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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운의사 기념 조형물
시설 : 조형물
사건 연도 : 1884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전라남도 담양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전명운 의사의 페티의거 100주년 기념
전해산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북도 장수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본명은 기홍(基洪)이고, 해산은 그의 호이다. 1878년 전라북도 임실 남면 국화촌 호전동(菊花村 狐田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해산은 1908년 이석용(李錫庸)과 같이 전북 남원(南原)에서 기병하였다. 이들보다 일찍이 호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고광순(高光洵)이 적에게 체포되고, 기삼연(奇參衍)이 일어나 활약하다가 그 역시 체포되자, 그 산하 의병들은 김준(金準)의 휘하에 통솔되고 있었다. 이에 해산은 이석용에게 김준과 연합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준을 뒤쫓아 장성에 이르니 김준 역시 순국하였다고 하므로 광주와 나주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김준의 부장으로서 활약하던 오성술(吳聖述)과 연합하여 나주 도림(道林)에 주둔하였다가, 사천(沙川) 등지에서 적병과 교전하였다. 한편 김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曺京煥)이 의병장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해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1908년 6월 광주에서 모군하고 있는 데 정원집(鄭元執)이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부하 되기를 청하였고, 계속 세력이 확장되었으므로 7월 29일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다시 구성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선 봉 장 : 정원집(鄭元執) 중 군 장 : 김원범(金元範) 후 군 장 : 윤동수(尹東秀) 호 군 장 : 박영근(朴永根) 도 포 장 : 이범진(李凡辰) 격문을 지어 원근에 돌리고 수하 장령들에게 특히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엄명하고 군령을 엄히 하였다. 적병과 전투하는 한편 친일적인 무리, 그 중에도 일진회원들을 경계하여서 김원범 등에게 명하여 일인에게 의병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던 변영서(邊永瑞)·박기춘(朴基春) 등을 총살시켰다. 첫 전투는 영광 불갑산(佛甲山) 전투였다. 7월 25일 삽시간에 적에게 포위 당하자, 선봉장이 천보총(千步銃)을 쏘아 두어 명을 사살하고 곧이어 선치(蟬峙)에 구멍을 파고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유인하여 기마병들을 죽이고 무기를 포획하였다. 한편 무기를 보충하고자 8월 23일 윤은경(尹殷卿)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조경환에게 무기를 보내었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일로 미루어 무기공급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알 수 있고 무기문제로 의병장간에 알력이 있었던 것은 관동의병장 민용호(閔龍鎬)와 김하락(金河洛)의 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9월 도림(道林)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는데 대봉산(大鳳山) 일대에 적병들이 운집하여 총성이 들렸다. 29일 나주 석문동(石門洞)에 이르러 조사해 보니 전일에 조경환이 순사대장 정득주(鄭得柱)를 죽였기 때문에 적병들이 거문돌(黑石) 윗마을에 불을 지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마침 전에 헤어졌던 군사들이 합세하여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일시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조경환의 의진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두 의진이 연합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사상자는 하나도 없었으나 수백 명의 군사가 흩어지고 수십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시 행군하여 유정(柳汀)에 유숙하였다. 10월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장성의 김기순(金基淳)과 합진할 것을 꾀하나 서로 군사와 무기를 빌릴 것을 주장하여 합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구룡촌(九龍村)·대곡(大谷) 등을 행군하여 영사재(永思齋)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광주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적과 접전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순창·담양 등을 거쳐 광주 대치(大峙)에서 다시 적과 대적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총과 탄환, 군복 등을 노획하였다. 주흥동(朱興洞)에 이르러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을 만나 크게 고무를 받고, 곧 순창 내동(內洞)으로 가서 적과 접전하다가 적이 불을 질러 후퇴하였다. 다시 함평 유덕산(有德山)으로 가서 참봉 김 돈(金燉)을 만나 전략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 돈은 김준의 전략을 크게 도와준 인물이었다. 고막(古幕)의 적병참을 포위 공격하여 적을 몇 명 사살하였으나 선봉장 정원집이 크게 부상당하였다. 민가에 머물며 10여 일 치료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해산은 거의한 이래 오른팔 역할을 담당하던 정원집을 잃고 크게 상심하였을 뿐 아니라 의진의 사기도 다소 떨어졌다. 1909년 1월 17일 몰래 고향에 돌아가 부친께 세배를 올리고 가사를 처리하고 돌아왔다. 1월 18일 그는 '본 고을 반당(反 )에게 보내는 격문'을 써서 고향에 널리 반포케 하고, 또 '대동 의병장(大東義兵將)은 격문 대신에 노래 한 장을 지어 모든 회도(會徒)와 각도 보조원에게 통유하노라'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3월 27일 해산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광으로부터 부안으로 가서 오동촌(梧洞村)에 이르렀을 때 적의 내침을 받아 접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다시 나주 땅으로 돌아와서 의병활동이 어려우므로 일시 휴식할 것을 훈시하고 곧 재기할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고향 진안(鎭安)으로 돌아갔다. 