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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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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선생 생가

  • 시설명

    김창숙선생 생가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생가

  • 주제분류

    문화운동

  •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04

  • 관할지청

    대구지방보훈청

  • 관리자

    김위

  • 사건연도

    1919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1901-01-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한말 유림으로서 1919년 유림단 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창숙 선생의 집이다. 김창숙의 호는 심산(心山), 본관은 의성으로 선조 때 명신학자인 동강 김우옹선생의 주손으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스승 한계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목을 밸 것을 상소하는 ‘오적매국성토상소사건’과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장서’를 작성하여 발송한 ‘파리장서사건(제 1차 유림단사건)’으로 가진 옥고를 당하였다. 1906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국단연동맹 성주대표로 활동하며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으나 일제의 방해가 계속되자 이후 1909년 사립학교인 성명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습니다. 1910년에는 향리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 시대에 통하는 선비를 길러야 한다는 애국계몽의 일념으로 청천서당에 성명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 선생은 전국의 유림대표들이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상해에서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내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임시정부와 만주 등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활동을 지속한 김창숙선생은 급기야 병을 얻어 상해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일제의 밀정에 걸려 국내에 체포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구 감옥에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하반신이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결성된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활동하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평생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