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중부전선의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 1952년 10월 12일 그 고지의 최후의 탈환작전에서 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와 함께 결사대에 자원, TNT 수류탄 박격포탄을 몸에 묶고 적의 토치카에 뛰어들어 장렬히 자폭함으로써 막혔던 아군의 작전 혈로를 뚫어 위기일발의 백척간두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한 주인공이다 |
740 | 호국영렬탑 | 국가수호 | 2003-09-15 | 전라북도 부안군 | 부안군 | 탑 | 6·25전쟁 | 1950 | 기단높이 3m, 탑높이 4.3m | 1969-01-01 | 부안군 서림공원 정상에 6·25전쟁 시 부안군에서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호국영령탑’을 건립하였다. 부안군은 부안군을 수호하다가 산화한 호국전몰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호국영렬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69년 1월 이 비를 준공하였다. 국가위시 시 광명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부안군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41 | 삼일독립운동 유공 기념비 | 독립운동 | 2009-05-25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주청년회의소 | 비석 | 3·1운동 | 1919 | 2001-12-01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2일 언양 장날 이무종·강경찬(姜康贊)·이규인(李圭寅)·이성영·최해선·이규장·이규천·최해규(崔海圭)·황선훈 등의 사전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본군 수비병이 발포하여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길천, 손입분, 김종환, 정달조 등이 부상을 입었다. 이 시위에서 강문필(姜文必, 1872~1953), 김경수(金卿洙, 1892~1968), 김운봉(金雲峰, 1893~1950), 김정훈, 김종백, 서석용, 손수복(孫秀福, 1877~1961), 윤봉수(尹鳳水, 1889~1971), 정대원, 정용덕 등이 피체되어 90도의 태형을 받고, 강기형(姜祺馨, 1876~1940), 강재주, 김락수(金洛綬, 1880~1919), 김원용, 김정원(金正元, 1880~1961), 김한준(金漢俊, 1884~1956), 박채우, 서태식(徐泰植, 1889~1973), 신동목(辛東睦), 이규경(李圭庚), 이규인(李圭寅, 1890~1927), 이무종(李武鐘, 1893~1956), 이민영, 이성영(李成榮, 1879~1940), 최윤봉(崔允奉, 1898~1934), 최한홍(崔翰鴻, 1898~1949), 최해선(崔海璇), 허황(許황, 1874~미상)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가운데 김락수는 옥중 순국하였다. 3·1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 |
742 | 소류정 및 심성지선생 사적비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청송군 | 심남규(문중관리자) | 비석 | 의병운동 | 1831 | 1896-01-01 | 소류정은 1885년에 건립된 정자로, 청송지역 의병활동의 상징적 인물인 심성지(沈誠之)의 주 은거지였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툇마루와 사분합문을 설치하는 등 청송지방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붕괴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심성지는 역학변화 지리와 성학심성지설을 연구하여 유학을 통달한 선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1888년에 의금부도사와 1894년에 돈영부 도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고 이후 1896년에는 향천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덕 감은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하고 말았다. 심성지 서거 100주년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 소류정에 사적비를 세웠다. | |
743 | 3선생 공적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경상북도 예천군 | 조필권 | 비석 | 기타 | 1907 | 2002-10-26 | 2002년 10월 26일 예천지역 출신인 조윤제 문학박사와 독립운동가 조용구, 조용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윤제(1904~1976)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대에 한국 고전 문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다. 특히 『한국 문학사』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저술로 평가되며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조용구(1861~1925)는 1907년 이강년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좌종사부 의관에 임명되어 1908년 6월까지 종군하고 이후 군자금 모집활동에 힘써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조용필(1867~1946)은 1915년 조직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군자금 조달, 일제 관리와 친일부호 처단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러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 |
744 | 우리고장 국가유공자 기념비(남일면) | 국가수호 | 2003-09-15 | 충청남도 금산군 | 남일면 | 비석 | 기타 | 1992 | 0 | 1992-07-04 | 남일면 출신으로 애국지사,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 무공수훈자의 애국애족의 충정과 숭고한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1992년 7월 4일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308-2(남일면사무소 내)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사업은 1991년도 보훈가족 사기앙양 추진시책과 관련하여 1992년 금산군 자체 특수시책인 ‘충절의 얼 기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
745 | 조설대 | 독립운동 | 2010-02-12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조설대보존회 | 조형물 | 한말구국운동 | 1910 | 1905 | 제주 애국지사 12인의 구국을 맹약한 장소 조설대. 조설대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젊은 유림 12인이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한 곳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 |
746 | 무공수훈자 공적비(청주시) | 국가수호 | 2003-05-30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무공수훈자 청주시지회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00-08-02 | 청주시 무공수훈자회는 2000년 8월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1459(발산공원 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운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공적비를 건립하였고 무공수훈자 509명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이후 474명의 무공수훈자회 회원 누락자 및 추가자 발생으로 인해 2010년 4월 474명의 명각비를 추가로 건립하였다. |
747 | (연천군)베트남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6-04-27 | 경기도 연천군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연천군지회 | 탑 | 월남전쟁 | 2006-10-17 |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자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써 1965년부터 베트남에 참전했다. 이들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은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경험과 미군의 지원으로 국방력을 제고할 수 있었으며, 공산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는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 | ||
748 | 충혼탑(복흥면) | 국가수호 | 2003-05-31 | 전라북도 순창군 | 복흥면 수복동지회 윤용호 | 탑 | 기타 | 1950 | 0 | 1988-06-01 | 복흥면 정산리에 1988년 6·25전쟁 기간 공비토벌작전에 전사한 의용경찰, 방위군, 청년단원 등 복흥면 출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복흥면과 수복동지회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88년 6월 1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복흥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 공비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복흥중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749 | 경산시 현충공원 | 국가수호 | 2019-12-12 | 경상북도 경산시 | 경상북도 경산시 | 공원 | 기타 | 2019-6-6 | 경산시 참전유공자, 무공수훈자를 기리고 각 국가유공자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음 | ||
750 | 해남군 6·25 참전기념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전라남도 해남군 | 6·25참전유공자회 해남군지회 | 탑 | 6·25전쟁 | 1950 | 3m x 3m, 높이 5m | 2011-12-7 | 6.25전쟁 휴전 후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넋을 위로하고, 참전유공자의 호국정신을 널리 계승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음 |
751 | 충의성지발원비 | 독립운동 | 2019-12-12 | 강원도 춘천시 | 충의성지발원비건립위원회 | 비석 | 기타 | 높이3.6 m 가로2.3m 세로3.6m | 2011-10-27 | 국가와 민족이 위난에 처하였을때 국권회복과 민족의 생존권을 되찾기위해 일제에 맞서 소중한 목슴을 초개같이 여기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수십여 명의 의병장과 700여명의 의병을 양성하여 훈련시켰던 국내유일의 성지로 의병정신의 발원지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동시에 자라나는 청소년과 국민에게 민족정신 교육의 장으로 승화 시키고자 건립하였다. | |
752 | 순국선열 노은 김규식 선생 생가 터 | 독립운동 | 2019-12-12 | 경기도 구리시 | 경기도 구리시 | 장소 | 해외운동 | 0 | 1882-01-01 | 1920년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 무쟁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독립운동가 노은 김규식이 태어난 곳이다. | |
753 | 귀성충혼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인천광역시 남동구 | 제7851부대 | 탑 | 기타 | 소 | 2019-1-1 | 국가를 위해 순직한 귀성부대 전우 36인의 공적과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제7851부대에서 2019년 6월 6일 부대 내에 탑을 건립하였다. 1974년 10월 1일, 부대창설 이래 숭고한 조국 수호의 절대 임무를 위해, 드높은 하늘에서 낙하산에 자신을 맡기고 뛰어내리고, 칠흑 같은 어두운 바다에서 두려움과 거친 파도를 극복하는 등의 특수훈련에 전념하다 작전 중 순직한 36인의 전우들의 혼과 넋을 기리기 위해 부대 전 후배 장병들이 뜻과 기금을 모으고 예비역과 민간단체로부터 추가로 도움을 받아 충혼탑 건립을 계획하였으며, 후배 장병들이 충혼탑 건립 후 부대 주요행사(국기게양식, 부대창설일, 현충일 등), 부대생활 및 출·퇴근 시 순직한 전우들의 거룩한 뜻을 생각하고 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부대에서 가장 따뜻한 곳에 건립하게 되었다. | |
754 | 속초시 6·25 및 월남전 참전기녑탑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속초시 | 월남전참전유공자회 속초시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1950 | 탑 4.4mX 0.52mX7.6m / 명각비 7mX 2.6mX0.4m 2동 | 2019-5-14 | 6.25전쟁과 월남참전의 역사적 의의와 참뜻을 널리 알려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속초시 출신 참전용사들의 투혼과 희생, 상흔의 족적이 각인된 애국애족 정신과 장렬히 산화한 용사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755 | 한영중·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9-12-1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한영고등학교 | 조형물 | 6·25전쟁 | 1950 | - | 2019-9-27 | 우리의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때, 위국충절과 애국단심의 영혼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시어, 소중한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시고 선진 강국 대한민국 건설의 초석을 이루게 하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한영의 가족들은 영원히 기억하고자 이 명비를 세웁니다. |
756 | 철마 순직 경찰·의용경찰 추모비 | 국가수호 | 2019-12-12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 비석 | 기타 | 1952 | 0 | 2018-12-21 | 1952년 9월 2일 철마면 나암동 전투(무장공비와 교전)에서 조국과 내 고장을 지켜내고 순직한 경찰 1명과 의용경찰 6명의 숭고한 희생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기 위함 |
757 | 기장군 6.25참전유공자 명비 | 국가수호 | 2019-12-12 | 부산광역시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12-17 | 기장군 지역 출신 6.25참전유공자 1,263명의 이름을 명각한 비로 기장군 출신 6.25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지역 주민의 호구의식 함양을 위해 건립 |
