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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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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영당(기념관)

  • 시설명

    단재영당(기념관)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기념관

  • 주제분류

    문화운동

  •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304

  • 관할지청

    충북남부보훈지청

  • 관리자

    청주시

  • 사건연도

    1880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2002-01-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단재영당은 일제 강점기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 그의 묘소 앞에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며2003년 서거 67주기를 맞이하여 단재기념관이 사당의 부속 건물로서 개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