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방극용·형갑수 등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과 헌병이 무차별 발포하여 방진형(房鎭馨, 미상~1919), 방양규(房亮圭, 1879~1919), 방명숙(房明淑, 미상~1919), 김홍록(金洪祿, 1895~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황찬서(黃贊西, 1873~1919), 정한익(丁漢翼, 1890~1977) 등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해근(金海根, 1860~1946), 박정석(朴正錫, 1897~1933), 유창근(柳昌根, 1874~1938),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형기(李炯器, 1884~1936) 등 20여명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와 남원지역 청년회의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4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