758 | 6.25반공산악대원 전적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경기도 가평군 | 경기도 가평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99-4-27 | 6.25전쟁 당시 가평지역에서 80여명의 청년들이 군번없이 반공투쟁산악공작대를 조직, 북한군을 상대로 싸운 전적과 자유수호정신을 후손에 전하고자 함 |
759 | 해병대가리산전투전적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홍천군 | 강원도 홍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5-7-1 | 6.25전쟁 당시 가리산 전투에 참여하여 주요 고지인 가리산을 확보하는데 기여한 해병대와 해병대 소속 참전 군인들의 공훈을 추모함 | |
760 | 부채뜰전투 기념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홍천군 | 강원도 홍천군 | 비석 | 6·25전쟁 | 1950 | 높이 1.5 m 폭 1m | 2008-12-10 | 6.25전쟁 당시 미2사단 23연대 소속으로 가리산 부채뜰 전투에 참전한 유엔군 프랑스대대 공병 소대 및 소속 참전 군인들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761 | 반공희생자 위령탑 | 국가수호 | 2019-12-12 | 경기도 동두천시 | 경기도 동두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4-6-20 | 공산군에 맞서 싸운 이름도 군번도 없는 반공투사들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충정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
762 | 6·25참전유공자기념탑 | 국가수호 | 2019-12-12 | 전라북도 순창군 | 전라북도 순창군 | 탑 | 6·25전쟁 | 1950 | 2012-11-30 | 6·25전쟁으로 인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6·25전쟁사를 재조명하여 군민에게 국가관, 민족관, 애국심을 고취하기 이하여 건립 | |
763 | 독립유공자 이재락선생 생가 | 독립운동 | 2019-12-12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울산광역시 울주군 | 생가 | 3·1운동 | 1919 | 277.16 | 2019-12-12 |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 1월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764 | 월남참전유공비 | 국가수호 | 2019-12-12 | 세종특별자치시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세종특별자치시지부 | 비석 | 월남참전 | 1964 | 0 | 2003-12-21 |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한 부용면 회원들을 추모하고 그들을 영원히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
765 | 6·25, 베트남(월남) 참전기념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경상남도 거창군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거창군지회 | 탑 | 6·25전쟁 및 월남전쟁 | - | 2006-10-12 | 6.25참전 750명, 월남전참전 146명, 국가유공(상이, 전사)자 193명, 참전경찰유공자 78명 등 총 1,167명의 6.25 및 월남전참전용사들의 불굴의 충성심을 받들고, 후손에게 국가관과 민족관을 정립시키고자 건립하여 기념하고자 함 | |
766 | 6·25전쟁 철의삼각지대전투 전몰장병추모비 | 국가수호 | 2019-12-12 | 강원도 철원군 |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강원도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2012-10-15 | 6.25한국전쟁 당시 조국수호와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한 대한민국의 참전용사와 유엔군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유훈을 되새겨 후세에 영원토록 기리고자 함. | |
767 | 가람문학관 | 독립운동 | 2019-4-26 | 전라북도 익산시 | 익산시 | 기념관 | 애국계몽운동 | 1892~1968 | 영상실, 가람실, 상설전시실, 세미나실, 휴게실 등 | 2017-10-14 |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1927년 2월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신명균(申明均) 등과 같이 "한글사(社)"를 조직하고 월간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발기인이 되어 사전편찬의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국민)문학의 부흥을 주장하고, 고유한 민족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확대 개편)의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하여 1천 6백명의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 강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민족문화와 국사·국어국문 등 국학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익산시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문학관을 설립하였다. |
768 | 독립지사 진주정공 기적비 | 독립운동 | 2019-4-26 | 전라남도 광양시 | 정찬기 | 비석 | 3·1운동 | 0 | 2011-9-25 | 1919년 4월 1일 광양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군중 1,00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던 정귀인 선생을 기리는 시설이다. | |
769 | 안중근 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19-4-26 | 광주광역시 서구 | 광주광역시 서구 | 동상 | 의열투쟁 | 2016-08-00 | 광주광역시 서구의 상무시민공원 내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동상은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가 우리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와 한복을 입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
770 |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북도 울릉군 |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 | 기념관 | 기타 | 0 | 2017-10-27 | 대한민국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 용감히 싸우다 부상을 입고 명예제대하여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이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독도의용수비대원이 되어 울릉군민들의 생활터전인 우리땅 “독도”를 일본의 불법 침입으로부터 지켜내었다. | |
771 | 고양독립운동기념탑 | 독립운동 | 2018-12-4 | 경기도 고양시 | 경기도 고양시 복지정책과 | 탑 | 3·1운동 | 1919 | 31m | 2018-7-31 | 고양출신의 74인의 독립운동가와 아직 조명 받지 못한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함 |
772 |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 흉상 | 독립운동 | 2018-12-4 | 충청남도 서천군 | 고석주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 동상 | 3·1운동 | 1919 | 0 | 2018-7-19 |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은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17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773 |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남도 통영시 | 경상남도 통영시 주민생활복지과 | 장소 | 6·25전쟁 | 1950 | 표지석, 안내판 | 2000-8-16 | 1950년 8월 17일 7척의 해군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시작한 곳으로 해병대 최초 상륙작전인 통영 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 세우고 18년에 이전하여 재건립하였음 |
774 | 좌천시장 3.1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18-12-4 | 부산광역시 기장군 | 장안읍주민자치위원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2017-4-9 | 1919.4.9. 좌천 장날을 기해 3.1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고자 좌천시장 자리에 건립 |
775 | 동래고등학교 6.25 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12-4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동래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7-10-30 | 동래고등학교 출신으로 6.25전쟁에 군인, 학도병으로 참전해 국가수호를 위해 헌신한 289명의 이름을 각인하여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776 | 용마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 국가수호 | 2018-12-4 | 부산광역시 서구 | 경남고등학교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6-9-27 | 6.25전쟁에 참전한 경남중, 고교 출신 424명의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777 |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 | 국가수호 | 2018-12-12 | 대전광역시 서구 | 한국자유총연맹 대전광역시지부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6-7-15 | 대전지구전투는 1950년 7월 16일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미 제24사단 [사단장 소장 딘 (William F. Dean)]이 17일에 대전으로 물러나 방어진을 치고 수행한 전투이다. 이 전선에서 다시 한 번 북한군을 막아보려다가 적의 포위망 속에 빠지게 되는 고전 끝에 20일에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7월 20일까지 지연임무를 수행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에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호국영웅비는 1950. 7. 17. ~7. 20. 기간 중 대전지구전투에 참전하여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미군 참전용사(미 제24사단 등)의 넋을 기리고 그희생정신과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778 | 충혼탑(산청경찰서) | 국가수호 | 2018-12-4 | 경상남도 산청군 | 산청경찰서 | 탑 | 기타 | 1950 | 1983-6-25 | 6.25전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및 6.25에 참전하였다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장렬하게 순국하신 산청경찰서 소속 호국영령의 넋을 달래고 그 공훈을 빛내기 위하여 당시 산청경찰서에 같이 근무하였던 경우들의 모임이 청맥회에서 건립하고 매년 2회(1월 2일, 6월 6일) 추모행사를 개최한다. | |
779 | 6.25 참전 호국영웅 기념비 | 국가수호 | 2018-12-4 | 부산광역시 수영구 | 부산광역시 수영구청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2018-7-25 |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조국을 위한 희생을 기리고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건립되었음. |
780 | 유관순열사 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3·1운동 | 1902 | - | 1973-10-20 | 대표적인 독립지사인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함 |
781 | 이원등상사 상 | 국가수호 | 2003-09-15 | 서울특별시 용산구 | 특전사령부 | 동상 | 기타 | 1966 | 1966-06-09 |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한강대교에 낙하훈련중 동료를 구하고 숨진 이원등 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이원등상사상기념사업회에서 1966년 6월 9일 이 동상을 세웠다. 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제1공수특전여단 고공침투훈련 강하조장으로 훈련도중 동료의 낙하산이 기능 고장을 일으키자 동료의 낙하산을 개방시켜주고 자신은 한강에 추락 순직하였다. 주낙하산과 예비낙하산을 착용하고 이원등 중사의 안전점검을 받았다. 4, 500피트의 고도를 잡고 한강 모래사장을 항하여 날았다. 강하조장인 이원등 중사는 비행기 좌측문에 앉아서 정확한 낙하지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강하명령을 내렸다. 모두 다 비행에서 이탈했다. 비행기 우측문 3번째에서 뛰어내린 한 전우의 자세가 균형을 잃고 회전했다. 그는 전우를 구출코자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뛰어 내렸다. 전우의 낙하산을 펴서 위기를 모면해주고 이탈하려는 순간 자기 자신은 강렬하게 전개되는 전우의 주낙하산 줄에 걸려 오른팔이 부려졌다. 그후 그는 한강에 떨어져 순직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취옥보다도 더 푸른, 아름다운 조국의 하늘. 이 하늘을 지키는 젊은 용사 이원등. 바람찬 창공을 끊어 죽음의 부하를 구하다. 오오. 대한민국의 군인, 이원등의 정신이여! 높은 의지여! 당신의 갸륵한 군인정신을 우리 모두 씩씩하게 받들어 이곳에 찬란한 구리상을 세운다. | |
