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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60
배재중·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서울특별시 강동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6·25전쟁에 참전한 배재고등학교 선배들 395명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재고 후배들에게 일깨우고,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기억하고자 명비를 건립하였다.
백인권준장군흉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17년
주제 : 기타
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경북 상주 출신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자 초대 50사단장을 역임한 백인 권준장군을 기리기 위한 흉상이다. 1917년 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김원봉과 같이 의열단을 창설하여 군자금 조달 등을 지원하였다.
백산서원
시설 : 기타
사건 연도 : 1850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전라북도 익산(益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이웃을 돌보는 성품이 있었으며 무술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아 이름이 높았다. 1876년 무과(武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親軍別營哨官) 겸 선전관(宣傳官) 충무위좌부장(忠武衛左部將)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등을 역임하고 훈련원 첨정(僉正)에 이르러 일본과의 강화 및 관리의 부패를 통탄하여 사직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역문(討逆文) 등을 지어 전라관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보내면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능히 우리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은 가히 다 말할 수 없으니 죽어서 마땅히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으리라」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목매어 자결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호 충혼탑
시설 : 탑
사건 연도 : 1968년
주제 : 기타
지역 : 강원도 원주시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육군 제36보병사단은 2005년 4월 20일 사단 창설 50주년을 맞아 울진·삼척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전사한 박경호 상병 등 전몰장병 12위를 추모하기 위해 강원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보병 제36사단 영내) 백호충혼탑을 건립하였다.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자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고 12월 28일 완료되었다. 휴전 이후 북한측의 최대 규모의 도발로 침투한 무장공비 중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측도 제36보병사단 장병들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20여 명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는 백호의 얼이 서린 곳, 영원히 사단과 함께하는 백호의 충혼이여! 위국헌신 군인 본분의 표상이 되리라.”
백재덕 호국영웅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53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부산 강서구 천가동 천성분교 내에 호국영웅인 백재덕 이등상사를 추모하기 위해 백재덕 호국영웅흉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2001년 1월 1일 이 동상을 세웠다. 1953년 5월 14일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10중대 3소대 3분대장 백재덕 육군이등상사는 강원도 금성 샛별고지에서 야간 매복작전을 전개하던 중 적 3개 중대의 공격 징후를 미리 탐지하고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워진다. 전 분대원은 나와 같이 이곳에 뼈를 묻자"며 분대원들을 독려하여 3차에 걸친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백병전과 진내사격까지 요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중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중동부전선의 요충지인 샛별고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하였다. 1953년 5월 15일 밤 제11중대 3소대 백재덕 이등상사가 지휘하는 3분대는 매복조로 차출되어 중대진지 앞에서 진목동 일대를 살피고 있던 중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조명탄을 발사한 결과, 적 3개 중대가 진지를 향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분대장은 매복진지가 돌파될 경우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울 것으로 판단하고 전 분대원에게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철수를 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분대장은 능선의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로 4명씩 분리하여 배치한 후 접근해오는 적을 향해 사격을 집중하자 적은 괴성을 지르며 돌격을 감행해왔다. 분대는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인해전술로 접근해오는 적을 완전 섬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적의 제1파 15~16명이 분대의 진지안까지 돌입함으로써 백병전이 전개되었으며, 백재덕 이등상사 이하 모든 분대원은 수적으로 2:1의 열세 속에서도 적을 모조리 격퇴하였다. 약 20분이 경과된 후 적의 제2파가 다시 공세를 취해옴에 따라 피아간에는 수류탄전과 아울러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분대원들은 처절한 사투 끝에 침입한 적을 모두 사살하였으나, 1차 1명에 이어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잠시 후 또 다시 제3파의 공격을 재개한 적 10여 명이 다시 분대진지까지 돌입하자 분대원들은 총검과 맨주먹으로 혈전을 개시하였고, 아울러 중대에서는 진내사격을 실시하여 계속하여 돌진해오는 적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분대원들은 9명 중 4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명도 부상을 입는 손실이 있었으나, 날이 새고 적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분대장 백재덕 이등상사는 단신으로 10여 명의 적을 사살, 진지를 고수하고 중대의 위기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아울러 샛별고지전투의 승리는 아군이 중부전선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무사히 확보함으로써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백초월대선사순국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44년
주제 : 기타
지역 : 경상남도 고성군
관할지청 : 경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초월은 1878년 2월 17일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위는 인영이고 법명이 초월이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였고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 법계를 받았다. 일제의 병탄 당시 대선사이신 이남파, 한용운, 김포광 등 저명한 큰 스님과 국권상실을 통탄하여 오다가 1914년 "한국민단본부"라는 구국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일심교"를 창안하여 2천만이 한마음이 되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일심교리를 선양하여 활동하다 일본 동경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당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원도와 지리산 등으로 전전하다 서울로 돌아와 서대문의 극락암에서 승려 70여명에게 수학을 하고 있던 중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주행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격문사건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고 또다시 청주형무소에 이감되어 3년 형고를 치르다 1944년 6월에 향년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1991년 6월 1일 향리인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 있는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백초월대선사 순국비를 세웠다.
