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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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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기념비

  • 시설명

    동의 기념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전북특별잧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193

  • 관할지청

    전북서부보훈지청

  • 관리자

    정읍시 산외면

  • 사건연도

    1905년

  • 시설규모

    2m X 0.9m

  • 시설건립일

    1928-01-01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본관은 평택(平澤)으로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신이다.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義兵將)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招募), 군량(軍糧)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洪州)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官 )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陣容)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監禁)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 일제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不服)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됨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巨文島)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음력)에 유배지에서 사망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