782 | 안중근의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11-06-08 | 서울특별시 중구 | (사)안중근의사숭모회 | 기념관 | 의열투쟁 | 1879 | 1970-10-26 | 안중근은 개항 이후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참담하게 국권을 피탈당하고 있을 때 불타는 애국심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의 영웅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이었던 남산 조선신궁 터에 1970년 개관한 이래 2010년 새로이 건립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단지 동맹을 상징하는 12개의 유리 기둥을 묶은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전시실에는 그의 출생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안중근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평화사상을 널리 선양하여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고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데 그 소임이 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생중에 남긴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전체가 보물 569호로 지정된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은 그의 우국충절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그밖에 안중근 의사 초상화와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 휘호 등도 전시되었다. | |
783 | 백범 김구 기념관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용산구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 기념관 | 해외운동 | 1876 | 1,743 | 2002-10-22 |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개명하여 창수(昌洙),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으로 아버지 순영(淳永),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광무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엡윗청년회(Epworth 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이동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시행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京橋莊:지금의 강북삼성병원)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임정로 26)에 건립된 박물관이다. 1996년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기념관 건립을 제안하였고, 1998년에 (사)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발족하여서, 1999년부터 백범기념관 건립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2000년 6월 26일에 기공식을 가졌고,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하였다. 2008년 12월에 백범기념관에서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 김구의 어린 시절부터 서거까지의 행적을 따라 관련 유물을 배치하였다. 전시관 1층의 중앙홀에는 김구의 좌상이 놓여있다. |
784 | 백범 김구선생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해외운동 | 1876 | 1969-09-23 |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출신으로 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왕후 민씨를 참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하였으마,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동상은 1969년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 그의 의로움을 본받으려는 뜻에서 세웠다. | |
785 | 일성 이준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문화운동 | 1859 | 동상높이 3m, 좌대높이 4.8m | 1964-07-14 |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 중 순국한 이준 열사의 뜻을 전승하기 위하여 해당 동상을 건립하였다. |
786 | 백마고지 3용사의 상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광진구 | 어린이대공원관리사업소 | 동상 | 6·25전쟁 | 1952 | - | 1973-10-01 |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의 진지를 공격해 승리로 이끌었던 강승우 소위 및 오규봉 일병, 안영권 일병을 추모하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1973년 10월 어린이대공원 내(동문 인근 위치)에 ‘백마고지 3용사의 상’을 건립하였다. 이들 3용사는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예하 제1중대 제1소대 소속으로 1952년 10월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고지에서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 등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돌진하여 적의 기관총 특화점을 격파한 후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고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
787 | 3·1독립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탑 | 3·1운동 | 1919 | 0 | 1999-03-01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광복회의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
788 | 유관순 동상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동상 | 3·1운동 | 1902 | - | 1970-10-12 |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로 진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각 마을과 문중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공주 영명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을 만났다. 1심 공주재판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언에서 3년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 중 여러 차례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 등으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동상은 원래 1970년 남대문 앞 녹지대에 건립됐다. 하지만 지하철 공사 때문에 건립 1년 만인 1971년 이곳으로 이전됐다. |
789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서울특별시 중구 |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비석 | 민족주의운동 | 1919 | 높이 4.5m | 1973-10-03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글인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펼친 유림의 파리장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
790 | 반공순국용사 위령탑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영등포구재향군인회 | 탑 | 6·25전쟁 | 1950 | - | 1978-06-25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좌우익 충돌에 의한 혈전과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영등포구 관내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반공연맹, 민보단 서북청년회 등 애국우익 단체 동지들과 경찰관, 소방관, 학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동지들이 반공전선에서 싸우다가 순국 산화하였다. 위령탑 건립위원회는 1978년 6월 2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1동 20-4에 이재호 등 134명의 반공순국용사들의 무훈을 앙양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후세에까지 길이 추모하고자 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6월 순국용사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791 |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 국가수호 | 2002-11-01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유격백마부대기념사업회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2-07-15 |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북 정주에서 조직된 '유격백마부대'는 군번,계급도 없이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 과정에서 전사자 552위를 추모하는 충혼탑을 건립 |
792 |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 독립운동 | 2008-05-09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사)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 기념관 | 의열투쟁 | 1908 | 0 | 1988-12-01 |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한 뒤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 때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에는 월진회와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 민족운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 하였다. 그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인 1930년 3월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 29일 천장절 겸 상해 점령 전승경축 기념식을 홍구 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점령 일본군 수뇌들이 여기에 모이게 되자, 김구가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에 특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윤봉길은 단신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등 군·정 수뇌들 7명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데 성공하였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25일 현지의 군법재판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해 12월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업적과 살신성인 정신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키며, 선양하기 위하여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국민들의 성금으로 서울 양재 시민의숲 안에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1988년 12월 1일에 준공된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은 대지 1,996평에 건평 743평,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서 윤의사의 유품과 생애사진, 훈장 그리고 항일독립운동 관련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 |
793 |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1-22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해병대사령부 군사연구소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2-09-28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서울 서쪽 관문인 104고지 탈환 작전 중 전사한 해병대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82년 9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해병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계속 진격하던 중 1950년 9월 21일 서울의 서쪽 관문인 104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4고지 점령은 서울시민 구출의 선도를 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해병은 결사적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3주간의 끝없는 혈전으로 1개 중대 중 26명만 생존하는 처절한 혈전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 적은 104고지 일대를 요새화하여 난공불락을 호언하며 서울 사수의 최후방어선으로 확보중에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한미해병대는 공격을 계속했다. 해병 제1대대가 104고지를 조기에 탈취 역사적인 수도탈환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상승해병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다. 서울 서측방을 점령 방어하던 적은 북한군 제25여단 및 독립 제7연대 소속 약 4, 000명 규모였으며 장교 및 준사관은 대부분 중공군에서 복무했던 정예화된 전투 경험자들이었다. 1950년 9월 21일 해병 제1대대를 중앙에, 미 해병 제5연대 제1대대를 좌측에, 미 제3대대를 우측으로 하여 서울 서측방을 병진공격했다.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제3중대를 주공으로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18:30분에 104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9월 22일 새벽 약 600명 규모의 적은 120밀리 박격포와 각종 공용화기의 지원하에 3시간 동안 2차에 걸쳐 단말마적인 역습을 감행해왔으나 우리 해병대는 필사적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 |
