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홈   >   현충시설 둘러보기   >    독립운동 현충시설

면암최익현선생동상

  • 시설명

    면암최익현선생동상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동상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1(나분동길 12 모덕사 내)

  • 관할지청

    충남서부보훈지청

  • 관리자

    모덕사관리사무소

  • 사건연도

    1833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1973-01-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최익현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14세 때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고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당대의 권력가인 대원군의 주요 정책인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의 혁파, 당백전의 폐지, 사대문 문세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해 대원군 일파의 비난을 받았으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 궐리사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900명에 이르렀으나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 진위대의 포위 공격을 받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쓰시마 섬[대마도]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에 감금되었는데 그곳에서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동상은 지난 1973년 12월 선생의 충의를 기리고 애국사상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민의 십시일반 모금해 현 위치에 건립됐으나 이 동상은 지난달 선생의 위패를 모신 목면 송암리 ‘모덕사’로 옮기고, 기존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동상을 제작해 다시 세웠다. 새 동상은 높이 7.2m의 청동상으로 동상의 좌대는 칠갑산을 상징하는 7각형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