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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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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기념관

  • 시설명

    심산 기념관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기념관

  • 주제분류

    민족주의운동

  •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심산로 99 (성주군청 옆)

  • 관할지청

    대구지방보훈청

  • 관리자

    성주군수

  • 사건연도

    1879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1974-08-15

관련 사진

시설 내용
김창숙은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를 올려,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그는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나석주 의거를 주도하였고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 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 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