794 | 원심창의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평택시 | 성동초등학교 | 동상 | 의열투쟁 | 1906 | 0 | 1991-12-20 | 원심창 의사는 1906년 평택군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 1918년 평택보통학교(평택성동국민학교 전신) 4년제를 졸업했다. 1923년부터 1932년까지 중국 상해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1933년에는 육삼정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6년부터 1971년까지 재일거류민단을 결성, 단장을 역임하며 교포사회의 단결과 평화적인 남북통일 성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통일의 일념으로 활약하다 1971년 7월 4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며 그 유해는 1976년 10월 2일 철원군 망향의 동산에 모셔졌다. |
795 | 현충탑(평택시 서정동)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평택시 | 송탄출장소 | 탑 | 기타 | 1950 | 0 | 1982-06-06 | 평택시 서정동에 국가를 위해 산화한 방기원 대위 등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평택시 서정동)’을 건립하였다. 송탄문화원은 호국전몰군경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2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 탑을 준공하였다. 국가위기 시 평택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
796 | 기미독립선언 신둔의거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이천시 | 신둔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85-04-02 | 이천군 신둔면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수광리에 위치한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났다. 서기창·이상혁은 3월 31일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모임을 갖고, 김영익이 거사의 취지와 장소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집집마다 이를 회람시켰다. 4월 1일 신둔면사무소 앞에 5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자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은 이천읍내로 향하였는데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천 주둔병이 총칼로 강력히 제지하여 모두 해산되었으나 그날 밤 신둔면·모가면·백사면·대월면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서기창 이상혁 김영익 등 7명의 지사들이 체포되어 고문과 옥고로 순국하였다. 한천회는 이천 신둔면 지역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한 7명의 애국지사들의 공적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4월 2일 이천시 신둔면 경충대로 3150번길 82-3(신둔초교 내)에 신둔면의거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신둔면 경충대로 3234번길 37(신둔체육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
797 | 이수흥열사 동상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동상 | 의열투쟁 | 1905 | 0 | 1985-02-27 |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주 대한통의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육군 주만참의부에 가담,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했다. 6·10만세사건 당시 동소문파출소, 이천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
798 | 현충탑(의왕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의왕시 | 의왕시 | 탑 | 기타 | 1993 | 1993-05-21 | 의왕 왕곡동에 6·25전쟁 등에서 전사한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탑(의왕시)’을 건립하였다. 의왕시는 순국선열과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3년 5월 21일 이 탑을 준공하였다. 6·25전쟁 등 국가위기 시에 의왕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의왕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
799 | 3·1독립운동 기념비(장안) | 독립운동 | 2003-01-17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 장안면장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4-03-01 |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마을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 삼일절 때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 차희식(1968, 독립장) 등 수촌리 지사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경찰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불을 질러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왜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쳤다. 이 소식을 듣고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가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문하고 치료해주었다. |
800 | 현충탑(시흥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시흥시 | 시흥시 | 탑 | 기타 | 1987 | 1987-05-30 | 시흥군 현충탑은 1971년 10월 15일 안양읍 안양리 산 101번지에 건립하였으나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안양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1986년까지 안양시와 공동으로 영령을 봉안 하여오다 1987년 6월 6일 현충탑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탑은 내탑과 외탑으로 구분하였고 내탑의 조석 5각 충혼비는 5개 읍면 20만 군민이 호국영령을 기리는 염원이며 외탑은 비를 감싸는 두손의 형태이고 백색은 우리 백의민족을 뜻하며 천정에서 쏟아지는 다섯줄기의 빛은 우주근원인 음양오행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상징하였다. | |
801 | 탄운 이정근 창의탑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화성시 | 이호헌(이정근의 증손자) | 탑 | 3·1운동 | 1856 | 0 | 1970-04-05 | 경기도 화성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한 이정근(1856~1919)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하생들과 국내의 저명인사 36명이 1970년에 건립한 비이다. |
802 | 터어키군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 용인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 | 1974-09-06 | 유엔군의 기치를 들고 터어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사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 |
803 | 제암리 3 1운동 순국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5-30 | 경기도 화성시 | 화성시시설관리공단 | 기념관 | 3·1운동 | 1919 | 0 | 2001-01-01 | 제암·고주리 사건은 일제가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에 대한 전복과 3·1운동 확산을 저지하고자 자행한 참극이며 보복사건이다. 이에 제암리 순국기념관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발생한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으로 돌아가신 29선열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고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1년에 개관하였다. |
804 | 월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5-05-09 | 경기도 김포시 | 월곶3.1정신선양회 | 비석 | 3·1운동 | 1919 | 소 | 1984-12-29 |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월곶면에서는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郡下里) 장날을 이용하여 이병린(李炳麟), 성태영(成泰永), 박용희(朴容羲), 이병철(李丙喆), 백일환(白日煥) 등이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동년 3월 29일 임용우(林容雨), 최복석(崔福錫), 윤영규(尹寧圭)등이 주동이 되어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805 | 현충탑(안성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안성시 | 안성시 | 탑 | 기타 | 1965 | 1965-12-08 |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 안성시청 뒤편에 안성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안성군에서 1965년 12월 8일 이 탑을 세웠다. 순국충렬 봉안회 안성군 지부장 김태영씨가 현충탑 건립기금을 마련해 냄으로써 안성군에서는 1965년 12월 8일 안성공원에 최초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그후 안성출신 전몰 육·해·공군 장병 및 경찰관과 민간인 열사의 충혼 1, 263위의 현충록을 봉안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명복을 축원하기 위해 1975년 10월 2일 현충탑을 재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님의 높으신 얼은 이 겨레 이끄시고 님의 거룩한 넋은 이 강토 지키시네 드넓은 안성벌 우뚝 솟은 이 언덕에 힘 모아 바칩니다. 님들의 안식처 더욱더 빛내리라. 님들의 높으신 뜻. | |
806 | 연기우의병장 공적비 | 독립운동 | 2003-05-30 | 인천광역시 강화군 | 곡산연씨대동종친회 | 비석 | 의병운동 | 1914 | 소 | 1988-11-18 | 연기우(미상∼1914)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성장하였다. 강화 진위대 부교로서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지홍윤, 유명규, 이동휘, 김동수 등과 함께 전등사에 모여 의병모집을 밀의하고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창의대장 이인영의 휘하에 합류하여 대대장으로 서울 진격을 감행했으나, 양주에서 패한 후 창의 한북대장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연천·이천·안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1월 21일에 강기동 의진과 합작으로 포천군 송우 등지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여 2명을 사살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철원군 동면에서 일본 헌병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이진용·강기동 의진과 연합작전을 벌이면서 활동했다. 1909년 8월 이후에는 철원·연천 등지에서 20~40명의 소수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감행하며 활약했다. 1910년에는 구월산, 지리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14년 마침내 일제에 체포되어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807 | 현충탑(이천시)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이천시 | 이천시 | 탑 | 기타 | 1958 | 1958-03-03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에 이천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천시에서 1958년 3월 3일 이 탑을 세웠다. 이천군에서는 1958년 3월 3일 이천군 이천읍 안흥리에 6·25전쟁 당시 이천군 출신 전몰군경 및 군속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세에 빛나는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도시계획지구로 인가에 접근하여 조경 및 관리상 문제점이 많아 1977년 6월 6일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건립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조국을 위해 몸바치신 이천출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이천의 현충탑은 원래 안흥동 방죽 한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후 1978년도 설봉호수 입구로 이전하였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규모가 발전하는 이천시의 위상에 걸맞지 않아 새로운 현충탑 건립이 필요하던 차에 설봉공원 주변이 세계도자기 EXPO 주행사장으로 결정되면서 진입도로 확장과 아울러 현충탑도 그 규모를 크게 하고 좀더 아늑한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선현들의 넋을 새롭게 기리게 되었습니다. 호국이 영령들은 문화도시로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는 이천시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미소지으실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이섭대천(利涉大川)의 큰 뜻을 새기어 천하를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과 상생의 정신, 개척의 정신을 갖고 더욱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20만 이천 시민들은 호국영령들이 베푸신 살신성인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우리 고장의 유산으로 영원히 물려주기 위해 이곳을 '충효동산'으로 이름짓고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성스런 장소가 시민들의 화합의 장소가 되고, 충효의 교육장이 될 것으로 믿으며 여기에 이 현충탑을 세웁니다. | |
