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선택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울산
부산
세종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닫기
닫기
현충시설 소개
현충시설 소개
국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국외 참전시설
국외 참전시설 둘러보기
현충시설 함께하기
현충시설 활용 우수사례
관리실태 신고
사이버 추모관
OPEN API
전체 현충시설
홈 > 국내 현충시설 > 전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MAP
HOME
TOP
BOTTOM
시설 전체
공원
기념관
기타
동상
비석
사당
사적지
생가
장소
조형물
탑
주제 전체
3·1운동
6·25전쟁
6·25전쟁 및 월남전쟁
기타
문화운동
민족주의운동
사회운동
애국계몽운동
월남전쟁
월남참전
의병운동
의열투쟁
학생운동
한말구국운동
해외운동
지역 전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세종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지자체 전체
VR 영상
유
무
안내판
유
무
제목
내용
검색 결과
총 2316건
Excel
전체 개수 : 2316
순국의사 장진홍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5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895년 6월 6일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태어난 장진홍 의사는 일찍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국내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만주에서는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고, 3.1운동 이후에는 전국을 돌며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여 이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관공서, 은행 등 공공기관을 폭파하여 일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했으며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중의원과 경시청 폭파를 준비하다가 경찰에게 체포, 대구로 압송 되었다.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일제에 죽느니 내 손으로 죽겠다 향년 35세에 옥중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순창 조공기보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남도 나주시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조기보는 나주 세지면 내정리에서 삼대독자로 출생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기보는 뜻있는 주민 몇 명과 함께 항일의병 항쟁을 전개했다. 그는 "차리리 싸워 죽을지언정 어찌 적국을 섬길 수 있느냐"며 8살의 어린 아들을 남기고 의열투쟁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에는 내정마을 야산에 몸을 숨긴 뒤 산발적인 게릴라 전략으로 일본 헌병을 교란했으며, 이후 함평출신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장흥, 영암, 나주, 강진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강진 오치동과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도 등에서 일본군와 맞서 싸웠다. 또 영산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하여 일본 장교와 기병 10여 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는 전과를 세웠다. 1908년 음력 8월 1일. 지금의 영암 반치산에서 일본군 40명과 싸워 20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지만 그도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순국하였다. 조기보 선생의 나라사랑의 마음과 그에 대한 기억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지면 내정리에 조기보 선생의 추모비를 세웠다.
순천시 현충정원
시설 : 조형물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해 산화한 호국 영령의 숭고한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9.5.월에 건립하였으며 탑 건립시 그동안 따로 봉안해왔던 죽도봉 반공순국 위령탑 144위와, 경찰관 충혼비의 321위, 향림사 충혼비의 128위를 합하여 593위를 봉안 하였다. 1995년 1월 1일 통합 순천시의 출범에 따라 같은해 5월 24일 승주 충혼탑의 1,237위를 옮겨와 총 1,830위를 합동으로 봉안하였다.
순국선열전주이공학순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기타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학순선생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은사금을 보내어 오자 이를 끝까지 거절하고 자결 순국 이내수선생은 이학순선생의 자녀로 군자금 모집 활동,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로 참여, 대동단의 유림 대표 및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 등
순국전우 추도 기념비(신도리)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서귀포 신도리에 1956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순국전우 추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리 주민들은 금화지구, 강원도 고성지구, 홍천지구 가리산 등의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이 곳 출신 이종식, 백대석, 정윤석 등 3인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1956년 2월 6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도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순국학도 현충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북도 전주시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0년 6.25전쟁 당시 학생신분으로 학도의용군에 입대한 3,500여명과 전사한 531명의 공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숭렬사(이상설 기념관)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870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관할지청 : 충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상설은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 성균관 교수 탁지부재무관을 지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6년 러시아령 연추에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허위로 칭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상설은 1909년 4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성명회 사건으로 추방되었다 다시 돌아와 권업회를 창립하고 그 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당의 본부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나, 건강악화로 인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낯선 타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숭의사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867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철영은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 에서 태어났다. 1904년 일본 사람들이 철도 부설을 위하여 공주에 있는 선영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1909년 융희 3년에 을사조약체결 등 어려운 상황을 느낀 선생은 의병거사를 계획하여 기의려문을 지었고, 호적개편 반대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4년 부여 순사주재소에 잡혀가 70여 일간 구금되었고, 1918년 호적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부여 일경주재소에 잡혀갔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왜인들의 정령을 모두 거부하여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19년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 참전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유엔군 산하의 스웨덴 의료지원단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의료진 92명과 행정요원 76명 등을 부산에 파견했으며 1953년 철수할 때까지 옛 부산상고 건물에서 국군과 피란민 등 연간 5, 3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스웨덴 야전병원협회 및 스웨덴 한국협회는 1971년 10월 1일 스웨덴 의료지원단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스웨덴 왕국과 대한민국 양국의 영원한 친선을 위해 부산진구 부전동 503 롯데백화점 정문 왼편(옛 부산상고 건물 자리)에 스웨덴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승동교회
시설 : 기타
사건 연도 : 0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할지청 : 서울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이 1층 기도실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의한 이른바 제1회 학생지도자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학생대표들은 전문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아우르기로 합의하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설 것을 결의했지만, 사흘 뒤인 23일 다시 승동교회에 모여 학생대표들이 만들었던 독립선언문을 태워 없애버리고 범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세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이 교회에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페이지 이동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