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전시체제가 한참 강화되어 가던 1941년 2월 15일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이던 김성권(金聖權)·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문홍의(文洪義) 등이 당시 대구부 대봉정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고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사까지 포섭하여 활동하였다. 다혁당 관련자들은 1941년 7월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두안(姜斗安, 1922~1944, 옥사), 고인옥(高麟玉, 1921~), 권쾌복(權快福, 1921~), 김근배(金根培, 1921~미상), 김성식(金聖植, 1922~), 김영복(金榮宓, 1919~), 김효식(金孝植, 1920~), 문덕길(文德吉, 1921~), 문홍의(文洪義, 1921~), 박우전(朴祐雋, 1920~), 박제민(朴濟民, 1919~), 박찬웅(朴贊雄, 1919~1943, 옥사), 박효준(朴孝濬, 1924~), 배학보(裵鶴甫, 1920~), 서진구(徐鎭九, 1921~1944, 옥사), 안진강(安津江, 1922~), 양명복(梁命福, 1921~), 오용수(吳龍洙, 1922~미상), 유흥수(柳興洙, 1922~), 윤덕배(尹德裵, 1921~), 윤영석(尹永碩, 1922~), 이도혁(李道赫, 1922~), 이동우(李東雨, 1922~), 이무영(李茂榮, 1921~), 이원호(李元鎬, 1923~), 이종악(李鍾岳, 1923~), 이주호(李柱鎬, 1921~), 이태길(李泰吉, 1920~ ), 이홍빈(李洪彬, 1923~), 임병찬(林炳讚, 1922~), 장세파(張世播, 1919~1945),
조강제(趙崗濟, 1923~1950), 최낙철(崔洛哲, 1921), 최대석(崔大碩, 1923~), 최영백(崔榮百,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