적은 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수탐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해산의 의진에 출입하던 조두환(曺斗煥)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현규(金顯圭)에게 밀고하여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친 지 수개월만에 일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체포된 후 일인들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귀화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남겼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가리니두견새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書生何事着戎衣 太息如今素志違 痛哭朝廷臣作蘗 忍論海外賊侵圍 白日呑聲江水逝 靑天咽泣雨絲飛從今別却榮山路 化作啼鵑帶血歸)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동년 7월 9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 동년 8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8월 23일(음력 7월 19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부하 중에 원인석(元仁石)·노한문(盧漢文)·박영근(朴永根)·이범진(李凡辰)도 그를 전후하여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로써 호남의진의 거봉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처는 그간에 시부모의 상을 홀로 치르고 있다가 그의 관이 돌아온 날 순절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전몰장병 추도비(신도리)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서귀포 신도리에 1954년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 16명의 희생과 충혼을 기리기 위해 ‘전몰장병 추도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부창범, 변시종, 고태식, 이능수 등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4년 4월 1일 추도비를 세웠다. 신도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몰경찰관 충혼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6.25전후 무장 공비들의 습격으로 증산면 치안질서가 위태로울 때 공비소탕을 위해 전투 중 장열하게 산화한 경찰관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
전쟁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94년
주제 : 기타
지역 : 서울특별시 용산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에 호국전쟁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국민정신교육장으로 역할을 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사업회에서 1994년 6월 10일 전쟁기념관을 세웠다. 전쟁기념관은 옥내전시와 옥외전시로 구분되어 있으며 3만 3천여 점의 소장유물 중 1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1만 900여 평의 옥내전시실은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대형장비실 등 6개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형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옥외전시실이 있다. 3층 규모의 옥내전시실은 삼국시대로부터 현대까지 5천년 대한민국 전쟁사와 위국 헌신한 분들의 공로와 훈장 등이 실물·디오라마·복제품·기록화·영상 등의 다양한 전시기법에 따라 역동적이고 입체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특히 6·25전쟁실은 전쟁이 일어난 원인과 전쟁 경과 및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쉽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험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외전시장에는 세계 각국의 대형무기와 6·25전쟁 상징 조형물, 광개토대왕릉비, 형제의 상, 평화의 시계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장비를 전시하고 있는데, K-1전차를 비롯하여 곡사포, 미사일, 헬리콥터, 수송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양측 회랑에는 국군 전사자와 유엔군 전사자 20여 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전사자 명비가 있으며, 전쟁기념관을 대국민 호국문화의 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이부터 일반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20여개의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함은 물론, 국군 군악·의장행사, 어린이날 문화축제, 현충일 그림그리기 대회, 6·25 호국문화행사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연간 개최하고 있어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의 캐릭터는 무돌이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을 가진 철모와 평화를 상징하는 월계수잎이 특징적이다.
전몰호국용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광양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광양 운평리 옥룡초등학교 내에 6·25전쟁에서 산화한 옥룡면 출신 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옥룡면은 이곳 출신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3년 1월 9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옥룡 면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전몰호국용사 현충비(조도면)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진도군 창유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조도면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비’를 건립하였다. 조도면 재향군인회에서는 이곳 출신 호국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3년 5월 3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조도면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조도면 재향군인회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전몰호국용사 충혼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기타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관할지청 : 대전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부여 홍산리에 6·25전쟁 기간에 전사한 은산면 출신 호국전몰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은산면에서는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92년 5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은산 면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침략에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은산면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전몰용사 위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전사하신 여수시 삼산면 출신 92명의 전몰용사의 공헌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함
전몰경찰관 위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 중 군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도망치던 북한군이 1951년 3월 봉화군을 거점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 방화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울진경찰서 경찰관들이 소탕에 나섰다가 경사 임호선 등 6명의 경찰관이 북한군과 교전하다 전샇사하였다. 정부는 전사한 6명을 경위로 추서하고 1987년 위령비를 건립하였고 1998년 현재 장소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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