808 | 현충탑(경기 광주)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광주시 | 광주시 | 탑 | 기타 | 1950 | 가로 12m, 높이 21m | 1959-11-30 |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에 광주시 출신으로 호국영령이 되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주시에서 1959년 11월 30일 이 탑을 세웠다. 현충탑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된 지 6년이 지난 1959년도에 16개면 출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대에 선양하기 위해 경안리에 건립되었다. 기존시설은 50년 전 시설로 규모가 작고, 훼손부분이 많을 뿐더러 보훈시설로서 상징성이 부족함에 따라 재건립이 요구되어, 살기 좋으며 날로 발전하는 인구 24만의 광주시 위상에 걸맞고 국가를 위해 희생, 공헌한 분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 국가의 소중함과 감사를 느낄수 있고, 경건 엄숙한 곳이면서 후세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시설로 확장 조성하기 위해 기존 시설 철거와 주변부지 3배 확장 등 시민들의 휴식 및 여가공간인 경안근린공원과 연계하여 작품성을 갖추어 새로이 건립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끓는 청춘을 겨레위해 바치리라. 목숨걸고 지켜온 아-소중한 조국산하 불굴의 큰 뜻 받들어 청사에 꽃 피우고 불멸의 혼불로 스러져간 영령앞에 추모의 정 깊고깊어 머리숙인 광주시민 호국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기립니다. |
809 | 무어장군 추모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여주시 | 여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1-10-01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단현리에 전쟁 영웅이었던 미 육군 제9사단장 브라이언트 무어(Bryant E. Moore)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51년 10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1894년 6월 6일 미국 메인 주에서 태어난 무어 장군은 8군사령관 리지웨이와 미국 육사 동기였다. 리지웨이가 8군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추천한 네 명의 군단장 후보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에서 연대장, 사단장을 지냈고, 전후엔 미국 국방부 공보처장, 육사교장을 거쳤다. 6·25 전쟁 당시 1951년 1월 31일 부임하여 3주만인 1951년 2월 24일 남한강 도하작전을 지휘하다 고압 전기선에 헬리콥터가 충돌하여 강바닥에 추락 전사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 |
810 | 기미 3.1독립만세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0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사무소 | 비석 | 3·1운동 | 1919 | 소규모 | 1979-04-09 | 1919년 전국으로 퍼진 3.1독립만세운동은 옹진군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옹진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을 전개한 곳은 덕적도였다. 당시 김포군 덕적도에서 사립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林容雨)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月串)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수배되어 덕적도로 들어와 있었다. 임용우 선생은 명덕학교 제자인 한․일학교 선생 이재관(李載寬), 차경창(車敬昌)등과 함께 덕적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섬이라는 특성상 김포처럼 군중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장날’같은 계기가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임용우가 제시한 방법은 ‘학교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임용우선생과 이재관과 차경창은 덕적도 각 지역을 돌며 4월 9일 ‘운동회’ 개최를 알렸다. 운동회 장소는 진1리 해변 운동장이었으며, 당일 섬 유지들과 많은 학생 및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오전 중에 운동회와 관련된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이 진행되었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운동회는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임용우의 독립 연설과 이재관의 격문 낭독 그리고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참가자 수는 명덕학교, 합일학교의 재학생과 교사, 덕적도 주민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 및 주민들은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진리에서는 뒷산에서 봉화를 피우며 만세를 불렀고 서포리는 국사봉에서, 북리는 주요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진행된 덕적도의 독립만세운동은 밤 9시 이후에야 각 마을에서 끝났다. 임용우 선생은 이 날 3.1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임용우의 정확한 체포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덕적도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4월 9일에서 4~5일 지난 다음으로 보인다.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이미 임용우 선생은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철사줄에 묶여 있는 등 잔혹하게 보복을 당했다. 이어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더욱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임용우 선생이 체포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임용우 선생과 함께 덕적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수업 중에,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동응과 장기선, 남준기 등이 체포되어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각각 8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렇지만 임용우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5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덕적면민들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1979년 4월 9일, 3 ·1 독립만세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덕적면민 일동이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136번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덕적도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임용우와 이재관, 차경창 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
811 | 춘천농고 항일학생운동 기념탑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 탑 | 학생운동 | 1919 | 1995-08-25 | 춘천농공고등학교는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식민지 교육을 받는 가운데서도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터지자 전교생이 만세 시위에 동참한 강원도 최초의 유일한 학교로, 이를 효시로 일본 교사 배척, 식민지 교육 반대, 광주학생사건연대투쟁,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 독서회 사건, 일본 천황과 총독에게 보낸 통치반대 청원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련의 항일운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른 많은 본교 애국학생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총동창회 동문들의 뜻을 모아 1995년 8월 25일 개교 85주년 및 광복 50년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기단 1.5m, 탑신 5.4m로 매년 3월1일 동문회 주관으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 |
812 | 애국선열 추모비(철원)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 철원군 | 비석 | 기타 | 1919 | 0 | 1967-03-01 | 철원군민들이 철원군에서 3·1운동 직후 결성된 철원애국단 단원들의 구국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3월 1일 철원군 철원읍 화지8리 54(철원고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대한독립애국단이 조직되었다. 1919년 철원 출신 김상덕은 애국단에 가입하고 강원도 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8월 11일 강대려·김완호·이용우·이봉하·박건병·오세덕 등은 도피안사에 모여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철원애국단)을 결성하였다. 철원애국단의 활동이 도내 각지로 확대되어 나갔으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철원의 부호가 이를 경찰에 밀고하여 1920년 초 관계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 애국선열추모비가 위치한 철원역사문화공원의 철원읍 사요리 일대는 강원도에서 3·1운동이 먼저 일어난 장소로 철원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2023.12.7. 철원중·고등학교에서 이전되었다. |
813 | 김포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13-05-30 | 경기도 김포시 | 경기도 김포시 | 탑 | 기타 | 1962 | 0 | 2012-04-17 | 김포시 출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현충탑(김포시 북변동 소재)이 시민들이 접근하기 불편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해소하기 위해 김포한강신도시 내에 김포시에서 2012년 4월 17일 탑을 새로 세웠다. 김포시 현충탑은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국화인 무궁화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하였으며, 태극이 서로 휘감는 모습을 상징화하였다. 특히, 하늘, 땅, 물, 불을 상징하는 건,곤,감,리 4괘를 부조벽과 광장 포장 패턴에 도입하였으며, 헌화대는 태극문양을 활용하여 설치하였다. 현충탑 안 쪽에는 김포시 순국선열의 영현을 각인해 놓아 후세들이 순국선열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게 하였으며 2020년 6월 독립운동 만세 장면, 6·25전투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 설치 및 위패를 각인하였다. |
814 | 한용운선생 기념관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인제군 | 백담사 | 기념관 | 한말구국운동 | 1879 | 1층 | 1998-10-10 |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용운 [韓龍雲] (두산백과) |
815 | 의암류인석기념관 | 독립운동 | 2012-05-16 | 강원도 춘천시 | 춘천문화원 | 기념관 | 의병운동 | 1842 | 0 | 2004-06-01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연해주에서 병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인석 [柳麟錫] (두산백과) |
816 | 해병대 김포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4-12-09 | 경기도 김포시 | 해병대 제2사단 | 비석 | 6·25전쟁 | 1951 | 대 | 1989-11-01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에 김포지구 전적 기념 및 해병대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89년 11월 1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김포지구 전투에서 수도 서울을 수호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독립 5대대 장병의 빛나는 무훈과 조국수호의 영령으로 산화한 해병용사들의 숭고한 넋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그날의 전승터가 보이는 곳에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예로부터 한강 하구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이자, 대몽고 항쟁, 신미, 병인양요 등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 한 땅이다. 한국동란중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만회한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탈환작전의 선봉군인 해병 제1연대는 그 예하 제3대대를 이곳에 배치하여 서울로의 반격을 시도하려던 잔적을 과감히 소탕하였고, 1·4후퇴의 와중인 1951년 3월부터 휴전시까지는 해병 독립 제5대대가 이곳에 배치되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면서 한강 넘어 개풍군 및 개성 등으로 침투, 월암리전투를 비롯한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사수하고 이 땅을 지켰다. 특히 이 지역은 휴전 이후 해병 제1임시여단, 제5여단, 제2여단, 제2사단으로 오늘에 이르며, 피와 땀과 혼이 깃든 분단조국의 최전방을 40년 이상 지켜 온 우리 해병들은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지킬 것이다. 여기 이 전투에서 목숨 바쳐 나라와 겨레를 지킨 님들의 고귀한 충정과 용감무쌍한 정신은 자손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
