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 선생은 제주양씨 학포 양팽손의 12세손 이며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길중이요 호는 지강 으로 7살 때 천자문을 익히고,
8살에 양사재에서 유학을 배웠으며, 18살에 불교,선교,
천도교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1894년에 능주의 세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산적한 문서들을
신속히 정리하여 지역의 주민들에게 크게 봉사하였다.
1898년(3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운동을 추진하다
손병희 선생을 만나동학에 입교하였다.
헤이그열사 이준 등과 함께 공진회를 결성하여 친일 조직인
일진회에 맞섰다. 1909년 이완용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뤘으며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 모여 손병희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경에 채포되어 1919년 5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순국 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