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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화령장지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6.25전쟁 당시 육군 1사단 및 제17연대가 화령장지구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파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화랑회 이상운의사 추모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27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이던 이상운의사는 동기생 장지환, 김구, 김영준, 호중기 등과 항일결사대인 화랑회를 조직하고 선배 강이규 등이 조직한 독립단과 제휴, 김제경찰서 습격, 목천호 철교 폭파 등 무장항일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1945. 7. 17. 순국하였습니다.
화수리 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시설 : 기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화성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곳은 화성 지역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인 화수리 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만세꾼들은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우고 화수리에 도착하여 주재소를 에워싼 다음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가와바타 순사는 만세꾼들에게 총을 쏘면서 달아났고 시위대는 주재소를 모두 불태운 후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화수리 마을은 주재소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가옥이 불타는 등 보복을 당하였다.
화도 3·1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월산교회는 1993년 3월 1일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555(월산교회내)에 화도 3·1운동을 주도한 김필규 목사 외 7명의 독립운동가의 공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화도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달용 등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3월 16일 사전에 발각되어 다수의 주도인사들이 일경에 피체되었다. 월산교회 목사 김필규(1874~1919) 등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답내리·월산리 주민들이 총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 앞으로 몰려가 피체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은 그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5명이 즉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은 채,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3월 19일 이른 아침에 일헌병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을 연행해 갔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4월 25일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6.25전쟁 중 아군이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지로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기도를 사전에 탐지하여 매복과 기습작전으로 적을 섬멸시킴으로서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한 상주화령장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호국 기념관이다. 광장내에는 상주 출신 6.25 및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상주시 6.25 및 월남전 참전 기념비(22.1.4. 건립, 22.12.6. 현충시설 지정)"가 세워져있다
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4월 6일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각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운수리 쌍계사의 승려인 정금리에 사는 김주석은 학생인 정상근·양봉원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4월 6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준비하였다. 김주석 등은 4월 6일 오후 6시경, 장이 거의 파할 무렵에 태극기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으며 주도 인물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4월 7일, 하동보통학교 소풍날, 공평송림으로 소풍을 가던 길에 4학년 학생들인 박문화는 시장통에 이르렀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었고 하동보통학교 학생 16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이정수, 임만규 등 화개면민들은 4월 11일 장날에 제2차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준비하며 시위 전날인 4월 10일 밤에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만전을 기했으나 장날 당일 화개장터를 경계 중이던 일경에 의해 4명 모두 검거됨으로써 3·1독립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2001년 2월 1일, 화개장터3·1만세운동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화개장터에서의 3·1독립운동을 전개한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화천군 6·25참전유공자 명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화천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화천군 6.25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그 공훈을 선양하고자 1919년 12월 16일 건립하였다.
환산 이윤재 선생 어록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8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황진박선생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8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경북 선산출신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신 독립운동가 황진박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황진박선생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1927년 장진홍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장진홍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장진호의사가 옥중에서 순국하자 감방문을 부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재소자들과 농성하며 옥중 투쟁을 벌였으며 장진홍의사의 사인을 규명하다 8개월 가형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옥고를 치루고 나욌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2년 5월 27일에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황진박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67년 5월 1일 황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황진박의 의열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황매천 선생 휘현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55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전라남도 광양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비는 매천 황현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6년 1월 10일 건립되었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 운경(雲卿), 호 매천(梅泉)이다. 1855년 12월 11일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이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이다. 왕석보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이후 서울로 거주하여 이건창 등과 교우했고 1885년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대탄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 구럐례로 낙향하여 구안실이라는 작은 초가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여 황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과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 4편을 남겼으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사를 담은 <매천야록>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되어 한말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1962년 황현 선생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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