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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16
3·1 독립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연개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이어 유광도가 격려 연설을 하였으며, 김정오(金正悟)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이를 계기로 경명학교 선생들을 선두로 많은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산인면 각 부락을 순회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 만세 시위는 함안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시위로 3월 12일 대산 평림시위, 18일 칠서 이룡리시위, 19일 함안읍시위, 20일 군북시장시위, 4월 3일 칠원시위 등으로 이어졌다. 3·1독립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6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351고지 전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고성군
관할지청 : 강원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육군 제3군단, 제8군단이 351고지 전투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7월 15일 이 기념비를 세웠다. 동해안 요충지인 월비산(459고지), 208고지, 351고지의 피아공방전은 1951년 7월 15일부터 1953년 7월 1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개전 이래 수십 차례에 걸쳐 국군 제5, 11, 15, 수도사단 용사들과 북한군 제6, 7, 19사단은 월비산 208고지, 351고지를 뺏고 빼기기를 반복했다. 1953년 7월 29일 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전투가 종식되었다. 목표탈환을 눈앞에 두고 전투를 중지해야했던 격전지로 현재의 동해안 일대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전투다. 이 비는 휴전되기까지 동해안의 요충지인 351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참전한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후대에 그 위혼을 전하고자 1957년 7월 15일 제3군단과 제8군단에서 공동으로 현내면 대진리에 건립·관리하여 오던중 1988년 12월 26일 동해안 안보관광지를 조성하면서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어, 그날의 격전지가 직접 바라다 보이는 통일전망대로 이전하였으며 2020년 통일전망대 리모델링 공사에 따라 국군의 합동작전을 통한 국토방위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공군 전투전적비가 있는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6·25전쟁 당시 351고지 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하게 산화한 전몰장병의 영혼을 달래고 당시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사단을 섬멸시킨 전승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3·1운동 기념비(강진 남포)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강진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강주형·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의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제문(金濟文, 1888~1935),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진 지역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8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3·1사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장성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모현리 유지 유상설·고용석·정병모·신태식 등의 주도로 마을 주민 200여명이 ‘대한독립기’라고 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헌병대가 출동하여 유상설·고용석·신진식 등 주동자를 체포해 가자 다음날도 100여명의 마을 주민이 만세시위를 하며 사가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시위로 고용석(高龍錫, 1895~1950), 박광우(朴光又, 1866~1940), 신국호(申國浩, 國洪, 1990~1924), 신상우(申商雨, 1892~1981), 신태식(申台植, 1890~1944), 오상구(吳相九, 1891~1942), 유상설(柳相卨, 1890~1943), 유상순(柳相淳, 1876~1932), 유상학(柳相學, 1882~1948), 정병모(鄭秉謨, 1872~1945)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장성 지역 3·1사우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9년 1월 1일 이 사우를 세우고 13인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3·1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장성군
관할지청 : 광주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7일 송주일·조병렬 등이 주도하여 소룡리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3월 21일에도 교사 정선유와 학생 100여명과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3, 4일에도 모현리 유지 유상설·고용석·정병모·신태식 등의 주도로 마을 주민 200여명이 ‘대한독립기’라고 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하고, 사가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시위로 고용석(高龍錫, 1895~1950), 박광우(朴光又, 1866~1940), 신국호(申國浩, 國洪, 1990~1924), 신상우(申商雨, 1892~1981), 신태식(申台植, 1890~1944), 오상구(吳相九, 1891~1942), 유상설(柳相卨, 1890~1943), 유상순(柳相淳, 1876~1932), 유상학(柳相學, 1882~1948), 정병모(鄭秉謨, 1872~1945)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열사장성기념사업회가 장성출신 3·1운동열사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1972년 9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3·1운동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방극용·형갑수 등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과 헌병이 무차별 발포하여 방진형(房鎭馨, 미상~1919), 방양규(房亮圭, 1879~1919), 방명숙(房明淑, 미상~1919), 김홍록(金洪祿, 1895~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황찬서(黃贊西, 1873~1919), 정한익(丁漢翼, 1890~1977) 등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해근(金海根, 1860~1946), 박정석(朴正錫, 1897~1933), 유창근(柳昌根, 1874~1938),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형기(李炯器, 1884~1936) 등 20여명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와 남원지역 청년회의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4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3·1운동 기념비(장수 산서)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북도 장수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 장날 박정주·안성섭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23일 사계리에서도 주민 20여명이 사계산에서 산상 시위를 벌이고, 양일표·빈영섭·유동렬 등의 준비로 3월 26일 산서면 오성리에서 주민 수백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들 시위로 김형택(金炯澤, 1891~1950), 박기영(朴琪永, 1893~1938), 박정주(朴政柱, 1871~1921), 빈영섭(賓永燮, 1887~1936), 신동개(申東開, 1893~1939), 안성섭(安成燮, 1880~1944), 양일표(梁日杓, 1880~1959), 유동렬(柳東烈, 1895~1974), 이길선(李吉善, 1894~1957), 이상욱(李相煜, 1894~1926), 이화백(李化伯, 1885~1941), 장재만(張在萬, 1894~1956), 정호현(丁豪鉉, 1890~1940)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산서면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5년 12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3·1독립운동 기념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할지청 :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시설내용 : 조천만세운동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삼일절에 조천리 만세동산에 건립된 기념탑이다. 조천만세운동의 발단은 조천리 출신의 휘문고보 학생인 김장환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김시은 등과 의논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이 시위는 이후 3월 24일까지 함덕리·신촌리 등 조천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광복 후 조천만세운동의 시발지인 미밋동산에 삼일정이란 정자가 지어졌고 그 옆에 3·1운동독립기념비가 있었다. 1991년 이후 조천만세동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옛 기념물은 모두 헐고 그 자리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새로 세우고, 이어서 제주항일기념관을 건립했다.
3·1운동 기념비(남양주)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밤 월산리·답내리 주민 200여명이 마석우리 헌병대 병참 앞에 몰려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발포하여 손복산(孫福山, 1889~1919), 신영희(申榮熙, 1891~ 1919), 유상규(兪相奎, 1880~1919), 이교직(李敎稙, 1887~1919), 이달용(李達鎔, 1889~1919)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강선원(姜善遠, 1874~미상), 권은(權慇, 1872~미상), 김필규(金弼圭, 1874~1919, 옥사) 등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 2월 6일 이 비를 세웠다.
3·1독립운동 무안 의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무안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비는 무안 출신의 서울 유학생 김한근과 지역 유지 10여 명이 장날에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여 1975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무안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한근이 독립만세 소식을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김한근과 지역 유지 수십여 명은 무안읍 장날인 3월 19일 새벽 읍내 각처에 독립 선언서와 경고문을 붙여 친일파의 반성 자숙과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이 날 읍내에 모인 수백의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밤 10시경까지 만세운동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중심인물 24명을 포함한 57명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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