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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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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의사 기념관

  • 시설명

    박열의사 기념관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기념관

  • 주제분류

    의열투쟁

  • 소재지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일원

  • 관할지청

    경북북부보훈지청

  • 관리자

    (사)박열의사기념사업회

  • 사건연도

    0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2012-10-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박열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받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나아가 귀향하여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살포하며 문경의 3·1운동을 촉발하여 민족독립의 의지와 열기를 분출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하며 과학적이며 선진적인 반제이론을 수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나 반제 항일투쟁의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식민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의열투쟁노선을 천명하면서 1922년 말 직접행동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중운동』·『후데이센징』·『현사회』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서울·도쿄의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펴면서 민중의 권익신장에도 힘썼다. 1923년에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계기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며 폭탄 반입 및 제조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대진재의 발생을 기화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때 박열과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어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일제는 박열과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가 무기로 감형했다.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박열의사 기념관은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투철한 애국정신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조명하고, 후손들이 이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2003년부터 추진하여 2012년 10월 9일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