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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강릉지구 포병전공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관할지청 : 강원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에 6·25전쟁 당시 강릉지구에서 치러진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91년 12월 11일 명주군수 등 각계의 후원으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사천초등학교 일대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월 26일 38선 인근에 강릉 8사단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6월 27일에는 현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강릉 8사단 제18대대는 105밀리 포 5문을 사천면 노동하리 지역에 배치하였다. 석교2리 뒷산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당시 장경석 대대장을 중심으로 사력을 다하여 주문진 북방을 향해 지원 사격을 가하였으나 아군은 주문진 이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18대대 장병들은 다시 105밀리 포를 사천초등학교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가래골 뒷산의 관측소와 연곡천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되어 사력을 다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8대대는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덕실리 앞에서 맹렬한 지원 사격을 계속 가하였다. 그러는 동안 북한군은 육지를 포기하고 경포, 강문 쪽으로 돌아 상륙하여 삽시간에 사천 쪽으로 밀어닥쳤다. 국군은 계속 패하는 상황에서 바다 쪽을 헤아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사천면 이남으로 넘어왔으니 18대대 장병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18대대 장병들은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올라가 육박전을 하였으나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전멸되다시피 패배를 당하였으니 여기저기 나뒹굴어 피아간의 시체가 말할 수 없이 많아 동리 주민들은 며칠 동안 시체를 점검하고 팻말을 부착하고 매장하였으나 당시 수백 구의 시체 중에서 몇 구의 시체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18대대에는 월남한 장병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팻말도 없이 무명용사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천의 유지들이 회의를 열고 사천초등학교 뒷동산 임간 교실 위쪽에 이름 모를 국군의 시신 3구가 묻혔던 자리에 '용사의 묘'를 기념하도록 하고 당시 전쟁사에 기록해 줄 것을 전사편찬위원회에 특별히 청하였다. '자라는 어린 새싹들에게 멸공 교육의 귀감(표본)이 되게 하자.'는 의미에서 당시 뜻있는 인사들의 주선으로 무명용사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추모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격전지의 무명용사 묘이다. 때마침 사천초등학교가 전국 새마을 시범학교로 알려져서 전국의 교장시찰단에게 공개되자 무명용사의 묘는 이곳을 찾는 교육 관계자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다. 그 뒤 18대대 전우회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이곳을 찾아서 다시 복원하여 비문을 건립하고 과거를 되살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장렬하게 싸우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무명용사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들이 바로 중사 최서종과 하사 한명화, 일병 심우택이다. 중사 최서종은 지휘통신 선임하사로 적진으로 유선 철수 중 전사하였다. 하사 한명화는 관측하사로 미노리 능선에서 관측 임무 수행 중 전사하였다. 일병 심우택은 운전병으로 백병전 상황에서 포차로 진지 이탈 중 전사하였다. 무명이었던 3용사의 이름이 밝혀지고 '사천삼용사비'로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민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가 새로이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1991년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로 건립되었다.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주민들이 처음 ‘사천삼용사비’(건립일자 미상)이 세워졌다가. 1980년 6월 6일 다시 비석을 세우고, 1981년에는 포병 18대대가 복원하였다. 그후 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가 1990년 설치되고 부지 및 기금을 바탕으로 1991년 12월 11일 준공되었다.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95년
주제 : 기타
지역 : 강원도 춘천시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강원도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강진 3.1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강진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황호경(黃鎬京) 등의 사전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진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6년 5월 9일 이 비를 세웠다.
