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국가보훈부

전체 현충시설

홈   >   현충시설 둘러보기   >    전체 현충시설

기미 3.1독립만세 기념비

  • 시설명

    기미 3.1독립만세 기념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3·1운동

  • 소재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덕적남로 15(덕적초중고등학교) 근처 (덕적 기미 3·1독립만세 기념공원 내)

  • 관할지청

    인천보훈지청

  • 관리자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사무소

  • 사건연도

    1919년

  • 시설규모

    소규모

  • 시설건립일

    1979-04-09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1919년 전국으로 퍼진 3.1독립만세운동은 옹진군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옹진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을 전개한 곳은 덕적도였다. 당시 김포군 덕적도에서 사립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林容雨)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月串)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수배되어 덕적도로 들어와 있었다. 임용우 선생은 명덕학교 제자인 한․일학교 선생 이재관(李載寬), 차경창(車敬昌)등과 함께 덕적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섬이라는 특성상 김포처럼 군중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장날’같은 계기가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임용우가 제시한 방법은 ‘학교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임용우선생과 이재관과 차경창은 덕적도 각 지역을 돌며 4월 9일 ‘운동회’ 개최를 알렸다. 운동회 장소는 진1리 해변 운동장이었으며, 당일 섬 유지들과 많은 학생 및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오전 중에 운동회와 관련된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이 진행되었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운동회는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임용우의 독립 연설과 이재관의 격문 낭독 그리고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참가자 수는 명덕학교, 합일학교의 재학생과 교사, 덕적도 주민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 및 주민들은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진리에서는 뒷산에서 봉화를 피우며 만세를 불렀고 서포리는 국사봉에서, 북리는 주요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진행된 덕적도의 독립만세운동은 밤 9시 이후에야 각 마을에서 끝났다. 임용우 선생은 이 날 3.1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임용우의 정확한 체포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덕적도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4월 9일에서 4~5일 지난 다음으로 보인다.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이미 임용우 선생은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철사줄에 묶여 있는 등 잔혹하게 보복을 당했다. 이어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더욱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임용우 선생이 체포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임용우 선생과 함께 덕적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수업 중에,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동응과 장기선, 남준기 등이 체포되어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각각 8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렇지만 임용우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5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덕적면민들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1979년 4월 9일, 3 ·1 독립만세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덕적면민 일동이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136번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덕적도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임용우와 이재관, 차경창 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