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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말 4월 초 성주 지역 야성송씨 문중이 여기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서명과 성주지역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논의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준비하여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송준필(宋浚弼, 1869~1943), 송홍래(宋鴻來, 1876~1953), 송회근(宋晦根, 1877~1949), 송규선(宋圭善, 1880~1948), 송훈익(宋勳翼, 1884~1961), 송천흠(宋千欽, 1888~1968), 송우선(宋祐善, 1894~1942), 송문근(宋文根, 1895~1963), 송인집(宋寅輯, 1896~1961), 송수근(宋壽根, 1896~1969)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백야김좌진장군추모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9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충청남도 홍성군
관할지청 : 충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 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 조직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또한 1925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 운동의 전개와 동포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추모비는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의 치적을 적은 비이다. 1949년 대한 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으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백호부대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인천광역시 옹진군
관할지청 : 인천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호부대전우회는 1961년 8월 15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248-1에 백호부대 전적비를 건립하여 1951년 2월부터 1954년 2월까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장렬히 산화한 백호부대 전우들의 넋을 추모하였다. 백호부대, 곧 동키(DONKEY)부대는 북한 출신 청년으로 구성된 장연군 무장대 26명으로 출발하여 월남한 북한 청년들의 가담으로 2천여 명까지 늘어났다. 동키부대는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83차례의 작전을 벌여 적 사살 2100여 명, 생포 105명, 반공인사 구출 4500여 명이라는 전과를 올렸으며 대원들이 적진에서 얻은 정보는 연합군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수행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동키부대는 휴전협정과 동시에 해산되어 전우의 시체를 북한지역 산골짜기나 해변가 모래밭에 묻어두고 각각 주둔지에서 철수했으며 4년간의 활동기간에 전사 338명, 부상 406명, 행방불명 34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백범 김구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876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용산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개명하여 창수(昌洙),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으로 아버지 순영(淳永),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광무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엡윗청년회(Epworth 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이동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시행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京橋莊:지금의 강북삼성병원)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임정로 26)에 건립된 박물관이다. 1996년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기념관 건립을 제안하였고, 1998년에 (사)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발족하여서, 1999년부터 백범기념관 건립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2000년 6월 26일에 기공식을 가졌고,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하였다. 2008년 12월에 백범기념관에서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 김구의 어린 시절부터 서거까지의 행적을 따라 관련 유물을 배치하였다. 전시관 1층의 중앙홀에는 김구의 좌상이 놓여있다.
백범 김구선생 동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76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김구의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출신으로 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세에는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하였으며,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할 생각으로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다 실패하여 1895년 신천 안중근 의사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했다. 이때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왕후 민씨를 참살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20세 때인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봄에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약반대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우고, 전국 강습소 순회를 다녔으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등 임시정부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년간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비 강화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환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이 북한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단독정부수립방침에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을 하였으마,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동상은 1969년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 그의 의로움을 본받으려는 뜻에서 세웠다.
백마고지 3용사의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52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관할지청 : 서울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의 진지를 공격해 승리로 이끌었던 강승우 소위 및 오규봉 일병, 안영권 일병을 추모하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1973년 10월 어린이대공원 내(동문 인근 위치)에 ‘백마고지 3용사의 상’을 건립하였다. 이들 3용사는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 예하 제1중대 제1소대 소속으로 1952년 10월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고지에서 TNT와 박격포탄, 수류탄 등을 휴대하고 육탄으로 돌진하여 적의 기관총 특화점을 격파한 후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고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백하구려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09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백하구려는 1907년 안동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된 백하 김대락의 생가 사랑채이다.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김대락은 신교육을 수용하면서 백하구려를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12월경 김대락은 마을과 인근의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삼원포 이도구에 정착였다. 1911년 6월 경학사와 1913년 공리회 결성에 참여하여 「공리회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김대락은 망명 후 줄곧 이주 한인들을 지도하고,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심혈을 기울이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김대락의 뜻은 여동생인 김락, 집안 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 종손자 김성로의 항일투쟁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952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철원군
관할지청 : 강원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에 6·25전쟁 중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를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에서 1990년 5월 3일 기념관을 지었다.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전쟁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제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과 12차례의 공방전을 반복하면서 중공군이 7번 고지를 점령하고, 국군이 7번 역습하여 고지를 탈환하는 등 고지의 주인이 14번 바뀌는 혈전이 거듭되면서 피아간에 막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하였으나,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의 좌변 일각인 철원 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으며, 중공군 제38군은 그들 제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작전기간중 이 작은 고지에 중공군이 5만 5, 000발, 아군측이 21만 4, 954발이라는 막대한 양이 포탄이 집중되어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투중에 발사된 극심한 포격과 폭격에 의해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고, 제9사단 역시 백마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산 안희제선생 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885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세워 부산지역에서 무역업을 벌였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순국했다.
백산 기념관
시설 : 기념관
사건 연도 : 1885년
주제 : 3·1운동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부산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세워 부산지역에서 무역업을 벌였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순국했다. 백산기념관은 백산 안희제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는 이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백산상회를 설립 운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현재 기념관은 1995년 8월 15일 개관하여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전시장에는 그의 유품과 당시 구국운동 자료 등 8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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