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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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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사

  • 시설명

    충절사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사당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162

  • 관할지청

    강원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영월군(문화관광과)

  • 사건연도

    1864년

  • 시설규모

    사당 1동

  • 시설건립일

    2001-05-02

관련 사진

시설 내용
김상태는 충북 영춘 남청(永春 南川 혹은 東面) 출신으로 1차·2차 의병전쟁에 모두 참여하였다. 1차 의병전쟁 때, 김상태는 1896년 이강년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그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호좌수(湖左帥)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酒泉)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짐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다.이와 같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그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삼년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여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주장(主將)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1984년에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거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에 이장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