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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독립운동 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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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전적 의혼 추모비

  • 시설명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

  • 주제

    독립운동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의병운동

  • 소재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146 추모비공원내

  • 관할지청

    전북동부보훈지청

  • 관리자

    임실군 성수면

  • 사건연도

    1908년

  • 시설규모

    0

  • 시설건립일

    2005-10-19

관련 사진

안내판 사진

시설 내용
이석용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1897년 8월 그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으로 이거한 후 경향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다. 특히, 그는 면암과 연재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제가 한일합병 후 통감부를 설치하자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이른바 12의사가 체포된 이후에는 그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7년 8월 하순 그는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의병에 나설 것임을 부모에 알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창의동맹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는데 당시 마이산 용암에는 1천여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석용은 의병 조직을 결성하고 진안읍 공격하여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하였으며, 일본어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으며, 군율을 엄히 하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한 후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석용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의령단 설치운동을 통해 점차 무력감에서 벗어난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그는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사형이 언도되자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3일 그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는 이석용 의병장 과 휘하의 28의사를 추모. 1908년 3월 22일  최대의 격전지인 임실운현전투에서 17명의 의병들이 순국하였고 그들을 기려 그 장소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