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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터 표지석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서울특별시 금천구
관할지청 : 서울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시흥기주사령부 표지석 터는 6.25전쟁 초기 한강방어선전투를 지휘했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흥일 소장)가 있었던 곳이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 전차가 창경원, 동대문, 돈암동 등지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본부가 시흥보병학교(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창동, 미아리 전투를 치르며 분산되어 한강을 건너온 병력을 수용해 혼성 수도사단, 혼성 제2사단, 혼성 제3사단, 혼성 제7사단,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등 예하사단을 편성했다. 각각의 사단은 연대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지형물인 한강을 이용하여 오늘날 양화교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24㎞ 구역 및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특히 여의도 비행장, 영등포, 노량진, 신사동 등에 이르는 한강이남지구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 제3,4사단, 제1사단(예비), 제105전차여단 등의 남진을 저지했다. 그 결과, 국군은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흥시 6.25 참전유공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시흥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참전유공자회 시흥시지회는 2005년 6월 30일 경기 시흥시 대야동 569-2 은계어린이공원 내에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시흥시 출신 6·25참전유공자들의 공훈을 선양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이 참전유공자비를 건립하였다.
신효동 충혼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53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6·25참전 당시 전사한 지역출신 국가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고 애국 및 희생정신을 후세에 남기고자 지역민 일동으로 건립함
신명 3·1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72년 10월 23일 대구 중구 동산동 신명고등학교 교정에 대구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드높인 신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명 3·1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매년 3월 선배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신명고등학교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1919년 3월 8일 신명학교에 재학중이던 최정술을 비롯한 일부 학생은 만세운동의 시발지인 큰 장터에서 이영현을 비롯한 통학생 및 저학년 10여 명은 동신교를 조금 지나서, 그리고 30여 명의 기숙사생들은 대부분 남성파출소 앞에서 각각 계성학교·성격학교·남선정교회·남산교회·달남교회 등이 주축이 된 수천 명의 만세행렬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일본기마대와 기관총을 앞세운 대구 주둔 80연대의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동성로까지 진출하였으나, 달성군청 앞에서 일본 경찰, 헌병, 군인들로부터 구타당한 후 전원이 구속되고 말았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학교 학생들은 석방되었으나, 졸업생과 교사들은 전원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받았다. 이만집 3년, 김태련 2년 6개월, 김영서·김무생·정재순 각 2년, 박재원·권희윤·최경학 각 1년 6개월, 이재인·임봉선 각 1년, 신태근·이선애 각 6개월 등이다.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1일 용원 장날 이희갑·단경옥·이강렴·손승억 등의 장터에서 2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에서 김은배(金殷倍, 1891~1971), 단경옥(段慶玉, 1894~1943), 손승억(孫承億, 1893~1934), 윤무영(尹務榮, 1890~1962), 윤주영(尹周榮, 1897~1938), 이강렴(李康濂, 1902~1927), 이강호(李康吉, 1895~1973), 이희갑(李喜甲, 1897~1953) 등이 주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니면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 이 비를 세웠다.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2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울산광역시 울주군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제53보병사단은 2001년 6월 27일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 232-16 석남사 입구에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중 희생된 전몰군경, 의용대원 및 지역 주민 등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참전용사 및 유가족의 명예를 선양하며 고귀한 희생정신을 길이 빛내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해마다 신불산참전유공자회의 주관으로 추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군경과 민간 의용대의 신불산 공비토벌작전은 1949년 말부터 1954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군과 경찰, 의용대가 남부군 제5지대장 김원팔 등 450여 명을 소탕했으며, 1952년 2월과 3월에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울산경찰서, 의용대가 미 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공비활동과 토벌작전 과정에서 희생당한 울산지역의 우익인사와 경찰관, 의용대, 군인은 140여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원순의사 독립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0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합천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원순(申元淳, 1890~1961)은 경남 합천군 묘산면 사람으로 같은 면 윤병석(尹炳奭)·윤병은(尹炳殷) 등 동지들과 함께 1919년 3월 22일 묘산면 면사무소 앞에서 100여명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때 성경술(成敬戌)과 함께 일군경과의 연락을 끊기 위해 연도(沿道)의 전화줄을 절단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원순의사기념사업회는 이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1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신지 항일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891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완도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 탑은 1994년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669에 신지면 출신 애국지사 임재갑, 장석천, 김정상 3인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을 후세에 알려 자라나는 2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하고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임재갑(1891~1960)은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1927년에 신간회 완도군지회장을 지냈다. 장석천(1903~1935)은 1928년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였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정상(1894~1965)는 신지중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다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신간회 활동에 앞장섰다.
신태식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64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문경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태식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895년에 의병을 일으켜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와 상주에 사는 강용이 등을 농암장터에서 총살하였다. 그 뒤 광무황제의 퇴위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또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소모후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양주 산안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나가사부로를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이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한 그는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그 기밀이 드러나 단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신태식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뒤에도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신녕지구 전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북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성환산공원 내에 신녕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1958년 10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8월초 안강, 포항지구로 침투하려던 적이 의성 지구에서 입은 병력 손실 때문에 의흥, 신녕지역으로 진출했고 이에 아군 제 6사단이 적의 최후 공격을 저지했다.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분전난투를 거듭했던 제6사단의 신녕 지구 전투는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야욕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던 전투였다. 특히 9월 4일에는 제 19연대의 1대대가 화산동 깊숙이 숨겨놓은 적의 전차 8대를 발견하고 특공대를 파견하여 모두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9월 4일 북한군이 영천을 점령하자 북한군 제 8사단이 신녕으로 진출했고 아군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포병으로 방어했다. 9월 7일 조림산과 운산동에서 침입한 적 1개 대대 병력이 합세하여 공격했으나 아군도 포병의 집중화력으로 크게 이겼는데 유재흥 준장이 각 연대에게 되도록 많은 예비대를 보유하도록 지시했던 것이 승전으로 이끌게 된 이유였다. 이날 제7연대의 방어진에서도 2개 대대병력의 공격으로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는데 아군은 진지를 약간 뒤로 이동하고 전 화력을 집중 발포했으며 미 공군 전폭기의 지원 사격과 포병의 지원 화력 그리고 각 대대의 박격포 사격으로 적의 인해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8일부터 15일까지 전투에서 아군은 수차례 승전했으며 적은 시체를 버린채 황망히 퇴각했다.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장병의 사기는 충천했다. 신녕-화산 지구 전투는 신녕-조림산 지구 전투와 더불어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적 8사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북진반격의 기반을 마련한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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