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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3·1의거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포항 송라면 대전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5월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370 건립한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22일 오후 1시 포항시 송라면 대전리에서 윤영복, 이준석 등 23명이 주동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날의 독립항쟁은 일제 관헌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제지당했고 주동인물 23인 모두가 붙잡혀 갔다. 온갖 고문을 당한 뒤 윤영복, 윤영만, 이준석, 이영섭, 이준업, 안천종, 안상종, 안덕환,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태하, 김진봉, 안도용 등 14인은 대구형무소에서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3·1독립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 이강우·김재화·권채근·강달룡·박진환·박용근 등의 사전 준비로 3만여명이 모여 경남 도청 앞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9일에도 읍내 상점은 모두 철시하고 태극기와 악대까지 앞세워 만세시위를 하여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위에서 강달룡(姜達龍, 1888~1940), 강상호(姜相鎬, 1887~1957), 권채근(權采根, 1889~1920), 김성권(金聲權, 1875~1960), 김재화(金在華, 1892~1920), 박용근(朴龍根, 1883~1940), 박재룡(朴在龍, 1887~1955), 박진환(朴進煥, 1888~1940), 심두섭(沈斗燮, 1894~1975), 심호섭(沈護燮, 1891~1935), 이강우(李康雨, 1890~납북), 장덕익(張德翼, 1889~1947), 정용길(鄭鎔吉, 1887~1938), 한규상(韓圭相, 1896~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진주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3·1운동 유공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범어사 학생의거 관련 3·1운동 유공자 42분의 공적을 기리고 이 고장 출신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1995년 3월 1일에 금정구 금정중학교 안에 건립된 비이다. 범어사 지방학림(고등보통과정)을 졸업한 김법린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3월 17일 저녁에 개최된 명정학교, 지방학림 두 학교 졸업생을 위한 송별연 모임에서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하여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한번 죽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1천장이 준비되었고, 태극기도 이미 제작해 두었다. 송별연 모임은 김영규의 축사를 끝으로 모두 ‘대한독립만세’ 3창을 외쳤고, 청련암으로 자리를 옮겨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동래읍에 잠입하기로 하였다. 주동인물들이 불교포교당에 18일 새벽 1시쯤에 도착하였으나, 한 학생의 밀고로 일본 헌병과 경찰이 들이닥쳐, 김영규, 김상기, 김학기 등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인원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다음날 19일 아침,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동래시장을 비롯한 동래읍 일원에 뿌리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십 명의 명정학교, 지방학림 학생들과 민중들이 합세하여 동래시장 남문부근에 다시 집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돌진하다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인물은 대부분 검거되었다. 이 의거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34명에 달하며 대부분 부산 또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3.1만세운동 기념공원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강원도 화천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고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김화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3월 23일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500여명이 거사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내부 고발로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읍내로 향하던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맞서 30분간 맹렬한 격투를 하였으나 읍내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또한 김창희의 지휘 하에 화천장터에 모인 논미리, 구운리, 노동리, 풍산리 등의 주민들도 후일을 도모하고 해산하였다. 3월 28일에는 유학자, 청년, 농민, 의병출신, 산림기수, 일부 구장 등이 주도하여 상서면민들과 더욱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천장날이었던 이날 상서면 봉오리에 모인 천도교인들과 다목리, 파포리 주민 1,000여명은 만세를 부르며 상서면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면장과 면서기를 사로잡아 만세를 부르게 하고 화천읍으로 진격하였다.거사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주민 2,000여명은 지금의 화천읍 신읍리에서 화천읍내로 향하던 중 신풍리에 도착한 일본헌병들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격렬히 대치하다 4명이 즉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시위대는 그들을 저지하는 헌병에게 무력을 가하기도 하고 관공서를 공격·파괴하기도 하는 등 강렬히 저항하였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군민 3,500여명 이상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인원만 175명이 넘었다. 이들 피검된 숫자는 강원도에서 화천군이 가장 많았으며, 22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즉결재판으로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우리는 3․1만세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3. 23, 3. 28 화천만세항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화천의 얼과 민족의 자긍심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3․1만세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한다.
3·1운동 의거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운동 당시 정관면의 좌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1979년 4월 5일 건립한 의거비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관면에서는 기장군 교리 김수용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여러 부를 오해영이 입수하여 오진환·김종복에게 전달하였고, 오진환·신두성 등 면내의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좌천 장날을 기해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3월 9일(음), 좌천시장에서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 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두성·김윤희·정지모 등은 검거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의거 기념비(영동)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북도 영동군
관할지청 : 충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안준, 안광덕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매곡면 3·1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6년 3월 1일 매곡면민의 정성을 모아 매곡초등학교 교정에 건립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2006년 3월 1일 학교 앞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안광덕이 서울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하고 나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가하여 같은 마을 안준과 시위계획을 짰다. 이에 신상희 장복철 안병문이 합세하고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이장노, 김용문, 장출봉 등도 합류하여 태극기 2천여 매를 미리 제작하였다. 4월 3일 이들은 면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옥전, 노천리의 3백 여명과 함께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이들은 매곡면사무소에 몰려가 면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군중의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러 황간으로 나아갈 계획이었으나 날이 저물어 중지하였다. 대신에 추풍령 헌병분견대를 습격코자 했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출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거를 주동한 사람 11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기념비(합천군)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합천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기념비는 1919년 3월 합천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 등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업가인 정영섭 씨가 1995년 3월 1일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산 80-1 (쌍백초교 정문 앞)에 건립한 것이다. 3월 8일 삼가장날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등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무력행사로 해산했으나, 3월 23일 쌍백면에서 다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순국 또는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3선생 공적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7년
주제 : 기타
지역 : 경상북도 예천군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2002년 10월 26일 예천지역 출신인 조윤제 문학박사와 독립운동가 조용구, 조용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윤제(1904~1976)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대에 한국 고전 문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다. 특히 『한국 문학사』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저술로 평가되며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조용구(1861~1925)는 1907년 이강년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좌종사부 의관에 임명되어 1908년 6월까지 종군하고 이후 군자금 모집활동에 힘써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조용필(1867~1946)은 1915년 조직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군자금 조달, 일제 관리와 친일부호 처단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러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3·1독립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광복회의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3·1독립운동 기념비(장안)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화성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마을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 삼일절 때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 차희식(1968, 독립장) 등 수촌리 지사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경찰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불을 질러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왜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쳤다. 이 소식을 듣고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가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문하고 치료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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