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홈   >   현충시설 둘러보기   >    독립운동 현충시설

김산의진 창의지

  • 시설명

    김산의진 창의지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장소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437번지

  • 관할지청

    대구지방보훈청

  • 관리자

    강희돈

  • 사건연도

    1896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1634-01-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여중룡(呂中龍)의 호는 남은(南隱). 경상북도 금릉군 구성면 김천 출신이다. 1895년 10월 일본인들의 민왕후 참살에 이은 단발령 공표에 반발하여 1896년 1월 22일 김산 유생 여영소·여중룡 등은 금릉향교에 모여 통문을 띄우고, 향회를 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 무렵 의병을 일으키다 실패한 상주지역 이기찬·조동석등과 선산의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통문을 보고, 김산으로 모여들었다. 허위(許蔿)는 경북 선산의 유가명문(儒家名門)에서 태어나 7세 때 시를 지을 줄 알고 16세 때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한 명망 높은 유학자였다. 이리하여 김산·지례·상주·선산 등지의 유생들은 1896년 음력 2월 11일(양 3. 24) 금릉향교에서 상주 유생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산의진을 일으켰다. 김산의진은 「김산창의대장」이라고 쓴 큰 대장기를 세우고 2월 12일(양 3. 25) 대구부로 진격하기 위해 출발하여 김천에서 유숙하고, 2월 13일 저녁 지례에 도착하였다. 2월 14일 김산의진은 군량과 군병을 모집하였는데, 지례현감은 관포군을 의병진에 붙여주었고, 의병지원자가 늘어 진영이 차츰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구에서 파송된 경상감영의 관군 수백 명이 김천에 도착하고, 고종 황제가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종용을 받아 3월 29일 김산의진은 해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후 1905년 7월 24일 여중룡은 이병구(李秉九)·지우룡(池禹龍)과 일본공사관을 폭파하려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행, 혹독한 고문으로 중상을 입었으며,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6년 5월 다시 허위ㆍ이강년(李康秊)·우용택(禹龍澤)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의병대장 최익현(崔益鉉)과 힘을 모아 서울에 입성한 뒤 통감부를 격파할 것을 맹세하고 8월 2일에 김산군 병기창고에서 포 80발을 걷어서 의병 180명을 무장시키고 군비 200원을 준비해 가던 중, 옥중에서 얻은 병과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허위는 1907년 다시 이인영(李麟永) 등과 원주(原州)에서 전국 의병 대연합 부대를 조직하여 서울을 향했고, 허위는 정병 3백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에 이르렀으나 후진(後陣)이 일군에게 진로를 차단당해 포위되어 싸우다가 포로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기찬은 1896년 3월 29일 패퇴했던 김산의병들 중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여 명을 다시 집결시켜 상주와 김찬의 동지들과 함께 직지사에서 4월 11일 다시 대장으로 추대되어 군문도총(軍門都總) 조동석, 참모장 허위, 서기 여영소와 이시좌, 중군장 양제안, 선봉장 윤홍채 등으로 의병 부대를 재정비하고는 진천·영동·황간·문경으로 진출했고, 김천·대구로 출동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 일본군에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