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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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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사 동상

  • 시설명

    이재명의사 동상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동상

  • 주제분류

    한말구국운동

  • 소재지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356

  • 관할지청

    전북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진안이씨 화수회 이수원 감사

  • 사건연도

    1890년

  • 시설규모

    -

  • 시설건립일

    2001-01-01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美國勞動移民會社)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숙청을 결의하자 그는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등박문이 동행한다는 사실에 접하고 평양역(平壤驛)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정거장 부근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등박문이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이등박문을 처단코자 동지 김병록(金丙綠)과 함께 서울과 원산(元山)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 괴수들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慶興學校)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의 처단은 그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이 담당하고, 김정익(金貞益)과 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7일에는 최종적으로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는데,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여, 조창호와 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을, 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후 12월 12일 상경하여 거사 준비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경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그의 정의로운 행동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은 인력거 아래로 떨어졌고, 그는 재빨리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그의 거사로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이 달려들자 이들과 격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일경들의 칼에 하체가 상하게 되어 붙잡혔다. 그런데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히도 잔명을 보존하여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의 의연함은 왜적의 재판장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그것은 1910년 봄 공판장에서 내외의 많은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그를 처단하였음을 역설하고, 일본인 재판장의 공모 여부에 대한 심문에 이천만 조선 동포가 모두 매국노를 죽이는데 가담한 것이라고 답한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변호사인 안병찬(安秉瓚)의 성의있는 변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그는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