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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케니상사 전공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1년 1.4후퇴 당시 이 곳 베내(동문리)에서 1개 소대 규모의 군병력이 후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적군의 전차에 소대는 열사직전에 이르렀다. 이 때에 분대장직을 맡았던 케니는 부하 2명과 함께 육탄으로 전차를 잡고 장렬히 전사하여 소대를 구출하는 지대한 전공을 세웠다.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인천광역시 서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에 지상군 1개 대대와 함정 1척 파견 및 5,000여명이 참전한 콜롬비아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5년 9월 24일 국방부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인천광역시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2018년 7월 25일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 경명공원으로 이전 건립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시 파병을 결정했고, 콜롬비아는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에 지원군을 보냈다. 콜롬비아군은 참전을 결정하자마자 미국식 장비로 재무장한 뒤 미국 교관단으로부터 12주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이와 함께 189명이 탑승한 해군 프리깃함도 한국 해역에 투입할 준비를 하기 위해 진주만에서 미 해군과 합동훈련에 나섰다. 1951년 4월 프리깃함 파딜라호가 한국을 향해 출항한데 이어 1천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콜롬비아 1보병 대대도 5월 21일 미국 수송선을 타고 콜롬비아를 떠났다. 이들은 1951년 6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 고위 장성,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항에 입항했다. 콜롬비아는 교대병력을 포함해 연인원 5천 100여명의 병력을 모두 4차례에 걸쳐 한국에 보냈다. 이들은 김화 400고지 전투, 연천 180 고지 전투, 골모고지 전투 등에서 격전을 치렀으며 휴전된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유엔군 방어작전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전국에 6·25전쟁 참전국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이 진행됐고 인천에는 콜롬비아군 참전비 건립이 결정되어 그해 9월 24일 서구 가정동에 비 높이 10m, 기단 2m의 콜롬비아군 참전비가 세워졌다. 매년 콜롬비아 독립기념일에 주한 콜롬비아 대사와 6·25참전유공자회 서구지회 회원들이 참석해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참전비에는 ‘카리브해 바다의 정기를 타고난 콜롬비아 용사들! 국제연합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611명의 고귀한 생명이 피를 흘렸다. 우리는 그들을 길이 기념하고자 여기에 비를 세운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타일랜드 참전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태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전쟁 중 피 흘린 1,296명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로, 기념비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타일랜드의 육·해·공군 용사들! 여기 그들의 마지막 주둔지에 피 흘린 1,296명의 뜻을 길이 새긴다.’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기념비 옆으로는 불상을 모신 태국식 사원(寺院) 건축물도 조성되어 있다. 태국은 한국전쟁 때 육군 1개 대대, 해군 함정 2척,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3대를 파견해 참전함으로써 육·해·공군 모두를 지원하였다. 태국군은 율동전투(1951), 철원 포크찹고지전투(1952), 고랑포 나부리전투(1953), 김화 사동전투(1953) 등의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자 129명, 부상자 1,139명, 실종자 5명이라는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탄운 이정근 창의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856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화성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화성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한 이정근(1856~1919)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하생들과 국내의 저명인사 36명이 1970년에 건립한 비이다.
탑골공원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할지청 : 서울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우리나라 최초로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
태극단 교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중 적의 치하에 든 고양, 파주지역에서 비밀결사단체인 태극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처참히 죽음을 당한 청석초등학교 교사들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파주 청석초등학교에 2004년 건립된 태극단 교사 추모 조형물입니다. 네비게이션에 청석초등학교를 찾으면 새로운 학교로 가기 때문에, 교하성당을 검색하여서 구 청석초등학교로 가야지 참배가 가능합니다.
태극단 반공 유적지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ㆍ25전쟁을 맞아 애국청년 240명은 태극단을 조직해 서울 수복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1ㆍ4후퇴 이후에는 국방부 정훈국 등에 편입되 실전에서 활약하였다.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42년
주제 : 학생운동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42년 5월 대구상업고등학교 4학년 이상호가 서상교, 김상길 등과 조선이 처한 현실을 토로하고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한 태극단은 치밀한 조직체계와 투쟁방안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1943년 일경에 발각되어 단원 26명 전원이 체포되어 16명이 석방되고 10명이 취조를 받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이준윤이 병보석 석방 3일만에 숨지고, 3명이 추가로 불기소로 풀려났으며, 6명이 재판을 받아 미성년자의 최고형인 단기 5년이상 장기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태백중학교 학도병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철원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는 동족상단이고 동서진영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우리의 조국산하가 포화로 초토화가 되면서 교정에 모여든 127명의 태백중학교 학우들은 육군제3사단 23연대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제3군단 철수작전과 중동부 전선에서 치열했던 피의능선 가칠봉979고지 대진리 쑥고개 214고지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7.27 휴전 때까지 18명의 학우가 구국의 영령으로 산화하였다. 장열하게 산화한 영령을 달래고 태박 학도병의 애국심과 충정이 자라나는 2세와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기를 바라면서 참전학도병과 동문들의 정성으로 전적비를 세운다.
태인의병 주둔지-태인향교
시설 : 기타
사건 연도 : 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북도 정읍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최익현 의병장이 이끄는 태인의병이 이곳에 머무르며 전력을 강화 하였던 곳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전북 태인으로 내려가 임병찬과 함께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태인의병을 일으킴. 태인군수는 의병의 기세에 눌려 달아나고 태인의병은 태인향교에 머무르면서 관아의 무기를 확보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함. 1906년 6월 5일 이곳 태인을 떠나 정읍, 곡성을 거쳐 순창까지 진격한 태인의병은 6월11일 순창에서 관군과 마주치자 일본군이 아닌 같은 민족과의 싸움을 피하고자 의병을 해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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