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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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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렬사(이상설 기념관)

  • 시설명

    숭렬사(이상설 기념관)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사당

  • 주제분류

    한말구국운동

  •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 관할지청

    충북남부보훈지청

  • 관리자

    진천군

  • 사건연도

    1870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1996-01-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이상설은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 성균관 교수 탁지부재무관을 지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6년 러시아령 연추에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허위로 칭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상설은 1909년 4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성명회 사건으로 추방되었다 다시 돌아와 권업회를 창립하고 그 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당의 본부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나, 건강악화로 인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낯선 타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