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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유엔평화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세계 유일의 성소인 유엔기념공원의 위상에 걸맞는 기념관을 건립하여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세계적인 관광명소 육성 및 국제평화도시 이미지 제고
유관순열사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02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3년형을 선고 받은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상황에서도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랫동안 심한 고문에 시달린 유관순 열사는18세의 나이로 옥중에 순국하였다. 이러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자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청소년들의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관순열사 봉화지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02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유관순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연기(燕岐), 청주(淸州)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유관순 유적(아우내 3·1운동 사적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유관순은 병천으로 내려와 만세운동 사실을 전하였다. 소식을 들은 유중권과 조인원 등은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때 병천주재소 헌병들이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돌을 던지며 격렬히 항거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하여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수십 명이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열사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02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유관순 열사 생가는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
유석 남형우선생 순국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75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지내고, 친일분자 및 밀정(密偵) 총살과 군자금 모집에 활약하였다.
유격군 충혼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6·25전쟁시 반공결사대를 조직하여 유격전을 펼치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을지타이거여단유격군전우회에서 2001년 11월 29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탈환 후 1951년 1·4후퇴 때에 북한 지역과 3·8도선 접경지대에 거주하면서 치안대·청년대·학도호국대 등으로 반공결사대를 조직하여 공비소탕과 치안사업에 헌신한 청년방위군 등은 육군 '을지 제2병단'으로 편성된 후,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제8240)부대에 예속, 이후 '타이거여단'으로 개편된 반공유격대원으로 북한 연안일대와 적지내륙 등지에서 첩보전을 수행하며 도서지역 및 해상 방어 작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KLO부대는 1950년 9월 14일 인천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여 함정 261척이 안전하게 수로에 진입하게 하는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재 총 3, 875위의 8240한국유격군 전몰용사의 위패가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후, 유엔군의 보급지원 종료와 철수명령에 따라 1954년 2월 22일 국방부 8250부대에 통합·편입되어 군번을 부여 받고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대원들은 1992년 12월 '8240국제연합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로 통합되었다. 이에 '자유의 의병(義兵)'들의 넋을 위로하며 한국 유격군의 명예선양과 후세들에게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살고자 2001년 9월 1일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북녘의 미수복 산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이곳 교동도에 그들의 고귀한 생명과 희생을 나라에 바친 자유의 십자군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유석 조병옥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기도 과천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태산같은 기상, 바다같은 도량, 주옥같은 연설은 이 강산의 큰 빛이요, 높은 횃불로서 민족사에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높고 맑은 절개는 민족의 귀감이며,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힘이다. 온 겨레와 함께 추모하는 마음으로 선생이 서거한 지 43주년을 맞이하여 위업과 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성금을 모으로 국가보훈처와 서울특별시의 협조를 받아 이 동상을 세웠다
유관순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02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新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민들이고, 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 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며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안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유관순은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유관순은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유관순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1만세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순국하신 유관순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백운면 부녀회에서 건립하였다.
유관순 열사 상(像)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관할지청 : 서울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운동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유관순 열사는 광복 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으로 2019.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일제에 항거한 유관순 열사의 공훈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기념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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