817 | 진병산 전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춘천시 | 춘천시 | 비석 | 의병운동 | 1895 | 1979-12-28 | 1895년의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시해와 단발령의 강제로 배일감정이 폭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0일(음력 을미년 12월 16일)에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의 지방유생과 1,000여 명의 농민들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소응은 척사위정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규정하고, 엄한 군율 밑에서 부대를 통솔하였다. 먼저 정부에서 개화관료인 조인승(曺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임명하자 단발하고 부임한 조인승를 참형에 처하여 그 기세를 올렸다. 2월 8일에는 이겸제(李謙濟)가 인솔한 친위대 3개 중대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고 흩어졌으나 다시 모여 부대가 정비되었다. 그 뒤 포천·영평·양광 등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또 일부 병력은 그 뒤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강릉에 이르렀고 경기도 여주·이천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신우균(申羽均)·김구현(金龜鉉)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전략 전술 및 무기의 열세로 점차 전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문제도 곤란해져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와 협상하였으나 실패하자 2월 17일 부득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부대로 이적하였고 부대는 종형 이진응(李晉應)이 지휘하였다. 이진응 다음에는 이진응의 아우 이경응(李景應)이 대장에 추대되어 지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소응 [李昭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818 | 버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한국자유총연맹 파주시지회 | 탑 | 기타 | 1983 | 0 | 1984-01-01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희생된 외교사절 및 공식 수행원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반공연맹에서 1984년 1월 1일 탑을 세웠다. 1983년 10월 8일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22명, 비공식 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의 공식 순방길을 출발했다. 미얀마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길의 첫 방문지였으며, 이 날은 미얀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10월 9일,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들은 행사 준비 및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인 오전 10시, 전두환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한다. 예행연습을 끝내고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한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오전 10시 26분에, 전두환 측근으로부터 무전 연락을 받아 "차량 정체로 인해 전두환 대통령이 약 30여 분뒤에 지연도착"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한번 더 애국가의 예행 연습을 한다. 그런데 미리 대기해 있던 폭탄테러 용의자중 1명인 신기철은 전두환 대통령이 오전 10시30분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첩보를 통해 파악한 상태였고 예행연습중에 나온 음악을 듣고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하여 오전 10시 28분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을 터트린다. 이 폭발로 예행 연습중이던 경제부총리 서석준과 수행공무원 기자를 포함하여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한다. 전두환은 차량정체로 인해 애당초 도착예정인 10시 30분에서 30분뒤인 11시에 도착했다. 따라서 30분에 정상적으로 도착을 했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이후 전두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한다. 버마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희생된 순국외교사절 및 공식 수행원 17위의 영령을 추모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위령탑을 건립했다. |
819 | 기미만세공원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홍천군 | 홍천군 | 장소 | 3·1운동 | 1919 | 1991-08-26 | 물걸(동창)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장두 김덕원과 부장두 전성열의 지휘로 거사 일정 및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많은 군중이 모이도록 사발통문식으로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3일 동창장터에서 5개 면민(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3천여 군중이 운집하여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도준이 징을 치면서 내촌면 주재소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현장에서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이여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등 8명이 순국했고 함춘선, 승만수 등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63년 동창 3·1독립운동 때 순국한 8열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관민이 합동하여 팔렬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팔렬각이 노후화되자 1990년 2월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91년 8월 기미만세공원이 준공되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기미만세공원은 군민의 성금과 군비를 투자하여 약 5, 700㎡의 부지에 기미만세상을 세우고 부대시설을 하는 등 독립운동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 |
820 | 미국군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5-10-03 | 국방부는 1975년 10월 3일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490-1 (임진각 내)에 6·25전쟁 기간(1950~1953) 참전한 미국 군인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이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미국은 6·25 전쟁을 맞아 유엔 참전국 중 가장 먼저 참전했으며 가장 큰 규모의 지상군, 해군, 공군을 파병했다. 유엔군 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을 임명함으로써 6·25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다.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최초로 북한군과 교전을 시작한 것을 비롯,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작전, 북진, 1·4 후퇴, 휴전 등 6·25 전쟁 전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전쟁 기간 참전 연인원 57만 2000명, 사상자 14만 2091(사망 3만3629명, 부상10만9284명, 실종 5178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
821 | 임진강지구 전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9-01-01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임진강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79년 12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임진강지구 전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청단, 연백, 개성, 고량포, 적성 일대에서 3·8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국군 제1사단이 개전 이후 배속된 국군 2개 연대와 더불어 개성-문선-파평산-봉일천 일대에서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4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다.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과 공릉천의 천연장애물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6월 28일 서울이 실함됨으로써 퇴로가 차단되어 부득이 행주-이산포 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사단은 철수 시기를 놓친 데다가 도하장비의 부족으로 인하여 벽력이 과도히 분산되고 모든 공용화기와 장비를 유기한채 철수를 단행해야 하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다. 더구나 임진교 폭파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천 장애물을 활용하지도 못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부의 요충지 임진강은 남북을 잇는 관문이요, 혈맥이다. 여기에 공산군의 화살을 꽂아 4년.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및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몸을 던져 사선을 지켰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은 영원히 혈맹의 교훈을 받은채 통일의 그날을 지켜볼 것이다. |
822 | 백하구려 | 독립운동 | 2008-05-09 | 경상북도 안동시 | 김시중 | 생가 | 문화운동 | 1909 | 0 | 1885-04-19 | 백하구려는 1907년 안동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된 백하 김대락의 생가 사랑채이다.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김대락은 신교육을 수용하면서 백하구려를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12월경 김대락은 마을과 인근의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삼원포 이도구에 정착였다. 1911년 6월 경학사와 1913년 공리회 결성에 참여하여 「공리회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김대락은 망명 후 줄곧 이주 한인들을 지도하고,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심혈을 기울이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김대락의 뜻은 여동생인 김락, 집안 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 종손자 김성로의 항일투쟁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
823 |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춘천시 | 광복회강원도지부 | 탑 | 기타 | 1995 | 0 | 1995-08-15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강원도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
824 | 이유중대령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기타 | 1980 | 1981-01-01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이유중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81년 12월 23일 이 비를 세웠다. 1980년 겨울 전방경계 작전수행 중 중상을 입고 간경화증까지 악화되어 임무수행은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웠으나 조금의 내색도 없이 의연하게 마지막 순간까지 부대를 지휘하다가 보병 제1사단 12연대 3대대장 이유중 대령은 순직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호국의 선봉으로 젊음을 다 바친 이유중 대령의 전진혼을 기린다. | |
