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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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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사

  • 시설명

    도동사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사당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168-3

  • 관할지청

    전북서부보훈지청

  • 관리자

    고광헌

  • 사건연도

    1928년

  • 시설규모

    강당, 정문, 중문, 강학비, 읮의적비

  • 시설건립일

    1928-06-01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 있는 최익현, 고석진, 고예진, 고용진을 기리는 일제 강점기 사당으로 도동사는 원래 고석진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가 있던 곳인데, 1928년 6월에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사우를 지어 최익현과 독립의군부 참모장을 지낸 고석진, 의병장 고예진, 고용진 등 4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하고 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14세 때에 이항로의 문인이 되어,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 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 갑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 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통상 확대와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최익현은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단식을 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가 4개월 만에 사망했다. 고석진은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스승인 최익현의 단식결사 소식을 듣고 장귀동에 달려가 지사를 규합하여 창의 토적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다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종의 밀칙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참모총장으로 활약하였고, 1919년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인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하여 제2인으로 서명하였다. 광복 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6년에 최익현이 창의할 때 족형인 고석진과 함께 의거에 참여해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고, 많은 무기와 군량을 모아서 옥천으로 운송하였다. 1914년 독립의군부 서기관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항일운동에 진력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용진은 그의 형 고석진과 아우 고예진과 함께 최익현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1913년 9월 독립의군부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그 후 1919년 4월에는 파리장서운동에도 참여하여 호남지방 유림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