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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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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한용운선생동상

  • 시설명

    만해한용운선생동상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동상

  • 주제분류

    기타

  • 소재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장리 산43-1

  • 관할지청

    충남서부보훈지청

  • 관리자

    홍성군(문화관광과)

  • 사건연도

    1887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1985-12-02

관련 사진

시설 내용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히고, 14세에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16세 되던 1894년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나는 등 세상이 요동치자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그러던 중 한때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불교 경전 공부와 한문으로 된 불경을 번역사업에 주력하였으며,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만주지방 여러 곳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였으며,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시인으로서도 유명한 한용운은 1926년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직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발간하며 불교개혁에 노력하였다. 1938년 그가 이끌던 불교계 비밀단체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나 고초를 겪었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동상은 만해 한용운의 훈업을 민족정신의 지표로 삼고 이 고장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홍주혼의 구심점 강화에 그 건립의 목적으로 삼고자 1985년 12월 2일 남산마루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은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에 왼손에는 독립선언문을 들고 오른손을 높이 치켜 올린 40대 당시의 서있는 모양의 동상으로, 동상의 글은 동상건립추진위원장 최창규가 짓고 글씨는 한국미술협회 고문 정한섭이 썼으며 조각은 이대교수 강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