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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광주독립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세기 말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의병들의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1910년 광주전남의 3.1운동, 191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1945년 조국광복이 있기까지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의 항일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함
광주백범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46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46년 여수, 순천, 보성을 거쳐 광주를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학동 전재민촌에 자신의 정치후원금품을 기증하여 전재민들의 안식처인 백화마을을 조성하였다. 이에 백범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을 오늘의 시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거점을 확보한다.
광복의사단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858년
주제 : 기타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구한말 국권회복과 일제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상주시 화북면 출신 이강년, 이용엽, 이원제, 이성범, 이용회, 이원녕, 김재갑, 홍종흠 등 8인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갈기동·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피체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성범은 상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4월 8일의 상주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운산 이용엽은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왜병을 말티재로 유인하고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고 가은 이원재는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에 헌신하였으며, 화은 이성범, 송사 이용회, 김재갑, 홍종흠은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6월씩 옥고를 겪었고, 간산 이원녕은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29년
주제 : 학생운동
지역 : 전라남도 나주시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면서부터 발생한 일본인 중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81년 10월 30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일’을 맞아 항일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긍지와 귀감으로 삼고자 나주지역 광주서중·일고동창회 등 지역민의 정성을 모아 건립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29년
주제 : 학생운동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민족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 국내외의 복합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어 194개 학교가 시위, 동맹휴학 등으로 참가하였다. 참가 학생 수는 54,000여 명으로, 이는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참여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582명이 퇴학을, 무기정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으며, 1,462명이 검거되어 악형을 받았다. 이렇듯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여 1967년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4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신축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합 전시 연출하여 2005년 1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광주시 호국유공자 공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0년
주제 : 기타
지역 : 경기도 광주시
관할지청 : 경기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호국용사들을 기리는 곳으로 광주시 호국유공자 공적비는 2009년에 건립하였다. " 임들의 공적을 기리며... 임 들이시여 참으로 고귀한 피와 땀을 흘리셨소. 조국의 평화와 겨레의 번영을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젊음을 오로지 바쳐 멍든 산하에 배달의 숭고한 얼을 심어주셨거늘 어찌 이름 석 자 새겨놓고 그 크신 공적을 기릴 수 있으리오. 온겨레 마음모아 임들의 애국 충정 거울 삼아 이 나라 굳건히 지키리이다" 라는 비석이 함께 있다
괴산 모래재의병 격전 유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충청북도 괴산군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에 위치한 괴산모래재의병격전유적비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를 주축으로 1909년 6월에 증평에서 괴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서 한봉수부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여 수 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노획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한봉수 선생은 1883년 4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를 조직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오근장 부근에서 일본 헌병대위 도기선치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일본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즈음하여 홍명희 ·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괴산군에서는 국권회복과 민족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선열의 우국충정을 길이 전하고자 1984년에 높이 3m, 너비 2.5m 규모의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괴산 3.1운동 7인 열사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북도 괴산군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열사비는 3·1운동 때 일제에 항거한 괴산 출신의 김의현 등 7분의 거룩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립되었다. 김의현(1990, 애족장)은 당시 장연면의 서당 교사로,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자인 박영래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를 목격하였다. 귀향 후 김의대(1990, 애족장) 김일곤 정해문 지민수 양신집과 함께 거사를 협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장을 몰래 준비하였다. 거사일자를 4월 1일로 결정하고 각 동리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박영래로 하여금 준비된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전달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가리 소재 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괴산군보훈공원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충청북도 괴산군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괴산군은 2012년 12월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188-5번지에 보훈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에 기존의 낡은 충혼탑과 충열탑을 새로 건립하고 여러 곳에 나누어진 6, 25참전공적비, 무공수훈자 공적비, 베트남 참전탑 등 충혼 관련 시설을 이곳에 모아 놓았다. 새 충혼탑에는 구국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1, 759위의 넋을 기려 그 이름을 새겨놓았고, 충열탑은 괴산지역 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65위의 넋을 기리며 민족정기를 되살려 후손에게 호국보훈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했다. 보훈공원은 후손에게 나라사랑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군민들에게 호국안보 성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구연영ㆍ구정서 의사 순국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6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경기도 이천시
관할지청 : 경기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구연영(具然英)은 서울 출신의 전통 유림 인사로서 1895년 10월 일본 무뢰배들에 의해 왕후 민씨가 참살당한 데 이어 12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해인 1896년 1월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구연영은 경기도 양근(楊根)·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300명을 모병하고, 안성의 의병장 민승천(閔承天)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1896년 1월 18일 경기도 이천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1896년 2월 12일 새벽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온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에 맞서 이현(梨峴)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이 열세한 데다 눈보라까지 몰아쳐 의병 부대는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이현 전투에서 패전한 잔여 병사들과 여주 의병부대는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였다. 2월 25일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의 주둔 병으로 산성을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용전하였으나 박준영이 관군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어 함락 당하였다. 구연영은 다시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안동·의성·청송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이듬해 5월 26일 비봉산(飛鳳山) 일대에서 관군과 접전한 뒤 부하 30여 명과 경기도로 돌아왔다. 그 뒤 구연영은 동족상잔을 피할 수 없는 의병전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상동 교회의 전덕기(全德基)·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구국 교육에도 종사하였으며, 1900년에는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하며 구국 종교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각처에서 성토회를 열고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정서(禎書)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구성서는 서울에서 태어나 동대문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보안회ㆍ자강회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00년에는 아버지가 조직한 구국회 청년부를 맡아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국채 보상 운동을 벌였다.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여주(驪州)와 원주(原州)에서 아버지 구연영과 함께 의병항쟁을 하다 1907년 일진회원의 밀고로 아버지와 함께 붙잡혀 사형당했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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