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1990년에 주민들의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하여 2006년에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백범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을 준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