백용성조사 유적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1863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용성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수도 정진 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선농불교의 대각사상을 바탕으로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 날인하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하여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혐의로 1년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었으며, 출옥 후에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1921년 3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위한 각종 포교서의 저술에 착수하고, 불교 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전승하였다. 1927년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하고 선농일치운동을 통한 민족구제 및 사원 경제의 자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기지로 활용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8년부터 7년간에 걸쳐 생가복원과 유적지를 건립하였으며 기념관과 용성교육관, 대웅보전, 생가, 오사채, 승방으로 구성되어있다.
백정기의사고택지
시설 : 장소
사건 연도 : 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전라북도 정읍시
관할지청 : 전북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이곳은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07년 8월 25일 정읍으로 이주하여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2년 동안 살던 곳이다. 백정기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으며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1운동을 목격하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동지를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해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0년 서울의 중부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1922년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곳에서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해,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둥팅 호[洞庭湖] 근처의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여름 도쿄에 잠입해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9월에는 상하이의 철공장에 들어갔다. 1925년 신채호 등이 조직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으며 5·30총파업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8년 5월에는 일본상품배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자유혁명자연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군의 시설파괴, 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상하이로 돌아와 이회영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해 상하이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한 후, 3월에 상하이 홍커우[虹口]에 있는 육삼정에서 열린 일본요인과 친일파들의 연회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으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40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조경한은 1900년 주암면 한동 마을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단의 국내연락원으로 활약했다. 1924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덕신의숙, 계명학원 법정과에 다니면서 신채호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26년 만주에서 배달청년회의 배신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정의부 교민교과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참여,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의 책임을 맡았고 1931년 지청천·김창환·황학수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만주 각지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33년 뤄양군관학교의 교관에 임명되어 청년군사간부의 양성에 힘썼다. 1935년 민족혁명당에 참여했고 1937년 지청천 등과 조선혁명당을 창설하고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8월 한국광복전선이 조직되자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임시정부에서 군사학 편찬위원으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였다. 1941년 12월 광복군장교훈련소가 설치되자, 송호성·나월환과 같이 훈련책임을 맡았으며, 1942년 10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으로 선전업무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징계심사분과위원장,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 국무위원회 부비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4년에는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중앙상무 집행위원이 되었다. 백강 조경한 선생 추모비는 2009년 순천 금당 공원에 조형물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조형물과 추모비는 전국 공모를 거쳐 양진옥 작가의 ‘빛의 소리’를 선정해 설치했다. 설치된 조형물은 조경한이 참여한 100여 회의 크고 작은 항일 전투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던 대전자 전투를 형상화한 것으로 그의 애국심을 절벽에 피어나는 태극기로 형상화 하고 있다.
백운의 혼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0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한산 백운암을 거쳐 후퇴하던 중 장교 1명, 사병 1명이 남아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하다가 서울이 함락되자 북한산에서 자결하였다. 1959년 6월 20일 두 용사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운의숙(애국청년단체)에서 이 곳에 ‘백운의 혼’이라는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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