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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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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죽헌 이교재 순국 기적비

  • 시설명

    열사 죽헌 이교재 순국 기적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민족주의운동

  • 소재지

    진전면 임곡리 산 153

  • 관할지청

    경남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이상화

  • 사건연도

    1887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2002-05-04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이교재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교재는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돌리다가 진주에서 체포되었는데,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만기 출옥한 이교재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과 국내 연락책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통영의 김종원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3년 9월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3년간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국내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되돌아가려다 신의주 국경에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이교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에서 갈톱회를 조직해 고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주었다. 1931년 이교재는 국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되돌아갔다. 같은 해 11월 20일 상주대표 직위를 위임받아 경상남북도에 퍼져 있는 애국지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연락책 역할과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는 일, 독립자금을 모집하였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한 이교재는 진주·대구 등지를 돌아다니며 은밀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마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일제는 그를 강제 출소시켰다. 석방된 지 10여 일 만인 1933년 2월 14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