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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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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사

  • 시설명

    모충사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사당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125-1번지

  • 관할지청

    전남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모충사독립유공자추모보존위원회

  • 사건연도

    1991년

  • 시설규모

    목조와가 3동

  • 시설건립일

    1991-12-30

관련 사진

시설 내용
모충사에는 항일 의병의 거목인 최익현을 비롯한 호남지역 출신 애국지사 백홍인(‘90년 애족장)과 박태환(’91년 애국장), 창의사인 위계룡과 백형칠 등 독립운동가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최익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상소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백홍인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운을 걱정하여 의병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면암 의진에 들어가 적군과 약간의 교전을 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2천만 동포가 왜놈들의 밥이 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고 하며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위계룡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최익현선생의 소명에 응하여 호남창의에 좌중군장으로 참여하였다. 박태환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9년 3월 8일 전남지방의 의병장 박민홍의 우익장으로 총기로 무장한 40∼5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전남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왜적과 교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백형칠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백홍인 등과 함께 결사구국 할 것을 혈맹하고, 경고서사(敬告書社)를 호남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1908년 백홍인 등 여러 장수들과 보성, 장흥 등지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군자금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 순절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19년 3.1운동시 귀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려 하였으나 귀향 즉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투옥되어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망극의 한을 품은 채 1937년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