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홈   >   현충시설 둘러보기   >    독립운동 현충시설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시설명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3·1운동

  • 소재지

    충남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산73-2 (구미산)

  • 관할지청

    충남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천안시 사적관리소

  • 사건연도

    1919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1947-11-26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홍일선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와 이순구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그리고 숙부 유중무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쳤다. 일경 5명이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였다. 사상자들의 친지는 시신을 헌병 주재소를 옮기고 항의를 하였고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경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