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7년 2월까지 1300만원의 국채가 쌓였고, 이 돈은 한국정부가 재정적으로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문제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했다.
김광제, 서상돈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참여하여 의연금을 냈다.
이후 국채보상금 처리회의 회장 유길준은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의연금으로 장차 교육 사업을 하기로 결의하고 한강변의 농토를 사들이던 중 1910년 8월 29일 한, 일 합방의 국치를 맞았고, 모집한 의연금은 그 후 한국 국민들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다.
기념비는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세상에 공포하기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장소인 옛“북후정”정자 터에 이날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여 1997년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