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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60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896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할지청 : 서울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독립협회창립총회 터는 영국 왕립아세아협회에서 소장한 '서울지도'(1902)에 광화문 앞 육조거리 동편으로 내부와 학부사이에 독립협회 창립 총회였던 외부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의 발의로 예전 중추원 자리인 외부 건물을 빌어 창립총회를 가질 당시 독립협회는 독립문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급관료클럽이었다. 그러나 1897년 8월 29일 모화관을 개수해 문을 연 독립관에서 첫 토론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시민과 학생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명실상부한 민중계몽단체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리고 1898년 2월 21일 구국선언 상소를 올린 것을 시발로, 만민공동회 등을 통한 정치개혁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룬 독립신문 계열과 개신 유학자들과 중인층이 중심을 이룬 황성신문 계열의 주도하에 1898년 12월 해산당할 때까지 민중과 함께 하는 점진적인 개화 개혁을 추구하며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열강의 이권침탈과 내정간섭에 대한 반대운동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주체성을 일깨웠고, 토론회와 의회개설운동을 통해 민중의 언로를 터주면서‘우리’라는 민족적 동질의식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서 독립문의 건립, 개국기원절 경축행사의 개최, 태극기의 게양과 애국가의 보급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 상징의 보급을 통해 대중적 차원에서 애국심과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였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3ㆍ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조야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독립유공자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0년
주제 : 기타
지역 : 경기도 동두천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한말·일제강점기 동두천 출신으로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항쟁에 몸 바친 독립유공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동두천시민 대표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추모비건립위원회는 1996년 8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독립유공자 정용득 열사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울산광역시 울주군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정용득열사는 1885년 7월 28일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256번지에서 태어났다. 25세 되던 1910년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였고 이에 비분강개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죽음을 무릅쓰고 자주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언양만세운동의 주도자들과 거사를 도모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언양 장날인 1919년 4월 2일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던 중 일본군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시위군중은 해산되었으나 주동자로 정용득 등 6명은 일본군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그 후 부산지방법원울산지청에서 형의 언도를 받고 태형 90대를 집행당하였다. 수감 당시 왜경의 혹독한 고문 및 그 후유증으로 7여 년 간 병고를 치르다 조국광복의 영광도 보지 못하고 1927년 11월 29일 42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인정하여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박준승선생 추모공원
시설 : 공원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91년(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에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 공원은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셨던 박준승 애국지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 위해 건립되었다.
독립지사 김용기·안응건선생 유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용기(金龍基, 1901~1983)는 1920년 만주에서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의 부하로서 일본영사관 습격 등의 활약을 하였고, 1921년에는 김좌진(金佐鎭) 휘하로 전속되어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전했다. 1923년 8월 의군부(義軍府) 특파원으로 국내에 들어와 관공소 방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응건(安應乾, 1886~1920)은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경기도 포천 자택에서 태극기 25개와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이지 않으면 방화하겠다는 격문을 작성하여 다음 날 밤 태극기를 각 집에 세우고, 격문을 마을 게시판에 붙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6·25참전전우회 포천군 영북면 분회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2003년 5월 24일 이 비를 세웠다.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17년
주제 : 의열투쟁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 기념비는 대한광복회의 회원으로 천안 출신인 장두환(1963, 독립장), 유창순(1963 독립장), 성달영(1990, 애족장), 유중협(1990, 애족장), 강석주(1990, 애족장), 조종철(1991, 애족장), 김정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9년 10월에 천안시 삼용동 295 천안삼거리 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이 조직한 광복단과 대구에서 박상진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7월 조직했고 박상진이 총사령을 맡았다. 1916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경북·충남·황해·전남 일대와 만주에 기지를 두기도 했다.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는 100개소의 요지에 혁명기지로서 잡화상을 설치하여 무기를 비축하며 조직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행동강령 아래 군자금 모금을 위해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거나 친일 관리·지주를 처단하기도 했다. 1918년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면서 대한광복회의 전모가 일경에게 포착되어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대한광복회 간부와 회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독립유공자 이재락선생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울산광역시 울주군
관할지청 : 울산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 1월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지사 진주정공 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라남도 광양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4월 1일 광양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군중 1,00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던 정귀인 선생을 기리는 시설이다.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관할지청 : 경북남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대한민국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 용감히 싸우다 부상을 입고 명예제대하여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이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독도의용수비대원이 되어 울릉군민들의 생활터전인 우리땅 “독도”를 일본의 불법 침입으로부터 지켜내었다.
독립지사 최병규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1년
주제 :
지역 : 경상남도 의령군
관할지청 : 경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서기인 그는 면장 강제형(姜齊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부탁 받고 동료서기 전용선(田溶璿)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군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9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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