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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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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령 김영남 전적비

  • 시설명

    육군소령 김영남 전적비

  • 주제

    국가수호

  • 종류

    비석

  • 주제분류

    6·25전쟁

  • 소재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855 한국자유총연맹 완도군지부앞

  • 관할지청

    광주지방보훈청

  • 관리자

    완도군

  • 사건연도

    1950년

  • 시설규모

  • 시설건립일

    1961-06-01

관련 사진

시설 내용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에 6·25전쟁 중 경북 예천에서 전사한 김영남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1·20학병동지회에서 1961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김영남 소령은(출생지 및 생년월일 미상) 1949년 3월 29일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직할부대(헌병사령부)에서 복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용전분투하였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그리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마저 제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독립기갑연대 제1대대(장갑차)도 제1, 6, 7, 8사단에 배속되었다. 또한 서울 특별연대를 제1사단에, 전투경찰 1개 대대가 배속된 육사생도대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는 한편,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는 제1, 6, 7사단에, 제2교도대대는 제7사단에 배속하였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지역에 배치하였다. 국군은 철수와 방어 그리고 다시 철수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만 수행하다가 일시 공격으로 전환하여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역습을 받아 의정부 방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렀다.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선에서 강력한 방어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꺾었다. 김영남 소령은 1950년 7월 29일, 경북 예천에서 공격해 내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부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용전분투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