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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황극단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78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석용 의병장을 비롯한 순국선열의 추모비를 세운 제단이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진안 마이산 주필대에서 거병하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했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진안 시동, 마근현, 수류산, 관촌역,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2년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그 해 4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순국하기 전 아들인 독립운동가 이원영에게 순국선열을 위한 추모 제단을 세워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1955년 1월 1일 이원용은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이석용 의병장 순국비, 고종황제비, 대한의장비,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 백범안동김공구지비, 대한장의순국5열사(안중근·이봉창·윤봉길·이준·백정기)기적비, 광복정령33인추억비 등 모두 5기의 비를 세우고 황극단을 세웠다.
황영남지사 순국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5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 18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거사 당일에 유동봉·송기식(宋基植)·송장식(宋章植)·권중호(權重浩)·이종록(李鍾祿) 등과 함께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1백 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군경에 대항하다가 일경이 휘두르는 칼에 중상을 입어 순국하였다.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인천광역시 계양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불길은 이곳 장기동 황어장터에서도 타올라 3월 24일 오후 2시경 장이 파하는 시각에 600여명의 계양주민들은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 운동에서 일본순사가 휘두른 칼에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더욱 격분한 계양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40여명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당했으며, 그 가운데 중심인물로 지목된 인사들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황병학 의병 전투지 - 망덕포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05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남도 광양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은 을사늑약과 광무황제 강제 퇴위 및 군대해산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몰아내기 위해 1908년 여름에 황순모(黃順模)·한규순(韓圭順)·고견(高堅) 등과 산포수(山砲手) 200여 명을 모집하여 백운산에서 의병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광양군 망덕만(望德灣)에 이주하여 한국의 어장을 침탈한 일본 어민과 잡화상을 개설한 일본 상인들을 공격하여 처단하였다. 망덕포전투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저지하기 위한 황병학 의병부대의 대표적인 항일투쟁 사례이다. 그후 이들은 광양을 비롯한 여수·순천의 연해도서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을 병탄하자 황병학 의병부대는 하는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병학은 기산도와 만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하다가 발각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가 의주에서 헌병대에 피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봄 출옥하여 귀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4월23일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이 비는 황병학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86년 8월 15일 건립하였다.
회당 장석영선생 사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51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성주읍 3·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한 독립운동가 장석영 사적비. 1905년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장석영은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곽종석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유림들과 접촉하여 성주 3·1독립운동을 계획하면서 기독교측과 만나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4월 2일 성주 장날을 기해 일어난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8년 5월 1일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는 장석영의 독립운동 공적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횡성 3·1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강원도 횡성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횡성군민 만세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강원도 횡성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 군민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옛 횡성군청 자리에 세운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1984년 11월 22일 횡성군수는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 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횡성군민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횡성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강원도 횡성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인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으며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저녁 무렵에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향하자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이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강승문과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4월 2일에도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고 옥고를 치루었다.
흑산면 현충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전라남도 신안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조국수호를 위해 6.25전쟁 및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신명을 바치신 흑산도 출신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 현충탑 건립
흥동장학당
시설 : 기타
사건 연도 : 1931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관수 등 고창지역 유지들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 운영한 교육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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