강문호목사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강문호는 제주도 남제주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1919년 3월 31일 군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3월 5일의 군산 만세시위 때 체포된 30여명의 영명학교 교사·학생들이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재판을 받는 날로¸ 영명학교 4학년인 그는 이날 그들의 재판과정을 보기 위하여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30여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찰나¸ 그는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과 학우들이 묶여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방청객들이 이에 호응하여 재판정은 별안간 만세 현장으로 변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고등법원에서 소위 법정 소란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교회 목사로서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항상 일본 경찰 헌병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는 등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제주의 한림교회에서는 강문호목사의 독립운동을 기리고자 1991년 강문호목사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강원경찰 충혼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춘천시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지방경찰청은 2000년 1월 1일 춘천시 서면 신매리 68-4(소양강 호수변)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6·25때 전사하거나 치안유지를 위해 순직한 강원 경찰 673위(전사 525위, 순직 142위)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길이 보전하며 강원경찰의 자긍심과 화합단결을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원래 1958년 10월 27일 춘천시 봉의동 산 15번지 강원도청 뒤에 충혼탑을 건립하고 전사경찰관 550위를 봉안하였으나 1967년 5월 철거됨에 따라 춘천시 서면에 새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강재구 공원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65년
주제 : 기타
지역 : 강원도 홍천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고자 1만여 평의 대지를 기증받아 육사 16기 동기회 등 여러 기관이 1986년 11월 30일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에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부하 사병이 실수하여 수류탄이 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속했던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는 '재구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그를 높이 기리어 동상이 세워지고, 그가 산화한 자리에는 추모탑을 세웠고, 1978년 강원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산181에 '강재구공원'이라는 공원을 만들었다. 이 공원은 서울 대경목재 김경황씨가 대지 1만여 평을 희사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강재구 소령이 산화한 이 성지에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추모탑 및 기념관을 세우고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살신성인의 정신을 본받는 국민정신의 도장으로 길이 보존하고 있다.
강화 참전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2010년
주제 : 기타
지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인천광역시는 2010년 5월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218-4에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6·25전쟁 및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희생한 6·25참전유공자회 강화군지회와 월남참전유공전우회 강화군지회 회원, 그리고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군번 없는 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강화지역 3개 소년대원 회원(강화 향토방위특공대, 6·25참전국가유공자 강화청소년 유격동지회, 6·25참전유공자 강화청소년유격대 기념사업회)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전후세대들의 투철한 나라사랑정신 함양과 지역안보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강화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강경 항일독립만세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관할지청 : 대전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 기념비는 강경에서의 1, 2차 독립운동의 시발점인 옥녀봉 산정에 강경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5년 10월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강경읍의 장날 하오 3시경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 등이 주동하여 500여 명의 군중들이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 행진하였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 정통을 지나 시장을 일주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왜경은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주동인물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3월 20일 오후 5시경에도 옥녀봉에서 이근석, 이봉세 등이 1, 0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강경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화군 현충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화군에서는 1950년 10월 30일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산20에 6·25전쟁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강화 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들을 추모하고자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현충탑이 노후화되자 1994년 6월 현 위치에 현충탑을 재건립하고 강화군 출신 전몰군경 1,033위(국군 735위, 특공대18위, 경찰관36위, 유격군 224위)를 새겨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강화 유격용사 위령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0년 10월 30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1951년 1·4후퇴 당시 강화를 사수하기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연백군, 경기도 개풍군, 개성에서 강화도로 피난 온 애국청년 1,240명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북한군 과감히 싸웠다. 이후 육군 제5816부대 직속 유격대로 편성되어 적의 대병력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강화도 사수는 물론 해안침투상륙작전, 배후습격, 공수특전침투, 첩보활동, 유엔군 조종사 및 양민구출, 북한군과 중공군 3개 군단 견제, 개성까지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들 유격대 용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산화한 516명 유격용사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이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강화유격대 창설지에 1981년 6월 25일, 5816유격추진위원회에서 ‘반공유격용사위령탑’을 건립하였으며, 2008년 7월 31일 ‘강화유격용사위령탑’으로 재건립하였다. 탑머리는 평화와 자유수호, 좌측날개는 용사의 참혼, 우측날개는 조국의 안위, 탑 받침은 숭고한 용사의 넋을 대해로 펼침을 상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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