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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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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단비

  • 시설명

    삼충단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한말구국운동

  • 소재지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488-1(현등사 입구)

  • 관할지청

    경기북부보훈지청

  • 관리자

    가평군

  • 사건연도

    1905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1989-01-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삼충단비는 을사조약 때 자결 순국한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충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조병세는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889년 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사직하고 가평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 5적신의 처형을 왕에게 간청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였다. 심상훈·민영환 등과 함께 여러 날 궁궐에 머물며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 왜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해산되었다. 그러자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글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민영환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 등을 지냈다. 조선 최초의 신식해군인 해방영을 설치하였고 1886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형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자결하였다. 최익현은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하여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오불가의 상소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단식의 후유증으로 3개월 뒤의 발병으로 7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