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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지구 전적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전투지역인 왜관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산화한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교통부에서 1978년 7월 1일 전적기념관을 지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전투인 왜관전투를 기념하고 이때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며 동시에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적기념관 및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령들이여! 우리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기억하노라! 이곳 유학산 봉우리에 그리고 낙동강 기슭에서 남긴 그날의 거룩한 희생을 피의 발자국을 우리 겨레는 영원히 기억하노라.
왜관지구전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단기 4283년 적 제2군단은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할 목적으로 수차례 왜관에 도하작전을 펼쳤으나, 국군은 이를 분쇄하였다. 그 후 증원된 적을 격퇴하고 8월 20일부터는 국군이 역습하였다. 조국수호와 국군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지은 이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외솔 최현배선생 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울산광역시 남구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외솔 최현배선생 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울산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최현배 선생은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의 독립과 한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외솔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 병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건립하였다.
외솔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894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울산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늘의 연세대학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연구했다. 그는 주시경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어학회"를 1931년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여 광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에는 선생이 앞장서 우리말의 맞춤법과 표준어를 정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반세기 동안 우리말의 규범으로 삼았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배달말 사랑과 한글만 쓰기 운동을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학자 기념관로서는 전국 최초인 외솔 최현배 기념관이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터인 중구 동동 613번지 3,3l6㎡부지에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건립됐으며, 전시관과 체험실, 영상실 등을 갖추고 있다.
용화사 위령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50년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기계·안강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계·안강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면 포항·경주·영천·대구가 위험에 처하게 되어 우리 군은 최후 방어선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부대의 공격에 맞서 수도사단·제3사단과 독립기갑연대·2개 유격대대·해군육전대·민부대·학도병 등 동원가능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필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그 결과 고지의 주인이 열여섯 번이나 바뀌고, 국군 제17연대는 소대장·중대장, 3개 대대장이 전사와 부상으로 인해 지휘자가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었다. 17연대는 격전지인 곤제봉 전투에서 최후의 승자는 되었지만 수많은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치열했던 기계·안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고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용마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6.25전쟁에 참전한 경남중, 고교 출신 424명의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용문산전투 가평지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가평군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에 양평 북방 용문산을 방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전적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96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지키고있었다. 5월 18일에는 중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당시 장도영 휘하 6사단 중 2연대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에 막강한 물량공세에 후퇴, 전초부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와 합류하였다. 그 후 2연대는 후퇴하지 않고 그대로 진지를 지키며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해 했다. 이때 중공군은 착각을 했는데,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를 주력부대로 알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제63군은 187, 188 2개 사단에다 군 예비인 189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하기까지 이른다. 즉, 중공군 3개 사단이 2연대에게 총 공격을 감행한것이다. 하지만 2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서 계속 몰려오는 중국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중공군이 2연대를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6사단의 7, 19연대가 후방을 기습한 것이다.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UN군과 국군의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국군은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새벽 중공군은 서둘러 퇴각을 하였다. 6사단은(2, 7, 19연대)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중국군은 화천호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그 결과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되거나 6사단에 의해 격멸당했다.
용문산지구 전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양평군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용문산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아낸 제6사단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육군 제5사단에서 1957년 7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1년 5워 19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개된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제6사단 장병은 중공군 제60군 예하 186, 187, 188사단과 격전 끝에 적을 섬멸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로서 호국의 신으로 사라진 제6사단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그 공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건립했다. 전투기간 중 제6사단은 적의 집결지를 포위 공격하여 2, 500명의 중공군을 포획하고, 이어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용문산 지구 전투는 일개 방어전의 승리일 뿐 아니라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6·25전쟁 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린 기록적인 작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용문산지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양평군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용문산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아낸 제6사단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교통부에서 1979년 1월 1일 건립했다. 용문산지구 전투는 1950년 10월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 용문산에서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것을 한국군 제6사단 장병과 학도병들이 육탄으로 사수하여 적을 섬멸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장렬한 전투로 나라를 지킨 장병들과 학도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뜻을 받들고자 비를 세웠다. 1951년 용문산 북쪽 산속에서 국군은 적과 대치하여 육탄전으로 전투사상 유래없는 격전을 거듭하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분쇄하여 적의 남침을 저지하였고 중부전선을 끝까지 사수하여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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