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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60
다부동 전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경북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 다부동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북도와 제2군사령부에서 1971년 12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1950년 8월 J. H. 마이캘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보병 제27연대 장병들이 국군 제1사단 장병들과 더불어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격파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전승비는 미 보병 제27연대(존 에취 마이캘리스 대령 지휘) 용사들이 수행한 찬연한 무훈과 공훈을 길이 남기기 위한 기념비이다. 1950년 8월 이곳에서 미 27연대는 한국군 제1사단 장병과 더불어 공산침략자들을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무찔렀으며 대한민국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들이 남긴 탁월한 지휘력과 결단성과 돌격정신을 이 겨레와 함께 영구히 간직될 것이다.
다천서원(면우 곽선생 신도비)
시설 : 사당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곽종석은 1846년(현종 12년) 6월 24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영특해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다. 23세 때 이진상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58세 때 고종이 궁으로 불러 의정부 참찬, 홍문관 경연관, 시강원 서연관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사직하면서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듣고 상경하여 매국오적의 참수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입대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돌아와 두문 칩거하면서 영재의 교육에 힘썼다. 74세 되던해 기미년에는 전국유림대표 137명을 대표하여 파리의 세계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를 송치한 일로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병환의 위중으로 풀려나 1919년 8월 24일 다전의 여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1960년에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이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20년 그 탄생지인 단성에 니동서당을 세웠고 다음 해인 1921년에는 거주지인 거창에 다천서당을 건립하고 1979년 전국 유림들의 성금으로 ‘신도비’를 세워 선생의 학덕과 애국충정을 기리고 있다.
다솔사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0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남도 사천시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한 만당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단체이다. 1930년 5월 만해 한용운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은 불교 청년들이 식민지 불교의 극복,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만당은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침략 세력과 줄기차게 투쟁하였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도쿄[東京]에까지 지부를 조직했다. 만당은 표면 단체로 불교 청년 동맹을 조직하고 각지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는 당세가 확장되어 80명의 당원을 확보하면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사찰로 1938년 말 만당은 진주경찰서에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서울과 사천을 비롯한 진주, 합천, 해남, 양산 등지에서의 6차례에 걸친 일본 경찰의 검거 선풍으로 김법린, 장도환, 최범술, 박근섭, 김범부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단양군 무공수훈자 공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기타
지역 : 충청북도 단양군
관할지청 : 충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단양군 도전리 소금정 공원 내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훈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고장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단양군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무공수훈자회 단양군 지회는 무공수훈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안보교육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1년 12월 1일 공적비를 세웠다. 6·25전쟁에서 단양 군민은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산군과 맞섰으며, 많은 무공수훈자들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빨치산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공산주의에 맞서서 ‘제2의 한국전선’인 베트남에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단정 배중세 지사 순국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93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배중세는 1893년 지금의 창원시 토월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창원시 진전면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선봉장으로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일로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한 배중세는 김원봉, 양건호, 윤세주, 한봉건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듬해 배중세는 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경남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돕고, 양건호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의 정보를 캐다 1920년 8월에 체포, 1921년 5월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배중세는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세 번의 옥고를 겪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1월에 또 다시 검거되어 거듭 당하는 고문과 옥고에 1944년 1월 2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77년 배중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11월 창원시와 창원문화원, 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 건립위원회는 배 지사의 이런 행적을 기리고자 상남공원에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80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과천시
관할지청 : 경기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이 동상은 1988년 단재의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를 연재한 조선일보가 지령 2만호 발행 기념으로 발기하고 유지들의 출연으로 세운 것이다.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80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관할지청 : 충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청주 예술의 전당 앞에 세워져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동상은 단재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2년 동안 전국에서 9천여 명의 헌금과 충청북도 등에서 지원한 지원금으로 1996년 12월 8일 단재선생 탄신일 116주년을 맞아 건립되었다.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880년
주제 : 민족주의운동
지역 : 대전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대전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신채호선생 생가지는 신채호가 태어나 8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1992년 선생이 태어나신 이곳의 효율적 보존을 위하여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생가를 복원하였다.
단재영당(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880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관할지청 : 충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성신문의 주필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임사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다. 1923년에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7년 무정부동맹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조선사연구초’가 출간되었고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단재영당은 일제 강점기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 그의 묘소 앞에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며2003년 서거 67주기를 맞이하여 단재기념관이 사당의 부속 건물로서 개관되었다.
단천군 반공투사 위령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양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 당시 1.4후퇴와 흥남철수작전에서 각 군과 영도유격부대, 경찰 등에 입대하여 전투 중 전사하거나 실종된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 청년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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