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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개수 : 2360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58년
주제 : 해외운동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에게 배움을 받았다.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여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다. 이후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근지역의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유림적 인사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자 이에 합류하였다. 1908년경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1월 해외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동지들과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하였다. 또 서로군정서에서는 군정서 독판을 맡아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중국 동북삼성 지역의 군사통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해의 임시정부에서는 초대 국무령을 맡았다. 이 후 간도로 돌아가 전민족유일단 결성을 위해 힘쓰다 순국하였다. 이상룡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구국기념비는 이상용의 제자 이은상이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이 비문의 앞글을 쓰고 제자‘종주’가 비문의 뒷부분을 썼다고 한다.
석초 한양리의사 기념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3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경상북도 예천군
관할지청 : 경북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한양리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강년이 의병활동의 재개하였다. 이에 한양리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 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고 한다. 이강년 의진이 의병활동을 본격화시키자 그 종사관이 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의진이 크게 패하고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자, 이등박문을 암살하고자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일이 적에게 탐지되어 은신하였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 후에는 문경군 가은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해외의 길림군정서 및 흥업단과 연락 제휴하고,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북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동지 이응수·이대기 등과 함께 대구 계림여관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후에는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하여 정양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 예천군 유산면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이강연 의병장의 문집인 『운강문집』을 정리하였다.
석정 황석선생 충의 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05년
주제 : 한말구국운동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관할지청 : 전북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전북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乙未事變)]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황석은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전북도내 유림들에게 통문(通文)을 돌려 거의(擧義)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장성(長城)에서 기우만(奇宇萬)이 거의할 때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점차 가속화되고, 러일전쟁 직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황석은 의(義)로써 적신(賊臣)들을 단죄하고자 고광순(高光洵)·이석용(李錫庸) 등과 수 차례 거의를 도모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소식에 자결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석정 안후덕선생 생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24년
주제 : 기타
지역 : 전라남도 함평군
관할지청 : 전남서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안후덕은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1924년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내고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에 나섰다. 1926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하여 전 재산을 임시정부 운영 자금으로 헌납하고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다시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하였다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에 은거 생활을 해 오다 광복 이듬해 고문후유증으로 요양하던 중 1946년 향년 42세로 서거할 때까지 23년간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생가는 2009년 복원 공사를 완료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생가에는 그의 독립운동 활동사진과 초상화, 김구의 글과 윤봉길의 초상화 등이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석전 유건영 선생 유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3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남도 곡성군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유건영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서 농촌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최익현과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최익현이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면암 의진에 입진하였다. 그러나 의진이 패배하자 시세가 의병운동 전개에 불리함을 깨닫고, 농촌에 들어가 청년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무하였다. 그 후 한일합방이 되고, 이른바 창씨개명을 추진하였다. 이에 유건영은 극력 반대하여 끝내 저지하겠다는 요지의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제의 모진 박해를 받고 끝내 자결하여 한민족의 기백을 적에게 알리고자 1940년 7월 24일 독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해방 후 곡성의 뜻있는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무산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순국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석전 유건영 선생 유적비는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비석이다.
석인 정태진 기념관
시설 : 생가
사건 연도 : 1903년
주제 : 문화운동
지역 : 경기도 파주시
관할지청 : 경기북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파주 중앙도서관 옆에 위치한 정태진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이며, 한글학자인 정태진의 생가이다. 정태진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미국에 건너가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거쳐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31년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2년 9월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도의 흥원 경찰서에 구금되어 징역2년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자 조선어학회를 복구하고 큰사전의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 중앙대학 홍익대학 동국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선산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93년
주제 : 기타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관할지청 : 대구지방보훈청
시설내용 : 일제강점기 활동한 선산출신의 독립유공자로 권오환(權五煥, 1892~1957), 김관묵(金寬默, 1894~1967), 김의경(金義景, 1898~1949), 이원길(李元吉, 1893~1920),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3·1독립운동으로, 황진박(黃鎭璞, 1888~1942)은 의열투쟁으로, 김영득(金榮得, 1908~1940), 이종식(李鍾植, 1891~미상), 장재성(張在星, 1914~1939)은 국내항일로, 남상순(南相淳, 1926~1978), 육홍균(陸洪均, 1900~1983)은 일본방면 항일투쟁으로, 김종철(金鍾哲, 1924~), 전재덕(全在德, 1924~)은 광복군에 참여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구미시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93년 10월 22일 이들 각각의 비를 세웠다.
선장 4.4 독립만세운동 기념상
시설 : 동상
사건 연도 : 1919년
주제 : 3·1운동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관할지청 : 충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1919년 4월 4일 선장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운동 전개 하였다. 일본 경찰은 주재소까지 온 시위대에게 총을 쏘았고 최병수 순국, 정수길, 임천근, 서몽조, 오상근, 김천봉 체포되며 시위대 해산하였다.
설봉 김도규의병장 기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885년
주제 : 의병운동
지역 : 전라남도 보성군
관할지청 : 전남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김도규은 보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강건하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특히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고 했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근심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고향 보성에서 담산 안규홍이 거의했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호곡싸움에서 적의 목을 베고 안규홍의 부장이 되었다. 이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 보성파청전투를 비롯한 보성군 문덕면 진산, 병치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과 싸우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비록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글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역량이 크고, 정직하고, 경우가 분명하며 충성과 의리를 중히 여겼다.
설악산지구 전적비
시설 : 비석
사건 연도 : 1951년
주제 : 6·25전쟁
지역 : 강원도 속초시
관할지청 : 강원동부보훈지청
시설내용 :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설악산지구 전적을 기념함과 동시에 그 전투에서 전사한 혼령을 위로하고자 교통부에서 1978년에 이 비를 세웠다. 1976년 대통령의 교통부 연두순시 때 6·25전쟁 전적지 개발 추진지시에 따라 교통부, 국방부, 문공부, 국제관광공사 합동으로 전적지 개발계획을 작성하여 1976년 7월 21일 대통령 재가를 받아 1978년 1월~6월까지 개발대상지를 답사 사업계획을 승인받았다. 그후 교통부차관을 위원장으로 관계부처국장급 및 전문가로 추진위원회를 구성 1978년 7월 8일 설악산지구전적비설계를 완료하고 같은해 11월 10일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설계는 최기원 조작가가 담당하였다. 이 전적비는 11사단과 수도사단이 북한군과 싸운 전투를 기념하고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설악산전투는 중공군 1차 춘계동세시 국군 1군단의 11사단 및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5군단과 치른 공세적인 전투로서 1951년 2월 삼척 부근에서 태백의 준령을 따라 북진한 국군 제11 및 수도사단은 5월 7일 공격을 개시해 6월 9일까지 공격을 계속,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향로봉지역의 북한군 제5군단을 격퇴하고 설악산 일대를 확보하였다가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강릉과 대관령지역으로 철수하여 중공군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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