825 | 소위 김만술 상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상이군경회파주시지회 | 동상 | 6·25전쟁 | 1953 | 1996-12-04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베티고지 전투에서 맹활약한 김만술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96년 12월 4일 이 동상을 세웠다. 베티고지의 영웅인 김만술 소위는 192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6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제5연대에 배속되었다. 입대 후 그는 여순 10·19사건의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평양 탈환 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김만술 소위는 7월 15일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티고지 사수임무를 부여받았다. 7월 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부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그동안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대대에서는 사흘 동안 3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중공군의 공격에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이 새기도 전에 새로운 1개 소대를 다시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김만술 소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 제2소대가 4번째로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가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베티고지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봉과 동봉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앙봉에서 직선거리로 10m도 안되는 서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15일 오후 2시 김만술 소위는 아직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34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중앙봉과 동봉(東峯)을 점령했다. 김만술 소위는 ‘목의 가시’와도 같은 서봉(西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지금까지 국군이 당하고만 있던 수동적인 자세를 뒤집어 국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한편, 중공군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중대장에게 서봉에 대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 당시 베티고지에서는 많은 사상자로 인해 병사들은 고지에 오를 때 "오늘은 몇 명이 전사할 것인가"를 걱정하게 되었고, 상급부대도 다음에는 “어느 소대를 투입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사상자가 많아 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특무상사로서 실전 경험이 많았던 김만술 소위는 병사들에게 먼저 “아무리 치열한 포탄 속에서도 침착하고 민첩하게만 행동하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김만술 소위는 서봉을 기습 공격하여 적병 5명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공격하여 소대원들의 사기를 올린 다음 야간에 적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의 모래를 파내고, 무선과 유선을 세밀히 점검하고, 시계를 일일이 확인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중공군의 야간공격을 받았다. 김만술 소위는 중공군 1개 대대 규모의 공격에 맞서 수류탄과 소총, 백병전 그리고 4차례의 포병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사선에서의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13시간이나 진행된 격전 속에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치룬 결과 제2소대의 생존자는 소대장을 포함 단 12명뿐이었다. 이때 확인된 중공군의 시체만도 350여구에 달했고, 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김만술 소위와 제2소대원은 치열한 혈투속에서 왕성한 책임감과 감투정신으로 베티고지를 몸으로 지켜냈다. | |
826 | 횡성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1-15 | 강원도 횡성군 | 횡성군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72-08-15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
827 |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7-01-01 | 한국동란중 자유세계 곳곳에서 달려온 "부의전사"라 불리우는 많은 종군기자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쳐가며 정의의 평화 그리고 종군 기자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쳐가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민과 유엔군의 투쟁을 생생히 기록하려 전 세계에 알린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18명의 희생과 공훈을 길이 추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828 | 임광빈중령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보병제1사단 | 비석 | 기타 | 1989 | 1990-01-01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내에 을지훈련 중 순직한 임광빈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보병 제1사단에서 1990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임광빈 중령은 1957년 10월 7일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의정부공고를 졸업하고 3군사관학교 15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32사단 98연대 소대장과 62사단 108연대 작전장교, 39사단 117연대 중대장, 306보충대 군구과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후 1989년 4월 24일 보병 제11연대 1대대 작전장교로 보직되어 우수하게 근무하던 중 동년 8월 22일 89을지훈련기간 적 주력 섬멸 전투훈련중 임진강에서 부대원들을 안전하게 도하시킨 후 자신을 급류에 의해 순직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死必忠誠으로 꽃피운 軍人精神을 높이 기리고자 이 碑를 건립한다 천하제일 제1사단 장병일동 | |
829 | 해병대 수도방위기공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해병대사령부 | 비석 | 6·25전쟁 | 1952 | 1959-03-05 | 1951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요청으로 유엔군사령관 벤 플리트 장군은 1952년 3월 12일 한미해병대로 하여금 장단·사천강 지구를 방어하게 하여, 정전협정시까지 중공군 2개 사단의 네 차례 대공세를 저지함은 물론 정전협정 후에도 1959년까지 본 전선을 굳게 수호하여 수도권 방어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 |
830 | 파주시 충혼탑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88-01-01 |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남한 땅이 한 때 붉은 무리들의 손에 들어 갔으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젊은 청년들은 고귀한 피를 흘려 싸웠다. 당시 감악산에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현역 잔류병과 파주군 연천군 양주군 장단군 등지에서 모여든 반공 청년들이 대한의열단 감악산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후방교란과 유격적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결사대원들의 희생도 많았다. 생존한 결사대원들은 항상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동지들의 숭고한 뜻과 영혼을 달래고자 1978년 적석면 객현리에 충혼사를 건립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수복일인 9월 28일과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내왔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어언 38년 감악산 결사대장과 생존동지들은 옛 순국동지들의 영혼을 달래는 길은 충혼탑의 건립이라고 뜻을 모으고 그 성사를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던 중 1988년 파주시당국과 한국자유총연매 파주시 지부의 도움을 받아 늦게나마 이탑을 세움 |
831 |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양양시 | 양양군 | 비석 | 3·1운동 | 1919 | 너비 3.5m, 높이 14.8m | 2000-04-09 | 양양 3·1독립운동이 참여한 양양군민의 유적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4월 4일부터 4월 9일까지 양양군 6개면 82개 동리 주민들은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양읍 도천면에 거주하던 이석범은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3·1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다. 양양으로 귀향한 그는 현북면의 7개리 주장들과 태극기 11,000개를 제작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태극기를 압수당하고 22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태극기를 각 면별로 전달하여 4월 4일부터 양양읍 장터에서 3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만세운동에 불길을 댕겼다. 양양 3·1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 신분종파를 초월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양양군에서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양양군민들의 나라사랑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2000년 4월 9일에 이 비를 세웠다. |
832 | 충렬사 | 독립운동 | 2003-09-15 | 강원도 양양군 | 양양군(환경복지과) | 사당 | 3·1운동 | 1919 | 사당 1동 | 1990-12-30 | 강원도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양양3.1만세운동 당시 순국하신 30위의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이때의 만세운동으로 현재 45분(애국장 9, 애족장 27, 건국포장 3, 대통령표창 6)이 포상을 받았다. ㅇ 위패 봉안 선열 권광식(權廣植) 고대선(高大先) 김성서(金聖瑞)김두영(金斗榮) 권병연(權炳淵) 김재한(金在漢)김사만(金思晩) 김석희(金錫熙) 김종성(金鐘聲)김창환(金昌煥) 김학구(金學九) 김주열(金周烈)이창갑(李昌甲) 문종희(文鍾熙) 김필선(金必善)최영덕(崔永悳) 이학봉(李學奉) 이원희(李源熙)최인식(崔寅植) 임병익(林秉翼) 이종엽(李鐘燁)이두형(李斗炯) 전원거(全元擧) 김철기(金哲起)황선주(黃璇周) 진원팔(陣元八) 노병례(盧炳禮) 함홍기(咸鴻基) 황응상(黃應相) 홍필삼(洪必三) |
833 | 양양 3·1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3-05-30 | 강원도 양양군 | 양양군 | 비석 | 3·1운동 | 1919 | 너비 1.7m, 높이 3.5m | 1974-10-03 |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은 대규모 시위 계획이 사전에 치밀하게 진행되던 중 1919년 4월 3일 일경에 탐지되어 임천리에서 22명의 인사가 체포되고 태극기 수백 매가 압수되었으나, 4월 4일 양양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4월 9일까지 6일 동안 강선면, 도천면, 논산리, 손양면, 상평리 등지에서 각각 별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에 함흥기, 권병연, ·김학구(1995, 애국장) 등 12명이 일본군에 피살되고 시위자 중에 80여 명이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외에 수많은 양민이 태형을 당하였다. 동아일보사와 양양군협찬회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되거나 투옥된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74년 10월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25-1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834 | 고 육군대위 서상윤 순직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육군 제7296부대 | 비석 | 기타 | 1960 | 0 | 1960-01-01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에 지뢰를 밟아 순직한 서상윤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20사단 육사 동기들이 모여 1960년 4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당시였던 1960년 4월 6일 제20사단 탄약고 지역에서 산불이 나자 영연방사단(영국·뉴질랜드·캐나다)이 주둔하면서 매설해 놓은 지뢰가 폭발하였다. 이때 주위에 주둔하고 있던 소대장 서상윤 중위는 소대원을 지휘하여 화재진압작전을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순직하였다. 20사단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은 서상윤 중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순직비를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에 건립하였다. |
835 | 해병 제1상륙사단 전공 선양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파주시 | 해병대(군사과) | 비석 | 6·25전쟁 | 1951 | 1958-03-15 | 해병 제1상륙사단은 6·25전쟁 중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함흥지구작전, 도솔산지구전투, 김일성고지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귀신잡는 해병대의 위용을 만전하에 떨쳤다. 특히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려는 중공군을 격퇴해 수도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 |
836 | 순국 3·1열사 충혼비(홍천) | 독립운동 | 2002-12-01 | 강원도 홍천군 | 성수리3.1열사유족회(민성홍) | 비석 | 3·1운동 | 1919 | 높이1.5 m 폭0.5m | 1964-05-01 | 민병숙은 서울에 올라가 광무황제의 국장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3월 말경 민준기와 같이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4월 2일에서 3일까지 이틀 동안 계속된 이 만세시위에는 먼저 면사무소 앞에서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1919년 4월 1일 홍천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다음날인 4월 2일 동면 소재지인 속초리로 군중이 집결하면서 동면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동면사무소 주변에 모여든 800여 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민병숙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3일에 동면 주민들은 속초리에 다시 집결하여 홍천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일제 헌병과 수비대 10명이 나타났다. 면사무소에서 시위 주도자들과 헌병들이 대치하다가 격투가 벌어졌다. 군중들이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고 하자, 일본군이 총을 쏘아 민병숙이 즉사하였다. 동생의 죽음에 격분하여 달려들던 민병태도 역시 총에 맞고 쓰러졌다. 격분한 군중이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나 결국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군중은 모두 해산하고 말았다. 수십 명이 검거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들 면병태, 민병숙 두 형제 열사를 기려 1965년 홍천읍 유지들이 뜻을 모아 높이 1.5m, 폭 50cm의 추모비를 세웠다. |
