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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의사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01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서울특별시 용산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봉창 의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일본천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의사의 숭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와 이봉창의사동상건립위원회가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재명의사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90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美國勞動移民會社)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하와이에서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숙청을 결의하자 그는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平安道) 순시 때 이등박문이 동행한다는 사실에 접하고 평양역(平壤驛)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정거장 부근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의 거사를 만류한 이유는 이등박문이 자기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융희황제 곁에 있으므로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이등박문을 처단코자 동지 김병록(金丙綠)과 함께 서울과 원산(元山)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하였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 괴수들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하순경, 평양 경흥학교(慶興學校)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이완용의 처단은 그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이 담당하고, 김정익(金貞益)과 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7일에는 최종적으로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는데,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여, 조창호와 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을, 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후 12월 12일 상경하여 거사 준비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경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그의 정의로운 행동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은 인력거 아래로 떨어졌고, 그는 재빨리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그의 거사로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경호하던 일경들이 달려들자 이들과 격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일경들의 칼에 하체가 상하게 되어 붙잡혔다. 그런데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불행히도 잔명을 보존하여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의 의연함은 왜적의 재판장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그것은 1910년 봄 공판장에서 내외의 많은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죄목을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그를 처단하였음을 역설하고, 일본인 재판장의 공모 여부에 대한 심문에 이천만 조선 동포가 모두 매국노를 죽이는데 가담한 것이라고 답한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변호사인 안병찬(安秉瓚)의 성의있는 변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그는 1910년 9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원대열사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1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3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거쳐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 조선의용대의 창군 주역으로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1941년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진출, 새로이 개편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분대장으로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이원대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9년 비를 건립
이육사 문학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04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 출생.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이범교 애국지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8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교통부 위원으로 피선되어 국내를 오가며 군자그므 조달 및 임시정부와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노령으로 건너가 배영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한 이범교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널리 전하기 위해 2004년 이 비를 건립하였다.
이명균의사 유적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이종주 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기타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종주 선생은 1901년 3월 20일 성내면 월산리 35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종주 선생은 1920년 3월 10일 밤 1919년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종철, 이대성, 유판술 등과 함께 성내면사무소에 숨어 들어가 등사기를 훔쳐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다. 이어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12본을 그려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다가 흥덕 주재소 일본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1921년 1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 이송되었다. 이후 옥에 갇힌 사람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같은 해 7월 13일 고문을 받다가 혹형을 이기지 못하고 21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고창군 및 지역유지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내면 월산리 현 위치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이형표 애국지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5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1906년 3월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영천 남부지역 책임자로서 구룡산 일대를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전을 전개한 이형표 애국지사의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3년 건립
이태희지사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성주 출신 애국지사로 성주 3·1독립운동에서 순국한 이태희의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는 가운데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유림측과 기독교측에서 결정함에 따라 이날 장터에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여 밤 11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군중이 성주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에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강경진압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하였고 이태희는 투석으로 맞서며 항쟁하였다. 시위양상이 커져가자 일본경찰은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시위대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이태희는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49년 1월 1일에 후손들에 의해 이 비가 세워졌다.
이인화의병장생가(온계종택)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0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호는 원여(元汝). 경상북도 문경 출신.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선성(宣城)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에서 거의한 김도현(金道鉉)과 안동의병대장 김도화(金道和) 휘하에서 안동부 입성에 성공하였다. 3월에는 함창의 태봉(胎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군사 300여명을 거느리고 격전을 벌였다. 적과의 교전이 치열하고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하여 의병부대가 패퇴하자, 김도현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일단 헤어져 새로이 의병을 일으켜 예안대장(禮安大將)이 되었다. 10월에 고종이 해산을 선유(宣諭)함에 따라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예안에서 선명학교(宣明學校)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온힘을 기울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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