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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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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목사 기념비

  • 시설명

    김인전목사 기념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해외운동

  •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220 (다가동3가) 전주서문교회 내

  • 관할지청

    전북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전주서문교회(이승규)

  • 사건연도

    1876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1986-04-29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을미사변 등 국내정세가 혼란하던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에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주력하다가 1910년을 전후로 일제의 침략이 완전히 표면화되면서부터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보다도 많은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議政院) 재무예산위원(財務豫算委員)으로 피선되자 임시의정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즉 의정원에서는 인구세(人口稅)의 징수, 국내외에서의 독립공채 발행, 구국(救國) 활동을 위한 재정단(財政團)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으나 예산과 결산만큼은 행정부에 전담하였다.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政務調査特別委員)이 되어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의 대외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해 지구력과 규율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의 개최와 군인학과의 개설, 사업부의 설치, 국민의용병 등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의 실시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한 지역 선정, 외국의 사관학교에 무관학생(武官學生)을 파견하고 군사선전대를 마련하는 등 직접적 전쟁에 대비키 위한 전열을 가다듬는 등 안건을 내세워 실천토록 하였다. 이렇듯 의정원의 안건설정, 임시정부의 시정방침 등 활발한 활동으로 1920년 4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 의정원을 이끌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 연구회가 협의하여 국내외 각 방면에서의 활동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한(南韓) 지역의 기독교와의 연락책임자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본구 의원에 당선되어 한진교(韓鎭敎) 서병호(徐丙浩)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교민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臨時公債管理局長)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한 중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학무총장(學務總長) 대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하였으며,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連署)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제4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들의 단합을 위하여 안창호 김덕진(金德鎭) 최 일(崔日)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원이 되었으며, 9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교육과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김 구 조상섭(趙尙燮) 이유필(李裕弼) 여운형(呂運亨) 등과 한국노병회(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그는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10월 해산할 때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던 그는 1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다. (1993년 유해봉환, 서울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