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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애국계몽운동
지역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하여서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愛國啓蒙團體)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2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처단하기 위해서 폭발장치를 한 선물상자로 위장하여 박제순(朴齊純)과 이지용(李址鎔)에게 우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오적신(五賊臣) 모두를 한꺼번에 처단하기로 하고 나인영·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이 자신회는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 40여명의 청년들이 가입하였고 많은 애국지사들의 협조가 있었다. 1907년 3월 25일 아침, 그는 동지들과 각기 지정한 장소에서 박제순·권중현 등을 처단하기 위해 대기하였으나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차질로 단지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동지들은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1907년 당시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의 판결에서 7년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얼마후 풀려났다. 그는 그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 처단을 위한 활동을 하는 등 이기선생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함.
해병혼 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제주시 동문로타리에 6·25전쟁 등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제주 출신의 해병들을 기리기 위해 ‘해병혼 탑’을 건립하였다. 제주시는 이곳 출신 해병용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후세에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해병혼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60년 4월 15일 준공하였다. 6·25전쟁 기간 나주 군민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의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제주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강동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수립 후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함
해외(월남) 참전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64년
주제 : 월남참전
지역 : 충청북도 영동군
관할지청 : 충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참전한 영동군 출신 참전전우들의 국위선양에 공헌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해남군 6·25 참전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6.25전쟁 휴전 후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넋을 위로하고, 참전유공자의 호국정신을 널리 계승하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하였음
해병대가리산전투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홍천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 당시 가리산 전투에 참여하여 주요 고지인 가리산을 확보하는데 기여한 해병대와 해병대 소속 참전 군인들의 공훈을 추모함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남도 통영시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0년 8월 17일 7척의 해군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시작한 곳으로 해병대 최초 상륙작전인 통영 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 세우고 18년에 이전하여 재건립하였음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서울 서쪽 관문인 104고지 탈환 작전 중 전사한 해병대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82년 9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해병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계속 진격하던 중 1950년 9월 21일 서울의 서쪽 관문인 104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4고지 점령은 서울시민 구출의 선도를 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해병은 결사적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3주간의 끝없는 혈전으로 1개 중대 중 26명만 생존하는 처절한 혈전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 적은 104고지 일대를 요새화하여 난공불락을 호언하며 서울 사수의 최후방어선으로 확보중에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한미해병대는 공격을 계속했다. 해병 제1대대가 104고지를 조기에 탈취 역사적인 수도탈환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상승해병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다. 서울 서측방을 점령 방어하던 적은 북한군 제25여단 및 독립 제7연대 소속 약 4, 000명 규모였으며 장교 및 준사관은 대부분 중공군에서 복무했던 정예화된 전투 경험자들이었다. 1950년 9월 21일 해병 제1대대를 중앙에, 미 해병 제5연대 제1대대를 좌측에, 미 제3대대를 우측으로 하여 서울 서측방을 병진공격했다.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제3중대를 주공으로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18:30분에 104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9월 22일 새벽 약 600명 규모의 적은 120밀리 박격포와 각종 공용화기의 지원하에 3시간 동안 2차에 걸쳐 단말마적인 역습을 감행해왔으나 우리 해병대는 필사적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해병대 김포지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김포시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에 김포지구 전적 기념 및 해병대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서 1989년 11월 1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 김포지구 전투에서 수도 서울을 수호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독립 5대대 장병의 빛나는 무훈과 조국수호의 영령으로 산화한 해병용사들의 숭고한 넋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그날의 전승터가 보이는 곳에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예로부터 한강 하구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이자, 대몽고 항쟁, 신미, 병인양요 등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 한 땅이다. 한국동란중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만회한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탈환작전의 선봉군인 해병 제1연대는 그 예하 제3대대를 이곳에 배치하여 서울로의 반격을 시도하려던 잔적을 과감히 소탕하였고, 1·4후퇴의 와중인 1951년 3월부터 휴전시까지는 해병 독립 제5대대가 이곳에 배치되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면서 한강 넘어 개풍군 및 개성 등으로 침투, 월암리전투를 비롯한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사수하고 이 땅을 지켰다. 특히 이 지역은 휴전 이후 해병 제1임시여단, 제5여단, 제2여단, 제2사단으로 오늘에 이르며, 피와 땀과 혼이 깃든 분단조국의 최전방을 40년 이상 지켜 온 우리 해병들은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지킬 것이다. 여기 이 전투에서 목숨 바쳐 나라와 겨레를 지킨 님들의 고귀한 충정과 용감무쌍한 정신은 자손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해병대 수도방위기공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2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51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요청으로 유엔군사령관 벤 플리트 장군은 1952년 3월 12일 한미해병대로 하여금 장단·사천강 지구를 방어하게 하여, 정전협정시까지 중공군 2개 사단의 네 차례 대공세를 저지함은 물론 정전협정 후에도 1959년까지 본 전선을 굳게 수호하여 수도권 방어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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