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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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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동상

  • 시설명

    백범 김구선생 동상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동상

  • 주제분류

    해외운동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100-115(남산공원 백범광장 내)

  • 관할지청

    서울지방보훈청

  • 관리자

    서울특별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

  • 사건연도

    1876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1969-09-23

관련 사진

시설 내용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출신으로 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왕후 민씨를 참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하였으마,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동상은 1969년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 그의 의로움을 본받으려는 뜻에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