837 | 문충사 | 독립운동 | 2003-09-15 | 대전광역시 동구 | (사)문충사 | 사당 | 한말구국운동 | 1836 | 1동 | 1966-01-01 | 문충사는 한말에 일제에 항거한 유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송병순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두 형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손으로 형 송병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해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동생 송병순은 1888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학문연구에 몰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는 격문을 지어 8도에 돌렸다. 1910년 망국의 비보를 듣고 통분하여 형의 뒤를 따라 음독 자결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문충사는 원래 1908년 충청북도 영동에 건립되었는데, 송병선의 순국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66년 그의 순국지인 대전시 동구 용운동으로 옮겨졌다.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고, 그 옆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인 외삼문 안에 용동서원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있으며, 그 뒤의 내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
838 | 파주시 징집 제1차 6·25 참전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파주시 | 파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2 | 1998-06-28 |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침공하여 우리 강토가 적색으로 물들어갔으나 다시 우리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통일의 그날을 생각할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파주시 800명의 청년들은 국가의 부름에 조국을 구하겠다는 신념하나로 참전하여 70여명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하고 파주군 징집 1기생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진 기념탑입니다. | |
839 | 대한민국 무공수훈 국가유공자 공적비 | 국가수호 | 2003-01-17 | 경기도 파주시 | 무공수훈자회 파주시지회 | 비석 | 기타 | 1998 | 0 | 1998-01-01 | 파주시 장곡리 장곡체육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와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공수훈 국가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파주시 지부는 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8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파주 시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840 | 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땅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아산시 | 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 | 장소 | 한말구국운동 | 1878 | 0 | 1986-12-15 | 수당 이남규선생은 고려말 목은 선생의 후예로 1855년 서울 미동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 벼슬은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일제의 침낮 마수가 이땅을 죄어들자 일찍이 척왜 항일의 굳은 신념을 불태워온 수당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영흥부사직을 박차고 왜적을 물리칠 것과 척신의 머리를 베라는 추상같은 상소와 실제의 행동은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1906년 의병들의 홍주성 봉기를 뒤에서 후원하고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준 일로 왜군에 의해 공주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두고는 그들의 침략이 뜻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안 백여 명의 왜군은 이곳에서 20여리 떨어진 대술면 상항리 선생의 사저 평원정을 에워싸고 묶으려 했다. 선생은 이에 ˝선비는 죽을 수 있으되,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외치며 가마를 타고 나섰다. 해가 지기를 바라며 뒤따르던 왜적들이 이속 평촌 냇가에 이르러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자 ˝죽을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선생의 호령이 떨어지자 저녁놀에 반짝이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뒤따르던 맏아들 충구가 몸으로 선생을 감싸자 내리친 칼에 쓰러지니 가마를 맨 하인 김응길, 가수복이 또 선생을 에워싸는 순간 칼날이 어지러이 비켜 아들도, 하인도, 선생도 모두 쓰러지니 향년 쉰 셋이었다. |
841 |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 국가수호 | 2003-09-15 |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58-01-01 | 대한민국 해병대는 수도권 안전확보를 위해 현 전적비 일대에서 북한군 1개연대와 격전 끝에 20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포로로 잡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국군은 서울 외곽 방어선을 확보했고 북한의 재침공 기도를 분쇄하였으며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
842 |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독립운동 | 2002-11-25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천안시 사적관리소 | 비석 | 3·1운동 | 1919 | 0 | 1947-11-26 |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홍일선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와 이순구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그리고 숙부 유중무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쳤다. 일경 5명이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였다. 사상자들의 친지는 시신을 헌병 주재소를 옮기고 항의를 하였고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경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
843 | 미 제25사단 한강도하 기념비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1986-03-07 | 남양주시는 1986년 3월 7일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 347-2(미 제25사단의 도하지점)에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하여 감행한 한강도하작전에 참전한 미 제25사단 용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미 제8군이 1951년 3월 7일부터 서울 재탈환을 위한 리퍼작전을 실시하였다. 당시 제8군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대장은 중부의 미 제9군단 예하 25보병사단으로 하여금 양수리와 팔당 부근에서 도하작전을 전개하도록 해 서울 동측을 위협하는 한편, 한강 남안 진지를 확보하고 있던 미 제1군단( 한국군 제1보병사단·미 제3보병사단)을 투입시켜 큰 피해 없이 서울을 탈환하려 했다. 그러자 중·조연합사령관인 팽덕회는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미 제25 보병사단의 도하와 중동부 지역에서 감행된 미 제10 군단과 한국군 제1 군단의 공격에 대해 지연전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격전이나 희생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다. | |
844 | 구리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구리시 | 구리시 | 탑 | 6·25전쟁 | 1950 | 1991-01-01 | 구리시는 1991년 6월 구리시 인창동 313-44에 6·25전쟁시 전사한 구리시 출신 호국영령 87위(육해공군, 경찰, 애국단원, 노무자)를 추모하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 |
845 | 포천시 현충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94-05-02 | 이 탑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순국하신 포천 지역 출신 호국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시민의 정성을 모아 건립되었다. 1966년 건립된 기존에 있던 충혼탑은 탑신만 이 자리에 옮겨 같이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의 탑은 1994년 재건축된 것이다. |
846 | 월남 참전 기념탑(포천시) | 국가수호 | 2003-05-30 | 경기도 포천시 | 월남참전전우회 포천시지회 | 탑 | 월남참전 | 1964 | 0 | 1998-06-10 | 청성문화체육공원 내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 중령 최인환, 대위 이광용, 준위 박종서, 원사 최병욱, 하사 조보원, 병장 안승주, 상병 이강열 등의 숭고한 자유수호 뜻을 기념하기 위해 ‘포천시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월남참전유공자회 포천시 지회는 이곳 출신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8년 6월 10일 준공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포천시 젊은이들은 맹호, 백마, 청룡, 십자성 부대 대원으로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였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 |
847 | 애국지사추모탑(비)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태안군 | 반도청년회 | 탑 | 민족주의운동 | 1919 | 1983-08-05 |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음력 3월 남만주 유하현에서 조맹선·백삼규·조병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 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 이들은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지역, 만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집중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습격하고, 신의주 등지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는 1919년 9월 조직되었고 이종헌이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응징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노출되어 단원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지단장 이종헌(1977년 애족장)을 비롯해 가재창(1982년 애족장), 오몽근(1982년 애족장), 김정진(1983년 애족장), 염성환 등이 옥고를 치렀다. 태안 안면 반도청년회는 1983년 8월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추모탑을 건립하였다. | |
848 | 도평리 수복 기념탑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탑 | 6·25전쟁 | 1950 | 0 | 1954-10-15 | 포천시는 1954년 10월 포천시 이동면 도평1리 197-2에 도평리 수복 기념탑을 건립하여 북한군의 마수에서 포천지역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고 북한군을 몰아내는데 전력을 다한 육군 5군단장 최영희 장군과 그 예하 장병의 전공을 널리 선양하고자 하였다. 포천지역은 개전 초부터 1951년 3월까지 2차례 북한군이 점령했다가 1951년 3월 24일 유엔군과 우리 육군의 반격작전으로 완전히 수복하게 됐다. 1954년 10월 15일에 열린 제막식 때 ‘收復紀念塔’이란 휘호를 쓴 이승만 대통령이 행사를 주관하였고 미 9군사령관(카터비 중장)과 초대 5군단장(최영희 중장) 등이 참석하기도 했다. |
849 | 육사생도 6·25 참전 기념비 | 국가수호 | 2002-10-09 | 경기도 포천시 | 포천시 | 비석 | 6·25전쟁 | 1950 | 0 | 1979-01-01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당시 육군 사관 학교에 다니던 생도 1기[현 육군 사관 학교 10기] 312명과 2기 330명은 육사 장교 및 교관들의 지휘 아래 6월 26일 새벽 포천으로 출전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공산군 제3사단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포병의 지원도 없이 소총만으로 싸우던 이들은 이곳에서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한 전몰 생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동기생들이 모은 기금과 국비 1억 원을 지원받아 1979년 12월 1일 건립되었다. |
850 | 옥파이종일선생생가 | 독립운동 | 2003-02-18 | 충청남도 태안군 | 태안군 | 생가 | 3·1운동 | 1858 | 1996-08-11 |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서 태어났다. 신교육의 일환으로 1898년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여성들도 읽을 수 있는 순 한글 신문인 <뎨국신문>을 간행하였고 신물을 통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