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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인천광역시 동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는 3.1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당시 인천 유일한 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휴학을 일으켜 만세운동을 전개함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 시장에서는 1919년 3월 20일 광명학교 민옥금·한이순·황금순 등과 직산금광 광부 안시봉의 주도로 군중 600∼700명이 1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8일에는 직산 금광의 광부 박창신이 동료 광부 안은·한근수 등과 함께 직산금광 갱부의 교대 시간을 이용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 대열을 지어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저지하는 헌병주재소의 헌병 및 천안철도원호대 수비병과 충돌하였다. 이에 광부들과 군중들은 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격투를 벌이는 한편, 통신을 차단하고자 주재소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입장 지역에서는 3월 30일과 4월 8일에도 면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두 차례의 양대리장터 만세시위로 일본 헌병에 의해 현장에서 3명이 순국하고 민옥금 등 8명은 징역 6월에서 1년 2월, 박창신 등 4명은 징역 10월에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0. 4. 27 건립한 비이다.
3·1독립투사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김원휘·박영화·박영신 등의 주도로 태극기 200여개를 준비하여 주민 2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 시위로 등이 김명출(金明出, 1893~1987), 박세길(朴世吉, 1876~1946), 박영달(朴永達, 1887~1962), 박영신(朴永新, 1891~1942), 박영화(朴永和, 1859~1923), 박인욱(朴寅郁, 1896~1934), 배달근(裵達根, 1865~1944), 배도근(裵道根, 1866~1923), 배용도(裵容度, 1895~1971), 배용석(裵容奭, 1890~1938), 배중엽(裵重曄, 1882~1934), 이일만(李一萬, 1903~1954), 최점문(崔占文, 1874~1938)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밀양박씨 유족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9년 3월 2일 이 비를 세웠다.
3·1운동 책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할지청 : 서울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중앙고등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1919년 1월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학교(1919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를 찾아와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숙직실에 모여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하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계획을 세웠다. 이후 송진우 등은 기독교계, 불교계, 천도교계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3·1운동을 준비하였고 최남선이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바탕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1973년 6월 동아일보사가 삼일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했고, 당시의 숙직실은 ‘삼일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있다.
3·1독립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기념탑은 원래 광복 후 중포산에 세워져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돌을 맞아 죽은 수원경찰서 사범계주임 노구치의 순국비를 허문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기념탑을 1969년 10월 15일 3·1동지회가 팔달산 중턱으로 이전하였다. 수원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의 시초는 장날인 3월 16일에 서장대와 창룡문 쪽 연무대에서 각각 당시 수원면민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향해 행진한 것이다. 23일에는 서호에서 약 700명이 시위를 벌였고, 25일에 25명의 청년학생과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날에 있었던 시위 주동자의 검거에 대한 항의 표시로 27일 인근 상인들이 상점을 닫는 철시투쟁을 전개하였다.
3·1독립만세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인천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하순 용유면 남북리에 살던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이 혈성단(血誠團)의 명의로 부근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등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의 주민이 모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날 시위에서 조명원(趙明元), 조종서(趙鍾瑞), 최봉학(崔奉學, 1897-1955), 문무현(文武鉉), 김윤배(金潤培), 윤치방(尹致芳), 윤보신(尹寶臣), 유웅렬(柳雄烈, 1897-1940), 오기섭(吳基燮), 구길서(具吉書, 1896-1971), 이난의(李蘭儀, 1885-1957) 등 11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 인천 덕교동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3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3.1운동만세시위지(수원자혜병원)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1일 발발한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 한 달 내내 수원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으며 이 가운데 3월 29일 일어난 만세운동은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기생 30명의 주도로 일어났다. 15~23세인 이들은 수원기생조합 기생들로 이들의 만세운동은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일제의 '기생단속령'으로 과거 예술인으로 인정받던 이들이 관기로 내몰리면서 내재된 반발심을 사전 계획 하에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원기생조합 기생들은 자혜의원으로 검진을 받으러가던 중 일제의 보건 정책에 항거하여 수원경찰서 앞에서 김향화(金香花)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자혜의원 앞으로 이동하여 다시 한번 독립만세를 불렀다. 자혜의원에서 이들에 대한 검진을 거부하자 기생들은 의원을 나와 다시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김향화는 곧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자혜의원은 현재의 도립의료원과 비슷한 성격으로 1909년에 시행된 칙령에 의해 전국에 설립되었다. 칙령 발표 후 청주·전주·함흥에 의원이 설치되었으며, 수원 자혜의원은 공주·춘천·광주·대구·진주 등과 함께 1910년에 세워졌다. 자혜의원은 초기에 봉수당 건물을 이용하여 진료를 하였으며, 1923년 봉수당을 허물고 신축 벽돌 건물을 세웠다. 1990년대까지 수원의료원이 이 자리에 있었다가 화성복원 사업과 함께 해체 전 봉수당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38선 돌파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연천군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에 1951년 5월 28일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5월 31일 연천군에서 기념비를 설치했다. 6·25전쟁 당시 미국 제1기갑사단 제70탱크대대 제191분견대, 그리스 원정군 1대대, 태국군 제21보병대대원들이 1951년 5월 28일 3·8선을 돌파한 무공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다. 다음은 비문의 내용이다. 여기는 3·8선 겨레의 슬픔 어린 원한의 길목입니다. 우리 모두 하루속히 북녘을 읽은 땅과 그리운 부모 형제를 찾기 위하여 승공통일의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의 슬기를 모아 협동과 단결로 전진합시다. 연천군에서는 겨레의 슬픔이 어린 원한의 길목 3·8선을 통과하는 이 지점에 표석을 세우고 평화통일의 굳건한 신념을 키워 나갈 것을 기원했다.
3·1독립운동 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목포시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서상봉·강석봉 등이 남궁혁(南宮赫)·오도근(吳道根) 등 청년 학생들과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여 목포 부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과 경찰은 기마부대와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이 시위로 강석봉(姜錫奉, 1890~1956), 박복영(朴福永, 1890~1973), 박상렬(朴相烈, 1897~1981), 배치문(裵致文, 1890~1942), 서상봉(徐相鳳, 1870~1927), 서화일(徐化壹, 1881~1936), 곽우영(郭宇英), 남궁혁, 박상술(朴相述), 박상오(朴相五) 등 80여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가운데 박상술은 일제의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되어 이듬해 5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끝내 순절하였다. 유당산공원화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3년 5월 15일 공원 내에 이 탑을 건립하였다.
3·1독립선언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서울 중심지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로부터 시작된 전 민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 발발의 또하나의 중심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고귀한 순국의 현장이었던 서대문 감옥 가까운 곳인 서대문 독립공원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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