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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우당 이회영선생 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년
주제 : 기타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회영은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1905년에 울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경술국치)이 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을 떠났다. 그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와 더불어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그는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한다.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이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회영선생의 집터 표지석과 함께 흉상을 건립하였다.
우남 이승만박사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75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강동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진보적인 개화당 관계의 청년들과 많이 접하게 되었으며 외국의 문물을 섭취, 그 자신도 진보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896년에 서울에서 협성회보, 매일신문 등을 발간하였는데 황제를 비판하였다고 하여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04년에 미국으로 떠나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에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일본에게 약육강식 당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국제 여론은 마땅히 한국을 불합리한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호소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였으며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과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였다. 1940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그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을 실시하여 희망과 용기를 북돋았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우재 이시영 선생 순국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듬해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결연한 각오 아래 중국으로 망명,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괄괄한 성격의 그는 실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윤상태(尹相泰), 서상호(徐相鎬), 정운일(鄭雲馹) 등과 애국단이란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애국단을 조직한 그들은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모라는 당시 대구부호의 지원을 얻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자는 이름난 구두쇠인데다 민족의식이 없어 말로 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서부자의 아들을 애국단에 가입시켜 그가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희사하기를 원하였으나, 서부자는 끝내 외면했다. 군자금은 마련해야겠고 저쪽에서는 응할 기미가 없자 최후 수단으로 하루밤 그의 아들을 앞세우고 그 집에 침범했다가 정체만 드러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강도죄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다시 최준(崔俊),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을 조직했다. 광복단은 무기를 구하고 병사를 길러 일본 세력에 무력으로 겨루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였다. 1914년 다시 출국하여 북경으로 가 그곳에서 항일운동에 이바지했다. 그가 그때 쓴 일기를 보면 백남채(白南採)와 함께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1919년 2월, 지청천(池靑天),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영남유림대표 2백여 명을 경성으로 보냈다. 그때 유림측에서 그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 '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하였다. 1919년 3월 3·1운동 직후 그는 그를 따르는 한위건(韓偉健), 김영호(金永浩) 등 청년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한인무관학교(韓人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무관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길러내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1919년 7월 9일 피로와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운문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고종 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김상구, 김종대가 당시 사립 문명 학교장 김우곤의 집에서 동지 여러 명을 모아 독립회를 조직하여 결의문을 만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3월 18일 정보를 접수한 일경들이 독립회 청장년들을 모두 잡아가려 하자 동네 주민들과 독립 회원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운문면 3·18 독립운동이다. 3·18독립운동 기념관은 방지초등학교 문명분교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학교 내 유일한 독립기념관이다. 1919년 기미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가족과 경상북도 교육청의 지원으로 2002년 건축 한 것이다.
운강 이강년선생 경모각 및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5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문경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강년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이기태와 의령 남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2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격하여 188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1896년 2월 문경 가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국내로 돌아온 이강년은 광무 황제(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운강은 문경 갈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죽령, 단양 고리평, 백자동, 용소동 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이 쏜 총에 발목을 맞아 붙잡혔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정부에 불만을 품고 정사를 기도하여 1907년 음7월 이후 호좌창의 대장이라 자칭하고 도당을 소집하여 내란을 일으켜 충청, 강원, 경기 각 도내를 횡행’했다는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기념비는 이강년 선생의 구국을 위한 위정척사 사상의 충정을 기리고, 갈평리대첩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10일에 건립하였다.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85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문경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강년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이기태와 의령 남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2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격하여 188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1896년 2월 문경 가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국내로 돌아온 이강년은 광무 황제(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운강은 문경 갈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죽령, 단양 고리평, 백자동, 용소동 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이 쏜 총에 발목을 맞아 붙잡혔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정부에 불만을 품고 정사를 기도하여 1907년 음7월 이후 호좌창의 대장이라 자칭하고 도당을 소집하여 내란을 일으켜 충청, 강원, 경기 각 도내를 횡행’했다는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운강기념관은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도창의대장 이강년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2002년 4월 개관하였는데 유물전시관, 사당, 관리사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북도 임실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석용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1897년 8월 그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으로 이거한 후 경향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다. 특히, 그는 면암과 연재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제가 한일합병 후 통감부를 설치하자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이른바 12의사가 체포된 이후에는 그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7년 8월 하순 그는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의병에 나설 것임을 부모에 알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창의동맹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는데 당시 마이산 용암에는 1천여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석용은 의병 조직을 결성하고 진안읍 공격하여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하였으며, 일본어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으며, 군율을 엄히 하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한 후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석용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의령단 설치운동을 통해 점차 무력감에서 벗어난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그는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사형이 언도되자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3일 그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는 이석용 의병장 과 휘하의 28의사를 추모. 1908년 3월 22일 최대의 격전지인 임실운현전투에서 17명의 의병들이 순국하였고 그들을 기려 그 장소에 건립하였다.
울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년
주제 : 기타
지역 : 울산광역시 남구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울산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 및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기리고 계승
울산지구 두서전적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기타
지역 : 울산광역시 울주군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울산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두서면사무소 내에 두서에서 벌어진 전투중 희생된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울산광역시호국선양기념사업단에서 2008년 11월 19일 이 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기간 중 울산지구 일대 북한군이 아미산, 천마산 등 두서면 일대에 아지트를 구축함으로써 전투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희생된 군경찰, 공무원, 지역주민 등 약 360여 명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수호 전선에 산화하신 우리의 님이시여 그날의 희생정신이 후세에 길이 빛나리 여기 두서면 양지바른 곳에 한 비를 세워 님들의 위대한 충성을 높이 기리노라
울산경찰 추모의 공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2015년
주제 : 기타
지역 : 울산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당시 공비토벌에 교전 하거나 민생 치안을 위하여 경찰업무 수행 중 순직한 110명분의 경찰관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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