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선택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울산
부산
세종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닫기
닫기
현충시설 소개
현충시설 소개
국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국외 참전시설
국외 참전시설 둘러보기
현충시설 함께하기
나라 사랑 여행 코스
현충시설 활용 우수사례
관리실태 신고
OPEN API
전체 현충시설
홈 > 국내 현충시설 > 전체 현충시설
전체 현충시설
독립운동 현충시설
국가수호 현충시설
MAP
HOME
TOP
BOTTOM
시설 전체
공원
기념관
기타
동상
비석
사당
사적지
생가
장소
조형물
탑
주제 전체
3·1운동
6·25전쟁
6·25전쟁 및 월남전쟁
기타
문화운동
민족주의운동
사회운동
애국계몽운동
월남전쟁
월남참전
의병운동
의열투쟁
학생운동
한말구국운동
해외운동
지역 전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세종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지자체 전체
VR 영상
유
무
안내판
유
무
제목
내용
검색 결과
총 2316건
Excel
전체 개수 : 2316
육군 소령 윤길병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경주시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1년 1월 육군 소위로 임관,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 812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53년 1월 대위로 진급, 보병 제 12사단 37연대 10중대장으로 보직, 812고지 방어 전투에 참가하여 북한군 1개 대대와 5일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자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먼저 대피시킨 후 자신은 적으로부터 포로가 되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자결하였다. 이러한 중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52연대 2대대 장병들이 분격하여 역습을 감행 812고지 탈환에 성공
육군소령 강재구 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65년
주제 : 기타
지역 : 인천광역시 동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인천시 동구 창영동 창영초등학교 내에 이 학교 출신으로 많은 부하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1966년 5월 6일 흉상을 건립했다.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직전, 부하들의 수류탄 투척훈련 중의 일이었다. 한 사병이 앞으로 던져야 할 수류탄을 뒤로 추켜드는 순간에 놓침으로써 그 수류탄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앉아 있던 사병들 가운데 떨어졌다. 그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수많은 사병들이 희생하게 된다. 미쳐 주워 던질 겨를도 없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침으로써 많은 부하들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출하고 산화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또한 4등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창영초등학교 어린이회의 발의로 학부모, 졸업생, 교직원, 인천시 유지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1-1953년 6.25전쟁기간중 적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주요한 정보를 수집보고하여 미제8군과 전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큰 공적을 세운 많은 요원이 희생되어 그들의 추모와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전공비를 건립하였다.
육군 중위 조유환 전공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원주시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조유환은 1925년 4월 23일 문막에서 출생 / 1946년 4월 국방경비대에 지원입대하여 통신장교 / 1950년 6․25사변 당시 일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9․28 수복 당시에는 애향심에 불타 문막지구를 조기탈환함으로서 적치하에서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한 반공애국면민들의 고귀한 생명을 구출한 업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 전한다 / 1951년 4월 23일 가평지구전투에서 향년 27세를 일기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고 명복을 기원하여 이 전공비를 건립하노라 미망인 최성훈 / 서기 1976년 3월 일 문막면민 일동 건립
육탄 3용사 고 안영권하사 전공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2년 10월 12일 오전 8시 탈환 명령을 받은 국군이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고, 살아도 이 고지에서 살자 하는 비장한 각오로 진경을 개시한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며 서로 고지를 차지하기를 2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 국군과 중공군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으며 국군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육군 3용사의 한 사람인 고 안영권 하사는 우리고장 김제시 금산면 용화리 출신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입대 제9사단 30연대 1대대 3소대원이었다. 우리나라 육군전사가 증언하듯이 피맺힌 동족상잔의 전란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중부전선의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 1952년 10월 12일 그 고지의 최후의 탈환작전에서 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와 함께 결사대에 자원, TNT 수류탄 박격포탄을 몸에 묶고 적의 토치카에 뛰어들어 장렬히 자폭함으로써 막혔던 아군의 작전 혈로를 뚫어 위기일발의 백척간두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한 주인공이다
육사생도 6·25 참전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당시 육군 사관 학교에 다니던 생도 1기[현 육군 사관 학교 10기] 312명과 2기 330명은 육사 장교 및 교관들의 지휘 아래 6월 26일 새벽 포천으로 출전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공산군 제3사단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포병의 지원도 없이 소총만으로 싸우던 이들은 이곳에서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한 전몰 생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동기생들이 모은 기금과 국비 1억 원을 지원받아 1979년 12월 1일 건립되었다.
육탄용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홍천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 초기인 1950년 6월 28일 전차를 선두로 밀려오는 적 7사단을 맞아 아군 6사단 19연대 조달진 일등병을 비롯한 11명의 특공대가 주력전차 9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것을 기리고 그 얼을 받들고자 1975년 10월 건립하였다.
육사 이원록선생 시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4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 출생.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육사 이원록선생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04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광야, 청포도 등 저항시인으로 유명하며, 대구조선은행투탄등 항일 투쟁으로 무려 17회나 옥고를 치른 육사선생의 생가지임
육군소령 김영남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완도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에 6·25전쟁 중 경북 예천에서 전사한 김영남 소령을 추모하기 위해 1·20학병동지회에서 1961년 6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김영남 소령은(출생지 및 생년월일 미상) 1949년 3월 29일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직할부대(헌병사령부)에서 복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용전분투하였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그리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마저 제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독립기갑연대 제1대대(장갑차)도 제1, 6, 7, 8사단에 배속되었다. 또한 서울 특별연대를 제1사단에, 전투경찰 1개 대대가 배속된 육사생도대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는 한편,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는 제1, 6, 7사단에, 제2교도대대는 제7사단에 배속하였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지역에 배치하였다. 국군은 철수와 방어 그리고 다시 철수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만 수행하다가 일시 공격으로 전환하여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역습을 받아 의정부 방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렀다.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선에서 강력한 방어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꺾었다. 김영남 소령은 1950년 7월 29일, 경북 예천에서 공격해 내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부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용전분투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페이지 이동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